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노트/이탈리아 여행 URL 복사

바티칸 시국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17. 1. 22. by 솜글
이탈리아 여행을 앞두고 고민하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들입니다. 한국어 인터넷에서 모은 것들과 외국(영어 또는 이탈리아어) 사이트에서 번역해 모은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페이지 맨 아래에서 본문 내용을 PDF 파일로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PDF 파일에는 본문 이상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일 비밀번호는 somgle입니다.
*자료가 도움이 되었다면 인사 한 줄 남겨 주세요.

바티칸 시국 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

도시 속에 하나의 나라가 속해 있는 경우도 있다. 피레네 산맥에 있는 안도라 공화국,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에 자리한 산마리노,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는 리히텐슈타인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 꼽히는 곳은 로마에 있는 바티칸 시국이다. 전체 면적이 0.44㎢이고 인구가 1,00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나라이지만,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바티칸 시국은 인류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가톨릭교의 중심지인 동시에 르네상스의 예술혼이 살아 있어 문화·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전 세계의 8억이 넘는 가톨릭 신자들의 정신적인 고향, 바티칸 시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의 위치에 있었다. 로마가 크리스트교를 탄압하던 시절, 서기 64년에 베드로는 교인들과 로마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교한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하면서 324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설한 것이 바티칸의 뿌리가 되었다. 한때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겼던 시기도 있었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이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바티칸 시국은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바티칸 시국과 이탈리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교황청의 힘이 강할 때는 바티칸 시국이 이탈리아를 지배했고, 반대로 이탈리아의 힘이 막강할 때는 바티칸 시국이 이탈리아의 다스림을 받았다. 이런 관계가 명확하게 정리된 것은 1929년 이탈리아와 바티칸 시국 사이에 라테란 조약(Patti Lateranensi)이 체결되면서부터이다. 라테란 조약은 바티칸 시국을 교황이 다스리는 독립된 주권국으로 인정한 조약으로, 이에 따라 주권국이 된 바티칸은 지구상에 흩어져 살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만한 조직과 기구를 갖추게 되었다.

교황 선출

교황은 선거권을 가진 추기경들의 비밀회의인 콘클라베를 통해 선출한다. 콘클라베는 교황이 죽은 날로부터 15일~20일 이내에 바티칸 시국의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열게 되어있다. 모든 추기경은 임명된 날로부터 교황 선거권을 갖지만, 80세가 넘는 추기경은 선거권이 없습니다. 선거권을 가진 추기경들은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물과 음식을 공급받으며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없다. 비밀 투표 방식으로 오전과 오후에 나눠 하루 2번 선거를 실시하는데, 교황에 선출되려면 선거인단의 2/3를 득표해야 한다. 만약 3분의 2를 얻지 못할 경우 투표는 계속됩니다. 선거 결과는 투표용지를 태워서 알리는데 바티칸 시국의 굴뚝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면 결정되지 못한 것이고, 흰 연기가 피어오르면 새로운 교황이 탄생한 것이다. 이 방식은 1274년부터 시행돼 왔다.

교황청 근위병

바티칸 시국에서 교황청을 지키는 사람들은 모두 스위스 출신의 교황청 근위병이다.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창설할 당시에는 여러 나라 출신으로 구성했는데, 1527년 독일 용병들이 침입해 왔을 때 대부분의 근위병들이 도망치고 스위스 출신들만 끝까지 교황을 지켰고 이후 스위스 병사들만 교황청 근위병이 될 자격을 갖게 되었다. 현재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 근위병은 110명으로 모두 남성이며, 복무 기간은 최소 2년을 기준으로 연장할 수 있다. 근위병이 되려면 만 30세 미만의 가톨릭 신자로 미혼이며 신장이 174㎝ 이상이어야 한다. 다만 근위병이 된 후에는 결혼할 수 있다. 매달 1,800스위스프랑(우리 돈 약 140만원)을 월급으로 지급받는다.

바티칸 박물관 Musei Vaticani

바티칸 박물관은 시스티나 예배당을 포함해 바티칸 내에 있는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들을 통틀어서 부르는 명칭이다. ‘바티칸 미술관’을 단수(Museo)가 아니라 복수(Musei)로 표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의 대가들이 남긴 걸작 르네상스 회화들과 역대 교황들이 수세기에 걸쳐 수집한 막대한 미술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1506년 1월 14일,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인근 포도밭에서 기원전 150~50년경 제작된 라오콘이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율리오 2세는 교황청에서 교황을 위해 일하고 있던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미켈란젤로를 현장으로 보냈고, 이들이 라오콘을 매우 높게 평가하자 포도밭 주인으로부터 라오콘을 구입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교황은 자신의 거처인 사도 궁전에 딸린 벨베데레의 정원에 라오콘을 진열하고 일반에 공개해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바로 이때를 바티칸 박물관의 시작으로 보고 있으며, 교황청에서도 2006년 박물관 창설 500주년을 기념해 바티칸 네크로폴리스 발굴 현장을 영구 개방했다. 본격적으로 박물관이 확장된 것은 클레멘스 14세와 비오 6세의 후원을 받으면서부터이다.
비오 7세 때는 키아라몬티 미술관과 브라치오 누오보가 신설되었고, 그레고리오 16세 때는 1836년 에트루리아 미술관 및 1839년 이집트 미술관이 각각 개관했다. 비오 9세 때인 1854년 비오 그리스도교 미술관이 개관되었으며 교황 비오 11세 때인 1932년, 보르자 아파트에 있던 기존의 회화관이 새로운 건물을 지어 재개관했다. 교황 바오로 6세 때인 1973년 현대 종교 미술 컬렉션이 사도 궁전 내 보르자 아파트에 개관했다.

운영시간 : 09:00-18:00
입장료 : 16€(+예약비 4€,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7€)

시스티나 예배당 Cappella Sistina

15세기 후반에 건설되었다. 평소에는 교황이 직접 미사를 집전하는 곳으로 자주 사용되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콘클라베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오른쪽 사진 : 2013년의 콘클라베) 시스티나의 외부는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고 창문도 적으며, 바깥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출입구 없이 교황 궁전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다. 때문에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는데 용이해 콘클라베를 여는 장소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내부를 구성하는 사면의 벽과 천장은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으며 특히 미켈란젤로의 역작인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도 이곳을 장식하고 있다. 관람객들이 벽면과 천장의 성화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통에 덜 주목받긴 하지만 코즈마테스크 양식으로 장식된 대리석 모자이크 바닥도 아름답다.
지금의 시스티나 예배당 자리에는 14세기 중반부터 마조레 예배당(Cappella Maggiore)이 있어서 교황청의 각종 미사와 의전을 행했다. 그러나 1세기 가량 지나자 건물이 노후되었고,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이를 헐고 새 경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피렌체 출신의 바치오 폰델리가 설계하고 조반니노 데 돌치의 감독으로 진행된 공사는 1473년에 시작되어 1483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축성되었다. 신축된 예배당은 건축을 의뢰한 식스투스 4세의 명에 따라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명명되었다.(오른쪽 사진 : 식스투스 4세 때의 모습으로 천장에 별이 그려져 있음)
예배당의 평면은 길이 40.23m, 너비 13.41m인데 이것은 구약성서에 언급된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의 치수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바티칸이 예루살렘을 대신하는 새로운 성전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했다. 이외에도 바닥의 중앙부를 가르는 대리석 칸막이를 통해 경당을 두 구획으로 나누어 각각 교황 일행과 일반 신자를 위한 자리로 삼았는데, 이것 또한 솔로몬의 성전을 재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교황 일행의 수가 늘어나면서 이들이 사용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칸막이를 옮기는 바람에 지금은 한쪽에 치우친 상태이다. 경당의 높이는 20.7m이고, 내부의 천장은 아치형이며, 그 밑에 있는 남쪽과 북쪽 벽면에는 각각 6개의 창문이, 동쪽과 서쪽 벽면에는 각각 2개의 창문이 있다. 이 중 서쪽 벽면의 창문은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폐쇄했다.
식스투스 4세는 예배당의 내부 벽면에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공통된 부분을 부각시켜 남쪽과 북쪽 벽에 각각 6개씩, 동쪽과 서쪽 벽에 각각 1개씩 도합 14개의 성화를 그리도록 했다. 이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합일을 나타냄과 동시에, 하느님이 부여한 권리가 ‘모세 → 예수 → 베드로 → 교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14장면의 성화들 중 제대가 있는 서쪽 벽에 그려졌던 <강에서 발견된 모세>와 <그리스도의 탄생>은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 위해 지워져 현재는 12장면만 현존한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는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며 말도 할 수 없다. “silence (please).”라는 말만 울려 퍼진다.

남쪽(왼쪽) 프레스코 벽화

모세의 일생을 주제로 한 6개의 성화가 그려졌다. 벽을 본 상태에서 오른쪽에서 왼쪽 순서로 보는 것이 좋다.

북쪽(오른쪽) 프레스코 벽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주제로 한 6개의 성화가 그려졌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시스티나 예배당이 1483년에 축성식을 가진 지 21년 후인 1504년, 건물의 배수 구조에 문제가 생긴다. 이 때문에 파란 바탕에 금빛 별을 그렸던 천장에 금이 가고 말았다. 보수 작업 도중 천장화가 손상되었고, 교황 율리오 2세는 별이 그려진 기존의 천장화를 지우고 새로운 천장화를 그리기로 결정하고 미켈란젤로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가 안장될 영묘를 만드는 조각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어서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고사했지만, 교황은 강하게 요청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영묘 작업을 중단하고 1508년 5월 10일,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계약서에 서명했다.
원래 율리오 2세는 12사도를 그려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그런 구성으로는 천장화를 짜임새 있게 그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창세기, 예수의 조상, 예언자와 시빌라, 이뉴디와 메달리온 등을 포괄한 장대한 내용으로 주제를 전환해 교황의 허락을 받아냈다. 1508년 12월, 미켈란젤로는 예배당 벽면에 비계를 고정시키고 작업에 착수했다. 고향 피렌체에서 불러들인 조수들과 함께 작업을 했지만, 주요 그림은 대개 미켈란젤로 혼자서 그렸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보니 초반에는 프레스코화가 변색되는 일이 벌어져 당황한 나머지 작업을 중단해야 했고, 그는 이 기회에 천장화 작업을 그만두고 영묘 조각에 복귀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율리오 2세가 보낸 건축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사태를 분석한 결과, 미켈란젤로의 그림 실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벽면에 바른 석회의 수분이 너무 많았던 것으로 판명되었고 문제를 해결했다.
천장화는 이런 시행착오들을 겪으면서 초반에는 작업이 느리게 진행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그리며 매우 고생했다고 한다. 천장화는 불편한 자세로 그리기 때문에 무릎에 고름이 차고 허리가 굽고 어깨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아파온 것이다. 물감이 눈에 떨어져 눈이 나빠지고 피부병도 생겼다. 나중에 미켈란젤로는 “어깨를 잘라내고 잠들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그린 장면일수록 대체로 사람 수가 적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작업 속도에 탄력이 붙었고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는 ‘빛과 어둠의 분리’ 같은 하나의 장면을 밑그림 스케치 없이 하루만에 완성할 정도로 속도가 빨라졌다. 1511년 8월 15일에는 아직 미완성이었던 천장화가 부분적으로 공개되었으며, 마침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4년 만인 1512년 10월 31일 완성해 율리오 2세의 축하 미사를 거쳐, 같은 해 11월 1일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1787년 괴테는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 화를 두고 “시스티나 경당을 보지 않고서, 한 인간이 어느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직관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최후의 심판>(서쪽(정면) 벽)

천장화를 그린 후 미켈란젤로는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너무도 고통스러운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3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요청으로 다시 이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되었다. 뒤를 이은 바오로 3세 역시 이 작품을 완성하도록 독촉했다고 한다.(참고로 이 작품을 멀리서 보면 마치 해골처럼 보인다.)
4년 후인 1541년 만성절, 드디어 <최후의 심판>이 공개되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이 경사스런 행사에 맞추어 시스티나 예배소로 모여들었다. 1512년 이곳의 천장 프레스코를 완성하고 서른 해 남짓 지난 미켈란젤로는 66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 날, 예수, 천사와 악마, 꽃다운 생명을 던져서 신앙의 사표가 되었던 순교자와 열두 제자들, 그리고 수백 명의 성자와 성녀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총 391명이 등장하는 이 그림을 뜯어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지더니 술렁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쥐어짜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단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날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최후의 심판>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직자와 교황청 관료들,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이 모두 한편이 되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를 두둔하다가 ‘이처럼 저질스럽고 음란한 장소에서 어떻게 기도와 찬양이 나오느냐’고 막말을 듣기도 했다. 뒤이어 성좌에 오른 네 명의 교황들도 제단 프레스코에 대해서 전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전면 철거냐, 부분 개작이냐를 두고 안팎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사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도착했을 로마는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두려움과 무기력의 늪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두 강대국인 스페인과 프랑스의 세력 각축장이 될 만큼 초라한 처지였고, 스페인 왕 카를로스 5세가 모은 독일 개신교 신자들인 용병들이 로마를 점령해서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살해하고 수녀들을 성폭행하기도 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이들의 마구간이 되고 바티칸 궁전은 그들의 막사가 됐다. 이런 배경 하에서 <최후의 심판>은 동일한 주제를 다루었던 여러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구원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를 구분하는 양분법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을 한 공간에 배치함으로서, 하느님의 최후 심판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미래임을 상기시켰다.
<천지창조>를 그릴 때만해도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했으나 <최후의 심판>에서는 비록 나체라고 해도 생동감 보다는 무겁고 무기력하게 그림으로서 르네상스의 미적 개념을 철저히 파괴했다. 때문에 완성되는 순간부터 엄청난 반대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400명의 성인 성녀들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알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단한 자유인인 그는 이 그림을 수정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으나 점차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프랑스, 독일, 화란 등 유럽 각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 그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종교개혁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개최된 트렌트 공의회는 작가의 사망 직전 작품의 수정작업을 명령했고, 다행히 미켈란젤로의 제자였던 볼테라(Daniele da Volterra, 1509~1566)가 책임을 맡아 스승의 의도를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성기 부분에 최소한의 가리개만 입히는 수준으로 변형시켰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작품을 본래 상태로 복원할 것을 허락함으로서 몇 백 년을 칩거 상태에 있던 성인들이 작가의 의도대로 모든 것을 벗어던진 시원한 자유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였으며, 이 복원 작업이 마무리 되어 관람객들에게 개방되던 날 교황은 미켈란젤로의 예술성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글을 남겼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과거 질서 정연한 다른 르네상스 작품과는 달리, 무질서하게 여기 저기 무리를 지어 있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실재 보다 더 크게 그려져서 저마다의 고립된 세계에 머물고 있는 인상을 주며, 창조와 파괴의 상반되는 요한 묵시록적 성격이 작품 전체에 넘치고 있다. 전체에 깔려 있는 푸른색은 최후의 심판을 거친 후 도달하게 될 차안 너머 존재하는 피안(彼岸) 세계의 무한한 공간을 보는듯한 신비감에 잠기게 한다. 아래쪽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은 죽음의 색깔인 잿빛을 띄고 있는 반면, 구원을 받아 무덤에서 나온 인물들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면서 점점 더 밝은 빛을 띠면서 천상 광휘의 아름다움 속에 잠기게 만든다.

시스티나 경당 그림의 복원 작업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과 벽면에 프레스코 화를 그린 이래 보존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17세기 초와 18세기 초, 그리고 20세기 초에 그림을 보존하고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 행해졌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본격적인 복원이 시작된 것은 1984년 11월 7일이었다. 10년 넘는 작업 끝에 복원이 완료된 천장화는 1994년 4월 8일에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다시 복원에 착수해 1999년 12월 11일에 공개되었다. 전례 때 켠 촛불의 그을음과 먼지가 500년 동안 덮이면서 어둡게 변했던 프레스코 화는, 최신 과학 기술을 동원해 미켈란젤로 당대의 광채를 되찾았다. 이에 대해서 미켈란젤로가 사용한 풍부한 색채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옹호론과 더불어, 그을음과 먼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그림이 가지고 있던 어두운 깊이감이 사라졌다는 비판론이 제기되어 팽팽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복원하면서 500년 묵은 세월의 때를 벗겨내기 전과 후를 비교하기 쉽도록 프레스코 화의 일부를 그대로 두었다. 요나가 그려진 위의 복원 이후 사진을 보면, 오른쪽의 기둥 장식 부분에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된, 주변보다 어두운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때를 벗겨내지 않은 부분 중 하나이다. 복원이 끝난 후에는 빛에 약한 프레스코 화를 보호하기 위해 사진 촬영을 엄금하고 있다.

성 베드로 광장 Piazza San Pietro

바티칸 광장이라고도 한다.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거장인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가 1656년 설계해 12년 만인 1667년 완공했다. 베드로가 순교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자, 베르니니의 대표적인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3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으며 수많은 순례자들이 주일 정오에 교황의 축복을 받기 위해 이곳에 모인다.
광장이 들어서기 전의 성당 앞은 수많은 집과 복잡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힌 무질서한 공간이었다. 광장 조성 계획에 속도가 붙은 것은 교황 알렉산데르 7세 때로, 알렉산데르 7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곧바로 건축위원회에 광장 조성에 대한 논의를 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공사를 담당할 건축가로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수석 책임자였던 베르니니가 선정되었다.
광장은 입구에서 좌우로 안정된 타원형이며, 가운데서 반원씩 갈라져 대칭을 이룬다. 좌우 너비는 240m이다. 정면 끝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입구로 해당한다. 반원형인 광장 좌우에는 4열로 토스카타식 원주 284개와 각주 88개가 회랑 위의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테라스 위에는 140명의 대리석 성인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조각한 것이다.
회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온 세계 백성을 인자하게 두 팔로 안고 있는 인류의 어머니인 교회를 상징한다. 베르니니는 성 가톨릭교회가 그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고,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머리로 두고 반원형의 회랑 두 개를 팔로 묘사함으로써 성 베드로 대성전이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여기에 더해 대성당 바로 앞에 있는 사다리꼴 모양의 작은 광장과 열주랑이 둘러싼 타원형 광장이 합쳐지면서 광장의 전체적인 평면을 열쇠 구멍으로 구성해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지물인 열쇠를 상징하는 효과까지 더했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가 자신의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40년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처음 가져왔을 때에는 경기장에 세워져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의 순교들 지켜보게 된다. 훗날 식스투스 5세(재위 1585~1590)가 경기장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1586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알렉산데르 7세 가문의 문장과 십자가를 장식해 그리스도가 박해로부터 승리했음을 선포했다.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약탈 문화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인식될 만큼 많은 굴곡을 겪은 건축물이다. 높이는 25.5m, 무게는 320t이다.
오벨리스크 좌우에는 카를로 마데르나(Carlo Maderna)와 카를로 폰타나(Carlo Fontana)가 각각 만든 두 개의 아름다운 분수가 있다. 베르니니는 분수가 타원의 초점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분수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지름 6~7m 정도의 검은 대리석 원반 표식(Centro del Colonnato)이 사방으로 박혀 있는데, 이 위에 서서 회랑을 쳐다보면 네 줄로 된 회랑이 맨 앞 한 줄만 보이고 나머지 세 줄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 원 위에서 걸음을 옮기면 나머지 세 줄이 갑자기 나타난다. 마치 거대한 기둥 세 줄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다. 이 회랑을 설계한 베르니니의 치밀성과 천재성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한 예라 하겠다.
1981년 5월 13일에는 성 베드로 광장의 북서쪽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Paul II)가 터키 출신의 알리 아으자에게 저격당하는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저격당한 위치는 현재 붉은색 반암으로 표시되어 있다. 또 1982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크리스마스에 광장 가운데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하고 있는데, 각국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할 나무를 교황청에 기증하는 것을 영예로 여긴다고 한다.

성 베드로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인 성 베드로 대성당은 349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베드로 성인의 묘지 위에 세운 것을 실베스트로 교황이 396년에 대성전으로 축성한 것이다. 이민족의 잦은 약탈로 극심한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그때마다 보수 작업을 했지만 원래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브라만테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상갈로의 줄리아노에게 성전의 재건축 계획을 세우도록 하여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재건축 사업을 시작했다. 브라만테는 로마에서 가장 역사성이 깊은 판테온의 돔 형태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도입하고자 했다.

라파엘로

브라만테가 죽자 건축은 라파엘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이것을 라파엘로에게만 맡겨둘 수가 없어 상갈로의 줄리아노와 베로나의 조콘도 수사에게 라파엘로를 도와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 구조를 되도록 살리는 선에서 공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1527년 란체스키를 중심으로 한 독일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공사가 중단되었다. 공사는 1534년 바오로 3세가 즉위하면서 재개되었는데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주도했다.

미켈란젤로와 마테르노

1546년에 안토니오가 죽자 미켈란젤로가 이 공사를 이어받았다. 73세 고령이었던 미켈란젤로는 전임자였던 안토니오의 설계를 면밀히 분석한 끝에 크게 수정 보완했는데, 그의 설계도는 초기의 브라만테의 것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내부를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재조정하였고 돔을 현재의 모습대로 변경하였다. 돔은 이 성당의 꽃이다.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자 공사가 잠시 비판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605년 교황 바올로 5세가 등극했는데, 그는 성당이 옛 콘스탄티누스 기념 성당이 자리 잡고 있던 모든 지역을 포괄하기를 원했다. 그 책임자로 등장한 예술가가 카를로 마테르노로, 마무리 작업을 순조롭게 진행했다. 마테르노는 모든 면에 있어 미켈란젤로의 정신을 철저히 계승했다.
1629년에 마테르노가 죽자 신축 성당의 마무리 작업이 베르니니에게 맡겨졌다. 그는 성당의 내부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성당의 바닥을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양쪽 회랑에 마련된 소성당(Capella)들의 장식을 붉은색 기조의 천연 대리석으로 더욱 아름답게 했다. 천재적인 조각가 베르니니로 인해 성당은 완전한 예술작품이 되어 건축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물론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마테르노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혼이 융화를 이루어 만들어졌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마테르노의 정면

대성당의 정면은 마테르노의 설계안에 따라 1608년 공사를 시작해 1612년 7월 21일에 건설이 대부분 마무리되었다. 미켈란젤로의 그리스 십자가 설계안이 라틴 십자가 형태로 바뀌면서 신랑 길이가 늘어나게 됐고 이에 교황 바오로 5세는 우선 정면부터 짓도록 했다. 정면 공사가 끝난 1612년에 로마 시민들은 성가대석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홀로 서 있는 정면의 얇은 벽체를 보았을 것이다.
정면의 높이는 45.44m, 너비는 114.69m이고, 여기에는 높이 27m, 직경 3m짜리 대리석 기둥 8개가 세워져 있다. 어지간한 궁전 못지않은 장려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그 규모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을 가리게 되었다. 성당 정면은 건설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미켈란젤로의 돔은 대성당 정면을 제외한 로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빈정거림이 끊이지 않아 왔으며,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정면 자체는 아름답지만 돔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성당 건물의 진짜 목적은 돔이었는데 그것이 가려지고 말았다”고 혹평했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1년여에 걸쳐 보수 공사가 있었다.
정면 프리즈에는 “IN·HONOREM·PRINCIPIS·APOST·PAVLVS·V·BVRGHESIVS·ROMANVS·PONT·MAX·AN· MDCXII· PONT·VII(In honorem principis apostolorum paulus quintus burghesius romanus pontifex maximus anno millesimo sescentesimo duodecimo pontificatus septimo: 사도들의 으뜸의 영예로 선출된 바오로 5세 보르게세 교황, 교황 재위 제7년, 1612년)”라는 라틴어 명문이 새겨져 있고, 박공벽에는 교황 바오로 5세의 문장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 위에는 유다 타대오, 마태오, 필립보, 토마스, 대(大)야고보, 세례자 요한, 예수 그리스도, 안드레아, 사도 요한, 소(小)야고보, 바르톨로메오, 시몬, 마티아의 순서로 총 13개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각각의 높이는 6m이다. 베드로의 조각상은 바오로와 함께 대성당 정면 앞 좌우에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세례자 요한이 대신 위치하고 있다. 박공벽 가운데에는 바오로 5세의 출신 가문인 보르게세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발코니 Loggia

대성당의 정면 2층에는 모두 3개의 발코니가 광장을 향해 돌출되어 있다. 그중 중앙부의 발코니는 ‘강복의 발코니(Loggia delle Benedizioni)’로 불리는데, 이곳은 원로 추기경단이 콘클라베에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선언하는 장소이자 새 교황이 광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첫 강복을 하는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가 열리는 장소로 유명하다. 매년 성탄절과 부활절 정오에 교황이 전세계에 보내는 우르비 에트 오르비 또한 여기에서 이뤄진다. 강복의 발코니 아래에는 조각가 암브로지오 부온비키노(Ambrogio Buonvicino, 1552~1622)의 작품인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가 있다.

종탑 Campanile

마데르노는 성당의 정면을 설계하면서 그 양쪽 끝부분에 종탑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지반이 침하되고 1621년 1월 28일 교황 바오로 5세가 선종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20여 년이 지난 1646년 베르니니가 훨씬 큰 규모로 종탑의 재공사에 들어갔지만, 거의 다 완공된 상황에서 교황이 기대한 것만큼 종탑이 웅장하지 않다며 마땅찮은 반응을 보이자 공사가 잠정 중단되었다. 여기에다가 재공사 시작 전 20년 넘게 방치되었던 왼쪽 종탑 기단부에 균열이 발생하자 이것이 종탑의 하중을 잘못 계산한 베르니니의 잘못인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끝에 해당 부분을 모두 철거했다. 현재와 같은 모습의 종탑은 1790년 주세페 발라디에르(Giuseppe Valadier)의 설계에 따라 마데르노의 계획보다 축소된 규모로 건설되었다.
정면 양쪽의 종탑 중 왼쪽의 종탑은 1931년부터 전자식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종탑에 걸린 종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옛 대성당에서 사용하던 종으로 1288년에 주조되었다. 콘클라베에서 교황 선출이 확정되었을 때 시스티나 경당에서 흰 연기를 피워 올리는데, 연기의 색깔이 불분명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혼동하기도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된 2005년 콘클라베부터는 연기를 피울 때 이 종탑의 종도 타종한다.

성 베드로 상과 성 바오로 상

두 성인의 조각상은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봤을 때 각각 정면부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운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존속했을 때인 교황 비오 2세(Pius II, 재위 1458~) 때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조각상이 설치되었다. 파올로 디 마리아노(Paolo di Mariano)와 그의 공방이 1461~1462년에 걸쳐 조각했으며 당시에는 지금의 조각상보다 크기가 작았다. 파올로 디 마리아노의 작품은 현재 사도 궁전 내부 식스토 4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16~17세기 동안 옛 성당보다 훨씬 큰 규모로 새로운 성당이 신축되자 정면부에 놓여 있던 이 조각상들은 더욱 왜소하게 보이게 되었다. 1849년, 교황 비오 9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예전 조각상을 대신할 더 큰 조각상을 세우기로 결정하면서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에 갖다 놓기 위해 제작을 의뢰했던 조각상을 사용했다. 원래는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내부에 세울 예정이었지만 조각상이 너무 커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결과 1847년 부활절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대신 세워졌다. 조각상을 받치는 대좌에는 ‘PIVS·IX·P·M·(교황 비오 9세)’라는 명문과 교황 비오 9세의 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성 베드로 조각상은 베네치아 출신 조각가 주세페 데 파브리스(Giuseppe De Fabris, 1790~1860)가 1840년에 제작했으며 조각상 높이는 5.55m이고, 조각상이 올린 좌대의 높이는 4.91m이다. 조각상의 오른손은 베드로의 지물인 천국의 열쇠 한쌍을 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두루마리를 쥐고 있다. 두루마리에는 라틴어로 마태오 복음서 16장 19절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가 써 있다.
성 바오로 조각상은 볼로냐 출신 조각가 아다모 타돌리니(Adamo Tadolini, 1788~1863)가 1838년에 제작했으며 조각상 높이는 5.55m이고, 조각상이 올려진 좌대의 높이는 4.91m, 바오로가 든 칼의 길이는 2.79m이다. 조각상의 오른손은 바오로의 지물인 칼을 비껴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두루마리를 펼쳐들고 있다. 늘어뜨려진 두루마리에는 히브리어로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4장 13절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가 새겨져 있다.

현관 열주랑

길이 71m, 폭 13m, 높이 20m의 길다란 열주 회랑으로 된 현관의 대리석 바닥에는 교황 클레멘스 10세, 성 요한 23세, 레오 13세의 문장이 박혀 있다. 가장 왼쪽에 있는 죽음의 문 앞에는 클레멘스 10세의 문장이, 가운데에 있는 중앙문 앞에는 성 요한 23세의 문장이, 가장 오른쪽에 있는 성문 앞에는 레오 13세의 문장이 설치되었는데, 성 요한 23세의 문장은 조각가 자코모 만추가 디자인했기 때문에 다른 두 교황들의 고전적인 문장과는 다른 현대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또 중앙 입구 상층부에는 지오토가 1298년 옛 대성당에 만든 나비첼라(Navicella)라는 이름의 모자이크 작품의 17세기 복제품이 있다. 지오토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는 배를 표현한 것이다.
천장에는 베드로의 생애를 나타낸 46개의 부조가 있고, 뤼네트(lunette)에는 시성된 교황 38명의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열주랑 양편으로 ‘절제’, ‘정의’, ‘불굴’, ‘신중’, ‘관용’, ‘믿음’, ‘교회’, ‘희망’을 상징하는 석상이 서 있으며, 네 개의 비문이 벽면에 걸려 있다.

보니파츠 8세의 사면부

이 사면부는 1300년 교황 보니파츠 8세가 내린 「Antiquorum habet fida relatio」를 옮긴 것으로, 사면부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사면부였다. 과거에는 사면부가 교회의 특별 프로그램에 의해 제한되어 있었다면, 이 사면부는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열려 있었다. 이 사면부는 ‘plenissima omnium suorum venia peccatorum(그의 모든 죄과에 대한 완전한 용서)’을 약속했다.
보니파츠 8세는 1300년을 거룩한 해로 지정하고 이 해에 성 베드로 성당, 성 바울 성당을 그 해에 순례하는 모든 카톨릭 신자에게 완전 사면을 약속한다. 그때까지 성당과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숙소로만 이루어져 있던 황량한 도시였던 로마는 이로 인해 새로운 활기를 띠고 ‘영원한 도시(urbs aeterna)’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기념 사면부는 100년에 한 번씩 거행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곧 인간의 수명이 짧다는 이유로 50년으로 줄었다. 또 예수가 지상에서 33년 살았다 하여 다시 33년으로 줄고, 나중에는 25년까지 줄었다. 교황청의 재정 수입을 고려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결국 이 기념 사면부는 결국 신자들의 영적인 빈곤과 교황청의 물질적인 빈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였다고 할 수 있다.

다섯 개의 문

죽음의 문 : 장례행렬이 통과하는 문이다. 1950년 희년(禧年)을 맞은 교황 비오 12세가 설계안을 공모해 입찰에서 선정된 자코모 만추가 1964년 완성했다. 청동 패널에는 예수, 마리아, 아벨, 성 베드로, 성 요한 23세, 스테파노, 성 그레고리오 7세 등의 죽음이 묘사되어 있다.
선악의 문 : 교황 복자 바오로 6세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대성당에 기증된 문으로, 루치아노 민구치가 1977년 완성했다. 청동문의 오른쪽 패널에는 비둘기를 포함한 선(善)을 나타내는 상징물들이, 왼쪽 패널에는 매를 포함한 악(惡)을 나타내는 상징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필라레테 문 : 현관의 다섯 개 문 중 가운데에 있는 문이자 옛 대성당에 있었던 가장 오래된 문이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필라레테’라 불리던 피렌체 출신의 아베를리노에게 의뢰해 1445년 완성했다. 청동 패널에는 중세 때 널리 사용된 종교미술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베드로와 바오로를 찬미하는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성사의 문 : 일반적으로 대성당 출입에 사용하는 문으로 높이 7.43m, 너비 3.80m이다. 1965년 완성했으며 가톨릭의 성사(聖事, sacramentum)를 주제로 했다. 왼쪽 청동 패널에는 천사가 성사의 은총을 알리는 장면, 세례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 장면이, 오른쪽 청동 패널에는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 성체성사, 혼인성사가 묘사되어 있다.
성년의 문 : 다섯 개의 문 중 가장 오른쪽에 있는 높이 3.65m, 너비 2.30m 크기의 문이다. 1749년에 만든 나무 패널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1949년 청동 패널로 교체한 것으로, 1950년 스위스 가톨릭교회가 기증했다. 원래는 100년마다 문을 열었으나 그 간격이 50년으로, 다시 25년으로 줄었다. 25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의 첫 날, 교황이 은 망치로 벽돌벽을 두들겨 이 문을 열고 순례자들이 출입할 수 있게 한다. 가장 최근에 열린 것은 교황 프란치스코가 자비의 희년을 기념하여 개문한 2015년 12월 8일이다.

마테르노의 신랑

마테르노가 설계한 신랑은 미켈란젤로의 설계안보다 길이를 더 늘려 6만 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바닥에는 붉은색 원형 대리석이 박혀 있는데, 이는 800년 12월 24일 옛 대성당에서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이 거행된 장소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또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부터 미국의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31곳의 길이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남쪽(왼쪽) 측랑과 북쪽(오른쪽) 측랑의 금빛으로 장식된 위쪽 벽면에는 검은색으로 각각 “EGO ROGAVI PRO TE, O PETRE, VT NON DEFICIAT FIDES TVA: ET TV ALIQVANDO CONVERSES VS CONFIRMA FRATERS TVOS(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는 누가복음 22장 32절과, “QVAODCVMQVE LIGAVERIS SVPER TERRAM, ERIT LIGATVM ETIN COELIS: ET QVODCVMQVE SOLVERIS SVPER TERRAM, ERIT SOLVTVM ET IN COELIS(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는 마태복음 16장 19절이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맨발의 가르멜회’를 설립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조각상(측랑 왼쪽)과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한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조각상(측랑 북쪽)의 아래에는 아기 천사 한 쌍으로 장식된 성수반이 각각 설치되어 있다. 대성당 자체가 워낙 광대하고 내부의 시설물도 하나같이 거대한지라 이에 비하면 성수반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이지만, 그래도 보통 성당에 있는 것보다는 월등하게 커서 성수반을 장식하는 아기 천사의 높이가 2m에 육박한다.

39 성도의 석상

내부에 마련된 40개의 벽감 중 39개에는 수도회를 창설한 성인 39명의 석상이 안치되어 있다.(나머지 1개의 벽감에는 성 베드로 청동상이 있다.) 여기에는 베네딕토회, 프란치스코회, 예수회, 살레시오회 등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수도회들을 설립한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 요한 보스코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 석상들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성된 1626년에 곧바로 채워진 것은 아니고, 80년 동안 비어 있다가 1706년부터 하나씩 설치되기 시작해 약 250년 후인 1954년에 와서야 모든 벽감이 채워졌다. 종교 건축에서는 벽감을 비워두지 않고 그 안에 종교와 관련된 물건을 갖다 두는데, 이 39개의 벽감이 채워짐으로써 비로소 성당 공사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성당 외벽에 있는 벽감에도 1999년부터 성상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피에타 경당

1499년 당시 24세였던 미켈란젤로가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 랑그로사이오 추기경의 의뢰를 받아 조각한 <피에타>가 있다. ‘피에타’란 그리스도교 예술에서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 이탈리아어로 ‘슬픔’이나 ‘비탄’을 뜻한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이 묘사되는 작품을 피에타라고 하는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워낙 유명해 마치 대명사처럼 되었다.
자세히 보면 성모 마리아 얼굴이 예수보다 젊어 보이는데, 그 이유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순결한 여자들이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더 잘 유지하는데,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특히 이 피에타가 유명한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수많은 조각들 중에서 그의 서명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어깨띠를 보면 ‘MICHAEL·ANGELVS· BONAROTVS·FLORENT· 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세계적인 걸작이다 보니 파괴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결국 1972년 5월 21일 헝가리 출신의 지질학자 라슬로 토트가 “내가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외치며 10여 차례나 망치를 휘둘러 성모의 얼굴과 한쪽 팔을 박살내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오른쪽 사진 : 토트가 붙잡히는 모습). 전문가들이 바닥에 흩어진 작은 부스러기까지 수거해 7개월만에 복원했지만, 이후로는 방탄유리에 둘러싸여 엄중하게 보호받고 있다. 이 때문에 피에타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보관된 수많은 예술품들 중 유일하게 방탄유리의 보호를 받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복원할 때 대리석 가루와 조각을 붙일 접착제로는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사용했고, 절단된 팔 부분에는 산화 방지 철근을 끼워 넣어 몸체와 접합시켰다. 1749년 피에타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손가락 부분이 깨져서 절단면을 갈아 붙였었는데, 최초 조각 당시의 길이와 관절의 모양을 확인하는 게 불가능한 탓에 여기는 대리석보다 가벼운 재료를 사용해 복원 사실이 드러나게 처리했다. 토트가 휘두른 망치의 녹이 성모의 눈썹에 얼룩으로 묻던 것은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어내 제거했다고 한다.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의 제대 윗부분을 장식하는 성화는 성 세바스티아노의 순교 장면이다. 세바스티아노는 3세기 로마 제국의 군인이었는데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이 발각되어 화살형에 처해졌지만 살아남았고,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교 박해를 비판해 처형당했다. 17세기에 그림으로 그려졌다가 1722년 모자이크화로 교체됐다.(성 베드로 성당의 그림들은 대개 본래 그림이었다가 1722년경 모자이크화로 교체됐다.)
제대 아래쪽에는 교황 이노켄티우스 11세의 유해가 유리관 내부에 안치되어 있었다. 원래 성당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지만 1956년 10월 7일 비오 12세 때 시복되면서 관을 열었는데, 사후 267년이 지났음에도 유해가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55년 뒤인 2011년 5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기념해 사람들이 보다 가까이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여기에 대리석 석관을 마련하고 대성당 지하 무덤에 있던 유해를 이장했다. 이에 따라 기존에 모셔졌던 이노켄티우스 11세의 유해는 ‘변용의 제대’로 이장되었다.
제대 양 옆에는 20세기에 제작된 2개의 기념물이 서 있는데, 왼쪽은 교황 비오 12세의 동상이고 오른쪽은 교황 비오 11세의 동상으로 두 교황 모두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즘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제대의 왼쪽 벽감에는 교황 이노켄티우스 12세의 동상이, 오른쪽 벽감에는 왕위를 포기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 아우구스타 바사(Kristina Augusta Wasa)의 기념물이 있다.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관용’과 ‘지조’를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성체 경당

성체 경당은 베르니니가 1676년 대성당에서 맡은 마지막 내부 장식이다. 성체가 봉안된 경당은 도금한 청동으로 제작했으며, 그 형태는 1502년 브라만테가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 중정에 세운 로톤다 형식의 성당인 템피에토(Tempietto)를 축소시켰다. 경당의 돔 꼭대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올려 있고 그 둘레의 지붕에는 12사도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왕관은 쓴 16명의 천사가 경당을 장식하는데 큰 조각상 8개는 팀파눔(tympanum)을, 작은 조각상 8개는 코벨(corbel)을 꾸민다. 경당의 양 옆에는 무릎을 꿇은 두 천사가 손을 모으고 경당을 향해 경배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현재 대성당 내부에 있는 그림 중 유일하게 모자이크화가 아닌 그림이다.
성체 경당의 왼쪽 감실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무덤이, 오른쪽 감실에는 카노사의 굴욕 때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를 지지했던 카노사의 마틸다(Matilda of Canossa) 여백작의 무덤이 있다.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순수(Innocence)와 평화(Peace)를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성 베드로 의자

신랑의 북쪽 측랑 끝부분에는 의자에 앉은 성 베드로 청동상이 있다. 13세기 조각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제작한 것으로 피에타와 함께 대성당의 명물로 통한다. 성 베드로 청동상은 고대 로마식 복장에다 왼손에는 열쇠를 들고 오른손은 곧추세운 채 의자에 똑바로 앉은 모습을 하고 있다. 중세 때부터 이곳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가 청동상의 발에 입맞춤하고 손으로 만지며 기도하는 습관 때문에 오른쪽 발가락은 거의 다 닳아서 원형이 사라졌고 이제는 왼쪽 발가락도 많이 닳은 상태다. 성 베드로의 축일인 6월 29일에는 이 청동상에 금실로 수놓은 제의를 입히고 미사를 집전한다.
청동상 위쪽에는 살레시오 수도회의 설립자 성 요한 보스코(Giovanni Melchiorre Bosco, 1815~1888), 그리고 1857년에 임시 희년을 선포하면서 이 청동상의 발에 입을 맞춰야 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한 교황 비오 9세(B. Pius IX, 1792~1878)의 모자이크 초상화가 장식되어 있다.

세례 경당

세례 경당은 18세기 초에 도메니코 폰타나의 종손인 카를로 폰타나(Carlo Fontana)가 설계했다. 여기에 놓인 지름 4m의 자색 반암 세례대는 산탄젤로의 성에서 옮겨온 것이고, 그 위에 덮인 도금 청동 덮개 장식은 카를로 폰타나가 설계한 것을 조반니 지아르디니(Giovanni Giardini)가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세례대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하는 장면이다. 경당의 스펜드렐(spandrel) 4곳은 18세기에 프란체스코 트레비사니(Francesco Trevisani)가 디자인한 것으로 의인화된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의 4대륙이 장식되어 있다.
경당 오른쪽 벽감에는 영국 국왕 제임스 2세의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James Francis Edward Stuart)의 아내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Maria Clementina Sobieska)의 무덤이 있다.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정의(Justice)와 용기(Fortitude)를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자헌 경당

자헌 경당의 성화는 성모 마리아의 부모인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가 어린 성모를 하느님에게 바치는 장면이다. 제대 아래쪽에는 교황 성 비오 10세의 유해가 유리관 내부에 안치되어 있는데 얼굴과 손에 은으로 만든 가리개를 덮어 놓았다. 제대 왼쪽에는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기념물이, 오른쪽에는 교황 성 요한 23세의 기념물이 있다.
제대의 왼쪽 벽감에는 스튜어트 왕조의 일족으로 명예혁명 이후 자코바이트가 영국의 정당한 왕위계승권자라고 주장한 영국 국왕 제임스 2세의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및 그의 두 아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그리고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 추기경의 기념물이 있고, 제대의 오른쪽 벽감에는 교황 성 비오 10세의 기념물이 있다.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겸손(Humility)과 인내(Patience)를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성가대 경당

성가대 경당의 무염시태 제대는 교황 바오로 5세의 명에 따라 1477~1479년에 만들어져 같은 해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 축일에 축성되었다. 이곳에서는 성모에게 바치는 ‘성무일도(聖務日禱)’가 행해진다. 원래 제대 아래쪽에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취해 온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8백년 후인 2004년 11월 2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정교회에 유골을 반환해 지금은 이스탄불의 성 게오르기오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제대 뒷배경에는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을 나타낸 성화가 있다. 성화에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가 왕관 쓴 성모를 경배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성모의 머리에 얹어진 왕관은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가 봉헌한 황금관에 1904년 12개의 다이아몬드 장식이 추가로 봉헌된 것이다. 한편 무염시태 제대와 함께 있는 성가대 경당의 파이프오르간은 1626년에 설치된 것인데 상당히 오래된 편에 속한다.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는 순결(Virginity)과 복종(Obedience)을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클레멘티나 경당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 교권(Ecclesiastical Authority)과 신성한 정의(Divine Justice)를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대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제대

이 제대의 성화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1명인 대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540~604)의 제대이다. 그는 뛰어난 학식을 바탕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레고리안 성가를 편찬하고, 598년 롬바르드족의 위협으로부터 로마를 지켜내 ‘교회의 구세주’, ‘로마의 보호자’로 불렸다. 성유물을 요청하는 황제의 대리인에게 순교자의 유골을 닦은 천을 주었는데, 그것이 하찮다며 받지 않자 교황이 칼로 그 천을 찌르니 피로 얼룩졌다는 기적을 보였다고 한다. 선종 즉시 시성되어 대교황으로 격상된 성 그레고리오 1세의 유해는 옛 대성당에서 이장해 이곳 제대의 아래쪽에 안장되어 있다. 제대 왼쪽에는 교황 비오 7세의 무덤이 있다.

변용의 제대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기 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갔다. 제자들 앞에서 예수의 모습이 변해 얼굴과 옷이 눈부시게 빛나며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자,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라고 청했다. 하지만 빛나는 구름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러자 제자들이 엎드려 두려워했다고 한다. 마태복음 17장 1~6절의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담은 변용의 제대의 성화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인 라파엘로의 유작으로, 1517년 작업에 착수해 그가 사망한 해인 1520년 제자들이 완성한 것을 1767년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성화의 원본은 1797년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가져가 루브르에 전시되었다가, 1815년 파리 조약에 따라 바티칸으로 반환되었다. 제대 맞은편에는 교황 이노켄티우스 11세의 무덤이 있다.

거짓의 제대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땅을 팔아 생긴 돈을 하나님께 내지 않고 감추었는데, 아내인 사피라도 그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돈의 일부만을 사도 베드로에게 바쳤다. 베드로가 “하나니아스,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 놓았소?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 것이었고, 또 팔린 뒤에도 그 돈은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라고 말하자 하나니아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시신을 메고 장사지내러 나간 사이, 남편의 죽음을 알지 못한 사피라가 들어왔다. 베드로는 그녀에게도 돈이 이것뿐이냐고 물었고 그녀 역시 거짓말을 했다. 베드로는 “어쩌자고 그대들은 서로 공모하여 주님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오? 보시오, 그대의 남편을 묻은 이들이 바로 문 앞에 이르렀소. 그들이 당신도 메고 나갈 것이오.”라고 말했고, 사피라 또한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흔히 ‘횡령자의 최후’로 알려져 있다. 거짓 제대의 성화는 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대 맞은편에는 교황 비오 8세의 기념물이 있으며, 기념물 밑에는 성구소와 보물실(Sacristy and Treasury Museum)로 향하는 문이 자리하고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구소 및 보물실을 연결하는 이 통로에는 대성당에 안장된 교황들의 명단이 있다.

그레고리우스 경당

경당의 아치 윗부분 좌우에 자애(Charity)와 신앙(Faith)을 의인화한 조각상이 있다.

도움의 성모 제대

도움의 성모 제대를 장식하는 성화는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나타낸 것이며 나무판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졌다. 이는 대성당 내의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모자이크화가 아닌 그림들 가운데 하나이다. 12세기에 그려진 이래 오늘날까지 8백년이 넘도록 보관된 귀중한 유물로 원래는 옛 대성당에 있었으나 15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지금의 대성당으로 옮겨 자수정과 같은 준보석, 아프리카산 대리석, 초록색 반암을 사용해 성화가 걸린 벽면을 장식했다. 제대 아래쪽에는 카파도키아의 교부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329~390)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고, 제대의 오른쪽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무덤이 있다.

성 예로니모 제대

이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이자 교회학자이며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 즉 성 예로니모(St. Hieronymus, 340/347~420)를 주제로 했다. 죽어가는 성 예로니모의 손에 입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굽힌 바오로, 그리고 화면 왼쪽에 앉아 있는 성 예로니모의 발치에 머리를 대고 있는 사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제대 아래쪽에는 교황 성 요한 23세의 유해가 유리관 내부에 안치되어 있다. ‘선하신 교황 요한’으로 불리며 많은 존경을 받았던 그는 1963년 6월 3일 선종한 뒤 대성당 지하 무덤에 매장되었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 시복 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관을 열었는데, 30여년이 지났음에도 유해가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요한 23세를 2000년 9월 17일 시복하면서 새로운 매장처로 이 제대를 선택해 그의 거룩함을 기렸다.

성 바실리오 제대

이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한 성화는 카파도키아의 교부이자 교회학자인 성 대 바실리오(St. Basil the Great, 330~379)가 372년 1월 6일 주님 공현 축일(Epiphany)을 맞아 신하들을 대동하고 카파도키아 교회를 방문한 발렌스 황제(Valens)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신자들에게 의식을 집전하는 장면을 나타냈다. 당시 발렌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 퍼진 아리우스파를 신봉했지만 성 바실리오는 반대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한때 그를 벌하려 했으나 바실리오가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당당하게 나서자 그 용기에 감탄해 카이사레아 인근의 영지를 하사하고 그가 벌이던 자선 활동을 재정적으로 도왔다. 이 성화는 세속의 권력에 대한 기독교회의 우위를 나타냄과 동시에 아리우스파에 대한 아타나시우스파의 우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제대 아래쪽에는 동유럽 지역에서 가톨릭과 정교회의 교회일치를 위해 노력하다가 분리파 주교들에 의해 순교한 폴로츠크 대주교 성 요사팟 쿤체빅(St. Josaphat Kuncevyc, 1580?~1623)의 부패하지 않은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제대의 맞은편에는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무덤이 있다.

교황의 제대와 발다키노 Baldacchino

베드로의 무덤 바로 위에 있는 교황의 제대는 오직 교황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자리에는 본래 1123년 교황 갈리스토 2세가 축성한 제대가 있었으며, 지금의 제대는 1594년 6월 5일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봉헌한 것이다. 제대에 올라설 수 있도록 하는 일곱 층계의 계단은 포룸 로마눔의 네르바 포룸에 있던 거대한 대리석을 옮겨와 조각한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제대를 보수하거나 새로 만들기도 했지만, 제대의 위치만큼은 옛 대성당과 지금의 대성당 모두 현재의 위치에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교황 제대를 덮은 발다키노는 천개(天蓋)라고도 불리며, 교황 우르바노 8세가 20대 청년 베르니니에게 명해 1625년부터 1633년까지 8년에 걸쳐 청동을 주재료로 만든 후 금박을 입혀 제작한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다. 높이 29m, 무게 37톤에 달하는 이 발다키노를 제작하기 위해 이탈리아 전역은 물론 베네치아에서도 청동을 끌어 모았는데, 그래도 부족하자 판테온에까지 손을 뻗쳤다는 이유로 로마 시민들의 조롱거리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완성 당시에는 기존의 발다키노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라 이도저도 아닌 키메라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오는가 하면, 실제 동식물을 밀랍 속에 넣고 청동 주물을 만들었다 하여 실물을 모방해야 할 예술가가 실물 자체를 이용해 효과를 냈다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주문자였던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결과물에 매우 만족해하면서 베르니니를 더욱 신임하게 된다.
발다키노의 기둥을 지탱하는 네 기단부에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발다키노의 지붕을 떠받치는 네 개의 물결무늬 나선형 기둥은 옛 대성당에 있던 같은 모양의 대리석 원기둥을 본떠 만든 것으로 인간의 영혼이 천상에 도달하는 것을 형상화했는데, 기둥의 굵기를 가늘고 날렵하게 처리해 미사를 집전하는 교황의 시야를 가리지 않게 했다. 발다키노의 천장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조각되어 있고 화관을 들어 올리는 네 명의 천사가 있으며, 우르바노 8세의 출신 가문인 바르베리니 가문의 상징인 벌, 베드로를 상징하는 교황관과 열쇠 및 바오로를 상징하는 칼과 복음서를 든 천사들도 함께 장식되어 있다.

콘페시오 Confessio

교황 제대 밑에는 베드로의 무덤이 자리해 있어 대성당 내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로 손꼽힌다. 베드로가 순교한 이래 2,00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진짜 매장지인지는 알 수 없었는데, 오랜 탐사와 연구를 거쳐 1950년 12월 23일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가 성당 지하실의 기저 공간에서 성 베드로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공표했다. 이곳으로 내려가는 대리석 계단과 주변을 두른 난간에는 청동제 램프 100개가 장식되어 불을 밝히고 있다. 교황 제대 아래쪽의 벽감에는 1세기에 교황 성 리노가 사용했다는 영대(Pallium)가 봉헌돼 있다. 이 영대는 성녀 아녜스 축일에 봉헌된 양털을 축성한 뒤 그것을 실로 만들어 제작했다고 한다. 이곳의 베드로의 무덤을 기점으로 대성당의 지하 무덤에 내려갈 수 있다.

돔 Cupola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설계한 돔이 기단부만 완성되는 걸 보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설계안을 이어받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원안을 약간 수정해 1590년 완공했다. 돔의 내부 둘레에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는 마태복음 16장 18~19절이 2m 크기에 라틴어로 새겨져 있고, 채광 정탑 아래쪽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4세가 식스투스 5세를 기념한 ‘성 베드로의 영광을 위하여, 식스토 5세 교황, 교황 재위 제5년, 1590년’라는 라틴어 명문이 가장자리를 둘러 새겨져 있다. 돔 벽면에는 16개의 창문이 나 있고, 돔의 이중벽 내부에는 537개의 계단이 있어서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채광 정탑으로 향할 수 있다.
돔을 지탱하는 네 모서리의 기둥 벽 위쪽에는 사복음의 저자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과 이들을 상징하는 사람, 사자, 소, 독수리가 원형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기둥 벽 아래쪽 벽감에는 대성당에 봉안된 성 유물과 그에 연관된 성인들-성 십자가의 파편과 성녀 헬레나(중앙부 북서쪽), 성창과 성 론지노(중앙부 북동쪽), 성 안드레아의 두개골과 성 안드레아(중앙부 남동쪽), 예수의 얼굴이 찍힌 수건과 성녀 베로니카(중앙부 남서쪽)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왼쪽 익랑

왼쪽 익랑 상단부에는 금빛으로 장식된 벽면에 검은색 글씨로 ‘DICIT TER TIBI PETRE IESVS DILIGIS ME CUI TER O ELECTE RESPONDENS AIS O DOMINE TV OMNIA NOSTI TV SCIS QVIA AMO TE(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라는 요한복음 21장 17절이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제대

이 제대의 성화는 귀도 레니의 작품으로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장면을 표현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제대가 위치한 곳이 바로 베드로가 순교한 칼리굴라 경기장의 한복판이라고 하니, 이 제대를 통해 베드로의 순교지에 대성당이 세워졌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성화는 본래 성 요셉 제대에 걸려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제대 왼쪽에는 필리핀 출신으로 일본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1600~1637)의 원형 초상화가 있다. 그는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1987년 시성한 성인이다. 제대 오른쪽에는 교황 비오 12세가 1951년 시성한 성 안토니오 마리아 지아넬리(1789~1846)의 원형 초상화가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성 요셉 제대

원래 이 자리에는 귀도 레니가 그린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의 모자이크 복제화가 있었지만, 이것이 1822년 성 요셉 제대의 왼쪽에 있는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제대로 위치가 옮겨졌다. 지금 있는 성화는 1963년 축성한 것으로, 성모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며 전세계 교회의 주보성인인 성 요셉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무릎을 꿇은 천사와 하늘에 떠 있는 천사가 경배하는 내용이다.
제대 아래쪽에는 12사도 가운데 두 사람인 사도 시몬과 사도 유다 타대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으며, 제대의 양 옆에는 각각 시몬과 유다 타대오의 원형 초상화가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사도 성 토마스 제대

사도 성 토마스 제대는 대성당 내의 제대들 가운데서도 가장 이른 시기인 1621년 1월 30일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화는 12사도 중 하나인 성 토마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다가 예수의 손바닥 난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서야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요한복음서 20장 24~29절의 내용을 나타낸 것이다. 제대 아래쪽에는 교황 바오로 5세가 옛 대성당에서 이장한 교황 성 보니파시오 4세(550~615)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제대 왼쪽에는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1988년 시성한 카노사의 성녀 막달레나(1774~1835)의 원형 초상화가, 오른쪽에는 교황 비오 12세가 1951년 시성한 성녀 마리아 도미니카 마자렐로(1837~1881)의 원형 초상화가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성심의 제대

이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프랑스 카톨릭 교회의 수녀인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47~1690)의 앞에 발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예수 성심(聖心) 신심 전파에 공헌한 것이 인정되어 1864년 9월 18일 교황 비오 9세가 시복했고,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시성했다. 원래 이 자리에는 1600년경의 그림이 걸려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훼손되어 지금의 그림으로 대체되었다.
제대 맞은편에는 베르니니가 완성한 교황 알렉산데르 7세(1559~1667)의 무덤이 있다. 무덤을 장식하는 4개의 여인상은 바로크 양식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다. 이중 ‘진실’을 상징하는 조각상은 지구를 밟고 있는데, 이 여인상의 발치에 놓인 지역은 성공회를 내세워 카톨릭과 갈라선 영국이다.

원주의 성모마리아 제대

이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것으로, 옛 대성당 입구 옆에 있던 원기둥 위에 그려져 있었다 하여 ‘원주의 성모마리아’라는 이름이 붙었다. 1581년에 지금의 대성당으로 옮겨졌으며, 1607년에는 성화 주변에 희귀한 대리석과 설화 석고 장식이 덧붙여졌고 1645년에는 성화 속 성모자의 머리 위에 금관이 봉헌되었다.
1964년 11월 21일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났을 때 교황 바오로 6세는 원주의 성모를 ‘교회의 어머니(Mater Ecclesiae)’라 선언했으며, 1981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성화를 모자이크화로 복제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잘 보이는 외벽에 설치했다. 제대 아래쪽에는 교황 성 레오 2세(?~683), 교황 성 레오 3세(?~816), 교황 성 레오 4세(?~855)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대교황 성 레오 1세의 제대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조각은 대교황 성 레오 1세(400~461)의 전설을 표현하고 있다. 452년 훈족이 로마 코앞에까지 침입해 오자, 레오 1세는 이를 물리치고자 아틸라를 만나기 위해 병력 없이 성직자 차림으로 로마 교외에 나갔다. 그런데 아틸라가 성 레오 1세의 뒤쪽에서 칼을 든 베드로와 바오로가 나타나는 환시를 본다. 아틸라는 즉시 군대를 퇴각시켜 로마를 구원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뒷돈 주고 협상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여하튼 교황은 당시 로마 황제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셈이다.
이 조각은 대성당 내의 제대를 장식하는 성화 중 프레스코 화나 모자이크화가 아닌 유일한 조각 작품으로 1645~1653년에 대리석으로 제작했다. 제대의 아래쪽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대교황 성 레오 1세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절름발이를 치유하는 성 베드로의 제대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불구자들을 날마다 메고 성전 앞 미문(美門)에 데려다 놓고 구걸을 시켰다고 한다. 어느 날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는데 한 불구자가 구걸을 하자, 베드로는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말하며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뛰며 성전으로 들어가 하느님을 찬미했다고 한다. 이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사도행전 3장 1~10절의 이 내용을 담은 것이다.

계상랑 - 성 베드로 의자

중앙 제대 뒷부분에 있는 성 베드로의 의자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선교할 때 앉았던 나무 의자라는 전설이 있어 그 조각들을 모아 5세기에 상아로 장식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875년 서프랑크의 카를 2세(823~877)가 로마에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할 때 교황청에 기증한 의자이다. 하지만 이 의자가 베드로를 상징하는 중요한 성 유물로 간주되면서 이미 수많은 순례자들이 경배를 했다.
베르니니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1559~1667)의 의뢰로 1647년부터 1653년까지 6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기존의 의자에 약 75톤에 달하는 청동을 입히고 금박과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했다.
의자의 네 다리는 무게 39톤, 높이 5m에 육박하는 4개의 청동상이 잡고 서 있다. 이중 앞쪽의 두 사람은 서방 교회의 교부인 성 암브로시오(340?~397)와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이고 뒤쪽 두 사람은 동방 교회의 교부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7?~407)와 성 아타나시오(293?~373)이다. 이는 동서 교회의 통합을 의미함과 동시에, 서방 교회의 교부를 앞에 배치함으로써 동방 교회에 대한 우위를 드러낸다.
의자 위쪽에 있는 황금빛 타원형 창은 유리가 아니라 대리석을 얇게 깎아서 유리처럼 비치게 만든 것이다. 한가운데에 새겨진 길이 1.75m의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고, 비둘기를 둘러싼 타원이 세 겹인 것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며, 창이 열두 부분으로 나뉜 것은 12사도를 상징한다. 그 주변에는 구름에 둘러싸인 천사들의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의자를 중심으로 그 뒤쪽 왼편에는 ‘O PASTOR ECCLESIAE TU OMNES CHRISTI PASCIS AGNOS ET OVES’라는 라틴어가, 오른편에는 ‘ΣΥ ΒΌΣΚΕΙΣ ΤΑ ΑΡΝΙΆ ΣΥ ΠΟΙΜΑΊΝΕΙΣ ΤΑ ΠΡΟΒΑΤΙΑ ΚΡΙΣΤΟΥ’라는 그리스어가 새겨져 있는데, 둘 다 요한복음 21장 15~17절인 ‘교회의 목자여, 그대는 모든 어린 양과 양떼를 목장으로 넣으라’라는 뜻이다.
계상랑의 좌우 벽감에는 각각 교황 바오로 3세(1468~1549)의 무덤과 교황 우르바노 8세(1568~1644)의 무덤이 있다.

다비다를 살리는 성 베드로 제대

야포에 평소 착한 일을 많이 하던 다비다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병들어 죽자 시신을 씻겨 다락방에 모셨는데, 마침 인근에 있던 베드로가 이 소식을 듣고 와서 다비다의 집을 방문해 다락방에 올라가더니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던 과부들을 모두 내보낸 다음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시체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하자 그녀가 소생해 눈을 뜨고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많은 야포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화는 사도행전 9장 36~44절의 이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이 자리에는 본래 1604~1606년에 그려진 원본이 있었는데, 너무 낡아서 18세기에 새로 그리고 이를 다시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제대 맞은편에는 교황 클레멘스 10세의 무덤이 있다.

성녀 베드로닐라의 제대

성녀 베드로닐라는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은 뒤 그의 영적인 딸이 되었고, 이후 로마 귀족 플라쿠스의 청혼을 거부하고 3일 동안 단식하다가 사망한 여인이다. 그녀의 유해는 도미틸라 카타콤베에 매장되었다.
이후 그녀가 베드로의 딸이라고 믿은 프랑크 왕국의 국왕 피핀 3세(714~768)가 750년 교황 바오로 1세에게 그녀를 베드로의 무덤과 가까운 곳으로 이장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유해가 옛 대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고 성녀를 위한 제대도 함께 세워졌다. 이 제대는 1606년 옛 대성당을 허문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겨 1623년 축성되었다. 이후 781년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카를 1세가 이 제대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렇듯 이 제대는 프랑스와 깊은 인연이 있으며, 역대 프랑스 국왕들은 이 제대를 ‘프랑스의 경당’이라고 여겼고 성녀 베드로닐라는 16세기까지 프랑스의 수호성녀로 공경되었다. 지금도 성녀 베드롤리나의 축일인 5월 31일에는 프랑스인들이 이곳을 순례해 미사를 드리고 있다.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성녀 베드로닐라의 순교와 그녀가 천국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에게 환대받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대천사 성 미카엘 제대

처음에 이 제대는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성녀 안나에게 바쳐쳤고 그 뒷배경을 장식한 성화 또한 이들을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1606년 4월 14일에 걸렸다가 이틀 만에 내려지고 말았고, 이후 이곳은 대천사 미카엘에게 바치는 제대로 바뀌었다. 성화 역시 다른 성당에 있던 귀도 레니의 작품을 모자이크로 복제해 설치했는데, 이것은 18세기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다른 모자이크화로 교체됐다. 성 베드로 성당 내부의 다른 모자이크화들은 처음에는 벽화로 그려졌다가 나중에 모자이크화로 교체된 것인데, 그와 달리 이 성화는 유일하게 처음 제작할 때부터 모자이크화로 만들어져 제대에 설치된 작품이다.

나비첼라의 제대

나비첼라(Navicella)는 이탈리아어로 ‘작은 배’를 뜻하는 단어로, 종교 미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한다. 제자들이 탄 배가 호수에서 풍랑에 휩싸이자 예수가 이들의 안전을 걱정하며 물 위를 걷는 기적으로 배 가까이 다가갔다고 한다. 이를 본 베드로가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해 예수처럼 물 위를 걸었으나 시선을 돌려 파도치는 호수를 보고 겁이 나 물에 빠져 허우적댔는데, 예수가 구해주며 그의 믿음이 약함을 꾸짖었다고 한다. 이 제대의 성화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나타낸 것이다.
같은 내용을 주제로 한 조토의 작품이 이미 대성당 현관에 있었지만,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제대를 장식하기 위해 이 그림을 다시 완성시켰다. 나중에 그림 상태가 악화되어 네 차례나 보수했고 마지막에는 모자이크화로 교체됐다. 제대 맞은편에는 교황 클레멘스 13세(1683~1769)의 무덤이 있다.

오른쪽 익랑

오른쪽 익랑 상단부는 금빛으로 장식된 벽면에 검은색 글씨로 ‘O PETRE DIXISTI TE ES CHRISTVS FILIVS DEI VIVI AIT IESVS BEATVS ES SIMON BARIONA QVIA CARO ET SANGVIS NON REVELAVIT TIBI({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는 마태복음서 16장 16~17절이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성 에라스모 제대

1628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축성한 이 제대는 성 에라스모에게 바쳐진 것이다.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체포되어 권양기로 내장을 끄집어내 뽑히는 고문을 받다가 처형당한 포르미아의 성 에라스모(Erasmus, ?~303)의 순교 장면을 나타냈다.
기존의 성화가 너무 낡아서 니콜라 푸생이 1628~1629년에 새로 그린 것을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푸생이 17세기 프랑스 회화의 거장이자 프랑스 근대 회화의 시조라는 유명세 때문인지, 이 성화의 원본은 나폴레옹이 프랑스 파리로 가져갔다가 나중에 반환된 역사가 있다. 푸생이 그린 원본은 현재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중이다. 제대의 아래쪽에는 옛 대성당에서 이장한 성 에라스모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성 프로체수스와 마르티니아누스 제대

역시 1628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축성한 이 제대는 성 프로체수스와 성 마르티니아누스에게 바쳐진 것이다. 원래 두 사람은 베드로가 로마의 마메르티노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를 감시하던 간수였으나, 베드로의 기적을 접하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두 사람 모두 고문을 당하다가 처형되었다.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두 성인이 순교하는 장면인데, 모자이크화로 바뀌면서 원화보다 색상과 분위기가 어둡게 바뀌었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원래 이 자리에 바오로에게 봉헌할 제대를 만들고 싶어서 세부적인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계획이 백지화되는 바람에 지금의 제대가 자리하게 되었다. 제대의 양 옆을 떠받치는 옅은 황색의 기둥은 지알로 안티코(giallo antico)라는 희귀한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클레멘스 8세가 계획했던 바오로 제대의 흔적 중 일부이다. 제대 아래쪽에는 옛 대성당에서 이장한 성 프로체수스와 성 마르티니아누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성 바츨라프 제대

성 벤체슬라오 제대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성화는 보헤미아의 국왕인 성 바츨라프(907~929/935)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독일에 대한 타협 정책과 슬라브인의 통합을 추진한 인물인데, 이에 반발한 동생 볼레슬라프의 부하에게 피살당한 뒤 순교자로서 공경 받았다.
제대 아래쪽에는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344?~421/522?) 등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또 제대 왼쪽에는 성 치릴로(827~869)의 원형 초상화가, 오른쪽에는 성 치릴로의 형인 성 메토디오(826~885)의 원형 초상화가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슬라브인의 사도’로 불린 이 형제는 모라비아의 슬라브인 전도에 종사했으며 슬라브인의 구어를 적을 수 있도록 키릴 문자를 창안해 성서와 기도서를 번역하고 이를 교황으로부터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무덤

대성당 내부에는 백 개가 넘는 무덤들이 있는데, 대부분 성당 바로 밑 지하 동굴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성 베드로를 시작으로 역대 교황의 대부분을 비롯하여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2세 황제, 작곡가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도 매장되어 있다. 본국에서 추방당해 교황 클레멘스 11세에게 망명을 신청해 의탁한 영국의 가톨릭교도 왕족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그의 두 아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그리고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도 이곳에 묻혀 있다. 또한,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아내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와 왕위를 포기하고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도 이곳에 묻혀 있다.

외벽의 벽감에 설치된 성인 성상

성당 내부에 있는 39개의 벽감에는 수도회를 설립한 성인들의 성상이 설치되어 있다. 1706년 성 도미니코부터 시작해 1954년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을 끝으로 대성당 내부에는 빈 벽감이 남지 않게 되었다. 이렇듯 만원이 된 내부의 벽감과는 달리 외벽에 있는 30여 개의 벽감은 3세기 넘도록 빈 상태였다. 그러던 중 1999년부터 교황청에서 이곳에도 성상을 설치하기로 했다.
교황청은 조각상의 대상이 된 성인을 교황이 승인할 것, 대성당 관리소가 디자인을 감수할 것, 석재는 이탈리아 카라라 산 대리석을 사용할 것, 조각상 설치 제안자가 모든 비용을 부담할 것 등을 설치 조건으로 제시했다. 조각상을 제작·설치하는 데에는 약 25만 달러, 우리 돈 약 2억5천안 원 이상의 비용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마련된 성상은 2005년에 설치·축성한 것이며 아직도 빈 벽감이 많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성상이 계속 설치될 예정이다.

독일인 묘지 Campo Santo Teutonico

독일인 묘지는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오로 6세 알현실 사이에 있다. 기독교인들이 박해 받아 순교한 장소인 네로 황제의 전차경기장 자리에 세워졌다는 점, 성 베드로 대성당 바로 옆에 있다는 점 때문에 이 독일인 묘지에 매장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아무나 묻힐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조건이 있다. 죽은 이가 대신심회(Archconfraternity) 소속이거나, 독일에 기원을 둔 수도회 소속이거나, 바티칸에 있는 독일인 대학(Collegio Teutonico) 소속이어야 매장 자격이 주어진다. 이 때문에 종교, 정치, 외교, 예술 등 분야의 거물급 인사들이 주로 안장되어 왔다. 그런데 지난 2015년 2월, 교황 프란치스코가 바티칸에서 사망한 벨기에 출신 노숙자를 여기에 매장하도록 허락함에 따라 한 세기 넘게 이어진 매장 조건 전통이 깨졌다.

바티칸 궁전(사도 궁전) Vaticano

아비뇽 유수(1309~1377) 이후 현재까지 600년 넘게 교황의 거처로 사용된 궁전으로 교황 궁전, 사도 궁전이라고도 한다. 2013년에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가 교황청 내부에 있는 성녀 마르타의 집(Casa di Santa Marta)에 머물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교황이 거주하지 않고 있다. 물론 외교 사절을 접견하거나 삼종기도 때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강복하는 것과 같은 공식 업무는 여전히 이 궁전에서 수행한다. 큰 방, 개인용 방, 예배당 등 방의 수가 약 1,400개나 되는 대규모 궁전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대부분이 바티칸 미술관과 도서관으로 이용된다.
바티칸 궁전의 시초는 교황 심마쿠스(재위 498∼514) 때 구(舊) 성 베드로 성당의 곁에 교황의 거주관을 건립한 것이었다. 교황 거주구는 1307년까지 라테란 궁이었으나, 1377년 그레고리오 11세가 바티칸 건물을 교황궁으로 정하고 15세기 니콜라오 5세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증축·개축해 왔다.
1473년 식스투스 4세가 시스티나 예배당을 건설하고 바티칸 도서관을 확충했다. 이어 알렉산데르 6세는 보르자 탑을 세웠으며, 율리오 2세 때에는 브라만테가 벨베데레의 가운데 마당과 다마수스의 가운데 마당 등의 부분을 형성하는 동시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궁전 전체를 장식했다. 특히 1659년 베르니니가 만들기 시작한 계단이 유명하다.


본문 PDF 파일 내려받기

바티칸 시국 한국어가이드.pdf
3.28MB

시스티나 예배당, 성 베드로 성당만 따로 보기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설명만 따로 보기

로마 여행지도 다운로드 바로가기

로마 일반 광광지 한국어 가이드 바로가기

이탈리아 맛집 정보 다운로드 바로가기

옷, 패션 트렌드, 운동화, 쇼핑, 신상품, 신발, 자켓, 코트, 탈모, 모발이식, 미용, 성형수술, 구두, 부츠, 샌들, 여름 신발, 바지, 롱팬츠, 팬츠, 양말, 모자, 캡, 나이키, 아디다스, ABC 마트, 롱부츠, 첼시부츠, 티셔츠, 원피스, 정장, 수트, 가방, 귀걸이, 목걸이, 반지, 마스크, 시계, 팔찌, 패션, 백화점, 의류, 옷, 머리띠, 롱패딩, 패딩, 점퍼, 야상, 재킷, 화장품, 크림, 스킨, 아이섀도우, 아이브로우, 올리브영, 롯데닷컴, 하프클럽, 니트, 블라우스, 스커트, 치마, 주름바지, 통바지, 크롭티, 와이셔츠, 영어, 토익, 학원, 반찬, 다이어트, 도시락, 닭가슴살, 샐러드, 감자, 계란, 집밥, 요리, 고기, 소고기, 닭다리, 치킨, 아침밥, 삼겹살, 곱창, 밀키트, 선물세트, 저녁 메뉴, 볶음밥, 탕수육, 광어회, 연어회, 해산물, 냉동식품, 참치회, 잡곡밥, 아이스크림, 배스킨라빈스, 배달의 민족, 배달음식, 떡볶이, 튀김, 오징어튀김, 순대, 오뎅, 토마토, 딸기, 사과, 귤, 오렌지, 콤부차, 홍차, 레몬티, 커피, 카누, 네스프레소, 캡슐커피, 식품 직구, 영양제, 비타민, 아이허브, 신용카드, 소액대출, 대출, 보험, 보험상담, 저축은행, 여성대출, 학자금대출, 대출계산기, 대출이자, 주부대출, 임플란트, 치아보험, 자동차 렌트, 제주도 렌트, 렌터카, 자동차, 승용차, 중고차, 자동차보험, 자동차사고, 청약주택, 청약통장, 정기예금, 적금, 주택정약, 아파트, 내집마련, 빌라, 30평대, 부동산, 소형아파트, 치아, 어금니, 송곳니, 법률상담, 모기지론, 대학 편입, 학사편입, 대학교, 웹호스팅, 클라우드, 보안솔루션, 홈페이지, 앱제작, 동영상제작, 영상편집, 기부, donate,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세계구호,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전문자격증, 자격증, 학원, 사이버대학교, 학사, 학위취득, 학점은행제, 토익, 영어, 외국어, 통역, 번역, 동시통역
[면책공고] 솜글 블로그 자료 이용 안내

이 글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