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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동유럽 여행 URL 복사

[체코] 프라하(Prague)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22. 1. 16. by 솜글

프라하(Prague)

영어·프랑스어로는 프라그(Prague), 독일어로는 프라크(Prag)라고 한다. 체코의 수도이자 체코 최대의 경제·정치·문화의 중심도시이다. 시내를 흐르는 블타바강은 너비가 100~300m이며 몇 개의 강이 있다.

비교적 따뜻하며 습도가 낮고 연 강수량은 508mm이다. 프라하분지에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슬라브 인 들어온 것은 5~6세기이다. 9세기 말에 성이 축조됐다.

11세기에는 구 시가지 내의 광장에서 교역이 시작되고 12세기에 가면 중부유럽 최대의 도시 중 하나로 발전하게 된다. 14세기 카를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더욱 발전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는데 당시의 인구는 약 4만 명으로 추정된다. 14~15세기에는 후스전쟁의 싸움터가 되었다.

15~16세기에는 고딕 건축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정치적인 의미는 상실했다. 17세기에는 바로크 건축이 번성하고 18세기 말부터 다시 수공업 등이 일어나 경제적으로 회복되어 인구도 8만을 헤아렸다. 그 후에도 인구는 늘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한 이래 수도가 되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8년의 이른바 2월 사건, 1968년 1월의 ‘프라하의 봄’으로 부르는 자유화운동이 소련 등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입으로 짓밟힌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공업도시로서의 프라하에는 100여 개의 기업이 있고 전국 공업생산의 10% 가량을 생산한다. 주요한 것은 기계공업으로, 국영기업의 CKD(전기기관차 등)와 테슬라(모터·방송관계) 등이며 인쇄공업도 중요하다. 식품공업으로는 스미호프의 맥주, 프라하 햄이 유명하고, 그 밖에 의복·제지·화학(주로 타이어) 공업 등이 영위되고 있다. 시는 10개의 구로 나누어져 있으며 교외지역으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프라하 시 박물관(Muzeum hlavního města Prahy)

1881년 설립된 박물관으로 선사시대 이래 프라하 시의 역사와 관련된 전시품들을 보여 준다. 성격으로 치면 서울역사박물관과 비슷한 곳이다. 체코 역사 특성상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기를 암흑기로 보기 때문에 중세 프르셰 왕조 때의 설명이 많다. 1830년 제작한 프라하 시 미니어처가 가장 큰 볼거리이다.

레기 교(Most Legií)

블타바 강을 건너는 프라하의 다리 중 하나이다. 최초의 다리는 1839~1841년 건설되어 1898년까지 사용됐으며, 지금 있는 것은 기업가의 주도로 1898~1901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다리 위에는 돔을 가진 두 개의 탑이 있으며, 양쪽 끝에는 통행료를 징수하던 탑이 있었다. 1901년 6월 개통됐다.

국립극장(Národní divadlo)

건축가 요제프 지테크(Josef Zitek)의 설계에 따라 1868년 공사를 시작해 1881년 완공됐다. 건립 기금은 역사학자 프란티세크 팔라츠키(Frantisek Palacky), 작곡가 베드리흐 스메타나(Bedrich Smetana) 등 체코의 문화인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했다. 개관 직전인 1881년 8월 12일, 화재가 발생해 건물 전체가 전소되었으나 6주 후 각계의 지원으로 재건에 필요한 자금이 충당되었다.

건축가 요제프 슐츠(Josef Schulz)의 지휘 아래 복구작업이 이루어져 2년 후인 1883년 11월 18일, 스메타나의 오페라 <리부셰(Libuse)> 공연을 시작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때 건물의 안팎 장식에 이른바 ‘국립극장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당대의 젊은 예술가들이 참여하였다. 1980년대 초반 다시 한번 복구작업이 이루어졌으며 현재 연극, 오페라, 발레 등을 주로 공연한다.

성 십자가 로톤다(Rotunda Nalezení sv. Kříže)

프라하 구시가지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원형 홀이다. 1125년 만들어졌으며 체코 국가문화기념물로 지정됐다.

최초의 기록은 1365년에 등장한다. 당시 이 위치는 비셰흐라드에서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교차로에 해당하며 중요한 교역 중심지였다. 처음에는 개인 저택 중 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1625년에 이 로톤다는 성십자가 교회 수도원의 소유가 되어 지금과 같은 이름을 갖게 됐다. 1784년 요세프 1세 때 교회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성소로서의 기능이 없어지기도 했다.

훗날 재건 작업을 거치면서 바닥 아래에서 13세기의 벽돌 바닥과 묘비 유적, 1012년 왕자였던 인물에 관한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로톤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십자가 못박힌 여자가 던져졌던 연못 자리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여자를 던져넣자 연못에서 커다란 십자가가 떠올랐다고 한다.

베들레헴 예배당(Betlémská kaple)

그 중요도 면에서 프라하에서 으뜸가는 교회이다. 후스 파의 사상적 기초가 이태된 곳이기도 하다. 1391년 프라하의 종교개혁가들은 라틴어 대신 체코어로 미사를 볼 수 있는 교회의 설립인가를 받았고 곧 3000명의 신도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보헤미아 최대 규모의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베들레헴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단순한 형태의 실내는 제단보다는 설교단을 중심으로 꾸며졌다.이곳에서 1302~1412년까지 얀 후스가 설교를 했는데 이는 까롤리눔의 성소에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효시가 되었다.

베들레헴 예배당은 18세기에 파괴된다. 1920년 무렵 교회의 잔해가 발견되고 1948~1954년 사이에는 후스 사상이 초기 형태의 공상주의와 유사하다는 평가 덕분에 교회 전체가 옛날의 그림과 각종 잔해에 기초해 원래의 형태대로 다시 세심하게 복원되었다.현재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예배당 남쪽 벽만 새로 건립된 것이고 동쪽 벽에서는 설교단으로 통하는 문, 몇몇 창문들, 설교자가 머무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 등 원래 건물의 일부를 볼 수있다. 후스를 비롯해 그의 측근들이 사용하던 방들 역시 원래 건물에 속했던 곳이다.현재는 전시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벽화들은 현대에 와서 그려졌고 내용은 옛 후스 파의 소책자에 기초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곳에서는 1415년 후스의 화형식이 있기 전날이었던 매년 7월 5일에 추도식이 열린다.

18세기에 베들레햄 예배당을 포함하여 기록한 구시가지 그림

매달린 지그문트 프로이트 동상(Socha zavěšeného Sigmunda Freuda)

후소바(Husova) 거리의 땅 위에 높이 매달린 동상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를 묘사한 것으로 조각가 다비드 체르니가 1997년 제작했다. 프로이트가 정신의학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지만 그도 별수 없이 대롱 대롱 버티면서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체르니는 이밖에도 오줌 누는 동상, 프란츠 카프카의 두상 등 재미있는 조형물들을 시내 곳곳에 남겼다.

레고 박물관(Muzeum Lega)

병원, 휴양지, 농장 등 평범한 풍경부터 프라하의 카를 교, 인도의 타지마할, 런던의 빅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등 세계의 랜드마크까지 다양한 대상을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하벨 시장(Havelské tržiště)

1232년부터 운영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프라하의 시장이다. 옛모습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오랜 의미를 간직하고 있으며 기념품은 물론 과일, 채소 등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기념품 고르기가 어렵다면 이 곳에서 아이템을 찾아 보는것도 좋은 방법이다. 장 보러 나온 프라하 시민으로 늘 북적이는 곳으로, 활기찬 프라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마리오네트와 글라스 등 각종 기념품을 파는 시장으로 탈바꿈한다. 흥정 문화가 있으므로 값을 깎아 보는 것도 좋다.

눈의 성모 마리아 성당(Kostel Panny Marie Sněžné)

바츨라프 광장 북부 끝에 위치한 이 고딕 성당은 14세기 카를 4세가 짓기 시작했지만 그의 생전에는 성단소만 완공됐다.프라하에서 가장 위대한 교회를 짓고자 했던 카를의 염원 덕분인지 이곳의 네이브(Nave, 교회당 중앙의 회중석 부분)는 성 비투스 성당보다 높고, 제단은 프라하 내에서 가장 높다.1419년 후스 전쟁을 일으킨 얀 젤리프스키(Jan Želivský )가 설교를 펼쳤던 곳으로 후스파의 근거지로 사용되었다. 1611년 한 차례 파괴되었다가 1625년에 복구 공사를 마쳤다. 왼쪽 제단의 <수태고지>는 바로크 시대 최고의 회화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데 1929~1930년 학술 연구가였던 피셰르(František Fišer)가 복원한 것이다. 바닥에는 루톨프 2세 백작 등 유명인사들의 묘비가 여럿 있으며 15세기 말 고딕 양식의 종탑도 있다.

좌측 제단의 수태고지 성화

아치문을 지나면 융만 광장( Jungmannovo náměstí )에 자리한 오스트리아 문화원과 이어진다. 인근에는 프란체스코회 정원에서 성당의 근사한 외관을 감상할 수 있다.교회 옆에 자리한 파소프 성처녀 예배당은 현재 임시 예술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바츨라프 광장(Václavské náměstí)

중세 시대 카를 4세에 의해 조성된 신시가지에 속한다. 원래 말 시장이 섰던 곳이며 광장 가운데 사형대가 세워졌던 역사도 있다. 너비 60m, 길이 750m의 이 광장은 엄밀히 말하면 광장이라기보다 드넓은 대로에 가깝다. 현재는 중앙 녹지를 경계로 차도와 인도가 나뉘어 있다. 광장 이름은 체코의 최초 왕조인 프르셰미슬 왕가의 왕 바츨라프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는 사후에 성인으로 추대된 체코 기독교의 상징적 인물이다. 광장 동남단에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성인 4명의 수호를 받으며 서 있다.

무엇보다 바츨라프 광장은 체코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무대이며 여러 차례 프라하 시민의 집회가 열린 민주화의 상징적 장소이기도 하다. 191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선언이 이 광장에서 선포되었고 1968년에는 ‘프라하의 봄’이라 일컫는 자유화 운동이 일어나 광장 일대가 모여든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프라하의 봄은 소련의 군사 개입으로 큰 희생을 치렀지만 결국 1989년에 같은 장소에서 몇 십만의 시민들이 광장을 메우며 공산 정권의 몰락을 이끌어 낸 벨벳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광장에는 자유화 운동 당시 소련의 무력 개입에 항거하는 뜻으로 목숨을 끊은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 두 젊은이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오늘날에는 호텔과 백화점, 부티크 등이 늘어서 있는 프라하 최고의 번화가로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붐빈다. 바츨라프 광장 주변은 그냥 걸어도 좋지만 주변에 흩어져 있는 미술관과 기념관을 돌아보려면 트램이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인드리스카 탑(성 헨리 탑)(Jindřišská věž)

65.7m 높이로 프라하에서 가장 높은 독립된 종탑이다. 사암으로 만든 고딕 양식에 목조 지붕을 덮은 형태로 1472~1476년 지어졌다. 1648년 프라하가 스웨덴 군에 포귀됐을 때는 군대 집회소의 역할을 했다가 스웨덴 포병에게 폭격을 당했고 1757년에는 프러시아 군대가 쳐들어와 또 다른 피해를 입었다. 1801년에는 거센 폭풍으로 지붕까지 날아가고 만다. 이후 1876~1879년에 건축가 요세프 모커(Josef Mocker)의 설계로 후기 고딕 양식으로 복원됐는데, 이때부터 탑 높이가 65.7m에 도달하게 됐다. 1970년대에 다시 재건축됐으며 2001년에는 내부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화약탑(Prašná brána)

프라하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나뉘는 지점으로, 옆에는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시민회관이 있다.

1475년 지금의 구시가지를 지키는 13개 성문 가운데 하나이로 처음에는 대포 요새로 건설됐다. 이후 총기 제작공이자 종 주조공이었던 야로스(Tomas Jaros)라는 사람이 작업실로 개축해서 쓰다가, 루돌프 2세 때인 17세기 초에 연금술사들의 화약창고 겸 연구실로 쓰이면서부터 ‘화약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1757년 프러시아가 프라하를 포위하여 공격할 때 크게 파괴되어 후에 오늘날의 유사 고딕 양식으로 재건됐다.

고딕 양식의 탑으로 높이는 65m이며 총 186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라하의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화려한 장식과 다양한 색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달리 어둡고 칙칙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옛날에는 왕과 여왕의 대관식 행렬이 시로 들어가는 곳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으며, 외국 사신들이 프라하 성으로 들어올 때 꼭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이용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탑을 오르는 계단

1960년대부터는 연금술이나 종 주조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약탑과 나란히 있는 길이 신시가지, 탑을 지나 서쪽 길이 구시가지가 각각 시작되는 곳이다.

양심의 망토 동상(Plášť svědomí)

잘츠부르크에 있는 ‘피에타’와 같은 시리즈의 작품이다. 체스키 크룸로프 출신의 예술가 안나 흐로미(Anna Chromy)가 슈탈의 <예더만>과 모차르트의 <돈조반니>에서 영감을 얻어 이 ‘양심의 망토’ 조각 연작을 작업했는데, 유사한 작품이 잘츠부르크 외에 그리스 아테네, 체코 프라하에도 있다. 폭력, 전쟁, 테러리즘에 반대하여 용서와 생명, 사랑, 정의, 영성과 명상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망토 속’으로 상징화한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 틴 교회(Chrám Matky Boží před Týnem)

1365년 고딕 양식으로 건축한 교회로 성 비투스 대성당과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종교 건축물로 꼽힌다. 작은 탑이 주변을 에워싸고 그 중앙에 우뚝 선 쌍탑이 인상적인데, 프라하 시내 어디에서든 보인다. 꼭대기가 금빛으로 빛나는 쌍탑은 높이가 80m로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프라하에서 단연 눈에 띈다. 원래 쌍탑 사이에 후스파를 상징하는 황금 성배가 있었는데 1621년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하면서 황금 성배를 녹여 마리아의 후광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황금 성배를 녹여 만든 성모 마리아의 후광
성당 내부

프라하 국립미술관(골츠킨스키 궁전)(Palác Golz-Kinských)

1948년 개관한 프라하 국립미술관은 총 8개의 미술관을 시내 곳곳에 흩어 놓고 있는데 그중 프라하 성 밖의 정문 뒤에 있는 슈텐베르크궁전이 본관 역할을 하고, 그 외에 나로드니 미술관이 유명하다.

골츠킨스키 궁전은 1755년에 착공해 1765년에 완공한 건물로 당시 유행하던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졌다. 본래 골체(Golze) 백작을 위해 지어진 건물인데 백작이 죽은 추 매입되어 고전주의 양식으로 재건됐으며 1835년 전후에 안뜰과 다른 건물들을 추가했다. 여성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오스트리아 작가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궁전 외벽에 있는 킨스키 가문의 문장

올드타운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

구시가지에 있는 광장이다. 13세기부터 이곳에 시장이 열려 14세기 기록에 이미 올드타운 광장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이래 줄곧 사람들은 올드타운 광장이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바츨라프 광장과 카를교 사이에 있어서 관광객들로 문전 성시를 보여준다. 고딕 양식 및 바로크 양식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다.

프라하 구시청의 천문 시계(Pražský orloj)

프라하의 구시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역사 지구로서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구시가 광장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천문시계가 있는 구시청사는 최고의 관광 명소로 꼽힌다. 구 청사는 1338년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화재로 상당 부분 훼손되는 시련을 겼었다. 그러나 천문시계가 있는 서쪽 동은 다행히 소실을 면했으며 그 후 복원과 증축 공사가 진행돼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구 시청사 관광의 핵심은 독특하고 화려한 천문시계이다.

천문시계

1410년에 만들어진 천문시계는 체코 고딕 시대의 과학과 기술이 집약된 결정판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기발하고 정교하다. 600년 넘게 프라하의 역사와 함께한 시계는 원형에 거의 가까운 형태로 보존되어 왔다.

위쪽에 있는 시계 장치는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천문 눈금판으로, 하늘의 해와 달의 위치와 다양한 천문학적 정보들을 표시한다. 두 번째는 ‘사도들의 행진’으로, 매 시간마다 12사도의 모형과 죽음을 형상화 한 해골의 모형 등 여러 움직이는 조각품들이 나타난다. 세 번째는 달력 눈금판이다.

아래 시계의 둥근 판 중심에는 구시가의 문장이 있고 둘레에 별자리가 새겨져 있으며, 이를 둘러싸고 한 해의 열두 달을 농민의 생활로 표현한 그림이 있다. 위쪽 시계는 천동설에 기초해 만들었다는 천문시계이다. 시간, 일출, 일몰, 월출, 월몰까지 표시해 준다고 한다. 실제 시간과의 시차는 약 1초라고 한다.

시계의 구조

매 시각 정시에 시계가 짧게 작동하므로 미리 기다리고 있어야 놓치지 않는다. 해골이 줄을 당겨 종을 울리고 왼손의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시계의 맨 위쪽 창이 열리면서 12사도가 등장한다. 이들이 한 바퀴를 다 돌면 닭이 울고 종이 울리는 순서다. 이를 보기 위해 정시가 가까워지면 천문시계 앞은 관광객들로 만원이 된다. 구 시청사 안에는 역사박물관, 예배당, 집무실 등이 있다. 예배당에서는 천문시계 내부를 볼 수 있다. 중세에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시계를 높은 탑 위에 설치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구 시청사의 시계탑 또한 그러한 이유로 만들었을 것이다. 또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는 높이 69m의 시청사 탑 전망대는 프라하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므로 꼭 올라가 보자.

프라하 자오선(Pražský poledník)

정오를 표시하기 위한 표식이다. 마리안스키 기둥의 그늘이 지는 자리를 표시하고 있는데, 청동판에는 체코어로 프라하의 정도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1652년부터 프라하의 정오를 결정하는 데 사용됐는데, 정확한 시간은 구시청 천문시계가 표시했다.

마리안스키 기둥(Mariánský sloup)

과거에 있던 기둥(왼쪽)과 현재의 기둥(오른쪽)

원래 1652년 초기 바로크 양식 기둥이 있었다가 1918년 합스부르크 정원이 물러날 때 군중에 의해 파괴됐던 것을 2017년에 다시 만든 것이다. 전체 무게는 118톤이며 꼭대기에 화강암으로 제작된 성도 마리아 상이 있다.

얀 후스 동상(Pomník mistra Jana Husa)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Jan Hus, 1372?~1415)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1915년 세워진 동상이다. 1962년부터 국가문화기념물로 지정됐다.

제작에 필요한 기금은 공공자본으로 조달했다. 이 동상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많았는데 바츨라프 과장, 베들레헴 광장 등도 후보였으나 결국 올드타운 광장에 설치되어 킨스키 궁전과 마리안스키 기둥 사이에 위치하게 됐다. 기초석은 1903년 7월에 놓였으며 12년만인 1915년 7월에 엄숙하게 공개됐다.

얀 후스는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고 고위 성직자들의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한 인물이다. 또한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했다.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화형에 처해졌으며 이후 오랫동안 체코 사람들에게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얀 후스의 화형을 기록한 그림

성 미쿨라셰 성당(Chrám svatého Mikuláše)

올드타운 광장에서 카프로바 거리로 가는 길목을 바라보면 거대한 흰색 성당이 하나 보인다. 이 바로크 양식의 교회는 14세기 틴 성당이 들어서기 전까지 구시가의 대표적인 성당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프라하를 지배하던 1735년 완성됐다.

성당 곳곳에는 아나토닌 브라운의 바로크 양식의 조각 작품들이 장식되어 있다. 하지만 1781년에 황제 요세프 2세가 제대로 활동하지 않는 수도원의 폐쇄를 명령하자 성당은 점차 황폐화되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라하 주둔군의 부대로 쓰였고, 그때 천장 돔에 코스마스 다미안 아잠이 성 미쿨라셰와 성 베네딕트의 생애를 프레스코화로 그려넣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후스파 교회로 사용되었다. 현재 매일밤 클래식을 연주하는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슈파넬스카 시나고가(Španělská Synagoga)

유대인 회당으로 12세기부터 있던 오래된 학교 자리에 1868년 지어졌다. 프라하에 있는 시나고가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35년부터 세계대전 때는 병원 건물이 추가됐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창고로 쓰이기도 했다. 1958~1958년에 재건을 거쳤다가 1989년 재건축됐고 1998년부터는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서 영감을 얻은 무어인 스타일의 인상적인 실내 장식이 돋보인다.

마이젤 시나고가(Maiselova synagoga)

황제 루돌프 2세의 명령에 따라 1592년 세워진 시나고가로 1689년 화재가 발생한 이후 여러 차례 재건됐다. 현재의 후기 고딕 양식은 1893~1905년에 복원된 것이다. 시청각 매체로 10~18세기 프라하에 살았던 유대인 마을의 옛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저녁에는 시 낭송회나 음악회가 걸린다.

루돌피눔(Rudolfinum)

19세기 후반만 해도 프라하에는 이렇다 할 콘서트 홀이 없었는데, 이에 체코 최대의 금융사였던 체코저축은행이 1874년 창사 50주년을 맞아 예술가의 집을 짓기로 결정한다. 콘서트 홀과 미술관을 합친 유럽 최초의 아트센터 콘셉트의 건물을 기획한 것이다.

원래 시장이 열리던 강변에 땅을 구입하고 유명한 건축가 8명을 초청해 경합을 벌인 끝에 프라하 공대 건축가 교수인 요제프 지텍과 요제프 슐츠가 설계자로 채택됐다. 1885년 드디어 완공한 이곳은 극장 건설을 일부 지원한 오스트리아의 루톨프 왕자(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체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공화국으로 독립하자 마땅한 국회의사당이 없었고 이때문에 루돌피눔을 1919~1939년, 20여 년 동안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개조해 사용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체코를 병합하자 음악을 좋아했던 독일인들은 루돌피눔을 다시 공연장으로 복원했다. 이 과정에서 체코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름을 딴 실내악 홀인 ‘수크 홀’이 마련됐고, 메인 홀은 드보르자크의 이름을 따 ‘드보르자크 홀’로 명명됐다.

루돌티눔의 지붕 난간에는 체코 출신 작곡가들의 조각상이 서 있고, 출입구 계단 양쪽에는 뮤즈 신이, 콘서트홀 입구에는 사자가, 미술관 입구에는 스핑크스 상이 서 있다. 건물 앞 광장과 그 옆으로 흐르는 블타바 강변에 가면 한가롭게 강을 바라보며 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클레멘티눔(Klementinum)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2005년 유네스코 직지 상을 수상했다. 내부는 가이드 투어로만 관람할 수 있다. 예배당과 천체 관측대, 시계와 탑 등이 있다.

클레멘티눔의 역사는 11세기 성 클레멘트에 헌정된 예배당 유적에서 시작됐다. 이 예배당은 1556년 예수회 대학으로 변모했는데, 1622년 예수회가 카를 대학교 도서관을 클레멘티눔으로 옮기면서 대학과 합병했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되자 국가가 도서관을 인수했으며 1990년에는 국립 도서관으로 지정했다. 모차르느나 코메니우스에 관한 자료, 체코 문학 자료 등을 소장하고 있다. 프라하 성에 이어 프라하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이다.

카를 교(Karlův most)

카를 4세가 유디트 다리(1158~1172 건설)를 대체하기 위해 짓게 한 다리이다. 유디트 다리는 폭이 더 좁은 다리였는데, 1342년에 일어났던 홍수를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어 버렸다. 이 새로운 다리의 주춧돌이 놓인 것은 1357년이었다. 건축가는 독일인인 페테르 파를러였는데, 그는 성 비투스 대성당을 설계한 인물이기도 했다. 하나는 16세기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 다른 하나는 1464년에 지어진 후기 고딕 양식인 두 개의 탑이 다리 입구 부분 양쪽에 서 있는데, 이 탑에서는 다리의 모습이 훤히 보이며 강 건너 프라하의 명물인 여러 개의 첨탑들을 감상할 수 있다.

17세기 중반, 이 다리는 고딕 양식의 돌로 된 건널목에서 오늘날 볼 수 있는 모습처럼 조각상이 늘어선 수수께끼 같은 매력을 지닌 대로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 1683년에 세워진 얀 네포무츠키의 바로크 동상은 이 나라의 수호성인을 나타낸 엄숙한 조각상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기둥 사이에는 십자가 하나가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성인인 얀이 1393년 보헤미아의 왕 벤체슬라우스(바클라프 4세)의 명령에 따라 블타바 강에 던져져 순교당한 장소를 표시한다고 한다.

결국에는 모든 기둥에 총 서른 개의 동상이 자리 잡게 되었는데 대부분 바로크 양식이다. 20세기에 들어 프라하에서는 홍수로 손상을 입은 바로크 동상들을 현대적인 석조 복제품으로 점차 바꿔 나갔다. 원래의 조각상은 현재 국립 박물관에 있다. 다리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 교량 위 모든 교통이 통제되었다.

여섯 세기 하고도 반세기 동안 서 있으면서 여러 차례 홍수로 피해를 입었지만, 이 다리는 1741년까지 블타바 강을 건너는 유일한 건널목이었으며, 중세의 도시 프라하를 찾는 많은 이에게 중심적인 장소로 남아 있다. 아마 이 다리는 어둠이 깔리고 거리의 조명이 다리를 비춰 동상이 그림자로 보일 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구시가 교탑(Staroměstská mostecká věž)

구도시에서 카를 교로 들어가는 대문으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탑으로 꼽힌다. 1380년 이전에 완공한 것으로 추정되며 다양한 석상으로 장식돼 있다. 카를 4세 통치하의 체코에 속한 지역의 문장, 성 비투스, 카를 4세, 바츠라프 4세,  보이티예흐와 성 지크문드 석상 등이 있다. 교탑에 오르면 구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어 인기가 높다.

해질녘 교탑에서 내려다본 풍경

꼴레뇨(Koleno)

체코어로 무릎이라는 뜻을 가진 꼴레뇨는 돼지 무릎 아래 정강이 부분을 구운 요리로, 다양한 소스에 찍어 양배추 절임과 함께 먹는 요리이다. 우리나라의 족발, 독일의 슈바인 학세와 비슷하며,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에 누구나 거부감 없이 즐기는 음식이다. 체코 어디서나 쉽게 맛볼 수 있다. 맥주와 환상 궁합을 자랑한다.

페트린 타워(Petřínská rozhledna)

프라하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로 1891년 유빌레움 전시회 (Jubilejní výstava) 의 일환으로 파리의 에펠탑을 모방하여 1/5 크기로 건축됐다. 전망대의 높이는 63.5m로 실제 에펠탑 전망대의 높이와 일치하며 299개의 계단이 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프라하뿐만 아니라 체코 전역까지 볼 수 있다.

페트린 타워에서 내려다본 전망

슈트라호프 수도원(Strahovský klášter)

슈트라호프 광장 남쪽에 위치한다. 플라디슬라프 2세 때인 1140년에 건립되었으나 1420년 후스전쟁 때 화재 등으로 인해 소실되거나 파괴되어 본래의 모습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의 건물은 17~18세기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된 복합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1783년 요제프2세 시절 수도원 해체령이 내렸을 때는 학자들의 연구기관으로 지정되어 해를 면하였고, 이후 수도승들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951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폐쇄되었다가, 1953년 체코 국립문학박물관으로 바뀌었고, 1989년 사회주의 정권이 물러나면서 다시 수도원 기능을 회복하였다.

현재는 문학박물관이자 수도원으로서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수도원 내에는 125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초기 고딕 양식으로 재건된 뒤, 17세기에 다시 바로크 양식이 가미된 성모마리아승천교회와 바로크 양식의 강당이 있다. 문학박물관에는 총 14만 권에 달하는 장서가 있는데, 종류에 따라 ‘철학의 방’, ‘신학의 방’ 등 2개의 고전 도서관과 고전주의 이후의 도서를 모아 놓은 근대 도서관으로 구분해 놓았다.

수도원에는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조성한 성모 마리아 승천교회(Opatský Kostel Nanebevzetí Panny Marie)가 있는데 내부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교회 입구 벽면 현판에는 이곳에서 1787년 모차르트가 연주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교회 내부에는 모차르트가 연주했다는 바로크풍 오르간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 승천교회

로레타 성당(Loreta)

이탈리아 로레타의 산타 카사와 같은 로레타 성당이다.

프라하에서는 독일의 루터보다도 100년 앞서 얀후스라는 신부에 의해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는 종교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카톨릭교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이들이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들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얀후스가 화형으로 순교한 후 그 정신을 본받은 신교도들이 스웨덴 지원군의 협력으로 프라하 근교의 백산 에서 구교도들과 마지막 일전을 벌였으나 불운하게도 이곳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 로레타 성당은 구교도들의 희생을 애도하고 카톨릭의 승리를 기리는 뜻에서 세워진, 피에 의해 지어진 사연이 깊은 성당이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담은 외벽의 부조

전쟁이 끝난 후 체코 전역에는 이와 똑같은 성당이 60개나 지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제는 신교도들이 다 죽었으므로 지금부터 체코는 구교의 국가다’라는 의미를 모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후에 중북부 유럽에서는 나중에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꾸준히 지지를 받은 신교도들과 구교도들 사이의 골 깊은 갈등이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켜 무려 100년 동안이나 피비린내로 얼룩지게 된다.

프라하의 로레타 성당은 1621~1631년 사이에 세워져 40년 후에 회랑으로 둘러 싸이고 1740년 이후 확장됐다. 18세기 초 성당 앞부분의 정문과 나로제니(Narození) 사원이 세워졌다.

로레타의 종

1865년 탑의 윗부분에 설치된 종들은 체르닌 궁전 앞의 테라스에서 제일 잘 보인다. 종들은 프라하 성의 시계공이 1694년 말 만든 것으로 2.5옥타브의 음역을 가진 1400kg의 종 27개가 있다. 처음 종이 울린 것은 1695년 8월 15일이었다.

파이프오르간

중앙 제단

로레타의 중앙 제단은 1721~1723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며, 은으로 된 제단에는 1775년대의 흑단나무로 된 성모 마리아상이 서있다. 성모 마리아의 인생을 형상화한 그림으로 장식된 산타 카사의 벽은 원래의 손상된 예배당에서 신성 모독자를 벌 주기위해 섬광을 떨어뜨리는 부분을 모조했다. 산타 카사의 아래는 로레타의 설립자이자 후원자인 로브코비치(Lobkovic) 가문 사람들의 무덤이다.

안뜰의 분수

건물 양쪽에 두 개의 바로크식 분수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과 예수님의 부활을 나타낸 것들로 1739~40년에 제작됐다. 산타 카사 주변의 회랑 들은 1664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1740년 완공된 것이다. 또 목재로 된 훌륭한 오르간의 그림은 18세기 초반의 것이다.

거룩한 성인 조각상

남서쪽 회랑에에 있는 고통 받는 성모 마리아 예배당에는 방문객들이 줄을 잇는다. 로코코 양식의 가운데 제단은 14세기 말~15세기 초의 고통 받는 성모 마리아의 귀중한 조각상이 아름답게 서있다. 그 옆 제 단에는 거룩한 성인(Svatá Starosta)이라 불리는 십자가에 박힌 성인의 조각상이 있다.

성물 전시실

회랑 위 1층에는 16세기~18세기의 예배식용 소품들이 포함된 유명한 성물 전시실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1510년경의 화려한 그림이 있는 고딕양식의 성배이고, 가장 유명한 전시물은 1969~99년에 만들어진 6222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성채 안치기이다. 본래 백작부인의 의복을 장식하던 다이아몬드라고 하며, 12kg의 무게가 나가는 그 옷에는 머리 위에 빛이 비추는 성모 마리아가 서있다.

슈바르첸베스키 궁전(Schwarzenberský palác)

흐라드찬스케 광장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건물 중 하나이다. 날개관의 역할을 하는 건물들은 16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이며, 실내에는 15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르네상스 벽화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18세기 바로크 양식을 띠며 19세기 후반에 보수 공사를 거쳤다. 현재 프라하 국립 미술관의 분관인 궁전미술관(Národní galerie v Praze – Šternberský palác)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미술작품들과 꼭대기 층의 무기 전시관이 인기 있다.

프라하 성(Pražský hrad)

9세기 말경 보리보이 공에 의해 세워졌으며, 진흙과 돌로 된 단순한 성벽으로 해자에 둘러싸여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여러 차례 증축되어 프라하 성은 유럽에서 가장 큰 중세의 성채 단지가 된다. 이 성은 보헤미아 왕국,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체코 공화국의 정부 소재지가 되었다.

성 내부에는 성 비투스 대성당과 수녀원 이외에도,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200년 후 카를 4세의 주도 하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된 왕궁의 유적이 있다. 15세기에 후스파 전쟁으로 인한 혼란이 지나간 후 1485년 블라디슬라프 2세는 대규모 재건축 작업을 시작했다. 보헤미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합병된 이후 성은 또 다시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특히 루돌프 2세 때는 그가 16세기 말 이 성을 주요 거처로 삼으면서 많은 부분이 개조되었다.

성은 르네상스 풍으로 재건축되었고, ‘왕실 정원’, ‘스페인 홀’, 사격장, 공놀이 경기장 등 여러 부분이 새로이 증축되었다. 30년 전쟁(1618~1648) 동안 입은 약탈의 피해로 프라하가 누리던 번영은 쇠퇴했으며 18세기 동안에도 곳곳에서 재건축 작업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프라하는 빈이 누리는 제국다운 호화로움을 따라가려 애쓰는 지방 도시가 되었을 뿐이었다.

20세기에 프라하의 성은 체코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실제적인 표상으로 새로이 주목받게 되었는데, 특히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설립된 이후에 그랬다. 1989년의 '벨벳 혁명' 이후 프라하 성은 개조 작업을 거쳐 현재는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다. 성 안에는 여러 개의 박물관이 있는데, 이 중에는 루돌프 2세가 수집한 체코와 유럽 예술품 컬렉션도 있다.

성 비투스 대성당(Katedrála Sv. Víta)

프라하성 중앙에 있다. 보헤미아의 군주들이 대관식을 올리고 사후 매장되어 온 장소인 성 비투스 대성당은 프라하에서 가장 큰 교회일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성당이기도 하다. 성 비투스 성당의 기원은 925년, 벤체슬라우스 1세(바츨라프) 공작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받은 성물인 성 비투스의 팔을 보관하기 위해 교회를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1344년 카를 4세 때 착공하여 1929년에야 완공되었다. 최초의 설계자는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 마티아스(Matthias of Arras)였다. 그가 1352년 숨을 거두자 당시 23세의 페터 파를러(Peter Parler)가 뒤를 이었고, 이후 파를러의 아들과 또 다른 건축가들이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갔다. 공사는 후스(Jan Hus)의 종교개혁 때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었다. 16세기 중엽 르네상스식 첨탑이 완공되고, 17세기에 양파 모양의 바로크식 지붕이 모습을 드러냈다. 1753∼1775년 사이에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신고딕 양식의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다.

1060년 한 차례 증축되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당당한 고딕 양식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344년에 접어들어서였다. 건물은 아라스의 마티아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프랑스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었는데, 1352년 그가 사망한 후에는 독일 건축가 페테르 파를러와 역시 건축가였던 그의 가족들이 감독을 맡은 가운데 작업이 계속되었다. 파를러는 대단히 창의적인 건축가였으며, 성 비투스 성당의 둥근 천장은 고딕 건축의 걸작이다.

1863년의 성 비투스 대성당

마티아스와 파를러 가족의 노력에도 성당은 완공되려면 먼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으로 몇 군데 증축되기는 했어도 이 성당은 19세기까지 미완성 상태였다. 1844년, ‘성 비투스 대성당 완공을 위한 조합’이 탄생해 성당을 고딕 양식으로 완성시키고 고딕 양식이 아닌 장식부를 제거해 버린다는 목적을 세웠다. 진행 과정은 더뎠으며, 성당은 1929년, 건축이 시작된 지 거의 600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었다.

성 바츨라프 예배당

 

성 바츨라프 예배당은 특별히 흥미를 끄는 부분인데, 이곳에는 보헤미아에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순교당한 성 바츨라프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다. 이 예배당은 준보석으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 바츨라프의 일생을 나타낸 장면이 있다. 이밖에도 총 22개의 작은 예배당이 있다. 예배당의 벽면은 보석과 도금으로 장식되었고, 여러 성인들과 성서 속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장미창과 스테인드글라스

성당의 규모는 길이 124m, 폭 60m, 천장 높이 33m, 첨탑 높이 100m에 이른다. 정문 바로 위를 장식한 지름 10.5m의 장미창이 인상적이다. 성당 안쪽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기법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가 제작한 아르누보 양식의 작품이다.

구 왕궁(Starý královský palác)

현재 일부 방만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는 구왕궁은 9세기 정도부터 왕자와 공주들의 거처로 사용하던 곳이다. 체코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는 곳이며 대통령궁 바로 옆 건물이기도 하다.

구왕궁에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넓은 홀은 블리디슬라프 홀이라 불리는데 후기 고딕양식의 아치형 천장으로 유명하다. 당시에는 성당들을 제외하고는 기둥이 없는 방으로는 가장 큰 것이었고 한다. ​다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오른쪽 방은 1618년 종교 탄압에 항의하던 개신교 귀족들이 국왕의 섭정을 20m 아래 성의 창밖으로 집어던져 30년 전쟁이 촉발된 ‘프라하 제2 차 창외 투척 사건’이 발생한 방이다.

홀을 지나 안쪽에는 17세기 가구와 장식품을 복원한 의회의 방, 토지문서 보관실 등이 있다. 하이라이트는 왕실 예배당을 지나면 나오는 왕실 테라스로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프라하 구시가지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

블리디슬라프 홀

성 이르지 성당(Bazilika svatého Jiří)

920년 출발한 성당으로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목조건물로 세워졌는데, 1142년 대화재가 난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다시 건축했다. 바로크 스타일의 붉은 색 정문은 17세기에 완공됐다. 서로마를 중심으로 해서 서유럽에서 발달한 교회건축 양식이 바로 로마네스크식이고, 반면 동로마를 중심으로 발달한 교회건축 양식은 비잔틴식이다. 로마네스크식은 바실리카식 평면에 목조지붕 대신 석조 반원통 볼트를 덮은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 바실리카는 교회건축 형식의 기조를 이룬 건물 구조로 로마네스크와 고딕식 성당 건축에 영향을 미쳤다.

성당 안에는 체코의 수호성인인 성 바츨라프의 할머니, 성 루드밀라(Ludmila, 860-921)의 성체가 석관이 안치돼 있다. 성 루드밀라는 보헤미아 최초의 성녀로 이교도였던 며느리 드라호미라(Drahomira, 877-935)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며느리는 그녀가 성 바츨라프에까지 종교적·정치적 영향을 끼치는 것을 두려워해 921년 살해했다고 한다.

성 루드밀라의 성체(왼쪽)와 그녀를 살해한 며느리 드라호미라(오른쪽, 하늘색 옷을 입은 사람)

건물 윗부분에는 용을 창으로 무찌르는 성 이르지의 부조를 볼 수 있고 그 뒤로 두개의 첨탑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첨탑중 오른쪽의 첨탑은 '아담', 왼쪽의 조금 작은 첨탑은 '이브'라고 부른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탑을 아담과 이브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바실리카답게 실내 분위기는 화려하지 않으나 경건한 느낌을 준다. 복원을 거치지 않은 내부 벽화를 볼 수 있다. 음향 효과가 뛰어나 연주회장으로도 쓰이는 곳이다.

성이르지 바실리카를 정면으로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로젠베르크 궁전이다. 이 궁전은 1753년 합스부르크 공국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재위했을 당시 합스부르크 가에서 결혼하지 않은 가난한 귀족 여성들이 지내는 주거지로 사용됐다.

성 이르지의 부조

황금소로(Zlata ulicka)

황금 소로의 모습. 왼쪽의 하늘색 집이 카프카가 살았던 22번지이다.

프라하의 대표적인 관광명소 중 하나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물들이 늘어선 프라하 성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성 이르지 교회와 로젠베르크 궁전을 지나 동문 쪽으로 가다 우 달리보르키(u Daliborky) 거리를 왼쪽으로 들어서면 색색의 집이 늘어선 골목이 나오는데, 이 골목이 바로 ‘황금 소로’다.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올 법한 아기자기하고 예쁜 집이 나란히 서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다.

카프카

원래 황금 소로의 집들은 16세기 성에서 일하는 시종이나 집사, 보초병이 살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런데 루돌프 2세가 고용한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면서 불로장생하는 비약을 만들 궁리를 했다고 해서 ‘황금 소로’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금박 세공사들이 살아서 황금 소로라고 불렀다는 말도 있다. 성벽과 거리 반대쪽에도 집들이 지어졌으나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한쪽이 철거되었다. 지금은 성벽 쪽에만 15채 정도 보존돼 있는데 대부분 기념품점으로 탈바꿈했다. 거리 중간쯤에는 한때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작업실이던 22번지의 푸른색 집이 있다. 이 집에서 카프카가 프라하 성을 배경으로 한 소설 <성(城,, Das Schloss)>을 집필해, 특히 관광객에게 인기다. 현재는 카프카 관련 서적과 엽서 등을 파는 서점이 되었다.

13~16번지의 집들은 전시장인데 각각 당시의 주방, 응접실, 침실, 작업실 등이 재현되어 있어 과거 프라하 사람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전시되고 있는 집 내부

달리보르 탑(Daliborka)

1498년부터 1781년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첫 수감자였던 달리보르의 이름을 따서 달리보르 탑이라고 부른다.

후스 전쟁 이후 신교와 구교로 양분되면서 신교 지지파였던 달리보르 기사는 1498년 영주의 폭정 피해 탈출한 농노들과 봉기를 일으켰다가 최초로 이 탑에 갇혀 처형당했다. 이곳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밤마다 바이올린을 연주했는데 그 아름다운 연주에 많은 이들이 탑 주위로 몰려들고 창문을 통해 음식을 전해주곤 했다고 하며, 이 이야기를 딴 오페라가 있을 만큼 유명하다.

현재까지 육중한 아치로 구성된 감방들, 죄인들을 지하감옥으로 내려보내기 위해 도르래를 설치했던 동그란 구멍이 있는 바닥이 보존돼 있다. 이 탑의 지하감옥은 단순히 수감 목적이 아니라 죄수를 굶어죽이기 위해 존재했다고 한다.

프라하 성의 보물 이야기 : 카를 4세의 왕관

1347년 1월 어느 날, 카를4세는 궁에 모인 신하들에게 지엄한 목소리로 왕관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카를4세는 보헤미아를 전성기로 이끌었지만 사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비용을 아끼지 말고 금은보화가 치렁치렁 매달린 왕관을 만들라고 하니 신하들은 물론 국민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최고의 번영을 누리는 보헤미아의 경제력이 국왕 대관식에 사용할 왕관 하나 못 만들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국민들은 국왕이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대관식을 한 달 앞둔 8월 어느 날 카를4세에게 왕관 완성품을 올렸다. 왕관은 황금을 기본 재료로 하고 첨정석 44개, 에메랄드 30개, 사파이어 19개, 진주 20개, 루비 1개 등을 장식했다. 무게는 2. 475㎏이었다. 왕관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달려 있었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질 때 머리에 썼던 가시나무에서 달린 가시를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앞뒤와 좌우 네 방향에는 백합문장을 수놓았다.

왕관과 함께 왕이 권위의 상징으로 짚는 지팡이인 홀, 십자가가 달린 구슬 모양 장식인 보주도 제작했다. 홀은 18K 금을 기본으로 삼아 사파이어 4개, 첨정석 5개, 진주 62개를 붙여 만들었다. 보주도 18K 금을 기본으로 해서 사파이어 8개, 첨정석 6개, 진주 31개를 장식했다. 보주에는 구약성서와 창세기에 나오는 장면을 부조로 새겨놓았다.  

카를 교 앞에 있는 카를 4세 동상

카를4세는 왕관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이 왕관에 ‘성 바츨라프 왕관’이라는 이름을 붙이겠다고 하고, 보헤미아 땅에 주님의 축복을 선물하려다 어리석은 신하들과 동생의 배신으로 암살당한 보헤미아의 수호성인 성 바츨라프에게 이 왕관을 바치겠다고 말한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왕관은 프라하 성으로 옮겨졌다.

카를4세가 왕관을 바쳤던 성 바츨라프는 프례미실 왕가의 왕자였로, 기독교로 개종한 할머니의 뒤를 따라 기독교를 믿게 됐다. 성 바츨라프는 아버지 브라티슬라프 1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게 돼 있었지만 그가 13세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대신해 섭정으로 국가를 다스리게 됐는데 며느리, 즉 바츨라프의 어머니는 기독교를 신봉하지 않았다. 앙심을 품은 어머니는 시어머니가 손자 뒤에 숨어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못마땅했고, 체코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는 시어머니를 암살했다.

이후 바츨라프는 18세 때 어머니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았다. 그는 할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대해 귀족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이들은 그의 동생 볼레슬라프를 꼬드겨 형을 암살하게 했다. 바츨라프의 나이 29세 때였다. 그는 기독교 전파를 위해 애쓰다 피살된 점을 인정받아 교황청으로부터 순교자 칭호를 얻었고, 나중에는 성인 반열에 올랐다. 그는 지금 체코의 수호성인이다.

바츨라프의 순교를 그린 그림

프라하 성에는 카를4세가 만든 성 바츨라프 왕관 등 보물들이 보관돼 있다. 체코 국민들은 이 보물들을 ‘보헤미아의 보물’이라고 부른다. 성 바츨라프 왕관과 보주, 홀에 더해 대관식 옷, 황금 성유물함 십자가, 성 바츨라프의 칼등이다. 보물들은 프라하성 안에 있는 비투스대성당의 성 바츨라프 예배당 내 비밀의 방에 보관돼 있어 공개되지 않는다.

‘비밀의 방’이 어디인지 비투스 대성당 일부 관계자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방 문에는 열쇠 구멍이 7개 있다는 사실만은 알려져 있다. 문을 여는 데 필요한 열쇠도 7개다. 열쇠는 체코의 주요 인사인 대통령, 국무총리, 상원 의장, 하원 의장, 프라하 대주교, 비투스 대성당 원장, 프라하 시장이 각각 하나씩 나눠 갖고 있는데 7개 중 하나라도 없으면 '비밀의 방'의 문을 열 수 없다.

보물 진품은 평소에는 볼 수 없으며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도 따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 블라디슬라브 홀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진품은 수년마다 한 번씩 며칠 동안만 전시되기도 하는데, 전시 행사 기간 중에는 보물들을 보기 위해 수많은 체코 국민들과 관광객들이 몰리기 때문에 최소한 3시간 이상 줄을 서야 한다. 보물 개방 행사 개최 여부와 개최 시기는 오직 체코 대통령이 결정할 수 있으며 2000년 이후에는 2003년, 2008년, 2013년, 2016년, 2018년까지 다섯 번 열렸다.

체코 국민들은 성 바츨라프 왕관에는 성 바츨라프의 저주가 걸려 있다고 믿는다. 왕관을 쓸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억지로 왕관을 쓸 경우 1년 이내에 죽는다는 것이다. 보헤미아 왕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지만, 저주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블라디슬라브 홀 내부

카이저슈타인스키 궁전(Kaiserštejnský palác)

1714년 완공된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전부터 있던 르네상스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것이다. 작은 안뜰을 형성하는 좁은 측면 날개로 연결된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에 르네상스 양식의 채광 천장이 남아 있다.

최초의 주인이었던 카이저슈타인은 군대 지휘관이었는데, 이후 소유주가 몇 차례 바뀌었다. 1940년대에는 제코 저축은행에 넘어가면서 후기 고전주의 양식으로 일부가 개조됐으며, 1977년 대규모 재건축을 통해 다시 바로크 양식으로 돌아갔다. 1964년 국가기념물로 지정됐다. 현재는 사설 사교장 용도의 다목적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존 레논 벽(Lennonova zeď)

1980년 12월 8일 영국 그룹 비틀즈의 존 레논이 암살당하자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였고 체코 젊은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대사관 반대 편에 길게 늘어진 이 담벼락에 누군가 존 레논의 얼굴과 대표곡인 <이매진(Imagine)>의 가사를 적어 넣으면서 존 레넌의 벽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체코는 공산주의 체제였고 서구 팝 음악 대부분이 금지곡으로 지정 되어 있었으며, 서구 음악을 연주하거나 들으면 투옥되는 일도 많았다. 때문에 존 레논 벽은 이후 프라하 청년들에게 평화의 상징이자 정치적 구심점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 존 레넌의 형상은 눈 부분을 제외하곤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이 벽을 찾아 새롭게 그의 얼굴과 평화의 메시지를 그려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벽의 소유주인 기사단에서도 더 이상 벽의 낙서들을 페인트로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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