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세 사람은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사이 <문장>을 통해 문단에 나온다. 이들은 그 동안의 서정 시편들을 모아 1946년 여름에 공동 시집 <청록집>을 낸다. 이 <청록집>의 이름은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이다.
이들은 특별한 유파 의식을 바탕으로 공동 시집을 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 시에는 소재의 뚜렷한 자연 지향성, 우리말의 리듬과 토속적 아름다움을 잘 살려냈다는 점 등에서 공통점이 보인다. 때문에 세 시인은 <청록집> 이후 ‘청록파’로 불리는데, 알고 보면 이들은 시집 한 권을 함께 낸 것 외에는 특별히 행보를 같이 한 적이 없다.
조지훈의 생애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조지훈(趙芝薰, 1921~1968)은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성균관 유생 출신인 할아버지와 개화 지식인인 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익히고,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친 후 1938년(18세)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조지훈은 학창 시절인 1939년(19세)에는 <문장> 4월호에 <고풍 의상>이 추천되어 청록파 중 가장 먼저 추천을 받는다. 이후로도 <승무>, <봉황수>, <향문> 등을 거쳐 추천을 완료하여 등단하였다. 조지훈은 유교적 분위기의 성장 배경과 불교 체험의 바탕 위에서 역사적 연민성을 드러내는 고전미에 천착하는 경향을 보여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문단 활동
1940년(20세)에는 <아침> 등을 쓰지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오대산에 들어가 당시와 불경을 탐독하며 지낸다. 이 무렵 산에서 잠시 내려와 박목월을 처음으로 만났다. 1946년(26세)에는 서울 성북동 집에서 박목월을 박두진과 함께 다시 만나 공동 시집 발행에 뜻을 모으고 <청록집>을 발간하였다.
1946년(26세) 조지훈은<해방 시단의 과제>를 발표하여 “해방 후 시단은 사이비 시의 범람기”이며 “우리의 전통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후로도 여러 비평문을 통해 그는 순수 문학적 태도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고전주의적’ 정신을 제시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1950년(30세)에는 6 · 25 전쟁을 겪는데, 이때 초대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 조헌영이 납북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종군 작가단에 참여하였고 문총, 한국문인협회의 대표 이사 등을 지냈다.
1952년(32세)에는 첫 단독 시집인 <풀잎 단장>을 펴고, 1953년(33세)에는 시론집 <시의 원리>를, 1956년(36세)에는 절제된 언어로 자연을 관조하는 시집 <조지훈 시선>을 간행하여 자유 문학상을 받았다.
한국 전쟁 이후의 변모
조지훈은 전쟁 직후 <다부원에서> 같은 시에서 현실에 대한 관심을 조금씩 표현했는데,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초기의 순수 서정성에서 차츰 벗어난다. 1959년(39세) 펴낸 시집 역사 앞에서에서는 해방 뒤의 사상적 분열 양상과 격동기 현실을 직시하는 지식인의 자의식을 담고 있다.
이후 조지훈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고, 특히 1960년(40세) 4 · 19의 열기를 전하는 시 <마침내 여기 이르지 않곤 끝나지 않은 줄 이미 알았다> 등은 그의 대담한 시적 전환은 단적으로 보여 준다.
1962년(42세)에는 고려대학교 부설 민족 문화 연구소장에 취임하여 문학보다 민족 문화 연구에 더욱 열을 올린다. 그 결과 1964년(44세)에 <한국 문화사 서설>, <신라 가요 연구 논고> 등의 이론서를 발간하였다. 이렇듯 조지훈은 청록파 세 사람 중 사회 현실에 대한 참여 의지를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저에 언제나 청록파다운 자연 친화 정신이 흐르고 있어서, 1964년(44세)에 나온 마지막 시집 <여운>에서는 다시 자연으로 귀의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조지훈은 만성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다가 1968년(48세) 국립 메디컬센터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조지훈의 시
전기 시
<승무>
1939년(19세) <문장>에 실린 작품이다. 오동잎이 달빛을 받으며 떨어져 내리는 밤. 아무도 없는 빈 무대에 황촉 불을 켜 놓고 춤을 춘다. 그러므로 이 춤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춤이 아니라, 자신의 번뇌를 떨쳐 버리려는 몸짓이며, 가없는 영혼의 세계를 향한 간절한 발돋움일 것이다.
‘복사꽃 고운 뺨’, ‘까만 눈동자’ 같은 관능적인 아름다움이나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라는 표현을 보면, 이토록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하여 세속적인 영화(榮華)를 멀리하고 승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연유를 밝히지는 않는다.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이 세속은 어차피 번뇌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겠다.
발은 이 번뇌의 땅을 디디고 있지만, 눈은 ‘먼 하늘 한 개 별빛’을 향해 있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는 표현이 드러내 주고 있는 바, 지상적 · 세속적인 번뇌를 통해 여승은 종교적․초월적으로 승화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승무>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고풍의상>
1939년(19세) <문장>에 실린 작품으로, 옛 여인의 옷과 춤사위의 아름다움을 예스런 말투와 가락으로 조화 있게 보여 준다. 단순히 고전적인 미(美)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우리 것에 대한 시인 자신의 그리움, 서글픔 등을 작품의 내면에 담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 아름다움은 여러 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조지훈은 그 중에서도 선(線), 특히 곡선의 아름다움이 한국적 미의 본체라고 말한 바 있다. <고풍의상>은 이러한 우리의 전통적 고전미를 옛 여인의 옷맵시와 춤사위에서 포착하고 있다. 조지훈의 대표작처럼 되어 있는<승무>가 종교적 경지에까지 승화된 춤의 아름다움을 그렸다면, 이 시는 우아한 고풍 의상에서 우리의 고전적 멋을 찾고 있다.
고풍 의상에 대한 시인의 정서는 단지 아름다움의 예찬에 그치지 않고 ‘이 밤에 옛날에 살아’에서 보듯이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로 돌아가 잃어가는 고전미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마지막 행인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는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풍경이 운다’, ‘두견이 소리’ 등의 애잔한 분위기와 어울려 옛 것의 아름다움이 상실돼 가는 현실을 슬픔의 멋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고풍의상>
하늘을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 저고리/ 호장 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도라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추운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춰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를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이냥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지어다.
<봉황수>
1940년(20세) <문장>에 실린 작품이다. 한시적(漢詩的) 품격에 친숙한 조지훈의 이 시도 전후 두 단락으로 구분되어 선경 후정의 구성을 보여 준다. 앞의 두 문장이 배경이라면, 그 이하에는 그러한 배경 속에서의 화자의 심회가 드러나 있다.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거미줄 친 옥좌’의 구절들이 보여 주듯이 망해 버린 왕조의 궁궐에서 화자가 느끼는 심회는 역사에 대한 허망함일 터이다. 한 번도 날아오르지도 마음 놓고 울어 보지도 못한 ‘봉황’의 모습은 우리 역사가 또한 그러했음을 나타내 준다.
화자는 나라 패망의 원인을 사대 사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라는 간명한 표현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권력의 상징으로서 ‘쌍룡’ 대신에 ‘봉황’을 틀어 올렸다는 것도 같은 뜻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망국의 현실 속에서 화자는 ‘몸둘 곳이 바이 없다’고 한다. 나라의 패망 앞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부질없기에 참을 수밖에 없지만, 차라리 눈물이 속된 줄 몰랐더라면 구천에 사무치도록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봉황수>
벌레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鳳凰)새를 틀어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泉)에 호곡(呼哭)하리라.
<낙화>
1946년(26세) <청록집>에 실린 시로, 지는 꽃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서글픔을 차분하게 노래하고 있다. 화자의 쓸쓸한 삶의 우수가 적막한 분위기, 전통적 율조를 바탕으로 하여 절제된 언어 속에 압축되어 있으며, 시의 진술이 비유 없이 묘사적 심상에 의지하고 있어 읽기에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에는 아쉽고, 쓸쓸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람의 일상적 감정이 시인에게는 늘 주요한 시적 주제가 되어 평범한 소재도 다채로운 목소리로 노래하게 된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꽃의 떨어짐을 보면서 격정적인 슬픔을 노래했다면, 조지훈의 <낙화>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한다고 하겠다.
<낙화>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목어>
1946년(26세) <청록집>에 수록한 작품으로, 오래된 절의 풍경이 은은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 심오한 선(禪)의 세계에 빠져드는 듯한 감동을 주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오래된 절의 해질 무렵 풍경을 절제된 언어, 민요적 리듬으로 여백이 많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이 그리고 있다. 화자는 ‘고사(古寺)’의 은은한 정경을 관조하면서, ‘상좌 아이’, ‘부처님’, ‘눈부신 노을’, ‘지는 모란’ 등의 대상을 아무런 주관적 정서의 개입 없이 그저 그림 그리듯 묘사하고 있다. 시의 소재들을 바탕으로 시를 이해한다면, 그 대상들이 심오한 선의 세계에 젖어 드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고운 상좌 아이’도 ‘부처님’도, 일체 중생의 상징일 수 있는 ‘모란’도 모두 ‘눈부신 노을’과 같은 환희, 희열감에 젖어 정토의 세계인 ‘서역 만리 길’로 귀의하고 있다.
<목어>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西域萬里)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산상의 노래>
1945년(25세) <해방기념시집>에 실은 작품이다.
조지훈은 1947년(27세) 3월 발표한 <순수시의 지향―민족시를 위하여>에서 이른바 ‘순수시론’을 주장하면서, 좌익 문학 측의 ‘진보적 민족 문학론’에 맞설 뿐만 아니라 김기림, 정지용 등의 ‘시와 정치의 결합’론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면서 일약 김동리와 더불어 우익 문학론의 신진 기수로 부각된다. 김광균이나 신석정이 과거 그들의 이론적 후원자였던 김기림의 입장에 따른 시를 창작하였다면, 이른바 청록파 시인들은 자신들의 스승 격이었던 정지용의 입장에 정반대의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조지훈은 “순수한 시 정신을 지키는 이만이 시로서 설 것이요, 진실한 민족정신을 지키는 이만이 민족시를 이룰 것”이라고 하고, 여기에서 순수한 시정신이란 “시류의 격동 속에 흔들리지 않는,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영원히 새로운 것”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감성에 귀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 해방 공간에서의 문학의 정치주의적 편향에 대해 분명하게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산상의 노래>는 이러한 조지훈의 순수 지향적 태도 속에서도 해방을 맞는 그의 감격이 적절히 형상화되어 있는 해방 공간의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산상의 노래>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완화삼>
1946년(26세)에 발표한 시로, ‘목월에게’라는 부제가 달려 있으며 박목월이 이 시에 대한 화답시로 <나그네>를 썼다. <완화삼>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 달랠 길 없는 민족의 정한을 스스로 ‘나그네’화하여 아름다운 시어, 시각적 이미지, 고전적 가락을 통해 탄식과 체념이 담긴 낭만적 시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시제인 ‘완화삼(玩花衫)’이란 ‘꽃을 보고 즐기는 선비’를 의미한다.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라는 시행은 나그네와 꽃, 곧 시인과 자연이 합일된 경지이자, 이 시의 제목을 ‘완화삼’이라 한 이유를 알게 해 준다. ‘완화삼’이란 본디 ‘꽃무늬 적삼을 즐긴다.’는 뜻으로, 이 시행의 ‘소매 꽃잎에 젖어’ 있는 것 같은 무념무상의 경지를 표상한다. 그런 다음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자연에 동화되어 하염없는 나그네 길을 다시 떠나는 그는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며 애상감에 젖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 말 이조년(李兆年)의 시조 <다정가>의 ‘多情(다정)도 病(병)인 樣(양)여’와 상통하는 정서이다.
이처럼 이 시는, 세속적인 집착과 속박에서 벗어나 구름처럼 흘러가는 나그네의 고독과 무상감이 7 · 5조 3음보격의 전통적 가락과 낭만적 분위기, 감각적 이미지의 시어와 함께 간결한 시행 구조에 완전히 용해됨으로써 전통적 서정시의 전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완화삼—목월에게>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후기 시
고전적인 정신의 추구를 내세우면서 해방 직후의 혼란을 버틴 조지훈은 곧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자기 인식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의 관심을 더욱 확대하고 있으며, <다부원에서>와 같은 총체적인 상황 인식의 가능성을 작품을 통해 시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지훈은 자연을 노래하거나 지나간 역사를 더듬거나 간에, 또는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기 응시에 몰두하거나 간에 언제나 비슷한 어조를 지키며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풀잎 단장>
1952년(43세) 출간한 <풀잎 단장>의 표제시이다.
<풀잎 단장>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잎을 새롭게 조명하여 생명의 신비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풀잎이란 단순히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적 존재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풀잎과도 같이 조그만 고통에도 동요하고 번뇌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이렇게 시인은 풀잎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자연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화자가 자신의 반성적 타자(他者)로 설정한 풀잎을 통해 주어진 운명대로 한 자리에 붙박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는 여유로움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지친 영혼을 내맡기는 삶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풀잎 단장>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떨기/ 영혼이여.
<석문>
1952년(32세) <풀잎 단장>에 수록된 시로, 경북 영양 일월산에 있는 황씨 부인 사당에 전해지는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우연한 오해로 인해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버림받은 한 여인네가 끝까지 남편을 기다리며 정절을 지키다가 죽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서정주의 <신부>와 비교된다.
<석문>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민들레꽃>
1952년(32세) 시집 <풀잎 단장>에 수록된 시로, 의인화한 민들레꽃 한 송이를 통해 애틋한 그리움의 마음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죽도록 사랑하는 임의 현신(現身)일 수 있는 민들레꽃을 바라보며,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외로운 화자의 그리움을 여성적인 어조로 고백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화자가 위로의 대상으로 그저 ‘바라본 민들레꽃’이 오히려 화자를 ‘바라보는 민들레꽃’으로 전화(轉化)되어 만남을 이루는 상황이다. 이것은 물론 조지훈의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민들레꽃>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다부원에서>
1959년(39세) <역사 앞에서>에 수록한 시로, 한국 전쟁 동안 종군 문인으로 활동해던 조지훈이 다부원에서 본 전쟁의 참상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그만큼 조지훈의 실제적 경험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데, 특히 한 달 여의 전쟁이 끝난 뒤 그것이 할퀴고 지나간 아픈 상처들이 남아 있는 다부원을 본 감회가 사실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특히 <다부원에서>는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전쟁터의 비참함을 고발하고 이를 통하여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하면서도 휴머니즘적 시각을 갖고 있다. 이런 시인의 시각은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죽어간 여러 생명들의 희생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곧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安息)이 있느냐.’를 물음으로써 소비적이고 무의미한 전쟁의 허무함과 참혹함,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함을 느끼게 해 준다.
<다부원에서>
한 달 농성(籠城)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多富院)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彼我) 공방(功防)의 포화(砲火)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多富院)은 이렇게도/ 대구(大邱)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自由)의 국토(國土)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荒廢)한 풍경(風景)이/ 무엇 때문의 희생(犧牲)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姿勢)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軍馬)의 시체(屍體)//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傀儡軍) 전사(戰士)//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多富院)//
진실로 운명(運命)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는 무슨 안식(安息)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多富院)은/ 죽은 자(者)도 산 자(者)도 다 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패강 무정>
1959년(39세) <역사 앞에서>에 수록한 시로, 6 · 25 당시 국군에 의해 탈환된 평양에 입성해서 폐허화된 도시의 모습을 보고 전쟁의 참혹상과 민족의 비극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쟁의 의미 추구나 이데올로기의 우열을 주장하는 격한 감정의 전쟁 시가 아니다. 조지훈은 의도적으로 연을 구분하지 않고 한 연을 긴 행 하나로 처리함으로써 전쟁을 바라보는 화자의 허망한 마음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 작품은 내용상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3연의 첫째 단락은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 인해 온통 폐허화되어 을씨년스러워진 평양 거리의 풍경을 ‘사람이 없다’라는 구절로 요약,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때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잡혀 오는 한 여자 빨치산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렇듯 황량한 폐허 속에서 화자는, 북한이 소위 ‘스탈린 거리’로 명명한 거리에 웅크리고 앉아 시나브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외로운 나그네와 같은 수심에 빠져든다.
현실로 돌아온 화자는 전쟁으로 인해 잿더미가 된 이곳을 왜 찾아왔던가 하고 뉘우친다.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대동문 다락에 오른 화자는 마침내 그 곳에서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발견하고 패강(浿江), 즉 대동강의 무정함을 탄식한다. ‘아, 가는 자 이 같고나’라는 말은 공자(孔子)가 사물의 그침 없는 변화를 일러 한 말로서 이 작품에서는 전쟁의 비극과 덧없음을 자연의 의구함에 대비시켜 강조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패강 무정>
평양(平壤)을 찾아 와도 평양성엔 사람이 없다.//
대동강 언덕길에는 왕닷새 베치마 적삼에 소식(蘇式) 장총을 메고 잡혀 오는 여자 빨치산이 하나.//
스탈린 거리 잎 지는 가로수 밑에 앉아 외로운 나그네처럼 갈 곳이 없다.//
십년 전 옛날 평원선(平元線) 철로 닦을 무렵, 내 원산(元山)에서 길 떠나 양덕(陽德) 순천(順川)을 거쳐 걸어서 평양에 왔더니라.//
주머니에 남은 돈은 단돈 십이 전(十二錢), 냉면 쟁반 한 그릇 못 먹고 쓸쓸히 웃으며 떠났더니라.//
돈 없이는 다시 안 오리라던 그 평양을 오늘에 또 내가 왔다#평양을, 내 왜 왔노.//
대동문(大同門) 다락에 올라 흐르는 물을 본다. 패강 무정(浿江無情) 십 년 뒤 오늘! 아, 가는 자 이 같고나, 서울 최후의 날이 이 같았음이여!
<꿈 이야기>
1961년(41세) <사상계>에 발표한 시이다. 꿈의 문을 열고 들어간 시인이 그 곳에서 만나게 된 ‘마을’과 ‘바다’라는 두 개의 시적 공간을 통해 죽음에 대한 초월 의지를 담담한 어조의 이야기체 형식을 빌려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꿈 이야기>에서의 ‘문’은 화자를 아름다운 꿈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환상의 문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를 투시할 수 있는 실존의 문이다. 이렇게 시인은 소멸과 허무의 일반적인 죽음 의식을 버리고 삶의 연장으로서의 죽음, 또는 삶과 환치할 수 있는 죽음을 보여 줌으로써 생과 사를 초월하고 싶어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꿈 이야기>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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