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의 생애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신경림(新庚林, 1935~)은 충북 충주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응식(應食)이며, 일찍 개화한 지식인 집안에서 비교적 부유하게 자랐다. 노은국민학교 4학년이던 1946년(12세) 당숙과 함께 목계에 간 적이 있는데, 전부터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서 낙원의 이미지로 나오곤 하던 그 곳의 풍경을 신경림은 공책 한 귀퉁이에 적어 둔다. 이것이 선생님의 눈에 띄어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1948년(14세)에는 충주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하는데, 담임이자 문예반 지도 교사이던 정춘용으로부터 아낌없는 격려를 받았다. 이 시기 신경림은 이광수, 김동인, 이기영 등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문학적 소양을 쌓는다. 그런데 3학년 때인 1950년(16세)에 6 · 25가 터져 피난을 가야 했고, 몇 달을 미군 하우스 보이고 지내다가 다시 가족들과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전쟁 중 그의 집은 이미 풍비박산 나 있었고, 집안에서 운영하던 광산도 폐쇄되었으며, 당숙이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특히 신경림은 광산에서 헌병이 인민군을 죽이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는데, 이 경험은 훗날 시 <폐광>으로 형상화되었다.
문단 데뷔와 오랜 방황
중학교 졸업 후에는 취업이 보장되는 사범학교에 다니다가 정춘용의 권유고 그만두고 다시 충주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학업에 마음을 붙이지 못해 방황한다. 이때 국어 교사이던 유촌 선생이 시를 써 오라는 벌을 내렸고, 그 시를 통해 유촌의 아들인 유종호를 만나 나중까지 든든한 후원을 받는다. 고등학교 시절 신경림은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백석, 임화, 이용악, 오장환, 정지용, 윤동주, 청록파의 시를 밤새워 읽곤 했는데,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백석와 정지용의 시였다. 신경림은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읽고는 책을 떨어뜨릴 정도로 감동해서, 나중에 백석 같은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1955년(21세) 신경림은 동국대 영문과에 입학하여 유종호와 함께 하숙을 한다. 집안 형편이 더욱 기울어 버려 고학을 하면서도 1956년(22세) <문학 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그런데 이즈음 좌익 책을 읽던 친구가 검거되자 신경림은 사회와 문단에 대한 불신을 품어 낙향하고, 1960년대 초까지 강원도를 떠돌며 광부, 농부, 장사꾼, 인부, 강사 등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 평소 존경하던 정치가 조봉암이 사형되자 신경림은 아예 시도 안 쓰고 문학 서적도 읽지 않고 지낸다.
<농무>
1965년(31세) 영어 강사 노릇을 하던 신경림은 우연히 길에서 술에 취한 시인 김관식을 만났는데, 그는 막무가내로 “네가 안 쓰면 나도 안 쓰겠다.”며 억지를 피워 신경림을 반 강제로 서울로 다시 끌고 온다. 이렇게 다시 서울 홍은동 김관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비로소 신경림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때 쓴 시편들은 훗날 <농무>에 실린다.
1970년(36세) 신경림은 긴 공백을 깨고 유종호의 소개로 <창작과 비평>에 <농무>를 비롯한 시 몇 편을 발표한다. 민중적 화자를 내세워 민중의 현실과 정서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그의 사실주의적 작품들은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1973년(39세) 300부 한정으로 자비 출판한 첫 시집 <농무>는 발간되자마자 모조리 팔렸다. 여기에 실린 대표적 시편으로는 <겨울밤>, <시골 큰집>, <파장>, <농무>, <그날>, <폐광>, <갈대> 등이 있다. 이렇게 신경림은 <농무> 한 권의 시집으로 단번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자리 잡았고 제1회 만해 문학상까지 거머쥐었다. 나중에는 영역판 <Farmer's Dance>가 출간되어 미국 코넬대학교의 교재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신경림은 여전히 어렵고 궁핍한 생활을 한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낸 아내는 <농무>가 나오는 것도 못 본 채 죽고, 4년 후에는 어머니가, 또 이듬해에는 병중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다.
<새재> 이후의 민요시
1970년대 후반부터 신경림은 민중적 화자를 내세워 민중의 삶과 언어로 그들의 정서를 표현하려는 태도가 더욱 굳건해져 아예 민중이 스스로 쓰고 읽는 시를 지향한다. 그 과정에서 민요를 발견하고, 민요의 전통을 차용하여 시의 민중성을 넓혀 나갔다. 그 결실이 1979년(45세)의 두 번째 시집 <새재>로, 특히 <목계장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시에 이야기 요소를 도입하여 서사 지향성을 드러내는 단편 서사시, 이야기시, 장시의 세계로 나아간다. 1978년(44세) 발표한 <새재>를 비롯해 <남한강>(1981), <쇠무지벌>(1985), <북으로 간 친구>(1985) 등으로 이어졌다.
1984년(50세)에는 ‘민요 연구회’를 만들어서, 그 동안 혼자 해 오던 민요 채집을 문화 운동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민요 연구회 활동은 큰 성과를 얻어 국내 여러 대학에 민요 연구 동아리가 생기고 지역 문화 단체에도 잇달아 민요 모임이 생겼다. 1985년(51세)에는 발품을 팔아 모은 민요들을 <민요 기행 1>로 발간해 큰 호응을 얻었으며, 통일을 노래한 본격적인 민요 시집 <달 넘세>를 내놓았다. 이어 1987년(53세)에는 장시집 <남한강>을 내고, 1988년(54세)에는 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를 통해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삶에도 관심을 보였다.
1989년(55세) <민요 기행 2>를 낸 후 1990년(56세)에는 기행 시집 <길>을 내놓는다. 이 시집은 그 동안 저도 모르게 민요의 형식을 도식적으로 적용하려고 들던 강박증에서 벗어나, 비로소 “민요의 알맹이가 고스란히 녹아든 새로운 언어와 문법”에 바탕을 둔 민요시들을 담고 있다.
이후로도 신경림은 시집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등을 내놓고 각종 문학상, 문학 협회 간부, 대학 석좌 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경림의 시
초기 시 - <갈대>
<갈대>는 1956년(22세) <문학 예술>에 발표한 시로, 신경림의 데뷔작이다.
<갈대>에서 볼 수 있듯 신경림의 초기 시는 ‘슬픔’을 바탕으로 한 서정성에 기대어 인간 본질의 탐구에 주력하여 인간 존재의 비극적인 생명 인식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그것이 갈대의 ‘울음’으로 나타난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진술이 이 시의 핵심일 터인데, 그 ‘울음’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화자는 갈대의 온몸을 흔드는 것이 ‘바람도 달빛도’ 아니고 ‘울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1960년대 이후 신경림의 시는 참여시 쪽으로의 변모를 겪어 암담한 농촌 현실을 묘사함으로써 시의 영역을 확대한다. 인간 존재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에 기초한 막연한 울음이 가난한 자들의 울분으로 구체화되어 좀 더 우렁차고 도도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갈대>
언제부터인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
<농무>의 시
<겨울밤>
1965년(31세) <한국일보>에 발표한 후 1970년(36세) <농무>에 수록한 작품이다.
오랜 방황 이후 돌아온 신경림의 본격적인 문학적 관심은 농촌에 대한 관심, 즉 농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관심과 애착으로부터 출발한다. 신경림은 자신의 창작 지침을 농촌의 실상을 도외시한 농촌 문학이란 그 어떤 존재 가치도 있을 수 없음을 직시하고, 문학에 있어서 농촌이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역사적 · 사회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당위로 삼는다. <겨울밤>는 그가 등단 이후 거의 10년 동안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농촌의 공동체적 삶을 체험한 후 다시금 시를 쓰기 시작한 무렵의 작품으로, 그의 문학적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겨울밤>에서 시적 화자는 장날을 앞두고 장터에 모인 마을 사람들이 추운 겨울밤을 술과 노름으로 지새우며 고달픈 삶의 회포를 푸는 모습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담담하게 고백하듯 진술하고 있다. 시적 대상인 ‘우리’가 전혀 분리되지 않은 채 제시됨으로써 화자에 의해 관찰된 농민들의 현실적 삶은 고스란히 화자의 내면에 수용됨으로써 솔직한 감정 표현으로 융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농민들의 삶의 대변자로서 시인의 존재를 부각시킬 때, 작품에서 느껴지는 슬픔과 회한의 정서나 현실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과 비원(悲願)의 행위들은 모두 집단적인 정서로 보편화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화자가 진술하는 이야기들은 그들의 삶의 현장이자 생활 주변의 현실로서 진실성과 전형성을 획득한다.
이처럼 농민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정서와 결합하여 개인의 목소리로써 드러날 수 있는 형태가 바로 신경림의 ‘농민시’의 본질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며, 후일 <농무>라는 작품을 탄생하게 하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경림은 우리 고유의 ‘이야기꾼’으로서 전통적인 시가의 원형을 간직한 시인이다. 그의 초기 시에서 나타나는 시적 방법론은 이야기의 전달이라는 차원에 국한되어 있지만, 농촌의 현실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그의 상상력이 농촌 민중들의 정서에 일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민중의 노래를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겨울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농무>
1970년(36세) <창작과 비평>에 발표하고 시집 <농무>의 표제시로 삼은 작품이다. 암담한 농촌을 배경으로 가난한 자의 울분을 노래하면서도 그 울분이 선동적이거나 전투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지는 않는 것이 특징이다. 산업 구조의 변화로 야기된 농민들의 소외된 삶의 정경을 통해 그 집단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 시적 리얼리즘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농무(農舞)’는 농민들의 춤이고, 춤에는 가락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시에서 춤과 가락은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짓는 농민의 발버둥치는 모습으로, 원통하고 답답한 심정의 발로(發露)이다.
‘막이 올랐다’로 시작되지 않고 ‘막이 내렸다’로 시작되는 것은 이 시가 두렛일의 흥겨움보다도 농민의 자조적인 한탄과 원한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예고라 할 수 있다.
서사적인 골격이 분명하지 않지만, 이 작품의 전개는 일정한 이야기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윤영천에 의하면 신경림 시의 이야기적 성격은 10여 년의 침묵 끝에 이루어낸 ‘역사와 사회에 대한 시인 의식의 성장’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197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분해되어 가는 농촌의 모습을 떠올려 주는 이 시에서 농민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여러 구절에서 감지된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든지,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이러한 감정 토로는 매우 직설적이어서 차라리 산문적인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것은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는 표현이다. 자조와 한탄이 ‘신명’으로 전환되는데, 여기에는 분노의 감정이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섬뜩하게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다. 농민의 비애가 그만큼 심화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가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이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파장>
1970년(36세)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후 시집 <농무>에 수록한 작품이다. 산업화에 따라 파생되는 농촌의 이농문제를 날로 초라해지는 시골 장터의 모습을 통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농촌의 장터가 끝나갈 무렵을 배경으로 농민들의 구수한 인정과 함께 소외되어 가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제1~4행에는 농민들의 순박한 인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제5~9행의 농민들은 ‘가뭄’과 ‘조합 빚’에 힘겨워하고, ‘서울’을 그리워한다. 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노름과 토색질을 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10~13행에서 결국 농민들은 아픈 현실을 수용하고 고무신과 조기를 사들고 절뚝이며 집으로 향한다. 주제의 직접적인 표출을 자제하고 시적인 형상화를 통해 황폐화되어 가는 농촌의 현실을 그려 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파장>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민요시, 도시 빈민 소재의 시
신경림은 시집 <새재> 등 1970년대 후반 이후 발표한 민요시 및 이야기시, 서사시, 장시, 그리고 1988년(54세) 낸 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에서와 같이 도시 빈민들의 삶을 노래한 작품들이 속한다.
<목계 장터>
1979년(45세) 두 번째 시집 <새재>에 수록한 작품이다. 신경림의 시 세계의 한 아름다운 거점이 되고 있는 ‘목계 장터’를 제재로 하고 있는데, ‘목계’는 남한강안(南漢江岸)의 수많은 나루터 중에서 가장 번잡했던 곳이다. 목계를 중심으로 한강마을 사람들의 억센 생명력을 고도의 상징과 비유를 통해 형상화시키고 있다.
<목계 장터>는 신경림이 민요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던 한 시기 가운데 가장 빼어난 성과를 이룩한 작품이다. 민요의 기본 율조인 4음보를 바탕에 깔고 3음보 가락을 적절히 배치해 지루함을 조절하고 있으며, ‘하고’, ‘하네’, ‘-라네’ 등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방랑과 정착의 심상이 교차하는 가운데 생동감 있게 내용을 전개하고 잇다.
특히 목계 나루를 무대로 한 풍물과 그에 따른 어휘들이 토속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끊임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뿌리 뽑힌 민중들의 삶의 정서를 물씬 풍기게 한다. 화자는 서울로 가는 길목에서 큰 장터를 이루었던 목계가 근대화로 점점 퇴색해 가는 대목에 서서 갈등을 느낀다.
‘구름’, ‘바람’으로 대표되는 방랑의 심상과 ‘들꽃’, ‘잔돌’로 표상되는 정착의 심상 사이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 그의 마음은 ‘산 서리 맵차’고 ‘물 여울 모진’ 이 세상에서 차라리 천치(天痴)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고 싶지만, 몸은 끝없이 떠돌 수밖에 없는 처지였을 터이다.
<목계 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고향길>
1981년(57세) <한국 문학>에 발표한 작품이다.
<고향길>은 무엇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바람은 결코 바람직한 바람이 아니며, 첫 시행부터 단정적인 거부와 부정이 스며 있다. ‘고향길’의 기쁨과 설렘은 자취도 없고, 오히려 버리고 싶고, 잊고 싶은 고향길이다. ‘고향길’이 고향으로 향해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시에서 ‘고향’은 설렘, 평화, 안정, 귀향점이 되지 못하며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그 그리움은 숨어들어야 하는 아픔을 동반하고 있다. 화자가 고향에서 되고자 하는 것은 ‘가윗소리 요란한 엿장수’,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 ‘길 잘못 든 나그네’이다. 이와 같은 시어들이 주는 삶의 모습은 요란한 허세를 부리나 실속 없는 초라한 삶, 헛된 욕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삶,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삶 등의 의미를 지닌다.
‘~려네’의 애상적 어조에는 삶에 대한 슬픔과 애틋함이 녹아들어 있으며, ‘툇마루’, ‘쥐오줌 얼룩진 벽’, ‘수유나무’, ‘우물’, ‘장길’, ‘고무신집’, ‘가겟방’, ‘쇠전마당’ 등의 이미지를 통해 정든 장소를 하나하나 열거하는 시상의 전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화자의 처지를 더욱 안타깝게 느끼게 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고향길>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여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마시고/ 가윗소리 요란한 엿장수 되어/ 고추 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비 수북한 쇠전 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만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되어 떠나려네
<가난한 사랑 노래>
1988년(54세) 발간한 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의 표제시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감정마저도 외면하고 살아야 하는 한 젊은이의 고통스런 삶을 통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삶에 대한 시인의 깊은 연대 의식과 유대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신경림은 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에서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삶으로 눈길을 돌려, 농민 시인에서 민중 시인, 노동 시인으로 발돋움하였다.
화자는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이다.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어머니가 보고 싶고 고향 집이 그리워도 돌아갈 형편이 못 된다. 새벽 두 시에 잠을 깬 그에게 어디선가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화자 역시 밤새 기계 앞에서 시달려본 경험이 있기에 그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화자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문제는 가난이다. 가난 때문에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고, 그립고 보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면, 그리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면, 결국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가난한 사랑 노래─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1990년대 이후의 시
신경림은 1990년대 시편들에서 개개의 욕망들이 어우러지고 부딪치고 서로 밀어내며 만들어내는 사람살이를 그윽하게 관찰한 성찰의 언어들을 활용하여 공생의 윤리를 노래하였다.
<나무를 위하여>
1993년(59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에 수록한 작품이다. 미약한 존재들이 연대를 통해 현실의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는 시로, 시련과 고통을 단합과 연대로 이겨 낸 나무들이 숲과 들판에 떼 지어 서는 모습을 통해 희망찬 미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고 있다.
<나무를 위하여>
어둠이 오는 것이 왜 두렵지 않으랴/ 불어닥치는 비바람이 왜 무섭지 않으랴/ 잎들 더러 썩고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가지들 휘고 꺾이는 비바람 속에서/ 보인다 꼭 잡은 너희들 작은 손들이/ 손을 타고 흐르는 숨죽인 흐느낌이/ 어둠과 비바람까지도 삭여서/ 더 단단히 뿌리와 몸통을 키운다면/ 너희 왜 모르랴 밝는 날 어깨와 가슴에/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라는 걸/ 산바람 바닷바람보다도 짓궂은 이웃들의/ 비웃음과 발길질이 더 아프고 서러워/ 산비탈과 바위너설에서 목 움츠린 나무들아/ 다시 고개 들고 절로 터져나올 잎과 꽃으로/ 숲과 들판에 떼지어 설 나무들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1998년(64세) 출간한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의 표제시로, 원점 회귀의 삶의 본질에 대한 포착하여 유년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 지니는 의미를 노래한 작품이다.
화자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경험들을 진술하고 있다. ‘램프불’, ‘칸델라불’, ‘전등불’, ‘실루엣’과 같이 ‘불’을 소재로 하여 화자의 과거 회상의 사유 과정이 순서대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어려서 나는~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에서는 어린 시절의 한정되고 부족한 경험 속에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세상의 전부, 즉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대상이자 의미 있는 대상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또한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부분에서는 어른으로 성장한 이후에 넓은 세상에 나아가 많은 경험을 해 보았지만 결국에는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원초적 사랑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깨닫는 것으로 귀결(회귀)되고 있다.
한편 시의 처음 부분(1~4행)을 다시 끝부분인 22행부터 변화를 주면서 반복함으로써, 삶이란 결국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작품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성장하면서 점점 더 넓은 세상으로 향했던 화자의 시선이 결국 유년시절에 보았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삶의 근원과 삶의 근원이 되는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주는 작품이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들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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