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문학테마 URL 복사

현대문학 테마 83. 1960년대 참여 · 순수 논쟁

2022. 1. 6. by 솜글

1963년 김우종과 이형기의 논쟁

논쟁의 시작

미완의 혁명4 · 19 이후, 우리 문단에서는 문학과 삶이 하나이며 작가는 사회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이 일어난다. 이에 따라, 문학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퍼져 나갔다.

이 무렵인 1963, 김우종은 <파산의 순수 문학>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한국 문학이 이제 대중과 대화해야 한다고 진단하고, 그러자면 문학은 아직까지도 전쟁의 상처로 고통 받는 민중의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이제 순수와 결별할 때라는 것이다. 이 글로 인해 우리 문단은 본격적인 참여 · 순수 논쟁의 시대로 들어선다.

논쟁의 전개

김우종의 글이 나온 후, 같은 해 김병걸은 <순수와의 결별>에서 앙드레 말로, 카뮈, 사르트르 등 서구 문학에 나타난 보편적 미학 이론을 근거로 하여 현실 참여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순수 문학이 내세우는 것들은 그저 몽상의 문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한국의 행동 문학 작가로 김정한과 선우휘를 꼽으면서 김정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김병걸의 글로 인해 분단의 분위기는 차츰 참여 문학 쪽으로 쏠리는 듯하다.

그러나 서정주는 <사회 참여와 순수 개념>을 내놓고, ‘참여를 강조한 과거 문학이 동양적 전통 정신을 무시하고 서구 사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한국의 전통적 문학은 오직 순수 문학뿐이며, 갑자기 참여 문학을 외치는 것은 행여 사회주의적인 참여로 기울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한다.

김우종 대 이형기 - 김우종의 참여론

김우종은 다시 <유적지의 인간과 그 문학>에서 참여 문학론을 펼치는데, 이번에는 좀 더 실증적인 예를 들기 위해 당시의 한국 소설들을 구체적으로 분석 · 평가한다.

이 글에서 김우종은 오영수의 <안나의 유서>, 손창섭의 <포말의 의지>, 이범선의 <오발탄>, 강신재의 <임진강의 민들레>, 전광용의 <꺼삐딴 리>, 선우휘의 <도박>,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 정한숙의 <끊어진 다리>, 박경리의 <김 약국의 딸들> 1960년대 소설들이 대개 현실을 보여 주는 문학’, ‘위안의 문학’, ‘기도드리는 문학수준에서 자족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런 문학은 현재 한국 현실에 도움이 되지 못하며, 순수 문학론자들은 순수를 부르짖지만 가장 비순수하다고 비난하였다.

사진 출처 : 한국대학신문(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7744)

김우종 대 이형기 - 이형기의 순수론

이듬해인 1964, 이형기는 <문학의 기능에 대한 반성순수 옹호의 노트>를 발표한다.

이형기는 먼저 해방 전후 이미 마무리된 순수 · 참여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 자체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참여론자들이 순수 문학론자들을 두고 현실을 외면한다며 비판하지만, 김동리 등의 순수 문학 작품에서 현실 외면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순수 문학과 현실 외면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 그는 김우종, 김병걸 등 참여론자들이 양자 택일의 흑백 논리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고, 문학은 현실의 효용적 목적의 도구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사진 출처 : 다음 블로그(https://blog.daum.net/rina507/3118605)

이형기의 시

이형기는 시인으로도 유명한데, 특히 정감의 미학 추구하며 감각성을 살려내기 위해 언어의 치밀한 구사에 힘썼지만 수사적으로도 화려하려 주요 서정 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대표작으로는 <낙화>, <폭포> 등이 있다.

<낙화>(1963)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 터에 물 고인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폭포>(1963) -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1967년의 참여 · 순수 논쟁

논의의 동기

196710,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무는 제35회 대회를 연다. 여기서 김붕구가 <작가의 사회>를 발표하며 새삼 참여 · 순수 논쟁을 벌임으로써, 1963년 김우종과 이형기의 논쟁에 이은 참여 · 순수 문학 논쟁이 다시 일게 된다. 이 원탁 토론에는 김붕구, 김승옥, 남정현, 서기원, 선우휘, 이근삼, 홍사중, 김중빈 등이 참여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붕구는 참여 문학론이 유행 사조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작가의 자아를 사회적 자아창조적 자아로 나눈다. 그러면서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들의 현실 참여 유형을 제시하였는데, 사르트르는 사회적 자아가 더 강한 실패한 작가이며, 앙드레 말로, 생텍쥐페리, 지드, 카뮈 등은 행동으로 사회 참여를 실천하고 창작 면에서는 자연 발생적 참여로 나아간 성공한 작가라고 평한다.

논의의 전개

임중빈은 김붕구가 이상형으로 제시한 카뮈식’ ‘자연 발생적 참여론1960년대 한국 현실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시하고, 보다 한국 실정에 맞는 민중적 참여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선우휘는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를 통해 문학의 사회 참여론을 일면 수긍하면서도, 전후에 흘러들어와 지식인들의 교조가 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참여론이 국내 참여 문학을 좌경화했다며 김붕구에 동조하는 견해를 내놓는다. 사르트르식 참여 문학은 곧 좌익 문학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호철은 <작가의 현장과 세속의 현장>에서, 참여 문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데올로기에 귀착한다고 보는 선우휘의 견해를 비판한다.

1968년 이어령과 김수영의 논쟁

논쟁의 발발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은 개발 계획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경제 성장을 이뤄나간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이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었고, 더욱이 발전 과정의 왜곡 때문에 빈부의 격차가 심해져 소외된 농민과 도시 빈민들이 늘어갔다. 게다가 19681월 북한에서 온 무장 군인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고 이틀 후에는 미국의 첩보함이 납북되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남북한 사이에는 초긴장 상태가 조성된다. 민간에서는 부정 선거가 치러진 뒤 해가 바뀌었는데도 계속해서 선거 무효화 투쟁이 벌어졌다.

이런 뒤숭숭한 19681, 김수영은 <지식인의 사회 참여>라는 평론을 내놓아 참여 · 순수 논쟁을 다시 일게 한다. 이 글에서 김수영은 지식인들과 언론 매체들이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며 비난하는데, 문단에서는 이어령이 그렇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논쟁은 주로 김수영과 이어령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논쟁의 전개

김수영의 글에 앞서, 이어령은 우리 문화를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로 규정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예전부터 아이들이 울 때 에비 온다.”라는 말로 엄포를 놓곤 했는데, 이는 에비라는 개념 속에 숨어 있는 어떤 공포, 불안, 금기의 힘을 환기시킴으로써 아이들을 통제하는 행위이다. 이어령은 한국의 문화인들이 그런 어린 애들처럼, 정체불명의 공포에 눌리고 규제 감정에 지배되고 있다고 말하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식인의 사회 참여>에서 김수영은 우리 문화인들이 공포증과 퇴영성에 빠져 있다는 이어령의 입장에는 동의하지만,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것은 에비와 같이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힘이 아니라 훨씬 구체적인 현실의 억압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한국 문화에 나타나는 퇴영성은 문화인들의 소심증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유형 · 무형의 정치 탄압에 더 큰 원인이 있다는 논리를 편다.

<지식인의 사회참여>가 실린 1968년 1월 <사상계> 표지 / 사진 출처 : 다음 블로그(https://blog.daum.net/ashriver/3475534)

이에 이어령은 <누가 조종을 울리는가?>라는 글을 통해, 문화의 위기는 억압적인 정치권력에 짓눌릴 때도 찾아오지만, 그보다 오히려 8 · 154 · 19 직후처럼 자유 속에 내던져졌을 때 자멸할 때 더욱 심각하게 찾아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1960년대 후반기는 한국 문화를 위협하는 오도된 사회 참여론때문에 위기를 겪고 있다고 규정한다. 이어 이어령은 작가의 창조적 자유를 억압하는 힘으로 ()의 검열자대중의 검열자를 들고, 때로는 관의 검열자보다 대중의 검열자가 더 무섭다고 말한다. ‘대중의 검열자들 때문에 문화를 팔아넘기는 오도된 참여론자들이 문화에 위기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다시 김수영은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를 통해, 8 · 15 직후와 4 · 19 직후는 여러 사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상황이었는데, 이것을 이어령이 너무 단순화했다며 비판한다. 이 글에서 김수영은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라는 유명한 진보적 명제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자 이어령은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 이념의 시녀가 아니다>라는 글을 통해 김수영의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라는 발언을 문제 삼고, 문화의 진정한 전위성은 역사의 진보를 추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보수진보라는 도식화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데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의 양분론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논쟁의 결과

김수영과 이어령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불온시 논쟁을 벌인다. 이어령이 주고 작가의 소심증과 빈곤한 상상력을 문제 삼았다면, 김수영은 작가의 상상력을 억압하고 검열하는 정치권력을 주로 문제 삼는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불온이라는 용어의 해석에 얽매인 나머지 생산적인 논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인신공격에 머문 느낌을 준 채 공방전을 마무리 짓는다.

이후 김수영과 같이 작가의 현실 참여를 중시하는 이들은 1966년 창간된 <창작과 비평>을 거점으로 하여 참여 문학을 민족 문학, 리얼리즘 문학, 농민 · 노동자 문학의 단계로 발정시켰다. 또 이어령과 같이 작가의 개성과 자율적 미학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문학과 지성>을 중심으로 모여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참고 : <지식인의 사회 참여 - 일간신문의 최근 논설을 중심으로> 전문(김수영) - 1968년 1월, 사상계

외국에 다녀온 친구들이 항용하는 말이 우리 나라에는 논설이나 회화(會話)에 있어서 <주장>만이 있지 <설득>이 없는 것이 탈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불평을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니고, 또한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점은 유별나게 내 자신을 지목해서 말하는 것 같고, 그런 자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나의 주변에도 적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이런 경우에 <주장>이란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명령으로 화하는 성질의 것이고, 이런 현상은 으례히 문화의 기반이 약하고, 정치적으로는 노상 독재의 위협에 떨고 있는 사회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문화현상의 정치형태와의 관계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식의 선후의 순열을 가릴 수 없는 악순환의 수수께끼를 낳는다. <주장>은 독재를 보고 욕을 하고, 독재는 <주장>을 보고 욕을 한다. 그러다가 힘이 약한 <주장>이 명령을 넘어서서 어쩌다가 행동으로 나올 때, 독재가 어떠한 수단을 쓰는가에 대한 최근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누구나 다 아는 6.8 총선거의 뒷처리 같은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힘과 힘의 대결이다. <설득>이 허용되지 않기는 커녕 <주장>이 지하로 그의 발언을 매장시키기 시작한다.

지식인이 그의 의중의 가장 참다운 말을 못하게 되고, 대소의 언론기관의 편집자들이 실질적인 검열관의 기능을 발휘하고 대학교의 강당을 <폭동참모본부>로 인정하게 되고, 월수 50만원을 올리는 유행가수가 최고의 예술가의 행세를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사회의 상식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것을 근대화를 위한 <건전한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텔레비젼의 코메디언까지도 <명랑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게 되고, 신문사의 편집자는 <民比(민족주의비교연구회)>사건의 피고 같은 것을 두둔하는 투서나 앙케이트의 답장을 모조리 휴지통에 쓸어 넣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설득>이 미덕이 아니라 범죄로 화한다.

<설득>에는 자유의 조건이 필요하고 방향의 제시를 전제로 하고 있어야 하는데, 요즘 각신문의 세모와 신춘의 특집 논설중의 몇몇개의 비교적 씨있는 문화시론이나 좌담같은 것만 보더라도 여전히 할 말을 다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이빠진 소리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신문다운 신문이 없다는 것과, 잡지다운 잡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주장>이고 <설득>이고간에 지면이 없다. 민주의 광장에는 말뚝이 박혀 있고, 쇠사슬이 둘려 있고, 연설과 데모를 막기 위해 고급승용차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진보적인 여론을 계몽하는 기골있는 신문과, 열렬한 문학작품을 환영하는 전형적 종합잡지를 만들어 내야 할 용지는 없어도, 고급차의 뒷자리의 두꺼운 유리창 밑에서는 하얀 두루마리 휴지가 정액의 봉사라도 기다리고 있는 듯 미소를 짓고 있다.

C신문은 대학교수들의 환담을 통해 <70년대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우리의 경우는 중소기업이 몰락위기에 있다든지, 혹은 농촌에 미쳐 손이 모자라 자원의 분배가 안된다든지, 이러한 피치못할 중대한 요인들이 있는데, 이것을 중심으로 뭉쳐지는, 조직되지 않은 어떤 폭발적인 요소가 70년대에 가면 표면화하지 않겠느냐....."고 사뭇 점잖게 말하고 있지만, 공정한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당신네 신문이 지난 1년을 통해서 언론의 자유의 긴급한 과제를 얼마나 주장하고 얼마나 실천했느냐를 먼저 반문하고 싶고 그런 불같이 시급한 관점에서 볼 때 위기는 70년대가 아니라 바로 현재 이 순간이며, "조직되지 않은 어떤 폭발적인 요소가 70년대에 가면 표면화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방관적인 논평은 너무나 한가한 잠꼬대 같이 밖에 안들린다.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정치의 기상지수(氣象指數)와 상대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고,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정치의 기상지수의 상한선을 상회할 때에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民比>사건의 피고들의, "이 재판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이라든가 "우리들은 6.8 부정선거의 제물이 되고 있다."는 말 같은 것이 예를 들자면 그것인데 이런 정동의 주장을 하는 신문이나 잡지의 논설을 우리들은 하나도 구경해 본 일이 없다.

D신문이 정월 초하룻날에 실은 J.D 듸로젤 교수의 "민족주의의 장래"라는 논설은 개발도상에 있는 국가들의 "적극적 중립주의"의 당위성을 논한, 우리나라의 필자라면 좀처럼 쓸 수도 없고 실려지기도 힘들 만한 내용의 것인데, 이것을 비롯한 10편 가량의 해외 필자의 건전한 논단시리지를 꾸민데 대해서는 경하의 뜻을 표하면서도 어쩐지 한쪽으로는 365일의 지나친 보수주의의 고집에 대한 속죄 같은 인상을 금할 길이 없다.

금년 들어서 C신문의 사설란에 "우리문화의 방향"이란 문화론이 실린 것을 읽은 일이 있는데, 이런 논조가 바로 보수적인 신문이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 가장 전형적인 안이한 태도다. 그것은 서두에서 "경제성장을 서두르는 단계에서는 문화가 허술하게 다루어지기 쉬운 것도 어쩔 수 없는 경향인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생활을 도외시하고 문화발전을 생각할 수 없듯이 문화를 무시한 경제적 안정이나 정치적 안정이 愚者의 낙원을 만들어 그 사회가 지니는 취약성이 끝내는 그 사회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은 동서의 흥망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발전의 템포를 빨리해야 하는 우리 사회는 경제건설 다음에 문화발전을 이룩한다는 서열을 매기지 말고 발전의 표리로서 문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전제를 내세우고 나서,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암시로 문제의 초점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몽롱하게 얼버무려 넘어가고 있다.

즉 그것은 본론으로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화의) 방향의 문제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동백림공작단사건>이다. 그것이 비극적인 것은 문화인이 관련된 사건이면서 그 학문이나 작품이 문제되지 않고 간첩행위가 치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점이지만, 상당수 문화인이 그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자체는 간첩행위 이상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행위의 밑에 만의 일이라도 인터내셔널한 생각이 깔린 소치였다면 관련자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일반문화인의 성향과 관련시켜 심각히 생각해 볼 일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문화인이 우리의 현실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관건으로서 문화의 주체성 확립과 밀접히 관련지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선 <인터내셔널>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따라서 이것이 <일반문화인의 성향>과 어떻게 <관련시켜 심각히 생각해>봐야 할 지 알 도리가 없다. 또한 따라서 그 다음의 <문화의 주체성확립>어떻게 <밀접히 관련지어져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추측해서 이 <인터내셔날>이란 말을 세계주의나 인류주의로서 생각하고, 문화를 정치에서 독립된(혹은 우월한) 가치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그렇게 되면 <문화인이 관련된 사건>이라고 해서 그 학문이나 작품이 문제되어야 한다는 同社의 사설의 그 전날의 <지적>은 어디에 기준을 두고 한 말인가.

문화와 예술의 자유의 원칙을 인정한다면, 학문이나 작품의 독립성은 여하한 권력의 심판에도 굴할 수도 없고 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학문이나 작품이 문제>되어야 한다는 지적부터가 자가당착에 빠진 너무나 어수룩한 모독적인 발언이다. 학자나 예술가의 저서나 작품의 내용을 문제삼고 간섭하고 규정하는 국가가 피고에 유리한 경우에만 그들의 저서나 작품의 내용을 문제삼고, 그들에게 불리한 경우에는 그것들을 문제삼지 않았다는 실례를 우리들은 일찍이 어떠한 독재국가의 판례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실제는 오히려 백이면 백이 번번히 그와는 정반대였던 것이 통례이다.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땜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정책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는다.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한다. 그리고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하는 것을 문화의 건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문화의 방향>의 필자는 <문화를 무시한 경제적 안정이나 정치적 안정>이 나쁘다고 했지만, 나는 논법으로는 오히려 문화를 무시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 원고료 과세나 화료 과세를 포함한 문화의 무시보다도 더 나쁜 것이 문화의 간섭이고 문화의 탄압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간섭과 위협과 탄압이 바로 독재적인 국가의 본질과 존재 그 자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문화의 문제는 언론의 자유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고 언론의 자유는 국가의 정치의 유무와 직통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이치를 몰각하고 무시하는 버릇이 신문 뿐 아니라, 문화인 자체 안에도 매우 농후하게 만연되어 있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서글픈 일이다.

지난 연말에 <우리문화의 방향>이 실려진 같은 신문에 게재된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이어령)>라는 시론은 우리 나라의 문화인의 이러한 무지각과 타성을 매우 다끔하게 꼬집어 준 재미있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 글은, 어느 편인가 하면, 창조의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을 지나치게 문화인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주는 것이 불쾌하다. 물론 우리 나라의 문화인이 허약하고 비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더 큰 원인으로 근대화해가는 자본주의의 고도한 위협의 복잡하고 거대하고 민첩하고 조용한 파괴작업을 이글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의 <문화의 침묵>은 문화인의 소심증과 무능에서보다도 유상무상의 정치권력의 탄압에 더 큰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 괴수 앞에서는 개개인으로서의 문화인은 커녕 매스미디어의 거대한 집단들도 감히 이것을 대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이 글에서도 "막중한 정치권력에도 한계라는 것이 있는 법"이라고 하면서, "학문을 비롯하여 오늘날의 정치권력이 점차 문화의 독자적 기능과 그 차원을 침해하는 경향이 있다"<더 큰 원인>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그렇다면 오늘날의 문화계의 실정이 월간잡지의 기자들의 머리의 세포속까지 검열관의 <금제(禁制)적 감정>이 파고 들어가 있다는 것 쯤은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필자는 <에비>라는 말의 비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에비>라는 말은 유아언어에 속한다. 애들이 울 때 어른들은 <에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어른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멈추는 애들도, <에비>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고 있다. <에비>란 말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기리키는 명사가 아니다.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의미는 막연한 두려움이며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안, 그리고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힘을 총칭한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가면을 쓴 공포, 분위기로만 전달되는 그 위협의 금제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문화를 지배하는 <에비>를 이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우리들의 <에비>는 결코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닌" "가상적인 어떤 금제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명확한 <금제의 힘>이다. 8.15 직후의 23년과 4.19 후의 1년 동안을 회상해 보면 누구나 다 당장에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이 필자가 강조하려고 하는 점이 우리 나라의 문화인들의 실제 이상의 과대한 공포병과 비지성적인 퇴영성을 나무라고 독려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 필자의 말대로 "이러한 반문화성이 대두되고 있는 풍토 속에서 한국의 문화인들이 창조의 그림자를 미래의 벌판을 향해 던지기 위해서," "그 에비의 가면을 벗기고 복자(伏字) 뒤의 의미"를 아무리 <명백하게 인식해> 보았대야 역시 거기에는 복자의 필요가 있고 벽이 있다. 그리고 이 마지막의 복자와 벽을 문화인도 매스미디어도 뒤엎지 못하기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 필자는 끝머리에 가서 "우리는 그 치졸한 유아언어의 <에비>라는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성인들의 냉철한 언어로 예언의 소리를 전달해야 할 시대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소설이나 시의 <예언의 소리>는 반드시 냉철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필연적으로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은 <유아언어>이어야 할 때가 많다. 특히 오늘날의 이곳과 같은 <주장><설득>도 용납되지 않는 지대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실은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최근에 써 놓기만 하고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을 생각하며 고무를 받고 있다. 또한 신문사의 <신춘문예>의 응모작품 속에 끼어있던 <불온한> 내용의 시도 생각이 난다. 나의 상식으로는 내 작품이나 <불온한> 그 응모작품이 아무 거리낌 없이 발표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현대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영광된 사회가 반드시 머지 않아 올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것은 신문사의 응모에도 응해 오지 않는 보이지 않는 <불온한>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이 나의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볼 때는 땅을 덮고 하늘을 덮을 만큼 많다. 그리고 그 안에 대문호와 대시인의 씨앗이 숨어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위기는 아득한 미래의 70년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있다. 이런, 어찌보면 병적인 위기의식이 나로 하여금 또한 뜻하지 않은, 엄청나게 투박한 이 글을 쓰게 했다. 역시 비평은 나에게는 영원히 분에 겨운 남의 일이다

'현대문학테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문학 테마 85. 김정한  (0) 2022.01.09
현대문학 테마 84. 이청준  (0) 2022.01.07
현대문학 테마 82. 김승옥  (0) 2022.01.03
현대문학 테마 81. 고은  (0) 2022.01.01
현대문학 테마 80. 김남조  (1) 2021.12.30
옷, 패션 트렌드, 운동화, 쇼핑, 신상품, 신발, 자켓, 코트, 탈모, 모발이식, 미용, 성형수술, 구두, 부츠, 샌들, 여름 신발, 바지, 롱팬츠, 팬츠, 양말, 모자, 캡, 나이키, 아디다스, ABC 마트, 롱부츠, 첼시부츠, 티셔츠, 원피스, 정장, 수트, 가방, 귀걸이, 목걸이, 반지, 마스크, 시계, 팔찌, 패션, 백화점, 의류, 옷, 머리띠, 롱패딩, 패딩, 점퍼, 야상, 재킷, 화장품, 크림, 스킨, 아이섀도우, 아이브로우, 올리브영, 롯데닷컴, 하프클럽, 니트, 블라우스, 스커트, 치마, 주름바지, 통바지, 크롭티, 와이셔츠, 영어, 토익, 학원, 반찬, 다이어트, 도시락, 닭가슴살, 샐러드, 감자, 계란, 집밥, 요리, 고기, 소고기, 닭다리, 치킨, 아침밥, 삼겹살, 곱창, 밀키트, 선물세트, 저녁 메뉴, 볶음밥, 탕수육, 광어회, 연어회, 해산물, 냉동식품, 참치회, 잡곡밥, 아이스크림, 배스킨라빈스, 배달의 민족, 배달음식, 떡볶이, 튀김, 오징어튀김, 순대, 오뎅, 토마토, 딸기, 사과, 귤, 오렌지, 콤부차, 홍차, 레몬티, 커피, 카누, 네스프레소, 캡슐커피, 식품 직구, 영양제, 비타민, 아이허브, 신용카드, 소액대출, 대출, 보험, 보험상담, 저축은행, 여성대출, 학자금대출, 대출계산기, 대출이자, 주부대출, 임플란트, 치아보험, 자동차 렌트, 제주도 렌트, 렌터카, 자동차, 승용차, 중고차, 자동차보험, 자동차사고, 청약주택, 청약통장, 정기예금, 적금, 주택정약, 아파트, 내집마련, 빌라, 30평대, 부동산, 소형아파트, 치아, 어금니, 송곳니, 법률상담, 모기지론, 대학 편입, 학사편입, 대학교, 웹호스팅, 클라우드, 보안솔루션, 홈페이지, 앱제작, 동영상제작, 영상편집, 기부, donate,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세계구호,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전문자격증, 자격증, 학원, 사이버대학교, 학사, 학위취득, 학점은행제, 토익, 영어, 외국어, 통역, 번역, 동시통역
[면책공고] 솜글 블로그 자료 이용 안내

이 글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