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설의 성립
신소설의 개념과 특징
개화기를 시대 배경으로 해서 나타난 일군의 계몽주의적 소설을 일컬어 신소설이라고 한다. 신소설은 고전 소설과 현대 소설을 이어 주는 과도기적 소설 양식으로, 대개 봉건 타파와 개화 계몽, 자주 독립과 민주 · 애국 사상의 고취, 서구의 신사조 도입 등을 주제로 하였다. 일상적 공감에서 이루어지는 언어, 즉 일상성을 풍부하게 담아낸 첫 번째 서사 문학 양식이기도 하다.
신소설의 발생 - <일념홍>
신소설의 첫 예로는 1906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일념홍>을 들 수 있다.
<일념홍>은 여주인공이 일본 공사의 도움으로 개인적인 불행에서 벗어나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식 교육을 받으면서 개화의 길을 가게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여주인공은 고아가 되어 기생으로 팔리고, 그녀를 탐하는 조선 대관에게 위협 받는다.
그런데 이 고난에 처한 주인공을 돕는 구원자가 일본 공사이다. 여주인공을 사랑했던 청년을 구출한 것도 일본인이고, 그 청년은 일본에서 사관학교를 다닌 후 일본군 장교가 되어 러일 전쟁에서 일본을 위해 전공을 세운다. 반면 조선인 대관은 악덕과 비행을 일삼고 일념홍을 자기 손 안에 넣기 위해 권세와 폭력을 쓰며, 국가 기밀을 러시아에 넘기는 반국가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이렇게 <일념홍>은 조선 대관과 일본 공사의 상반되는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보수적인 집단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동시에 개화에 대한 긍정을 적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 지향 의식을 부추기는 신소설의 정치성은 이후에 발표된 여러 작품들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며, 이광수의 <무정>에서 여주인공 박영채의 삶 역시 <일념홍>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는 당대 현실에서 일본의 정치적 위상과 그 세력의 확대 과정을 말해 주는, 일종의 정치적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이인직, 신소설의 확립
이인직의 경향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은 마흔이 다 된 나이인 1900년에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 사람이다. 본래 양반 가문이 아닌 집안에서 태어나 출세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 것이다.
일본에서 이인직은 극단적인 친일론자 조중응을 만나 교유하면서 일본의 문화와 정치에 매혹된다. 이것은 자신의 열망을 억누르던 조선의 봉건 사회에 대한 반감과 맞닿은 결과였다. 일본에서 그는 신문 정치 소설 작가들이 출신에 관계없이 정치에 입문하는 과정을 보고 이를 모방하기 시작한다. 신소설은 바로 그 과정에서 태어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소설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정치 구조가 일본식 의회 제도와 다른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소설로 출세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깨달은 후부터 이인직은 방향을 틀어 상업 출판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령 작품에서 한자로 달던 토를 없애고 한글 위주로 표기했다든지, 일본식 표기나 표현을 우리식으로 바꾸었다든지, <혈의 누>에서 보이던 정치적 색채를 하편 격인 <모란봉>에서는 제거했다든지, 갈수록 애정 소설로 흘렀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소설에 대한 이인직의 인식 변화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
<혈의 누>(1906)(45세)는 «만세보»에 50여 회에 걸쳐 연재된 소설이다. 이 작품은 조선 말 청일 전쟁을 겪은 평양의 한 가족을 중심으로 한다.
여주인공 옥련은 전란 속에서 부모와 헤어지고 헤매는데, <일념홍>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도움으로 구출되고 일본으로 건너가 행복하게 성장한다. 일본에서도 다시 위기에 처하는데, 이때 만난 조선인 유학생 구완서를 따라 미국으로 가서 근대 문물을 익힌다. 공부를 마친 옥련은 구완서와 약혼하고 부모도 찾으면서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고전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가족 이합(家族離合)에 따른 고난과 행복의 유형 구조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혈의 누>가 ‘일청 전쟁’의 장면에서 출발하는 것은 이인직의 정치적 현실 감각을 말해 준다. 청일 전쟁은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이 싸운 전쟁이고, 일본이 승리한 싸움이었다. 일본은 청일 전쟁의 승리를 통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였으며, 청나라로부터 요동 반도를 보상 받고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정치적 간섭도 배제할 수 있었다. 이인직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그는 <혈의 누>에서 전란을 겪은 조선의 한 가족이 일본 군대의 역할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여는 모습을 보여 준다. 요컨대 전란 속에서 헤매는 조선인들에게 힘을 주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구원자와 안내자로서 일본 군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혈의 누>의 서사 구조는 일본이 의도적으로 유포하고자 했던 조선 보호론을 승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당대 친일 정객들 사이를 넘나들던 이인직에게는 작품을 통해 이런 논리를 나타내는 것 자체가 현실적인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옥련에게 부여된 새로운 교육과 개화의 길은 하나의 허상과 추상에 불과하다. 때문에 인물의 행위에 구체성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채 그저 개화와 발전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도만 보여 주는 데 머문다. 신교육이라든지 자유연애, 여성의 사회 진출과 같은 계몽적 내용들은 그 과정을 서사화하기 위해 동원된 장치라 할 수 있다.
<은세계>
<은세계>(1908)에서도 <혈의 누>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전반부는 <최병도 타령>을 각색한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봉건적 사회 제도와 부패한 탐관오리의 학정을 고발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 강릉 산골에 사는 최병도는 김옥균에게 감화되어 구국의 뜻을 품고 착실하게 재물을 모은다. 그런데 탐관오리인 강원 감사가 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억울한 죄를 씌우고, 최병도는 영문도 모른 채 감옥에서 형벌을 받다가 숨진다. 이에 충격을 받은 부인은 유복자인 옥남을 낳은 뒤 정신 이상이 되며, 최병도의 친구 김정수가 최병도의 재산을 관리하고 옥순, 옥남 남매를 맡아 기른다.
후반부에서는 옥순, 옥남 남매가 성장하여 외국 유학을 다녀오는 과정을 보여 준다. 남매와 함께 미국에 갔던 김정수가 파산하고 죽자, 두 남매는 자살을 기도했다가 우연히 만난 미국인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다. 돌아온 남매와 상봉한 어머니도 정신을 회복한다. 세 가족은 함께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의병들에게 잡히는데, 옥남이 그들을 설득하는 데서 이야기가 끝난다.
남매는 개화의 이상을 꿈꾸지만 실천적인 의지나 행동은 거의 드러나 있지 않으며, 의병 운동이 개혁에 대한 부당한 반응이라고 비판한다. 이것은 당시 개화론자들이 지니고 있던 이념적 취약성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부분이다.
<은세계>의 전반부가 부패한 관료들의 보수적 태도를 문제 삼았다면, 후반부는 일본이 주도하는 개혁을 반대하는 의병들의 무지를 다룬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주체적이지 못한 개화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이자, 일본의 식민주의의 사회적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귀의 성> · <치악산>
<귀의 성>(1906)과 <치악산>(1908)은 모두 처첩 간, 고부간의 갈등을 근간으로 하는 통속적 가정 소설에 속한다. 몰락하는 지배 계층과 신분 상승을 노리는 상민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리면서 사건을 다채롭게 꾸며 흥미를 더한다.
<혈의 누>와 비교하여 보면 당대 현실과 사회에 대한 작가 의식이 매우 옅지만, 나름 현실 세태와 인정 풍속의 변화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또 사건 구성과 장면 묘사가 치밀해졌다는 것은 곧 신소설의 기법적인 변화를 말해 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해조, 신소설의 대중적 확대
이해조의 경향
이해조(李海朝, 1869~1927)는 친일 개화 문학의 이인직과 항일 개화 문학의 신채호 사이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소설의 시대를 연 이인직은 문학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갈수록 문학에서 손을 떼었고, 실천적인 계몽주의자인 신채호는 합일 합방에 이르자 해외로 나가서 활동한다. 온건 개화론자인 이해조는 이 두 사람 사이에서 1910년대 신소설의 맥락을 이어 갔다.
이해조는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10대손으로 태어난 종친이다. 아버지 이철용은 지방 토호로 상당한 재력가이자 벼슬을 지낸 인물이며, 훗날 신식 교육 기관인 화야의숙을 설립한 선각자이기도 했다. 이런 배경은 이해조나 정치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온건 개화파의 면모를 보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해조는 자라면서 신교육을 받지 않고 한문학을 배웠는데, 열아홉 살에 과거에 급제한 후에도 벼슬을 하지 않았다. «소년한반도»의 일을 보던 중 <금상탑>(1906)(38세)을 발표하며 소설가의 길을 걷는 한편 틈틈이 대한협회, 기호흥학회 회원으로 자강 운동화 국채 보상 운동에 앞장섰다.
한일 합병 뒤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계속해서 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는데, 이 시기 모든 분야의 창작 활동이 침체되어 있었음을 감안하면 이해조의 활동은 매우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조금씩 친일 성향을 보이고 작품에 노골적으로 일제를 찬양하는 색채를 덧칠하기도 하는데, 1920년 이후에는 아예 친일 단체에 적극 참여하다가 1927년(59세)에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해조 신소설의 특징
이해조의 신소설은 당시의 현실을 작품 속에서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지만, 과도기적인 시대적 상황을 독특한 갈등 양상으로 포착한 소설적 형상화 방법은 주목된다. 그래서 이해조는 신소설의 대중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성의 탈색
이해조는 첩실 또는 계모의 악덕과 음모에 의해 가정이 파탄 나는 모티프를 자주 활용한다. 소재는 낡은 것이지만, 여기서 이해조는 새로운 흥미를 창조한다. 악덕과 음모가 얼마나 악랄한가는 과정적으로 묘사하고, 이야기의 흐름에 예기치 못한 반전을 개재하는 구성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른 것들, 가령 일본 유학이니 신교육이니 동학 운동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일종의 주변적 장치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인직이 작품 전면에 내세웠던 정치의식이 이해조의 작품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토론체 소설인 <자유종>, 역사 전기물인 <서사 건국지> 등에서는 계몽적 윤리관이나 자주 독립관을 보였지만, 한일 합방 이후 발표한 작품들에서는 이런 경향이 크게 약화되거나 사라졌다.
인심과 세태에의 관심
이해조의 소설은 사회적 풍속과 세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면서 선 · 악의 윤리적 가치를 과장하게 강조하는데, 그런 점에서 소설 구성 방식 자체가 멜로 드라마적 요소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태에 너무 관심을 쏟은 나머지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천착을 보여 주지 못한다. 그의 소설은 성격과 행위를 매우 극단적으로 그리고, 이야기가 주로 원한과 복수로 이어져 독자들의 흥미와 호응을 유도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권선징악적인 요소, 즉 선에 대한 보상이 강조되는데, 이런 구성에서는 개인의 성격이나 내면, 인간관계와 같은 문제가 개입되기 어렵다.
인물의 특징
이해조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대체로 옛 관습에 의존한다. 주인공이 유학 가서 새 학문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 신학문이라는 것의 실체나 실천 과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유학이라는 것을 일종의 수사적 장치처럼 끼워 넣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개별적인 주체로서 행동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대신 등장인물들은 인간적인 순수함과 자기희생의 자세를 끝까지 지키는데, 그럼으로써 대중에게 호소하는 윤리적 가치를 부각하였다 할 수 있다.
이해조의 신소설
이해조의 신소설의 주류는 크게 대중적인 흥미를 위주로 구성한 가정 소설의 부류와 사회적 계몽성과 정론성을 다룬 성격의 작품들로 나뉜다. 전자에는 <빈상설>, <구의산>, <춘외춘> 등이, 후자에는 <자유종>, <구마검>, <홍도화>, <화의 혈>, <모란병> 등이 있다. 후기로 갈수록 여성의 절개, 의리, 부모에 대한 효도와 같은 전통적 윤리를 주제로 삼았다.
<빈상설>
<빈상설>(1907)은 개화의 물결에 밀려 몰락해 가는 북촌 대가 집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처첩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지만, 그 과정에서 선 · 악, 신 · 구의 갈등을 첨예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정숙한 본부인, 무능한 남편, 간악한 첩의 관계를 그려낸 전형적인 처첩 갈등의 삼각 구도이다. 이들을 둘러싼 하인들 역시 선인과 악인으로 나뉘어 서로 다툰다.
<자유종>
<자유종>(1910)은 토론 형식을 활용한다. 생일잔치에 초대 받아 모인 여러 부인들이 차례로 여성의 권익과 교육 제도, 국가의 독립과 사회 개혁, 국어 국문의 확대나 자녀 교육 등 당대 문제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면서 설명하고 토론하는 내용이다.
토론의 주제 자체가 상당히 실천의 구체성을 띠는데, 그것이 각 부인들의 주장을 통해 더욱 확고하게 제시된다는 특징이 있다. 가령 새로운 교육을 확대 실시하려면 반상과 지역의 차별을 없애고 모든 청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거나, 여성 교육을 위해 여성들에게 잡지와 교과서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거나 하는 것은 상당히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라 할 수 있다. 지식을 확대시키기 위해 국문을 정비하고 널리 교육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결말부에서는 부인들이 각자 자신들의 꿈을 실제의 꿈 이야기를 통해 진술한다. 여기서 부인들은 나라의 독립과 문명 개화, 평화 등을 꿈꾸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앞에서 토론한 내용의 실천적 구체성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진다.
<구의산>
<구의산>(1911)에서는 후처로 들어온 계모가 전실 소생의 아들을 구박하고 끝내는 살해하려는 음모까지 벌인다. 아들의 혼인날에 계모는 신부 집에 하인을 몰래 보내서 신랑이 된 의붓아들의 목을 잘라 오게 한다. 혼례를 치른 이튿날 신부는 신랑을 살해 누명을 쓰고, 남장을 하고 염탐하여 진실을 밝혀낸다. 결국 계모는 벌을 받는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의붓아들을 살해한 줄로 알았던 그 하인이, 알고 보니 다른 남자의 시체를 신방에 넣었고, 주인댁 아들을 업고 달아나 일본 큐슈까지 가서 15년 동안이나 보호하고 대학 공부까지 마치게 하는 등 충직한 의인이었다는 반전을 보여 준다.
<춘외춘>
<춘외춘>(1912)에서는 전실 소생의 딸을 학대하는 계모가 등장한다. 여학교에 다니는 딸이 중병에 걸리자 계모는 계교를 써 그녀를 색주가로 넘기려는 음모를 꾸민다. 딸은 온갖 역경을 겪고 일본인 교사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구마검>
<구마검>(1909)은 조선 사회에 만연하던 미신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미신 타파라는 주제 의식을 단순한 풍속 개량의 차원을 넘어서서 낡은 사회 구조와 인습에 대한 비판까지 확대하지만, 이를 소설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은 우연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한계로 지적된다. 재물을 탐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에 대한 응징이 근대적인 재판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대목은 눈여겨 볼 만하다.
<홍도화>
<홍도화>(1909)는 과부의 개가를 주장하면서도 고부 갈등이라는 낡은 모티프를 활용한 작품이다. 열세 살에 약질인 신랑에게 시집 간 여주인공은 신랑이 얼마 후 죽자 눈물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가 우연히 신문에서 개가를 제창한 논설을 읽고 감명 받아 새로 남편을 맞는다. 새 남편은 여주인공이 여학교에 다닐 때 은근히 관심을 가졌던 청년으로, 초혼이면서도 과부를 아내로 맞을 만큼 개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청년의 어머니는 미신에 빠져 있었고, 이 때문에 며느리와 갈등을 일으킨다. 여주인공은 시집에서 쫓겨나 친정에서 암담한 생활을 하고, 외숙의 도움으로 다시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이렇듯 이 작품에서 고부 갈등은 단순한 가정 내의 문제가 아니라 신 · 구 가치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모란병>
<모란병>(1909)은 구한말에 정부 제도가 개혁되면서 직책을 잃은 아버지가 속임수를 당하는 바람에 기생으로 팔린 여주인공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하고 다시 색주가로 넘겨지는데, 후반부에서 은인의 도움으로 학업의 길을 걷고, 결혼하여 미국 유학까지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여주인공이 기생으로 전락하는 과정, 그리고 다시 신여성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모두 우연과 기복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화의 혈>
<화의 혈>(1911)은 고전 소설 <춘향전>을 패러디하여 당대 현실 상황과 결합시킨 작품인데, 복수담을 덧붙여 흥미를 높인다. 전남 장성의 최호방이라는 사람이 퇴기 춘홍을 첩으로 들여 선초, 모란 두 딸을 낳는다. 선호는 재색 뛰어난 기생이 되어 이름을 널리 알린다.
그런데 탐관오리인 이시찰이 그녀를 탐내어 부친 최호방에게 누명을 씌워 잡아 가둔다. 그리고 선초를 불러 그녀에게서 몸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아버지를 풀어 준다. 그러나 이시찰은 일시적으로 선초를 농락하다가 배신하고, 선초는 이에 비관하여 자결한다. 이시찰 역시 공금을 횡령한 죄로 체포된다.
선초의 동생 모란은 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 이시찰의 정체를 폭로하고 그의 재기를 꺾어 버려 통쾌하게 복수한다.
최찬식, 신소설의 통속화
최찬식의 경향
최찬식(崔瓚植, 1881~1951)은 최영년의 아들로 태어난다. 최영년은 1900년대 중반에 친일 기관지인 «국민신보»의 주필을 지냈고 일진회의 총무원으로도 활동한 친일 한학자이다. 최찬식 역사 일본인 잡지 등에서 일하는데, 기자로 근무하며 단편과 가사 등을 발표하였다.
최찬식 신소설의 특징
이해조가 통속적인 가정 소설로 대중적인 기반을 확대하는 동안, 최찬식 역시 청춘남녀의 애정과 갈등,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회 윤리 문제를 다루면서 독자들의 흥미와 관심을 끌었다. 초기의 정치성과 계몽성이 훨씬 약화되는 반면, 주제 면에서는 봉건 사회의 가치관이라 할 수 있는 효, 우애, 여성의 정절 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그러한 이 시기 신소설은 고전 소설과 1900년대의 신소설, 그리고 새로 나오게 되는 신파 소설의 특징이 한 데 뒤엉킨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최찬식의 소설에서는 신교육에 대한 관심이나 새로운 결혼관 등이 나타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개성을 옹호하는 근대 지향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개인의 안위와 행복만을 추구하는 폐쇄적 욕망 구조를 띠고 있다는 한계를 가진다. 또 최찬식의 신소설에서는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 핵심으로 등장하는데, 그 과정이 ‘행복 - 고난 - 행복’의 패턴으로 유형화되어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신교육이 강조되거나 주체 의식이 내세워지기도 하지만, 이런 진보적 의식이 삶의 현실에 밀착되어 실천적으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흥미의 초점은 주인공이 우연히 위기를 모면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악덕한 인물이 서로 부딪는 장면들에만 있다. 지나치게 우여곡절을 강조하고 우연성에 의존하다 보니 사회에 대한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고 오직 개인적 욕망의 구현에만 집착하고 있어 작가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신소설은 최찬식에 이르러 신파극과 신파 소설을 앞에 둔 채 소멸하고 만다.
최찬식의 신소설
<추월색>
<추월색>(1912)은 최찬식의 대표작이자 가장 널리 애독된 신소설 중 하나이다. 조선, 일본, 중국, 영국 등의 광범위한 지역을 무대로 하며,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젊은 남녀의 애정 갈등과 이합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추월색>은 조선인인 동경 여자 유학생 정임이 우에노 공원에서 남학생의 구애를 거절하다가 칼을 맞고 쓰러지는 극적인 장면에서 시작된다. 정임은 본래 김승지의 외아들 영창과 어릴 때부터 부모에 의해 정혼한 사이로, 김승지 일가가 민란 때문에 행방불명되자 다른 혼처를 정하려는 부모로부터 도망쳐 일본 유학에 오른 여인이다. 그런데 칼에 맞은 정임을 부축해 구해 주었다가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공교롭게도 영국에서 공부하고 일본에 와 있던 영창이다. 영창은 곧 무죄로 석방되고, 두 사람은 신식 결혼식을 올린 후 만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신혼여행 중에 마적단에 체포되는 수난을 겪지만, 도리어 거기에서 영창의 부모를 만나 함께 귀국한다.
이 작품은 혼사 장애의 모티프를 확대 · 변형한 것으로,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부모가 어릴 때 맺어준 사람과 혼인한다는 낡은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여러 가지 사건과 우여곡절로 채워져 흥미를 더하고 있다. 또 어린 시절에 부모가 일방적으로 정해 준 결혼 상대자에게 자신의 운명을 거는 정임의 태도는, 오히려 구시대적인 윤리 의식을 대변하며 자기 운명에 안주하는 태도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작가 의식의 한계를 시사한다.
<안의 성>
<안의 성>(1916) 역시 청춘남녀의 애정 갈등을 주축으로 한다. 부모를 잃고 오빠와 함께 가난하게 살던 여주인공 박정애는 여학교에 다니며 법학교 학생인 김상현과 사귄다. 상현은 판서집 가문의 자제인데, 그의 어머니가 이웃에 사는 정봉자와 그를 혼인시키려 한다. 상현이 결국 정애와 결혼하자 봉자는 질투를 느낀 나머지 정애에게 다른 남자가 있는 듯이 모략을 꾸민다.
마침내 정애는 시집에서 쫓겨나고 상현은 실의에 빠져 구라파로 여행을 떠난다. 결국 상현은 귀국하여 정애와 재결합하고, 봉자도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된다.
신소설의 의의와 한계
신소설의 의의
신소설은 작품의 소재를 현실 세계에서 취하고, 언문일치의 한글로 산문체 문장을 구사하는 등 고전 소설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면을 갖추었다. 이런 점에서 신소설은 근대 신문학 운동의 한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일정한 의의가 인정된다.
언문일치에의 접근
신소설은 국문체를 서사적 문체로 정착시킨 대표적인 문학 양식이다. 국문을 씀으로써 일상적인 언어를 작품에 구현해 냈다 할 수 있다.
‘-ㄴ다’ 문체의 등장
신소설에서는 ‘-더라’ 체의 종결형과 함께 ‘-ㄴ다’ 체가 새롭게 등장한다. 이 새로운 문장 유형은 보통 장면을 객관적으로 제시하거나, 인물의 행동이나 변화의 직접적인 인상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ㄴ다’ 체의 현재법 종결형 문장은 화자와 서술 대상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준다. 이 거리로 인해 묘사와 서술에 객관성, 실재성이 구현될 수 있었다. 이는 신소설이 고전 소설과 같은 설화성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말해 주는 주요한 특징이다.
한편 ‘-ㄴ다’ 체의 종결형 어미는 현재형이기 때문에 서사적 공간을 감당하기 어려워 시제의 불안정을 드러낸다. 이후 이광수와 김동인을 거치면서 소설의 문체는 ‘-았(었)다’라는 서사적 과거 시제의 종결법으로 고정되었다.
직접 화법의 묘사
신소설뿐만 아니라 개화 계몽기의 서사 양식은 인물의 대화를 모두 직접 화법으로 처리한다.
고전 소설에서는 지문과 대사가 섞여서 간접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인물들의 대화가 화자의 어조에 묻혀 버렸다. 그래서 대화를 통해 인물의 성격을 형상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신소설은 대사를 지문과 구분하여 직접 제시함으로써 인물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그대로 살려 냈다.
새로운 근대적 갈래
신소설은 개화 계몽 시대의 허구적 장편 서사 양식을 대표한다. 조선 시대 영웅 소설이나 판소리계 소설과 연관이 있어 고전 소설의 서사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할 수 있지만, 내용과 형식면에서 고전 소설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장르적 성격을 가진다.
특히 신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삶이 신이나 운명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개인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서사 양식의 주제를 구현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신소설의 한계
여전히 권선징악의 이분법적 주제에 머물렀다는 점, 사건의 결말이나 전개를 인위적으로 설정하였다는 점 등은 아직 신소설이 고전 소설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또 신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감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개인의 의미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가족이라는 사회적 제도의 울타리에 머무는 것이다. 서사의 갈등이 대개 새것과 낡은 것, 또는 선과 악의 대립 구조를 통해 과장적으로만 제시된다는 점 역시 중요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결국 신소설은 본래 가졌던 개화에 대한 전망마저 상실하고, 통속성과 소재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어 소설사적 의미를 지속하지 못한 채 쇠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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