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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동유럽 여행 URL 복사

[크로아티아] 자그레브(Zagreb), 플리트비체(Plitvička)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22. 1. 2. by 솜글

자그레브(Zagreb)

크로아티아의 수도이다. 수도권은 자그레브 시를 포함하여 별도의 자그레브 자치주를 포함하고 있고, 2011년 기준 수도권의 총인구는 약 110만 명 정도이다. 이 지역은 크로아티아에서 유일하게 100만명 이상의 인구를 보유한 도시권이다.

구시가지는1세기 로마인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됐다. ‘자그레브’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1094년에 로마 가톨릭 주교구가 되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1241~1242년 몽골 침략 이후 자그레브는 왕의 보호를 받는 요새 도시로서 성장하기 시작한다.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 중부유럽은 오랫동안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는데, 19세기 이후 자그레브는 크로아티아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편입되면서 자그레브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정치경제의 중심지가 된다. 1991년에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선언 후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발생한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에서는 전쟁의 중심지였고, 유고슬라비아 공군으로부터 로켓포로 인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독립 이후에는 중부 유럽의 중심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며 중부유럽과 지중해, 그리고 발칸반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크로아티아뿐만 아니라 중부유럽을 기반으로 하는 대기업들의 본사가 이 도시에 자리하고 있으며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다.

1992년 1월 UN 가입을 축하하는 자그레브 시민들

KRAVATA(넥타이의 기원)

현대 남성 정장에 빼 놓을 수 없는 액세서리인 넥타이는 크로아티아 병사의 타이에서 유래됐다.

루이 14세 당시 프랑스 군대에 소집된 크로아티아 기마병들은 빨간색 타이를 목에 둘렀다. 여기에는 무사귀환을 바라는 크로아티아 아내와 가족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었다.

이를 본 루이14세가 ‘저게 뭐냐’고 묻자 시종장이 저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는 줄 알고 크로아티아 병사라는 뜻의 ‘크라바트(Cravate)’ 라고 대답했다. 이후로 넥타이는 ‘크라바트’로 불리게 됐다.

도니 그라드에서 고르니 그라드에 오르는 길목에서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넥타이 가게를 만날 수 있는데, 이 가게가 바로 KRAVATA이다.

스톤 게이트(Kamenita vrata)

13세기에 건설된 문으로 언덕으로 된 올드 그라데츠(Gradec) 지역을 감싼 4개의 문 중 북쪽을 지키는 문이다. 성모마리아 그림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현재 건축물은 1760년에 다시 건축한 것이다.

원래 성문에는 많은 나무 장식이 되어 있었으나 1731년의 대화재로 모든 것이 불타버렸는데, 성모마리아 그림만이 전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로 인해 기적적인 힘을 지닌 그림으로 추앙받기 시작했고 성지순례지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성모마리아 그림이 발견된 곳은 이곳 재 한가운데였으며 액자만 탔을 뿐 그림은 전혀 타지 않았다. 이후 스톤게이트의 깊이 들어간 부분에 바로크 양식의 제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성모마리아 그림을 모셔놓았다.

성모마리아 그림

1778년에는 정교한 바로크 양식의 철문을 만들어 제단 주위를 감쌌다. 그림에 있는 금으로 된 왕관은 1931년에 새로 덧붙여 그려넣은 것이다. 성모마리아는 자그레브의 수호성인으로, 그녀의 축일인 5월 31일은 자그레브 시의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스톤 게이트 내부의 제단

도라 크루피츠 동상(Dora Krupic)

이보 크레르디치(Ivo Kerdić)가 만든 동상으로 1929년에 이곳에 설치되었다.

도라 크루피츠는 아우구스트 셰노아(August Šenoa)의 소설, <세공사의 금>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1871년에 출판된 이 책은 크로아티아에서 처음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소설이다. 16세기, 상류층의 한 남자와 세공사의 딸이지만 착하고 아름다운 도라의 사랑 이야기로, 도라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이발사가 그녀를 독살하면서 비극으로 끝난다.

케트리차 테렘푸흐 동상(Petrica Kerempuh)

꽃을 파는 가판대가 가득한 작은 광장 한 켠에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는 페트리차 케렘푸흐의 동상은 조각가 반야 라다우슈(Vanja Radauš)의 작품이다. 크로아티아 문학에서 가장 사랑 받고 있는 페트리차 케렘푸흐는 평민 출신의 선구자이면서도, 당대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 심술궂고 냉소적인 평가를 내놓기도 하는 현대의 스탠드업 코미디언과 비슷한 인물이었다. 이런 그의 성격은 20세기 크로아티아의 대표적인 작가 미로슬라브 크를레차가 지은 <페트리차 케렘푸흐의 발라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땅 위의 태양계(Grounded solar system)

자그레브 시내 곳곳에는 태양계의 각 별을 묘사한 조형물이 있다. 이들을 하나씩 찾아보는 것도 자그레브 여행에서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다. 최초의 조형물인 태양은 이반 코바리치(Ivan Kozaric)가 1971년 크로아티아 국립극장 앞에 조성한 것이며, 이어 화성, 수성, 지구, 명왕성 등이 설치됐다. 각 조형물 크기는 실제 행성들의 크기와 비례하고, 각 별들 사이의 거리는 실제 행성들 간 거리와 비례한다고 한다. 가령 목성은 지름이 28cm이며 제일 작은 명왕성(공식적으로는 2006년부터 행성이 아니지만) 겨우 3mm이다. 또 태양과 지구까지의 거리는 75m이고 가장 먼 명왕성까지의 거리는 7.658km라고 한다.

 

각각의 주소와 위치는 다음에 올려 두었다.

태양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총독 궁(Banski dvori)

반스키 드보리는 성 마르카 광장 서쪽에 있는 건물로 19세기 전반기에 건설한 2층의 바로크 양식 궁전이다.

군사력을 장악하며 크로아티아를 다스리던 총독을 과거에는 반(Ban)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후일 크로아티아 정부의 수뇌가 되었다. 이 총독궁은 반이 살았던 관저이다. 바로크 양식의 2층 건물로 19세기 초반 이그나즈 기유라이(Ignaz Gyulai)가 설계했다.

미사일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대통령궁

내전이 한창이던 1991년 10월 7일에는 유고 공군이 당시 크로아티아의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Franjo Tuđman)을 암살할 목적으로 이 건물에 미사일 공격을 했으나 다행히 대통령은 목숨을 구했다. 크로아티아 의회는 공격이 있던 다음날 독립을 선언했으며, 현재에도10월 7일은 크로아티아 독립기념일로 지켜지고 있다.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1992년부터 거주지를 대통령궁으로 옮겼다.

성 마르카 교회(Crkva sv. Marka)

빨강, 파랑, 흰색의 체크무늬 바탕의 예쁜 지붕이 유명한 성당으로 후기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된 빼어난 외관을 자랑한다. 자그레브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지붕의 왼쪽에는 크로아티아 문장이, 오른쪽엔 자그레브 문장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는 네 개의 거대한 기둥으로 나뉘어 있으며 서쪽과 남쪽 문으로 드나들 수 있는데 남쪽 문에는 14세기에 만들어진 목각 조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본래 14세기 그라데치카(Gradečka) 교구 교회의 강당 건물로 쓰기 위해 지어진 것인데 이 교구는 1261년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내부는 20세기 전반에 두 차례 개조됐다.

남쪽 출입문의 14세기 목각 장식

마티야 구베츠 조각(Matija Gubec)

성 마르카 교회의 정면으로는 치릴로메토드스카 거리와 로트르슈차크 탑이 보이는데, 여기서 왼쪽 건물의 코너(빨강 동그라미 부분)에서 마티야 구베츠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홍경래가 있다면 크로아티아에는 마티야 구베츠가 있다. 마티야 구베츠는 크로아티아 소작농들이 일으킨 농민봉기의 지도자로, 1573년 농민군을 일으켜 수탈을 일삼는 귀족 영주의 횡포에 맞선 인물이다. 그러나 농민군이 패배하는 바람에 구베치는 재판을 위해 자그레브로 압송되었고, 같은 해 2월 15일 세인트 마르크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농민의 왕’ 으로 칭송 받았던 그는 처형 당시 머리에 뜨겁게 달굴 둥근 쇠를 쓰고 사지가 찢겨져 죽었다고 한다. 그의 반란은 후대 크로아티아 문학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했고 나아가 크로아티아가 독립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시의회(구시청)(Skupština grada Zagreba)

자그레브 시의회가 사용하는 건물이다. 자그레브 자치시의 법률을 제정하고 행정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치릴로메토드스카 거리(Ćirilometodska)

성 마르카 광장 남쪽의 치릴로메토드스카 거리에는 한때 이 지역 귀족들이 살았던 바로크 양식의 저택들이 저마다의 모습을 뽐내고 있다. 거리의 이름은 9세기에 글라골 문자(Glagoljica)를 처음 고안한 슬라브의 사도 치릴(Ćiril, 성 키릴로스)과 메토드(Metod, 성 메토디오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거리의 중간에 있는 그리스 카톨릭 성당에도 이 두 사도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 성당은 19세기, 건축가 헤르만 볼에 의해 지금의 형태를 완성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클로비체비 드보리 갤러리(Galerija Klovićevi dvori)

예수회 광장(Jezuitski trg)의 구 예수회 수도원 건물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회 광장은 한 크로아티아 귀족의 초대로 크로아티아에 오게 된 예수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세인트 카타리나 성당 옆에 위치한 이 수도원 건물은 17~18세기 동안 여러 단계에 거쳐 완공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유명한 세밀화 화가 율리예 클로비치(Julije Klović, 1498~1578)의 이름을 얻은 이 갤러리에서는 큰 규모의 국내외 예술가들의 전시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갤러리의 광장 맞은 편에는 1911년에 세워진 어퍼타운의 첫 분수대를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시몬 로크산이치(Simeon Roksandić)의 어부의 조각상이 있다.

어부 조각상

성 카타리나 성당(Sveta Katarina Aleksandrijska)

자그레브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성당 중 하나이다. 이 성당은 17세기 초반 예수회에 의해서 지어졌는데, 한 개의 통로와 6개의 예배실, 그리고 로마의 예수회 성당의 ‘일 제수(Il Gesu)’를 모델로 만든 벽화가 그려진 성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배실은 1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5개의 바로크 양식의 제단과 1729년에 만들어진 한 개의 대리석 제단으로 되어 있으며, 성당의 외벽은 1880년 대지진 이후 헤르만 볼에 의해 재건축 되었다. 전면 외관에는 교회의 수호 성인인 성 카타리나와 네 명의 복음 전도자의 동상이 있다.

왼쪽부터 성 카타리나(건물 전면 상단에 있음), 성 누가, 성 마태, 성 마가, 성 요한

로트르슈차크 탑(Kula Lotrščak)

13세기에 건축되어 중세시대에 도시를 방어하던 탑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외형은 사면으로 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서로 모양이 다른 돌과 벽돌을 혼합해서 만들었고 성벽의 두께는 1.95m이다. 탑에 있는 종은 매일 저녁 도시로 진입하는 문을 닫기 전에 울렸는데, 종(Bell)이 없어졌기 때문에 라틴어로 ‘도둑들의 종’(campana latrunculorum)이라는 뜻의 ‘로트르슈차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19세기에 4층으로 증축되었고 창문도 덧대었으며 맨 위에 대포(Grič cannon)를 들여놓아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일 정오에 종 대신 대포를 발사한다. 이러한 대포 발사는 자그레브의 역사적 전통을 알리는 조그만 행사이면서 사람들에게 기준시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에는 전시관으로 사용되며 근처에는 선물가게와 갤러리들이 있다. 높은 전망대에서는 자그레브가 한눈에 바라다보인다.

탑의 대포(왼쪽)와 대포를 발사한 모습(오른쪽)

로트르슈차크 탑 대포에는 전설이 전한다. 과거 투르크 족이 자그레브를 침공하기 위해 몰래 사바(Sava) 강을 건널 때 타워에서 우연히 대포가 한 발 발사됐는데 우연히 수탉이 대포에 맞았다고 한다. 닭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본 투르크족들이 대포의 정확성에 깜짝 놀라 자그레브 침략을 포기한 채 도망갔다고 한다.

실연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

크로아티아의 한 커플이 헤어지고 난 후 사랑하던 시간을 상기시키는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만든 박물관이다. 문화기획자이자 예술가인 이 커플은 자신들의 관계가 끝났지만 주고받고 공유했던 물건들을 버리기가 아까워 2006년에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깨어진 관계를 정리하고픈 사람들이 기증한 물건들을 모아 차곡차곡 ‘실연 박물관’을 키워갔다. 한때 사랑의 증표였던 물건이 연인과 사랑에 얽힌 소소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 기념물이 된 것이다. 일상적인 물건을 통해 인간의 사랑을 기리는 이 박물관은 유럽에서 독창적 아이디어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전시장은 ‘실연 박물관’의 처음 동기가 되었던 연인의 실연에서 시작해서 가족, 어릴 적 꿈 등 한 때 소중했던 사람과 취미를 떠나보내야 했던 사연으로 확대된다. 익명으로 처리돼 누구의 사연인지 알 수 없으나 곰인형, 자동차, 만화책, 모자, 옷, 그림, 카메라 등 평범해 보이는 물건들이 저마다 ‘나’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우스피나차 푸니쿨라(Zet Uspinjača)

66m 길이의 케이블카로 어퍼타운과 로어타운을 이어준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철로이다. 위아래 정거장의 높이 차가 30.5미터로 운행시간은 겨우 55초 남짓이다. 28명의 성인을 한 번에 태울 수 있는 케이블카는 매 10분마다 운행하고 있다. 1890년 대중에처음 공개되었을 때에는 증기로 운행되었는데, 말이 끄는 트램보다 한 해 앞서 설치된 자그레브 최초의 대중교통수단이다.

반 옐라치치 광장(Trg bana Jelačića)

사회주의 시절 공화국광장이라고 불렸으나,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한 후 반 옐라치치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광장에는 업무지구, 카페, 상가가 밀집해있으며 트램으로 자그레브 전 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시민들의 왕래가 가장 많은 만남의 장소이자 야외 공연장이며 축제의 장소이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준우승하고 돌아온 축구 국가대표팀의 환영행사가 열린 반 옐라치치 광장

광장 양 옆으로 길게 뻗은 4km의 일리차(Ilica) 거리는 자그레브에서 가장 긴 거리로 다양한 상점이 늘어서 있는 쇼핑 거리로도 유명하다. 일리차 거리를 기준으로 북쪽은 중세 유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고르니 그라드(Gornji grad, upper town)와 중세 유적과 신식 건물들이 한데 어우러진 도니 그라드(Donji grad, lower town)로 구분된다.

광장 한편에는 만두셰바츠(Manduševac) 분수가 있으며, 광장 중앙에는 오스트로-헝가리 점령 당시 총독을 맡았던 반 요십 옐라치치(Ban Josip Jelačić) 백작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때 공산주의자들이 광장의 이름을 없애고 옐라치치 동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등 왕정 시대의 잔재를 없애려고 노력하였지만 독립 후 다시 현재의 원래 자리로 복원되었다.

월드컵 준우승을 기념해 광장에 있는 반 요십 옐라치치 동상도 크로아티아를 상징하는 무늬의 새옷을 입은 모습

트칼치체바 거리(ul. Tkalčićeva)

자그레브 시내 중심에 위치한 거리로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거리 이름은 19세기 자그레브 출신의 역사가 이반 투칼치(Ivan Tkalčić)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트칼치체바는 옛날부터 자그레브 산업의 중심지였으며 많은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물레방아는 자그레브에서 천, 비누, 종이, 주류 등 생산품을 만들게 하는 주요 산업 설비였다. 1392년 평화조약에 따라 도시에서는 더 이상 물레방아를 건설할 수 없게 되었다.

매음굴이었던 20세기 초의 트칼치체바 거리

20세기에에는 매춘굴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당시 매춘은 합법이었고 자그레브 시는 트칼치체바를 아예 매춘 관광명소로 홍보하며 관광객들을 끌어 모았다. 놀랍게도 이때 모여든 관광수익은 도시 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고 한다. 합법이었던 만큼 당시 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주 2회 이상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고 위생적인 양질의 업장을 유지해야 했다고 한다. 매춘업은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유지되다가 폐지됐다.

돌라치 시장(Dolac Market)

식료품을 판매하는 전통시장으로 자그레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반 옐라치치 광장 인근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1926년부터 주요 시장으로 기능했으며 농부들이 집에서 재배한 과일과 채소, 식료품을 내다 팔아 왔다. 아래층에는 정육점, 생선가게, 지방 특산물 가게 등이 자리해 있으며 치즈와 크림 가게도 많다.

빨간색으로 통일된 야외시장의 파라솔은 시장의 상징다. 제철 채소와 과일을 팔기 때문에 주민들은 물론 많은 여행객들도 먹거리를 사거나 외국 시장을 체험하기 위해 찾아와서 북적북적 활기로 채운다.

아주머니 동상(Kumica Barica)

돌라치 시장 입구에서는 아주머니 청동상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쿠미차 바리차라 불리는 이 동상은 2006년에 세워졌는데 대모(代母) 또는 농촌 아주머니라는 뜻이다. 전통 의상을 입은 아주머니는 자기 몸만큼 크고 넓적한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거기에 수건을 둘렀다. 시장건물 외벽에는 엄마와 딸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자그레브 대성당(Zagrebačka katedrala)

1093년에 헝가리 왕인 라디슬라스(Ladislas)가 건설을 시작하여 1102년에 완공했고 1217년에 성모마리아에게 헌정되었다. 성당은 높이가 77m, 넓이가 46.2m이며 두 개의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데 북쪽 탑이 105m, 남쪽 탑이 104m이다. 성당 내부의 면적은 1,671㎡로 최대 5,000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큰 규모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바로크 양식의 제단, 신고딕 양식의 제단 등이 있고 성당에만 보물급 유물이 10개 이상이 되어 크로아티아의 보물이라고 부른다.

외관은 로마네스크의 과도기적인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1242년 타타르족의 침공으로 심하게 훼손되었다. 1264년부터 20년에 걸쳐 고딕 양식으로 복구했고,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초까지 성당 주위에 성벽을 쌓아 또 다른 침입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17세기에 발생한 2번의 커다란 화재로 인해 성당은 손상을 입게 되었고 이후 17세기 중반까지 복구했으며, 남쪽에 육중한 종탑을 세워 감시대로 활용하기도 활용했다.

르네상스 성벽(Kaptolska utvrda)

방어 목적으로 성당을 둘러싸고 있었던 르네상스 성벽은 타워와 함께 오토만 제국의 세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세워졌다. 기록에 따르면 성벽은 1512~1521년 사이에 세워졌고, 두 타워 중 하나는 19세기 성당을 재건축 할 때, 성당의 트인 전경을 위해 철거되기도 했었다. 현재 이 곳에 남아있는 성벽은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방어시설 중 하나로 꼽힌다.

블라슈카 거리(Vlaška)

블라슈카 거리에는 잘 보존된 1층집과 전통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들이 늘어서있다. 캅톨지구의 성벽 아래로 뻗은 이곳은 이탈리아에서 온 상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당시 이탈리아 사람을 가리키는 옛 크로아티아 단어, 블라시(Vlasi)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소설가 아우구스트 셰노아(August Šenoa)도 이곳에서 태어났는데, 이 거리의 한 코너에는 기둥에 기대선 그의 모습을 묘사한 동상이 서있다. 기둥에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도시, 그가 사랑한 도시를 칭송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아우구스트 셰노아 동상과 기둥

유리시체바 거리(Jurišićeva)

자그레브 메인 광장의 동쪽으로 뻗은 거리로 이곳에는 산업과 상업 관련 건물들이 늘어서있다.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1904년 헝가리 아르누보 스타일로 지어진 큰 우체국도 서 있다.

거리의 서쪽 끝, 라디치 서점의 반대쪽에는 스테판 라디치(Stjepan Radić)의 동상이 서있다. 라디치는 베오그라드의 국회의사당에서 의회에 참가하던 중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던 유명한 크로아티아의 유명한 정치가이다. 크로아티아 노동당의 리더로서 라디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연설자로, 국가의 진정한 지도자로, 그리고 가장 존경 받는 크로아티아의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스테판 라디치 동상

토미슬라브 광장(Trg kralja Tomislava)

토미슬라브 왕은 크로아티아를 건국한 인물이다. 910년부터 928년까지 집권을 했는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중앙역 맞은편에 직사각형의 큰 공원을 만들고 말을 타고 있는 토미슬라브 왕의 동상을 세웠다.

크로아티아 건국의 아버지, 토미슬라브

토미슬라브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가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크로아티아의 크네즈가 되고 왕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된 사료는 없다. 단지 19세기에 활동한 크로아티아의 사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프라뇨 라츠키가 최초의 크로아티아 왕이었다고 주장하면서 크로아티아 역사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또 크로아티아 역사학계는 토미슬라브가 헝가리와 불가리아의 공격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했다고 여기고 있다.

1941년 제작된 토미슬라브의 초상

토미슬라브는 문치미르(Muncimir) 공작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910년에 크로아티아의 공작으로 즉위했다. 스플리트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 겸 역사가인 토마 아르히자콘(Toma Arhiđakon)의 기록에 따르면 토미슬라브는 914년에 크로아티아의 공작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크로아티아는 토미슬라브 시대에 크로아티아 중부, 크로아티아 남부, 달마티아 연안, 헤르체고비나 서부, 보스니아 북서부를 지배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7세 황제가 집필한 저서에 따르면 당시 크로아티아는 토미슬라브 시대에 100,000명의 보병, 60,000명의 기병, 80척의 대형 선박, 100척의 소형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를 보유했을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교황 요한 10세의 편지 부분

925년 교황 요한 10세가 크로아티아의 토미슬라브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미슬라브에게 ‘크로아티아 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이며 925년에는 스플리트 교회 주교단이 교회 관할권과 관련된 문제,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후 크로아티아의 왕위는 트르피미르 2세(Trpimir II)가 승계받았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토미슬라브는 크로아티아의 최초의 왕이었으며, 비잔틴이 923년 달마티아를 교황의 교회 당국에 반환한 사실을 돌이켜볼 때 토미슬라브가 달마티아 도시들과 아드리아 해의 섬들을 다스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의 역사가였던 이반 루치치-루치우스는 최초의 크로아티아 왕을 토미슬라브가 아니라 그의 증손자 격인 스체판 드르지슬라브(Stjepan Držislav, ?~997)로 보기도 했다.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Nacionalni park Plitvička jezera)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자그레브와 자다르(Zadar),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국립공원이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리카센 주, 카를로바츠 주에 위치한다. 약 19.5㎢ 면적의 숲으로 이루어진 이 국립공원은 곳곳에 16개의 청록색 호수가 크고 작은 90여 개의 폭포로 연결되어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약 18㎞ 길이의 인도교는 개울 위를 지나기도 하고, 개울이 인도교 위를 지나 얕게 흐르기도 하여 매우 상쾌한 산책로를 형성하고 있다.

플리트비체 공원의 상징, 갈색 곰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보존을 위해 내부의 모든 인도교, 쓰레기통, 안내표지판 등을 나무로 만들었고, 수영, 취사, 채집, 낚시가 금지되어 있으며 애완동물의 출입도 막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공원은 상징인 갈색 곰을 비롯해 50여종의 포유동물과 1천2백여 종의 희귀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의 보고이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그 크기가 매우 커 구석구석을 자세히 보려면 3일 정도가 소요되는 공원이다. 하지만 근처의 대도시 자다르나 자그레브에서 하룻동안 들러서 보아도 그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봄철에는 풍부한 수량의 폭포의 웅장함을 볼 수 있고, 여름철에는 녹음이 우거진 울창한 숲 속의 신비로운 호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가을철에는 사람이 적어 고요한 분위기와 단풍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 사시사철 매력 있는 곳이다.

국립공원 내부의 방대한 양의 물은 물에 포함된 광물, 무기물과 유기물의 종류, 양에 따라 하늘색, 밝은 초록색, 청록색, 진한 파란색, 또는 회색을 띠기도 한다. 물의 색은 날씨에 따라서도 달라지는데, 비가 오면 땅의 흙이 일어나 탁한 색을 띠기도 하고, 맑은 날에는 햇살에 의해 반짝거리고 투명한 물빛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 지역은 1991년 세르비아 극단주의자들이 점령해 국립공원의 경찰관을 살해하는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사실상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호텔을 막사로 삼고 국립공원의 자산을 약탈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4년 후인 1995년 8월에 크로아티아 군대가 다시 이 지역을 되찾으면서 호텔과 가은 시설들을 보수했고, 현재까지 그 아름다움을 잘 보존하고 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역사

선사시대 이후 기원전 1000년경 트라키아인이 이 지역에 거주했다는 사실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 이후에는 일리리아 민족이 정착해 살았으며, 기원전 59년부터는 로마인들이 600년 간 거주했다.

7세기에 들어서 노예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초기의 중세시대 때 지배적이었던 봉건 제도 하에 조직화되었다. 1528년에 이 지역에 거주하던 터키족은 150년 후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이 지역에 새로운 거주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이 곳을 봉건 제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역으로 확립하면서 결국 밀려나게 되었다. 그 후 이 지역은 군사전선으로 이용되었으며 후에 세르비아 정교의 신념을 따른 왈라키아 사람들이 정착했다.

이 지역은 약 400년 전까지만 해도 공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다가,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터키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경 문제로 군대의 조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사람의 접근이 매우 어려워 ‘악마의 정원’이라고도 불린 만큼 많은 전설을 갖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1893년에 이 지역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가 생긴 이후 1896년에 처음으로 근처에 호텔이 지어지면서 관광지역으로서의 잠재성이 드러났다. 1951년에는 지형의 침식이나 훼손을 최소화하고, 관광 산업은 극대화 할 수 있는 국립공원의 적합한 범위가 구체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 중 한 곳으로, 매년 약 90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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