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문학테마 URL 복사

현대문학 테마 2. 최남선과 신체시

2014. 2. 12. by 솜글

최남선의 생애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서울에서 중인 계급에 속하는 집안에서 태어난다. 아버지 최헌규는 한의학을 익힌 개화인으로, 관청에서 일하면서 한약 무역을 하여 큰돈을 번 인물이었다. 최남선은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며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한다.

보통학교에 다니지 않고 자습으로 글을 익히다가 경성 학당에서 일어를 공부한 후 1904(15)년에는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간다. 그러나 석 달만에 돌아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 다니다가 그마저 그만둔다. 이후로는 어떤 정규 교육도 받지 않고 모든 지식을 독학으로 습득하였다. 이후 최남선은 여러 가지 문예지를 내는 등 다양한 문학 활동을 하고, 2 · 8 독립 선언문 작성에 가담한 혐의로 수감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최남선이 1928(39), 돌연 일제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고 총독부의 참의직을 수락하는 등 친일 노선에 들어간다. 그 동기와 이유가 어쨌든 이 일로 최남선은 세간의 수군거림을 들어야 했다. 때문에 해방 후 1949(60)년 반민족 행위자로 검거되어 체포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당뇨와 중풍으로 투명생활을 하던 중 서울 종로구의 자택에서 68세로 숨을 거둔다.

사진 출처 :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http://hwiki.eumstory.co.kr/index.php/%EC%B5%9C%EB%82%A8%EC%84%A0)

문예지의 발간

최남선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척박하던 문단을 일구는 데 큰 몫을 해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끊임없이 문예지(또는 잡지)를 발간했던 그 열정이 기반하고 있다.

«소년»

«소년»의 창간

최남선은 1906(17), 와세다 대학을 그만둔 후 도쿄 인쇄소에서 인쇄기와 주조기 자모를 사서 인본인 인쇄공 두 명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을지로의 2층 집을 세내어 신문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어 공장과 편집실을 차리고는, 2년 후인 1908(19) 11월에 «소년» 창간호를 낸다. 한국 근대 잡지의 효시로 꼽히는 잡지이다.

«소년»은 발간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고, 여러 학교에서 교과서 대용으로 쓸 만큼 선풍을 일으켰다. 대부분은 최남선 자신의 글들로 지면을 채웠고, 편집과 실무, 심지어 수금까지도 자신이 도맡아했다. 그는 당시 죽음을 맞은 톨스토이(N. Tolstoi)의 작품 세계를 특집으로 다루는 재간을 보이는 한편, 출판사 신문관을 통해 교양 서적, 지리 역사서, 창가집, 번역물 등 다양한 책을 선보이며 개화기의 출판 문화를 선도한다.

문예 공모와 우리말에의 관심

«소년»이 기억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신시 대현상 모집이라는 문예 작품 공모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최남선은 «소년»을 통해 문학 작품을 공모하면서, 한글로 쓰되 뜻이 통하지 않을 때만 한자를 덧붙이라는 조건을 내세운다. 또 최남선은 책거죽’(; 표지), ‘그림 본’(; 삽화), ‘나무 새김’(; 목판) 등과 같은 새 말을 만들어 쓸 정도로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이것은 국주 한종(國主漢從)’, ‘언주 문종(言主文從)’과 같은 새 문장 건립 운동의 이상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청춘»

한일 합병 이후인 1911(22)«소년»이 폐간되자 곧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를 창간하지만, 이들 역시 총독부에 의해 폐간된다. 최남선은 다시 «새별»을 창간했다가 이것을 이광수에게 맡긴 채 금강산 유람을 떠나고, 돌아와서 새로 창간한 것이 1914(25) 발간한 «청춘»이다.

«청춘»은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서양화가 고희동이 표지 그림을 그렸고, 이광수, 현상윤, 홍명희, 이상협 등이 집필을 맡았다. 특히 «청춘»은 고전과 신문학에 관계없이 여러 분야에 걸쳐 문예 작품을 현상 모집하여 이른바 문단을 일구는 데 큰 몫을 하였다.

«청춘» 역시 큰 인기를 누렸지만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고 정간과 속간을 거쳤다가 1918년 폐간된다.

<소년>(왼쪽)과 <청춘>(오른쪽) / 출처 : 네이버블로그(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ookgram&logNo=120105139321)

«동명»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난 후인 1922(33)에는 신문관을 해산하고 동명사를 창립하는데, 여기서 주간 종합지인 «동명»을 펴냈다. 2천여 부씩 나가던 이전의 «소년», «청춘»과 달리 «동명»2만 부가 넘게 팔리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 역시 일제의 압박과 재정난에 부딪혀 이듬해 폐간하였다.

최남선의 작품 활동

창가

창가는 대개 최남선이 시 형식을 실험하면서 개인적으로 창작한 것들이다. 최남선의 창가는 개화 가사와 달리 정치적 주장을 배제하고, 새로운 문명의 세계를 동명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계몽하는 데 목표를 둔다.

<경부철도가>

<경부철도가>(1908)(19)는 근대적 문물의 도입을 상징하는 경부 철도의 개통을 축하하고자 지은 것이다. 남대문 역부터 종착역인 부산역에 이르기까지 철도로 이어지는 역들을 차례로 열거하고 그 주변의 풍물을 소개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그러면서 국토에 대한 사랑, 인정과 풍속을 노래하고 철도를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을 찬양하였다.

이 작품은 일본의 철도 창가를 모방한 것이지만, 조선 후기 기행 가사가 보여 주었던 서사적 · 경물(景物)적 특성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일주가>

<세계일주가>(1914)(25)는 세계 각국의 인문 지리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자세한 주석까지 제공한다는 점에서 <경부철도가>보다 더 교술적인 특징을 지닌다.

개화 시조
개화 시조란 개화기에 신문과 잡지에 제목을 달고 수록된 시조들을 말한다. 개화 시조는 대부분 작가가 밝혀지지 않았고, 작가가 표시된 경우는 거의가 익명을 사용하였다.

최남선의 연작 시조 실험

개화 시조가 형식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최남선에 의해 연작화 되면서부터이다.

최남선은 전통적 시조가 지닌 3장의 정형성을 지키는 대신, 단형 시조보다는 연작 형태의 연시조를 많이 창작하였다. 단형 평시조가 시적 주제를 압축하고 긴장미를 획득하는 데 중점을 둔 양식이라면, 최남선의 연작 시조 실험은 시조에 담긴 시적 의미를 확대하고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는 데 중점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복적인 율격을 실현하는 데도 연시조의 형태가 더 용이했을 것이다.

한편 최남선은 시조의 명칭을 국풍(國風)’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시조가 한국 고유의 노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최남선이 신시 형식과 시조를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요소이다.

연작 시조의 한계

개화 시조의 연작 실험은 전대 시조의 형식에서 느낄 수 있는 전아한 기품과 균제미를 오히려 이완시킬 우려를 내포한다. 실제로도 최남선을 비롯한 개화기의 연작 시조들은 작품 전체의 균형을 잡고 시적 긴장을 이끌어갈 수 있는 요건을 결여하고 있다.

신체시

신체시의 등장 배경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새로운 시 형태를 모색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가 본격적으로 나타나 개화 가사나 개화 시조가 보여 주던 고정적 형식까지도 파괴되었다. 그러한 작은 변화들을 유기적인 형태로 이끌어간 결과가 바로 신시, 또는 신체시라고 부르는 새로운 시 형태이다.

신체시의 형태적 특징

신체시는 최남선 개인의 실험에 의해 시도된 새로운 시 형태적이다. 신체시는 가사보다 형식적으로 더 완결성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 신체시는 개화 가사의 형식적 개방성에 개화 시조의 형식적 완결성을 결합한 새로운 절충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개화 가사나 창가와 달리 7 · 5 내지 3 · 4 · 5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실제 작품들을 보면 신체시들은 고정적인 형식을 지니지 않고 작품마다 개별적인 형태를 보여 주는데, 이것은 결국 신체시가 자유시형을 지향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신체시를 근대시 성립의 첫 단계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체시의 장르적 한계

어떤 문학 형태가 장르적인 위상을 부여받으려면 첫째, 다양한 경향의 작품이 존재해야 하고 둘째, 그 형태를 공유하는 창조적 주체가 폭넓게 존재해야 하며 셋째, 그 형태를 향유하는 사회적 기반이 형성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신체시라는 명칭은 특정한 문학적 양식이나 경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형식의 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신체시는 문학 전반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한두 사람에 의해 실험적으로 시도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작품 수 역시 몇 편 되지 않고, 창작 주체와 향유의 폭이 너무도 협소하다. 따라서 신체시는 일시적인 문단 현상일 뿐 하나의 갈래를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새로운 형태를 지향한다고는 하지만 매 연이 동일한 율격을 유지하고 후렴구를 지님으로써 정형시의 속성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 역시 근대시로 보기 어려운 근거가 된다.

근대시의 확립 과정
개화 가사 4 · 4조 4음보(전통적 율격) 계몽적
창가 6 · 5조, 7 · 5조 등(다양한 정형적 율격) 계몽적
신체시 비교적 자유롭지만 정형성을 띤 율격 계몽적
자유시 자유로운 율격 서정적
신체시는 대부분 최남선과 이광수, 두 사람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 최남선 : <해에게서 소년에게>, <꽃 두고>, <태백산가>, <대한 소년행>
- 이광수 : <우리 영웅>, <새 아이>

신체시 실험

형식의 실험 : 개화기의 시들은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규칙적인 율격과 고정적인 형태를 파괴하여 시적 형식에서 자유로움과 개방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꽃 두고> 등에도 파격적인 율조와 산문화된 자유로운 형식, 일정한 행과 연의 구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19)는 전체가 4연이고 각 연이 7행으로 이루어지는 형태적 균형을 취한다. 이런 연의 구분은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가사의 분장 형태와 유사하지만, 고정된 율격의 규칙성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시적 형식을 획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꽃 두고>(1909)(20)는 더욱 형태적으로 개방적이다. 시적 진술에서 서두와 결말을 의도적으로 일치시켜 놓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작품은 자유시의 형태에 근접하고 있다.

시적 언어의 실험 : 개화 가사나 개화 시조는 여전히 한문 투의 관념적인 한자어를 많이 동원하지만, 최남선의 신체시에서는 일상어를 눈에 띄게 활용한다. 의성어와 의태어를 대담하게 구사하여 대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구어체를 활용함으로써 경험적 구체성을 실감나게 표출한다. 이러한 언어적 변화는 국문의 시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신체시의 한계

근대시는 개인적인 정감을 심미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즉 서정성이라는 중요한 조건을 가진다. 따라서 근대시가 성립되려면 시 외의 모든 목적의식을 배제하고 철저한 시적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는 시 창작의 의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최남선은 새로운 시 형식을 실험하면서도 여전히 시를 통한 계몽 의식의 구현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근대시로 보기 어렵다. 시적 대상을 인식하고 형상화하는 방법 면에서 서정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서적인 측면보다는 이념적 주제에 집착하는 것은 최남선의 신체시뿐만 아니라 개화기 시가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육전 소설

최남선은 조선광문회를 만들어 «동국통감»«열하일기»를 내는 등 우리 전통 문학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 중 하나가 육전 소설(六錢小設)의 발간이다.

육전 소설이란 최남선이 신문관에서 발행한 기획 시리즈의 명칭으로, 보통 명사가 아니라 고유 명사이다. 1909(20) 야심차게 내놓았던 십전 총서가 실패하자 다시 내세운 것인데, “옛 책 가운데 가히 전할 만한 것을 가리어 사연과 글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며 옳지 못한 것을 마땅토록 고치겠다는, 일종의 기획의 말씀까지 턱 내걸고 출발하였다.

최남선은 육전 소설로 <서유기>, <춘향전>, <장화홍련전>, <전우치전> 같은 작품을 냈는데, 고전 소설을 한글로 개작한 것들이다. 이 역시 같은 최남선의 우리말과 한글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음을 잘 보여 준다.

불함 문화론

불함 문화론의 내용

최남선은 우리 국토에 대해 신앙과도 같은 애정을 보였는데, 이것이 집약된 예가 불함 문화론(不咸文化論)이다. 불함 문화론은 1926(37)부터 <단군론>, <아시조선>, <단군급기연구> 등의 논문을 통해 제창된다.

불함이란 빛을 뜻하는 고대어로, ‘불함 문화란 곧 빛 문화를 말한다. 이 이론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본, 중국 북부, 몽골, 중앙아시아를 포괄하는 넓은 지역에 태양신을 숭배하는 거대한 문화권이 존재했다는 단군 중심 이론이다.

이 논의에 의하면 동방 문화의 핵심이요 동방 의식의 최고 연원은 백두산이라고 한다. 고대 아시아의 문화 이동 경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루어졌으니, 한반도는 그 문화의 마지막 집결지이고, 따라서 한반도는 자연스럽게 동방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불함 문화론의 골자이다.

불함 문화론에 대한 평가

부정적인 평가 : 불함 문화론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하나는 논리를 지나치게 비약하여 관념적인 독단론에 지나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단순히 문화 이동 경로만을 가지고 한반도가 동북아시아 문화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결국 불함 문화론이 식민 사학의 골격인 일선 동조론이나, 조선과 만주를 하나로 묶는 만선 사관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긍정적인 평가 : 일부에서는 불함 문화론을 민족적 자긍심을 높인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여하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반도와 우리 민족의 긍지를 먼 과거에서 찾아보려는 애국심에 바탕을 둔 문화론임에는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옷, 패션 트렌드, 운동화, 쇼핑, 신상품, 신발, 자켓, 코트, 탈모, 모발이식, 미용, 성형수술, 구두, 부츠, 샌들, 여름 신발, 바지, 롱팬츠, 팬츠, 양말, 모자, 캡, 나이키, 아디다스, ABC 마트, 롱부츠, 첼시부츠, 티셔츠, 원피스, 정장, 수트, 가방, 귀걸이, 목걸이, 반지, 마스크, 시계, 팔찌, 패션, 백화점, 의류, 옷, 머리띠, 롱패딩, 패딩, 점퍼, 야상, 재킷, 화장품, 크림, 스킨, 아이섀도우, 아이브로우, 올리브영, 롯데닷컴, 하프클럽, 니트, 블라우스, 스커트, 치마, 주름바지, 통바지, 크롭티, 와이셔츠, 영어, 토익, 학원, 반찬, 다이어트, 도시락, 닭가슴살, 샐러드, 감자, 계란, 집밥, 요리, 고기, 소고기, 닭다리, 치킨, 아침밥, 삼겹살, 곱창, 밀키트, 선물세트, 저녁 메뉴, 볶음밥, 탕수육, 광어회, 연어회, 해산물, 냉동식품, 참치회, 잡곡밥, 아이스크림, 배스킨라빈스, 배달의 민족, 배달음식, 떡볶이, 튀김, 오징어튀김, 순대, 오뎅, 토마토, 딸기, 사과, 귤, 오렌지, 콤부차, 홍차, 레몬티, 커피, 카누, 네스프레소, 캡슐커피, 식품 직구, 영양제, 비타민, 아이허브, 신용카드, 소액대출, 대출, 보험, 보험상담, 저축은행, 여성대출, 학자금대출, 대출계산기, 대출이자, 주부대출, 임플란트, 치아보험, 자동차 렌트, 제주도 렌트, 렌터카, 자동차, 승용차, 중고차, 자동차보험, 자동차사고, 청약주택, 청약통장, 정기예금, 적금, 주택정약, 아파트, 내집마련, 빌라, 30평대, 부동산, 소형아파트, 치아, 어금니, 송곳니, 법률상담, 모기지론, 대학 편입, 학사편입, 대학교, 웹호스팅, 클라우드, 보안솔루션, 홈페이지, 앱제작, 동영상제작, 영상편집, 기부, donate,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세계구호,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전문자격증, 자격증, 학원, 사이버대학교, 학사, 학위취득, 학점은행제, 토익, 영어, 외국어, 통역, 번역, 동시통역
[면책공고] 솜글 블로그 자료 이용 안내

이 글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