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테마 76. 이호철


이호철의 생애

어린 시절과 습작기

이호철(李浩哲, 1932~2016)은 함남 원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란다. 이후 고향의 갈마국민학교를 거쳐 1945년(14세) 해방 후 원산 한길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이 시기 이호철은 5년 동안 초기 북한 체제 속에서 농촌 공동체가 무너지는 급격한 현장을 그대로 목격하였다.

이호철은 중학교를 마친 후 원산고등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졸업을 앞둔 1950년(19세) 6 · 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인민군에 동원되었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북으로 가던 중 자형을 만나 겨우 풀려나 1 · 4 후퇴 직전인 1950년 12월 LST를 타고 월남하여 부두 노동자, 제면소 도제로 일하다가 미군 기관의 경비원으로 들어갔다. 이쯤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해군 중령으로 있던 염상섭에게 단편 「오돌 할멈」을 보여 주고 “싹수가 보인다.”는 격려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소설을 쓴다. 서울 환도 후에도 효창동 미군 기관에서 근무하며 습작에 열을 올리는데, 이렇게 완성한 작품이 황순원의 추천으로 1955년(24세) <문학예술>에 실린 「탈향」이다. 

문단 활동의 시작

이호철은 1956년(25세)에 전후의 황폐한 현실과 허무를 그린 단편 「나상」으로 추천 완료를 받고, 이어 「빈 골짜기」(원제 「백지 풍경」), 「무궤도 제2장」 등을 발표한다. 이 무렵부터 이호철은 미군 부대 경비원 노릇을 그만두고 황순원의 소개로 ‘광문사’에 들어가 오상원과 하숙을 하고, 또래의 신예 작가인 서기원, 박재삼 등과 어울렸다.

1957년(26세)부터 1960년(29세)까지 이호철은 「부군」, 「소묘」, 「부동하는 군상」, 「세월」, 「혼란아」, 「토굴」, 「새옹 득실」, 「짙은 노을」, 「와동」, 「이런 부부」, 「탈곡」, 「파열구」, 「먼지 속 서정」, 「진노」, 「만조」, 「아침」, 「여울」, 「용암류」, 「권태」 등 많은 작품을 쏟아내고, 1961년(30세)에 들어 문제작 「판문점」을 내놓아 현대문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이후 이호철은 많은 단편을 꾸준히 내놓는 한편 「소시민」, 「인생 대리점」 같은 장편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민주화 운동의 주도

1972년(41세) 10월, 유신 체제가 출범하고 박정희 정권의 폭압이 거세지자 이호철은 독재 정권의 횡포에 맞설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이듬해 민주수호협의회 YMCA 시국 성명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연행된다. 이어 개헌 청원 30명 서명, 항일시 낭독의 밤 등에 참가하며 반체제 운동에 나서는 동안 연행과 석방을 되풀이하며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1974년(43세)에는 문인 시국 성명의 사회를 맡아 안수길, 백낙청 등과 잡혀 갔다가 풀려나 가택 연금을 당하는데, 이 일로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크게 건드려 간첩 혐의를 받고 임헌영, 김우종 등과 구속되어 집행 유예를 받기까지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때 이호철은 구치소에서 북한 공작원 출신의 사형수를 만나 북쪽 체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것을 중심으로 쓴 작품이 1976년(45세)의 단편 「문」이다. 이후로도 이호철은 1970년대 후반에 「도주」, 「그 겨울의 긴 계곡」 등을 계속 내놓는다.

1980년(49세)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연행되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두 달 간 조사를 받고 나온 후 「새해 즐거운 이야기」, 「밤바람 소리」를 발표한다. 이어 1981년(50세) <월남한 사람들>을 출간하고 1980년대 내내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1985년(54세)에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대표를 맡아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여 강연 방해, 연금, 도청 등 갖가지 핍박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버텨낸다. 1989년(59세)에는 <이호철 전집>을 펴내고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호철은 1991년(61세) 단편 「살」을 발표하고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으며, 지금까지 문단 최고 원로 문인으로 인정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뇌종양 판정을 받아 입원 하루 전까지도 문인협회가 발간하는 ‘월간문학’에 연재하는 ‘우리 문단의 지난 60년 이야기’ 원고를 썼다. 잡지사에 넘기지 못한 13회가 유작이 됐다. 

이호철의 문학

이호철 문학의 특징

이호철은 분단 시대의 실향민이라는 데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작가이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뿌리 뽑혀 월남 피난민으로 내동댕이쳐진 그는 남한 사회에서 편입되어 부대끼는 삶을 견디고, 그러한 자신의 정체성을 작품에 녹인다. 그러면서 분단 상황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상실감과 그런 현실을 가져온 사회적 모순을 그려내었다.

장편 소설 「소시민」부터는 강렬한 비판 의식과 풍자 정신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품 세계가 변모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 유신 독재라는 현실 정치의 폭력에 행동으로 저항하고 자유에의 열망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여 몇 차례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러한 현실 참여의 경험을 통해 현실의 비리와 부조리가 궁극적으로 분단 상황으로부터 비롯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호철의 소설

「탈향」

1955년(24세) 황순원의 추천으로 <문학예술>에 실린 작품으로, 이호철의 데뷔작이다. LST를 타고 월남한 네 사람은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버티지만, 현실은 그 희망을 자꾸 짓밟는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이기심과 욕망이 서서히 드러나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자신 역시 이북 출신인 이호철은 「탈향」을 통해 인간성까지 저버리고 남한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실향민을 꾸짖는다. 자기 손으로 자기 집단 내부의 추악한 욕망과 이기심을 까발리고, 이를 냉정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비판 정신이 곧 이호철 자신의 실향 의식임을 입증하고 있다.

「탈향」

6 · 25 전쟁 중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대규모 1 · 4 후퇴가 일어나자, 두찬, 광석, 하원, 그리고 ‘나’는 엉겁결에 LST(Landing Ship Tank, 전차양륙함)에 올라 한 마을에서 함께 월남한다. 

‘나’는 털털하고 성격 좋은 광석, 약삭빠른 실속파 두찬, 나약한 감상주의자 하원과 함께 피난지 부산에서 궁핍한 피난살이를 시작한다. 이들은 부산 부두 하역장에서 육신을 팔아 간신히 끼니를 이어 갔지만, 기거할 방이 없어서 정차되어 있는 화차(火車)에 숨어들어 잠깐씩 잠을 청한다. 이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렵지만, 네 사람은 서로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겨내기로 맹세한다. 이들은 화찻간에서 고향에서 내리던 눈, 잘 웃던 이웃집 형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나이가 많은 두찬과 광석은 ‘나’와 하원을 귀찮게 생각한다. 하원은 입만 열면 고향 이야기이고, 눈물을 흘린다. 급기야 광석이 화차에서 실족하여 죽는 사건이 일어나 이들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이들 세 사람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점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마침내 두찬은 ‘나’와 하원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이제 ‘나’ 역시 하원을 버리고 도망할 궁리를 한다.

「판문점」

1961년(30세) <현대 문학>에 발표한 작품으로, 분단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현대문학신인상을 수상한 소설이다. 이호철은 이 작품으로 문단의 주목을 크게 받았다. 남북 이데올로기의 이질성과, 여기서 비롯된 분단의 역사를 ‘판문점’이라는 하나의 공간으로 압축해서 보여 주는 단편이다.

‘문’은 열림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설령 그것이 지금 ‘벽’처럼 느껴지더라도 희망은 유지될 수 있다. ‘판문점’은 아직은 벽이지만, 끝내는 열릴 ‘문’인 것이다. 이호철은 「판문점」을 통해 이렇게 분단으로 말미암은 절망과 비극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전해 주고 있다. 얼마 후 이호철은 실제로 군사 정전 위원회가 열리는 판문점을 찾아 북측 사람들과 만나기도 한다.

「판문점」

판문점 취재 기자인 진수는 형과 형수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판문점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자신이 없었다면 한결 형 내외의 관계가 원만했을 텐데 하는 상념에 잠긴다.

버스나 어느덧 판문점에 도착하자 같이 탔던 외국인 기자들은 사진 찍기에 바쁘다. 이윽고 북측 기자들도 도착하여 회담이 시작될 즈음, 진수는 붉은 완장은 두른 북한 여기자와 체제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여기자와 얘기하는 동안 진수는 남북 사이의 단절을 확인하며 벽에 부딪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휘몰아치고, 진수는 얼떨결에 그 여기자의 손을 잡고 아무 지프에나 올라탄다. 차 안에서 진수는 재미있는 얘깃거리를 늘어놓으며 여기자를 안심시킨다. 집에 돌아온 진수는 그 북한 여기자의 모습과 목소리를 떠올리고 판문점이 사라질 날을 그리며 잠에 빠져든다.

얼마 후, 오랜만에 취재차 다시 판문점에 간 진수는 그때의 여기자를 또 만난다. 그러나 상냥한 웃음과 딱딱한 경계를 동시에 보이는 그 여기자를 바라보며 씁쓸함을 느낀다.

「닳아지는 살들」

1962년(31세) <사상계>에 발표한 단편으로, 같은 해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한 가정을 무대로, 20년이나 돌아오지 않는 맏딸을 기다리는 초조한 상황을 소설화하고 있다.

‘영희’의 일가족은 항상 거실에 모여 앉아 이북으로 시집가서 월남할 때 데리고 오지 못한 맏딸을 기다린다. 그녀가 언젠가 찾아 들어올 문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정작 그 문을 열고 나가 기 다리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신경을 자극하는 꽝당 꽝당하는 쇠붙이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 소리는 1960년대 이후 진행된 근대화의 물결과 그 바람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영희 일가족은 이 쇠붙이 소리에 아무 희망 없이 숨어 지내며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호철 자신도 밝히고 있듯 「닳아지는 살들」은 속편 격인 「무너 앉는 소리」와 함께 안톤 체호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꽝당 꽝당’ 하는 쇠붙이 소리를 배경음으로 하여 분단의 비극이 한 가정에 가져다 준 정신적 고통을 상징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뚜렷한 사건의 전개가 없고,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 역시 한 결 같이 단절된 마음의 벽을 느끼게 해 준다. 특히 등장인물들 간의 심리적 갈등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묵중한 침묵과 불길하면서도 음산한 분위기는 이 작품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특징이다. ‘문’ 역시 그러한 분위기 형성에 이바지하는 소설적 장치인데, 이는 아마도 그 가족 구성원들의 삶이 거의 폐쇄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왜냐 하면, 이층으로 통하는 ‘문’에서는 침묵 일변도의 오빠 ‘성식’만 등장하며, 복도로 통하는 ‘문’에서 나타난 사람은 기다림의 대상이 결코 하닌 ‘식모’였기 때문이다. 긴장감과 기대감이 일시에 무너지자 막내딸 ‘영희’는 식모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는 정말 언니가 왔다며 아버지를 향해 소리친다. 그것은 이 지루하고 무의미한 기다림을 그만 끝내자는 반발의 외침이며, 기다림이 좌절된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의 감정이다.

「닳아지는 살들」의 기본 틀을 ‘기다림 - 기다림의 좌절 - 기다림을 재촉하는 쇠붙이 소리’로 본다면, 이 가족은 또다시 끝없는 기다림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세월 속에서 가족 간의 유대감은 점점 마멸되어 제목 그대로 ‘살이 닳아지는’ 아픔만 남게 될 것이다.

「닳아지는 살들」

5월의 어느 날 저녁, 가족들은 언제나처럼 밤 열두 시에 돌아온다는 맏딸을 기다리고 있다. 조용하고 썰렁한 집안에는 은행에서 은퇴한 늙은 주인(아버지), 며느리 정애, 그리고 막내딸 영희가 소파에 앉아 있다.

어디서 ‘꽝당 꽝당’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정애에게 이 집 맏딸의 시사촌 동생인 선재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을 상기시킨다. 선재는 죽은 영희 어머니가 몹시 아낀 청년이다. 마침 이층에서 내려온 성식은 왜들 그러고 앉아 있느냐고 가시 돋친 말을 하고, 영희는 바짝 야윈 파자마 차림의 오빠를 비꼰다.

술에 만취된 선재가 들어오자 영희가 그를 부축하고 올라가고 성식도 이층으로 올라간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정애는 까닭 없이 불안해지고 갑자기 조급해지는 것을 느낀다. 영희는 선재가 쓰는 초라한 방에서 선재의 품에 안기어 쇠망치 소리를 혼자 감당하기 힘들고 무섭다고 말한다. 그녀는 오빠의 방을 찾아가서 지금 막 결혼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식이 물끄러미 천장만 쳐다볼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영희는 쓰디쓴 웃음을 보인다.

점점 열두 시는 가까워지고 늙은 주인은 푸념을 하는 어린애처럼 코의 사마귀를 만지면서 두리번거린다. 그 순간 시계가 열두 시를 치고 모두의 시선이 시계와 노인의 얼굴로 향하는데, 복도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기묘한 웃음을 띤 식모가 나타나 변소에 갔었다고 말한다. 영희는 식모를 가리키면서 언니가 정말 왔다고 소리친다. 아버지는 영희의 부축을 받으면서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린다.

‘꽝당 꽝당’ 하는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는 온 밤 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