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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레지덴츠 한국어 가이드 : 온라인에서 바로 보기

2022. 1. 25. by 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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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레지덴츠 Residenz München

바이에른 왕국 비텔스바흐(Wittelsbach) 왕조의 본궁이다(별궁은 인근에 있는 님펜부르크 궁전(Schloss Nymphenburg)이다). 막스요제프 광장(Max-Joseph-Platz)을 마주보고 서 있다.

1385년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해자에 둘러싸여 작고 보잘것없는 성이었지만 이후 수 세기를 거치는 동안 증축을 거듭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19세기 국왕 루트비히 1세(Ludwig I, 1786~1868) 무렵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복원했다.

 

뮌헨 레지덴츠는  각각의 왕들이 모은 보물과 예술 작품 컬렉션을 보관했던 저택이기도 했다. 내부 장식과 예술품들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초기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를 거쳐 신고전주의 시대까지를 아우른다. 비텔스바흐 왕조의 독특한 취향과 정치적 야망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켜본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투박하지만, 내부에 들어가 보면 그 압도적인 화려함에 놀라게 된다.

뮌헨 레지덴츠의 전시 공간

레지덴츠의 공개 홀은 모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는 박물관(Residenz Museum)과 보물관(Ratzkammer)이라는 이름으로 나누어 개방하는데 박물관에서는 다양한 양식으로 장식된 각종 방을, 보물관에서는 비텔스바흐 왕조의 금은보화 컬렉션을 전시한다. 둘을 다 본다면 하루 종일 보아도 부족하다.

상당히 많은 구역을 개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래 그림과 같이 여러 차례 증축한 덕에 구조가 복잡하고 다양한 건축양식이 혼재되어 있어 지루하지 않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와 같이, 하나의 건물이라기보다는 안뜰들을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건물 단지’에 가깝다. 왕족들이 방을 찾다가 길을 잃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다.

비텔스바흐 가문(Haus Wittelsbach)

비텔스바흐 가문의 문장

바이에른 지역에서 왕을 배출한 독일 명문가이다. 11세기 남독일 지방의 바벤베르크 가문(Haus Babenberger)의 분가로 시작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본가인 바벤베르크 가문은 프랑스의 카페 왕조(Capétiens), 발루아 왕조(La maison de Valois), 부르봉 왕조(Maison de Bourbon)와 조상이 같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1122~1190)가 팔츠(Pfalz) 백작인 비텔스바흐 가의 오토(Otto)에게 바이에른 지역을 증여받은 후부터 본격적으로 비텔스바흐 왕가가 시작되어 20세기 초까지 바이에른을 통치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기도 했고, 그리스가 독립할 때 런던 회의에서 국왕 루트비히 1세(Ludwig I, 1786~1868)의 차남인 오톤(Otto, 1815~1867)을 그리스의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그리스 국왕도 배출했다. 비텔스바흐의 바이에른 왕국은 1918년 독일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막을 내렸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정신병

비텔스바흐 가문은 미남 미녀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근친혼을 거듭했던 유럽 왕가들이 대개 그렇듯, 비텔스바흐 가문에도 유전병을 앓는 인물이 많았다. 특히 정신질환자가 많다.

예컨대 국왕 루트비히 2세(Ludwig II, 1845~1886)는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며 자신을 달의 왕이라 칭하고는 했고, 재위 말기에는 정신병을 이유로 강제 퇴위 당하기도 했다. 그의 숙모인 알렉산드라 공주(Alexandra, 1826~1875)는 결벽증이 있어 흰옷을 고집하고 자신이 유리로 만든 피아노를 삼켰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정신병과 미모, 양쪽에도 가장 유명한 인물은 시씨(Sisi)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엘리자베트 황후(Elisabeth, 1837~1898)이다. 그녀는 외모에 집착해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과 172cm 키에 40kg대 몸무게를 고집했으며 온갖 기상천외한 다이어트 방법들을 동원했다. 칼에 찔려 암살당했을 때 코르셋의 압박 때문에 자신이 칼에 찔렸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엘리자베트 황후

뮌헨 레지덴츠 내부(지도상 관람 순서대로)

1 입구 구역 Vestibül - Eingangsbereich

왕궁 안뜰 KÖNIGSBAUHOF

입구 구역 앞쪽에 있는 안뜰이다. 1826~1835년에 국왕 루트비히 1세(Ludwig I, 1786~1868)의 주거용 궁전으로 지어진 막스 요제프 광장(Max-Joseph-Platz)에 왕궁인 쾨니히스바우(Königsbauhof)가 건설되면서 조성된 안뜰이다. 동쪽 끝은 1730년대에 벨기에 출신의 장식 건축가 퀴빌리에(François Cuvilliés, 1695~1768)(프랑스 어로는 ‘퀴비예’)가 설계한 녹색 갤러리(Grüne Galerie)의 양식을 기반으로 했다.

2-3 정원 홀 - 물품보관소 Gartensäle –Garderobe

관람이 시작되는 2~3번 방은 정원 홀(Gartensäle)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곳에 물품보관소가 있어 짐을 넣어둘 수 있다.

I-X 보물관 Schatzkammer : Goldschmiedekunst vom Mittelalter bis zum Klassizismus

왕궁 1층의 보물관은 비텔스바흐 왕실 유물들을 모은 곳으로, 9세기에 걸친 작품이 10개의 방에 전시되어 있다. 청동이나 녹색 크리스털 작품, 황금 공예품, 왕관, 의식용 검, 고블렛, 왕실의 휘장, 사파이어를 박은 술잔 등 1,250개 이상의 작품을 전시한다.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특히 9세기부터 전해 내려온 ‘대머리 왕 카를’의 기도서, 그리스도가 못 박혀 죽었다는 십자가의 성물함, 성 게오르크 조각상이 눈에 띈다. 이외에도 투르크 족에게서 빼앗아 온 무기들, 스리랑카에서 만들어진 상아 세공품, 중국 도자기 등 상당한 양의 동양 보물들도 있다.

보물관 ⁃ 바이에른 왕관 Bayerische Königskrone

보물관을 대표하는 전시품이다.

1806년 1월 1일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Maximilian I, 1756~1825)가 새로운 왕으로 선포되자, 뮌헨에서는 즉시 프랑스 파리(Paris)의 장인들에게 왕관과 왕홀, 검과 허리띠, 제국의 구와 인장 등의 제작을 의뢰했다. 나폴레옹의 궁정 예술가이자 당대 가장 유명한 금세공인이었던 마르탱 기욤 비에네(Martin-Guillaume Biennais, 1764~1843)가 제작에 참여했다. 비에네는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에 쓰인 칼, 월계관, 목걸이 등을 제작한 장인으로 바이에른 외에 투스카니 대공, 네덜란드 왕 등의 휘장도 제작했다. 

왕관은 이듬해에 도착했지만, 정치적 이유로 대관식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는 공개적으로 이 왕관을 머리에 쓴 적은 없다. 이후에도 새로운 왕이 즉위하더라도 의례적 행사가 있을 때 쿠션 위에 올려놓기만 했다고 한다. 금과 은,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를 사용해 높이 23.3cm, 지름 26.5cm로 제작되었다. 푸른 다이아몬드의 색은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보물관 ⁃ 황금양모기사단 휘장 Toison vom Goldenen Vlies

뮌헨에서 1760년경에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금, 도금한 은은 활용해 높이 8.8cm로 제작된 휘장이다.

황금양모기사단은 1430년 부르고뉴의 공작 필리프 3세와 포르투갈의 공주 이사벨라와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설립된 기사단이다. 성모 마리아와 성 안드레아에게 헌신되어 있었으며 로마 가톨릭교도로서 가장 지위가 높은 귀족만이 이 기사단의 단원이 될 수 있었다. 초기에는 다른 기사단처럼 처음에는 엄격하게 1명의 기사단장(주권을 가진 공작)과 23명의 기사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1433년에는 31명으로 늘어났다가 1516년에는 회원수가 51명이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를 수호하고 기사도의 전통적 관례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기사단에서 각 기사는 범죄에 소추되거나 반역, 이단의 혐의를 받으면 다른 기사에게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기사단은 이단을 엄격히 배격했으나 기독교적 기사단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이교도적인 이름인 ‘황금양모’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하단의 축 늘어진 양은 황금양모기사단의 상징이며, 기사단의 보석을 투아종(Toison, 프랑스어로 양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보물관에는 금고에는 18세기 황금양모기사단의 보석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다.

보물관 ⁃ 하인리히 2세의 성 십자가 유물 Kreuzreliquiar Kaiser Heinrichs II

101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금세공품 중 하나이다. 비문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에서 나온 조각 네 개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하인리히 2세(Heinrich II, 973~1024)가 밤베르크 대성당에 내린 것이라고 한다.

1803년에 바이에른 주교구와 수도원이 해산되고 교회 재산이 세속화되면서 뮌헨 레지덴츠의 화려한 예배당(Reiche Kapelle)으로 옮겨졌다가 1958년부터 보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오크나무, 금과 금 도금한 은, 크리스털, 진주, 실크 등이 쓰였으며 높이는 43cm이다.

 

하인리히 2세는 오토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1002년에 독일의 왕, 1004년에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고 1014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즉위했다. 하인리히 2세는 주교들을 지원하는 한편 성직자들의 축재를 예방하기 위해 성직자들에게 독신을 요구했다. 1007년에는 밤베르크 교구를 만들어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육성하기도 했다.

1147년 교황 클레멘스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는데, 독일의 왕 중 유일하게 성인으로 지정된 인물이다. 후사를 남기지 않고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오토 왕조가 단절되었다.

하인리히 2세

보물관 ⁃ 사슴 위의 다이아나 Trinkspiel "Diana auf dem Hirsch"

17세기 초 아우구스부르크의 금세공인 마티아스 발바움(Matthäus Walbaum, 1554~1632)이 제작한 작품이다. 단순한 장식용품이 아니라, 중앙 장식에 포도주를 채워 테이블 위에 올리면 내부에 있는 장치가 작동해 움직이다가 멈추도록 설계된 게임용 장치이다. 기계가 멈췄을 때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잔에 담긴 술을 마셔야 했을 것이다. 17세기 초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제작된 것인데, 당시 작센에서는 이런 유형의 술 마시기 게임이 매우 인기가 높아 유사한 장치들이 여러 점 제작되었다. 특히 아우크스부르크 금세공인들의 솜씨가 유명했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약 30여 점의 작품이 모두 세 명의 아우구스부르크 장인들이 제작한 것들이다.

높이는 32.5cm이며 은과 금 도금으로 제작되었다. 붉은 색의 사슴 뿔 부분은 산호로 만든 것이다.

보물관 ⁃ 기젤라의 십자가 Kreuz der Königin Gisela   

헝가리 왕비인 성녀 기젤라(St. Gisela, 985~1061)가 어머니의 무덤에 쓰고자 제작 의뢰한 것이다. 어머니인 부르고뉴의 기젤라 공작부인은 1006년에 사망해 레겐스부르크의 니더뮌스터(Niedermünster) 수도원에 묻혔다. 즉, 무려 1천 년도 더 된 유물이다. 오크나무과 금, 에나멜과 실크, 진주 등을 사용해 44.5cm 높이고 제작되었다. 레겐스부르크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젤라 왕비는 바이에른 대공 하인리히 2세의 딸이었는데, 996년에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헝가리의 이슈트반 1세(I. Szent István, 975?~1038)와 결혼했다. 당시 기젤라의 나이는 겨우 11세였다. 이후 기젤라는 남편의 지원 아래에서 헝가리에 기독교 신앙과 서양 문화를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1세가 1038년 사망하자 새 헝가리 왕에게 쫓기듯 바이에른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니더부르크(Niederburg)의 수녀원에서 여행을 보냈는데 이곳이 오늘날 기젤라의 무덤이 있는 니더른부르크 수도원(Kloster Niedernburg)이다. 아직도 매년 헝가리의 순례자들이 이곳을 성지순례의 일환으로 찾고 있다.

기젤라 왕비는 18세기에 시성될 뻔했으나 무산되고 1975년에 성녀로 시성되었다. 남편인 이슈트반 1세는 이미 1083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어 ‘성 이슈트반’으로 불린다. 이슈트반 1세는 헝가리의 10,000 포린트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기도 한데, 사실상의 헝가리 왕국의 개창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성 이슈트반(왼쪽)과 성녀 기젤라(오른쪽)

보물관 ⁃ 마리 루이즈 황후의 여행용품 Reiseservice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두 번째 부인인 마리 루이즈 도트리슈(Marie Louise, 1791~1847) 황후에게 선물한 작품이다. 1812년에 제작되었으며 너비는 56cm이다. 금박을 입힌 은, 자개, 별갑, 상아, 흑단으로 만든 120개 이상의 조각을 사용해 만든 것이다. 열쇠구멍 덮개 아래에 보면 ‘바이에른 왕관’의 제작자인 마르탱 기욤 비에네의 사인이 새겨져 있어 비에네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황후가 여행을 떠날 때 필요한 물품들을 구비한 것, 즉 말하자면 여행용 세트라 할 수 있다. 교묘하게 위장된 비밀 칸이 여러 개 있고 2인용 식기 세트, 세면용품 세트, 필기구와 바느질 도구, 자와 드라이버, 심지어 치과용 도구까지 포함돼 있다.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에서 프란츠 2세(Franz II, 1768~1835)의 장녀로 태어났는데,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쉔브룬 궁전에서 두 번이나 쫓겨난 적이 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붙인 인형을 괴롭히며 자랐다고 한다. 나폴레옹과 조제핀 황후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 황후가 될 사람이 가엾다, 그게 내가 아니길 빈다”라고 썼을 정도였다. 그래서 자신과 나폴레옹의 결혼이 결정되자 매일 같이 울었다고 한다. 더욱이 나폴레옹은 그녀보다 무려 22세나 연상이었다.

나폴레옹와 마리 루이즈의 결혼식 그림

 

마리 루이즈는 1810년에 나폴레옹와 결혼해 남편의 상냥함에 마음을 열었고 얼마 되지 않아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스를 마중 나왔다가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빗속을 달려가 포옹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평소 남자들을 멀리하는 데다 성격이 무던하고 검소하기까지 한 그녀를 소중하게 대했다. 일례로, 결혼한 이듬해에 마리 루이즈가 난산을 겪자 의사가 “산모와 아기 중 한 쪽만 살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자, 나폴레옹은 고민하지 않고 마리 루이즈를 살리라고 했다고 한다.

이 여행용품 세트는 그런 마리 루이즈에 대한 나폴레옹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 할 수 있다. 낯선 프랑스에 시집와서 1년만에 아들을 출산한 아내를 위해 주문한 작품인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같은 해에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이를 시작으로 점차 패전을 거듭하여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

보물관 ⁃ 하인리히 성배 Heinrichskelch

이른바 ‘하인리히 성배’라고 불리는 이중 손잡이 형태의 잔이다. 레겐스부르크의 예배당에 있다가 교회 재산이 세속화되면서 1811년경에 뮌헨 레지덴츠로 옮겨졌다. 1024년 사망해 훗날 시성된 오토 왕조의 마지막 왕인 하인리히 2세가 예배당에 헌납했다. 크리스털 그릇 부분은 1000년경에 파티마 제국에서 제작되었고, 11~12세기에 신성로마제국에서 도금한 은으로 나머지 부분을 만들어 끼웠다. 받침대 부분은 파란 색과 빨간색 자수정으로 장식했다.

보물관 ⁃ 성 게오르크 기사 상 Statuette des Ritters St. Georg

1586년에 쾰른 대주교 에른스트(Ernst von Bayern, 1554~1612)가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Wilhelm V, 1548~1626)에게 보낸 유물이다. 게오르크 기사 부분은 이탈리아·네덜란드의 예술가인 프리드리히 서스트리(Friedrich Sustris, 1540~1599)가 제작했다. 금과 도금한 은을 주재료로 하고 루비, 에메랄드, 오팔, 마노, 크리스털, 진주 등으로 장식했다. 높이는 50cm이다. 17세기 축일에 뮌헨 레지덴츠의 화려한 예배당(Reiche Kapelle) 제단을 장식하게 되었다.

얼굴 가리개 부분을 들어 보면 수염 난 성 게오르크의 얼굴이 드러난다. 회양목으로 조각된 이 얼굴은 작품 제작을 의뢰한 빌헬름 5세와 닮은 모습이다.

성 게오르크는 성 게오르기우스(Georgius, ?~303)의 독일식 이름이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자 14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언어권에 따라 조지(George), 호르헤(Jorge), 조르지오(Giorgio) 등으로 부른다. 미술 작품에서는 보통 칼이나 창으로 용을 찌르는 백마 탄 기사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용과 싸우는 남자의 등에 날개가 있으면 성 미카엘 대천사이고 날개가 없고 말을 탄 기사의 모습이면 성 게오르기우스이다. 조지아나 러시아의 국장에도 이런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 게오르크를 묘사한 그림들. 왼쪽부터 △1348년 프랑스의 그림, △14세기 중반 러시아의 그림, △13세기 이탈리아의 그림, △1435년 스페인 화가 마르토렐(Bernat Martorell)의 그림

중세 시대인 11세기에서 12세기경부터 그가 용과 싸웠다는 이야기가 처음 등장했다. <황금성인(Legenda Aurea)>이라는 책에 적힌 전설에 따르면, 카파도키아의 왕 세르비오스(Selbios)의 성이 있는 라시아(Lasia) 부근 호수에 독기를 뿜는 용이 있었다. 용은 시레나를 장악하고 매일 두 마리씩의 양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는데, 양이 다 떨어지면서 사람을 산제물로 바치게 되었다.

왕의 외동딸까지 바쳐야 할 지경이 되었을 때, 마침 로마 제국의 게오르기우스 기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사정을 듣게 되었다. 게오르기우스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을 무찌르고 나면 개종해 달라는 약속을 받았다. 게오르기우스는 용이 입을 벌린 그 순간에 긴 창으로 일격에 용의 입속을 찔러 악룡을 죽였고, 이후 주민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성 조지의 십자가’라 불리는 하얀 바탕의 붉은 색 십자가도 매우 유명하다. 성 게오르기우스를  수호성인으로 삼는 국가의 국기에도 많이 쓰이는데, 그 예로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의 중심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나 조지아 국기의 붉은 십자가를 들 수 있다.

 

보물관 ⁃ 십자가 상 Kruzifix

페텔의 십자가 상(왼쪽)과 루벤스의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오른쪽)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활동한 바일하임(Weilheim) 출신의 거장 게오르크 페텔(Georg Petel, 1601~1635)의 작품이다. 페텔은 당대 유럽 최고의 상아 조각가 중 한 사람으로, 독일에서 바로크 조각의 시작을 알린 예술가이다. 보물관에 있는 페텔의 십자가 상은 1629~1631년경 제작되어 1958년부터 보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상아를 깎아 만든 높이 65.5cm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로크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회화 작품에 바탕을 두고 있다. 페텔은 고아로 자라다가 뮌헨에서 상아 조각법을 배우던 중 30년 전쟁 초기에 독일을 떠나 떠돌이 장인으로 생활했는데, 1620~1621년경 앤트워프(Antwerp, 안트베르펜)에서 루벤스를 만난 이후 그의 바로크 풍 예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루벤스의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한 조각으로 형상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상아 조각에 적격이었다. 페텔은 앤트워프에서 루벤스와 여러 차례 만나는 동안 루벤스의 작품들 조각으로 여러 차례 변용했다.

보물관 ⁃ 지구의와 천구의 Erd- und Himmelsglobus

상아, 금, 에나멜, 진주 등으로 1570~1580년경 제작한 높이 7cm 미니어처이다. 처음에는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Albrecht V, 1528~1579)가 설립한 뮌헨  쿤스트캄머(Kunstkammer)에 보관되었다가 나중에 캄머갈레리(Kammergalerie)로 옮겨졌다. 캄머갈레리는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가 자신의  궁전 옆에 자신의 개인 미술품과 공예품 컬렉션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방이었다. 이후 캄머갈레리가 폐쇄된 1730년경에야 비로소 뮌헨 레지덴츠 보물관으로 오게 되었다.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별자리와 세계 각국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수집용 장식품이다.

보물관 ⁃ 영국 여왕의 왕관 Krone einer englischen Königin

1399년 영국에서 작성된 목록에 기록되어 있는 왕관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국 왕관이다. 1370~1380년경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금과 에나멜, 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진주를 사용하였는데,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1400)의 첫 번째 왕비인 보헤미아의 앤(Anne of Bohemia, 1366~1394, 안나 체스카 왕녀)의 것이라고 한다. 앤은 보헤미아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4세(Karl IV, 1316~1378)의 장녀이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헨리 4세(Henry Ⅳ, 1366~1413)의 반란군에 의해 폐위되었다. 훗날 헨리 4세의 딸인 블란체(Blanche) 공주가 1402년에 팔츠 선제후국의 선제후 루트비히 3세(Ludwig III von der Pfalz , 1378~1436)와 결혼할 때 지참금 중 하나로 이 왕관을 가져왔다. 1782년에 팔츠에서 뮌헨 레지덴츠로 옮겨졌다.

보물관 ⁃ 장식 주전자 Zierkanne

1570년경 제작된 장식용 주전자로 조개껍데기 진주층과 은, 도금, 에나멜 등으로 제작되었다. 높이는 32.5cm이다. 전형적인 매너리즘 양식의 그릇으로, 천연 자개의 부드러운 빛깔과 반짝이는 금의 결합, 자연물과 인간 기술의 대조가 매우 매력적이다.

조개껍데기가 가진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 색상, 빛깔과 형상을 활용해 절묘한 조화미를 탄생시키는 이러한 작업 방식은 벤젤 얌니처(Wenzel Jamnitzer, 1507/1508~1585)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태어난 얌니처는 나중에 독일의 뉘른베르크로 이주해 1585년 사망할 때까지 당대 최고의 금세공인이자 장식 조각가로 이름을 날렸다.

벤젤 얌니처 탄생 500주년 기념 우표(2008)

보물관 ⁃ 사파이어 잔 Saphirpokal

의례용으로 사용하는 잔으로,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Albrecht V, 1528~1579)를 위해 만든 것이다. 한스 라이머(Hans Reimer)가 1563년 제작했으며 뮌헨 레지덴츠 보물관이 초기부터 소장해 왔다. 높이는 48.6cm이고 무게는 5.5kg이다.

흰색 에나멜로 덮여 있고 섬세한 금박과 덩굴 장식을 상감했다. 36개의 큰 사파이어와 금색 장식도 눈에 띈다. 뚜껑에는 고대 갑옷을 입은 전사가 오른손에 사파이어 반지를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인데, 바이에른 문장의 색상인 흰색과 파란색을 사용하고자 한 의도이다.

보물관 ⁃ 탁상시계 Tischuhr

1690~1692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은과 금 도금, 에나멜, 다이아몬드 등으로 제작한 진자 방식의 시계로, 높이는 57cm이다. 시계 바닥에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Maximilian II, 1662~1726)의 이니셜이 있다.

시계 바로 아래에 있는 금 부조 장면는 막시밀리안 선제후가 승리했던 1688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묘사한 것인데, 전쟁 중 사바 강(Sava, 지금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을 흐르는 도나우 강의 지류)을 건너는 모습을 표현했다.

 

막시밀리안은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선제후 직을 계승하고 일치감치 군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당시는 대투르크 전쟁 시대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신성 동맹’을 발족해 합스부르크 군주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러시아 차르국, 독일과 영국의 군주들이 이에 합류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막시밀리안 2세는 1688년 투르크의 베오그라드 공방전에서 지휘를 맡아 승리하면서 명성과 능력을 전 유럽에 알리게 되었다.

보물관 ⁃ 타조알 그릇 Straußenei-Gefäß

도금한 은, 에나멜을 사용해 제작된 높이 29cm의 작품이다. 프랑스나 독일 남부에서 14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스바흐(Ansback) 인근의 베네딕토 수도회의 성 비투스 수도원에서 나온 것으로, 몸체가 타조 알로 구성되어 있다. 타조알은 당시 매우 이국적인 희귀품이었고 그만큼 가치가 높았다. 나선형 뚜껑과 체인 장식, 숭배하는 천사를 둔 것은 고딕 양식의 특징인데, 이를 통해 이 그릇이 성수나 성유 같은 신성한 액체를 담는 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물관 ⁃ 상아 상자 Truhe

실론(Ceylon, 지금의 스리랑카)에 있는 코테(Kotte) 왕의 궁정에서 제작된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Albrecht V, 1528~1579)의 소유가 되었다. 상아과 금, 루비, 사파이버 등을 사용해 제작되었으며 높이는 18cm이다.

이 작품은 1543년경 제작되어 당시 실론의 일부를 정복한 포르투갈 사절단에 선물로 바쳐졌다. 상아 조각은 실론의 공사관, 무용수, 음악가, 코끼리를 탄 사람들, 경의와 기도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실론’이라는 이름은 영국인들이 사용하던 명칭으로 포르투갈 어 ‘세일랑(Ceilão)’에서 파생된 것이다.

보물관 ⁃ 왕실 기도서 Königlichen Gebetbuch/h4>

14.2×11.5×3.7cm의 작은 이 기도서는 843년에 서프랑크 왕가의 위엄을 얻은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인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747~814)의 손자인 ‘대머리 왕’ 카롤루스 2세 칼부스(Karl II der Kahle, 823~877)의 개인 소유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875년 로마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양피지 46장(13.5×11cm)의 원고는 카롤루스 2세가 이른바 궁정 학교에 있던 846~869년에 정교하게 디자인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왕실 기도서이다. 참회 기도와 시간별 기도, 시편 등 다양한 상황을 위한 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 텍스트는 전체적으로 금색으로, 일부는 자주색으로 작성되었으며 페이지마다 장식용 테두리가 있고 이니셜로 장식되어 있다.

 

14세기부터 종교개혁 때까지 스위스 취리히의 대성당에 있다가 스위스 라이나우 수도원으로 옮겨졌는데, 1583년에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Wilhelm V, 1548~1626)가 획득했다. 금자수와 바이에른 진주가 있는 오늘날의 가죽 제본은 아마도 1635년 이후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사료에 의하면 이때 원본에 있던 수태고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하는 두 개의 상아 부조가 현재의 표지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현재 온라인에서 모든 페이지를 고화질로 볼 수 있다.

왕실 기도서의 일부(맨 왼쪽은 표지이다)

4-5 선조화 갤러리와 도자기 캐비닛 Ahnengalerie und Porzellankabinett

선조화 갤러리 Ahnengalerie

황금색 장식으로 꾸며진 화려한 공간에 신화 시대 이래 비텔스바흐 왕가의 역대 왕 121명의 초상화를 전시하고 있다. 샤를마뉴 등 몇몇은 가문 인물은 아니나 비텔스바흐 혈통의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 추가한 것이다.

1726년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Karl Albrecht, =카를 7세, 1608~1745)는 집권하자마자 프랑스에서 훈련받은 궁정 건축가 요제프 에프너(Joseph Effner, 1687~1745)에게 선조화 갤러리를 조성하게 했다. 제국의 위엄과 자신의 정당성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당시 젊은 건축가였던 벨기에 출신의 퀴빌리에(François Cuvilliés)도 이 방의 멋진 디자인에 참여했으며 벽의 금박 조각은 벤체슬라우스 미로프스키(Wenzeslaus Miroffsky)의 작품이다. 오랜 공사 끝에 마침내 1742년, 선조화 갤러리가 완공되었다.

도자기 캐비닛 Porzellankabinett

선조화 갤러리와 인접해 화려하게 장식된 이 방은 원래 선제후의 보물관이었으나, 카를 알브레히트(Karl Albrecht, =카를 7세, 1608~1745)의 유언에 따라 비텔스바흐 가문의 보물을 거울로 벽을 만든 전시공간에 전시하게 되었다. 왕족의 명성과 대표성을 상징하는 이 유서 깊은 컬렉션은 지배자 가문을 정당화하고 선전하기 위한 선조화 갤러리의 결론과도 같은 의미를 지녔다. 20세기 초부터는 이곳에 도자기 컬렉션이 전시되고 있다.

6 그로토 안뜰 Grottenhof

1581~1589년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Wilhelm V, 1548~1626)가 안티쿠아리움을 따라 정원 안뜰 주위에 여름 궁전을 지으며 조성한 안뜰이다. 안티쿠아리움 서쪽 정면에 있는 분수와 조개벽 때문에 그로토(그로테스크하다는 뜻) 안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586년에 마르스 신의 청동상과 형형색색의 조개껍데기들로 빼곡히 만든 조개 벽이 매우 유명하다. 실제로 보면 화려한 금 세공품이나 예술 작품보다도 더 깊은 탄성을 자아낸다. 같은 기간에 제작되어 안뜰에 서 있는 페르세우스 분수도 명물이다.

7 안티쿠아리움 Antiquarium

뮌헨 레지덴츠를 대표하는 하나으 방을 꼽으라면 단연 안티쿠아리움이다. 알프스 북부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르네상스 양식의 방 중 하나이며, 뮌헨 레지덴츠에서 가장 오랫동안 보존된 방이다.

길이 66m의 이 방은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Albrecht V, 1528~1579)가 자신의 골동품 조각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1568~1571년에 처음 지은 것이다. ‘골동품 수집실’이라는 이름의 ‘안티쿠아리움’이라는 명칭은 고대 유물의 방이라는 최초 용도에서 파생된 것이다.

 

알브레히트 5세의 후계자인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Wilhelm V, 1548~1626)와 그의 아들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는 1581~1600년에 방을 연회장으로 개조했다. 이때 고대 모델에서 영감을 받은 장식 스타일인 그로테스크 양식을 채택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천장에 있는 네덜란드 궁정 화가 페테르 칸디드(Peter Candid, 1548~1628)의 16개의 그림은 명성과 미덕의 우화를 묘사한 것이다.

채광창과 뤼네트 부분은 과거 바이에른 공국의 마을, 시장, 성, 궁전 등을 그린 102개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오늘날 긴 벽에 전시된 흉상과 조각품 중 일부는 17~18세기 알브레히트 5세의 골동품 컬렉션이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아프로디테 상 Aphrodite von Aphrodisias

안티쿠아리움은 로마 황제를 비롯한 이교도 인물들의 조각으로 가득 차 있다. 흰색 조각품들의 면면을 보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여성 조각상이 하나 있다. 바로 검은 피부의 작은 여신상이다. 과도하게 장식된 옷 장식과 머리, 손, 발의 어두운 색깔 때문에 중세 기독교의 컬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현재는 손이 남아 있지 않다). 2세기 전반에 로마에서 제작한 것이다.

 

안티쿠아리움에 자리한 이 작은 조각상은 경건한 마리아가 아니라, ‘아프로디시아스의 아프로디테’ 형식을 축소한 골동품 사본이다. 아프로디시아스는 후기 헬레니즘 시대부터 후기 고대(2~8세기)까지 소아시아 지방의 도시문화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지역이다. 고대 시대에는 고대 아나톨리아의 다산의 여신에 그리스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을 융합한 독특한 버전의 아프로디테를 숭배하는 신앙 중심지로서 유명했다. 이 ‘아프로디시아스의 아프로디테’는 지중해 연안 여러 지역의 대리석 인물상에서도 나타난다. 이후 로마와 그리스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레아, 가이아, 헤카테, 이시스, 이슈타르, 세레스, 키벨레, 마그나 마테르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아프로디시아스의 아프로디테’라는 이름으로 숭배되었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아프로디테 모델 중 하나인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상(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안티쿠아리움에 있는 아프로디테 여신상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골동품 수집가인 자코토 스트라다(Jacobo Strada, 1507~1588)가 1567년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Albrecht V, 1528~1579)에게 보낸 것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스트라다는 ‘에페소의 디아나(아르테미스) 상으로, 머리와 발은 소위 파라곤(paragon)이라 불리는 검은 얼룩으로 만들어지고 나머지는 흰색이며,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대 유물 중 하나일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알브레히트 5세는 이 희귀한 작품을 인수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실제로 이 작품은 로마에서 매우 유명했는데, 당시의 스케치를 보면 검은 색 돌로 만든 머리와 손, 발은 나중에 추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방 안뜰 KÜCHENHOF

녹색 갤러리와 구 보물관(현재는 박물관 매표소로 쓰인다) 뒤에 위치한 주방 안뜰은 한때 왕궁의 1층에 있던 조리 시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44년 2차 세계대전 때 레지덴츠가 파괴된 후 재건했는데, 이때 현재의 보물관인 신 보물관이 주방 안뜰 옆에 조성되었다.

8-11 옥타곤 방과 검은 방으로 가는 계단 Oktogonraum und Treppe zum »Schwarzen Saal« 

옥타곤 방은 검은 방 건물에 팔각형으로 조성된 아치가 있는 전실로, 1630년 기록에도 보인다. 안티쿠아리움과 연결되어 있다.

분수 안뜰 BRUNNENHOF

1600~1610년경 8면으로 조성한 안뜰이다. 중앙에 분수가 있다 하여 분수 안뜰이라고 명명했다. 분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비텔스바흐 가문의 첫 바이에른 공작인 오토 1세(Otto I, 912~973)의 청동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가늘고 긴 이 안뜰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가 배치한 첫 번째 안뜰인데, 그 위치와 모양은 본질적으로 오래된 건물인 안티쿠아리움의 영향을 받았다. 궁전 단지의 커뮤니케이션 센터 역할을 했으며, 특히 1613년 노이부르크 결혼식 토너먼트 대회와 같이 궁전 축제 행사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고위층의 방문객들만 마차를 타고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야외 음악공연장으로 대여하기도 한다.

음악회가 열린 모습

12/13 검은 방으로 가는 계단과 검은 방 Treppe zum Schwarzen Saal / Schwarzer Saal

검은 방은 1590년경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Wilhelm V, 1548~1626)가 안티쿠아리움 건물 동쪽에 추가한 것이다.

착시 효과를 부르는 환상적인 천장화는 1602년경에 한스 베를(Hans Werl, 1570~1608)이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관람자의 사람의 시선에서 설계한 원근 건축 표현을 보여주는데, 마치 가짜 돔이 있는 2층 아케이드 홀처럼 보이도록 했다. 천장 전체에 적용한 이 기법은 이는 독일 남부의 기념비적인 환상적 건축 회화의 시작점에 서 있다.

이 천장화를 두고 과거에는 크리스토프 슈바르츠(Christoph Schwarz, 1545~1594)가 설계한 것이라는 학설도 있었으나 이탈리아 화가 톰마소 로레티(Tommaso Laureti, 1530~1602)가 그린 볼로냐 비자니 궁전(Palazzo Vizzani) 천장화의 그림을 모방한 듯하다. 당시 비자니 궁전 천장화는 이미 없어진 후였기 때문에 베를은 1582년에 출판된 판화 자를 입수했을 것으로 보인다.

1582년에 출판된 판화

 

1623년 검은색의 대리적 입구와 벽난로 프레임을 설치해 여기에서 ‘검은 방’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방 상당부분이 파괴되었는데, 출입구와 천장화가 1979년에 재건되었다. 천장화는 카를 마닝거(Karl Manninger, 1912~2002)가 프레스코화 기법으로 복원했다.

베를의 천장화

14-14a 황색 계단과 방 Gelbe Treppe und Raum

황색 계단의 공사 전(왼쪽)과 공사 후(오른쪽)

뮌헨 레지덴츠는 종종 내부 공사를 하는데, 2017년부터 시작한 수 년 간의 공사 끝에 2021년 6월에 황색 계단의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 크게 파손되어 1970년대에 좁은 폭으로 재건되었다가, 이번 공사로 원래 형태로 복원되었다.

200년 전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Ludwig I, 1786~1868)는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건축가 클렌체(Leo von Klenze, 1784~1864)에게 왕궁을 증축하게 했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왕이 새 거처에서 손님을 만날 때 손님들이 걷게 될 계단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뮌헨 레지덴츠에 온 손님들은 왕을 알현하기 위해 300년이 넘은 오래 된 계단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 결과 클렌체는 웅장한 황색 계단을 완성했고, 손님들은 ‘검은 방’에서 왕궁까지 갈 때 28개의 계단을 통해 이동하게 되었다. ‘황색 계단’이라고 불리는 것은 노란색의 대리석 벽토 때문이다. 이것은 고대 로마 시대에 통치자들이 높이 평가했던 짙은 황색의 대리석(giallo antico)을 모방한 것이었다. 웅장한 입구를 구성하는 두 명의 의인화된 여성은 루트비히 1세의 모토인 ‘정의’와 ‘끈기’를 상징화한 것이다.

14b-14c 슐라튼 방(전투의 방) Schlachtensäle

나폴레옹 전쟁을 묘사한 14개의 벽화가 있는 전투의 전당이다.

14d-14h 18-19세기 테이블 문화 Tafelkultur des 18. und 19 Jh.

슐라튼 방을 지나면 복원 공사 끝에 2018년 문을 연 테이블 문화 전시실을 만날 수 있다. 1944년 전쟁으로 파손된 왕궁 식당 자리에 조성된 이 전시실들에는 장엄하게 반짝이는 은식기와 도자기 접시들이 전시되어 있다. 비텔스바흐 통치자들의 화려함에 대한 열망과 유행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19세기까지 복잡한 왕족의 만찬을 특징짓는 정교한 상징성, 그리고 궁중의 식탁 문화 분야에서 이루어진 모든 물질적·예술적 노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베를린 궁정에서 1842년에 당시 바이에른 왕세자였던 막시밀리안(훗날의 국왕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 1811~1864)과 그의 신부인 프로이센의 마리(Marie von Preußen, 1825~1889)에게 결혼 선물로 보낸 도자기 세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Maximilian I, 1756~1825)의 광범위한 은도금 테이블 세트가 눈에 띈다. 나폴레옹의 궁정 예술가이자 당대 가장 유명한 금세공인이었던 마르탱 기욤 비에네(Martin-Guillaume Biennais, 1764~1843)와 장 밥티스트 클로드 오디오(Jean-Baptiste-Claude Odiot, 1763~1850)가 나폴레옹의 동생인 베스트팔렌의 제롬 왕을 위해 1807~1809년에 제작한 식기 앙상블도 전시되어 있다.

15-21 동아시아 도자기 Ostasiatisches Porzellan

 

비텔스바흐 가문의 통치자들이 수집한 동아시아 컬렉션에는 500점 이상의 동아시아 도자기와 칠기가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Maximilian II, 1662~1726)이 구입한 것이다.

상인과 선교사들의 여행기가 퍼지면서 도자기, 비단, 칠기, 향료와 같은 동아시아 귀중품은 당시 유럽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중국, 일본, 인도 등에서 작품을 수입하다가(당시에는 아시아를 통틀어 ‘동인도’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아예 가구나 벽화를 중국풍으로 자체 제작하기도 했다. 뮌헨 레지덴츠의 ‘화려한 방’에 있는 거울과 도자기 캐비닛(Spiegel-und Porzellankabinett ausgestaltet)은 중국풍 장식에 대한 바이에른 통치자의 열정을 증언한다.

거울 캐비닛

 

동아시아 도자기 컬렉션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1600년경에 제작된 명나라의 청백색 그릇과 접시이며, 유럽 시장을 위해  제작된 일본과 중국의 도자기, 일본의 아리타 자기(Imari-Porzellan)도 포함하고 있다.

동아시아 도자기 ⁃ 청나라 청화 백자 Blauweiß-Porzellan

투명한 유약 아래 코발트 청색을 칠한 백자이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1654~1722) 때인 1680~1720년경 제작된 것이다.

청화백자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도자기의 전형으로 여겨져 1700년경까지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동아시아 도자기 ⁃ 포대를 멘 배불뚝이 불상 Dickbauchbuddha mit nacktem Bauch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1654~1722) 때인 1680~1720년경 제작된 백자이다.

중국의 순백색 백자는 19세기부터 블랑 드 신(Blanc de Chine, 중국의 흰색이라는 뜻)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남동부 푸젠(福建) 성에서 만든 백자의 일종인데, 명나라 때부터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다. 18세기 초에 수많은 순백 백자가 중국에 수출되어 마이센(Meissen) 공장 등에서 복제되었다.

이 불상과 같은 작은 작품은 유럽에서도 특히 인기가 많았다. 이 작품이 묘사한 배불뚝이 부처는 행복과 풍요의 상징인 포대화상(布袋, ?~917?)이다.

 

포대화상은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십국 시대까지 실존한 전설적인 승려이다. 항상 포대(헐렁한 주머니)를 메고 다녀서 포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엇이든 상관없이 시주를 받아 포대에 넣어 다니고, 언제나 솔직하며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의 길흉을 알아맞혔다는 등의 전설들도 있다. 중세 이후 중국에서는 포대화상을 본뜬 배불뚝이 자태를 주요 불당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였다. 서구에서는 마이트레야(Maitreya, ‘미륵’이라는 뜻)라고 부르곤 한다.

항저우 봉래봉 석굴의 포대화상

동아시아 도자기 ⁃ 모란 무늬 접시 Teller mit Darstellungen der Päonie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1678~1735) 때인 1730~1750년에 제작된 접시이다. 중국에서 ‘꽃의 여왕(花王)’이라 불리는 모란은 아름다움과 고귀한 신분, 부를 상징하는 꽃이다.

이런 유색 도자기는 1700년경부터 유럽에 전해졌는데, 대부분 ‘파밀리에 베르트(Famille verte, 녹색 패밀리라는 뜻)’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청나라 도자기를 분류할 때 전체적인 색상 계열에 따라 프랑스 어로 ‘Famille’라는 말 뒤에 ‘jaune(노란색)’, ‘ noire(검은색)’, ‘rose(장미색)’, ‘verte(녹색)’ 등을 붙여 부르곤 했다. 이 모란 무늬 접시에는 분홍색 음영이 있다 하여 ‘Famille rose’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식의 도자기 분류 표현은 현재까지도 종종 쓰이고 있다.

동아시아 도자기 ⁃ 금으로 장식한 사자 한 쌍 Löwenpaar aus Japanischem Porzellan

일본 도자기로 만든 이 한 쌍의 사자는 표면을 금으로 상징했다. 1670~1690년경 제작된 것은 18세기 초 파리에서 들여온 것이다. 당시 사자는 동아시아에서 힘의 상징이었다.

비텔스바흐 동아시아 도자기 컬렉션의 특징은 도금한 청동과 은으로 표면 장식을 추가한 것이 많다는 점이다. 주로 도자기의 가치를 더하는 동시에, 도자기를 선물할 때 보다 정성을 담기 위해 이런 작업을 거쳤다. 또한 외부 충격으로부터 작품을 보호하고 운송 중에 생긴 흠집을 가리지 위한 용도로도 쓰였다.

동아시아 도자기 ⁃ 검은색 금장 꽃병 Mirror Black Vasensatz mit Golddekor

검은색 유광 도자기에 순금으로 장식한 꽃병들이다. 비문과 그림은 이 꽃병이 교육받은 중국 상류층을 위해 제작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1654~1722) 때인 1700~1720년경 제작되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특히 검은색 유광 도자기가 희귀했다. 그중에서도 이 꽃병들처럼 순금 장식이 있는 것은 매우 인기가 높았다. 중국에서 이런 도자기들은 대개 중국 내의 상류층을 위해 제작되어서 국외로 거의 수출하거나 반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뮌헨 레지덴츠에 있는 검은색 도자기들은 중요하고 희소성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22-31 선제후의 방 Kurfürstenzimmer

1599년까지 공작 도서관이 있던 곳을 나중에 고쳐 선제후의 거주지로 사용하게 된 곳이다. 이 방들을 사용한 첫 번째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Maximilian III Joseph, 1727~1777)는 선제후 직에 오른 후인 1745년부터 아내인 작센의 마리아 안나 소피아(Maria Anna von Sachsen, 1728~1797)와 함께 이 거주공간에서 지냈다. 1746년 건축가 구네츠하이너 (Gunetzrhainer, 1692~1731)가 확장을 맡으면서 근대화되었고, 약 15년 후에 장식 건축가 퀴빌리에(François Cuvilliés, 1695~1768)가 다시 개조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다. 다만 오늘날 선제후의 방에 전시된 가구나 예술품들은 대부분 본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다.

32 만성회랑과 만성교회 Allerheiligengang / Allerheiligen-Hofkirche

만성회랑을 거치면 왕궁 교회인 만성교회로 진입할 수 있다.

1823년 당시 왕세자였던 루트비히는 이탈리아 팔레르모(Palermo)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12세기의 노르만-비잔틴 궁전 예배당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후 왕위에 오른 국왕 루트비히 1세(Ludwig I, 1786~1868)는 1826~1837년에 건축가 클렌체(Leo von Klenze, 1784~1864)에게 만성교회를 건축하게 했다. 클렌체는 자신이 선호하는 고전주의 양식으로 중세 모델을 해석해 예배당을 지었다. 원래 만성왕궁교회의 아치형 천장과 후진부는 금색 바탕에 채색된 그림으로 장식되었고 벽은 파리에서 가져온 유색 석고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이 교회는 1803년 교회 재산 세속화 이후 바이에른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때문에 공식적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봉헌되었고, 그 결과 이름이 ‘만성’이 되었다. 왕은 거주 공간인 왕궁에서 직접 이곳 예배당으로 가서 미사에 참석했고, 뮌헨 시민들은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의 동쪽 파사드를 통해 외부에서 들어왔다.

2차 세계대전으로 크게 파괴된 교회 내부는 2003년에야 일반에 공개되었다. 현대적인 건축 방식으로 보완해 현재는 음악회장과 행사장으로 유료 대여하고 있다.

33-41 호프가르텐 방, 샤를로테 방 Hofgarten-und Charlottenzimmer

분수 안뜰을 따라 길게 잇는 부분에서 33~38번 방이 호프가르텐 방(Hofgartenzimmer)이고, 그 옆에 이어지는 39~41번 방이 샤를로테 방(Charlottenzimmer)이다.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1573~1651)는 궁전 단지를 확장하면서, 레지덴츠의 최초 건물인 노이베스테(Neuveste)를 연결하는 오래된 복도 구역을 개조해 자녀들과 손님을 위한 거주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이 방들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200년 후인 1814년, 선제후 막스밀리안 1세 요제프(Maximilian I, 1756~1825)의 딸인 샤를로테 공주가 이곳에 거주하게 되면서 ‘샤를로테 방’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호프가르텐 방과 샤를로테 방에서는 최초의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와 그의 가족이 실제로 사용했던 가구들과 19세기 초의 궁정생활 문화를 감상할 수 있다. 왕가의 가구들은 완벽한 장인 정신과 절묘한 재료로 무장하고 있다. 일부 가구는 정교한 내부 장치가 있어 마법처럼 열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쟁 이전의 샤를로테 방

실린더 책상 Zylinderschreibtisch

당대 가장 유명한 가구 예술가인 다비드 뢴트렌(David Roentgen, 1743~1807)의 작품이다. 1773~1775년경 오크나무, 침엽수, 호두나무, 체리나무 등으로 제작했다. 상감 장식에는 단풍나무, 회양목 등 다양한 색상의 나무를 썼고 도금한 청동으로 이음쇠 등을 만들었다.

이 책상은 보안을 위해 매우 복잡한 설계 하에 제작된 책상이다. 잠금 해제된 책상 상판을 잡아당기면 자동으로 롤업 방식의 덮개가 열려 내부가 보이게 되어 있다. 중간 서랍에도 잠금 장치가 되어 있고 롤링 실린더 아래에도 비밀 수납공간을 두었다. 외벽에 있는 다른 잠금장치를 해제하면 서랍 앞부분을 옆으로 회전시키면서 더 많은 서랍이 열린다. 책상 작동 방식은 아래 링크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상은 로코코에서 고전주의로의 전환을 알리기도 한다. 색이 많이 바래긴 했지만 우아하게 숲을 모티브로 한 상감 장식을 넣었는데,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 불리는 이 장식은 로코코 시대 이후 중국풍 문양을 활용한 장식미술 양식 중 하나이다. 17세기 이래의 이국적 정서를 담고 있어 직물, 도자기, 가구 등에 두루 쓰였는데 18세기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누아즈리로 장식한 방이나 작품들을 갖고 있었다.

색상을 복원한 시누 아즈리 장식

이 책상은 원래 슐라이스하임(Schleißheim)의 새 궁전을 위해 만들어졌다가 군주제 말기에 뮌헨 레지덴츠로 왔다. 당시 뢴트겐의 가구들은 매우 세련되어 유럽 왕실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그의 아버지가 설립한 가구 공장은 약 80명을 고용했고 프랑스 루이 16세에게 납품하기도 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도 두 번째 장편소설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Wanderjahre oder die Aussagenden)>에서 뢴트겐 공장의 작품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42-45 샤를로테 회랑과 넓은 계단 Charlottengang und Breite Treppe

42번의 기다란 복도가 샤를로테 회랑으로 팔츠 회랑(Pfalzgang)이라고도 한다. 샤를로테 방과 가까워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 때인 1612년에 조성한 것이다. 현재는 특별전시장 등의 용도로 쓰이고 있다.

46-53 트리어 방 Trierzimmer

역시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 때인1612~1616년에 지어진 곳으로, 황제의 궁전 동편에 위치해 있다. 18세기에 뮌헨 레지덴츠에 올 때마다 이곳에 묵곤 했던 트리어(Trier) 지방의 선제후이자 대주교 클레멘스 바츨라프(Klemens Wenzeslaus von Sachsen, 1739~1812) 때문에 ‘트리어 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7세기에 황제 거주지 구역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였는데, 황실을 방문하던 사람들 중 황실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나 고위 인사들만이 여기에 머물 수 있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회의장으로 썼다. 이러한 방의 중요성은 천장의 정교한 시각적 설계에 반영되었는데, 이 천장화는 안티쿠아리움의 천장을 맡기도 한 페테르 칸디드(Peter Candid, 1548~1628)의 작품이다.

트리어 방은 18~19세기에 여러 번 수정을 거쳤으며 2차 세계대전 때 상당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복원 과정에서 1615년경의 설계를 약간 다른 형태로 재현하고 천장화를 복원했다. 오늘날에는 17세기의 카페트와 호화로운 가구 등을 전시하고 있다.

게임 테이블 Prunkspieltisch

트리어 방에 있는 이 테이블은 두 사람이 주사위를 굴리면서 플레이하는 프랑스의 고전 게임 ‘트릭-트랙(Tric-Trac)’ 보드가 숨겨져 있는 게임용 테이블이다. 게임도구는 현재 바이에른 국립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1670년경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참나무, 흑단목, 금·은 도금으로 만들었고, 상감 장식에는 자개와 거북이 등껍질, 삽나무 등을 썼다. 물론 이런 최고급품은 장식용이며, 실제로 게임을 하는 데 쓰지는 않았다.

서랍에 숨겨진 게임 보드

 

상감 장식은 자연과 사냥, 전쟁 등을 주제로 한다. 중앙에는 고대부터 승전의 상징으로 알려진 소위 트로파이온(Tropaion), 즉 흉갑, 투구, 무기, 악기 등이 넣었는데, 이 트로파이온은 식물과 낙타·유니콘 같은 이국적인 동물에 둘러싸여 있다. 주변의 프리즈(Fries) 부분에서는 토끼가 여우에게, 여우는 사냥개에게, 사냥개는 사자에게 쫓기는 사냥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주제의 테이블 상판은 17세기 귀족의 삶을 상징하는데, 테이블의 소유주였던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Ferdinand Maria, 1636~1679)가 당대의 왕자가 가져야 할 이상을 표현한 것이다.

상판의 무늬들

 

이후 예술을 사랑했던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Maximilian II, 1662~1726)는 1790년경, 이 게임 테이블 밑에 새로운 장식 받침들을 만들어 넣었다. 벌거벗은 채 묶여서 무릎을 꿇은 두 명의 투르크 전사가 테이블을 어깨에 지고 있는 모습이고, 가운데에 있는 두 마리의 독수리는 날개를 펼쳐 테이블의 균형을 잡고 있다. 여러 무기 장식도 추가했다. 이런 일련의 받침 장식들은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이 자신이 크게 승리했던 투르크 전투(1683~1688)를 기념하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이 게입 테이블은 귀족적 삶을 표현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성공한 군 지휘관이자 ‘터키 학살자’인 선제후를 미화하는 의미로까지 확장되었다.

하부 받침대 장식

12월 태피스트리 Monatsteppich Dezember

53번 방에는 페테르 칸디드(Peter Candid, 1548~1628)가 디자인하고 한스 판 데어 비스트(Hans van der Biest, 1550~161)가 제작한 12월 태피스트리가 있다. 이른바 ‘월별 태피스트리(Monatsteppich)’ 시리즈 열두 점 중 하나로, 17세기 초 사람들이 12월의 대림절(크리스마스 전 4주 간의 기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뮌헨 레지덴츠에 값비싼 태피스트리를 갖추기 위해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는 큰 비용을 들여 양탄자 직공인 비스트를 네덜란드에서 뮌헨으로 데려왔다. 비스트는 수년에 걸쳐 여러 태피스트리 시리즈를 제작했으며 그 중 일부는 금실로 촘촘하게 짜여 있다.

 

12월 태피스트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면 1610년경 뮌헨은 아주 춥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들은 땀 흘리는 일, 즉 도축을 하고 있어서 더욱 옷을 가볍게 입었을 것이다 남자는 돼지의 멱을 다서 피를 빼 담고 있고 여자들과 아이는 돼지가 움직이지 못하게 몸통과 다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겨울의 시작은 돼지를 먹이는 기간의 끝을 의미하고, 이때부터 돼지는 주로 숲에서 혼자 먹이를 찾거나 목자들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또 춥고 어두운 겨울이 시작되면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는 크리스마스는 물론 봄맞이 축제 때까지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 중요한 음식이었다. 칸디드는 이런 순간을 12월의 주제로 택해 즐겁게 돼지를 잡는 사람들을 진실성 있게 담아내고 있다.

 

다른 많은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태피스트리도 통치자를 대표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가장자리에 비텔스바흐 가문의 문장이 있다. 또 당시에는 태피스트리에 군주의 통치지역을 묘사하기도 했는데, 주로 배경에 과거 바이에른의 가장 중요한 도시들을 넣곤 했다. 12월 태피스트리 역시 멀리 배경으로 바이에른 통치 지역인 슈트라우빙(Straubing)의의 탑과 성벽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 당시 슈트라이빙 탑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가축 시장이 크게 열리는 곳이었다고 한다.

54 성 게오르크 방의 온실정원 전시 St. Georgs-Rittersaal / Wintergartenausstellung

성 게오르크 홀에서는 뮌헨 레지덴츠에서 사라진 두 왕실 정원의 과거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하나는 1851~1854년에 국왕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 1811~1864)가 유리와 철 구조물로 구성해 지은 최초의 온실정원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인 국왕 루트비히 2세(Ludwig II, 1845~1886) 때인 1869년부터 왕궁 북쪽에 조성한 또 다른 아치형 온실정원을 조성했다. 거의 70m 길이의 철골 골격으로 만든 공간이었다. 궁정 정원의 책임자였던 카를 폰 에프너(Carl von Effner, 1831~1884)는 1871년까지 인공호수 주변에 이국적인 조경 정원을 배치했다. 그 결과 19세기에 이 연회실은 낭만적인 자연물과 최신 기술이 결합한 예술적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루트비히가 사망한지 불과 몇 년 후, 이 매혹적인 공간은 해체되고 만다.

55-62 녹색 갤러리가 있는 화려한 방 Reiche Zimmer mit Grüner Galerie

독일어권에서 로코코 양식 궁전의 정점에 서 있는 공간이다.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Karl Albrecht, =카를 7세, 1608~1745)는 1730년부터 1737년까지 건축가 퀴빌리에(François Cuvilliés, 1695~1768)에게 이 멋진 일련의 방들을 설계하게 했다. 제국의 존엄성과 자신의 정당성을 상징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녹색 갤러리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흰 벽의 금 장식과 붉은 제노바풍 벨벳 장식이 지배적이다.

퀴빌리에는 방 배치뿐만 아니라 벽면과 일부 가구 등도 디자인했다. 가구 중에는 파리에서 들어온 고급 가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이후 재건하면서 장식 벽토, 벽 판넬 등 대부분을 본래와 같이 복원했다.

화려한 방  ⁃ 객실  Audienzzimmer

57번 방인 객실(Audienzzimmer)은 외국에서 온 외교 사절들을 공식적으로 접견하던 곳인데, 이곳에 특히 화려한 가구들을 두었다. 사절들은 의례용으로 마련된 두 개의 대기실을 거치는 동안 점점 더 장엄한 장식 공간을 경험했다. 선제후는 빨간 벨벳 캐노피 아래에 앉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한 방  ⁃ 녹색 갤러리 Grüne Galerie

58번 방인 녹색 갤러리는 선제후가 정기적으로 선별된 귀족들을 초대해 연회를 여는 곳이었다. 녹색의 실크 다마스트(damast) 벽면 때문에 ‘녹색 갤러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연회장일 뿐만 아니라 사진과 ‘거울 갤러리’이기도 했다. 70점 이상의 그림을 세 줄로 구성해 높은 벽 거울과 번갈아가며 배치했는데, 그림은 비텔스바흐 가문이 수집했던 것이다. 금박을 입힌 장엄한 액자에 담긴 대가들의 그림은 장식 벽토, 화려한 가구와 함께 조화를 이룬다. 그림 걸이는 2011년에 바이에른 주립 회화 컬렉션의 지원으로 대부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1920년 녹색 갤러리의 모습

화려한 방  ⁃ 회의실 Konferenzzimmer

59번 방은 회의실로, 과거에는 최고위층 귀족이나 왕실 직계가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 만큼 가장 값비싸고 화려한 장식들로 내부를 꾸며 두었다.

현재는 아름다운 장식 벽토와 풍부한 조각들을 관람할 수 있다.

화려한 방  ⁃ 의례용 침실 Paradeschlafzimmer der Reichen Zimmer

60번 방은 의례용 침실이다. 기록에 의하면 호화로운 가구를 갖춘 이곳은 ‘편안함’이 아니라 ‘화려함’을 위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즉, 실제로 거주하기 위한 침실이 아니라 프랑스 궁정 의식 모델을 채택해 상징적인 ‘쇼룸’으로 쓰인 것이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부르봉 왕가의 왕들은 등은 300여 명의 귀족들이 매일 아침 문안인사를 하는 기침 의식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밤에는 똑같이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취침 의식을 하면서 하루를 마쳤다. 취침의식이 끝나면 개인 침실로 가서 잠들었다. 뮌헨 레지덴츠에서도 이를 모방해, 선제후는 매일 의례용 침실에서 공개적으로 잠옷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모습을 선보였다. 그런 만큼 이 침실은 특히 귀하고 값비싼 옻칠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파리에 특별히 주문한 것이라고 한다.

 

의례용 침실은 ‘보여주기’ 위한 방인 만큼 장식 설계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예컨대 창문 벽과 침대 측면은 네 개의 판넬로 둘러싸여 있는데 각각 꽃(봄), 사냥 도구(여름), 덩굴(가을), 작은 불씨(겨울) 모양으로 사계절을 드러낸다. 침대의 양쪽에는 가을을 상징하는 전갈자리와 겨울을 뜻하는 염소자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하단 판넬에는 계절을 인물의 나이로 표현한 조각이 있는데, 봄의 인물은 젊은이의 모습이지만 가을을 상징하는 인물은 나이든 모습이다. 이렇게 장식들에 시간의 의미를 부여한 것은 낮과 밤, 겨울의 고요함과 봄의 깨어남과 같은 개념들이 잠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전갈자리(가을)와 염소자리(겨울), 젊은이(봄)와 노인(가을)

 

뿐만 아니라 상단의 하얀 치장 벽토 부분에서 힘차게 아폴론(Apollo)이 태양 마차를 몰고 있는 모습은 활기찬 아침을 상징한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잠자는 사람 위로 나타나는 노인은 밤에 찾아오는 꿈의 신 모르페우스(Morpheus)를 형상화한 것이다. 

또 오른쪽 거울 위쪽의 장식은 고요한 분위기의 밤으로, 사랑에 빠진 달의 여신 셀레네(Selene)가 미소년 사냥꾼인 엔디미온(Endymion)을 잠들게 한 후 몰래 키스하기 위해 다가서는 모습이다. 왼쪽 거울 장식에서는 미인이 화환으로 잠자는 전사를 옭아매고 있는데, 잠자고 있던 케팔로스(Cephalus)에게 반해 그를 납치한 에오스(Eos)라는 추측이 설득력 있다.

왼쪽부터 아폴론(아침)과 모르페우스(밤), 셀레네(밤)와 에오스(낮)

화려한 방  ⁃ 거울과 도자기 캐비닛 Spiegel-und Porzellankabinett ausgestaltet

61번 방은 침실 옆에 배치된 두 개의 캐비닛 중 하나이다. 퀴빌리에는 프랑스 궁정 관습을 따라, 침실에 두 개의 작은 캐비닛을 설계했다.

첫 번째 캐비닛은 휴게실 겸 서재로 설계되었는데, 거울과 도자기로 된 캐비닛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이렇게 벽을 장식하는 큰 거울은 18세기 귀족 저택 인테리어에서 가장 값비싼 장식품 중 하나였다. 정교하게 빛을 반사하는 거울 덕분에 수백 개의 작은 도자기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금박 벽걸이들이 더욱 화려하게 빛난다. 중국풍 도자기에 대한 바이에른 통치자의 열정을 보여주는데, 당시 도자기, 도자기, 비단, 칠기, 향료와 같은 동아시아 귀중품은 유럽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화려한 방  ⁃ 미니어처 캐비닛 Miniaturenkabinett

62번 방은 ‘화려한 방’을 구성하는 일련의 방들의 마지막인 미니어처 캐비닛이다. 화려한 방에서 유일하게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특히 예술적으로 꾸며져 있다.

요아킴 디트리히(Joachim Dietrich, 1690~1753)의 정교한 조각에 금박을 입힌 장식들은 붉은 옻칠 배경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 절묘한 판넬에 16~18세기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화가들이 그린 미니어처 회화 작품들이 있다. 작품 수는 무려 129점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두 세트의 문과 미니어처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수년간의 공사 끝에 2001년 복원을 완료했다.

63-66 화려한 방의 내실 Rückwärtige Räume der Reichen Zimmer

67–69 / 71 교황의 방과 황금 방 Päpstliche Zimmer / Goldener Saal

17세기 초부터 4세대 동안 이 방들은 공작부인과 그 뒤를 이은 선제후가 사용했다. 지금의 이름은 1782년 교황 비오 6세(Pius VI, 1717~1799)가 방문하면서 붙었다.

헤르츠 캐비닛 Herzkabinett

68번 방은 헨리에트 아델라이드가 호화롭게 꾸민 헤르츠 캐비닛이다. 그 옆 67번 방인 붉은 방(Rotes Zimmer)에 원래 침실이 있었는데 침실 내부는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고, 다행히 헤르츠 캐비닛은 보존되었다. 원래 모습의 세련된 화려함이 잘 전달되는 공간으로, 이름은 ‘하트(마음, 사랑)의 캐비닛’이라는 뜻이다. 방의 액자와 그림, 장식 등에서 반복되는 하트 모양에서 딴 명칭이다.

 

사보이 왕가의 헨리에트 공주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활기차게 자라는 동안 자유분방한 이탈리아와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14세 나이에 결혼하여 오게 된 뮌헨 궁정에서의 삶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고 일생 동안 엄격한 반종교 개혁 가톨릭의 엄격한 통제 아래 조국을 지켰던 시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무거운 상중이었기 때문이다. 새로 선제후 자리에 오른 남편 페르디난트 마리아(Ferdinand Maria, 1636~1679) 역시 나이가 14세밖에 되지 않아 모후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두 소년소녀의 중매결혼은 특히 초기에 매우 불행했다. 뮌헨의 엄격한 의례 궁중 법도 때문에 헨리에트 공주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선조화 갤러리에 있는 헨리에트 아델라이드의 초상화

헨리에트가 뮌헨에 적응하기까지는 몇 년이나 걸렸다. 이윽고 시어머니가 죽자, 헨리에트는 남서쪽에 있는 자신의 새 거주지를 꾸미기 시작했다. 금박을 입힌 조각, 우화 그림, 세련된 벽 장식과 장식 대리석으로 만든 모자이크 등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헨리에트가 조성한 헤르츠 캐비닛은 붉은 방(Rotes Zimmer)인 침실의 내실에서만 드나들 수 있게 만든 공간이다.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이른바 상징주의 회화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꽃, 동물, 일상물 등의 상징을 퍼즐과 같은 추상적 그림으로 그려 넣고 모호한 설명을 곁들여, 해석을 통해서만 숨은 의미가 드러나게 하는 일종의 비밀 언어이다. 행복과 고통을 수반하는 양면적인 사랑의 감정을 형상화한 일련의 회화들은 오랜 싸움 끝에 얻은 남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된 헨리에트의 개인적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들은 1669년경 궁정 화가 카스파 아모르트(Caspar Amort, 1612~1675)와 니클라스 프루커(Nikolaus Prugger, 1620~1694) 등이 그린 것들이다.

 

중앙 그림에서는 날개 달린 사랑의 신 큐피트가 하나의 화살로 두 개의 하트를 꿰뚫고 있는데, 이는 헨리에타와 남편인 페르디난드 마리아의 결합을 상징한다. 두 사람이 풀리지 않는 매듭을 잡고 있는 모습 역시 사랑의 감정을 의미한다.

네 모서리 쪽에는 각각 하트 모양 프레임의 그림들이 있는데, 사랑의 천사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인간의 마음으로 장난치는 모습이다.

 

북쪽 벽화에서는 날개 달린 퓌토(서양의 회화 등 예술에 자주 쓰이는, 벌거벗은 아기)가 애정의 땅이 있는 지도를 들고 있다. 이 상징적인 지도 형태는 17세기 가장 인기 있었던 여류 소설가인 마들렌 드 스퀴데리(Madeleine de Scudery, 1607~1701)의 작품 <끌레리(Clélie)>에 등장하는 판화 ‘탕드르 지도(Carte du Tendre)’(오른쪽 사진)에서 따온 것이다. 가상의 공간을 표현한 이 지도는 소설 속에서 사랑으로 가는 길을 나타내고 있다.

 

문 맞은편의 그림에서는 담요에 하트를 수놓는 세 명의 궁녀가 있다. 이들은 아테나 여신과 베짜기 대결을 했다는 그리스 신화 속 아라크네를 연상케 한다. 삶의 (에로틱한) 실을 짜서 수를 놓는 운명의 여신들을 묘사한 것으로, 프루커의 작품이다.

황금 방 Goldener Saal

71번 방은 황금 방인데, 이곳 객실의 장식이 과거 매우 화려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1666~1667년경 사보이 왕가의 공주인 헨리에트 아델라이드(Henriette Adelaide, 1636~1676)가 원래 있던 공간을 이탈리아 토리노의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재설계하게 하면서 탄생했다. 한때 접견실, 즉 북쪽에서 온 손님들을 맞기 위한 공간이었다.

1665~1667년 헨리에트가 뮌헨 궁정에 장엄한 바로크 예술을 들였지만 화재와 전쟁을 거치며 많이 소실되었다. 원래 태피스트리로 덮지 않은 모든 벽과 천장을 반짝이는 금박 조각으로 장식했었다고 한다. 다행히 요한 하인리히 쉔펠트(Johann Heinrich Schönfeld, 1609~1684)가 그린 아홉 점의 천장화가 남아 있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천장화 중앙의 그림은 로마 제국 트라야누스 황제(Traianus, 53~117)의 일화를 표현한 것이다. 트라야누스가 전쟁터로 나가는 길에 한 과부가 나타나 억울하게 죽은 아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황제가 이를 거절하자 과부는 ‘자신에게 맡겨진 본분에 소홀하지 말라’고 했고, 이 말을 들은 황제가 출정을 중단하고 과부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그림은 교육 받은 귀족이나 지식인들만이 해석할 수 있었다.

 

황금 방에 마지막으로 거주한 사람은 훗날 황제가 된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Karl Albrecht, =카를 7세, 1608~1745)의 아내, 마리아 아말리아(Maria Amalia von Österreich, 1701~1756)였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아말리나는 1730~1756년에 방을 아름다운 로코코 가구로 채웠다고 한다.

72 태후의 계단 Königin-Mutter-Treppe

왕궁 쪽의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대형 계단이다.

73-127 왕궁(쾨니히스바우) Königsbau

쾨니히스바우(Königsbau), 즉 왕궁은 바이에른 왕국 시대 왕실의 거주 지역이다. 1층과 2층에 걸쳐 있다.

1825년에 집권한 국왕 루트비히 1세(Ludwig I, 1786~1868)는 즉위하자마자 레지덴츠를 대규모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1826년 건축가 레오 폰 클렌체(Leo von Klenze, 1784~1864)는 거주 지역의 남쪽에 새로운 주거용 왕궁인 쾨니히스바우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선호했던 루트비히의 취향을 따랐는데, 특히 막스 요제프 광장(Max-Joseph-Platz)의 주요 파사드는 피티 궁전(Palazzo Pitti)과 루첼라이 궁전(Palazzo Rucellai)의 요소를 통합한 것이다. 오랜 공사 끝에 1835년, 새로운 왕궁은 입주 준비를 마쳤다.

75-79 니벨룽겐 방 Nibelungensäle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1980년까지 오랜 기간 동안 공들여 복원된 니벨룽겐 방과 왕실 부부의 거실은 19세기 전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실내 예술로 꼽힌다.

왕궁 서쪽 1층에 있는 니벨룽겐 방은 이탈리아 양식을 기반으로 건축가 레오 폰 클렌체(Leo von Klenze, 1784~1864)가 설계했다.

초기 벽과 천장 그림은 프리드리히 폰 올리비에(Friedrich von Olivier, 1791~1859)와 빌헬름 호이쉴트(Wilhelm Hauschild, 1827~1887)의 협력으로 완성되었다.

특히 13세기 초에 기록된 <니벨룽겐의 노래(Nibelungenlied)>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대형 프레스코 화들이 유명하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최초의 독일어 영웅 서사시인데, 게르만족 대이동 시대인 5~6세기경부터 전승되다가 1200년경에 궁정에서 서사시로 정리되어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독일의 일리아드’라 불리게 되었으며, 19세기 들어서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퍼져 있는 게르만 민족의 상징적인 서사시로 여겨졌다. 이렇게 중요한 작품인 만큼, 루트비히 1세는 다섯 개 방을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하고 각 방마다 서사시의 장면들을 표현한 프레스코 화를 그리게 했다. 그림은 율리우스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794~1872)가 그렸다. 작업은 1831년부터 시작해 국왕 루트비히 2세(Ludwig II, 1845~1886) 시대인 1867년까지 무려 36년 간 이루어졌다.

 

서사시의 이야기 구성을 반영해 그림이 그려졌고, 그 결과 니벨룽겐 방의 다섯 개 방의 이름은 각각 아래 사진의 차례대로 - 영웅의 방(Saal der Helden), 결혼식의 방(Saal der Hochzeit), 반역의 방(Saal des Verrats), 복수의 방(Saal der Rache), 비탄의 방(Saal der Klage)이 되었다.

80a-80j 18-19세기 도자기 컬렉션 Porzellansammlung

80a~80e는 18세기, 80f~80g는 19세기 도자기 전시장이다. 유럽 도자기 공장의 예술과 공예를 증거하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럽 왕궁에는 언제나 화려하고 새로운 도자기를 필요로 했고, 마이스너(Meißner) 공장을 시작으로 경쟁사들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지배층을 위한 최고 품질의 사치품을 생산해 냈다.

비텔스바흐 가문에서는 18세기 중반부터 님펜부르크(Nymphenburg)와 프랑켄탈(Frankenthal) 제조소에서 원하는 도자기를 자체 제작했으며, 외교 선물로 받은 수많은 도자기들도 수집했다. 초기 마이센(Meissen), 파리 근교의 프랑스 세브르(Sèvres)나 베를린 왕립 도자기 제조소 등에서 제작한 도자기들이 끊임없이 바이에른 궁정에 도착했다. 특히 19세기에 국왕 루트비히 1세(Ludwig I, 1786~1868)는 님펜부르크 공장에 왕실 컬렉션 작품을 기반으로 예술적·기술적으로 인상적인 사본을 제작하게 했는데, 이것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럽 도자기의 정수로 꼽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뮌헨 레지덴츠에는 유럽 도자기 예술의 발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외교 과정을 기록하는 수백 개의 작품 컬렉션이 탄생하게 되었다.

메자닌 층 전시관의 탄생

18~19세기 도자기 컬렉션과 미니어처 컬렉션이 있는 메자닌 층(Mezzanine, 건물의 층 사이에 있는 공간)은 과거에 하인들이 생활하거나 주방용품, 휴대품 보관소 등으로 사용되었던 방 뒤의 캐비닛을 재건하고 새로 계단을 설치해 다른 층과 연결한 것이다. 최근까지 이어졌던 대대적인 왕궁 공사 결과 만들어졌다.

코뿔소 시계 Nashorn-Uhr

도자기 컬렉션에 들어서면 섬세한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신과 우화, 용감하거나 해학적인 장면들이 도자기마다 담겨 있다. 동쪽 벽에는 거품에서 태어난 미의 여신 비너스가 있는데, 그 대각선 반대편에는 또 하나의 ‘미인 여왕’인 코뿔소 모양 시계가 있다.

이 작품에서 코뿔소의 몸체는 지극히 사실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머리를 숙이고 단단한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이 조밀한 작품은 후기 로코코 장식과 고전주의 양식을 결합한 모습이다. 안장에 터번을 두른 아프리카인의 머리를 양각으로 장식한 것은 이국에 대해 유럽인들이 갖고 있었던 환상을 담은 것이자,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귀족들이 코끼리를 길들여 타고 다니는 것을 창의적으로 묘사한 방식이다. 깨지기 쉽고 연약한 도자기 소재와 코뿔소의 육중한 몸이 이루는 대조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런데 이 시계는 단순히 미지의 세계에 대한 유행의 결과물이 아니라, 실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아마 당시 유럽에 유일하게 존재했을 암컷 코뿔소, ‘미스 클라라(Fräulein Clara, 1738~1758)’이다.

클라라는 인도 벵골(Bengal)에서 태어났는데, 사냥꾼들이 어미를 죽이고 클라라를 동인도회사로 데려가 애완동물처럼 키웠다. 그러나 점점 자라 몸집이 커지고 먹는 양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하자 ‘쇼맨’인 마우트(Douwe Jansz Mout, 1705~1761)에게 팔려 1741년에 로테르담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클라라는 독일 대도시와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및 이탈리아 등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자신을 선보여야 했다.

마우트(왼쪽)와 1751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공연하는 클라라를 그린 그림(오른쪽)

코뿔소를 직접 보게 된 유럽 각국에서 클라라는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클라라가 공연을 펼치면 구경꾼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온 1톤이 넘는 거대 동물을 보기 위해 앞다투어 모여들었다. 마우트는 매일 클라라의 먹이로 건초 60파운드, 빵 20파운드, 양동이 14개 분량의 물을 지출해야 했지만 서커스의 대성공으로 그 이상의 큰 돈을 벌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Maria Theresia, 1717~1780)은 빈 궁정에서 클라라의 공연을 본 후 마우트에게 귀족 특권을 수여하기까지 했다.

클라라가 유럽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 사람들은 코뿔소를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반점무늬 껍질로 덮인 동물인 줄 알았다. 이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가 1515년에 남긴 판화 속 코뿔소의 모습 때문이다. 뒤러가 그런 그림을 남긴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가 캄바이 술탄으로부터 외교 선물로 코뿔소를 받았는데, 배가 침몰하면서 배에 코뿔소 가죽만이 남은 채 도착한 탓에 정확한 모습을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747년 11월, 클라라는 팔츠(Pfalz)의 도시인 만하임(Mannheim)에 오게 되었다. 선제후인 카를 테오도르(Karl Theodor, 1724~1799)와 그의 아내, 친척 등이 클라라를 보기 위해 모였는데, 이때 팔츠에서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던 피터 안톤 폰 베르샤펠트(Peter Anton von Verschaffelt, 1710~1793)도 클라라를 보았다. 베르샤펠트는 이 독특한 동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한참 후인 1770년에 당시 기억을 바탕으로 점토를 빚어 코뿔소의 형태를 만들었다. 이것을 인근 프랑켄탈에 있는 선제후 도자기 제조소에서 도자기로 만든 것이 바로 이 코뿔소 시계이다. 작가는 아마도 ‘도자기’라는 소재와 ‘코뿔소’라는 동물이 갖는 이국적 특징이라는 공통성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1747년 만하임에서 판매된 클라라 크림

1758년 4월, 몇 년이나 장거리를 오가며 고난을 견뎌야 했던 클라라는 안개가 자욱한 런던에서 죽고 만다. 검은 코뿔소 평균수명의 거의 절반밖에 살지 못한 것이다. 다만, 가엾은 클라라는 이렇게 뮌헨에 도자기 작품으로 남아 불멸하게 되었다.

예배당 안뜰 KAPELLENHOF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가 1603~1630년 그로토 안뜰 서쪽에 지은 안뜰이다. 레지덴츠 가(Residenzstrasse)에서 사자가 있는 큰 문을 통해 왕궁 예배당에 들어가는 길에 위치해 있어 ‘예배당 안뜰’이라고 한다.

막스 요제프 방 Max-Joseph-Saal

원래 ‘헤라클레스 방’이었으나, 지금의 헤라클레스 방이 생긴 1959년부터 명칭이 바뀐 공간이다.  현재 대여 공간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최대 360명까지 수용 가능하며 음악회, 전시회, 시상식 등 목적으로 일정 금액을 받고 빌려주며 식사도 준비 가능하다. 뮌헨 레지덴츠는 헤라클레스 방, 만성교회, 막스 요제프 방, 퀴빌리에 극장, 분수 안뜰, 위원회 안뜰 등을 대여하고 있다.

89-96 왕궁 예배당 구역 Hofkapelle

17세기 초에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는 레지덴츠의 최초 건물인 노이베스테(Neuveste)의 오래된 기도실을 대체하기 위해 2층에 걸친 새로운 궁정 예배당을 지었다. 반원형의 성단은 1630년에 추가된 것이다.

궁정 예배당은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기리고자, 막시밀리안 1세가 신봉했던 성모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정했다. 한스 베를(Hans Werl, 1570~1608)이 1600년에 제작한 커다란 제단화는 삼위일체 아래에 있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하고 있다. 18세기 중반에는 로코코 회화의 거장인 프란츠 짐머만(Franz Zimmermann, 1864~1956)이 성가대석 측면의 제단화를 완성했다.

90/94 예배당 계단 Kapellentreppe

계단이 있는 공간으로, 이곳의 동쪽 문을 통해 예배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91-93 제의실 Paramentenkammern

왕궁 예배당의 제의를 보관하고 있는 방이다.

95 성유물실 Reliquienkammer

성유물을 전시하는 방이다. 성인의 뼈뿐만 아니라 그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성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성유물(Reliquien)’이란 카톨릭 성도의 유골이나 기념물을 의미한다.

뮌헨 레지덴츠의 성유물 컬렉션은 종교개혁 시대에 만들어졌다. 독일을 휩쓴 종교개혁으로 성유물이 ‘우상 숭배’의 일환으로 여겨져 박해받던 시기인 1577년,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Wilhelm V, 1548~1626)는 성유물을 수집할 수 있다는 교황의 허가를 얻어 많은 보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는 아버지의 전통을 열정적으로 이어 나갔다. 해골에 금과 에나멜로 묵주를 만든 관을 씌우는 등의 작업을 거쳐 자신의 기도실이었던 예배당(Reiche Kapelle)에 성유물들을 보관했다. 이렇게 모인 각종 성물(Heiligtümer)들은 19세기까지 왕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로 취급되었다.

현재 1590~1640년경 수집한 성유물 60여 점이 보존되어 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금세공인들이 제작한 작품들도 있다. 추기경과 교황이 유물의 진위를 증명하는 17세기 비문 원본도 있다. 성인의 몸에서 나온 뼈나 두개골, 의복 등은 보는 이에게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기도 하고 으스스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세례 요한의 두개골

성유물실에서 가장 중요한 소장품으로 꼽히는 것은 세례 요한의 두개골과 그의 어머니이자 성모 마리아의 사촌인 엘리사벳의 두개골이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Herod Antipas, B.C.20~A.D.39)에게 직언을 하곤 했는데, 잔인한 왕비 헤로디아(Herodias, B.C.15~A.D.39)에게 그런 요한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헤롯 왕의 생일 연회에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Salome)가 아름답게 춤을 추었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왕은 살로메에게 소원을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살로메는 헤로디아 왕비가 시킨 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은쟁반에 담아 달라고 요청했고, 약속을 번복할 수 없었던 왕은 요한의 머리를 베고 말았다. 천연덕스럽게 은쟁반에 요한의 머리를 든 살로메의 모습은 오랫동안 유럽 예술의 단골 소재이자 악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어린이 석관 Kindlschrein

미라를 보관하고 있는 작은 유리 석관이다. 늦어도 1626년경 뮌헨 레지덴츠에 온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나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아, 즉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퍼졌다. 이 이야기를 들은 헤롯 왕은 크게 분노하며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사는 2세 이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1세기였던 당시의 인구를 고려할 때 20여 명의 유아들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관에 보관된 미라는 그 중 한 명의 시신으로 추정된다.

96/89 왕궁예배당 갤러리 Empore der Hofkapelle

2층 높이에 있는 발코니 석이다. 예배 참석자들이 1층에 모이면, 왕을 비롯한 왕가 구성원들은 거주지인 왕궁(Königsbau)에서 쉽게 오갈 수 있는 이곳 왕궁예배당 갤러리로 가서 미사에 참석했다.

97-98 대기실과 화려한 예배당 Vorraum und Reiche Kapelle

98번 방은 1607년에 축성된 화려한 예배당이다.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와 그의 아내가 이용하는 개인 기도실이었다. 성유물이 당시에는 이곳에 보관되었다. 성유물이 갖는 의미 덕분에 이 예배당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왕궁의 이념적, 정신적 중심지가 되었다.

왕 부부가 사용하는 곳인 만큼 유색 대리석과 금박을 입힌 부조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벽은 스칼리오라(Scagliola, 대리석을 대체하기 위한 고급 석고 가공 방식) 판넬, 아름다운 꽃 장식의 밝은 대리석 상감 등으로 덮여 있다. 표면을 반짝이도록 광택 처리해 진짜 대리석처럼 보인다. 아우크스부르크 금세공인들이 제작한 은 부조 제단, 화려하게 장식된 웅장한 오르간, 성유물 찬장(Heiltumskasten) 등도 있다. 전반적으로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공간으로, 19세기에 이중기둥 구조로 재설계되고 20세기에 다시 재건되었다. 

화려한 예배당 ⁃ 성유물 찬장 Heiltumskasten

전면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25개의 유리 판넬을 댄 성유물 보관함으로, 19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흑단목과 유리, 금, 에나멜, 청금석, 진주, 산호 등이 쓰였다.

유리 컷은 1590년경 이탈리아 출신의 프리드리히 서스트리(Friedrich Sustris, 1540~1599)가 제작한 것인데, 원래 레지덴츠의 최초 건물인 노이베스테(Neuveste)에 있었던 빌헬름 5세 예배당 창문을 장식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크리스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화려한 예배당 ⁃ 그리스도의 수난 Passionsreliquiar

1590년경 아우구스부르크의 금세공인 아브라함 로터(Abraham Lotter, 1535~1612)의 공방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금 도금한 은으로 만든 높이 1m 이상의 작품으로, 유약을 바른 여러 개의 캡슐에 다양한 조각들이 들어 있다.

미니어처로 된 많은 인물상 장식들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보여준다. 이것들의 크기는 불과 몇 cm밖에 되지 않았다.

상단에서는 야훼가 희생하여 순교한 그리스도를 무릎에 안고 있고 그 아래 바닥 중앙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언급이 있다. 기둥 조각이 있는 중앙 구획 아래에는 바이에른 공작의 문장을 넣어, 그리스도의 신성한 구원과 비텔스바흐 가문의 통치를 의미 있게 연결하고 있다.

 

맨 꼭대기에는 십자가를 비스듬히 들고 있는 그리스도 상이 있는데(왼쪽 사진), 이것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가 1519~1521년에 로마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St Maria Sopra Minerva Basilica)을 위해 제작한 대리석 작품(가운데 사진)을 모방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조각이 있는 로마 성당의 천장(오른쪽 사진)도 화려한 예배당처럼 푸른 아치형 천장을 갖고 있다.

 

이 귀중한 성유물은 원래 화려한 예배당의 제단 내부에 보관되어 있었다. 십자가를 묘사한 중앙의 은색 부조 판넬은 크랭크를 사용해 내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1850년대 기록에 따르면 1583년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Wilhelm V, 1548~1626)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99 사슴뿔 회랑 Geweihgang

그로토 안뜰의 한쪽에 길게 늘어서 있는 회랑이다. 안쪽 벽면에 사슴뿔을 걸어두어 사슴뿔 회랑이라고 부르는데, 두개골까지 같이 걸어둔 것도 있다.

안뜰 쪽 벽에는 사슴뿔 모양과 대응되도록 촛대들을 디자인해 장식했다. 날짐승 머리 위에 촛대를 올리고 등에 올라탄 날개 달린 천사들이 촛대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촛대가 없는 곳에는 값비싼 대형 장식 거울을 걸어 놓았다. 

100-102 국무회의실 Ehemalige Staatsratszimmer

1809~1810년에 왕을 위한 최고위 자문기구 회의를 열기 위해 레지덴츠 가(Residenzstraße)를 따라 조성된 공간이다. 세 개의 방은 각각 회의 진행자의 방(Konferenzdiener), 회의실(Konferenzzimmer), 대형 회의장(Große Sessionszimmer)이다.

103 근위병의 방 Hartschiersaal

뮌헨 레지덴츠의 공식 근위병들이 사용하던 방이다. 벽에 브뤼셀에서 만든 태피스트리를 걸어 전시하고 있다.

104-109 돌의 방 Steinzimmer

1611년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가 지은 서쪽 별관에 있다. 이 방들은 17세기 황제의 거주 구역에서 가장 중요한 방이었다. ‘돌의 방’이라는 이름은 장식으로 색색의 대리석과 장식 벽토 대리석 상감, 스칼리오라(Scagliola, 대리석을 대체하기 위한 고급 석고 가공 방식)를 사용해 장식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본래 이 방은 손님을 위한 방이었고, 황제가 황후가 머물 때만 값비싼 태피스트리로 방을 장식했었다. 오늘날에는 언제나 태피스트리를 볼 수 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첫 바이에른 공작인 오토 1세(Otto I, 912~973)의 전투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1604~1611년 네덜란드 직물공예가인 한스 판 데어 비스트(Hans van der Biest, 1550~161)가 금실를 사용해 짠 것이다. 도안은 안티쿠아리움의 천장화를 그린 페테르 칸디드(Peter Candid, 1548~1628)가 설계했다.

돌의 방은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후 17세기의 공간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해 1945년부터 많은 부분을 재건해야 했다. 오늘날 전시되어 있는 바로크 양식의 가구들은 왕실의 예술품 컬렉션에서 가져온 것이다.

110-112 네 백마의 방, 황제의 방, 황제의 계단 Vierschimmelsaal / Kaisersaal / Kaisertreppe

네 백마의 방과 황제의 방은 17세기 초에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가 세운 초기 바로크 양식의 방들이다. 1799년에 이들 대신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꾸민 거실인 ‘구 호스가르텐 방(Hofgartenzimmer)’을 지었으나 이 방은 1944년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방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17세기에 조성했던 현재의 두 방을 복원해 1985년에 공사를 마쳤다.

네 백마의 방 Vierschimmelsaal

110번 방은 황제의 방 서쪽에 있는 네 마리 백마의 방으로, 1614년경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인접해 있는 돌의 방(Steinzimmer)의 대기실로 사용되었으며, 황제의 손님이 찾아오면 객실로도 썼다. 신분이 높거나 중요한 손님은 궁정 인사들과 함께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네 백마의 방’이라는 지금은 없어진 중앙 천장화에서 네 마리의 흰색 종마들이 끄는 태양 수레를 탄 아폴로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 중앙 판넬은 행성을 상징하는 여섯 신의 다른 천장화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황제의 방 Kaisersaal

111번 방인 황제의 방은 그 이름처럼 막시밀리안 1세를 위한 방이다.

이 방의 벽면을 장식하는 대형 태피스트리들은 이성과 덕을 바탕으로 한 군주의 통치를 주제로 하고 있다. 네덜란드 직물공예가인 한스 판 데어 비스트(Hans van der Biest, 1550~161)가 제작한 이 태피스트리들은 통치자의 롤 모델은 고대와 구약 시대의 영웅적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 위의 프리즈에 있는 그림 역시 17세기에 덕행의 예로 간주되었던 고대 및 성서의 역사적 사건들을 보여준다.

천장화는 페테르 칸디드(Peter Candid, 1548~1628)가 그린 것으로 왕자의 미덕에 대한 서사를 풀어내고 있다. 중앙 천장화 석 점은 2차 세계대전 때 불타 버렸기 때문에 현재는 복제품으로 대체되었다.

황제의 계단 Kaisertreppe

네 백마의 방과 황제의 방을 지나면 1616년경 완성된 황제의 계단을 만날 수 있다. 황실 북쪽 윙에 넓고 웅장하게 장식된 계단으로, 17세기 초에 조성된 황제 안뜰(Kaiserhof)로 이어졌다. 당시 이런 계단은 근위병들이 대열을 갖춘 가운데 예복을 갖춘 황제의 등장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순간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113-114 극장 회랑 Theatinergang

114번 방인 극장 회랑은 레지덴츠 가(Residenzstrasse)를 따라 길게 이어진 복도이다. 흰색의 담백한 천장 조각으로만 꾸며져 있다. 과거 국왕 루트비히 2세(Ludwig II, 1845~1886)가 자신의 아파트로 이어지는 복도인 이곳에 리하트르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가 작곡한 4악장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Wagners Ring-Tetralogie)>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걸었다고 한다.

115-127 왕과 왕비의 아파트 Appartements des Königs und der Königin

왕궁(Königsbau)에 있는 왕과 왕비의 거주지이다.

국왕 루트비히 1세(Ludwig I, 1786~1868)가 1826~1835년에 지은 뮌헨 레지덴츠의 왕궁을 걷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벽의 그림들을 볼 수 있다. 본보기가 되는 고대 시인과 현대 독일 작가들의 작품들이 회화 프로그램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전까지는 군주를 미화하는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가 왕실을 대표하는 방의 표준 장식이었다. 반면에 루트비히 1세의 새 왕궁의 그림들은 유명하고 대중적인 회화 주제를 채택하고 모범적인 고대 문학을 형상화했다. 왕실 부부 아파트의 풍부한 회화 작품들은 루트비히 1세가 직접 고른 것들인데, 왕의 방은 전적으로 그리스 등 고전 문학작품을 주제로 한 반면, 왕비의 방 벽은 주로 독일어권 시인들의 작품에서 내용을 채택했다.

 

한편 당대 뮌헨에서 가장 유명한 고전주의 건축가 클렌체(Leo von Klenze, 1784~1864)가 벽 디자인과 가구를 포함해 전체 인테리어를 균일한 스타일로 설계했고, 가구는 1834~1835년에 뮌헨 목수와 조각가들이 제작한 것이다.

왕과 왕비의 아파트는 1944년 2차 세계대전으로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복원되었다. 인접한 거실은 1층에 있었는데, 이전의 왕실 거실과 달리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왕이 없을 때도 방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왕비의 응접실 Salon der Königin

119번 방은 왕비의 응접실이다. 왕비의 아파트의 장식 그림들은 대개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많이 읽힌 독일 시인들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 점은 아파트의 중앙 공간 응접실에도 적용되었다. 금색 왕좌가 있는 방과 의례용 침실 사이에 있는 이 응접실은 손님을 만나 대화하기 위한 장소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앉을 수 있는 원형 테이블을 갖추었다.

왕비의 응접실은 유머러스하고 아이러니컬한 시인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Christoph Martin Wieland, 1733~1813)의 시에 헌정되었다. 빌란트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이 시대를 살았던 문인인데 괴테, 쉴러, 헤르더 등과 함께 저명한 독일 고전파인 바이마라너(Weimaraner)에 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지함과 존엄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른 바이마라너들과 달리, 빌란트 문학의 근원은 장난기 넘치고 변덕스러운 젊음의 시라고 평가된다.

 

고전적인 모습을 한 빌란트의 로코코 양식은 왕비의 응접실에 모티브로 사용된 그의 작품 <무자리온(Musarion)>(1768)에서 특히 뚜렷하다. 아름답고 에로틱한 무자리온(Musarion)과 도덕적 이상을 설교하지만 그것을 실천하지는 않는 자칭 철학자, 쾌락과 탐욕의 삶과 다른 한편으로는 영광과 지혜를 찾는 미덕의 삶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믿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노래한 서사시이다.

무자리온 그림

 

건축가 클렌체는 왕비의 응접실의 벽 증하부에, 폼페이 유적 등에서 발견되는 고대 로마의 장식 그림의 현대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비현실적인 정적과 ‘그림 속 그림’ 기법을 활용해 건축물과 같은 벽 장식을 단순하고 차분하게 만들어냈다. 클렌체는 뚜렷한 대칭 구조를 택했는데, 이런 엄격한 일관성은 고대 로마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다.

 

반면,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어 축소되었던 상단의 프리즈에서는 훨씬 더 감동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가 묘사되어 있다.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는 군중이 프리즈를 채운 모습은 하부의 깔끔한 그림들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 부분 역시 문학적 모델에 기초하고 있다. <무사리온>이 고대를 배경으로 한 실내극인 반면, 프리즈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빌란트의 대표작품인 동화 서사시 <오베론(Oberon)>(1780)이다. 샤를마뉴(Charlemagne)의 중세 궁정, 1001개의 밤, 소년 같은 미남 왕 오베론이 다스리는 요정의 왕국 등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과 장소 속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오베론>은 매우 짧긴 해도 ‘서사시’이기 때문에 일련의 스토리가 있다.

주인공인 오베론은 태어날 때 요정의 주술에 걸려 세 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 크기의 몸집을 갖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버전의 줄거리에 의하면, 어느 날 아내인 요정 티타니아가 미소년을 납치해 시종으로 부리자 오베론은 이를 질투한다. 그래서 잠든 사람의 눈에 넣어 두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대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꽃즙을 만든다. 그러나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서 이야기가 복잡하게 전개된다. 왕비의 응접실에 있는 프리즈 그림 역시 기승전결을 담아 영웅 서사를 드러낸다. 각각의 그림 장면들이 서로를 밀고 당기는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주인공이 여러 차례 나타나 이야기의 구성을 담당하고 있다.

1780년 발행된 빌란트의 오베론 초판본(왼쪽)과 1789년 라이프치히 발행판의 첫 페이지 판화 삽화(오른쪽)

 

본래 ‘오베론’이라는 인물은 중세 독일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Nibelungenlied)>에 등장하는, 땅속 보물을 지키는 소인들의 왕 ‘알베리히(Alberich)’에서 유래했다. 알베리히는 니벨룽겐의 보물을 지키던 중 크산텐(Xanten)의 왕이자 초인적 무력을 지닌 지크프리트(Siegfried)에게 정복당한다. 오베론 이야기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한여름밤의 꿈>에도 등장하며, 영국에서 독일 작곡가인 카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가 각색해 오페라로도 나왔다. 위의 줄거리는 셰익스피어 버전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프리즈의 오베론 이야기 그림을 이야기 순서대로 흑백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16a-116d 은식기 컬렉션 Silbersammlung

현재까지 약 4,000개의 작품이 남아 있는 뮌헨 레지덴츠의 은식기 컬렉션은 유럽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보존된 왕실의 실버 컬렉션 중 하나이다. 주로 식기와 식사용 도구로 구성되어 있다. 은그릇은 국빈 만찬에서든 친목 목적의 식사에서든, 언제나 국가의 권위를 대표하는 도구였으며 식사에 초대된 손님에게 왕가의 지위와 화려함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반짝이는 은과 금으로 만든 작품들은 평화의 시대에 바이에른 선제후와 왕들의 식탁을 장식했던 값진 선물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현재 소장품 구성은 전쟁과 국가 위기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기도 한데, 국고를 채우기 위해 많은 은식기들을 녹여야 했다고 한다. 반면 1777년 팔츠 선제후국의 소유물에서 얻은 식기들, 1803년 교회재산 세속화로 얻게 된 밤베르크와 뷔르츠부르크 대주교의 식기들은 컬렉션을 한층 풍부하게 확장했다. 이렇듯 은식기 컬렉션은 초기 현대까지 바이에른 역사와 정치적 사건들도 간직하고 있다.

수프용 은 냄비 Silberterrine

은식기 컬렉션을 찾은 방문객들은 매우 화려하게 도금 장식된 둥근 뚜껑의 냄비와 국자, 접시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게 된다. 작지만 웅장한 은 냄비는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Maximilian II, 1662~1726)을 위해 8세기 초 파리에서 제작된 것이다. 중앙에 명목상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선제후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런 장식용 은 냄비가 등장하게 된 데는 당시 국제적으로 유행했던 ‘스페인 수프’의 영향이 컸다. ‘오야 뽀드리다(Olla podrida, 썩은 냄비라는 뜻)’라는 이 수프는 각종 야채와 고기를 몇 시간 동안 항아리에서 끓여 만드는 스튜의 일종이었다. 16세기에 스페인이 세계 강국으로 떠올라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조금씩 많은 유럽 사람들이 이 스페인 수프를 식탁에 올렸다. 이는 매우 놀라운 전환이었다. 독점적인 사냥 권한을 자랑스러워하고 고기 음식을 즐겼던 귀족 식탁에는 평범한 수프를 올리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귀족들은 고기와 밀로 만든 하얀 빵, 치즈, 계란을 먹었고, 뭉근하게 끓여 숟가락으로 떠먹는 수프 같은 음식은 농민들이나 먹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현대의 오야 뽀드리다

 

스페인 수프가 퍼지면서 밤낮으로 불에 올린 가마솥에 온갖 재료들을 넣고 끓이는 일이 많아졌다. ‘썩은 냄비’라는 이름이 그대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조리법의 특징을 반영한다. 마인츠(Mainz)의 궁정 주방장이 1581년에 쓴 요리책에 의하면 독일 남부에서 수프를 끓이는 데 쓰는 재료는 90가지나 되었다고 한다. 각종 야채, 동물의 내장, 가금류 외에도 사냥꾼이 먼저 잡아야 하는 희귀 재료를 쓰기도 했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아시아에서 들여온 값비싼 육두구, 생각, 사프란 등도 사용했다.

미니어처 컬렉션에 있는 그림. 16~17세기 시골 농민들의 부엌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17세기 중반부터는 값비싼 수프가 왕궁의 정규 메뉴로 등장하게 된다. 동시에 프랑스에서는 이 새로운 고급 음식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그릇이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오야 뽀드리다를 위한 냄비’라는 뜻의 뚜껑 달린 둥근 은 냄비, ‘pot d'ouille’이다. 냄비를 은으로 만든 것은 장식적 목적도 있지만, 끓여낸 수프를 담아 테이블에 내 가기 전까지 데우려면 열을 보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열 전도율이 가장 높은 금속인 은은 이에 안성맞춤이었다. 처음에는 냄비 크기가 작았으나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화려하게 장식한 덮개가 있는 큰 냄비로 발전했다. 그리고 식사의 첫 번째 코스를 비싼 수프로 내는 것은 점차 관례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세기 초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수프 냄비

128-129 미니어처 컬렉션 Miniaturensammlung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미니어처 컬렉션 중 하나이다. 16~19세기의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이 아름다운 작품들은 상세한 풍경, 우아한 초상화, 신화적 또는 성서적인 장면, 재치 있는 비유를 보여준다.

 

미니어처의 기원은 중세 서적에서 시작되었다. 인쇄된 책의 등장과 함께 양피지, 에나멜 또는 상아로 만든 미니어처 작품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형식이 되었다. 뮌헨 레지덴츠에서는 멋진 양피지 미니어처들을 주제별로 전시하고 있다. 요한 마티아스 카거(Johann Matthias Kager, 1566~1634)가 제작한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성 가브리엘 대천사>나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의 <가나의 혼인잔치>와 같은 작품의 미니어처가 눈에 띈다. 별도의 방은 한때 우정과 사랑의 선물로 주고받았던 귀한 재료인 상아 미니어처에 부분적으로 액자로 장식한 초상화 미니어처 전용 공간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우스 3세에게 승전한 후 페르시아 여인들이 애원하는 장면을 그린 미니어처

청동의 방 구역

황제 안뜰 KAISERHOF

황제 안뜰 주변의 건물들은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의 통치 기간인 1612년부터 1618년까지 건립되었다. 새로운 정원 안뜰 맞은편의 Court Garden 맞은편의 북쪽 날개에는 입구와 응접실, 기념비적인 황제의 계단 등을 두었다. 서쪽 날개에 있는 방들은 황실을 방문한 손님들을 위한 방이었다. 황제 안뜰은 중요한 의식 행사가 있을 때만 개방되었다고 한다.

피어섀프트 방 Vierschäftesaal

황제 안뜰에서 청동의 방 쪽으로 들어가면 네 개의 인상적인 기둥이 있는 피어섀프트 방을 만나게 된다. 이름처럼 네 개의 기둥이 있는 공간이다. 1664년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곳 벽에는 열두 명의 고대 로마 황제들을 묘사해 두었다고 한다.

청동의 방 Bronzesäle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이르는 40점 이상의 청동 조각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방이다. 매너리즘과 초기 바로크 시대의 가장 풍부한 청동 예술 컬렉션 중 하나이다. 한때 정원과 분수 등을 장식했던 청동 신과 영웅들이 이곳으로 옮겨지고 현장에는 사본이 자리하게 되었다. 원본은 2015년부터 이 방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Wilhelm V, 1548~1626)와 그의 아들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이 다스리던 뮌헨 궁정은 국제 청동예술의 중심지였다. 실물 크기 청동상에는 값비싼 청동이 많이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고급 주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빌헬름 5세는 아우구스부르크의 무역회사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덕에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인 네덜란드 출신 조각가 후베르트 게르하르트(Hubert Gerhard, 1540~1620)를 궁정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이탈리아 조각가 카를로 디 체사레 델 팔라지오(Carlo di Cesare del Palagio, 1538~1598)까지 가세하면서, 불과 몇 년만에 뮌헨 궁정의 청동 조각은 높은 수준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왼쪽부터 팔라지오의 사티로스 상(1574~1578), 페텔의 돌고래와 넵튠 상(1628~1629), 게르트하르트의 비텔스바흐 분수의 사자 트리톤 상(1584~1586), 게르하르트의 트리톤 소년 상(1584~1586), 게르하르트의 호르가르텐 파빌리온을 장식했던 텔루스 바바리카 상(1594), 게르하르트의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상(1585~1590),

 

검소한 막시밀리안 1세의 통치가 시작되자 몸값 비싼 이 이탈리아 조각가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다행히 한스 크럼퍼(Hans Krumpper, 1570~1634)와 뮌헨의 지역 예술가들이 이들의 모범을 따라 몇 년 동안 청동상을 계속 주조해 냈다.

1618년부터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청동들은 예술품 대신 무기를 만드는 데 쓰여야 했다. 게르하르트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작품들이 대포로 녹아내리지 않은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청동상 작품은은 반종교개혁 시대부터 30년 전쟁 직전까지, 비텔스바흐 왕조를 선전하는 효과적인 매개체였다. 오늘날까지 남은 작품들은 이들이 바이에른 역사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퀴빌리에 극장 구역 방면

위원회 안뜰 COMITÉHOF

현재 대여 공간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최대 700명까지 수용 가능하며 음악회, 전시회, 만찬 등 목적으로 일정 금액을 받고 빌려준다. 지난 2010년에 밝기 조절이 가능한 LED 2,300개와 행사를 위한 할로겐 조명등 48개를 설치했다.

퀴빌리에 극장 Cuvilliés-Theater

건축가 퀴빌리에(François Cuvilliés, 1695~1768)의 이름을 딴 극장으로, 1751~1755년에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Maximilian III Joseph, 1727~1777)가 ‘새로운 오페라하우스’를 짓게 한 결과이다. 이전까지는 레지덴츠 근처에 왕실 전용으로 쓰던 극장이 있었다. 1781년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이도메네오(Idomeneo)> 초연을 시작으로 수많은 호화 오페라 작품을 선보여 왔다. 

붉은색과 금색이 조화를 이루는 이 극장은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로코코 극장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1943년에 안전을 위해 부속품 등이 제거된 것을 제외하면 원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다. 1944년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피하기 위해 목조 건물 전체를 완전히 해체해서 대피시켰다가, 전쟁이 끝난 후 1956년부터 2년에 걸쳐 약국 안뜰 근처의 새 건물에 재조립한 결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렇게 극장이 재개관한 1958년부터, 이전에 있던 극장은 ‘구 극장’이라고 부르고 새 극장을 퀴빌리에 극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관객석은 네 개 층으로 되어 있는데 군주, 고위 귀족, 고위 공직자, 일반 귀족 등 신분에 따라 앉을 수 있는 층이 달랐다. 중앙에는 왕을 위한 특별석이 있다. 초기에 내부를 장식했던 요한 밥티스트 짐머만(Johann Baptist Zimmermann, 1680~1758)의 천장화는 남아 있지 않으나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게 조각된 장식은 여전히 아름답다. 현재도 오페라를 공연하고 있으며 공연이 없는 날에는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이도메네오 Idomeneo, Re di Creta K.366

이도메네오를 초연하던 때쯤의 모차르트

퀴빌리에 극장의 첫 공연작인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3막의 오페라 세리아로, 모차르트가 24살 때인 1780년에 작곡되었다. 역대 오페라 세리아 중 최고의 명작 중 하나이자 오페라 분야에서 모차르트가 남긴 최초의 걸작이며, 그의 음악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1780년은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대주교와의 불화로 다른 직장을 알아봤지만 여의치 않아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1780년 10월, 모차르트는 뮌헨 레지덴츠로부터 오페라 작곡을 주문받았다. 5년 전에 뮌헨의 전임 선제후를 위해 오페라 <가짜 여정원사(la finta giardiniera)>를 작곡한 것이 호평 받았었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에 있던 모차르트는 뮌헨의 궁정작가 지안바티스타 바레스코(Gianbattista Varesco, 1735~1805)가 쓴 <이도메네오>의 대본을 넘겨받고는 활기 넘치게 오페라 작업을 했다. 대강 구상을 마친 후 1월에는 아예 직접 뮌헨으로 가기까지 한다. 그러나 대본 작자인 바레스코는 젊은 작곡가인 모차르트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아 갈등이 초래됐다. 주인공 역을 맡은 가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주연배우를 그린 그림

이토록 힘겨운 작업 끝에 1781년 1월에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Karl Albrecht, =카를 7세, 1608~1745)가 지켜보는 가운데 리허설이 이루어졌고, 곧 오페라 <이도메네오>의 초연이 이루어졌다. 모차르트 본인이 직접 지휘했으며 아버지와 누나 등 모차르트의 가족과 지인들도 많이 참석했다.

초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작품성도 훌륭해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벤트용 오페라’라는 인식이 붙은 데다 공연을 기다리는 다른 오페라들이 많았던 탓에 초연 후 세 차례 정도 상영되다가 극장에서 내려가고 말았고, 이후 (1931년에 초연 150주년 기념으로 개작이 공연된 적은 있지만) 다시 퀴빌리에 극장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기타 구역

약국 안뜰 APOTHEKENHOF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는 레지덴츠의 최초 건물인 노이베스테(Neuveste)의 일부를 철거한 후, 그 유적과 새로운 궁정 건물의 날개를 복도로 연결했다. 그 결과 황제 안뜰(Kaiserhof)의 동쪽으로 주방 안뜰(Küchenhof)이라고 불리는 안뜰이 만들어졌다.

이후 1832년부터 국왕 루트비히 1세(Ludwig I, 1786~1868) 치하에서 이전에 있던 건물들을 황제 안뜰의 북쪽 건물과 연결하고 마르슈탈 광장(Marstallplatz) 맞은편에 위치한 새 건물을 지었다. 이로써 지금의 약국 안뜰이 조성되게 되었다. 당시 동쪽 날개(지금의 퀴빌리에 극장)에 막스 폰 페텐코퍼(Max von Pettenkofer, 1818~1901)가 일했던 약국이 있었기 때문에 약국 안뜰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위생학자이자 화학자였던 막스 폰 페텐코퍼는 집, 통풍, 공기, 의복 등과 건강의 관계를 밝혀 현대 환경위생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헤라클레스의 방 Herkulessaal

약국 안뜰 북쪽 건물에 위치해 현재 콘서트 홀로 쓰이는 이 공간은 국왕 루트비히 1세(Ludwig I, 1786~1868) 때 지어진 곳이다. 원래 왕좌실 등이 있었고 국왕 루트비히 2세(Ludwig II, 1845~1886) 때 아치형 온실정원과 인공정원, 이슬람식 파빌리온인 키오스크(kosk) 등이 있었지만 1897년에 없앴다고 한다.

과거에 있던 왕좌실(1850년 그림)

 

1944년 2차 세계대전 때 당시 공연장으로 쓰던 오데온(Odeon)이 파괴되었었는데, 이를 대체하기 위해 1951년에 새로운 콘서트 홀을 조성하기로 하고 헤라클레스 방의 공사를 시작해 1953년에 완공했다. 당시 헤라클레스 방도 전쟁으로 많이 파괴되긴 했지만 그래도 뮌헨 레지덴츠의 다른 부분들보다는 손상이 적었다고 한다. 이 방이 생기기 전에 이미 1600년경에 조성한 ‘헤라클레스의 방’이라는 의식용 방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새 헤라클레스의 방(Neuer Herkulessaa)’이라고 부르다가,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종전 방의 이름을 ‘막스 요제프의 방’로 바꾸었다.

 

‘헤라클레스의 방’이라는 이름은 1566년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Albrecht V, 1528~1579)가 프란스 플로리스(Frans Floris, 1516~1570)의 판화를 바탕으로 제작하게 한 일련의 태피스트리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헤라클레스 신화를 묘사한 이 섬세한 태피스트리들은 일명 ‘화이트 블루 시리즈(weißblaue Serie)’라고 불리며 1993년까지 헤라클레스의 방에 걸려 있었다. 지금은 모두 인쇄본으로 교체되었고, 유일하게 공개되어 있는 원본은 뮌헨 레지덴츠 북동쪽 윙 끝에 위치한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Bayerischen Akademie) 강의실 전면에 있는 <히드라와 헤라클레스의 전투(Kampf des Herkules mit der Lernäischen Hydra)>이다. 원래 화이트 블루 시리즈는 켄타우로스(Kentauren, 502×830cm), 케르베로스(Zerberus, 530×536cm), 히드라(Hydra, 524×710cm), 안타이오스(Antäus, 525×532cm), 게리온(Geryon, 528×572), 뱀(Schlangen, 553×530cm)의 여섯 개 작품이다.

히드라와 헤라클레스의 전투 태피스트리

 

한편 최근인 2017년에는 무게가 900kg에 이르는 3m 높이의 바이에른-란트후트 공작 루트비히 9세(Ludwig IX, 1417~1479)의 금박 청동성이 완성되어 복도에 서 있다.

캐비닛 정원 Kabinettsgarten

레지덴츠의 동쪽에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날개와 만성 교회(Allerheiligen-Hofkirche) 사이에 있는 안뜰이다. 벽을 세워 광장과 분리되어 있어 좁은 입구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데, 이렇듯 닫혀 있는 정원 공간이라는 뜻에서 ‘캐비닛 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래 중앙에는 분수가 있었고, 20세기에는 정원이 무성해서 채소밭이나 닭 사육장으로 쓰기도 했다. 2003년 재설계가 완료되어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2005년에 독일 조경 건축상을 수상했다.

호프가르텐 Hofgarten

1613년에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573~1651)가 주도한 레지덴츠 확장 및 건물 신축의 일환으로 궁정 단지 외부에 건설되었다. 이전에 있던 둥근 사원과 뽕나무 산책로, 분수, 과일나무 등으로 풍부하게 꾸민 르네상스 양식 정원으로  1615년 완성했다.

 

8개의 아치형 입구가 있는 파빌리온은 정원 구역을 십자형 및 대각선으로 분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파빌리온의 꼭대기는 바이에른의 부(곡물, 사냥감, 물, 소금)를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청동상 ‘텔루스 바바리카(Tellus Bavarica)’의 사본으로 장식되어 있다. 1590년경 후베르트 게르하르트(Hubert Gerhard, 1540~1620)가 완성한 청동상을 1616년 이후 막시밀리안 1세가 안뜰 정원 사원으로 사본을 설치한 것이다. 원본은 현재 청동의 방(Bronzesäle)에 전시되어 있다. 건축가 클렌체(Leo von Klenze, 1784~1864)가 바이에른 통치자들의 역사적·문화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게르하르트의 이 청동상은 물질적 번영과 부의 축적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

 

정원 동쪽의 낮은 지대는 1796년까지 수역으로 쓰였다. 이후 여러 차례 재설계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는데, 1776년에 만든 조경과 나무 프레임을 기반으로 했다고 한다.

오늘날 호프가르텐은 오데온 광장(Odeonplatz) 앞에 무료로 개방되어 있어 시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에 통치자들이 조용히 산책하던 공간이, 이제 누구나 자유롭게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쉼터가 된 셈이다.

호프가르텐 아케이드 Hofgartenarkaden

1613~1617년 막시밀리안 1세는 호프가르텐 아케이드의 아치 안쪽에 페테르 칸디드(Peter Candid, 1548~1628)가 비텔스바흐 가문의 첫 바이에른 공작인 오토 1세(Otto I, 912~973)의 삶을 담은 그림을 걸게 했다. 1779~1783년에는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Karl Theodor, 1742~1799)가 아케이드 북쪽 위에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호프가르텐 갤러리(Hofgartengalerie)’를 지었고, 이곳에 비텔스바흐 가문의 그림 컬렉션이 전시되었다. 19세기에도 이 아케이드는 회화 전시를 위한 공공장소로 남아 있었다. 주로 바이에른 왕가에 대한 예술적 찬미를 그림으로 전시해 통치의 정당성을 세우는 한편 일반 시민들에게는 ‘그림책’의 역할을 해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

 

아케이드는 2차 세계대전 때인 1943~1944년에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1947~1957년에 단순화된 형태로 재건되었다가, 2008~2016년에 마지막으로 복원되었다. 호프가르텐과 레지덴츠 사이를 지날 때 한 번쯤 구경해 볼 만한 곳이다.

호프가르텐 아케이드의 위치

호프가르텐 아케이드의 작품들

순서대로 회화 작품 18점의 위치와 주제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각 번호는 이른 것부터 연대 순으로 매긴 것이나, 여기서는 왼쪽부터 차례대로 나열한다.

a ‘정의와 끈기(Gerecht und Beharrlich)’의 방패를 든 바이에른의 의인화
13 1717년, 바이에른 군이 베오그라드에서 투르크 군의 참호를 습격하다
1 1155년, 이탈리아 치우사에서 독일군을 구출하는 비텔스바흐의 오토 대제
2 1180년, 오토 폰 비텔스바흐 백작이 바이에른 공작에 봉해짐
3 1225년, 오토 2세와 라인강의 아그네스의 결혼
4 1258년, 뮐도르프 근처 다리 붕괴와 달아나는 보헤미안들
5 1322년, 암핑 인근에서 바이에른의 루트비히의 승리
6 1322년, 바이에른 대공 루트비히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
14 1759년, 막시밀리안 요제프 3세의 과학 아카데미 설립
b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의인화
c 마인 강과 이자르 강의 의인화
16 1818년, 국민에게 헌법을 전달하는 막시밀리안 요제프 1세
7 1440년,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3세가 보헤미아의 왕관을 거부하다
8 1462년, 기엔겐 근처에서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9세의 승리
9 1506년, 알브레히트 4세가 바르에른에서 계승권을 확립하다
10 1583년, 쾰른의 고데스부르크 성을 습격하는 바이에른 군
11 1623년,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선제후 승격
12 1688년, 선제후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의 베오그라드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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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지도는 아래에 올려 뒀다.

그밖의 뮌헨 여행 자료 몇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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