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테마 100. 정호승, 곽재구, 안도현

1980년대에는 암울한 현실에서 오는 고통과 저항의식, 우울성을 이성복, 황지우, 기형도처럼 형태 파괴로 드러낸 시인들도 있었지만, 이런 비감의 소재를 내면화한 시인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정호승, 곽재구, 안도현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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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정호승의 생애

정호승(鄭浩承, 1950~)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정호승은 1973년(24세)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오고, 1982년(33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위령제>가 당선된 후부터는 소설에도 손을 댔다. 지금까지 <슬픔이 기쁨에게>(1979), <서울의 예수>(1982), <새벽 편지>(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이 짧은 시간 동안>(2004), <포옹>(2007) 등의 시집과 장편 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1993)를 펴낸 바 있다. 이렇게 문학 활동에 힘쓰는 동안 소월 시 문학상, 동서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사진 출처 : 월간조선 뉴스룸(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2004100003)

정호승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 <슬픔에게 가는 길>

1979년(30세)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실린 작품들이다.

‘슬픔’의 시인 정호승은 인간을 옹호하고 민중을 신뢰하는 낙관주의적 태도와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따스한 작품 세계를 펼쳐 준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슬픔의 내용을 확장시키거나 깊게 하는 일에 몰두하는 시인으로, 그에게 있어 ‘슬픔’은 모든 시적 사색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이 ‘슬픔’은 전통적인 정서인 한이나 비애의 세계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정호승은 ‘슬픔’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아픔, 전쟁이나 분단, 독재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상처까지도 끌어안고 따뜻이 위무해 준다. 이처럼 그는 현실의 모순 아래서 고통 받고 있는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 삶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는 미래 지향적 자세를 보여 준다는 면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중 시인으로 평가된다.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에게 가는 길>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또 기다리는 편지>

1982년(33세) 낸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에 수록된 작품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있는 사람이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전반부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있는 애절한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후반부에도 이러한 배경의 성격은 그대로 유지되는데, 다만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라는 마지막 시구를 통해 작품의 정서에 변화가 나타난다. 쓸쓸하고 고통스런 마음을 토로하던 화자가, 기다림과 희망의 자세를 표현하는 전환을 보여 주고 있다. 사랑의 애절한 아픔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곽재구

곽재구의 생애

곽재구(郭在九, 1954~)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28세)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토착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등단 후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시집 <사평역에서>(1983), <전장포 아리랑>(1985), <한국의 연인들>(1986), <서울 세노야>(1990), <참 맑은 물살>(1995),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등의 시집을 간행한 바 있다.

<한국의 연인들>에 이르기까지 초기 시 세계는 현실의 거대한 폭력에 대한 분노와 그 아래서 고통 받는 민중들에 대한 사랑을 추구한다. 이에 비해 <서울 세노야> 이후에는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단순한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 인간 본래의 순수성과 사랑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사진 출처 : 한겨레(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12513.html)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1981년(28세)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곽재구의 등단시이다, 1983년(30세) 간행한 첫 시집 <사평역에서>의 표제작으로 쓰였다. 쓸쓸한 간이역을 무대로 하여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따뜻한 감정을 노래한 1980년대의 대표적인 서정시이다. 대합실이라는 작고 좁은 공간에 몇몇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과 삶의 내력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오래 앓은 기침 소리를 내고 쓴 약 같은 담배 연기를 내뿜지만, 자신의 삶의 무게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화자는 그렇게 삶의 무게를 묵묵히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이라고 하면서 현재의 고통이 지나가면 그리운 순간으로 변할 것이라고 위로한다. 그리고 ‘한 줌의 톱밥’과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준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애틋하게 묻어나고 있다.

한편 임철우의 액자식 구성의 소설 <사평역>은 <사평역에서>에 나오는 상황 설정과 분위기, 인간 군상의 모습을 차용하고 있어 상호 텍스트성을 가진다.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은행나무>

1991년(38세) <받들어 꽃>에 수록한 시로, ‘은행나무’라는 자연물을 통해 인간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은행나무’의 아름다움을 통해 현재 처한 절망적 처지에 연연하지 말고, 세상의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한 절망을 결코 있을 수 없으므로 희망을 갖자는 화자의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다양한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은행나무라는 자연물을 인격화시키고 있다. 위태한 상황 속에도 꿋꿋하게 아름다움을 지키는 은행나무의 의연한 모습은 벅찬 감동 주기에 충분하다. 부정적인 상황을 대처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자연물인 ‘은행나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사색적인 작품이다.

<은행나무>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맑은 바람결에 너는 짐짓/ 네 빛나는 눈썹 두어 개를 떨구기도 하고/ 누군가 깊게 사랑해 온 사람들을 위해/ 보도 위에 아름다운 연서를 쓰기도 한다/ 신비로와라 잎사귀마다 적힌/ 누군가의 옛 추억들 읽어 가고 있노라면/ 사랑은 우리들의 가슴마저 금빛 추억의 물이 들게 한다/ 아무도 이 거리에서 다시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 벗은 가지 위 위태하게 곡예를 하는 도롱이집 몇 개/ 때로는 세상을 잘못 읽은 누군가가/ 자기 몫의 도롱이집을 가지 끝에 걸고/ 다시 이 땅 위에 불법으로 들어선다 해도/ 수천만 황인족의 얼굴 같은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희망 또한 불타는 형상으로 우리 가슴에 적힐 것이다.

안도현

안도현의 생애

안도현(安度眩, 1962~)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81년(20세)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낙동강>이, 1984년(23세)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통적 서정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안도현은 개인적 체험을 주조로 하면서도 시적 차원을 넘어서 민족과 사회의 현실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그려내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순수한 젊음의 시각에서 삶과 역사를 서정적으로 그려낸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주변 삶의 쓸쓸함과 현실에 대한 성찰이 담긴 <모닥불>(1989), 시대적 문제와 마음의 갈등을 다룬 <그리운 여우>(1997), 바닷가 우체국과 시골 이발관 등 사소해 보이는 풍물을 애잔하고 낭만적으로 다룬 <바닷가 우체국>(1999)을 비롯해 <바닷가 우체국>(2003),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2004),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5),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 등을 간행하였으며, 소설집으로는 연어의 모천회귀를 성장의 고통 및 사랑의 아픔에 빗대어 그린 <연어>(1996)가 있다.

사진 출처 : 여성조선(http://woman.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55174)

안도현의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

1981년(22세)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동학 농민 전쟁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전봉준이 압송되는 사진을 소재로 하여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제거하기 위한 현실 변혁 운동의 좌절, 새로운 세상을 견인하게 될 민중적 힘에 대한 신뢰, 전봉준의 희생이 지니는 의미의 깨달음 등의 의미를 시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안도현의 말을 빌리면, 이 시는 고부, 백산 등지에서 동학 농민군들을 지휘하다 잡혀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의 모습 위에 1980년 5 · 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좌절이라는 의미를 겹치어 놓은 것이다. 이 시는 시대적 모순과 부조리에 맞서는 ‘풀뿌리’ 민중 정신, 그리고 삶의 참된 가치 실현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인간 정신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은 작품이라 하겠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우리가 눈발이라면>

1991년(32세)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에 수록된 작품이다. 함축성이 강한 시어를 구사하여 팍팍하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함박눈’과 ‘진눈깨비’라는 대립적 시어를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시상의 전개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로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