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니(Rovinj)
크로아티아 이스트라 주에 위치한 해안 도시이다. 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비잔틴 제국 등의 통치를 받은 역사가 있어 현재 크로아티아에 속해 있지만 지역색은 이탈리아에 더 가깝다.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자극하는, 베네치아식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다. 이탈리아 어로는 로비뇨(Rovigno)라고 한다.
인구는 14,000명 정도이며 북부 아드리아 해 연안과 이스트라 반도 서부 연안의 관광 도시이다. 로망스 어군에 속하는 언어인 이스트라 어를 쓰는 몇몇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탈리아 어도 공용어로 쓴다.
1283년부터 1797년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이곳은 이스트라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마을 중 하나였다. 이 시기에 겹으로 된 방어벽을 쌓은 것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성에는 모두 일곱 개의 문이 있었지만 운하를 메우면서 네 개가 없어져 현재는 세 개만 남아 있다.
성 유페미아 성당 위에서 내려다 보면 아드리아 해의 산토리니라는 명성을 실감할 수 있게 푸른 바다와 붉은 지붕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좁은 언덕위에는 작은 화랑과 부티크 호텔들, 이탈리안 식당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화분으로 장식한 창가에 앉아 수를 놓는 노파, 작은 바에서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석조 건물 사이에 걸어 놓은 빨랫줄과 좁은 골목에서 축구공을 갖고 노는 아이들은 로비니를 여행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흔히 ‘이스트라의 숨겨진 보석’으로 불리며 골목마다 중세 유럽의 낭만을 물씬 느낄 수 있어, 유럽에서는 이름난 휴양지이다. 한국에서는 2016년 조인성과 고현정 주연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 등장한 이후 많이 알려졌다.
로비니의 골목길, 테라물라(Tiramola)
크로아티아의 지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테라물라라는 골목길 빨랫줄은 ‘테라(당기다)’와 ‘물라(놓다)’의 합성어이다.
예전에 크로아티아에서는 집의 베란다가 넓을수록 세금을 많이 물렸다고 한다. 때문에 빨래 널 베란다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골목을 두고 마주한 집과의 사이에 이렇게 빨랫줄을 연결해서 빨래를 널었다.
송로버섯(Truffle)
‘땅 속의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고급 식재료이다. 푸아그라, 캐비어와 함께 흔히 세계 3대 진미로 불린다. 양식하거나 재배하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으니, 현존하는 모든 트러플은 전부 자연산이다. 땅 속 40~80㎝의 깊은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 채취하기 어려워 과거에는 후각이 예민한 돼지를 풀어 찾았다고 한다. 이제는 개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스트라 반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송로버섯 산지 중 하나인데, 로비니에서 멀지 않은 모토분(Motovun)에서 연 평균 10톤 이상의 트러플이 생산된다.
트러플은 크게 블랙과 화이트로 나뉜다. 블랙 트러플은 크로아티아뿐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캐나다, 중국 등 세계 전역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화이트 트러플은 가을, 겨울에만 전 세계에서 딱 세 곳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데 이탈리아의 알바(Alba), 피에몬테(Piemonte),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크로아티아의 이스트라 반도이다. 블랙 트러플보다 화이트 트러플의 향이 더 깊고 진하며 가격도 훨씬 비싸다. 생 트러플이라면 블랙 트러플은 1㎏에 최고 500만 원 선지만 화이트 트러플은 1천만 원 가까이 거래되기도 한다. 알바 산 화이트 트러플 오일은 450g에 300만 원 정도이다.
크로아티아 산보다는 아무래도 생산량이 높고 인건비가 비싼 이탈리아 트러플이 더 비싸게 거래되는데, 종종 크로아티아산 트러플이 이탈리아로 밀반입된다. 그래서 트러플 수확철이 되면 크로아티아 국경은 밀수꾼 단속으로 바쁘다.
로비니 시장(Green Market/Rovinj Market)
티토 광장에서 100m 떨어진 항구 중심가에 자리한 시장이다. 해산물은 물론 과일과 치즈, 채소, 아스파라거스, 꿀 등 신선한 식재료를 살 수 있고, 로비니 특산물인 트러플 오일을 파는 곳이 많다. 친환경 제품들이기 때문에 저렴하지는 않지만 일반 슈퍼마켓에서 파는 것보다 맛 좋고 건강하다. 이곳에서 산 해산물로 요리해 먹는 것도 좋다.
류칸치 파스타(Pljukanci)
로비니의 음식들은 이탈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 다른 크로아티아 지방보다 맛이 좋은 편이다. 특히 아스트라 지방의 대표 파스타 요리인 류칸치(Pljukanci)와 해산물 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독특한 면발과 피시 스톡 베이스에 여러 해산물과 야채를 섞어 만드는데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밀가루 반죽을 굴려 짧게 만든 파스타이다.
발비 아치(Balbijev luk)
7세기의 성벽을 보존해 나중에 보강한 아치 문이다. 로비니에는 원래 일곱 개의 문이 있었는데 그 중 세 개가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발비 아치가 그 중 하나이다. 1678년 기존의 문 대신 당시 해군 참모였던 다니엘 발비(Daniel Balbi)가 지금의 아치 문을 세웠다 하여 발비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 발비 항구가 있는 자리에는 17세기 후반까지 해산물 시장이 있었는데 그 입구가 발비 아치 자리에 있는 성문이었다. 오늘날에는 로비니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입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발비아치 위쪽에 성 마르코를 상징하는 날개달린 사자상을 새겨놓은 것을 보면 베네치아가 지배하던 시기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출입구의 아치 상단에 터번 쓴 사람을 조각해 놓았다는 점이다. 이 조각은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를 거쳐 헝가리 제국까지 지배하고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포위할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이스트라 반도는 아직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미리 보험을 들어두는 심정으로 투르크 사람의 모습을 새겨놓았을 것이다.
시계탑이 있는 중앙광장에는 작은 분수가 눈길을 끈다. 무언가를 들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새긴 분수는 비록 비교적 최근인 1959년에 세워진 것이지만 광장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라시아 거리(Ul. Grisia)
구도심의 언덕에 위치한 그라시아 거리는 화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파리의 몽마르트를 연상케 한다. 로비니의 예술인 거리라 할 수 있는 이곳에는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거나 기념품이나 작품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모여 있다. 무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화랑에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정부가 이지방의 화가들에게 아주 싼 가격으로 건물을 임대해 주고 예술 활동에 전념하도록 배려한 덕분에 생긴 풍경이다.
성 유페미아 성당(Crkva svete Eufemije)
그라시아 지역을 지나면 곧 로비니 반도의 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대형 유적, 성 유페미아 성당을 만나게 된다. 이스트라 반도에서 가장 큰 바로크 양식 건물이다. 1736년 지어진 로비니 구시가지의 상징으로 도시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종탑에 오르면 시원하게 펼쳐진 아드리아해가 반짝이는 것을 감상할 수 있다. 성당 주변에 늘어선 나무들의 신선한 내음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늘에서 잠시 쉬어 가는 것도 좋다.
성 유페미아
성 유페미아 성당의 종탑은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교회의 종탑과 닮았는데, 1654~1680년 안토니오 마노폴라(Antonio Manopola)의 설계에 따라 60m 높이로 세워졌다. 종탑 위에는 성 유페미아의 입상이 풍향계로 서 있다.
성 유페미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 순교한 성인으로, 290년 소아시아 칼케돈(Chacedo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5살이 되었을 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배교하지 않았고 결국 사자에게 던져져 죽음을 맞았다.
그녀가 죽은 뒤 칼케돈 사람들은 그 유해를 잘 수습했고, 620년 페르시아군이 쳐들어왔을 때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당으로 유골을 옮겼다. 그러나 800년에 성상파괴운동이 극심해지자 기독교도들은 유페미아의 유골함을 치우라는 압박을 받았다.
이때 바다로 던져진 성 유페미아의 대리석 유골함이 바닷물에 떠서 로비니 해안까지 왔다고 한다. 로비니 사람들이 유골함을 끌어올려 성 조지 교회에 모시려 했지만 실패해는데, 결국 두 마리의 작은 소를 끌던 소년이 유골함을 언덕 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로비니 사람들은 이것이 기적이라고 여기고 그때부터 성 유페미아를 마을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때까지 성 조지를 모시던 이 성당은 성 유페미아 성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풀라(Pula)
아드리아해 최대의 군항(軍港)이자 철도의 종점이다. 이탈리아 어로는 폴라(Pola)라고 하며 옛 이름은 피에타스율리아(Pietas Julia)이다. 조선, 시멘트, 목재가공, 화학, 담배, 피혁, 구두, 해군병기 등의 공장이 있으며 기원전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1798~191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고 1919~1947년에는 이탈리아령이었다.
풀라 아레나(원형극장)(Amfiteatar u Puli)
크로아티아의 10쿠나짜리 화폐에 그려져 있는 건축물이다.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68년까지 무려 80년 간 건축된 로마시대 극장으로, 현존하는 6대 로마 경기장 중 하나이다. 석회암과 화강암을 주재료로 지은 것이며 최대 높이는 29.4m이다. 맨 아래 2개 층은 각각 72개의 아치로 되어 있고 최상층은 64개의 직사각형 개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경기장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베시파시아누스 황제가 로마의 콜로세움과 함께 건설하도록 한 것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건설된 이 원형경기장을 짓는 데에는 여자 죄수들도 동원됐다고 한다.
로마 콜로세움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과거 검투사와 사자의 사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최대 23,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15개의 출입구가 있었고 검투사들은 지하 통로로 출입했다. 서로마 시대에 가면 검투사 경기가 잔인하다 하여 투우 경기로 대체됐고, 중세에는 이곳에서 소나 양을 키웠다고 한다.
네 개의 탑에는 본래 분수로 쓰거나 관람객들에게 물을 뿌리는 용도로 만든 두 개의 저수조가 있었다. 당시에는 큰 천막으로 천장을 덮을 수 있어서 태양과 비로부터 관중들을 보호할 수 있었는데, 이런 경기장은 매우 희귀하다. 또한 네 개의 측면 탑과 세 개의 로마 건축 양식의 기둥이 모두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경기장이다.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아 고대 로마 건축기법 연구에 큰 도움이 된 유적이다.
엘튼 존, 스팅 등의 유명 팝가수들의 공연이 이곳에서 개최된 적이 있다. 또 매년 7월 말에 개최되는 풀라 영화제에 방문하면 한여름 밤 원형경기장 안에서 주옥같은 예술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쌍둥이 문(Porta Gemina)
20세기 발굴 작업으로 발견된 문으로 원형극장 인근에 세워져 있다. 원래는 기원전후에 로마 성벽에 세워진 문이 있었는데 13세기 초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레드리히 2세의 군대가 이 지역에 쳐들어왔을 때 도시가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이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문 옆에 조성한 것이 쌍둥이 문이다. 지금도 쌍둥이 문 앞에 로마 때 성벽 아치문 유적이 남아 있다.
중세에 들어 쌍둥이 문은 요새화된 풀라 도시에 편입됐다. 문 하나는 도시 출입구로 쓰고 다른 하나는 사용하지 않다가 1800년경부터 다시 사용하게 됐다. 문 앞에는 13세기의 원형 기지가 조각된 탑이 있다.
베네치안 요새(Kaštel Pula)
풀라 언덕에 위치한 오래된 요새이다. 과거 이스트라 반도에는 베네치아 고대 부족 중 하나인 이스트리 족(Histri)이 살았는데, 로마인들의 기록은 이들을 악랄한 해적이라고 적고 있다. 결국 로마는 두 차례 군사 공격을 벌여 기원전 177년, 로마 베네치아 지역의 일부로 편입시킨다. 이후 지은 것 중 하나가 베네치아 요새이다. 이스트라 반도에서 요새는 지형적 특성상 만이나 항구로 쳐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해안 근처에 설치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교회, 수도원(Crkva i samostan sv. Franje)
1209년 교황 이노센트 3세의 동의를 얻어 설립된 성 프란치스코 회를 설립하고 13세기 말에 완성한 고딕 양식의 교회이다. 귀족적 특성을 살려 단순한 모양으로 지었으며 15세기에 초기 르네상스 양식의 수도원을 추가했다. 일설에 따르면 수도원 설립 시 성인의 유적이 발견된 적이 있다고 한다.
풀라 대성당(성모승천 성당)(Uznesenje Blažene Djevice Marije)
5세기에 지어진 이 대성당은 포룸으로 연결되는 메인 거리에 위치한다. 4세기부터 그리스 교도들이 이곳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정방향을 띠고 있으며 내부는 두 개의 낮은 원주로 구분돼 있다. 1242년 화재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16세기 초에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건설됐다.
대제단은 로마의 석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세기 이후 성인들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바닥에는 5~6세기의 모자이크 조각이 있어 볼 수 있다. 17세기에 조성한 종탑은 원형경기장의 돌을 가져다 만든 것인데, 당시에는 사택을 지을 때 원형경기장의 돌을 가져다 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 신전(Augustov hram)
풀라 시청사 옆에 위치한 로마 시대 유적이다.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기원전 2세기 경부터 기원후 14년 사이에 세워졌으며 원형경기장과 함께 로마 시대에 제작된 대표적인 크로아티아 건축물이다.
풀라에는 3채의 사원이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 사원은 다이애나 사원과 함께 메인 사원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원래 이교도 사원이었으며 14세기 황제가 죽고 난 뒤 성당, 곡물창고 등으로 용도가 변하기도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인 1944년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다가 1945~1947년 원형으로 복구되었는데, 전면 부분은 원형 그대로이다. 기독교가 전파됨에 따라 신전의 기능은 없어졌으며 지금은 고대의 석기와 청동상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약 8m 높이의 6개 기둥이 사원 현관 입구를 떠받치고 있는 구조이고 기둥과 지붕 사이에 풍부한 장식 조각이 새겨져 있다.
디르케의 형벌 모자이크 바닥(Floor mosaic The Punishment of Dirce)
제2차 세계대전 때 풀라에 폭파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주택지구 아래에서 모자이크가 있는 로마 시대 집들이 발견됐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디르케의 형벌을 묘사한 이 모자이크 바닥이다. 가로 12m, 세로 6m 크기의 이 모자이크는 같은 크기의 두 개 섹션으로 나뉘어 있으며 물고기, 새 같은 동물 모양과 기하학적 패턴으로 구성돼 있다. 3세기경부터 로마 주택에서는 중앙 방의 바닥을 모자이크로 꾸미곤 했다.
디르케의 형벌 이야기
디르케는 그리스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로, 유리피데스가 저술한 비극 <안티오페(Antiope)>에 등장한다. 디르케의 형벌 이야기는 프레스코화, 병이나 모자이크, 동전 등에 자주 묘사됐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안티오페라는 여인이 제우스 신에게 강제로 범해지는 바람에 임신하게 되어, 수치심에 시시온의 에포페우스 왕에게로 도망친다. 그러나 리쿠스가 그녀를 납치해 다시 데려오고, 그러는 동안 안티오페는 동굴에서 암피온과 제투스 쌍둥이를 낳는다. 리쿠스는 쌍둥이를 목동에게 맡기고 안티오페는 아내인 디르케에게 넘겼는데, 디르케는 그녀를 매우 싫어해 심하게 학대한다.
쌍둥이 형제가 젊은이로 성장하자 안티오페는 자신이 그들의 어머니임을 밝히고 디르케를 피해 피신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형제는 그녀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고 도피를 돕지도 않았다. 곧 디르케는 안티오페를 찾아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후 쌍둥이 형제를 키워준 목동이 형제에게 안티오페가 어머니가 맞다고 증언하자 형제는 어머니를 학대한 디르케를 황소의 뿔에 매달아 죽인다.
세르기우스 개선문(Slavoluk Sergijevaca)
악티움 해전을 승리로 이끈 로마 군단과 세르기우스 가문의 세 형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문으로 기원전 29~27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군인이자 정치가 가문인 세르기우스는 식민지 풀라에서 수 세기 동안 권력을 유지한 가문이다.
악티움 해전은 카이사르 사망 후 그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전쟁으로,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해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취임했다.
세르디우스 개선문에는 과거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가였던 루시우스 세르기우스(Lucija Sergija, 기원전 108~62)를 비롯한 삼형제의 입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만 새겨져 있다. 이들은 개선문 건설 비용을 댔다고 한다.
세르기우스 개선문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받아 헬레니즘 시대 후기에 세워졌다. 말에 갑옷을 입고 올라탄 전사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후 개선문은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미켈란젤로는 풀라를 방문해 세르기우스 아치의 스케치를 남겼다.
풀라 동굴(Grotte von Pula)
구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풀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이다. 바위절벽 해안에 자리한 동굴로 물이 꽤 깊으니 조심해야 한다. 스노클링이나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들이 종종 찾는 곳이며 작은 보트를 타고 동굴 끝에 들어가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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