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의 생애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1888~1968)는 충청도 괴산에서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의 증조부는 이조 판서를 지냈고 조부는 이조 참판을 지냈다. 홍명희의 풍산 홍씨 문중은 혜경궁 홍씨, 홍만종 등을 배출하였으며 자체로 문고를 이룰 만큼 많은 저술을 남긴 집안으로 유명하다.
홍명희는 1890년(3세)에 어머니가 병사한 후 증조모와 대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는데, 어릴 적에 한학을 익히고 여덟 살에 한시를 지을 만큼 신동이었다. 그는 경전 외에도 <삼국지>와 같은 중국 소설을 읽으며 성장기를 보낸다.
1900년(13세)에는 을사조약 때 자결한 민영환의 재종 민영만의 딸과 혼인한다. 홍명희는 부인과 금슬이 매우 좋아 자녀들 앞에서도 부인을 아끼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고 하며, 많은 지식인들이 조혼한 부인을 버리고 신여성과 재혼하던 유행과 달리 부부가 평생을 해로한다.
1902년(15세)에는 서울 중교의숙에 입학에 신학문을 접하고, 1903년(16세)에는 장남 기문을 낳았다. 두 부자는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고, 당시 홍명희의 아버지인 홍범식 역시 서른셋의 젊은이였다. 홍명희는 스스로도 “형제와 같은 부자”라고 말할 만큼 기문과 줄곧 동반자 관계를 유지한다. 두 부자는 담배도 마주 피워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홍명희는 1906년(19세) 일본으로 가서 일 년 간 일본말을 철저히 배우며 기초를 다지고, 이듬해 다이세이 중학에 편입해 1910년까지 다닌다. 당시 여느 문인들이 속성으로 학교를 다녀 졸업장만 따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이 무렵 홍명희는 일본과 서양의 문학을 접하여 도스토예프스키, 바이런 등의 작품을 읽고, 좌파 사상가들의 저술도 많이 읽는다. 이광수, 최남선 등과 만나 교유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일 합방 이후
유학 시절 내내 민족 차별에 회의를 느끼던 홍명희는 1910년(23세)에 귀국한다. 그런데 같은 해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금산 군수이던 아버지가 비분강개하여 자결한다. 홍명희는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액자에 끼워 놓고, 일생 동안 아버지의 명예를 잃지 않기 위해 조심하였다.
3년 상을 치른 홍명희는 1913년(26세) 집을 떠나 만주,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떠돈다. 이때 신채호 등과 만나 자주 독립 사상에 감화 받고, 1919년(32세) 3 · 1 운동에 앞장섰다가 감옥살이를 한다. 1920년(33세)에는 만기 출소했지만 집안 형편이 이미 기 데다 삼남 기하까지 죽는 악재가 겹친다.
1923년(36세)에는 좌익 단체인 ‘신사상연구회(=화요회)’에서 간부로 활동하고, 1924년(37세) «동아일보» 편집국장, 1927년(40세) 시대일보사 사장 등 언론계의 일을 주로 하였다. «동아일보» 재직 당시에는 2천 원이라는 거금을 걸고 <춘향전>을 현대 소설로 개작한 작품을 공모하고, 1925년(38세)에는 우리 신문 역사상 최초로 신춘문예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 문학의 미래를 개척하는 데 앞장선다. 1927년(40세)에는 신간회 창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시대일보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후 교직 생활을 하던 홍명희는 1928년(41세) 11월,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한다. 이후 1940년까지 <임꺽정>은 홍명희가 옥에 갇히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몇 차례 연재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였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막을 내렸다.
해방 이후
1945년(58세)에는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된다. 이 시기쯤부터 정치 운동에도 나서 1947년(60세)에는 중도 좌파인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고, 이듬해 당원들과 월북하였다. 홍명희의 월북은 그가 공산주의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친일 세력이 오히려 권력의 중심에 진입하는 남한의 정국에 대한 회의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후 북한에서 홍명희는 부수상과 과학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다른 대부분의 문인들이 숙청당하는 가운데서도 순탄한 길을 걷다가, 1968년(81세) 사망하였다. 그의 무덤은 북한 혁명열사릉에 있으며, 빗돌에 “홍명희 동지 내각 부수상 1888년 7월 3일생 1968년 3월 5일 서거”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임꺽정>
임꺽정은 명종 14년인 1559년에 등장하여 관리들과 토호 세력에 맞서 의적 활동을 벌이다가 조정에 의해 포살된 실존 인물이다. 홍명희는 «기재잡기»와 «명종실록» 등에 나오는 사료들을 축으로 하고, 여기에 다시 야담과 야사들을 섞어 버무려 <임꺽정>을 집필하였다. 홍명희는 4백 년의 시차가 있음에도 여전히 지배 계층의 억압으로 신음하는 민중의 삶과 현실에 내재된 모순을 눈여겨보고, 그러한 모순 구조를 역사 속의 실존 인물을 내세운 것이다.
서지사항
<임꺽정>은 1928년(41세)부터 1940년까지 연재되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중단이 있었다.
1928년 11월~12월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하여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까지 연재하던 중 신간회 민중 대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중단됨
1932년 12월~1935년 12월 «조선일보»에 ‘의형제편’을 마치고 ‘화적편’을 연재하던 중 병으로 중단됨
1937년 12월~1939년 7월 «조선일보»에 연재를 재개하다가 중단됨
1940년 10월 «조광»에 1회 연재 후 영구 중단됨
이후 1939년(52세) 조선일보사에서 총 4권으로 된 «임꺽정»으로 출간되고, 해방 후 최근까지도 여러 차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구성
<임꺽정>은 전편이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 ‘의형제편’, ‘화적편’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보인다.
- 도입부 : 임꺽정의 청석골 활동
-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 의형제편 화적편
- 제1장 박유복이, 제2장 곽오주, 제3장 길막봉이, 제4장 황천왕동이, 제5장 배돌석이, 제6장 이봉학이, 제7장 서림, 제8장 결의 제1장 청석골, 제2장 송악산, 제3장 소굴, 제4장 피리, 제5장 평산쌈, 제6장 자모산성
‘의형제편’과 ‘화적편’은 ‘장’으로 구성되고, ‘화적편’의 제1장인 ‘청석골’은 소제목 없이 번호로 된 1~6개의 절로 다시 나뉜다. <임꺽정>은 ‘편’, ‘장’, ‘절’의 각 부분이 독립된 단편 소설과 유사한 성격을 띠는데, 이와 같이 소설 전체를 작은 단위로 구분하여 독립성을 추구하는 구성 방식은 황석영의 <장길산>을 비롯한 많은 대장편 소설들에 영향을 미쳤다.
표현상의 특징
강담사식 서술 방식
소설의 서술 방식, 또는 소설에서 등장인물을 제시하는 방법은 크게 보여주기(showing, =극적 방법)와 말하기(telling, =파노라마적 방법)로 나눌 수 있다. 모든 소설은 보여주기와 말하기의 수법을 혼용하여 스토리를 전개시켜 나가는데, 보여주기 수법이 근대 소설의 특징 중의 하나이고 리얼리즘 소설에서 많이 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리얼리즘 소설이 보여주기 수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어느 수법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으며, 보여주기와 말하기 수법을 각각 적절한 곳에서 사용해야 효과가 극대화된다.
보여주기란 소설 속에서 주로 묘사와 대화를 통해 화자 또는 작가가 소재를 장면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수법이고, 말하기란 화자 또는 작가의 개괄적 설명, 편집자적 논평, 등장인물의 심리 분석 등을 통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기법이다. 고전 소설은 대개 말하기 수법을 주로 하여 전개된다.
그런데 <임꺽정>에서는 말하기 수법의 일종인 강담사적 서술 방식이 나타난다. 강담사적 서술 방식이란 마치 강담사(=전기수)가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설화체의 이야기 구연 방식을 말한다. 역사 소설 <임꺽정>에서는 작가가 조선의 정조를 가미하기 위해 고전 소설의 수법을 의도적으로 도입하였다.
민중 언어의 구사
<임꺽정>에서는 속담과 관용어, 고유어든 물론 하층의 비속어까지 그대로 사용한다. 그럼으로써 상황을 더욱 익살스럽게 하기도 하고 표현을 풍부하게 가꾸기도 한다. 또한 민중 언어의 사용은 민중의 생활을 가식 없이 잘 드러내 줌으로써 대화나 이야기 전반에 생동감을 불어 넣는 기능을 함께 가진다.
현실 풍속과 세태의 묘사
<임꺽정>에는 머슴살이나 데릴사위제, 과부 보쌈과 같은 조선 시대의 풍속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또 “여편네가 사내를 너무 밝히면 애를 잘 못 낳는답디다.”와 같은 속설까지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전통적 소개를 최대한 살리고 작품에 현실성을 더한다.
<임꺽정>의 한계
<임꺽정>은 오히려 하층의 핵심인 농민의 삶과 생활을 소홀이 다루었다는 점, 작품 후반부에서 임꺽정이 혼자 축첩을 하는 등 향락에 젖어드는 것, 무고한 평민에게까지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다는 점 등은 작품의 의도가 훼손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측면은 홍명희가 왕조의 실록을 지나치게 충실히 따른 데서 비롯된 듯하다.
또한 당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려던 시도 역시 작가 자신의 혼돈 때문에 약화된 느낌이 없지 않다. 게다가 임꺽정과 일곱 두령들을 제외한 나머지 졸개들의 삶과 활동은 거의 무시되어 있는데, 이 때문에 임꺽정의 울분이 그저 자신의 신분에서 비롯된 개인적 복수심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준 것 역시 <임꺽정>의 한계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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