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모의 생애
전기 활동
정한모(鄭漢模, 1923~1991)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의 나니와 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23세)에는 서울대학교 시절 동인 ‘백맥’을 결성하지만 실패하고, 다시 ‘시탑’을 꾸리지만 이 역시 자금난으로 그만둔다. 이후 정한숙, 전광용 등과 다시 ‘주막’을 결성하여 동인으로 활동하였는데, ‘주막’ 역시 한국 전쟁 이후 사그라든다.
1950년(28세) 6 · 25 발발 이후 다시 상경해 1955년(33세)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멸입>이 입선하여 정식으로 등단한다. 1959년(37세)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고, 전광용이 휘문 고교를 떠날 때 그 자리에 들어갔다.
정한모가 본격적으로 시인으로서 활동한 것은 1958년(36세)의 첫 시집 <카오스의 사족>, 1959년(37세) 시집 <여백을 위한 서정>을 내면서부터이다. 이들에서 정한모는 따뜻한 시선의 휴머니즘을 깔아 전쟁으로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낸다.
1960년대 이후, 첫 시인 장관
한동안 공백기를 가지던 그는 1966년(44세)에는 서울대학교에 전임 강사로 임명되고, 1970년(47세) 시집 <아가의 방>을 펴내어 이 시집으로 한국시인협회상을 받았다. 1973년(50세) 문학 박사 학위를 내놓은 후에는 <한국 현대 시문학사> 등을 펴내 이론에 집중하였으며, 이후 1975년(52세) 서울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고 네 번째 시집 <새벽>을 펴냈다.
1983년(60세)에는 시집 <아가의 방 별사>를 내는데, 여전히 ‘아가’의 이미지를 사용하면서도 생명의 영원성에 도달하기 위한 새로운 탐색을 보여 주었다. 이어 시집 <나비의 여행>과 시론집 <한국 현대시의 현장>을 간행하였으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엮임하고 서울시 문화상 수상, 예술원상 수상 등 화려한 활동을 보인다. 1988년(65세)에는 문공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납북 · 월북 문화 예술인에 대한 해금 조치를 입안 공포하는 업적을 남겼다.
이후로도 각종 위원장과 문학상을 수상하던 그는 시인 치고는 드물게 화려한 삶을 누리다가 1991년(68세) 췌장암으로 숨진다.
정한모의 시
정한모는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순수한 사랑과 원초적 생명에 대한 경외감, 휴머니즘과 긍정적 미래를 제기한 시인이다.
<가을에>
1959년(37세) 낸 시집 <여백을 위한 서정>에 수록된 작품이다. 핵심 제재인 ‘가을’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조락(凋落)의 이미지로서 반(反)문명적인 현대의 삶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명징하고 온화한 가을의 이미지로 파악하는 것이다. 후자는 휴머니즘을 옹호하고 고양시키려는, 정한모 시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기본적인 주제로 볼 수 있다.
<가을에>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傳說)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 말씀이/ 영원(永遠)히 아름다운 진리(眞理)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病席)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恐怖)의 기억(記憶)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나비의 여행>
1965년(43세) <사상계>에 발표한 시이다.
정한모의 시적 모티프는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서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주제와 천착하고 있는 세계는 인간성의 옹호와 인도주의 정신이다. 그가 생각하는 삶의 가치와 세계 질서의 중심에는 언제나 휴머니즘이 있다.
<나비의 여행>과 <아가의 꿈> 역시 정한모가 추구하는 휴머니즘을 보여 주는 다른 이름의 같은 상징이자 심상이다. 현실이 지닌 야수적 폭력성과 비이성적 폭압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나비(아가)’의 ‘여행(꿈)’을 통해서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비인간적인 가치와 질서를 부정하는 가운데 휴머니즘의 참된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나비의 여행>
아기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記憶)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絶壁),/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히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어머니 6>
1975년(53세) 시집 <새벽>에 담은 시로,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정한모 특유의 휴머니즘 정신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고귀한 희생과 사랑을 ‘눈물’과 ‘광택의 씨’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을 자양분으로 해서 성장한 자식의 아름다운 모습을 ‘진주’, ‘태양’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에 비해 ‘검은 손’은 힘겨운 삶을 사시면서도 오직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시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무화(無化)시키려는 어떤 부정적 힘 또는 방해물의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사랑을 관조적으로 노래하는 다른 연들과는 달리, 4연에서는 그것과의 대결 의지를 ‘사라져라’라는 명령형으로 표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 6>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로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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