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생애
어린 시절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는 평북 정주에서 이종원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아버지 이종원은 과거제 낙제한 후 술로 여생을 탕진하며 생계를 돌보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광수는 그런 아버지 때문에 어릴 때부터 산에서 나무를 하거나 담배를 팔아 가며 서당에 다니는데, 여덟 살 때 동양 고전을 두루 섭렵할 만큼 신동이었다.
열한 살 나던 해에 갑자기 고아가 되자 이광수는 사당에 불을 지른 후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1903년(12세) 동학 이념에 감명을 받아 동학교도가 된다. 이듬해(13세)에는 러일 전쟁으로 동학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서울로 오는데, 여기서 일진회를 접하면서 개화사상에 눈을 뜬다. 그리고는 머리를 삭발하고 혼자 일본어를 익혀 잠시 일본어 교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문단 생활의 시작
1905년(14세)에는 일진회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데, 거기에서 최남선, 홍명희 등과 교유하고 도쿄에 들른 안창호의 강연을 들은 후부터는 기독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07년(16세) 경에는 톨스토이나 바이런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서양의 문예 사조에 심취하고, 홍명희 등과 함께 ‘소년회’를 결정하여 회람지 «소년»을 펴내고 여기에 시와 논설을 실었다. 1909년(18세)에는 장편 <노예>를 쓰고 몇 해 뒤에 일어로 발표한 <사랑인가>가 호응을 얻어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문사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10년(19세) 초에는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여 당시 잡지 «소년»을 펴내고 있던 최남선과 재회한다. 그리고 곧 «소년»에 단편 <어린 희생>과 <헌신자>를 발표하고, «대한흥학보»에는 단편 <무정>과 평론 <문학의 가치>를 실었다. 조부상을 치른 후에는 야학을 열어 계몽 운동을 벌이다가 합일합방을 맞았다. 1913년(22세)에는 만주와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 등을 여행하고 이듬해(23세) 최남선의 도움으로 잡지 «새별»을 창간하였다. 1915년(24세)에는 다시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면서 계몽적 소설이나 논문을 틈틈이 발표한다.
1916년(25세) 말에는 대한매일신보사로부터 신년 연재소설을 청탁 받는데, 이에 미리 써 두었던 원고 <영채>를 다듬어 보낸 것이 바로 장편 <무정>이다. <무정> 연재 이후에는 소설 집필에 박차를 가하여 <어린 벗에게>, <개척자>, <윤광호> 등을 발표하였다.
1918년(27세)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허영숙과 애정 행각을 벌이고 19세 때 중매로 조혼했던 아내와 이혼한다. 1919년(28세) 독립 선언서 작성에 가담하고 1920년(29세) 흥사단 임시 반장으로 일하던 시기에는 허영숙이 상하이까지 찾아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두 사람은 결국 1921년(30세)에 정식으로 결혼하여 2남 2녀의 자녀를 두는데, 해방 후인 1946년(55세)에 이혼하게 된다.
문단과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이광수는 갑자기 1922년(31세), «개벽»에 <민족 개조론>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문단과 독자들의 항의를 불러 일으켰고, 이 때문에 이듬해에는 단편 <가실>을 ‘Y생(生)’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해야 했다. 계속해서 논설과 소설을 내는데도 문단은 계속 그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이광수는 «조선문단»이나 «동광»의 일을 돕기도 하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1934년(43세) «조선일보» 부사장까지 지낸다. 그러는 동안 <재생>, <마의 태자>, <단종애사>, <흙> 등을 발표하며 문단 내의 위치를 어느 정도 회복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아들이 병으로 죽고 안창호가 장기 투옥되자, 이광수는 조선일보 일을 그만두고 홍지동 산장에서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홍지 출판사’를 설립, 서적들을 출간하며 기운을 찾다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기도 하였다.
친일 행위와 말년
1939년(48세) «세종대왕»의 집필에 들어갈 무렵, 이광수는 일제의 권유로 ‘북지 황군 위문’에 나선다. 여기에는 박영희, 김동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이광수는 차츰 적극적으로 친일 노선을 걷는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김용제, 최재서, 김기진 등과 ‘문인 보국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최남선 등과 함께 도쿄에 파견되어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한때 독립 선언 문안의 기초를 쓰고 «독립신문»의 주필까지 맡았던 이광수의 변절은 많은 이들에게 배신감을 안겼다.
해방 직전인 1944년(53세)부터는 정치에 손을 떼고 물러나 농사를 짓다가 해방을 맡는다. 해방 후 그는 일제 말기의 친일 행각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건강이 점차 악화되었는데, 그러던 차에 1949년(58세) 최남선과 더불어 반민특위에 걸려 수감되자 건강이 급격하게 쇠하였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이광수(1949년)
1950년(59)에는 6 · 25 전쟁 와중에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북쪽 산악 지대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홍명희의 도움으로 병원 치료를 받던 중 1950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들어 북한 당국은 그의 무덤을 평양으로 옮기고 빗돌을 세워 예우하였다.
이광수의 문학관
이광수의 문학 이론
<문학이란 하오>
이광수는 <문학의 가치>(1910)에 이어 발표한 <문학이란 하오>(1916)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문학론을 내 놓는다.
<문학이란 하오>의 주요 내용
- ‘문학’은 서양의 ‘Literature’나 ‘Literatur’에서 나온 것이다.
- 문학은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특정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문학의 근본적인 목적은 미와 쾌감을 얻는 것이다.
- ‘지 · 정 · 의’ 중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이다.
- 최고의 소재를 최고로 정확하고 정감 있게 묘사한 것이 가장 좋은 문학이다.
- 유교에 뿌리를 둔 권선징악 위주의 도덕적 문학관에서 벗어나 감정의 사실적 묘사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 문학에는 지식 전달과 교육, 교훈의 기능이 있다.
- 중국 문화에 근본한 문학의 폐해를 극복하고 서구 문화와 자유 정신에 입각하여 신문학을 창조해야 한다.
- 문학에서는 일상어와 현대어를 사용해야 한다.
- 문학인은 천재성과 노력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
- 조선 문학은 조선인이 조선문으로 쓴 것이어야 한다.
정의 문학
이광수는 <문학이란 하오>에서 먼저 ‘문학’의 개념을 밝히고,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情)’이라고 하였다. 또 문학이 자아에 대한 각성과 자기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분야라고 하면서 문학의 독립성을 주장한다. 문학이 개인 정서에 기초하여 성립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전대의 모든 유교 윤리적 속박과 관념에서 문학을 해방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광수의 문학관은 문학을 근대적으로 인식하고 개인을 발견한 성과라고 평가된다.
계몽 문학관
<문학이란 하오>의 또 다른 주요 논점 중 하나는 문학의 효용론적 인식이다. 문학은 유교적 도덕의 도구가 아니며, 앞서 말한 정서적 감화력을 활용하여 신사상과 신이상을 전달하는 매체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이광수는 두 가지 중요한 모순에 빠진다. 하나는 ‘정의 문학’을 말하면서 문학의 독자적 가치를 강조했으면서도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높이 평가하여 계몽 문학관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문학의 목적이 미와 쾌락에 있다고 하면서도 문학이 가진 오락성을 낮은 수준의 것으로 여겨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는 고급 문학을 옹호했다는 점이다.
이런 모순은 이광수가 한국 문학 현실을 자각하고 비판하면서 구체화하여 새로운 문학관을 내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했다. 나아가 이 때문에 문학에서 개인의 정서를 중시하면서도, 그 개인의 존재 문제와 개인이 근거하는 현실 사회를 제대로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학이란 하오>는 일본을 통해 얻어 들은 서구 문학에 대한 단편적 지식들을 모아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된다.
<민족 개조론>
이광수는 종학원, 경성학교 등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중 느닷없이 <민족 개조론>(1922)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우리나라가 쇠퇴한 까닭이 타락한 민족성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우리 민족의 속성으로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무신, 겁나와 나타, 사회성의 결여 등을 꼽는다. 그러면서 이런 민족정신을 개조해야만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광수가 제시하는 민족성의 개발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도덕적 개조로, 개인이 지니고 있는 허위, 증오, 분노, 시기와 같은 감정을 버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술적 개조로, 자연과 인생을 하나의 예술로 보면서 자신을 수양하면 그 예술이 개인의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 정신생활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도덕적 개조와 예술적 개조를 거치면 민족이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방법론적 면에서 설득력이 없고, 피침략자인 우리는 결국 열등한 민족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제국주의적 논리에 맞장구를 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은 침략 세력의 강변에 굴종한 패배적 민족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광수 문학론의 한계
이광수의 논리가 갖는 모순은 결국 당대 현실에 대한 그의 인식이 지극히 심정적이고 패배주의적임을 보여준다. 민족의 고통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일제의 착취해 의한 것임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원인을 민족의 도덕적 타락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생활의 예술화’라는 막연한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어떤 실천적인 지표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이광수의 계몽론은 이상주의적인 환상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이광수 자신이 문학을 철저하게 근대적으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 자체가 아직 근대적 문학론을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소설의 특징
이광수의 작품 전반에는 개인과 민족의 자유 추구, 인도주의적 기독교 이념, 그리고 톨스토이적 정신세계의 사상이 흐른다. 여기에 <무정> 등에서는 교육의 중요성과 자연 과학 수용의 필요성, 자유연애관 등을 덧붙이고 있다.
자유연애론과 가족 제도의 문제
이광수는 앞서 <문학이란 하오>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정’의 이론, 즉 ‘정’의 교육을 담당하는 분야가 문예라는 논리에 감동을 받고 이것을 자신의 문학적 지표로 삼았다. 여기에 고아 의식에서 기인한 애정 결핍감과 봉건 구습에 짓눌린 사회 상황이 맞물리고, 이광수는 우리나라를 사랑과 정이 없는 무정(無情) 상태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사회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자유연애론의 합리성을 소설로 표현한다.
자유연애론과 연관 지으면서 이광수가 문학적 과제로 삼은 것은 가족 제도와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작품 속에서 대가족 중심 제도가 소가족 제도에 따른 부부 중심 사회로 이행하는 국면을 부각시키는데, 이것은 부권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나아가서는 전통 윤리나 도덕을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엘리트 의식과 계몽주의
이광수는 일본을 통해 문명개화하는 것이 곧 선(善)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개인 차원의 고아 의식이나 사회 차원의 식민지인 의식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배움이라고 확신한다. 때문에 이광수의 작품 속에서는 교육, 특히 신교육에 대한 주장이 종종 나타난다.
그러나 이광수가 말하는 ‘배움’이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는 일본이 지배하는 질서에 충실히 따르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 같다. 일본은 선진 사회이고 우리는 후진 사회라는 폄하 의식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은 다른 누구와도 다르다는 우월감에 젖는다. 여기에서 엘리트 의식이 나온다. 자신, 혹은 문학인, 혹은 지식인은 선구자 기질이나 작가적 재능 면에서 천부적으로 선택받은 사람, 즉 엘리트라는 것이다.
이런 지적 우월주의는 곧 민족에 연민을 갖고 하고, 줄곧 애국 계몽식 설교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는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한 장치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월감에 의한 자아도취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광수의 소설
이광수는 장편 소설과 단편 소설, 신체시, 희곡, 논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집필 활동을 했다. 그 중 이광수가 주력한 갈래는 단연 소설이다.
<무정>
<무정>은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매칠신보» 1면에 연재된 작품이다. 내용상 약 한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을 그린 것인데, 이광수 자신이 방황하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최초의 근대 장편 소설로 꼽히는 작품이다.
<무정>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김 장로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그런데 옛 스승인 박 진사의 딸 영채가 찾아온다. 박 진사는 고아이던 형식을 데려다 키워 주고 영채와 정혼시켰었는데, 개화 운동이 실패하고 집이 망하자 형식과 영채 사이에는 소식이 끊어졌었다. 형식은 영채와 선형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선형을 선택하고, 약혼식을 치른 후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난다.
영채는 형식에게 버림받은 데다 배 학감에게 정조를 유린당하기까지 하자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우연히 신여성 병욱을 만나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병욱의 호의로 함께 도쿄 유학길에 오르던 영채는 기차 안에서 형식과 선형을 만난다. 형식은 다시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고, 영채와 선형 역시 불협화음을 겪는다. 그런데 기차가 삼랑진의 수재 현장에서 연착한다. 여기에서 네 젊은이는 수재민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열고, 이에 따라 개인적인 악감정이 사라진다. 네 사람은 토론을 통해 민족의 장래를 이끌어 갈 사명을 다짐한다.
이광수의 시혜 의식
이광수는 <민족 개조론>에서 우리 민족의 열등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 민족성을 개조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사상이 <무정>에서는 이형식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무정>에서 민중들은 수재라는 자연 재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데, 이형식은 그 이유가 민족이 전근대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근대적인 지식을 배워 민중을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중들을 피동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보고, 지식인인 자신이 민중들에게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욱이 기차에서 첨예하게 대립을 이루던 인물은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이라는 숭고한 공동 목적에 도달하면서 비로소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한다. 이러한 일련의 주제 의식은 바로 이광수 문학의 특징인 시혜 의식, 계몽 의식의 한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특징
개인적 운명의 양상 : <무정>에서 관심의 초점은 이형식과 박영채로 대별되는 두 인물이 가진 개인적 운명의 양상이다. 이형식은 고아나 마찬가지인 신세이지만 누구보다도 많은 행운을 누리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극복해 나가지는 않는다. 언제나 주변의 도움으로 고통을 모면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박 진사의 도움으로 성장하였고, 일본 유학을 떠난 것도 다른 은인의 도움 덕분이었으며, 김 장로의 호의로 그의 딸과 결혼하여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형식이 신분적 상승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개화라는 사회적 변동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형식의 신분 상승 과정은 지극히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그의 출신 성분이나 가족 관계는 제대로 알 수 없고, 그가 구시대의 봉건성을 버리고 문명개화에 들어서는 계기조차 불투명하다. 이형식에게 주어지는 단 하나의 갈등은 영채와 선형 사이에서의 일시적 방황일 뿐이다. 이렇듯 이형식은 거의 무의지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으며, 결국 근대적 소설의 인물로 제대로 성격화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박영채는 이형식의 무의지적 성격과 대별된다. 박영채는 개화 운동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 아버지와 오빠를 위해 스스로 기생이 되고, 이형식을 다시 만나기 위해 순결을 지키며 기다린다. 그러다가 이형식이 다른 여성과 혼약하고 자신의 순결마저 잃게 되자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결말 부분에서는 병욱의 충고를 듣고 신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아 일본 유학을 결심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박영채의 굴곡 어린 변모 과정은 전통적인 가족 구조가 붕괴되고 개인이 무너지고 있던 당시 사회적 변동과 맞물리며, 여기에 개화 지상주의적 요소가 곁들여졌다.
그러나 박영채의 운명의 전환 역시 병욱이라는 인물의 매개적인 역할에 의해 이루어졌을 뿐, 영채 자신이 자기 각성을 통해 주도적으로 행하는 구체적인 행동은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박영채가 선택하는 신교육이라든지 문명개화라든지 하는 가치 또한 가능성의 세계 정도로만 제시되었을 뿐이다.
인물의 특징과 시대적 전형성 : <무정>의 인물은 사회 현실을 관찰하여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이광수의 개인적 체험과 개화 의식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네 인물들은 시대적 전형성을 띠는데, 이는 <무정>을 근대 리얼리즘 소설로 보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 이형식 : 전통을 모르는 개화 지식인 급격한 사회 변동으로 인한 전통 단절을 반영
- 박영채 : 실패한 개화 운동가의 딸 일제 강점으로 인해 몰락하는 민족의 운명을 반영
- 김선형 : 외래 종교인 기독교 장로의 딸 개인적 자각을 보여주지 못하는 외면적 신여성
- 김병욱 : 개화 사상을 지닌 신여성 민족의 미래가 개화에 달렸음을 암시하는 실질적 신여성
근대 소설적 특징
내용면의 특징 : <무정>은 고전 소설과 달리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당대인의 삶에서 소재를 취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소설의 면모를 보인다. 이형식이 영어 교사라는 설정은 당대의 개화 현실을 반영한 것이며, 기차 여행이나 유학, 자유연애와 같은 주요 모티프 역시 당대 현실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문체면의 특징 : <무정>이 근대 소설로 인정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에서 시도된 문체 변혁 때문이다. 신소설이 문체 면에서 일본식을 거의 모방한 반면, 이광수는 조금씩 시도하던 문체의 변혁을 <무정>에서 과감하게 시도한 것이다.
<무정>은 인물의 대화를 직접 인용하는 구어체의 문장을 씀으로써 언문일치를 이룩한다. 대화가 아니더라도, 연재 초기에는 여전히 “-이라.”의 구식 문어체 종결형을 쓰지만, 연재가 진행되면서 차츰 “-이다.”체로 바뀐다. 또 남녀의 구별이 없기는 하지만 ‘그’라는 3인칭 대명사를 쓰는가 하면, 시점도 현재, 과거, 미래를 두루 사용하고 현대 소설에서 많이 쓰는 과거 회상 기법을 수용하는 등 획기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근대화 현실과 인간의 심리를 관념적으로 제시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밀한 묘사를 통해 표현했다는 점 역시 큰 변화로 인정된다.
한 마디로 <무정>의 문체는 신소설의 문체보다 몇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문체의 변혁과 새로운 기법의 도입은 우리 소설이 현대성을 갖추게 되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흙>
<흙>은 이광수가 자신이 편집국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에 1932년 4월 12일부터 1933년 7월 10까지 총 291회에 걸쳐 연재한 장편 소설이다.
이때는 일제가 만주 사변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대한 무단 정치를 다시 강화하던 시기였다. «동아일보»는 이런 시대적 암흑기에 ‘브 나로드’ 운동을 들고 나와 농촌 계몽을 주도하였는데, <흙>은 심훈의 <상록수>와 함께 이 ‘브 나로드’ 운동을 소설화시킨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흙>
허숭은 보성전문학교를 다닌 농촌 출신 고학생으로, 유순과 약혼했으면서도 일본에 가서 변호사가 된 후 윤 참판의 딸 윤정선과 혼인한다. 그러나 곧 윤정선과 다투고는 살여울로 돌아와 농촌 계몽 사업에 몰두한다. 이후 정선이 살여울에 찾아오자 허숭은 농촌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정선은 이를 탐탁해 하지 않지만 허숭의 숭고한 정신에 감동하여 시골에서 살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정선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 갑진과 불륜을 저지르고, 이를 목격하고 방황하던 허숭은 우연히 기생집에서 산월을 만난다. 산월은 전문학교를 나온 신여성으로 본명은 백선희인데, 허숭을 연모했다. 이후 허숭은 아내에게 이혼하고 싶을 때 도장을 찍으라며 필요한 서류들을 건네주고는 살여울로 떠난다.
허숭은 살여울로 향하는 기차에서 산월을 만나 동행한다. 이때 자살하려고 열차에 뛰어든 아내 정선을 발견하고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지만 결국 정선은 한쪽 다리를 잃고 만다. 이후 정선과 산월은 살여울로 같이 내려가 허숭과 함께 농촌 생활을 시작하고, 산월은 유치원을 경영하고 정선도 농촌의 불편한 삶에 서서히 적응해 간다. 그러나 살여울의 고리 대금업자인 유산장의 아들 유정근이 등장하면서 조용하던 살여울에 분란이 일어난다. 유정근은 허숭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는, 허숭이 정선을 후려 혼인하고도 여의사, 유순, 산월과 통정하는 바람에 이에 반발한 정선이 간통했으며, 산월과 숭이 타고 가는 기차에 정선이 뛰어 들었다는 내용을 퍼뜨린다. 이에 유순의 남편인 한갑은 임신 중인 유순을 때려죽인다. 또 유정근의 밀고로 허숭, 산월(백선희), 한갑 등이 유순의 살인과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어 투옥된다. 홀로 남은 정선은 성실하게 생활하여 살여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한편 이건영이라는 청년에게 버림 받았던 유학하였다가 독주회를 위해 귀국하는데, 살여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갑진과 만난다. 갑진은 정선과의 불륜 이후 느낀 바가 있어 개간 사업 등을 펼치며 그간의 방탕한 생활을 반성하고 있었다. 비록 허숭 등이 아직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작품은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을 암시하며 결말을 맺는다.
연애 소설의 서사 구조
<흙>은 삼각관계로 짜인 연애 소설의 서사 구조로 되어 있다. 삼각관계는 대중의 시선을 가장 빨리 끌어들일 수 있는 대표적인 통속 소설의 한 소재이다. 이광수는 자신의 창작 원형을 연애 소설의 기본 구조에 두었다. 이는 일단 삼각관계로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독자를 소설에 끌어들인 후,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서였다. 이광수는 이미 <무정>에서부터 삼각관계의 모티프를 즐겨 이용했는데, <흙>에서도 역시 ‘허숭 - 정선 - 유순’, ‘정선 - 허숭 - 갑진’, ‘유순 - 허숭 - 한갑’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서사를 이룬다.
귀농의 명제
<흙>의 핵심은 모든 인물들이 결국 농촌으로 복귀한다는 대명제의 실천이다. 귀농 사상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광수는 농촌 출신 고학생 허숭을 소설의 중심에 배치한다. 농촌 출신이자 가난한 허숭은 도회의 안락과 신분 상승을 꾀하기 위해 윤 참판 댁에서 사는 수치를 감내한다. 그는 마침내 고시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며, 재색을 겸비한 윤 참판의 딸 정선을 아내로 맞는다. 이것으로 일단 허숭의 상류 사회로의 편입은 완료된다.
그러나 작자의 진정한 의도는, 허숭이 상류 사회의 물질 만능과 향락, 이기주의와 타락한 삶에 회의를 느낌으로 해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자신이 지녔던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그것이 허위임을 깨우치고 농촌으로 내려온다는 상황 설정은 춘원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흙>에서는 허숭을 중심으로 도회와 농촌이 대비된다. 도회의 인물들인 김갑진, 윤정선, 이건영 등이 이기주의, 향락주의, 반민족적 행위를 주도하는 속물군이라면, 농촌의 인물인 유순, 한갑, 작은갑을 위시한 살여울 사람들은 구조적 모순에 자기도 모르게 희생되는 희생양들이다.(물론 농촌 인물들 중 고리 대금업자 유정선과, 일제의 앞잡이 순사나 기수는 악의 인물에 해당한다.) <흙>은 이들 도회의 인물이나 악의 표상들이 허숭의 인격에 감화되어 선한 인물로 변모하며, 희생양이 된 농민들이 이상을 향해 매진할 수 있게 된다는 데 주제 의식을 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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