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
판소리, 무대에 오르다 - 판소리꾼의 격상
판소리는 1800년 무렵부터 열두 마당으로 늘어나 주로 호남 지방에 뿌리를 내리면서 인기가 치솟았다. 동편제의 확립자로 알려진 송흥록에 와서는 연창자와 청중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양반층에게도 호응을 얻어 관객층이 두터워진다. 송흥록은 철종으로부터 정3품 ‘통정대부’라는 벼슬까지 얻었다. 판소리꾼의 위상이 올라간 것이다.
이런 경향은 1800년대 중반인 대원군 시대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대원군은 서편제를 창안한 박유전, 동편제를 계승한 박만순, 고창 아전 출신 신재효에게 무관직을 주어 후대한다. 양반 출신의 광대인 ‘비가비’까지 등장한 것을 보면 당시 판소리의 열풍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광대들은 피나는 수련을 거쳐 상당한 경지에 오르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이전과 달리 광대가 아니라 어엿한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특히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재능 있는 소리꾼들을 찾아내서 수천 명의 제자를 길렀다. 특히 그는 이제껏 남성의 전유물이던 판소리 판에 진채선, 허금과 같은 여성 명창을 등장시켜 판소리의 영역을 한층 더 넓히기도 했다. 또 판소리를 새로 짓기도 하고, 이미 있던 판소리를 소설로 개작하기도 하였다.
이런 판소리꾼들 중에는 좀 더 번듯한 예술가로 대우 받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판소리꾼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만든 단체가 협률사(協律司)이다. 이 협률사의 이름은 청나라 창극인 ‘협률 창희’에서 따온 것이다.
협률사 무대에 오른 판소리
판소리는 1900년 즈음부터 무대에 올랐는데, 시설이나 단원들의 구성 면에서 체계적이고 정식으로 무대에 오른 것은 1902년, 봉상시 안에 설치된 협률사(協律社)에서가 처음이었다.
협률사는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만든 벽돌 식 극장이다. 170여 명이 공연을 준비하고 1천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런데 상황이 악화되어 예정되어 있던 공연이 무산되자, 나라에서는 협률사를 일반 대중에게 개방하면서 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소춘 대유희’를 연다. 오래 전부터 계승되어 오던 구비 문학이 정식으로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협률사의 위기
협률사의 위기
협률사가 문을 연 이듬해인 1903년의 어느 날, 갑자기 공연이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관객이 줄어 경영난이 지속되자 협률사는 문을 열고 닫기를 되풀이하다가 김용제에게 넘겨진다. 그런데 사실상 김용제 뒤에서 협률사를 경영하던 사람은 어떤 일본인이었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협률사에 대한 세간의 여론이 나빠져 눈총을 받게 된다. 결국 고종은 협률사를 폐지하라는 명을 내린다.
원각사와 이인직 - 창극의 등장
협률사가 폐지되자 서민들은 달리 즐길 만한 것이 없어졌다. 곧 다시 문을 열라는 여론이 일었고, 협률사는 1908년 다시 문을 열어 호황을 누린다. 재개관한 협률사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활동사진을 상영하거나 애국지사들의 강연을 유치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 경시청으로부터 다시 폐쇄 압력을 받아 또다시 위기를 겪는다. 협률사의 운영진들은 타개책으로 이인직을 비롯한 친일 성향의 인사들을 운영에 끌어 들이고 이름도 원각사(圓覺社)로 바꾸었다.
창극의 등장
창극의 등장 배경
1900년대 초엽에는 판소리가 소수 양반층의 전유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이에 판소리를 대신해 서민층을 상대로 볼거리를 공연해 돈을 벌어 보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창극(唱劇)이다. 창극을 주도한 이는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이다.
이인직은 신연극을 하겠다며 나서고 자신이 쓴 신소설 <은세계>를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전부터 있었던 <최병도 타령>에 친일 색채만 덧칠해 놓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관객들을 실망시켰다. 웬만큼 비판적 안목까지 갖춘 서민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인직은 고심 끝에 판소리 명창들과 합의하여 판소리의 극적 요소에 신연극을 가미한 창극을 고안해낸다.
판소리와의 차이점
창극은 기존의 판소리에 극적인 성격을 강화하여 사실극의 요소를 덧보태고, 한 사람이 아닌 여러 명의 창자가 인물을 나누어 맡는 분창(分唱)의 형식을 취한다. 때문에 등장인물이 많고 대사와 연기, 무대 장치가 판소리보다 더 사실적이다. 판소리가 ‘들을 거리’ 위주라면, 창극은 ‘보고 들을’ 거리를 갖춘 종합적인 무대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창극은 판소리에 비해 작품 속 인물들의 성격을 더 잘 살렸고 볼거리도 풍성하게 갖추었고 곧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서양 극과의 차이점
같은 극음악 양식인 서양의 오페라(Opera)나 오페레타(Operetta ; 작은 규모의 희극적 오페라)는 대본에 의한 창작 음악에 바탕을 둔다. 이에 비해 창극은 자연 발생적인 소리와 이야기([설화])로 이루어져 훨씬 민속적이고 민족적인 색깔이 짙다.
창극의 쇠퇴
1909년에 이르러 일제는 창극의 각본을 사전에 검열하고 일본 연극을 모방한 창극을 무대에 올리게 한다. 우리 연극판의 창조적 역량을 말살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2월, 원각사는 친일 단체인 ‘국민회’ 본부에 흡수되고 만다. 원각사가 해체되자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광무대에 지방 유랑 극단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로써 뒤이어 등장한 신파극과 영화에 밀리자 창극은 급격하게 쇠퇴하고, 근근이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해방 이후 여성 국극단으로 부흥되는가 싶더니 1960년대에 들어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개화기 가사와 창가
가사의 분장
가사는 본래 개방된 성격이 강한 갈래이기 때문에 조선 후기부터 내용과 형식이 다양하게 변화하는데, 개화기의 가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의 작품을 몇 개의 단락으로 구획하는 분장 형태를 취한다. 전통적인 율격을 고수하면서도,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내용을 몇 개로 나눈 것이다.
또 분장된 각 장의 말미에서는 동일한 시구를 후렴처럼 반복하는데, 이를 통해 분장 의식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주제를 강조하는 효과를 얻는다.
개화기 가사 작품
개화기 가사는 내용상 의병 가사, 동학 가사, 개화 가사로 구분된다.
동학 가사
동학 가사는 최제우가 득도했다는 1860년부터 그가 사형 당하기 전인 1863년 사이에 지어진 9편을 말한다. <용담가>, <안심가>, <교훈가>, <도수가>, <몽중노소문답가>, <검결>, <권학가>, <흥비가>, <도덕가>가 있다.
동학 가사는 동학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종교적 목적을 띤다. 그래서 순 국문으로 창작되었다. 내용은 최제우의 득도 과정을 노래하거나 동학 이념을 강조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무능한 집권 세력에 대한 비판도 보여 준다. 그러면서 사회 변혁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인본주의와 평등사상을 내세웠다.
동학 가사는 형식상 율문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율문은 규칙적으로 음보를 반복하여 율격을 형성함으로써 구송하기 쉽게 만드는 형식인데, 이를 통해 이념을 더욱 널리 퍼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또 동학 가사는 길이가 늘어날 수 있는데, 이 형식의 개방성은 곧 내용의 개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의병 가사
의병 가사는 의병 활동의 내력을 담은 가사이다. 따라서 서정성보다는 의병들의 의지를 서사적으로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대표적인 의병 가사로는 의병장 신태식이 지은 <창의가>를 들 수 있다. <창의가>는 조선 왕조의 위업을 기리면서 주자학적 질서를 노래하는데, 내용 속에 민중들이 지니고 있던 항일 사상과 구국 정신을 잘 드러내어 보여 준다. 외견상 전통적인 가사 형식을 그대로 이어 받아 동학 가사와 마찬가지로 구송을 용이하게 하였고, 길이에 제한을 두지 않아 개방적 형식을 보여 준다.
개화 가사
개화 가사는 개화기에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수많은 가사 형식을 통칭하는 말로, 개화 계몽 의식을 노래한 것이 많다고 해서 개화 가사라고 부른다. 크게 «독립신문»에 발표된 것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독립신문»의 개화 가사 : 개화 가사가 장르적 특성을 인정받은 것은 «독립신문»에 다양한 내용의 애국가 또는 독립가가 독자 투고 형식으로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필균의 <대조선국 자주독립 애국하는 노래>, 이용우의 <애국가>, 이중원의 <동심가>, 문경호의 <자주독립가> 등 27편 정도가 있다. 전통적인 4 · 4조의 율문 형식을 따르지만, 작품 전체 내용을 몇 개의 연으로 구분하고 각 연마다 말미에 동일한 시구를 후렴처럼 붙여 형태적 변화를 보여 준다.
«독립신문»의 개화 가사는 투고 형식이니만큼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이 쓴 것들이지만, 내용상 두 가지의 뚜렷한 흐름을 따른다. 첫째는 자주 독립과 문명개화라는 흐름을 따른다. 이는 «독립신문»의 편집진이 가지고 있던 사회의식과도 어느 정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인데, 물론 이들 개화 가사들이 실천의 구체성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는 국민의 일심 단결과 협동이다. 이러한 주제는 외세의 위협에 대응하여 민족의 주체적인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의 개화 가사 - 사회등 가사 :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부터 1909년 사이에 ‘사회등’이라는 고정란에 개화 가사를 싣고 있어서 이들을 사회등 가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독립신문»이 독자 투고 형식으로 가사를 실은 것과 달리, «대한매일신보»는 신문 관계자들이 직접 쓴 가사를 실었다. 각각의 작품들은 <일진회야>, <권고>, <귀족>, <현내각> 등과 같이 내용을 직접 드러내는 제목이 붙어 있다.
사회등 가사는 «독립신문»의 개화 가사와 달리 구체적인 현실 정치와 사회 문제를 소재로 한다. 대체로 국권 회복의 작품, 그리고 친일적인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의 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형태적으로는 4 · 4조를 유지하고, 14구를 1연으로 하여 대개 10연으로 고정되어 있다. 형식면에서 보다 고정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독립신문»의 개화 가사와 마찬가지로 각 연의 말미에 후렴 형태의 반복구가 쓰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창가의 발생
1910년을 전후하여 개화 가사는 4 · 4조의 율격에서 벗어나 새로운 율격을 보여주는데, 이를 창가(唱歌)라고 한다.
창가는 그 이름처럼 기독교와 관련이 깊다. 1880년대에 들어 기독교계 선교사들은 숭덕 학당, 배재 학당, 이화 학당과 같은 신식 교육 기관을 세운다. 이들 학교에서는 전통 민요나 창을 부르기도 했지만, 특히 외국인 선교사의 풍금 반주에 맞추어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이나 교인들이 아니더라도 찬송가 가락을 듣게 되고, 이 곡조에 당대 사람들의 정서에 맞는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이 유행한다. 이것이 바로 창가이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학교들마다 학생들에게 부르게 할 교가와 애국가가 필요해졌고, 이에 따라 애국가의 내용을 띤 창가도 많이 나왔다.(학부에서는 이 애국가를 통일하기 위해 군악대가 곡조를 다듬어 만들게 하였다.)
창가의 확산과 전개
창가의 확대
창가가 찬송가의 그늘에서 벗어나 제 모양을 갖춘 것은 1896년 «독립신문»에 실린 이용우의 <애국가>부터이다. 뒤이어 이중원의 <동심가>, 고종 황제의 탄신을 기리는 <황제 탄신 경축가>,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건립하면서 만든 <애국가> 등이 나와 점차 확산되었다.
이후 독립 협회, 만민 공동회, 신민회 등 여러 단체나 조직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자, 이들 각 모임의 이념을 담은 창가가 쏟아져 나온다. 신교육을 권장하는 <권학가>, 운동 경기를 통해 체력과 투지를 기르자는 내용의 <운동가>와 <응원가>가 널리 불렸고,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특히 진취적 기상과 애국적 투쟁을 독려하는 <학도가>가 유행하였다.
창가의 성격
내용의 특징
개화 초기의 창가에는 기독교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임금에게 충성을 보이려는 인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창가의 가사에는 기독교와 애국심이라는 두 가지 내용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또 창가는 자생적으로 자란 갈래는 아니지만, 개화기 민중의 생활 양식과 정서를 많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담았던 내용들 역시 점차 민족의식의 고취나 항일 운동의 이념을 내세우는 방향으로 달라져 민중 문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향유 방식
창가는 곡조가 붙어 노래로도 불렸지만,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에 그 가사가 활자로 실리기도 하였다. 투고하는 이들은 대개 학생이나 일반 지식인, 그리고 언론인이었는데 가명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창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국민 문학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창가는 국문학사에 등장하는 그 어느 문학 양식보다도 폭넓은 계층을 수용한 장르라 할 수 있다.
창가의 한계
형식상의 한계
창가는 그 형식의 측면에서 고전 기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근대 시문학으로 보기에는 미흡하다. 가령 초기 창가는 고대 가사의 3 · 4조, 4 · 4조의 율격을 그대로 따랐다. 차츰 7 · 5조나 8 · 5조 등 변형된 형식도 나오지만, 여전히 전통 시가의 형식을 크게 뛰어넘지는 못했다.
내용상의 한계
창가는 그 내용 면에서 봉건 이념을 마저 떨쳐내지 못한 채 대부분의 작품이 애국 사상이나 계몽사상을 담는 차원에만 머물렀다는 한계를 가진다.
창작 주체의 한계
근대 문학 양식은 그 창작 주체가 분명하여야 하지만, 창가는 특정 시인에 의해 예술로 창작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안창호, 김인식 등과 같이 전문적인 제작자들이 나오기는 하였지만 이들이 뚜렷한 창작 의식을 가지고 폭넓게 창가를 지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창가의 문학사적 의의
창가는 1908년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나오기까지 어설프나마 근대 시문학의 디딤돌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고전 시가에서 신체시로 넘어오던 시기를 담당한 과도기적 문학 형태로 평가된다. 특히 창가 전개의 마지막 단계에 서정적인 창가나 수백 행에 이르는 대형 창가가 나타난 것은 훗날 나오는 근대적 서정시 양식과 장편 서사시의 전초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창가는 국민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실제로 가장 폭넓게 수용된 문학 양식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창가는 근대식 교육 기관의 교과목으로 채택되고 일반 대중들에게 향유되면서 민족 교육과 정서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창가의 쇠퇴
1910년을 전후로 창가는 이완용이나 일진회, «대한신문»과 같은 친일 세력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기 시작한다. <권고현내각>, <일진회야> 등의 작품이 그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내용의 창가를 비밀리에 인쇄한 창가집을 일부러 퍼뜨리기도 하였다. 때문에 일제는 이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고, 일본을 찬양하거나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내용을 담은 창가집을 학교나 단체에 보급한다.
이후 일본의 식민 지배가 강화되자 항일 창가는 해외 독립 운동에 쓰였고,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일제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개인의 취향과 정서를 담은 창가가 많이 나돌았다. 이렇게 창가는 그 일부가 가요 형식의 노래로 이어지고, 일부는 신체시 같은 새로운 근대 문학 양식에 섞여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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