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은 «금성»의 주역이다. 이 «금성»은 3호에 이장희가 합세하며 더 큰 빛을 발하였다.
양주동
«금성»의 창간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1903~1977)은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황해도에서 자난다. 어릴 때는 한학을 익혔는데, 여섯 살 때 «유합(類合)»을 익히고 1914년(12세)부터는 마을 한시회에 참석하고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등 빼어난 학문적 성취를 보였다. 그 과정에서 양주동은 훗날 보이는 ‘자칭 천재’의 면모를 깊숙이 지니게 된다.
1915년(13세)에는 평양고보에 들어가지만 학교 공부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퇴하여 독학으로 공부하고, 1920년(18세) 다시 중동학교에 입학하여 1년 만에 마친다. 이후 일본으로 가서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데, 이 시기에 백기만, 유엽 등을 만나 회람지 «알»을 발간하고 습작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1923년(21세) 백기만, 유엽과 함께 «금성»을 창간하고 권두시 <기몽>을 비롯해 창작시와 보들레르, 타고르 등의 번역시를 무려 10여 편이나 한꺼번에 내놓으면서 문단에 들어온다.
시론
1924년(22세)에는 «금성» 2호와 3호에에 시론 <시는 어떠한 것인가>, <시와 운율>을 발표하면서부터 창작과 이론을 겸한다. 여기서 그는 시란 “우리 사람의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느낀 바 정서를 개성과 사상을 통하야 가장 단순하고 솔직하게 음률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또 시와 산문의 차이를 말하면서, “시의 리듬은 산문의 그것보다 한층 강조한 긴장된 것이올시다. 시는 우리가 그것을 읽을 때에 그 리듬이 분명히 우리에게 어떠한 강조하고 긴장한 정서의 활동을 전합니다.”라고 한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명쾌한 시론이었다.
1930년(28세)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내는데, 여기 실린 시들은 그리 좋은 성취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저 «금성» 시절에 보였던 서정적 분위기 대신, 나라 사랑이나 겨레 사랑과 같은 사회성이 엷게 채색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할 뿐이다.
이때부터 양주동은 자신이 시인보다 이론가 쪽에 더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은 듯하다. 그래서 이후 계속해서 시보다는 문학론에 치중하여 활동한다. 프로 문학과 민족 문학에 대해 중간자적 입장을 표명한 절충주의 문학론인 <문예상의 내용과 형식 문제>가 이 시기 문학 평론 중 하나로 주목된다.
고전 시가 연구
양주동은 학문적 자존심이 지나쳐 ‘인간 국보 제1호’를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는 동서고금의 문장에 통달해 고어의 음운 변천사로부터 워스워스, 엘리엇 등의 문학 세계를 한 자리에 아우를 만큼 문학적, 어학적 능력이 빼어난 논객이었다. 이런 그의 박학다식함은 향가 연구에서 크게 빛을 발한다.
양주동은 1935년(33세)경, 우연히 도서관에서 일본 어학자인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가 1929년에 발표했던 논문 <향가 및 이두의 연구>를 읽는다. 이것을 읽은 양주동은 경탄하는 한편으로 “비분한 마음”을 느낀다. 우리 문학의 가장 오랜 유산인 향가의 석독이 외국인으로부터 이루어졌다는 데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향가 연구에 몰두하는데, 평양에서 영어 교사 생활을 하던 양주동에게는 딱히 자료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서울에 가서 최남선, 이희승, 이병기 등 장서가들을 찾아다니며 평양에서 고서 전시회를 한다고 거짓말을 하여 향가 관련 자료들을 모아서 돌아온다.
양주동은 말 그대로 ‘단시일에’ 향가 연구를 마쳐, 1937년(35세) 잡지 «청구학총»에 <향가의 해독—특히 원왕생가에 취하야>를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오구라 신페이의 이론을 “절반 이상의 개정을 필요로 한다.”라면서 논박하여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실제로 그의 해독은 정확성, 문학성, 논리의 완결성 면에서 신페이의 연구를 훨씬 웃돈다.
향가 연구로 주목을 받은 양주동은 1942년(40세) «조선 고가 연구»를 공동 발간한다. 최남선은 이 책을 두고 “앞으로 1백년 뒤 남을 책을 오직 이 한 권 뿐이다.”라고 극찬하였다.
해방 이후
해방 후인 1946년(44세)에는 고려 가요에 관한 연구서인 «여우 전주»를 펴내는데, 이로써 그는 당대 최고의 국학자로 손꼽히게 되었다. 1947년(45세) 동국대 교수로 취임한 후에도 그는 연구를 계속하여 «국문학 고전 독본», «국학 연구 논고» 등 여러 저서를 내놓아 국문학 연구와 국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심지어 그는 외국 문학에도 관심을 보여 «영시 백선», «세계 기문선» 등을 내고, 수필집 «문주 반생기», «인생 잡기» 등도 출간하였다.
양주동은 생전에 별명이 ‘돈 선생’이었을 정도로 구두쇠였다. 부모를 여의고 어렵게 자라면서 가난의 설움을 뼈저리게 맛본 터라, 원고 청탁이나 결혼 주례 청탁이 들어오면 으레 선금부터 받았고, 원고료를 노골적으로 흥정하는 ‘점잖지 못한’ 어른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제자들이 양복을 선물하자 그날로 양복점에 가서 돈으로 바꿔 올 정도였다. 신문은 ‘국보’가 봐 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줄 알라며 무료 구독을 주장했고, 도둑맞을 금붙이가 없다면서 방범비도 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지프를 타고 다니며 여러 학교에 겹치기 출강을 하여 재산을 착실히 모은다.
늘그막에는 당뇨로 고생을 하다가 1977년(75세) 사망하였다.
이장희
이장희의 생애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 1900~1929)는 대구에서 태어나는데, 집이 이상화, 오상순의 집과 가까웠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인물로, 대구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였다. 그러나 이장희는 21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나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죽고, 계모가 들어와 줄줄이 낳은 수많은 이복동생 틈에 끼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자란다. 그래서인지 부잣집 아들인데도 옷차림이 초췌할 때가 많았고 항상 얼굴이 해쓱했다. 그는 아버지의 완고함 때문에 반항적, 폐쇄적 성격을 지니며 성장한다. 이장희는 1913년(14세) 일본으로 건너가서 1917년(18세) 교토 중학을 졸업한다. 그는 목사가 되고 싶어 신학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하여 포기했고, 이후 집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지낸다. 그러던 중 백기만과 만나 급속도로 친밀해져 1924년(25세) «금성» 3호에 이장희라는 필명으로 시 <봄은 고양이로다>,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마리>, <불놀이>, <무대> 다섯 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이어 이장희는 사망하기까지 «신여성», «생장» 등에 <동경>, <고양이의 꿈>, <겨울밤>, <연>, <청천의 유방>, <비오는 날>, <눈은 나리네>, <봉선화> 등 30편이 넘는 시를 꾸준히 낸다. 그의 시는 은유와 상징 기법을 통해 짙은 내면의 고독과 우수를 보여 주고 있다.
이장희는 시 외에 음악과 그림에도 관심이 많았고, 백기만, 양주동, 유엽, 오상순 등과 어울려 다방이나 카페에 드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폐쇄적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속물로 보는 배타적 성격 탓에 점차 문단에서 소외된다. 그는 이런 소심한 결벽증 때문에 생전 제대로 된 이성 관계조차 한 번 해 보지 못했다.
그가 무엇보다 괴로워한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였다. 아버지는 그에게 통역을 부탁하지만 거절하고, 판사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고, 이장희는 평생을 빈곤하게 살았다.
겨울에도 외투 한 번 없이 지내던 이장희는 곧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인다. 어느 날 그는 골방에 틀어 박혀 이틀 동안 금붕어 그림만 그리다가, 유언도 남기지 않은 채 극약을 먹고 1929년(30세) 젊은 나이로 자살한다. 사후에 백기만이 이상화와 이장희의 시편과 일화를 담은 «상화와 고월»을 내 주었다.
이장희의 시
이장희의 시는 ‘백조파’나 낭만주의들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19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와 같은 서구 문예 사조에 휩싸여 감상적이고 퇴폐적이었는데, 이장희는 여기에 동조하지 않고 날카로운 감각과 새로운 기교로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했다. 특히 베를렌과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다의적인 뜻을 갖는 상징 기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장희의 시들은 대체로 길이가 짧고 개인적 서정을 섬세하게 드러내며, 묘사 위주의 감각적인 시어를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특징들은 당시 우리 시단에서 새로운 기법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이런 이장희 시의 특색은 1930년대에 출발한 감각적 모더니즘의 정지용이나 김광균보다 한 발 앞선 자리에 이장희를 놓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장희 사망 후 김기림 등 본격적인 모더니즘이 등장한 후에도, 백철은 이장희를 두고 “천재의 시인”으로 평가 받는 시인이며 “모더니즘에 가까운 감각적인 시를 발표하”였다고 평한다. 이 외에도 여러 평자들이 정지용과 함께 이장희를 한국 모더니즘 시의 싹을 보여 준 시인으로 꼽고 있다.
<봄은 고양이로다>
1924년(25세) «금성» 3호에 발표한 데뷔작으로, 예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고양이와 봄의 이미지를 결합시켜 감각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고양이의 털, 눈, 입술, 수염에서 봄을 보는 이장희의 관능적, 감각적 표현은 곧 다가올 모더니즘의 징후를 느끼게 한다.
<봄은 고양이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솜의 생기(生氣)가 뛰놀아라.
일반적으로 봄을 상징하는 전통적 소재는 ‘꽃’이다. 그런데 이장희는 새로운 소재인 ‘고양이’를 등장시켜 연상 작용에 따라 고양이로부터 봄을 발견한다. 객관적인 대상과 주관적 정서를 하나의 이미지로 합치시키는 독특한 수법이 쓰이고 있다.
<봄은 고양이로다>는 보들레르의 유미적, 탐미적인 시 <고양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양이> -보들레르
사랑에 들뜬 사내건 의젓한 학자건/ 나이가 차서, 한결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 이 힘차고도 어진 고양이/ 집안의 자랑거리/ 그들처럼 추위타고 그들처럼 샌님인 고양이들/ 일락의 벗 과학의 벗인 고양이들은 고요와 어둠의 종포를 즐겨 찾노니
보들레르가 고양이의 속성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장희는 고양이의 털과 눈, 그리고 입술에 어리는 봄의 향기, 불길, 졸음을 형상화함으로써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때문에 이장희의 작품은 보들레르의 작품보다 우수한 형상화 기법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연>
<연>는 등단 무렵인 1925년(26세) 쓴 시로, 이장희의 고통과 비극적 종말을 예감하게 하는 작품이다.
<연>
애달프다/ 헐벗은 버들가지에/ 어느 때부텀인지/ 연 하나 걸려 있어/ 낡고 지쳐 가늘었나니/ 그는 가을바람에 우는/ 옛생각의 그림자—ㄹ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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