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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테마 84. 이청준

2022. 1. 7. by 솜글

이청준의 생애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이청준(李淸俊, 1939~2008)은 전남 장흥에서 태어난다. 일곱 살 때 세 살 난 막내 동생이 홍역을 앓다가 죽고, 반 년 후에는 맏형이 폐결핵으로 죽었다. 어린 시절 겪은 형제들의 잇단 죽음은 그의 성격과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청준은 일찍이 한글을 깨진 후부터 소설 읽기에 재미를 붙인다. 1954(16) 이청준은 광주서중학교에 입학하여 한동안 친척집에 지내다가 가난한 자취 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의 가난 체험 때문에 그는 얼른 고향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한다.

광주제일고를 거쳐 1960(22) 서울대 독문과에 입학한 후에는 대학 1학년과 2학년 때 4 · 195 · 16을 잇달아 겪고 그 의식을 내면화한다. 대학 시절에는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주로 읽으며 지내고, 군 복무 후에는 마땅한 잠자리가 없어 학교 건물에 몰래 숨어들어 자곤 했다고 한다.

문단 데뷔와 초기 활동

여러 차례 소설 공모에 원고를 보내도 번번이 떨어지던 이청준은 1965(27)에 비로소 <사상계> 신인상 공모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오는데, 이듬해 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사상계>에 입사하여 <임부>, <>, <무서운 토요일>, <병신과 머저리>, <바닷가 사람들>, <굴레>를 잇달아 발표해 주목받는 신예 작가로 떠올랐다. 특히 <병신과 머저리>로는 1967(29) 동인 문학상까지 수상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과 허기에 시달렸고, 이는 고스란히 이청준 문학의 원체험이 된다.

1971(33) 이청준은 1960년대에 발표한 소설들을 묶어 <별을 보여드립니다>를 펴낸다. 이 창작집에 실린 소설들의 주인공은 대개 광대, 매잡이, 궁사와 같은 예인이나 장인들로, 개발 독재가 시작된 1960년대 사회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뒷전으로 밀려난 이들이다. 여기에는 시골에서 자라서 서울에서 패배와 좌절, 가난을 겪으며 환멸과 박탈감을 느낀 이청준의 체험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뒤이어 내놓은 <쓰여지지 않은 자서전>(1969), <소문의 벽>(1971), <조율사>(1972), <서편제>에서도 현실은 여전히 뛰어넘을 길 없는 벽으로 존재를 억압한다.

1970 · 1980년대 활동

이청준은 소록도 나환자촌을 방문 취재하고 돌아온 후 1974(36) <신동아>에 장편 <당신들의 천국>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1975(37)에는 중편 <이어도>로 한국일보 창작 문학상을 받고, 1978(40)에는 <잔인한 도시>로 제2회 이상 문학상을 받았다. 1970년대의 주요 작품들은 대개 창작집 <이어도>(1976), <예언자>(1977), <남도 사람>(1978), <잔인한 도시>(1978), <춤추는 사제>(1979) 등으로 묶여 나왔다.

이청준은 1980년대에도 글쓰기에 매달려 <살아 있는 늪>(1980), <낮은 목소리>(1980),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1981), <젖은 속옷>(1982), <시간의 문>(1982), <3의 현장>(1984), <이청준 문학 선집>(1984), <황홀한 실종>(1984), <비화 밀교>(1985), <따뜻한 강>(1986), <겨울 광장>(1987), <벌레 이야기>(1988), <이교도의 성가>(1988) 등을 꾸준히 펴내고,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1990년대 이후

199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왕성한 집필 의욕을 보여 주는데, 이즈음부터는 개인과 사회’, ‘복수와 용서’, ‘갈등과 화해’, ‘자유와 금기’, ‘실존과 계율’, ‘고통과 기원등 충돌하고 대립하는 두 가지 가치의 세계가 어떻게 만나고 부정하며 조화에 이르는지를 탐구한다. <키 작은 자유인>(1990), <이제 우리들의 잔을>(1990) 등을 들 수 있다. 1990년대에는 프랑스와 일본 등 외국에서 저서가 번역 출간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만년까지 작품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던 이청준은 지난 2008(70)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사진 출처 : 울산신문(https://www.ulsanpress.net/news/articleView.html?idxno=140255)

이청준의 소설

이청준의 작품은 크게 전통적인 장인의 비극적 삶을 다룬 것과, 정신적 상처를 지닌 현대인의 왜곡된 삶을 다룬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전통적 가치를 추구하는 장인이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나, 왜곡된 사회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이상 현상이나, 둘은 모두 개인의 진실한 가치 추구와 사회적 패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청준은 이런 사회적 상황에서 개인의 구원 가능성을 찾고 있는데, 이렇게 볼 때 이청준의 문학 세계는 바로 구원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작품

<>

1966(28) 발표한 액자 소설이다. 이청준 소설에는 전통 사회에서 특정 분야의 일가를 이룬 전문인, 이른바 장인 모티프가 많이 등장한다. <서편제>에서도 판소리 예술의 전승이라는 집념 때문에 딸의 눈을 멀게 하는 소리꾼이 나오며, 초기작인 <>허 노인이나 <매잡이>곽 서방도 이와 유사한 성격의 인물이다. 이는 전통 사회에 대한 막연한 향수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신적 경지에 대한 작가의 존중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그들이 지녔던 예술혼의 절대 경지를 좇아가면서 그것이 실현도지 않는 현실에 대한 비애를 드러내는 것이다.

<>2대에 걸친 줄광대의 삶과 (남기자)’의 생활을 지성의 눈으로 조명함으로써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모색하고 있다. ‘는 자신의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책임감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고 그저 타성적으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허 노인은 바로 그런 가 잃어버린 소중한 정신을 보여 준 인물이며 그의 아들 허운도 같은 성격의 인물이다. 이들 부자는 줄을 탈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죽음을 택하는데, 그들을 죽게 한 것은 외부 세력이 아니라 자신들에 대한 엄격함 그 자체이다. 이 엄격함은 곧 장인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은 바로 이런 정신의 부각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오직 일생을 줄타기에 바친 허 노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인의 경지에 이르지만 결국 운명 앞에 무너져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아들 허운’, 그리고 이들의 삶을 취재하는 의 냉소적인 태도는 바로 우리가 겪어 온 시대적, 일상적 자기 변모의 모습과 일치한다. , ‘허 노인허운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은 절대 가치가치에 대한 갈등가치 상실의 일직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줄>
일상에 묶여 무력하게 살아가던 (남기자)’승천(昇天)한 줄광대에 대한 기사를 취재하라는 부장의 지시에 따라 C읍으로 내려간다. 그 곳에서 는 예전에는 서커스단에서 트럼펫을 불었으나 지금은 거의 폐인이 된 사나이로부터 줄광대 허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허운은 아버지 허 노인으로부터 줄타기를 배웠다. 허 노인은 줄타기 한길만을 걸어온 장인으로 아들에게 작은 허튼 재주도 용납하지 않는다. 허 노인은 결국 재주를 부리라는 단장과의 마찰에도 자세를 바꾸지 않고 장인 정신으로 줄을 타다가 어느 날 아들과 함께 줄에 올랐다 떨어져 죽고 만다.
허 노인의 뒤를 이어 줄은 타게 된 허운은 아버지의 소망대로 마침내 장인의 경지에 오른다. 그도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재주를 부리라는 단장과 갈등을 빚는다. 그런 어느 날 허운은 한 여인에게 호감을 갖게 되지만, 그 여인이 사랑한 것은 허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줄 타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고 줄 위에 올라 최후의 연기를 한 뒤 스스로 떨어져 죽는다.

<병신과 머저리>

1966(28)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단편으로, 서로 다른 삶의 자세를 가진 형제의 상처와 갈등을 통해 개인의 의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여건인 경험관념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의 아픔은 경험에 의해 형성된 구체적인 것이지만, ‘의 고민과 상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관념적인 것이다. 이청준은 6 · 25 전쟁을 직접 체험한 병신으로, 그러한 체험 없이 자신을 포기한 무기력한 머저리로 형상화함으로써 삶의 방식이 다른 두 형제의 아픔과 그 극복 의지를 보여 준다. 동시에 의 갈등은 단순히 전쟁을 체험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갈등일 뿐만 아니라, 4 · 19를 전주한 현실적 고통의 세대와 관념적 이상이 좌절당한 세대의 태도 차이로도 파악할 수 있다.

<병신과 머저리>에서 은 수술 도중 소녀가 죽자 김 일병을 죽이게 놔두었던 과거의 상처가 살아나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의사 일을 중단한다. 그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은 소설을 쓰고, 상상의 세계에서 고통의 실체인 오관모를 죽인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오관모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는 소설을 불태워버리는데, 이는 소설을 통한 자기 극복이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은 소설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인물로, 그러한 노력을 함으로써 작품 말미에 가면 다시 현실로 복귀하게 된다.

<병신과 머저리>
한국 전쟁이 끝난 지 10년쯤 뒤의 일이다. ‘의 형은 성실한 의사로, 자신의 한국 전쟁 체험을 소설로 쓰려 하고, ‘는 자신의 관념적인 삶을 자각하지 못한 채 형의 허약함을 피상적으로 관찰하고 조롱한다.
형은 한국 전쟁 때 의무병으로 참전했다가 성욕과 이기심에 가득 찬 잔인한 오관모, 그리고 그 잔인함의 희생양이었던 김 일병과 함께 적의 수중에 낙오했던 적이 있다. 오관모는 김 일병을 성적 노리개로 삼다가 식량이 모자라자 그를 죽이려고 했다. 형은 오관모가 김 일병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부분에서 소설을 중단한다.
형의 소설을 훔쳐 읽은 는 형에게 좀 대범해지라는 뜻에서, 소설 결말부를 형이 김 일병을 죽이는 것으로 끝맺어 놓는다. 이를 안 형은 가 쓴 부분을 찢어 버리고 새로 쓴다. 형이 새로 쓴 내용은 오관모가 김 일병을 죽이고, 뒤따라간 자신이 오관모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형은 우연히 살아 있는 오관모를 만나고 온 후 자신의 소설을 불태워 버린다. ‘는 관념적으로 형의 아픔을 짐작하고 조롱했던 자신의 한심한 처지를 반성한다.

<매잡이>

1968(30) <신동아>에 발표된 중편이다. <>과 같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옛 것을 지켜나가는 장인 정신을 다룬 작품이다. 시류에 물들지 않고 우직하다고 할 만큼 자기의 것을 지키려는 장인 정신의 소유자인 매잡이 곽돌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진정한 가치를 알고 그것을 담아 보려는 민태준의 소설 쓰기를 통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참된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매잡이>
소설가인 는 민태준 형의 권유로 그가 매잡이에 대해 답사했던 마을을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벙어리 소년을 만나 곽돌이라는 매잡이를 알게 된다. 곽돌이는 사라져 가는 매잡이의 전통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아 식음을 전폐한 끝에 세상을 등진다.
는 곽 서방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서울로 돌아가면 민 형과 함께 이런 궁금증을 풀어 보려 했으나, 민 형은 이미 자살했고 세 가지의 유언만이 남아 있었다. ‘는 민 형과 매잡이의 죽음 사이에 서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어 결국엔 매잡이에 대한 이야기만을 쓰게 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 매잡이이다.
그런데 는 작품을 완성한 후에도 민 형의 죽음과 매잡이의 죽음의 연관성에 대한 의문을 버리지 않는다. 더 나아가 민형이 이미 곽 서방의 죽음을 예견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근거를 찾지 못해 계속 고심하다가 민형이 남긴 유언을 생각해 내고 유품으로 남긴 봉투를 뜯어보니 그것은 민형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소설 <매잡이>였다. 내용은 나무랄 데가 없었고, 놀랍게도 의 작품과 일치했다. 그에게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찰하는 훌륭한 작가의 기질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 <매잡이>와 함께 세 편의 동명 소설이 있음이 밝혀진다.

중기 작품

<건방진 신문팔이>

1974(36) <한국문학>에 발표된 작품으로, 1970년대 당국에 의해 언론 탄압이 자행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언론의 자유를 갈망하는 내용을 우회적인 수법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소년민국 일보가 폐간됐다고 신문팔이를 그만둔 것은 언론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우리가 다시 소년을 기다리는 것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의미를 내포한다.

<건방진 신문팔이>는 독특하게도 우리라는 1인칭 복수 관찰자를 서술자로 설정한다. 이러한 시점은 독자들이 소년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하는 동시에 소년에 대한 시선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 주며, 밤차를 타고 퇴근하는 도시 군중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작품의 서두에는 이상한외양과 행동을 보이는 인물을 제시하여 독자의 호기심을 유도하고 그 의미를 탐구하게 하는데, 이와 같이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 의미를 찾는 구조를 탐색의 구조라고 한다. 이청준의 소설에는 탐색의 구조가 많이 쓰이고 있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삶에 내재하는 진실을 찾도록 유도한다.

<건방진 신문팔이>
저녁 9시가 지나 좌석 버스로 서대문 정류소를 지날 때면 신문팔이 소년이 버스에 올라와 신문을 판다. 그는 가분수형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고, 늘 독특한 억양으로 여덟 가지 신문 이름을 줄줄 외운다. ‘우리는 억양의 변화나 발음의 장단 따위를 최대한 억제하는 듯한 소년의 목소리에서 은밀한 가락을 느낀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소년은 신문 파는 데는 관심이 없고, 그저 신문 이름 외는 것을 즐기는 듯하다. ‘우리는 모두 맘속으로 그를 아끼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 달이 지나도록 소년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 날 한 사내가 길에서 소년을 우연히 만나 왜 신문을 팔지 않느냐고 묻자, 소년은 민국 일보가 없어져 버려서 신문 목록을 외는 대사의 억양과 호흡이 맞지 않아 그렇다고, 연습이 끝나면 다시 신문을 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도 소년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역시 점점 이에 익숙해지고, ‘우리는 소년이 이상스럽게 건방진 신문팔이였다고 생각한다.

<이어도>

1974(36) <문학과 지성>에 발표한 중편으로, 현대 소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무거운 유토피아적 주제를 적절한 사실성 속에 구현해 내어 수작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에서 찾고 있는 이어도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대비되는 낙원의 공간, 섬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구원의 공간을 상징한다. 환상과 구원에 대한 이청준의 사상과 탐색담적 소설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어도>
선우현 중위는 제주도 사람들이 믿는 이어도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해양 수색 작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어도는 실재하지 않는 듯했고 수색 작업을 종료하려 하는데, 어느 날 배에 동승했던 천남석 기자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 이유를 밝히려던 선우현 중위는 양주호 국장으로부터 천 기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천남석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이어도 노래를 듣고 자랐는데, 이어도의 환상 때문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상처를 남긴 이어도 설화를 부인하고, 술집 이어도의 작부를 애인으로 삼고 그녀에게 섬을 떠나라는 말만 되풀이해 왔다고 한다.
양주호 국장은, 아마 천남석이 이어도가 허구임이 밝혀진 순간 자신의 섬을 끝내 부정하지 못한 채 자살한 듯하다고 한다. 선우현 중위는 양 국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차츰 섬사람들에게 이어도가 갖는 의미와 천남석의 죽음을 이해하게 된다.
실종되었던 천남석 기자의 시체가 섬으로 돌아와 이어도의 존재가 암시되며 소설이 끝난다.

<서편제>

1976(38) <뿌리 깊은 나무>에 발표된 <남도 사람> 연작 중 하나로, 소리꾼 부녀의 기구한 삶과 이를 추적하는 사내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과 예술 사이에 필연적으로 내재할 수밖에 없는 비극성을 ()’이라는 한국적 정서로 보여 주고 있다. 일종의 잃어버린 과거 찾기유형의 소설이다. 남도창을 제재로 한 <남도 사람> 연작은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내의 원초적 체험에서 비롯된 한은 햇덩이로 드러난다. 햇덩이가 이글거릴 때 어머니는 노랫가락을 흥얼대며 밭일을 하고 소년은 고삐에 묶여 기다려야 했다. 그 때 어디선가 소리꾼의 소리가 들려 왔고, 햇덩이가 떨어지자 그 소리꾼은 소년의 어머니를 덮친다. 이렇게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소년에게 고통을 주었던 햇덩이는 어머니를 겁탈한 소리꾼의 소리와 하나의 이미지로 합쳐지고, 소년은 여기에서 숙명적인 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서편제>
소릿재라는 곳에 있는 주막집에 한 사내가 찾아와서는, 그 주막집의 여인이 소리를 하게 된 내력을 묻는다.
1950년대 중반, 주막집 여인이 잔심부름꾼으로 있던 읍내 대갓집에 소리꾼 부녀가 찾아든다. 소리꾼은 병세가 악화되자 그 집에서 나와 소릿재 근처에 기거하며 소리를 한다. 그 해 겨울, 소리꾼이 죽은 후에도 계속 소리를 하던 딸은 어느 날 종적을 감춘다.
여기까지 들은 사내는 어릴 적 자신의 어머니가 소리꾼과 정을 통한 후 딸을 낳고 죽은 기억을 떠올린다. 주막집 여인은, 그 소리꾼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소리꾼이 딸에게 한을 심어주기 위해 눈에 청강수를 넣어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내는 어릴 때 어머니가 죽은 후 어린 계집아이와 함께 소리꾼을 따라다니며 북장단을 배우며 복수를 노리다가 끝내 복수하지 못하고 떠났던 과거를 회상한다.
주막집 여인은 사내가 예전의 그 소년임을 알아챈다. 그리고 장님이 된 누이를 다시 찾아 헤맬 거냐고 묻고, 사내는 멀리서나마 누이의 소리라도 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긴다.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 / 사진 출처 : 동아일보(https://www.donga.com/news/Entertainment/article/all/20190618/96055068/4)

<당신들의 천국>

1976(38) 단행본으로 출간한 장편 소설로, 전체 3부로 되어 있다.

표면적 줄거리는 당신들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조백헌의 꿈이 나한자들과의 대립을 통해 실패하고 다시 그 실패가 화해를 가져온다는 것이지만, 진정한 작가의 의도는 그보다는 인간사회는 천국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삶의 의미를 재점검해 보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당신들의 천국>의 대답은 첫째, 권력은 사랑과 자유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되고, 둘째, 인간의 천국은 다른 인간의 천국과 대립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록도라는 한 섬을 통해, 자유 없는 권력은 증오를 낳고, 사랑 없는 권력은 강요된 의무만을 요구할 뿐이라는 비관적 세계관을 도출하고 있는 이 소설은, 그런 면에서 1970~1980년대 한국 사회의 상징적 축도라고 볼 수 있다.

<당신들의 천국>
소록도 병원의 새 원장 조백헌이 부임해 온 날 밤, 두 원생이 섬을 탈출한다. 조백헌은 부임 인사도 하지 않고 탈출 사고의 경위를 조사하고, 병원의 보건과장 이상욱은 일본인 주정수 원장의 과거사를 말해 준다. 주정수 원장은 소록도를 나환자들의 낙원으로 꾸민다는 명분으로 대규모의 역사를 일으켰었지만, 거기에는 자신의 동상을 건설하려는 욕심이 숨어 있었다. 결국 주정수는 원생들에게 피살된다. 낙토 건설은 원장의 입장에서는 원생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위인 듯했지만, 원생의 입장에서 보면 원장의 동상을 위한 억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백헌은 사랑의 행위라는 확신 아래 낙토 건설 사업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보건과장 이상욱은 낙토가 건설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환자의 낙토이지 인간의 낙토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는 괴로워하고 조백헌에 대해 계속 회의한다.
드디어 낙토 건설 사업이 시작되었지만, 오마도 간척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육지 사람들의 방해, 행정 관청의 비협조, 자연의 횡포, 원생들의 배반, 그리고 마침내는 상부의 일방적인 전근 발령으로 조백헌은 거의 절망적 수렁에 빠져든다. 조백헌이 낙토 건설 완성 의지를 굳건히 하는 것은 무의식중에 동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이상욱은 그 점을 지적하지만 조백헌이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섬을 탈출하고, 황 장로와의 대화를 통해 반성한 조백헌은 조용히 섬을 떠난다.
7년 후, 자기 각성에 도달한 조백헌은 다시 섬에 들어와 섬의 주민이 되어 있다. 그 자기 각성의 내용은 다스리는 자의 사랑 속에 다스림을 받는 자의 자유가 깃들고, 다스림을 받는 자의 자유 속에 다스리는 자의 사랑이 깃들어서 결국은 양자가 한 길로 화해스러운 조화를 이룩해 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획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믿음이 획득되기 위해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백헌은 작은 일부터 차례차례 확실한 것을 한 가지씩 해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조백헌은, 뭍에서 온 여교사 서미연과 병력이 있고 뒤틀린 반생명적 자세를 보여 오던 윤해원의 결혼을 주선한다. 두 남녀의 상징적 결합이 이루어지는 날, 날씨는 화창했고 사람들의 표정 역시 그 봄날 날씨처럼 맑고 너그러웠다.

<눈길>

1977(39) <문예중앙>에 발표한 소설이다. 고향에 대해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이 고향에서의 체험을 통해 인간적 화해에 도달한다는 귀향형 소설의 구조로 되어 있다.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작가 이청준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소설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이 작품은 물질적 가치에 젖어 있는 이기적인 자식과 그 자식에 대한 노모의 사랑이 잘 대조되고 있다.

특히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모자(母子)의 기억 속에 교차되며 회상되고 있는 눈길은 작품의 서사적 의미의 핵심이다. 아직 깜깜한 새벽길, 행여 이웃들의 눈에 띨 세라 급히 상경하는 자식을 배웅하기 위해 모자가 함께 걷는 눈길, 그러나 자식이 상경하고 난 뒤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눈길은, 몰락한 집안의 어머니가 겪어온 인고의 생애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눈길>
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증오감을 갖고 있다. 휴가를 맞아 는 아내와 함께, 형수와 조카들과 함께 살고 계신 시골의 노모(老母)를 찾아간다. 장남이었던 형의 노름과 술주정으로 집안이 파산을 겪은 후부터, 그리고 형이 조카와 노모를 에게 맡기고 세상을 떠난 뒤로부터 노모와 는 거의 남남으로 살아 왔다.
노모는 그 동안 남은 세상이 얼마 길지 못하리라는 체념 때문에도 그랬지만, 그보다 아들에게 아무것도 주장하거나 돌려받을 것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감득하고는 아들인 나에게 어떠한 부탁도 하지 않아 왔다. 그런데 마을에서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지붕 개량 사업이 벌어지자, 노모는 은근히 허름한 자신의 집도 개량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친다. ‘는 노모의 이러한 마음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한다. ‘는 모든 것을 자수성가했으니 애초에 노모에게 빚도 없고 줄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 외면하려 했던 것은 지붕 개량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불거져 나온 예전 이야기였다. ‘는 계속 피하려 했으나 아내는 자꾸 노모에게 예전에 눈길 속에서 아들을 떠나보냈을 때의 심경을 캐묻는다.
그러자 노모는 그 날 새벽 매정한 아들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하얀 눈길을 돌아오면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눈물을 흘렸으며, 아들의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면서 아들의 앞길이 잘 되길 빌면서 돌아왔었음을 아내에게 말해 준다. ‘는 이불 속에서 아들에게 한 번도 해 주지 않았던 그 날의 이야기를 몰래 듣고는 심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린다. 아내가 를 세차게 흔들어 깨우는 것에도 불구하고 내처 잠이 든 척 버틸 수밖에 없었다. 노모는 며느리에게, 자식에게 아무것도 베풀어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서글픔을 느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잔인한 도시>

1978(40) 발표된 장편으로, 2회 이상 문학상이다. 인간 상주의 따뜻한 고향으로 귀환하려는 한 죄수의 방생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꿈과 그 구제의 가능성을 상징적인 수법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잔인한 도시>는 이청준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진실에 대한 탐구의 소산이다. 백동테 안경의 젊은이가 운영하는 방생의 집은 도시의 잔인함과 위선의 결정체이다. 원래 방생의 집은 새들의 자유를 통해 갇힌 이들의 자유를 기원하는, 오래전 감옥을 나온 한 노인의 따뜻한 마음씨에서 시작되었지만, 순수한 의도가 상업적으로 변화되면서 방생으로 인해 새들은 더 이상 멀리 나갈 수 없도록 강제로 날개를 찢겨야만 하는 치명적인 위협에 처하게 된다.

새를 방생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꿈꾸어 왔던 사내는 젊은이의 사악한 상술을 알고 난 뒤에 분노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가 없다. 자유를 갈망하던 자신의 의지가 또 한 번 꺾였는데도 사내는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주고 날개가 찢긴 새를 다시 사들인 뒤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과 새를 위한 구원의 길을 찾아 떠난다. 이청준은 이를 포착하여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통해 거대한 위선과 억압에 꺾이지 않는 참사랑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잔인한 도시>
최근 몇 년 동안 오가는 사람이 없었던 교도소로 이어가는 길을 한 사내가 걸어 나온다. 초라한 행색에 그를 맞아주는 것은 그림자뿐이다. 사내는 공원 입구에 있는 방생의 집앞에서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머문다. 사내는 그 근처에서 서성이며 새들의 방생을 깊은 감동으로 지켜본다. 다음날부터 공원을 돌며 흙 묻은 동전을 주워 새들을 산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몫으로, 다음날은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는 동료 죄수들과 감옥 안에서 죽은 친구를 위해 새들을 산다. 그리고 자신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던 백동테 안경의 청년에게 차츰 말을 걸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평생을 감옥에서 살다시피 했다는 이야기와 찾아올 아들이 있고 그 아들과 함께 갈 고향이 있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이 아님이 곧 밝혀진다.
어느 날 밤 공원에서 잠을 자던 사내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누군가가 한밤중에 공원을 돌며 새 사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쫓기던 새 한 마리가 사내의 품속으로 날아든다. 다음날 사내는 그 새를 가게 새장에서 발견한다. 백동테 안경의 청년은 새가 멀리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갯죽지 밑 속 깃을 가위로 잘라내고 있었다. 사내는 방생에 더 이상 신명을 느끼지 못하지만 자신이 노역을 하여 모은 돈 전부를 주고 그 새를 산다.
사내는 이제 이 잔인한 도시를 빠져 나간다. 남쪽으로 이어지는 가을날 저녁 햇살 속을 지나는 사내의 손에는 방생의 집새 한마리가 발톱과 부리를 쉴 새 없이 꼼지락대고 있다. 사내는 등 뒤로 와 닿는 햇살이 따뜻하다고 느낀다.

<선학동 나그네>

1979(41) <문학과 지성>에 발표된 작품으로, 남도창을 제재로 한 <남도 연작> 중 한 편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비밀이 하나씩 벗겨지는 추리 소설적 구조를 보여 주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특징이며, 비극적 감정을 낭만적으로 처리함으로써 감동을 준다.

<선학동 나그네>
어느 날 한 사내가 선학동에 온다. 사내는 만조의 바닷물에 비친 선학의 자태를 보려고 했지만, 포구는 이미 들판으로 변해 있었다. 나그네는 주막에서 주인 사내로부터 학을 다시 날아오르게 했다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30여 년 전 한 부녀가 선학동에 오는데, 딸은 포구의 모습을 통해 소리의 깊이를 얻고 간다. 그런데 그 여자가 몇 년 전 다시 찾아와서는 소리로 마을 사람들을 감화시킨 후 아버지의 유골을 묻고 떠났다고 한다. 주막 주인 사내는 여인이 마음의 눈으로 포구에 물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소리를 했는데, 그때 자신 또한 학이 포구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들은 사내는 왜 여자의 오라비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고, 주막 주인은 사내가 바로 그 오라비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여자가 오라비가 먼저 물어 오기 전에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말라면서, 오라비더러 자신을 더 이상 찾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고 알려 준다.
다음 날 아침, 사내는 길을 떠나며 누이의 부탁대로 더 이상 누이를 찾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주막 주인은 사내가 사라진 고갯마루 위로 백학 한 마리가 떠도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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