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Nürnberg)
뮌헨에 이어 바이에른 지역 제2의 도시라 할 수 있는 뉘른베르크는 일찌감치 상공업이 발달하여 제국도시로 위엄을 뽐냈고, 오늘날에도 상공업이 발달한 대도시이다. 독일에서 가장 먼저 철도가 개설된 곳도 바로 이 곳이라고 한다. 뮌헨이 바이에른 남쪽에 위치하여 독일 전체 중 구석에 치우쳐 있다면, 뉘른베르크는 바이에른 북쪽에 위치해 다른 도시와의 교통이 편리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뉘른베르크는 공업이 발달한 대도시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즈넉한 구시가지를 간직하고 있다. 옛 성벽과 성 안쪽의 구시가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구시가지를 가로지르는 페그니츠 강(Pegnitz)의 운치까지 더해져 평화롭고 아늑하다는 인상을 준다.
흥미로운 점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도시가 2차 세계대전의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독일의 도시들 중에서도 뉘른베르크를 가장 사랑해 나치제국 수도를 뉘른베르크로 정했다. 덕분에 뉘른베르크는 전쟁 내내 엄청난 폭격을 받아 온 도시가 다 파괴되었고, 전쟁 후에는 전범재판이 열려 나치의 전범을 처형한 역사적 현장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뉘른베르크에 가면 과거 제국도시였던 부유한 모습을 복원하여 아름다운 구시가지, 예로부터 발달했던 상공업의 전통이 남은 수공업, 나치가 남긴 유적 등 다양한 볼거리를 골고루 구경할 수 있다.
페그니츠 강(Pegnitz)
바이에른 주에 있는 전체 길이 115km의 강으로 레그니츠 강(Regnitz)의 두 개의 원류 중 하나다. 강과 이름이 같은 도시 페그니츠(Pegnitz)의 슐로스베르크(Schlossberg) 해발고도 543m 지점에서 시작되어 남쪽을 향해 흐르며 노이하우스(Neuhaus), 펠덴(Velden), 헤르스브룩(Hersbruck) 등을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라우프(Lauf), 뉘른베르크(Nürnberg), 퓌르트(Fürth)를 끼고 흐른다. 퓌르트 시내 북쪽에서 레드니츠강을 만나 합류하고 이 곳에서 부터 레그니츠 강이 시작된다.
1909년 2월에 있었던 홍수 피해때문에 강의 곡류를 곧게 하는 공사를 했고, 그로 인해 강의 길이가 4km 짧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생태적인 문제때문에 1996년 이후부터는 강의 흐름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성 로렌츠 교회(Lorenzkirche)
1477년 완공된 고딕 양식의 교회로 외부와 내부 모두 군더더기 없는 고딕 교회의 전형이다.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화려한 치장은 없으나 돌이나 나무로 정교하게 조각된 장식물이 곳곳에 조화를 이룬다.
화려한 정문 안으로 들어가면 독일 후기 고딕양식의 대표적인 목조각가인 바이트 슈토스(Veit Stoss)가 대제단 앞의 천장에 새긴 수태고지(Engelsgruß)가 눈에 띈다. 1517년 상인이자 시의원이었던 안톤 투허(Anton Tucher)가 의뢰한 것으로, 최종 완성 전에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가 작품 품질을 검토했다고 한다. 작은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성모 마리아와 대천사 가브리엘을 보여주는데, 천사들은 대부분 축하의 종을 울리거나 즐겁게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원형 프레임의 장미 화환에는 동정녀와 그리스도의 삶의 장면을 보여주는 여덟 개의 동그란 메달이 박혀 있다. 슈토스는 프레임 위에 걸기 위해 도금 왕관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소실되었다.
이 수태고지는 독일 종교개혁 직전에 완성되었는데, 당시에 루터교 개혁가들이 종교예술의 필요성과 목적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우상파괴 사상이 만연했다. 다만 이 작품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투허 가문의 사유재산으로 인정된 덕에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교회 본당은 1400년경에 완성되었고, 1439년부터 시작된 독일 존더고틱(Deutsche Sondergotik) 양식의 성가대석 공사는 1477년에야 완공됐다. 성가대석에서는 아담 크라프트(Adam Kraft)의 기념비적인 성막(聖幕)을 볼 수 있는데, 성막에는 아담 크라프트 자신의 모습도 있다. 오르간의 음색이 아름답기로 유명해 연주회나 콩쿠르가 열리기도 한다.
교회 바로 앞에 있는 투겐트브루넨(Tugendbrunnen) 분수는 ‘미덕의 분수’라는 뜻으로 7명의 여신에게서 물줄기가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14세기에 만들어진 것을 1821년 다시 지은 것이다.
존더고틱(Deutsche Sondergotik)
‘독일의 말기고딕 건축’을 의미한다. 14~16세기에 할렌키르헤(Hallenkirche, 광간식 성당)가 프랑스식의 대성당 고딕과 다른 공간감각으로 표현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20세기 독일 미술사가 쿠르트 게르스텐베르크(Kurt Gerstenberg)가 자신의 저서 <독일 존더 고틱>(1913)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현재는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플라이쉬 다리(Fleischbrücke)
'물고기 다리'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석조 아치교이다. 독일의 후기 르네상스 시대 교각 중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다리 옆에 생선 가게가 있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가장 오래된 부분은 12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335년 기록에 이 다리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 발견됐다. 당시에는 목제 다리였는데 1418년 불타서 다시 지었고, 그마저 1432년 홍수로 파괴돼 또 다시 재건됐다. 1487년에야 두 개의 아치를 가진 돌다리로 대체되었다. 아치는 반지름 23.8m의 원형이고 다리 폭은 4.2m이며, 석재는 글라저스베르크(Glasersberg)의 사암이다. 2000개 이상의 나무 말뚝이 이를 떠받치고 있는데, 16세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공법인 400개의 각진 말뚝이 특징적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리알토 다리가 이와 같은 유형의 교각이다.
통행량이 늘어 다리가 약해진 통에 1595년 또 다시 홍수로 손상되자 도시에서는 아예 새로운 다리를 짓기로 한다. 마차 등 교통수단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평평하게 만드는 데 중점을 두어 1598년 새 다리를 완공하고 1599년에 통행료를 징수하는 사무소를 두었다. 측면의 황소 문도 이때 생긴 것이다.
이후 다리는 사실상 변하지도 파괴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때조차 거의 손상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러니까 지금 보는 다리는 무려 420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1974년에는 독일 역사기념물로 지정됐으며 2004~2005년에 수리 공사를 거쳤다. 2011년 독일연방 기술회의소로부터 독일토목공학의 역사적인 랜드마크로 지정됐으며, 명예 명패는 다리 남쪽 끝(Kaiserstraße 방향)에 있다.
레프쿠헨(Lebkuchen)
호니히쿠헨(Honigkuchen)이라고도 불리는 독일과자이다. 호니히(Honig)란 독일어로 꿀을 의미하고 쿠헨(Kuchen)은 과자라는 뜻이니, 꿀과자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자가 레프쿠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대략 14~15세기 정도이다. 밀가루와 거의 같은 양의 꿀을 섞어서 반죽을 하기 때문에 오래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며 오늘날도 옛방식을 그대로 이용해서 레프쿠헨을 굽고 있다.
레프쿠헨은 주로 수도사들이 기거하던 수도원에서 발달했다. 당시 양봉을 통해 꿀을 많이 얻는 작업이 주로 이루어진 곳이 수도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원을 찾는 신도들에게 레프쿠헨은 친근한 과자가 되었으며, 성서에 등장하는 장면이나 성인의 모습을 레프쿠헨 무늬로 새겨넣기도 했다. 모양도 재료도 다양해서 취향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다.
나렌쉬프 분수(Narrenschiffbrunnen)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로 2007년 사망한 조각가 베버(Jürgen Weber)의 작품이다. 3.6m 높이의 이 청동 분수 역시 세속이라는 배에서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당과 지옥, 아브라함과 카인, 아담과 이브의 묘사는 베버의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 준다.
분수의 조각은 1984~1987년 주물 하나를 짜서 청동상 두 개로 찍어낸 것이다. 첫 번째 것은 현재 하멜른(Hameln)에 있고 두 번째 것은 1987년 뉘른베르크에서 미술전시회에 전시됐다가 개인이 구매했는데 이후 뉘른베르크 시에 기부되어 이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전체적인 형상은 독일 시인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의 시 <바보 배(Das Narrenschiff)>(1494)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이 시의 삽화를 알브레히트 뒤러(Dürers)가 그렸는데, 그 그림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바보의 배>는 종교개혁 직전 타락한 정치, 종교, 사회의 부패상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브란트의 <바보 배> 중 일부(<광인의 배>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권력에 기대고 세상의 재물에 몸 달아 하다가 기뻐 날뛴다면 그런 사람은 살과 피를 가진 바보라네.
… 자식들이 버릇없이 굴어도 못 본 척하고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고통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네.
… 옳은지 그른지 판단을 못하고 남의 조언에만 기대는 사람은 혼자서 피해를 감당해야 한다네.
크리스마스 마켓(Christkindlesmarkt)
겨울에 크리스마스 마켓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뉘른베르크의 겨울철 최대 축제의 장이다. 유럽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나라는 많이 있는데, 원래 크리스마스 마켓은 신성로마제국의 전통이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계승자인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가장 성대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크리스마스 마켓의 역사
크리스마스 마켓의 유래는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신성로마제국에서는 겨울철 성 니콜라스 데이(12월 6일, 성자 니콜라스가 순교한 날)에 부모가 어린 자녀들에게 ‘성자 니콜라스가 주는 선물’이라며 작은 선물을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성 니콜라스 기념일을 즈음하여 아예 선물을 위한 시장이 노천에 들어서게 되었으니 이것이 크리스마스 마켓의 원조다.
가장 오래 된 크리스마스 마켓은 1434년 드레스덴(Dresden)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뮌헨, 오스트리아 비엔나 등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도시에서 차례로 마켓이 들어서 신성로마제국 전역으로 전파됐다.
그런데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이 풍습을 따르지 않고, 로마 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로 기념하기로 한 12월 25일 전날 밤에 자녀에게 선물을 주었다. 이후 루터의 신교를 받아들인 도시에서 자연스럽게 풍습이 바뀌어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물을 주는 것으로 바뀌었고, 선물을 사기 위한 시장이 11월 말쯤부터 들어섰다. 이 시장을 ‘아기예수 시장’이라는 의미의 크리스트킨들 마켓(Christkindlesmarkt)이라고 불렀다. 1570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당시에는 독일 문화권이었다)가 원조로 꼽히며, 뉘른베르크도 비슷한 시기부터 대형 시장을 열어 현재까지 세계 최대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곳으로 꼽히고 있다.
구교와 신교가 화해한 뒤 이 두 가지 풍습이 하나로 합쳐져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성자 니콜라스가 선물을 주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성 니콜라스가 바로 세인트 니콜라스, 즉 산타클로스의 기원이다.
프라우엔 교회(성모 성당)(Frauenkirche Nürnberg)
독일에 이 성모교회와 비슷하게 생긴 교회는 아마 없을 것이다. 호리병을 세워둔 듯한 독특한 전면 외관이 인상적인, 14세기경 지어진 고딕 양식의 교회이다. 원래 이 지역은 유대인이 거주하던 곳이었는데, 지역에 시장이 들어서면서 강제로 유대인의 거주지를 철거하는 대신 그들에게 교회를 짓도록 허가하여 만들어진 교회라고 한다.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내부와 외부 곳곳에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과 장식이 아름답다.
교회 전면의 시계탑에는 1509년 만든 특수 인형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독일 각지에서 이런 특수장치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수공예의 도시답게 독일에서 그러한 특수장치 시계로는 이 성모교회의 것이 최초라고 한다. 정오마다 실행되는 인형극의 내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Karl VI)가 <금인칙서(Goldene Bulle)>를 발표하는 내용을 기념한 것이다.
쇠너 브루넨(Schöner Brunnen)
중앙 마르크트 광장(Hauptmarkt)의 명물로 ‘아름다운 분수’라는 뜻을 가진 분수이다. 높이가 무려 20m로, 분수라기보다는 기념탑으로 인식될 정도의 크기와 장식을 자랑한다.
쇠너 브루넨에는 7명의 선제후(성모교회의 시계탑 인형극의 내용인 <금인칙서>가 바로 7명의 선제후와 관련이 있다)를 포함해 성서 속 인물, 중세 영웅 등 총 40여 명의 조각을 둘러 새겨 놓았다. 높은 곳에 있는 조각은 잘 보이지 않고 조각 하나하나의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세공이 매우 뛰어나다.
분수 앞에는 언제나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는데, 분수를 둘러싼 철창의 황금고리를 왼쪽으로 세 번 돌린 다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이다.
장크트 제발두스 교회(성 세바스찬 교회)(Sankt Sebaldus Kirche)
성 제발트(St. Sebald)를 기리는 교회로 고딕 양식을 기본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해 만들어졌다. 1300년대 후반 완공되었으며, 내부에 성 제발트의 무덤이 내부에 있어서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면서부터 이 근방이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캐논 변주곡>의 작곡자인 요한 파헬벨(Johann Pachelbel)이 이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뉘른베르크 출신인 파헬벨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이 교회에서 연주를 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 교회는 ‘평화의 기념비(ein Denkmal für den Frieden)’라는 주제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사진을 교회 내부에 전시하고 있다. 교회 기둥마다 사진과 설명이 있다.
브라트부어스트 호이즐레(Bratwursthäusle)
뉘른베르크도 지역 고유의 소시지가 특히 유명한 곳으로 손꼽힌다. 뉘른베르거 브라트부어스트(Nürnberger Bratwurst)라고 불리는데, 독일의 다른 지방보다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다.
장크트 제발두스 교회 바로 옆에 위치한 브라트부어스트 호이즐레는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소시지 레스토랑이다. 소시지를 세 개 끼운 테이크아웃 빵도 저렴하게 판매한다. 참고로 레스토랑 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빵은 유료다.
뉘른베르크 성(카이저부르크)(Kaiserburg Nürnberg)
카이저 성(Kaiserburg)을 직역하면 ‘황제의 거성’이라는 뜻으로, 제국도시 뉘른베르크에서 황제가 머물 성으로 건축한 곳이다. 110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뉘른베르크에 들르면 꼭 이 성에 머물렀다고 한다.
황제가 머물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본래의 목적은 도시를 지키기 위한 요새에 가깝다. 그래서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만들었으며, 견고한 성벽이 성과 도시 전체를 둘러싸도록 했다. 성까지 오르는 언덕길이 약간 가파르지만 성 위에 오르고 나면 뉘른베르크 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카이저부르크는 2차 세계대전 중 크게 파괴된 것을 거의 옛 모습과 일치하게 복원했다. 성의 본관은 박물관으로 황제가 사용하던 공간이나 우물 등을 구경할 수 있고, 원래 성의 마굿간이었던 건물은 유스호스텔로 개조해서 사용 중이다. 유료 입장을 한다면 박물관만 둘러보아도 충분하고, 유료 입장을 하지 않더라도 성문으로 들어가 성벽 위에서 성과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뒤러의 집(Albrecht-Dürer-Haus)
독일 예술가 알브레히트 뒤러(Dürer, 1471~1528)는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북부 르네상스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에서 발전하고 있던 새로운 기법에서 영감을 얻은 뒤러는 그러한 기법을 독일 전통에 맞게 해석하여 유화와 수채화를 그린 재능 있는 화가인 동시에 여러 점의 목판화로 유명해졌다.
뒤러의 집은 1420년경 지어졌으며 총 네 층짜리 건물이다. 1502년 박공과 커다란 지붕창이 추가되면서 크게 확장되었다. 뒤러는 많은 여행을 자신이 태어난 도시로 돌아왔고, 1509년 이 집을 샀을 때에는 이미 명성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집에서 어머니와 아내인 아그네스, 여러 명의 학생들과 도제들과 더불어 살았다.
아래의 두 층은 이 지역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사암으로 건축되었고 그 위의 두 층은 목재 골조로 되어 있다. 마차가 들어갈 정도로 널찍하고 커다란 문은 지상 층으로 연결되는데 이곳은 작업장이자 창고 구실을 했다. 1층에는 부엌이 있고, 그 위에는 거실과 뒤러가 작품을 제작하던 스튜디오와 공방이 있다.
19세기에 뒤러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면서 이 건물은 뒤러와 그의 예술에 바치는 사원으로 복원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폭격 피해를 입었지만 여러 차례의 수리와 복원 작업을 거쳐 뒤러의 일생과 작품에 대한 실제적인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거리의 한쪽 끝에 위치한 뒤러의 집은, 주의 깊게 복구되어 부엌과 당시의 예술적 기법을 보여 주는 여러 개의 방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맨 꼭대기의 갤러리에는 세 개의 전시실이 있고, 최근에 지어진 별관에는 뒤러의 삶에 대해 시청각 자료로 설명을 제공해 주는 상영관이 있다.
사형 집행인의 다리(Henkersteg)
중세시대 어느나라에서도 사람들은 사형집행인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는데, 뉘른베르크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 바로 1457년 만들어진 사형집행인의 다리이다.
이 다리는 특이하게도 지붕이 덮여 있어 외부에서 다리 내부가 보이지 않는다. 사형집행인들이 이 다리를 통해 사형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하러 가는 모습을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만든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다리는 와인 저장고(Weinstadel)과 어우러져 그림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다리 위에 오르면 페그니츠 강과 주변 건물들이 이루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리 끝에는 사형집행인의 집(Henkershaus)이라는 작은 박물관을 두어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와인의 집(Weinstadel)
사형집행인의 다리 옆에 있는 붉은 지붕의 큰 건물이 바로 와인의 집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와인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목조건물이다. 중세시대의 목조건물 치고는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며, 사형집행인의 다리와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전쟁 후 1950년부터는 학생 기숙사로 사용 중이다.
운쉴리트 하우스(Unschlitthaus)
1491년 도시에 설립한 7개의 곡물 창고 중 하나였다. 세련된 사암 건축과 정교한 고딕 양식이 인상적이며, 한때는 도시 해자 벽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보관하는 곡식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기 위해 76개나 되는 채광용 창을 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학교와 보육원으로 쓰였고 1899년에는 시립 전당포가 들어서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때 폭력으로 파괴됐다가 재건됐는데, 건물의 남쪽 부분은 원래 상태로 보존됐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통계청과 선거관리사무소, 전당포로 사용되고 있다.
에카루셀(결혼 회전목마 분수)(Ehekarussell)
1977~1981년 조각가 베버(Jürgen Weber)가 설계해 1984년 완성한 분수로, ‘쓴 결혼의 회전목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늙어 싸우는 과정을 노골적이고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녹색과 분홍색 대리석으로 만들어 ‘장밋빛 가지’라고 불리는 하트 모양 조각도 유명하다.
백색 탑(Nürnberg Weißer Turm)
아치형 출입구를 갖춘 사암 사각탑으로 1250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통행료를 징수하는 요금소로 쓰였다. 뉘른베르크에서 몇 안 되는 탑 중 하나인데, 제국도시였던 뉘른베르크가 바이에른에 속하게 되면서 다시 지어질 뻔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탑이 하얗지도 않은데 하얀 탑이라고 부르는 것은 벽돌에 일부 섞여 쓰인 흰 석고 때문이다.
1978년에 지하철을 건설하면서 가까운 지하철역 동쪽 입구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는데, 때문에 가까운 C&A 백화점에서 이곳까지 오갈 수 있게 되었다.
파베르 문(Färbertor)
뉘른베르크의 구시가지는 옛 성벽을 복원해 시가지 전체를 둘러싸도록 하고 있다. 옛 성이 존재하던 시절에 동서남북으로 성을 드나들던 출입문이 나 있었는데, 파베르 문도 그 중 하나이다. 프라우엔 토어의 쾨니히 문이 가장 먼저 1540년에 만들어졌고 파베르 문, 카르토이저 문 등은 19세기에 만들어졌다. 북쪽 파베르 거리(Färberstraße)를 향하고 있다고 하여 파베르 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카르토이저 문(Kartäusertor)
뉘른베르크 성 출입문 중 하나이다. 프라우엔토어의 쾨니히 문이 가장 먼저 1540년에 만들어졌고 파베르 문, 카르토이저 문 등은 19세기에 만들어졌다.
프라우엔토어 탑과 쾨니히 문(Frauentorturm, Königstor)
뉘른베르크의 구시가지 성벽의 문 중 오늘날까지 가장 잘 보존된 것이 ‘왕의 문’이라는 뜻의 쾨니히 문이다. 1540년에 만들어졌다.
원통형의 육중한 프라우엔토어 탑은 견고한 요새의 초소 역할을 했던 곳이다. 높이는 40여m이며, 중앙역 정문으로 나오면 바로 건너편에 보이기 때문에 뉘른베르크 관광의 시발점 역할을 한다.
수공예인 광장(Handwerkerhof Nürnberg, 한트베르커호프)
일찍부터 수공업이 발달했던 뉘른베르크에는 장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장인들은 나무나 금속, 유리 등으로 다양한 수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했는데, 솜씨가 매우 뛰어나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후 그 명맥을 유지하여 옛날 모습 그대로 장인들이 수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공방을 한 곳에 모아둔 것이 수공예인 광장이다.
광장이라기엔 규모가 약간 작고 양편에 수공예 장인들의 공방과 선술집이 아기자기하게 늘어서 있다. 가게마다 창문 앞 작은 공간에 장인들의 작품을 내놓아 구경해 볼 수 있다. 수공품이기 때문에 가격은 비싼 편이다.
공방은 비교적 일찍 문을 닫지만 선술집들은 늦게까지 영업을 한다. 쾨니히 문이 바로 올려다보이고 성벽으로 둘러 싸인 곳에서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이루는 조화가 아름답고, 수공예품을 구경하기만 해도 흥미로운 곳이다.
나치 전당대회장(Reichsparteitagsgelände)
히틀러가 사랑했던 나치의 수도답게, 뉘른베르크에는 히틀러의 광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중요한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 히틀러가 꿈꾸었던 제국의 상징, 나치 전당대회장이다.
지금 우리는 2차 세계대전을, 그리고 나치와 히틀러를 그저 기록으로만 확인할 뿐 그 실체에 대해서는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 없는 것이 사실인데, 이 곳을 다녀오고 나면 광기와 야만이 고스란히 느껴져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히틀러의 광기는 그의 제국을 세우고 그가 신이 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국을 세우는 것, 그리고 신이 되는 것, 이 두 가지 키워드에 대한 광기의 산물이 있다.
제국을 세우고자 했던 그의 광기는 나치 전당대회장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원형경기장으로 실체화되었다. 히틀러는 로마제국의 콜로세움을 능가하는 제국의 상징을 원했다. 그래서 거대한 원형경기장을 지어 이 곳에서 나치의 전당대회를 치르며 힘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꿈은 거의 실현에 가까웠었다. 하지만 전당대회장이 완공되기 전 나치가 패망하였고, 그래서 지금은 건물의 겉은 완성이 되어 있으나 그 내부는 아직 미완성인 채로 방치되어 있다. 이곳에 가면 히틀러가 원했던 청사진이 공개되어 있는데, 그가 전당대회장을 얼마나 바라고 또 얼마나 여기에 미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기록의 전당(Dokumentationzentrum)
미완성인 원형경기장의 내부는 한 곳의 출입문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 자세한 설명과 당시의 관련 사진이 내부에 전시되어 있으니 꼭 들러볼 가치가 있다.
보다 자세한 자료를 보고 싶다면 원형경기장에 만들어진 기록의 전당이라는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이 곳에는 나치 집권 기간 중 자행된 폭력의 자료들이 여과없이 공개되어 있다. 과거사를 숨기기에만 급급한 이웃나라와는 달리, 그 부끄러운 과거를 낱낱이 공개하고 반성하는 독일의 지성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입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해 주세요.
*자료가 도움이 되었다면 인사 한 줄 남겨 주세요.
'여행노트 > 독일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센스위스 바스타이 국립공원 여행 코스 한국어 지도 (3) | 2022.01.12 |
---|---|
[독일] 작센 스위스와 바스타이 국립공원(Bastei)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1) | 2022.01.12 |
[독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 | 2022.01.05 |
[독일] 로텐부르크 장크트 야곱 교회, 리멘슈나이더의 <최후의 만찬> (0) | 2022.01.04 |
[독일] 로텐부르크(Rothenburg ob der Tauber)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3) | 2022.01.04 |
이 글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