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테마 포스트 78. 김관식, 구자운, 김종길


김관식, 구자운, 김종길은 1960년을 전후로 문단 활동을 시작하여 주로 고전적인 기풍을 절제된 언어를 통해 드러낸 시인으로 평가된다.

김관식

김관식(金冠植, 1934~1970)은 한문과 동양의 고전에 능통하여 동양인의 서정 세계를 동양적 감성으로 구상화함으로써 특이한 시풍을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세련된 시어와 밝은 동양적 경지로 승화하려는 높은 정신의 추구를 엿볼 수 있으며, 서양 외래 사조를 배격하고 동양적 예지의 심오한 세계로 몰입하여 그 경지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세속적 생활 방식을 무시한 기행(奇行)으로 유명했던 그는 결국 가난과 질병으로 37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대표작으로는 1957년(25세) 펴낸 첫 시집 <김관식 시선>에 실린 「석상의 노래」가 있다. 너무나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돌이 되었다는 이 시의 내용은 백제 가요 「정읍사」나 신라 시대에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 설화」와 접맥되어 있으며, 또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는 김소월의 「초혼」과도 그와 유사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석상의 노래」는 행이나 연의 구분은 물론, 구두점까지도 철저히 배제시킨 산문시이다. 이러한 형식상 특성은 독자에게 거침없이 작품을 읽게 함으로써 그리움으로 인해 돌이 되었다는 작품의 내용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효과가 있다.

「석상의 노래」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곳 머언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면 해가 저물어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만 귀에 적시어 눈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하여 벙어리 가슴 쥐어뜯어도 혓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구자운

구자운(具滋雲, 1926~1972)은 가난 속에서 불구의 몸으로 시를 쓴 시인이다. 구자운은 1950년대 후반에 옛 항아리나 꽃병 같이 옛 그릇을 그윽하게 형상화한 「청자 수병」 등이 서정주에게 추천되어 문단에 나와, 이후 아어(雅語)의 멋을 살린 고아한 수사와 형식미로 한국적 사상을 한뜻하게 그려냈다. 1960년대에는 4 · 19와 5 · 16을 겪은 후 정치 감각과 사회적 관심에 중점을 둔 시를 쓰기도 했으며, 1969년(38세) 첫 시집이나 생전 마지막 시집인 <청자 수병>을 발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1956년(31세)의 「청자 수병」과 1969년(38세) <청자 수병>에 실은 「벌거숭이 바다」가 있다.

「청자 수병」

아련히 번져 내려/ 구슬을 이루었네./ 벌레들 살며시/ 풀포기를 헤치듯/ 어머니의 젖빛/ 아롱진 이 수병(水甁)으로/ 이윽고 이르렀네.//

눈물인들/ 또 머흐는 하늘의 구름인들/ 오롯한 이 자리/ 어이 따를손가!/ 서려서 슴슴히/ 희맑게 엉긴 것이랑/ 여민 입/ 은은히 구을른 부프름이랑/ 궁글르는 바다의/ 둥긋이 웃음 지은 달이라커니.//

아롱아롱/ 묽게 무늬지어 어우려진 운학(雲鶴)/ 엷고 아스라하여라./ 있음이어!/ 오, 저어기 죽음과 이웃하여/ 꽃다움으로 애설푸레 시름을/ 어루만지어라.//

오늘/ 뉘 사랑 이렇듯 아늑하리야?/ 꽃잎이 팔랑거려/ 손으로 새는 달빛을 주우려는 듯/ 나는 왔다.//

오, 수병이여!/ 나의 목마름을 다스려/ 어릿광대/ 바람도 선선히 오는데/ 안타까움이야/ 호젓이 우로(雨露)에 젖는 양/ 가슴에 번져내려/ 아렴풋 옥을 이루었네.

「벌거숭이 바다」

비가 생선 비늘처럼 얼룩진다/ 벌거숭이 바다.//

괴로운 이의 어둠 극약의 구름/ 물결을 밀어 보내는 침묵의 배/ 슬픔을 생각키 위해 닫힌 눈 하늘 속에/ 여럿으로부터 떨어져 섬은 멈춰 선다.//

바다, 불운으로 쉴 새 없이 설레는 힘센 바다/ 거역하면서 싸우는 이와 더불어 팔을 낀다.//

여럿으로부터 떨어져 섬은 멈춰 선다./ 말없는 입을 숱한 눈들이 에워싼다./ 술에 흐리멍텅한 안개와 같은 물방울 사이//

죽은 이의 기(旗) 언저리 산 사람의 뉘우침 한복판에서/ 뒤안 깊이 메아리치는 노래 아름다운 렌즈/ 헌 옷을 벗어버린 벌거숭이 바다.

김종길

김종길(金宗吉, 1926~2017)은 본명이 치규(致逵)로, 고려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셰필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47년(22세)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문」이 입선하여 등단한 이후 시인과 시론가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주요 시집으로는 <성탄제>(1969), <황사 현상>(1986) 등이 있다. 

김종길 시의 특징

김종길의 시는 다른 대개의 이미지스트들이 경박한 모더니티에서 머물고 마는 데 비해 고전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명징한 이미지와 고전적 품격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염결성은 그의 시적 특징이다. 그의 시는 조만간 사라질 유한한 것들의 아름다움이 구성하는 세계와 이 세계 속에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세계와 자아의 대립적 긴장 가운데 균형을 유지하는 절제의 정신을 견지한다. 이러한 절제의 정신은 김종길의 고전적 품격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서, 그의 시에서 시적 자아는 언제나 대상이나 감정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절제와 극기의 태도는 그의 시적 감수성 속에 한시적 전통, 혹은 유가적 정신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신처사가」나 「고고」에는 세속에 처하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초연한 태도를 견지하는 정신이 드러난다. 「고고」에서 시인이 말하는 ‘높이’는 어둠과 빛 사이의 긴장된 냉랑함이 가득한 시간에 세계내적 초월의 비전이 여는 정신의 높이이다. 세속에 거주하면서도 삶과 시가 격(格)을 벗어나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며, 인내와 초연함으로 염결성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달리 부른다면 유가적 선비정신으로 일컬어질 수 있다. 

김종길은 과작의 시인인데, 그의 시는 시인의 염결적 태도를 반영하듯 높은 완성도와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김종길의 시가 보여주는 예민한 이미지스트로서의 감각과 유가적 정신성의 조화는 한국 현대시가 가지는 득의의 부분이라 할 것이다. 영문학자이면서도 고전적 소양에 시 세계의 근원을 둔 김종길은 시론 또한 고전적 안정성과 균형감각을 지니고 있어 학문적 성과를 뚜렷하게 하고 있다.

김종길의 시

「성탄제」

1969년(38세) 시집 <성탄제>에 수록한 작품으로, 성탄일 무렵 내리는 눈을 보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한 시이다. 시에서 노래되는 그리움의 대상은 연인이거나 어머니인 경우가 많은데, 「성탄제」는 조금 특이하게도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회상한다. 어렸을 때의 병력(病歷)과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이 시를 대할 때의 친근감은 우선 그 기법의 낯익음에서 연유한다. 전 10연 중에서 제7연을 분기점으로 하여 전반부에 화자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후반부에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어른으로서의 삶을 대칭적으로 조직하였다.

「성탄제」

어두운 방 안에/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마지막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설날 아침에」

1969년(38세) <성탄제>에 수록한 주지적 서정시이다. 누구나 쉽게 읽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평이한 내용, 우리 생활 주변의 평범한 소재, 알기 쉬운 시어를 사용하여 삶의 밑거름이 될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설날에는 새삼스럽게 인생살이의 각박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화자는 더 높은 이상의 실현을 위해 그것을 긍정적 · 희망적 삶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대로’, ‘꿈도 좀’,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등의 표현에서 설날의 추위와 같은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을 슬기로 견뎌내는 여유 있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주어진 삶을 더 지혜롭게 영위하여 기쁨과 보람을 찾자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작게는 한 가정의 어른으로서, 크게는 한 나라의 시인으로서 설날 아침에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은 성장의 기쁨과 반가움이며, ‘고운 이빨을 보듯’은 잇몸을 뚫고 나오는 어려움과 같은 삶의 고통을 착함과 슬기로써 이겨내고 기쁨과 반가움을 맛보자는 것이다. 평이한 시어와 간결 · 압축된 표현으로 적절히 감정을 절제하면서 생활과 유리되지 않고 건강한 삶의 자세를 담담한 어조로 표출시킨 것이라 하겠다.

「설날 아침에」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