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의 생애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1901~1981)는 서울 유림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한학을 익힌다. 이후 보통학교도 거치지 않은 채 휘문 의숙에 입학하는데, 졸업하던 1920년(20세)에 홍사용, 정백과 동인지 «문우»를 펴내면서 비평 <심볼리즘>을 실음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그리고 1921년(21세)에는 «장미촌» 창간호에 <오뇌의 청춘>, <우유빛 거리>를 발표한다.
이듬해인 1922년(22세)에는 홍사용 등과 «백조»를 창간하고 주로 «백조»에서 활동한다. 이 시기에는 주로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 찬 어둡고 음울한 색채의 시들을 발표하는데, 1922년의 <밀실로 돌아가다>, <만가>, 수필 <영원의 승방>, 평론 <오호 아문단>, 1923년(23세)의 <목매이는 여자>, <사(死)의 예찬>, 시 <흑방비곡>등이 있다. 그러는 동안 박종화는 «백조»를 대표하는 낭만주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힌다. 특히 1923년에는 평론 <계해 문단의 1년을 추억하여—현상과 작품을 개평하노라>와 <역의 예술> 등을 발표하는데, 그 과정에서 김억과 비평에 관한 논쟁을 벌여 문단을 떠들썩하게 하기도 했다.
박종화는 한동안 김기진, 박영희와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점차 프로 문학과 자신의 ‘힘의 예술’은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데,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창작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1924년(24세) 첫 시집 «흑방비곡»을 출간하고, 이어서 황진이의 삶을 그린 역사 소설 <삼절부>를 쓴다. 한편으로는 현대물인 단편 <아버지와 아들>을 내더니, <여명>(1925), <부세>(1925) 등도 쓰는데, 이 과정을 거치며 시보다 소설 분야에 더 주력하게 되었다. 또 1929년(29세)에는 <대전 이후의 조선의 문예 운동>에서 신문예 운동 전반을 검조하여 이후 비평의 본보기를 보인다.
«매일신보»에 1935년(35세) <금삼의 피>를 연재하고 1937년(37세) <대춘부>를 연재하면서 박종화는 역사 소설로 눈을 돌린다. 그리하여 1940년(40세) 단편 <아랑의 정조>와 <전야>, 장편 <다정불심>을 잇달아 발표하며 역사 소설 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졌다. 1942년(42세)에는 수필집 «청태집»을 내고 장편 <여명>을 발표했으며, 이후로도 <민족>, <홍경래>, <청춘승리>, <논개> 등을 꾸준히 발표한다.
박종화는 1949년(49세)에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임명되어 언론계에 발을 들이더니, 한국문학가협회장, 1951년(51세)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장을 역임하며 해방 전과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한편으로는 대학에 교수로 출강하고, 각종 문학상과 훈장을 두루 받는다.
1954년(54년)에는 서울신문사에서 나와 장장 946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임진왜란>을 연재하는 열정을 보여 준다. 이 외에도 후기 작품으로 <벼슬길>(1958), <여인천하>(1959), <자고 가는 저 구름아>(1962), <월탄 삼국지>(1964), <아름다운 이 조국>(1965), <양녕대군>(1966) 등이 있다.
이처럼 박종화는 1920년에 문단에 등장하여 1981년 81세로 숨질 때까지 3권의 시집, 18편의 장편, 12편의 단편, 5권의 수필집과 평론집 등을 내어 대가다운 면모와 역량을 보여 준 작가이다.
박종화의 문학관
비평의 분류
박종화는 «백조» 특유의 낭만주의 시를 주로 쓰던 1922년, «백조» 2호에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한 월평 <오호 아문단>은 발표하더니, 이듬해에는 1년 동안의 문단을 총 정리하는 연간 평 <계해 문단의 1년을 추억하여—현상과 작품을 개평하노라>를 발표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김억의 시에 대해 비판한 것을 두고 김억이 발끈함으로써 논쟁에 빠져들게 된다.
박종화는 연간 평에서 김억의 <대동강>을 두고 서정의 노래이지만 ‘무드’가 없으며, “베르렌의 마음 썩는 오뇌의 심볼도 없다. 예의 그 ‘여라’, ‘서라’, ‘러라’가 공연히 독자를 괴롭게 할 뿐이다.”라고 혹평한다. 이에 김억은 <무책임한 비평—‘문단의 1년을 추억하여’의 평자에게 항의>라는 제목으로 반박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김억은 박종화의 글에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난한다.
박종화는 다시 <항의 같지 않은 항의에게>라는 글에서, 자신의 비평이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책임 있는 주관이며, 김억의 항의는 “서푼짜리”도 못 된다고 반박한다. 이 글에서 박종화는 비평을 ‘의고적 비평’, ‘과학적 비평’, ‘인상 비평’, ‘감상 비평’, ‘설리 비평’의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자신의 비평은 감상 비평과 설리 비평의 영역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후로도 논쟁은 한동안 이어지고 양주동까지 가세한 다음 일단락된다. 박종화의 비판은 다소 무리라는 느낌을 주긴 하지만, 아직 ‘비평’이라는 용어의 개념조차 확립되지 않은 시대였음을 감안할 때 박종화의 활동은 무시할 수 없는 성과로 인정된다.
‘역(力)의 예술’
박종화는 이광수의 계몽주의, 민족주의, 인도주의 문학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런 주장을 이론으로 정리하여 내놓은 것이 1923년(23세)의 <역의 예술>이다. ‘역의 예술’이란 “가장 강하고 뜨거웁고 매운, 힘 있는 예술”을 말한다. 이듬해에 발표한 <갑자 문단 종횡관>에서는 문단이 민족의 아픔을 외면한 채 “상아탑 속에서 콧노래”나 부르는 안이한 문학 행태에 빠져 있다며 비판하고, 다시 한 번 ‘역의 예술’을 강조하였다.
이런 ‘역의 예술’은 탈 낭만의 성격을 보인다는 점에서 당시 김기진이 빠져 있던 마르크스주의 문학관과 어느 정도 상통하는 면이 있었고, 이 때문에 박종화는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김기진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유한다. 그 과정에서 김기진의 급진적인 프로 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곧 다시 본래의 ‘역의 예술’로 돌아왔다.
문단의 총체적 정리 작업
박종화는 1929년(29세)에 <대전 이후의 조선의 문예 운동>을 발표한다. 이 글은 신소설과 신체시 이래의 모든 20세기 문학 운동 전반을 검토하고 정리한 것인데,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포괄적인 평을 시도하면서도 일정한 객관성을 유지함으로써 이후 신예 비평가들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이 글에서 보이는 박종화의 문학관은 상당히 많이 변모해 있다. 초기에 강하게 비판하던 이광수에 대해 언문일치를 이루고 자유연애 사상, 신도덕관을 확립한 공적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 반면 박영희와 김기진 등의 프로 문학에 대해서는 이데올로기 주입에 집착한 나머지 창작의 본질을 망각했다며 세차게 비판한다.
박종화의 시와 소설
<사의 예찬>
같은 백조파라도 그 낭만주의 경향에는 작가들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박종화의 낭만은 죽음과 무덤이요 해골이다. 이런 초기 경향은 1923년(23세) «백조» 3호에 발표한 시 <사의 예찬>에 잘 드러난다. 무절제한 감정의 분출과 생경한 상징적 수법이 어색하고 황량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3 · 1운동 실패 후의 절망적 시대상을 잘 암시하고 있다. 문학적 가치보다는 시사적 의의가 강조되는 시이다.
<사의 예찬>
보라!/ 때 아니라. 지금은 그 때 아니라./ 그러나 보라!/ 살과 혼,/ 화려한 오색의 빛으로 얽어서 짜 놓은/ 훈향(薰香) 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토(朱土) 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 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 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한 칠흑(漆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 해골! 무언(無言)!/ 번쩍이는 진리는 이 곳에 있지 아니하냐./ 아! 그렇다. 영겁(永劫) 위에.//
젊은 사람의 무리야/ 모든 새로운 살림을/ 이 세상 위에 세우려는 사람의 무리야./ 부르짖어라, 그대들의/ 얇으나 강한 성대(聲帶)가/ 찢어져 해이(解弛)될 때까지 부르짖어라./ 격념(激念)에 뛰는 빨간 염통이 터져/ 아름다운 피를 뿜고 넘어질 때까지/ 힘껏 성내어 보아라/ 그러나 얻을 수 없나니,/ 그것은 흐트러진 만화경(萬華鏡) 조각/ 아지 못할 한 때의 꿈자리이다.//
마른 나뭇가지에/ 곱게 물들인 종이로 꽃을 만들어/ 가지마다 걸고/ 봄이라 노래하고 춤추며 웃으나,/ 바람부는 그 밤이 다시 오면은/ 눈물나는 그 날이 다시 오면은/ 허무한 그 밤의 시름 또 어찌하랴?//
얻을 수 없나니, 찾을 수 없나니,/ 분(粉) 먹인 얇다란 종이 하나로,/ 온갖 추예(醜穢)를 가리운 이 시절에/ 진리의 빛을 볼 수 없나니./ 아, 돌아가자./ 살과 혼/ 훈향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거룩한 해골의 무리/ 말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의 거리로 돌아가자.//
이 작품은 현실보다 차라리 죽음의 세계가 참되다고 말한다. 그것은 식민지 현실이 죽음보다 가혹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거기엔 현실을 극복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미래의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가 보여주는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과는 다르다. 차라리 그것은 가혹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이다. 이탈리아의 탐미주의 작가이자 시인인 다눈치오(G. D'Annunzio)의 소설 <죽음의 승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이 시는 «백조» 시대 병든 낭만주의의 한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목 매이는 여자>
1923년(23세) 발표한 <목 매이는 여자>는 1910년대에 박은식과 신채호 등이 보여준 애국 계몽 문학 이래 근대 역사 소설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에 앞서 1922년 이광수가 <가실>, <허생전>을 발표했지만, 이 두 작품은 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설화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목 매이는 여자>를 최초의 근대적 역사 소설로 보는 견해가 많다.
<목 매이는 여자>
신숙주의 아내 윤씨는 남편의 어두워진 안색, 그리고 대신들이 화를 입었다는 소문을 듣고 사태를 예감한다. 윤씨는 두려움 속에서도 남편의 충절을 믿고, 그날이 닥치면 자신도 남편을 따라 죽으리라고 다짐한다.
신숙주는 세조에게 신하가 될 것을 강요당하는데, 처음에는 완강하게 버틴다. 그러나 어린 자식들의 생명까지도 위협 받는 처지가 되자 결국 세조의 명을 수락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윤씨는 남편에게 침을 뱉고는 목을 매어 자결한다.
<목 매이는 여자>는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후 신숙주의 고뇌를, 그 아내의 시점으로 그린 소설이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한 나라의 대신이기에 앞서 아버지로서 번뇌하는 신숙주의 모습을 여성인 아내의 시각으로 그려내어 감동을 더한다.
그런데 여기서 박종화는 «백조» 때의 낭만주의 경향을 계속 보인다. 가령 고문을 견디는 사육신의 초인적인 태도라든지, 어머니로서보다 충신의 아내로서 보이는 윤씨의 행동 같은 것이 너무 과장되고 미화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윤씨의 자살 동기에 필연성이 적다는 등의 지적을 받았다.
<금삼의 피>
박종화는 1935년(35세) «매일신보»에 연재한 <금삼의 피>를 통해 역사 소설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사실(史實)에 충실하면서도 풍부한 상상력이 가미된 낭만적인 역사 소설이다.
<금삼의 피>
연산군은 계비의 손에 자라나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우연히 자기에게는 생모가 따로 있고 그 생모가 원통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생모가 죽을 때 피를 토한 저고리를 보게 되자 성격이 급격하게 포악해져 주색에 빠진다. 끝내는 이를 충간하는 어진 신하들을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다가 드디어 폐주(廢主)가 된다.
정사(正史)에서는 폭군 연산의 행적이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되어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연산의 인간상을 낭만적인 문장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승화시켰다. 즉 연산군의 반항적이며 복수적인 성격의 성장 과정이나, 반정(反正)의 묘사 등에 대한 서술 등은 박종화가 지닌 낭만 정신의 표상이며, 주인공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난폭한 행위의 이면에 인간적인 오뇌와 고독을 그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것은 역사를 생활화하려는 작가 정신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랑의 정조>
<아랑의 정조>는 1940년(40세) 발표한 단편이다. «삼국사기»의 <도미 설화>에서 모티프를 따온 일종의 역사 소설로, ‘도미’의 아내에게 ‘아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새롭게 성격화하고 있다.
<아랑의 정조>
백제 여인 아랑은 목수인 도미의 아내이다. 아랑은 예쁘기도 하였지만, 아랑을 한 번 본 사람은 백제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고 칭송했다. 아랑이 예쁘다는 소문은 백제의 왕 개루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만나자는 개루의 요청을 아랑은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이에 개루는 아랑의 남편인 도미에게 아랑의 정조를 시험하겠다고 한다.
개루왕은 아랑의 집에 가서 도미의 허락을 받았으니 아랑을 후궁으로 맞이하겠다고 한다. 아랑은 개루왕의 청을 허락하고, 개루왕에게 불을 꺼 줄 것을 요구한다. 다음날 아침 일어난 개루는 옆에 누워 있는 여인이 아랑이 아니라 옆집 과부임을 알게 되고, 하가 나서 도미에게 구실을 붙여 두 눈을 뽑고 광나루 강가로 끌어다가 배를 태워 내쫒았다. 아랑은 이 소식을 들은 즉시 광나루로 갔다가 잡혀 개루왕의 앞으로 끌려온다. 개루왕은 다시 아랑에게 후궁이 될 것을 요청하고, 아랑은 개루의 청을 받아들인다.
아랑은 개루와 같이 살면서도 월경을 핑계 삼아 정조를 허락하지는 않는다. 개루의 의심을 풀어낸 아랑은 이레째 되는 날 밤 아랑은 개루의 옷과 바지를 입고 병부를 챙겨 강화도로 갔다. 그 곳에서 아랑은 도미와 재회한다.
몇 달 뒤, 백제의 서울에는 아랑이 눈먼 남편 도미의 손을 이끌고 원수의 백제 땅을 영영 버린 뒤에 거지가 되어 고구려 땅으로 들어섰다는 구슬픈 이야기가 떠돈다.
<다정불심>
<다정불심>은 1940년(40세)부터 이듬해까지 연재한 장편이다. 고려 공민왕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으로, 당시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다정불심>
원나라에 끌려갔다가 노국대장공주와 열렬한 사랑에 빠진 공민왕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그녀를 왕비(妃)로 맞는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갑자기 죽자 공민왕은 크게 충격을 받아 정사까지 돌보지 않는다. 그는 백성들을 동원해서 노국공주의 영전을 짓게 했다가 백성과 신하들의 원성을 사고, 영전 건립을 중지해야 한다고 충간하는 섭정 신돈까지 죽이고 만다. 이후 성격 파탄을 일으킨 공민왕은 후궁들을 멀리하고 아름다운 소년들을 상대로 변태적인 생활을 이어가던 중 미동 홍륜과 최만생이라는 신하에게 살해당한다. 그로부터 40여 년 후 고려는 멸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선다.
<다정불심>은 왕이 오랑캐 땅에서 맺은 한 번의 사랑이 끝내는 나라를 망치게 되었다는 점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박종화는 우리 역사에 숨겨진 오점(汚點)을 끄집어내어 냉엄하게 비판하고자 했을 것이다. 궁중의 언어와 제도, 풍습 등을 소상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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