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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프랑스 여행 URL 복사

루브르 박물관 126개 작품 설명 온라인에서 바로 보기

2022. 1. 23. by 솜글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들입니다. 한국어 인터넷 사이트에서 모은 것들과 외국(영어 또는 프랑스어) 사이트에서 번역해 모은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하세요.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 대표 126개 작품 바로보기

파리 루브르 뮤지엄 대표작들을 온라인에서 바로 볼 수 있게 페이지를 코딩해서 포스팅한다.& 목록은 102개이지만 한 목록 하에 여러 작품이 있는 경우도 있어 총 126개 작품이다. 

참고로 반지층(지하1층?)은 넣지 않았다. 단 하나, 안뜰의 '네 국가의 포로'는 넣었다. 이건 보고 오고 싶어서.

작품 원제는 모두 그냥 프랑스어로 넣었다. 간혹 영어를 넣는 등의 실수가 있을 수 있다. 

한국어 제목, 한국어 작자 이름, 프랑스어 제목, 제작연대 순으로 넣었다.
예) 세례요한의 머리를 받는 살로메, 루이니 Salomé reçoit la tête de saint Jean Baptiste, 15c

 

원래 목록표를 만들어 클릭하면 그 작품 설명으로 바로가게 코딩하려고 했는데, 목록표조차도 너무 길어져서ㅠ 고민 좀 더 해 봐야겠다.

참고 페이지

본문 내용을 PDF 파일로 보고 싶다면 아래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만든 방법, 중점사항, 작품 선정 기준 등도 모두 아래 페이지 참조.


루브르 박물관 Musée du Louvre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미술관으로 2010년 연중 관람 인원이 약 850만 명으로 집계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B.C 4000년부터 19세기에 걸친 각국의 미술 작품약 35,000점을 전시하고 있는 프랑스 국립 박물관이다. 넓이는 약 60,600㎡, 소장품 수는 38만 점 이상, 하루 평균 방문자는 약 15,000명이다.

요새였던 루브르 궁전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재의 건물은 과거에 루브르 궁전(Palais du Louvre)이었는데, 루브르 궁전은 본래 12세기 필립 2세(Phillippe Auguste)가 요새로 건축한 것이 시초이다. 필립 2세는 앵글로노르만 족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외벽, 탑, 내부건물로 된 요새를 지었는데, 아직도 루브르 곳곳에서는 지하홀(Salle Basse) 등 중세 요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루브르의 지하 홀

도시가 점점 커지고 루브르 요새만으로 파리를 보호하기 어려워지자 14세기 후반 샤를 5세는 파리 주변에 거대한 새 성벽을 쌓고 루브르를 왕실 거주지로 개조하도록 명한다. 그러나 초기 루브르 궁전은 임시 거처에 불과했고, 본격적인 왕궁으로 변모한 것은 프랑수아 1세 때였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프랑수아 1세는 낡은 건물을 부수고 그 터에 새로 왕궁을 짓게 하고 벽면 장식은 당대 최고의 조각가인 구종(Jean Goujon)에게 맡겼다. 현재의 카레 궁정 남서쪽 부분 건축물이 그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시설은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때에 추가로 건축된 것으로 파악된다.

궁전에서 박물관으로

루브르가 궁전에서 박물관으로의 탈바꿈을 시작한 건 1682년, 루이 14세가 거처를 베르사유 궁으로 옮기면서 루브르를 왕실의 예술품을 보관·관리·전시하는 공간으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692년에는 루브르에 만들어진 왕립예술아카데미가 그 후 100년 간 수많은 왕실의 예술품들을 보존·관리하고 예술가들을 교육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1699년부터는 왕실 컬렉션을 중심으로 최초의 살롱전을 열고 이후 1~2년에 한 번씩 살롱전을 열면서 박물관으로서의 모습을 다졌다.

루브르가 본격적인 박물관으로서 변모한 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이다.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는 루브르가 국민을 위한 박물관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1793년 8월 10일부터 537점의 회화 작품을 전시해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이후 루브르는 건물의 구조적인 문제로 몇 년 간 임시 폐쇄되기도 했으며,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컬렉션의 규모가 급격히 커지면서 잠시 ‘나폴레옹 박물관(Musée Napoleon)’으로 불리기도 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구조

루브르 박물관은 1874년부터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74년이다. 크게 동쪽으로는 쉴리(Sully) 관과 카레 궁정(Cour Carree), 구 루브르 궁이 자리하고 북쪽으로는 리슐리에(Richelieu) 관과 드농(Denon) 관, 나폴레옹 궁정(Cour Napoleon)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세느 강과 접하고 있어 직사각형에 가까운 구조이다.

지면 높이의 입구에 유리 피라미드가 위치하고 있다. 유리 피라미드는 1988년 10월 15일에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페이(Pei)가 기획·설치한 현대적 구조물로, 유리 피라미드와 지하 단지로 이루어져 있다. 프랑스 정부의 ‘그랑 루브르’ 계획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으며 1993년에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역피라미드(The Inverted Pyramid)로 완성되었다. 주 전시관인 리슐리외(Richelieu) 관, 쉴리(Sully) 관, 드농(Denon) 관은 ‘ㄷ’자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관람객들은 반지층, 1층, 2층을 오가며 관람할 수 있다.

1층 드농관 Room 77 : 이탈리아 회화

메두사 호의 뗏목, 제리코 The Raft of the Medusa,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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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보고 그림에서 느껴지는 격정과 힘에 압도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자였던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가 그린 이 그림은 오늘날에는 낭만주의 회화 운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간주된다. 낭만주의는 고전적인 18세기 미술에서 탈피하여 감정과 사실성을 강조한 미술 사조인데, 이 그림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이어주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자세히 보면 바다 저 멀리로 희미한 배의 돛이 모인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처절하게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 힘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사람은 깃발을 들고 안간힘을 다하여 구조를 요청하고 있고, 누군가는 지쳐 쓰러지고 있는 사람에게 배를 가리키며 희소식을 전하고 있다. 어떤 노인은 구조를 체념하고 턱에 팔을 괴고 자식인 듯 시체를 안은 채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는 죽은 자들의 시체가 즐비하다.

희미하게 보이는 배의 돛

삶과 죽음의 절박한 갈림길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장 극적으로 역동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난파된 프랑스 정부의 전함 ‘메두사 호’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재현한 것이다. 메두사 호가 난파되자 무능력한 선장과 장교들은 150명의 선원과 승객들을 버리고 구명보트를 타고 가버렸는데, 그중 살아남은 15명은 임시 뗏목 위에서 절망에 빠져 심지어 동료의 시신을 먹는 야만적인 행위를 하면서 죽어가다가 구조되었다. 1800년대 당시 프랑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확장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배를 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떠났다. 항해를 위해  자격도 없는 퇴역군인들이 왕실에 뇌물을 주고 선장을 하는가 하면 정원 이상의 터무니 없는 많은 승객을 싣고 항해하기도 했다. 난파된 메두사 호 역시 정원이 250명인데 400명이 승선했었고, 이 배의 선장은 20년 동안 겨우 몇차례 항해한 경력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아프리카 세네갈을 향하고 있었다.

결국 메두사 호는 결국 암초에 부딪혀 좌초했고, 그러자 선장과 귀족들은 구명정으로 탈출해 버려 하층민 승객들만 표류하게 되었다. 약 열흘 간의 표류 기간 동안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스스로 바다에 몸을 내던졌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시체를 먹기까지 했다. 끝까지 살아남아 구조된 인원은  149명 중 겨우 15명이었다.

제리코는 이 사건을 거대하고 웅장한 역사화와 같은 방식으로 그렸다. 작품에서는 소용돌이치는 움직임과 감정을 증폭시키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붓질과 소름끼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를 볼 수 있다. 제리코는 오른쪽의 인물들을 자세히 그리기 위해 시체를 연구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물들의 몸과 피라미드형 구성은 양식적인 면에서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1819년 살롱전에 이 그림이 소개되자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예술적으로는 호평 받았으며, 이후 들라크루아 같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단테의 배, 들라크루아 La barque de Dante,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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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배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두 명의 여행자들이 불안한 모습으로 서있고, 사공은 있는 힘껏 노를 저어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다. 배 아래에는 배에 올라타려는 사람들이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다. 지옥을 여행하는 단테와 또 다른 여행자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안내자 플에기아스를 그린 작품이다.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가 이탈리아 시인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이 그림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플에기아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의 성벽을 둘러싼 호수를 건너는 장면으로, 유령이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실은 배를 멈추려 로하는 격렬한 순간을 담았다. 붉은 두건을 쓴 사내가 단테이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노를 젓는 이가 플에기아스이다. 배 아래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진 망자들이라고 한다. 들라크루아는 망자들의 모습을 그릴 때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의 표류하는 사람들을 참고했으며 어두운 소재와 구성, 깊이감, 강렬한 근육의 표현은 미켈란젤로에게서 따 왔다.

키오스 섬의 학살, 들라크루아 Scènes des mass-acres de Scio,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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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작 <단테의 배>에 이어 내놓은 작품으로,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특색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고전주의에 대립하는 새로운 미술사조의 탄생을 예고하는 기점이 되었다. 특히 같은 해에 앵그르가 발표한 <루이 13세의 성모에의 서약>과 대비되면서 낭만파와 고전파의 대립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이 그림은 1822년 일어난 그리스독립전쟁 때 터키인들이 키오스 섬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으로, 민가가 모두 불타고 섬 주민들이 약탈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표현하고 있다.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는 이 잔인한 사건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를 담아 그리스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초기 들라크루아는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그 영향을 고스란히 작품에 구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혁명’이라는 정신보다는 ‘재난’이라는 상황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 재난에 처한 인간 군상을 피라미드 형태로 구성한 것도 제리코의 영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림 앞쪽에서는 지쳐서 누워버린 키오스섬 사람들을 체념과 고통, 고뇌가 뒤섞인 표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여자를 납치해 가려는 터키 기마병들의 잔인한 장면을 화면 왼쪽에 담아 처참함에 사실감을 부여한다. 이들 뒤로 불타오르는 민가와 전투로 피폐해진 황량한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검붉은 바다와 짙은 저녁 노을이 암시하는 우울함과 적막함이 그림의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시켜 준다. 작가는 학살의 비참함과 공포, 비인간적인 죽음을 불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 더욱 생동감 있게 표현해 냈다.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그림에서 드러나는 객관적 시선을 불편하게 여겼고 주제 의식과 그림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비난을 쏟아냈다. 심지어 장 그로는 ‘예술의 학살’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뒤섞인 곡선과 강렬한 색채, 자유분방한 필치로 대표되는 들라크루아의 화풍은 이 그림을 통해 결정되었으며, 동시에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전형이 여기서 탄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느다나팔의 죽음, 들라크루아 La Mort de Sardanapale,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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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작품 중에서 단연 최고를 꼽는다면 이 작품을 들 수 있다. 가로가 5m에 가까운 대작으로, 시인 바이런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기원전 7세기 경 동양의 앗시리아 왕 사르다나팔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수도 바빌론을 침략해 온 적이 2년 동안이나 성을 포위하고 이제 곧 함락될 위험에 처하자 사르다나팔은 부하인 노예들에게 수많은 후궁들 뿐 아니라 말, 개 같은 동물들까지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이라는 무서운 명령을 내린다. 탐욕이 정신이상에 이를 만큼 극에 달했던 그는 적의 손에 자신이 사랑하던 인간, 짐승들이 넘어가는 것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다. 자신의 것을 파괴할지어언정 남에게는 그 무엇도 뺏기지 않고자 하는 끔찍한 욕망의 말로였다.

처음에 시선을 끄는 것은 작품 우측 하단에서 전라의 몸으로 죽임을 당하는 하녀이다. 그리고 끔찍한 살인 현장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늗네, 가장 마지막에는 그림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이 모든 상황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왕의 모습이 나온다. 너무도 태연한, 한편으로는 공허한 슬픔을 느끼는 모습의 왕의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 보는 이는 압도당하고 만다.

태연한 듯한 사르다나팔

이 작품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에게 너무도 비도덕적이며 퇴폐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중은 무엇보다 이교도의 왕이 이런 처참한 학살을 저지르고도 저렇게 태연한 것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 그렇지만 후세의 우리는 이 잔혹한 학살과 평온하기조차 한 무심한 장면 앞에 그저 숨죽여 감탄할 수밖에 없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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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1830년 7월 28일>이며, 왕정복고에 반대하여 봉기한 시민들이 3일간의 시가전 끝에 결국 부르봉왕가를 무너뜨리고 루이필리프를 국왕으로 맞이한 7월 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그림에서 시민군을 이끄는 이는 알레고리로 표현된 자유의 여신으로서 공상적인 현실, 즉 낭만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비현실의 진리를 대변한다.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는 1830년 10월 18일, 형 샤를 앙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나는 현대적인 주제, 즉 바리케이트 전(戰)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국의 승리를 위해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 이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7월 혁명에 대한 들라크루아의 관심은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작품에서 자유를 상징하는 여인은 그림 속 다른 남성들 못지않게 강인해 보이는데, 여성을 힘차고 강인하게 그린다는 것은 여성은 우아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당대의 경향에 매우 도전적인 시도였다. 때문에 살롱전에 출품했을 당시 ‘품위가 없는 여성’이라는 비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들라크루아는 여인이 상징하고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이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강인한 의지와 힘’이 더 필요함을 말하고 싶어 했다.

한편 여인의 오른쪽으로는 하층계급으로 보이는 소년이 권총을 들고 대열에 합세한 채 소리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훗날 빅토르 위고는 이 소년에게 모티브를 받아 소설 <레미제라블>에 구두닦이 소년으로 등장시킨다. 또한 캡을 쓰고 셔츠를 풀어헤친 노동계급의 시민과 정장을 입고 모자를 쓴 중산층 계급도 보이는데, 이런 다양성은 당시 혁명이 사회 전반에 걸쳐 지지를 얻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정장을 입고 모자를 쓴 사람은 들라크루아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는데, 아직 이 인물의 모델이 누구인지 추측이 난무한다.

권총을 든 하층 소년과 모자를 쓴 중산층 남자

하이라이트를 받고 있는 인물 아래로는 수많은 시체들이 쌓여 있는데, 들라크루아는 시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 혁명으로 인해 희생당한 이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다. 시민군과 정부군의 시체가 뒤엉켜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혁명의 참담함을 전하는 동시에 경각심까지 일깨워준다.

이 작품은 1831년 살롱에 출품되어 상당한 호평을 받았으며 7월왕정의 수반인 필리프가 작품을 사들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 때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진열되기도 하였다. 들라크루아가 죽은 뒤인 1874년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알제리의 여인들, 들라크루아 Women of Algiers in their apartment,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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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성숙기에 제작된 것으로 낭만주의 사조의 강렬한 색채, 극적인 구도와 명암 대비, 그리고 격정적이며 역동적인 감정을 엿볼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 모르네 백작(Charles de Mornay)의 지휘 하에 모로코의 술탄을 만나기 위해 떠난 외교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모로코를 여행하게 되는데, 이때 근동 지역의 열정적 색채와 문화, 그리고 풍속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알제리의 여인들>은 이 기행에서 탄생한 것으로, 살롱에 처음 전시되는 순간부터 당대 예술인들의 찬사를 받으며 동방 취미의 풍속을 낭만주의 회화의 주요한 주제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은 제국주의의 행로를 겪고 있던 프랑스의 사회적 분위기와 맥을 같이 한다. 프랑스는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의 일환으로 1830년에는 경제적 분쟁 하에 있던 알제리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알제리는 모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프랑스는 모로코의 술탄과 정치적으로 교섭하여 연맹을 맺음으로써 국경 분쟁을 해결하고자 했다. 모르네 백작의 외교적 방문은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작품이 다루고 있는 장면은 들라크루아가 알제리에 갔을 때 비밀리에 방문한 하렘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하렘은 이슬람 문명에서 본래 부인과 여성들의 처소를 뜻했지만 점차 매춘부와 연관되며 19세기에는 극히 성적인 내용과 오리엔탈리즘의 장소로 간주되었다. 들라크루아가 방문한 하렘 역시 알제리의 매춘부들의 사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렘은 당시 남성중심적 사회였던 이슬람 문화권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의 내밀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그림에서 들라크루아는 현실 그대로를 묘사하기보다는 당대의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관철하고 있다. 작품에서 흐릿하게 빛이 드는 실내에 앉은 세 이슬람 여인은 양탄자 위에서 고유한 의복과 장식을 걸치고 나른하게 아편을 태우고 있다. 흑인 노예만이 뒤돌아 거처를 나서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역시 흑색과 적색, 흰색이 대비되는 이국적인 복색이다. 하렘이라는 장소의 특징대로 묘사된 분위기는 고요하고 내밀하지만, 좀 더 나아가 호화로운 권태를 보여준다. 색채는 강렬하고 화려하며, 두껍게 발린 물감과 자세하게 묘사된 이국적 장식의 세부는 어둡고 침침한 실내의 답답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투영하고 있다.

자파의 페스트 격리소를 방문한 나폴레옹, 장 그로 Bonaparte visitant les pestiférés de Jaffa,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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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부터 나폴레옹까지에 걸친 수많은 전쟁과 정치적 사건들은 당시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전쟁화나 역사화를 대하고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고대가 아닌 동시대의 영웅들과 영광을 찬미할 수 있었고, 혹은 찬미해야만 했다. 그러한 예술가 중 하나인 앙투안 장 그로(Antoine Jean Gros, 1771-1835)는 다비드에게 그림을 배우다가 1793년부터 9년간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나폴레옹의 아내 조제핀을 통해 나폴레옹을 알게 되어, 이후 나폴레옹에게 인정 받고 명성을 얻으며 많은 전쟁화를 그린 인물이다.

장 글의 살롱 데뷔작인 이 그림은 보나파르트가 젊은 장군이었을 때 그가 시리아 전투 중 페스트에 걸린 부하들을 격려하고자 전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방문해 위로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나폴레옹은 전쟁에 방해되지 않도록 전염병에 걸린 병사들을 독살하도록 명령했었기 때문이다.

작품에 보이는 따뜻한 색깔, 강한 자연주의, 실제라기보다는 오히려 꿈꾸는 듯 펼쳐진 동양적인 풍경들에서 앞으로 다가올 낭만주의의 구성요소들을 엿볼 수 있다. 우두머리로서 부하를 돌보는 인간미를 부각시키고자 제작한 선전적 작품이지만, 장 그로의 뛰어난 재능은 여지 없이 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러나 훗날 장 그로는 스승 다비드의 엄격한 비판에 위축된 데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불만이 거듭돼 우울해하다 결국 센 강에 투신 자살하고 만다. 유서는 그의 모자 안쪽에 남아 있었는데, “인생에 지쳤고, 남은 재능으로부터도 견뎌내야 할 비판으로부터도 배신당했다.”라고 써 있었다.

1층 드농관 Room 75 : 이탈리아 회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다비드 The Oath of the Horatii, 1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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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9-1825)가 처음으로 왕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다. 왕은 로마 역사의 한 장면을 주문했고, 다비드는 리비의 <로마사>와 <플루타크 영웅전> 등에 등장하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기원전 7세기, 로마와 이웃 나라 알바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자 양국은 각각 세 명의 대표를 뽑아 그들 사이의 결투 결과에 따라 승부를 결정하기로 한다.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가의 삼형제가, 알바에서는 쿠리아티우스가의 삼형제가 결투에 나섰다. 그런데 호라티우스가 형제들의 누이인 카밀라가 쿠리아티우스 형제 중 하나와 결혼을 앞둔 상태였다. 결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호라티우스 형제 중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아 돌아왔다. 누이 카밀라가 약혼자의 죽음을 원망하며 로마를 저주하자 돌아온 전사는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그 자리에서 카밀라를 죽여 버리는데, 로마의 군중들은 잔인하게 누이를 살해한 호라티우스의 아들을 비난했지만 아버지는 그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며 아들을 지켜냈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희생하고, 오직 국가를 위해 전쟁터로 나아가는 군인이란 왕실이 미술작품을 통해 선전하고자 하는 최고의 가치였다. 다비드가 구상한 장면은 고전문헌 어디에도 묘사되지 않은 순수한 그의 창작물이다. 장식이라고는 전혀 없이 엄숙하고 단정한 건물 안에서, 아버지는 세 자루의 칼을 아들들에게 쥐어 준다. 아들들은 무기를 받아들며 적을 물리치지 못하면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겠다는 맹세를 하고 있다. 팔을 앞으로 뻗은 당당한 삼형제는 그야말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용기와 전의로 뭉쳐 있다. 이와 달리 여인들은 무너져내리 듯 주저앉아 있다. 공공의 선을 위해 자기를 절제하는 남성들과 달리 사적인 감정에 빠져있는 나약한 여성들의 대비는 초인적인 영웅심을 강조하기 위해 다비드가 만들어낸 드라마인 것이다.

다비드가 로마에서 이 작품을 완성해서 공개하자 그는 순식간에 국제적인 유명화가로 위세를 떨치게 된다. 물론 프랑스 살롱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덕분에 원래 약정된 가격인 4,000리브르보다 훨씬 받은 6,000리브르를 그립값으로 받아냈다. 중산층이 파리에서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일년에 3,000~4,000리브르면 족하던 시절이었고, 소르본느 대학 교수의 연봉은 1,900리브르에 불과했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다비드 Sacre de l'empereur Napoléon,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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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임기10년의 제1통령이 된 이후 1804년부터는 프랑스 원로원에 의해 프랑스 최초의 황제로 등극한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석권한 절대자의 위치에 있었고 그러한 권위를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대관식을 계획한다. 대관식 장소 역시 본래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이 열리던 소박한 교회당 대신 노트르담 대성당을 선택했으며 수많은 손님을 초청했다. ​그리고 그 대관식에서 자신과 자신의 부인 조세핀이 황제와 황후로 즉위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영광스러운 순간을 드러내고자 했다.

황후인 ​조세핀은 본래 두 자녀가 있는 미망인으로 나폴레옹보다 6살 연상이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조세핀과 결혼신고을 하면서 조세핀의 나이는 4살 줄이고 자신은 2살 올려 동갑인 것으로 서류를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조세핀은 굉장히 사치가 심했고 이미 40대에 접어들어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결국 나폴레옹과도 훗날 이혼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키가 작고 볼품없는 용모였지만 정치적 선전을 위해 그림을 활용해 자신을 준수한 외모로 그리곤 했는데, 그러한 욕구를 잘 채워준 화가가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9-1825)였다. 이 대관식 그림은 그 극한이라 할 수 있다. ​

작품에서는 그림의 주인공인 나폴레옹이 왕관을 받는 모습 대신 조세핀이 왕관을 받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에 교황 비오7세를 초청하는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교황은 대관식에서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왕관을 받게 될 나폴레옹을 생각하며 교황청의 권위를 보여줄 때라고 여겼다. 그러나 막상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교황이 들고 있던 왕관을 빼앗어 자기가 직접 머리에 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교황을 비롯한 참가자들 모두가 당황했고 대관식을 그리기 위해 상황을 관찰하고 있던 다비드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비드는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에 빠지는데, 고심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 사랑하는 조세핀에게 왕관을 내려주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조세핀을 중심에 두고 그런 조세핀에게 왕관을 내려주는 모습에서 권위가 느껴진다고 여긴 나폴레옹 역시 그림에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그림에서는 조세핀이 40대의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젊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는데,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며 빈정대자 다비드는 “가서 황제 앞에서 그리 말해 보시오.”라고 하곤 했다. 또 원래는 교황 비오7세를 원래 두 손을 허벅지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앉 자세로 그렸는데, 나폴레옹이 “교황이 단지 의자에 앉아 있으려고 여기 왔겠느냐”며 수정을 지시해 세 개의 손가락을 펴서 축복하는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축복하는 손가락 모양의 교황 비오7세

카롤린 리비에르, 앵그르 Mademoiselle Caroline Rivière,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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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90-1867)는 젊은 시절 미덕과 영웅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역사화를 추구했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부유한 이들의 주문을 받아 초상화를 그리곤 했다. 로마 상을 받고 이탈리아로 떠나기 직전에 제작한 리비에르 가족의 초상화도 그중 하나다. 한 시기에 한 가족을 그렸지만 각 초상화에는 각기 다른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 리비에르 양의 초상화에는 막 여성이 되어가는 사춘기 소녀의 아름다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앵그르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따님”이라고 표현한 리비에르 양은 이 초상화를 그릴 무렵 15세의 소녀였으나 이 해에 사망했다. 이제 막 여인이 되려 하는 소녀는 청순함을 강조하는 흰 모슬린 원피스를 입고 있으며,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홍조가 깃들여있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순진한 표정은 앵그르가 그린 성숙한 여인들의 초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함을 담고 있다.

그녀의 포즈는 앵그르가 숭배하던 라파엘로의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고대 조각상처럼 정적인 인물의 자세와 표정과 달리 주변을 감싼 풍부한 곡선은 그림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상단 배경의 둥근 아치는 소녀의 둥근 머리와 눈썹과 반향을 이루고, 어머니의 캐시미어 숄만큼이나 호화로운 모피 숄은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단순한 윤곽선과는 대조적으로 세밀하게 묘사된 옷의 둥근 소매와 주름, 장갑에서도 둥근 곡선의 리듬감이 느껴진다.

부모의 초상화와 달리 리비에르 양의 초상은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프랑스어에서 리비에르는 ‘강’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인생의 봄에 해당하는 시기에 있는 리비에르 양의 초상화에서 배경이 된 이 풍경은 일종의 시각적 말장난이라고 볼 수 있다. 인물만큼이나 신선한 풍경의 엷은 녹색과 청색은 인물이 입고 있는 옷의 흰색과 황색과 조화를 이룬다.

앵그르는 이 작품을 1806년 살롱에 출품했다. 전통적인 어두운 색채와 인체 묘사에 익숙한 평론가들에게 앵그르가 그린 지나치게 긴 목과 좁은 어깨, 어색한 코의 곡선같이 왜곡된 신체 표현, 그리고 흑단처럼 짙은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밝은 색채는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이들은 앵그르의 작품을 ‘고딕적’이라고 혹평했다.

오달리스크, 앵그르 Une Odalisque,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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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90-1867)의 대표작으로 그랑 오달리스크(Grand Odalisque)라고도 하는 작품이다. 오달리스크란 터키 궁전 밀실에서 왕의 관능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기하는 궁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앵그르는 오달리스크를 주제로 몇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이 작품에서는 옛날 그리스 조각의 미적 요소들을 분석해 화면에 도입하고 있다. 앵그르 미학의 실체가 잘 나타난 작품으로 앵그르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나폴리왕국 카롤리네 여왕의 주문으로 제작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오달리스크는 등을 돌리고 길게 누워 있는데, 아름다운 얼굴이 화면에 생기를 불어넣고 주변의 세부적인 묘사와 분위기 표현도 뛰어나다. 단, 얼굴과 목의 연결, 가슴의 표현, 다리의 위치, 허리와 엉덩이의 연결 등의 시점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해부학적으로 맞지 않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점은 앵그르의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긴 목과 허리, 가늘고 섬세한 선이 당시의 새로운 미적 기준이었고, 화가들은 여인을 고대 그리스 항아리의 선과 형체에 비유하곤 했다. 즉 앵그르는 여인의 미적 기준을 르네상스 시대나 그 이전의 고전미에서 찾으려고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19년 살롱에 출품된 이 작품은 허리의 길이를 늘여 해부학적인 사실을 왜곡시켰다는 이유에서 고전주의를 지지하던 평론가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앵그르는 정확한 형태보다 리듬감을 더 중시한 화가였다. 그의 뛰어난 형태적 구성 능력은 관람자들이 볼 때 이러한 왜곡을 쉽게 알아보기 어렵게 한다. 긴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이어지는 감각적인 여인의 신체는 마치 작품 속에서 살아 숨쉬는 듯 생명력을 가진다.

아탈라의 매장, 트리오종 Les Funérailles d'Atala,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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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오종(Anne Louis Girodet Trioson, 1767-1824)의 대표작 중 하나로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가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의 소설 <아탈라>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다. 소설 <아탈라>는 프랑스인들의 식민지 미국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자극해 당시 큰 인기를 끝 작품이었다.

작품 속에서 카톨릭 신자인 아탈라는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여성이었다. 아탈라는 어느 날 자연을 숭배하는 인디언 청년 샤크타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물론 그림 속에서 샤크타의 모습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외모와는 거리가 멀다.), 성녀가 되기를 희망해온 그녀는 더 이상 샤크타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용서할 수 없었다. 카톨릭의 교리와 상반되는 원시종교를 가진 샤크타와의 사랑은 그녀에게 곧 신앙의 포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아탈라는 자신의 모든 사랑을 종교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샤크타에게 카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부탁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탈라의 시신은 동굴 속 수도사에게 인계되고, 샤크타는 그녀의 죽음을 한없이 슬퍼한다.

트리오종이 그린 작품에서 왼쪽의 샤크타는 아탈라의 다리를 부둥켜안고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아탈라의 상체를 들고 있는 이는 수도사다.

눈을 감은 아탈라는 십자가를 품에안고 있고, 멀리 동굴 밖으로는 십자가가 보인다. 중앙의 동굴 벽에는 ‘한 떨기 꽃과 같았던’이라는 뜻의 문구를 새겨 아탈라의 아름다운 외모와 순수한 마음을 기리고 있다.

1층 드농관 Room 7 : 이탈리아 회화

전원의 합주곡, 티치아노 The Pastoral Concert,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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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두고 한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화가가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88?-1576)인지 조르조네(Giorgione, 1477?-1510)인지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벌였으며, 작품의 정체규명을 위한 논쟁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의 누드에 티치아노의 화풍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초기작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루브르 박물관 역시 같은 이유를 들어 이를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규정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 보이는 두 남성을 보면, 한 사람은 퍼프 소매가 달린 붉은 옷을 입고 류트를 연주하고 있으며 금발의 다른 한 사람은 맨발로 언덕에 걸터앉아 있다. 이들의 옷차림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보아 이들은 귀족이고 현실의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와 달리 그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는 양옆의 두 여인은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여인들의 벌거벗은 몸은 이상적이고 풍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남성들과는 달리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이들은 각각 음악과 물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로 사용되었다. 화면의 왼쪽에 위치한 여인은 물을 긷고 있는데, 우물처럼 보이는 것은 당시 귀족들에게 인기 있는 골동품이었던 석관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에 빠져 주변 상황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으며, 몸을 앞으로 약간 구부린 채 서 있다. 다른 여인은 남성들과 가깝게 앉아 우리에게 등을 보인 채 뒤돌아 있으며 플루트를 들고 있다. 원경에는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완만한 언덕이 한쪽에 있고, 나무 아래 목동이 양을 데리고 있다.

옷을 차려입은 남성들과 누드의 여성들이 함께 있는 장면은 복잡한 함축을 지닌다. 이러한 구성은 후에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식사(Le Déjeuner sur l'herbe)>를 그릴 때 차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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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는 현실과 이상의 두 세계를 비교하여 보여주고자 작품을 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쪽은 베네치아의 귀족 사회이고 한쪽은 요정과 목동들이 사는 목가적인 이상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인물과 배경은 서로 관련되지 않으며, 화면 속의 인물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시선을 교환하지 않는다. 다만 음악으로만 소통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작품에 우아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이 작품에서 풍경은 단순히 작품의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서 더해진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자연의 곡선이 만들어내는 유기적인 흐름은 풍경 속에 있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작품 전체에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은은하게 빛나는 부드러운 피부는 배경의 색채와 조화가 매우 아름다우며, 인물의 윤곽선을 뚜렷하게 표현하지 않아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자 본래 하나임을 새삼 알려준다.

거울을 보는 여인, 티치아노 La Femme au miroir,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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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88?-1576)가 초기에 그린 여러 편의 여성 초상화 중 하나로 구성과 색상의 조화로 이상적인 여성의 전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파란 눈의 젊은 여성이 머리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고 어깨를 드러낸 모습, 느슨하게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는 16세기 초 베네치아의 미인의 모습을 드러낸다.

작품 속에서는 젊고 감각적인 베네치아 여서이 한 손에는 머리칼을, 다른 한손에는 향수병을 들고 있다. 어깨 끈이 날린 녹색 드레스와 흰 블라우스는 느슨하게 걸쳐져 있어 한쪽 어깨는 드러내는데, 빨간 옷을 입은 남자가 그녀의 앞뒤로 두 개의 거울을 비춰주고 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두 인물에 집중되어 있고 동시에 조화를 이루는데, 특히 여인의 타원형 얼굴과 둥근 팔, 통통한 어깨와 팔, 남자의 이마에서 양감의 놀라운 조화를 엿볼 수 있다.

1층 드농관 Room 6 : 이탈리아 회화

모나리자, 다 빈치 Mona Lisa, 1505-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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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지만 언제, 누구를 모델로 하여 그려진 것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았고 그림 주문서와 같은 기록 역시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사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가장 이른 기록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의 <미술가 열전>(1550)에 근거해 모델이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인 조콘도(Francesco del Giocondo, 1465-1538)의 부인 리자(Lisa del Giocondo, 1479-1551?)라고 추정했고, 작품 역시 ‘리자 부인’이라는 뜻의 <모나 리자(Monna Lisa)>이라 부르게 됐다. 여기서 ‘모나’는 ‘마돈나(Madonna)’의 준말로 ‘부인’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가 왜 주문자에게 인도되지 않고 작가의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가 후일 프랑스 왕실 소장품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는 여인의 미소를 묘사하기 위해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했다. 스푸마토란 이탈리아어로 ‘흐릿한’ 또는 ‘자욱한’을 뜻하는 말로, 인물의 윤곽선을 일부러 흐릿하게 처리해 경계를 없애는 방법이다. 특히 여인의 입 가장자리와 눈꼬리를 스푸마토 기법으로 묘사함으로써 여인의 미소를 모호하지만 부드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모호함과 신비로움은 여인의 미소뿐만 아니라 배경에서도 드러난다.

레오나르도는 인물 뒤 풍경을 묘사하면서 대기원근법(aerial perspective)을 사용하고 있는데, 대기원근법이란 사물들 간의 관계를 기하학적으로 계산해 배치하는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과 달리 색채의 조정을 통해 대기의 효과를 묘사함으로써 공간감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작품에서는 가까운 곳의 풍경은 붉은 색조를 사용해 비교적 명확하게 묘사한 반면, 먼 곳의 풍경은 청색조를 사용하고 윤곽선을 흐릿하게 묘사함으로써 작품 속에서 공간이 뒤로 물러나는 듯 보이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한편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화면 밖을 주시하고 있는 여인의 상체는 화면에서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여인의 몸은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져 있어서 관람자가 보는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달라 보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느낌은 배경에 묘사된 풍경에 의해 더욱 강화되는데, 이는 인물 좌우의 풍경 속 지평선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도록 그려졌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강이 흘러나가는 물길을 표현하면서 마치 인물 오른쪽의 지평선이 더 높은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도록 묘사함으로써 그림의 왼편에서 인물을 관찰할 때와 오른편에서 인물을 관찰할 때의 느낌이 다르도록 만들었다.이러한 풍경은 이상화된 관념적인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 자연에서 관찰되는 지리학적인 특징들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풍경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머리카락과 의복의 선과 같은 인물을 묘사하는 요소들을 서로 조화되도록 배치함으로써 배경과 인물을 통합하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 베로네세 Les Noces de Cana, 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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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994㎝, 세로 667㎝의 대작으로 루브르박물관에서 가장 큰 작품이다. 베네치아의 산 조르지오 마조레 수도원의 식당을 장식했던 종교화로, ​베네치아공화국이 멸망하면서 나폴레옹군이 약탈해 루브르에 걸리게 되었다. ​작품이 워낙 거대해서 프랑스까지 운반하기 위해 그림을 반으로 잘라 가져갔다고 한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베네치아 화풍이 잘 드러난 그림으로 인물의 구도가 균형 잡힌 대칭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로 그려져 있어서 베네치아 수도원의 식당에 있었을 때는 가장 햇살이 잘 드는 자리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화려한 화풍은 당시 베네치아의 번영을 보여주고자 했던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의 의도를 보여 준다. 132명에 달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유럽의 귀족 등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으며 ​각 인물들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어 마치 한 편의 연극무대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림의 주제인 ‘가나의 혼인잔치’는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가나는 지금의 팔레스타인 북부에 있는 갈릴리 호수의 근처 마을인데, 당시 유대인들은 혼인잔치를 1~2주에 걸쳐 성대하게 치렀다고 한다. 그중 한 결혼식에 예수와 열두 제자도 초대받았는데, 이 자리에서 예수가 행한 일곱 가지 기적 중 첫 번째 기적이 나타났다. 바로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는 기적이다. 때문에 이 에피소드는 수많은 화가들에게 주요한 그림 소재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앞쪽에서 노란 옷을 입은 노예가 항아리의 물을 병에 따르는데 물 대신 포도주가 나오고 있는 장면으로 기적이 표현되어 있고, 그 옆에 앉은 푸른 옷의 남성이 놀란 모습으로 그 모습을 뒤돌아보고 있다.

물이 변한 포도주를 따르는 노예

결혼식의 주인공인 부부는 왼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고, 그림의 중앙에 위치한 그리스도의 양 옆에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이 있다. 예수의 위쪽 난간에서는 칼로 고기를 자르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의 발밑의 난간 사이로 검은색 병이 있는데, 이런 장치들은 훗날 그리스도가 겪게 될 고난을 상징한다. 하지만 부부나 그리스도는 연회에 참석하고 있는 많은 손님들 속에 파묻혀 버린다. 종교적인 한 장면이 베네치아 도시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연회로 바뀐 것으로, 인물 대부분의 의복이 당대 베네치아의 옷을 입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카를 5세, 프랑수아 1세, 술탄 솔리만 그리고 마리 튀도르와 같이 당대의 유명인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고기 자르는 사람들

베로네세는 그림 맨 앞 중앙의 악단을 넣어 성경 외의 요소도 가미했다. 이 악단의 얼굴은 당대 베네치아 화가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 베로네세 자신은 가장 밝은 흰 옷을 입고 있는 고고한 표정으로 ​황금빛 비올라를 연주하고 있고 반면, 당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였던 티치아노는 얼굴색이 어둡고 붉은 옷을 입은 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고 있다. 베로네세가 당시 티치아노에게 가졌던 라이벌 의식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티치아노 옆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짧은 머리의 남자는 틴토레토, 그 옆의 플루트를 연주하는 사람은 바사노이다. 한편 악단이 둘러싸고 있는 테이블 위에는 모래시계가 놓여 있는데, 이는 잔치가 끝나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물질적인 것은 오래갈 수 없다는 가치를 암시한다.

비올라를 연주하는 베로네세 자신의 모습

천국, 틴토레토 Le Paradis, 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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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토레토(Tintoretto, 1519-1594)가 베네치아 도제 궁전의 회의장을 장식하기 위해 1588년에 완성한 <천국>의 첫 번째 스케치 작품으로 <성모의 대관식>이라고도 한다. 열두 명의 사도들, 천사들, 주교들과 선지자들, 네 전도사들, 세례 요한, 아담과 이브, 교부와 기독교 영웅들, 교황 및 주교들을 신분상의 순서에 따라 앉히고 있다.

13세기 이탈리아에서 발간된 <황금 성인전>에 따르면 마리아는 죽은 후 그리스도의 대관식으로 예수와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한다. 이 그림을 그 장면을 담은 것으로, 성도와 순교자, 교황 등이 모두 모여 마리아와 예수의 재회를 연속된 반원 형태의 구름 층에 따라 목젹하고 있다. 열두 사도에 둘러싸인 마리아는 아들에게 왕관을 받고 있고 그 옆에는 성령의 비둘기가 생소한 모양의 후광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 모양은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 등장하는 ‘천상의 장미(celestial rose)’ 삽화를 차용한 것이다.(‘천국’에서 단테는 천국의 마지막 하늘에서 사랑하는 연인 베아트리체가 펼쳐 보인 장미꽃처럼 둥근 빛의 형태를 응시한다.)

신곡의 celestial rose 삽화

틴토레토가 이 스케치를 제작할 당시는 매우 성숙기였으며, 1588년 최종적으로 <천국>을 완성하기까지 이후 25년이나 걸리게 된다.

하얀 장갑을 낀 남자, 티치아노 L'homme au gant, 1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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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88?-1576)는 당대는 물론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 중 한 사람이다. 당시의 황제, 교황, 군소 국가의 군주를 비롯하여 수많은 귀족 및 부유한 상인들이 티치아노로부터 초상화 한 점 받기를 갈망했는데 이 작품을 보면 그들이 왜 그토록 티치아노의 초상화를 원했는지 알 수 있다.

<하얀 장갑을 낀 남자>의 색상은 배경도 인물도 검은색이 압도적이어서 어둠 속에서 남자가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가슴과 양 소매 끝에 그려진 흰색 블라우스의 깃은 검은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화면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 그림에서 흑백이 아닌 색으로 그려진 부분은 가슴에 차고 있는 금목걸이, 얼굴과 장갑을 든 왼손, 반지를 낀 오른손뿐이다. 때문에 푸른 눈동자와 붉은 입술이 더욱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할 뿐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추측만 할 뿐이다. 티치아노는 이 작품 외에도 이 무렵 이와 유사하게 검은 배경에 검은 의상을 입은 모델을 다수 그렸는데, 많은 초상화에서 비록 흑백의 제한된 색상을 사용하면서도 한 인간의 외모는 물론 내면 세계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완벽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모델을 비롯해 티치아노가 초상화를 그려준 사람들은 대부분 당대의 귀족이나 고위층이었다. 이 남성은 냉정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모습은 어쩌면 당시 르네상스 사람들이 추구한 이상적인 지성인의 모습일 것이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대리석 블록에는 티치아노의 서명이 ‘TICIANVS F.’라고 적혀있다.

1층 드농 관 Room 8 : 이탈리아 회화

사계 연작, 아르침볼도, 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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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출신의 젊은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는 1562년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궁정화가로 들어가 황제의 정식 초상화가로 임명된다. 1569년 새해를 맞아 아르침볼도는 자신의 첫 번째 얼굴 시리즈인 <사원소>와 <사계>를 막시밀리안 2세에게 선물했는데, 과일과 채소 따위를 모아 콜라주를 하듯 그려 놓은 이 그림들은 미술품과 이상한 형태의 자연물, 학술 도구들이 늘어선 전시실을 연상케 한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조는 전 유럽의 학자와 예술가들을 초대해 궁정에서 활동하게 했는데, 아르침볼도는 예술 고문의 역할을 맡아 이들과 함께 궁정 후원자들의 소장품을 늘리는 작업에 참여했다. 전시실에 잡다하게 모여 있는 진기한 소장품들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조합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었다.

아르침볼도의 초상화는 흉측한 괴물처럼 우글거리는 얼굴 때문에 불편한 느낌도 초래한다. 이러한 작품 중에는 위아래를 뒤집어도 그림이 되는 것도 있다. 바로 놓고 보면 사람의 얼굴이었다가 뒤집어서 보면 그릇이 되는 식이다. 아르침볼도가 만들어낸 얼굴은 당시에 무시받던 장르인 정물화를 고상한 장르로 여겨진 초상화와 교배시킴으로써 기존 질서를 전복시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르침볼도의 작품은 발표 당시에는 황제의 권력을 찬미하고 일부 궁정 인물들을 향해 반어적인 의미를 표출하는 복잡한 알레고리 작품으로 여겨졌으나 이후에는 오랫동안 저속하고 괴기스러운 취미에 따른 그림으로 치부된다. 이 작품의 가치를 재발견한 것은 1930년대 초현실주의 화가들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아르침볼도는 오늘날 ‘현대성’을 인정받는 화가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점쟁이, 카라바조 La Diseuse de bonne aventure, 1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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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유럽 회화의 선구자이자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인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는 11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밀라노에서 그림을 배웠다. 르네상스 시대 거장인 미켈란젤로와 본명이 같아서 화단에 등단하기 위해 25세 때 태어난 마을의 이름을 따 카라바조로 개명했다. 로마로 간 후 초기에는 질병과 가난으로 고생하다 한 추기경의 후원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카라바조는 집시 여인이 젊은 남자에게 점을 봐주는 것을 주제로 한 그림을 두 점 그렸는데, 다른 하나는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카피톨리니 소장작은 훼손이 너무 심해 복원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길에서 만난 여자 점쟁이에게 손을 내주고 점을 보는 청년은 여인의 묘한 웃음에 시선을 두고 있다. 그러는 동안 점쟁이는 청년의 손에서 몰래 반지를 훔치는 중이다. 여기에는 주술과 에로티시즘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점쟁이에게 자신의 앞날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장면은 동시대 주술적인 힘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도덕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장치이다. 당시 집시 여인들은 치맛자락을 끌어올려 한쪽 어깨에 묶어서 생기는 공간을 주머니처럼 쓰곤 했다고 하는데, 그림 속 여인도 그런 옷차림이다. 이 여인은 청년의 손목을 잡고 손금으로 운명은 점쳐 주는 척하며 청년의 손가락에 있던 반지를 빼는 식으로 도둑질을 했다.

그림 속 여성은 로마 나보나 광장에서 활약(?)하던 인물로 ‘에스트렐라’라고 불리던 집시 여인이다. 공작새 깃털을 꽂은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 쓴 남자는 당시 카라바조의 화실에서 조수 노릇을 하던 16세의 마리오 미티니라는 인물이었는데, 카라바조의 <바쿠스>나 <과일바구니를 든 소년>에도 모델로 등장한다. 이 청년은 세간에서 카라바조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던 인물이다.

바쿠스(일부)

한편 이 작품은 길거리에서 모델을 구해 와서 장면을 연출한 다음 캔버스에 바로 스케치를 시작하고 물감을 입히는 방식으로 그린 최초의 그림이라고 한다. 즉, 작품을 제작하기에 앞서 따로 구상하거나 종이에 스케치를 하지 않고 바로 캔버스에 작화를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일명 카라바지즘(Caravagism)이라 불리는, 어둠을 배경으로 강한 명도 대비를 통해 주제를 부각시키는 화풍을 유행시키기 시작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있다.

한편 이 그림은 유로 통합 전 이탈리아 화폐 중 고액권에 해당하는 10만 리라짜리 지폐에 카라바조의 초상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카라바조가 이탈리아에서 얼만큼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탈리아 화폐에 그려져 있었던 점쟁이

성모의 죽음, 카라바조 La Mort de la Vierge, 1605-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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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는 르네상스 후기를 살면서 두 가지 특징을 만들어 나갔다.

하나는 조명의 설정이었다. 조명을 깊이 연구해 그림 속 조명을 마치 연극무대처럼 ‘장치’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기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조명 설정은 그림 속 장면에 이야기성을 강하게 부여하고 효과를 가져왔다. 또 하나는 일상의 표현이다. 카라바조를 현대적 의미에서 ‘사실주의 화가’의 선구자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주변 세상을 표현하는데 몰두하고 일상 속 진실을 작품에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종교화라 할 수 있는 이 작품 속에서도 카라바조는 일상적인 표현을 조명을 활용해 진실되게 보여준다. 겹겹이 겹친 주름으로 드러나는 육중한 목선과 부푼 발목은 성모 마리아를 비현실적인 미인이 아닌, 서민과 같은 한 사람의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은 원래 로마의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 교회에 걸리기 위해 주문된 것이지만, 성스러운 대상인 마리아를 이런 사실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하여 성직자들이 거절하고 만다. 그러나 이 작품에 나타난 신성적인 면모는 카라바조가 창시한 풍부한 명암을 통해 충분히 암시되고 있으며, 이 고통스러운 장면 속에서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볼테라 Combat de David et Goliath, 1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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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라(Daniele da Volterra, 1509-1566)의 작품으로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투 끝에 골리앗의 목을 베려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다윗은 전장에서 팔레스타인 장수 골리앗과 맞섰는데, 골리앗은 키가 3m에 가까운 거인인 데다 청동 투구와 비늘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고 긴 창과 칼로 무장한 상태였다. 양치기 소년 다윗은 허름한 가죽옷 차림이었고 무기라고는 돌팔매뿐이었다. 결국 골리앗은 다윗이 던진 돌에 이마를 맞아 쓰러졌고, 다윗은 쓰러진 거인을 밟고 칼로 목을 베었다. 후에 다윗은 고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에 올라 현재의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전한다.

이 작품은 그림 앞뒤로 두 점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의 장면을 시선을 달리 해서 그린 것이다. 단순히 시선을 반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각도에 따라 그림 속 인물의 감정까지 달리 표현한 점이 인상깊다. 미켈란젤로의 제자였던 볼테라의 발상과 표현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테네브리즘’이라 불리며 카라바조의 작품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기법의 명칭이 되었다. 테네브리즘은 단순한 인물 표현이 아닌 내면적 심리를 잘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적 욕구 충족으로 탄생하였다. 검은 물감을 사용한 명암대비, 즉 빛과 어둠의 그림자를 강렬하게 대비시킴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인 주목을 불러일으키며, 극적인 드라마틱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테네브리즘의 기법은 후대 할스나 렘브란트, 루벤스, 벨라스케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카스틸리오네의 초상, 라파엘로 Balthazar Castiglione, 1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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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틸리오네는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명저인 <궁정인>의 저자인 발자타르 카스틸리오네(1478-1549)이다. 카스틸리오네는 <궁정인>에서 궁정인은 ‘그라지아’(일종의 우아함)을 갖추어야 하며,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이 책은 귀족들의 이상적인 태도를 제시한 저술이다. 당시의 회화도 바로 이와 같은 ‘그라지아’를 추구했는데,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의 그림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그라지아다. 당시 사회가 추구하던 이상적 지표가 문학이나 예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파엘로는 친구였던 카스틸리오네의 ‘그라지아’라는 개념을 이 초상화에서 여실히 보여준다. 그림 속 주인공은 궁정인으로서의 품위와 세련됨, 현명함, 지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가장 절제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를 위해 라파엘로는 그림의 색상을 검은색과 회색 톤으로 제한하고, 옷 모양은 정교한 세부 묘사를 하는 대신 포근한 밍크 느낌을 충분히 표현했다. 검은 모자 아래 비치는 빛나는 파란 눈의 이 중년 남자는 왠지 모를 초조함과 신경질적임, 그리고 외로움을 감추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어쩌면 모든 것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그 무엇이다. 초상화가 인물의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의 세계까지 표현한다면 그것은 초상화의 최고봉에 도달한 것인데, 바로 이 그림에서 라파엘로는 가장 이상적인 궁정인 뒤에 감추어진 내면의 세계까지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라파엘로의 초상화 중 백미로 꼽힌다.

1층 드농 관 Room 12 : 이탈리아 회화

헬레네의 납치, 귀도 레니 L'Enlèvement d'Hélène, 1626-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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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네는 제우스와 레다(또는 네메시스)의 딸이다. 아름다운 여인인 레다는 제우스의 구애를 피해 변신술을 거듭하며 도망다녔는데, 거위로 변했을 때 마침 백조로 변한 제우스에게 붙잡혀 관계를 맺게 되고 스파르타의 숲에서 알을 낳았다. 양치기가 이 알을 발견하고 스파르타의 왕비에게 바쳤는데 이 알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바로 헬레네였다.

헬레네 역시 매우 아름다워서 청년들이 서로 그녀를 아내로 맞고자 싸움이 일었다. 어렵게 메넬라오스가 남편으로 간택되었는데, 파리스가 ‘절세 미인을 갖게 해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약속을 믿고 헬레네를 찾아와 그녀를 트로이로 납치해 간다. 분노한 메넬라오스가 동맹자들과 트로이로 진격하면서 저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시작됐다.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의 <헬레네의 납치>는 이 중 납치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흔히 생각하는 ‘납치’의 이미지와 달리 헬레네는 상냥하게 파리스에게 손을 맡기고, 파리스의 표정은 마치 연인을 이끄는 듯 황홀하다. 자세히 보면 헬레네는 파리스와 눈까지 맞추고 있고, 큐피트는 사랑의 찬가를 부른있다. 서정성을 중요하게 여겼던 귀도 레니는 납치 장면을 이토록 투명하고 맑은 빛깔로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면 헬레네는 왜 저렇게 순순히 파리스를 따라나섰을까? 항간에는 헬레네가 저 시기쯤 결혼생활에 권태감을 느꼈으며 마침 나타난 미남 파리스에게 마음을 뺏겼으리라는 말이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헬레네의 납치>는 트로이 전쟁의 당위성을 역설적으로 설파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층 드농 관 Room 14 : 스페인 회화

성모승천, 피아체타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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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출신의 피아체타(Giovanni Battista Piazzetta, 1628-1754)는 바로크적인 종교화와 풍속화를 많이 그린 화가이다. <성모승천>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처에 있는 한 교회의 제단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한 작품으로, 완성된 후 베네치아에서 전시되어 호평 받았다. 죽은 성모가 무덤에서 나와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보고 사도들이 놀라는 장면을 담은 종교화이다.

피아체타는 작품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아래쪽 1/3에서 노인 모습의 사도들은 황홀한 태도를 취하며 마리아를 우러러보고 있고, 위쪽 2/3에서는 마리아가 상향 이동하는 모습만이 강조된다. 이런 구성에서 사도들은 마치 소용돌이치는 천상의 소란으로 부서져 나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아체타는 이런 소용돌이치는 듯한 대상을 가볍고 활기차게 그려 당시 유럽 회화, 특히 독일 지방에서 거장으로 우뚝 섰다.

두 경배자에 의해 추앙받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엘 그레코 Le Christ en croix adoré par deux donateurs,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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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것 같은 시각으로 십자가를 강조하고, 성모와 성요한 대신 두 경배자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특징적인 작품이다. 푸른빛이 약간 도는 그리스도의 육체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 표정, 그의 머리 위에 둘러싸여 있는 구름은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가 그리는 예수의 모습이 전형적으로 돋보인다.

십자가 밑에서 경배를 드리고 있는 두 사람 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얼굴에 특이한 점이 있다. 귀족처럼 보이는 오른쪽의 사람은 경외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다른 한 사람인 성직자는 엄숙한 표정을 보여 서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칭적인 구성으로 작품 전체에 균형감을 더하고 있다.

1층 드농 관 Room 26 : 스페인 회화

내반족 소년, 리베라 Le Pied Bot,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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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화가인 리베라(José de Ribera, 1591-1652)는 초기에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양식으로 종교화를 많이 그렸지만, 건강이 나빠진 1640년대부터는 온화한 색조와 부드러운 붓질로 평범한 사람들, 특히 사회의 불운한 사람들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에스파냐의 통치를 받고 있던 나폴리에서 주로 작업을 했던 리베라는 그저 나폴리의 거지 소년을 묘사하고자 <내반족 소년>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통과 사실성을 혼합해 하층민을 그려낸 그의 양식은 미술에서 새로운 방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내반족 소년>은 리베라의 전성기 그림으로, 성화에나 어울릴 법한 고상한 배경에 장애가 있는 거지 소년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인 작품이다. 내반족이란 말 그대로 발바닥이 안쪽을 향해 굳어 버린 발을 말한다. 그림 속의 소년은 구걸로 생계를 유지하며 내반족과 일그러진 손을 가진 난쟁이 장애인이었던 것 같다. 인생은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지 않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싱긋 드러내고 웃으며, 명랑하고도 도전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목발을 의기양양하게 어깨에 올려놓고 절망적이기 보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걸허가서를 내보이고 있다. 당시 나폴리에서는 구걸을 하려면 반드시 구걸허가서를 발급 받아야 했는데, 그림 속 허가서에는 라틴어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저에게 자선을 베풀어 주세요.”라는 말이 씌어 있다.

소년은 더러운 길가에 웅크리고 있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서 있다. 그의 뒤쪽으로는 고전적인 양식으로 그려진 역사적, 신화적, 종교적인 작품을 연상시키는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리베라는 소년에게 인상적인 당당한 몸집을 주었다. 인간적인 위엄과 낮은 시점이 그를 더욱 커 보이게 한다. 구걸하는 소년은 거의 어린왕자처럼 보인다. 느슨한 붓질로 더욱 부드럽게 표현된 풍경이 소년을 훨씬 더 두드러지게 해준다. 사람들의 개성에 인간애를 담아 사실적으로 전달할 줄 알았던 리베라의 능력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다.

목동들의 경배, 리베라 L'Adoration des Bergers,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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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José de Ribera, 1591-1652)가 사망하기 2년 전에 나폴리에서 완성한 작품이다. 흥분한 듯 황홀하게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남자들은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고 있고, 마리아는 손을 모으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 옆에서 가슴 위에 손을 포갠 인물은 성 요셉으로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왼편에서 한손으로 모자를 들어올린 남자는 기도를 올리는 중이며, 오른쪽 여자는 관객쪽을 주시하고 있다. 여러 인물들이 저마다 다른 행동을 취해 그림에 다채로움을 더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주의와 고전주의 사이에 있는 후기 리베라의 작품 특성을 잘 보여 준다. 목자의 거친 손과 옷감의 표현은 리베라 특유의 자연주의에 해당하며, 왼편의 목자와 오른쪽 여인의 모습에서는 현실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장면 전체에는 고전적인 웅장함이 흐르고, 하늘에는 예수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알리러 온 희미한 형체의 천사가 보여 고전주의의 색채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마리아와 예수의 얼굴은 우아한 작풍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자연의 빛을 끌어드린 점, 마리아가 머리에 쓴 망토에 사용한 청금석 파란색은 1630년 이후 리베라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거지 소년, 무리요 The Young Beggar,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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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활동했던 화가이다. 이 시기의 스페인 작가들은 카라바조나 플랑드르 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무리요의 <거지 소년>에서도 그러한 흔적이 발견된다.

<거지 소년>은 벼룩을 잡는 거지 소년의 모습을 포착한 그림이다. 짧은 머리에 누더기 옷을 걸친 소년은 누더기 속에 숨어 있는 벼룩을 잡는 중이다. 더러운 발바닥은과 새우 부스러기, 왼편의 과일들은 소년의 처지를 잘 보여 준다. 소년은 사실 배고프기보다는 사랑에 굶주려 있을 것이다.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다 해도 이 소년은 영원이 배고플 것이다. 그러한 굶주림의 이미지가 마치 블랙홀 같은 배경의 그림자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의 감상 포인트는 소년의 애처로운 모습과 더불어 바로 그림자와 빛이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소년의 모습을 무대의 조명처럼 비춘다. 그 덕에 소년은 지금 따사로움을 느끼며 벼룩을 잡는 여유를 누린다. 하지만 이 빛의 힘은 가변적이다. 작은 창으로 들어온 빛이 소년이 있는 쪽에서는 꺾인 사각형의 모습을 띠고 있는데, 빛은 그렇게 사물에 와 닿을 뿐 사물로 깊이 스며들지는 않는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빛은 곧 사라져버릴 것이다. 반면 그림자는 언제까지나 계속 남아 있을 것이며, 이 공간은 근원적으로 어둠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그림자로에서 소년에게 드리운 슬픔과 고통을 읽을 수 있다. 무리요는 소년의 삶을 바꾸어 줄 수는 없지만, 소년의 삶을 그림이라는 영원한 기록으로 남겨 수많은 사람들 앞에 내놓았다. 무리요가 수르바란이나 벨라스케즈 같은 다른 스페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작가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고아로 자랐고 아홉 자녀 중 다섯 명을 먼저 보낸 무리요의 인간애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1층 드농 관 Room 32 : 영국 회화

공원에서의 대화, 게인즈버러 Conversation dans un parc, 1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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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의 초기 걸작 중 하나로, 로맨틱한 풍경과 섬세한 연애 감정이 잘 조화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프랑스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 작품은 1740년대 중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게인즈버러가 이 무렵 결혼했기 때문에 작품 속의 두 인물이 게인즈버러와 그의 부인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게인즈버러의 자화상에 묘사된 얼굴과 이 작품 속 남자의 모습이 흡사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 참고로 루브르박물관 소묘관에는 이 작품에 나오는 두 연인이 숲 속 벤치 옆에 서있는 모습을 묘사한 소묘 작품도 소장되어 있는데, 소묘 역시 경쾌하면서도 섬세한 고유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게인즈버러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구상을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 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최초로 초상화와 풍경화를 같이 그린 화가이며, 자연을 배경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돌이나 코르크 같은 여러 가지 무생물을 풍경화의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거나, 이런 배경에서 자신이 그리려고 계획한 인물 대신 인간의 모습을 한 인형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게인즈버러의 작품 속 인물들 중 몇몇은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편 <공원에서의 대화>는 게인즈버러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초기작인 이 작품에서 두 연인은 가상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는 목가적 풍경 속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게인즈버러의 후기 작품에서는 울창하고, 원시적이며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을 배경으로 인물을 등장시킨다. 따라서 게인즈버러의 작품은 18세기에 나타난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멀리 만이 보이는 강가 풍경, 윌리엄 터너 Paysage avecune rivière et une baie dans le lointain, 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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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의 그림 중 프랑스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1890년, 이 그림을 본 에드몽 드 공쿠르는 “황갈색의 땅 한 끝에 저 멀리 어렴풋이 드러나는 푸르스름하고 깨끗한 호수의 경계와 강렬한 빛은 가히 놀랄 만하다. 뛰어난 모네나 모네 풍의 작가들이 그린 다른 그림들도 이 작품에 비하면 그다지 독창적이라 할 수 없다.”며 극찬했다. 이 작품은 터너가 말년에 그린 것으로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으려 했던 미완성 작품이었고, 터너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작업실에 있었다. 터너는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습작을 여러 장 그리며 작품을 단계적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터너의 작품세계는 고전주의 풍경화가의 대표인 클로드 로랭과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이지만, 이 작품은 그런 전통 화풍과는 거리가 멀다. 터너는 괴테의 색채론을 공부해 작품에 적용했으며, 특히 말년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빛의 연구를 화폭에 담았다. “색은 바로 빛의 표현”이라고 했던 터너의 이 그림은 색을 통해 빛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20세기, 특히 2차 대전 후 사람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화풍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터너를 현대예술의 선구자이자 연금술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1층 드농 관 Room 5 : 이탈리아 회화

성 세바스티아노, 만테냐 Saint Sebastian, 1456-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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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세바스티아노의 우측에 그리스어로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작품이다. 성 세바스티아노는 르네상스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대상인데, 그가 기독교 성자이기도 하지만 특히 젊은 남자의 누드를 그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군인이었던 성 세바스티아노는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형된 인물이다. “황제를 따르지만 경배하지는 않겠다”는 그의 말이 반역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결과로 그는 활쏘리 연습용 표적이 되었고, 심장을 관통한 화살은 하나도 없었지만 결국 화살받이가 되어 죽어야 했다.

만테냐는 성 세바스티아노에게서 완벽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이 항상 사랑해 왔던 대상, 즉 돌이 가지는 실재성과 로마 유적의 위엄을 인간 행동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연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인 배경은 돌로 되어 있고, 그 뒤로는 낭떠러지가 있다. 그리고 화면 곳곳에 바위와 대리석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멀리 세바스티아노의 ‘친구’들이 그를 남겨둔 채 자신들의 갈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결국 이 작품을 통해 만테냐가 말하려는 바는, 인간의 마음보다 더 단단하고 불가해한 것은 없다는 점이다. 또한 만테냐는 단단한 돌과 다치기 쉬운 인간의 육체 사이의 차이점에도 매혹된 듯하다. 하지만 만테냐는 인간의 연약함뿐만 아니라 심하게 상처받았음에도 꼿꼿하게 서 있는 강인함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화살이 머리를 관통했음에도 성 세바스티아노의 눈은 여전히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를 묶고 있는 밧줄은 그리 단단하게 묶인 듯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기둥에 묶여 있는 것이다. 아마 만테냐는 세바스티아노가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 즉 인간의 육체는 약하지만 정신은 강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듯하다.

한편 그림의 왼쪽 윗부분의 구름 안에 말 탄 사람을 그려 넣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남자는 승리감에 차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세바스티아노의 죽음 때문에 말 위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는 듯 보인다. 위를 향해 질주하는 이 말은 차분하게, 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천국을 바라보며 죽어가는 이에 대한 상징이다.

덧붙여 12~14세기에는 전염병을 ‘하늘에서 죄 많은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쏘는 화살 때문에 걸리는 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때문에 화살에 맞고도 다시 살아난 성인 세바스티안은 이후 전염병 환자와 가족을 지키는 수호성인이 되었다.

어린 소년과 함께 있는 노인, 기를란다요 Portrait d'un vieillard et d'un jeune garçon, 1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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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9-1494)는 피렌체의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한 화가로 프레스코와 초상화를 잘 그렸다. <어린 소년과 함께 있는 노인>은 기를란다요의 대표작으로 그의 초상화 전형을 보여준다.

노인은 만성피지선염증으로 인한 여드름 때문에 딸기코종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초상화에서 드러나는 사실성은 당시에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피부의 결점을 그대로 표현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후대 화가들이 모델을 ‘있는 그대로’ 그리도록 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그림 속 장면은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나이 든 노인의 얼굴이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피부와 대조를 이룬다. 아이가 노인을 향해 손을 뻗고 있으며 그들은 애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따뜻한 붉은색이 이들의 애정 어린 결속을 강조한다. 당시 피렌체의 화가들이 자주 묘사했던 열린 창문 너머의 풍경이 작품에서는 차가운 회색으로 그려져 죽음을 앞둔 노인의 여로를 암시한다.

스톡홀름 국립미술관에 있는 스케치

한편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에 있는 드로잉은 기를란다요가 코에 있는 피부 결점과 함께 노인을 여러 번 스케치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이와 노인이 혈연관계인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만약 추정대로 이 작품이 노인의 사후에 완성되었다면 기를란다요가 이야기를 창출하기 위해 아이를 추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암굴의 성모, 다 빈치 La Vergine delle roche, 1483-1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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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후원 아래 활동하던 시절의 작품인데, 이 시기에 그린 대표작이 <암굴의 성모>와 <최후의 만찬>이다. <암굴의 성모>는 밀라노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를 장식할 예배당 제단화를 그려 달라는 의뢰로 그림 작품이다.

그림은 동방 박사의 예언을 들은 헤롯왕이 갓 태어난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자 성모 마리아가 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던 중 세례 요한을 만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화면 중앙에 성모 마리아가 위치하며 그의 오른편에는 아기 예수, 왼편에는 아기 요한과 천사가 앉아 있다. 성모를 정점으로 예수와 세례 요한, 천사가 삼각형 구도를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이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어두운 동굴 안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이다. 어둠 속의 기암괴석이 한 줄기 빛에 의해 온화한 얼굴을 드러낸 인물들과 대조를 이루며 성스러움을 돋보이게 한다. 또한 스푸마토 기법과 투시법, 축소법을 사용해 사실적인 묘사를 하면서도 예술적인 상상력을 불어넣어 특유의 깊이감과 신비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그림에는 종류가 다른 풀들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자연에 대한 다 빈치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동굴 속의 어두움, 습기 등과 같은 롬바르디아 지방의 기후에서만 볼 수 있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부드럽고, 섬세한 빛이 어둠컴컴한 동굴 속에 있는 인물들을 비추고 있어서 인물들은 형태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형태만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전체 분위기에 신비로움을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다 빈치 회화의 핵심인 스푸마토 기법을 그리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빛에서 어둠으로의 변화를 그리는 섬세한 명암법이 효과를 발휘하여 윤곽선을 뚜렷하게 그리지 않고 희미하게 그리는 스푸마토 기법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스푸마토는 형태가 배경에 잠기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형태에 한층 생명감을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암굴의 성모>는 다 빈치와 성당 측의 불화 때문에 도중에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1486년이 되어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원래는 1483년 4월에 계약해 7개월 안에 끝내기로 했던 작품이었다. 그 후 다 빈치는 1508년 또 하나의 <동굴의 성모>를 완성했는데, 이번에도 인물 배치와 구도는 처음 작품과 같았다. 다만 성모와 예수, 세례 요한이 머리에 후광을 두른 점과 아기 예수와 요한이 자리를 바꾼 점, 또 아기 요한이 십자가 형상을 들고 있는 점 등이 구별되었다. 이 두 번째 그림은 원래의 주문대로 제단화로 사용되다 18세기 말엽 밀라노의 성당에서 반출되어 이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내셔널갤러리에 있는 암굴의 성모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첫 번째 <암굴의 성모>는 다 빈치의 초기 예술 세계가 잘 나타난 작품으로 치밀한 구도와 무한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대기원근법, 인물의 얼굴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특이한 조도법, 그리고 물체의 경계선을 연기처럼 부드러운 톤으로 흐리게 그리는 스푸마토 기법 등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독특한 기법들이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페로니에르를 한 아름다운 여인, 다 빈치 La belle ferronnière, 1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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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느라 스쳐 지나기 쉬운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걸작 중 하나이다. 모델에 대한 정보는 추측만 있을 뿐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으나, 다 빈치가 밀라노에 머물던 시절, 도시의 수장이었던 루도비코 일 모로(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정부 루크레치아 크리벨리나를 그린 것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

이 그림이 ‘라 벨 페로니에르’, 즉 ‘페로니에르를 한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불린 것은 18세기부터였다. 프랑스 여인들은 그림 속 여인의 이마에 달린 예쁜 철 장신구를 페로니에르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래 페로니에르는 ‘페론 씨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림 속 여자가 루도비코 일 모로의 정부가 아니라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의 정부로, 철물 장식업자인 ‘페론 씨의’ 아내일 것이라라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어 사전을 펼쳐 찾아보면, 페로니에르(ferronnière)는 ‘여자의 이마에 두르는 금줄 달린 보석 장신구’라는 뜻도 있지만 ‘철물 제작(판매)업자의 아내’라는 설명도 함께 되어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암흑 같은 검은 배경은 관객의 시선을 오로지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만 집중하도록 한다. 몸을 살짝 비틀고 있어서 여인의 존재가 더욱 자연스럽다. 게다가 하단에 그려 넣은 창틀 때문에 그림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치 실제로 어딘가에서 우연히 창 너머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는 듯한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엇나간 듯 살짝 치켜뜬 시선은 <모나리자> 속 주인공과 달리 여인의 성격이 그다지 호락호락할 것 같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확실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90년대 밀라노 궁정 시대에 제자들과 함께 공방에서 제작한 초상화 중의 하나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한편 이 작품은 1929년 위작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당시 그림 소유자가 가짜를 팔았다며 미술품 거래상을 고소한사건인데, 배심원단은 결국 평결을 내리지 못했고 뉴욕주 대법원이 사건을 파기하고 항소심으로 돌려보냈다. 진품에 대한 판단은 예술적 영역이지 법이 대답해야 할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성 안나와 성 모자, 다 빈치 La Vierge à l'Enfant avec sainte Anne, 1503-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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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년경 피렌체에서 미완성한 후기 작품으로 후대에 복원되는 과정에서 손상을 입은 그림이다.

맨 뒤쪽에서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 인물이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이고, 그 무릎에 앉아있는 성모 마리아는 양의 등을 타려는 아기 예수를 양과 떼어놓으려 하고 있다. 양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희생양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마리아의 행위는 아들을 험난한 운명으로부터 막고 싶은 모성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성화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려 한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르네상스 정신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림은 성 안나의 머리를 정점으로 피라미드형 구조를 띤다. 이러한 구도 덕분에 성 안나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딸을 무릎에 앉혔지만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느낌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이 앉아있는 곳은 결코 순탄치 못할 아기의 운명을 예고하려는 듯, 아름다운 초원이 아니라 척박한 바위산이며, 배경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그린 듯 안개가 자욱한 풍경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데, 이는 다 빈치가 발명한 스푸마토 기법 덕분이다. 윤곽선을 뚜렷하게 그리지 않고 희미하고 뿌옇게 그리는 스푸마토 화법으로 그림 속 인물들은 부드러우면서도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준다. 다 빈치는 회화를 많이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작품이 대표작에 속하지만 이 작품은 특히 회화 기법에서나 신학적 의미에서 다 빈치 예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다 빈치 생전에 이 작품과 동일한 주제를 그린 대형 스케치를 피렌체에서 며칠 간 전시해 놓은 적이 있었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인파가 마치 거룩한 축제에 참석하듯이 줄을 서서 감상했다고 한다. 다 빈치가 당대에도 칭송받던 최고의 예술가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작품의 밑그림에 대해 1501년 4월 3일 피에트로 다 노벨라라라는 후작 부인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다 빈치는 한 살쯤 된 아기 예수가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 양을 붙잡고 조르려는 듯한 모습을 그렸다. 아기 엄마는 아기를 양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성 안나에게서 거의 일어서고 있다. 성 안나 역시 약간 일어서면서 아기를 양에게서 떼어놓지 못한 딸을 받쳐주고 있는 듯하다.”

세례자 성 요한, 다 빈치 Saint Jean-Baptiste, 151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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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스푸마토와 키아로스쿠로의 테크닉을 활용해 완성한 마지막 걸작으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 요한을 주제로 하고 있다. 검은 배경 속에서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젊은이의 표정은 모호하고 신비로우며, 얼굴의 표현이 극도로 섬세하다. 머리카락과 털옷에서는 스푸마토와 키아로스쿠로를 극대화해 뚜렷한 선이 보이지 않으나 인물의 입체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어둠 속에서 인물이 베일에 싸여 떠오르는 듯한 신비한 인상을 준다. 본래 세례자 요한은 보통 아기 예수와 함께 노니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려지거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혼자 그려질 경우나 여러 성인과 함께 그려질 경우를 불문하고 보통은 중년 남성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다 빈치는 이 작품에서 세례자 요한을 청년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런데 그림 속 요한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 보면 미소 짓는 입 모양이 마치 <모나리자> 속 여인과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흥미롭게도, 입술의 양끝만 살짝 올라간 이 미소는 다 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마리아와 예수>에서 성모 마리아의 입가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입가의 미소가 같으면 그 사람의 인상도 비슷해 보이는데, 그래서 성 요한과 모나리자, 성모 마리아는 유난히 닮아 보인다.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 <다 빈치 코드>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옆 가롯 유다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사람이 성 요한이 아니라 마리아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최후의 만찬> 속 성 요한 부분을 확대해 보면 다 빈치의 마리아와 매우 닮아 있다. 물론 <다 빈치 코드>는 허구를 기반으로 한 픽션이지만, 이러한 미소 때문에 충분히 그와 같은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왼쪽부터 마리아, 성 요한, 모나리자의 모습

종교화에서 남성이 십자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면 대체로 예수의 사촌인 성 요한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주인공을 성 요한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성서에 따르면 성 요한은 광야에서 은자 생활을 하면서 벌꿀과 메뚜기로 연명했고, 낙타 가죽을 두르고 허리에 가죽띠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다 빈치의 <세례자 성 요한>에 등장하는 남자는 낙타 대신 표범 가죽을 두르고 있다. 표범 가죽은 성경이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술과 쾌락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를 상징한다. 그렇듯 성경과 그리스 신화가 공존하는 상징, 모나리자나 마리아와 닮은 미소, 밝음과 어둠의 대비 등이 그림 속 인물의 신비감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다 빈치의 의도된 계획이라고 볼 수 있다. 다 반치는 대중의 호기심을 이끌곤 했으며, 그가 남긴 의문의 코드들은 오늘날까지 감상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또 다른 지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세례요한의 머리를 받는 살로메, 루이니 Salomé reçoit la tête de saint Jean Baptiste, 1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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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은 혜롯왕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한 것을 비난한 일 때문에 옥에 갇히게 된다.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 딸 살로메가 연석에서 춤을 추어 왕을 기쁘게 하자 헤롯은 그녀에게 무엇이든 달라는것을 주겠다는 맹세를 하고, 살로메는 헤로디아의 사주에 따라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한다. 왕은 선지자 요한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 했지만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맹세한 것 때문에 어쩔수 없이 세례요한의 목을 베라는 명을 하고 살로메는 소반에 얹은 세례요한의 머리를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다 준다.

인류 최초의 팜므파탈로 기록될 만큼 자극적인 살로메의 성서 속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의 그림에서 주제로 등장한다. 루이니(Bernardino Luini, 1481?-1532)의 작품에서는 아름다운 살로메의 외모와 세례 요한의 목과 은쟁반이 대조를 이루면서 인물의 잔인함을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섬세한 그림자로 윤곽선을 희미하게 처리한 점은 다 빈치가 개발한 스푸마토 기법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1층 드농 관 Room 4 : 이탈리아 회화

젊은 공주의 초상화 ·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 피사넬로 Portrait d'une jeune princesse · Sigismondo Pandolfo Malatesta, 1449 ·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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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을 중시하던 중세에는 여간해서는 개인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 그러다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로마적 사고가 부활하자 개인 초상화가 폭발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고대 로마 시절에는 황제나 귀족들이 자신의 측면 얼굴을 새겨 넣은 메달이나 동전을 주문 제작하곤 했는데, 측면 얼굴을 그리는 것이 한 인물의 위엄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피사넬로(Il Pisanello, 1395-1455)는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 실세들의 얼굴을 기념비적으로 새겨 넣는 메달 전문 제작자로 유명하다. 피사넬로의 그림 속 공주는 에스테 가문의 여인 중 하나로 추정되는데, 여인의 왼팔 바로 뒷부분에 수놓아져 있는 꽃병이 이들 가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가슴 위쪽에 수놓아진 노간주나무는 이탈리아어로 지네프로(ginepro)라고 하는데 그녀의 이름 ‘지네브라’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여인의 정체는 당시 귀족인 지네브라 데스테(Ginevra d’Este, 1419-1440)로 추정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민망할 정도로 훤한 이마는 당시 여성들 사이에 유행이었다.

그녀의 초상화는 또 다른 측면 초상화의 주인공,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Sigismondo Pandolfo Malatesta, 1417-1468)와의 결혼을 앞두고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식견 높은 지도자였지만, 아내인 지네브라 데스테와 폴리세나 스포르차를 독살하고 귀족 여인을 시간하는 등의 악행을 저질러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인물이다. 물론 그의 악행에 관한 이야기는 정치적 알력 관계에 놓여 사사건건 그와 마찰을 빚었던 교황 측의 기록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믿기는 어렵다.

1층 드농 관 Room 3 : 이탈리아 회화

성흔을 받는 프란체스코, 조토 St. Francis Receiving the Stigmata, 1297-1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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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신인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는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에서도 일했는데, 왕과 교황의 친구인 덕에 이름을 날렸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치마부에 밑에서 그림을 배우다가 이 작품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 성 프란체스코가 생전에 경험했다는 전설을 묘사한 28점의 프레스코화 중 하나로, 그중 25점이 조토가 그린 것이다. 조토의 가장 초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성흔을 받는 성 프란체스코>에서 성 프란체스코는 여섯 개의 날개가 달린 천사와 십자가에 매달린 인물이 결합된 경이로운 형상을 만나고 있다. 이 환영을 본 이후 성 프란체스코의 손과 발에 성흔,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입은 상처가 나타났다. 그림 속 환영에서 나오는 광선이 프란체스코의 손과 발 위로 떨어지고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풍경은 계시의 빛으로 빛난다. 조토는 원근법이나 해부학에 대한 기법적인 지식이 없었음에도 이를 잘 활용했으며, 특히 이 작품에서는 앉아 있는 수도사의 모습에서 공간감과 무게감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조토는 중세 미술에서 나타나는 엄격한 양식화를 버리고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작가로 꼽히는데, 특히 후기 프레스코화에서 수사학을 넘어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을 탐구해 훗날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르네상스 미술이 조토의 스승인 치마부에부터 시작되었다는 관점도 있지만, 비잔틴미술이라는 중세적 관습에서 벗어나 르네상스 미술의 물꼬를 튼 진정한 주도자는 조토였다. 조토의 친구이기도 했던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는 <신곡>에서 “치마부에의 시대는 갔다. 지금부터는 조토의 시대다.”라고 했고, 최초의 미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는 그가 자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재현하려는 화가의 본능과 잊힌 회화의 기법과 규칙을 부흥시켰다고 평했다. 또한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는 <데카메론>에서 “수세기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성모 대관식, 프라 안젤리코 Le Couronnement de la Vierge, 1430-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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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는 처음에는 책의 삽화를 그렸었는데 후일 규모가 큰 패널화, 제단화,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그는 작품에 임할 때마다 반드시 기도했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릴 때면 항상 눈물을 흘렸던 화가였다. 1440년에는 피렌체에서 대규모 공방을 운영하며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원근법적 공간과 사실적 재현의 기법을 이해해 나갔다.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은 성모가 천상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여왕으로서 왕관을 수여받는 장면을 남긴 것이다. 주위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들과 성인들이 있다. 계단 아래의 왼쪽에는 남자 성인들이 오른쪽에는 여자 성인들이 참석하고 있다.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 성인은 최초의 순교자로서 돌에 머리를 맞아 죽은 성 스테파노이고, 양을 안고 있는 사람은 동정녀로 순교한 성 아그네스, 바퀴를 들고 있는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이다.

꼼꼼하게 그린 세부묘사와 화려한 채색이 고딕 양식과 정밀한 필사본의 채색화 전통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좌우 대칭구도의 계단과 타일의 모습은 화면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원근법적 공간구도를 따르고 있다. 한편 청금석을 활용한 파란색은 안젤리코가 즐겨 쓰던 색이었다. 초기 르네상스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정원사 성모 마리아, 라파엘로 La Belle Jardinière,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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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는 역대 화가 중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표현한 작가로 정평이 나 있다. 이 그림의 마리아 역시 그 아름다운 자태와 자식을 향한 자애롭고 지극한 애정의 눈길이 한 개인으로서가 아닌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어머니의 모습, 즉 이상적인 모성의 실체로 다가온다.

그림 속 정원의 모든 식물은 잡초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이파리 하나 없이 생생하고 건강하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존재들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 하느님의 섭리는 멀리 동네에 서 있는 교회의 모습을 통해 시사되고 있다. 어머니 마리아의 보호아래 아기 예수가 어머니와 눈을 맞추고, 그 옆에 십자가를 지고 있는 세례 요한은 모자 간의 다정한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작품 속 예수의 모습은 벌거벗은 아기의 모습이며 땅에 두 발을 딛고 있다. 이는 예수를 한 인간으로 본 것이다. 신의 시대에는 아기 예수가 항상 성모 마리아에 의해 받들어졌고, 어른의 육체가 적용된 아이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기 예수에게 성인의 위상을 부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인간 중심 르네상스 시기가 도래하자 이렇듯 예수조차 한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스케치들(왼쪽 스케치는 루브르 박물관 소장)

성모는 전통적인 아이콘을 통해 표현되어 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하느님에 대한 강한 사랑을 나타내는 붉은 원피스, 세속에서의 가난하고 청빈한 삶의 모습을 의미하는 검푸른 망토, 그리고 기도를 생활화하는 마리아의 상징인 기도서 등을 통해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는 잘 손질된 머리는 세속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며, 겉옷 한쪽이 흘러내리면서 드러난 강한 붉은색은 세속에서의 인간적 욕망을 드러내는 듯하다. 요컨대 마리아는 성인으로서의 자태와 위상을 지니고 있지만, 그런 선입견을 버리고 보면 마리아 역시 한 인간이며 인간으로서의 세속의 욕망을 지닌 여인으로 비추어진 것이다.

한편 작품 속 인물들이 보이는 삼각형 구도는 그림에 안정감을 더하고 있다. 또한 마리아와 예수, 요한의 시선이 이루는 삼각형과 각각의 머리에서 보이는 세 개의 원형, 그리고 그 세 개의 머리를 통해 그려지는 하나의 커다란 원 등의 암시적 구도가 그 안정감을 한층 강화한다. 더욱이 전체적으로 작품의 틀은 윗부분의 원과 아랫부분의 사각형이 결합된 구도인데, 윗부분의 원은 영원성의 상징으로 하느님의 세계이며, 아래의 사각형은 지상의 세계로 유한한 인간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무슨 이유로 ‘아름다운 정원사’라고 불리기 시작했는지가 불분명하다. 분명 배경이 되고 있는 곳은 닫혀 있는 공간인 정원도 아닐 뿐더러, 마리아에게서는 정원사를 연상시키는 그 무엇도 발견되지 않는다. 정원사라는 말이 무엇인가를 은유적으로 지칭했거나, 또는 누군가가 별 의미 없이 이 작품을 그렇게 부른것이 훗날 그대로 전승됐을 수도 있다.

1층 드농 관 Room 1 : 이탈리아 회화

비너스와 삼미신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젊은 여인, 보티첼리 Vénus et les Trois Grâces offrant des présents à une jeune fille, 1483-1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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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4?-1510)의 작품을 통해서 신화적 작품들의 시적 분위기를 재발견할 수 있다. 초기에는 자연주의에 관심을 보인 보티첼리는 특유의 곡선과 감상적인 시정 연출과 결합해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끌어냈는데, 이후 보다 감미롭고 감상적인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맡은 작업이 바티칸 궁전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측벽 장식이다.

이 작업을 마치고 1482년 피렌체로 돌아온 보티첼리는 약 10년 동안 사실의 비중을 거의 두지 않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마음껏 펼쳤다. 이 때의 작품이 <마르스와 비너스>, <비너스의 탄생>, <수태고지> 등의 대표작이다. 이후로는 말년까지 신비주의 경향이 짙은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비너스와 삼미신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젊은 여인>은 보티첼리의 프레스코화로 부분 부분 박락되어 아쉽지만 보티첼리의 작풍 연구를 위한 자료로 손색없다. 그림 속  젊은 아가씨는 어쩌면 비너스와 세 명의 미의 여신일 듯한 네 명의 우의적인 인물로부터 선물을 받고 있으며, 동시에 이와 짝을 이루는 그림에는 여신(비너스 혹은 미네르바)에게 소개된 청년이 나타나 있다. 여성 인물상들의 우아함과 빛깔들의 부드러움 그리고 몸짓과 옷 주름의 유동적인 리듬감으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게 만든 그 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볼 수 있다.

1층 드농 관 Room 66 : 유럽 장식미술

루이 15세의 왕관, 뒤플로 Crown of Louis XV,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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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탱 뒤플로(Augustin Duflot, 1715-1774)가 루이15세의 대관식을 위해 제작한 왕관이다. 이전까지의 프랑스 왕들은 왕관 전체를 보석으로 장식하지는 않았었음에 비추어 보면 당시 프랑스 궁정의 사치가 얼마나 급격히 심해졌는지 알 수 있다. 꼭대기는 저 유명한 상시 다이아몬드(Sancy Diamond, 55.23캐럿)로 장식되어 있었고 전체에 273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으며, 64개의 유색 보석이 사용됐다. 루브르에 전시되어 있는 수많은 왕관 중에서도 보석의 향연이라 할 만큼 정교하고 화려한 왕관이다.

리전트 다이아몬드 Diamant dit "Re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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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의 왕관 앞에 전시되어 있다. 세계 4대 다이아몬드(호프 다이아몬드, 상시 다이아몬드, 리전트 다이아몬드, 피렌체 다이아몬드) 중 하나로, 무려 140.50캐럿이다.

이 다이아몬드는 1701년 인도의 크리스나 강변 파티알 광산에서 일하던 노예가 발견했다. 발견 당시 원석이 410캐럿에 달했는데, 노예는 다이아몬드를 탐내 자신의 발목에 상처를 내고 원석을 붕대로 감아 맨 다음 몰래 도망친다. 하지만 아무도 배에 태워 주지 않자 노예는 영국의 한 선장에게 다이아몬드를 보여주며 자신이 노예 신분을 벗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에 데려다 주면 원석값의 절반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선장이 이를 수락해 노예는 승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배가 봄베이로 향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게 되자, 선장은 노예를 바다에 빠트려 버리고 다이아몬드를 참전드라는 상인에게 5천달러에 판다. 하지만 선장은 죽은 노예의 환영에 시달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다 돈을 탕진하고 자살하게 된다.

보석상 참전드는 다이아몬드는 총독 토마스 피트에게 10만 달러에 팔고, 토마스 피트는 아들 로버트에게 다이아몬드를 유럽으로 가지고 가서 커팅해 오도록 지시해 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140.50캐럿의 브릴리언트 컷으로 세공했다. 이렇게 길이 20㎜, 높이 19㎜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브릴리언트 형태의 ‘피트 다이아몬드’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세공 과정에서 나온 몇 개의 로즈컷 다이아몬드는 피터 대왕에게 판매됐다.

1717년, 루이 15세를 대신해 섭정을 하던 오를레앙 공작 필립 2세는 엄청난 가격인 50만 달러에 피트 다이아몬드를 구입해 루이 15세에게 선물한다.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프랑스 왕실 소유가 되고 ‘섭정’이라는 뜻의 ‘리전트(Regent)’를 붙여 ‘리전트 다이아몬드’라 부르게 되었다. 리전트 다이아몬드는 1722년 루이15세의 대관식 때 왕관 밴드 바로 위 정면에 박혔고, 훗날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는  이 다이아몬드를 머리 장식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770년 루이 16세도 대관식에 이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왕관을 썼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리전트 다이아몬드로 만든 검정 벨벳 모자를 자주 착용했다. 하지만 상시 다이아몬드(Sancy Diamond, 55.23캐럿), 호프 다이아몬드(Hope diamond, 45.52캐럿)와 마찬가지로 리전트 다이아몬드 역시 프랑스 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자 리전트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두 배로 뛰어오른다. 시간이 지난 1800년, 나폴레옹이 리전트 다이아몬드를 소유하게 되는데 나폴레옹은 이 다이아몬드를 칼자루 끝에 장식용으로 달고 다녔다.

나폴레옹의 초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칼자루의 리전트 다이아몬드

프랑스 왕실은 리전트 다이아몬드를 구입한 이후 영국과의 7년 전쟁에서 패배해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영국에 내어주고 바닥난 재정으로 허덕였으며 프랑스혁명까지 맞아 몰락했다. 때문에 리전트 다이아몬드는 호사스러운 왕정 정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리전트 다이아몬드는 독일의 나치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였을때 대부분의 보석과 함께 도난당했지만 다행히 프랑스의 남을 수 있었으며 현재는 프랑스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상시 다이아몬드 Diamant dit "Sa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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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5세의 왕관의 맨 꼭대기에는 상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는데(지금 박혀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4대 다이아몬드 중 하나인 상시 다이아몬드에도 역시 사연이 있다.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는 절대왕권을 확립한 후 전쟁과 화려한 궁정생활, 베르사유 궁전 신축 등으로 국고를 급속도로 낭비했다. 그런 그가 대관식에서 쓴 왕관에 바로 이 상시 다이아몬드가 장식돼 있었다.

다른 큰 다이아몬드가 그러하듯 상시 다이아몬드 역시 인도산으로 추정되는데, 원래는 1570년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에서 주 터키 프랑스 대사로 일하고 있던 니콜라 드 상시(Nicolas Harlay de Sancy)가 구입해서 프랑스로 들여온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헨리 3세와 후계자 헨리 4세는 상시로부터 이 다이아몬드를 빌려 장식으로 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 4세는 부족한 자금을 빌리기 위해 돈주인에게 상시 다이아몬드를 보증 삼아 맡기기로 하고 하인에게 다이아몬드를 전달하데 한다. 그런데 보석이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강도를 만나게 되었고, 보석을 갖고 가던 하인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후에 다이아몬드를 전달하기로 한 하인의 시신을 수습해 해부해 보니 보석이 그의 위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충성스러운 하인이 보석을 강도들에게 뺏기는 대신 삼켜 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었다는 하나의 전승을 만들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보석을 돌려받은 상시는 다이아몬드를 나중에 1605년 영국의 제임스 1세에게 팔았고 이후 1669년까지 상시는 영국 왕실 소유가 되었다. 훗날 제임스 2세가 내란으로 피난처를 구하게 되는데, 돈이 필요했던 그는 이 보석을 당시 루이 14세의 섭정을 대행하던 마자렝 추기경에게 판매한다. 마자렝은 이를 루이 14세에게 헌상했다. 루이 14세의 왕관에 장식되기까지는 오랜 방랑을 한 셈이다.

이후 이 보석은 프랑스 혁명 중에 도난당했는데 1828년 러시아의 부호인 데미도프 왕자가 구매하게 된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865년 다시 인도의 왕자에게 팔렸다가 되팔리고, 그 후 다시 어디엔가 숨겨져 있다가 1906년 미국의 재력가이자 정치가인 아스토(William Waldorf Astor)에게 팔려 그 후 72년 간 아스토 가문이 소유했다. 이것을 1978년 루브르 박물관이 100만 달러에 구입해 지금까지 전시하고 있다. 당시의 프랑스 왕관은 프랑스 혁명 중에 사라졌으나 후에 복원되었으며, 현재 왕관에 장식된 보석들은 모조품으로 채워져 있다.

1층 설리관 Room 74 : 회화 임시전시실

리슐리외 추기경의 초상, 상페뉴 Le Cardinal de Richelieu, 1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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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주인공인 리슐리외 추기경(본명 Armand Jean du Plessis, 1585-1642)는 탁월한 지적 능력과 뛰어난 학구열, 그리고 부지런함을 인정받아 앙리 4세의 왕비인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édicis, 1573-1642)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한 인물이다. 1622년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2년 후인 1624년에는 재상이 되었으며, 사망할 때까지 루이 13세의 곁에서 어린 왕이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했다.

작자인 상페뉴(Philippe de Champaigne, 1602-1674)는 벨기에 브뤼셀 출신으로, 플랑드르 사람은 아니지만 감각적이고 품격 높은 솜씨로 네덜란드 남부 회화의 전통을 프랑스에서 이어가게 한 화가다. 프랑스에서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와 루이 13세에게 인정받았으며 리슐리외 추기경에게도 신임을 받았다.

상페뉴는 이 작품과 함께 리슐리외 추기경의 초상화를 여러 점 제작했는데, 이미 당시 교회나 귀족 상류층의 주문으로 많은 사람들의 초상화를 제작한 경험이 있어 초상화에 능했다. 특히 인물의 모습에 정신적 심오함을 불어넣을 줄 아는 화가로 평가된다.

1층 드농 관-쉴리 관 사이 : 고대 그리스·로마

사모트라케의 니케 Victoire de Samothrace, B.C.331-B.C.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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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농관의 큰 계단 난간에서서 많은 관람객들의 주목을 받는 조각이다. 1863년 터키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의 프랑스 영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떤 샤를 샹푸아소(Charles Champoiseau, 1830-1909)가 에게 해 북서부에 있는 작은 섬 사모트라케에서 이 거대한 조각의 파편 100여 점을 발굴했다. 이는 곧장 루브르 복원실로 옮겨졌는데, 복원을 통해 드러난 여신의 모습은 실로 놀라웠다. 머리와 두 팔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유려함이 아프로디테에 견주어 손색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니케 상은 본래 사모트라케 섬의 돌로 된 벽감(niche)에서 돌로 만든 전함의 뱃머리 위에 서 있었는데, 아마도 처음에는 분수대 중앙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모인다. 대리석으로 된 뱃머리 위에 서서 바람을 가르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여신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어깨의 위치로 미루어 보아 오른쪽 팔이 앞으로 뻗고 왼쪽 팔은 자연스럽게 뒤로 늘어뜨린 상태였을 것이로 보이는데,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어 허리를 약간 뒤튼 자세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의 변형을 보여준다. 물에 젖은 듯 몸체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얇은 옷감의 묘사는 헬레니즘 조각의 정수로 평가되었다.

1950년경에 오른손이 발견됐는데, 남아 있는 손가락의 형태로 볼 때 여신은 기다란 물체, 아마도 승리의 나팔을 쥐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니케 여신이 뱃머리에 서서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모습은 기원전 4세기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까지 나타나는 전형적인 도상이지만, 그 표현의 섬세함과 생동감은 <사모트라케의 니케> 여신상을 따라오지 못한다. 적어도 대중적으로 니케 여신이 유명해진 것은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견된 여신상의 공이 컸다.

훗날 발견된 오른손 일부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에게 해 동남쪽에 위치한 로도스(Rhodes) 섬 사람들이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사모트라케 섬까지 와서 승리를 기원하며 세운 조각상이었다. 로도스 인들은 사모트라케를 차지하기 위해 기원전 190년경 시데 해전을 치르는데, 이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이른바 전승 기념물을 세운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여신상이 있던 뱃머리의 회색 대리석은 로도스 섬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렇다면 니케는 어떤 여신일까? 날개를 단 여신 니케는 티탄 족(Titans)의 딸로 팔라스(Pallas)와 스튁스(Styx) 사이에서 태어났다. 질투를 의미하는 젤로스(Zelos), 힘을 뜻하는 크라토스(Kratos), 폭력을 상징하는 비아(Bia)의 남매이기도 하다. 니케는 거인 기간테스와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인 기간토마키아에서 제우스 편을 들면서 승리의 여신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니케의 이미지는 그리스 미술에서 특별한 존재로 전통적으로는 전쟁, 운동 경기, 시정 논쟁에서의 승리와 관련이 있다.

1층 쉴리 관 Room 25 : 고대 이집트

아메노피스 4세 상 Aménophis IV, B.C.1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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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낙(Karnak)에 있는 아몬(Amen) 신전 동쪽에 건설된 건물에서 나온 것이다. 아메노피스 4세(아크나톤, 재위 B.C.1350-B.C.1334)의 얼굴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아마르나 시대 스타일로 제작된 유물이다. 기둥 한쪽 대들보를 위해 제작된 유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아크나톤(Akhenaten)은 자신의 모습을 조각할 때 조각가들이 따라야 할 양식 규칙을 정하며 예술 스타일을 마련했다. 이를 아마르나(Amarna)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조금 독특하다. 이전까지 파라오를 운동선수의 몸처럼 완벽한 모습으로 표현했다면, 아크나톤은 오히려 빈약하고 이상한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 유물에서 보이는 이상한 형태와 길에 늘어진 듯한 얼굴 모양, 가슴까지 뻗은 턱수염 등도 이에 따른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왕은 제 18대 왕조부터 파라오라 불렸는데, 이들은 테베에서 숭배한 최고신 ‘아몬(Amen)’, 혹은 태양신 ‘라(La)’와 항상 동일시되었다.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통치 5년에 들어, 제 18왕조의 아메노피스 4세(아멘호테프 4세)는 오래된 신들을 폐지하고 자신만의 유일신인 태양 원반의 신 아텐(Aten)을 섬겼으며, 자기 이름조차 ‘아텐에게 쓸모 있는 자’라는 뜻의 ‘아크나톤(Akhenaten)’으로 바꿨다. 또 새로운 수도 아테타텐(Akhetaten, ‘아텐의 지평선’이라는 뜻으로 현재의 아마르나 지역)을 세우고 새로운 제사장을 앉혔다.

오래된 질서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실로 극적이었다. 새로운 종교는 이집트에서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아크나톤은 히타이트 족 등의 침입을 받게 된다. 아크나톤 사후에 그의 아들인 투탕카멘(Tutankhamen) 역시 결국 옛 종교로 회귀했다. 그 동안 아크나톤이 세운 수도는 버림받았고, 그의 독특한 종교가 남긴 흔적을 모조리 제거하려던 사람들은 비문에 새겨진 그의 이름마저도 강제로 지워 버렸다.

아크나톤 왕과 네페르티티 왕비 Akhenaten et Nefertiti, B.C.1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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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나톤 시대(재위 B.C.1350-B.C.1334)에 제단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석회에 채색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왕과 왕비는 손을 잡고 마치 앞을 향해 함께 걷는 듯한 모습이다. 완전한 무표정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것을 바라보듯 하며, 몸은 꼿꼿하게 편 상태이다. 아마포로 된 아름다운 의복을 입고 있으며(본래는 화려한 색이 칠해져 있었을 것이다.), 왕은 파라오가 전쟁이나 중요한 의식을 거행할 때 쓰는 푸른 왕관인 케프레쉬(khepresh)를, 왕비는 높은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아크나톤은 아텐 신을 모시기 위해 사막 가운데 아마르나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새로운 사제단을 임명했으며, 네페르티티와 더불어 독창적인 양식의 자연주의적 예술을 창조했다. 다른 어떤 이집트 군주와도 다른, 복부가 둥글게 부풀고 몸이 길쭉하게 늘어나 있으며 목을 앞으로 빼고, 머리를 세우고, 어깨를 둥글게 표현하는 이상한 예술이었다. 이런 모습을 토대로 학자들은 그가 다양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뒷면에는 상형문자로 된 카르투슈(cartouche)가 왕 쪽에 세 개, 왕비 쪽에 세 개로 총 여섯 개 남아 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항상 신과 인간의 중개자 역할을 했는데, 아크나톤 재위 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역할이 왕비에게도 중요하게 강조됐다.

1층 쉴리 관 Room 22 : 고대 이집트

앉아 있는 서기 Le Scribe Accroupi, B.C.2600-B.C.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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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Memphis)에서 발굴된 것으로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4500년의 세월을 견뎠음에도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며, 1998년 청소하는 과정에서 고대 채색이 많이 복원되었다.

얼굴, 특히 상감으로 구성한 눈의 표현이 백미인데, 양쪽 눈 전체가 뒤쪽으로 연결된 두 개의 커다란 구리 클립으로 소켓처럼 고정돼 있다. 눈동자는 크리스탈을 다듬어 표현한 것이며 겉에 드러난 부분은 둥그스름하지만 머리 안쪽 부분은 원뿔형으로 뻗어 있어 실제 눈의 시신경 해부도와 유사하게 되어 있어 놀랍다. 더욱이 크리스탈 안에는 동공 자리에 검은 점이 찍혀 있어 사실성을 더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처음 이 유물이 발굴되었을 때 인부들은 이 석상이 자신들을 따라다니며 쳐다본다며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손가락, 손톱의 정교함 또한 놀라우며 넓은 가슴에는 나무로 만든 젖꼭지를 꽂아 놓았다.

이 서기가 누구인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추정이 난무한테,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제4왕조 때 고위관료인 페헤르네페르(Pehernefer)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보기 드문 얇은 입술, 몸통의 형태, 넓은 가슴과 같은 표현적 특징이 페헤네페르의 다른 동상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서기 상과 같은 방에 페헤르네페르의 앉아 있는 석회암 조각상도 함께 전시돼 있는데, 가슴 윗부분에 우세크(Ousekh)를 그렸던 자국이 남아 있는 최고위 신분의 인물임을 드러내고 있다.

페헤르네페르 상

서기는 이집트 요직이었다. 서기들은 글이 필요한 거의 모든 일에 참여했고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소출을 계산하고 그에 따른 세금을 산출하는 일, 군사와 무기를 세고 병사를 징집하는 일은 물론이고 외교나 법무에도 참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대 이집트에서 서기는 경제, 행정, 법, 외교,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루 활동했으며, 글을 자유롭게 읽고 쓸 줄 아는 엘리트들이었다.

<앉아 있는 서기>는 파라오 밑에서 왕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서기가 했던 중요한 역할을 상징한다. 서기가 왼손에 잡고 있는 것은 고대 이집트에서 쓰던 파피루스이고, 오른손에는 원래 갈대 펜을 쥐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글을 쓰는 모습의 서기 상은 제4왕조때까지 나타나며, 이후 시기에는 독서하는 모습의 서기 상이 주로 발견된다.

1층 리슐리외 관 Room 2 : 유럽 장식미술

네소스와 데이아니라, 잠볼로냐 Nessus et Deianira, 1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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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볼로냐(Giambologna, 1529-1698)는 플랑드르 출신의 조각가로 피렌체에서 성공적인 공방을 운영했으며 메디치 가를 위해 자신의 작품을 작은 사이즈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신화에 바탕하고 있다. 헤라클레스는 칼리돈의 왕이 딸 데이아니라와 결혼했는데, 에우에노스 강을 건널 때 켄타우로스 족인 네소스가 나타나 물살이 거세니 자신이 데이아니라를 등에 태워 건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강을 건넌 네소스는 데이아니라를 겁탈하려고 했고, 이를 본 헤라클레스는 강 건너편에서 네소스에게 활을 쏘았다. 네소스는 죽어가면서 데이아니라에게, 자신의 피에는 식어버린 사랑을 되살리는 힘이 있으니 남편이 변심했을 때 자신의 피를 남편의 옷에 발라서 입히라고 했고 데이아니라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피를 병에 담아 보관한다. 훗날 남편의 외도를 의심한 데이아니라가 헤라클레스의 옷에 보관해 두었던 피를 묻히자 그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죽어 갔고 데이아니라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잠볼로냐는 복잡한 구성을 통해 활력과 균형 잡힌 긴장감으로 두 인물을 얽어내고 있는데,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세 개의 주물틀을 제작했었다고 한다.

피렌체 로지아 데이 란치 앞에 있는 잠볼 로냐의 작품, 사비나 여인의 겁탈

1층 리슐리외 관 Room 87·83 : 유럽 장식미술

나폴레옹 3세의 아파트 Appartements Napoléon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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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 1808-1873)는 우리가 흔히 아는 나폴레옹의 동생으로, 나폴레옹 실각 후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하다가 국민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표를 얻어 즉위한 인물이다. 나름의 공적이 있는 통치차였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만큼 그가 파리 루브르에 머물 때 썼던 이 아파트 역시 대단히 화려하다. 온통 금빛으로 빛나는 실내 디자인과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샹들리에들이 눈길을 사로잡는 공간이다. 방과 거실, 식당, 침실 등이 이어져 있으며 현대 장인들도 흉내내지 어려울 만큼 지나치게 화려한 최고급 가구, 샹들리에, 도자기, 식기와 소품들, 장식품, 카페트 등이 가득하다. 특히 Room 87에서는 풍성한 인테리어와 함께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루브르와 튈르리 정원 그림에 주목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1층 리슐리외 관 Room 2 : 유럽 장식미술

쉬제르의 독수리 Vase dit Aigle de Suger,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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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의 공예품 전시실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한때 생드니 수도원의 원장을 지냈던 쉬제르(Suger, 1081?-1151)가 신에게 봉헌한 화병 중의 하나로 그가 소장했었던 세 개의 화병 중 예술적 가치를 가장 높게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다.

쉬제르는 서민 출신이었는데 어릴 때 생드니 수도원에 들어가 루이 6세와 함께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루이 6세 및 루이 7세의 고문을 지내면서 동시에 생드니 수도원의 원장까지 지냈다. 그는 왕실의 영향력 있는 고문이었고, 베네딕도 수도회의 훌륭한 행정관이었으며 수도원 생활의 혁신을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권력자였다. 특히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하느라 루이 7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정성껏 왕실을 돌봤는데, 루이 7세는 돌아온 후 그에게 “나라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주었다.

쉬제르는 온갖 종류의 귀중품을 수집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화병들에 대해 적은 기록을 보면, 어떤 귀중품 보관 상자에서 반암으로 만든 골동품 화병을 발견했고 그 위에 독수리 형상을 올려 성찬용 포도주병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본래는 독수리 장식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쉬제르는 독수리의 머리와 받침으로 쓰일 두 발톱 등 여러 장식품을 덧붙이기도 했는데, 도금한 은과 같은 고급 재료를 썼다. 쉬제르가 사용한 은은 붉은 색이 돌면서 따뜻한 질감을 주도록 제작한 한 겹짜리 도금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이런 기발한 발상을 후대에 보여주기 위해 독수리에 목 부분에 다음과 같은 글씨를 새겨 넣었다.

“이 돌은 보석과 금으로 둘러쌀 만큼 값어치가 있다. 그것은 대리석이지만 그것은 대리석보다 훨씬 귀중한 것이다.”

1층 리슐리외 관 Room 1 : 유럽 장식미술

황제의 개선 Feuillet de diptyque : L'Empereur triomphant, 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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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상아에 새긴 부조 작품으로 ‘바르베리니 상아(Barberini ivory)’라고도 한다. 비잔틴 제국 황제를 승리자로 선전하고자 새긴 것인데, 6세기 초반 콘스탄티노플의 왕실 작업장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인 황제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 483-565) 또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Anastasius I, 431-518)로 추정되며 유스티니아누스 쪽에 무게가 실린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민중의 대리인이기를 거부하고 신의 대리인이기를 선택한 첫 번째 황제였다. 그는 권력이 민중이나 군대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었다. 대관식 역시 예전처럼 히포드롬(hypodrome, 전차 경주장)에 모인 민중 앞에서 치르지 않고 대중이 없는 황궁에서 거행했으며, 오랜 전통의 원로원도 폐지했다. 새로운 황제는 신의 명령에만 복종하며, 지상의 제국을 신국(神國)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상아 패널은 이러한 황제관의 변화를 보여 준다. 완전 무장을 한 채 이민족을 복속시키고, 제국의 중앙 권력을 쟁취한 황제가 십자가를 든 그리스도와 그를 에워싼 두 천사 아래에 서 있다. 보통 의식용으로 제작하는 황제의 상아 조각 패널은 한쪽이 다섯 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개 중앙에는 황제의 초상, 그 양 옆에는 집정관, 아래에는 공물을 나르는 사람들, 위에는 그리스도의 흉상을 들고 있는 천사들이 있다. 이러한 배열은 그리스도가 위에 있고 그리스도의 부섭정관으로서의 황제가 지배하는 세상이 그 밑에 있다는 당시 비잔틴 세계의 계급 질서를 나타낸다.

2층 리슐리외 관 Room 19 : 북유럽 회화

샤를7세의 초상, 푸케 Charles VII,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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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인 장 푸케(Jean Fouquet, 1420-1480)는 성직자의 사생아로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 로마와 피렌체 등을 수년간 여행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미술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에 교황 에우게니우스 6세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귀국 후 프랑스 투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샤를 7세의 애호를 받아 왕과 귀족들 사이에서 활동했다. 1475년 루이 11세의 왕실화가로 임명되는 등 만년에도 왕성한 제작을 보였으며 명실 공히 당시 최고의 화가로 평가되었다.

그림의 주인공인 샤를 7세는 샤를 6세의 막내아들이다. 1422년 그가 왕으로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백년전쟁 중이었고 수도 파리를 비롯한 북부 프랑스는 모두 잉글랜드 왕 헨리 6세가 장악하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샤를 7세가 저항 의지를 상실해 갈 무렵인 1429년 갑자기 등장한 잔 다르크는 그와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여 전세를 뒤바꿔 놓았다. 이를 발판으로 샤를 7세는 칼레시를 제외한 전 프랑스 왕국의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샤를 7세는 전쟁 직후 발발한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상비군과 관료제에 기반을 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 나갔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남부 지방에 민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샤를 7세는 군대를 모으기 위한 돈이 필요했다. 왕은 부유한 상인이었던 자크 쾨르(Jacques Coeur, 1395-1456)의 재산을 몰수하면 된다는 귀족들의 말에 귀가 솔깃해서 죄가 없음에도 그를 체포하도록 했고, 쾨르는 자신의 정확한 죄명도 모른 채 2년 가까이 고문당하고 옥살이를 하다가 결국 재산을 몰수당하고 맨몸으로 귀양을 떠나게 된다. 푸케는 초상화를 그릴 때 사람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성품을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샤를 7세의 초상>에서도 자신의 권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간식들의 속임수에 흔들리는 왕의 나약함이 잘 드러나 있다.

롤랭 재상의 성모, 얀 반 에이크 Vierge au chancelier Rolin,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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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플랑드르 초상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의 작품. 롤랭이 성모와 예수님 앞에서 거만함을 드러내는 모습이 인상적. 목판에 그린 유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는 인물의 심리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기법을 사용한 플랑드르 초상의 창시자로 불린다.

제상 니콜라스 롤랭(Nicolas Rolin, 1376-1462)은 부르고뉴 공국의 엄청난 자산가이자 권력자였는데, 성당의 개인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이 그림을 주문했다. 원래 이 그림을 둘러쌌던 틀에는 제작 연대와 화가의 사인이 적혀 있었는데, 얀 반 에이크는 자신의 작품에 가장 먼저 사인을 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 만큼 자신감과 자존심을 내비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롤랭 재상의 성모>는 <성모 앞에서 기도하는 롤랭 재상>이라고도 부른다. 그림 오른편으로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리고 성모에게 면류관을 씌워주려는 천사가 보인다. 그리고 왼편으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롤랭 재상이 있다. 그림 속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리고 천사는 롤랭 재상의 환상이다. ‘성스러운 대화(Sacra Conversaxione)’라고 일컫는 이런 그림 양식은 중세 후기와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많이 나타났다.

‘성스러운 대화’를 표현하는 여느 그림들에 비해서 <롤랭 재상의 성모>가 특별한 것은 기독교의 성인이 있어야할 자리에 성인 대신 롤랭 재상이 있다는 점이다. 이 그림을 주문할 당시 롤랭은 60대였는데 그림 속 그의 모습에서 노쇠한 기운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권세를 가진 자의 염원이었다.

아기 예수는 왼손에 십자가로 장식된 지구의를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내리고 있다. 정원에는 성모의 덕을 상징하는 장미와 백합이 피어있고 공작새가 있다. 공작새 역시 영생을 의미한다. 롤랭 재상은 지금 ‘천국’에서 성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림 가운데로는 사람들을 태운 배 한 척이 현실 세상으로부터 이곳 천국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얀 반 에이크의 대표작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그림 가운데의 조그만 볼록거울에 화가 자신의 모습이 비쳐 많은 흥미로운 해석을 끌어낸다. <롤랭 재상의 성모>에서도 얀 반 에이크를 볼 수 있다. 그림 중앙에 현실 세상으로부터 배가 다가오는 것을 굽어보는 두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중 왼편의 남자가 얀 반 에이크일 것으로 추측된다. 얀 반 에이크가 스스로를 천국과 현실 세상의 중간 지점에 위치시킨 것은 재미있는 설정이다. 권세가는 자신의 염원을 그림으로 표현해내도록 주문했고 그림 제목도 차지했지만, 그림을 그려낸 화가는 이렇게 성스러운 세상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중개자가 바로 화가 자신임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위트있게 나타냈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엉겅퀴를 든 자화상, 뒤러 Portrait de l'artiste au chardon, 1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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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을 독립적인 분야로 만든 첫 번째 유화로 자화상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프레히트러 뒤러(Albrecht-Düre, 1471-1528)가 스물두 살 때 그린 작품이다.

이 자화상은 뒤러가 결혼 전, 얼굴도 보지 못한 약혼녀 아그네스 프레이(Agnes Frey)에게 보내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손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상징하는 엉겅퀴를 들고 있다. 잘 보이지 않지만 1493이라는 연대 위에 ‘나의 일은 위에서 정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신랑 신부가 서로 얼굴을 모르는 상태지만 부모가 정해 준 대로 결혼을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뒤러는 서양미술사에서 근대적 자화상을 그린 시조로도 꼽힌다. 뒤러 이전에는 뒤러만큼 반복해서 자화상을 그린 화가가 없었다.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곧 인간중심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한데, 특히 이 작품은 어디에 내놓아도 처질 것 없이 단호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자신을 그려냈다. 이런 뚜렷한 자의식은 르네상스와 더불어 근대적 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아내, 캥팅 마시 Le Preteur et Sa Femme,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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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팅 마시(Quentin Matsys, 1465-1530)는 초기 플랑드르 풍속화로 엔트워프의 환전상을 그린 작품이다. 지금은 벨기에의 영토인 엔트워프는 당시 네덜란드의 중심 항구이자 경제 중심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환전상이라는 직업은 인색하고 탐욕적인 고리대금업자라는 인식을 끊임없이 받았다.

무표정한 환전상은 평소 늘 하던 대로 동전 무게를 저울에 달며 돈을 세고 있고, 그 옆에서 성경을 읽던 부인은 잠시 독서를 멈추고 남편의 돈 세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세파의 찌든 남편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아내는 해맑은 소녀와 같아 딸 같이 보일 정도다. 두 사람의 앞에는 고급 유리병, 귀금속, 보석 등 부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놓여 있다. 뒤쪽 선반에는 책과 각종 서류, 과일이 보이는데 이는 마치 선악과를 뿌리치지 못한 인간의 탐욕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구성 속에서 마시는 아내가 만지작거리는 성경과 그 앞에 놓인 볼록거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낸다. 아내는 펼쳐진 책 속의 성 모자 상 속 성모와 비슷한 색을 입고 있고, 볼록거울에는 십자가와 교회 종탑이 비치고 있다. 이는 인간이 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고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정직하게 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부분이다. 동시에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눈앞에 있는 당장의 현실인 돈보다 아직 가 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 즉 창밖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볼록거울의 모습

이 작품은 캥팅 마시가 성경의 <레위기> 구절 “너희는 재판할 때나 물건을 재고 달고 되고 할 때에 부정하게 하지 마라. 바른 저울과 바른 추와 바른 에바와 바른 힌을 써야 한다. 너희는 내가 정해 주는 모든 규정과 내가 세워주는 모든 법을 지켜 그대로 살아야 한다.”를 토대로 그린 것이며, 원래 작품이 담겼던 액자에는 “저울은 진실해야 하며 중량은 같아야 하리라”라는 라틴 어가 씌어 있었다고 한다.

글쓰는 에라스무스, 홀바인 Desiderius Erasmus,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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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홀바인(Hans Holbein der Jungere, 1497-1543)은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자로 독일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죽었다. 이름이 같은 아버지 한스 홀바인 역시 화가여서 아버지의 회화 공방에서 미술을 배웠다. 1515년경부터 네덜란드의 인문주의 학자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를 알게 되어 그의 초상화들을 그리고 저 유명한 <우신예찬>의 삽화를 그렸다. 이후 에라스무스가 영웅 궁정의 귀족들에게 홀바인을 소개했고 홀바인은 영국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독특한 자신만의 방식을 개발하기 시작해 초상화의 대가가 되었고, 나중에는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된다.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Düre, 1471-1528), 캥팅 마시(Quentin Matsys, 1465-1530) 등 여럿 있다. 이런 작품 속에서 에라스무스는 청명하며, 편안함과 강인함의 매력을 모두 갖고 있다.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 중 하나인 이 작품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보인다. 에라스무스의 옆모습 얼굴과 손이 하이라이트로 강조되고 있는데, 홀바인은 마치 에라스무스의 지식과 생각이 그의 저술로 나타난다는 듯 얼굴에서 발산되는 빛이 그의 손과 펜, 종이를 빛나게 하도록 표현하고 있다. 또한 에라스무스의 내적 정식을 드러내기 위해 <마가복음>의 주석서를 집필하고 있는 손의 표현에 신경썼다. 집필 중인 종이 밑에 책을 놓아두어 학자로서의 면모 역시 잊지 않고 드러냈다. 이러한 모습은 홀바인이 학자들을 후원하는 성인인 성 히에로니무스(St. Hieronymus / Gérôme)의 초상 도상을 변형시켜 새로운 ‘학자 초상화’의 유형을 확립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전 시기에 성 히에로니무스를 그린, 학자의 전형적 도상들. 왼쪽은 안토니오 다 파브리아노의 1451년작, 오른쪽은 얀 반 에이크의 15세기 초반 작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녀의 여동생, 퐁텐블로 화파 Gabrielle d'Estrées et une de ses sœurs, 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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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 두 여인은 나체로 욕조 속에 앉아 있다. 왼쪽 여인은 오른쪽 여인의 젖꼭지를 살며시 잡고 있고, 오른쪽 여인의 손엔 반지가 들려 있다. 붉은 벨벳 커튼이 욕조 양쪽에 전시되어 있는데, 마치 무대의 커튼처럼 느껴져 두 여인을 그림 밖으로 끌어내는 듯 보인다. 뒤로는 하녀로 보이는 듯한 여인이 바느질에 몰두해 있다. 불이 피워져 있는 벽난로 위에는 벌거벗은 남자의 하반신이 그려져 있는 그림의 일부분이 보인다. 참으로 이상한 그림이다.

16세기 프랑스는 신·구교 사이의 종교전쟁으로 온 나라가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왕위에 오른 앙리 4세(Henry IV, 1533-1610)는 다섯 번이나 종교를 바꾸면서까지 신·구 양 교도의 화해를 위해 애쓰고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해 30년 간의 종교내란을 끝내고 프랑스에 평화를 가져온다. 이외에도 앙리 4세는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겨 재위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앙리 대왕’으로 불리며 프랑스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앙리 4세는 호색한이어서 ‘팔팔한 오입쟁이(le Vert galant)’라고까지 불렸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 중 하나가 가브리엘 데스트레(Gabrielle d'Estrees, 1571-1599)이다. 가브리엘은 앙리 4세가 가장 사랑하는 정부였고 이미 그의 아이를 셋이나 낳은 상태였다. 앙리 4세는 왕비와 이혼하고 가브리엘과 결혼하려고 했는데, 이를 로마 교황이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앙리는 혼인 무효 소송을 내기에 이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전 유럽이 들썩였다. 프랑스 왕비의 자리는 곧 전 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요직이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가브리엘은 세 번째로 사내아이를 낳았고 앙리 4세는 드디어 그녀와의 결혼을 발표한다. 곧 가브리엘은 앙리 4세의 네번째 아이를 임신하지만, 1599년 가브리엘은 그렇게 고대하던 앙리 4세와의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돌연 사망하고 만다.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 임신 6개월 상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사산아를 낳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림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녀의 여동생> 속에서 왼손의 두 손가락에 사파이어 반지를 들고 있는 여인이 가브리엘이다. 이 반지는 가브리엘이 곧 프랑스의 왕비가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즉위식 반지로 추측된다. 자극적이고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다른 여인은 가브리엘의 동생 빌라르 공작부인으로, 왼쪽 두 손가락으로 언니의 젖꼭지를 살짝 쥐고 있다.당시에는 젖꼭지의 상태로 임신을 판단했고, 때문에 이 행위는 가브리엘이 임신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 또는 임신을 확인하는 행위로 해석된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배가 욕조 아래에 가려진 탓에 임신여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어 때로는 16-17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은근히 성행한 동성애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가브리엘 데스트레를 그린 다른 그림

이 그림의 미스터리는 아직 진행 중이다. 모든 것이 추측일뿐 확실히 증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일어난 가브리엘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같은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청되는 비슷한 그림들은 이 그림을 더욱 수수께끼처럼 느끼게 만든다. 뒤에서 조용히 바느질하는 여인은 하녀가 아니라 실은 가브리엘의 운명의 실을 짜고 있었던 운명의 여신이 아니었을까.

2층 리슐리외 관 Room 38 : 북유럽 회화

천문학자, 베르메르 L'Astronome ou plutôt L'Astrologue, 1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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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한 신생국가로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고유 예술 양식이 탄생하는 시기였다. 신흥 부르주아 등장은 예술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은 어려운 신화나 종교를 주제로 한 작품보다 아름답고 이해하기 쉬운 그림을 선호했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는 바로 이 시기에 활동한 화가로 중산층 가정의 일상생활, 특히 실내를 배경으로 한 여인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천문학자>는 당시 과학에 대한 관심과 성과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당시는 천문학은 갈릴레이와 뉴턴 망원경의 업적으로 큰 변혁을 맞은 상태였다. 베르메르의 인물화는 대부분 여인을 모델로 하지만, <천문학자>와 <지리학자>

남성이 모델이다. 천체본과 그 옆에 높은 천문 관측의에서 알 수 있듯 긴 머리의 이 남자의 직업은 천문학자이다. 벽에는 아기 모세를 발견하는 장면의 그림이 걸려 있는데, 이는 과학의 발명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옷장에는 이 작품이 완성된 날짜가 로마 숫자로 적혀 있다. 책상 모퉁이에 있는 파란색의 고급스럽고 화려한 책상덮개는 <지리학자>에도 등장하는데, 두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 역시 동일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연구하는 그림 속 학자의 모습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통해 더욱 진지하게 드러난다. 차가운 톤을 바탕으로 한 섬세하게 쓴 색조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이른 베르메르의 전형적인 기법을 보여 준다.

레이스 짜는 여인, 베르메르 La Dentellière, 1669-1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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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뽑았을 정도의 걸작으로, 남아 있는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회화 중 가장 작은 작품이다. 오른쪽 구석 벽면에 베르메르의 서명이 있다.

빛이 들어오는 실내에서 바느질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 여인을 그린 이 작품은 작은 크기가 만들어내는 내밀함으로 베르메르식 구조가 지닌 섬세함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베르메르의 작품 속 여인들은 부엌에서 우유를 따르거나, 물주전자를 들고 있거나, 창가에서 편지를 읽고 있다. 무언가 의미심장하고 극적인 사건을 그의 그림에서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평범한 주제를 가치 있게 만드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이 작품 속의 여인은 지금 레이스를 짜고 있다. 여인의 주위에는 레이스 받침대와 융단이 깔린 테이블, 쿠션, 책 등이 놓여 있고, 여인은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인 채 자신의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한 손에는 실패를, 다른 한 손에는 핀을 든 손끝에 그녀의 시선과 관람자의 시선이 맞부딪친다. 순간 부드러운 빛과 은은한 색채, 만져질 듯 정확하고 생생한 질감의 표현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숨을 멎게 한다.

아주 작은 크기의,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을 다룬 그림 한 점이 이처럼 경건하고 존엄한 분위기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빛과 그 빛이 사물의 형태와 질감 그리고 색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치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베르메르의 표현 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여인이 앉아 있는 공간과 그 공간에 흐르는 무수한 빛과 대기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간과 사물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숨을 내쉰다. 단순하고 소박한 정경의 아름다움에 새삼 감흥에 젖는 것은 그가 빛을 통해 비밀스런 생명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2층 리슐리외 관 Room 30 : 북유럽 회화

루트를 연주하는 어릿광대, 할스 Le Bouffon au luth, 1581-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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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0-1666)의 작품 중 흔히 볼 수 없는 상상 속의 인물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루트를 연주하는 광대의 의상은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로 불리는 당시의 의복 양식과는 맞지 않는데, 이러한 광대의 의상이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작가 자신의 향수를 드러내는 표현인지, 아니면 화가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산물인지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할스는 배우들을 작품의 모델로 자주 등장시켰다. 이 작품 역시 실제 배우인 궁정 악사를 모델로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의 궁정 악사는 예술가로서 화가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고, 궁정의 후원으로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를 수는 없었으며, 대신 간간히 상류층 주변의 인물로 그림 속 모델이 되곤 했다.

이 작품은 인물 초상화의 측면에서 다양한 상징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배경을 최소화한 채 인물을 화면의 중앙에 가득 채워 배치함으로써 인물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거기에서 느낄 수 있는 빛의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모델의 모습은 화면의 측면에서 인물 쪽으로 비춰지는 강한 빛을 통해 한층 더 돋보이는데, 이러한 표현은 카라바조 풍의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할스가 위트레흐트에서 유행했던 카라바조의 화풍과 주제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에 그치지 않고, 할스는 자신만의 강렬하고 열정적인 붓 터치를 통해 인물의 개성을 더욱 훌륭하게 드러내고 있다. 생동감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 표현된 인물의 모습은 할스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는 특징으로 그의 자유로운 표현력을 대변해 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즐거운 사람들, 레이스테르 La joyeuse Compagnie, 1629-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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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작가인 주디스 얀스 레이스테르(Judith Jans Leyster, 1609-1660)는 렘브란트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지만 오랫동안 잊혀져 온 여류 화가로, 남매 중 여덟째인 데다 딸인 탓에 성장 과정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레이스테르가 당대의 다른 여성 화가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림의 주제 때문이다. 다른 여류 화가들은 주로 꽃이 있는 정물이나 곤충을 거의 실제처럼 그렸지만, 레이스테르는 시골이 무대가 되는 풍속화와 초상화를 그렸다. 이런 주제는 1650년 무렵 네덜란드에 발생한 중산층의 입맛에 맞추고자 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레이스테르는 사후 잊혀졌는데, 1893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프란스 할스의 것인 줄 알고 구입한 작품이 레이스테르의 것으로 밝혀지면서 재조명되어 왔다.

<즐거운 사람들>은 제목만큼 그림의 내용도 즐겁다. 우선 그림 속 등장 인물들의 입 모양이 모두 같은데, 웃고 있다기보다는 같은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이다. 악기 반주에 따라 부르는 흥겨운 노래에 몸도 들썩이고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한 발은 들려 있고, 가운데에서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의 한 발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술잔을 들고 관객을 보는 붉은 옷의 청년은 살짝 취기가 오른 모습이다. 얼굴도 모두 닮아 마치 형제 자매처럼 보인다. 옷차림으로 보아 축제를 표현한 장면으로 보인다.

2층 리슐리외 관 Room 18 : 북유럽 회화

마리 드 메디치의 일생, 루벤스 Galerie Médicis, 1622-1625

앙리 4세의 왕비인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édicis)가 뤽상부르 궁전의 갤러리를 장식하기 위해 벨기에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에게 자신의 일생을 그리도록 의뢰해서 탄생한 24점의 그림들이다. 이중 21점이 마리 드 메디치의 일생과 영광에 대한 그림이고 3점은 그녀와 부모님의 초상화이다. 이 연작들은 나폴레옹 집권 이후 뤽상부르 궁이 상원 건물로 사용되면서부터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1900년부터 전용 전시실레 전시되어 왔다.

연작의 주인공인 마리 드 메디치는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딸이었는데, 정략 결혼으로 앙리 4세의 두 번째 왕비가 된 인물이다. 그녀는 한 번 결혼한 데다 나이도 많은 앙리 4세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으며, 결혼 후에도 왕이 정부와 놀아나는 것을 인내해야 했다. 그러나 10년 후인 1610년에 앙리 4세가 암살됐고, 마리 드 메디치는 아직 8세에 불과한 아들 루이 13세의 섭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루이 13세는 성인이 되자 어머니를 중부 지방으로 추방하고, 4년 후 마리는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 갤러리의 그림들은 이 돌아온 시기에 의뢰한 것이다. 그러나 1631년, 마리는 다시 한 번 아들에게 추방되었다가 브뤼셀로 망명해 1641년 사망했다. 루벤스의 그림들은 마리 드 메디치의 탄생부터 결혼, 그 당시의 최근 활동까지를 다루고 있다.

<마리 드 메디치의 운명(Les Parques filant le destin de Marie de Médi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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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의 일생을 예고한 그림으로, 주피테르와 그의 아내 주노 여신이 구름 속에서 튀들린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제목인 ‘운명’은 운명의 실을 돌리고 있는 벌거벗은 여신의 아름다움으로 묘사돼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운명의 세 여신이 각각 운명의 실을 물레로 회전시켜 자아내고, 그 길이를 재고, 그 실을 끊는다고 한다. 루벤스는 이중 실을 가르는 가위를 생략해 마리의 삶에 특권과 불멸의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주피테르는 난잡한 생활을 했던 마리의 남편 앙리 4세를 상징한 것이다.

<공주의 탄생(La Naissance de la re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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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3년 4월 26일 마리 드 메디치의 출생을 그린 작품으로 그림 전체에 상징과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왼쪽에 있는 두 명의 아기 천사(Putti)가 갖고 오는 방패는 메디치 가를 상징하며, 천상에서 메디치 가의 탄생을 축복한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화면 아래쪽에 있는 강의 신은 피렌체를 지나는 아르노 강을 암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기를 안은 여인이 쓴 풍요의 뿔(뿔 모양에 과일과 꽃을 가득 얹은 장식)은 마리가 미래에 얻게 될 영광을 상징하며, 사자는 권력과 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공주의 교육( L'Instruction de la Re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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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드 메디치의 교육적 성숙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

그림에서 마리는 아폴로에게서 예술을, 아테나에게서 지혜를, 헤르메스에게서 유창한 언어와 웅변을 배운다. 특히 헤르메스가 위쪽에서 천을 휘날리며 장면에 극적으로 들어와 구성을 다채롭게 하고 있다.

<앙리 4세에게 선보인 마리 드 메디치의 초상화(Henri IV recevant le portrait de la re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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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와 앙리가 정략결혼을 하기 전 앙리 4세에게 마리의 초상화가 전달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결혼의 신 히메나이오스(Hymenaios)가 호위병인 큐피트(Cupid)와 함께 왕에게 공주의 초상화를 보여 주고 있고, 주피테르와 주노는 왕이 내려다보이는 구름 꼭대기에 앉아 있다. 이것은 두 사람의 결혼을 신들이 허락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두 사람이 결혼 협상을 하기 전에 여러 점의 초상화가 오갔다고 하는데, 왕은 그녀의 외모에 만족했고 실제로 만났을 때 더욱 좋아했다고 한다.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의 결혼을 위한 대리 결혼식(Le Mariage par procuration de Marie de Médicis et d'Henri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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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의 결혼식을 그린 장면으로, 마리의 삼촌이 신랑 자리에 서 반지를 건내고 있는 모습이다. 루벤스는 실제로 이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하는데, 부의 뒤에서 십자가를 들고 있는 사람이 루벤스다.

결혼식이 열리는 뒷편으로 배치된 조각은 바치오 반디넬라(Baccio Bandinelli)의 피에타를 암시하고 있다. 루벤스 21점의 연작에서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장면을 신화 속 인물들과 함께 나타냈는데, 이 그림에서도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혼인의 신 히멘(Hymen)이 신부의 드레스 끝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마르세유에 도착하는 마리 드 메디치(Le Débarquement de Marie de Médicis au port de Marse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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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프랑스 왕비가 되기 위해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하는 모습으로,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전체적인 화면 구성은 위·아래로 분할되어 있는데, 윗부분에는 마리 드 메디치와 그녀의 일행의 모습이, 아랫부분에는 프랑스의 도착을 환영하는 다양한 신화적 모티프들이 나타난다.

우선 화면의 상단을 살펴보면 화려한 금빛 드레스를 차려 입은 마리 드 메디치가 수행원이자 숙모였던 공작부인 크리스티나(Grand Duchess Cristina, 1565-1637), 그리고 언니인 공작부인 예리아노르(Duchess of Mantua Eleonora, 1567-1611)와 함께 호화로운 선박에서 내려오고 있다. 배에는 메디치 가문의 문장인 공이 여섯 개 달린 방패가 붙어 있다. 마리 드 메디치는 푸른 망토와 깃털 달린 철모를 쓴 인물로 상징되는 프랑스로부터 환대를 받고 있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도도한 자세를 취한 그녀의 자세는 주변 인물들의 역동적인 몸짓와 대비되면서 더욱 기품 있어 보인다. 이들의 머리 위로는 명예를 상징하는 인물이 나팔을 불고 있다. 하단부에 생동감 넘치게 그려진 바다의 요정들은 마치 기둥처럼 선착장의 다리를 떠받치며 새로운 왕국에 입성하는 여왕을 환영하고 있다. 이 신화적 인물들의 표현은 루벤스의 화풍을 가장 잘 드러내는 소재이다. 갑판 위에는 가슴에 몰타 기사단의 커다란 흰색 십자가가 그려진 갑옷을 입은 기사가 서있는데, 그는 화면의 왼쪽에서 상황을 주시하며 전반적인 분위기를 통제하고 있다.

<리옹에서 만난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La Rencontre du roi et de la reine à Ly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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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후 마리와 앙리 4세가 첫 번째 회합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상부에서 마리는 공작새와 전차를 ㄷ갖고 있고 앙리 4세는 독수리를 타고 손에 벼락을 쥐고 있는데, 이것은 두 주인공을 주피테르와 주노 여신처럼 묘사한 것이다. 두 사람이 오른쪽 손을 잡은 것은 전통적인 결혼의 상징이다. 두 사람을 하나로 회합해 주는 인물은 결혼의 신인 히메나이오스이다. 그림의 아래쪽 배경은 리옹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퐁텐블로에서의 황태자의 탄생(La Naissance du dauphin à Fontainebl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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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드 메디치의 첫 아들인 황태자, 훗날 루이 13세의 탄생을 묘사한 것이다. 루벤스는 이 현장을 평화롭게 구성하고 있다. 왕위 계승자의 탄생은 왕가에 그들의 통치를 안정화하는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앙리 4세는 동성애자였던 발루아 왕조의 앙리 3세가 자식 없이 죽자 부르봉 가문의 적장자로서 프랑스 왕위에 오른 인물이고, 사람들은 선대처럼 앙리 4세도 후사를 보지 못할까 봐 불안해 했다. 그런 와중에 황태자의 탄생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그림에서 아기는 율법의 여신 테미스(Themis)의 보호를 받고 있고 있다.

<섭정권의 위탁(La Remise de la régence à la re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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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가 전쟁에 나가자 잠시 마리가 섭정권을 받던 장면을 담고 있다. 섭정으로서의 어머니와 루이 13세는 잦은 마찰이 있었다. 그래서 루벤스는 연작을 그리는 동안, 특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을 묘사할 때면 왕이었던 루이 13세를 언짢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는데, 이 장면도 그러하다. 그래서 웅장한 이탈리아 양식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주제는 다소 냉담해 보인다. 다른 작품들처럼 운명을 드러내는 신화적 인물도 등장하지 않고 대신 세 명의 군인들이 있을 뿐이다. 한편 이 그림은 구형의 보주(orb)를 국가 권력의 상징으로 처음 등장시켜 더욱 의미 있다. 보주의 이미지는 24점의 연장 중 무려 6점에 나타난다.

<생드니의 대관식(Le Couronnement de la reine à l'abbaye de Saint-De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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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벽 끝에 있는 장면으로, 시각적으로 관람객의 눈길을 확 끈다. 마리 드 메치디가 섭정으로서 즉위하던 대관식 장면을 담고 있는데, 이 작품 역시 보주를 국가권력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리는 제단으로 나아가 왕관을 받고 있다. 구경하러 온 군중들의 모습도 보이며, 풍요의 여신 아분단티아(Abundantia)와 날개를 난 여신 빅토리아는 마리에게 주피테르의 금화를 뿌려 주며 마리에게 평화와 번영의 축복을 선사한다. 앞에 있는 두 마리의 개는 마리 드 메디치의 애완견이다.

<앙리 4세의 사망과 섭정 선언(L'Apothéose d'Henri IV et la proclamation de la ré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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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의 사망 후 마리가 정식으로 섭정이 된 것을 나타낸다. 전체적으로 두 개의 장면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쪽에는 1610년 사망해 하늘로 올라가는 앙리 4세의 승천하는 모습이, 한쪽에는 권력의 상징인 보주를 건네받으며 섭정에 오른 마리 드 메디치가 표현되어 있다. 앙리 4세는 주피테르 신의 모습과 같이 그려져 있고, 마리는 과부인 만큼 엄숙한 옷차림이다.

<신들의 회의(Le Conseil des Die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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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섭정이 된 마리, 그리고 그로 인한 유럽의 평화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연작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기도 하다. 그림에 등장하는 큐피트와 주노 여신은 사랑과 평화의 상징이고, 마리의 가장 큰 목표 역시 유럽의 평화였다. 그래서 아들와 딸의 정략결혼을 통해 주변 국가들과 동맹을 유지하곤 했다.

<율리히의 점령(La Prise de Juli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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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드 메디치의 섭정 기간 중 유일했던 전쟁이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율리히 쟁탈전에서의 승리를 강조한 그림이다. 마리가 하얀 종마 위에 앉아 있고 승리의 여신이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수관을 들고 있다. 마리 옆에는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인이 함께 하고 있는데 손에 여왕을 상징하는 진주목걸이를 쥐고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공주들의 교류(L'Échange des deux princesses de France et d'Espag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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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3세에게 시집오는 아나(Anna) 공주, 그리고 훗날 펠리페 4세가 될 스페인의 왕자에게 시집가는 루이 13세의 동생 엘리자베스 공주를 주제로 하고 있다. 결혼식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인 비다소아(Bidassoa) 강에서 진행됐다. 스페인을 상징하는 사자가 그려진 헬멧을 쓰고있는 사람은 왼편에서 엘리자베스를 인도하고, 프랑스 백합 문장이 그려진 망토를 걸친 사람은 오른편에서 아나 공주를프랑스로 인도하고 있다.

<섭정 시대의 지복(La Félicité de la ré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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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중 가장 마지막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마리는 정의 자체를 인격화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정의를 상징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큐피트, 미네르바, 프루덴스, 아분탄티아, 사투르누스 등 다양한 신들이 식별 가능한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연작 중 가장 직설적인 작품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그림의 진정한 주제는 ‘황금 시대, 정의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우의적 내용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루벤스가 남긴 편지들을 보면 이 작품이 단순히 표면적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루이 13세의 시대(La Majorité de Louis X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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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드 메디치의 권력이 아들인 루이 13세에게 옮겨 가는 역사적 장면을 담고 있다. 아들이 미성년인 동안 마리는 섭정으로 군림했지만, 이제 그녀는 배의 조타는 프랑스의 새로운 왕인 루이 13세에게 넘기고 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배의 측면에 달려 있는 방패들을 통해 각각의 상징을 유추할 수 있다. 두 번째 사람의 방패에는 네 스핑크스들과 함께 불타는 제단이 있고 또라이를 튼 뱀과 뜬 눈이 묘사돼 있는데, 이는 신앙이나 종교적 특성이며 마리가 아들이 신앙을 갖기를 바랐음을 상징한다.

<블루아의 탈출(La Fuite de Bl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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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권력을 잃고 루이 13세의 명으로 블루아(Blois) 성에 유폐됐다가 그곳을 빠져나와 도주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마리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위엄있는 태도로 서서 군중들과 호위 무사들 사이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이렇듯 루벤스는 이 연작에서 사실적인 요소를 정확하게 그려낸 것이 아니라, 인물을 영웅적으로 보여주는 데 중심을 두고 있다. 특히 사건의 부정적인 면을 포함시켜 마리를 불쾌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앙굴렘 협정(Le Traité d'Angoulê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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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와 아들 루이 13세의 화해를 상징한다. 그림 속 마리는 루이 13세의 사자인 머큐리(Mercury)로부터 올리브 가지를 건네받고 있다. 루벤스는 마리를 아주 겸손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표현하고 그녀 쪽의 인물들 역시 고상하며 우아하고 정적인 모습으로 담아 냈다. 반면 머큐리는 성스러운 막대기인 카두케우스(caduceus)를 허벅지 뒤쪽으로 감추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좌우 양쪽 그룹의 인물 간 묘사는 양측의 사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짖는 개는 사악한 의도를 가진 이방인을 경고하는 데 쓰이는 전형인데, 이를 통해 루벤스가 지금의 화해가 완전한 화해는 아님을 은연 중에 드러내려 할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앙제에서의 평화 협정 체결(La Conclusion de la paix à An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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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드 메디치의 군대가 패한 후 앙제(Angers)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할 때 안전을 요구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휴전 협상에 대한 불안감과 안전에 대한 마리의 욕망이 잘 나타나 있다. 마리는 뱀이 감겨 있는 카두케우스를 보며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머큐리는 여왕에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들어 보이는 듯하다.

아들이 성인이 되어 권력을 빼앗기자 아들을 상대로 쿠데타를 시도할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루벤스의 그림들에는 신화적인 묘사만 있다.

<여왕과 아들의 화해(La Parfaite Réconciliation de la reine et de son f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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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돌아와 아들인 루이 13세와 완전히 화해했음을 표현한 그림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히드라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뱀으로 헤라클레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이 작품에서 히드라는 륀(Lyune)의 공작이자 왕실 매 사냥 관리관이었던 샤를 달베르(Charles d'Albert, 1578-1621)의 죽음 상징한다. 샤를 달베르는 1617년 루이 13세를 도와 마리 드 메디시스로부터 권력을 뺏도록 하는데, 이후 륀 공작은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장악한 인물로, 이후 마리와 루이 13세의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앙굴렘 협정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1621년 열병으로 사망했다. 항간에는 그가 동성애자였던 루이 13세의 연인이었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루벤스는 고의적으로 그림에 이러한 애매모호함을 담아 역사적 사실을 일반화하고 있다.

<진실의 승리(Le Triomphe de la Véri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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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3세와 마리 드 메디치가 천상에서 화해하는 모습을 완전히 우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두 모자는 천국에 떠서 평화에 도달하고 있고, 그 아래에 있는 시간의 상징인 남성은 진실(Veritas)을 상징하는 나체의 여인을 천국에 있는 마리에게로 올려보내려 하고 있어 아들보다 마리의 영역이 차지하는 공간이 훨씬 더 크다.

루이 13세는 심지어 시간의 날개에 몸의 일부가 가려져 있기까지 하며, 마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월계관으로 둘러싼 불타는 심장을 선물하고 있다. 모자 간 관계의 진실이 시간에 의해 드러났음을 상징하고자 한 우화적 작품이다.

2층 리슐리외 관 Room 14 : 프랑스 회화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푸생 L'Enlèvement des Sabines, 1637-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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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세운 로물루스 형제가 여인이 부족하자 대전차 경기장 인근의 사비니 부족 여자들을 겁탈해 아내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후 사비니 부족이 자신들의 딸과 아내를 찾기 위해 로마와 전쟁을 벌이지만, 이미 로마에서 정착한 여자들이 둘 사이에서 중재자로 나서서 양측이 동맹을 맺었다고 한다.

프랑스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출신은 비천했지만 서양 미술의 이론적·지적 전통을 대변한 철학가 화가였다. 또 미술 인력 양성에도 힘써 안정된 교육 체계를 마련하는 데도 지대한 공을 세웠다.

푸생이 그린 이 작품의 맨 앞쪽 부분부터 묘사된 극도로 혼란스럽고 격렬하게 움직이는 군중들의 상황은, 뒤편에 정돈되고 단단한 인상으로 엄격한 원근법에 의해 표현된 건물들과 극단적인 대비를 이룬다. 푸생은 이런 표현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뒤편에 견고하게 짜인 틀이 앞 부분에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장면을 돋보이게 하며 그와 동시에 잘 마무리하듯 완성되게 만든다는 점에서 푸생의 그림 철학에 부합한다.

니콜라 푸생은 이탈리아에 유학을 가서 공부하며 완성된 작가가 된 이후 이탈리아에 비해 아직까지 뒤떨어지던 프랑스 미술 부분의 격차를 메운 공로를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의 방법은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확립하면서 미술을 전공하는 인력들의 양성이나 이후 직업까지 안정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 속에는 조화와 균형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한 그의 미학이 기반돼 있었다.

인물들이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각 인물들의 자세는 고정된 듯 보이기도 한다. 모두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에서 수없이 등장하던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헬레니즘 시대의 고대 조각에서 모범으로 생각하던 자세들이 모여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표현 역시 푸생의 특징인데, 그래서 푸생의 그림은 장면이 폭발적이지 않고 활기 있어야 하는 장면에서도 마치 ‘조용한 아우성’이라고 할 만큼 뭔가 침착해 보인다.

2층 쉴리 관 Room 24 : 프랑스 회화

에이스를 든 사기꾼, 라 투르 Le Tricheur à l'as de carreau,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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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인 조르주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는 기록이 뚜렷하지 않은 화가이다. 어느 기록에 따르면 빵집 아들로 태어나 광활한 영지를 소유했지만 농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남을 등한시하다가 일가족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런 그가 성서의 이야기를 담은 종교화와 민중의 삶을 주제로 풍속화를 그렸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70여 점의 작품을 남겼음에도 40점 정도만이 정확히 그의 그림이라고 평가되며 그 중 15점에만 서명이 들어가 있다.

당시 사회상와 섬세한 옷차림을 세련되게 표현한 <에이스를 든 사기꾼>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돈과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면 누가 가해자이며 또 누가 피해자인지 명확하게 설명이 된다. 가운데 있는 공작부인과 하녀, 그리고 왼쪽의 공작처럼 보이는 이는 쉽게 말해서 한 패다. 세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어떤 카드를 낼지 상의하고 있다. 심지어 하녀는 포도주를 채워주러 온 척하고 있다. 왼쪽의 남성이 등에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숨기고 있고 그것을 이번에 내려고 하고 있어서 그림이 <에이스를 든 사기꾼>으로 명명됐다.

오른쪽에 젊은 남자는 깃털 장식으로 한껏 멋을 냈는데, 어려 보이는 얼굴만큼이나 행동이 어리숙하다. 다른 세 사람의 어른이 교묘하게 정해져 있는 눈빛을 주고받고 있지만 어린 남자는 그 상황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둔하다. 오직 자신의 카드에만 눈이 향하는 것은 그에게 이런 상황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짐작케 한다. 그의 앞에 돈이 가장 많은 것은 이제 막 사기를 펼칠 상황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 돈이 모두 사라지면 이 상황이 끝날 것이고, 그는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돈을 마련해서 다시 도박장을 찾을 것이다. 관객들이 이 그림을 보면서도 피해자인 남성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것은 저런 도박장의 위험성을 알기 때문이요, 쉽게 돈을 벌기 위해 도박장을 찾는 행동이 어리석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도박장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피해자는 없다. 모두가 운을 좇아 돈을 벌 목적으로 왔기 때문이다.

오른쪽의 남자의 얼굴

2층 쉴리 관 Room 31 : 프랑스 회화

최후의 만찬, 상페뉴 La sainte Cène,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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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림으로 초상화의 대가인 벨기에 출신 상페뉴(Philippe de Champaigne, 1602-1674) 작품이다. 파리 근처 슈브르즈(Chevreuse) 계곡에 있는 포르 루아얄 데 샹(Port-Royal-des-Champs) 수도원 제단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됐다. 사실주의에 입각해 인물들의 얼굴을 표현하고 사물의 입체감을 정확하게 표현한 점은 프랑스 북부 표현 양식을 보여 주는데, 한편 전체적으로 수평적인 형태를 기반으로 하고 몸짓과 식탁보의 직물을 표현한 부분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이 엿보인다.

2층 쉴리 관 Room 34 : 프랑스 회화

루이14세의 초상, 이아생트 리고 Louis XIV,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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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을 확립하고 “짐이 곧 국가”라고 했던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정치 선전을 위해 초상화를 700점 이상 그리게 했다. 왕의 초상화는 실물보다 크고 화려하게 그려졌고, 초상화가 걸리는 위치도 정교하게 계산됐다. 감상자가 언제나 왕을 우러러 볼 수 있도록 왕의 눈높이는 언제나 감상자의 시선보다 높게 맞춰졌다. 오늘날 남아 있는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300점이 넘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1659-1743)가 그린 이 작품이다.

루이14세의 공식 초상화였던 이 초상화 속에서 왕은 흰 담비 털로 안을 댄 황금빛 백합꽃 무늬가 가득한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다.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칼과 황금 왕관 등도 태양왕의 절대권위에 어울리게 화려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그림은 아주 특이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림에 묘사된 왕의 모습이 생물학적인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림의 상체는 60대 ‘할아버지’의 신체 특징을 지니고 있는 반면, 하체는 20대의 건장한 청년의 다리가 그려진 것이다. 한마디로 상체는 가발을 썼다고는 하나 가볍게 늘어진 볼을 통해 영락없는 63세 할아버지의 모습을 전하는 반면, 다리는 몸에 꼭 맞는 비단 바지를 입고 이제 막 춤을 추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 모습이 20대의 탱탱하고 건장한 다리가 분명하다. 젊은 몸과 늙은 몸이 합체된 이 괴물과도 같은 왕의 형상은, 살아있는 왕은 언젠가 소멸할 육체를 지닌 인간적인 존재지만 왕국을 지배하는 최고 주권자로서 왕은 초시간적인 영원불멸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국가적인 선전사업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으로 루이 14세는 한사람의 병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루이 14세는 엄청난 대식가에 기골이 장대한 데다, 평균수명이 20대이던 당시에는 드물게 77세까지 장수한 인물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온갖 병을 달고 살아간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명의 의사들이 작성한 <건강일지>를 통해 의학사의 귀중한 샘플로도 남은 일종의 ‘마루타’이기도 했다. 14세에 앓은 천연두를 시작으로 성홍열, 홍역을 줄줄이 앓았고,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얼굴에 곰보가 있었으며 성홍열을 앓고 난 다음에는 머리가 빠져 거의 대머리가 됐다. 평생 가발에 집착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또 피부병과 위염, 설사 등 가벼운 질병을 달고 살았고 평생 편두통과 치통, 통풍, 신장결석, 당뇨 등 만성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끼니 때마다 코스별로 10종류의 요리가 나오는 식사를 아침 3코스, 저녁 5코스를 매일 소화해 위염와 설사, 두통과 현기증을 앓았다. 치아 역시 썩어버려 나중에는 하나의 이만 남기고 모조리 뽑아버려 유동식만 먹었다고 한다.

그렇다 한들, 리고의 초상화 속에서 왕은 그저 위엄 있고 기품 넘치는 태양왕이다. 그림에서 보는 화려한 의상과 도구들은 즉위식 때 사용했던 것들이다. 리고는 플랑드르의 화려한 바로크적 초상화의 전통을 답습해 왕을 신격화했으며,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어 동적인 자세에 취하며 지팡이를 잡고 있는 모습은 정통적인 요소와 결합된 바로크적 초상의 세련되고 우아한 멋을 풍긴다. 그러나 이 포즈는 사실은 루이 14세가 엄지발가락에서 시작되는 통풍 환자였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2층 쉴리 관 Room 36 : 프랑스 회화

피에로 질, 와토 Pierrot, dit autrefois Gilles, 1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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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앙투안 와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는 당대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대가 중 하나이다. 로코코 양식은 루이 15세 통치기에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장식적이고 화려한 미술 양식을 말한다. 그럼에도 와토의 그림에서는 종종 우울한 분위기가 엿보인다.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즐거운 시간들이 덧없으며, 곧 사라져버리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 멜랑콜리한 그림의 분위기는 보통 와토의 건강이 나빴던 탓에 기인한다. 그는 결핵으로 고통 받았고, 그 때문에 참을성도 없어지고 성격도 까다로워졌다. 때로 그림을 아무렇게나 그리기도 했는데, 결국 37세라는 이른 나이에 죽었다.

<피에로 질>은 와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당시 ‘질’은 17세기 희극 배우였던 질 르니에(Gilles Renie) 이후 피에로를 부르는 일반적인 말이 되어 있었다. 그림 속 주인공 질(Gilles)이 입고 있는 흰 옷은 그가 피에로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질은 화면 가득, 담담하고 어리숙한 얼굴로 우리를 정면으로 마주보며 서 있다.

그의 등 뒤에는 자신들의 세계에 몰입해 담소를 나누고 있는 인물들이 보인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이탈리아 순회극단의 거리 연극에 뿌리를 둔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에 등장하는 이들이다. 코메디아 델라르테 연극은 ‘전형화’된 캐릭터 몇 명이 출연하는 연극으로 캐릭터들이 각각 특징적인 복장을 착용하고 있으며 전형화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구별이 쉽다. 이 작품에서 배경에 있는 당나귀를 포함한 인물들과 주인공인 피에로는 모두 연극의 전형적 등장인물들이다.

1715년 클로드 질로(Claude Gillot)가 그린 코메디아 델라트 레 배우들의 스케치

이 그림이 심금을 울리는 것은 보일 듯 말듯 광대의 얼굴에서 무언의 슬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희고 매끄러우면서도 어벙벙한 의상을 입은 그는 일견 바보처럼 보인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어느 편이 연극무대인 걸까? 그는 경계인이다. 이 광대는 그림 안쪽과 그림 바깥의 관객 사이, 표면 경계에 서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무일푼으로 그림을 시작한 와토에게 예술가란 한낱 어리숙한 광대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 와토는 이 점에서 연극에 깊이 공감했다. 동시에 꾸준히 노력했으나 진정 자신이 참여할 수 없었던 세계, 마치 연극 관객처럼 바깥의 구경꾼일 수밖에 없었던 화려한 세계에 대해서도 깊은 매혹을 지니고 있었다. 천박한 광대와 화려한 세계 사이의 ‘경계인’ 와토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저버리지 않았다. 화려한 세계에 대한 매혹을 간직했고, 경계에 서서 그것을 영원한 꿈이자 한 편의 연극처럼 표현해냈다. 와토는, 그림 속의 피에로 질처럼, 화면 안과 밖의 경계에 서서 관객인 우리로 하여금 그가 꾸었던 똑같은 동경의 꿈을 꾸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2층 쉴리 관 Room 44 : 프랑스 회화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드 라 투르 Portrait en pied de la marquise de Pompadour, 1748-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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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영향력 있었던 여성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초상화이다.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5세가 왕비보다 더 시간을 많이 보낸 연인이었다. 외모가 아름다운 데다 교양이 높았으며 모든 예술 분야에 관심과 재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왕의 정서적인 면을 돕고 문화·예술에 관한 정책적 조언도 했다. 나중에는 정치 부분에 간섭하고 전쟁을 일으키도록 왕을 조종해 프랑스의 패배를 불러오기도 했다.

예술 부문에 국한해서 본다면 그녀의 활약은 현대 프랑스를 문화 강국으로 만들어 놓는 거대한 초석이 됐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퐁파두르 부인은 재능 있는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그녀의 거처인 트리아농 궁에서 늘 예술가들과 오디션 같은 특별한 면회를 했다. 이 특이한 면회는 프랑스 문화의 전반적인 흐름까지 결정할 수 있는 막대한 영향력이 있었는데, 로코코 문화는 여기서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퐁파두르 부인은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할 때면 항상 책이나 악보를 보고 있는 모습을 그리도록 했다. 이 작품에서도 그녀가 들고 있는 그림과 판화 인쇄물, 배경에 자리한 책과 지구본 등은 그녀가 이 그림에서 나오는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작자인 모리스 캥팅 드 라 투르(Maurice Quentin de La Tour, 1704-1717)는 파리에서 플랑드르 지방의 예술가에게 기초 교육을 받은 후 영국에서 초상화가로 큰 성공을 거둔 화가로, 프랑스로 돌아온 후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퐁파두르 부인이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했을 때 라 투르는 꽤나 귀찮아 했따고 한다. 신인들이야 퐁파두르의 간택으로 등용될 수 있었지만, 이미 유명했던 라 투르에게는 그런 과정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퐁파두르 부인의 강권으로 작품에 임했고, 그녀의 초상화 중 가장 화려하고 기품 있는 이 그림이 완성될 수 있었다.

2층 쉴리 관 Room 48 : 프랑스 회화

마리 마들렌 기마르의 초상, 프라고나르 Portrait de Marie-Madeleine Guimard, 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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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경 그려진 ‘환상의 초상화’ 연작 중 하나로,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 ‘환상의 초상화’ 연작은 현재 총 14점이 남아있는데 이 중 루브르 박물관이 8점을 소장하고 있다. 각각의 초상화에는 동일한 크기의 화면에 반신의 남성 혹은 여성이 그려져 있으며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한 듯 묘사된 인물은 모두 몸을 꼬는 듯한 모습이다. 이 초상화들은 주제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 동일한 주제의 연작으로 제작된 것인지, 누구를 위해 혹은 누구의 주문으로 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중에서도 <마리 마들렌 기마르의 초상>은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연작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이 작품은 허리 아래까지 더 내려가 묘사된 인물의 화면 구성과 정확한 세부 표현이 특징이다. 모델은 유명한 오페라 성악가라는 것은 확실한데, 그림 속 주인공이 무엇을 하고 있는 장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렇듯 내용과 도상이 확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프라고나르의 가장 성공적이고, 그의 실력이 가장 잘 발휘된 작품이라는 점은 변함없다. 몸을 우아하게 감싼 화려한 스페인 풍의 의상과 머리 장식은 극 중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듯 보인다. 화면 왼쪽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갈구하듯 자신의 감정을 전하고 있다. 인물을 비추는 따뜻한 빛은 정확하고 섬세한 얼굴 묘사와 의복의 녹색, 적색, 금색 의복의 관능적인 붓놀림 사이의 대조를 훌륭하게 드러낸다. 여유 있는 붓놀림, 자유분방하면서도 적절히 통제된 기법, 신체를 비튼 구도의 대담함은 당시 18세기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생명과 약동감을 느끼게 한다.

환상의 초상화 연작 일부

2층 쉴리 관 Room 60 : 프랑스 회화

발생퐁의 목욕하는 여인, 앵그르 Baigneuse de Valpinçon,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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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90-1867)의 초기 대표작으로, 원제는 <앉아 있는 여인(La Femme assise)>이었으나 나중에 작품을 소장하게 된 발팽송(Valpinçon)이 자신의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되면서 작품명이 바뀌었다.

스승인 다비드가 남성적이고 엄격한 분위기의 신고전주의를 추구하였다면, 앵그르는 유연한 선의 흐름이 강조된 드로잉을 통해 관능적이면서 우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앵그르의 고전주의는 특히 여성의 누드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 작품 역시 화가의 섬세한 감각과 데생능력을 잘 보여준다.

빛이 은은히 쏟아져 들어오는 방 안은 평온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단순한 구성을 보여준다. 여인은 부끄러운 듯 침대에 뒤돌아 앉아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녀의 다리 옆에는 욕조가 놓여 있는데, 사자 머리의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곧 목욕을 하려는 듯하다.

앵그르는 여체가 만들어 내는 이상적인 곡선을 강조하여 관능적인 느낌이 나도록 했다. 그와 동시에 머리에서 등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밝고 따뜻한 광선은 티 없이 맑고 부드러운 그녀의 피부 위로 스며드는 듯이 보이는데, 여인은 마치 모든 움직임이 멈추어버린 순백의 조각상 같기도 하다. 뒷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관능적이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여성일 것이다.

커튼은 어두운 초록빛이 여성의 하얀 피부색과 대조를 이루며 작품에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은밀한 공간 속에 있는 여성의 뒷모습이 관음증적인 시선을 암시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여인이 쓰고 있는 터번은 그 색상과 문양이 화면 속에서 강하게 드러나는데, 이슬람식 하렘이 배경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앵그르가 심취했던 이국적 취향을 반영한 결과이다. 이처럼 실내의 여러 모티프들은 단순한 장면 속에서 별다른 특징이 없는 듯하지만 작품 속에서 여러 부속물로 기능하도록 화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으로, 작품 전체에 감도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한층 강조하고 있다.

터키탕, 앵그르 Le Bain turc, 1862-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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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로 데뷔하고 처음 로마에 머물렀던 시절부터 이미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90-1867)는 이슬람식 하렘(harem)에 마음을 빼앗겼다. 하렘은 서구인이 결코 발을 들인 적이 없는 신비한 장소였다. 이후 앵그르는 18세기에 왕성하게 다루어진 여인 누드의 다양한 자태와 정경에 마음을 쏟았다.

1817년경 앵그르가 정성스럽게 베껴 쓰기도 했던 오스만 제국에 파견된 영국대사의 부인이 쓴 <몬태규 부인의 서간집>(1805)에 묘사된 터키에 있는 한 목욕탕의 정경은 다음과 같다.

“목욕탕에는 이백 명도 넘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최상품의 소파는 가지각색의 쿠션과 호화로운 직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여인들은 모두 알몸이었지만, 상스러운 동작을 하거나 불결한 행색을 하고 있는 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략) 수다에 빠진 자도 있었고 일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셔벗을 먹는 사람도 있었고, 나태한 자세로 쿠션에 엎드려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앵그르는 1862년부터 1863년에 걸쳐 이 작품에 집요하게 매달리며 수정 작업을 했다. 사각형이었던 화면은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이탈리아풍의 원형화로 바뀌었고, 여인들의 신체와 장식적 요소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수정되어 완성되었다. 몽토방(Montauban)의 앵그르 미술관과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과 관련된 수많은 데생은 길고 힘들었던 그의 탐구를 말해 준다. 이 완성작품이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5년 살롱의 ‘앵그르 회고전;을 통해서 였다. 화면 가득 묘사된 관능성과 다양한 육체표현,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기묘한 분위기의 비현실적인 색채는 퓌비 드 샤반느(Pierre Puvis de Chavannes)나 폴 고갱과 같은 다양한 화가와 상징주의의 예술가들의 작업의 초석이 되었으며, 마티스나 미래의 큐비스트, 특히 파블로 피카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터키탕의 스케치들 중 하나

2층 쉴리 관 Room 62 : 프랑스 회화

쇼팽의 초상, 들라크루아 Portrait of Frédéric Chopin,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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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가 1838년 절친한 친구인 피아노곡 작곡자 쇼팽(Chopin)과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Georges Sand)를 그린 큰 그림의 일부분이다.

들라크루아는 개인의 초상화는 좀처럼 그리지 않았는데, 다만 낭만적인 고통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기 위한 주문에는 응했다고 한다. 들라크루아에게 있어서 쇼팽은 ‘천재성에 의해 불타 버린 가장 순수한 영웅의 존재’로 비추어졌던 듯하다. 쇼팽은 조국 폴란드가 분할되는 것을 보며 역사적 현실에 항상 가슴아파했다고 한다.

쇼팽과 상드는 이 그림이 그려지던 시기쯤부터 사랑을 시작했다. 조르주 상드는 프랑스의 여류 소설가로 주로 남장 차림을 즐기며 쇼팽과의 모성적 연애 사건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림은 1863년에서 1874년 사이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둘로 나뉘었고, 조르주 상드가 그려진 부분은 나중에 코펜하겐에서 발견됐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구성한 본래의 그림을 보면, 두 사람은 따로 앉아 있음에도 마치 서로 소통하는 듯하다.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와 붙인 모습

2층 쉴리 관 Room 68 : 프랑스 회화

망트의 다리, 카미유 코로 Le pont de Mantes,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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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는 1860년대 들어 친구 부부를 만나기 위해 파리에서 50㎞쯤 떨어진 망트(Mantes)에 여러 번 찾아갔다. 그러다 1869년 류마티즘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부터는 망트에만 머물며 그곳 풍경을 화폭에 담아 냈다.

<망트의 다리>는 코로가 그린 망트 다리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후기 대표작이다. 화면 전체를 감도는 은회색의 부드러운 색깔은 코로의 후기 풍경화에서 자주 나타난다. 코로는 특히 변화하는 계절의 느낌을 섬세하게 잡아내어 화폭에 담아내곤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초봄의 은은함을 빛의 효과를 통해 잘 살려내고 있다. 관찰에 충실한 사실주의적 풍경에 이러한 부드러운 대기와 빛의 효과가 입혀지면서 시적 느낌을 자아내는 방식은 코로 특유의 ‘서정적 풍경화’로 재탄생됐다.

한편 망트 다리의 견고한 수평선과 위로 뻗은 나무의 수직선이 대조를 만들어내는데, 이 사이에서 산등성이와 강가의 선이 비스듬하게 공간을 구획함으로써 구성의 경직성을 상쇄시킨다. 또한, 강가에 배를 정박시키고 있는 어부의 붉은 모자는 은회색 빛의 전체 화면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2층 쉴리 관 Room 72 : 프랑스 회화

키질하는 농부, 밀레 Un Vanneur, 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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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는 1848년 살롱전에 <키질하는 농부(Un Vanneur,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를 출품한 후 농민화가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전에 밀레는 주로 역사나 신화 속 인물을 다뤘지만, 이후부터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1848년은 2월 혁명으로 왕정이 붕괴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선 해였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프랑스는 경제난에 시달렸고 이에 화가들은 역사화나 종교화로부터 벗어나 현실을 반영하는 사실적인 그림들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민주정치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강했던 1848년의 살롱전은 심지어 심사위원 제도조차 두지 않았다. 이 해에 밀레는 마치 역사화의 영웅처럼 낟알을 까부는 농부의 모습을 그려냈고 많은 사람들은 새 시대를 대표하는 영웅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이후 밀레는 <키질하는 농부>와 동일한 주제 및 구도로 여러 점을 더 제작했는데,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품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아마 밀레가 이 주제에 큰 의미를 두었던 듯하다. 그림 속 농부는 열심히 키질을 하고 있으며 작가는 이 움직임을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농부는 무릎을 이용해 바구니를 들어올려 곡식 낟알을 흔들고 있다. 그림 전반에 안개같이 뿌연 금색 효과를 내며 헛간을 가득 채운 먼지들 속에서 곡식 껍질들이 흩날린다. 밀레는 <키질하는 농부>란 투박하며 힘이 느껴지는 주제와 걸맞게 역동적으로 인물을 표현하는데, 특히 농부의 손과 셔츠에 빛을 집중시켜 이를 두드러지게 함으로서 인물의 움직임을 강조하고 있다.

2층 드농 관 Room C : 프랑스 회화

책읽는 소녀들, 르누아르 La Lecture, 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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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는 아내가 될 알린 샤리고(Aline Charigot)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 피에르(Pierre Renoir)를 낳은 후 1890년 결혼한다. 늦은 나이에 가정을 꾸린 르누아르는 가족이 주는 기쁨에 매료되는데, 이 시기부터 그림에 아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루누아르는 어른의 모습에서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었다.

<책읽는 소녀들> 속 소녀들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레이스 목장식 위로 얌전히 드리워져 있다. 상기된 얼굴과 포동포동한 피부는 어린아이에게서만 느껴지는 순수한 매력이다. 책을 뒤적거리면서 웃고 있는 곱슬머리의 소녀들은 진지하게 책에 몰두하고 있지만 그 표정은 마치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천사와 같다. 르누아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무수한 여인들은 삶의 어두움보다는 환희를 노래하는 대상들이었다. 르누아르는 웃음, 미소, 꽃, 천사가 된 어린아이, 여신이 된 여인들을 풍성한 색채로 표현하며 삶의 기쁨을 부드럽게 발산하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부드러운 표현에 어린아이의 진홍빛 뺨과 통통하게 살찐 팔을 포착했고, 현실에 찌든 삶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상적인 우아함과 순진함을 고정시키고자 했다. 이 그림에서 두 소녀가 앉아있는 모습, 즉 흰 드레스를 입은 금발 소녀와 안쪽에 진분홍빛 갈색 머리 소녀를 배치한 구도는 1892년에 그린 <피아노 치는 소녀들(Jeunes filles au piano)>과 매우 흡사한데, 두 작품은 동일한 모델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

0층 드농 관 Room B : 고대 로마

보르게제의 검투사 Le gladiateur Borghèse, B.C.320-B.C.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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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걸작 중 하나이다. 나무 받침대에 조각가의 이름인 ‘아가시아스(Agasias)’가 새겨져 있는데, 고대 조각에 작가의 사인이 기록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소재는 아테네 지역에서 나는 대리석이다.

이 작품은 그리스 시대에 제작된 청동상을 로마 때 대리석으로 모작한 것이었는데, 로마 근처의 항구 도시 네투노(Nettuno)에 설치되었다가 5세기에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 부서져 땅 속에 묻혀 잊혀졌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와서 부유한 보르게제 가문이 네투노의 폐허 위에 저택을 지을 때 땅을 파다가 여러 조각으로 깨진 검투사를 발견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됐다. 1807년에 나폴레옹이 이 조각들을 사들여 루브르에 들여와 깨진 부분과 모자라는 부분을 완성시켜 복원했고 이후 남성 나신의 미학적인 모델이 되었다.

작품 속 검투사는 힘과 움직임을 완벽하게 드러낸 건장한 육상선수의 몸을 갖고 있다. 본래 방패를 쥐고 있었을 왼손은 공격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고 있으며, 시선이 위를 향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은 말을 탄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른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건장한 신체에 교양과 미덕이 깃든다고 여겼으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함께 한다고 보았다. 이런 영웅적인 신체는 용기와 지혜를 겸비한 이상적인 인간을 상징한다. 완벽한 신체 비율은 머리의 8배라는 이론(리시포스 Lysippos, B.C.395-B.C.305)에 바탕하고 있다.

0층 드농 관 Room 18 : 고대 이탈리아·에트루리아

테르베테리 부부의 관(사르코파구스) Sarcophagus, B.C.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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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북부에 해당하는 에트루리아 지방에 발견된 것이다. 에트루리아는 로마가 아직 도시국가이던 시절 로마를 지배했던 이웃 나라로 훗날 로마에 멸망당했지만, 초기 로마 문화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테라코타로 된 이 귀족 부부의 관은 일종의 유골함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향수를 떨어트려 주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돼 있으며 부부의 위치는 상호 동등하다. 죽은 부부가 포도주 등의 향을 함께 음미하는 것은 에트루리아의 독특한 장례 예술이었다. 에트루리아 인들은 이탈리아 에트루리아 지역에서 생활했으며 로마 인들처럼 무덤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 관이 발견된 체르베테리는 로마 근겨의 작은 마을로 에트루리아 인들의 공동묘지가 자리한 곳이었다.

0층 드농 관 Room 23 : 고대 이탈리아·에트루리아

아그리파 흉상 Marcus Agrippa, B.C.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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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익은 이 작품은 원형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로마 카피톨리노 박물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각각 한 점씩 소장돼 있다. 로마의 장군다운 억세고 강인한 남성미와 개성을 한눈에 느끼게 한다. 아그리파는 최초의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영향력 있는 부관이었는데, 기원전 31년 악티움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 동안 반란을 진압하고 식민지를 확보하는 등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군인이었다.

0층 쉴리 관 Room 16 : 고대 그리스

밀로의 비너스 Venus de Milo, B.C.130-B.C.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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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예술의 이상이 잘 표현된 대리석 조각품으로, 아름답고 완벽한 균형을 가진 몸매로 인해 미(美)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1820년 에게 해에 있는 키클라스 제도의 하나인 밀로스 섬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발견했는데, 이것을 마침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입수했다.

이 작품을 미의 전형으로 언급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몸의 뼈대와 근육을 표현할 때 완벽한 해부학을 도입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몸의 무게 중심을 한쪽 다리에 둠으로써 나타나는 S자 곡선, 즉 인간의 신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다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이며, 셋째는 이른바 인체 황금비율이라는 팔등신의 신체구조이다. 이 비례법은 특히 여체를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 신체 비율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사실적이고 생생한 묘사를 목적으로 한 기법들이다. 이런 기법들은 원형이라는 실제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이를 보다 아름답고 숭고하게 표현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표현 기법들로 오랜 세월 동안 서구 예술에 있어 거역할 수 없는 법칙이며 규범이 되어 왔다.

수려하고 뚜렷한 이목구비도 눈에 띄며, 목주름과 약간의 지방질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복근 등의 세부적인 모습들은 섬세한 관찰과 과학적인 해부학에 의거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비너스의 커다란 눈은 맑고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오뚝한 콧날의 코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작고 굳게 다문 입은 단호함을, 갸름한 얼굴은 미적 이상을, 단정한 머릿결은 흐트러짐 없는 성격을 보여준다. 가슴의 모습 또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절한 볼륨과 크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완벽함은 실제 인간세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형상이다.

그런데 상체에 비해 하체는 조금 다른 구조를 보인다. 허리는 요즘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인 개미허리와 달리 굵고 두툼하며, 천으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엉덩이와 허벅지가 크고 굵은 듯하다. 상체가 지고지순하고 여린 이상미를 보인다면, 하체는 육감적인 욕망과 연관된 세속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완벽한 해부학과 콘트라포스트, 황금분할법으로 표현된 상체의 모습이 플라톤의 이데아에 입각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면, 하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적 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의 자연인 동시에 아이를 생산하는 능력이라는 본질로서의 자연을 말한다. 특히 비너스의 아랫배가 도톰하게 부푼 것은 잉태의 숭고한 능력을 드러낸 세속미의 상징이다.

한편 자세히 보면 복부 오른쪽에 둥그런 흔적이 있는데, 이것은 사라진 오른쪽 팔 부분이 붙어 있던 자리이다. 나중에 발굴된 조각들과 이 자국을 분석한 결과 본래 밀로의 비너스는 사과를 든 손을 앞으로 뻗어 내밀로 있었을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러나 큐레이터들은 이 조각을 복원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보전하기로 결정했다.

배꼽 오른쪽 위에 있는 둥그스름한 흔적

0층 쉴리 관 Room 15 : 고대 그리스

웅크린 아프로디테 Aphrodite accroupie, 1-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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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디테는 미의 여신이자 조각 작품의 단골 소재이다. 이 조각은 대부분의 여신상이 서 있는 포즈인데 반해 웅크리고 앉은 자태가 독특한 작품으로, 몸을 비튼 모습이 목욕하는 여인을 연상킨다. 프랑스 남동부의 온천 유적에서 발견됐으며 살짝 가린 듯한 가슴에서 <밀로의 비너스>와는 다른 수줍음이 감돈다. 여체에 대한 관능미를 넘어서 해부학적 치밀함까지 보이고 있어 당시 인체에 대한 탐구 정신을 엿보게 한다.

등에는 작은 손 조각이 남아 있다. 이것은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큐피트의 손일 것이다. 아마 모자가 함께 목욕하며 아들이 어머니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장면을 조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형태의 조각은 그리 드물지 않으며 목욕탕에 장식용으로 놓여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몸통만이 남아 있는 토르소로 머리와 사지가 잘려나간 탓에 원형이 궁금한데, 러시아 에르미타주에 있는 비슷한 조각과 거의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에르미타주의 아프로디테와 큐피트

0층 쉴리 관 Room 13 : 고대 그리스

벨레트리의 팔라스(아테나 여신) Athéna dite "Pallas de Velletri", B.C.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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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가 무려 3m가 넘는 거대한 아테나 여신 조각상으로 1797년 이탈리아 벨레트리에서 발견됐다. 기원전 430년경 제작됐으며, 청동으로 제작된 원작은 분실되고 로마에서 제작된 복제본들만 남아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대영 박물관에도 전시돼 있고, 뮌헨에는 흉상 부분만 복제돼 있다.

1979년 이탈리아의 예술품 발굴가인 파세티(Vincenzo Pacetti)가 벨레트리라는 마을 근처의 다 주저앉은 로마 시대 주택에서 이 거대상을 발견했고, 투수과 가슴 중앙의 메두사 부분을 조금 손본 후 프랑스의 고관에게 판매했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모습을 마치 남성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는데, 특히 옷자락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다. 가슴에 있는 메두사(Medusa)의 머리와 투구 모양으로 미루어 보아 아테나 여신을 묘사한 것이 틀림없는 작품이다. 그리스 헬레니즘 양식의 자세 역시 인상적이다. 원본의 작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크레타 섬의 조각가 크레실라스(Crésilas)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데, 날카로운 눈썹, 눈의 표현 방식, 코와 타원형 얼굴, 투구를 쓴 모습이 그의 작품 <페리클레스 흉상(Perikles)>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크레실라스의 페리클레스 흉상

0층 쉴리 관 Room 1 : 고대 이집트

거대 스핑크스 Grand sphinx de Tanis, B.C.2700-B.C.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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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은 19세기 들어 카이로 주재 영국 참사인 솔트(Salt)가 보유하고 있던 4,000여 점의 소장품을 구입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스핑크스이다. 높이 1.83m, 폭 4.8m의 거대한 이 초대형 스핑크스는 무게가 28톤에 달하는 분홍빛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이집트 밖에 있는 스핑크스 중 가장 크기가 크다. 이집트 제21왕조 및 제22왕조 때 수도였던 타니스(Tanis)의 아문(Amun) 성전 유적에서 발굴된 것이다.

묘사가 섬세하고 표면에 광택 처리가 된 것으로 보아 훌륭한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긴장된 몸매와 발톱은 스핑크스가 도약할 준비가 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각 밭 및 현판에는 상형문자가 조각돼 있는데, 제작된 후 나중에 계속 의도적으로 수정된 흔적이 보여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제19왕조 때 메르넵타(Merneptah)와 제22왕조 때 세숑크(Sheshonq) 왕의 이름은 명확하게 보인다.

흔히 사람 머리에 사자 몸을 가진 이집트 석상을 ‘스핑크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 단어로 나중에 붙은 것이다. 이런 이미지를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의 살아 있는 모습’이라는 뜻의 ‘쉐세프 앙크(Shesep ankh)’라고 불렀다.

0층 쉴리 관 Room 12 : 고대 이집트

람세스2세 좌상 Statue colossale de Ramsès II, B.C.1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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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의 이름이 있는 비문을 덮고 보좌에 앉아 있는 왕을 표현한 것으로, 오랫동안 누구의 석상인지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던 유물이다. 왕좌에 앉아 허벙지에 손을 평평하게 올리고 거짓 턱수염을 달고 뱀 모양 목장식을 착용한 이런 모습은 전통적인 파라오의 전형이다. 람세스 2세의 이름과 칭호는 허리띠와 왕좌 뒤쪽, 옆면에 새겨져 있다. 머리에 쓴 관과 얼굴, 목, 몸통과 의자 부분에 변형의 흔적이 있는데,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람세스 2세가 아메노피스 3세의 것을 수정해서 재사용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설득력이 부족하다.

람세스3세 석관(사르코파구스) Cuve du sarcophage de Ramsès III, B.C.1550-B.C.1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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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3세의 별칭은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이다. 람세스 2세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었지만 그를 존경해 ‘람세스’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분홍빛 화강암으로 제작한 이 석관에는 람세스 3세의 유해가 안치돼 있으며, 뚜껑은 영국 캠브리지의 피츠 윌리엄 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석관 바깥쪽에는 고대 이집트의 장례문인 <암두아트의 서(Book of Amduat)>의 제7장과 제8장이 새겨져 있고, <관문의 서(Book of Gates)>의 첫 장도 발견된다. 새겨진 내용들에 다소의 실수가 있는데 이런 서기의 실수는 새로운 왕국에서 더 이상 파라오가 절대왕권을 갖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채색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상인방에 새겨져 있는 람세스 3세의 이름. 좌측 카르투쉬에 들어 있는 것은 람세스 3세의 출생명으로 ‘라-메세-수 헤카-이운누’라고 읽힌다. 뜻은 ‘라가 그를 낳았다. 헬리오폴리스의 통치자’이다. 우측 것은 람세스 3세의 즉위명으로 ‘우세르-마아트-라 메리-아멘’으로 읽히고 그 뜻은 ‘라의 마아트는 강력하다. 아멘에게 사랑받는 자’이다.

0층 쉴리 관 Room 12 bis : 고대 이집트

덴데라 신전의 황도12궁 Zodiaque de Denderah, B.C.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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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천궁도로 태양이 지나가는 길을 12개로 나누어 원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1년은 360일로 보고 이를 10일 단위로 나눈 다음 36개의 별자리를 원형으로 배치한 형태이며, 사방 2.5m, 두께 1m의 화강암 석판에 새겨져 있다. 이 황도 12궁은 처음에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분석 결과 로마 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별자리 외에 메소포타미아의 별자리도 섞여 있고 원래는 다채로운 색이 칠해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게 자리와 사자 자리가 강조돼 있다.

덴데라(Dendera)는 상이집트의 수도였는데, 남아 있는 유적 중 여신 하토르에게 봉헌된 신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매우 보존 상태가 양호한 신전으로 예배소의 천장에 12궁도가 그려져 있던 것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 때 떼어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현재 신전에는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채색을 복원한 그림과 36개 별자리를 복원한 것

0층 쉴리 관 Room 17 : 고대 이집트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Hermaphrodite endormi, B.C.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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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마프로디토스는 아버지 헤르메스와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이름을 반씩 딴 신의 아들로 상당한 미소년이었는데, 열 다섯 살 때 여행을 하다가 한 호수에서 살마키스라는 요정의 사랑을 거절하게 된다. 요정은 제우스에게 빌어 자신이 그와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했고 신이 이를 받아들여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와 하나의 몸이 되었다. 그렇게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녀동체, 즉 남성과 여성을 한 몸에 두루 갖춘 존재가 되어 여성의 가슴과 남성의 성기를 갖게 되었다.

이 작품은 본래 2세기경 로마에서 만들어진 대리석 조각이었는데, 1619년에 조각가 베르니니(Bernini, 1598-1680)가 보충 작업으로 매트리스를 첨가한 것이다. 누워 있는 뒷모습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보이지만, 앞부분에서는 남성의 성기를 볼 수 있다.

0층 쉴리 관 Room 12b : 고대 근동

다리우스의 궁사들 부조 Frise des archers, B.C.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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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제국을 통일한 다리우스 1세(Darius I, B.C.550-B.C.486)의 강력한 궁수 근위병들을 모티브로 제작된 프리즈 장식이다. 궁전에 부조처럼 장식된 유물로, 각 궁수들이 손에 창을 들고 어깨에 활을 메고 있다. 궁수들은 긴 페르시아의 옷을 입고 있는데 다리에서 옷자락을 땋아 주름을 잡았다. 모두 수염이 있고 두툼한 곱슬머리를 하고 있다. 이 궁사들은 왕을 호위하는 최정예 부대로 ‘불멸의 군대(Immortal)’이라고 불렸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rezzar II, B.C.604-B.C.562) 때 만들어진 바빌론의 행렬 프리즈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지만 제작 기법은 다르다. 바빌론에서는 벽돌 위에 찰흙을 바르는 방식을 사용했지만, 다리우스의 작가들은 엘람 시대에 개발된 다색 벽돌을 활용하고 있다.

다리우스 1세 궁의 접견실(아파다나)의 기둥 머리 Chapiteau d'une colonne de la salle d'audiences (Apadana) du Palais de Darius 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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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 제국을 통일한 후 수사(Susa)에 새로운 행정 수도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궁전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109m짜리 아파다나(Apadana)를 만들었다. 아파다나는 왕궁에서 옥좌를 놓고 알현 장소로 쓴 넓은 방으로, 실내 밖에 기둥을 둔 다주식 건축 방법을 활용했다.

아파다나는 21m 높이로 19.2m의 거대한 석조 원주 36개가 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각각 왕의 이름을 새긴 사각형의 받침에 이오니아 양식의 길쭉한 축을 얹고 에페소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처럼 주랑 양쪽을 두 마리의 황소 머리 부분으로 장식했다. 두 한 쌍의 황소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해 우주의 균형을 상징해 온 상징이이자 수호자의 역할을 했다. 고대 근동에서는 중요한 건축물을 지을 때 이런 수호상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작자는 그리스와 리디아 출신 석공들이었다고 전한다.

0층 리슐리외 관 Room 4 : 고대 근동

라마수 Taureau androcéphale ailé, B.C.721-B.C.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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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지역의 코르사바드(khorsabad) 발굴에서 나온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의 궁전의 장식이다. 황소의 몸에 사람의 머리가 달린 형상을 하고 있다.

사르곤 2세는 반란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사르곤 왕조를 창설한 군주로, ‘사르곤’이라는 이름은 ‘정통 왕’이라는 뜻의 아시리아 어 ‘샤루 킨(Sharru-Kin)’을 히브리어로 번역한 것이다. 사르곤 왕조는 페르시아 만에서부터 지중해에까지 이란, 소아시아, 아르메니아, 이집트에 이르는 세계 최초의 세계제국을 실현했다.

이 동물은 ‘라마수(lamassu)’로 알려진 정령이다. 바빌론에서 정령은 모두 우투쿠라고 불리는데, 이들 중 선한 정령들을 라마수라고 했다. 기독교의 천사와 같은 존재로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 활약했다. 인간의 수호신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는데, 사람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고 덮쳐오는 악령이나 재앙에서 보호해 주었다. 인간의 모습이지만 새나 동물의 머리를 지닐 때도 있으며, 등에는 네 개의 날개가 있다고 한다.

이 라마수 역시 인간의 머리, 황소의 귀와 몸, 그리고 새의 날개를 가진 복합적인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측면에서 보면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면에서 보면 그냥 서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다리가 4개가 아니라 5개로 만들어져 있다. 황소 다리 사에 ‘사르곤 왕의 궁전’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다른 라마수

0층 리슐리외 관 Room 6 : 고대 근동

이슈타르 문의 사자 부조 Panneau de briques : lion pass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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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효하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진흙 벽돌로 만든 벽에 파랑, 초록, 검정, 노랑, 하양으로 칠한 벽화이다.

고대 근동에서 사자는 힘과 능력의 상징이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자는 바빌론을 대표하는 여신 중의 여신, 이슈타르(Ishtar)를 상징했다. 그래서 바빌론에는 사자 그림이나 조각이 매우 많다. 이슈타르를 상징하는 이 사자 벽화는 바빌론의 중심 도로, 즉 개선한 군대나 외국이 사절단이 통과하는 ‘행렬의 길’의 양쪽 벽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 가면 복원된 이 길을 볼 수 있다.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는 행렬의 길

0층 리슐리외 관 Room 3 : 고대 근동

함무라비 법전 Code de Hammurabi, roi de Babylone, B.C.1792-B.C.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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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12월과 이듬해 1월, 성경에 ‘수산(Shushan)’이라고 나오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지역에서 검은 섬록암으로 된 세 개의 큰 파편이 발견됐다. 그것들은 서로 완벽하게 들어맞았으며. 결합했을 때 높이가 225㎝이고 대좌(臺座)의 직경이 약 60㎝인 석비였다. 위쪽에는 바빌론 첫 왕조의 제 6대 왕이었던 함무라비(Hammurabi, B.C.1792-B.C.1750)가 앉아 있는 태양신 사마쉬(Shamash) 앞에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한 부조가 있고 표면 전체는 282조의 법률을 쐐기문자로 새긴 긴 비문으로 덮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이다.

왕이 신에게 법전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법신수사상(法神授思想)을 엿볼 수 있다. 법문의 배열은 엄밀하지 못하나 대체로 체계적이다. 법 제도가 계급에 기반하고 동해보복형(同害報復刑, 탈리오의 법칙: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라는 점에서 고대적 잔재가 남아 있으나, 농업사회의 법 이외에 운송 ·중개 등 상업 규정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이다. 또 절차적 규정이나 종교적 색채의 규정이 적다는 점에서도 고대법보다 진보된 내용이 있다. 후세의 바빌론이나 아시리아의 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0층 리슐리외 관 Room 27 : 프랑스 조각

버려진 프시케, 오귀스탱 파주 Psyché abandonnée, 1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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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시케가 큐피트와의 약속을 어겨 큐피트가 프시케를 홀로 두고 떠난 뒤 낙심한 프시케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쓰러진 기름등잔과 흘러내리는 기름, 발밑에 떨어진 칼. 그리고 받침대 옆 나비 문양이 이 여인이 프시케임을 나타낸다.

파주(Augustin Pajou, 1730-1809)은 이 조각상을 만들던 시기에 프시케 또래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머리 모양을 그대로 새겨 넣었다. 때문에 신화적인 느낌과 동떨어 보이지만, 육감적인 전라의 석고상에 인간적인 감정표현까지 나타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조각품은 밑의 큐피트 상과 짝 지어 제작한 작품이다.

0층 리슐리외 관 Room 16 : 프랑스 조각

사슬에 묶인 네 명의 포로, 보르도니·프랑크빌 Quatre Captifs provenant du piédestal de la statue équestre d'Henri IV sur le Pont-Neuf, 1614-1618

왼쪽부터 늙은이, 젊은이, 남쪽 사람, 북쪽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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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퐁네프 위에 있던 앙리 4세 기마대 좌상의 네 모서리를 장식하고 있던 청동상들이다. 앙리 4세 상을 포함한 이 동상군은 파리에서 공공시설에 최초로 세워진 것이었다. 부르봉 왕조가 새로 시작된 만큼 이를 대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정치선전물이었던 셈이었다. 처음 기마상 건설을 제안한 사람은 왕비인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édicis)였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에 의해 앙리 4세 상이 부서지고 만다. 지금 퐁네프 한가운데, 그러니깐 시테 섬의 끝자락에 위치한 플라스 도핀(Place Dauphine)에 있는 앙리 4세의 기마상은 1818년에 루이 18세가 다시 세운 것이어서 원래의 것과는 모습이 다르며, 받침돌에 “루이의 복귀가 앙리를 부활시켰다(Le retour de Louis fait revivre Henri)”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앙리 4세 상과 달리 <사슬에 묶인 네 명의 포로>는 절대권력의 희생자로 여겨진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앙리 4세의 궁정 조각가였던 프랑크빌(Francville)이 사위인 보르도니(Franceso Bordini)와 함께 앙리 4세의 기마상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작품들이다.

파괴되기 이전의 앙리 4세 기마상

네 명의 전쟁 포로들은 저마다 나이대도 출신도 다르게 묘사돼 있는데, 이는 앙리 4세의 드넓은 영향력과 위대함을 나타내고자 한 결과이다. 근육질의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은 각각 늙은이와 젊은이를 상징하며 이는 곧 ‘모든 남성’을 의미한다. 한 사람은 중년 아프리카인 같은 외모의 특징이 매우 두드러지는데, 그가 가진 거북이 등껍질은 아프리카, 즉 남쪽을 의미한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길고 배가 볼록 나온 나머지 한 사람은 북쪽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이 청동상들을 외적인 요인 없이 작품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통제당한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작품들로서 손색없는 걸작이다.

0층 리슐리외 관 Room 10 : 프랑스 조각

필립 포의 무덤, 모와튀리에 Tombeau de Philippe Pot, 1477-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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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인 모아튀리에(Antoine le Moiturier, 1443-1470)의 대표작으로 석회암과, 금, 납 등 다양한 재료로 제작됐다. 부르고뉴 지방의 권력가인 필립 포(Philippe Pot, ?-1493)의 장례 행렬을 묘사한 작품으로 필립 포의 무덤 안에서 발견된 작품이다. 실물 크기와 세밀한 묘사로 눈길을 끈다.

옆구리에 방패를 단 채 고개를 숙인 여덟 명의 사람들이 망자를 짊어지고 무덤으로 가는 중이다. 이 여덟 사람은 당시 필립 포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여덟 개의 마을을 상징하는데, 각 방패에 그려진 것은 마을들의 문장이다. 고대 조각들은 인물의 표정으로 감정을 이입했지만, 이 작품은 인물들의 행동과 분위기로 감정을 전달하며 분위기를 압도한다. 필립 포는 생전에 금색 상의를 즐겨 입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금빛 옷을 입고 있다.

0층 리슐리외 관 Room 4 : 프랑스 조각

죽어가는 노예 · 반항하는 노예, 미켈란젤로 Captif,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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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노예>와 <반항하는 노예>는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1443-1513)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한 것으로 육체적 아름다움과 함께 정신적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피에타>와 <다비드> 상의 제작을 마쳤을 때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는 어느 덧 30대에 들어섰는데,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청으로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앞으로 그의 반평생을 쫓아다니게 될 운명과도 같은 미완의 조각, 율리우스 2세의 묘비 제작을 의뢰받게 된다. 이 조각 프로젝트는 스케일이 너무도 장대해 처음부터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계획이었고, 이후 수없이 반려되고 취소되었으며 그럴 때마다 미켈란젤로는 재계약과 음모의 소용돌이 속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물론 여기에는 미켈란젤로의 일에 대한 열정과 한계를 모르는 예술가적 야망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죽어가는 노예>와 <반항하는 노예>, 미완성으로 끝난 이 두 노예 상은 처음에는 40여 점의 조각으로 장식될 웅대한 율리우스 2세의 영묘 조각의 일부로 구상되었고, 다른 대부분의 작업은 작업 초기에 중단됐다.

남성의 굴곡 심한 근육이 내보이는 운동감과 안정감을 주는 구도의 조화는 미켈란젤로에게 와서야 한 작품으로 구현되기에 이르렀고 그는 세계 조각사의 가장 찬란한 영광 그 자체로 남게 되었다.

제작 초반에 미완으로 남은 몇몇 다른 노예 상들. 왼쪽부터 벌거벗은 노예,아틀라스의 노예, 깨어나는 노예

<죽어가는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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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노예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평온하다는 느낌이 들며 몸짓이 매우 선정적이다. 곰브리치는 이 작품이 죽음의 지배를 받는 육체의 순간, 즉 삶의 투쟁과 긴장으로부터 해방되는 마지막 순간을 조형한 것이고 피로와 체념의 몸짓속에 지극한 아름다움이 보인다고 극찬했다. 요컨데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결합됐다는 것이다. 노예들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은 평생 수많은 조각과 작품의 의뢰를 받고, 힘든 예술가의 삶을 살았던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조각상의 다리 뒷부분에는 원숭이를 새기려 했으나 미완성이 되어 원숭이의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렵다.

<반항하는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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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역시 미완의 원숭이와 함께 있는 모습인데 손이 뒤로 묶여 있다. <죽어가는 노예>가 한계를 받아들인 인간을 의미한다면, <반항하는 노예>는 그 한계 앞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을 상징할 것이다. 또 <죽어가는 노예>와 달리 근육을 섬세하게 표현해 몸부림치는 인물의 역동성을 천재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고대 그리스 조각의 영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맘에 드는 대리석이 없어서 결함이 있는 돌에 조각한 것인데, 자세히 보면 얼굴을 가로질러 목과 등 뒤로 돌에 금이 나 있다.

그렇다면 두 노예 상에 새기고자 했던 원숭이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원숭이는 일반적으로 그 어떤 동물보다 인간과 유사하지만 인간에 내재하는 욕망, 탐욕, 폭식, 호색과 같은 ‘인간 이하’의 본능을 내포한다. 요컨대 원숭이는 동물적 본성을 의한다고 할 수 있다.

큐피트의 키스로 환생하는 프시케, 카노바 Psyché ranimée par le baiser de l'Amour, 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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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많은 언니들의 꾐에 넘어가 약속을 어기고 큐피트의 얼굴을 보고 만 프시케는 그와 이별하게 되지만,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비너스를 찾아가 갖은 학대를 견디며 큐피트를 기다린다. 잘 견디는 프시케를 보며 질투를 느낀 비너스는 어느 날 그녀에게 지하 세계에 가서 페르세포네의 아름다움을 한 상자 얻어 오라고 심부름을 보낸다. 주변의 도움으로 페르세포네의 선물을 받게 된 프시케는 돌아오는 도중에 그 상자를 절대 열지 말라는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호기심과 아름다워지고 싶은 유혹에 그만 뚜껑을 열고 만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지하 세계의 잠이었고 프시케는 곧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들게 되었다. 사랑하는 그녀를 찾아 나선 큐피트의 입맞춤으로 잠에서 깨어난 프시케는 큐피트와 함께 신들의 세계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된다.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 1757-1822)의 이 대리석 조각은 이 중 큐피트의 입맞춤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프시케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육감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투명한 우아함을 발하고 있는 이 걸작품은 시적인 색조와 신화 속의 형이상학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순수함과 윤곽의 얽힘, 공간 내에서 형태들의 성숙함 등이 마치 한 송이 꽃의 개화를 연상하게 하며 이 모두는 사랑이 신성한 황홀감과 만나는 마술 같은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0층 리슐리외 관 Room 1 : 프랑스 조각

사자굴 속의 다니엘 Daniel dans la fosse aux lions, 1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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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수호성인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성 쥬느비에브(Geneviève) 교회를 장식하고 있던 대리석 조각이다. 교회가 로마네스크 시기인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반에 지어졌기 때문에 이 조각 역시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예언자 다니엘은 두 사자 사이에서 고요하고 두려움 없는 얼굴로 앉아 있다. 이 주제는 구약성서에서 따 온 것이다.

다니엘은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활동한 이스라엘의 예언자로, 다니엘이란 이름은 히브리 말로 ‘하느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이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rezzar)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네부카드네자르는 이스라엘 왕족과 귀족 자손 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교육시키고 자신을 보필하게 했다. 다니엘은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꿈을 해몽해 총애를 받았고, 뒤이은 벨사차르 왕와 다리우스 역시 그를 아껴 다니엘은 재상의 반열에 오른다.

그런에 이를 시기한 다른 신하들이 ‘왕 외의 다른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자는 사자굴에 던져야 한다.’는 금령을 세운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고도 언제나처럼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고 결국 사자굴에 던져졌다. 그러나 하느님이 보낸 천사가 사자의 입을 막아버린 덕분에 그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리우스 왕은 기뻐하며 바빌로니아 백성들에게 다니엘이 섬기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칙령을 내린다.

조각 양식을 볼 때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발견되는 다른 12세기 조각들과 별 관계가 없다. 다만 구성이 보르도 근처의 소브 마외르(Sauve-Majeure) 수도원에 있는 다니엘의 묘사와 유사하고, 사자의 묘사는 랑그도크(Languedoc)나 루시용(Roussillon) 수도원의 것들과 유사하다.

소브 마외르 수도원의 다니엘 일부

반치층 리슐리외 관 Courtyard

네 국가의 포로 Quatre captifs dits aussi Quatre Nations vaincues, 1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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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층에서 2층까지 관람을 마친 후 조금 여유가 있다면 리슐리외 관 지하 1층 안뜰로 가 보자. 놓치고 가기엔 아쉬운 거대한 <네 국가의 포로>를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 빅투아 광장(Place des Victoires)에 있는 받침대에서 가져온 이 포로 동상들은 네이메겐 조약(Treaties of Nijmegen) 때 패전한 네 국가,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네덜란드, 브란덴부르크를 의미한다. 포로들은 희망, 반항, 체념, 슬픔의 각기 다른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앞서 본 <사슬에 묶인 네 명의 포로>가 앙리 4세 기마대 좌상을 장식했듯, <네 국가의 포로>들은 루이 14세 동상의 받침대를 장식하고 있었다. 작자인 마틴 데 자르 뎅(Martin Desjardins)은 루이 14세 통치 시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네덜란드 출신의 조각가로 이 작품을 1686년에 완성했다. 네 포로가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감상하는 것이 좋다.

왼쪽부터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네덜란드, 브란덴부르크

먼저 스페인 포로는 머리카락이 풍성한 젊은이로 표현돼 있다. 그의 벗은 몸과 하늘을 향한 시선은 희망을 상징한다. 반면 신성로마제국의 포로는 고대 튜닉을 입은 수염 난 노인의 모습이다. 고개를 푹 숙인 낙담한 모습에서 체념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네덜란드의 포로는 짧은 턱수염을 갖고 있는데, 벗은 몸을 도약하려는 듯 어깨를 도전적인 자세로 앞으로 내밀고 있다. 그의 얼굴은 반항의 감정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브란덴부르크의 포로는 야만인과 같은 옷을 입은 중년의 남성으로, 외투를 움켜쥔 손과 처진 오른쪽 어깨, 일그러진 표정에서 슬픔의 감정이 보인다.

1685년에는 고대 위대한 승리들과의 은유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투구, 방패, 휘장, 도끼창, 노 등이 추가로 제작됐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국가 간에 동맹이 형성되자 이런 청동상은 부질없어졌고 계몽 정신에도 어긋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4세의 청동상은 앙리 4세의 기마상처럼 사라졌지만, 앙리 4세의 포로상처럼 이 포로들 또한 살아남았다. 이때 원래 포로들을 묶고 있던 사슬도 대중에 의해 사라졌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모습(자세히 보면 포로들이 사슬로 묶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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