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테마 75. 최인훈


최인훈의 생애

어린 시절

최인훈(崔仁勳, 1936~)은 두만강변의 국경 도시인 함북 회령에서 목재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8세) 회령북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식민지 교육을 받았다.

1945년(10세)에 해방이 되자, 국경 곁인 최인훈의 집 주변에는 소련군이 곧바로 들어오고 읍내 곳곳에서 소련군과 일본군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진다. 이 때문에 그의 가족은 읍내 집을 떠나 시골로 잠시 거처를 옮겼는데, 다시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부르주아지로 분류된 그의 아버지는 1947년(12세) 다시 함남 원산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최인훈은 원산중학교와 원산고등학교에 다녔다.

1950년(15세) 한국 전쟁이 터진 후 최인훈 가족은 원산항을 통해 LST(; 탱크 수송 화물선)월남하여 한 달쯤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지내다가 친척이 살던 목포로 이주하여 1951년(16세) 목포고등학교에 다녔다. 최인훈은 원산고등학교에서 외국어로 러시아어를 배웠는데 목포고등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쳐서 힘들어 했는데, 무척 애쓴 결과 영어를 아주 잘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학 활동

1952년(17세)에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여 「두만강」의 초고를 쓰고, 1956년(21세)에는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대학을 중퇴한다. 이후 통역 장교로 근무하던 중 1959년(24세) <자유문학>에 단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을 투고한 것이 안수길에 의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이듬해인 1960년(25세)에는 「9월의 다알리아」, 「우상의 집」, 「가면고」를 발표한 데 이어 <새벽> 11호에 「광장」을 내놓아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광장」은 이후 1968년(33세)과 1973년(38세), 1976년(41세) 단행본으로 펴냈는데, 출판할 때마다 조금씩 수정을 거쳤다.

1961년(26세)에는 단편 「수」를, 1962년(27세)에는 「구운몽」, 「열하 일기」, 「7월의 아이들」을 발표하고, 1963년(28세)에는 풍자성을 띤 「크리스마스 캐럴 (1)」과 「금오 신화」를 발표하는 등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시도하였다. 이어 5 · 16 쿠데타 등을 목격하고 쓴 장편 「회색인」을 연재한다.

이후 1964년(29세)부터 1960년대 말까지 최인훈은 「크리스마스 캐럴 (2)」, 「문학 활동은 현실 비판이다」, 「놀부뎐」, 「웃음 소리」, 「크리스마스 캐럴 (3)」, 「크리스마스 캐럴 (4)」, 「크리스마스 캐럴 (5)」, 「정오」, 「서유기」, 「총독의 소리 (1)」, 「총독의 소리 (2)」, 「공명」, 「총독의 소리(3)」, 「주석의 소리」,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1)」, 「온달」, 「열반의 배」, 「옹고집뎐」 등 다양한 작품과 평론을 썼으며, 1970년대에도 「태풍」,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둥둥 낙랑둥」,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원시인이 되기 위한 문명의 의식」 등과 희곡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냈다.

최인훈은 1979년(44세)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창작을 거의 중단하다시피 하여 1980년대에는 작품 활동이 많지 않았으며, 1994년(59세) 오랜 공백을 깨고 <화두>를, 2003년에는 단편 <바다와 편지>를 냈다.


최인훈의 문학

최인훈 문학의 특징

내용의 특징

최인훈은 현대인의 고뇌와 불안을 묘사하기 위해서 꿈, 단장(斷章), 일기, 작품, 회상 등의 내용을 끌어와 수필에 가까울 정도로 ‘내적 사유 중심의 이야기’로 쓰면서 플롯을 해체해버리고 새로운 소설 미학을 창조하려고 애쓴 작가이다. 그의 소설은 줄기차게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구조를 분석하고 해석 · 비판한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월남한 독신이나 시골에서 상경하여 하숙하고 있는 학생 등 대부분 생활의 뿌리를 뽑힌 사람들이지만 지적 긍지도 있고 자의식이 강한 동시에 현실적인 절망감에 빠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실존적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 불안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이 작가의 명제였던 것 같다.

그래서 최인훈은 딱딱하기 짝이 없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사랑에 관한 테마’를 내려놓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문학을 통해 소외된 인간의 모습, 역사와 모순에 가득 찬 사회의 부조리 속에 함몰되어 가는 개인 삶의 갈등이 해결될 수 있는 통로를 사랑으로 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삶의 질곡들을 ‘사랑’이라는 열쇠로 해결하려는 그의 문학적 과제는 긍정적으로 성취되지 못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드러낸 그의 완곡한 사랑은 인간적 신뢰감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고 확인하려 하여 서로 부딪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모든 주인공들이 삶의 현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관념적이며 지독한 에고의 소유자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점들은 그의 문학이 독특한 빛을 발하면서도 독자들에게 외면당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최인훈의 작품에서 그 내용을 중심으로 살피고 단순히 그를 진단하기를 전후의 한국 사회를, 분단시대를 살아야 하는 부조리한 지식인 군상을 관념과 사유의 거울로 들여다보려 했던 작가라고 단정지려 하지만 정녕 그의 소설 내용은 자유로운 삶과 존재를 위해 그의 눈이 바깥 세계를 향해 있으면서 인간의 사랑을 추구하는 쪽으로 언제나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형식의 특징

최인훈 소설은 관념과 인식의 세계를 중요시한 결과 비리얼리즘적인 요소가 많은 데다 서사 형식의 실험성이 넘치기 때문에 매우 난해하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현실에 기댈 건더기를 갖지 못한 그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전후 문명의 해체이론들을 소설에 원용하여 당시 문단에서는 드물게 메타 픽션적이거나 패러디적 특성을 갖는 글을 썼다는 것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김치수는 최인훈에 대해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는 아마도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소설을 읽는 동안만은 자신의 사람을 잊어버리고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소설 속의 삶을 사는 일을 방해한다. 이 소설적 조작은 최인훈 소설이 독자에게 현실도피의 공간이 되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고통스런 자신의 삶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게 하며 자신의 현실로부터 떠날 수 없도록 깊은 의식을 갖게 하고 나아가서는 소설과 문화에 대한 독자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게끔 한다. 이와 같은 소설 문법의 파괴는 한편으로 소설의 제도화를 방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와 현실 사이에 있는 음모 관계를 어느 정도 드러나게 해준다“라고 평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작가가 독자와 소설 인물 사이를 이화시키려는 것이다. 작중 인물과 독자 사이를 떼어 놓으려는 의도는 현명해야할 독자가 허구 속에 빠져 들어 감상적이 되거나 비이성적으로 편협하게 되어버리는 것을 방지하려는 고도의 작가적 책략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최인훈은 ‘어떤 사건을 흥미 있게 이야기하는’ 소설가가 아니라, ‘어떤 사건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를 의미 있게 제시하는’ 소설가라고 볼 수 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1960년(25세) <새벽>에 발표한 작품이다. 한국 문학 사상 남 · 북한의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비판한 최초의 소설이자, 전후 문학 시대를 마감하고 1960년대 문학의 지평을 연 첫 작품으로 평가되는 문제작이다. 또한 「광장」은 4 · 19 뒤의 아주 잠깐 동안 우리 사회에 허용된 바 있는 열린 지적 분위기에 나옴으로써 절묘한 시기를 탄, 말하자면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각에 나온 소설이기도 하다.

‘이명준’이 제3국행 배를 타고 가던 중 자살한 근원적 이유는 그가 ‘바다’에 부여한 상징적인 의미에서 드러난다. 바다는 ‘은혜’와 그녀가 잉태했던 딸이 갈매기, 즉 ‘사랑’의 징표가 되어 살고 있는 곳으로서, ‘이명준’에게 있어 남북한에서는 이룰 수 없었던 진정한 사랑이 가능한, 달리 말해 밀실과 광장이 조화된 공간으로서 다가온 것이다. 따라서 「광장」에서 ‘이명준’의 자살은 단순한 현실 도피적 행위라기보다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광장과 밀실의 조화 또는 그러한 조화의 결정체로서의 진정한 사랑에 이르기 위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광장」

대학 철학과 학생인 이명준은 아버지 친구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그는 현실을 편협하게 인식하고 있는, 관념적이고 내성적 인물이다. 해방 후 가뜩이나 남한의 혼탁하고 부패한 체제에 회의를 품고 있던 그는 북쪽의 고위직에 있는 아버지 때문에 문초를 받은 후 더욱 허탈감을 느끼고, 결국 남한을 떠나 북으로 가는 밀항선을 탄다.

북한에서 <노동신문> 편집 기사가 된 이명준은 자신의 기사가 소부르주아적이라며 빈축을 거듭 사자 그만두고, 공사장 노동자로 일하던 중 직업 무용수인 은혜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얼마 후 은혜는 소련 순회 공연차 모스크바로 떠난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 이명준은 정치보위부 간부가 되어 서울로 오는데, 지난 날 은인의 아들인 태식이 첩자 혐의로 붙잡혀 온다. 이명준은 태식을 구타하고 태식의 아내인 옛 애인을 겁탈하려 하는 등 철저한 악역을 자임하지만 결국 둘을 몰래 도피시킨다. 북쪽에도 진정한 ‘삶의 광장’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명준은 은혜와도 재회했으나 은혜는 다음날 전사하고, 명준은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갇힌다. 남과 북에서 자기에게 맞는 삶의 터전을 얻기를 원했으나 어느 곳에서도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일종의 허무주의적 상황에 처한 이명준은 포로 송환 도중 남이냐 북이냐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중립국을 선택한다. 이제 자신이 나설 ‘광장’은 남쪽과 북쪽 어느 곳에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을 싣고 가는 인도의 상선 타고르 호가 남지나해를 지나 항해하던 어느 날, 이명준은 바다에 투신자살하고 만다.

「회색인」

최인훈은 5 · 16 군사 쿠데타와 6 · 3 한일 회담 반대 투쟁 때의 폭력을 목격한 후, 이제는 혁명조차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이 되었으며, 잠시 자유라고 느낀 것은 거짓 위에 세워진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식하였다.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세대>에 연재한 장편이 1963년(28세)의 「회색인」(원제 「회색의 의자」)이다. 최인훈의 소설 중에서도 사건이 점차 퇴조하고 에세이 스타일의 지적 독백이 강화되는 경향의 초기 작품이다. 대체로 최인훈의 작품은 경직화된 이데올로기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특히 「회색인」에서는 사고와 관념에 의해서 유리(遊離)되는 집단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그리고 있다. 

1950년대 말, 주인공 ‘독고준’은 전쟁의 와중에 북의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와 낯선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그러면서 고통스런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사고의 추이를 주시하고 표현하는 관념 소설이라는 평가가 말해 주듯 이 작품에는 논리와 사색적인 진술이 많다. 가령 이런 식이다. “만일 우리 나라가 식민지를 가졌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식민지 없는 민주주의는 크나큰 모험이다.”, “어떻게 해 볼래야 해 볼 수 없는 그런 환경이란 게 있어. 우리의 지금 상태가 그것 아냐?”, “이상한 현실이야. 우리 사회에는 절망이라는 활자는 있으나 절망은 없어.”, “언어와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골짜기를 뛰어넘는 길은 막혀 있었다.”. 이것은 ‘나갈 길 없는 지평선’ 앞에 선 자들의 자화상이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 세계에 갇혀 어찌할 바 모르는 젊은 세대의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은 그저 대학생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는 이들의 눈과 입을 빌어 뒤엉킨 혼돈의 현실을 지적으로 분해하고 비판하여 그것을 속속들이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운명의 굴레를 지성의 힘으로 이겨내려 한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 지식인의 전범을 처음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1958년과 1959년의 한국 사회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였다. 정치는 노쇠한 정치가를 축으로 끝없는 소모전을 되풀이하고 있었고, 전쟁의 부산물들은 사회 곳곳에 그대로 방치된 채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누구도 분연히 자기 언어로 말을 할 수 없었고, 누구도 자기 의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이러한 1950년대 후반의 암울한 시대 상황을 ‘독고준’ 개인의 욕망과 그 결핍의 자리바꿈으로 상징화했던 작가 최인훈의 의도는 명확했다. 모든 것이 부재한 시대에 개인의 욕망도 또한 부재할 수밖에 없으며, 끝없는 욕망의 자리바꿈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미로를 헤매는 그 시대 지식인의 황폐한 정신세계의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 하겠다.

결국 아무런 대안이 없이 출구가 막혀 버린 미로의 시대에 사는 지식인들과 그 뒤에 숨어있는 최인훈은 거대하고 폭압적인 현실에 전면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역으로 그 현실에 냉소를 보냄으로써,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되고 있는 냉소의 크기만큼 암울한 현실의 어둠도 짙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회색인」

1958년의 비가 내리는 어느 가을날 저녁, 독고준의 하숙집으로 친구인 김학이 찾아온다. 김학은 독고준이 매우 냉철한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정치 모임 동인에 가입할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혁명이나 정치에 무관심한 독고준은 그 권유를 거절하고, 김학이 떠난 후 독고준은 내리는 비를 맞으며 과거의 회상에 잠긴다.

독고준이 어렸을 때, 지주였던 아버지와 매형은 가족을 버리고 월남한다. 가족들이 월남했다는 사실은 독고준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했고, 그는 학교나 친구들에게 별로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책에만 파 묻혀서 살았다.

어느 날, 우연히 전쟁의 폐허를 직접 눈으로 본 후 외곽 지역에 살던 독고준에게 전쟁은 공포의 전부가 되어 버린다. 전쟁 속에서 소외된 자신, 학교에서는 뭔지도 모를 이데올로기 때문에 소외된 자신. 그는 이내 현실 속으로 돌아오지만, 현실 속의 자신도 모든 것에서 소외되어 버린 그 때 그대로일 뿐이다.

결국 독고준은 어머니와 누이를 북에 두고 홀로 월남하는데, 같이 살던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가난한 고학생의 신분으로 전락한다. 그는 매형의 공산당 당원증을 발견하고는 그를 협박하여 매형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그곳에서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매형의 처제인 이유정을 만난다. 원래 독고준은 김순임이라는 여성에게 관심을 가졌지만 현대적 여성인 이유정에게 점점 끌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고준은 또 다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상념의 나날을 보내는 자신의 비겁함과 소심함에 대해 반성하고 갈등하게 된다.

1959년의 비 내리는 어느 여름날 저녁, 친구 김학이 독고준을 찾아온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간 정치에서부터 더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나누던 둘은, 김순임의 이야기가 나와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시간이 늦었다며 김학은 돌아가고, 친구를 보내고 난 독고 준은 혁명이니 신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생각에 오랫동안 잠에 들지 못하며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이내 아래층에 있는 이유정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진다.

「웃음 소리」

1966년(31세)에 발표한 단편으로, 그 해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최인훈은 사건보다는 사건의 동기로서의 내면세계에 더 큰 관심을 가진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소설 속 사건들은 내면적 심리의 결과이면서 한 인간의 내면적 변모 과정을 보여주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얼핏 보기에도 ‘의식의 흐름’ 수법을 닮은 데가 있는 소설 기법을 통하여 인간성의 해체와 새로운 탄생을 형상화해 내고 있다.

소설 속의 현실은 거의 언제나 개인에게 있어 문제적 현실이다. 문제적 현실은 개인에게 갈등의 소지를 제공하는데, 그 갈등은 어려운 선택의 문제와 직결된다. 선택과 버림은 모든 소설 속에 나타나는 일반화된 갈등의 문제이지만, 최인훈의 소설에서는 고뇌와 방황으로 탈바꿈하여 나타난다. 허무와 불안, 고뇌와 번민 등 현대인의 심리적 고통을 주로 다루는 그의 소설은 실존주의적 색조를 띠기도 한다.

「웃음소리」는 ‘떠남→ 체험→돌아옴’의 구조를 보여 준다. 주인공은 남자로부터 배신당하고 실의에 빠져 자살하기 위해 ‘P 온천’으로 가지만, 산에서 정사(情死)한 두 남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다시 마음을 정돈하여 돌아온다. 두 남녀의 죽음은 그녀에게 충격이자 사랑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했고, 그녀를 성숙시켰으며 새로운 삶을 열게 해 준다. 즉 이 소설은 실연당한 여인이 죽음을 결심하고 서울을 떠나 ‘P온천’으로 가지만, 자신이 진정 원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임을 깨닫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웃음소리’라는 소재를 통해 현실과 꿈, 사실과 환상을 혼재시켜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그 극복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웃음소리」

그녀는 바(bar) ‘하바나’의 종업원으로, 자기가 근무했던 마담에게서 밀린 월급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순정을 바쳤던 ‘검은 안경을 쓴 해사한 눈자위의 그’와 헤어진다.

이튿날, 그녀는 자살을 감행하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P온천을 찾는다. 그곳은 ‘그’와의 추억이 서린 장소이다. 기차 안에서 신사가 말을 건넨다. 그러자 같이 데리고 가서 죽어 버리고 싶은 생각을 한다. P온천의 여관에서 묵은 다음날, 그녀는 죽기로 작정한 장소가 있는 산 속으로 간다. 그곳엔 한 쌍의 남녀가 잔디에 누워 있었다. 여자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튿날, 같은 시간에 다시 그 장소에 갔더니 오늘도 그 남녀는 벌써 와 있었다. 그녀는 여자가 베고 있는 남자의 팔이 햇빛 속에 환한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본다. 그 여자의 짤막한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그녀는 그 남녀 때문에 이틀이나 허비하고 꿈과 환각에 사로잡혀 괴로움을 당한다. 그녀는 빈터의 남녀가 자기 자신과 ‘그’처럼 언젠가 갈라지는 날을 그려본다. 다정스럽게 팔을 베고 있던 숲 속 빈터의 그 여자가 자기처럼 혼자 그 빈터를 찾게 될 어느 날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러자 그녀는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날 그녀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사흘째 되던 날, 그녀는 점심때가 되어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이번엔 그 자리를 차지한 남녀를 보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빈터에는 십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기에는 그 남녀의 주검이 거적때기에 덮여 있었다. 이미 1주일 전에 죽은 시체라는 것이었다.

그 후 P온천에서 1주일을 더 묵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녀는 여자의 짤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옴을 느낀다. 아주 귀에 익고 사무치는 목소리,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의 웃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