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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리엔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의 설명자료를 예전에 PDF로 올렸는데, 어느새 티스토리가 다량의 사진 업로드를 허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온라인에서 바로 볼 수 있게 업로드한다. PDF 파일로 보고 싶다면 아래 클릭.
시카고 대학교와 오리엔탈 박물관 한국어 설명파일(PDF) 바로가기
각 지역별로(=전시관 이름별로) 해당 전시 유물들을 사진과 함께 넣었다. 이쪽은 대개 중동 지역이고 지금은 가 보기 힘든 곳들이다. 갔다가 총 맞으면 안 되잖아요.
지명 표기가 종종 애매한 면이 있는데, 전시관 이름을 기준으로 했고(아나톨리아, 페르시아 등) 현재 다른 국가가 들어서 있는 지명은 괄호 안에 국가 명을 넣었다. 가령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는 지금의 이라크 지역이고, 아나톨리아는 지금의 터키 지역이라고 써 놨다.
시카고 오리엔탈 뮤지엄Oriental Institute Museum
시카고 대학교 고고학 연구소(Oriental Institute)의 박물관으로 영화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모티프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인류 문명의 발원지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 지역), 이스라엘, 시리아,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지난 100년 간 수많은 현장답사와 발굴을 통해 얻은 결과물을 전시하고 있어 작지만 매우 훌륭한 박물관으로 꼽힌다. 함무라비 법전 조형물, 므깃도의 상아 예술품, 사해 문서 조각, 투탕카멘 거대 석상과 미라, 금속 공예품 등 수없이 많은 고대 근동 지역의 유물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운영] 화~일 10:00-17:00 / 일요일 오후 2시 무료영화 상영
[입장료] 무료
제임스 헨리 브레스티드 James Henry Breasted, 1865-1935
오리엔탈 박물관 갤러리 입구에 들어서면 20세기 미국 최고의 역사학자이자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모델이기도 한 브레스티드의 두상을 만날 수 있다. 페르시아, 이집트 등의 문명을 발굴하고 연구해 학술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긴 고고학자로 꼽힌다.
고대 오리엔트사, 특히 이집트 학에 뛰어났으며 시카고 대학교에서 이집트학을 강의하고 이집트와 수단에서 조사단을 직접 지휘했다. 1919년 록펠러 재단의 원조를 얻어 시카고 대학교에 오리엔트 연구소를 설립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는 용어의 창시자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땅을 만드는 데 학문적 뒷받침을 하기도 했다.
시카고 오리엔탈 뮤지엄 전시품
지역별로 정리했다.
아나톨리아 Anatolia(지금의 터키 지역)
아나톨리아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돌출한 대반도로 지금의 터키 국토 중 아시아 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아시아 대륙의 남부에서 발칸 반도에 이르는 광활한 산악성 지대인 아나톨리아 반도를 고대에는 ‘소(小)아시아’라고 했고, 반도 형태이기 때문에 소아시아 반도라고도 했다. 아나톨리아는 본래 ‘히타이트의 땅’이라고 불리던 곳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최초로 철기를 쓰고, 쇠로 만든 칼과 전차를 쓰던 히타이트 제국이 이 땅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비잔틴 사람들이 처음 지리 용어로 사용한 ‘아나톨리아’는 터키어로는 ‘아나돌루’라고 하는데,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톨레’(anatole)이며 ‘동쪽’ 또는 ‘해 뜨는 곳’이란 뜻이다. 로마 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와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 두 황제 시대에 제국의 행정제도가 개편되면서 제국을 형성하는 4개 주(州) 가운데 중동, 터키, 이집트, 리비아 지역을 망라하는 커다란 지역의 명칭이 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 실크로드의 3대 간선, 특히 오아시스 로는 이곳을 경유해 유럽(로마)에 이른다. 그래서 예로부터 아나톨리아는 동서 교류의 중계지로서 큰 몫을 담당해왔다.
여과기가 있는 물병 Pitcher with built-in strainer 아시리아 왕국 시대, 기원전 1900-1750년
공동묘지의 영안실에서 발굴된 우아한 물병이다. 광택 있는 바깥 면은 갈색으로 칠해져 있고 날카롭게 간 돌로 줄무늬를 새겨 넣었다. 우아하게 휜 병목의 위쪽에 액체를 부으면 안에 있는 여과기로 불순물이 걸러졌다.
황소 청동상 Pair of Bull Statuettes 초기 청동기, 기원전 2300-2000년
청동기 아나톨리아 반도의 사람들은 황소를 숭배했는데, 이런 전통은 철기까지 이어진다.
이 두 마리의 황소상은 아마 왕이나 사제의 장식품으로 쓰인 듯하다. 표면 중 절반은 구리와 비소로 도금되었는데 이것은 공기에 산화되어 부식된 것이다. 아마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은색이었을 것이다. 금속 피복으로 덮여 있던 부분은 부식이 덜 진행되어 초기 형태 그대로 남아 있다.
아시리아 Assyria(지금의 이라크 지역)
이라크 북부 지역에 세워졌던 국가로 19세기 중엽에 발굴됐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신석기 시대 이후의 문화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원주민은 스바르투 인인데 기원전 3000년경부터 셈계(系)인 아카드 인이 원주민을 누르고 세력을 얻으면서 언어, 풍습, 신앙이 셈족처럼 바뀌었다. 기원전 2500년경 도시국가로 성립된 후 끊임없이 수메르의 침입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강건하고 용감한 민족성을 지닌 셈계의 '아시리아 인'이 형성되었다.
아시리아의 중심부는 티그리스 강과 대(大) 자브강의 합류점에 가까운 삼각형 지역이었는데, 이런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바빌롱에서 나지 않는 금속·보석·목재·석재 등을 실어다 교역을 하고 점차 군사 국가로 발전했다. 기원전 7세기에 이르면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까지 정복해 세계제국을 건설했으며 특히 기병과 전차를 구비한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화를 융합하여 변경지대에 전했다는 문화적 특색이 있다. 니네베와 코르사바드 유적에서 볼 수 있듯 도시계획이나 성 쌓기에 능했고 예술 면에서는 석조의 환조와 부조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전투와 맹수 사냥 등 잔인한 행위를 주제로 한 것이 많다. 역대의 왕들은 전승(戰勝)이나 사적(事績)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연대기도 편찬했다.
라마수 Human-Headed Winged Bull 신 아시리아 시대, 기원전 721-705년
아시리아 지역의 코르사바드(khorsabad) 발굴에서 나온 아시리아 왕 사르곤 2세의 궁전을 장식하고 있던 부조이다. 왕좌가 있는 방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것으로, 무게가 40톤에 이르며 황소 몸에 사람의 머리가 달렸다.
사르곤 2세는 반란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사르곤 왕조를 창설한 군주로, ‘사르곤’이라는 이름은 ‘정통 왕’이라는 뜻의 아시이아 어 ‘샤루 킨(Sharru-Kin)’을 히브리어로 번역한 것이다. 사르곤 왕조는 페르시아 만에서부터 지중해에까지 이란, 소아시아, 아르메니아, 이집트에 이르는 세계 최초의 세계제국을 실현했다.
이 동물은 ‘라마수(lamassu)’로 알려진 정령이다. 정령은 모두 '우투쿠'라고 부르고 이들 중 선한 정령들을 라마수라고 했다. 기독교의 천사와 같은 존재로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 활약하고 인간의 수호신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는데, 사람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고 덮쳐오는 악령이나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고 전한다. 인간의 모습이지만 새나 동물의 머리를 지닐 때도 있으며 등에는 네 개의 새의 날개가 있다.
이 라마수 역시 인간의 머리, 황소의 귀와 몸, 그리고 새의 날개를 가진 복합적인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사진과 같이 측면에서 보면 걷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정면에서 보면 그냥 서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다리가 4개가 아니라 5개로 만들어져 있다. (사진상 오른쪽 면에 가서 보면 다리가 하나 더 있다.)
배를 끌어올리는 아시리아 군인 Assyrian Soldiers Towing a Boat 신 아시리아 시대, 기원전 721-705년
라마수 부조와 마찬가지로 사르곤 2세 궁전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사르곤 2세의 왕좌가 있는 방에서 발견한 것인데, 벌거벗은 아시리아 군인들이 얕은 강에서 배를 끌어올리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위에 바빌론의 왕인 므로닥 발라단(Marduk-apla-iddina)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를 사로잡기 위한 작전 중인 것으로 보인다.
므로닥 발라단의 이름 중 ‘므로닥’은 바빌론의 군신(軍神)인 '마르둑'의 다른 이름이다. 성경에 따르면 므로닥 발라단은 기원전 722년, 그 동안 바빌론을 지배해 오던 아시리아 인들에게 모반을 일으켜 바빌론의 왕이 되어 사르곤 2세의 인정을 받았다. 이후 사르곤을 치기 위해 히스기야 왕에게 사절단을 보내 동맹을 제의하는데, 사르곤이 그의 음모를 눈치 채고 공격해 기원전 710년에 바빌론을 차지했다. 부조는 이 이야기 속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아시리아의 두 환관 Two Assyrian Officials 후기 아시리아 왕국 시대, 기원전 721-705년
사르곤 2세 궁전의 알현실 외부 벽에 있던 부조로 무게가 약 2.5톤이다. 두 명의 관리가 왕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인데 수염이 없는 것을 보아 이들은 환관이었을 것이다. 표현상 특히 주목할 사람은 오른쪽 사람이다. 그는 앞사람 뒤에 서서 왕을 향해 나서며 손을 들어 올리고 있는데, 손과 어깨 모양을 볼 때 등을 보이고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이 부조에는 채색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 부조는 당시의 의복을 유추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옷자락 끝은 주름으로 장식돼 있고, 빨간 대각선 밴드는 가슴을 교차하고 있으며 와이어 팔찌, 귀걸이, 가죽 끈을 맨 샌들을 착용하고 있다.
흐르는 물병을 든 신상 Deity Holding a Flowing Vase 신 아시리아 시대, 기원전 721-705년
역시 사르곤 2세 궁전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발견 당시에는 많이 조각나고 깨져 있던 것을 용액에 세척하고 다시 조립해 복원했다. 나부의 사원으로 가는 출입구 양쪽에 있던 것 중 하나이다.
이 신은 물이 네 줄기로 흘러내리는 작은 물병을 들고 있다. 이런 형태와 유형은 고대 근동(약 1만 년 전 농경문화가 출현한 때부터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더 대제가 다스리던 당시의 북아프리카, 에게 해, 페르시아,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다. 아마 이 시기 사람들은 깨끗한 물이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고 믿었을 것이다.
청동 띠 Bronze Band 신 아시리아 시대, 기원전 721-705년
역시 사르곤 2세 궁전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사르곤 2세의 궁전 단지는 태양신인 샤마슈(Shamash)를 숭배하기 위한 신전도 갖추도 있었다. 이 청동 밴드는 사원의 출입구 양 측면을 지키던 신성한 삼나무를 둘러싸던 띠이다.
상단을 보면 거대한 황소의 뿔을 잡은 사르곤의 모습이 보인다. 동물, 특히 황소를 잡는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왕의 도식으로 자주 쓰이는 모습으로서 군주의 지배력을 상징했다. 하단부에 보이는 것은 농경을 상징하는 무화과 나무와 쟁기이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 King Ashurnasirpal II 신 아시리아 시대, 기원전 883-859년
몇 해 전 급진 수니파 무장 세력이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의 고대 아시리아 유적을 파괴하는 장면이 공개되면서 큰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이라크 북부 모슬(Mosul) 박물관의 석상과 조각품을 파괴한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님누드(Nimnud)까지 파괴한 것이다.
님누드 유적은 9세기 초 지중해에서 이란까지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던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자신의 권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새롭게 건설한 수도였다. 사방이 트여있는 초원지대의 특성상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높고 견고한 성곽이 필요했고, 왕은 사각형의 성곽 남서쪽 높은 곳을 택해 궁전과 신전을 조성했다. 뒤편으로 물길을 내고 바깥쪽으로 다시 성벽을 쌓아 운송과 방어목적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궁전 출입구에는 어김없이 거대한 황소 몸통에 솟아오른 날개를 달고 긴 턱수염에 높은 관모를 쓴 사람 얼굴의 라마수(lamassu)를 설치해 제국의 위용과 권능을 과시했다. 이 부조는 아슈르나시르팔 왕을 표현한 것으로, 원래 커다란 하나의 장면 중 일부였다.
아시리아는 아슈르나시르팔 왕이 죽은 뒤 내분을 틈타 바빌로니아에서 독립한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 인의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612년 니네베의 함락과 더불어 멸망했다.
산헤립 프리즘 Clay Prism of Sennacherib Deity Holding a Flowing Vase 신 아시리아 시대, 기원전 689년
성경에는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Hezekiah)이 아시리아 제국 산헤립 왕(Sennacherib)의 침입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개입해 준 덕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않았다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천사 군대가 산헤립 왕의 군대를 몰살시키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만은 신께서 친히 지켜 준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절대로 외국 군대에 함락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대중 사이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 산헤립 프리즘은 조금 다른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산헤립 프리즘에는 산헤립 왕이 히스기야로부터 크게 승리했다고 나온다. 히스기야가 예루살렘에 산헤립 군대가 쳐들어와 포위되는 바람에 항복한 것인지, 아니면 성이 함락되기도 전에 그냥 산헤립의 군대에 굴복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엄청난 양의 조공을 바쳤다는 점이다. 이 프리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의 멍에에 복종하지 않은 히스기야에 대해 말하겠다.
나는 그의 46개의 요새와 그 주변의 작은 마을 들을 포위하고 포위 기계를 사용함과 동시에 보병으로 하여금 성벽에 구멍을 뚫고 침입하거나 사다리로 성벽을 넘도록 해 함락했다. 그 안에 살던 주민들을 끌어냈더니 모두 200,150명이나 되었다. 말, 당나귀, 낙타, 소와 양 등도 획득하였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에 새장에 갇힌 새처럼 포위되었다.
나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누구도 들어가거나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빼앗은 요새들은 아스돗의 왕인 미틴티와 에크론의 왕인 파디, 그리고 가자의 왕인 실-벨에게 주었다.
나는 이전에 부과했던 조공 이외에 나의 영광에 부합하는 새로운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나의 무시무시한 영광은 히스기야를 압도했고 그가 포위를 대비해 보강한 군사들은 싸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히스기야는 나에게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많은 양의 전석, 상아로 장식된 침대, 의자, 코끼리 가죽, 흑단, 그 외에 귀중한 보물들을 조공으로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의 딸, 첩, 여자 가수 등도 함께 조공으로 바쳤다. 히스기야는 이로써 나에게 복속하였다.
키프로스 Cyprus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현재 키프로스 공화국으로 독립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계 지역, 터키 지배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이 섬은 오리엔트 세계와 에게 해 세계의 사이에 있어 양쪽이 교류하는 곳인 만큼 독자적인 예술을 낳았다. 예부터 동(銅)이 많이 나는 지역이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나온다.
신석기 시대부터 미술이 전개됐고 중부 남해안에 가까운 키로키티아 지역에서는 돌로 쌓은 원형 가옥군을 비롯해 다량의 석기, 석우(石偶)와 토기가 출토됐다. 청동기 시대에는 토기의 제작이 성행해 비누스, 라피투, 브니, 필리아 등 섬 북방의 구릉 지대에서 많이 출토됐다. 다른 문화권의 토기와 비교해 보면 양식이 통일돼 있지 않지만 그만큼 환상적인 상형 토기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아기 돌보는 어머니 상 Mother Nursing Child 청동기 중기, 기원전 1850-1600년
형태를 단순하게 만든 다음 정교한 장식을 더한 여성상으로 얼굴과 사지, 가슴, 배꼽(?)의 표현이 그리 미술 양식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의 것임을 말해준다. 키프로스의 어머니 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목을 둘러싼 목걸이와 몸통을 짧은 줄무늬를 새겨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팔에 든 정교한 아기 요람에는 아기가 들어 있으며 왼쪽 가슴의 젖을 먹고 있다.
이집트 Egypt
귀 석비 Ear Stela 나카다 2기, 기원전 3600-3200년
이집트에 왕조가 들어서기 이전인 나카다(Naqada) 2기 시대의 유물이다. 이 시기는 농경과 어업, 메소포타미아 등지와의 긴밀한 교역 등을 통해 외국제 가공품이나 수입한 재료를 사용하던 게르자(Gerza) 시대에 해당한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사원에 가지 않아도 신을 숭배할 수 있었다. 다섯 쌍의 귀가 새겨진 이 작은 석비가 마치 휴대전화처럼, 신에게 직접 말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신을 어렵거나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가 아니라,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든 문제를 들어줄 수 있는 존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비에는 글이 적혀 있지 않지만 귀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프타(Ptah) 신의 물건으로 추정된다. 프타는 이집트 멤피스 시의 신이다.
도공 상 Potter 제5왕조 시대, 기원전 2445-2414년
기자(Giza)에 매장됐던 것으로 보이는 Ny-kau-Inpu의 무덤에 있던 25개의 조각상 중 하나로, 도공을 표현한 조각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함께 부장된 다른 조각들은 이 사람의 아내와 다른 가족,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죽은 후 가족들과 영원히 살기를 바라며 무덤에 이런 조각들을 만들어 넣었을 것이다.
도공은 손으로 돌리는 회전판 물레 앞에 쪼그리고 앉아 폭이 넓은 대접을 만드는 중이다.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표현한 등 표면, 깊이 파인 헤어라인 등을 통해 장인의 집념 어린 직업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송아지 잡는 백정 상 Butcher Slaughtering a Calf 제5왕조 시대, 기원전 2445-2414년
위의 도공 상과 함께 매장돼 있던 조각상 중 하나이다.
이집트 인들은 죽더라도 내세에서 삶이 지속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사후에도 음식이나 음료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음식을 만들 사람이 필요했을 텐데, 실제 하인을 함께 묻어 희생시키는 대신 이렇게 일하는 사람의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어 넣어 영원히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 백정은 소를 잡기 위해 사지를 묶어서 고정시켜 놓았다. 허리에는 숫돌을 맨 모습이다. 당시 백정들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각 연습 Trial Piece 제18왕조 시대, 기원전 1352년
학생의 작품인지 숙련된 조각가의 미완성 작품인지 불확실한 조각품이다.
파라오의 장식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아마르나(Amarna) 시대에 아크나톤 왕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아크나톤이 통치하던 시기에 그를 표현한 모습의 특징인 가는 눈, 기다란 코, 움푹 꺼진 볼, 두툼한 입술, 늘어진 턱의 모습 때문이다. 다만 이 조각은 아크나톤을 표현한 다른 작품들과 달리 팔자주름을 새겨 추가했다.
투탕카멘 거대 석상 Colossal Statue of Tutankhamun 제18왕조 시대, 기원전 1334-1325년
높이 525cm의 거대한 석상이다. 투탕카멘은 이집트 제18왕조의 12대 파라오로 9살에 왕위에 올랐다. 원래 이름은 유일신 아텐(Aten)에 대한 신앙을 상징하는 ‘투탕카텐’이었으나 후에 아멘(Amen)을 국가 최고신으로 섬기면서 아멘 신앙을 상징하는 ‘투탕카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어린 투탕카멘은 아이(Ay) 장군과 재상 호렘헵(Horemheb)의 도움으로 정권을 유지했으나 18살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호렘헵이 왕위를 계승했다.
석상의 왕은 이중으로 된 왕관과 파라오를 상징하는 두건인 네메스(Nemes)를 쓰고 있다. 이마 위에는 왕의 적들을 향해 불을 내뿜는 성스러운 코브라인 우라에우스(Uraeus) 조각이 장식돼 있다. 기둥 뒤에 있는 카르투슈(왕이나 신의 이름 등을 둘러싼 선)에서는 투탕카멘의 조력자였던 아이 장군과 호렘헵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시카고 오리엔탈 연구소는 이 석상을 두 개 발굴했는데, 하나는 이집트 정부에 기증해 현재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 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메레사문의 관과 미라 The Mummy and Coffin of Meresamun 제22왕조 시대, 기원전 945-715년
기원전 800년 경 테베의 여사제였던 메레사문의 관이다. ‘메레사문’이란 ‘아문 신을 위해 산다’는 뜻으로, 카르나크의 아문 신전 합창단에서 노래하고 제례용 음악을 만들었던 인물로 추측된다.
이 관은 직물과 접착제, 석고 등을 섞어 굳히는 전형적인 이집트식 관 제조 재료인 ‘카토나쥬’로 만들어져 있다. 진흙과 짚으로 모양을 만든 후 그 위에 재료를 덮어 굳혔다. 표면에는 신의 그림, 상징, 이집트 상형문자가 장식돼 있다.
지난 2009년 시카고 오리엔탈 박물관은 메레사문의 미라를 컴퓨터로 단층촬영(CT)했다. 3000년이나 된 관인 탓에 내부에 번식했을 수 있는 박테리아 등의 우려가 있어 함부로 열어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촬영 결과 메레사문은 키가 약 167.64cm이고 사망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큰 눈, 균형 잡힌 얼굴, 도드라진 광대뼈, 긴 목 등의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이 미라에는 장기와 눈구멍에 넣은 돌이 남아 있다. 뼈의 상태를 분석한 결과 영양가 있는 식사와 활동적인 생활습관으로 매우 건강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장례 석비 Funerary Stela 제22왕조 시대, 기원전 946-735년
람세스 2세의 신전인 테베 라메세움(Ramesseum) 신전에 있는 개인 무덤에서 발견된 장례 석비이다. ‘Djed-Khonsu-iw-es-ankh’라는 여성을 기념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여자는 머리에 수련을 꽃은 향기 나는 관을 쓰고 투명한 흰색 가운을 입고 있다. 음식을 바치는 테이블 위에 술을 따르고 있는데, 이 손 모양은 앞에 앉은 태양신을 맞이하는 모습이다. 상형문자로 쓰여 있는 글은 내세에 영혼이 무사하길 바라며 음식과 음료를 바친다는 기도 내용이다.
도마뱀 관 Coffin for a Lizard 제25-31왕조 시대, 기원전 747-332년
기원전 천년 동안에는 동물 미라가 인기를 끌었다. 이 기간에는 심지어 뱀, 풍뎅이, 딱정벌레, 쥐 등 작은 생물들까지 미라로 만드는 경우가 있었다. 일부는 금속, 나무, 점토 등으로 만든 관에 매장하기도 했는데 특히 작은 동물의 미라 유적은 청동 관에 넣은 경우가 많다. 청동 관에 매장했을 경우 뚜껑을 그 동물의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 도마뱀 관 역시 청동 관으로, 부식되긴 했지만 도마뱀 모양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도마뱀은 황소, 사자, 이집트 몽구스, 뱀과 함께 이집트의 창조신 아툼(Atum)의 성스러운 동물 중 하나이다.
마법의 벽돌 Magical Bricks 제25왕조 시대, 기원전 746-664년
고대 이집트 무덤에서 발견된 두 개의 마법의 벽돌로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 151장에 나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51장은 분묘(무덤)에 관한 것으로 자신이 기거할 집을 갖기 위한 주문이다. 이 벽돌들은 건축용 벽돌을 햇볕으로 구워내던 전형적인 방식과 달리, 나일 강의 점토를 잘게 체로 친 쳐서 성형한 다음 굽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마법의 벽돌은 이집트 문서에서 그냥 ‘벽돌’이라고 지칭하는데, 무덤 안에 넣으면 악령을 퇴치해 주는 기능을 했다. 즉 네모난 묘실에 있는 벽의 틈새나 바닥에 네 개를 놓아 동서남북 사방으로부터 오는 위험하거나 악한 것들을 막아 죽은 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덤 제조 및 배치를 설명하는 지시서에 따르면 무덤에는 네 개의 벽돌과 부적을 넣은 벽돌을 무덤에 넣어야 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마법’이란 종교적인 우주론의 논리 내에서 존재하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왼쪽 블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오, 나를 얽매려고 오는 자여. 나는 네가 나를 얽매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오, 나를 공격하려고 오는 자여. 나는 네가 나를 공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다. 나는 너를 쫓아버릴 것이다. 나는 오시리스(Osiris)와 네스파카슈티(Nespaqashuty)로부터 보호 받고 있다.
<사자의 서> 일부 Book of the Dead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기원전 332-30년
<사자의 서>는 신왕조 시대 이후, 미라와 함께 묻은 지하 세계의 안내서이다.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다. 죽은 이들이 안전하게 다음 세상에 도착하기를 기원하는 기도문,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칠 때 외우는 마법의 주문, 신들에 대한 서약 등이 적혀 있다.
<사자의 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죽은 자의 심판이다. 죽은 자를 심판하는 재판관 오시리스가 배심원을 거느리고 검사인 호루스 신, 서기관인 토트 신, 안내자인 아누비스 신, 저울을 다는 마아트 신, 그리고 죽은 이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내리는 아뮤트 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은 사람을 재판한다. 죽은 이의 심장을 ‘진리의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는데, 심장이 깃털보다 심장이 무거우면 죄가 많은 것으로 판단되어 아뮤트에게 심장을 먹히고, 착한 사람은 오시리스의 왕국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
이 부분은 Yartiuerow라는 사람의 죄를 재판하는 장면이다. 왼쪽에 오시리스가 앉아 있고, 마아트 여신은 깃털과 그 심장의 무게를 재는 중이다. 자칼의 머리를 한 아누비스와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는 정루 옆에 서 있다. 신들의 비서인 토트는 평결을 기록하는 중이다. 심판을 받는 Yartiuerow는 저울 옆에서 환희를 나타내는 손짓을 하며 절하고 있다.
Mentuemhat 무덤의 부조 Relief from the Tomb of Mentuemhat 제25-26왕조 시대, 기원전 656년
테베의 책임자였던 당대 최고의 권력가 Mentuemhat의 무덤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아문 신과 몬투 신 사제 집안의 일원이자 아문신의 네 번째 사제로 생전에 요직을 두루 맡았다. 아마도 당시 최고의 화가를 고용해 이 그림을 그리도록 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죽은 후 계속 즐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활동을 무덤 벽에 그려 장식하곤 했다. 이 부조 역시 마찬가지로, 파피루스 돛을 단 배가 물고기와 함께 물길을 따라 여행하고 있다. 배 앞뒤에는 노 젓는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가슴에 가로질러 입은 것은 구명조끼이다.
다이즈헤브세드 무덤의 부조 조각 Fragment from the tomb of Diesehebsed 제26왕조 시대, 기원전 664년
지금은 없어진 다이즈헤브세드(Diesehebsed)라는 여인의 무덤 또는 무덤 기도실에 있던 조각 일부이다. 그림에서 왼쪽에 보이는, 머리 부분이 없어진 여자가 무덤의 주인이다. 그녀는 아문 신전에서 노래하는 메인 가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이 여인이 신을 찬양하는 합창단의 단원이었음을 나타낸다. 오른쪽 여자는 앞에 있는 상형문자를 통해 아문 신의 아내인 Amunirdis 2세임을 알 수 있다. 아문 신은 테베에서 찬양한 대표적인 지역 신이다.
카르낙(Karnak) 지역의 신전 유적에도 이 두 여자가 함께 있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장면은 다이즈헤브세드가 신의 아내의 신뢰할 만한 관리자 역할을 했고 테베에서 권력 있는 가문의 일원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녀는 아문 신전의 제사관이자 제물을 바치는 제단의 서기인 네습타(Nesptah)의 딸이었는데, 부녀는 모두 테베에서 아문 신전의 관리로 일했다. 다이즈헤브세드는 위 무덤 부조의 주인인 Mentuemhat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참고로 본래 ‘헤브세드’란 장수한 파라오들이 재위 30주년을 기념할 때 여는 축제를 말한다.
시스트룸(제례용 래틀) Sistrum(Ritual Rattle)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후기-로마 지배기, 기원전 3-1세기
시스트룸(Sistrum)이란 고대 이집트의 악기로, 풍요의 여신 아이시스의 예배 때 사용한 래틀(rattle,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의 일종이다. 자루가 달린 말발굽 모양의 금속 틀에 헐겁게 끼운 쇠막대 또는 고리를 흔들어 울리며 소리를 냈다.
이 시스트룸은 다른 일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과 춤의 여신인 하토르(Hathor)가 소의 귀를 단 모습으로 장식돼 있다. 여신의 머리 위쪽에는 신전의 출입구 모양이 표현돼 있고 그 위에 작은 사자상 두 마리를 앉혔다. 신전 내부에는 작은 시스트룸을 들고 있는 고양이 머리의 여신 바스테트(Bastet)가 있는데, 그녀의 시스트룸 위에는 새끼고양이들을 돌보는 고양이가 있다.
이렇게 복잡한 장식을 가진 이 시스트룸은 ‘레의 눈(Eye of Re)’에 관한 하토르(Hathor)의 전설을 암시한다. 이 전설에 따르자면 레는 자신을 거역할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되는 인간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하토르 여신을 암사자의 머리를 지닌 여신인 세크메트(Sekhmet)로 만들어 인간들에게 내려 보낸다. 세크메트는 음악을 통해 진압되고 머리가 사자에서 고양이로 바뀌면서 사자의 공격적인 성향 대신 사랑과 환희, 음악의 신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른쪽에는 시스트룸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모성과 흉포성의 양면성을 가진 여신이 되었다.
이 모습은 훗날 고양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바스테트(Bastet) 여신으로 등장한다. 당시 이집트 인들은 곡창지대의 농작물을 갉아 먹는 쥐를 막기 위해 집집마다 고양이를 키웠고 고양이를 가족처럼 여겼다고 한다. 나중에는 고양이를 자유와 신성의 상징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로제타 석 Rosetta Stone 로마 지배기, 기원전 196년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이 나일 강 하구의 로제타 마을에서 진지를 구축하던 중 발굴한 비석 조각이다. 발견 당시에는 흑색의 현무암 또는 화강암으로 추정했으나 오늘날에는 화강섬록암으로 보고 있다. 표면은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14행의 성각문자(聖刻文字), 중단에는 32행의 디모틱(Demotic, 고대 이집트 서민들이 쓰던 상형문자), 하단에는 54행의 그리스 문자가 새겨져 있다. 본래는 신전 경내에 세워져 있던 것을 후에 요새 구축의 석재로 이용한 것이다.
발견 당시에는 아직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해독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비문을 7부 복사해 언어학자들에게 상형문자의 해독을 명했는데, 7종 언어에 능통한 샹폴리옹(J. F. Champollion)만이 해독에 성공했다. 그의 해독은 훗날 고대 이집트 문자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었다. 내용은 국왕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독실한 신앙과 덕행을 칭송한 신관의 송덕문(頌德文)으로,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대관식 거행 다음 해인 기원전 196년의 기념식 날에 작성되었다.
로제타석은 1801년 영국 군에게 몰수당해 현재는 런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카고 오리엔탈 박물관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미라 마스크 Mummy Mask 로마 지배기, 기원전 1세기 - 기원 2세기
미라에는 그 사람의 얼굴과 비슷하게 만든 마스크를 씌웠다. 죽은 자의 영혼인 ‘바(Ba)’가 낮에 육신을 떠나 미라 주위를 선회하거나 미라 위에 앉아 있다가 밤에 다시 체내로 돌아온다고 여겼기 때문에, 영혼이 돌아올 때 자신의 몸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마스크는 관을 만들 때 쓰는 재료인 '카토나쥬'로 형태를 잡고 그 위를 석고 가루로 코팅한 다음 그림을 그리고 도금을 했다. 심장 모양의 부적을 단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고 양쪽 어깨에는 묘의 입구를 상징하는 문이 그려져 있다. 각각의 문 위에는 오시리스 신이 앉아 있어 죽은 여인이 오시리스 신과 관련 있는 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페르시아 Persia(지금의 이란 지역)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서쪽으로는 그리스까지 세력을 뻗었다. 페르시아는 바빌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땅이 포함된 제국의 영토를 차지했으며 바빌론에 살던 유대인들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페르시아 인들은 유일신을 숭배하고 신상을 만들기 싫어한다는 점에서 유대인들과 닮은 데가 많았다. 페르시아 인들은 바빌론 인들보다 훨씬 인도적이고 너그러웠는데, 페르시아 지배자인 키루스(고레스)는 바빌론에 억류된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나온다.
훗날 세워진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에는 ‘페르시아’라는 말이 더 이상 쓰이지 않았지만 오리엔트 문명의 계승자, 세계 최초의 통일제국, 세계 최초의 계시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출현지, 헬레니즘의 발상지, 이슬람 시아파의 종주국 등 페르시아적인 민족 전통은 계승되어 왔다.
칠그림 토기 항아리 Painted Jar 초기 플래토(Plateau) 시대, 기원전 5000-4500년
손으로 점토를 빚어 만든 항아리이다. 광택을 낸 붉은 빛 표면에 검은색 안료로 마름모꼴 무늬를 채색했다. 이런 도자기와 장식 유형의 채문 토기는 이란 레이 부근에 있는 시알크(Sialk) 언덕의 선사시대 유적인 차슈메 알리(Chashmeh-ali)에서 흔하다.
차슈메 알리 유적은 기원전 5000년-4300년경에 해당하는 시알크 2기, 그리고 기원전 4300년-3500년경에 해당하는 시알크 3기로 나뉘는데 사진의 칠그림 토기는 시알크 2기의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메소포타미아 이전의 문명으로 보기도 한다.
아이벡스를 그린 크라테르 Krater with Ibexes 기원전 4300-3500년
수시아나(Susiana)라 불리는 수사(Susa) 지역은 역사적으로 이란 남서부 선사시대 문화에 해당한다.
이 크라테르는 테두리 사이에 휜 뿐을 가진 야생 염소 아이벡스를 그려 놓았는데, 이런 모양은 수시아나 연대 중 후기의 특징이다.
채문 토기 Painted Bowl 바쿤 A(Bakun A) 시기, 기원전 4000년대 초
1932년 시카고 대학교 오리엔트 연구소는 바쿤(Bakun) 유적을 발견해 A와 B로 구분했는데, A구는 시알크 3기(BC 5세기)와 같은 시대이고, B구는 신석기 시대 초기의 유적이다. A구에서 직사각형의 점토벽 주거지가 발굴되는 한편 엷은 황색 바탕에 검은색 안료로 동물무늬나 기하학 무늬를 그린 가지무늬 토기가 많이 발견되었다. 밑이 뾰족하고 깊숙한 토기 바깥쪽에 무늬를 채색해 넣은 이 토기들은 이란의 선사시대 문화를 대표한다.
주둥이 달린 회색 주전자 Spouted Gray-Ware Pitcher 철기, 기원전 2000년대 말-1천년대 초
페르시아 초기 토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밝은 황색 바탕에 갈색 테라코타로 그려진 채색 토기들이다. 특히 수시아나에서는 다양한 기형과 무늬를 가진 토기들이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기원전 4000-3000년경에 만들어진 이 토기들에는 주로 양식화된 동물 무늬와 반복적인 기하학 무늬를 갖고 있다.
그러다가 이후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아리아 인이 페르시아 고원에 진출하면서 기원전 2000년 이후에는 표면에 광택을 낸 회색 토기들과 붉은 염료로 색을 입힌 동물 모양 토기들이 나타났다. 마를리크(Marlik) 유적의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대표적이다.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 및 주변 지역과의 교류를 통하여 다양한 토기와 용기들이 전해졌고 이에 따라 종교 의식에 사용되는 용기들은 점차 금속기, 유리기, 석제 그릇으로 바뀌어갔다.
함무라비 법전 Code of Hammurabi 함무라비(Hammurabi) 시대, 기원전 1792-1750년
1901년 12월과 이듬해 1월, 성경에 ‘수산(Shushan)’이라고 나오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지역에서 드 모르강(de Morgan)은 검은 섬록암으로 된 세 개의 큰 파편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서로 완벽하게 들어맞았으며. 결합했을 때 높이가 212cm이고 대좌(臺座)의 직경이 약 60cm미터인 석비였다. 위쪽에는 바빌론 첫 왕조(기원전 1728-1686)의 제 6대 왕이었던 함무라비가 앉아 있는 태양신 사마쉬 앞에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한 부조가 있고 이 밖의 표면 전체는 300여 개의 법률을 쐐기문자로 새긴 긴 비문으로 덮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이다. 진본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고 시카고 오리엔탈 박물관에 있는 것은 모사품이다.
기하학적 디자인의 새가 그려진 술잔 Beaker with Geometric Designs and Birds 기얀 2세(Giyan) 시대, 기원전 1500년
1931년에서 1932까지 2년 간 이란의 테페 기얀(Tepe Giyan) 지역을 조사한 결과 119개의 매장품이 발굴됐다. 할라프 시기(기원전 5000-4300년경)부터 기원전 1000년경까지 5개 문화층에 속하는 집터와 묘가 나왔는데, 특히 기얀 2세 시대의 유물들은 작은 태양과 새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된 것이 특징이다.
이 술잔은 고고학자 언스트 헤르츠펠트(Herzfeld)가 1930년대에 발굴한 것으로, 무늬를 통해 기얀 2세 때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반 달린 핀 Disc-Headed Pin 초기 철기, 기원전 750-700년
이란 Kuhdasht 지역의 성소인 수르흐(Surkh) Dum-i-Luri 유적에서 이런 모양의 많은 핀이 발견됐다. 이것들은 아마 출산의 신에게 봉헌되었거나 이 지역을 지나며 이동하던 유목 민족 간에 결혼 계약을 보증하는 징표로 쓰였던 것 같다.
중앙에 여덟 개의 꽃잎을 단 꽃이 있고 주변 테두리에 오목한 무늬를 넣은 이런 장식이 가장 일반적이다. 핀이 시작되는 부분에는 사자의 머리가 있는데, 핀 쪽이 아닌 장식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핀은 원반 쪽이 아래로 가게 하고 위쪽으로 꽂아 사용했기 때문에 머리에 꽂은 다음 보면 사자의 정면이 보였을 것이다.
걸어가는 사자들을 새긴 프리즈 Frieze of Striding Lions 다리우스 1세(Daruis 1)-크세르크세스 시대, 기원전 522-465년
페르시아 아케메데스 제국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새긴 조각 장인은 이 석조 부조를 우븐 천이나 아플리케로 장식된 장미 무늬 옷감처럼 매우 섬세하게 조각했다.
위쪽에 장식 없이 남은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프리즈가 건물 가장 윗부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아래에 표현된 술 장식은 끝에 매듭을 지은 태슬 장식을 표현한 것인데 이것은 아케메데스 제국 시기보다 더 앞선 시대의 것이다. 아마 다리우스 궁전의 동쪽을 지을 때 이전 시대의 작은 돌계단을 재사용했던 것 같다.
8자형의 다이아몬드 조각을 해 놓은 것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작품을 새긴 조각가가 자신이 소속된 조각 팀의 고유마크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크세르크세스 정초판 Foundation Slab of Xerxes 크세르크세스 시대, 기원전 485-465년
바빌론의 설형문자가 새겨진 이 비석은 크세르크세스가 왕위에 있는 동안 발생했던 국내 반란들의 목록을 적어놓았다. 본래는 크레스크세스의 건물 중 하나의 모서리 바로 아래에 두어 정초매장물(Foundation Deposit)의 기능을 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았고, 고대 페르시아와 엘람(Elamite) 유적에서 같은 글씨를 새긴 다른 석판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참고로 정초 매장물이란 신전과 궁전, 기념물이 되는 건물을 세우거나 수리할 때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건물 기초 부분에 집어넣은 것을 말한다.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고대 오리엔트에서 성행했는데 현재까지 계속되어 ‘정초비(定礎碑)’가 되고 있다. 고대에는 주로 금, 은, 청동, 돌, 점토 등으로 만들었다.
거대 황소 머리상 Colossal Bull Head 크세르크세스(Xerxes)-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Ⅰ) 시대, 기원전 485-424년
페르시아 아케메데스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는 다리우스 왕(기원전 522-486)이 건립하기 시작해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기원전 486-465)와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465-424)가 완성했다. 페르세폴리스는 거대한 계단 모양의 뜰 위에 세운 거대한 궁전 복합단지였는데, 알현실인 아파다나(Apadana) 옆에 크세르크세스 왕이 짓기 시작한 100개의 기둥이 있는 홀이 있다. 이 건물 북쪽의 주랑 현관 양쪽에는 수호의 역할을 하는 2개의 거대한 황소 석상이 있었다. 이 유물은 그 중 하나이다. 높이가 무려 216cm에 달한다.
황소 머리는 돌출되어 있지만 몸통은 현관 벽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 두 귀와 뿔들은 따로 추가됐다. 고대 근동 건축에서는 중요한 건물을 지을 때 이런 수호 상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원형 장식 Persian Roundel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 2세 시대, 기원전 404-359년
날개 달린 사자가 포효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금 장식은 옷이나 직물에 달던 장식품이었다. 당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Achaemenid) 왕조의 금 세공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스 작가들은 페르시아의 엄청난 부에 대해 종종 언급하는데,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 책 <역사>에서 다리우스 왕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왕(Xerxes I)의 군대에 대해 쓰면서 그들인 웅대한 장식을 하고 있었고 사람마다 굉장한 양의 금으로 온통 반짝였다고 썼다.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지금의 이라크 지역)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현재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의 북동부, 이란의 남서부가 포함된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부근을 경계로 북부의 아시리아와 남부의 바빌로니아로 나뉘며, 바빌로니아는 다시 북부의 아카드와 남부의 수메르로 나누어진다. 수메르에서 일어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을 모체로 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형성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나일 강 유역에서 번영한 이집트 문명,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황허 강 유역의 황허 문명 등과 더불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지리적으로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하는 바빌로니아 · 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킨다. 넓게는 서남아시아 전체의 고대 문명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셈족에 속하는 아카드 인, 아무르 인, 아시리아 인, 칼데아 인 등과 인도-유럽 인종에 속하는 히타이트 인, 카사이트 인, 메디아 인, 페르시아 인 및 수메르 인, 엘람 인 등이 활약하였고 공통 문자로 설형문자를 사용했다.
귀가 넷 달린 그릇 Four-Lugged Vessel 잠다트 나스르(Jamdat Nasr) 시기, 기원전 3100-2900년
수메르 문명 유적 중 우루크 유적 다음으로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잠다트 나스르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네 개의 구멍 뚫린 귀가 달려 있고 윗부분에 장식이 그려져 있어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토기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석재와 목재는 빈약해도 강렬한 태양과 진흙, 그리고 풍부한 물이 있어 기원전 6000년경부터 토기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햇볕에 말리기만 했지만 기원전 5000년경부터 불에 굽기 시작했고, 우바이드 기에서 잠다트 나스르 기에 걸쳐 마름모나 지그재그 무늬 같은 기하학 무늬와 동식물 무늬를 그린 채문 토기가 크게 발전했다. 이 그릇은 각각의 귀 아래에 나무 그림이 추가된 모습이다. 아마 뚜껑을 닫은 후 귀에 달린 구멍에 끈을 매달아서 내용물을 보호했을 것이다.
가젤 머리 모양의 도장/부적 Gazelle-Head Stamp Seal/Amulet 잠다트 나스르 기 초기 제1왕조 시대, 기원전 3100-2750년
중부 및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3000년대 말에 원통형 도장이 동시에 출현했다. 도장 중 상당수는 동물이나 동물 머리 모양을 새겼고, 도장을 찍는 면은 단순한 구멍 모양이나 선으로 장식하곤 했다. 가젤 머리 모양의 이 도장은 실제로 사용된 것은 아니고, 아마 부적처럼 몸에 지니던 물건일 것이다.
소형 수메르인 입상 Sumerian Statuette 초기 제1-2왕조 시대, 기원전 2900-2600년
메소포타미아 초기 왕조 시대에는 조각상을 만들어 성소에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나면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신전을 재건축할 때 매장했다. 이 수메르인 상은 텔 아스마르 유적의 아부(Abu) 신전의 제단 구덩이에 묻혔던 조각들 중 하나이다. 다른 남성상과 달리 풍성한 수염과 긴 머리카락이 없기 때문에 제사장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웅과 동물이 떠받친 컵 Cup Supported by Hero and Animals 초기 제2-3왕조 시대, 기원전 2700-2600년
이 정교한 석고 컵은 이난나(Inanna) 여신의 아들인 사라(Shara) 신의 신전에서 발견된 것으로,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컵을 장식하고 있는 영웅은 벌거벗은 채 두 줄짜리 벨트를 차고 있고 양 손으로 사자 두 마리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있고, 위쪽에 있는 사자들의 말린 꼬리는 영웅의 겨드랑이를 감싸고 있다. 이 사자 네 마리는 반대편에 있는 수염 달린 황소를 위협하고 있다. 이런 식의 전투 장면이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종종 나타나는데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연회 플라크 Banquet Plaque 초기 제2-3왕조 시대, 기원전 2700-2600년
맨 윗줄에는 앉아 있는 남자와 여자가 연회에 참석해 어떤 행사 또는 의식에 참여해 축하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하인들은 아마 맥주가 가득 들어 있을 항아리, 도살한 짐승, 기타 먹을거리를 머리에 이고 가져와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시중을 들고 있다. 맨 아랫줄에는 악기 연주자와 춤추는 사람이 표현돼 있다.
이런 플라크는 중요한 건물의 문을 잠그는 시스템의 일부로 사용됐다. 중앙에 뚫린 구멍으로 문설주와 말뚝을 끼워 넣고 갈고리나 끈으로 고정한 후 진흙을 덮어 낙인으로 날인하는 방식이었다.
한편 플라크는 하나의 주형으로 여러 개를 만들 수 있어, 부조를 제조하는 가장 간단하고 저렴한 방법이었다.
원통형 도장 Cylinder Seal 아카드 왕국(Akkad) 나람신(Naramsin) 또는 샤르칼리샤르(Sharkalishari) 왕 시대, 기원전 2254-2193년
도장의 기원은 기원전 5000년대 후반 메소포타미아의 원시 농경 사회에서 발명된 것이 시초이다. 처음에는 돌, 점토, 조개껍데기, 뼈, 금속 등에 그림이나 문자를 새겨 천이나 점토에 찍었다. 후대로 가면 사진과 같이 원통형 도장으로 변해서 굴려 찍곤 했는데, 이것이 발칸으로 전해져 유럽 도장의 기초가 되었다.
이 원통 도장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여신 Ninishkun에게 바친 것으로 대 여신 이슈타르가 새겨져 있다. 이슈타르는 가죽 끈으로 사자를 통제하며 오른쪽 발을 그 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이것은 이슈타르를 표현한 모습의 전형이다. 왼쪽 손에 쥔 초승달 모양의 칼과 어깨에서 돋는 무기, 그리고 날개는 이슈타르가 전쟁의 여신이기도 했음을 잘 보여준다.
우르 남무(Ur-Nammu) 왕의 청동상 Foundation Figurine of King Ur-Nammu 우르(Ur) 제3왕조 우르-남무(Ur-Nammu) 시대, 기원전 2111-2095년
우르 남무(재위 기원전 2124-2107) 왕은 수메르 우르 제3왕조의 창설자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법전 <우르 남무 법전>의 편집자이다. 수도 우르에서 크게 건축 활동을 하고 우르크, 에리도 등에서 수메르 식의 지구라트(ziggurat)를 만들었는데 1980년대에 사담 후세인이 복원했다.
우르 남무는 수메르의 파테온의 최고신인 엔릴(Enlil)의 에쿠르 신전(E-kur)을 확장해 재건축했다. 이 청동상은 이 재건축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의미를 지니는데, 머리 위에 신에게 봉납할 흙이 들어 있는 광주리를 이고 있는 인물상으로 우르 남무 왕을 표현한 것이다. 완성된 후 신전의 탑 중 하나의 아래 기초 상자에 묻혔다.
지구라트(ziggurat) : 다른 말로 성탑(聖塔), 단탑(段塔)이라고도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각지에서 발견되는 건축물로 일종의 신전이었다. 하늘에 있는 신들과 지상의 인간들을 연결하기 위하여 지표보다 높게 지었으며 후대로 갈수록 더 높아졌다. 정상부는 ‘하얀 집’이라 하여 신상을 모셔 놓은 성소의 역할을 했다. 고대에서 이와 필적할 규모의 건축물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밖에 없는데, 피라미드가 직선상의 통로를 갖는데 비해 지구라트는 지그재그의 곡절 통로를 갖추었다.
수메르 초기 왕조 시대(기원전 2700-2350년경)에는 1층에 테라스 형태가 있었으나 우르 제3왕조 시대(기원전 2100-2000년경)에는 3층의 테라스를 겸한 탑으로 나타난다. 신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7-6세기)에 바빌론에 세워진 지구라트는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무려 8층이었다고 한다.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전설의 근원으로 추정된다.
여성 입상 Female Figurine 우르 제3왕조 및 이신 라르사(Isin-Larsa) 시대, 기원전 2100-1800년
메소포타미아의 주택, 사원, 공공건물들이 발굴된 텔 아스마르(Tell-Asmar) 유적에서 나온 것이다. 텔 아스마르는 옛날에 에슈눈나(Eshnunna)라고 불리던 고대 도시 유적으로 잠다트 나스르 기(기원전 3200-2700년경)에서 우르 제3왕조 시대(기원전 2100- 2000년경)까지의 신전 터와 우르 제3왕조 시대의 슈신 궁전, 이신 라르사 시대 에슈눈나 국의 북동 궁전 등이 발굴되었다.
이 여성 입상은 넓고 평평한 엉덩이, 과장되게 삼각형 모양으로 절개한 음모, 원반 모양의 가슴과 눈에 띄게 튀어나온 젖꼭지를 갖고 있다. 머리 측면에 여러 개의 뚫려 있어 끈 등으로 옷감 따위에 매달 수 있었을 것이다.
오리 모양 추 Duck Weight 기원전 2000년대 초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거래를 할 때 무게를 재는 표준 추를 사용했으며 잘못된 추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엄벌을 내렸다.
추는 보통 적철광 같이 단단하고 무거운 돌로 만들었다. 단순한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긴 했지만, 이 오리처럼 특별한 형태를 가진 무게추도 유행했다.
하프 연주자 플라크 Plaque Showing a Harpist 이신-라르사 및 구 바빌로니아 시대, 기원전 2000-1600년
하프는 악기 중 기원이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활처럼 휜 하프는 이미 기원전 3000년에 이집트와 수메르의 부조 등을 통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유물과 같은 모습의 하프는 이것이 가장 오래됐다. 플라크에 담긴 하프 연주자가 술이 달린 가운을 입고 달라붙는 모자를 쓴 채 한창 연주를 하고 있는데, 이런 모습은 기원전 2000년대 메소포타미아 하프 연주자 모습의 전형이었다.
이 시기 점토 플라크들은 현악기, 타악기, 관악기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들을 보여 준다.
네 개의 얼굴을 가진 신과 여신상 Four-Faced God and Goddess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 기원전 18-17세기
불법 도굴꾼들이 발견한 것으로, 네 바람의 신과 폭풍의 여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네 바람의 신은 납작한 모자를 쓰고 있는데, 오른쪽 손에 초승달 모양의 칼을 들고 있으며 왼쪽 발 옆에는 웅크리고 앉은 숫양이 있다.
여신은 높은 왕관을 쓰고 있고 각각의 얼굴에 한 쌍의 뿔이 달려 있다. 왕관은 신전 제단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손에는 물이 흐르는 꽃병을 쥐고 있으며 흐르는 물이 옷에 무늬처럼 새겨져 있다.
점토 문서와 점토 봉투 Clay Tablet and Envelope 미탄니(Mitanni) 왕국 시대, 기원전 15세기
점토로 만든 봉투와 그 안에 있던 문서판으로, 개인 보관함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다. 총 1천 개 이상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문서판에는 하나의 토지를 두고 소유권을 주장하며 재판을 벌였던 두 사람의 소송 결과가 기록돼 있다. 재판관은 자신의 소유권을 이웃 주민 9명의 서면 진술서로 만들어 증명한 사람의 주장을 인정해 판결했다.
재판 결과를 기록하는 관리들은 판결이 옳다고 생각하면 점토판에 명기하고 봉투 겉면에 원통 도장을 굴려 새겼다.
악마 파주주 상 Pazuzu Demon 기원전 800-600년
파주주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바람의 악마이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아프리카 사막 지대에서 불어오는 남서풍의 열기가 모든 것을 말리고 태워 버려 피해를 입곤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악마 파주주의 탓이라고 여겼다. 한 쌍의 날개가 달려 있고 인간의 몸과 개의 얼굴, 독수리의 발, 전갈의 꼬리를 지녔으며, 손은 사자의 앞발로 되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편 파주주는 출산을 방해하고 어린이들에게 병을 가져오는 여자 악마 라마시투(Lamashtu)의 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출산을 할 때는 종종 파주주를 부적으로 삼아 간직하기도 했다. 이 파주주 상의 상단에도 다른 끈에 매달 수 있는 고리가 있어 부적으로 사용됐음을 암시한다.
걸어가는 사자 벽화 Striding Lion 신바빌로니아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 시대, 기원전 604-562년
1899년 독일 고고학자가 발견한 벽화로 포효하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채 고대 바빌론 유적의 잔해 속에 묻혀 있었다. 시카고 대학의 오리엔탈 연구소에 있는 두 점의 벽화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복원한 것으로 진흙 벽돌로 만든 벽에 파랑, 초록, 검정, 노랑, 하양으로 칠한 벽화이다.
고대 근동에서 사자는 힘과 능력의 상징이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자는 바빌론을 대표하는 여신 중의 여신, 이슈타르(Ishtar)를 상징했다. 그래서 바빌론에는 사자 그림이나 조각이 매우 많다. 이슈타르를 상징하는 이 사자 벽화는 바빌론의 중심 도로, 즉 개선한 군대나 외국이 사절단이 통과하는 ‘행렬의 길’의 양쪽 벽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 가면 복원된 이 길을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Palestine
팔레스타인은 지중해와 요르단 강 사이의 땅과 그 인근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다. 팔레스타인이 어디인가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는데, 대체로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구역(요르단 강 서안 지구 및 가자 지구) 일대를 가리킨다.
팔레스타인은 해안지대와 갈릴리(요르단 강이 흘러드는 갈릴리 호 주변) 지방, 산악지대, 사해로 흘러드는 요르단 강의 계곡, 골란(‘추방’이라는 뜻) 고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염분 농도가 31%(보통 해수의 약 3배)인 사해가 유명하다. 역사적으로는 지중해 동쪽에 위치해 시리아와 함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의 3개 지역을 연결하는 ‘육상의 다리’ 기능을 해 왔다. 한편 팔레스타인은 성서에 나오는 가나안 지역으로, 히브리 성경에서는 이곳을 ‘우유와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등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약 60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히브리 왕국이 세워지기도 했으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다.
가나안의 조상, 엘과 바알 Canaanite Statuette 후기 청동기, 기원전 1350-1200년
가나안의 주신은 엘(왼쪽)이었지만, 실제로는 엘보다 그의 아들인 바알(오른쪽)이 더 폭넓게 숭배 받았다. 바알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신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언급되는 신이자, 이스라엘 신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바알의 그의 실제 이름은 하다드(Hadad)였지만 거의 ‘주인’이라는 뜻의 바알이라고 불렸다. 바알을 숭배할 때는 흔히 사람들은 신전의 창기들(남성과 여성이 모두 있었다)과 성관계를 가졌다. 정확히 말해 여기서 숭배란 그저 난잡한 성교를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아마 그런 행위를 하면 토지, 수확, 가축이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믿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을 가끔 바알에게 인신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예레미야 19:5). 바알의 사제들은 칼로 자신의 몸을 찔러 피를 흘리곤 했는데, 그래야 바알이 비를 내려준다고 믿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의 우상 앞에 절을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상숭배가 잘못이라고 여겼고, 바알 숭배가 난잡한 섹스 파티로 변질되는 것까지 보자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이런 현상이 바알과 기타 다른 신들의 탓이라고 주장했다.
훗날 타락한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220년경에 제국 전역에서 바알을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그가 바알 사제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대다수 로마인들은 중동에서 전래된 신을 억지로 숭배하라는 명에 격분했고, 반면 일부 로마인들은 바알이 그들의 주신인 유피테르(주피터, 목성의 신)라고 믿었다. 또 그리스인들은 바알과 제우스를 동일시하기도 했다. ‘바알’이라는 이름은 레바논의 고대 도시 바알베크로 이어졌다. 고대의 유명한 군사 지도자들 중에 한니발의 이름은 ‘바알의 사랑’이라는 뜻이다.
[므깃도] 놀이판 Gaming Board 후기 청동기, 기원전 13세기
메기도(므깃도) 유적에서는 코끼리 상아로 만든 유물들이 발견됐다. 놀이판들도 여럿 발견됐는데 크게 ‘58개 구멍 게임(game of 58 halls)’을 위한 것과 ‘20방 게임(game of 20 squares)’을 위한 것으로 나뉜다. 사진의 놀이판은 58개 구멍 게임의 놀이판 중 하나이다. 다섯 번째 구멍마다 금과 파란색 상감 장식이 돼 있고 중앙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20방 게임은 주사위와 비슷한 소나 양의 뼈를 굴려서 그 결과에 따라 말을 움직이는 경주였다. 이 게임은 부자들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즐겼고 심지어 궁을 지키는 경비병으로 근무가 지루할 때 즐기곤 했다. 아시리아 사르곤 왕의 궁전 문 앞 땅바닥에는 이 게임의 놀이판이 그려져 있다.
사진과 같은 58개 구멍 게임 역시 말을 움직이는 경주 게임으로 58개의 구멍이 있는 놀이판을 사용했다. 현대의 카드 게임인 크리비즈(cribbage)와 비슷한데, 아마 오른쪽 위에 있는 작은 구슬들을 보드의 구멍에 올려 놓아 점수를 표시했을 것이다.
[므깃도] 세 여인 두상 Three Female Heads 청동기 후기, 기원전 13세기
앞의 놀이판과 마찬가지로 므깃도 유적에서 발견된 코끼리 상아 유물 중 하나이다. 상아 유적들은 반지하의 방에서 발견됐는데, 이런 두상 쌍들은 화장품 상자에 부착하기 위한 일종의 손잡이이다.
머리 모양 뒤에 경첩 역할을 하는 납작한 접합재가 있었고, 다른 쪽 뒤를 뚜껑 같은 조각으로 닫아 고정했다. 풍성한 곱슬머리로 미루어 보아 이집트의 여신 하토르 상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므깃도] 그리핀 플라크 Griffin Plaque 청동기 후기, 13세기
역시 므깃도 유적에서 발견된 코끼리 상아 유물 중 하나이다. 사자의 몸과 새의 머리, 날개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리핀을 표현한 것 같다. 그리핀은 머리, 앞발,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통과 뒷발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로 오리엔트 건축이나 장식 미술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 모티프는 그리스의 미케네인들의 예술에서 차용한 것이다. 미케네의 장인이 직접 만든 것인지, 아니면 미케네인의 작품을 팔레스타인 지역의 상아 조각가가 모방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에게 직접 수입한 것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므깃도] 케르노스 링 Kernos Ring 초기 철기, 기원전 1175-1100년
팔레스타인에서 종교 의식을 할 때 신주를 따르는 용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케르노스(Kernos)란 많은 컵이나 단지를 부착한 고리 모양의 오지 그릇을 말한다. 가운데가 뚫린 점토 고리 모양에 가젤 머리, 두 개의 항아리, 석류 두 개, 비둘기 두 마리, 그리고 컵 하나를 붙여 놓았다. 컵에 담긴 술을 비둘기 입을 통해 마실 수 있게 되어 있다. 여덟 번째 장식은 고대에 깨지고 사라져 남아 있지 않다. 석류, 가젤, 비둘기는 이 링이 다산 숭배와 관련 있음을 시사한다. 컵에 따른 와인이나 물은 대지와 대지의 비옥한 생산을 상징하는 다른 개체들 속으로 흘렀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이런 링 모양 케르노스 그릇은 매우 일반적이었다.
[므깃도] 향 제단 Four-Horned Incense Altar 철기, 기원전 10세기
귀퉁이를 돌기처럼 올린 이런 제단은 성경에서도 등장하는 것으로서 철기 시대 이스라엘 지역에서 많이 발견됐다. 이 제단은 신에게 바칠 동물을 죽이기에는 너무 작으므로 포도주, 향, 기름에 섞은 곡물 등을 바칠 때 사용됐을 것이다. 동물을 죽이는 제단은 아래 사진과 같다.
이 제단이 발견된 메기도(Megiddo, 성서의 ‘므깃도’) 유적은 거대한 공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솔로몬 왕이 건설한 것으로 추정진다.
토기 등잔 Oil Lamp 철기, 기원전 8세기
연료를 담아 어두운 곳의 불을 밝히던 등잔이다. 연료로는 보통 올리브유를 사용했으며 아마섬유로 만든 심지를 통해 불을 밝혔을 것이다. 심지가 나와 있던 등잔의 주둥이 부분은 검게 그을려 있다
이 등잔은 하나의 주둥이를 가지고 있고 위가 열려 있는 형태인데, 이전에 네 개의 주둥이 형태에서 서서히 변화한 양식이다. 더 나중에는 하나의 주둥이를 가지고 있고 위가 닫힌 형태의 등잔이 등장한다. 이런 모양의 변화를 통해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
유골함 Inscribed Ossuary 기원전 70-기원 70년
기원전 1세기 끝 무렵부터 유대인들의 장례 문화는 본래 사용하던 나무 관 대신 작은 석회암 관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사람이 죽으면 우선 구덩이에 매장하고, 시간이 지나 뼈만 남아 있게 되면 꺼내서 공동묘지에 있는 이런 유골함으로 옮겼다. 이 유골함은 기하학적인 모양의 장식이 되어 있고 ‘서기관 Yo-ezer(Yo-ezer the scribe)’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해 문서 조각 Fragment of a Scroll 1세기
사해의 북서안에 있는 고대 유적 쿰란(Qumran)에서 발견된 구약성서 두루마리 조각으로 20세기 고고학 역사상 최고의 발견 중 하나로 꼽힌다. 1947년 양치기 소년이 부근에 있는 사막의 동굴(오른쪽 사진)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이 지역에는 기원전 8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기원전 2세기부터 유대교의 한 파인 에세네(Essenes) 파가 공동생활을 하면서 사해문서를 남겼다.
사해 문서의 약 1/4은 구약성서에 해당하는데 히브리 어와 아람 어로 필사되어 있었다. 폭 44cm, 길이 1-8m의 양피지 두루마리들에 잉크로 글씨를 쓴 다음 린넨으로 감싸 도자기 항아리에 보관했다. 일부는 파피루스에 쓴 것도 있고 동판에 새겨진 것도 있다. 유적 내 11곳에서 조금씩 발견됐는데, 아마 훗날 로마 군이 쳐들어 왔을 때 문서를 보호하고자 항아리에 넣고 여기저기에 분산시켜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제작한 연대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1세기 사이로 추정된다. 이 조각에 적힌 글은 시편 일부인데, 성서의 시편과 유사한 에세네 파의 시편 조각이다.
두루마리들의 구약 부분에는 에스더(Esther) 서를 뺀 구약성서가 모두 들어있다. 메시아의 서, 하박국의 주석서(註釋書), 계율의 지도서, 라메크의 묵시록 등도 수록되어 있었다. 이 사본들은 이전까지 제목만 알려졌고 실물은 사라졌던 것인데, 사해에서 나온 구약성서는 오늘날의 것과 거의 같다.
시리아 Syria
시리아는 세계 4대 고대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권으로 5000년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중해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연결하는 통상의 요충지이자,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위치해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려 왔다.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문명들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며 페르시아가 멸망한 다음에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부하인 셀레우코스가 안티오키아를 수도로 셀레우코스(셀루키드) 왕조를 건설했는데 파르티아, 이집트 등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몰락해 버렸고 기원전 64년 로마 제국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함에 따라 로마 제국에 귀속되었다. 그 후에도 시리아는 동방 속주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하였으며 그 수도인 안티오키아는 속주시리아의 수도로서 외항 셀레우키아를 통한 외부와의 교역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청동상 Bronze Statuettes 초기 청동기, 기원전 2900-2500년
텔 타이나트(Tell Ta'yinat) 유적의 보관소에 숨겨져 있던 세 남성상과 세 여성상 중 하나로, 시리아 부근의 사람 모양 주물 중 초기의 것이다. 남성상들은 넓은 벨트와 은 합금으로 만든 헬멧을 쓰고 있는데, 아마 원래는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벌거벗은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묶어 쪽지로 헤더밴드를 두른 모습으로 표현돼 있는데, 팔을 교차하고 손을 가슴에 올리고 있다. 이것은 고대에서 임신을 상징하는 공통의 포즈이다. 이런 독특하고도 섬세한 주조 기술은 이미 기원전 3000년대 초부터 시리아의 예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키르벳 케라크 웨어 크라테르 Krater of Khirbet Kerak Ware 초기 청동기, 기원전 2900-2500년
오늘날 이스라엘의 갈릴리 해 남부 해안 주변에 위치한 키르벳 케라크(Khirbet Kerak, 또는 ‘Beth Yerah’라고도 함) 유적은 초기 청동기(기원전 3000-2000년경)부터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450)에 이르기까지 긴 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이 유적은 동부 지중해에서 가장 큰 유적 중 하나로 꼽히는데, 특히 이곳에서 처음 발견돼 다른 유적의 유물과 구별되는 초기 청동기의 도자기 양식을 키르벳 케라크 웨어(Khirbet Kerak ware)라고 한다.
키르벳 케라크 토기들은 손으로 만든 후 겉면과 안면을 반짝거리는 광택재로 마감했다. 우선 안쪽 면에 보이는 붉은 색 흙으로 전체 모양을 만들고 무늬를 새긴 다음, 소성하는 과정에서 특수 처리해 겉면에 검정으로 색을 냈다. 이 커다란 항아리는 전형적인 가로, 세로, 지그재그 무늬로 장식돼 있다.
키프로스 병 Cypriot Juglet 철기, 기원전 1000-500년
고대에 키프로스 섬에서 만들어지고 시리아로 수입된 토기이다. 검은색과 붉은 색의 두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기 때문에 2색(bichrome) 토기로 분류된다. 몸체를 구형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표현에 동심원을 그리는 기하학적 무늬를 칠해 도공의 뛰어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고대 키프로스 섬에서는 동심원 무늬를 토기에 그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여성 스핑크스 석상 Female Sphinx 철기, 기원전 800년
이 누운 스핑크스 상은 시리아 지역에서 제조한 것으로 머리의 위치가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턱을 조금 틀어 들고 자연스럽게 오른쪽을 바라보는 이런 자세는 여성 스핑크스 상에서 종종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 스핑크스는 머리에 띠를 두르고 이것들 뒤에서 단단하게 매듭을 지어 고정했다. 곱슬곱슬한 머리칼이 가슴으로 흐르며, 몸통에는 못을 박아 고정할 수 있는 구멍이 남아 있어 이 석상이 본래 큰 왕좌의 팔걸이에 부착하는 부분이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집트에서는 스핑크스가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동물로 왕권의 상징, 선한 자의 보호신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스핑크스는 사악한 여성 괴물이었다.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독수리 날개가 있었으며 욕정 때문에 미소년을 범했던 테베 왕 라이오스를 벌하기 위해 헤라가 보낸 괴물이라고 믿었다. 위 시리아 석상의 스핑크스의 모습은 그리스와 유사하다.
승리한 아시리아 전사 Victorious Assyrian Soldiers 철기, 기원전 750-725년
아시리아 인들은 시리아 북쪽의 텔 타이나트(Tell Ta'yinat) 지역을 정복한 후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궁전이나 공공 건축물에 이런 부조를 만들어 장식했다. 이 부조는 싸움에서 이긴 아시리아 전사들이 저마다 손에 패배한 적군의 머리를 들고 죽인 적군의 수를 세는 곳으로 옮기는 장면을 남긴 것이다. 병사들의 발밑에는 목이 잘려 없어진 몸통 부분들이 남겨져 있다. 각 전사들은 투구를 쓰고 어깨에 활과 화살 통을 차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화살 세 개를 쥐고 있다.
이런 부조는 훗날 아시리아가 쇠퇴한 후 조각된 면이 아래로 가도록 해서 포장도로에 까는 등 재사용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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