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의 생애
오정희(吳貞姬, 1947~)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난다. 부모가 해방 무렵 황해도에서 월남해 온 탓에 살림이 곤궁했는데, 1950년(4세) 6 · 25가 터졌을 때 아기를 가진 어머니 때문에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인공 치하에서 몇 달을 보냈다가, 이듬해 출산 후 몸조리조차 못 한 어머니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오정희 가족이 간신히 도착한 곳은 충남 홍성으로, 이곳에서의 기억을 훗날 오정희는 <유년의 뜰>로 형상화한다.
1954년(8세)에는 홍주국민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아버지가 인천 석유 회사에 취직되어 인천 중앙동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그의 가족들이 살았던 집은 일명 ‘차이나 타운’이 내다 보이는 작은 일본식 집이었다. 이 시기 오정희는 낯선 도시 생활과 열등감 때문에 방황하고 책과 연재소설을 읽으며 지냈으며, 집 근처 언덕의 중국인촌에 세 들어 사는 ‘양공주들’을 보면서 상상의 세계를 펼친다. 이것이 뒷날 <중국인 거리>에서 그려진다. 1956년(10세) 어느 날, 오정희는 담임선생으로부터 난생 처음으로 글을 잘 썼다는 ‘칭찬’을 받는다. 이후 오정희는 글쓰기에 재미를 붙여 ‘글 잘 쓰는 아이’로 소문이 난다.
1959년(13세)에는 아버지가 전근되어 서울 마포구로 이사하고, 중학교 입시에 매달리는 한편 니체, 헤세, 지드, 도스토예프스키, 이광수, 김동인, 박화성, 최정희, 황순원 등의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이듬해에는 이화여중에 입학하여 정구부에 들어가 교내 선수로 활약하였지만, 운동선수의 고등학교 진학 특전 제도가 없어지는 바람에 3학년 때부터 다시 공부에 매달려 1963년(17세) 이화여고에 입학하였다.
1966년(20세) 오정희는 작가가 되겠다는 품을 품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김수영, 김현의 강의를 듣는다. 곧 1968년(22세)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첫 발을 내딛고, 이후 1978년(32세)까지 <주차>, <산조>, <봄날>, <관계>, <목련초>, <안개의 둑>, <야곱의 꿈>, <꿈꾸는 새>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79년(33세)에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중국인 거리>와 <저녁의 게임> 등의 문제작을 내놓고, <저녁의 게임>으로 이상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오정희는 많은 소설와 창작집을 내놓고, 동인 문학상 등 굵직한 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들어 그는 “낡은 거푸집 하나로 똑같은 물건들을 거듭 찍어내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후 외출을 삼가고 한동안 소설을 발표하지 않다가 1994년(48세) 발표한 작품이 <옛우물>이다. 이후로도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오정희의 소설
<완구점 여인>
1968년(22세)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으로, 오정희의 등단작이다. 가족과 주변 세상으로부터 내동댕이쳐진 한 소녀의 소외감, 고아 의식, 좌절감, 방황, 그리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구체적인 사건의 서술 없이 몇몇 삽화와 이미지만이 몽롱하게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오정희는 <완구점 여인>에서 자신에게 깊숙이 자리한 불안과 고뇌를 미화하지 않고, 예리한 칼날로 환부를 도려내듯 속속들이 파헤쳐 보인다. <완구점 여인>의 ‘소녀’를 비롯해 오정희의 등장인물들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폐적 몽상에 잠기거나 충동적 행동을 시도하곤 하는데, 그런 행위로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하지는 못한다. 때문에 오정희의 소설들은 거부당한 영혼, 단절된 삶, 죽음의 냄새들로 채워지곤 한다. 이렇게 끊임없는 결핍을 견뎌나가는 작중 인물들 때문에 독자들은 때로 원인 모를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정희 문학의 한 특징이요, 이 특징은 등단작인 <완구점 여인>에서부터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완구점 여인>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가 어릴 때 집에 들어온 가정부와 재혼한다. 계모는 쉴 새 없이 이복동생들을 낳았고, 차츰 아버지와 계모는 소녀에게 무관심해 진다. 그러던 중 동생의 죽음까지 겪자 소녀는 세상에 전면적인 거부감을 품게 되고, 이는 도벽, 살해, 방화 욕구 등으로 표현된다.
언제부터인가 소녀는 휠체어를 탄 완구점 여인에게 매혹된다. 소녀는 날마다 불구의 여인을 바라보거나, 교실 서랍에서 훔친 돈으로 완구점에 있는 오뚝이를 사 모은다. 소녀는 그 여인을 보면서, 휠체어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은 소아마비 동생을 떠올린다.
어느 날 소녀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핑계로 완구점 여인과 나란히 누워 관능적인 접촉을 하는데, 이후 소녀는 심한 수치심과 관능의 유혹을 동시에 느끼면서 밤마다 그 여인의 꿈을 꾼다. 그러나 소녀는 여인의 모습을 훔쳐보거나 편지를 쓸 뿐, 여인을 찾아가지는 못한다. 얼마 뒤 완구점 유리문에는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이 붙고, 그 자리에 새로 다방이 들어선다.
<중국인 거리>
1979년(33세) <문학과 지성>에 발표한 작품으로, 오정희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자전적 소설이다.
오정희는 이 작품에서 피난살이 중에 ‘중국인 거리’ 속에 살게 된 한 소녀의 눈을 통하여 전후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흑인 병사와의 국제결혼을 꿈꾸던 양공주인 ‘매기 언니’의 죽음과, 커서 양갈보가 되고 말겠다는 결심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어린 소녀들의 슬픈 감수성을 통해 한국 전쟁이 가져온 비극과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어린 영혼에게 준 상처를 어린 화자를 통해 담담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작품 안에서 전쟁이 던져주는 생체기는 결국 성장하기 위한 통과 의례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주인공인 ‘나’는 전쟁이 준 상처들과 가난과 죽음을 통해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개체에서 하나의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유년기 체험에 대한 기록으로 일종의 교양 소설, 혹은 성장 소설 색채를 지니게 된다. 사춘기의 문턱에 선 소녀는 미군들에게 몸을 파는 양색공주의 화려한 모습에 매혹되기도 하고, 중국인 청년에게 아련한 동경을 품는가 하면, 할머니의 죽음을 겪고, 아이를 출산하는 어머니의 처절한 비명을 들으며 첫 생리를 경험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성의 정체성에 막연하게나마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성장의 과정이다.
<중국인 거리>의 큰 특징인 성장 소설적 형태와 회상의 형식을 가능하게 하는 효과적인 기법은 유년기 화자를 설정했다는 점이다. 한 소녀가 성인으로 변모해 가는 통과 의례를 유년기 화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해인초 냄새, 회충약에 의한 배앓이, 새끼 고양이를 잡아먹는 고양이에 대한 묘사는 기억의 가장 깊숙한 저층에 자리 잡고 있는 원체험으로써 소설의 구체성을 획득하게 하는 데에 공헌하고 있다.
<중국인 거리>
‘나’의 식구들은 아버지의 일자리를 따라 피난지로부터 항구 도시인 인천 외곽에 있는 중국인 거리로 이주한다. 그곳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건물들과 낮선 모습의 중국식 ‘적산가옥’, 그리고 기지촌과 미군 부대로 둘러싸여 있는 황폐한 도시이다. ‘나’는 우연히 건너편 이층집 창문에서 중국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비애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나’는 양갈보인 매기 언니를 보기 위해 아침마다 치옥이네 찾아 가고, 매기 언니의 방에서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한다. 자신도 양갈보가 되겠다는 치옥이의 결심을 듣고는 자신 역시 치옥이처럼 자유로웠으면 하고 바란다. 척박한 환경에서 되바라지게 자란 ‘나’와 다른 아이들은 고양이의 죽음을 보면서 새삼 ‘죽음’이라는 것을 목도하고 충격에 휩싸이기도 한다.
어느 날, 행복해 보였던 매기 언니는 술 취한 검둥이가 베란다에서 던져버리는 바람에 떨어져 죽는다. 또 나날이 정정해지는가 싶던 할머니는 쓰러져 할아버지가 계신 시골로 보내진다. 다음날 ‘나’는 할머니가 소중히 여기던 반닫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깨진 비취나 동정 따위가 들어있는 손수건 뭉치를 꺼내 들고 공원으로 올라가 장군의 동상 부근 오리나무 밑에 깊이 묻는다.
봄이 되고, ‘나’는 일 년 동안 키가 한 뼘이나 자란다. 내내 주변을 맴돌던 중국인 남자는 내게 물감 들인 빵과 용이 장식된 등이 든 종이 꾸러미를 안겨 준다. 한편 어머니는 나의 불길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여덟 번째 아이를 무사히 낳는다. ‘나’는 그 순간 핏속에 순처럼 돋아 오르는 무언가를 감지한다. 그리고 절망감과 막막함 속에서 초조를 맞이한다.
<유년의 뜰>
1980년(34세) 발표한 작품으로, 역시 오정희 자신의 자전적 체험을 담은 소설이다. 화자는 역시 어린 소녀로, <완구점 여인>에 나오는 아이처럼 도벽과 게걸스러운 탐식 습관이 있는 아이이다.
‘나’는 방에 갇힌 채 지내다가 주검으로 들려 나온 주인집 딸 ‘부네’를 보고 호기심을 보이고, 대책 없는 허기를 느끼며 자란다. 이런 가족의 뒤틀린 풍경과 과거의 기억들은 집안의 ‘거울’에 낱낱이 비친다. 어느 날 이 거울이 깨지자 가족은 이웃 동네로 이사를 가고, 동시에 소식이 없던 아버지가 돌아온다.
‘거울’은 오정희가 즐겨 사용하는 소도구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거울’은 대개 참회나 환상적 나르시시즘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에 반해 오정희의 ‘거울’은 등장인물들의 하찮은 행동과 허위 의식, 광기와 절망, 그리고 삶의 권태와 고통 등 복잡 다기한 세계를 비추는 구실을 하는 점이 특징이다.
<유년의 뜰>
일곱 살인 ‘나’는 노랑눈이라고 불린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강제 징병되어 나가자, 정신없이 마을로 피난을 와서 조그마한 방 한 칸에서 할머니와 어머니, 오빠, 작은 오빠, 언니, 동생과 살고 있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저녁마다 거울에서 화장을 하고 일하러 간다. 오빠는 작은 방을 꽉 채우듯이 시위라도 하듯 큰소리로 영어책을 읽어 나간다. 동생은 너무나도 마르고 연약해서 죽을지 모른다.
‘나’는 한밤중에 나와 앉아 부네의 방을 바라보곤 한다. 부네는 주인집 외눈박이 목수의 딸이었는데, 부네가 집을 나가 살림을 차리자 목수는 부네를 끌고 와 방에 가둬 놓았다. 그래서 부네의 방에는 항상 큰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부네가 언제부터 그 방에 갇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볼 때에는 부네의 방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그래서 부네에 대한 사람들의 추측만 무성하다.
폭군인 오빠는 엄마가 외박을 하면 언니를 때려서 코피를 나게 만든다. 언니는 항상 오빠의 그런 폭력에 대항하지 않고 묵묵히 맞고만 있다. 또 할머니는 가끔 임자 없는 닭을 잡아 온다.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면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말했고,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아버지를 기다린다.
어느 날 가을, 부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부네가 정말 그 방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쟁이 끝나 가는지 피난민들은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나고, ‘나’의 가족도 이사를 한다. ‘나’는 언니가 다니는 학교에 입학을 한다. 여름이 갈 무렵, 학교로 아버지가 찾아오지만 반갑지가 않고, 자꾸 서러움으로 눈물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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