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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이탈리아 여행 URL 복사

[이탈리아] 로마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17. 1. 23. by 솜글
이탈리아 여행을 앞두고 고민하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들입니다. 한국어 인터넷에서 모은 것들과 외국(영어 또는 이탈리아어) 사이트에서 번역해 모은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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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Rome

이탈리아의 수도로 바티칸 시국(市國)이 있으며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건축과 미술이 현존하고 있는 도시이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 4월 21일 로물루스(Romulus, 로마라는 호칭은 여기에서 연유됨) 왕이 건설했다고 한다. 로마의 어원은 그리스 어로 ‘힘’과 관계있다고 하는데, 로물루스에서 기원했다는 설 외에도 ‘광장’을 뜻하는 ‘그로마(Groma)’가 변한 것이라는 학설, 에트루리아 어 ‘루몬(Rumon, 테베레 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여기서부터 도시가 발달했다고 보기도 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로마의 탄생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로마의 일곱 언덕 부근에 오지의 본거지로부터 나온 라티니(라텐) 인과 사비니 인들이 집단 부락을 이루고 이들이 점차 합쳐지면서였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그 무렵을 전후해서 토스카나 지방으로부터 남하해 온 에트루리아 인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들의 뛰어난 각종 기술을 배워 점차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러다가 기원전 509년, 마침내 에트루리아 계 최후의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확립했다. 이후 로마인은 라티움 일대를 장악, 난전 기원전 270년경에 이르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제압하고,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에서 완승을 거두어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기원전 148년경까지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했으며 뒤이어 이집트, 소아시아, 시리아 등을 수중에 넣고 갈리아, 이베리아, 브리타니아에도 세력을 뻗쳐서 고대 세계를 제패하는 대제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에트루스크와 그리스 문명, 고대 동방에서 꽃피웠던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아 공화정 시대와 제정 시대를 지나는 동안 광대한 지역에서 눈부신 업적들을 남겼다. 고대 로마 시는 각 시대의 대표적 공공 기념 건축물로 차 있었고 유적들은 오늘날까지 당시의 번영을 전한다.

그러나 4세기 초부터 로마는 제국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해 밀라노와 라벤나에게 정치적·경제적 중심을 빼앗기고, 이후에는 로마 가톨릭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15~16세기에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6~17세기에 현재 남아 있는 많은 궁전과 광장이 건설되었다. 교황의 도시 로마는 19세기 이래 공화주의 운동과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는데, 급기야 1871년 로마가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자 이에 반발한 교황이 바티칸 궁에 들어가 이탈리아 왕국과 대립하고 만다. 이 문제는 1929년 무솔리니와 교황 비오 11세 사이에 라테란 협정(Lateran Concordat)(오른쪽 사진)이 체결되고 바티칸 시국이 성립됨에 따라 해결되었다.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된 로마는 도시로서 급진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현재 로마는 그 발상지인 테베레 강 왼쪽 연안에 있는 7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구시가와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 만들어진 시벽 바깥쪽의 신시가지로 되어 있다. 로마는 현대 이탈리아 문화의 중심지이며, 오랜 역사를 가져 고대부터 바로크 시대까지의 많은 문화유산이 있는데 콜로세움, 성 베드로 성당 등 많은 유적이 있다. 로마는 소비 도시의 성격이 강해서 교외에 중소 규모의 공장이 있을 뿐이며, 관광업이 주요 산업이다. 경제적 기능은 북이탈리아에 집중되어 있고, 로마에는 정치적·행정적 기능이 집중되어 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로마는 유럽 문명의 요람으로 ‘영원의 도시’라 불리고 있다.

아벤티노의 열쇠구멍 Buco di Roma

로마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비공식적 나라로 영토 없이 건물만 존재하는 나라, 몰타기사단국이 있다. 제1차 십자군원정 이후 1080년 성지순례자들의 보호와 구호를 위한 목적으로 예루살렘과 로도스, 몰타 등지에 생겨난 종교기사단으로 템플기사단, 튜튼기사단과 더불어 유럽3대 기사단으로 불리리는 몰타기사단의 나라이다. 초기에는 성지 순례자들과 부상당한 기사들을 구호하기 위해 조직됐지만, 이슬람의 기독교 납치나 약탈이 심해지자 점차 전사적인 기사단의 성격도 띠게 된다. 십자군 전쟁 동안 많은 성지들이 함락되고, 결국 몰타기사단은 키프로스 섬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그곳에서 활동한다. 이후 템플기사단과 튜튼기사단 등 다른 종교 기사단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몰타기사단은 1309년 로도스 섬을 정복해 이곳에 병원을 세우는 등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독립국가로 탄생한다. 그러나 16세기 초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신성로마제국 카를5세에 의해 시칠리아 남단의 작은 섬 몰타로 다시 옮겨진다. 기사단은 이곳에서 주권까지 있는 나라로 다시 성장한다.

1789년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정복당해 또 다시 여러 지역을 떠돌게 되고, 끝까지 살아남은 기사단은 결국 19세기 초 세력이 많이 줄어든 상태로 1834년 로마에 정착한다. 이후 군사적 모습보다는 종교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활동과 전 세계에 퍼져있는 단원들이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몰타기사단이라는 명칭보다는성 요한기사단으로 더 많이 불리며, 오랜 시간 끊임없는 봉사·의료 활동의 노고를 인정받아 유엔총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외교사절뿐만 아니라 자국의 선박도 있으며, 많은 나라와 외교관계도 맺고 있다. 현재 약 30명의 신부와 3,000명 정도의 기사들로 이루어졌으며, 로마에 기사단의 본부가 있다.

아벤티노의 열쇠구멍은 바로 이 본부의 대문에 있는 열쇠구멍이다. 이 자그마한 구멍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펼쳐진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직경 2㎝의 작은 구멍을 통해서 3개의 국가가 보이기 때문이다. 터널처럼 아름답게 아치를 그리며 어울려 있는 정원은 몰타기사단국 소유의 정원이다. 첫 번째 나라이다. 그 뒤로 펼쳐진 소나무와 집들은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의 주택들이므로 두 번째 나라이다. 그리고 저 너머로 원근법을 무시한 채 그 높이와 크기의 위용을 뽐내고 있는 건물은 바티칸 시국 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쿠폴라이다. 이로서 세 번째 나라도 보인다. 그래서 한 구멍에 세 나라가 동시에 보이는 것이다. 이 방법이야 말로 가장 특별한 방법으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성 베드로 성당의 쿠폴라)을 보는 방법이 아닐까.

오렌지 정원 Giardino degli Aranci

로마 건국 신화에 나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중 레무스가 터로 썼다는 아벤티노 언덕에 조성돼 있다. 산책하기에 좋고 특히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Santa Maria in Cosmedin

로마에 있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바실리카 식 성당이다. 고대 로마에 시장이 있었던 장소에 지었으며 일부는 그 건축 재료를 재이용해 세웠다. 건축 시기는 4세기 이전, 혹은 6세기라고 하는 설이 엇갈린다. 8세기에 확대하고 측랑을 만들었으며, 다시 11~12세기에 복원해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을 지어 넣었고 내부는 8세기의 것을 그대로 두었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바닥이 인상적이다.

이 성당은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진 ‘진실의 입(La Bocca della Verita)’이 있는 교회이다. 진실의 입은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졌는데 본래 하수구 뚜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판에 해신 트리톤의 얼굴을 새긴 커다란 원반 형태로, 거짓말쟁이가 트리톤의 입에 손을 넣으면 트리톤의 입이 다물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 이 성당에는 발렌타인 데이의 유래인 성 발렌타인의 유골이 있다. 200년 경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는 군사적 의도로 젊은 남성들의 결혼을 금지시키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교였던 발렌타인이 그 명령을 어기고 군인들의 혼배성사를 집전했다가 순교했으며 그가 숨을 거둔 2월 14일을 기념하고 있다.

주소 Piazza della Bocca della Verità, 18
입장료 없음(기부금 형식)
운영시간 09:00-13:00, 15:00-17:00

대전차 경기장 Circo Maximo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약 2000년 전에 지어졌으며, 25만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타원형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시민들의 오락을 위해 건설한 곳이다. 관중석 계단의 돌들은 로마 시민들이 주워다 집 짓는데 사용하고 자부심을 가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형체조차 없다. 양쪽 끝에 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으며 대전차 경기가 열리면 이 나무들을 열 바퀴 돌아야 했다고 한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촬영지이며 <벤허>에서 전차를 몰고 경주하는 장면의 모티프가 된 곳이다.

여기서 열린 전차 경기는 주로 네 필의 말이 끄는 4륜 마차를 타고 결승점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전사가 승리하는 경기였다. 경기 도중에 전차끼리 충돌하는 일이 잦아서 전사와 말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에 이르는 위험한 경기였다. 전차 경기 외에도 경마, 창던지기, 맹수와 검투사의 사투 등 다양한 종류의 경기가 열렸다. 경기장 한가운데에는 스피나(Spina)라는 낮은 벽이 있었는데, 이 위에 있는 7개의 돌고래 동상을 설치하고 선두가 몇 바퀴째 돌고 있는지를 돌고래 머리를 아래로 내려 표시했다. 지금은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옛 모습은 없고 터만 휑하니 남아 있다.

클라우디우스 수도교 Acquedotto Claudio

칼리굴라 황제가 38년에 착공해 로마 제국의 네 번째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재위 41~54)가 52년에 완공했다. 로마가 제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도시가 팽창하며 인구가 크게 늘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깨끗한 물의 확보와 안정된 공급에 대한 문제가 시민 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수로였다. 이러한 수로들을 통해 인근 언덕들의 호수와 저수지로부터 로마 시내로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수로의 건설, 그리고 정기적인 보수와 유지는 로마 시민들의 위생과 안전을 위한 필수적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팔라티노 언덕 Palatino

팔라티노 언덕은 로마가 시작된 요람이다. 전설 중 하나에 따르면 알바 롱가(Alba Longa)의 왕녀 레아 실비아(R[h]ea Silvia)가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은 숙부에 의해 베스타 여신의 무녀가 되었으나, 군신 마르스와 통정해 쌍둥이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를 낳았다. 쌍둥이는 어미가 저지른 파계의 죄로 상자에 넣어져 아니오 강(현 아니에네 강)에 던져졌는데 그 상자가 티베리스 강(현 테베레 강)을 떠내려가 팔라티노 언덕의 기슭에 표착했고, 두 아이는 늑대의 젖으로 길러졌다. 이후 한 목자가 주워다 길러 두 형제는 성인으로 자라 어미의 원수를 갚고 이 팔라티노 언덕에 시가지를 세웠다. 이것이 로마의 발상이 되었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 위에 ‘정방향의 로마’를 세운 다음, 사비나(Sabine)의 여인들을 강탈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 농부들과 연합해 영토를 확장했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 이 언덕은 부유한 귀족들의 주거지로 이용되었다. 언덕 일대의 경관이 수려하고 주변 환경도 훌륭해 귀족들이 저택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기원전 63년 이곳에서 옥타비아노가 태어났으며, 그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훗날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다. 황제는 자신이 태어난 이 언덕에 제국의 궁전(Palazzo Imperiale)과 아우구스투스 궁전(Domus Augustana)을 세웠다. 궁의 중앙 대문을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사방에 조각상들을 세워놓아 출입하는 이들을 압도했으며, 안에는 대원형극장을 지었다. 또 누이 옥타비아를 기리기 위해 기둥 300개와 신전 두 개로 이루어진 옥타비아의 회랑(Il Portico di Ottavia)을 건설하기도 했다. 라틴과 그리스의 고전 작품을 많이 소장한 도서관을 짓고 카라라에서 가져온 흰 대리석으로 아폴로 신전을 지은 후 입구의 문틀을 상아로 꾸몄으며, 궁전 앞에는 베스타 신전(Tempio di Vesta)을 지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왕가의 건축을 향한 광기는 대를 이어 악화되었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팔라티노 언덕 북쪽 부근에 티베리아나(Domus Tiberiana)라는 훨씬 더 거대한 궁전을 짓기에 이른다. 네로 황제는 첼리오 언덕과 에스퀼리노 언덕을 나누는 평원에 아우레아 궁전(Domus Aurea)을 건설하도록 명령했고, 정원과 숲, 수영장, 그리고 심지어 (근처 상수원에서 끌어온 물로) 넓은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상수도를 건설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모방해 경제 정책을 철저하게 펼쳤다. 티투스 황제 역시 그러했다. 이 두 황제는 공공건물과 목욕 시설, 공회당과 원형극장 등을 건설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되는 곳은 도미치아누스 황제가 지은 플라비 궁전(Domus Flavia)이다. 이곳의 홀들은 특별한 파티나 경건한 행사 때에 사용되었다. 궁정에서 제일 중요한 곳은 공회당으로, 여기서는 황제가 참여한 가운데 재판이 이루어졌다. 공회당 다음으로 주요한 역할을 했던 공간은 공식 연회당이었다.

거기서 회랑을 따라가면 욕실과 식당이 있었다. 또한 여름철에 사용되던 식당 닌페오는 타원형의 분수 옆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 호사스러움이 극에 달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훗날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으로 이 궁전이 허물어졌고 오늘날엔 테라스의 잔해만 남아 있다. 이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환상적이다.

승리자 제우스 신전(Tempio di Giove Vincitore)은 센티움 전투 이후 파비오 마시모가 세운 것이다. 체육 행사를 열고 병사들을 훈련하기 위해 지은 경기장은 세베리우스 황제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건설한 것으로, 그동안 몇 차례 전면 개방된 바 있다. 그 외에 왕족의 젊은 노예들을 위한 학교 페다고지움(Pedagogium) 등이 있다.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제국의 건축물들은 포로(Foro)와 함께 야만족들이 로마를 침략할 때 여지없이 파괴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중세에 이르러 명문대가의 요새와 정원들이 세워졌다. 파르네세 가문과 바르베리니 가문도 거기에 공원과 포도원, 또 각양각색의 관상수를 키우는 파르네시안 농원(Orti Farnesiani)을 조성했다.

주소 Via di San Gregorio, 30
입장료 12€(+예약비 2€)(팔라티노 언덕 + 콜로세움 + 포룸 로마눔 통합권)
운영시간 5월 기준 08:30-17:15

주변 구역

보나벤투라 수도원 Convento S. Bonaventura

팔라티노 언덕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는 수도원 성당으로 바르셀로나의 추기경 카를로 바르베리니의 요청에 따라 1675년에 지어졌다. 본래 이 자리는 로마 시대에 물탱크가 있던 지대였다.  클라우디우스의 수로에서 흘러온 물이 이 물탱크에 저장되었고, 이 물은 팔라티노 언덕의 궁전들에 제공됐다.

19세기 중반에 균열이 일어나 19세기 중반에 복원되었다. 내부에는 하나의 신랑과 작은 두 개의 제단을 가진 작은 예배당이다. 360도로 콜로세움을 비롯해 멋진 전경이 보이기 때문에 팔라티노에서 가장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한다. 프란치스코회 소속 수사신부 포르토 마우리치오의 성 레오나르도(Leonardus a Porto Maurizio, St. 1676~1761)가 선종해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현재 철저한 신앙 생활과 목회 활동을 펼치며 있다.

프레코눔 궁전 Domus Praeconum

노예 교육장과 대전차 경기장 사이에 위치한 건물로 세베리우스 황제가 지었다. 다른 건물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네 면의 열이 있는 현관으로 둘러싸여 있고 작은 사각형 안뜰을 둔 건물이다.

북쪽에는 세 개의 아치형 방이 있고 중앙에 방이 하나 더 있었으며 2층도 있었다. 전령의 행렬을 묘사한 모자이크도 남아 있다.

노예 교육장 Paedagogium

어린이 노예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로 읽기, 쓰기, 수학 등을 가르쳤다. 1857년 이곳에서 낙서 한 점이 발견됐는데, 십자가 위에 당나귀가 매달려 있고 어떤 사람이 이것을 숭배하고 있는 모습이다. 2~3세기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십자가 그림이다. 고대 그리스 어로 ‘ΑλΕξΑΜΕΝΟς CЄΒΕΤΕ ΘΕΟN’라고 써 있는데, 이는 ‘알렉사메노스가 자기 신을 경배하고 있네’(Alexamenos worships his god)라는 뜻이다. 이 낙서는 사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당시 십자가가 얼마나 치욕과 혐오의 대상이었는지를 잘 드러낸다.

세베리우스 궁전 구역 Domus Severiana

세베리우스 욕장 Terme Severiane

아우구스투스 궁전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세베루스 황제가 건축한 욕장으로 비오 9세 때는 19세기 후반에 출토됐다. 일부에서는 이전에 지은 것은 세베루스 시대에 확대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막센티우스 시대에야 완성됐다. 클라우디우스 수도교를 통해 옮겨 온 물로 목욕물을 댔으며 탱크, 수도관, 난방 시스템 등의 흔적이 남아 있고 화려한 실내 장식도 엿볼 수 있다.

세베리우스의 아치 Arcate Severiane

로마 건축 예술 중 최고 사례에 속하며, 로마 건축은 물론 아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이 아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와 막센티우스 황제 시대 사이에 건설됐다. 매우 높고 좁은 아치 수로를 2단 분산 시스템으로 쌓아올려 건물의 공간을 확대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궁전 구역 Domus Augustana

기원전 26년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의 궁전(Palazzo Imperiale)와 함께 지은 궁전이다. 웅장한 모습으로 유명한 플라비아 궁전이 국가적 목적으로 사용됐다면, 남쪽에 있는 거대한 아우구스투스 궁전은 사적 거소였다. 고대에는 2개층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원을 통해 각 층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바닥층으로는 접근할 수 없지만 분수의 수반, 채색 대리석으로 덮은 방들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한때 계단을 통해 아우구스투스 궁전과 연결되었다. 궁전에서 비서로 일했던 법률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 70~122)는 궁전이 크지도 우아하지도 않은 검소한 건물이며 대리석 장식이나 멋진 포장도 하지 않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40년 이상 겨울이나 여름이나 같은 침대를 사용했다고 기록했다.

히포드롬(경기장) Hippodrome

히포드롬은 로마에서는 키르쿠스(circus)라 불렸는데, 전차 경주나 경마장을 말한다. 로마인들은 중앙분리대가 없는 경기장을 ‘스타디움(stadium)’이라고 불렀고, 이 말은 ‘경기장’의 어원이 되었다.

이 스타디움은 팔라티노 언덕에 아우구스투스 궁전을 완성한 도미티아누스 황제(Titus Flavius Domitianus, 51~96)가 경기장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옥외 공간이었다. 그래서 이 스타디움은 도미티아누스 스타디움(Stadium of Domitianus)이라고도 불린다. 혹자는 이 스타디움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비밀정원이었다고 하지만, 황제가 앉아서 경기를 즐기던 관람석 발코니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경기가 열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기를 했는지, 황제가 이 스타디움에서 직접 경기를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구조물의 모양이 현대의 육상트랙이나 전차 경기장 같이 생겨서 그렇게 유추할 뿐이다. 보통의 체육 경기를 하기에는 약간 짧은 184m의 길이이다. 독특하게도 언덕의 땅을 파고 들어가 건설했는데, 덕분에 현대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회랑 Peristylium

그리스와 로마 건축에서 기둥으로 둘러싸인 회랑 또는 뜰을 말한다. 특히 로마 주택에서는 가장 안쪽에 있는 주랑으로 둘러싸인 정원 구역을 가리킨다. 사전적 의미는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다.

전형적인 고대 로마 주택은 주출입구, 아트리움, 타블리눔, 페리스틸리움이 일직선으로 배치되는 구조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페리스틸리움은 로마 주택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지붕이 있는 주랑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아트리움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식당, 침실, 부엌을 비롯한 여러 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정원이 주택을 감싸고 있는 현대 주택 구조와 달리 고대 로마인들은 주택 안에 뜰과 정원을 두는 식의 건축을 선호했다. 중앙의 정원에는 여러 가지 식물을 심고, 조각상, 연못과 분수대 등을 만들어 장식하기도 했다.

플라비우스 궁전 구역 Domus Flavia

네로 황제의 트란시토리아 궁전이 64년의 대화제로 파괴된 뒤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 베스파시아누스, 81~96) 황제의 명으로 거장 라비리우스(Rabirius)가 92년에 완공했다. 한때 계단을 통해 아우구스투스 궁전과 연결되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가장 번듯한 황궁 유적이다. 몇 개의 커다란 방과 특별실이 있었으며 주요 공간을 교회, 중앙 홀, 사당, 식당 용도로 사용했다.

이 궁전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11년에 거쳐서 궁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중 구도가 됐다. 이 공사 덕분에 궁전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공관으로서의 역할과 황제의 사저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대체로 황제 가족의 사적 공간을 아우구스투스 궁전으로, 국사가 이루어지던 공적 공간을 플라비우스 궁전으로 구분한다.

트리클리니움 Triclinium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세 개의 긴 의자’라는 의미이다. 이름처럼 삼면에 ‘ㄷ’ 자 형태로 배치된 세 개의 긴 의자, 즉 카우치에 참석자들이 각각 세 명씩 자리를 잡고 왼쪽 팔꿈치를 카우치에 괴고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하는, 격식을 차린 로마 만찬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공식적인 연회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초 그리스에서 유행하던 만찬 관행이 에트루리아를 거쳐 로마로 들어온 것으로 트리클리니움이라는 명칭 자체도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로마 중상류층 주택에는 보통 이런 트리클리니움이 적어도 두 개부터 네다섯 개까지 설치되어 있다. 대개 실내에 있지만 정원 한쪽에 설치되어 정원을 바라보며 식사를 하는 실내와 실외의 구분이 모호한 것도 있다. 플라비우스 궁전의 트리클리니움은 분홍색 화강암을 코린트 양식으로 배색하고, 29.5미터의 벽 기둥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중앙에는 큰 분수가 있었다.

여름 식당 Nymphaeum

요정에게 바쳐진 성소를 의미한다. 자연 또는 인공으로 동굴 모양을 만들어 식물, 꽃, 샘, 개천 등을 곁들였으나 차차 분수를 중심으로 한 건축물로 발달해 프론스 스카에나에의 형식을 모방했다. 신전이라기보다 오락 시설로서의 목적이 강했는데, 플라비 궁전에서는 호화로운 여름 식당으로 사용됐다.

이 님파네움은 분수대, 벽화, 조각상 등을 간직하고 있는데 2005년 11월 폭우로 일부가 붕괴됐으며, 인접한 두 그루의 소나무 뿌리가 건물에 손상을 주고 있다. 벽화 또한 염분으로 흐릿해져가고 있다.

교회 Basilica, 대연회장 Aula Regia, 라라리움 Larario

클리부스 팔라티누스(Clivus Palatinus) 거리에서 보이는 궁전의 첫 번째 부분인 교회는 3개의 방으로 이루어진다. 그 옆에 있는 중앙 홀(대연회장)은 궁전에서 가장 넓은 공간에 속하는 곳으로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벽을 대리석으로 치장했고 프리지아 산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의 수평 부분을 공들여 조각했다. 세 번째 공간인 라라리움은 가장 작은 공간이며 보존 상태가 가장 좋지 않다.

라라리움이란 고대 로마에서 가정에 라레스 신을 모시기 위해 꾸민 사당을 말한다. 라레스는 이탈리아의 수호신이자 가족, 국가, 도로, 항로를 보호하는 신인데, 가족의 수호신으로서 각 주택의 신주인 라라리움에 모셨다. 보통은 토가를 입은 장년 남자상으로 표현되나 청년상인 경우도 있고, 때로는 술이 담긴 뿔을 한손에 높이 든 형상으로 표현된다.

신전 구역

아폴로 신전 Tempio di Apollo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수호신인 아폴론에게 최초로 봉헌한 신전이며, 소시아누스 아폴론 신전(Temple of Apollo Sosianus)에 이어 로마에서 신에게 봉헌한 것 중 두 번째 신전이다. 1960년대에 유적이 발굴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기원전 36년 나울로쿠스 전쟁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이어 5년 후 다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까지 이기고 돌아왔을 때,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번개가 내리친 자신의 거처 내부에 지었다고 한다. 기원전 28년 10월에 아폴로에게 봉헌했고 기원전 17년 재도입한 종교의식 ‘루디 사이쿨라레스(Ludi Saeculares, 백년제)’를 이곳에서 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집에서 프레스코화 홀과 복도들을 지나면 신전 테라스로 곧장 연결됐다.

아우구스투스의 집 Casa di Augusto

아우구스투스가 개인적으로 거주하던 집으로 로물루스의 집 바로 옆에 지어 자신이 로마의 정통 후계자임을 상징했다. 소박하고 검소한 집이다. 로마에서는 부인과 따로 자는 것이 관습이었고, 황제는 40여년 간 같은 침실에서 낮은 침상에 평범한 이불을 사용했다.

지난 2014년, 아우구스투스 타계 2000주년을 맞아 약 34억 원을 들여 진행한 내부 프레스코 화 복원이 완료되어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붉은 색 바탕에 아름다운 꽃 장식이 된 것부터 전원의 평화로운 풍경, 교회 등이 훌륭한 상태로 그려져 있다.

리비아의 집 Casa di Livia

팔라티노를 통틀어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물 중 가장 상태가 양호한 유적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Livia Drusilla, 기원전 58~기원후 29)의 주거지로 추측되고 그렇게 불리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건물 내부에서 발견된 수도관에 리비아라는 이름이 써 있기 때문에 편의상 리비아의 집으로 부르고 있다.

1869년에야 발굴되었는데, 벽체구축법으로 미루어 보다 기원전 75~50년경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저택을 장식하는 벽화는 폼페이 벽화 제2양식이 발달한 단계에 해당하며, 연대로 치면 기원전 30년경 제작된 것이다. 벽화는 3실에 그려져 있는데 중앙 타불리눔의 「이오와 아르고스」(맨 오른쪽 그림)는 니키아스의 원화를 모사한 것이고, 우측 작은방의 황색 프리즈는 ‘알렉산더 양식’의 좋은 예이다. 이 벽화들은 로마 시내에서 발견된 로마 시대 벽화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고 질도 높다.

카쿠스 계단 Scalae Caci

로마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담은 바구니가 이 계단 근처의 성스러운 무화과나무 앞으로 떠내려가 암늑대가 동굴로 데려갔다고 해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던 곳이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카쿠스를 불꽃의 신 불카누스의 아들로서 지방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불을 내뿜는 괴물 같은 약탈자로 묘사했다. 카쿠스는 영웅 헤라클레스에게서 거인 게리온의 소떼 중 몇 마리를 훔쳐내 아벤티누스 언덕에 있는 자신의 은신처에 숨겼는데, 소 한 마리가 울음소리를 내는 바람에 발각되었고 헤라클레스가 불시에 공격해 와 카쿠스를 죽였다고 한다.

로물루스의 오두막 Capanna di Romolo

철기 시대인 기원전 7~8세기 경 바위 사이에 지어진 진흙 오두막집으로, 로마의 첫 번째 정착지로 여겨진다. 1948년 발굴됐다. 이곳은 로물루스가 직접 산 곳이라기보다는, 로물루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곳으로 여겨진다. 로마 제정 시대까지 ‘로물루스의 집’이라는 한 둥근 오두막이 국가적인 기념물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시빌레 신전 Tempio di Cibele

제2차 포에니 전쟁과 한니발의 습격을 받으면서 로마는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나 종교 면에서도 위기에 빠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대지 모신(母神)인 시빌레에 대한 숭배가 발생했고 팔라티노에도 거대한 신전이 세워졌다. 본래 ‘시빌레’는 트로이 부근에 살며 아폴론에게 예언의 능력을 물려받은 한 여인의 이름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무녀를 가리키는 총칭으로 사용됐다.

가장 유명한 시빌레인 쿠마이의 시빌레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로 향하던 아이네아스가 저승으로 가는 모험을 할 때 안내했다고 한다. 이승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네아스가 신전을 짓고 제물을 바치겠다고 했으나, 자신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아울러 만일 자신이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죽지 않는 여신이 될 수도 있었노라고 아쉬워했다. 한때 아폴론은 시빌레에게 구애하면서 무슨 소원이든 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시빌레는 손에 한 움큼의 모래를 쥐고 모래알의 수만큼 수명을 내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는 않자 아폴론은 화가 나서모래알만큼의 수명은 주었으나 나이만큼 늙도록 내버려 두었다. 쿠마이의 시빌레가 아이네아스를 저승으로 안내할 때 이미 700년을 살았고 300년의 수명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늙어서 몸이 점점 줄어든 시빌레는 병 속에 넣어져 동굴의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시빌레는 또 고대 로마의 타르키니우스 왕정 때 왕에게 예언집을 팔았다고 한다. 처음에 9권의 예언집을 가지고 와서 왕에게 비싼 값에 팔려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3권을 태워 버린 뒤 6권을 9권의 값에 사라고 했다. 왕이 또 거절하자 3권을 더 태워 버린 뒤 남은 3권을 9권의 값으로 사라고 했다. 이에 이상하게 여긴 왕이 사제들을 불러 상의하자, 사제들은 이미 불에 타 없어진 6권을 아쉬워하며 남은 3권이라도 어서 사라고 왕에게 권했다. 9권의 값으로 3권을 산 왕이 책의 내용을 읽어 보자, 거기에는 로마의 운명에 관한 예언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 책들은 카피톨리노언덕의 유피테르(그리스신화의 제우스) 신전에 보관되어 특정한 관리에게만 열람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승리의 신전 Tempio della Vittoria

로마는 기원전 326년부터 남부 이탈리아의 삼나이트(Samnites) 족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는다. 때문에 로마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그 동안 모방해 온 그리스 군사 제도를 과감히 버리고, 자신들의 고유 특성과 전투 환경을 반영한 이른바 '로마 군단'을 창설한다. 그 결과 마침내 삼나이트 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집정관인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신전이 바로 이 승리의 신전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비문이 남아 있다.

루페르칼레 동굴 Lupercal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얻어먹으며 성장했다고 전해지는 동굴이다. 루페르칼이라는 이름은 늑대(Lupa)의 이름은 본뜬 것이다. 지난 2007년 지하 16m 지점의 동굴에서 아치형 천장을 갖춘 신전이 발견됐는데, 높이 8m 지름 7.5m로 조개껍데기와 채색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고 중앙에는 흰 독수리 문양이 그려져 있다. 2년 간 내시경 카메라와 레이저 스캐너로 발굴했는데 붕괴 위험으로 들어가볼 수는 없다. 아우구스투스의 황궁터 근처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다 고고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로물루스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한 나머지 이곳을 복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티베리우스 궁전 구역 Domus Tiberiana

제대로 황궁이라고 부를만한 건물을 처음으로 지은 황제는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였다. 그러나 현재 티베리우스 궁전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실상 건물은 그 이후에 칼리굴라가 확장시켰고, 네로와 도미티아누스가 계속 손을 댔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지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705년 선출된 교황 요한 7세가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파르네시안 농원 Orti Farnesiani sul Palatino

16세기에 알레산드로 파르네제 추기경이 조성한 정원이다. 파르네세는 할아버지인 교황 바울 3세에 의해 14세이던 1534년 추기경으로 임명된 인물로, 고대 이래의 로마 조각품들을 수집했다. 1550년에는 티베리우스 궁전 부분을 인수하고 유명 건축가인 자코모 비뇰라(Vignola)를 고용해 이곳에 별장과 정원을 짓게 했다. 중앙 분수와 사분면의 고전 스타일로 지은 것이며, 새장과 테라스, 벽화 등이 일부 남아 있다.

지하 회랑 Criptoportico Neroniano

티베리우스 궁전을 리비아의 집까지 남쪽으로 연결하는 반지하의 회랑으로 아치형 천장을 가진 지하 회랑으로 총 130m 길이로 되어 있다. 기하학적 무늬와 식물 등을 주제로 한 토 장식이 일부 남아 있는데, 특히 큐피트 부조가 유명하다. 네로 황제 시대인 1세기에 제작됐다. 과거에는 티베리우스 궁전과 플라비우스 궁전을 연결하는 문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여름철에는 무더위와 햇볕을 피하기에도 좋다.

콜로세움 주변

티투스의 개선문 Arco di Tito

티투스 황제의 영예를 찬양해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세운 개선문이다. 현존하는 로마 개선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티투스 황제 사후에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만들기 시작해 네르바 황제 시대에 완성했다. 높이 15.4m, 폭 13.5m이며 상부의 4두마차는 훼손됐다. 서쪽면의 명문은 19세기에 새긴 것이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아치 모양은 이후 개선문의 기본이 됐다.

티투스와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와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해서 세운 것이며 프리즈와 통로 내 양측에 이런 내용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성배를 가져오는 모습도 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문을 통과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부조는 부조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데, 처음에는 채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Arco di Constantino

31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한 것을 기념해 원로원이 315년 완성했다. 높이 21m, 폭 25.7m이고 3개의 아치 형식이며 앞면에 부조가 있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3제(帝) 시대의 부조판을 재활용해 공사 기간을 단축했다. 여섯 개의 프리즈는 밀비우스 전투의 승리, 로마 입성, 베로나 포위 등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을 새긴 부조로 새로 만들었다.

일화에 따르면 312년 로마 사분치제(四分治制)의 경쟁자인 황제 막센티우스와의 결전이 이뤄졌는데, 그때 콘스탄티누스는 “정오의 태양 위에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고, 그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이겨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환영을 봤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결국 밀비우스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고 이로써 로마 전체를 지배하고 이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른다.

메타 수단스 Meta Sudans

콜로세움 앞에는 원래 메타 수단스라는 이름의 분수가 있었다. ‘땀 흘리는 메타’라는 뜻인데, 메타란 본래 대전차경기장 트랙의 굽은 부분에 설치해 위치를 나타내던 원뿔 모양의 표식을 말한다. 메타 수단수 역시 비슷한 모양이었다고 하며, 로마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해 개선식을 할 때 개선문을 지난 뒤 메타 수단스까지 와서 회전한 뒤 포룸 로마눔으로 갔다고 한다. 콜로세움이 완공되고 몇 년 후인 89~9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검투사들이 경기 후 여기서 몸을 씻었다고도 전해진다. 벽돌과 블록과 콘크리트,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물을 콸콸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땀을 배출하듯이 뿜는다고 해서 수단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처음에 높이는 17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9m 높이를 유지했다.

메타 수단스는 중세 시대부터 이미 못 쓰는 분수로 알려졌다. 그래도 20세기 중반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오른쪽 사진 : 1890년대 메타 수단스), 1936년 무솔리니가 원형 교차로를 내는 바람에 없어져 버렸다. 이후 원형 교차로도 없어지고 지금 메타 수단스 자리는 그냥 보도블록으로 덮여 있다. 메타 수단스 모양을 담은 동전도 여러 개 주조됐지만 크기가 너무 작아 분수 모양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어 추정해 볼 따름이다. 

콜로세움 원형경기장 Anfiteatro Flavio - Colosseo

고대 로마인들의 뛰어난 건축공학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세우기 시작해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완성시킨 4층의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nfiteatro Flavio)이다. 장축지름은 187m이고 단축지름은 155m, 둘레 527m, 높이 48m의 타원형 건물이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각 층마다 양식을 달리했으며 외벽은 아치 80개가 둘러싸고 있다. 본래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의 인공연못이 있던 자리를 덮고 만들었다고 한다.

신분과 성별에 따라 1층의 가장 낮은 곳에 설치된 특별석에는 황제와 베스타 여신이 마주하고, 그 옆으로 흰 토가(로마 시민의 겉옷)를 입은 원로원, 2층에는 귀족과 무사, 3층에는 로마 시민권자, 4층에는 여자·노예·빈민층이 자리 잡았다. 한 번에 5만 명이나 되는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로마인들은 치열한 검투사의 격투 시합, 맹수 등의 사냥 시합 등 목숨을 건 잔인한 전투 경기와 모의 해전(이를 위해 경기장에 물이 채워졌다) 등을 즐겼다. 티투스 황제는 준공을 기념한 100일의 축제 기간 동안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결이 끝나면 승자는 패배한 검투사를 죽여야 할지, 혹은 용맹함을 보여 주었으니 살려야 할지에 대한 관중들의 결정ㅡ혹은, 황제가 그 자리에 있다면 황제의 결정ㅡ을 살폈다. 오늘날 매우 유명한,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제스처를 통해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다. 시합에 들어가는 사자, 표범, 악어 등의 맹수는 극장 아래에 있는 우리에 가두었다가, 로프로 끌어올리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경기장에 풀려났다. 이 경기장에서 경기를 했던 검투사들은 전쟁 포로들로 시합에서 일정한 승리를 거두면 자유의 신분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콜로세움은 햇빛이 강할 때나 비가 올 때 벨라리움(Velarium)이라는 천막 지붕을 설치해 하늘을 가렸는데(왼쪽 그림) 천장 가운데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벨라리움으로 콜로세움을 덮는 작업은 고도의 공학 기술을 요하는 일이었다. 경기장 바닥에는 나무 바닥을 깔고 그 위에 모래로 덮었는데 원형경기장을 이탈리아어로는 아레나(Arena)라고 한다. 이는 라틴어의 ‘모래’를 뜻하는 아레나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경기장 바닥이 파헤쳐져 있지만 옛날에는 지하실 위에 덮개를 씌워 그 위에서 경기를 했고 바닥 밑에는 지하실을 만들어 칸을 막고 검투사들의 대기실과 맹수들의 우리로, 그리고 경기 시 필요한 도구들의 보관 창고로 사용했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은 그 앞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의 이름인 콜로소(Colosso)에서 와전되었는데 이는 라틴어 ‘Colossus’, 즉 거대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217년 화재, 442년에는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그 후에는 성당 건물들이나 귀족들의 저택을 짓기 위한 건축자재와 대리석의 채석장이 되어 파헤쳐지기도 했다. 1744년 베네딕트 교황 14세는 이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콜로세움을 신성시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실상 콜로세움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거의 죽지 않았다고 한다.

중세에 콜로세움은 교회로 쓰였으며, 그 후에는 저명한 두 로마 가문인 프란지파네(Frangipane) 가문과 안니발디(Annibaldi) 가문이 요새로 쓰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진의 피해를 입거나 강도가 돌을 약탈해 가기도 하고,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생긴 현대의 공해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콜로세움은 여전히 잔혹한 여흥을 즐기는 인간의 취향을 반영하는 기념물로 남아 있다.

콜로세움 내부 계단의 꼭대기 층은 힘들더라도 꼭 올라가 보자. 바깥 전경도 멋있지만 내부의 모습이 매우 웅장하다. 과거에 결투가 벌어졌던 1층 바닥 일부분에는 다리가 놓여 있으니 다리 위에서 옛 지하의 모습(맹수 우리와 검투사실 등)을 상상해 보자. 밤에 보는 콜로세움의 스펙터클한 야간 투광 조명도 무척 멋있다. 콜로세움의 야경은 웅장하고 화려해 낮에 즐긴 내부의 황량함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콜로세움을 방문하기 전에 영화 <글래디에이터>나 미드 <스파르타쿠스>를 미리 보고 가면 더욱 좋다. 단, 콜로세움 주변에서 로마 군인 제복을 입고 상행위하는 장사치를 조심하자.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 반드시 미리 흥정해야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

포룸 로마눔 Foro Romano

고대 로마의 중심부였던 공회장 유적지이다. 이곳을 포룸이라고 부른 사람은 로물루스였다고 한다. 라틴어에서 포룸은 ‘바깥 장소’라는 뜻으로, 팔라티노 언덕 등 로마의 신성한 중심지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고대 로마 시절 대부분의 도시에는 포룸이라고 불리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광장이 있었는데, 이 포룸 로마눔은 수도 로마에 개설된 최초의 포룸이자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원로원 의사당과 신전, 바실리카(공회당), 기념비 등 공공기구와 함께 일상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동쪽으로 가면 콜로세움, 서쪽으로 가면 테베레 강, 남쪽으로 가면 팔라티노 언덕, 북쪽으로 가면 카피톨리노 언덕에 이른다. 포룸 로마눔이 세워진 지역은 처음에는 비가 오면 물이 괴는 습지였는데, 하수시설을 확충한 후 도시 생활의 구심점을 이루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주변의 언덕들이 마주치는 곳이어서 도시를 방어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나중에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약 천 년 동안 로마 제국의 심장 역할을 했다. 283년 화재로 파괴된 후 복구되긴 했으나 중세 이후로는 이 공회장의 건물들을 헐어 건축자재로 쓰기도 했다. 그 후 1871년에 발굴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한때는 막강했던 위엄 있는 건물들이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 옛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을 통해 로마의 영광을 되새겨볼 수 있다. 그늘진 곳이 없으므로 강렬한 햇빛이 비치는 오후는 피하는 것이 좋다.

포룸 로마눔이 폐허가 된 원인

로마 제국이 망한 뒤 13세기께 로마는 인구가 1만 7천여 명에 불과한 초라한 도시가 됐다. 이때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서 로마로 소재지를 옮긴다. 교황은 로마를 화려하게 부활시켜 ‘교황이 사는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교황은 수많은 성당을 지었는데, 건축가들은 필요한 자재를 따로 구하지 않고 포룸 로마눔에 있는 많은 건물들에서 뜯어내 조달했다. 르네상스 시대 대저택 건설에 몰두했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포룸 로마눔은 거대한 채석장으로 변해버렸고 결국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이곳은 짧은 시간 안에 오늘날과 같은 폐허더미가 되어 버렸다. 오늘날 로마가 자랑하는 수많은 중세 이후 건물들은 결국 포룸 로마눔의 살을 뜯어먹고 만들어진 셈이다.

포룸 로마눔 지역은 원래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에 둘러싸인 저지대여서 폭우가 쏟아지면 물이 고이는 습지였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유래는 전설로 전해진다.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는 여자 부족 현상 때문에 남자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자, 가짜 축제를 열어 사비나 등 인근 여러 부족 사람들을 초대한다. 축제가 한창 무르익어갈 즈음 로물루스와 로마인들은 인근 부족 여자들을 납치하고 남자들은 모두 쫓아낸다.

이에 화가 난 사비나 부족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온다. 이때 로마는 팔라티노 언덕에, 사비나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진을 치고 대치한다. 그러나 납치당한 사비나 여인들은 이미 로마인들의 아내가 되어 아이들을 낳고 살아가고 있었고, 그들은 로마인 남편과 사비나 족인 친정의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와 사비나 사이에 끼어들어 전쟁을 멈추라고 울부짖었다. 간절한 호소를 들은 로물루스와 타티우스는 화해하기로 하고, 무기를 내려놓고 포룸 로마눔으로 내려가 동맹을 맺는다. 이후 이곳은 언덕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물물교환을 하기 쉬워서 일찌감치 시장으로 활용됐고 로마 시조 로물루스도 이 같은 점을 고려해 이곳을 흙으로 메워 공공장소로 활용했다.

입장료 12€(+예약비 2€)(팔라티노 언덕 + 콜로세움 + 포룸 로마눔 통합권) 운영시간 5월 기준 08:30-17:15

비너스와 로마 신전 Tempio di Venere e Roma

콜로세움에 올라가서 포룸 로마눔을 바라보면 바로 정면 언덕 위에 보이는 부서진 건물이 있다. 주변에는 기둥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포룸 로마눔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자 로마에서 가장 큰 신전이었다는 비너스 로마 신전이다.

이 신전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이며 로마에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알려진 여신 ‘비너스(아프로디테)’와 ‘로마(Roma Aeterna)’에게 바친 신전이다. 비너스는 그리스 연합군에 멸망당한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이네이아스의 어머니이고, 아이네이아스는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의 조상이니 결국 로마의 선조인 셈이다. 로마 에테르나는 로마를 지키는 여신인데, 로마라는 나라 자체를 신으로 만든 것이다.

비너스 로마 신전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121년에 짓기 시작해 피우스 황제 때인 141년에 완공했다. 283년 대화재로 소실됐다가 막센티우스 황제 때 재건됐는데, 원래는 길이가 145m, 폭이 100m에 이르렀다. 이 신전을 짓기 위해 신전 건설 예정 부지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 ‘콜로서스 네로니스’를 콜로세움 인근으로 옮겼다고 한다.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 아폴로도루스는 신전의 비너스 상이 너무 크다고 지적했는데, 이에 화가 난 하드리아누스가 그를 처형했다고 한다.

신전에는 건물 두 채가 나란히 서 있었고 각 건물에는 비너스 동상과 로마 신의 동상이 세워졌었다. 동상 앞에는 제단이 있어서 신혼부부가 와서 결혼생활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신전 동서쪽에는 지름 1.8m짜리 흰색 기둥이 10개씩 세워졌고 남북쪽으로도 역시 흰색 기둥 18개씩이 세워졌다(오른쪽 사진). 두 건물을 나란히 세운 것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뜻이었다. 비너스는 사랑을 지키는 여신이고 사랑은 라틴어로 ‘AMOR’이니, 사랑의 여신과 로마의 신을 모시는 신전을 나란히 세우면 글자로는 ‘AMORROMA’가 되고 거꾸로 읽어도 똑같은 철자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 같은 절묘한 단어 대칭을 염두에 둔 것이다.

비너스 로마 신전은 9세기 무렵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고, 세월이 흐르면서 신전 주변에 늘어서 있던 기둥들도 사라져 지금은 몇 개만 남아 있다. 매년 성 금요일에 교황은  이 신전 앞 잔디밭에서 미사를 거행한 뒤 신도들과 함께 십자가를 이끌고 콜로세움으로 향하는 행사를 치른다. 26년간의 공사를 실시한 뒤 최근 관광객 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산타 프란체스카 로마나 성당 Basilica di Santa Francesca Romana

비너스 로마 신전이 9세기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자, 9세기 중반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4세는 부서진 신전 부지에 산타 마리아 노바라는 성당을 짓도록 한다. 이 성당은 완공된 뒤 이름이 산타 프란체스카 로마나로 바뀌었다.

이 성당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무릎을 꿇었다고 알려진 판석이 있다.

주소 Piazza Santa Francesca Romana, 4
운영시간 매일 10:30-12:30, 15:30-18:00

안티쿠아리움 포렌세 Antiquarium Forense

81년 로마의 황제 도미티안이 예루살렘 정복을 기념해 세운 아치와 포룸에서 발견된 유물을 소장해 놓은 작은 박물관 겸 발굴단 사무실이다. 철기 시대에 매장된 항아리, 무덤, 뼈, 고대 로마 시대의 동상, 조각, 수도 및 난방 기기, 건축 장식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원래는 산타 프란체스카 로마나 성당의 부속 여자 수도원이었다.

막센티우스 바실리카 Basilica di Massenzio

바실리카는 원래 라틴어로 공공건물을 뜻하는 말이었다가 이후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건물에도 바실리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 바실리카가 대성당이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부터이고, 그때부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성당을 바실리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포룸 로마눔에도 바실리카라는 이름의 건물이 여러 채 있다. 바실리카 율리아, 바실리카 에밀리아, 바실리카 막센티우스 등인데, 이 건물들은 원래 의미대로 공공 건물로 쓰였고 상가로도 활용됐다.

바실리카 막센티우스는 ‘바실리카 노바’, ‘바실리카 막센티우스&콘스탄티누스’라고도 불린다. 막센티우스가 착공해서 콘스탄티누스가 완공했기 때문이다. 바실리카 막센티우스는 당시 최첨단 기술을 동원해서 지은 건물이었으며 다른 바실리카처럼 상점과 공공기관이 입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포룸 로마눔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다.

원래는 외벽이 흰색이었고, 높이 12m짜리 콘스탄티누스 거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거상이 산산조각이 났고, 지금은 머리와 손 등 일부분이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콘세르바토리 궁전에 보관돼 있다.

무솔리니는 집권한 뒤 바실리카 막센티우스 외벽에 로마 제국의 찬란했던 역사를 보여주는 지도를 내다 걸었다고 한다. 그가 실각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지도는 철거됐다. 1960년 로마 올림픽 때 레슬링 경기가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

중세 문 Portico Medievale

비아 사크라(Via Sacra)에 있는 중세 벽돌 현관문이다.

산티 코스마 에 다미아노 교회 Santi Cosma e Damiano(로물루스 신전 Tempio di Romulus)

원래 평화의 사원이라고 부르는 포룸의 입구로 쓰기 위해 지은 것인데, 이후 포룸 로마눔에 위탁됐다. 이름은 로물루스 신전이지만, 실은 막센티우스 황제가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 발레리우스 로물루스를 위해 지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신전이 로마 창시자 로물루스와 완전히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로물루스는 사비나 족과의 전투에서 이기게 해 준 유피테르 신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유피테르 신전을 세웠었는데, 네로 황제 때 발생한 대화재로 이 신전이 큰 피해를 입고 파괴돼 버렸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막센티우스가 아들을 위해 지은 신전의 위치가 바로 그 유피테르 신전이라고 한다. 이후 527년에 교회가 되어 이름이 산티 코스마 디마아노로 바뀌면서 벽돌로 보수했고, 중앙 원형에 쿠폴라를 씌웠다.

맨 위에 있는 원형 랜턴(Lantern)은 현대에 올린 것이지만, 멋진 녹색의 청동문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다. 화려한 처마 장식인 ‘코니스(Cornice)’와 흰 대리석에 세밀한 조각으로 화려하게 치장해 놓은 ‘엔테블러쳐(Entablature)’와 어울려 아름다운 고대 로마의 건축미를 뽐낸다.

도무스 퍼블리카 Domus Publica

공화정 로마 시대의 특별 제사 담당 사제인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이 살던 집이다. 렉스 사크로룸은 사제 서열 2위인 폰티팩스(Fontifex)였다. 귀족이어야만 하고 고유의 임무가 상속되었다. 또한 이곳은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의 집이기도 했으며, 카이사르가 주교직을 수행하기 시작한 기원전 62년부터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암살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카이사르의 집’이기도 했다. 현관과 모자이크 바닥으로 된 욕실 유적이 남아 있다. 또 다른 객실은 대리석 바닥과 프레스코 화 벽으로 장식돼 있다. 도무스(Domus)란 주로 고대 로마와 폼페이(Poempeii) 유적에서 발견되는 큰 규모의 개인 주거지를 말다.

베스타 신전 Tempio di Vesta

기원전 7세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신전이다. 포룸 로마눔이 처음 생길 때부터도 매우 오래된 건축물에 속했다. 불과 화로의 여신인 베스타를 모시는 신전으로, 생명의 근원인 불과 태양의 연결성을 상징하기 위해 동쪽에 입구를 두었으며 포룸 로마눔에서 가장 신성시되던 건물이었다. 두 차례의 화재 후 64년에 세베리우스 황제의 아내 율리아 돔나(Julia Domna)가 복구했고, 이후 약탈되고 손상되었다가 1930년대 무솔리니 정권 때 재건됐다.

로마 시대에는 법적인 유언장과 원로원의 서류, 팔라디움(Palladium)과 같은 제례 용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했다. 현재의 건물은 베스타를 모시는 모든 신전과 마찬가지로 원형 건축물이며, 코린트양식 기둥과 대리석, 중앙의 성상 안치소로 이루어진다. 반지름 15m의 단 위에 20개의 코린트양식 기둥들이 서 있었고, 연기를 내보낼 수 있도록 지붕 꼭대기에 구멍을 뚫었다. 고대 로마나 에트루리아 제단의 흔적으로 보이는 둥그런 발자국이 유명하다.

베스타 무녀의 집 Casa delle Vestali

베스타 신전의 신성한 불은 베스탈이라고 불리던 여섯 명의 무녀들에 의해 지켜졌다. 로마의 제2대 왕인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가 창설했다고 하며, 처음 지어질 때는 3층 건물에 방이 50개나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신성한 불을 지키던 베스탈들은 6~10세의 귀족의 딸 중에서 선정되었는데, 한 번 선발되면 이후 30년 간 베스탈의 직무에 종사해야 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어머니인 레아 역시 베스탈이었다. 베스탈들은 만약 불씨를 꺼트리면 가혹하리만큼 큰 벌을 받았으며, 특히 베스탈들이 그들의 신성한 처녀성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는 생매장을 당하는 중형에 처해졌다.

산 마리아 안티쿠아 성당 Saint Maria Antiqua

5세기에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으로, 8세기경 그려진 벽화들이 많이 보존돼 있다. 교황 요한 7세가 주교들을 만날 때 이 성당을 썼다고 한다. 9세기에 큰 지진으로 무너진 것이 땅에 묻혀 1000년 이상 알려지지 않다가 1900년대 초에 발굴됐으며, 2004년부터 후원금을 얻어 지속적으로 발굴해 오고 있다. 일반 관광객을 들어갈 수 없고 연구 목적의 특정 방문만 허용한다.

아그리파의 곡물창고 Horrea Agrippiana

오랫동안 용도를 알지 못했는데, 최근 연구에 따라 마르쿠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기원전 63~12)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창고이자 식품 시장임이 밝혀졌다. 상업 거래지인 비쿠스 투스쿠스 쪽에 위치한 큰 건물이었으며 주로 곡물 창고로 쓰였다. 세 개의 큰 마당을 가진 독특한 구조에 코린트식 기둥과 아치로 장식돼 있었다.

고대 비쿠스 투스쿠스 Vicus Tuscus

포룸 로마눔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고대 거리로 에트루리아 거리 또는 토스카나 거리라고도 불렀다. 이름에 대해서는 사비나 여성들을 되찾으려고 쳐들어온 티투스 타티우스의 이름을 땄다는 설이 있는데 정확하지 않다.

공화정 시대에는 부유한 가족의 주거 지역이었는데, 이 길을 따라 서점 같은 많은 상점(herrea)들이 들어서면서 로마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호라티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책은 '포룸 로마눔 안쪽의 토스카나 거리'에 있는 베르툼누스 신과 게미누스의 동상 앞에서 판매했다고 한다. 이후 책뿐만 아니라 향, 향수, 곡물, 직물 등 온갖 상품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비쿠스 투스쿠스는 포룸 로마눔과 대전차장 사이를 잇는 주요 의사소통 경로로도 사용됐다. 대전차 경기장에서 신들의 동창을 태운 마차가 출발하면 이 길을 거쳐 포룸 로마눔 쪽으로 행진했다. 기원전 193년 희극시인 플라우투스(Plautus)는 이곳에서 남성 매춘이 성행한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디오스쿠리 신전(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Tempio dei Dioscuri

기원전 499년, 거만함과 만행을 일삼아 로마에서 쫓겨난 로마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가 에트루리아로부터 병력 수만 명을 빌려 로마로 쳐들어오게 되는데, 집정관 포스투미우스가 장군으로 뽑혀 이에 맞서게 된다. 두 군대는 로마 인근의 레길루스 호수 근처에서 만나 다음날 전투에 돌입했다. 그런데 포스투미우스의 군대가 일방적으로 밀려 전멸할 위기에 몰렸다. 심지어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는 병사들도 있었다. 포스투미우스는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화려한 신전을 만들어 바치겠다는 기도를 올렸다.

포스투미우스는 기도를 마친 후 다시 말을 달려 적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레길루스 호수 한쪽에 있던 야트막한 언덕에서 젊은이 두 명이 백마를 타고 나타났다. 그들은 로마군과 에트루리아 군이 싸우는 장면을 잠시 바라보더니 싸움터를 향해 말을 달렸다. 양측 병사들은 잠시 싸움을 멈추고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달려오는 두 기병이 도대체 누구인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젊은이는 레길루스 호수 근처에 이르자 칼을 뽑아들고는 순식간에 엄청난 빛을 내뿜으며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영문을 모르고 서 있던 로마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함성을 지르며 힘을 내기 시작했고 결국 싸움에서 이겼다.

두 젊은이는 포룸 로마눔으로 가서 짧게 로마의 승리를 알리고 말에게 물을 먹이더니 사라져 버렸다. 로마 시민들은 이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는데,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저들은 바로 디오스쿠리 형제다.”

이후 포스투미우스는 젊은이들이 말에게 물을 먹인 포룸 로마눔에 디오스쿠리 신전을 짓게 했다. 이후 고대 로마에서는 매년 7월 15일 디오스쿠리 축제 때 디오스쿠리처럼 꾸민 기병 1천800명이 시내를 행진했다고 한다. 지금은 기둥만 몇 개 남아 있으며, 카피톨리노 언덕 입구에 디오스쿠리 형제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오른쪽 사진).

디오스쿠리 형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쌍둥이인데, 카스토르의 아버지는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우스인 반면 폴룩스의 아버지는 최고의 신 제우스였다. 어머니인 레다가 카스토르를 임신했을 때 제우스가 백조로 변장한 뒤 그녀와 동침해 폴룩스를 임신시킨 것이다. 디오스쿠리는 그리스어로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아들인 카스토르는 죽을 운명이었던 반면 신의 아들인 폴룩스는 불사의 신이었다. 어느 날 싸움 중에 카스토르가 죽자 폴룩스는 아버지 제우스에게 자신이 가진 불사의 능력 절반을 카스토르에게 주라고 간청했고 제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형제는 1년 중 절반은 하데스의 지하세계에서, 나머지 절반은 올림푸스 산에서 살게 됐다.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Arco di Augusto

기원전 19년에 세워진 개선문이다. 당시 모습이 아우구스투스 동전에 새겨서 있어 알 수 있다. 기원전 29년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 싸운 악티움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가 지은 개선문이 있었는데, 이것을 없애고 새로 교체한 개선문이라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 건축 붐으로 1540년 해체됐고, 일부분이 성 베드로 성당의 자재로 재활용됐다. 그래서 현재는 중앙문의 기저부만 남아 있고, 비문 등은 카피톨리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카이사르 신전 Tempio di Cesare

포룸 로마눔에는 사람을 신격화해 모시는 신전이 많은데, 카이사르 신전도 그 중 하나이다. 로마에서 죽은 사람이 신격화돼 신전까지 헌정 받은 첫 사례는 바로 카이사르이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뒤 기원전 29년에 지어 바친 것이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해외 원정을 앞두고 부르투스 등 원로원 의원 14명에게 23번이나 칼에 찔려 암살당했고, 사흘 후 포룸 로마눔에서 그의 장례식이 열렸다. 카이사르의 시신은 상아로 만든 마차에 실려 포룸 로마눔으로 옮겨져 비너스 신전을 본 따 만든 임시 신전에 안치됐다. 이곳에서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암살을 애도하는 유명한 대중연설을 하고 그의 유서를 공개하고, 이어 밀랍으로 만든 카이사르의 시신을 장례식에 참석한 로마 시민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회전시킨다.

원래 로마 시민들은 그를 로마의 신들이 모여 있는 팔라티노에 묻으려고 했지만 사제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포룸 로마눔에서 화장하기로 했다. 카이사르의 시체를 태운 장작더미는 밤새 타올랐는데, 불길이 거의 꺼져갈 무렵 세찬 비가 내려 재를 모두 쓸어가 버렸고 재가 빗물과 함께 포룸 로마눔의 하수구로 흘러가 버렸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무덤이 없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죽고 얼마 뒤 로마 밤하늘에 유성이 나타났는데, 기록에 따르면 이 유성이 7일 간이나 목격됐다. 사람들은 유성이 카이사르의 영혼이라고 생각했고, 아우구스투스는 사람들에게 유성이 왜 나타났는지를 연설로 설명한 뒤 유성과 카이사르의 영혼에 바치는 동전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삼두정치의 지도자였던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카이사르를 신격화하고 그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을 것을 선언한다. 신전은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모두 꺾고 1인자가 된 뒤인 기원전 29년에 완공됐다.

신전을 완성한 뒤 카이사르에게 헌정하는 기념식은 며칠 동안이나 이어졌다. 옛 트로이 전쟁을 재구성한 연극이 진행됐고 검투사 대결, 연회 등이 펼쳐졌다. 로마에서는 처음으로 하마와 코뿔소까지 등장했다고 하다. 기념식 기간 동안 로마 시민들이 신전에 세워진 카이사르의 동상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전의 문을 열어 두었다.

레지아 Regia

기원전 525년에 지어진 건물로 로마 왕의 본부나 거주지로 사용되었으며, 기원전에 이미 두 차례나 화재를 입었다. 나중에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집무실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세베리우스가 재건했지만 로마 제국이 몰락하면서 돌보는 이가 없어졌고 8세기에 또 다시 파괴됐다. 유적은 1546년에 발굴됐으며 구조와 기능이 밝혀진 것은 거의 1900년이 다 된 때였다. 지금은 거의 기초 부분만 남아 있다.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의 신전을 등지고 보면 내부의 흰 벽과 그에 둘러싸인 작은 사각형 방 등을 한눈에 보기 가장 좋다. 또 남쪽에는 대리석 장식 조각이 된 난간이 남아 있다.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Tempio di Antonio e Faustina

카이사르 신전을 필두로 몇몇 지도자들을 기리는 신전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신전을 황제에게만 바쳐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황제의 아내나 연인, 다른 가족들도 신격화해서 신전에 모셨다.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 신전도 그런 예이다. 안토니우스 황제는 부인 파우스티나가 숨지자 그녀를 위해 신전을 짓기 시작했는데, 신전이 완성되기 전에 안토니우스 황제까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두 사람을 신전에 동시에 모시기로 한다. 한마디로 부부 신전인 셈이다.

이 신전은 7세기 무렵 로마 가톨릭 교회로 용도가 바뀌고 이름도 미란다 산 로렌조 성당이 됐다. ‘미란다’라는 명칭은 교회 여성 후원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로렌조는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 순교한 사제 7명 중 한 명이다. 교회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나마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 대학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다.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지만 매주 목요일 오전 10~12시에는 일반 방문객도 들어가 볼 수 있다.

대형 봉헌 비문 Grande iscrizione dedicatoria

기원전 2년에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아들과 미래 후계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제작하게 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아그리파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딸인 율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제는 카이사르를 아우 가이우스와 함께 입양했고, 아우구스투스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훗날 제위에 오르게 된다.

새겨진 글은 기원전 55년 카레 전투로 정복당했던 휘장이 기원전 19년에 반환된 것을 기념하는 내용이며, 당시 다른 아치에서 일부를 떼어 만들었다. 네 개의 벽돌 교각이 비문을 지탱하고 있다. 그 북쪽에는 에밀리아 바실리카로 이어지는 작은 문으로, 세개의 기둥이 유적으로 남아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와 아우 가이우스를 기리기 위해 세운 문인 가이우스와 카이사르의 현관(Portico di Gaio e Lucio Cesari)의 기둥 세 점이 보인다.

에밀리아 바실리카 Basilica Emilia

로마에 세워진 두 번째 공화당(Basilica)으로 사법, 금융, 상업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본래 기원전 5세기에 지었던 건물로 이후 많은 재건을 거쳤다. 길이 100m, 폭 30m로 전면에 16개의 아치가 세워져 있었고 이 중 하나가 입구였다. 바실리카로 고친 것은 기원전 168년으로 에밀리아 가문이 증축했다고 하며 이루 기원전 67년에 역시 에밀리아 가문에서 다시 고쳐 지었다. 이후 410년에 서고트 족이 로마를 점령할 당시 화재로 일부가 소실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61년의 기념 동전과 15세기 그림에 당시 모습이 묘사돼 있으며, 바닥 돌을 자세히 보면 화폐가 불탄 흔적들이 남아 있다.

타베르나에 노바에 Tabernae Novae

에밀리아 바실리카 앞 자리에는 거리 상점들인 타베르나에 노바에가 죽 늘어서 있었다. 타베르나(Taberna)는 일반적으로 상점이나 사무실 건물을 의미한다.

이곳에서는 와인, 더운 음표, 소시지, 빵 등의 먹거리를 팔았으며 책 장수, 이발사나 미용사들도 곧잘 나타나곤 했으며 은행업자가 환전상들도 모였다.

클로아키나 여신 예배당 Sacello di Venere Cloacina

타베르나에 노바에 앞에 있는 예배당 유적이다. 기원전 5세기, 권력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평민 계급의 처녀 비르기니아에게 반해 그녀를 수중에 넣기 위해 권력을 부당하게 휘두른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순결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딸을 칼로 찔러 죽이는데, 이를 본 대중은 격분해 봉기를 일으켜 아피우스 클라디우스를 위시한 독재자들이 몰락하고 민주제도와 법질서가 다시 회복되었다. 한 처녀에 대한 부당한 횡포가 마침내 국가전복을 야기한 정치적 사건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 예배당은 비르기니아의 아비인 백부장이 그녀를 죽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작은 원형으로 된 대리석 건물의 유적으로, 기원전 42년의 동전이 남아 있어 모양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명예의 기둥 Colonne Onorarie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4~305) 황제 때인 3세기 후반에 포룸 로마눔의 남쪽에 있는 바실리카 율리리아(Basilica Iulia)의 전면과 평행하는 위치에 일렬로 7개의 기둥을 만들고 이름을 명예의 기둥이라고 붙였다.

높은 정사각형 기단에 기둥을 세우고 원래는 그 위에 토가를 입은 동상이 서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토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기둥도 두 개만 남아 있다.

바실리카 율리아 Basilica Giulia

건축학적 특성이 풍부한 이 공회당은 로마인들의 삶에 아주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회의가 열리고, 국가의 공공업무나 법률 업무가 수행되었다. 카이사르가 옛 셈푸로니아 공회당 터 위에 지었다 하여 그의 이름 ‘Julius(이탈리아어로는 Giulio)’을 따 바실리카 율리아라고 부르게 됐다. 공사 비용은 갈리아전쟁에서 챙겨온 전리품으로 충당했으며,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공사가 지연되다가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된 이후인 54년에 완공했다.

바실리카 율리아는 처음에 시민 법정으로 사용했는데 점차 상점, 정부관청, 은행도 들어섰다. 특히 상점과 은행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에 자주 들렀고, 서로 약속을 할 때 만나는 장소로 인기를 얻었다.

1세기 무렵에는 상속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100인 법정’이 열리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민사 소송을 담당하던 180여 명의 변호사들이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서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게 하거나 반대편에게 야유를 퍼붓도록 시켰다고 한다. 그때 그 일을 도맡았던 사람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주사위 놀이를 하며 기록한 점수 일부가 계단에 새겨져 있다.

포카 황제의 기둥 Colonna di Foca

동로마 제국의 플라비우스 포카(Flavius Phocas) 황제가 로마를 방문한 기념으로 세워진 기념물이다. 라벤나(Ravenna)의 총독 스마라그두스(Smaragdus)가 7세기 초에 건립했으며, 포룸 로마눔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세워진 건축물이다. 기둥의 꼭대기에 원래 도금한 포카 황제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높이는 13.6m이고 세로로 홈이 새겨진 코린트 양식의 원주가 흰대리석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 구조이다. 포카 황제가 판테온(Pantheon)을 성당으로 개축해 교황 보니파시오 4세(Bonifatius IV)에게 봉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증표이기도 하다.

코미치오 Comizio

코미치오(Comizio/Comitium)는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정치 및 사법 행위가 이뤄졌던 중심지로 회합의 결과를 알리던 장소이자 시민들이 모여 집정관을 선출하던 곳이다. 일찍이 로물루스와 사비나의 타티우스가 화해하기로 하고 이를 천명한 장소도 여기였다고 한다.

라피스 니제르 Lapis Niger

‘검은 대리석’이라는 뜻으로 로마를 세운 로물로스의 무덤이라고 추정된다. 지상에 덮은 이 석판은 로물루스의 묘지 덮개였다고 한다. 내부에서 라틴어로 된 비문이 하나 발견됐는데, 여기에 씌어 있는 글씨는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라틴어 금석문 중 하나이다.

쿠리아 유리아(원로원 의사당) Curia Iulia

고대 로마의 입법 자문기관 역할을 했던 곳으로 벽돌로 된 4층 구조이다. 소실된 것을 재건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과거 원로원 의원들이 모이던 곳이다.

원래 쿠리아는 작은 모임이나 부족을 나타내는 말이었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나 정부기관이 들어간 건물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이후에는 바티칸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이기도 했다.

쿠리아는 로마 정치의 변화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원래 원로원 의원들은 기원전 7세기경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왕이 만든 쿠리아 호스틸리아라는 곳에 모여 국정을 의논하곤 했다. 그런데 원로원 규모가 점점 커지고 정치적 중요성도 높아지자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쿠리아를 확장하기로 한다. 하지만 폭동으로 쿠리아가 불에 타는 바람에 새로 쿠리아 코르넬리아라는 쿠리아를 만들었다. 로마 정치에서 원로원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시간이 흘러 기원전 44년 로마 정치를 완전히 장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쿠리아 코르넬리아를 신전으로 바꿔 버린다. 이후 이 건물이 어떻게 해서 없어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대신 카이사르는 쿠리아 율리아를 새로 만들기로 한다. 그런데 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건설 작업에 잠시 차질이 빚어졌고,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공사를 재개해 기원전 29년에 완공하고 이름도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율리아라고 붙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카이사르는 바로 이곳에서 “부르투스, 너마저…….”라는 유언을 남기고 살해당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쿠리아 율리아를 완공했다는 것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종말과 제정 시대의 서막을 상징한다.

쿠리아 율리아에는 원래 청동 문이 달려 있었는데, 1660년 교황 알렉산더 7세가 문을 떼어내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했다(오른쪽 사진). 지금 있는 문은 이후에 만들어져 달린 것이다. 또 이 건물에는 원래 회랑이 있고 미네르바 동상이 서 있었으며, 지붕 쪽에는 날개 달린 빅토리아가 세워졌다. 이 두 여신상은 원로원의 지혜와 제국의 막강한 힘을 상징했다. 내부에는 좌석이 300개 있었는데, 카이사르 시절 원로원 의석수가 600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은 편이다. 원로원 의원들이 항상 모두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적게 만든 것이다. 좌석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콩코르디아 신전으로 옮겨 회의를 진행했다. 홀 뒤쪽에는 집정관과 황제 등이 앉는 자리가 있었다.

쿠리아 율리아는 7세기 무렵 교회로 바뀌어 르네상스 시대의 파괴의 파도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30년대에 교회의 역할을 포기하고 다시 원래 위상으로 되돌아왔다.

세베리우스 개선문 Arco di Settimio Severo

203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리우스(재위 193~211)가 자신의 즉위 10주년과 함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문이 지어진 곳의 지대가 낮은 탓에 중세 시대에 들어여러 번의 홍수로 파묻혔으며, 1742년에는 심지어 땅위로 아치의 위쪽 반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포룸 로마눔의 본래 높이에서 계단으로 이어지는 석회화물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아치 세 개가 연이어진 모습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죽은 후에는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공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212년 카라칼라가 게타를 살해한 후 단독 지배자가 되었고, 이후 게타의 기념비와 게타에 관련된 모든 문구와 기록, 각종 상들이 공공 건축물과 기념물에서 제거·파괴됐다. 이에 따라 이 개선문의 아치에서도 게타에 관한 문구와 그림이 모두 삭제되었다. 승리를 나타내는 의미로 지어졌지만, 마지막에는 형제 간의 피로 손질된 잔혹한 기념물이 된 셈이다.

로스트라 연단 Rostri

유명한 정치가들이 연설하던 연단으로 뱃머리의 부리를 뜻하는 라틴어 ‘로스트룸’의 복수형이며, 기원전 388년 악티움 해전에서 나포한 적선의 부리로 연단을 장식했던 데서 유래했다. 연설자들은 이곳에 서서 원로원들과 로마 국민에게 연설을 했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그의 후계자 안토니우스가 로마 시민에게 재산을 상속한다는 내용이 담긴 카이사르의 유서를 공개하며 이곳에서 추모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 연설을 계기로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화정파 귀족들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던 성난 시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로마의 배꼽 Umbilicus Urbis

로마가 세상의 상징적인 중심(Umbilicus Urbis; 원형의 배꼽이라는 뜻)을 천명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직경 4.45m의 벽돌 모양으로 남아 있다. 기원전 2세기경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도시의 상징적인 중심을 나타낸다 하여 배꼽(Umbilicus)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로마 시대에는 배꼽이 중심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투르노 신전 Templo de Saturno

포룸 로마눔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로마 공화정 시대 시민들이 가장 숭배하던 신전이다. 기원전 498년 티토라치오 집정관이 건립했으며 농업의 신인 사투르노(사르투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원로원이 공포한 주요 칙령, 귀중품을 보관하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지하에는 금고와 공화정의 신성한 제물들을 보관했다.

지금의 건물은 3세기 이후의 화제로 재건된 것이며, 이오니아식 기둥 여덟 개만 남아 있다.

황금이정표 Miliarium Aureum

로마 제국이 발전하면서 로마인들은 도로를 표준화하고자 했다. 기원전 450년경 도로의 구간 길이를 정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주요 도로에 매 1000걸음마다 공식 이정표를 설치했다.

그러던 중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0년, 포룸 로마눔에 아예 금으로 도금한 황금 이정표를 세운다. 로마 제국 영토의 모든 길의 시작이 로마임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로마와 연결되는 모든 길은 이 지점에서부터의 거리가 표시됐고, 각 도시에는 그 도시와 이 이정표까지의 거리를 표기해 두었다. 로마 제국의 어디에서든 로마와의 거리를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또 24~30킬로미터 지점마다 공무 출장자를 위한 숙박시설을 만들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여기서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는 이정표의 받침 부분 일부만 남아 있다.

신들의 현관 Portico degli Dei Consenti

1834년 발굴됐다. 둔각으로 만나는 열두 개의 기둥이 남아 있고 각 기둥은 저마다 다른 디자인으로 표현돼 있다. 쥬피터와 주노(Jupiter -Juno), 넵튠과 미네르바(Neptune-Minerva), 아폴론과 디아나(Apollo-Diana), 마르스와 비너스(Mars-Venus), 불카누스와 베스타(Vulcan-Vesta), 머큐리와 세레스(Mercury-Ceres)의 열두 남녀 신이 짝을 이루어 형상화돼 있다. 파손되었다가 카피톨리노 언덕의 이교도들의 지도자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신전 Tempio di Vespasiano e Tito

카이사르 신전이 지어진 이후 로마에서는 고인을 기리는 각종 기념물을 세움으로써 가문의 영광을 드높이는 게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여기서 황제 가문이 택한 것은 집이나 기념비가 아닌, 신전이었다.

최고 권좌에 오른 티투스 황제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신격화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왕이 되자마자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티투스는 즉위한 지 2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87년에 신전을 완성했는데 아버지와 함께 형 티투스도 신격화해 신전에 모신다. 원래 도미티아누스는 형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형도 신격화해야 가문의 위상이 높아지고 자신의 권좌도 공고해진다고 생각해 형도 모시기로 했다.

콩코르디아 신전 Tempio della Concordia

제 2의 로마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 ?~기원전365) 시기에 건립되었다. 갈리아 인의 로마 약탈 이후 정치적 지위가 향상된 평민들의 요구로 평민회와 호민관 제도가 설치되었지만, 평민과 귀족의 대립은 끊이지 않았다. 적이 쳐들어오면 귀족과 평민이 단결하여 싸워야 하는 로마에서는 이런 정치적 불안이 지속되어서는 안 되었다. 전쟁 영웅이기도 한 카밀루스는 기원전 367년에 호민관인 리키니우스와 세크티우스가 제안한 새로운 법을 귀족들이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이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두 사람의 집정관 중 한 사람은 평민 중에서 뽑도록 해 평민에게 모든 공직을 개방하고,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공유지(전쟁 등으로 로마가 확장한 땅)를 제한을 하자는 내용이다. 이 법이 성립함으로써 평민들도 공직에 진출하게 되었고 귀족들의 재산을 제한하면서 평민들의 재산이 늘어 평민의 경제적 기회도 강화되었다. 이렇게 로마는 사회적 개방과 통합으로 천년 왕국을 이룬 것이다. 이를 기념해 지은 신전이 바로 콩코르디아 신전이다.

콩코르디아는 조화와 화합의 여신이며, 라틴어에서 concordia는 공감과 조화를 의미한다. 로마 사람들이 콩코르디아를 조화와 평화의 여신으로 신격화하고 신전을 세워 기념하고 숭배한 것은 조화와 평화가 사회 유지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로마가 제 2건국을 하고 천년 왕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버리거나 제한하면서 이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포룸 로마눔 출구 밖

마메르티노 지하 감옥 Carcere Mamertino

마메르티노는 산 쥬제페 델 팔레냐미(San Giuseppe dei Falegnami, 목수요셉교회)의 지하에 있고,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서만 들어갈 수 있다. 카톨릭 교인들만 감금하고 형벌을 가했던 곳으며 바울과 베드로가 죽기 전 갇혔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울의 경우 과연 마메르티노에 수감되었지는 의문이다.  바울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 후서를 보면 로마에서 두 번째로 ‘갇힌 몸’이 된 것을 언급하며 겉옷과 책을 부탁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악명 놓은 마메르티노 감옥에서 이 같이 외부와의 교류가 가능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로마 시민권자이자 달변인 바울이 특별대우를 받았을 수도 있다.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 시기는 약 64년에서 67년 사이로 추정된다. 64년은 바로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한 해인데, 네로 황제가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기독교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한다. 바울과 베드로를 지키던 두 간수인 프로체수스(Processus)와 마르티니아누스(Martinianus)는 오히려 그들로 인해 종교를 바꾸게 되는데, 베드로는 예수를 받아들인 이들에게 감옥 바닥에서 솟아난 기적의 샘으로 세례를 베푼다. 그 흔적으로 아직도 바닥에 자그마한 물이 흐르는 곳이 있다(오른쪽 사진). 67년 경, 두 간수는 아우렐리안 성벽 밖 오스텐세 길에서 바울과 함께 참수형을 당했고, 로마시민권자가 아닌 베드로는 바티칸 언덕에서 참수형 대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처형되었다.

주소 Via del Tulliano&nbsp
입장료 15€
운영시간 매일 09:00-19:00 / 매20분 간격 입장

산 루카와 마르티나 성당 Chiesa dei Santi Luca e Martina

228년 처음 건립되었고 1256년 복원한 것을 17세기에 재건했다. 본래 228년에 순교한 성 마르티나에게 헌정된 성당인데, 1577년 ‘산 루카’ 학회에서 이 성당을 기부 받아서 성 루카를 함께 기리는 성당이 되었다.

 

카피톨리노 언덕 Capitolino

캄피돌리오(Campidoglio)라고도 한다. ‘카피톨리노’는 수도(Capital)를 의미한다. 로마의 일곱 언덕 중 가장 신성한 언덕으로 생각되었으며, 원래는 언덕 위에 있었던 유피테르 신전을 가리켰으나 언덕 전체를 가리켜 말하기도 한다. 이 신전은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의 3신을 제사한 신전이며, 기원전 509년에 완성되어 로마 국가 종교의 중심이었다. 집정관·속주총독의 취임서약, 개선장군의 환영도 여기에서 행했다. 페트라르카가 월계관을 받은 곳도, 기번이 󰡔로마 제국 쇠망사󰡕를 착상한 곳도 이 언덕이다.

타불라리움 Tabularium

기원전 78년에 세운 공문서 보존관이다. 공포정치로 로마를 벌벌 떨게 만들면서 수년간 독재관을 지내고 로마의 정치 체제를 과거로 돌리려 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세운 건물이다. 약 70x44m 크기이다. 직육면체로 자른 돌을 긴 쪽과 횡단면을 교차시켜 쌓은 정층벽을 ‘오푸스 크아드라툼’이라고 하는데, 타불라리움은 공화정 말기 이 벽의 가장 훌륭한 예이다. 석조벽에 콘크리트의 볼트 천정을 덮었고 밖으로 아케이드의 갤러리를 달았다. 상층에는 콘크리트 식 오더가 사용되었으나 이것은 기원 1세기의 것이라 추정되고 후에 콜로세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두 종류 이상의 오더를 각층에 겹쳐 적용하는 건축의 선구가 되었다.

이후 중세에는 폐허가 된 타불라리움 위에 세나토리오 궁전(Palazzo Senatorio)이 지어졌다. 중앙의 세나토리오 궁전 양쪽으로는 누오보 궁전(Palazzo Nuovo)과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dei Conservatori)이 있는데, 이 두 건물은 고대 로마 시대의 유물을 소장한 박물관이다. 현재는 로마 시청(Comune Di Roma) 청사로 쓰이고 있다. 지하 터널을 통해 카피톨리니 박물관으로 이동할 수 있다.

로마 여신 분수 Fontana della Dea Roma

포룸 로마눔 반대편의 시청사과 카피톨리노 광장 사이에 서 있는 분수로, 16세기에 제작됐다. 가운데 짙은 갈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여신이 로마 승리의 여신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여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에는 원래 미네르바 여신상이 서 있었는데, 10년 후 미네르바 여신상은 카피톨리니 박물관 정원으로 옮겨지고 로마 여신상으로 붙여졌다. 또 양쪽에 원래 나일 강과 티그리스 강을 상징하는 대형 석상들이 있었는데 대신 늑대와 로물루스 형제의 석상으로 교체했다. 분수를 이렇게 바꾸는 것에 대해 미켈란젤로의 제작이나 카피톨리노 광장을 완성한 자코모 델라 포르타라 크게 반대했지만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카피톨리니 박물관 Musei Capitolini

카피톨리노 광장과 함께 지어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누오보 궁전과 콘세르바토리 궁전을 합친 것을 말한다. 티켓을 사면 궁전 두 개를 모두 볼 수 있다. 두 궁전 사이는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데 타불라리움까지 갈 수 있다. 로마의 기원과 관련된 유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소장품으로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상, 324년에 제작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거상(신체 조각 하나의 크기가 2미터를 넘으며, 부서지지 않았다면 12미터나 되었다고 함), 미켈란젤로 광장에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청동 기마상 진본 등이 있다.

주소 Piazza del Campidoglio, 1
입장료 11.5€
운영시간 09:20:00

카피톨리노 광장 Piazza del Capitolino

카피톨리노 언덕에 1547년에 건설된 광장이다. 좌우에 있는 카피톨리니 박물관 건물 두 개와 그리고 타불라리움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계단으로 트여 있다. 코르도나타(Cordonata)라는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이 계단에서 바라보는 광장 건물들의 조합이 매우 아름다우니 포룸 로마눔 쪽에서 넘어왔더라도 계단을 따라 꼭 역으로 걸어 올라가 보기 바란다. 이 계단은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쪽에서 오를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광장 입구에는 로마 공화정 시절 약세였던 로마군을 도와 주변 부족을 물리친 쌍둥이 형제 디오스쿠리의 석상이 있다. 코르도나타 계단과 쌍둥이 형제의 석상과 어우러지면 광장이 더욱 화려해 보인다. 그물망 같은 통로와 통로가 만나 광장을 이루는 로마의 다른 광장들과는 달리 도시의 상부에 위치한다.

광장 제작을 의뢰한 사람은 교황으로, 마차가 오를 수 있어야 하는 계단을 주문했다고 한다. 물론 사람 또한 편하게 오를 수 있어야 하는 계단이어야 했다. 고민 끝에 미켈란젤로는 재미있는 발상을 한다. 착시 현상을 이용한 것. 그가 사용한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계단의 폭을 이용해 소실점 현상을 없앤 것이다. 보통 사람이 아래에서 계단을 올려다 볼 때에는 위로 갈수록 계단 칸의 폭이 좁아지는 것을 보고 대충 높이를 가늠하곤 하는데, 코르도나타 계단은 위로 갈수록 계단 폭을 넓게 해서 아래에서 보면 그 높이가 높아 보이지 않아 마치 금방 올라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또 한 가지 방법은 계단 위 양 옆에 세운 디오스쿠리 형제의 동상으로 눈속임을 만든 것인데, 동상 자체의 크기를 크게 하고 아름다운 인체 비율을 과감히 무시하고 두상을 크게 만들어 아래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원근감을 적게 느끼게 했다. 이런 발상들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이고 매우 독창적이었다.

또한 광장과 안쪽으로 좁아지는 세 건물의 구조, 긴 경사로로 미켈란젤로는 인간 형태의 광장을 만들어냈다. 호민관 건물은 인간의 머리와 어깨, 양쪽의 카피톨리니 미술관과 호민관 건물은 팔, 광장은 배, 중앙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은 배꼽, 긴 경사로는 다리를 표현한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청동 기마상 Statua equestre di Marco Aurelio

카피톨리노 광장에는 로마의 현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us, 121~180)의 청동 기마상이 있는데 이것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카피톨리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중세 들어 로마 황제들의 동상은 기독교도들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으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도를 박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사상이 기독교에 영향을 크게 끼친 관계로 유일하게 그의 동상만 훼손당하지 않았다.

아라 코엘리 계단, 아라 코엘리 성당 Scalinata dell'Aracoeli, Basilica di Santa Maria in Ara coeli

완만한 코르도나타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왼쪽으로 또 하나의 계단이 가파르게 나 있는데 이것이 아라 코엘리 계단이다. 총 124개의 대리석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 이곳에 돈을 만드는 주조창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계단을 오르면 복권에 당첨된다는 속설이 있다.

아라 코엘리 계단을 오르면 끝에서 산타 마리아 인 아라 코엘리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Ara coeli)을 만난다. 하늘 위에 있는 성당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산타 밤비노라는 아기 예수상이 있는데(오른쪽 사진) 이 예수상을 보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다.

겉모습은 매우 소박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성당 내부는 화려하며, 특히 수십 개의 샹들리에와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만들어 내는 빛이 아름답다. 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는 어두운 내부를 비출 목적으로 만지만, 정작 이것이 만드는 색깔 그림자는 찾기 어려운데, 아라 코엘리 성당 바닥에는 알록달록한 빛 그림자를 만나볼 수 있다.

아라 코엘리 인슐라 Insula Romana dell'Ara Coeli

2세기 초에 지어진 고대 로마의 아파트로, 당시 빈민들의 주거 공간이었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120년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을 영토로 편입하자, 전쟁 노예라는 양질의 노동력이 대량으로 들어와 이를 부리는 대규모 농장이 생기고, 속지에서 생산된 값싼 농산물들이 로마로 유입된다. 그러자 가격 경쟁력에서 밀린 이탈리아 반도의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할 지경에 이르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은 너나없이 일자리를 찾아 로마로 몰려든다. 사람들을 수용할 충분한 주거공간이 없었던 로마에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는 현상은 미처 예기치 못했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땅은 비좁은데 사람은 넘쳐나니 땅값과 집값은 치솟을 수밖에 없어서 갈수록 주거 문제가 불안해 지자,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당시로는 획기적인 벌집 같은 주거형태가 등장했다. 이것이 바로 인슐라(Insula)이다.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조국의 제단) Altare della Patria, Monumento Nazionale a Vittorio Emanuele II

통일 이탈리아의 첫 번째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으로, 일명 ‘통일기념관’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독립기념관인 셈이다. 에마누엘레 2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기념관 앞에 붙인 형태이다.

아주 새하얀 색으로 칠해진 건물이라 멀리서 빛이 비치면 눈이 부실 정도이다. 기념관 앞에 있는 가운데 기마상이 에마누엘레 2세 황제인데 이곳 앞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아름답다. 기마상을 만들고 나서 만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축배를 든 사진도 있다. 기념관은 대략 열댓 명 정도 되는 성인이 들어갈 정도로 크기가 크며, 기념관 앞에는 베네치아 광장이 있다. 이 광장에서 바라보는 기념관의 위엄이나 크기로 볼 때 이탈리아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알 수 있다. 새하얀 색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며 이 건물을 ‘웨딩케이크’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기념관 앞에서는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는데, 이들은 기념관 중앙 계단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지키고 있다. 이 불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불이라고 한다. 기념관 정문을 들어가면 경찰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데, 로마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앉아도 뭐라고 하지 않으나 기념관 내부의 계단에 앉아 있으면 바로 주의를 주고 일어나라고 하니 조심해야 한다.

베네치아 광장 Pizza Venezia

베네치아 광장은 로마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곳에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일반적인 광장처럼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잔디로 이루어져 있고 가운데로 길이 나 있어 지나갈 수 있게 해 놓았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정 가운데에서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장소이다.

광장 바로 옆에는 베네치아 궁전(아래 사진)이 있다. 산마르코 성당에 봉직하던 추기경들의 자택으로 세운 중세 건물 ‘산 마르코 궁전’을 1451년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조카 피에트로 바르보 추기경이 보수해 요새화된 구조로 만들었으며, 이 때 건설에 필요한 석재 대부분을 콜로세움에서 가져다 썼다. 1469년에는 교황의 궁전이 되어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1564년 교황 비오 4세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청 대사관으로 임대했는데, 그 이후로 베네치아 궁전이라는 이름이 되었고 베네치아 광장의 이름도 여기에서 따왔다. 이 궁전은 한 때 무솔리니의 집무실로 쓰였는데, 이 건물에서 정치인들과 만나곤 했으며 광장 쪽 발코니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현재는 국립 베네치아 궁전 박물관이 내부에 위치해 있다.

포룸 임페리알레 Foro Imperiales

트라야누스 포룸 Foro Traiano

로마 오현제 시대 두 번째 황제인 트라야누스는 재위 기간 동안 다키아, 나바테아 왕국,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등을 병합해 로마제국을 최대 판도로 넓힌 유능한 황제였다. 로마 원로원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빈민자녀 부양책, 도시·농촌 공동화 현상 대비책 등을 추진했으며 수많은 공공건물을 지어 시민들에게 기증했다. 이런 트라야누스였던 만큼 자신도 과거의 어느 황제보다 거대하고 위대한 포룸을 짓기로 한다.

그 결과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퀴리날레 언덕의 능선을 모조리 깎아내어 공간을 확보해 트라야누스 포룸을 지었는데, 로마 제국의 포룸 중 최대 규모였다. 대리석으로 드넓게 깔린 광장은 거대한 원기둥으로 둘러싸였고, 기둥 안쪽에는 사무실이나 점포들이 들어섰으며 좌우 반원형 공간인 엑세드라(Exedra)는 학교로 이용됐다. 정면에 있는 울피우스 회당에는 지붕을 씌워 햇볕이나 비를 피해 상거래를 하게 하고 재판을 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회당 너머에는 거대한 도서관도 있었고(오른쪽 사진의 짧은 기둥들이 그 흔적), 그 옆에 트라야누스 기둥이 있었다. 이 거대한 트라야누스 포룸의 부속 건물로 세워진 것이 오늘날 유일하게 남아있는 트라야누스 시장이다. 어떤 황제도 지은 적 없는 광대한 포룸을 짓고 싶어 했던 트라야누스 황제의 소원은 완벽히 이루어졌다.

2천년이 흐른 지금은 웅장했던 흔적이 트라야누스 시장과 트라야누스 기둥으로만 남아 있다. 20세기 초 독재자 무솔리니가 히틀러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심에 넓은 도로를 건설하면서 트라야누스 포룸 유적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 기둥 Colonna Traiana

‘가장 로마적인 황제’인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janus, 53~117)가 두 차례에 걸친 다키아(현 루마니아) 원정을 기념해 만든 것으로 그 시대에 대한 값진 정보들을 기록하고 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자신의 포룸에 세운 이 기둥의 높이는 40m이며 평탄화 공사를 하기 전의 퀴리날레 언덕과 정확하게 같은 높이로 쌓아 올렸다. 당시의 측량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기둥 받침 쪽에는 트라야누스를 화장한 재가 담겨진 황금 항아리를 안치한 방과 거기에 딸린 작은 회랑이 있었다고 한다. 기둥 안쪽에는 기둥의 끝까지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이 있으며, 기둥 밖에서 보이는 작은 구멍들은 이를 위한 채광창이기도 하다. 기둥 꼭대기에는 현재 성 베드로의 조상(彫像)이 놓여 있는데 르네상스 시대인 1587년까지만 해도 (놀랍게도) 트라야누스 황제의 조상(彫像)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 기둥에서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기둥 외관을 따라 나선형으로 새겨져 있는 다키아 원정의 부조이다. 두 차례에 걸친 다키아 원정(101~103, 107~108)의 내용이 총 200m 길이에 걸쳐 묘사돼 있는데, 등장인물이 2,500명에 달한다. EUR(Esposizione Universale di Roma: 로마만국박람회)의 로마 문명 박물관에 이 부조를 복원해 놓은 것이 있어서 자세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기둥이 온전히 남겨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레고리오 대교황(Gregorius Magnus) 덕분이다. 그가 이 기둥을 보던 중 트라야누스 황제가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는 장면에서 감동을 받아 황제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는데, 그러자 천사가 나타나 교황에게 트라야누스의 영혼이 구원됐다는 것을 알려주며 더는 이교도들을 위해 전구하지 말라고 청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트라야누스 황제를 화장한 재를 밖으로 꺼냈을 때, 아직 재 속에 온전히 남아있던 트라야누스의 혀가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지옥에서 구원됐는지를 말해서 알려졌다는 전설로 전한다. 이후 이 주변의 땅은 거룩한 곳으로 선언됐고 기둥은 보존됐으며, 다만 1587년에 기둥 꼭대기의 트라야누스 황제의 조상만 손에 열쇠를 든 베드로 사도의 조상으로 교체됐다(손에 열쇠를 든 성인은 무조건 베드로다).

트라야누스 시장 Mercati di Traiano

트라야누스 포룸을 건설한 건축가 아폴로도루스가 주로 벽돌과 콘크리트를 사용해 지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몰로 추정되며, 여러 층에 상점과 아파트가 있었다. 또한 이곳의 아케이드에 트라야누스 황제의 행정기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하층은 시장, 상층은 사무실로 사용했고 정교한 대리석 바닥과 도서관 유적이 눈에 띈다. 시장에서는 주로 기름, 와인, 해산물, 식료품, 야채, 과일 등이 거래됐다. 나중에 요새나 수도원으로도 쓰였고, 중세에 추가로 건설한 부분이 오늘날까지 이어고 있다.

옛 로마인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건물로 로마 시의의 계속된 복구 작업을 통해 새로운 유물과 모습이 드러났다. 현재 시장으로 사용되던 건물 하부의 2개 층이 남아 있으며  그중 일부가 일반에 개방된다.

주소 Via IV Novembre, 94
입장료 9€
운영시간 매일 09:00-19:30

밀리치에 탑 Torre delle Milizie

트라야누스 시장 중앙부 뒤편에 높이 솟은 2층 구조의 사각 탑이다. 트라나유스 시장이 요새로 바뀌었던 1200년에 덧붙여진 방위 시설이다. 13세기 말에는 당시 권세가 높던 안니발디(Annibaldi) 가문이 소유했고 이어서 여러 가문들이 차례로 소유하다가, 1619년에는 이웃한 산타 카테리나 아 마냐나폴리 교회(Santa Caterina a Magnanapoli) 수녀원의 수녀들이 사용했다. 네로 황제 당시 건설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이에 따라 ‘네로의 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0.5×9.5m 크기의 사각형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1348년 일어난 지진으로 상층부가 부서지고 구조도 약간 휘었다. 현재 높이는 약 50m이다.

로도스 기사의 집 Casa dei Cavalieri di Rodi

본래 아우구스투스 포룸이 지어질 때 만들어진 건물인데 5세기 큰 지진으로 훼손됐고, 이후 복원을 거쳐 교회와 수도원으로 쓰였다. 1320년경에는 성 요한 기사단, 즉 몰타기사단이 소유하게 되면서 이곳을 본부로 썼는데, 이 기사단의 본거지가 로도스 섬이라 하여 ‘로도스 기사의 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16세기에는 다시 수도원으로 쓰였으며, 원래 종탑이 있었는데 1838년 폭파됐다고 한다. 수도원이 철거되고 20세기 중반에 복원을 통해 로마 시의 소유가 됐다.

주소 Piazza del Grillo, 1
입장료 ?€(예약제)
운영시간 일~목 05:30-23:30, 금-토 05:30-13:30

아우구스투스 포룸 Foro di Augusto

기원전 41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의 싸움에서 이긴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건설됐다. 본래 기원전 2년에 완성한 마르스 신전과 그 주위를 둘러싼 주랑을 두고 지었다. 이 신전은 현재 금이 간 층계와 네 개의 코린트 양식 기둥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신전 내진에 있는 아프시스 앞에는 본래 높이 12m의 마르스 신상이 있었지만 현재는 없다.

높은 연단, 깊은 전실(前室), 중앙에 제단이 있는 넓은 정면 계단, 또 이 신전은 좌우대칭의 측랑을 중앙에 둠으로써 신전과 포룸 전체의 정면성을 강조한 점과 신전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 점은 전형적인 로마 건축법이다. 이후 티베리우스 황제가 19년에 신전 양측에 개선문을 세웠다고 한다.

콘티의 탑 Torre dei Conti

중세 로마를 대표하는 탑 중 하나이다. 1238년에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의 형제인 리처드 콘티(Richard Conti)가 짓게 한 것으로, 자신의 가족이 살 거주지로서 건축했다.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29m이지만 한때 50~60m 높이를 자랑했는데, 때문에 'Major Tower'라는 뜻인 마지오레 탑(Torre Maggiore)로 불리기도 했다. 원래는 포룸 임페리알레의 유적에서 가져온 자재로 외벽을 덮었는데, 16세기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포르타 피아(Porta Pia)를 건설하기 위해 다시 제거됐다고 한다. 위층은 1348년 지진으로 파괴됐다가 미처 재건되기도 전에 17세기에 또 한 번 지진을 만나 크게 손상됐다.

네르바 포룸 Foro di Nerva

도미티아누스가 착공했지만 네르바 황제가 제위에 오른 직후에 완공해서 네르바 포룸이라고 한다. 오스티아에서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가 접안하는 항구 근처에 세워진 네르바 창고 역시 같은 이유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포리 임페리알레 거리 Via dei Fori Imperiali

길이 850m, 너비는 30m의 거리로 베네치아 궁전부터 콜로세움까지 곧장 뻗어 있다. 본래 트리움팔레 거리(Via Triumphale)라고 불리던 것을 무솔리니 독재정권 때인 1932년 재건했는데, 이때 주변 도로도 정비하면서 트라야누스 포룸, 아우구스투스 포룸, 네르바 포룸이 도로로 나뉘었다. 포리(Fori)는 라틴어 포룸(Foro)의 복수형이다.

이 거리가 지나는 지역은 기원전 54년 카이사르가 처음으로 포룸을 건설한 이래 여러 황제들이 재위 기간 동안 건물을 확장한 곳으로, 도로 이름 역시 또한 ‘여러 황제들의 포룸’이라는 뜻이다. 도로 양쪽의 유적에서 이루어진 많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그 밑에 로마제국의 주요한 유물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19세기에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하면서 중세시대 건물들을 철거했고 이후에도 계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포폴로 광장 Piazza del Popolo

포폴로 광장은 ‘민중의 광장’이라는 의미로 원형으로 조성돼 있다. 포폴로 광장에도 여느 광장과 같이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는데 기원전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를 정복 후 가져온 것이다. 포폴로 광장 남쪽으로는 반듯한 직선형 거리인 코르소 거리, 리페타 거리, 바부이노 거리가 세 갈래로 뻗어 있다. 포폴로 광장 우측으로는 핀치오 언덕이 있으며, 언덕 위로 올라가면 포폴로 광장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

이 광장에는 포폴로 문(Porta del Popolo)이 있는데 교황 피우스4세가 건설했으며 17세기 스웨덴 여왕을 맞기 위해 베르니니가 장식을 다시 했다고 한다.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는 왕의 지위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해 로마에 정착했다고 한다. 포폴로 문은 플라미니아 문이라고 불렸으며, 테르미니 역에 생기기 이전까지 외부에서 로마로 들어오는 관문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실제로 기원전 220년경 플라미니아 가도의 출입구로 쓰였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del Popolo

포폴로(Popolo)는 ‘백성’이라는 뜻이고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Santa Maria del Popolo)’는 ‘백성들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다. 포폴로 광장에 있는 교회로, 1472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세웠다.

이 교회가 건축된 데에는 네로 황제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이 자리에는 원래 네로 황제의 무덤과 호두나무가 있었는데, 이곳에 계속 네로 황제의 망령이 나타나 백성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을 들은 교황이 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 성당은 특히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중 카라바지오의 <베드로의 십자가형>과 <바울의 회심>이라는 명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베드로의 십자가형>은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브라만테, 베르니니 등 유명 예술가의 작품이 있다. 유명한 가문들은 이 교회에 자신들을 위한 예배당을 가지고 있었는데, 체라시 예배당은 카라바지오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고, 키지 예배당은 라파엘로가 설계했다. 건물 뒤쪽 언덕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쌍둥이 성당 Santa Maria dei Miracoli, Santa Maria in Montesanto

포폴로 광장 남쪽에 있는 두 성당으로, 왼쪽에 서 있는 산타마리아 인 몬테산토 성당(Santa Maria in Montesanto)과 오른쪽에 서 있는 산타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Santa Maria dei Miracoli)을 외관이 비슷하다고 해서 흔히 ‘쌍둥이 교회’로 부른다.  포폴로 광장에 포인트를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칭적 형태로 설계된 성당들입이다. 실제로는 크기가 다르지만 광장에서 보이는 부분을 같은 크기로 건축했기 때문에 쌍둥이 성당으로 부른다.

왼쪽의 몬테산토 성당은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명령으로 1662~1675년에 세웠다. 본래 카르멜회 교회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세웠으며 추기경 지롤라모 가스탈디(Girolamo Gastaldi)가 재정을 지원했다. 몬테산토란는 ‘성스러운 산’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에 있는 카르멜 산(Mount Carmel)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본래 건축가 카를로 라이날디(Carlo Rainaldi)가 설계했지만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가 수정했으며, 이어 카를로 폰타나(Carlo Fontana)가 마무리했다. 건물은 타원형 평면에 12각형의 둥근 지붕으로 되어 있고 18세기에 세운 종탑이 있다.

오른쪽 미라콜리 성당 역시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명령으로 지은 것이며 몬테산토 성당을 완공한 후1675~1681년에 세웠다. 역시 추기경 지롤라모 가스탈디 돈을 댔다. 원형 평면에 지롤라모 테오돌리(Girolamo Theodoli)가 지은 우아한 종탑과 8변형의 둥근 지붕이 있다. 건물 내부는 치장 회반죽 장식으로 꾸몄고 카를로 폰타나가 만든 추기경 베네데토와 가스탈디의 기념비가 있다. 높다란 제단에 성모마리아가 기적을 행하는 그림이 있고 오른쪽의 첫 번째 예배당은 베타람(Bétharram)의 성모마리아에게 봉헌했다.

핀치오 언덕 Il Pincio

로마는 다른 도시에 비해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드문데, 핀치오 언덕이 그중 하나이다. 포폴로 광장의 오벨리스크에서 동쪽을 보면 오르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타고 5분가량 올라가면 핀치오 언덕이 나온다. 그리 높지 않아 힘들지 않으며, 힘이 많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더 높이 더 멀리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포폴로 광장이 한눈에 보이고, 포폴로 광장을 배경으로 로마 시내 건물들이 보인다. 광장에서 보면 넓은 공간과 오벨리스크만 보이지만, 핀치오 언덕에서는 주변의 건물들과 멀리 보이는 로마 유적들이 함께 어우러져 보인다.

코르소 거리, 콘토티 거리 Via del Corso, Via dei Contoti

포폴로 문의 옛 이름인 플라미니아 문은 플라미니아 가도에서 따온 것이다. 플라미니아 가도는 원래 포룸 로마눔 로마노까지 연결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코르소 거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기원전 220년, 당시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본인의 이름을 따 플라미니아 가도를 건설한다. 이 가도는 이탈리아 남북을 연결하는 것으로,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대공사였다. 코르소 거리를 걸으면 기원전 로마 제국의 교통을 담당했던 길을 걷는 셈이다.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은 코르소 거리를 두고 ‘우주에서 가장아름다운 거리’라고 했다. 로마에서 북부 도시 리미니까지 이어지는 이 거리는 수백 년 된 건물들 사이로 캐주얼한 상점이 모여 있어 걷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중간에 이어진 콘토티 거리에는 명품 숍이 즐비하다,

스페인 광장 Piazza di Spagna

17세기에 이곳에 스페인 영사관이 있었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광장은 144개의 스페인 계단과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의 종탑 및 오벨리스크를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떻게 보면 광장 그 자체보다 광장에서 바라보는 계단과 오벨리스크와 성당의 조화로움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 계단

스페인 광장에는 바로크 양식의 트리니타 데이 몬티, 즉 스페인 계단이 있다. 본래 한 프랑스 외교관이 남긴 유산으로 지어졌으나, 교황청의 부르봉 스페인 대사관을 따서 스페인 계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젤라또를 먹던 곳이며, 2015년 말 현재 화장품 기업인 불가리 사가 150만 유로(약 19억여원)을 지원해 대대적으로 보수 중이다. 원래 프랑스인들은 계단 꼭대기에 루이 14세가 말을 탄 조각상을 세우고 싶어 했지만, 교황이 반대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됐다가 타협안이 마련됐다. 즉 바둑판무늬의 독수리가 있는 교황 인노첸티오 13세의 문장과 더불어 부르봉 왕가의 상징인 붓꽃을 새기기로 한 것이다.

스페인 계단은 오랫동안 부유한 이들, 미인들, 보헤미안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18세기와 19세기에 이들은 화가의 모델로 선정되고 싶어서 이 계단으로 왔다. 계단 맞은편에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가 폐결핵과 싸우며 인생의 마지막 몇 달을 보냈던 집이 있다. 또 계단 바닥에는 계단 바로 하단의 중앙에는 보트 모양의 ‘바르카차 분수’가 있는데, 이것은 베르니니의 아버지인 피에트로의 1627년 작품으로 항해 중에 부서지거나 뒤집힌 배를 형상화한 것이다. 1588년 테베레 강에 홍수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실어 나르는 데에 사용되던 작고 바닥이 평평한 보트가 물이 빠진 뒤 그 자리에서 발견됐던 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스페인 계단과 광장 주변에는 카페와 꽃 파는 상인들이 가득하며, 특히 5월이 되어 계단이 분홍색 진달래 화분으로 장식되면 여유롭고 화사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

로마의 3대 성당 중 하나이자 313년에 지은 로마 최초 · 세계 최초의 성당이다. 천 년 간 교황청 역할을 해 왔으며 콘스탄티누스의 조각성, 12제자 조각상, 화려한 천장화, 교황만 설 수 있는 교황의 제단을 볼 수 있다.

로마 교구의 대성당이자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좌(座)가 있는 대성당이다. 대개 라테라노 대성당이라고 간략하게 부르기도 한다. 대성당의 공식 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 대성당(라틴어 Archibasilica Sanctissimi Salvatoris et Sancti Iohannes Baptista et Evangelista in Laterano, 이탈리아어 Arcibasilica del Santissimo Salvatore e Santi Giovanni Battista ed Evangelista in Laterano)이다. 로마에 있는 기독교 교회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대접받고 있다. 정면 외관에는 ‘구세주 그리스도(Christo Salvatore)’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모든 총대주교좌 성당을 대표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에게 봉헌되었다. 교황좌(Cathedra Romana)가 있는 로마 주교의 주교좌 성당으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하더라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다른 어떤 성당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로마 시내 안에 있지만 라테란 조약의 체결과 함께 성좌의 자산으로서 특별한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다.

라테라노 궁전

대성당 건물은 황실 기병 근위대의 요새인 ‘카스트라 노바 에퀴툼 싱굴라리움’ 유적 바로 위에 세워졌다. 이 요새는 19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설립한 것인데,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패하자 헐렸다. 요새 유적은 대성당 중랑(中廊) 바로 아래쪽에 일직선으로 있고, 대성당 부지의 나머지는 초기 로마 제국 시대에 라테라누스 가문의 저택이 차지하고 있었다. 라테라누스 가문은 몇몇 황제의 관재인이었는데, 개중에는 평민으로서는 최초로 집정관 자리까지 오른 인물도 있었다. 이후 네로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다가 고발당해 재산이 몰수당했다고 한다.

이후 라테라노 저택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막센티우스의 누이인 파우스타와 재혼하면서 황제의 손에 들어갔고 이어 로마 주교에게 넘어갔다. 대성당을 헌납받은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교황 멜키아데 때인 313년으로 추정된다. 이때 저택에 딸린 대성당도 함께 넘어갔으며 개축과 확장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로마 주교로서의 교황좌가 있는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중세 시대

라테라노 궁전과 인접한 대성당은 공식적으로 324년, 교황 실베스테르 1세가 이를 ‘하느님의 집(Domus Dei)’으로 선포하면서부터 교황의 통솔 아래로 들어갔다. 내부에 교황좌가 배치되어 있어 로마 주교의 주교좌 성당으로 발전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대성당의 으뜸직을 반영하고자 중앙 입구에는 라틴어로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이자 머리인 지극히 거룩한 라테라노 성당(Sacrosancta Lateranensis ecclesia omnium urbis et orbis ecclesiarum mater et caput)’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후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두 번에 걸쳐 다시 봉헌되었다. 10세기 교황 세르지오 3세는 대성당의 세례당을 새로이 축성하면서 이곳을 성 요한 세례자에게 봉헌했고, 12세기 교황 루치오 2세는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을 다시 성 요한 복음사가에게 봉헌했다. 대성당의 공식 이름이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 대성당’인 것은 이 때문이다.

교황 멜키아테 시대부터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간 1309년까지 모든 교황은 이 라테라노 궁전에 거주했지만, 아비뇽 유수 동안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그대로 방치되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1307년과 이후 1361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화재로 크게 손상을 입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재건을 위한 자금이 조달됐지만 궁전과 대성당은 과거의 화려함을 상실하고 만다.

아비뇽 교황 시대가 끝나고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고 난 후에도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교황이 머물기에 적합하지 않을 만큼 손상되어 있었고, 교황들은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이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을 임시 관저로 삼아 거주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바티칸에 궁전을 건설해 교황청을 그곳으로 이전했고 오늘날까지 교황은 바티칸에 거주하고 있다.

재건

교황 식스투스 5세, 인노첸시오 10세 등 많은 교황들이 재건에 손을 뻗었다. 라테라노 궁전 앞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것으로, 357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막시무스 경기장에 두었던 것을 식스투스 5세가 158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인노첸시오 10세 때는 대성당 내부를 한층 새롭게 꾸미면서 열두 개의 벽감을 두고 1718년 로마의 로코코 조각가들이 사도들을 묘사한 조각상들을 제작해 넣었다.(오른쪽 사진 : 벽감 조각 중 하나인 성 마태오)

대성당 재건에 가장 의욕적이었던 것은 교황 클레멘스 12세였다. 그는 새 건물 외관의 설계안을 모집한다는 공모를 냈다. 23명 이상의 건축가가 참가해 경쟁을 벌였는데, 우승자는 알레산드로 갈릴레이였다. 오늘날 보이는 건물 외관은 갈릴레이가 1735년에 완성한 것이며 전통적인 고대 바실리카 건축 양식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돼 있다.

건축 역사

교황 레오 3세의 공식 연회장(Triclinium)은 모자이크가 줄지어 있고 공기가 출입하는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어 고대 궁전의 넓은 방을 상기시킨다. 현재 건물은 고대의 것은 아니지만, 벽감에 보존된 세 점의 모자이크는(오른쪽 사진) 최초의 모자이크 중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 이들 모자이크를 살펴보면 중앙에는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사명을 부여하는 장면이 있고, 왼쪽에는 그리스도가 성 실베스테르 1세에게는 열쇠를 하사하고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는 라바룸을 하사하는 장면이 있다. 오른쪽에는 성 베드로가 레오 3세에게 교황 영대를 수여하고 샤를마뉴에게 깃발을 수여하는 장면이 있다.

대성당 건축을 위한 기부 내역은 교황 연대기에 기록돼 있는데, 초창기 이 대성당은 ‘황금 대성당(Basilica Aurea)’이라고 알려질 만큼 매우 화려했다. 그래서 반달족이 침략했을 때 모든 보석이 약탈당하기도 했다. 460년경 교황 레오 1세가 주변 지역을 복구하고 교황 하드리아노 1세가 대성당을 복원했지만 897년 지진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괴돼 다시 건축됐고, 1308년 화재로 또 다시 소실됐다. 소실된 대성당은 교황 클레멘스 5세와 교황 요한 22세가 재건했지만 1360년 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교황 우르바노 5세가 재건했다. 이렇듯 수많은 변천을 겪으면서도 대성당은 기둥으로 둘러싸인 안뜰 전방 가운데에 분수를 두고 측랑 안에 기둥이 일렬로 세워져 있는 고대의 형태를 계속 유지했다. 이와 같은 고대 후기 양식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에까지 이어졌다.

옛 건물에 있던 몇몇 부분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중세 시대에 만든 작품인 포장 바닥, 그리고 지금은 회랑에 있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조각상을 들 수 있다. 현재 주위 환경에 비추어볼 때 어색해 보이는 중앙 제대 위를 덮은 우아한 모습의 발다키노의 기원은 136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교황이 착석했던 붉은 대리석 좌석(stercoraria)(위 왼쪽 사진)은 현재 바티칸 미술관에 있다. 교황의 좌석을 ‘stercoraria’라고 하는 것은 교황의 착좌식 때 노래하는 성가이자 시편 113장에 근거한 「억눌린 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들어 올리시는 분(De stercore erigens pauperem)」 때문이다. 지금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는 교황의 주교 좌석(위 오른쪽 사진)은 19세기 후반에 다시 만든 것이다.

스칼라 상타(scala-santa, 거룩한 계단)

대성당 맞은편에는 ‘스칼라 상타’라는 이름의 28개의 나무로 덧씌운 하얀 대리석 계단이 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 계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할 때 예루살렘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게 나아가면서 밟았던 계단이라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와 라테라노 궁전에 설치한 것으로 1589년 교황 식스투스 5세 때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가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교황 비오 9세 때부터 예수 고난회 수도자들이 관리해 오고 있다.

순례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에서 이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오른다. 계단 양쪽의 대리석상들은 <유다의 입맞춤>과 <군중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빌라도>로 1854년 조각가 야코메티가 제작한 것이다. 계단 꼭대기의 쇠창살 사이로는 성 라우렌시오 예배당이 보이는데, 여기에는 천사들이 그렸다는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수도원 회랑

옛날에는 대성당과 도시 성벽 사이에 대성당을 위해 봉사하는 의무를 가진 수도 공동체가 거주하는 대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수도원에서 아직 남은 유일한 부분이 바로 우아하게 꼬인 상감 세공을 한 대리석 기둥들에 둘러싸인 13세기 초의 이 회랑이다(오른쪽 사진).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 사이의 중간에 해당한다.

라테라노 세례당  팔각형의 라테라노 세례당은 대성당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초창기 세례당은 교황 식스투스 3세의 지시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세례당을 장식했다고 한다.(실제로는 동방에서 아리우스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로마에서 유일한 세례당인 라테라노 세례당은 많은 세대에 걸쳐 이용한 곳이다. 완전 침수를 위해 커다란 대야처럼 가운데를 움푹 팬 이 팔각형 건물은 이후 이탈리아 전역에서 세례당의 모델이 되었다. 전통 비잔틴 양식의 특색이 있는 장식사본 ‘생명의 샘’도 마찬가지였다.

주소 Piazza di San Giovanni in Laterano
입장료 무료
운영시간 매일 07:00-18:30

카라칼라 욕장 Terme di Caracalla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이룩했을 때, 공공 목욕탕 시설은 기분 좋은 환경에서 다양한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주된 시민 시설이었다. 목욕탕은 특히 목욕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물을 제공해 주던, 바닥 아래의 난방 시스템이 발명된 이후부터는 대단한 토목 공학적 업적이기도 했다. 로마는 목욕탕 문화가 아주 발달한 나라로, 4세기경에는 1000개가 넘는 목욕탕이 있었다. 카엘리우스 언덕에 위치한 카라칼라 목욕탕은 국영목욕장이었는데 로마에는 총 11개의 국영목욕장이 있었다. 국가가 처음 만든 목욕장은 기원전19년의 아그리파가 만든 목욕탕이었고, 이후에 네로의 목욕탕, 트라야누스의 목욕탕 들이 건설되다가 드디어 카라칼라 목욕탕이 건설된다. ‘카라칼라’라는 이름을 들었을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흔히 옷깃을 부르는 ‘카라’라는 이름인데, 이것은 카라칼라 욕장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당시 로마 황제가 두건이 달린 갈리아 풍의 긴 옷인 ‘카라’를 즐겨 입었던 데서 유래했다.

당시 목욕문화는 혼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목욕물을 2중 벽사이에 전해지는 열기로 데웠다.

당시 로마의 모든 문화의 중심지는 목욕탕이었다. 이후 서로마 제국에서는 이런 목욕 문화가 없어졌고, 동로마제국에만 남아서 현재까지 터키 지방에 목욕문화가 남아있다. 카라칼라 목욕탕 이후 현재 테르미니역 바로 앞에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이 298년에 생겼는 데 그 수용인원은 3,000명에 육박했지만 게르만족의 침입 때문에 폐허로 남게 되었다.

카라칼라 목욕 시설은 211년 카라칼라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에 건설이 시작되어 6년 후에 완성되었다. 한 번에 1,600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었으며, 매우 뜨거운 물이 든 욕조가 있는 ‘칼다리움’, 미지근한 물이 든 ‘테피다리움’, 냉탕이 있는 ‘프리기다리움’, 그리고 야외 수영장인 ‘나라티오’ 등 여러 개의 독립된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설 안에는 더 많은 운동을 즐기고 싶은 이들을 위한 경기장과 체육관도 있었으며, 지적인 탐구에 빠져드는 편을 선호하는 이들을 위한 그리스어와 라틴어 도서관도 있었다. 요컨대 이곳은 단순한 목욕 시설이 아니라 종합 레크리에이션 시설이었던 것이다.

카라칼라 욕장은 6세기까지 영업을 계속했다. 그러다 이후 고트 족이 침입하여 물을 공급해 주던 수도교를 파괴하자 건물들은 차차 쇠락해 갔고, 16세기에는 파르네세 가문이 자신들의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화려한 대리석 시설 대부분을 떼어 가 더 황폐해 졌다. 그러던 중 20세기에 파시스트 독재자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곳에서 야외 오페라를 상연한다는 아이디어를 도입하면서 목욕탕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가수들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떨림이 건축물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지만, 이러한 공연은 계속되어 왔다.

주소 Viale delle Terme di Caracalla
입장료 6€
운영시간 월~토 09:00-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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