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테마 70. 기타 1950년대 소설(오상원, 선우휘, 하근찬. 안수길, 이범선, 송병수, 서기원)


한국 전쟁 후에는 전쟁의 비극적 체험과 상처를 담은 일군의 전후 소설이 마련된다. 이들은 몇 가지 경향으로 나뉜다. 이 중 장용학, 전광용, 황순원, 손창섭의 작품은 따로 다루고, 여기에서는 오상원, 선우휘, 하근찬, 안수길, 송병수, 서기원, 이범선의 작품을 다루기로 한다.

실존주의적 경향의

고발 소설

「요한시집」 (장용학 , 1955), 「유예」 (오상원 , 1955), 「모반」 (오상원 , 1957), 「불꽃」 (선우휘 , 1957), 「사수」 (전광용 , 1959)

전쟁 상처를 치유하고자 한 소설

「학」 (황순원 , 1956), 「학마을 사람들」 (이범선 , 1956), 「수난 이대」 (하근찬 , 1957), 「백지의 기록」 (오상원 , 1959)

전후 사회 세태를 묘사한 소설

「비 오는 날」 (손창섭 , 1953), 「제 3인간형」 (안수길 , 1953), 「쑈리 킴」 (1957, 송병수 ), 「암사 지도」 (서기원 , 1957), 「오발탄」 (이범선 , 1959)

오상원

오상원의 생애

오상원(吳尙源, 1930~1985)은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신의주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서울 용산고등학교를 거쳐 1949년(20세) 서울대 불문과에 들어간다. 이듬해 전쟁이 터지자 다른 학생들과 함께 피난지 부산에 임시로 지은 가교사에서 계속 공부하였다. 이 시절 오상원은 앙드레 말로(Malraux)의 작품에 심취하고, 학우들과 음악다방이나 술집에 모여 문학과 철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3년(24세)에는 극협에서 6 · 25 기념 공연을 위한 희곡을 공모하자 여기에 「녹쓰는 파편」을 투고해 당선되고, 1955년(26세)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유예」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다. 이후 꾸준히 소설을 창작하였는데, 1958년(29세)에 「모반」으로 동인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59년(30세)에는 「백지의 기록」을 발표하고, 1960년(31세) <동아일보>에 사회부 기자로 들어간 후에도 미완성 장편 「무명기」를 비롯해 단편 「야반」, 「분신」, 「훈장」, 「담배」 등을 드문드문 내놓았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는 소설 창작에서 멀어지고, 1985년(56세) 지병으로 세상을 뜬다.

오상원의 소설

「유예」

1955년(26세)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으로, 오상원의 등단 소설이다. 처형이 한 시간 뒤로 유예된 포로를 통해 극한 상황 속에 처한 인간의 심리를 그리고 있다.

「유예」

적의 배후 깊숙이 들어간 ‘나’의 부대는 본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눈 속에 쓰러진 부하들을 버려 둔 채 여섯 명만이 눈을 헤치며 대로를 횡단할 때, 돌연 총성과 함께 선임 하사가 쓰러진다. ‘나’는 선임 하사를 부축하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새벽이 가까워진 산속에서 선임 하사는 슬픈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죽어 갔다. 그는 무릎까지 파묻히는 눈 속을 헤치면서 남쪽으로 걷다가 몇 번이나 정신을 잃는다.

인적 없이 황량한 마을. ‘나’는 이상한 발소리를 듣는다. 몸을 피하고 보니 인민군들이 한 청년을 죽음의 둑길로 내몰고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인민군을 향해 총을 난사했으나 붙잡혀 몇 번의 심문을 받는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움 속 감방에 쓰러져서 한 시간 후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정확히 자신의 삶을 끝맺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둑길을 걸어간다. 흰 눈이 회색빛으로 흩어지다가 점점 어두워지자, 자신은 모든 것이 끝났지만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의식이 점점 흐려진다.

「모반」

1957년(28세) 발표한 단편으로, 해방 이후 정당이 난립하고 무질서와 혼돈이 극심한 가운데 조국을 위해 테러 집단에 가담한 어느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허황된 정치적 명분보다 소박하고 평범한 인간의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주인공 ‘민’의 말은 오상원의 인간주의적 각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청년 무리의 행동 자체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결말에 보이는 양심의 가책이나 반성 등도 소박한 인정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 작품이다.

「모반」

민은 정치적인 신념으로 반대파를 쏘아 죽인 청년으로, 그는 그것이 조국을 위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동료들의 도움으로 마침 현장을 지나던 한 청년이 범인으로 몰려 대신 잡히고, 민은 현장을 벗어난다.

그런데 신문에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러 나갔다가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렸다는 그 청년의 여동생 말이 실리고, 민은 그 기사를 읽다 얼마 전 타계한 어머니를 회상한다. 청년의 집을 찾은 주인공은 여동생에게 돈을 건네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게다가 결사대 내부에 배신자가 생지가, 민은 자신이 몸 바쳐온 단체가 정치에 이용당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민은 “소박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들”이 더 소중하다는 말을 남기고 결사대에서 나와 경찰에 자수한다.

「백지의 기록」

1959년(30세) <사상계>에 발표한 중 · 장편이다.

표제의 ‘백지’는 이중적인 의미를 띤다. 하나는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인간과 사회이며, 다른 하나는 그 백지를 다시 한 번 백지화하기, 즉 전쟁으로 말미암은 상흔의 지우기이다. 오상원은 「백지의 기록」에서 전쟁의 파괴력을 낱낱이 파헤치면서도, 그 끝에서는 역사의 비극을 딛고 나아가야 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백지의 기록」

중섭은 의대에 다니던 중 전쟁이 터져 군의관으로 참전하는데, 부하를 구하려다가 오른손과 다리 하나를 잃고 의사가 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자살을 기도한다. 자살에 실패한 중섭은 정신착란으로 입원하고, 우연히 그 병원에서 일하는 동창 준을 만난다. 중섭은 불구인데도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준에게 이끌러 자활촌을 찾고, 그곳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에 반해 중섭의 동생인 중서는 몸은 멀쩡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여자와 술에 빠져 지낸다. 그러던 중 옛 애인 정연의 소식을 듣는다. 정연은 전쟁 중 어머니를 잃고 병사들에게 겁탈당한 뒤 정신 이상과 기억상실증에 걸렸는데, 형 중섭이 입원한 적 있는 바로 그 정신병원에 있었다.

정연은 중서와 준의 보살핌으로 상태가 좋아지고, 중서는 정연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기억을 되찾은 정연은 과거의 악몽 때문에 투신자살하고 만다.

중서는 충격을 이겨내 서서히 자기 상실에서 벗어난다. 정연을 묘지에 묻고 돌아온 후, 중섭과 중서의 가족은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여 회포를 푼다.

선우휘

선우휘의 생애

선우휘(鮮于煇, 1922~1986)는 평북 정주에서 평범한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1943년(22세)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다. 1945년(24세) 해방 직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다가, 중학교 교사 등을 지낸 뒤 1949년(28세) 육군 소위로 입대하였다. 1950년(29세) 6 · 25가 터지자 장교로 임명된 그는 특수 유격대에 지원하여 전쟁 중 군인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1955년(34세) 우화성을 띤 단편 「귀신」을 선보이며 문단에 나온 선우휘는 이듬해 「One Way」, 「테러리스트」를 발표한다. 그리고 1957년(36세)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불꽃」으로 동인 문학상을 차지하며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1958년(37세)에는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여 단편 「테러리스트」, 「화재」, 「보복」, 「승패」, 「오리와 계급장」 등을 발표한다. 그런데 이런 작품에서는 전쟁에 대한 직접 묘사를 줄이고, 대신 월남자들이 겪는 설움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눈길을 주고 있는 등 「불꽃」에 비해 적극성이 다소 줄어 있다.

1959년(38세)에는 「흰 백합」, 「도전」, 「깃발 없는 기수」 등을 발표하고 단편집 <불꽃>을 펴냈다. 이후 1980년대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많은 수의 소설과 소설집을 냈다. 그러던 중 1986년(67세) 부산에서 KBS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을 녹화하던 도중 갑자기 쓰러져 숨진다.

선우휘의 문학

선우휘는 오상원과 함께, 손창섭과 장용학으로 대표되는 1950년대의 분열된 자의식의 문학이나 병적 인간상의 탐구에 매몰되어 ‘행동’을 지워버린 문학에 반기를 든 작가이다. 1950년대 작가들이 대부분 폐허가 된 현실을 피해 어둠침침한 관념 속으로 숨어들어 스스로를 유폐시켰다면, 선우휘는 전쟁 체험 세대의 의식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행동하는 인간상을 그린다.

그러던 중 1967년 참여 · 순수 논쟁 때에는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한다. 여기서 선우휘는 참여론의 요점에 일부 공감을 나타내긴 했지만, 문학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데에서는 비관적인 의견을 보였다. 이러한 견해는 직업 군인 출신인 선우휘가 기자라는 직업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얻게 된 일종의 균형 감각으로 보인다.

「불꽃」

1957년(38세) <문학예술> 신인 특집에 발표한 작품으로, 3 · 1 운동 때부터 6 · 25에 이르는 30여 년에 걸친 역사의 격변과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를 잇는 3대의 삶을 겹쳐 그려낸 소설이다. 이 중 작품의 중심 화자는 격변의 역사를 온몸으로 감당하는 손자 ‘고현’이다.

「불꽃」은 집단의 광기가 개인을 억압하던 역사의 격변기에, 도피적 삶에서 참여적 삶으로 나아가는 ‘고현’의 내면과 행동을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독단성과 허구성을 폭로하기도 하였는데, 선우휘는 이 작품으로 ‘행동주의자’, 또는 휴머니스트라는 말을 얻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장편에 어울리는 소재를 단편에 담아내다보니 비약과 단절이 보인다는 비판을 받으며, 또한 역사와 현실에 대한 세심한 관할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불꽃」

고현은 아버지가 3 · 1 운동 때 일경의 총에 맞아 죽어 유복자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기독교의 세례를 받아 국가나 민족 같은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이었고, 할아버지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치고 있다. 현의 어머니와 학교 선생님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아버지의 길을 따르라고 가르치지만, 할아버지는 자신과 무관한 일에 뛰어들어 불행을 자초하지 말라고 타이른다.

일제 말기, 현은 학병으로 전선에 투입되지만 일제의 허망한 광기에 염증을 느껴 탈주하고 중국 공산주의 집단인 ‘팔로군’의 인민 해방 운동에 가담한다. 그러나 거기서도 인민 해방론자들의 광기를 겪으면서 그는 소심한 개인주의자로 기울어간다.

해방 후 여학교 교원이 된 현은 역사를 애써 외면하고 자기 일에만 충실하려고 한다. 그런데 교장이 자신의 비리를 다른 교사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을 보면서 저항의식이 꿈틀댄다.

6 · 25가 터친 후 현은 친구 연호를 만난다. 연호는 월북한 사람으로, 현에게 ‘인민’의 혁명에 동참하자고 권한다. 현이 거절하자 연호는 혁명의 이름으로 현의 할아버지와 조 선생의 아버지를 쏘아 죽이고, 이를 목격한 현의 내부에는 강렬한 저항의 불꽃이 일어난다. 현은 총상을 입어 혼미한 와중에도 그 불꽃을 의식하고, 그 동안의 소극적인 삶을 청산할 것을 다짐한다.

하근찬

하근찬의 생애

하근찬(河瑾燦, 1931~2007)은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48년(18세) 전주사범학교에 다니던 중 교원 자격 시험에 합격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학업에 미련이 남아 1954년(24세) 동아대학교 토목과에 입학해 공부를 계속하였다.

하근찬은 본래 문학에 꿈을 갖고 있었는데, 1955년(25세)에는 전국 학생 문예 작품 모집에 단편 「혈육」을 응모해 당선되었고, 이듬해에는 교육 소설 현상 모집에 단편 「메뚜기」가 당선된다. 용기를 얻은 하근찬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수난 이대」를 응모하여 당선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나왔다.

하근찬은 입대 영장을 받아 학업을 중단하고 입대하였는데, 복무 중에도 「산중 고발」을 발표하는 등 계속 소설을 썼다. 제대 후에도 ‘교육주보사’에 근무하며 1959년(29세) 「흰 종이 수염」, 「나룻배 이야기」를 발표하고 1960년(30세) 「이지러진 입」, 「절규」 등, 1961년(31세) 「분」, 1962년(32세) 「나무 열매」, 「가지행」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후로도 1980년대까지 쉬지 않고 많은 단편과 장편, 단행본을 내고 한국문학상(1970)과 조연현문학상(1983), 요산문학상(1984), 유주현문학상(1989), 보관문화훈장(1998) 등을 받았다. 지난 2007년(77세) 노환으로 숨졌다.

하근찬의 소설

하근찬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농경 사회의 인습과 전통을 체질화한 순박한 사람들, 성실하고 착한 ‘보통의 한국인’들이다. 다른 전후 소설처럼 수난의 역사에 분노를 터뜨리며 용감하게 현실을 극복해가는 영웅적 인물은 거의 없다. 하근찬의 주인공들은 주어진 고난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속으로 삭인다.

그러면서도 당대의 풍속을 꼼꼼하게 되살려내는 정통 소설 미학과 문체에 충실하는데, 이렇게 미학과 문체에 스며든 휴머니즘이 하근찬 소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수난 이대」

1956년(26세)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징용에 끌려갔다 한쪽 팔을 잃은 박만도가 6·25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돌아오는 아들 진수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 작품은 민족적 수난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고통과 6·25전쟁의 참극을 겪어나가는 두 세대의 아픔을 동시에 포착하면서 민족적 수난의 역사적 반복성을 의미 있게 함축하고 있다.

하근찬은 이 작품에서 수난의 역사가 어떻게 한 개인이나 가족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는가를 부자의 삶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전쟁을 다룬 상당수의 작가들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결합시킬 수 있었던 작가의 능력이 돋보인다. 더구나 그것을 부자 2대의 수난사로 연결시킴으로써 한순간의 일회적인 비극이 아니라 민족의 공통적인 문제임을 보여주었다.

「수난 이대」가 약간 우의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상처를 당한 이들이 상처를 준 역사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는 팔, 아들은 다리를 잃었다는 단선적 대비,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장면에서는 설화성이 첨가됨으로써 이 작품은 더욱 우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수난 이대」

일제 때 강제 징용을 나갔다가 한쪽 팔을 잃은 박만도는, 아들 진수가 전쟁터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마음이 들떠 일찍부터 역으로 아들을 마중 나갔다. 아들이 병원에서 나온다는 말에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기는 했으나, 설마 아들이 자기처럼 불구가 되진 않았으려니 하고 애써 마음을 편히 먹는다. 박만도는 항상 팔이 없는 왼쪽 소맷자락을 조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꽂아 놓고 다녔다. 만도는 아들에게 주려고 역전으로 가는 길에 고등어도 한 마리 사고,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옛날에 징용에 끌려가 자신이 당했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

기차가 플랫폼에 도착하고, 아들 진수는 한쪽 다리가 없어져 빈 바지 자락이 펄럭이고 있었고 목발을 집고 있었다. 박만도는 눈앞이 아찔해져 실성한 모습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들과 함께 집으로 향한다. 돌아오는 길에 아들 진수는 다리가 없이 이 같은 꼴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느냐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외나무다리가 하나 있는데, 진수는 도저히 다리를 건널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아들에게 만도는 대뜸 등을 돌리며 진수에게 업히라고 하고 그 손에 고등어를 들려 준다. 팔 하나가 없는 아버지와 다리 한쪽이 없는 아들은 조심스레 외나무다리를 건너간다.

「흰 종이 수염」

1959년(29세) <사상계>에 발표한 작품이다.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6·25 전쟁 직후의 빈곤하고 참담했던 모습을 보여 준. 전쟁 후의 비참한 삶을, 정직하고 순박한 감정을 지닌 ‘동길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봄으로써 진솔하되 무겁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은 더욱 절실한 감동으로 다가오며,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노무자로 나갔다가 팔을 잃고 돌아와 괴로워하면서도 아들의 사친회비를 마련하고 어떻게든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어떠한 시련과 좌절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가려는 삶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끝 부분에서 ‘동길이’가 ‘창식이’를 때려눕히자, 아버지가 광고판도 벗어던지고 수염도 다 떨어진 채 하나 남은 팔만을 내저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처절하다 못해 차라리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여주는 삶의 의지와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잃지 않는 ‘동길이’의 존재가 있기에 이 작품은 결코 절망적이지 않은 것이다.

「흰 종이 수염」

전쟁 때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한 팔을 잃은 아버지가 돌아오던 날, 동길이는 학교에서 사친회비를 못 낸 탓에 다른 다섯 명의 아이와 함께 교실에서 쫓겨난다.

동길이의 아버지는 돌아온 후 동길이의 밀린 사친회비와 가족들의 살림을 위해 얼굴에 흰 종이 수염을 붙이고 극장 광고판을 메고 다니는 일을 하였다. 동길이는 얼굴에 흰 종이 수염을 붙인 그가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아이들과 함께 쫓아다니며 놀리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아버지였다.

그러자 동길이는 악동 패거리들과 맞서 창식이를 때려 눕힌다. 이를 본 동길이의 아버지는 깜짝 놀라 손에서 메가폰을 떨어뜨리고, 하나 남은 손을 내저으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아버지의 턱에 붙었던 수염의 실밥이 떨어져서 흰 종이 수염이 가슴 앞에 매달려 너풀너풀 춤을 춘다. “이놈우 자식이 미쳤나. 와 이카노, 와 이캐 응?”

「왕릉과 주둔군」

1963년(33세)에 발표한 단편으로, 6 · 25 전쟁이 남긴 상처와 가치관의 붕괴를 ‘왕릉’과 ‘주둔군’이라는 상징을 통해 잘 보여 준 소설이다. 외래 문화가 전통 문화와 야합하여 노랑머리 외손자와 같은 혼혈의 문화를 양산하면서 그 동안 굳건하게 지켜왔던 우리의 전통적 가치가 일거에 무너지는 사회상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전통적 가치를 지키려는 박 첨지의 안간힘은 너무나 왜소해 보이고, 무덤 위에 올라가 박 첨지를 조롱하는 노랑머리 외손자의 모습은 씁쓸함을 자아낸다. 전통적 문화와 가치를 무너뜨리는 외래 문화를 ‘주둔군’이라는 집단으로 상징한 것은, 이 모든 것이 6 · 25 전쟁이라는 역사적 산물이 만들어 낸 상처라는 작가 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릉과 주둔군」

마을의 한가운데에는 예부터 내려온 큰 왕릉이 있다. 왕족의 자손인 박 첨지는 현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물 중의 하나로 자신의 조상이 임금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상투를 기르며 왕릉을 돌보는 것을 큰 낙으로 삼고 있다. 그는 하루라도 왕릉에 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 왕릉 옆에 외국 병정들이 주둔하기 시작한다. 외국 병정들은 왕릉 앞에서 방뇨를 하고 여자를 만나는 등의 행동을 하며 왕릉을 함부로 대한다. 박 첨지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전통적 가치의 권위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고 마을 고유의 관습과 분위기가 일시에 뒤흔들린다. 박 첨지는 외국 병정과 양 색시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왕릉 주변에 담을 쌓자고 문중에 제의하고, 이를 실행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러는 동안 박 첨지의 딸 금례는 양 색시들과 점점 친해져, 결국 철수하는 주둔군을 따라 가출을 한다. 그리고 얼마 뒤 혼혈아를 낳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박 첨지는 금례와 외국 병정 사이에서 태어난 노랑머리 외손자가 왕릉 위에 올라가 노는 것을 보고 그만 혼절해 버린다. 박 첨지에게 있어서 왕릉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은 조상을 가장 욕되게 하는 행위이자, 자기의 근거 가치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수길

안수길의 생애

안수길(安壽吉, 1911~1977)은 함남 함흥에서 지식인이자 교육자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다. 1924년(14세) 소학교를 마친 후 부모가 있는 용정으로 건너가 간도중학교에 들어가고, 1926년(16세) 함흥고보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맹휴 주동자로 몰려 퇴학당하였다. 1928년(18세) 편입한 경신학교에서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류되어 다시 퇴학 처리된다.

1930년(20세)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료오 중학교를 마치고, 1931년(21세)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아버지의 와병 소식으로 학업을 접고 귀국한다. 이후 교사로 지내면서 시인 김동명의 지도를 받아 습작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1933년(23세) 함흥 석왕사에서 요양을 하는데, 이때부터 안수길은 문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이윽고 1935년(25세) <조선문단>에 투고한 단편 「적십자 병원장」과 콩트 「붉은 목도리」가 당선되어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1936년(26세)에는 <간도일보>의 기자가 되어 용정 등지에서 근무하였으나 1939년(29세) 다시 요양에 들어가고, 1940년(30세) 중편 「벼」와 단편 「4호실」, 「한여름 밤」, 1941년(31세) 단편 「새벽」, 「벼」, 「새마을」, 「원각촌」 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35세)에는 함흥에서 요양하던 중 해방을 맞았으나 좀처럼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계속 요양 생활을 하다가, 남학 단독 정부 수립 한 달 전인 1948년(38세) 7월에 아버지를 뒤쫓아 월남하여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였다. 남녘에서 웬만큼 자리를 잡은 후에는 1949년(39세) 「여수」, 「밀회」 등 많은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고, 전쟁 후에도 용산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명암」, 「제비」 등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에는 초기의 만주 체험에서 벗어나 주로 도시 소시민의 생활을 묘사하거나 지식인들의 문제점을 제시하는 데 주력한다.

1953년(43세)에는 단편 「제3인간형」을 내놓으며 문단의 눈길을 끌었다. 이후 1950년대 내내 많은 장편과 단편을 쏟아내는데, 그러던 중 1959년(49세)부터 1967년(57세)까지 8년에 걸쳐 자신의 역량을 쏟아낸 장편 「북간도」를 연재하였다. 이 작품으로 안수길은 1968년(58세) 서울시문화상을 받는다.

이후로도 안수길은 사망할 때까지 많은 작품을 냈으며, 1977년(67세) 장편 역사 소설 「이화에 월백하고」와 「동맥」의 연재를 마치지 못한 채 만성 폐 질환으로 숨졌다.

안수길의 소설

안수길은 우리 문학사에서 최서해, 강경개와 함께 간도 체험의 문학에 담아낸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제3인간형」

1953년(43세)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제목이 암시하듯 전후 사회에서 살아가는 세 가지 인간 유형을 제시한다. 개성이 뚜렷하고 문학에 엄격함을 보이다가 이제는 물질주의자로 전락한 ‘조운’, 철부지 문학소녀였지만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정의와 높은 사명감을 향해 나아가는 ‘미이’, 이 가운데 위치한 채 이탈도 지향도 아닌 중간 유형을 내표하는 ‘나’, 이렇게 셋이다. 「제3인간형」은 이들을 통해 전후 사회 현실 속에서 무력한 지식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여러 형태를 제시하고, 개인과 사회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통찰한 수작으로 꼽힌다.

「제3인간형」

석은 정치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교편을 잡고 글쓰기를 포기하다시피 한다. 석과 친했던 친구 조운은 돈을 위해 글을 팔지 않는 좋은 작가였는데, 6 · 25 때 자동차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소문과 그를 따르던 어느 문학소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문학계를 떠난 인물이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 오후, 석이 일하는 학교에 조운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찾아온다. 두 사람은 고급 중국 음식점에서 마주앉아 술과 안주를 시킨다. 조운은 석에게 미이가 보냈다는 검정 넥타이와 편지를 내보인다. 미이는 조운을 따라 다니던 문학소녀로 부잣집 딸이었는데, 조운이 항상 검정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것이 ‘인생의 상장(喪章)’같은 것이냐고 물으면서, 미이 자신은 세상에 태어난 걸 감사하며 즐겁게 산다고 하면서, 새로 빨간 넥타이를 사주며 인생을 밝게 살아보라고 조운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그런지 며칠 후 6 · 25 사변이 터지고, 조운은 숨어 지내며 삶에 대한 고통과 번민에 시달리다가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잘 되어 속물적인 인간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부산에 와서 우연히 미이를 만났는데, 전쟁 와중에 미이의 아버지는 반신불수, 오빠는 행방불명, 어머니는 행상으로 나섰다고 했다고 한다.

조운은 그녀에게 다방을 하나 얻어주겠노라고 제안을 했으나, 그에 대한 대답을 듣기로 한 오늘 미이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편지와 넥타이만 전해왔다는 것이다. 조운은 사변으로 자신은 형편없이 망가졌고, 미이는 사변으로 알차게 성숙해져 있었다는 자책에 친구에게 구원을 얻으려고 이렇게 석을 찾아왔다고 말한다. 편지에서 미이는 간호원이 되기로 했다고 적고 있었다.

집에 와서 누운 석은, 미이는 사변으로 저렇게 용감하게 시대에 대응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는데 자신은 무어냐고 자책한다. 그러면서 이런 자신도 사변이 만들어 낸 한 타입이라고 생각해 본다.

「북간도」

<사상계>에 1959년(49세)부터 1967년(57세)까지 연재한 대장편으로, 각색되어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한 소설이다. 1870년 조선이 기울 무렵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이어지는 4대에 걸친 한 가족의 삶을 서사의 축으로 삼아 우리 민족의 발상지이자 고구려와 발해 시대에 영토의 중심지였던 북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척박한 삶을 그리고 있다.

특히 안수길은 주인공 한두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북간도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주민 집단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함으로써 개인사와 사회사의 통합적 인식을 지향하는 대하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간도」

1870년, 이한복은 할아버지로부터 북간도가 조선 땅이라고 전해 들어 월강 금지령을 어기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비봉촌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황무지를 일구며 열심히 살지만, 청인들의 텃세와 행패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손자 창윤이가 감자 서리를 하다가 청인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리고 청인 옷이 입혀 돌아오고, 이한복은 충격을 받아 죽고 만다.

청인들의 행패가 심해지자, 조선인들은 조선인 출신인 최삼봉을 대표로 내세워 토지를 그의 소유로 해 두기로 한다. 처음에 쑥스러워하던 최삼봉은 점차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청인 지주에게 잘 보이려고 송덕비까지 세운다. 이에 분노한 창윤은 송덕비에 불을 지르고 용정으로 가서 친구 현도와 함께 사포대에 입단한다.

노일전쟁이 일어나고, 1909년 청과 일본 사이에 간도 협약이 맥어져 북간도는 청나라 영토로 귀속된다. 창윤의 아들 정수는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에 가담했다가 돌아오는데, 놀랍게도 아버지의 친구인 현도가 일본 관리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정수는 곧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독립군 활동 전적을 자수하지만 5년형을 받는 바람에 아버지 창윤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다. 석방 후 또 독립운동을 하던 창윤은 해방과 함께 풀려난다.

이범선

이범선의 생애

학촌(鶴村) 이범선(李範宣, 1920~1982)은 평남 신안주에서 태어난다. 보통학교와 상공학교를 졸업한 후 직업 전선에 나섰는데, 은행원, 회사원, 금융 조합, 탄광 경리 등 다채로운 직업을 두루 거쳤다. 1945년(26세)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군정청 통위부, 금강전구회사의 회계과에서 근무하다가 연희전문의 교무과에서 일하는데, 이 무렵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여 직장과 학교를 오가며 공부를 마친다. 1950년(31세) 6 · 25 때는 미처 피난을 하지 못해 석 달 동안 숨어 지냈다가 이듬해 1 · 4 후퇴 때는 서둘러 피난길에 나서 부산에 거주하였다.

1954년(35세)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대광고등학교 직원으로 일하며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암표」, 「일요일」을 선보인다. 이후 휘문고와 숙명여고 교사로 재직하며 1956년(37세)부터 「학마을 사람들」, 「미꾸라지」, 「갈매기」, 「사망 보류」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첫 창작집 <학마을 사람들>로 현대문학신인상을 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범선은 이데올로기의 실체나 전후의 참상을 직접 다루기보다는, 고고하고 단아한 문체로 소박한 휴머니즘의 세계를 구현하며 전쟁의 충격과 상처를 치유하는 작품을 주로 냈다.

이후 1959년(40세)에는 단편 「오발탄」을 내는데, 여기서 이범선은 이전까지 보이던 정태적 문학에서 벗어나 현실 사회를 향한 직설적 분노를 보여 준다. 이후 한국외국어대학에 근무하며 1960년(41세) 「태양은 부른다」, 「아내」를 발표하고, 전쟁의 실상을 박진감 있게 다룬 장편 「동트는 하늘 밑에서」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1962년(43세)에는 오월문예상을 받고 한국외국어대학의 전임 강사가 되었다.

이후로도 이범선을 1980년대 초까지 수많은 단편과 장편, 작품집을 내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벌이고,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받았다. 그러나 1982년(63세) 캐나다 여행을 다녀온 후 뇌일혈로 쓰러져 한 달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범선의 소설

「학마을 사람들」

1956년(37세) <현대 문학>에 발표한 단편으로, 창작집 <학마을 사람들>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일제 말기에서 6 · 25 전후까지를 배경으로 하여 강원도 산골의 ‘학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범선은 이 소설에서 ‘학’이라는 향토성을 띤 신화적 상징물을 매개로 하여 해방 후 이념 갈등을 담담하고 서경적인 묘사로 담아낸다. 학이 다시 날아와 깃들 애송을 안고 내려오는 마지막 장면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우연성과 운명성, 서경적 묘사에 기댄 나머지 이 작품은 비판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학마을 사람들」

강원도 어느 산골의 학마을에 있는 늙은 소나무에는 해마다 학(두루미)이 날아와 둥지를 튼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학이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영험한 짐승이라고 여기며, 학이 오는 날이면 모두 모여 나무 밑에서 잔치를 벌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학이 날아오지 않다가 해방 후 다시 학이 찾아들고, 마을은 30여 년 만에 평온을 되찾는다. 그러나 학의 새끼가 죽는 사건이 벌어지고, 마침내 전쟁이 터진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뺏긴 후 앙심을 품고 마을 떠났던 바우가 인민군 장교가 되어 돌아온다. 바우는 학을 쏘아 죽이고 소나무마저 태워 버린다.

얼마 후 북으로 후퇴한 인민군이 다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피난을 떠난다. 피난 후 다시 돌아온 마을 사람들은 폐허 속에서 바우 할아버지의 주검을 발견한다. 마을의 지도자 격인 덕이 할아버지 역시 곧 임종을 맞는데, 그는 ‘학나무’를 다시 심어 키우라고 유언한다. 마을 사람들은 덕이 할아버지를 묻고 다시 학이 날아올 어린 소나무를 안고 산에서 내려온다.

「오발탄」

1959년(40세) 발표한 작품으로, 이전의 소박한 휴머니즘에서 벗어나 타락한 사회 현실과 전쟁의 비극성에 대한 직설적 어조의 분노를 표현한 단편이다. 여기서 이범선은 한국 전쟁을 전후로 월남한 실향민들의 곤궁한 생활, 인간의 존엄성마저 짓밟히는 험난한 현실 속에서 피해 의식과 윤리적 번민에 빠져든 주인공의 내면을 특유의 간결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오발탄」은 현실의 어두운 면을 그저 고발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순 속에서도 인간의 진실성은 끝까지 유지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양심’의 문제까지 탐색하고 있다. 

이후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작중 ‘어머니’가 외치는 “가자!”라는 외침이 북으로 가자는 말이기 때문에 반공 사상에 위배된다고 하여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었다.

「오발탄」

송철호는 해방 뒤 월남하여 해방촌의 판잣집에서 어머니와 처자, 동생과 살아간다. 집에는 상이 군인이 되어 돌아온 지 2년이 넘도록 취직은 않고 법이나 양심을 아예 무시하는 동생 영호, 전쟁의 충격과 향수로 실성하여 아무 때나 “가자!”라고 외치는 어머니, 양공주가 된 누이동생 명숙, 영양실조에 걸린 딸, 만삭인 아내가 있다. 송철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계리사 사무실의 서기로 성실하게 근무하지만, 때때로 밀려드는 피로감에 까닭 모를 분노를 느낀다. 그는 차츰 일을 마친 후에도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다.

어느 날 동생은 돈을 구하기 위해 권총 강도로 나섰다가 경찰에 붙잡히고, 아내는 난산 끝에 죽어버린다. 송철호는 자신의 인생에 심한 절망감을 느낀 나머지 실성한 어머니처럼 “가자! 가자!”를 외친다. 그러다가 “도대체 어디로 가자는 말인가. 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가.”라고 생각한다.

송병수 · 서기원

송병수, 「쑈리 킴」

송병수(宋炳洙, 1932~2009)는 한양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6 · 25가 일어나 군에 입대한다. 1955년(24세) 제대 후 1957년(26세)에 <문학예술> 신인 공모에 작품을 보내 덜컥 당선되는데, 그 작품이 「쑈리 킴」이다.

「쑈리 킴」은 인생과 사회의 치부를 너무 일찍 알아버려 동심이 뭉개진 소년 ‘쑈리’와 양공주 ‘따링 누나’를 통해, 전쟁과 함께 밀려든 외국 군대에 의해 훼손된 가치관과 성 문화를 그린 작품이다. 동요를 그리워하는 ‘쑈리’의 아이다운 순수성, 생계 때문에 몸을 팔면서도 따뜻한 인간애를 잃지 않는 ‘따링 누나’, 그런 ‘따링 누나’와 다시 만나 오래도록 살고 싶다는 ‘쑈리’의 마지막 되뇜을 통해 송병수는 아무리 험난하고 황폐한 시대에도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인간의 조건 없는 사랑임을 보여 준다.

「쑈리 킴」

쑈리는 전쟁 통에 부모와 자신의 이름마저 잃고 청계천에서 똘만이 거지로 지낸다. 그러던 중 왕초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동료인 딱부리와 함께 거지 소굴에서 탈출하고, 딱부리는 미군 캡틴의 하우스보이로, 쑈리는 미군 기지 주변에서 우연히 만난 양공주 ‘따링 누나’에게 미군 손님을 붙여 주는 펨프로 생활한다.

쑈리는 따링 누나가 손님을 받는 동안 담배를 피우며 쩔뚝이, 놉보, 딱부리와 망을 보거나 칼던지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부대 막사의 라디오에서 「저 산 넘어 햇님이」 같은 동요가 나오면 신이 나서 따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밀고하는 바람에 따링 누나가 헌병에 붙들려 간다. 이것이 쩔뚝이의 짓임을 알게 된 쑈리는 쩔뚝이와 싸움을 벌이는데, 쑈리를 향해 쩔뚝이가 큰 돌을 내리치려는 순간 딱부리가 던진 칼이 쩔뚝이의 등에 꽂힌다. 쩔뚝이가 쥐도 있던 달러 뭉치는 피가 묻은 채 이리저리 바람에 날린다.

쑈리는 딱부리와 함께 도망치면서 이제 미군 부대와 양키가 싫어졌으며, 꼭 따링 누나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한다.

서기원, 「암사 지도」

서기원(徐基源, 1930~2005)은 황순원에게 1957년(38세) 황순원에게 「안락사론」이 추천되고, 이어 「암사 지도」를 추천 완료 받아 등단하였다.

「암사 지도」에는 다른 1950년대 전후 문학과 달리 전쟁이 작품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전쟁은 가족 공동체의 해체, 도착적 윤리와 왜곡된 인간관계, 전후 사회에 나타난 혼란의 발생적 근거로 암시되어 있다.

「암사 지도」

제대 후 머물 곳이 없던 형남은 전우인 상덕의 권유로 그의 집에 기숙한다. 상덕은 윤주라는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형남이 합류하면서 셋은 기묘한 혼거 생활을 하게 된다. 미대 출신인 형남은 밥값을 벌기 위해 극장 간판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도 순수 미술에 대한 동경을 키운다.

상덕은 다니던 학관이 문을 닫자 직장을 잃고 집에서 빈둥거리기 시작한다. 상덕은 아예 생활비 버는 일을 형남에게 떠맡기고 자신을 술주정을 일삼으며 지내고, 윤주에 대한 태도로 냉담하게 변한다. 그러는 동안 형남은 윤주에게 은근한 기대를 갖게 된다. 이 무렵 상덕은 형남에게 윤주를 공유하자고 제안하지만, 형남은 속으로는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펄쩍 뛰며 거절한다.

어느 날 상덕이 집을 비운 사이 형남이 윤주를 찾지만 윤주가 그를 거절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상덕은 형남을 거부한 것은 자신을 모욕한 것과 다름없다며 오히려 윤주를 몰아세운다. 그런 와중에도 윤주에게 끌린 형남은 반강제로 윤주와 성 관계를 갖고, 윤주와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 윤주가 누구의 아이인지 모를 아이를 갖게 되자, 그 아이를 낳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세 사람의 의견이 엇갈린다. 결국 윤주는 두 남자 모두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