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의 생애
박두진(朴斗鎭, 1916~1998)은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1939년(24세) 6월 <문장>에 <향현>, <묘지송>, <낙엽송>이 추천되고, 1940년(25세) <의>, <들국화>가 추천되어 청록파 시인 중 가장 먼저 완료 추천을 받는데, 이때 정지용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이후로도 꾸준히 <도봉>, <별>, <푸른 하늘 아래>, <설악부>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시들을 발표한다.
해방 후 <청록집>을 발간할 무렵인 1946년(31세)에는 서정주, 박목월과 함께 우익 문학 단체인 ‘청문협’에 가입한다. 그러나 그는 단체 활동이나 정치보다는 등산, 수석 채집, 서예에 더욱 몰두하는 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박두진 역시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는데, 1949년(34세)에 펴낸 첫 단독 시집 <해>에서는 여전히 산을 소재로 하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이글이글 타는 해를 솟아오르게 하는 생명력이 충만한 산을 노래하였다.
박두진은 1953년(37세) 시집 <오도>, 1956년(40세) <박두진 시선>을 펴내 제4회 자유 문학상을 받는다. 이후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지만 1960년(44세) 4 · 19 때 학원 분규 때문에 사퇴하였다. 이후 1962년(45세)과 1963년(46세) 발간한 시집 <거미와 성좌>, <인간 밀림>에서는 드문드문 현실에 대한 자각을 보였다.
그러나 다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박두진은 자신의 본령은 역시 자연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1967년(50세) 시집 <하얀 날개>에서 다시 자연으로 귀의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하지만 이 시집에 담긴 자연은 ‘산’, ‘해’ 같은 광활한 대상이 아니라, ‘꽃’, ‘새’ 같은 소박한 자연이다.
한동안 공백을 거친 후 1973년(56세) 낸 <고산 식물>과 <수석 열전>에서는 자연, 인간, 사회 현실을 두루 담아 절대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보여 준다. 이후로도 박두진은 시집과 수필집을 꾸준히 내어 성실한 문학인으로 많은 동료와 후학의 귀감이 되고, 외솔상과 아시아 기독교 문학상 등을 받는다. 그리고 1998년(83세) 숨졌다.
박두진의 시
전기 시
<향현>
1939년(24세) <문장>에 추천된 작품으로, 해방 후 발표된 <해>의 원형 같은 느낌을 주지만 아직 미숙했던 탓인지 <해>에 비해 갈등의 양상이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마지막 연에서 박두진 특유의 기독교적 인식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향현>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山) 너머 큰 산 그 너멋 산 안 보이어, 내 마음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長松) 들어섰고, 머루 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 만년(累巨萬年)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 직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 확 치밀어 오를 화염(火焰)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묘지송>
1939년(24세) <문장>에 실린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묘지’는 음산하고 무섭고 허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묘지송>은 이런 통념을 뒤집어 ‘묘지’를 밝고 환하게 빛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주검에 대한 찬미가 이 시의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주검에 대한 찬미는 삶의 포기나 체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의 폭 넓은 긍정,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묘지송>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髑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해>
1946년(31세) 발표한 작품이자, 1949년(34세) 펴낸 첫 단독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하다. 일제 암흑기의 어둠을 몰아낸 해방의 벅찬 기쁨에, 민족의 염원과 이상을 ‘해’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해’는 새로운 탄생과 창조의 근원, 평화 공존의 원동력으로 이해될 수 있고, 시대와 관련시켜 본다면 조국의 밝고 원대한 이상으로 볼 수도 있다. ‘달밤, 칡범, 짐승’은 악(惡)과 추(醜)의 이미지로, ‘사슴, 청산, 꽃, 새’는 선(善)과 미(美)의 이미지로 대표되나, 결국 이들의 대화합(大和合)을 추구하여 사랑과 평화의 이상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앟게 씻은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뙨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딿아 사슴을 딿아,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딿아,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딿아 칡범을 딿아,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뙤고 고은 날을 누려 보리라.
<도봉>
1946년(31세) <청록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박두진은 등단 초기부터 자연을 대하는 기쁨과 그 영원성을 노래하였는데, <도봉>에서는 석양이 아름답게 도봉산을 비출 무렵에 느낀 감상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가을 산에 홀로 앉아 있는 시인에게서 붉은 해가 하늘 끝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따라 변화해 가는 감정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어 감상의 묘미를 더하고 있다.
<도봉>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먼 골 골을 되돌아 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어서 너는 오너라>
해방 직전에 써서 간직했다가 1946년(31세) <청록집>에 실은 시이다.
박두진의 시는 기독교적인 정결한 갈망이 착색된 자연을 지향하여 신선한 생명력을 지닌 세계를 그려내는데, <어서 너는 오너라>에서는 복사꽃 핀 마을이 한국적인 이상향으로 토착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복사꽃은 동양에서는 무릉도원(武陵桃源), 즉 이상향을 상징한다. 한국적인 것으로 토착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오랜 과거에나 있었을 법한 이상향으로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일제에 의해 ‘함부로 짓밟힌’ 민족의 공동체적 삶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 오래 정드리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두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례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설운 가락도 너는 못듣고, 골을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 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여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나던,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어서, 철이야, 너는 늴 늴 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실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뒹굴어 보자.
<청산도>
1949년(34세) 시집 <해>에 수록한 4연 구성의 산문시이다. 의성어와 의태어의 다양한 구사와 반복적 어구를 통해 형성된 유장하면서도 운치 있는 산문 율조 속에는 자연의 생명력을 표상하는 시어들과 비관적 현실 인식을 드러내는 부정적 어사의 시어들이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박두진의 초기 시들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이고 비관적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좌절하지 않고 시인 특유의 미래 지향적인 낙원 회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특징을 갖는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한 특징을 시어의 사용에서부터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안 오고’, ‘안 불고’, ‘가버린’, ‘잊어버린’, ‘오지 않는’ 등의 부정적 의미의 시어들이 빈번히 나타나 있는 한편, 시간적 배경도 ‘밤’, ‘어둠’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의 생명력이 강하게 분출됨으로써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현실 상황을 상대적으로 상쇄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결국 ‘청산’에서 발견한 소멸과 생성으로서의 자연의 원리를 상실과 회복으로서의 역사, 인간사의 원리로 승화시킴으로써 비관적 현실 인식을 극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소멸과 생성의 주기적 순환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는 ‘청산’을 통해, 현실은 비록 ‘어둠’, ‘밤’과 같이 비관적이지만 그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 머지않아 ‘밝은 하늘 빛난 아침’이 찾아올 것이라는 미래 지향적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소멸과 생성으로서의 자연의 원리를 표층 구조로, 상실과 회복으로서의 역사의 원리를 심층 구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산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 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후기 시
<강 2>
1962년(47세) 시집 <거미와 성좌>에 실은 시이다. 박두진은 <거미와 성좌>에서 전쟁 때문에 황폐해진 민족의 비극적 상황을 강한 어조로 고발하고 어두운 민족 현실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통찰력 있게 제시한다. <강 2>은 이 시집의 주제 의식을 충실하게 반영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념으로 인해 빚어진 동족간의 살상과 반목, 갈등이 민족을 얼마나 비극적으로 만들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앞으로 지향해야 할 민족정신이 무엇인가를 구명하고 있는 시이다.
이 시는 다양한 형식적 실험이라든가 언어의 정서적 표현에 치중한 작품이라기보다는 비극적인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주제 의식이 강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박두진의 앞선 시기의 자연과 생명에 대한 정서적 감수성은 배제되고, 현실적인 상황과 그 극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강 2>는 동족상잔의 처참함을 ‘피’와 ‘죽은 것’ 등의 비극적인 언어로 형상화하여 고통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평가된다.
<강 2>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강물은 숲에서 나와 흐르리.//
비로소 채색되는 유유(悠悠)한 침묵/ 꽃으로 수장(水葬)하는 내일에의 날개짓,//
아, 흥건하게 강물은 꽃에 젖어 흐르리/ 무지개 피에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
일체의 죽은 것 떠내려 가리/ 얼룽대는 배암 비눌 피발톱 독수리의,//
이리 떼 비둘기 떼 깃쭉지와 울대뼈의/ 피로 물든 일체는 바다로 가리.//
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너의 전신(全身)/ 강이여. 강이여. 내일에의 피 몸짓.//
네가 하는 손짓을 잊을 수가 없어/ 강 흐름 핏무늬길 바다로 간다.
<꽃>
1962년(47세) <거미와 성좌>에 수록한 작품이다.
<꽃>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유전도>
1973년(58세) <현대 문학>에 발표한 작품이다.
박두진의 시는 6 · 25를 거치면서 자연을 바라보던 시선을 현실로 옮기면서 참여적 성향을 띠게 된다. 그 이후에는 현실보다도 근원적인 인생 문제에 천착하여 삶의 의미나 영혼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원숙한 생에 도달한 그의 깊은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박두진이 자연의 결정체인 ‘수석(水石)’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수집한 수석에서 얻은 시적 영감을 노래한 작품으로, ‘수석’이 표상하는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두루 섭렵하는 절대적인 경지를 이루어내고 있다.
‘유전도’에서 ‘유전’이란 번뇌 때문에 생사(生死)를 수없이 되풀이하며 ‘미망(迷妄)’의 세계를 떠도는 일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로, 이 시의 사상적 배경이 불교의 윤회 사상임을 알게 해 준다. 하나의 돌에서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끊임없는 유전이라는 자연의 본질을 찾아내는 박두진의 원숙한 혜안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유전도>
바람과 구름이 구름과 강물이/ 강물과 바다가 꼬리 물고 있다./ 바다가 햇살을 달빛이 번개를 노을이 강바람을 꼬리 물고 있다./ 언덕과 산악, 사막과 도시, 궁전과 움막들이/ 있는 것은 무너지고/ 무너진 것들은 흘러가고 있다./ 아우성과 침묵이, 영화와 몰락이/ 횡포한 자와 비겁한 자,/ 빼앗는 자와 빼앗긴 자,/ 말하고 싶은 자와 말하지 못하게 하는 자,/ 아부하는 자와 바로 말하는 자,/ 파계자와 성도자가/ 천 년씩 천 번을, 만 년씩 만 번도 더/ 무너지며 일어서며 영겁 속에 사그러져/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흐르고 있다./ 노여움도, 자랑도, 오만도, 겸손도/ 사랑도, 미움도/ 아름다움과 추,/ 지혜와 어리석음,/ 쫓던 자와 쫓기던 자,/ 죽이던 자와 죽던 자,/ 총칼도, 보습도/ 비밀 암호도, 경서도/ 짐승의 뼈도, 사람의 뼈도 한데 묻혀 있다./ 난 것은 모두 죽고, 죽은 것에서 다시 나,/ 소용돌이 소용돌이/ 저절로의 흐름,/ 침묵에서 침묵으로의 영원한 있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거기 있고 없는/ 해와 달, 하늘 땅이 꼬리 이어 도는/ 천의, 억의 영겁 천지 바람 불고 있다.
'현대문학테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문학 테마 64. 황순원 (0) | 2018.06.15 |
---|---|
현대문학 테마 63. 김동리 (0) | 2018.06.12 |
현대문학 테마 61. 박목월 (0) | 2018.05.30 |
현대문학 테마 60. 조지훈 (0) | 2018.05.30 |
현대문학 테마 59. 해방 직후의 문단 상황 (0) | 2018.05.30 |
이 글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