본문 바로가기
현대문학테마 URL 복사

현대문학 테마 7. 문예 동인지

2014. 3. 6. by 솜글

1920년대를 흔히 문예 동인지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화기부터 조금씩 문학이 근대적으로 인식되더니, 3 · 1 운동 전후 등장하기 시작한 신문, 잡지 등의 대중 매체를 통해 근대적 의미의 문학이 구체적인 작품 활동으로 실천에 옮겨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앞서 본 «청춘», «학지광», «태서문예신보»는 그 출발점이었으며, 그 결정타는 1920년대의 문예 동인지들이라 할 수 있다. 주요 동인지는 아래와 같다.

«창조»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김환 ㆍ특정 노선을 좇지 않고 다양한 작품 수용
ㆍ문단 동인지 시대를 엶
1919~1921(9호)
«폐허» 김억, 남궁벽, 나혜석, 염상섭, 오상순, 변영로, 황석우, 민태원 ㆍ감상적, 병적 낭만주의 1920~1921(2호)
«개벽» 박영희, 김기진, 이기영, 최서해, 그 외 대개의 문인 ㆍ천도교계 종합 잡지 1920~1949(81호)
«장미촌» 변영로, 황석우 ㆍ시 전문지
ㆍ낭만주의, 퇴폐주의, 현실 도피적
1921~1921(1호)
«백조» 홍사용, 박종화, 나도향, 박영희, 최승일, 현진건, 이상화, 김기진, 안석주, 이광수 ㆍ시 : 병적, 퇴폐적 유미주의, 낭만주의
ㆍ소설 : 자연주의
1922~1923(3호)
«금성» 양주동, 백기만, 이장희 ㆍ작품의 수준 제고에 목적을 둠
ㆍ중간자적 온건 노선
1923~1923(3호)

왼쪽부터 창조, 폐허, 개벽의 창간호 / 출처 : 동아일보(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00121/25551898/1)

«창조»

«창조»의 창간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힘입어 국내에서는 3 · 1 운동의 기운이 슬금슬금 일었다. 그리고 도쿄에서는 유학생들에 의해 2 · 8 독립 선언 계획이 무르익는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는 선배들에게 맡기고, 문학 쪽으로 뜻을 품어 문예 잡지 하나 발간해보려는 노력이 인다. 이렇게 191928, «창조(創造는 주요한과 김동인이 주도하고 재일 유학생 중 전영택, 최승만, 박승철, 김환을 참여시켜 만들어진다.

«창조»의 성격과 전개

«창조» 창간호에 김동인은 <조선 근대 소설고>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소설론을 펼쳐 보인다. 아직 이광수가 한국 문학에서 절대적 입지를 차지하고 있던 무렵, 약관인 김동인이 민족주의나 이상주의 문학론에서 벗어나 인생 문제를 제시하는 사실적 문학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이광수를 비롯한 앞 세대 문인들에 대한 당돌한 선전 포고였다. 김동인은 «창조»의 창간을 두고 민족 4천 년래의 신문학 운동의 봉화라며 자부심을 가졌다.

«창조» 창간호는 총 82쪽으로 되어 있는데, 주요한의 시 <불노리>와 김동인의 소설 <약한 자의 슬픔>, 전영택의 소설 <혜선의 사()> 등이 실린다. «창조»의 출현은 뒤를 잇는 «폐허», «장미촌», «백조» 등의 문단 동인지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하나의 신호탄이 되고, 1910년대 말과 1920년대 문단에 이른바 창조 시대를 열었다.

«창조»의 발전

«창조»191921일에 창간호가 배부되는데, 같은 달 24일에 김동인이 경찰에 체포된다. 하루 만에 풀려나긴 했지만 김동인은 고향집에서 그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귀국해야 했고, 3 · 1 운동의 격문을 만들다가 체포되어 다시 투옥된다. 김동인이 없으니 도쿄에서는 «창조» 2호를 내지 못한 채 창고에 쌓아 두기만 했다. 3개월이 지나 출감한 김동인은 평양에 와 있던 전영택, 그리고 도쿄의 김환과 최승만에게 서신을 보내 «창조» 2호의 발매를 부탁한다. 이렇게 4개월 만에 «창조» 2호가 발간되고, 이어 3 · 4 · 5 · 6호가 잇달아 나온다.

«창조»가 계속 이어지는 동안 한편에서는 «동아일보»가 생기고 염상섭 등은 «폐허»를 창간한다. 이렇게 전에 없던 경쟁지가 생긴 데다 문단에 창조파폐허파의 대립적인 조류가 생기자 «창조»는 비교를 의식해 더욱 신경 써서 만들어진다. 그러다가 2호 이후 이광수가 참여하고, «폐허»가 분열한 후 그 동인이던 김억, 염상섭 등이 «창조»에 가담하자 «창조»는 더욱 활기를 띤다.

«창조»의 폐간

«창조»는 초기부터 높은 판매율을 기록했지만 경영면에서는 늘 쪼들렸다. 그러던 중 김환이 김동인에게 주식회사 창조 출판사의 설립을 권유한다. 동인들은 출자금을 내고 창립총회까지 여는데, 이때 착수금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던 김환이 도주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로 김동인은 크게 낙심하고 «창조»의 열기 역시 점차 식어 간다. 그러자 꼭 «창조»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문학을 소개하거나 문인을 발굴할 수 있다는 대세 판단이 나온다. 그렇게 «창조»는 동인들의 합의를 거쳐 9호를 마지막으로 1921년에 폐간하였다. 이후 몇몇 동인들이 1924년 다시 «영대»를 창간하지만 이 역시 이듬해 통권 5호로 끝을 맺었다.

«창조»의 의의

«창조»1920년대의 근대 문학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것이었다. 1900년대부터 일어난 신문학 또는 계몽기 문학이 «창조»에 와서 비로소 청산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로 평가된다.

«폐허»

«폐허»의 창간

3 · 1 운동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민중 운동이었다. 여기에서 오는 좌절감 때문에 문단에는 한층 퇴폐적이고 우울한 분위기가 깃든다. 이 좌절감은 개인 차원의 경험이 아니라 시대와 집단 차원의 것이었다.

이런 민족적 좌절감에서 싹터 퍼져나간 것은 퇴폐와 우울의 정서였고, 그 시대적 흐름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 바로 동인지 «폐허(廢墟이다. ‘폐허라는 이름 자체가 식민지 현실의 고통과 황폐함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폐허옛 것은 멸하고 시대는 변하였다. 내 생명은 폐허로부터 온다.”고 한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F. Schiller)의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폐허»19207월에 광익서관에서 나온다. 동인으로는 «태서문예신보»의 주역인 김억과 황석우를 비롯해 남궁벽, 나혜석, 김찬영, 염상섭, 오상순, 민태원 등이 참여하였고, 이로써 «창조»에 대립하는 유파가 형성된다. «창조»와 달리 «폐허»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주로 시를 선보여 시 전문지의 성격을 띠었다.

창조파와의 논쟁

1920, «폐허»의 염상섭은 «창조»의 김동인과 일련의 논쟁을 벌인 바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논쟁은 비평의 역할과 권리에 대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데, ‘소설가김동인과 비평가염상섭의 대립이자 창조파폐허파의 대립이기도 했다.

논쟁의 발단과 전개

당시 «창조» 동인 중 한 사람이던 전영택은 김환을 김동인에게 소개한다. 김환은 김동인에게 «창조»에 자신의 소설 <자연의 자각>을 실어 달라고 하지만, 글을 선별하는 눈이 까다롭던 김동인은 그 작품이 함량 미달이라고 판단하여 «창조»에 싣지 않았다. 이에 김환은 <자연의 자각>«현대»에 보내 게재한다.

논쟁은 당시 비평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염상섭이 비평 <자연의 자각을 보고서>를 발표한 데서 시작된다. 이 글에서 염상섭은 김환의 작품을 조목조목 비평하면서 비단 이뿐만 아니라 문단 전반에 미흡한 작품들이 나돈다며 지적하고, 질이 떨어지는 작품들을 내놓으면서도 뻔뻔하게 작가로 행세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였다.

이 글을 읽은 김동인은, 물론 자신도 김환의 소설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긴 했지만 염상섭의 발언은 인신 공격성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김환에 대한 비난은 곧 «창조» 동인 전체에 대한 폄하일 수 있다고 여기고 분노하였다. 김동인은 오래 전 «학지광»의 편집을 맡고 있을 때 염상섭의 소설을 거절했던 적이 있었는데, 염상섭이 이 일로 오랜 앙심을 품고 비난을 터뜨렸다고 추측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논쟁은 염상섭의 <여의 평자적 가치를 논함에 답함>, 김동인의 <제월씨에게 대답함>, 다시 염상섭의 <김군께 한 말>, 김동인의 <비평에 대하여>로 이어지면서 문단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논쟁의 내용

김동인은 사사로운 감정을 갖고 작가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비평가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람일 뿐이지, 함부로 소설가를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염상섭은 소설가의 작품은 작가의 사적인 세계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작품을 논하면서 작가의 인격을 비롯한 사사로운 면도 함께 비판하는 것은 비평가의 당연한 권리라고 팽팽하게 맞선다.

염상섭과 김동인 사이의 이 논쟁은 문학 비평이라는 분야가 일반적인 문학론을 넘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분화하고 발전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폐허»의 성격과 전개

본래 «폐허» 동인들은 현실의 폐허를 극복하고 새 싹을 심어서 새 꽃을 피우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취지와 달리, 막상 동인들은 참담함과 암울한 현실 인식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폐허»는 점점 더 감상적이고 병적인 낭만주의로 빠져들고, 서구 세기말의 퇴폐적 낭만주의보다도 더 깊은 폐허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문제는 현실을 폐허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삶과 삶의 기반 전체를 폐허라고 여긴 나머지 일제에 대한 저항조차 무의미하게 보는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적 투항 의식을 정당화한 데 있다. 좌절에 빠진 민족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애초의 목적은 어느 샌가 사라지고, 자신과 세계를 저주하는 탄식이 문단을 뒤덮게 된 것이다. 더욱이 «폐허»는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맞았고, 결국 김억, 황석우, 염상섭이 폐허파에서 나와 «창조»에 합류한다. 그렇게 «폐허»192112호를 낸 후 종간된다. 얼마 뒤 «폐허 이후»로 부활을 시도하긴 했지만 이 역시 한 번 만에 끝나고 말았다.

«개벽»

«개벽»의 창간

3 · 1 운동을 거치면서 이 땅에는 평등과 자유정신이 다져진다. 그러자 이런 정신에 입각하여 식민지 민중 해방을 지향하는 잡지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긴다. 그렇게 1920년에 «개벽(開闢이 창간되었다.

«개벽»«창조»«폐허»와 달리 순문예지가 아니라 종합 잡지였다. 이 잡지는 천도교계에서 발행하여 이름 역시 천도교의 후천 개벽 사상에서 따왔고, 천도교계의 중진들이 사장, 발행인, 편집인을 맡았다.

«개벽»의 성격과 전개

문예지의 성격

«개벽»1923년쯤부터 문예란이 활성화된다. 그런데 이때는 우리나라에 사회주의 사상이 밀려든 시기와 맞아 떨어진다. «백조» 동인으로 있던 박영희가 옮겨오고 일본에서 귀국한 김기진까지 가세하자, 이 무렵 «개벽»은 거의 매 호마다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을 싣게 되었다. 뒤이어 이기영, 최서해 등 신경향 작가들까지 합류하자 곧 «개벽»은 사회주의 문학의 거점처럼 되어 갔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 역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때문에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던 염상섭, 현진건, 나도향, 이상화, 김억, 김소월, 변영로, 박종화, 김동환 등 당시의 일급 작가들은 대부분 이 잡지를 거쳐 간다.

«개벽»의 수난

«개벽»은 창간될 때부터 검열 당국의 최우선 감시 대상에 올라 계속해서 수난을 겪는다. 애초에 창간 목적이 민중 해방이었으니 일제로부터 무자비한 검열과 삭제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문인들이 계속해서 원고를 투고했기 때문에 몇 차례의 판매 금지와 압수, 또는 정간을 당하면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개벽»1920년대의 갖가지 문학 형태를 담는 큰 그릇 구실을 하다가 1926년에 72호를 내고는 맥이 끊긴다. 이후 1934년 속간되었지만 다시 정간되고, 1946년 복간된 후 통권 81호까지 이어지다가 1949년 폐간하였다.

«장미촌»

«장미촌(薔薇村자유시의 선구라는 부제를 달고 1921년에 창간한 시 전문지이다. 창간호에는 변영로의 <장미촌>, 황석우의 <장미촌의 향연>, 박영희의 <적과 비곡>, 박종화의 <우유빛 거리> 등 주로 세기말적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시들이 채워졌다.

그러나 «장미촌»은 창간호만을 내고 폐간되어, 직전에 없어진 «폐허»와 곧 나오게 되는 «백조» 사이의 간이역 정도의 의의만을 가진다.

동인들은 «폐허»보다 더욱 이상적인 평화와 안식의 낙원을 세우고자 «장미촌»을 창간하였다. 때문에 «장미촌»에는 «폐허»의 퇴폐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성격이 그대로 보이면서도, 이름처럼 한 층 더 화사함과 정열을 발산하고자 한 노력이 엿보인다.

«백조»

«백조»의 창간

«백조(白潮는 휘문 의숙 출신의 홍사용과 박종화, 배재 출신의 나도향, 박영희, 최승일로 출발하는데, 곧 현진건, 이상화, 김기진, 안성주가 합류하고 간헐적으로 이광수도 참여하면서 만들어진 문예지이다. 원래 1921년에 발간 준비를 마쳤지만, 발행인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게 문제가 되어 다시 외국인 명의로 허가를 받아 1922년에야 출간되었다.

처음에는 문예지로 «백조», 사상지로 «흑조»를 계획하지만 «백조»만 나오게 되었다. 제호도 화려하거니와 표지에 안석주가 그린 여인의 그림까지 곁들여 이 시기의 잡지답지 않게 호화스럽고 낭만적인 창간호를 냈다.

«백조»의 성격

«백조»에는 시와 소설이 모두 실렸다. 박종화는 시와 소설 모두를 내고, 박영희와 이상화 등은 시를 주로 실었으며, 현진건과 나도향 등은 소설을 낸다. «백조»의 시는 병적이고 퇴폐적인 경향이 묻어나는 유미주의와 낭만주의 경향을 보이고, 소설은 자연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백조» 특유의 유미주의는 박영희의 <월광으로 짠 병실>에서 극에 달한다. 소설에서도 이런 낭만주의의 색채가 더러 보이는데, 대표적으로는 나도향의 <젊은이의 시절>,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등이 있다. 시에서 보이는 낭만이 악마적이고 유미적이라면, 소설에 나타난 것은 순진한 소년의 감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창조»«백조»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이광수 등의 계몽적 문학에 대한 반항이라는 공통 명제를 안고 나왔다. 그런 목적의식이 «창조»에서는 예술 지상주의로, «백조»에서는 낭만주의와 유미주의라는 형태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유럽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대항하여 나타난 것이고, 일본에서 낭만주의는 비개성적 자연주의에 대항하여 나타난 사조였다. 그런데 우리 문단에서 «백조» 등에 나타난 낭만주의는 문단 방향의 공통 목적에 의해 선택된 하나의 대안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시기 «백조»의 낭만주의는 그 기본 맥락이나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분위기에만 도취하여 겉만 모방하는 데 그친 느낌을 준다.

«백조»의 폐간

«백조»의 낭만적 유미주의는 언어의 미적 선택, 내밀한 감정의 표현 면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그러나 이론적 토대가 취약하고 지나치게 추상성과 관념성에 치우친 결과, 문단에 사회주의 이념이 불어 닥치자 너무도 쉽게 허물어졌다. 그것도 «백조»의 선두에 서서 낭만적 유미주의의 극치를 보여 주던 박종화, 박영희, 김기진 등의 주역들에 의해 붕괴되는 결과를 맞는 것이다.

그렇게 박영희가 계급 운동 쪽으로 발길을 옮김에 따라 «백조»19233호를 끝으로 다시 나오지 못한다. 박영희는 훗날 <화염 속에 있는 서간철>(1925)에서 «백조»의 시대를 두고 모든 것은 한 가지 부르주아 자제들의 오락이었다.”라며 깎아 내린다.

«금성»

«금성»의 창간

«금성(金星1923년에 창간된 시 전문지이다. 양주동과 백기만의 주도로 만들어졌고, 전주 부호의 아들인 유엽이 자금을 책임졌다. 조선인은 잡지 발행 허가를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백조»와 마찬가지로 외국인의 명의를 빌려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창간호에는 백기만, 유춘섭, 양주동 등의 시가 실리는데, 창작시는 물론이고 동시, 보들레르나 타고르 번역시와 시론들까지 여러 편 실렸다. 권두시인 양주동의 <기몽>에는 «폐허»«백조»의 우울한 세기말적 분위기가 느껴지며, 3호에는 이장희가 <봄은 고양이로다> 등을 발표하며 데뷔하기도 하였다.

«금성»의 경향

«금성»«폐허»«백조»를 딛고 나아가 이전의 문예 동인지들보다 더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취지로 발간되었다. 말하자면 «금성»은 기존 시단의 양식을 받아들이되 작품 수준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그러면서 방법 면에서는 급진성을 배격하고 온건 노선을 선택한다. 이는 «금성»을 주도한 양주동의 중간자적 문학관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옷, 패션 트렌드, 운동화, 쇼핑, 신상품, 신발, 자켓, 코트, 탈모, 모발이식, 미용, 성형수술, 구두, 부츠, 샌들, 여름 신발, 바지, 롱팬츠, 팬츠, 양말, 모자, 캡, 나이키, 아디다스, ABC 마트, 롱부츠, 첼시부츠, 티셔츠, 원피스, 정장, 수트, 가방, 귀걸이, 목걸이, 반지, 마스크, 시계, 팔찌, 패션, 백화점, 의류, 옷, 머리띠, 롱패딩, 패딩, 점퍼, 야상, 재킷, 화장품, 크림, 스킨, 아이섀도우, 아이브로우, 올리브영, 롯데닷컴, 하프클럽, 니트, 블라우스, 스커트, 치마, 주름바지, 통바지, 크롭티, 와이셔츠, 영어, 토익, 학원, 반찬, 다이어트, 도시락, 닭가슴살, 샐러드, 감자, 계란, 집밥, 요리, 고기, 소고기, 닭다리, 치킨, 아침밥, 삼겹살, 곱창, 밀키트, 선물세트, 저녁 메뉴, 볶음밥, 탕수육, 광어회, 연어회, 해산물, 냉동식품, 참치회, 잡곡밥, 아이스크림, 배스킨라빈스, 배달의 민족, 배달음식, 떡볶이, 튀김, 오징어튀김, 순대, 오뎅, 토마토, 딸기, 사과, 귤, 오렌지, 콤부차, 홍차, 레몬티, 커피, 카누, 네스프레소, 캡슐커피, 식품 직구, 영양제, 비타민, 아이허브, 신용카드, 소액대출, 대출, 보험, 보험상담, 저축은행, 여성대출, 학자금대출, 대출계산기, 대출이자, 주부대출, 임플란트, 치아보험, 자동차 렌트, 제주도 렌트, 렌터카, 자동차, 승용차, 중고차, 자동차보험, 자동차사고, 청약주택, 청약통장, 정기예금, 적금, 주택정약, 아파트, 내집마련, 빌라, 30평대, 부동산, 소형아파트, 치아, 어금니, 송곳니, 법률상담, 모기지론, 대학 편입, 학사편입, 대학교, 웹호스팅, 클라우드, 보안솔루션, 홈페이지, 앱제작, 동영상제작, 영상편집, 기부, donate,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세계구호,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전문자격증, 자격증, 학원, 사이버대학교, 학사, 학위취득, 학점은행제, 토익, 영어, 외국어, 통역, 번역, 동시통역
[면책공고] 솜글 블로그 자료 이용 안내

이 글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