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문학파
해외 문학파의 형성
해외 문학파란 1926년 일본 도쿄에서 ‘해외 문학 연구회(=외국 문학 연구회)’를 만들고 이듬해 동인지 «해외 문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을 말한다. 구성원으로는 주로 외국 문학을 전공하던 유학생인 이하윤, 김진섭, 정인섭 등이 있었다.
사실 이인직을 선두로 하여 우리 근대 문학 초기에서 일본 유학은, 문학을 하겠다는 사람 치고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오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을 만큼 필수 과정이 되다시피 한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치를 떨면서도 선진 문물을 접하기 위해 앞 다투어 적국으로 떠났던 것이다. 이런 식의 문학 수업은 우리 현대 문학 형성에 일정한 밑거름이 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허영심의 충족, 무분별한 모방과 같은 이식(移植)의 부작용도 많이 나타났다. 해외 문학파는 선배들의 이식 문화적인 시행착오와 부작용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좌익과 우익을 동시에 지양하면서 민족애와 범세계적 문학 건설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출범한다. 중도의 민족 문학 건설을 표방한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서구 문학을 소개하고 이론을 전개하던 «해외 문학»이 2호만에 종간되자, 사실상 ‘해외 문학파’라고 하면 이 잡지의 동인뿐 아니라 외국 유학 중 서구 문학의 영향을 받아들인 문인 모두를 일컫는 말이 된다. 따라서 넓은 의미로 본다면 1920년대부터 계급 문학에 앞장섰던 문인이나 서구 문학에 심취한 사람들은 모두 해외 문학파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해외 문학파 논쟁
새로운 세대의 등장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우리 문단에서는 프로 문학이 무르익지만, 얼마 지나지 않나 독자는 물론이고 계급주의 성향을 보이던 일부 문인조차 프로 문학의 지향점과 방법론에 대해 차츰 회의하게 된다. 바로 이때를 틈타 «시문학»이나 «문예월간»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정지용,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유치진 등 해외 문학파 작가들은 뛰어난 기량, 프로 문학에 대응되는 자유와 개성을 앞세워 문단과 독자층에 깊이 파고들었다.
또 해외 문학파 중에는 모더니즘의 물결을 일으킨 김기림, 그리고 이헌구, 김진섭, 정인섭 등 이론과 지식을 갖춘 비평가가 여럿 있었다. 이들이 여태껏 지리멸렬하던 자유 문학 인영에 가세하자 프로 문학을 중심으로 흘러가던 문단의 풍향이 바뀌고, 오랫동안 이론 영역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프로 문학 진영을 바싹 긴장시키게 된다.
해외 문학파 논쟁
1930년대에 들어 해외 문학파가 속속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자 이들의 문단 진출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프로 문학 진영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제동을 걸기 시작하고, 급기야 논전에 이르게 된다.
1931년 임화는 <1931년 간의 카프 예술 운동의 정황>에서 해외 문학파를 소부르주아적 집단이라고 꼬집고, 송영도 같은 해 <1931년도의 조선 문단 개관>에서 해외 문학파가 “동경 유학생 중의 우익적 문학인”이며, “조선의 좌우익을 함께 비난하였으나 실은 우익적”이라고 지적한다. 이처럼 프로 문학가들은 해외 문학파의 노선이 우 편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주로 비판한다.
이에 대해 이헌구는 1932년 잇단 평론을 통해 임화 등이 견해가 부당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 문학사를 크게 3기로 나누는데, 1기는 최남선과 이광수가 서양 낭만주의 작품을 번역한 시기, 2기는 김억의 «오뇌의 무도»를 비롯한 신시 운동이 일어나고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은 소설가들이 나타난 시기, 그리고 3기는 자신이 동인이었던 «해외 문학»을 중심으로 서구 문학에 대한 다양한 소개와 실험이 이루어진 시기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해외 문학파의 위상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이후로도 프로 문학 진영에서는 임화, 송영, 이갑이 등이, 해외 문학파에서는 이헌구, 김진섭, 김기림, 박용철 등이 나서 한동안 논쟁이 이어진다. 이러나 이러한 논전은 카프 2차 검거와 뒤이은 해체로 사그라진다.
해외 문학파 이후
1930년대 중반 이후 이원조, 백철, 김환태, 최재서 등의 쟁쟁한 신세대 비평가들은 해외 문학파의 맥을 이으며 세력을 형성한다. 이들은 ‘순수 문학 논쟁’과 ‘휴머니즘 논쟁’ 등으로 다시 프로 진영과 맞서게 된다.
시문학파
«시문학»의 등장
1920년대 말에는 내부 분열과 일제의 탄압, 민족 문학파와 해외 문학파의 끈질긴 간섭 등으로 카프의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했다. 게다가 ‘조선심’을 외치며 민요시 운동과 시조 부흥을 외치던 국민 문학파도 차츰 활력을 잃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식민지 문학이 조금씩 난숙기에 들어선 1930년, 문학의 큰 줄기를 이루는 한 무리의 시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1930년 3월 창간된 시 전문지 «시문학»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일명 ‘시문학파’로 불렸다. 보통 박용철, 김영랑, 정지용, 신석정, 이하윤, 정인보 등을 가리켜 시문학파라고 한다. 이 중 정지용과 이하윤은 이미 상당한 경력을 가진 기성 시인이었고, 박용철과 김영랑은 «시문학»을 통해 비로소 문단에 등장하는 신인이며, 신석정은 미미한 시작 활동이 «시문학»에 의해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은 재등단 신인에 해당한다.
시문학파는 «시문학»을 비롯해 1931년 발행되는 «문예월간», 1934년 발행되는 «문학»을 주요 무대로 활동하여 이른바 ‘시문학파 문예지의 계보’를 형성한다. 그들 중에서도 시문학파의 특징을 가장 풍부하게 드러낸 시인은 김영랑과 박용철이다.
시문학파의 특징
시문학파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거리를 두고, 문학 자체의 자율성과 미학을 추구한 시인들이 주도하였다. 때문에 시문학파는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점을 내세워 언어의 조탁과 전통적인 시가 율격에 기초한 시의 음악성 회복에 관심을 보인다. 이를 통해 국어의 시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하였다. 그렇게 1920년대 중반 이후 각종 이념의 도구가 되곤 했던 우리 언어를 다듬고, 시를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빛을 뿌리는 예술로 다시 세운다. 이런 시문학파의 집념은 박용철이 “우리의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라고 했을 만큼 집요했다.
특히 정지용의 작품들은 전통성과 모더니즘의 경향을 동시에 지양 · 극복하는 독특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대의 한국 근대시를 한 단계 뛰어넘는 괄목할 성과를 이루어 낸다. 이렇게 1930년대의 한국시는 바야흐로 ‘현대적’인 특징들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그 개화의 모습은 1930년대 중반 무렵의 모더니즘 문학 운동에서 발견된다.
시문학파의 성과
시문학파의 시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고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 쓴, 도피 문학 또는 가벼운 문학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시문학파만큼 언어를 갈고 다듬은 이들도 없었으며, 시가 율격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섬세한 내면 공간을 형상화한 유파도 달리 찾기 어렵다. 또한 시문학파의 시는 본래 의도대로 관념성과 정치주의적 편향성을 극복하였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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