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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이탈리아 여행 URL 복사

[이탈리아] 피렌체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17. 1. 20. by 솜글
이탈리아 여행을 앞두고 고민하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들입니다. 한국어 인터넷에서 모은 것들과 외국(영어 또는 이탈리아어) 사이트에서 번역해 모은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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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Firenze

로마 북서쪽 233km, 아르노 강의 양안(兩岸), 구릉과 선상지상에 있다. 근교의 아르노 강 연변의 저지는 신흥공업지대로 상공업의 중심을 이룬다. 근대적인 대도시로서 아르노강 연변의 교통로와 아펜니노 산맥을 넘는 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하다.

피렌체의 역사는 기원전 10세기 무렵의 취락 ‘빌라노바’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로 발전한 것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시작되었는데, 특히 로마에서부터 뻗어오는 카시아 가도(街道)의 중심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당시에 계획적으로 건설된 부분은 현재의 시가 중심부 지역으로 베키오 다리의 우측 지역에 해당된다.
제정 시대에는 토스카나·움브리아 지방의 중심이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 하에서는 백작령의 중심이 되었다. 12세기 전반에 코무네로서 독립하고 서쪽 보루고 지역을 병합해서 발전했다. 12세기 무렵부터 산업, 특히 모직물공업이 발전하여 많은 직물상인이나 귀금속 상인이 조합을 만들어 경제적으로 번영했고 유럽 상공업·금융업의 중심이 되었다. 13세기에는 교황당(敎皇黨:겔프)과 황제당(皇帝黨:기벨린)과의 싸움이 피렌체 시뿐만 아니라 토스카나 전 지방, 나아가 이탈리아를 휩쓸었는데, 이때 피렌체는 피사 등의 인근도시를 지배하여 강대한 공화국이 되었다. 1300년 피렌체는 인구 10만 명의 대도시이자 산업과 문화면에서 이탈리아의 중심이었다. 피렌체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과학자,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는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5세기 초부터는 메디치(Medici) 가문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는데, 코시모와 그의 손자인 대(大)로렌초(Lorenzo di Piero de' Medici, 1449~1492)는 실질적으로 메디치 가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그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했다. 15세기 말부터 메디치 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어 피렌체는 토스카나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예술가들과 학자들을 믿고 지원해 주었던 메디치 가와 상인 조합인 길드가 없었다면 오늘날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질병이 유행하고 인구가 감소해 경제까지 쇠퇴했고 19세기 초가 되면 인구가 10만 이하가 된다. 1859년 토스카나 공국이 훗날 이탈리아 왕국이 되는 사르데냐(Sardegna) 왕국에 병합되었고, 1865년부터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격심한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다.
전통적으로 가죽 제품 공업이 유명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13∼15세기의 예술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시정의 중심이었던 시뇨리아 궁전을 비롯해 우치피 궁전(미술관), 독특한 고딕 양식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교회, 조토의 벽화 등으로 유명한 산타 크로체 교회, 도나텔로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산 로렌초 교회 등이 있는 시가지 중심부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과도 같다. 한때 메디치 가의 저택이었던 피티 궁전,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이름 높은 아카데미아 미술관, 바르젤로 미술관으로 알려진 국립 미술관,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산마르코 미술관 등도 유명하다. 또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종합대학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기관 ·연구기관이 모여 있다. 1966년 가을에는 아르노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우피치 궁전 등 시가의 중심부가 침수되어 귀중한 문화재가 큰 손실을 입기도 했다. 피렌체 시와 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영어로는 플로렌스(Florence)라고 한다.

그라치에 다리 Ponte alle Grazie

‘Ponte alle Grazie’를 우리말로 옮기면 ‘감사의 다리’이다. 여기서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감사를 뜻한다. 유명한 베키오 다리 바로 옆에 있다 보니 여행책사에서 크게 다루지 않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라치에 다리는 바로 옆의 베키오 다리처럼 오랜 역사나 다리 위의 건물들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고풍스러운 피렌체의 분위기와는 달리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라치에 다리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본래 최초의 그라치에 다리는 1227년에 ‘루바콘테(Rubaconte, podestà Rubaconte da Mandello)’라 불리던 유명한 다리였는데, 이 다리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새롭게 다시 지은 것이 현재의 그라치에 다리이다. 루바콘테에도 베키오 다리처럼 14세기 중반에 증축되면서 다리 위 건물들을 갖고 있었는데, 이 건물들은 1876년 트램이 지나다닐 철로를 놓는 과정에서 철거되고 말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른 1944년 8월, 무려 7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루바콘테는 나치 군의 폭탄으로 파괴되었다.
1945년 종전 후 새로이 다리를 짓기 위해 공모전이 열렸는데 1946년 지오반니 미첼루치(Giovanni Michelucci) 등이 제출한 디자인이 채택되어 지금의 새로운 다리가 건설되기 시작해 1957년 개통했다. 이것이 지금의 그라치에 다리이다.

미켈란젤로 광장 Piazzale Michelangelo

피티 궁전 동쪽의 언덕 위에 자리한 광장이다. 1871년 조성되었으며, 광장 중앙에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다비드」의 복제품이 있다. 수많은 계단을 10분 정도 올라가면 아름다운 피렌체의 전경, 즉 아르노강과 그 위를 지나는 유서 깊은 베키오 다리, 붉은 지붕으로 가득한 피렌체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특히 야경이 아름답기 때문에 해가 질 무렵 광장에 올라도 좋다.
피렌체의 하루를 마감하려는 사람들은 이곳으로 몰려든다. 광장 옆 계단에 걸터앉은 사람들 앞에 거리의 악사들의 음악이 깔리고 아이들은 뛰어 논다.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아 그림을 판매하는 화가들도 여럿 있다. 음악 연주가 흐르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석양부터 밤까지 두오모 광장과 다리 너머 시가지를 바라보노라면 피렌체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다.

베키오 다리 Ponte Vecchio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 강을 남북으로 이어 주는 여러 다리 중 가장 유명한 다리이다. 14세기에 건설되었으며 여러 구간으로 이루어진 다리 중에서는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베키오 다리라는 이름 자체가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베키오 다리는 처음부터 상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장소였는데, 그 큰 이유는 이곳에 가게를 차리면 세금 면제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까지 주로 식품을 파는 노점, 특히 푸줏간 노점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코시모 데 메디치가 1565년 조르조 바사리에게 다리 위쪽으로 베키오 궁전과 피티 궁전을 연결하는 통로(코리도이오 바사리아노)를 만들어 두 궁전을 오가는 동안 평민들과 뒤섞이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는 바람에 냄새를 풍기는 푸줏간들은 1593년 쫓겨났다. 대신 좀 더 고급스러운 업종인 금 세공인과 귀금속 상인들이 다리 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종류의 상점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피렌체 출신의 가장 유명한 금 세공인인 벤베누토 첼리니의 기념비가 서 있어 그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베키오 다리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난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오른쪽 그림 : 영국 헨리 홀리데이(Henry Holiday, 1839~1927)의 작품). 1283년 5월 1일 베아트리체는 다른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단테를 보고는 처음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단테는 그 당시의 감동을 자신의 글 「새로운 인생」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숙한 태도로 그녀는 나에게 인사를 했고, 그 순간 나는 지고의 행복을 본 듯했다.”. 이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 이 다리에서 피렌체의 연인들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그 증표로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강물에 버리거나 다리에 자물쇠를 달곤 했다. 현재는 피렌체 시에서 다리가 손상될 것을 우려해 이와 같은 행위를 금지하고 어길 시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때 폭격으로 아르노 강의 많은 다리가 파괴되었지만 베키오 다리만은 지금도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1944년 8월 독일군이 이 도시에서 퇴각할 때 피렌체에 있는 다른 모든 다리를 파괴하면서도 이 다리만은 남겨두라는, 놀라우리만큼 자비로운 명령을 내린 덕분이다. 멀리에 보이는 산타 트리니타 다리(Ponte St. Trinita)나 그라치에 다리(Ponte alle Grazie)는 전쟁 때 폭격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 Galleria degli Uffizi

본래 16세기 중반에 피렌체의 대공이었던 메디치 가의 코시모 1세(Cosimo I de’ Medici)의 계획 아래 착공된 궁전으로 당대의 유명 화가이며 건축가였던 바자리(Giorgio Vasari, 1511~1574)와 그의 제자들이 건축과 벽면 장식을 맡았다. 코시모 1세의 아들 프란치스코(Francisco de’ Medici)가 집권하던 1581년에 완공돼 이후 메디치 가의 공무 집행실로 주로 사용되었다. ‘우피치(Uffizi)’는 이탈리아 어로 집무실(Office)이라는 뜻이다. 두 채의 궁전과 이를 잇는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메디치 가의 마지막 상속녀 안나 마리아 루이자(Anna Maria Luisa de'Medici)가 기증해 미술관이 된 후 르네상스 회화 컬렉션으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술관이 되었다. 소장품 약 2천5백 점, 연 관람객 규모는 2010년 기준으로 약 165만 명이다.
궁의 구조는 말발굽 모양으로 두 건축물과 그 사이를 잇는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시뇨리아 궁전과 베키오 궁전 사이에 아르노 강이 흐르고 강 위에는 두 궁을 연결해주는 바자리 회랑(Vassari Corridor)이 있는 구조로, 집과 집무실을 회랑을 통해 오가며 생활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메디치 가는 우피치 궁을 지을 당시부터 건물의 3층에 예술품을 수집·전시할 수 있는 방들을 배치했다.
우피치 미술관은 이탈리아의 통일 후 국립미술관이 되었다. 1800년에 소장하고 있던 조각 작품들이 일부를 제외하고 국립 바르젤로 미술관과 국립 고고미술관으로 이관되었으며, 우피치에는 회화 작품들과 고문서, 일부 조각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는 3층에 걸쳐 45개의 전시실이 있으며 회화 작품들의 컬렉션이 우수하다. 13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근대적인 미술 작품 배치의 기본을 확립한 미술관으로 평가된다. 또 최초로 미술 작품에 이름표를 달기 시작한 미술관이다. 작품들은 연대순 배치를 원칙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 컬렉션이 매우 유명하다. 이탈리아 외에도 프랑스, 네덜란드, 독인, 벨기에 화가들의 작품들을 모은 해외 컬렉션 역시 수준급으로 알려져 있다.
회화 이외에도 로마 시대와 16세기의 조각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우피치에 있는 세 개의 회랑(Corridors)을 따라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건축가 바자리가 우파치 궁을 지을 때 일부 훼손한 피에르 셰라지오 교회(Church of S. Pier Scheraggio)의 로마네스크 양식 유물이 최근 복원되었고, 초기 르네상스의 사실파 화가 카스타뇨의 프레스코 벽화, 「유명 인사들(Famous Men)」을 감상할 수 있다. 1층의 주요 소장품은 고문서들이다. 2층에서는 17세기 레오폴드 데 메디치 추기경 때부터 수집하기 시작한 풍성한 판화와 소묘 작품들을 만날 수 있고, 3층에는 다양한 회화 작품들을 전시한다. 1993년 테러리스트가 폭탄을 던져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그 후 중요한 부분을 개조했다.
워낙 관람객이 많아 몇 십 명 단위로 입장을 허용하니 관람하려면 일찍 가거나 미리 예매하는 것이 좋다. 화장실은 3개가 있는데, 출구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2층의 화장실은 비교적 한산하다.

주소 : Piazzale degli Uffizi, 6
입장료 : 12.5€(+예약비 4€)
운영시간 : 월~일 08:15-18:30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이 접해 있는 광장으로 13~14세기에 조성되었으며, 중세 이후 지금까지 시청사로 쓰이고 있는 베키오 궁전과 더불어 수세기 동안 피렌체의 정치·사회적 중심지였으며, 현재는 카페들이 늘어선 휴식처이다. 광장 부근 베키오 궁전에 있는 종루의 종은 시민들을 공공집회에 불러 모으는 데 사용되었다. 넵투누스 분수 옆의 돌바닥에 박혀 있는 둥근 금속은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가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다 화형에 처해진 곳을 표시한 것이다. 광장 주변에는 젤라토를 파는 가게, 와인 바, 역사 깊은 카페 등이 늘어서 있으며 광장 동쪽의 산타 크로체 교회 주변은 피혁 제품 상점이 모여 있다.

로지아 데이 란치 Loggia dei Lanzi

‘개인 군대’라는 뜻의 ‘란치’에서 유래한 곳으로 과거 독일 용병이 대기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로지아’는 한 쪽 또는 그 이상의 면이 트여 있는 방이나 복도를 말한다. 이곳은 한때 정부행사를 진행할 때 시 귀족들이 휴식하는 장소로 쓰였는데, 건물 옥상에 메디치 가문의 왕자들이 광장의 행사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테라스를 증축했다. 15세기 중반부터는 노인들이 시간을 보내고 담소를 나누는 장소로 사랑받았다.
현재는 멋진 조각상들이 가득한 옥외 조각 갤러리로 변신해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인기 관광지이자 휴식처가 됐다. 회랑에 있는 조각상은 모두 복제품인데, 특히 겁탈 당하는 사비나 여인상은 사방에서 볼 수 있게 제작한 최초의 르네상스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베키오 궁전 Palazzo Vecchio

현재 시 청사로 쓰이는 건물이다. 처음에는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지도자들의 궁전)라 불렸던 이 육중한 도시 건축물은 1299년 시 의회의 명에 따라 지어졌는데, 도시 지도자들이 회의를 열 만한 적당한 장소로 삼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피렌체 주요 길드의 대표자들이었던 이 지도자들은 당시 이 도시의 주도적인 지배 세력을 형성했는데, 이 시대를 특징짓는 내부 분쟁과 지역주의를 반영하듯 베키오 궁전은 반대 세력인 우베르티 가로부터 몰수한 땅에 세워졌다. 그리고는 내부의 라이벌을 제압할 수 있는 시 정부의 힘을 건축으로 표현하고 있다. 피렌체 두오모와 산타 크로체 성당을 짓는 데에 참여해 명성이 드높았던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건축했다.
‘베키오 궁전’은 오래된 궁전이라는 뜻으로, 본래 고대 로마 유적이 있던 자리에 지었다. 오래된 탑 하나가 파사드 안쪽에 중심을 벗어난 위치에 통합되었고, 주변의 광장 자체도 대칭적인 구도가 아니다. 아르놀포는 탑 꼭대기를 피렌체의 백합을 들고 있는 상징적인 사자, 즉 ‘마르초코’로 마무리했다. 마르초코라는 단어는 아마, 피렌체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성 요한을 수호성인으로 지정하기 이전, 고대에 이 도시의 보호자였던 마르스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18세기까지는 궁전 뒤편에 사자 한 쌍이 우리에 갇힌 채 놓여 있었다고 한다.
매우 거친 러스티케이션의 피에타 포르테(pietra forte, ‘강한 돌’이라는 의미)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높은 창문, 눈에 띄는 시의 문장, 그 위에 총안을 설치한 돌출한 발코니는 마치 군대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 종탑 꼭대기에는 건물 전체의 형태를 미니어처로 제작해 놓은 것 같은 종루가 있으며, 공공 공간과 정부 청사의 기능이 교차하는 추축과도 같다. 정청 앞에는 높은 석조 연단이 있어 이곳에서 정부 지침을 시민들에게 공표한다. 방어용 외벽 뒤로는 세련된 르네상스 풍 궁전이 메디치 궁의 그것을 닮은 아케이드 정원을 중심으로 서 있다. 이는 1450년경 점차 피렌체 시정에 영향력이 커지게 된 메디치 가가 주도한 재정비 덕분이다. 메디치 가는 자신들이 뽑은 건축가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1396~1472년)가 건축 감독을 맡도록 하였다. 안뜰 너머에는 각종 정부 사무실이 미로처럼 잇달아 자리 잡고 있었지만 1500년대 중반 피렌체의 통치자가 된 메디치 가의 궁전으로 쓰이기에 알맞도록 탈바꿈했다. 실내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축 공간은 살라 데이 친퀘첸토(500인의 방)로 메디치 가가 집권하기 전, 피렌체 공화국 말기에 시정을 담당했던 500인 위원회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새로운 궁전은 1565년까지 피렌체 시의 중요한 정치적 모임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었지만, 이후 우피치와 피티 궁전에 밀려 그 지위를 조금씩 잃어가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통일된 1872년 들어 시 의회가 들어서는 곳이라는 본연의 목적으로 돌아와 오늘날까지도 그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대중에게도 문이 열려 있어 예술 작품들과 역사 속에서 이곳을 차지했던 이들이 거주했던 개인 구역을 전시해 놓고 있다.

주소 : Piazza della Signoria
입장료 : 무료(단 박물관과 탑은 각 10€, 통합권 14€)
운영시간 : 매일 09:00-23:00

산타 크로체 성당 Chiesa di Santa Croce

유럽 전역에서 성행한 고딕 양식도 이탈리아에서는 충분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고유의 오랜 전통과 맑은 풍토가 워낙 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고딕 건축을 찾자면, 극히 적은 예를 제외하면 이탈리아 특유의 성향과 고딕 양식이 결합한 절충적 작품 약간만을 볼 수 있다. 산타 크로체 성당도 이러한 과도기의 상황 속에서 생긴 건축의 하나이다. N.피사노의 제자인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 1240?~1310 이전)의 설계를 바탕으로 1294년에 탁발승단의 프란체스코회수도원 성당으로 착공했으며, 1442년에 완공되었으나 그 동안에 당초의 설계는 계속 변경되었고 말기에는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37~1446)도 참여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바실리카를 연상케 하는 T자형의 간결한 플랜에, 폭이 넓은 바닥과 상승감이 없는 낮은 천장 등 모든 면에 걸쳐 고딕 양식과 대립되는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열주의 들보 길이와 측랑의 공간을 구분 짓는 첨두 아치, 또는 제실의 구성 등에 고딕 건축의 특징을 약간 발견할 수는 있다. 지오토의 벽화 「두 요한」과 「성 프란체스코전」의 일부가 남아 있다.
내부 지하에는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 피렌체 출신 유명 인사의 무덤이 있다. 그러나 피렌체의 대표 시인 단테는 기념비만 있는데, 그가 피렌체의 당파 싸움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당한 후 훗날 라벤나에 묻혔기 때문이다.

주소 : Piazza Santa Croce, 16
입장료 : 6€
운영시간 : 월~토 09:00-17:30, 일 13:00-17:30

파치 예배당 Cappella Pazzi

산타 크로체 성당의 회랑(클로이스터)에 있는 예배당이다. 피렌체의 유력자 안드레아 파치(Andrea Pazzi)를 위해 브루넬레스키가 1430년에 설계했으나 완성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피렌체 두오모의 시공 기간과 시기상으로 겹친다. 중앙의 소박한 돔이 있고 정면으로 시선을 유도하며 축대위에 가는 기둥열이 동선을 이끌고 있다. 두오모만큼의 묵직함은 없으나 아치와 돔, 터널볼트 등을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다소 발랄하게 유도한 개성 있는 예배당이다.

오르산미켈레 Orsanmichele

오르산미켈레는 ‘산 미켈레(미카엘)의 텃밭’이라는 뜻인데, 본래 산 미켈레 수도원 텃밭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1337년에 곡물 시장으로 쓰기 위해 지은 건물이었지만 이곳에 걸려 있던 성모화가 기도에 응답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1380~1404년에 피렌체의 강력한 상공업 길드들을 위한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정사각형 건물의 일층 내부에는 기존의 곡물 시장의 로지아를 형성하던 13세기 아치들이 있는데, 2층은 사무소로 운영되었고 3층은 기근과 전쟁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피렌체 시 곡물 창고였다.

주소 : Piazza Santa Croce, 16
입장료 : 6€
운영시간 : 매일 10:00-17:00

오르산미켈레의 수호성인상

14세기 후반 피렌체의 상공업 길드들이 도시정부로부터 각 길드의 수호성인의 상을 제작해 성당의 파사드를 장식할 것을 의뢰 받아 세우기 시작한 것들이다. 오르산미켈레의 조상들은 강렬한 봉헌 의욕과 피렌체 무역의 자존심이 담긴 유물이며, 훌륭한 예술품이 종종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출현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기념물과도 같다. 각 길드들은 피렌체 중심부 거리에서의 공공 전시를 의식하며 경쟁 길드를 능가하기 위해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조각을 의뢰했다. 고용된 예술가가 누구인가, 투입된 재료들이 얼마나 값비싼가(특히 청동)는 당시 이 장소가 얼마나 중요한 상징성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지표이다.
현재 모든 원본들은 부식과 같은 물리적 손상이나 반달리즘(문화유산이나 예술, 공공시설, 자연경관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복제품들로 대체됐는데, 진본은 대부분 오르산미켈레 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박물관은 2007년부터 무기한 폐관 중이다. 도나텔로가 제작한 두 점의 조각상 원본들은 각각 바르젤로 국립미술관, 산타 크로체 성당 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단테의 생가 Casa di Dante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중세를 대표하는 시인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가 태어난 집이다. 단테는 시인이자 예언자로 「신곡(Divina Commedia)」이라는 불멸의 거작을 남긴 지식인이자 신앙인으로, 중세의 정신을 종합하여 르네상스의 선구자가 되고 인류 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한 인물이다. 불에 탔던 것을 복원한 작은 박물관이 있고 13세기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단테의 위대한 명성과 업적에 비해 다소 초라하며, 이곳에 단체의 생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은 토르소를 만날 수 있다. 두오모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만 비좁은 골목길이 서로 얽혀 있어 쉽게 찾기는 어렵다. 다소 어둡고 칙칙한 그의 집 부근에는 ‘단테의 교회’라 불리는 성 마르게리타 교회가 자리하는데, 이곳에 단테의 연인 베아트리체와 그의 현실 여인 젬마가 한 곳에 누워 있다고 한다.

주소 : Via Dante Alighieri, 14
입장료 : 4€
운영시간 : 매일 10:00-17:00

단테와 피렌체

피렌체에는 베키오 다리 외에도 단테를 추억하는 장소가 제법 있다. 우선 산타 크로체 앞에는 단테의 상이 서 있다. 단테 생가 근처에 위치한 산타 마르게리타 성당은 일명 ‘단테의 성당’으로 불리는데, 이곳은 단테가 결혼식을 올린 성당이다. 피렌체의 심장이자 상징인 피렌체 두오모(정확히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는 도메니코 디 미첼리노가 그린 「단테와 신곡」이 걸려 있고, 우피치 미술관에도 바자리가 만든 단테 입상이 미술관 1층 기둥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피렌체 거리 곳곳에는 「신곡」에서 인용한 글귀를 새긴 현판이 서른 개나 걸려 있다고 한다.
마치 도시 전체가 ‘단테는 피렌체의 거장’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이 모든 흔적들은 소를 잃고 난 뒤 고친 외양간들이다. 우선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단테의 무덤은 단테의 시신이 없는 텅 빈 가짜 무덤이다. 생가 또한 당대 남아있는 얼마 되지 않은 기록과 증언을 유추하여 단테가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집을 골라 박물관으로 꾸민 것이고, 미첼리노의 그림은 단테가 죽고 무려 200년이 지난 다음에 그린 작품이다.
오히려 피렌체는 생전의 단테를 배척했고 좌절을 안겨주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가 그러했듯 피렌체 또한 신성로마황제 추종자와 교황 추종자 사이의 대립이 치열했는데, 이러한 당파 간 싸움에 휘말린 단테는 결국 35년이나 살던 고향에서 추방당해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추방자에 대한 국가의 태도가 그리 성실할 리가 만무하다. 그에 관한 피렌체의 기록이 허술한 탓에 우리는 오늘날 단테의 생가는커녕 생일조차 알 수가 없다. 다만 “1300년, 인생을 정확히 절반을 살아온 서른다섯 살에 상상의 지적 여행을 출발했다”라고 한 단테의 언급을 바탕으로 그가 126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단테가 태어날 당시 이미 몰락 상태에 있던 단테의 가문은 아버지가 고리대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아버지마저 사망하면서 장남이었던 단테는 10대 시절 이미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베아트리체를 짝사랑한 단테

토스카나 지방에서는 해마다 5월 1일 봄이 오는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피렌체의 유력자인 폴코 포르티나리 또한 사람들을 초대해 봄 잔치를 벌였는데, 여기서 단테는 포르티나리의 딸 베아트리체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단테 나이 아홉 살, 베아트리체는 여덟 살이었다. 단테 모든 문학 작품이 베아트리체에 대한 지고한 사랑이 동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예술가들의 창조력을 증폭시키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의미에서,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둘도 없는 뮤즈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테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 아홉 살의 단테는 수시로 베아트리체를 쫓아다녔고,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매일 아침 기도를 올리는 산타 마르게리타 교회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평생 이렇다 할 대화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베키오 다리의 일화가 부각된다. 사랑의 고백도 아니고, 그저 자기에게 인사말을 건네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어오른 벅찬 감동은 위대한 문학으로 남았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에게 시까지 지어다 바쳤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베아트리체는 스물한 살에 결혼했는데, 단테는 열두 살 때 이미 집안에서 맺어준 두 살 연하의 젬마와 조혼한 유부남이었다. 젬마와 베아트리체는 죽은 뒤 산타 마르게리타 성당에 나란히 안치됐다.

연인의 죽음과 더불어 찾아온 ‘새로운 인생’

1290년 봄, 베아트리체의 죽음은 단테의 인생에 커다란 충격이자 첫 번째 전환점으로 다가왔다. 단체는 이에 1274년 5월 잔치에서의 첫 만남에서부터 1290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베아트리체와 관련된 소소한 사건과 생각들을 적어 1293년 단테 알리기에리의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을 낸다. 이후 단테는 독서와 정치 활동에 몰입했다. 라틴어에 능통했던 그는 조서들을 숙독하는 한편 공직 생활을 하며 신흥 상인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교황을 적대시하는 당원의 일원으로 피렌체의 권익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생각하는 바를 행동에 옮기는 실천하는 운동가였다. 하지만 교황 추종자들의 입지가 거세지면서 1370년, 서른다섯 살의 나이에 단테는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 두 번째 전환기에 단테가 고향을 잃고 떠돌아다니며 집필한 저작이 「신곡(神曲)」이다. 서곡과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 편 등 모두 1백여 곡(canto)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작품은 행수만 무려 14,233행에 달하는 장편 대 서사시다. 본래 단테가 붙인 제목은 ‘코메디아(Comedia)’, 즉 ‘희극’으로, “절망에서 시작되어 희망으로 끝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런 제목을 붙였다고 친히 주를 달아놓았다.
줄거리는 알려진 대로 저자의 환상 여행기이다. 책속에서 단테는 기독교적 사상에 기반하여 평소 숙독했던 로마시대의 사상가 베르길리우스를 가이드로 삼아 부활절 전후 7일간에 걸쳐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며 실존 인물들을 만난다. 교황을 비롯한 자신의 적들은 모두 ‘지옥’에 던져진 반면, 친구와 스승은 ‘연옥’에, 그리고 베아트리체는 ‘천국’에 살고 있다. 실명이 거론되는 만큼 「신곡」이 끼친 사회적·정치적 반향은 대단했다. 이 대 서사시는 개인의 내적 성장기임은 물론 당대 피렌체의 문화에 대한 시적 탐구이자, 연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또 다른 헌정시이기도 하다.

중세의 종결자, 단테

단테가 중세의 종결자라는 이유는 바로 베아트리체에 대한 연모 때문이다. 기독교적 보수성이 극에 달해 있던 중세시대에 사랑과 같은 감정은 직접 표현할 수 없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단테는 「신곡」을 통해 기독교 세상의 천국과 지옥을 여행하는 와중에 끊임없이 사랑을 표현한다. 때문에 베아트리체야 어떤 감정이었건 이 여인의 존재는 확실히 역사적으로 기릴 가치가 있긴 하다.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과 감동은 결과적으로는 인류에게는 커다란 선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 단테는 위대한 문학을 생산했으며, 종국에는 “암흑의 시대”라 불리던 중세가 종식된 것이다.
결국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한 단테는 1321년 마지막 망명지였던 토스카나 지방의 라벤나에서 환갑을 넘기지 못한 채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피렌체가 단테를 인식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뒤의 일이었다.

칼차이우올리 거리 Via dei Calzaiuoli

두오모와 시뇨리아 광장을 연결하는 거리로 피렌체의 대표적인 쇼핑가다. 유명 브랜드 가게와 함께 가죽 공예점, 직물 공예점 등 전통 있는 상점들이 모여 있다. 피렌체 전통 피혁 제품과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직접 구경할 수 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피렌체 두오모는 세례당(바티스테로 디 산 조반니)과 종탑을 비롯한 건축물군의 일부이다. 세 건물 모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색깔 있는 대리석의 가로 세로 띠로 시각적으로 이어져 있다. 13세기 말, 산타 레파라타 대성당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피렌체 정부는 피사와 시에나의 그것을 뛰어넘는 새 두오모를 세우기로 결정한다. 새 교회 건설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지오토)가 시작했는데,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평생을 건축에 몰두한다. 공사 도중에 그가 죽자 지오토에 이어 제자인 피사노가 공사를 인계받아 그 동안 지오토가 새로 계획했던 정면 오른쪽의 대종탑을 거의 완성하는 등 흑사병으로 죽을 때까지 공사에 매달렸다.
이후 수많은 건축가들이 신속히 그 뒤를 이어 종탑을 완성하고 앱스와 측면 예배당을 확장하였으며 네이브 공사를 마쳤다. 여섯 개의 측면 스테인드글라스 창 역시 추가되었는데, 그중 트랜셉트에 가까운 네 개만이 빛을 통과시킨다. 정교하게 장식한 외관과 엄격하리만치 간소한 실내는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 당시의 대성당은 보통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챈슬 위에 쿠폴라(돔)를 올리는 엄청난 작업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년)에게 맡겨졌는데, 그는 판테온의 이중 벽 원형 돔에서 영감을 얻어 나무와 벽돌을 주재료로 하는 계획을 세웠다. 지붕 대신 드럼 위에 수평 지지대를 놓고 팔각형의 이중 벽 쿠폴라에 올리는 방식이었다. 이 혁명적인 설계 덕분에 더 이상 스캐폴딩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이 탄생하였다. 두오모가 마침내 완공되었을 때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회였다. 현재는 브루넬레스키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이 성당의 힘찬 외관은 그야말로 피렌체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또한 건물 전체를 덮는 쿠폴라의 프로포션은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의 이상이었던 ‘쿠폴라 중심 구성’의 선구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깊다. 또한 내부에 있는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는 예술의 도시 피렌체의 대성당에 어울리게 부속 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조각과 회화가 보존되어 있으며, 성당 지하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두오모를 짓기 전 이 자리에 있던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흔적들과 초기 기독교 시대의 포장도로 등이 보존돼 있다.

주소 : Piazza Duomo, 50122
입장료 : 종탑 등 포함 10€
운영시간 : 매일 08:30-17:30

지오토의 종탑 Campanile di Giotto

피렌체 출신 화가 지오토와 그의 제자 피사노가 함께 작업해 14세기 말에 완성한 종탑이다. 두오모와 마찬가지로 외관은 장미색, 흰색, 녹색의 3색 대리석을 이용해 정교하게 만들었다. 종탑 최하단에 장식되어 있는 붉은색 패널 안에 있는 부조는 피사노의 작품으로 현재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원작은 두오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414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 높이 84m의 꼭대기에 도달하면 두오모의 웅장한 모습과 피렌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벽에 낙서하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최근에는 종탑으로 올라가는 벽면에 디지털 낙서장이 생겼다.

산 조반니 세례당 Battistero di San Giovanni

대성당의 부속 세례당으로 1128년까지 피렌체의 대성당이었으나 현재의 대성당이 건립된 뒤에 세례당이 되었다. 직경 25.6m의 팔각형 위에 대원개(쿠폴라)를 올려 지붕을 덮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건축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고대 말기 세례당이 있던 자리에 지었고, 1202년 서벽을 넓혀서 ‘스카르셀라’라고하는 후당을 건립했으며, 외벽은 백색과 녹색의 대리석에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했다.
산 조반니 세례당은 건물의 내외가 모두 고대를 모방하고 있어 르네상스의 흔적이 보인다. 내부 장식은 「최후의 심판」을 대구도로 9계단의 천사들,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부터 대홍수까지의 이야기·요셉의 이야기·「그리스도전」·「세례 요한전」을 나타낸 천장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다. 고대를 모방한 원주로서 장식되어 쿠폴라와 함께 고대 부흥을 꾀한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후당에 가면 역시 천장에 모자이크 장식이 있으며, 도나텔로 작품인 「발다사레 코샤의 묘비」(1425~27), 「막달라의 마리아」 목상(1455~56?)도 볼 수 있다.

산 조반니 세례당에 난 세 개의 문

세례당 남·북·동쪽에는 훗날 각각의 부조를 더한 도금 청동문들이 있다.
남쪽 문은 안드레아 피사노가 만든 것으로 세례자 성 요한의 삶을 보여 준다.
북쪽 문과 동쪽 문은 기베르티가 만든 것이다. 북쪽 문은 신약 이야기 등을 다루었다.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알려진 동쪽 문은 1404~24년에 지어졌으며 예수의 삶을 나타냈는데,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며 극찬했다고 하여 천국의 문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북쪽 문이었지만 너무 아름다워 두오모를 바라보는 동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기베르티가 28년 간 제작한 것으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에 방한했을 때 경복궁 고궁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었다. 진품은 노후와 훼손 때문에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 있는 건 복제품이다.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Museo dell'Opera del Duomo

두오모에 있던 미술품들과 두오모 건축 관련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기베르티가 제작한 성 유물 상자, 로렌초의 문(Lorenzo Door),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 상(Santa Maria Maddalena Penitente),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 등을 볼 수 있다.

주소 : Piazza del Duomo, 9
입장료 : 6€
운영시간 : 월~토 09:00-19:30, 일 09:00-13:30

산 로렌초 성당 Basilica di San Lorenzo

일찍이 393년에 세워졌던 건물을 개조해 1421~1426년 브루넬레스키가 메디치 가를 위해 다시 지었다. 오래된 만큼 단순한 외관이지만, 내부는 지극히 화려한 장식과 예술품으로 가득하다. 피렌체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 성당으로 메디치 가 사람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 성당의 청동 설교단은 도나텔로의 유작으로 유명하며, 왼쪽에 위치한 옛 성구실은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가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교회 2층에는 메디치 가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1만 권에 이르는 메디치가 고문서를 모아두기 위해 설립한 라우렌치아나 도서관(Biblioteca Laurenziana)이 있다. 1523년 착공해 1571년 완성한 이 도서관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하고 건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소 : Piazza di San Lorenzo, 9
입장료 : 4.5€
운영시간 : 월~토 10:00-17:00(도서관은 13:30까지) / 휴무 : 일요일

메디치 예배당 Cappella Medicea

메디치 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와 조카인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후의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명으로, 미켈란젤로가 산 로렌초 성당의 아프시스 남쪽에 만든 예배당이다. 신 성구실(新聖具室)이라고도 부른다.
고대풍 모티브로 장식한 실내에 우르비노 공인 로렌초와 누무르 공 줄리아노 두 사람의 벽면 묘비가 있으며 여러 가지 알레고리로 장식돼 있다. 예배당은 1525년에 거의 완성했고, 조각 장식들은 1536년경에 제작됐다. 두 공작상은 ‘생각하는 사람’과 ‘행동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신플라톤주의 사상의 반영을 엿볼 수 있다. 두 사람의 묘비 사이에는 높이 2.26m의 성모자상이 놓여 있는데 미켈란젤로의 50대 후반의 걸작으로 꼽힌다. 1970년대 중반에 예배당 지하 복도에서 미켈란젤로와 그 제자의 것으로 보이는 소묘 50여 점 발견됐다.

주소 : Piazza di Madonna degli Aldobrandini, 6
입장료 : 11€
운영시간 : 화~토 08:15-16:50 / 휴무 : 일·월요일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Palazzo Medici Riccardi

1444년부터 메디치 가문이 소유하다가 1659년에는 리카르디 가문이 소유했다. 현재는 피렌체 관광청 소유이고 2개의 방만 일반인에게 공개되며 벽화와 메디치 가문의 초상화를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소 : Via Camillo Cavour, 3
입장료 : 7€
운영시간 : 목~화 08:30-19:00

아카데미아 미술관 Galleria dell'Accademia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상이자 미켈란젤로의 최고 걸작인 「다비드」의 원본을 소장한 미술관이다. 미술학도들에게 피렌체의 회화와 조각을 제대로 공부시키기 위해 1784년에 설립한 미술 학교인데,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지암볼로니아의 「겁탈당하는 사비나 여인」 조각상의 원본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다비드 상이 있는 홀까지 가는 좁고 기다란 복도 양쪽에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품인 「수염이 있는 노예」, 「잠에서 깬 노예」, 「젊은 노예」, 「아틀라스 노예」 등 4점의 노예상이 전시되어 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를 장식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팔레스트리나의 피에타」, 「성 마태오」 등 미켈란젤로의 주요 작품을 여러 점 감상할 수 있다. 회화로는 보티첼리 제자들이 제작한 「성모자와 성인들」, 기를란다요의 「성모자와 성 프란체스카, 막달라 마리아」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1501년 피렌체의 ‘공화국의 자유정신’을 표현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5m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피렌체는 작은 도시국가였고 강력한 적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따라서 공화국을 상징하면서 단합의 모티브가 될 수 있는 상징물을 원했다. 1504년 미켈란젤로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완성해 낸 「다비드」는 공화국 자유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에게 최고의 조각가라는 명성을 얻게 해준 작품이다.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를 이용해 2년에 걸쳐 제작했다고 한다.
다비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소년으로, 적군의 거인 장수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리고 승리한 후에 왕이 된 인물이다. 피렌체의 영주 메디치의 뒤를 이은 종교적 압제자 사보나롤라를 몰아낸 피렌체 시민들에게 다비드는 곧 ‘힘과 분노의 재현’을 상징했다. 이전에 제작된 베로키오와 도나텔로 등의 다비드 상이 골리앗의 머리를 발밑에 두고 손에 칼을 쥔 채 승리를 만끽하는 젊은이의 모습이었다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싸움 전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원래 시뇨리아 광장에 있었지만 훼손이 너무 심해 1807년부터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주소 : Via Ricasoli, 58/60, Firenze
입장료 : 11€
운영시간 : 화~일 08:15-18:50 / 휴무 : 월요일

피렌체 중앙시장 Mercato Centrale

일명 ‘도둑시장’으로도 불린다. 1874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피렌체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이다. 먹을거리뿐 아니라 다양한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으며, 특히 가죽 제품 상점으로 유명하다. 2014년 리노베이션해 깔끔하고 모던한 복합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으며, 오후면 문을 닫는 1층과 달리 2층에서는 늦은 밤까지 음식과 간단한 음료, 식재료를 판매한다. 중앙에는 각자 구매해 온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마련돼 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 Farmacia Santa Maria Novella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1221년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수도사들이 만든 약국에서 비롯된 화장품 브랜드이다. 공식 명칭은 ‘오피시나 프로푸모 파르마체우티카 디 산타 마리아 노벨라(Officina Profumo Parmaceutica di Santa Maria Novella)’인데, 이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있는 화장품 가게 겸 약국’이라는 뜻이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는 수도사들이 직접 재배한 약초로 만든 살균, 소독 효과가 있는 로즈 워터(Rose Water)를 비롯한 각종 민간 약품, 생활용품 등의 뛰어난 효능을 통해 초기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이후 ‘세계 최초의 약국’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피렌체 본점은 관광 명소가 됐다. 현재 수도사들이 400여 년 전 사용했던 원료와 전통적인 기법 그대로 향수, 에센스, 기초 페이스, 보디, 헤어 용품, 비누, 방향제 등의 화장품과 꿀, 티, 허브, 시럽, 초콜릿 등을 생산하며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주소 : Via della Scala 16
영업시간 : 매일 09:00-20:00
추천품목 : 재생크림(60€)
주문방법 : 입장 후 우측에서 종이 안내표 받기(한국어 있음) → 각 코너에서 제품 테스팅 → 구입을 원할 시 코너별 직원에서 얘기하면 플라스틱 카드를 기계에 넣어 품목 입력해 줌 → 반복 → 모두 입력하면 결제 후 실 제품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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