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반인간적 폭력과 살육이라는 인간이 저지른 최악의 추문을 가리키는 기호이자, 인간성의 파멸과 타락의 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인간성이 파탄 나 버린 세상에 서정시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하는 물음은 아우슈비츠 이후 끊임없이 등장했고, 문학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반성을 자아냈다.
한국인의 아우슈비츠는 1980년대의 광주이다. 1980년대 젊은 시인들에게는 ‘광주’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자리했고, 이 질문은 곧 파괴된 서정시 양식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양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나타난 움직임 중 하나가 양식을 파괴하는 이른바 해체주의이다. 다시 말해 1980년대 시인들에게 있어 해체 시학, 시의 형태 파괴는 ‘광주’로 상징되는 죄악의 현실에 대한 일종의 방법론적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1980년대 해체 시인으로는 이성복, 황지우, 기형도를 들 수 있다.
이성복
이성복의 생애
이성복(李晟馥, 1952~)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재학 때부터 지역 백일장이나 전국 규모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곤 했다. 1963년(12세)에는 고집을 부려 서울로 전학하고 1968년(17세)에는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는데, 경기고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출세하기 위해 유력층의 자제를 사귀어야 한다”는 생각 탓이었다고 한다.
1971년(20세)에는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입학하는데, 여기서 당시 불문과 교수로 재징 중이던 평론가 김현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제대 후 복학한 이성복은 김현의 연구실을 드나들며 습작 원고를 내보인 끝에 1977년(26세) 김현의 인정을 받아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하였다.
서울대 대학원 불문과에 재학 중이던 1980년(29세)에는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내어 젊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이후 1982년(31세)에는 계명대 불문과 조교로 일하면서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84년(33세) 프랑스로 유학하였으나 자괴감만 느낀 후 이듬해 귀국한다. 이 일은 이성복이 동양 고전과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1987년(36세)부터 동양 고전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1986년(35세)의 두 번째 시집이자 ‘연애 시집’인 <남해 금산>, 1990년(37세) 세 번째 시집 <그 여름의 끝>을 냈다. 이후 지금까지 계명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계속해서 시와 산문, 논문 등을 발표하고 있고 소월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성복의 시
이성복은 평상인들을 뛰어넘는 특유의 상상력에 의한 자유 연상의 기법으로 등단부터 주목을 받아오고 있는 시인이다. 현실과 직결되며 현재의 불행을 구성하는 온갖 누추한 기억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연상은 초현실주의 시를 방불하게 하는 현란한 이미지를 빚어낸다. 이처럼 현실과 밀착된 기억에서부터 창출해내는 비현실적인 이미지는 바로 왜곡된 현실을 고발하는 시적 방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를 가지고도 보편적이고 공적인 차원으로까지 그 의미를 확대시킬 수 있다. 삶의 범주 차원에서 그의 시가 암시하는 것은 모든 사물은 상관적으로 존재할 뿐 아니라, 유일한 핵심은 없다는 점이다.
<그날>
1980년(29세)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수록한 작품이다.
<그날>은 연상의 원리를 특징으로 하는 이성복의 초기 대표작이다. 시적 화자의 연상에 의해 그려지는 일상의 소묘는 무감각하게 마비된 병든 삶의 모습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에서 ‘가족’이란 삶의 기본 단위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이 시에서 보는 것처럼 초기 시에서는 주로 피폐하고 타락한 현실의 초상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가장인 아버지의 움직임에서 출발한 연상 작용은 여동생과 어머니에 이어 ‘나’에까지 이른다.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단한 삶에 비해 무기력하게 소일하는 화자 자신의 자괴감을 엿볼 수 있다. 젊은 그가 한가롭게 노닥거리는 행동은 한반도의 분단 현실에 비추어 전방의 무사함을 연상시킬 뿐 아니라, 불안한 휴전 상태가 삶의 조건이 되어 있는 현실은 전방이 무사하기만 하면 세상은 완벽하다는 아이러니를 유발시킨다.
이러한 연상의 고리는 통치의 미비함을 무마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시 상황을 강조하던 당시의 정치 현실에 대한 은밀한 비판을 이루기도 한다. 완벽한 세상이라면 없는 것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나타나는 창녀들에 대한 연상을 통해 화자는, 이 현실이 없어야 할 것조차 있는 부조리의 세상임을 강조한다. 게다가 더욱 섬뜩하게 이어지는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의 연상은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으로까지 연결되는 강한 현실 부정에서 비롯된다. 집일을 돕는 애들의 연상은 가장인 아버지의 피로한 일상으로 다시금 이어지고, 여동생의 데이트에 대한 상상에 이어 ‘멋진 여자’를 본 기억으로 가 닿는다. 자신의 잘 풀리지 않는 사랑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 끝에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과격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완벽한 세상’에서 태평스럽게 노닥거리는, 그러나 전혀 편하지 않은 ‘나’의 현실은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들이 모두 다 새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며,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과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는 등 곤고한 사람들의 삶에 가 닿는다. 그러다가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떠올리기도 하고 교통사고로 인해 여러 사람이 죽는 사건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향락을 즐기기만 할 뿐,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한다며 씁쓸해 한다. 결국 화자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마지막 시행으로 시상을 마무리하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궁핍과 퇴폐의 현실적 삶 속에 살아가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이 현실이 얼마나 부조리한 곳인지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날>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그 여름의 끝>
1990년(39세) 낸 세 번째 시집 <그 여름의 끝>의 표제시이다. ‘자연’을 대표하는 ‘백일홍’의 모습을 통해 강렬한 생명력을 느끼고,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적 상처와 절망을 치유하고 극복하고 있으며 삶에 대한 긍정을 회복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폭풍을 이겨내고 여름을 무사히 난 백일홍은, 절망의 먼 길을 돌아온 시의 화자의 다른 모습이다. 화자 또한 폭풍 속에 서 있었으니, 구체적으로 ‘폭풍’에 비유된 삶의 시련은 그를 궁극적으로 좌절시킬 수 없었고, 그래서 그 역시 어려움 속에서도 ‘우박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던 것이다. 두 번째 연은 시적 화자의 진술이면서, 동시에 백일홍의 진술로도 읽힌다. 끝 연의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것은 여름 석 달 동안 계속 꽃 피는, 정확하게는 수많은 꽃망울들이 번갈아 피어 결국 한 계절을 온전히 감당하는 꽃인 백일홍의 생태이다.
이렇게 화려한 절망, 또는 절망과의 싸움이 마감하는 곳은 여름의 끝이면서 절망의 끝이다. 또한 그것은 주체적 열기를 분출하며 절망의 상황을 견디어 낸 승리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낙화는 ‘피’의 형상을 띤다. 깨달음이란 고통 없이 순순히 오지 않는 법이다. 승리로 귀결되는 절망의 끝, 여름의 끝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그 대가로 일정한 출혈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오랜 절망의 끝에서 시인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것은 또 다른 절망의 연습일 것이다.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서해>
1990년(39세) 세 번째 시집 <그 여름의 끝>에 수록된 작품으로, ‘당신’의 부재 속에서 부재의 확인을 유보함으로써 ‘당신’의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다.
간절히 그리워하면서도 그 그리움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위하여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가보지 않고 당신 계실 자리를 남겨 둔다고 배려해 줌으로써 애틋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당신이 있을 곳을 늘 마음 한 쪽에 지니고 있다고 하여 그리움의 정서가 결코 약한 것이 아님을 알리고 있다.
<서해>에서 화자는 바다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당신에 대한 역설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1연에서 화자가 서해에 가 보지 않은 것은 당신 때문이다. 화자는 당신 때문에 서해를 특별한 공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2연에서 ‘그곳 바다’는 화자가 아직 알지 못하는 바다이고, ‘여느 바다’는 화자가 알고 있는 바다다. 그런데도 화자는 두 바다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2연의 2~3행에서 화자는 ‘여느 바다’의 심상을 통해 ‘그곳 바다’를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멀리서’로 보아, 화자와 ‘당신’ 사이에는 어떤 거리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연에서 ‘계실 자리’와 ‘가보지 않은 곳’은 바다를 가리킨다.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는 ‘당신’이 그립지만 그를 배려하여 그곳으로 가지 않겠다고 애쓰는 마음을 나타낸 시구이다. 4연의 ‘한쪽 바다’는 화자가 ‘당신’이 계실 것으로 추측하는 곳이다. 그곳은 항상 화자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서해>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황지우
황지우의 생애
황지우(黃芝雨, 1952~)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황재우이다. 어릴 때 가난한 가족들이 군용 트럭에 세간을 싣고 피붙이 하나 없는 광주로 이사했는데, 황지우는 광주중앙국민학교에 들어간 후 심한 대인 기피증을 앓았다. 중학교 시절부터는 학교 도서관에서 헤밍웨이, 카뮈, 사르트르, 니체 등을 읽고 학생 문학상에 작품을 투고해 입상하기도 하였다. 광주일고 시절에는 찢어진 교복과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다니는 “격렬한 사춘기적 반항기”를 겪었다고 한다.
1979년(28세)에는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동대학원에 다니는 한편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연혁>이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가 실리면서 시단에 나왔다. 그러나 곧 광주항쟁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되어 대학원에서 제적되는 바람에 다시 서강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후 시단에 큰 충격을 안겨 준 형태 파괴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를 비롯해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1985), <나는 너다>(1987), <게 눈 속의 연꽃>(1990),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1998) 등의 시집과 여러 권의 시선집, 산문집을 펴내고 김수영 문학상(1983), 현대 문학상(1991), 소월시 문학상(1993) 등을 수상하였다.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 한예종 교수를 거쳐 2009년까지 한예종 총장으로 재직하였다.
황지우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1983년(32세) 낸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표제시이자 황지우의 초기 대표작으로 풍자와 역설, 현실에 대한 냉소적 어조 등 황지우 시의 특성을 유감 없이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1980년대 당시 영화 상영 전에 애국가가 연주되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애국가를 들으며 화면 속 장면들을 바라보아야 했던 당시 우리 사회의 왜곡된 모습을 그린다. 각자 마음속으로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면서도, 애국가가 끝나면 허무하게 다시 자리에 앉아 버리는 순간을 ‘주저앉는다’는 표현으로 장면화하고 있다. 특히 애국가와 더불어 나오는 화면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경임에도 현실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데서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화면 속 아름다운 정경은, 현실은 이처럼 아름다우니 체제에 순응하며 살라는 당시 군사 정권의 우민화 정책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시적 화자는 그러한 검은 의도가 담긴 화면을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바라보고, 애국가에 나오는 ‘삼천리 화려 강산’에 풍자적 의미를 부여한다. 현실에 대해 조롱과 아유를 보내는 비판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새’는 보통 ‘날다’라는 서술어와 호응을 이루지만,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는 새가 세상을 ‘뜬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현실로부터의 도피, 후퇴 등의 함축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무등>
1983년(32세) 낸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실린 작품으로, 이른바 ‘구체시’, 즉 시 본문의 글자를 구체적인 형상을 닮은 형태로 배열함으로써 주제를 드러내는 형식의 해체시이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는 구체시가 많이 실려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글자의 배열 형태를 삼각형으로 맞추어 ‘산’이라는 제재를 시각화하고 있다.
그러나 <무등>에서 삼각형의 형태는 그 형태 자체만으로 의미를 지닌 것도, 단순히 산의 아름다움이나 의미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황지우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사 속에서 쟁점이 되었던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무등산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행의 점층적 확장과 함께 무등산의 이미지가 앞부분에서는 역사적 질곡으로 일한 절망(절망의 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으로 드러나다가, 뒷부분으로 가면 민중의 역사적 힘과 희망에 찬 전망(폭발적인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뜨는산, 희망의산, 평등의산)으로 발전하는 데서 그 의도를 엿볼 수 있다.
山
절망의 산,
대가리를 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 산, 사랑의 산, 침묵의
산, 함성의 산, 증인의 산, 죽음의 산,
부활의 산, 영생하는 산, 생의산, 희생의
산,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 산, 꿈의 산, 그러나 현실의 산, 피의 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 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 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 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 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 감싸주는 어머니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게로>
1985년(34세) 낸 두 번째 시집의 표제시이다. 추운 겨울을 견뎌 내고 봄을 맞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나무의 모습을 통해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겨 내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리라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는 자연 현상을 나무가 투쟁을 통해 얻어 내는 것으로 표현하여 나무의 결연한 의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혹한을 뚫고 꽃을 피우는 나무의 모습을 통해 암울한 시대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겨울 나무’와 ‘봄 나무’의 두 상태는 대립적인 두 가지의 상황을 의미한다. ‘겨울 나무’는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는 상태이며, ‘봄 나무’는 이를 극복하고 생명력을 맺고 있는 상태이다. 화자는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로의 변화를 자기가 속한 상황의 부정을 통한 변화로 파악한다. 그리고 그것을 상승의 이미지와 역동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마침내 겨울을 극복하고 봄을 쟁취하는 나무의 모습은 자기 생명력의 확인과 굳은 의지의 산물임을 제시하고 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황지우의 시 세계를 염두에 본다면,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게로>에서의 겨울과 영하의 땅은 현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고 열악한, 모든 생명들을 죽게 만드는 고난의 현실을 상징한다. 나무라는 생명체의 삶을 억압하고 수고하는 현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그 억압을 이기고 꽃을 피우는 나무는 역사 속의 민중이나 민중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게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십삼도/ 영하 이십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아 벌받는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입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달프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도/ 영상십삼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 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1990년(39세) 시집 <게눈 속의 연꽃>에 수록한 작품이다. 누구나 겪어 봤음 직한 ‘기다림’의 체험을 일상적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적 화자가 그리는 ‘너’는 사랑하는 연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 끝에 붙어 있는 창작 후기를 참고한다면, ‘너’는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시적 화자의 만남에 대한 의지, 적극적인 기다림의 자세를 더욱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노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서성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기형도
기형도의 생애
기형도(奇亨度, 1960~1989)는 경기도 옹진 연평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황해도에서 피난 온 공무원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서해안 간척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후 온 가족이 경기도 시흥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 웬만큼 안정을 찾았지만, 갑자기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기형도의 어머니는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고 한다. 이런 기형도에게 가난은 원체험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기형도는 훗날의 시 <엄마 걱정>에서처럼 시장에 장사하러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기형도는 신림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79년(20세) 연세대학교 법대에 들어갔다. 입학하자마자 그는 문학 동아리에 가입하여 성석제 등과 교유하고 본격적인 문학 공부를 시작하는데,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할 만큼 불안과 위기감을 느끼며 대학 생활을 마쳤다. 1984년(25세)에는 <중앙일보>에서 일하면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를 보내 당선되었다. 이즈음부터 드문드문 시를 발표하며 ‘시운동’ 동인들과 사귀기도 하였는데, 미성이어서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한다.
기형도는 1989년(30세) 3월 어느 날, 종로 3가 파고다극장의 한 좌석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으나, 지금까지 아무도 그가 왜 혼자 심야 재개봉관에 갔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며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사후 출간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평론가 김현이 정한 것인데, 죽은 후 기형도는 이 아름다우면서도 절망적인 한 권의 시집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기형도의 시
기형도의 시는 드문드문 발표한 몇 편을 제외하면 대개 사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수록되어 있다. 작품들이 대부분 유년 시절의 가난, 사랑의 상실, 부조리한 현실의 폭력, 자본주의 사회에 물화(物化)된 인간의 모습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대체로 절망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의 절망은 절망의 끝까지 가 본 자의 도저한 절망으로,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풍경에 속한다.
<입 속의 검은 잎>
<입 속의 검은 잎>은 폭력적인 현실과 그로 인한 죽음, 공포의 삶을 고도의 상징적 표현 속에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분명히 알 수 없는 어떤 사건을 시적 동기로 삼고 있다. ‘그 해 여름’, 화자가 신문에서 한번 본 적이 있는 ‘그’가 ‘그 일’이 터진 지 얼마 후 죽은 것이다. 거센 비바람 속에 거행된 ‘그’의 장례식 행렬에 사람들은 악착같이 매달렸고,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다가 나타났으며, 망자의 혀가 거리에 넘쳐흘렀다. 그리고 또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 일’은 1980년대 중 · 후반의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정치적인 억압과 사회적 통제가 알게 모르게 강화되었던 당시, 권력에 반대하는 비판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시 속의 ‘그’와 없어졌다가 나타난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 세력들을 뜻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침묵을 지킨다. ‘안개’와 ‘흰 연기’는 진실을 은폐하는 부정적인 현실을, ‘책’과 ‘검은 잎’은 관념적인 지식과 죽음의 징후들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자 역시 방관자의 한 사람이며, 먼지 낀 책을 읽는 무력한 지식인이었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고,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 ‘먼 지방’과 ‘먼지의 방’의 발음─띄어쓰기의 차이만이 있는─과 의미─현실과 괴리된 공간으로서의─의 양면에 있어서의 유사성이 흥미롭다.
사람들은 죽음과 폭력을 비굴한 침묵으로 방어하는 대신,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고 파편화되며 방향성을 상실한다. 택시 운전사와 그를 믿지 못하는 ‘나’,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와 나는 서로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다. 이제 나는 그가 누구인지,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대답해야만 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모르지만, 예전의 ‘먼 지방’, ‘먼지의 방’이 아닌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가서 현실에 직접 관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다.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으로 암시되는 낯설고 황량하며 어두운 현실,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뜻하는 죽음과 굴복, 타협의 징후들이 끝없이 ‘나’를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입 속의 검은 잎>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 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식목제>
<식목제>는 나무를 심은 경험에서 유년의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아가는 현재, 그리고 현재와 마찬가지일 미래에 대한 우울한 기록이다. 어린 시절의 삶의 흔적과 시대적인 아픔, 그리고 젊은 날의 고뇌들이 뭉뚱그려진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은 식목제 때 심어진 나무 한 그루와 같이 이해된다. ‘흙 속의 뿌리’는 과거의 삶, 경험, 기억을 의미한다. 이파리로 자라나고 있는 모습은 현재의 삶의 공간이며, 미래는 뻗어 나가는 줄기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렇듯 <식목제>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공간이 나무의 성장이라는 수직적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식목제>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 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木柵)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輕微)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도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 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 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엄마 걱정>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유년기의 경험을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표현으로 그려 낸 작품이다. 이 점에서 박재삼의 <추억에서>가 생선 장수 어머니의 고된 삶을 그린 것과 유사하다. <추억에서>가 어머니의 아픈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애틋하지만 밝은 이미지를 형상화했다면, <엄마 걱정>은 기형도의 시답게 화자의 아픈 마음을 주로 드러내고 어둡고 불행한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빈 집>
사랑을 잃은 후의 슬픔을 노래한 작품이다. 화자은 ‘빈 집’에서 머물던 ‘가엾은 내 사랑’의 정체를 ‘짧았던 밤들’,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등의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환기시켜 준다. 그 사랑이 ‘빈 집에 갇혔’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중용한 것은 그 갇힘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내 사랑’이라는 것이다. 즉, 이 시에서 ‘빈 집’에 갇힌 것은 사랑의 상처에 아파하는 화자 자신이 아니라 시인의 사랑에 대한 ‘추억’이다. 또, 그 ‘빈 집’은 영원히 닫혀 있기 때문에 그가 들어가지 않는 한, 그 어떤 것이 살아도 ‘빈 집’인 것이다.
3연에서는 안녕을 고한 과거의 자신에게서 떠나면서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공간을 폐쇄시킨다. 그 폐쇄 작업은 그것들이 있는 공간 바깥에서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근다는 설정으로 표현된다. 모든 ‘열망’, ‘가엾은 내사랑’들은 ‘빈 집’에 갇히고, ‘나’는 그 ‘빈 집’을 떠나가는 것이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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