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의 생애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김춘수(金春洙, 1922~2004)는 경남 충무의 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 그의 부모는 개방적 사고를 가지고 있어 일제 강점기에 보기 드물게 그를 유치원에 보내는데, 김춘수는 자신의 환경에 대해 우월감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또래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된 소외감 때문에 괴로워한다.
1929년(8세) 김춘수는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내내 일등을 차지하고 도지사 표창까지 받는다. 졸업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하숙방을 잡고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김춘수는 낯선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교과 성적이 자꾸 떨어져 갔고, 이를 염려한 아버지는 조부모만 고향에 남기고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럼에도 마음을 다잡지 못한 김춘수는 결국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자퇴한다.
얼마 후 김춘수는 법대 진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그곳 서점에서 우연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을 접한 후 충격을 받아 1940년(19세) 법학이 아닌 니혼 대학 예술과에 입학하여 영미 문학을 탐독하였다. 이 무렵부터 습작도 시작하였다. 그런데 1942년(21세) 잠시 귀국했다가 일경에 체포된다.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별생각 없이 했던 일본에 대한 험담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일로 그는 니혼 대학에서 퇴학당했다.
문단 생활의 시작
1943년(22세) 풀려난 그는 감옥 생활로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다가 결혼하고, 일제 말의 징병을 피해 처가에서 숨어 지내던 중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 그는 고향 충무에서 유치환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한글 강습회를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1946년(25세)에는 시 동인지 <낭만파>를 펴내고,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시화집에 이 <애가>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김춘수가 본격적으로 시를 창작하기 시작한 것은 1947년(26세) 자비로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하면서부터이다. 이 시집은 릴케의 영향을 듬뿍 받은 시로 채워져 있는데, 유치환이 서문을 써 준다. 이후 1948년(27세) <죽순>에 <온실> 등을 발표하고, 1949년(28세)에는 <산악>, <사>, <기> 등을 발표하고 서정주가 서문을 쓴 두 번째 시집 <늪>을 펴냈다. <늪>은 <구름과 장미>에 비해 정확하고 치밀한 언어의 운용을 보여 준다.
1950년(29세) 한국 전쟁이 터진 후 전시의 와중인 1951년(30세)에는 세 번째 시집 <기>를 펴내고, 1952년(31세)에는 구상 등과 <시와 시론> 동인지를 펴내며 여기에 <꽃>을 발표하였다. 이어 1953년(32세)에는 네 번째 시집 <인인>, 1954년(33세)에는 시선집 <제일시집> 등을 내놓았으며, 1955년(34세)에는 소설 <유다의 유서>를 발표하였다. 1958년(37세)에는 시론집 <한국 현대시 형태론>으로 한국시인협회상을 받는다.
김춘수는 여러 대학에 출강한 경험이 있지만 대학 중퇴 이력 때문에 정식 교수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1959년(38세) 문교부 교수 자격 심사를 거쳐 비로소 교수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시집 <꽃의 소묘>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내 자유아세아문학상을 받았고, 1961년(40세)에는 시론집 <시론>을, 1963년(42세)에는 단편 소설 <처용>을 발표한다.
1970년대 이후
이후 김춘수는 10여 년 간 시를 내놓지 않고 탐구를 지속하다가 1969년(48세) 13편의 연작 장시 <처용 단장>을 발표하며 무의미시의 본격적 단계에 들어선다. 이후 1974년(53세) <처용>을 출간하고 1980년(59세)까지 수상집 <빛 속의 그늘>, 시론집 <의미와 무의미>, 시선집 <김춘수 시선>와 <꽃의 소묘>, 시집 <남천>과 <비에 젖는 달>, 산문집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 등을 꾸준히 냈다. 그 동안 경북대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60세)에는 교수직을 내놓고 국회의원이 된 수 문공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시집 <처용 이후>, 시선집 <김춘수 전집>을 비롯해 많은 시집, 수상집, 시론집을 냈다. 1991년(70세)에는 KBS 이사로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원로 시인으로서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한다. 꾸준히 시와 산문, 이론에 매진하던 김춘수는 2004년(83세) 식사 도중 기도가 막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숨졌다.
김춘수의 시
전기 시
1947년(26세)의 <구름과 장미>를 비롯하여 1949년(28세)의 <늪>, 1959년(39세)의 <꽃의 소묘> 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등에 실린 작품을 주로 전기 시로 분류한다.
<서시>
1946년(26세) 첫 시집 <구름과 장미>에 실은 작품으로, 김춘수는 이 시집을 통해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구름과 장미>는 <서시>에서 볼 수 있듯 애수, 비탄, 그리움 같은 서정성과 ‘장미’에 매혹된 마음의 상태를 보여 준다. 이런 성향은 릴케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다.
<서시>
가자. 꽃처럼 곱게 눈을 뜨고.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원한의 눈을 뜨고 나는 가자. 구름 한 점 까딱 않는 여름 한나절, 사방을 둘러봐도 일면(一面)의 열사(熱沙). 이 알알의 모래알의 짜디짠 갯내를 뼈에 새기며 뼈에 새기며 나는 가자.
<꽃>
1953년(33세) <현대 문학>에 발표한 작품으로, 김춘수가 마산고등학교에 재직하던 당시에 써 둔 시라고 한다. 1950년대에 김춘수는 ‘꽃’을 제재로 한 일련의 시로 우리 시에 존재론의 문제를 끌어들임으로써 한국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데,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제1연은 ‘이름을 불러 주기’라는 명명(命名) 행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에는 그는 무(無)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몸짓’은 장미꽃이나 민들레꽃과 같은 구체적인 꽃이 아닌, 어떤 낯설고 정체불명인 관념일 뿐이다 제2연에 가면 시적 화자는 대상을 인식하고 이름을 불러 줌으로써 그는 정체를 드러내며 ‘나’에게로 다가온다. 혼돈과 부재의 상태, 곧 존재의 은폐성으로부터 그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은 존재의 집이다.”라고 하면서 만물은 본질에 따라 이름을 지으며, 시인의 사명은 성스러운 것을 이름 짓는 데 있다고 한 말을 상기시켜 준다.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것의 이름을 부를 때, 존재는 참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꽃’은 ‘의미 있는 존재’를 상징한다.
제3연에는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근원적 갈망이 표출되어 있다. 주체인 ‘나’도 대상인 ‘너’에게로 가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제4연에서는 시적 화자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이 ‘우리’의 것으로 확산된다. 그리고 ‘꽃’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임이 확인된다. ‘눈짓’은 ‘꽃’과 동격(同格)의 이미지로서 ‘의미 있는 존재’를 상징한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을 위한 서시>
1957년(37세) <문학예술>에 발표한 작품으로, <꽃>의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시에 동원된 ‘미지’, ‘존재’, ‘무명’, ‘추억’ 등의 시어들은 릴케가 주로 즐겨 쓰던 시어이다.
<꽃>이 존재가 남에게 바르게 인식되고 싶어 하는 소망을 노래한 것이라면, <꽃을 위한 서시>는 반대로 인식의 주체로서의 화자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하는 욕망을 읊은 것이다. 제3연의 ‘무명(無名)의 어둠’이란 존재의 의미, 본질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을 말한다. 이 무명의 상태를 보다 못한 ‘나’는 의식을 일깨우는 불을 밝히고 인식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나’의 이 노력이 돌개바람처럼 문득 큰 힘으로 변하여 사물의 본질을 꿰뚫기만 한다면 ‘나’는 드디어 꽃을 똑바로 인식하고 알맞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지만, 꽃은 수줍은 ‘신부’처럼 너울을 드리운 채 그 정체를 끝내 드러내지 않아 안타까움을 준다.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1950년(30세) 한국 전쟁이 터지자, 평소 ‘불완전’과 ‘역사’는 ‘아프게 무시’하겠다고 결심했던 순수주의자 김춘수도 현실에의 절규를 드러낸다. 그 한 예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으로, 1958년(38세)에 발표하고 이듬해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에 수록하였다. 처음에 산문시로 발표 때는 길이가 길었지만 시집에 실을 때에는 49행으로 개작되었다.
1956년 헝가리에서는 집권당인 공산당을 몰아내기 위한 시민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난다. 시민들의 궐기에 항복한 공산당 정권은 결국 정권에서 손을 떼고 개혁파 인물을 새 수상으로 지명하는데, 이 사건을 소련 지배권으로 부터의 이탈로 이해한 소련은 헝가리로 탱크 1000대와 병사 15만 명을 보내 무력으로 새 개혁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 과정에서 ‘소녀’를 비롯한 많은 헝가리 국민들은 죽어나갔고, 이는 헝가리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픈 상처로 남게 된다.
당시 6 · 25라는 같은 비극을 겪은 우리나라의 시인 김춘수는 이 사건을 포착하는데, 그 결과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다. 헝가리에서 일어난 자유의 물결을 총검으로 유린하고 억압하는 소련의 비휴머니즘적인 행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바쉬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 보 상공으로 뛰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초도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 세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 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 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시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는데/ 한국의 열 세 살은 잡히는 것 하낱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젖어든다./ 기억의 분(憤)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주일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부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 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逆)으로 싹튼 것일까./ 싹튼 비정(非情)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아지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의 염염(炎炎)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능금>
1959년(39세) 시집 <꽃의 소묘>에 발표한 작품으로, 김춘수가 추구하는 ‘무의미의 시’, ‘절대적 심상의 시’에 속하는 주지시 계열에 속하면서도 상당한 친근감을 준다.
익어가는 ‘능금’에 대한 경이감을 차분한 어조로 읊는데, 화자는 ‘능금’이라는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끊임없는 물음을 보내며 그 비밀을 알아낸다. 능금은 겉모습이 아닌 속 모습, 곧 실체를 드러내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제1연의 능금의 실체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다시 능금의 빛깔과 향기가 되어 우리의 손에 닿게 되고 우리에게 축제처럼 찬란하고 흐뭇한 충족감을 안겨 준다.
제2연의 능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알알이 익어 가고 그리고 가장 높고도 숭고한 곳에서 가을은 가장 큰 은총과 사랑으로 능금의 충실을 도와 준다.
제3연은 능금의 내면, 아름다운 미소가 있는 그 깊숙한 곳에는 예로부터 존재하는 한없이 넓고 시원한 감정의 바다, 넘치는 생의 감각이 물결치고 있다.
능금 하나를 두고 이런 감격을 우리에게 안겨 주는 시인의 존재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존재의 비밀을 밝히는 주지시이면서도 ‘그리움’, ‘축제’, ‘애무의 눈짓’, ‘세월’, ‘감정의 바다’ 같이 함축적 의미가 풍부한 시어를 구사함으로써 얼음 같은 지성을 녹여 포근하고 풍요로운 서정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다.
<능금>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무의미 지향의 후기 시
<꽃의 소묘>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이후 김춘수는 10여 년 간 거의 시를 발표하지 않는데, 그러는 동안 그는 “관념, 즉 의미 이전의 존재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언어나 의미 이전의 사물의 본질이 빚어내는 음영을 관찰하는 작업을 한다. 이런 무의미 직전의 과도기 형태의 시를 모은 것이 1969년(48세)의 <타령조 · 기타>이며, 본격적인 무의미시의 극단을 풀어 놓은 것이 같은 해 <현대 시학>에 발표하기 시작한 13편의 연작 장시 <처용 단장>이다.
<인동 잎>
1969년(49세) 시집 <타령조 · 기타>에 실린 작품이다.
<타령조 · 기타>는 김춘수가 전기 시에서 <처용 단장>의 본격적 무의미 시로 가는 중간에 자리한 ‘인식’의 시집이다. <인동 잎>은 그 중에서도 ‘인식의 시’로 자주 인용되는 작품인데, 끝의 두 행을 제외하면 이 시의 대상이 무엇인지, 시인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비유적 이미지를 철저히 배제한 풍경 묘사로만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인동 잎’으로 제시된 한 폭의 그림에서 우리는 조금의 티끌도 묻어나지 않는 짜릿한 감정 이입의 순간을 느끼게 된다. 일상적인 사물을 구체적인 설명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지 않는 대신, 시인의 가슴에 떠오른 어떤 관념을 압축된 풍경 묘사를 통해서 이렇게 ‘보여 줄’ 뿐이다. 그 관념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은 무상(無想)의 관념을 지향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쓰인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언어 자체를 절대화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인동 잎>의 후반부는 풍경을 바라보는 화자의 감정이 반영된 것으로 일체의 관념과 설명을 배제하겠다는 시인의 의도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눈 덮인 초겨울 들판에서 붉은 열매를 쪼아 먹는 ‘작은 새’는 인동초의 겨울나기를 가로막는 방해물의 상징이며, 인동초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슬픈 것은, 겨울과 작은 새로 표상된 시련의 외적 상황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인동초의 인고(忍苦)의 아픔이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인동 잎>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처용 단장>
1969년(48세) <현대 문학>에 발표하고 1974년(53세) 시집 <처용>에 수록한 작품으로, 총 13편의 연작 장시이다. 표제와 달리 고대 설화인 <처용 설화>와는 거의 연관이 없고, 관념과 의미가 제거된 어느 완벽한 무의미 상태에서 섬세한 이미지만을 언뜻언뜻 스치듯 담아내는 시이다.
김춘수를 제2의 이상(李箱)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가장 첨단적인 현대시의 기법을 구사하여 무의식 세계의 이미지를 구상화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진폭을 새로이 개척, 확대했다. 특히 후기로 갈수록 김춘수는 비유적 이미지를 버리고,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로써 일종의 시의 순수한 상태 곧 무의미의 시, 절대시를 이룩하려 시도하는데, 그 한 극단지 <처용 단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어떤 주제 의식이나 특정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고, 오직 심상만을 제시하고자 감각적인 언어들을 동원한 서술적 이미지에 의존한다. 따라서 시의 내면에는 어떤 관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관념이 배제되었다고 해서 ‘시문학파’의 순수시와 같지는 않으며, 이미지를 중시한다고 해서 김광균이나 김기림의 주지시와 같은 것도 아니다. 김춘수의 이른바 ‘무의미의 시’, ‘존재의 시’는 언어와 언어가 부딪쳐 유발하는 미묘한 감각적 심상을 위주로 하고 있으면서도 객관적 형태의 사실적 묘사를 위주로 하지 않음으로써 등장하는 사물들 간의 관계가 서로 먼 거리를 가진다. 따라서 개별 시행 속에서 관념이나 의미를 추출하는 데 익숙한 독자에게는 난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용 단장> 中
1의 1/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근골(筋骨)과 근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히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1의 2/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1의 9/ 팔다리를 뽑힌 게가 한 마리/ 길게 파인 수렁을 가고 있었다./ 길게 파인 수렁의 개나리꽃 그늘을/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가고 있었다./ 등에 업힌 듯한 그/ 두 개의 눈이 한없이 무겁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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