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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테마 22. 계급문학과 카프(KAPF)

2014. 5. 6. by 솜글

염군사와 파스큘라, 그리고 신경향 문학

동반자 작가들의 활동이 집단성을 띠게 되는 현상을 두고 클라르테 운동이라고 한다. 이 이름은 프랑스 작가 앙리 바르뷔스(H. Barbusse)의 소설 <클라르테(Clarte)>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 클라르테 운동은 일본을 거쳐 1920년께까지 상하이의 조선 사회당등에 유입된다. 이윽고 국내에서도 서투르나마 문학의 사회주의적 운동의 움직임이 일어 19229월 염군사(焰群社)가 발족하였다. 염군사는 무산 계급 해방을 위한 문화를 가지고 싸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경향지 «염군»을 내려고 했지만 검열 때문에 흐지부지되었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파스큘라(PASKULA)가 결성된다. 이 조직은 염군사 구성원들에 비해 문학적 경험과 지식의 깊이를 확보하고 있었던 박영희, 안석영, 김형원, 이익상, 김기진, 김복진, 연학년에 의해 결성되었지만, 역시 본격적인 문학적 활동보다는 사회 현실에 대한 감정적 대응을 앞세웠다.

염군사화 파스큘라는 모두 문학의 현실적 기능에 주목하여 만들어진 문학 단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염군사가 사회 운동에 좀 더 무게를 두었다면, 파스큘라는 한결 더 문학 지향적이라는 점은 다르다. 이 두 단체는 카프의 모체가 된다.

카프의 출범과 전개

카프의 결성과 계급 문학 시비론

러시아 혁명에서 발원해 일본을 거쳐 들어온 급진적인 계급 문학론은 점점 활발하게 진행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1925년의 계급 문학 시비론이다. 계급 문학 조직이 점차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김동인, 염상섭, 이광수, 나도향 등 민족주의 작가들이 이에 위기를 느끼고 대응에 나선 것이다.

결국 19252«개벽»이 꾸민 특집 <계급 문학 시비론>에 박영희, 김기진, 김석송, 그리고 반대 진영의 김동인, 염상섭, 나도향, 이광수 등이 평론들을 실으면서 격렬한 계급 문학 시비론이 진행되었다.

카프의 출범

계급 문학 시비론이 진행되면서 계급 문학 진영과 민족 문학 진영의 대립은 날로 거세어 갔다. 그러던 중 19258,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즉 카프(KAPF)가 정식으로 출범한다.

카프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반발이나 빈민에 대한 감상적 접근에서 시작된 신경향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뚜렷한 계급성과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앞세워 결성된 체계적인 정치 운동 조직이다. 이 조직은 염군사와 파스큘라의 연장선에 놓여 있지만, 두 단체에 비해 계급 문학을 많이 밀고 나간다.

창단 멤버는 박영희, 김기진, 김익상, 이상화 등의 파스큘라 구성원, 그리고 이적효, 송영 등의 염군사 회원들이다. 이후 한설야, 이기영, 윤기정, 유진오, 조명희 등이 가세하고, 19261월 기관지 «문예운동»을 펴내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리고 점차 문단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고, 1935년 해체하기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카프 문인들 / 사진 출처 : 다음블로그 필라테리아(https://blog.daum.net/philook/15719830)

내용 · 형식 논쟁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문화나 사상이 들어올 때에는 그에 대한 저항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1925년의 계급 문학 시비론은 불가피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듬해 박영희와 김기진 사이에 벌어진 내용 · 형식 논쟁은 아무도 예상치 못하던 것이었다.

박영희와 김기진

서울에서 태어난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 1901~?), 그리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난 팔봉(八峯) 김기진(金基鎭, 1903~1985)은 배재고보 시절 3년 동안 하루라도 만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만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김기진의 어머니는 박영희의 편지들을 보고 여자로 오해하여 야단 친 적까지 있다고 한다.1920년 김기진이 일본으로 건너자나 박영희도 따라갔는데, 두 사람 모두 학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학창 시절부터 괴테, 보들레르, 베를렌 등의 작품을 읽으며 서구 탐미주의에 심취했던 박영희는 1921(20) «장미촌» 창간호에 시 <적의 비곡>을 발표하면서 데뷔한다. 이듬해인 1922(21)에는 «백조» 창간에 앞장서고 이후 «백조»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시 <월광으로 짠 병실>로 그는 백조파를 대표하는 유미주의 시인으로 떠오른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 머물던 김기진 역시 «백조», «개벽» 등에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박영희 못지않은 활동을 벌인다. 그런데 김기진은 이 무렵 러시아와 일본의 사회주의 사상에 감화되고, 이를 박영희와 박종화를 비롯한 국내의 «백조» 동인들에게 편지로 전한다. 그 중심 내용은 당시 백조파가 따르던 예술 지상의 퇴폐적 낭만주의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마르크스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박영희는 얼마 후 김기진이 귀국하자 아예 계급주의 문예관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1923(23)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1924(24)부터 1925(25)에 걸쳐 계급 문학의 이념이 듬뿍 담긴 평론들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사상 전환을 널리 알렸다. 이 무렵 신경향 문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도 박영희이다.

마침내 1925년 두 사람은 이기영, 조명희, 심훈 등과 더불어 본격적인 프로 문학 단체인 카프를 조직하고 계급 소설을 발표한다. 두 사람은 소설 창작과 비평을 겸하면서 프로 문학가로서의 방향을 확고히 다졌다.

박영희와 김기진의 내용 · 형식 논쟁

김기진은 1920년대 초, 아직 계급주의프로 문학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백조시대에 사회주의 바람을 몰고 와 카프의 결성까지 끌고 간 장본인이다. 하지만 그는 곧 계급의식만으로 도배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문학 작품들에 적잖은 회의를 느낀다. 이런 생각 끝에 192612, 김기진은 <문예 시평>을 통해 박영희의 소설 <철야>, <지옥 순례> 등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피력한다. 여기서 그는 아무리 계급적 소설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소설 형식은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방법론적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김기진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프로 사상가가 되어 있고 카프 내 주도권까지 잡고 있던 박영희는 이에 발끈한다. 박영희는 아직 투쟁기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형식미에 얽매인 소설적 건축물을 만들려는 예술가는 프롤레타리아 문예 정신을 망각한 것이라고 반격을 가했다.

당시 프로 문학은 외부 민족주의 문인들로부터 그렇지 않아도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발생한 김기진의 문제 제기는 결국 카프 맹원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결과를 낳았다. 몇 차례의 반론이 오간 뒤, 이 논쟁은 결국 문단 외부의 급진적 당원 세력의 압력에 의해 김기진이 한 발 물러서면서 일단락되었다. 이론적 합당성이 아닌, 파벌상의 우위에 의한 박영희의 승리였다.

내용 · 형식 논쟁 이후

내용 · 형식 논쟁 이후 박영희는 1927(27) 신간회를 주도한다. 그러나 차츰 임화, 이북만, 김남천 등 제3전선파라는 신진 세력에 밀려나고 만다. 이 일로 회의를 느낀 그는 1931(31) 중앙일보사에 들어감으로써 사실상 카프를 떠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카프 검거 때마다 체포를 피하기 어려웠다. 출옥 후에는 1939(39)즈음부터 해방 전까지 친일 단체에 이름을 걸고 활동했고, 해방 후 교사와 대학 강사로 일하던 중 6 · 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한편 김기진은 내용 · 형식 논쟁 이후 여러 논쟁을 거치면서 온건 성향의 프로 문학 비평으로 물러서고, 창작 작품 역시 1929(27)부터 <전도 양양>, <청년 김옥균>과 같은 역사 소설 계열로 전환하였다. 이후 그는 여러 신문사의 기자직을 거치다가, 일본에서 독립 자금을 들여오다 발각되어 해방 때까지 평양 형무소에 갇혀 지냈다. 해방 후에를 출판사를 차려 경영하는데, 6 · 25 전쟁 때 이른바 인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 김기진은 남한에서 몇 편의 작품을 쓰고 «경향신문»에서 일하는 한편 사회 복지 사업에 앞장서다가 1985(83)년 숨을 거두었다.

카프의 세대 교체

아나키즘 논쟁

흔히 무정부주의또는 무국가주의로 번역되는 아나키즘(anarchism)은 본래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에서 산업 혁명의 여파로 급속한 정치 · 경제적 변환이 일어나자 이에 대항해 나타난 사조이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독립 운동이나 사회 운동을 목적으로 중국에 망명한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는데, 이에 따라 의열단과 다물단, 흑우회 등이 조직되고 곧 국내에 유입되었다. 이 무렵의 카프는 아직 기틀을 확고히 잡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불안정한 상태였다.

아나키즘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김화산은, 카프가 처음의 취지와 달리 예술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앞세워 하나의 당()으로 자리 잡으면서 문학의 자유까지 간섭하자 이에 불만을 품게 된다. 그리고 1927, <계급 예술론의 신전개>에서 아나키즘이라는 생소한 이념을 제시한다. 여기서 그는 프로 문학 전반에 대한 부정에 가까운 목소리를 낸다. 특히 김화산은 계급주의가 종교와 같은 미망에 빠져 있다고 하면서, 정치와 분리된 예술의 독자성을 주장한다.

이 글은 카프 내에 내용 · 형식 논쟁보다 훨씬 강렬한 바람을 일고 왔고, 윤기정, 한설야, 임화, 조중곤 등이 김화산의 글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여러 차례의 반론이 오가면서 한동안 격렬한 논쟁이 오가고, 결국 김화산 등의 아나키스트들은 조직에서 제명되었다. 아나키즘 논쟁은 그야말로 대 논쟁이긴 했지만 이론상 별로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박영희의 방향 전환론

김기진과의 논쟁 이후 박영희는 자신의 승리가 다른 맹원들의 도움 덕분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곧 자신의 문학론을 확고히 하기 위한 길을 모색한다. 그러던 차에 마침 아나키즘 논쟁이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박영희는 전격적인 방향 전환을 시도한다.

그는 1927(27)에 일련의 평론들을 통해 정치 투쟁 목적에 입각한 방향 전환론을 펼친다. 지금은 경제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의 방향 전환기에 있으며, 이제 계급 문학은 이전의 빈궁 소설, 자연 생장적 소설로부터 계급적 혁명을 위한 목적의식을 가진 문학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영희는 선언만 내세울 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원리나 실천 방안은 내놓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정치와 문학을 분리하기도 하고 통합하기도 하는 등 모순된 발언까지 하며 일관성이 결연된 사상을 노출하고야 만다.

3전선파의 등장

박영희가 주도한 방향 전환론은 모호한 태도와 모순 때문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카프는 박영희의 논의에 따라 임시 총회를 열어 조직을 개편하고, 과감한 투쟁을 위해 무기로서의 예술 운동에 주안점을 둘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개편은 표면상으로는 박영희가 주도한 것 같지만, 사실은 도쿄에서 «3전선»을 내며 일본 나프(NAPF)와 끈이 닿아 있던 이북만, 조중곤, 김두용 등에 의해 조종되었다. 이들을 제3전선파라 한다. 이후 제3전선파의 중심인물인 이북만은 박영희의 방향 전환론을 분석, 비판하면서 급진적 방향 전환을 시도하고, 카프의 신진 세력으로 떠오른다.

3전선파는 표지에 무기로서의 예술이라는 구호가 박힌 «예술운동»을 펴내고, 아울러 명목상 우두머리 자리에 있지만 차츰 카프에서 멀어져 온 박영희와 김기진에게 반성을 촉구한다. 또 김동환, 이익상 등을 제명하는 등 강력하게 카프를 장악해 나갔다.

신간회와 절충주의

신간회

1925년의 계급 문학 시비론으로 논쟁을 벌인 양측은 우선적인 과제가 민족 해방임을 새삼 인식한다. 이에 따라 단일한 운동 전선이 필요하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1927년 드디어 통일 전선체인 신간회(新幹會)가 만들어졌다. 신간회는 사회주의계, 천도교계, 비타협 민족주의계, 기타 종교계 등 각계각층이 참여함으로써, 이듬해에 가면 회원 3만 명에 이르는 전국적 규모로 발전하였다.

박영희는 물론 제3전선파의 주도자인 이북만까지도 신간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대부분의 카프 맹원 또한 신간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일부 극좌파 계급론자들은 신간회가 오히려 협동을 방해한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급진 좌파 세력 때문에 좌우 갈등이 심화되고, 1929년 민중 대회를 준비하던 중 신간회의 주요 회원들이 대거 검거되는 등 악재를 거친 신간회는 결국 1931년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사회주의계는 합법적인 활동 공간을 잃게 되며, 국내에서는 통일 전선 운동의 맥이 끊긴다.

절충주의의 움직임

신간회가 조직될 무렵에는 민족 문학파와 계급 문학파가 상대방의 이념을 어느 정도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가장 적극적으로 좌우 세력의 대립은 완화시키려고 노력한 사람은 양주동이었으며, 중간적 문학관을 가지고 있던 염상섭도 합세한다.

카프 진영에서는 절충파를 민족주의의 한 분파로 간주하여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결국 절충론은 호응보다는 양측 모두의 비난을 더 많이 받긴 했으나, 뒷날 나오는 동반자 문학이나 휴머님즘 문학 등 다소 유연한 형태의 문학에 일정한 실마리를 제공하였다는 의의를 가진다.

볼셰비키 문예 운동

3전선파는 1927년 박영희의 방향 전환론에 개입한 것을 시작으로 한동안 카프를 주도한다. 그러나 1930년에 접어들자, 더욱 더 과격한 성향을 가지고 볼셰비키 문예 운동을 외치는 무산자파가 등장해 주도권을 쥔다. 이들은 이념성과 당파성을 한결 강화하며 카프를 장악하는데, 중심 인물로는 임화, 이북만, 김두용, 김남천, 안막, 권환 등이 있다.

본래 볼셰비키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정통파를 일컫는 말로, ‘다수파라는 의미이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세력이자 공산당의 전신이기 때문에, 이에 따라 모범적인 공산주의자나 과격한 혁명주의자를 흔히 볼셰비키라고 부르게 된다. 이를 일본의 나프와 선이 닿아 있던 무산자파가 카프에 이입함으로써 볼셰비키 운동이 국내에 들여오게 되었다. 무산자파는 볼셰비키 문예 운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카프의 조직 확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창작 방법 확립이라는 두 가지 명제를 걸었다.

창작 방법론의 전개

<낙동강>에 대한 논쟁

포석(包石) 조명희(趙明熙, 1894~1938)는 박영희의 방향 전환론이 일던 1927(32), 단편 <낙동강>을 발표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 대해 카프 내부에서는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이내 논쟁으로 비화된다.

김기진을 비롯한 한 쪽에서는 <낙동강>이 초기 신경향 소설의 한계를 극복하고 카프의 방향 전환론을 만족시킨 작품이라며 극찬한다. 하지만 제3전선파 쪽에서는 빈곤의 근본적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으며 사건과 인물의 성격에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 논쟁은 당시가 카프의 무게 중심이 제3전선파의 강력한 정치성에 기울어 있던 때였기 때문에 김기진이 자신의 견해를 거둬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신경향 문학은 이 <낙동강>을 계기로 눈에 띄게 변모하는 양상을 보인다. 다시 말해 이전의 절제되지 않은 감정 표현과 맹목적 반항, 틀에 박힌 결말 등을 지양하고, 미진하나마 가난의 원인을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바라보려는 시도가 따르는 등 진일보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도 <낙동강>은 계급적 인식과 전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우리 소설사의 업적으로 꼽힌다. 그리고 <낙동강> 논쟁을 통해 계급 문단은 막연한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창작물을 놓고 논쟁하는 시대로 들어선다.

<낙동강>
성운의 조상은 대대로 낙동강에 살았으나, 식민지 수탈 정책으로 낙동강을 젖줄 삼아 살던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서간도로 이주해 간다.
성운은 독립 운동을 했다가 옥살이를 하고, 출옥 후 유랑민의 틈에 끼어 서간도로 갔다가 부친마저 잃고 만주, 노령, 북경, 상해 등지에서 오년간 독립 운동을 한다. 그러나 그는 낙동강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곧 낙동강 마을로 내려와 굳은 의지로 농촌 야학을 실시하고 소작 조합을 결성하나, 동척의 탄압으로 실패한다. 그리고 백정의 딸이자 여교사인 로사를 만나고, 그녀의 혁명 운동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마을 앞 낙동강 기슭의 갈대밭이 일본인에게 넘어가자 그는 그 땅을 되돌려 받으려다가 잡혀 고문을 당하고 병보석으로 출감한다. 풀려나 인력거에서 내려 배에 오른 성운은 로사에게 민요를 불러 달라고 한다. 그런데 노래를 마칠 때, 성운은 미친 사람처럼 낙동강 물을 만지며 날뛴다.
병든 성운 일행이 낙동강을 건너가고 며칠 뒤, 갈 때보다 몇 배나 많은 행렬이 박성운 동무의 령구라고 쓴 기폭을 들고 마을 어귀에서 강 언덕을 향해 나온다. 그리고 그와 함께 활동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만장을 들고 박성운의 운구를 뒤따른다. 이해 첫눈이 날리던 어느 늦은 아침, 성운이 말한 대로 혁명의 기수가 되겠다고 생각한 로사는 구포역에서 차를 타고 북쪽을 향해 떠난다.

대중 예술론

대중 예술론의 대두

카프는 자체적으로 이론을 검토하고 어떤 방향으로 전환할 것인가를 고심하던 끝에 또 하나의 문제에 봉착한다. 일제하에서는 방향 전환론을 만족시킬 만한 작품이 나오기 어려우며, 설령 그런 작품이 나온다 해도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자나 농민 계급이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산 계급은 대부분 문맹이거나 지식을 갖추지 못한 상태인데, 이런 상황에서 딱딱한 작품은 오히려 대중을 문학에서 멀어지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었다.

이런 움직임은 1928년 한설야의 <1928년의 대중간의 문예 관계는 어떻게 진전될까>에서부터 표면화된다. 이어 김동환도 새끼를 꼬며 읽어도 전후 맥락이 다 알리도록쉬운 말로 작품을 써야 한다고 했고, 잇달아 쉬운 문학의 필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김기진의 통속 소설론

192811, 김기진의 <통속 소설 소고>는 큰 파문을 일으킨다. 이 논문에서 김기진은 작품이 아무리 옳은 의도를 담더라도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면 소용이 없으니, 쉽고 재미있는 통속 소설을 쓰자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문체는 쉽고 간결해야 하며, 성격 묘사보다 심리 묘사에 치중에 사건의 기복을 뚜렷하게 쓰고, 활자를 쓰게 인쇄하고 표지를 화려하게 꾸며야 하며 책의 가격도 싸야 한다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대중이 눈으로 듣는 것보다 귀로 듣는 데 더 익숙하니 민요 형식 같은 운문체의 프로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작품을 쓸 때는 소재를 노동자와 농민의 일상에서 취할 것, 비극을 주로 할 것, 희망과 용기를 제시할 것, · 구 도덕의 충돌을 다루되 반드시 신사상이 승리하게 할 것, 정사 장면은 피할 것 등의 세부 지침까지 내놓고, 이를 충족시키는 대표적 형식으로 단편 서사시를 제안한다.

임화 등 카프 진영에서는 이러한 김기진의 이론이 검열 문제에 맞추라는 것은 무장을 해제하는 말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을 세차게 비판하고, 김기진을 타협적인 개량주의자로 몰아붙인다.

이후로도 김기진 등은 문학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이론을 더 전개하는데, 취지 자체는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카프 진영이 여전히 대중을 문학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대중 문학론의 핵심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

안막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

무산자파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안막은 창작 방법론의 볼셰비키화를 논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1928년에는 임화가 제기한 전위에 관점에 맞추어 사회적 사실주의의 이론을 수용하고 체계화한다. 이것이 안막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이다. 안막은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이 현실을 현실대로 그리는 객관적 예술 태도라고 하고, 이것이 혁명적 낭만주의로 계승, 변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그 동안의 프로 문학은 너무 도식적으로 인물을 묘사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하면서 노동자와 농민 속으로 직접 들어가 그들의 생활 감정을 몸소 익힌 후 작품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주장의 구체적 성과로 주목되었던 작품은 김남천의 <공장 신문>(1931)이었다.

한설야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

한설야는 무산자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리얼리즘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1931<사실주의 비판작품 제작에 관한 논감>에서 대상을 당위로 보지 말고 대상 자체의 성질, 즉 내적 필연성의 인식에 따라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그러려면 작가가 서재에서 글을 쓸 것이 아니라, 공장과 일터, 농촌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한설야의 논의는 대중을 대상으로 보지 않고 주체로 인신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프로 이론가들보다 한 발 앞선 인식론적 전환을 보여주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농민 문학론과 동반자 문학론

1930년 소련에서는 농민 문학과 동반자 문학이 주요 과제로 떠오른다. 그러자 국내 몇몇 프로 작가들도 이를 받아들여 다양한 논의를 펼쳤다.

농민 문학과 동반자 문학에 관한 논의는 검거 바람과 뒤이은 카프의 해체 때문에 실천되지 못하고, 이후 1930년대 중반 이후 창작 방법론 차원에서 조금씩 이어지다가 해방 후 다시 일어난다.

농민 문학 논쟁 : 이전의 볼셰비키 문예 운동이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이 카프의 내부에서 활발히 논의되었던 것과 달리, 농민 문학론은 카프 중심과는 다소 거리가 있던 안함광과 백철의 논쟁으로 촉발되었다.

1931, 안함광은 분산된 농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적극 투입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백철은 안함광의 논의가 농민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기계적 좌익주의라고 비난하고, 농민 문학은 프롤레타리아의 것이 아니라 농민 자신의 것이라면서 농민 계급의 독자성을 주장한다.

동반자 문학론 : 동반자 문학이란 작가가 스스로 사회주의 문학 운동에 동참하지는 않지만 사회주의 문학의 대의에는 동조한 문학을 말한다. 본래 1920년대 초 러시아에서 나온 용어로, 소련에서는 예세닌과 톨스토이가 동반자 작가라는 뜻의 파프도키라는 명칭을 얻은 바 있다.

국내에서는 1929년 이후쯤부터 동반자 문학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고, 이효석과 유진오가 카프로부터 공식적으로 동반자 작가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일련의 모호한 논쟁을 거친 결과 문단에서는 동반자 작가들은 프로 성향이 좀 더 짙은 좌익적 동반자 작가(강경애, 박화성 등), 자유주의 성향이 좀 더 짙은 우익적 동반자 작가(유진오, 이효석, 채만식 등)로 나누어 보게 된다. 그러나 논의가 깊어질수록 의견이 더욱 분분해졌을 뿐, 뚜렷하고 명쾌한 동반자 문학론이 정립되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카프가 1차 검거를 겪은 후, 1930년대 전후 프로 문학의 주요 창작 방법론이었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은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유물 변증법적 창작 방법론이 잠시 등장한다. 그리고 다시금 새롭게 떠오른 것이 당시 러시아에서 주목 받기 시작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백철은 1933<문예 시평>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막연하게 소개하고, 이어 안막은 보다 구체적인 소개에 나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이후 한효, 안함광, 김남천, 임화 등에 의해 논의가 진전되면서 프로 문학의 도식성을 스스로 비판하고 혁명적 리얼리즘으로 창작에 임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1935년 카프가 해체되자,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큰 진전 없이 명칭만 남은 채 이후 실천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한 실천, 즉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작 방법론을 만족시키는 작품으로는 이기영의 <고향>과 강경애의 <인간 문제>가 꼽힌다.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비판적 리얼리즘 : 전형적 인물이 전형적 상황에 처해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림으로써 계급사회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리얼리즘으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리얼리즘의 개념이다. 부르주아적 리얼리즘은 비판적 리얼리즘의 하위범주에 속하지만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 사회주의적 전망을 추구하는 리얼리즘을 말한다. 1920~3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프로문학 작품들이 과연 제대로 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속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카프의 위기와 해체

카프 1차 검거와 신간회 해체

1927년 신간회가 해체된 후, 1930년에는 카프도 일제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결국 도쿄에서 들여온 책 «무산자»의 배포, 임화 등이 만든 영화 <지하촌> 등이 걸려들어 1931년 카프 구성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진다. 이때 약 넉 달 동안 안막, 임화, 김남천, 박영희, 김기진, 이기영 등 17명의 임원이 구속되고, 30여 명의 인사들이 검거된다. 다행이 대부분은 불기소로 풀려났다.

전향, 2차 검거, 그리고 카프의 해체

1931년의 카프 1차 검거 사건으로 카프의 많은 임원들은 긴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영희를 비롯한 일부 맹원이 급격한 전향 조짐을 보이며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라고 말한다. 임화와 맹원들은 박영희에 발끈하면서도 한 발 물러서서 자체 반성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19346, 일명 신건설회 사건으로 불리는 2차 검거가 일어난다. 신건설회라는 연극단이 지방 공연에서 배포한 선전 삐라가 발각된 것이다. 일제는 곧 박영희, 김기진, 이기영 등의 간부와 맹원들을 체포하고 1년에서 3년의 실형을 선고한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많은 맹원들이 전향 의사를 밝히고, 더욱이 일본 나프의 해체 소식까지 들린다.

결국 19355월 카프는 자체 내에서 해체를 결정하고 경찰서에 해산계를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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