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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테마 15. 현진건

2014. 4. 11. by 솜글

현진건의 생애

학창 시절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은 대구 우정국장이던 아버지 밑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현진건의 집안은 대대로 역관을 많이 배출한 중인 계층으로 일찍이 개화하였다. 1915(16)에는 두 살 연상의 아내를 맞고 이상화, 이상백, 백기만 등과 함께 동인지 «거화»를 발간하며 조금씩 문학에 관심을 보였다.

1917(18)에는 도쿄에서 중학을 마치고 귀국하는데, 이듬해 상하이에서 독립 운동을 하고 있던 형 현정건을 찾아가 후장 대학에 입학하여 독일어를 전공하지만 경제적 이유 때문에 중도에 귀국하였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C%9D%BC:Hyun_Jin-geon.jpg)

문학 활동

1920(21)에는 «개벽»에 번역 소설 <행복><석죽화>를 발표하고 11월에서는 데뷔작인 <희생화>를 발표하는데, 황석우가 혹평하는 등 산뜻한 출발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이듬해인 1921(22) 다시 «개벽»<빈처><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한다. 이로써 현진건은 아직 사실주의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때에 사실주의 작가라는 칭호를 얻고 192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발돋움하였다.

역량을 인정받은 후 1922(23)에는 홍사용, 박종화, 나도향,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백조» 특유의 좌절감과 패배주의적 정서에 물들어 식민지 현실의 총체성을 작품에 담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작품으로 1922년의 중편 <타락자>와 단편 <피아노>, 1923(24)의 단편 <할머니의 죽음>을 들 수 있다.

이후 현진건은 시대일보사, 동아일보사 등을 거치며 1924(25) <운수 좋은 날>, 1925(26) <><B 사감과 러브레터>, 1926(27) <사립 정신병원장>, <그의 얼굴>(=<고향>, 1929(30), <신문지와 철창> 등을 꾸준히 발표한다. 1936(37)에는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을 때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정도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출옥한 후에도 여전히 작품 활동을 벌여 1938(39)에는 <무영탑>, 1939(40)에는 <흑치상지>, 1941(42)에는 <선화공주>를 연재하였다.

그러나 1943(44), 현진건은 만성 과음과 폐결핵 악화로 사망한다. 유언에 따라 화장된 후 지금의 서초구에 묻혔는데, 강남 지역이 개발되면서 묏자리가 사라지고 유해가 한강에 뿌려졌다.

현진건 문학의 특징

사실주의

현진건은 리얼리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탁월한 리얼리즘의 방법과 세련된 기교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에서는 1920년대 한국 사회와 가정 내의 인간관계를 다루면서 강한 현실 인식을 리얼리즘 기법으로 표현하는 한편 사회 부조리와 밀착된 제재를 통해 일제 강점하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민족의식의 표현

현진건은 여러 소설을 통하여 일제강점하의 핍박 받는 우리 민족의 수난과 사회 하층민의 빈궁의 참상을 폭로, 고발하였으며 일제에 대한 끈질긴 저항의 태도와 강렬한 민족의식을 표현하였다. 그의 이러한 작가적 태도는 주로 작가 자신의 모습의 투영으로 여겨지는, 초기의 신변 소설(身邊小說)기를 지나 1924(25)경부터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926(27)에 발표한 평론 <조선 혼과 현대 정신의 파악>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치 못하는 것이다.…… 오직 조선 혼과 현대정신의 파악! 이것이야말로 다른 아무것도 아닌 우리 문학의 생명이요 특색이다.”라고 한 바 있다. 스스로 이렇게 밝힌 현진건은 당대의 현실에 밀착하여 민족의 수난과 비참을 생생한 필치로 폭로한다.

특히 단편집 «조선의 얼굴»에 수록되어 있는 11편의 단편 소설은 이러한 현진건의 문학적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는 일제의 식민지화 된 조선사회의 암담한 상황과 운명에 대한 지식인의 고민을, <운수 좋은 날>에서는 사회 하층 노동자의 절망적인 빈궁의 참상을, <>에서는 비인간적인 낡은 사회인습에 희생된 연약한 소녀의 절망과 비극을, <고향>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고향을 떠나 이역으로 유랑하는 농민의 비애와 고통을 그리고 있다.

단편 소설의 기교

현진건은 김동인, 염상섭과 더불어 단편 소설 양식을 개척한 근대 문학의 선구자였으며, 문학의 내용과 기교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인식한 작가였다. 현진건은 그 나름대로의 서술 방식을 구축해 가면서 당대의 현실을 소설로 형상화하였다.

그의 소설에서 기교적 특징으로 흔히 지적되어 온 것은 언어의 정확성과 풍부함, 그리고 사실적 묘사 문체이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의 섬세하면서 간결하고 객관적인 표현을, <운수 좋은 날>에서는 하층 사회의 속어를 문학어로 수용하는 서민적 문체를 보여 준다.

이외에도 현진건은 단편 소설만의 압축과 기지, 반어와 해학 등의 세련된 기교를 매우 잘 보여주는 작가라 할 수 있다.

반어

현진건 소설의 구조적 특성은 반어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진건은 반어(反語, Irony) 구사에 매우 능한 작가이다.

현진건 문학에 있어 반어성은 비극적으로 또는 희극적으로 나타난다. <운수 좋은 날>이나 <사립 시립병원장>에서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노출하고 있으며, <B 사감과 러브레터>, <피아노> 등은 희극적 아이러니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현진건은 자아가 외적 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좌절할 때에는 모순된 사회 현실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통정하기 위해 비극적 아이러니를 사용하고, 자아가 개인적 욕망으로 파탄에 빠질 때에는 그를 조롱하고 풍자하기 위해 희극적 아이러니를 사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진건의 소설

초기
(1920년대 초반)
<희생화>(1920), <빈처>(1921), <술 권하는 사회>(1921), <타락자>(1922)
자신의 체험에 기반을 둔 자전적 소설의 경향
중기
(1925년 전후)

<피아노>(1922), <할머니의 죽음>(1923), <우편국에서>(1923), <운수 좋은 날>(1924), <까막잡기>(1924), <그리운 흘긴 눈>(1924), <발>(1924), <불>(1925), 사감과 러브레터>(1925), <사립 정신병원장>(1926), <고향>(1926), <동정>(1926), <신문지와 철창>(1929)
>민중의 삶을 주관적인 개입 없이 생활의 논리에 따라 묘사
후기
(1930년 전후)


<웃는 포사>(1930), <적도>(1933), <무영탑>(1938), <흑치상지>(1939), <선화공주>(1941)
민족주의 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역사 소설에 주력

<빈처> · <술 권하는 사회>

<빈처><술 권하는 사회>는 모두 1921(22) «개벽»에 발표한 작품으로, 현진건에게 명성을 얻어다 준 작품이다.

현진건의 초기 작품이자 단행본 «타락자»에 실린 <빈처>, <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에 등장하는 작중 주인공은 성별, 연령, 성격, 교육 수준, 재산 정도 등의 면에서 현진건의 신변 상황과 동일하다. 따라서 이들 작품의 작중인물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밑바탕으로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세 작품은 현진건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빈처>

<빈처>의 중심은 정신적 행복이라는 결말보다는 오히려 가난 그 자체에 놓여 있다. 문제는 가난의 원인에 있는데, 그것은 ‘K’문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어려운 생활인데도 불구하고 이 소설 속에서 문학은 절대적이자 당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빈처>에서 ‘K’아내의 갈등을 통해 드러나는 문학이라는 정신적 가치와 그에 따르는 가난의 갈등은 현진건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남편으로 설정된 1인칭 서술자의 자기 고백적인 서술 시점에 의하여 서술되었다는 점 또한 현진건 자신의 생활을 반영하는 자전적 성격을 잘 반영한다.

<빈처>
무명작가인 는 수입이 한 푼도 없어 아내가 가구나 옷가지들을 전당포에 맡겨 얻어 쓰는 돈으로 살아가는 처지이다. 6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고생만 한 아내는 오직 남편이 대 작가가 되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에 다니는 T가 찾아와 자기 처를 위해 샀다는 양산을 꺼내 보인다. 그것을 보면서 아내는 몹시 부러워하면서 우리도 이제 살 도리를 좀 하자고 한다.
다음날, 처가에서 장인의 생일이라고 할멈이 데리러 왔다. 비단옷이 없는 아내가 당목 옷을 입고 나서는 것을 보고 는 마음은 쓸쓸했다. 장인 집에 가니 부유한 처형과 아내의 모습이 너무 대조적이다. 처형은 비단옷을 입고 부유한 형편이었으나, 눈 위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그날 는 못 먹는 술을 여러 잔 마시고 장모가 불러다 준 인력거를 타고 집에 왔다.
잠에서 깨어 보니 아내는 음식을 차려 놓고 처형 이야기를 하면서 물질적으로 가난하더라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는 동서가 아내에게 선물한 새신을 보면서 어서 출세하여 아내를 기쁘게 해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술 권하는 사회>

다른 초기 작품과 마찬가지로 <술 권하는 사회> 역시 봉건적 관습인 조혼으로 맺어진 아내와 남편의 결혼생활이 부부 중심으로 이루어진 핵가족이라는 근대적 가정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부부 관계에서 아내의 무지는 남편의 갈등을 심화시킴으로써 전통 의식과 근대 의식의 충돌로 야기되는 사회문제를 보여준다. 다르게 본다면 아내남편의 관계는 민중과 지식인의 관계를 암시하며, 민중을 위해 지식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심각하게 제기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술 권하는 사회>
아내는 남편을 기다린다. 남편은 서울에서 중학을 마치고 결혼하자마자 동경에 가서 대학까지 마치고 온 인텔리이다.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면 부유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귀국한 남편은 돈벌이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집에 있는 돈을 쓰기만 하고 걸핏하면 화를 냈다. 그러던 남편은 무슨 근심이 있는 사람처럼 자다가 일어나 울기도 하는 등 늘 우울하게 지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새벽 두 시경 행랑 할멈이 부르는 소리에 나가 보니 남편은 만취가 되어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돌아왔다. 아내는 남편의 옷을 벗기어 자리에 뉘려 하나 옷이 잘 벗겨지지 않자 짜증을 내며, 남편에게 이토록 술을 권한 사람들을 탓한다. 남편은 쓸쓸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화증도 하이칼라도 아닌 현 조선 사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편은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며, 그런 사회에서 자신이 할 것은 주정꾼 노릇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남편은 아내의 무지에 답답하다고 하며,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가 버린다. 아내는 절망한 어조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빈처>에서는 결말에 남편이 아내와 화해를 시도하며 긍정적인 현실 인식을 보여주지만, <술 권하는 사회>에서는 남편아내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빈처>에서는 남편이 출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갈등이 생겼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의 입장을 수용함으로써 갈등이 해소될 수 있지만, <술 권하는 사회>에서는 갈등의 원인을 모순된 사회 구조에서 찾고 있으므로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될 수 없고, 결과적으로 갈등이 해소될 가망이 없는 것이다.

반어의 종류
반어를 분류하는 방식은 연구자들마다 차이가 있다.
- 언어적 아이러니 : 화자가 의도한 함축적인 의미와 겉으로 주장하는 의미가 다른 표현이 나타나는 경우.
- 구조적 아이러니 : 반어가 단어나 구절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작품 전체에 걸쳐지는 경우.
- 상황적 아이러니 : 결과가 예상한 것, 또는 알맞은 것과 다른 상황으로 되는 경우. =극적 아이러니.
- 낭만적 아이러니 : 현실과 이상, 유한과 무한, 자연과 감정 등 이원론적인 대립 의식에서 반어가 발생하는 경우.
- 순진성 아이러니 : 천진난만한 시점과 그렇지 못한 현실을 대비시킴으로써 긴장을 유발하는 경우.

<할머니의 죽음>

1923(24) «백조»에 발표된 단편으로, 할머니의 임종을 중심으로 가족들의 심리를 포착한 작품이다. 현진건은 <할머니의 죽음>을 기점으로 초기의 신변잡기를 다룬 소설에서 객관적인 심리 묘사 소설로 전환하였다. 죽음을 거부하려는 할머니의 허망한 몸짓과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이기적이고 작위적인 행동을 통해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면서 임종을 앞에 둔 인심과 인정을 실감나게 포착한 작품이다.

<할머니의 죽음>
3월 그믐날 조모주 병환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급히 시골로 내려간다. 여든 둘의 할머니는 이미 악화되어 있었고, 친척들이 모두 모여 긴장된 며칠을 보내는 가운데 집안 내의 효부로 알려진 중모가 할머니 곁에서 연일 밤을 새워 가며 간호하고 염불을 외운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독실한 불교 신자인 할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역시 놀라운 효성을 부리는 게 도무지 우리 야단칠 밑천을 장만하는 게로구나.”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와중에 할머니가 빨리 끝장나기를 은근히 바라는 자손들은 직장 때문에 무작정 시골에 눌러 있을 수도 없어 한의사를 불러 진맥을 시킨다. 오늘 내일 넘기기 힘들다는 진단과는 달리 하루하루가 무사히 지나자 양의사를 다시 불러 온다. 그러나 할머니의 병세는 호전되고, 몇 주는 염려 없다는 말을 들은 자손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모두 떠난다. ‘도 할머니에게 곧 완쾌되실 거라고 위로하며 서울로 올라온다.
그러나 어느 화창한 봄날, 우이동 벚꽃놀이를 막 나가려는 때에 오전 3시 조모주 별세라는 전보를 받는다.
는 할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벌어지는 자손들의 모습에서 천륜으로 얽혀진 끊을 수 없는 정보다는 요식 행위와 같은 형식적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또한 할머니에게 효를 다하는 중모의 행동은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수단, 즉 도덕적 우월감의 표시임을 간파한다.

<할머니의 죽음>의 묘미는 구성적 측면에 있다. 특히 아름다운 봄날 깨끗한 봄옷을 입고 벚꽃놀이를 나가다가 사망 전보를 받는 마지막 장면은 객관적이면서도 아이러니한 극적 효과를 낳는다. ‘조모주 병환 위독이라는 전보를 시작으로 하여 오전 3시 조모주 별세라는 전보로 끝나는 대칭 구조 또한 인상적이다. 한편 작품 내에서 보이는 서술자의 태도나 목소리는 비교적 담담하다. 이것은 서술자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할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의 태도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의도는 할머니의 죽음이 주는 슬픔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대하는 인간들의 심리와 행동을 그리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운수 좋은 날>

1920년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조사 사업 때문에 농촌이 피폐해졌고, 때문에 고향을 떠나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민중이 많았다. 1920년대의 리얼리즘 소설들은 이러한 현실을 포착하며 당시 민중의 어려운 삶을 그려낸 경우가 많다. <운수 좋은 날>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운수 좋은 날>1924(25)에 발표된 단편으로, 반어적인 제목을 통해 도시 하층 노동자의 삶을 생생하게 그린 현진건의 대표작이다. 특히 교육 받지 못한 주인공 김 첨지가 쓰는 비속어를 그대로 담음으로써 김 첨지의 사회적 위치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한편 하층민의 삶과 정서를 단편적으로 보여 준다.

<운수 좋은 날>
인력거꾼 김 첨지는 며칠 동안 장사가 잘 안 된다. 그런데 왠지 비가 조금씩 온 이 날은 이상할 만큼 운수가 좋아 만져본 적 없는 큰 돈을 번 것이다. 김 첨지는 술도 한잔 사 마시고 앓아누워 있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을 사다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아내는 처음에 감기로 앓아누운 지 오래 되었지만 가난해서 약을 한 첩도 못 쓰는 형편이다. 김 첨지에게 사흘 전부터 설렁탕이 먹고 싶다던 아내에게 핍박을 주었지만, 지금은 설렁탕을 사다줄 수 있다는 기쁨에, 세 살배기 아들에게 죽을 사줄 수 있다는 기쁨에 마음이 설렌다.
김 첨지는 길에서 친구 치삼이를 만나 술 넉 잔을 마시고,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죽어있다.

<운수 좋은 날>에서 나타나는 갈등은 인물과 외부 대상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김 첨지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내적 갈등이다. 돈을 벌수록 김 첨지는 비극에 대한 예감을 점점 더 크게 느끼는데, 이 갈등은 하루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에 가까워질수록 증폭된다. ‘김 첨지에게 은 벗어나고자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내면의 불안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의 갈등

내적 갈등 개인 내부의 심리적 모순 · 대립에 의한 갈등
외적
갈등
적대자나
반동 세력과의
갈등
개인과 개인의 갈등 주동 인물과 반동 인물 사이의 갈등
개인과 사회의 갈등 개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사회 윤리나 제도와의 갈등
인간과 운명의 갈등 개인의 삶이 운명에 의해 좌우되는 데서 오는 갈등
인간과 자연의 갈등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일어나는 갈등

<>

1925(26)에 발표한 <>은 가난과 조혼 제도 때문에 열다섯 살에 시집간 순이가 빈곤과 시집살이, 남편의 학대 등의 쓰라림을 견딜 수 없어 원수의 방을 없애 버리려고 집에 불을 질러 버린다는 내용을 박진감 있게 그린 작품이다. 무지한 농촌 소녀의 비극적 상황을 그린 자연주의 계열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불>
열다섯의 순이는 밤에 남편과의 관계를 너무도 힘들어 한다. 그리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남편과 자신이 자는 방이라는 생각에 남편과 함께 자는 방을 원수의 방이라고 생각한다.
순이는 허리가 부러지게 보리를 찧고 점심을 해 모심는 일꾼에게 가져가다 죽인 송사리가 큰 몸뚱이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실신한다. 깨어 보니 자신이 원수의 방에 누워 있었다. 순이는 그곳이 싫어 밖으로 나갔는데, 시어머니는 쓰러지면서 사발을 깬 며느리가 밉지만 들어가 쉬라고 속에 없는 말을 한다. 순이가 방에 있기 싫다고 하자 시어머니는 결국 속마음을 드러내며 순이를 때린다. 맞으면서 순이는 도리어 쾌감을 느끼고 버틴다.
저녁이 되어 순이가 지긋지긋한 밤에 대한 공포심으로 울고 있을 때, 남편이 들어와 울지 말라며 눈물을 닦아 준다. 순이는 원수의 방만 없으면 고통의 밤을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궁리한다. 그러다가 성냥을 발견하고는 밤을 기다렸다가 불을 놓는다. 집이 불타는 것을 보고 순이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모로 뛰고 세로 뛴다.

<>의 주제는 물론 봉건적 조혼에 대한 비판과 인간 해방에 있는데, 그 문제의 발원지에 불을 질러 태워 없앴다는 점에서 순이는 적극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결말 처리는 이 무렵 이미 등장한 신경향파 소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적극적 행위가 주인공 순이의 자각되지 않은 발작적, 일시적 충동에 불과하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 또 이 작품의 초점은 식민지 시대의 궁핍한 농촌 상황보다는 민며느리 제도의 비극적 측면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사실적 묘사와 치밀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현실에 대한 당대적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결국 고난과 갈등의 원인에 대한 이성적인 파악 없이 즉물적인 파괴 행위로 사태에 대응한다는 결말이 문학적 감동을 반감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립 정신병원장>

1926(27) 발표한 <사립 정신병원장>은 처자식을 거느린 남편의 비애를 통하여 당시의 빈궁한 사회상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물질적 빈곤이 정신적 파멸까지 초래하게 되는 빈곤의 비극성을 보여줌으로써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한층 강화되었던 시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현진건은 당대의 누구든 간에 ‘W’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시킴으로써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을 가한다.

<사립 정신병원장>
W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의 친구이다. 그는 백부 밑에서 자라다가 처가살이를 하고, 그도 견디지 못해 분가하여 은행에 들어갔다가 그만둔다. 암담하던 차에 부잣집 아들인 친구 P공인증’(=정신병)에 걸려 간병인이 필요하게 되자 WP를 돌보아 주고 돈과 쌀을 얻는다. 사람들은 그에게 사립 정신병원장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어느 날 는 고향에 갔다가 친구들과 이야기하던 중, W로부터 그날 P가 발작을 일으켜 칼로 W를 해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날 W는 술을 많이 마시고 남은 음식을 싸 가려고 하지만, K가 창피하니 그러지 말라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싸우고, 주위 친구들이 이를 뜯어 말렸다.
K가 먼저 간 후 W는 이런 음식 안 먹어도 산다며 목 놓아 운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식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게 어떻겠냐는 둥, 목 졸라 죽이겠다는 둥, 모두 매어 놓고 집에 불을 놓아 한꺼번에 죽이겠다는 둥 지껄인다.
이튿날 실제로 W의 부인은 마루에 흠씬 매를 맞아 늘어져 있고 아이들은 기둥에 매어져 있었다. 얼마 후 나에게 친구 L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W군은 결국 보호하던 P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것이다.

<고향>

1926(27) 간행된 단편집 «조선의 얼굴»에 수록된 작품으로, 일제의 수탈로 황폐해진 식민지 농촌의 현실을 집약적으로 그려낸 액자 구성의 단편이다. 사실주의 문학의 일반적 특성인 현실 폭로에 주안점을 둔 작품으로, 일제의 수탈로 찌그러진 두 남녀의 모습에서 조선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고향>
는 서울행 기찻간에서 기이한 얼굴의 의 옆자리에 앉는다. 좌석에는 각기 국적이 다른 사람들일본인, 중국인, 조선인인 이 앉아 있다.
는 처음에 에 남다른 흥미를 느끼고 바라보다가 이내 싫증을 느껴 애써 그를 외면하려 한다. 그러나 의 딱한 신세타령을 듣게 되자 차차 연민의 정을 느낀다. 마침내 두 사람은 술까지 함께 마시고, ‘의 얼굴에서 조선의 얼굴을 발견한다. ‘는 정처 없이 유랑하는 실향민인 에게서 유랑의 동기와 내력을 듣는다.
대구 근교의 평화로운 농촌의 농민이었던 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농토를 빼앗겼다. 떠돌이가 되어 간도로 떠났으나 거기서 부모는 굶어 죽고, 구주 탄광을 거쳐 다시 폐허의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무덤과 해골을 연상하게 하는 고향에서 , 이십 원에 유곽에 팔렸다가 질병과 부채만을 안고 돌아온 옛 연인과 해후했다. 그는 괴로운 심정으로 일자리를 찾아 지금 경성으로 올라가는 중이다. 그는 취흥에 겨워서 어릴 때 부르던 아픔의 노래를 읊조린다.

는 처음에는 단순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를 바라보다가, ‘의 어쭙잖은 행동에 반감을 느껴 거리감을 드러낸다. 그러다가 의 신산스런 표정에 마음을 열고, ‘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는 공감하며 정서적 합일 상태에 이른다. 별개의 존재이던 가 한 민족이라는 유대감을 가지면서 심리적 거리가 제거된 것이다.

거리감의 변화는 문체의 변화에서도 잘 감지된다. 즉 처음에는 를 묘사할 때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문체가 나타나지만, ‘의 행적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주관적 감정이 개입된 해설체로 표현되는 것이다.

한편 마지막 부분의 노래에서는 민족의 고뇌를 함축하는 풍자성이 엿보인다. ‘가 부른 노래는 신민요로, ‘가 어릴 적에는 멋모르고불렀지만 지금은 그 의미를 알고 부르는 노래이다. 이 노래의 노랫말은 당시 조선인이 겪었던논밭이 신작로가 되고, 친구가 감옥소로 가고, 노인은 공동묘지로 가고, 계집은 유곽으로 가는비극을 효과적으로 고발하여 작품의 주제를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역사 소설

현진건이 1930(31) 이후 발표한 <웃는 포사>, <적도>, <무영탑>, <흑치상지>, <선화공주> 등의 장편 소설은 <적도>를 제외하면 모두 역사 소설이다. 이렇듯 역사 소설은 현진건의 작품 전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학계에서 1970년대 이래 새롭게 부각되면서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1938(39)과 이듬해에 연재한 <무영탑>, <흑치상지>는 민족주의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다양한 계층의 삶을 통해 그 시대의 생활상을 폭넓게 묘사하고 있다. 이는 으레 역사상 저명한 상층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지배층 내부의 사건을 다루었던 동시대의 다른 역사 소설과는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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