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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프랑스 여행 URL 복사

[프랑스] 파리(Paris)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18. 7. 11. by 솜글
이 포스트는
파리, 프랑스 여행을 앞두고 한국어 자료가 없어 고민하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들입니다. 아주 많이 정성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페이지 맨 아래에서 본문을 PDF 파일로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파일에는 본문 이상의 정보와 총천연 사진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파일의 비밀번호는 somgleparis입니다.
*자료가 도움이 되었다면 인사 한 줄 남겨 주세요.

 

인터넷과 책, 외국 사이트 등을 긁어모아 정리한 파리 시내 관광지 설명 자료를 공유한다.

파리 시내 모든 곳이 다 나와 있다고 장담은 못해도, 8박 10일(근교여행 하루 빼면 7박) 간 빡세게 돌아볼 수 있는 웬만한 곳은 다 있다. 파리에 한 달 이상씩 있을 게 아니라면 아마 이 설명 자료면 충분하리라고 본다.

PDF 다운로드

본문의 내용은 모두 페이지 맨 하단에서 116쪽 분량의 PDF 파일로도 다운로드할 수 있다. 따로 올린 것까지 파리 전체 여행자료를 다 합치면 400쪽이 넘는 것 같다... 인간승리....

PDF에는 총천연 그림과 사진이 들어가 있어서 훨씬 가독성이 낫다. 본문에도 올리고 싶지만 너무 심한 노가다여서 포기... 

스마트폰에 넣어 가면 딱 좋다. 

따로 올리는 명소들

다음 관광지들의 상세한 자료는 지도 등과 함께 별도로 올렸으니 원하는 명소의 링크 클릭.

알자스 지방 소도시들

파리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좋은 근교인 콜마르(꼴마르)와 스트라스부르는 따로 업로드해 두었다. 한국어 지도와 한국어 설명자료 포스팅이 각각 따로 올라가 있다.

블로그 내에서 '콜마르', '스트라스부르'로 검색하길 추천...


파리(Paris)

예술가들의 수도이자 낭만의 도시이다. 프랑스의 수도이자 최대도시이며, 유럽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이칭은 빛의 도시(La Ville Lumière)이다.

파리는 같은 프랑스어권인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과 함께 한참 북쪽으로 올라가있다. 그래서인지 온난한 곳이 아니다. 걸핏하면 비가 오고 축축하며 싸늘하고 쓸쓸하며 어두컴컴하고 해 안비치는 것은 런던과 다를 바가 없다. 연간 일조시간 런던 1,630시간, 파리 1,660시간으로 큰 차이가 없다. 현지인들에 따르면 런던과 파리는 우중충한 날씨가 보통이라고 한다. 애초에 파리-런던간 거리는 부산-서울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파리의 기원, 루테시아

파리라는 이름의 유래는 고대 파리 지역에 살았던 갈리아의 일족 파리시(Parisii)에서 나왔다. 고대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 파리시 족이 살던 곳에 도시를 세운 것이 오늘날 파리시의 기원이 되었다. 로마 제국 당시에는 루테시아라고 불렸는데 정식 명칭은 ‘파리시의 루테시아(Lutetia Parisiorum)’였다. 파리시 족이 살던 센 강의 시테 섬에 로마인들이 그대로 도시를 세웠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 당시의 루테시아는 센 강의 시테 섬에서 센 강의 좌안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오늘날 파리 제5구역에는 루테시아 시절에 세워진 원형극장의 유적이 남아있기도 하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이민족들의 침입 때문에 결국 센 강의 좌안 지역은 포기하고 시테 섬을 요새화하게 되어 그후 상당기간은 시테 섬을 중심으로 한 요새도시로 남게 되었다. 그 때부터 루테시아라는 이름 대신 오늘날의 파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메로빙거 왕조와 카페 왕조

5세기말 클로비스 1세가 파리가 점령하고 508년, 파리는 메로빙거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885년에서 886년까지 파리에 바이킹 족이 쳐들어왔는데 이때 프랑크 왕국의 샤를3세(독일어로는 카를 3세)가 막대한 조공을 지불하고 바이킹과 강화를 맺어서 무마했고, 이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프랑크 왕국의 왕 대신 파리 백작을 더 따르게 되었다. 989년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프랑스 국왕으로 추대되어 ‘카페 왕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파리는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필리프 2세 때에는 파리를 둘러싸는 성벽이 완성되어 파리는 강력한 요새도시가 되었다. 11세기에 파리 대주교좌 부속 학교로 시작한 파리 대학이 발전하여 스콜라 신학의 중심지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독특하게 센강 좌안은 대학을 비롯한 학교들이 발전했고, 센강 우안은 시장이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파리의 대체적인 구조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백년전쟁 당시에는 오를레앙파와 브르고뉴파의 치열한 혈전으로 파리는 상당한 혼란에 빠져야 했다. 그 후에 잉글랜드 왕과 동맹을 맺은 브르고뉴측이 파리를 점령했고 잔 다르크는 이를 탈환하려다가 붙잡혀서 마녀재판을 받은 후 화형당했다.

부르봉 왕정의 시대와 프랑스 대혁명

우여곡절끝에 프랑스군이 파리를 다시 탈환하여 파리는 다시 프랑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왕들은 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루아르 계곡에 세운 성을 더 좋아해서 파리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위그노 전쟁 당시에 파리는 가톨릭 세력의 중심지였고 이로 인해 1572년에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위그노 전쟁 이후 등극한 앙리 4세는 파리를 프랑스 왕국의 명실상부한 수도로 부활시켰고 이후 파리에는 튈리르 궁, 루브르 궁, 폐병원 등의 대규모 건물들이 잇달아 세워졌다.

그러나 루이 14세 때 사실상의 행정수도나 다름없는 베르사유 궁전을 건축하면서 파리는 수도의 위상을 잃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 전까지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으로 루이 16세 일가가 튈리르 궁으로 끌려오면서 파리는 다시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프랑스 혁명 당시 중요 사건들이 파리에서 일어났으며 파리에서 혁명이 과격해진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파리는 정치적으론 잇달아 일어난 혁명과 파리 코뮌 등으로 혼란스럽긴 했지만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산업화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1837년에 파리와 생 제르망 안 레이 사이에 철도가 놓인 것을 시작으로 이후 파리에서 각처로 철도 노선들이 이어지게 되었다.

근대의 파리

파리를 근대도시로 탈바꿈한 인물은 나폴레옹 3세 당시 센 현의 지사였던 조르주 오스만 남작으로 중세 이래 이어져온 좁은 골목을 넓은 도로로 바꾸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었으며 도심부를 재개발하고 사회기반시설들을 갖추는 파리 개조 작업을 진행했다. 오늘날 파리의 모습은 조르주 오스만에 의해 갖춰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패전하면서 파리는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제2제정이 붕괴하고 제3공화정이 탄생했지만 파리는 프로이센군의 포위로 70여일이 넘게 고립된 끝에 제3공화정의 보수파 정권은 프로이센에게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파리의 노동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정권에 저항하여 파리 코뮌을 결성하고 봉기하였지만 그러나 결국 베르사유 정부군에게 진압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와해되었다.

현대의 파리

19세기 말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전까지 파리는 큰 발전을 이룩했다. 여러 차례의 만국 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1889년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여 에펠탑이 건설되었고, 1900년 만국 박람회에는 파리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침공으로 파리는 함락 일보직전까지 놓였고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해 파리는 간신히 함락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 파리에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몰려들어서 예술도시로 세계적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그 당시 파리로 건너온 예술가들은 에콜 드 파리(파리 파)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파리는 개전 1개월 만에 별 저항없이 독일군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상젤리제를 행진하는 독일군을 본 시민들은 보불전쟁 때 겪었던 수모를 또 겪게 되어서 참담했다고 한다(자료화면중에는 울면서 독일군에게 손을 흔드는 파리 시민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 있다). 파리 시민들 중에는 독일에 협력한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레지스탕스 활동에 뛰어들어 독일에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1944년 8월 15일에 파리는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파리가 함락당하기 직전,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에 주둔한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 중장(Dietrich von Choltitz,1894~1966)에게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콩코드 광장 등 파리의 유명한 문화유산들에 폭탄들이 설치되어 콜티츠가 히틀러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면 파리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겠지만 콜티츠는 나는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며 히틀러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하는 길을 택했다. 이 때, 콜티츠는 명령을 따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자신의 아내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콜티츠의 말을 들은 아내는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당시 히틀러는 9번이나 전화를 하여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Brennt Paris?)”라고 질문했는데 이 말은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6년작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Paris Brule-t-il?)>로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영화제목이 되었다. 명령을 무시하고 항복한 콜티츠와 부하들은 파리 한복판을 끌려가면서 파리 시민들에게 야유 및 욕설, 침까지 맞는 비참한 신세를 겪지만 레지스탕스와 경찰들이 적어도 그들을 지키면서 안전을 보장했다. 레지스탕스 지도자 앙리 롤 탕기에게 항복 조건으로 자신과 1만 7천명 파리 주둔 독일군 목숨을 보장했기 때문. 물론 롤 탕기는 나중에 회고하길, “파리를 지켜준 그의 마음에 고마워하며 설령 그런 조건이 없었다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콜티츠 중장은 종전 뒤에 전범 재판을 받아 2년정도 복역했지만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공을 높게 인정받아 가석방되었고 파리 시를 무사하게 놔둔 것에 대한 감사장과 명예시민증까지 받았다. 콜티츠는 1956년에 파리를 조용히 방문했는데 바로 나치 독일군 지휘본부가 있었던 바로 그 ‘호텔 르 뫼리스’를 잠깐 들러갔다고 한다. 당시 호텔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직원의 말에 의하면, 콜티츠는 아주 단정한 자세로, 하지만 세월의 경과에 조금은 놀란듯한 눈치로 호텔을 둘러봤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호텔 매니저가 콜티츠에게 샴페인을 권했지만, 콜티츠는 사양한채 몇 분을 둘러보다 호텔을 떠났다.

전후에 파리는 교외로 확장되어 인구가 증가했다. 1968년의 68운동은 파리에서 전 세계로 확산되기도 했다. 오늘날 파리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세계적인 문화, 예술, 패션의 도시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파리의 행정구역

파리는 20개의 구와 주변 위성도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흔히 파리라고 부르는 지역은 외곽순환고속도로 안쪽의 20개 구를 말한다. 우편번호가 ‘750(00)’이면 파리 시내이다. 시내 인구는 217만여명, 외곽까지 합하면 1184만명에 달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행정개편에서 파리는 센 현의 현청소재지로 제1코뮌에 해당했고 시의 영역은 오늘날처럼 크지는 않아 파리 지하철 2호선, 6호선의 안쪽이 당시의 시 영역에 해당했다.

지금의 형태가 된 것은 1860년 시 영역 확대시행 때였다. 이후 1968년에 센 현을 폐지해 파리시는 현과 동격의 자치단체로 규정되었다가 1978년에 프랑스를 각각 레지옹(지역권)으로 나누면서 파리는 일 드 프랑스 레지옹의 수도로 속하게 되었다. 한국에 비유하자면 ‘서울특별시’라 아니라 ‘경기도 서울시’와 같은 식이다.

20개 구는 파리를 달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 파리시의 외곽도시들을 편입하여 큰 도시를 형성하는 ‘그랑파리(grand paris)’ 계획을 발표했고, 현재 외곽도시에서는 이 계획의 일환으로 지하철 15호선 등이 건설 중이며, 도시들은 정비사업 및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에 있다.


팔레 루아얄(Palais Royal)

리볼리 거리를 사이에 두고 루브르 궁전 북쪽에 인접한 건물. 원래는 루이 13세의 재상 리슐리외의 저택이었는데 그가 죽은 후 왕가에 기증되면서 ‘왕궁’을 뜻하는 팔레 루아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여기에 거주한 왕은 루이 14세뿐이었으며 그것도 유소년기의 일이다.

루이 13세가 죽은 뒤 왕비 안 도트리슈는 다섯 살이었던 루이 14세를 데리고 루브르 궁전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이후 팔레 루아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1648년에 일어난 프롱드의 난으로 왕과 모후 안은 루브르 궁전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열네 살이었던 왕은 충격을 받아 파리를 싫어하게 되고, 후일 궁정을 베르사유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팔레 루아얄에는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살았으며, 이후 그의 가계인 오를레앙가의 소유가 되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팔레 루아얄은 과거에 귀족과 부자들만 입장할 수 있었다. 왕궁이 서민의 공간으로 변모한 것은 1784년의 일이다. 자금 곤란을 겪던 당시 주인 루이 필리프 오를레앙은 정원에 회랑을 두르고, 그곳에 늘어서 있는 방들을 점포와 아파트로 임대했다. 회랑은 카페와 술집이 즐비한 상점가로 변했고, 혁명기에는 정치 토론의 중심지로서 혈기 왕성한 시민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1789년 7월 13일, 몽팡시에 거리 쪽의 회랑에 있던 카페 푸아에서 카미유 데물랭이 “제군이여, 무기를 들어라!”라는 유명 연설을 해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의 계기가 된 이야기가 특히 유명하다. 1830년에 즉위한 루이 필리프가 매춘과 도박장을 금지한 후로는 소란도 없어졌다.

현재 팔레 루아얄 건물에는 프랑스 최고 행정재판소인 국사원(Conseil D'Etat), 헌법재판소(Conseil Constitutionnel) 등이 입주해 있다. 1층 회랑에는 몇몇 상점이 있는데 골동품 가게나 헌책방 정도여서 당시의 번화함을 상상하기 어렵다. 날씨가 좋으면 주변을 산책하거나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정면 입구에 펼쳐지는 중정은 최근에 정비되었다. 1986년 다니엘 뷔랭에 의해 완성된 흑백 줄무늬 모양의 원기둥 260개, 폴 뷰리의 작품인 은행 구 모양의 분수 등 현대적인 장식물로 이루어져 있다. 18세기의 모습이 남아 있는 정원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입장 매일 07:00-23:00

코메디 프랑세즈(La Comédie Française)

팔레 루아얄의 서쪽에는 1680년 창립된 이래 17세기 고전극을 중심으로 공연을 선보이는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가 있다. 코메디프랑세즈는 프랑스에 유일한 국립극장이다. 자체 배우단을 가지고 있는 얼마 안되는 극장 중 하나이기도 하다. 프랑스 고전극의 전통을 지켜온 몰리에르의 이름을 붙여 ‘몰리에르의 집’이라고도 한다.

코메디 프랑세즈는 그 당시 유일하게 존재하는 두 파리인 연기단인, 오텔 드 게네고와 오텔 드 브르고뉴를 병합하기 위해서, 루이 14세의 칙령에 따라 1680년 8월 24일에 세워졌다. 그 당시에 공연 레파토리는 몰리에르와 장 라신의 작품 컬렉션과 피에르 코르네유, 폴 스캐롱, 장 로트로의 몇몇의 작품등이 함께 구성된다.

1793년 5월 3일 프랑스 대혁명 동안 코메디 프랑세즈는 공공 안전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문을 닫았고 배우들은 수감되었다. 그러나 1799년 5월 31 일 새 정부가 살 리슐리외 극장을 열 수 있게 하였고, 배우들이 극단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반극장들이 번영하자 점차 그 색깔을 잃어갔다가 1936년경부터 새로운 개혁을 거쳐 가며 몰리에르, 라신 등의 고전은 물론 페이도, 몽테를랑, 더 나아가서는 이오네스코 등의 현대극에도 뛰어난 무대를 낳고 있다.

오늘날의 코메디 프랑세즈는 3,000개가 넘는 작품 레파토리를 갖고 있으며 파리 시내에 세 개의 극장을 갖게 됐다. 볼테르의 심장이 현재 묻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파사주(Passage)

파사주(Passage)는 원래 ‘통로, 통행’이라는 뜻이지만, 오늘날에는 ‘유리천장으로 덮인 쇼핑공간’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회랑’을 뜻하는 ‘Galerie(걀르히)’ 라고 불리는 곳도 있다. 과거의 파리는 마차를 끄는 말들의 배설물과 쓰레기로 더러웠는데,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쇼핑할 수 있는 환경은 만들면서 오늘날의 파사주가 만들어졌다. 천장이 있어 날씨에 관계없이 쾌적하고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어 등장과 함께 환영을 받았고, 그 결과 파리 곳곳에 수많은 파사주와 걀르히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상점 형태인 백화점이 생기면서 파사주의 인기가 조금씩 시들었고 파리 전반에 도시 개혁이 일어나자 점차 사라지게 됐다. 150여개에 달했던 파리의 파사쥬가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는 30여개가 남아있다. 다행히 파리 중심지에 아름다운 파사주들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작은 상점, 서점, 갤러리, 레스토랑 등이 자리해 관광객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Galerie du Palais Royal 

루브르 박물관에서 오페라 가르니에 방향으로 나오면 코메디 프랑세즈가 나오는데, 그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다니엘 뷰랭(Daniel Buren)의 흑백 줄무늬 기둥들이 있는 안뜰과 예쁜 꽃, 나무로 가득하여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는 정원을 둘러싸고 팔레 루아얄의 갤러리가 펼쳐져 있다. 과거에 궁전으로 사용했을 만큼 화려한 중세 건물 아래에에 현대적인 안뜰과 자연 그자체인 정원을 마주하며 앤티크샵과 갤러리가 있으니 한바퀴 둘러볼 만하다.

Galerie Vivienne(1824)

갤러리 비비엔느는 가장 아름다운 파사주 중 하나이다. 입구에 유서깊은 와인바 겸 판매점인 꺄브 르그랑 피이 에 피스(Caves Legrand Filles et Fils)가 있으며, 내부에 화려한 장식과 바닥 패턴, 그리고 아름다운 쇼윈도까지 더해져 있다. 특히 겨울에는 알록달록 크리스마스 장식이 더해져 더욱더 낭만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패션 디자이너 샵이나 오래된 서점 등이 자리한다.

19세기 초, 이 지역 근방에 살고있던, 공증인협회 회장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갤러리를 짓고자 1823년에 비비엔느가 6번지에 위치해있던 Vanel de Serrant 호텔과 쁘띠샴가(rue des Petits Champs) 쪽으로 정원이 나있던 인접 주택들을 사들이고 건축가 델라노이(Francois-Jacques Delannoy)에게 갤러리 건축을 맡겼다.

갤러리 비비엔느의 pilastres(벽의 장식기둥), arcs(아치문), corniches(수평띠모양 돌출부), 이 세가지에는 ‘성공’, ‘풍요’, ‘상업’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장식돼 있다. 월계관과 종려나무-밀단은 ‘성공’을 상징하고, 옛부터 풍요를 상징했던 ‘풍요의 뿔(cornes d'abondances)을 사용했으며, 상업과 무역의 신인 메르쿠리우스(Mercure)를 통해 ’상업‘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갤러리에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 바닥의 화려한 모자이크는 이탈리아 출신 Giandomenico Facchina의 작품으로, 만국박람회에서 성공을 거둔 뒤로 파리에서 오랫동안 많은 활동을 한 인물이다. 오페라 갸르니에 내부의 모자이크도 그의 작품이다.

와인바인 Legrand filles et fils는 1880년부터 갤러리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데 350여개의 지역에서 온 3000여 종의 와인을 소장하고 있기 떄문에 와인애호가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직접 앉아서 시음해 보거나 구입할 수 있다. 또 서점 Siroux 는 1828년부터 무려 190년 가까이 운영되어 왔다.

내부에서 걀르히 콜베르(Galerie Colbert)로 연결되며 밖으로 나와서 조금 걷다보면 일식·한식 식당이 모여있는 파사쥬 슈아즐이 보인다.

Passage Choiseul(1825-27) 

바로 앞의 거리 이름을 그대로 따서 choiseul(슈아즐,슈아질,슈아젤)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파사주는 다른 파사주에 비해서 사람도 많고 분위기도 덜 부담스러운, 좀 더 서민적인 느낌을 준다. 근처에 맛있는 한인 음식점과 일식점이 많다.

파사주 슈아즐은 길이가 총 190m로 파리에서 가장 긴 파사주인데, 1층 아케이드는 상점, 레스토랑, 갤러리 등으로 사용되고 있고 2-3층은 주거지이다. 2012년에 유리천장, 파사주 입구의 캐노피 등을 리노베이션해 매우 깨끗하다.

건축가 가이스트(Johann-Friedrich Geist)는 파사주 슈아즐을 두고 “이 파사주는 파리의 모든 파사주 중에서 거리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두 집이 파사주 양쪽에서 서루 마주보는 형태로 열지어 있고, 이 두 열 사이에 유리창으로 덮인 부분이 바로 파사주이기 때문이다.

Passage des Princes(1860) 

파리에 생긴 파지막 파사주이다. 이후 오스만 남작이 도시 개혁을 단행하면서 도로를 넓고 깨끗하게 정비했기 때문에 더러운 옛 도로를 피해 만들어진 파사주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파사주 프린스는 아라베스크 양식의 심플한 벽기둥으로 돼 있는데, 기둥 간격마다 반복되는 천장구조물 덕분에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공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1866년 이 파사쥬가 AGF 생명보험회사(오늘날 알리안츠생명)로 넘어가면서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서 파사쥬를 철거하게 되는데, 다행히 건축가 Andre Georgel과 Andre Mrowiec가 그대로 다시 복원한 덕분에 장식들이 재활용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원형 돔을 장식하고 있는 장미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다.

파사주 프린스는 어린이들을 위한 천국이다. 프랑스 유명 장난감회사인  joueclub은 물론 레고 상점, 인형 가게 등이 가득하다. 다른 파사주에 비해 볼 거리가 많지 않지만, 바로 옆에 있는 파사주 파노라마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야 할 곳이기도 하다.

Passage des Panoramas(1800) 

여기서부터 파사쥬 파노라마, 파사쥬 주프르와, 파사쥬 베르도 세 개의 파사주가 마치 하나의 길처럼 쭉 연결된다.

그 중 파사주 파노라마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파사주이다. 원래 입구에 원형 돔 두개가 있었는데 그곳에 도시 풍경을 묘사한 그림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팔레 루아얄에서 몽마르트 대로까지 진입을 쉽게 해서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파사주인데, 1807년 바로 옆에 바리에테 극장(Theatre des Varietes)까지 들어서자 이 파사주 파노라마는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다. 1834년에는 Galerie Saint-Marc, Galerie des Varietes, Galerie de Feydeau et Galerie de Montmartre의 네 개의 갤러리를 추가해 매우 복잡한 교차로의 구조를 띠게 되었다.

지금은 오래된 우표나 엽서,고서적 등을 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레스토랑도 많이 있다.

Passage Jouffroy(1845-46) 

파사주 파노라마 바로 맞은편에 파사주 주프로와가 있다. 큰 인기를 얻었던 파사주 파노라마의 연장선으로 설치되었는데, 경영 책임자였던 Felix de Jouffroy-Gonsans의 이름을 따 파사주 주프로와라는 명칭이 붙었다. 1층의 상점 위로 저명인사들의 밀랍을 전시해 놓은 그래벵 뮤지엄(Musee Grevin)이 있으며, 꺾인 형태의 파사주를 따라가면 역시나 파사쥬 베르도로 연결 된다.

Passage Verdeau(1845-46)

아름다운 파사주 탐방의 마지막은 파사주 베르도이다. 이 파사주 역시 앞의 두개 파사주의 연장선 개념으로 설립되었으나, 앞의 두 파사주에 비해 오랫동안 덜 사랑받다가 지금은 고서적을 판매하는 서점과 갤러리들이 주를 이루어 아늑하고 옛스러운 분위기내는 파사쥬로 사랑받고 있다.

에펠 탑(Tour Eiffel)

프랑스의 건축가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 1832~1923)이 만든 철골 구조의 탑이다. 파리, 프랑스, 더 넓게 보면 유럽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1889년부터 1930년까지,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원래 높이 300m, 안테나 약 20m이다.

에펠 탑의 역사

에펠 탑은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독일에게 패한 치욕을 만회하고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1889년 만국박람회에 전시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특히 영국이 자랑하는 최신 건물이었던 수정궁과 세인트 판크라스 역을 의식하여 기둥간의 거리를 115m로 늘린 기계관(판크라스 역은 73m)과 300m 높이의 에펠탑을 선보였으며, 일종의 기술을 과시하는 용도였기 때문에 원래는 임시적으로 20년만 설치했다가 해체할 예정이었다. 사실 건축적인 의의는 기계관이 더 크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대중이 느끼는 시각적인 충격은 에펠탑이 더 뛰어났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엔 에펠탑만이 살아남았다.

마천루가 즐비한 오늘날에는 잘 느끼기 어렵지만 기껏해야 최대 150미터 수준의 고전적인 석조 건축물이 주류를 이루던 19세기에 등장한 300m의 타워란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인류 역사상 이토록 인간의 구조물의 고도가 갑자기 올라간 적이 없었다. 특히 철을 가지고도 고전적 건물을 모방하기 바밨던 시대에 철골로 된 당당한 위용을 드러낸 에펠탑은 마치 새로운 신 건축의 시대를 선언하는 듯 하였으며, 이는 에펠 같이 토목 분야에서 활동하던 구조 공학자들이 일반적인 건축가보다 산업시대의 새로운 재료들을 더 빠르게 활용했기에 가능했던 진보다.

 

에펠탑은 건설비가 너무 많이 들어 비용의 대부분을 에펠이 부담하고 20년간 독점권을 인정받았는데, 1년만에 투자한 손실을 만회하며 흑자로 돌아섰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원래는 20년 후에 철거될 예정이었지만, 철거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던(?) 에펠의 설득과 송신탑으로 써먹자고 한 군부 고위층의 결정으로 살아남게 되었고, 어느덧 파리 시는 물론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1914년 1차세계대전 당시 통신 중계탑으로 잠시 쓰이다가, 1925년 첫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고, 이후 TV방송용으로도 쓰여왔다. 21세기에도 계속 방송중계탑으로서 역할을 했는데, 점차 케이블선을 이용한 디지털 방송이 확대됨에 따라 향후 폐지되고 기념탑으로만 남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에펠탑에 대한 평가

자유의 여신상과 더불어 에펠의 2대 걸작으로 꼽히지만, 만들 당시엔 온갖 욕이라는 욕은 다 먹은 건물이다. 대표적으로 “저거 무너지면 사람 다 죽는다”는 일반인들의 공포, 그리고 “뼈대만 앙상한 저딴 건물이 파리에 있는 걸 참을 수 없다”는 예술가들의 항의가 있었다. 덤으로 “비쩍 마른 피라미드”라는 혹평과, “예술의 도시인 파리의 미관을 망치는 흉물”이란 소리도 들었다. 실제로 파리에 가서 보면 흉물이란 소리가 나온 것이 이해가 갈 정도로 다른 건물과 이질적인 분위기이다. 주변 건물은 모두 육중한 석조 건물 양식인데, 에펠 탑은 선으로 이루어진 철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에펠탑의 조명이 다 꺼진 새벽 3시에 에펠탑을 가까이서 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평소엔 웅장하던 에펠탑도 이 시간대에는 숨막힐듯 위압적이고 흉물스럽다고 한다.

에펠 탑 건설이 시작되자 꼴도 보기 싫다며 정말로 파리를 떠난 예술가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혐에펠탑 인사는 대문호인 모파상이었는데, 얼마나 싫어했는지 에펠 탑이 안 보이는 방향으로 창을 낸 집에서 살 정도였고, 에펠 탑에 있는 음식점에서 자주 식사를 하는 그에게 이유를 묻자 “파리에서 에펠탑이 안 보이는 데가 이곳 뿐이라서.”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에펠탑 근처의 몽소 공원에 세워진 모파상의 동상도 에펠탑과 등을 돌린 방향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 에펠 탑을 파리의 흉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시 시대가 석조 건축에서 철과 유리, 콘크리트 건축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는 것도 고려해야 하며, 결국 기차역 등 많은 거대 시설들은 에펠 탑과 같은 철골 구조를 사용하여 지어졌다.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파리의 야경은 간접 조명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아름답고 운치있게 보인다. 에펠 탑도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매시각 정시가 되면 에펠 탑에 장식된 수많은 전구들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트리에 붙은 그 전구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는 느낌. 이것을 보면 다들 감탄을 하곤 한다. 예전엔 10분 정도 불빛이 반짝였는데, 지금은 줄어들어서 5분 정도 반짝거리곤 꺼진다.

에펠 자신은 이 탑이 자신보다 더 유명해져서 질투한다고 했지만, 토머스 에디슨도 이걸 보고 신의 기술이라 극찬했을 정도의 건축물이다. 참고로 토머스 에디슨은 에펠탑에 설치될 엘리베이터를 설계했다. 겨우 20년 간 쓰고 해체할 건물을 짓기 위해 수천 장의 도안을 만들 만큼 정성을 쏟았으며, 현재의 기준으로 봐도 그 정교함은 수준급이라 한다.

에펠탑의 구조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층까지 가는 엘리베이터는 옛날의 유압식 엘리베이터. 따라서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옆을 보면 거대한 통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3층으로 가는 것은 현대식이다. 특이하게도 엘리베이터가 2층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철골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유가 있는데, 300m 수준의 높은 구조물은 풍압의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에 바람을 통과시키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러한 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지만, 토목쪽에서 경험이 많은 구스타프 에펠은 경험적으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심한 날에는 탑이 흔들리기 떄문에 안전상의 문제로 3층은 출입을 통제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대부분의 구조물이 그렇듯이 계절에 따라 미세하게 이완과 수축을 한다.

사실 기술 실증용 20년짜리 가건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까이서 보면 거친 구조물이 있을 뿐, 섬세하다거나 화려한 장식은 없다. 단지 압도적으로 큰 크기와 복잡한 구조물만 있을 뿐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펠탑을 실제로 가까이에서 보면 1층 전망대 아래 부분(아치 위)에 탑의 4면을 따라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 공학자 및 수학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각 면에 18명씩 총 72명이 새겨져 있으며, 이공계 학생들이라면 수업중 한번씩 들어봤을 만한 유명한 학자들의 이름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어 프랑스 국력의 위엄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다. 명단은 에펠 본인이 직접 선정하였으며, 이러한 이름을 새긴 이유는 예술가들이 에펠탑 건설에 반대하는 것을 우려하여 ’과학에 대한 관심 촉구‘의 의미에서 작업을 결심했다고 한다. 각인된 이름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20세기 초반에 페인트로 덮었다가 87년도에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에 온 히틀러는 이 앞에서 알베르트 슈페어와 함께 정복(!) 기념 사진을 찍었다. 히틀러는 소싯적에 파리에서 좀 있어서 파리를 돌아다니며 측근들에게 파리 여기저기를 설명해주기 좋아했다고. 땅밟기 보불전쟁 때부터 이어온 유구한 전통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오기 전에 레지스탕스들이 엘리베이터의 전력을 끊어놔서 올라가지는 못했다.

에펠 탑에 관한 여담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공군이었던 빌 오버스트릿 중위가 Bf109G를 추격하던 도중 에펠 탑 아치 밑을 통과해서 지나갔는데, 당시 Bf109G의 조종사는 오버스트릿 중위의 베를린 특급을 유인하여 대공포로 격추시키려고 했다. 오버스트릿 중위는 이 대담한 행위 뒤에도 유유히 적진을 빠져나갔고 파리 시민들은 그의 묘기를 지켜보면서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이 일로 오버스트릿 중위는 2009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파리 시내 여느 곳처럼 에펠 탑 내부와 그 주변에서도 에펠 탑 모형을 팔고 있다. 크기와 모양, 색깔이 매우 다양한데, 똑같은 것임에도 파리 내에서 그 값이 20배 차이까지 난다고 한다. 주요 관광지 주변에서는 4cm 크기의 모형이 한 개에 최고 1유로 전후이고, 외곽 지역이나 센 강 주변의 떨이 상점에서는 1유로에 12개를 팔기도 한다. 비싸게 파는 상인에게 안 사겠다는 표현을 하는 순간 미친 듯이 가격을 깎아준다.

 

한편 일본에서는 에펠 탑을 모방해 도쿄타워를 만들었는데, 에펠 탑보다 적은 양의 철골이 사용됐다. 라스베이거스에는 1999년에 에펠 탑 절반 크기(165m)로 만든 레플리카가 있다. 패리스 호텔의 부속 건물이다.

프랑스에서 에펠탑은 프랑스에서 투신자살의 명소로 유명하다. 세운지 9년 뒤에 최초로 자살한 사람이 나왔다. 이를 본 조지 버나드 쇼는 영국이라면 개방하자마자 자살한 사람이 나왔을 것이라며 프랑스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에펠탑은 사기꾼에 의해 두 번이나 팔려나갔다. 빅토르 루스티히가 그 주인공이다. 파리의 사업가들을 불러놓고 에펠탑의 유지비가 많이 나간다며 에펠탑을 철거하면서 나오는 고품질 철채를 팔겠다고 속였는데, 첫 번째 사람은 속았으나 부끄러운 나머지 신고하지 않았고, 두 번째 사람은 속은 것을 알자마자 바로 신고했다고한다. 루스티히는 체포되진 않았지만 프랑스의 모든 사람이 이 사기방식을 알게 되는 바람에 사기는 이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심리학 용어 중에 에펠 탑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특정 대상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없어도, 대상이 수용체에게 많이 노출되고 그 대상과 오랫동안 함께 지낼수록 그 대상에 대해 호감을 지니게 된다는 이론이다. 처음에는 파리 시민들에게 무수한 욕과 비판을 받다가, 시민들과 2차 세계대전도 겪고 파리의 역사와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지내다 어느새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된 에펠 탑의 상황에 빗대어 표현한 용어이다.

 

에펠 탑은 현대식 대관람차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만국박람회 때 거대한 탑으로 에펠 탑을 떡하니 세운 프랑스를 보고 자존심 상한 미국이 우린 프랑스 녀석들보다 더 크고 높고 멋있는 탑을 만들자!”라는 생각에 건축가 페리스에게 새로운 건축물을 의뢰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현재의 대관람차였다. 1893년 시카고 엑스포 때 대관람차가 처음 등장했는데 전문가들에게는 에펠 탑보다 높이도 낮고 작다거나 건축미가 없다는 둥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엑스포를 찾은 방문객들은 매우 신기해하했고 단숨에 대관람차는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 이후 놀이기구로서의 잠재력이 확인돼 지금은 전 세계의 놀이동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건축물이 되었다. 그래서 대관람차를 영어로 페리스 휠(Ferris Wheel)’이라 한다.

에펠탑이 건축되었을 당시를 본 인물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산 인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산 인물이기도 한 잔 루이즈 칼망이다. 1875221일생에 199784일에 사망한 여자로, 정확하게 122164일을 살았다. 한창 건축중이던 1888년도에 직접 구경을 갔었다고한다. 또한, 이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를 살아생전 보았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사 과정에서 당시 고층 공사에 필요한 장비가 전무했던 통에 고층에서도 연기를 하는 곡예단원들을 고용하여, 지금도 철골에는 곡예단원들이 공사 중 고열로 달라붙어버린 피부조각이 있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라데팡스(La Défense)

라데팡스는 파리의 중심가의 루브르 박물관과 개선문을 중심축으로 도심에서 8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센 강변에 조성된 파리의 부도심이다. 단 행정 구역 상으로는 파리가 아닌 쿠르브부아(Courbevoie), 퓌토(Puteaux),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 속한다.

프랑스의 대통령인 미테랑과 파리 당국 등 자치단체로 구성된 라데팡스 개발위원회가 1958년부터 30여년에 걸친 장기 개발구상을 마련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는 대부분의 공사를 마무리했다. 라데팡스는 46만평의 땅 위에 첨단업무, 상업, 판매, 주거시설이 고층·고밀도로 들어섰고 고속도로, 지하철, 일반도로 등은 지하로 배치해 도심의 혼잡이 거의 없다. 지상은 완전히 도보 전용이다. 구도심에서 볼 수 없는 최신식 고층빌딩들로 가득 차 있고 프랑스의 현대적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유명한 건축물로 그랑다르슈(Grande Arche)가 있다. ‘인류의 영광을 위한 현대적 개선문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덴마크 건축가에 의해 탄생한 개선문으로 흰 대리석, 반투명 유리, 철로 지어진 이 건축물은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루브르부터 파리를 직선으로 잇는 역사적 축의 일환으로 심플하고 강인한 디자인은 미래를 향해 열린 창, 역사의 새로운 바람을 의미한다.

라데팡스의 예술작품들

라데팡스는 이밖에도 수많은 현대 공공예술픔으로 가득 차 있다.

<파리의 수호자>는 독일에 대항하던 1870년 전쟁 시절, 파리를 지키던 군인의 영광을 기리는 조각품이다. ‘파리라는 도시를 나라를 지키는 헌병대 제복을 입은 여인으로 상징화하였는데, 여성을 수호하는 군인은 파리 시민의 영웅적 저항을 대변한다. 프랑스어로 수호를 의미하는 라데팡스지역의 이름 또한 이 작품에서 기인되었을 만큼 의미깊은 동상이다.

<붉은 거미>는 움직이는 조각인 모빌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으로 15m 높이, 75톤 철강으로 구성된 추상 미술이다.

<모자이크 분수>는 라데팡스 광장 심장부에 위치한 분수대로 베니스에서 가공한 모자이크 타일이 깔린 것이 특징이다. 이스라엘 아티스트 야콥 아감의 작품으로 66개의 물 줄기가 분수대에서 퍼져 나온다. 타일의 색감, 빛의 반동, 물 줄기의 리듬이 분수대가 일렁인다는 환영을 준다.

<환상의 인물>은 스페인 화가, 조각가, 도예가, 야수파, 입체주의 아티스트 등 여러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호안 미로의 조각품이다. 기괴하고 거대한 한 쌍의 인물이 세 가지 역동적인 색으로 표현되어 미로가 편애하는 색채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쇼핑몰 Quatre-temps(꺄뜨르떵) 입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 거대 조각품은 그 독특함만으로 일상의 순응하는 태도를 조롱하고 있다.

<그랑 토스타>(위대한 토스카나인)는 프랑스 에너지기업 아레바(AREVA)의 건물 아래 위치한 청동상으로, 고대 조각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이다. 얼굴와 팔이 없고 훼손된 듯한 모습이 인간의 본성과 불안정함을 내포하고 있다.

<엄지손가락>은 작가가 자신의 실제 손가락을 재현한 세자르의 걸작 엄지 손가락을 무려 12m 높이, 18톤 무게로 재탄생시킨 복제본이다. 기념비인 오벨리스크와 같이 거대한 손가락상은 Quatre-temps(꺄뜨르떵) 맞은 편 ‘CNIT’쪽에 자리해 있다.

<>은 키네틱 아트 작가이자 그리스 조각가인 타키스Takis(Panayotis Vassilakis)의 첫 번째 공공예술 작품이다. 무작위로 빛나는 49개의 조형물이 라데팡스 광장의 물 위를 비춘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에 반응하며 빛과 움직임의 변화를 예술 작품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환각>은 미니멀리스트이자 키네틱 아트를 대변하던 프랑스 작가 모를레의 작품이다. 메탈 재질의 평행 육면체가 마치 땅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느낌을 주며, 동시에 프랑스 국립 현대 예술 협회 건물 위를 가로지른다다.

<베를린 장벽의 파편>은 경매에 올라온 베를린 장벽의 250개 파편 중 하나이다. 현재는 라데팡스에서 20세기 문화와 역사의 증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라데팡스에는 조각가이자 동아대학교 교수인 임동락의 작품도 있다. <성장>이라는 이 작품은 2006년 한불수교 12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그랑다르슈에서 전시되었다가 임 작가가 기증해 영구 설치됐다. 알과 새싹을 스테인리스 스틸과 브론즈로 혓앙화한 조형물이다.

뷔트 쇼몽 공원(Parc des Buttes-Chaumont)

프랑스 파리 북동부 지역인 19구에 위치하고 있는 녹지 공원이다.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뷔트(Butte)란 단어를 공원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이곳은 파리에 있는 규모가 큰 공원 중 하나이다.

뷔트 쇼몽 공원은 885년 파리를 침공한 노르망디 해적들을 물리친 곳이며, 중세시대에는 교수대가 세워져 공포를 조성한 곳이고, 나폴레옹 1세 마지막 집권기인 1814년에는 희망을 잃은 국민군이 항복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연합군에게 항쟁을 한 곳이기도 하다.

19세기에는 채석장과 쓰레기 처리장이 자리해 어수선하고 악취가 풍기는 곳이었는데, 1862년경부터 파리의 녹지를 확충하려는 나폴레옹 3(Napoléon III, 1808~1873)의 뜻에 따라 공원으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오스만 남작이 주도하였고 도시 계획으로 이름이 높았던 프랑스 건축가 아돌프 알팡이 구체적인 설계를 맡았다. 4년여의 공사 끝에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축제 때 개장한 새로운 모습은 지금과 같이 아름다웠다. 중앙 호수에는 30m 높이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무당의 집(Le temple de Sibylle)’이 걸려 있고, ‘자살자들의 다리(Le pont des Suicidés)’에 버금가는 63m 길이의 구름다리가 등장했으며, 옛 채석장 입구는 인조 동굴 및 폭포로 둔갑했다. 회전목마와 뱃놀이, 조랑말을 타는 곳도 있어서 연인끼리 또는 가족끼리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호수, 벤치, 가로등, 나무, 넓은 잔디밭 언덕, 산책로 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이 공원은 오늘날 시민들의 훌륭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바위 꼭대기에 지어진 고대 로마 신전 양식을 본 딴 전망대도 인기가 많다. 영화제를 비롯한 다양한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입장 매일 07:00-20:00

생 마르탱 운하(Canal Saint-Martin)

프랑스 파리 10구를 가로지르는 운하이다. 총 길이 4.5km로 북쪽의 우르크 운하(Canal de l'Ourcq)와 센 강(River Seine)을 잇고 있다. 1802년 나폴레옹 1(Napoleon I, 1769~1821)에 의해 건립이 추진되어 이십년이 넘는 대공사 끝에 1825년 완공됐다. 파리 시민들에게 안전하고 깨끗한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단거리 교통수단 혹은 와인이나 식품, 건축 자재 등의 물건을 나르는 수송로로도 사용되었다. 1960년대부터 고속도로 개통 등으로 수송로의 기능은 거의 잃었으며 오늘날에는 낚싯배나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많이 지나다닌다. 수위차가 20m 가 넘는 운하이기 때문에 여러 개의 수문이 설치되어 배가 통과할 때마다 수위를 조절해 주고 있다. 수문이 닫힌 후 마치 폭포와 같이 물이 쏟아져 내리는 장관이 펼쳐져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운하를 따라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와 철제 다리 등은 분위기를 더욱 운치 있게 만든다.

오페라 가르니에(Palais Garnier)

오페라 가르니에(팔레 가르니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미국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과 함께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영업 매일 10:00-16:30

오페라 가르니에의 등장 배경

1858114, 나폴레옹 3세와 황비가 르 펠레티에 극장에서 오페라 관람을 마치고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세 발의 폭탄이 터지면서 말이 피를 흘리면서 길바닥에 나뒹굴었고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이탈리아에서 온 혁명주의자 오르시니의 암살 기도였다. 사실 르 펠레티에 극장은 비좁아서 왕족이 출입하기에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이후 나폴레옹 3세는 파리 한복판에 세계 최대 규모의 오페라 극장을 새로 짓기로 하고 황제와 귀족을 위한 전용 출입문을 만들도록 했다. 18601229일 신축 오페라 극장 설계 공모작 심사 결과 171:1의 경쟁률을 뚫고 35세의 무명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Charles Garnier, 1825~51)의 작품이 만장일치로 선정됐다. 가르니에의 설계안은 빅토르 루이(Victor Louis)1870년에 지은 보르도 그랑 테아트르와 17·18세기 이탈리아·프랑스의 별장 저택 양식에서 영감을 받았다. 팔레 가르니에는 제2제정 시대에 지어진 건물 중 가장 많은 건축비가 소요된 건물로 무려 3300만 프랑이 들었다.

팔레 가르니에는 나폴레옹 3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백작이 진행한 파리 시가지 재건 계획의 일부였다. 1858년 하우스만은 나폴레옹의 3세의 명령으로 파리 한복판의 12000넓이의 대지를 말끔하게 정리한다. 극장 앞은 탁트인 전망을 확보하기 위해 대로를 냈다.

 

공사 진행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1896년 샹들리에를 올리다가 평형추 하나가 떨어져 인부 1명이 사망했다. 콘크리트 기초 공사 도중 지하수가 터져 호수를 방불케 했다. 펌프로 지하수를 빼내는 데만 8개월이 걸렸다.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에도 지하 호수가 등장한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보불 전쟁이 발발해 프랑스 제2 제정과 파리 코뮌이 차례로 몰락했다. 이 시기에도 간헐적으로 공사가 재개되었으나 오페라 하우스의 건축 자체가 취소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파리 코뮌이 막을 내린 다음 공사가 재개됐다. 18731029일 살 르 펠레티에 화재로 인해 극장을 조속히 완공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8743250명 이상의 인부들이 공사에 투입됐다. 18741017일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텅빈 극장에 모였다. 음향 테스트를 위해서였다. 121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또 한차례의 음향 테스트를 했다. 오페라단 관계자, 기자, 초대 손님 등으로 객석은 꽉 찼다. 발레 시연회는 1212일 열렸다. 그로부터 6일 후 유명한 샹들리에가 처음으로 환하게 불을 밝혔다. 1230일 가르니에가 열쇠 증정식을 했다. 1875년 샤를 뉘테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 건물에는 2,531개의 출입문, 7,593개의 열쇠가 있었다고 한다.

최초의 전막 오페라는 마이어베어의 <유대인>

개관 프로그램을 놓고 벌어진 논쟁 때문에 지휘자 델드베(Deldevez)는 개관 공연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천문학적인 개런티를 우려낼 요량으로 막판까지 실랑이를 벌였던 미국 출신의 오페라 배우 크리스틴 닐슨의 막무가내식 행동 때문에 문제는 더욱 커졌다. 결국 계약 위반으로 출연은 취소됐다. 14일 리허설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열렸고 부랴부랴 닐슨의 이름을 뺀 프로그램을 인쇄하느라 바빴다.

187515일 프랑스는 물론 런던 시장 등 외국에서 온 명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개관 공연이 열렸다. 개관일에 처음 공개된 장엄한 계단은 에두아르 데타이유의 그림 <새 오페라의 등장(Inauguration du Nouvel Opera)>에 잘 나타나있다. 전막 오페라로 처음 상연된 작품은 개관 3일 후인 18일에 무대에 오른 마이어베어의유태인’. 3주간 계속 상연됐다. 1881년 전기 조명이 도입됐으며 6년 오페라 극장 지하에 새로운 발전기를 도입했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백주년 기념으로 사회당 정부가 건축한 오페라 바스티유의 개관 이후 팔레 가르니에라 부르고 있다.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Charles Garnier, 182598)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서다. 오페라 바스티유와 더불어 파리 국립 오페라 소속이지만 주로 발레 무대로 사용된다. 파리 국립 오페라단이 바스티유로 옮겨 가긴 했지만 많은 관광객들은 파리 오페라하면 팔레 가르니에를 떠올린다.

객석수는 1,979석으로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2,800)은 물론 빈슈타츠오퍼(2,276)보다 적고, 무대와 객석은 건물 전체의 5분의1에 불과하다. 건물과 로비·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화가 13, 조각가 89명이 동원되었고 객석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무게만도 8톤이다.

스크리브 거리(Rue Scribe)와 맞닿아 있는 명예의 전당(Pavillion d'Honneur)은 국왕이나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이 로열 박스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였는데 현재는 작은 도서관과 오페라 소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파리 오페라 모형이 2개가 있다. 그중 하나는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만든 것이다.

건물 정면

팔레 가르니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받지 않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건물 자체가 오래돼 여러 차례 개보수 공사를 했다. 1969년 전시 설비공사를 했고, 78년에는 Foyer de Dance를 발레단의 리허설 공간으로 개조했다. 1994년 무대 기계를 최신 설비로 교체했고 건물 기초 보강 공사도 했다. 가장 큰 규모의 개보수 공사는 2006년에 끝났다.

극장 정면의 외벽은 아프리카와 유럽 각국에서 실어온 10종류의 대리석으로 마감했다. 파사드 기둥 사이에는 모차르트, 베토벤, 알레비, 키노, 스크리브, 스폰티니, 마이어베어 등 작곡가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 위에는 치마로사, 하이든, 페르골레시, 바흐의 두상으로 원형 장식을 곁들였다.

<오페라의 유령>의 실제 무대

1896년 이곳에서 샹들리에가 떨어져 여성 관객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가스통 르루가 여기에 힌트를 얻어 추리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쓴 것이다. 대형 크리스탈 샹들리에의 제작비는 금화 3만 프랑. 요즘 시세로 치면 5억원쯤 된다.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는 샹들리에 디자인에 많은 신경을 썼다. 영롱한 불빛을 내며 극장 안을 환하게 밝혀주는 샹들리에 없이는 극장이 완성될 수 없다고 믿었다. 시인 보들레르는 극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볼거리로 샹들리에를 꼽았다. 하지만 샹들리에 때문에 4층 발코니석에서는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고 천장 벽화도 일부 가려졌다. 가끔씩 발생하는 추락사고 때문에 1층 중앙에 앉은 관객들은 공연 내내 불안에 떨기도 했다. 샹들리에를 철거하고 천장 조명으로 대체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결국 무산됐다. 오페라 극장은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9세기말 팔레 가르니에는 상근 직원수만 1,500명이 넘었다. 앞마당 지하에는 무대에 출연할 백마를 수용하기 위한 자체 마구간까지 갖추고 있었다. 히틀러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극찬했지만 베르디는 대형 백화점이라고 비꼬았다. 드뷔시는 사실을 모르는 행인들에게 오페라하우스는 여전히 기차역처럼 보이며 내부는 터키탕의 중앙 로비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매춘굴’, ‘악마의 소굴’, ‘천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페라하우스는 정쟁과 파벌의 온상이었다. 프리마 돈나에서 무대 스태프까지 오페라 하우스는 음모와 소문에 의해 좌우됐으며 자리 다툼과 자기 방어, 상호 경쟁과 비방이 난무했다. ‘오페라의 유령파리 오페라 극장의 유령이 정확한 번역이다. 1909923일부터 190118일까지 연재된 추리 소설이다. 1925년에 처음 영화화됐으며 86년 앤드루 로이드 웨버에 의해 뮤지컬로 만들어져 널리 알려졌다.

17층짜리 건물인데 이 가운데 7층이 무대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건물 아래에 실제로 호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호수는 뮤지컬오페라의 유령에서도 등장한다. 무대 위의 무게에 따라 물의 수위가 오르내리며 무게 중심을 조절한다.

마르크 샤갈의 천장 벽화와 대형 샹들리에

천장 벽화는 마르크 샤갈이 77세인 1964년에 새로 그린 것이다. 1960년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작품을 위촉해 1964923일 처음 공개됐다. 14명의 작곡가와 이들이 작곡한 발레, 오페라를 그려 넣었는데 메인 패널에는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아당의 <지젤>을 그렸고 중앙 패널에는 글룩의 <오르페오와 유리디체>, 비제의 <카르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베토벤의 <피델리오> 등을 묘사했다. 샤갈은 자신의 이 천장화를 꽃다발 속의 거울이라고 불렀고, 천장화가 공개된 자리에 참석한 뉴욕 타임스 파리 특파원은 가르니에 궁전의 최고의 좌석은 이제 천장에 있다라는 기사를 송고했다.

 

사실 천장화 작가가 샤갈로 결정되었을 때 시끄러운 논쟁이 있었다. 프랑스의 예술가도 많은데, 어떻게 파리의 보물에 어떻게 러시아계 유대인이 그림을 그려넣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한켠에서는 이 고풍창연한 극장에 어떻게 현대 예술가 샤갈의 잠꼬대 같은 낙서 그림을 장식으로 쓰냐는 비판도 일었다. 그럼에도 샤갈은 총 200kg의 페인트를 쓰며 꿋꿋하게 벽화를 완성해 냈다.

샤갈의 천장 벽화 패널을 벗겨내면 그 안에는 개관 당시 그려져 있던 200크기의 천장 벽화가 숨어 있다. 르네부(Eugene Lenepveu)가 그린 <뮤즈신과 음악의 여신에게 둘러싸인 미의 여신의 승리(The Triump of Beauty, Charmed By Music, amidst the Muses and the Hours of the Day and Night)>에는 무려 63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 그림으로 화가는 금화 5만 프랑을 받았다.

무대막

무대막은 원래 쓰이던 것 가운데 두 개만 남아있다. 하나는 프로세니엄을 위한 것으로 오귀스트 알프레드 뤼베, 필립 샤프롱이 샤를 가르니에의 지시대로 그렸다. 무대막 위에는 루이 14세의 문장과 아카데미 로열 드 뮈지크의 창설 연도 ‘ANNO 1669’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로비는 중간 휴식 때 관객들이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이다. 2004년에 복원한 로비는 고전적인 성()의 갤러리(전시장)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거울과 창문으로 공간감을 더욱 강조했다. 폴 보드리(Paul Baudry)의 천장 벽화는 음악사에 나오는 주제들을 묘사하고 있다. 300크기의 천장 벽화로 보드리는 금화 14만 프랑을 받았다. 이 그림에서 가장 돋보이는 주제는 현악기 리라(lyre)인데 리라 모양의 장식은 기둥 머리와 난방기의 격자, 출입문의 손잡이에서 볼 수 있다.

오스만 거리(Boulevard Haussmann)

오스만 거리에는 오페라 하우스 뒤편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대형 상가들이 밀집되어 있다. 유럽에서 최초로 대형 상업 센터가 형성된 역사적인 거리인 이곳은 현재도 프랑스 최고의 백화점들이 몰려 있다. 매년 외국 관광객들과 파리 시민 1억 명 이상이 찾는다는 이 거리의 인도에는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라파예트 백화점(Galeries Lafayette)

오스만 거리에서 쌍벽을 이루는 경쟁자는 갈르리 라파예트(Galeries Lafayette)와 쁘렝땅(Printemps) 백화점이다. 오스만 거리에 사람들을 몰리게 만드는 이 대형 백화점들은 파리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포인트 중 하나이다. 근대에 만들어진 이 백화점들은 건축적 가치만 해도 프랑스 건축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기념물들이다. 고풍스럽게 보이는 외관 속에 백화점의 현대적인 상품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이다.

걀르히 라파예트는 1895년에 문을 열었다. 1893년 테오필 바드르와 그의 사촌인 알폰스 칸이 작은 옷가게를 파리의 라파예트 가에 여는데, 3년 뒤 옷가게가 회사로 성장하면서 라파예트가에 있던 한 건물을 구입하게 된다. 이에 테오필은 조르헤 쉐단과 그의 수제자던 페르디난 샤에게 건물의 건축 디자인을 맡겼고 유리와 철제로 된 위의 돔형과 계단부분은 1912년이 돼서야 완공되었다. 이곳이 훗날 10층짜리 본점이 되었다. 내부의 웅장한 중앙 홀과 그 위의 높은 철제 유리 돔, 황금빛 조명으로 장식된 우아한 발코니가 눈을 자극할 정도로 눈부시고 화려하다. 유명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자신들의 명성을 걸고 리모델링한 백화점 내부는 작은 궁궐과 오페라 하우스 객석이 혼합된 듯한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영업 월~토 09:30-20:30

쁘렝땅 백화점(Au Printemps)

쁘렝땅 백화점은 프랑스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수많은 지점을 가지고 있는 쁘렝땅 백화점의 본사이다. 우리나라에도 1988년 동아백화점이 서울 중구에 지점을 냈지만 1997년 영업부진으로 폐업했다.

파리 쁘렝땅 백화점은 1860년대에 시작되어 1883년 프랑스 건축가 폴 세딜의 손을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백화점 정면 상층에 조각된 사계절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조각들은 신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로 알려진 앙리 샤퓌의 작품이다. 20세기 들어 다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의 확장 및 보수 작업이 있었으나 화재로 폐허가 되었고, 1920년경 백화점 내부가 새롭게 지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아름답고 화려한 둥근 채색유리 천장은 2차 대전 당시 폭격을 피하기 위해 분해되어 따로 보관되기도 했다. 1975년 백화점 정면의 사계 조각과 둥근 채색유리 천장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수많은 대형 매장이 들어서 있는 이 백화점에서는 매주 패션쇼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11년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글로벌 2000대 기업 명단에서 백화점 부문 전 세계 1위로 선정된 자타공인 최고의 백화점이다.

특히 옥상의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파리의 전경이 멋있으니 옥상 전망대 델리씨유(deli-cieux)에 앉아 커피 한 잔과 함께 파리 시내를 감상하는 것도 좋다. 7층에 위치한 전망대는 무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쇼핑에 지친 몸을 휴식하는 곳. 최고의 명품 브랜드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내부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한국인 안내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쇼핑할 수 있다.

영업 월·화·수금 09:35-20:00, 목 09:35-20:45 팁 사전에 할인쿠폰 출력 필요

마들렌 교회(L'église de La Madeleine)

콩코드 광장을 사이에 두고 국회의사당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이다. 부르봉 왕조 말기인 1764년부터 건설을 시작해 프랑스 대혁명으로 중단됐다가, 나폴레옹이 이 건물을 프랑스군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완공된 1842년에는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라 루이 18세가 성녀 마들렌을 모시는 카톨릭 성당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때문에 다른 교회들과 달리 종탑도 없고 십자가도 없다.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모방했다.

정면 위쪽에는 <최후의 심판>조각이 새겨져 있다. 내부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 승천상, 그리스도 세례상을 비롯한 조각상들과 1849년에 제작된 파이프오르간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오르간은 1923년 보수된 것인데, 가브리엘 포레(Gabriel Urbain Faure)<레퀴엠>을 처음으로 연주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입장 매일 09:30-19:00

시테 섬(Île de la Cité)

센 강에 있는 두 개의 자연 섬 가운데 하나로 행정 구역상으로는 파리 1구와 파리 4구에 속한다. 역사적으로는 파리의 종교적·세속적 권위의 소재지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센 강에 있는 하중도 가운데 시테 섬과 생루이 섬은 자연 섬이며 시뉴 섬은 인공 섬이다. ‘시테라는 섬 이름은 프랑스어로 도시를 뜻하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이 곳에 파리 시 족인 루테시아가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시테 섬은 파리의 발상지로 여겨지며 섬 안에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생 샤펠 성당이 있다. 18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곳에는 주택 단지와 상업 단지 밖에 없었지만 현재는 사법부 청사와 병원, 파리 경찰청 청사가 들어서 있다. 섬 최서단과 최북단에는 주택 단지가 들어서 있는데 이 곳은 16세기 수도원이 들어설 터로 선정되었다가 건설이 보류된 곳이었다.

퐁 네프(Pont Neuf)

16세기에는 센 강에 단 두 개의 다리만이 있었는데, 1578년 앙리 3세가 교통 혼잡을 해소하기 위해 세 번째 다리를 지으라는 명을 내렸다. 그가 임명한 설계자들은 바티스트 뒤 세르소와 피에르 데 이예였으며, 그들이 기욤 마르샹이 설계했던 이전 디자인을 이용했다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작업은 느리게 진척되었고, 파리에서 최초로 돌로 건축된 이 다리가 완성된 것은 1607년에 이르러서였다. 앙리 4세가 개통식을 거행하였으며, 이 다리를 퐁네프(새로운 다리)라 이름 지었다. 퐁 네프는 파리에서 가장 긴 다리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다리로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퐁 네프는 시테 섬을 통해 맞은편으로 이어지며 일곱 개의 아치로 된 부분과 다섯 개의 아치로 된 부분의 독립된 두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부분은 시테 섬의 파크 베르-갈랑트에서 서로 만난다. 베르-갈랑트에는 베르 갈랑’(‘기운찬 바람둥이라는 뜻)이라는 별명을 지녔던 앙리 4세의 말 탄 모습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었다가 1818년 다시 복제품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 새로운 동상은 녹인 나폴레옹 동상 두 개에서 나온 청동으로 만든 것이었다.

길이 232m, 너비 22m의 퐁 네프는 위에 건물이 서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당시로는 흔치 않은 다리였고, 말이 끄는 차량으로부터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해 보도가 넓었다. 이로 인해 퐁 네프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고, 그림, 문학,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면서 세월이 흐르며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한 랜드 마크가 되었다.

1994년 퐁 네프는 대규모 보수 작업에 들어갔으며, 이는 다리 완공 40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에 맞춰 마무리되었다. 수리되는 동안 이 다리는 1985년 예술가 크리스토에 의해 포장되었는데, 다리 전체가 나일론 천으로 몇 겹 덮여 있었다.

퐁네프의 연인들과 퐁네프

퐁네프는 우리 세대에게는 퐁네프의 연인들(Les Amants du Pont Neuf)’ 이라는 영화로 먼저 알려졌다. 이 영화는 퐁네프에서 만난 사랑은 꼭 이루어진다.’는 구전을 모티브로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실제 촬영할 때 퐁네프에서는 잠깐만 촬영하고, 대부분의 장면은 세트를 제작해서 촬영했다고 한다.

퐁네프의 ‘pont’다리’, ‘neuf’새롭다라는 뜻이다. 중세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오랜 기간 폐쇄되어 있었고 1453년에야 잉글랜드가 물러나 비로소 새 국왕을 맞게 되었는데, 이때 파리가 프랑스의 수도가 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일자리와 부를 찾아 몰려들었다. 1589년에 이르자 파리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었고 좁은 도로들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해 도시교통이 정체를 빚는데, 때문에 파리에는 새로운 다리가 절실하게 필요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당시의 국왕 앙리 4세가 권력을 잡고 공사를 명령한 것이 퐁네프이다.

퐁네프는 센강에 놓인 최초의 석조다리로, 당대 공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가장 오래된 다리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최신공법으로 만들어져 파리의 교통을 해소한 22m 너비를 가진 대단한 다리였다.

 

퐁네프를 살펴보면 일곱 개의 아치와 다섯 개의 아치로 된 부분이 시테섬의 베르-갈랑트 스퀘어(Square Vert-Galant)에서 서로 만난다. Vert-Galant기운찬 바람둥이라는 뜻으로, 앙리 4세를 뜻한다. 아치의 폭은 19m나 되었다. 당시 목조다리 위에는 흔히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퐁네프는 건물이 서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neuf’이고, 최초의 석조 다리였기에 또 ‘neuf’가 붙을 만하다. 또한 다리는 보도와 차도를 분리했는데 말이 끄는 마차로부터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해 보도를 넓게 조성했다.

공사과정을 살펴보면, 무거운 돌다리인 만큼 그 기초를 더 깊이 놓아야 해서 강바닥에 바로 기초를 놓았다. 로마에서는 다리를 놓을 때 기초를 놓기 위해 물을 막는 토목공사를 먼저 했지만, 당시 파리에서는 여름이면 센강의 물이 말랐기 때문에 이때 기초공사를 했다. 그러나 공사를 할 수 있는 기간이 여름뿐이었기 때문에 공기가 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퐁네프의 재료인 석회석은 파리 밖 채석장이 아니라 파리 지반 밑에 있는 기반암에서 떼어 왔다. 돌을 구하기 위해 파리 한가운데를 이곳저곳 파들어간 결과 미로같은 지하터널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생긴 파리 시내 지하 채석장은 약 12세기 무렵부터 15세기까지 사용했는데 채석장은 지하 15미터 깊이 까지 내려가, 대충 다듬은 무게가 1톤정도 나가는 돌을 암석 단층선을 따라 돌을 잘랐다. 3m~4.5m 정도 깊이로 파 들어가야 했고 종종 누워서도 작업했다. 중장비가 발명되기 전 시대에 거대한 암석을 파내는 일은 굉장한 힘과 인내를 필요로 했다.

퐁네프는 1607년경 완공되었고, 그 후로 200년동안 엄청난 교통량을 소화해냈다. 매일 8만명의 사람과 25천대의 마차가 이 다리를 건너갔으며 퐁네프는 도시의 소통에 스피드를 더해 주었었다. 400년이 지난 후에도 퐁네프는 여전히 교통의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다리야 말로 르네상스 공학의 산 증거라 할 것이다.

1994년 퐁 네프는 대규모 보수 작업에 들어갔으며, 이것은 다리 완공 40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에 맞춰 마무리되었습니다. 수리되는 동안 이 다리는 1995년 예술가 크리스토에 의해 나일론 천으로 몇겹 포장되었다.

퐁네프 다리 밑을 자세히 보면, 다리 장식에 기괴한 모습을 한 얼굴들을 볼 수 있다. 이 얼굴들은 처음부터 이 다리에 있었는데, 석공장들이 자신의 얼굴을 일종의 캐리커쳐 처럼 새긴 것이다. 석공장은 당시 가장 존경받고 보수가 많았던 직업이었다. 퐁네프에 새겨진 얼굴은 384개나 된다.

도핀 광장(Place Dauphine)

시테 섬 서쪽 끝 근처에 위치한 공공 광장으로 1607년 앙리 4세가 후아얄 광장을 조성한 후 두 번째로 조성한 광장이다. 앙리 4세의 아들인 황태자를 위해 황태자라는 뜻의 도핀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 황태자는 훗날 루이 13세가 된다.

이곳은 원래 앙리4세의 왕비인 마리 데 메디치가 남편의 기마상을 세울것을 제안하면서 부지가 마련되었다. 앙리 4세는 왕립광장(앞의 보주광장)이 한참 공사중이던 1607년 자신의 동상이 세워질 이곳을 왕립광장과 같은 성격의 광장주거로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아들은 황태자를 위해 황태자라는 뜻의 도핀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 황태자는 훗날 루이 13세가 된다.

도핀 광장은 부지가 삼각형이기에 자연스레 건물도 대지모양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삼각형 세변을 건물로 에워샀고, 광장의 출입구를 꼭지점과 그 맞은편에 일직선으로 두어, 꼭지점 쪽에서 보면 두 개의 건물이 경비병처럼 서있다.

 

광장의 건물은 1층은 상가로 사용하고, 한 세대당 아치 2, 중앙통로로 구성되어 있고 통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뒤편에 작은 조용한 후원이있다. 광장에 서 있으면 2층이 주거지라는 게 보이지만, 정면 광장에서 보면 2층으로 진입하는 계단은 보이지 않는다. 중앙통로를 지나 나오는 후원 한 쪽 벽의 우아한 계단을 통해 2층 주거로 올라갈 수 있다.

결국 이 건물은 삼각형의 광장을 두 겹으로 에워싼 셈이고, 밖으로는 도로와 맞닿고 내부공간에도 공공광장을 형성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앙리4세는 이 삼각형의 내부공간에 임시극장을 설치해 공연과 집회같은 시민행사를 열릴 수 있도록 함으로써 광장주거 개발이 특정한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파리 시민 전체를 위해 만든 것임을 보여주었다.

앙리4세의 이런 광장주거는 성공적이었고, 시민들은 이것을 17세기를 대표하는 도시주거 유형으로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인식은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 밖에 많은 모방의 예가 만들어 지는데, 대표적인 예가 잘 알려진 영국 런던의 링컨스 인 필즈(Lincoln's Inn Fields)와 코벤트가든(Covent Garden), 18세기 말의 바스(Bath) 개발과 19세기 런던의 리젠트 파크(Regent's Park)로 이어졌다.

앙리 4세가 조성한 보주광장과 도핀광장을 보면 외관이 단순하고 간결한데, 단순히 건물이 즐비한 구획이 아니라 도시의 전체적인 조형에 편입된 공공장소로서의 광장을 세운 셈이다. 이후 도핀 광장은 프랑스 대혁명등을 거치면서 하나씩 상황에 맞추어 만들어지기도, 파괴되기도 해 현재까지 원래의 건물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꼭지점 출입구 부분뿐이다.

프랑스에서 앙리 4세는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에 버금갈 만큼 멋진 군인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훗날 루이 13세는 아버지를 무척 털털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프랑스의 상징이 인 것은 앙리4세가 일요일에는 모든 백성들이 닭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맹세한 것과 연관이 있다. 이 맹세는 루이 13세 시대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 유명한 코코뱅(coq au vin) 이라는 프랑스 닭고기 스튜요리(‘와인에 빠진 수탉이라는 뜻의 일종의 찜닭요리) 가 생겨난 시점을 이때로 잡는 학설도 있다.

또 앙리 4세의 큰 업적 중 하나는 유럽 역사상 최초로 개인의 종교 자유를 인정한다는 낭트칙령(Edit de Nantes)을 반포한 것이다. 본인도 겪었던 종교전쟁의 폐해를 막고, 혼돈의 프랑스를 정말 빠른 시간내에 안정시켰는데, 아쉽게도 이러한 업적을 손자(루이14)와 현손자(루이 15)가 무너뜨리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의 자유로 인해 앙리4세는 카톨릭 광신도에 의해 왕비의 대관식 날, 파리의 교통체증이 극심했던 그 시간에 암살당하고 만다.

팔레 드 쥐스티스(Palais de Justice de Paris)

시테 섬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중세시대부터 혁명기까지 사법 중심지 역할을 해왔으며 현재에도 파리 항소 법원, 파리 중죄 법원, 검찰청 및 변호사회 등 여러 주요 사법 기관이 놓여있다.

본래 이곳은 과거 루이 9(Louis IX, 1214~1270)의 궁전이 있던 자리였다. 훗날 샤를 5(Charles V, 1337~1380)의 명으로 궁전이 마레지구로 옮겨지기 전까지 이 곳은 도시의 중심이자 프랑스 왕권의 상징이었다. 16세기부터 프랑스 혁명기 전까지는 왕실 법정으로 사용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때에는 혁명재판소로 사용되며 수많은 정치 재판이 이루어졌다. 이 거대한 사법 건물은 몇 차례 화재로 파손과 재건축을 반복했다. 현재 건물은 20세기에 대대적으로 보수된 것으로 여전히 법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데 최고 재판소를 비롯하여 다양한 재판 관련 기관과 사무실 등이 들어와 있다. 건물 곳곳은 사용되었던 용도에 따라 상인의 복도’, ‘재판장의 복도’, ‘기다리는 방’, ‘죄인의 복도등의 이름이 붙어있다. 바로 옆에는 13세기에 지어진 생 샤펠(Sainte Chapelle)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입장 월~금 08:30-18:30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

콩시에르주리는 파리의 팔레 드 쥐스티스의 일부이고 이곳의 몇몇 구역은 대중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 지금도 사법 재판을 집행하는 데에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로마인들이 골 족을 지배하고 있을 때부터 중요한 장소였는데, 파리에 있는 로마 총독들의 거주지가 오늘날 콩시에르주리가 서 있는 곳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초기 프랑스 왕들 역시 이 지역을 본거로 삼았으며, 필리프 4세가 13세기에 궁전을 지었을 때 콩시에르주리는 그 일부였다. 콩시에르주리라는 이름은 그 당시부터 유래된 것으로, 이곳이 궁정의 세금과 숙박 관리인인 콩트 데 시에르주’(‘촛대의 백작이라는 의미)의 공식 거처였기 때문이었다.

입장 매일 09:30-18:00

1350년대에 왕실이 루브르로 옮겨 가자 이 궁전의 용도는 점점 더 사법적인 근거지에 가까워졌고 1390년대에 들어 콩시에르주리는 감옥이 되었다. 현재까지 중세에 건축된 시저타워(Caesar Tower), 실버타워(Silver Tower), 봉벡타워(Bonbec Tower)가 남아 있다. 실버타워는 왕실 보물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으며 봉벡타워는 시계탑으로 1370년 처음으로 시계가 설치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시계는 1535년에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봉벡타워에는 고문실도 있어서 때문에 1790년대에 걸쳐 혁명 법정으로 사용되기 이전에도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원대했던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1793년에서 1795년에 걸친 공포 정치의 잔혹함을 낳았고, 법정에서는 새로 탄생한 공화국에 범죄를 저지른(혹은 억울한) 2,600여 명의 사람들을 기요틴으로 보냈다. 재판받은 사람은 4만 명이 넘었다. 당시 처형이 확정된 죄수들은 침대 비용을 지불하면 처형일을 며칠 늦출 수 있었는데, 때문에 한 작가는 콩시에르주리를 파리에서 가장 수익성 좋은 숙박시설이라고 불렀다.

 

재판은 콩시에르주리의 커다란 홀에서 거행되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 당통, 로베스피에르가 각각 처형 전 최후의 날을 아래층에 있는 독방에서 보냈다. 당시에는 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정으로 향할 때 생루이 방(Salle Saint-Louis)를 지나게 되어 있어서 이 방이 불운의 방(Salle des Perdu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건물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은 13세기에 지어진 부분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길이 64m, 너비 27m, 높이 9m의 중세 시대 중기병들의 홀은 건축학적으로 인상적인 방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추모하는 예배당도 있는데, 혁명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이들의 기억을 환기시켜 주는 어울리는 기념물이라 하겠다.

19세기 부르봉 왕조의 부활 후에는 고위층을 위한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나폴레옹 3세도 이곳에 수감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감되었던 방은 루이 18세에 의해 왕비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예배당으로 개조되었다. 19세기 중엽 콩시에르주리와 재판소의 외관은 공포정치의 산실이라는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축을 하였다.

1914년부터 감옥으로서의 사용을 중지하고 국립 역사기념관으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고 오늘날 인기있는 관광명소다. 일부는 현재까지 파리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PDF에 구조도가 있음>
➊ 기병대실
주방
근위병실(대혁명 때에는 혁명 재판소로 사용)
파리의 거리의 방
프랑스 대혁명과 파리
대혁명과 콩시에르주리
죄수들의 복도
이름방(1793~1795년에 혁명재판소에서 심판받은 4000여명의 이름이 있음)
대혁명과 사법의 방
예배당(대혁명 때에는 공동 감방으로 사용)
마리 앙투아네트의 속죄의 예배당
여죄수 전용 안뜰

생 샤펠(Sainte-Chapelle)

루이 9세의 명령으로 건축가 피에르 드 몽트뢰이(Pierre de Montreui)1246년 공사를 시작해 33개월 만인 1248년에 완성한 것으로, 재판소 안뜰에 있는 교회이다. 프랑스 혁명 기간에 많이 훼손되어 밀가루 저장고로 사용되었다가 1세기 후 재건해 놓은 것이다.

사실 유럽에서 성당 이름들을 보면 앞에 eglise가 붙기도 하고 cathedrale도 붙고, basilique라는 단어도 붙는다. eglise(church) 는 카톨릭교회, 일반적인 성당으로 미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설명하는 가장 넓은 개념이고, chapelle(chapel)은 성당, 수도원, 학교, 병원 등 부속된 작은 성당으로 큰 성당이 별도의 소성당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고, 수도원이나 학교 등에 작은 예배당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cathedrale (cathedral)은 주교가 주관하는 대성당으로, 교구의 중심이 되는 성당이다. 보통cathedrale 하나가 있으면 그 산하에 여러 다른 교구성당들(eglise)이 있다. basilique(basilica)는 원래 대교회당, 대성당의 의미였으나,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나 유서깊은 성당을 칭하는 말이다. 기적이 일어난 곳 이라든지, 일반적으로 성지에 속하는 경우가 많아 관광지라기 보다는 순례지에 가깝다.

 

사실 생 샤펠을 성당이라고 하기는 좀 애매하다. 일반인을 위한 성당이 아니라, 루이 9세를 위한 개인성당이기 때문다. 그만큼 이 성당은 루이 9세와 각별한 연관이 있다. 1239년 콘스탄티노플 황제로부터 기증받은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과 십자가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건립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사실 이 가시면류관은 루이 9세가 콘스탄티노플의 볼드윈 2(Baldwin II)에게 135천 리브르를 지불해고 사 온 것이라고 한다. 당시 생샤펠 성당을 짓는 데 들어간 비용이 4만 리브르였다고 하니 가시면류관을 구입하기 위해 자그마치 성당 건축 비용의 3배 이상을 사용한 셈이다.

루이가 신앙심이 대단한 것은 알고 있지만, 가시면류관을 구입하게 된 동기는 신앙심만은 아니었다. 1200년이나 지난 나무 가시면류관을 소장함으로써 자신이 신이 세운 정통성 있는 왕임을 선전하고자 했던 정치적 동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 중요한 물건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보물창고 안에 보존되어 있다.

생 샤펠은 재판소 안쪽에 위치해 있어 전체를 조망하기가 쉽지 않다. 두 개의 예배당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낮은 예배당(Chapelle Basse)은 교회가 궁으로 쓰일 당시 경비병과 시종이 머물렀던 곳이고(그렇다지만 그 화려함은 놀랍다) 반면 좁은 나선형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 높은 예배당(Chapelle Haute)은 왕가 식구들이나 그들의 대리인들만이 다닐 수 있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높은 예배실에 들어가면 그 화려함에 입을 다물 수 없다. 온 사방이 모두 스테인드 글라스로 둘러 쌓여 있어 천상의 빛으로 가득 채워진, 황홀한 공간이 펼쳐진다. 15m의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 높이 솟은 가느다란 기둥들과 별모양으로 장식된 천장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성경에 나오는 1천여 장면들이 그려져 있고, 이 장면들을 보면 창세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요한 계시록에 이르는 성서의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가시면류관을 구입해 운반하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입장 매일 09:00-17:00(하절기는 19:00까지)

생 미쉘 다리(Ponte Saint-Michel)

근처에 있는 예배당인 생 미쉘 교회의 이름을 딴 다리이다. 중세시기인 1378년에 노트르담 대성당, 파리의 도당과 도시 상인들의 협의로 지어진 것이 시초인데, 100년 전쟁 때 나무다리로 재건됐다가 1444년에 다시 모금액으로 돌다리를 짓게 됐다. 지금의 다리는 18577개월에 걸쳐 62m 길이로 지어졌다. 1961년 파리 학살 때 시위자들이 많이 희생된 곳으로 유명하다.

좁은거리(La rue la plus étroite)

1.8m로 파리에서 가장 좁은 거리로 알려져 있다. --페슈 거리(rue du Chat-Qui-Peche)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이는 고기잡는 고양이 거리라는 뜻이다. 고양이가 쥐를 수없이 잡았을 만한 매우 좁은 길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1795년 이좁다란 길 10번지에서는 가난한 젊은 나폴레옹이 셋방살이를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벽뿐이다. 중세 때인 1540년에 생긴 골목이라고 하니 나폴레옹 젊은 시절에는 집들이 있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 Company)

오랜 역사를 가진 영미문학 전문 서점이다. 헤밍웨이, 제임스 조이스와 같은 20세기 초반 유명 작가들과 이후의 보헤미안 문학가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아담한 규모로 운영되고 있는 이 서점은 자유롭게 다양한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다양한 영미 문학 책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서관처럼 자유롭게 읽을 수도 있다. 이 고서점의 역사는 선교사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건너온 실비아 비치(Sylvia Beach, 1887~1962)1919년 서점을 차리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서점의 위치는 오늘날의 자리가 아니라 파리 6구의 오데옹 거리(Rue de l'Odéon)였다. 서점은 제임스 조이스, 헤밍웨이 등의 유명 작가들 뿐 아니라 만 레이(Man Ray, 1890~1976)와 같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 금지되었던 로렌스(D. H. Lawrence)의 작품들도 거래되었으며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스(Ulysses), 1922>가 출판되기도 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나치가 프랑스를 점거하면서 실비아의 서점은 1941년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1950년대에 들어 프랑스에 유학중이던 미국인 조지 휘트먼(George Whitman, 1912~?)에 의해 실비아 서점의 맥을 잇는 새로운 영미 문학 전문 서점이 현재의 자리에 문을 열게 되었다. 서점은 비트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으로 불리는 1950년대의 보헤미안 성향 문학가와 예술가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오늘날 서점은 조지 휘트먼의 딸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손때 묻은 책들이 빼곡히 들어찬 곳으로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훌륭한 쉼터이자 파리의 명소로 여겨지고 있다.

두블 다리(Pont au Double)

1515 년 프란치스코 1 세는 시테 섬의 오뗄 디외(Hôtel-Dieu)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하기 위해 센 강의 작은 지점을 가로 지르는 다리를 놓도록 했다. 건설은 1626 년에 시작되었고 8년 후인 1634년에야 양측이 연결되었다. ‘두블이라는 이름은 당시 통행료로 더블 데니어(2데니어)를 받은 데서 유래했다. 1709년에 다리가 붕괴된 적이 있는데 재건되어 1847년까지 사용되었으며, 1883년 현재와 같이 하나의 아치를 가진 주철 다리로 대체되었다.

샤를마뉴 상(Charlemagne et ses Leudes)

조각가 샤를 로셰(Charles Rochet)와 루이 로셰(Louis Rochet)의 작품이다. 받침대에 말을 탄 샤를마뉴 대제와 그의 가신을 묘사한 청동상을 올린 기념비이다.

샤를마뉴, 또는 카롤루스 대제(Charlemagne, 740, 742, 또는 747~814)의 본래 이름은 샤를이고 뒤에 붙은 ‘magne’는 라틴어로 위대하다는 뜻이다.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 2대 국왕이었던 그는 서부, 중부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해 프랑크 왕국을 제국으로 확장했다. 재임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교황 레오 3세에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와 반대되는 신성로마제국황제직을 수여받기도 했다. 황제가 된 후 교회를 통해 로마 고전문화의 부활을 장려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는데, 이를 가르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일컫기도 한다.

오늘날 샤를마뉴 대제는 프랑스, 독일 군주의 시초 인물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이후 최초로 대부분의 서유럽을 정복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 시켰으며 또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현재 유럽의 정체성에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사실성 여부는 의심스러우나 유럽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가의 기원을 샤를마뉴가 세운 왕국의 전통으로부터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오늘 날 여러나라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는 카롤루스(샤를의 라틴어 이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의 전기는 점차적으로 이상화 ·우상화되어 샤를마뉴 전설로 불리는 사상적 ·문학적 전승을 이루게 되었고, 중세 무훈시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샤를마뉴 대제의 측근이자 사관이기도 했던 아인하르트(Einhardt)가 쓴 샤를마뉴 전기를 보면 샤를마뉴 대제의 키가 7피트(현재 단위로 환산하면 6피트 3인치, 190.5cm)에 이르는 장신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리 과장은 아니다. 1861년 고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대제의 무덤을 열어 뼈를 다시 맞추어 본 결과 카롤루스 대제의 키는 정확히 74.9인치(192센티미터)였다. 또한 아인하르트의 글에 따르면 카롤루스 대제는 화려하고 귀족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프랑크족의 전통의상을 입었다고 한다.

포앵 제로(Point Zéro)

영어식으로 말하면 제로 포인트(Zero Point), 혹은 제로 마일 마크(Zero mile marker)원점을 의미하는데, 옛 프랑스의 모든 지리적인 위치를 측정하는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예를 들어, ‘파리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이라고 하면 이때 기준점이 바로 포앵 제로이다.

포앵 제로에는 세 가지 미신이 있다. 첫째는 포앵 제로의 동판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둘째는 포앵 제로를 발로 밟으면 반드시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고, 셋째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 포앵 제로에 서서 키스하면 그 사랑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노트르담 다리(Pont Notre-Dame)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유명하다. 지금 있는 자리에 다리는 지금껏 수없이 파괴되고 다시 세워지곤 했지만 고대부터 전해 왔다고 할 정도로 그 역사가 길다. 한편, 가장 오래되면서도 견고하게 보존되온 다리는 퐁네프 다리이다.

예부터 노트르담 다리는 큰 다리(Grand-pont)라고 불리면서 센 강을 가로지르는 교통 수단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886년 노르만족이 파리 지역을 침공했을 당시 구조가 파괴되어 다시 지어졌다. 다시 지어진 다리는 밀브레 다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1406년 대홍수 동안 다리는 다시 유실된다.

141253일 샤를 6세가 부지에 다리의 골격을 새로 정비하고 최초로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그가 정비토록 지시한 다리의 구조는 견고한 목재를 통해 쌩마르탱 가와 다른 곳을 연결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다리 건축에만 7년이 소요되었으며 양옆으로는 각각 30여 가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리는 14991025일 아침 9시경 지반 침하와 정비 부실로 붕괴된다.

석재로의 다리 건축이 같은 해 시작되었지만 당분간 주민들은 연락선을 타고 센 강을 건너다녔다. 이 시기에는 아치 형으로 된 석재 다리가 지어졌으며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이자 철학자였던 프라 지오반니가 건축을 맡았다. 그의 건축은 1507년에 완공되었으며 여전히 당시의 60여 개 벽돌과 석재는 보존되고 있다. 이후 상권의 중심으로 떠오른 다리 인근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성장했다.

 

1660년 노트르담 다리는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이었던 마리아 테레사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왕비로 발탁되어 파리로 들어올 당시 최초의 다리가 되는 영예를 안기도 한다. 1646~1788년 동안 다리 인근의 가옥이 모두 도시 정비의 일환으로 파괴되었다.

1853년에는 새로운 석재 구조로 기존의 돌다리를 덮었다. 하지만 기존의 예술적 아름다움은 상당 부분 경감되고 만다. 새로운 다리는 아치형으로 지어진 것이었지만 작은 흠이 있었다. 그것은 건축 보수 이후 연락선이 지나다니다 빈번히 사고가 난 것이었다. 때문에 1891년에서 1910년 사이 너무도 잦은 사고 탓에 사람들은 이곳을 악마의 다리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때문에 센 강변의 유람선이나 다른 배의 운송 편의를 위해 금속으로 다시 만드는 계획이 수립된다. 이 작업은 미라보 다리를 만들었던 장 르살이 맡았다. 1919년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푸앵카레가 참석한 가운데 다리가 개통되었다.

생 자크 탑(Tour Saint-Jacques)

노트르담 대성당 종탑에서 전경을 바라보면 가까운 곳에 높은 탑이 하나 보이는데, 이 탑은 프랑수아 1세 때 샤틀레 광장 근처에 새운 생 자크 라 부쉴리 교회의 부속 탑으로 만들어진 생 자크 탑이다. 생 자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교회는 예수의 제자 중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에게 헌정된 교회였다. 1525년에 완공된 높이 52m의 탑이다.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교회 건물은 채석장에 매각되어 1797년에 파괴되었지만, 탑을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교회를 매각했기 때문에 탑만 남게 되었다. 1836년 파리시는 생 자크 탑을 재구입하고 1862년 역사기념물로 지정했다.

탑 정상 피나클 위에 있는 성인 석상은 19세기에 추가로 세워진 것이다. 탑 기단부 중앙에 보면 파스칼의 동상이 있는데, 1648년 파스칼이 이곳에서 기압 실험을 한 것을 긴며한 동상이다.

파리 시청(Hôtel de Ville)

시청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파리 시 관공서와 센 도청이 들어선 건물로, 건물 전면의 시계 아래에 걸린 자유, 평등, 박애의 문구와 창가의 국기가 이 건물이 관공서라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건물의 네 면에는 136개의 조각상이 있으며 규모도 커 마치 미술관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다.

1260, 루이 9세가 파리 시민에게 시장 선출권을 부여한 것을 계기로 지어졌으며, 1357년에 샤틀레(Châtelet) 광장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이후 프랑스 혁명기에 파리 시민들의 혁명 본거지로 사용되면서 역사적 사건도 많이 일어났다. 혁명 당시 이 장소에서 시민군이 루이 16세에게 혁명의 삼색기에 경의를 표하도록 했으며, 테르미도르의 반동 때는 궁지에 몰린 로베스피에르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건물은 1871, 파리 코뮌 때 전소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듀펠트와 바류의 지휘 하에 1874~1882년에 걸쳐 재건축된 것이다.

내부는 르네상스 양식과 벨 에포크(Belle Epoque) 양식이 혼재하는 장엄한 모습이다. 화려한 계단과 고풍스러운 연회장, 리셉션장이 눈길을 끈다. 내부에는 유명한 예술 작품도 전시돼 있다. 특히 로댕의 <공화국 여신상>은 꼭 봐야 할 작품이다. 이외에도 퓌비 드 샤반(Puvis de Chavannes)의 프레스코화 등 볼거리가 많다. 시민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무료 전람회를 열고 있다. 견학하려면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

겨울에는 시청사 바로 앞에 무료 야외 스케이트장이 들어서고 여름에는 축구장과 배구장으로 이용되는 등 시민을 위한 공간을 제공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시청사 바로 앞에는 시테 성과 연결되는 아르콜 다리가 있다.

퐁피두 센터(Le Centre Pompidou)

파리의 3대 미술관 중 하나. 유럽 최고의 현대미술 복합 공간이자 파리 문화예술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식 명칭은 조르주 퐁피두 국립 예술문화 센터이다. 퐁피두 센터는 배수관과 가스관, 통풍구 등이 밖으로 노출되도록 지어졌다. 컬러풀한 건물 철골을 그대로 드러낸 외벽과 유리면으로 구성된 파격적인 외관은 어디에서 보더라도 시선을 끈다. 옛 시장의 오래된 거리에 갑자기 나타나는 건물의 모습은 매우 엉뚱하고 유쾌하다. 개관 당시에는 현대 건축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다. 설계는 49개국에서 681점이 출품된 국제 설계 공모전에서 뽑힌 이탈리아의 건축가 피아노와 영국의 로저스를 중심으로 한 외국인들이 맡았다. 1969년 당시의 대통령 퐁피두가 파리 중심부 재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1977년에 세운 것이다.

 

퐁피두 센터는 지상 7,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립 근대 미술관을 비롯해 도서관(BPI), 현대 음악 연구소(IRCAM) 등이 들어서 있다. 이 센터는 내부 보수 공사로 2년간 폐관되었다가 200011일 다시 문을 열었다. 미술관이 확대되고 도시에 최신 설비가 도입되면서 파리의 미술과 문화의 중추로서 점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는 곳은 퐁피두 센터 4~5층에 위치한 국립 근대 미술관이다. 20세기의 미술 소장품은 세계 최대 수준을 자랑한다. 전시 작품은 약 1400점에 달하며 프랑스 미술가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미술가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명작도 많이 갖추고 있다. 회화, 조각, 사진, 영화, 뉴미디어, 건축, 디자인 등 장르도 다양하다. 전시 내용은 연대별로 크게 2부로 나뉜다. 5층에서는 근대 컬렉션(1905~1960) 900점을 공개하고 있다. 마티스, 피카소, 칸딘스키, 레제, 미로, 자코메티 등 유명 미술가의 대작이 한곳에 모여 있어 볼만한 가치가 크다.

4층에 위치한 현대 컬렉션에서는 정크 아트 거장 장 팅겔리를 비롯해 앤디 워홀, 세자르, 바자렐리, 조셉 보이스 등 컨템포러리 아트 대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발상을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둘러보자. , 특별전은 뮤지엄패스가 있더라도 별도 입장료를 내야 관람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센터 최상층에는 파리 시내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으며 센터 밖 광장에는 거리의 예술가들이 펼치는 각양각색의 공연을 감상하는 젊은 여행객들로 항상 붐빈다. ‘탱글리 Jean Tinguely’니키 Niki de Saint-Phalle’의 기계 분수가 있는 스타빈스키 Stavinsky’의 분수는 동심으로 돌아간 듯 방문객들이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입장 수~월 11:00-21:00

공공정보도서관(Bibliothèque publique d'information)

퐁피두 센터 도서관(BPI- Bibliothèque publique d’information)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공립 도서관으로 멀티 미디어 장비를 통해 혼자 어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공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 프랑스 고전 및 최근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 자료를 찾고 볼 수 있는 공간 및 조용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프랑스어 듣기 능력을 발전시키고 싶은 학생들은 Autoformation 공간을이용하면 좋다. 교재와 함께 CD도 빌려주어 컴퓨터를 이용하여 TCFDELF DALF 시험준비도 할 수 있다. 이곳에는 프랑스어 뿐 아니라 기타 희귀한 언어들도 배울 수 있는 교재들도 갖추고 있다.

이용 방법

입구는 퐁피두 센터 광장이 아닌 뒤쪽 ‘rue Beaubourg’로 가야 한다. 안전을 위해 2,200명 정도를 수용하게 되어 있어서 수용 인원이 찼을 경우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40분간 인터넷을 무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인터넷을 이용하기를 원할 경우 1층 에스컬레이터 오른편에 마련된 대기표를 뽑아서 2층으로 올라가면 된다.

2층 오른쪽에는 세계의 11개 채널 TV를 볼 수 있는 Télévision du Monde 라는 공간도 있고, 인문 과학, 과학 기술, 경제, 법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과 2500부의 잡지 및 신문이 구비되어 있다. 단 도서관 내에서 읽거나 복사할 수 있으나 대여는 할 수 없다.

3층에서는 90여 개의 음악을 들거나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다. 다큐멘터리나 애니메이션 영화도 있으며,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3층 안내 데스크에 가서 예약하면 되고, 두 명이 시청하는 것도 가능하다.

입장 월수목금 12:00-22:00, 주말 11:00-22:00 / 권장시간 18:00 이후

바스티유 시장(Marche Bastille)

파리에서 제일 큰 재래시장으로, 진짜 파리지앵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볼거리가 가득한 곳이다. 각종 음식들과 야채, 과일 등을 주로 판매하며, 생활용픔, 중고 의류, 꽃 등을 판매하는 노점도 있다.

바스티유 전통 시장은 목요일과 일요일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열리는데 이 시장이 열리는 히샤흐 르누아르 대로(boulevard Richard Lenoir) 아래는 라르스날 선착장(Port de l'Arsenal)으로 이어지는 생마르탱 운하(canal Saint-Martin)가 있던 곳이다.우리나라의 오일장처럼 상설 시장이 아니므로 천막을 치고 장사 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진열된 상품의 종류와 진열 방식은 다르고 진열되는 상품도 다르다. 당근은 줄기를 자르지 않고 팔고 있고, 웬만한 가게는 POS 장비를 갖추고 있어서 금액을 지불하면 마트처럼 정확하게 영수증을 발급해 준다. 크레페와 빵, 주스 같은 간식은 물론이고 치즈도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값에 품질 좋은 것으로 살 수 있다. 거리의 악사들은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운영 목·일 07:00-15:00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 습격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다. 1789714, 성난 군중이 모여들어 바스티유 감옥을 향해 몰려가면서 역사적인 혁명의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원래 바스티유는 영국과의 백년 전쟁이 한창이던 14세기에 파리의 동쪽을 지키기 위한 성채로 지어졌다. 이후 루이 13세 때 재상이었던 리슐리외가 이 성채를 감옥으로 사용하면서 정치적인 정적이나 사상범들을 주로 수감하기 시작했다. 볼테르나 미라보 등 유명 사상가나 정치인들도 수감된 적이 있다. 소설 등의 소재가 되는 철가면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이야기는 바스티유의 악명을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에는 죄수가 7명뿐인데다 국사범은 하나도 없었으며 수비군도 6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구체제 전제 정치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는 가장 먼저 민중의 표적이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혁명 시기에 철거되어 현재는 그 모습이 없다. 습격 사건이 벌어졌던 714일은 혁명 기념일이 되었고, 바스티유는 광장의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다. 빅토르 위고가 그의 작품 <레미제라블>에서 언급했던 코키리상의 분수대도 없어지고, 현재는 광장 중앙에 1830년의 7월 혁명을 기리는 높이 52m의 기념탑만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 아래에는 7월 혁명과 19482월 혁명의 희생자들이 안치되어 있다. 탑 내부의 계단을 올라가면 파리 시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나온다.

1989년에는 혁명 200주년을 맞아 극장인 오페라 바스티유가 광장 한편에 들어섰다. 광장은 현재 카페와 상점이 즐비하고 활기 넘치는 장소로 변모했지만,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추모 행렬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빅토르 위고의 집(Maison de Victor Hugo)

빅토르 위고(1802~1885)처럼 파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작가는 드물다. 브장송에서 태어났으나, 그는 오랜 세월을 수도 파리의 가장 역사적인 구역 중 한 곳에 머물렀으며 그 정신과 성격을 마음껏 흡수했다. 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노트르담 드 파리>(노트르담의 꼽추, 1831)<레 미제라블>(1862)에 반영되어 있다. 그가 주로 머물렀던 집은 현재 그의 일생을 돌아볼 수 있는 박물관이 되었다.

 

1832년부터 1848년까지, 위고는 보주 광장에 있는 아파트를 빌렸다. 원래는 루아얄 광장이라 불렸던 이 우아한 광장은 앙리 4세가 자신이 살 목적으로 짓게 하였던 것인데, 그는 이 프로젝트가 완성되기 전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위고의 아파트먼트는 건물의 전 소유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게메네 공 루이 드 로앙의 이름을 딴 오뗄 드 로앙-게메네(프랑스에서, ‘오뗄이란 커다란 개인 주택을 가리킨다)라는 건물에 있었다.

위고의 집은 곧 작가와 예술가들이 선호하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알렉상드르 뒤마, 찰스 디킨스, 프란츠 리스트는 모두 이곳의 손님이었다. 위고는 또한 작은 비밀 계단을 통해 남몰래 찾아올 수 있었던 줄지어 오는 여성 숭배자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그의 정부였던 쥘리엣 드루에는 근처에 있는 아파트먼트에 살고 있었다. 위고가 이 집에 머무른 것은 1848년 혁명 동안 잠시 중단되었는데, 폭도들이 쳐들어와 그에게 더 안전한 곳으로 빨리 떠나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위고의 집은 개인 소유로 남아 있다가, 1873년 파리 시에 인수되었다. 잠시 동안 초등학교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1903년 마침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이 박물관은 위고의 작품을 폭넓게 총망라하는데, 그중에는 그의 신비로운 드로잉과 매우 별난 가구 디자인도 포함된다.

빅토르 위고는 이곳에서 <레미제라블>을 비롯한 많은 대작들을 집필하였는데, 전시관 곳곳에 프랑스 대문호의 유년부터 노년까지의 인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빅토르 위고의 인생을 담은 총 7개의 방이 전시되고 있는데 초상화, 문서, 삽화 뿐만 아니라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이 그대로 방안에 복원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레 미제라블> 집필실이었던 붉은 비단 방과 중세풍의 그릇들로 꾸며진 식당 그리고 당시 유럽 상류층 사람들에게 유행했던 중국풍의 고가구들이 배치된 거실이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마지막 일곱번째 방인 침실에는 1885년 그가 사망할 당시 누워있던 침대까지 재현되어 있다.

참고로 위고의 집 2층에서는 보주 광장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입장 화~일 10:00-18:00 입장료 무료(오디오가이드 5유로)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

지금은 보주 광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만들어질 당시 이름은 왕립광장인, 파리 시내에 최초로 등장한 광장 주거지이다. 원래는 투흐넬 왕궁(Palais Royale des Tournelles) 자리로 마상시합이 열리던 곳인데, 앙리2세가 마상사고로 사망하자 왕비였던 까트린 데 메디치가 남편을 기리며, 광장을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종교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프로젝트는 무기한 중단이 되었던 것을 훗날 왕위에 오른 앙리 4세가 실현에 옮겼다.

이곳 1층은 특별한 곳이다. 보통 도시주거지는 상가를 세를 놓기 위해 직접 도로면에 접하게 하는데, 이곳은 상가를 안으로 밀어 넣고 통로를 확보한 아케이드 형식을 취했다. 이 아케이드 회랑은 반 개방형으로 광장 쪽으로 열려 있어 비가 와도 산책을 할 수 있다. 바로 이 아케이드 통로가 앙리 4세가 역점을 둔 곳이다. 도로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파리 시민에게 도심의 산책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보주 광장은 앙리 4세가 중시한 공공성에 바탕을 두고 시도한 첫 번째 광장 주택이었다.(두 번째는 도핀 광장이다.) 당리 4세는 아주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적정 규모의 주택 설계안을 마련하고, 그 설계안대로 짓는다는 조건으로 광장의 네 면을 귀족들에게 분양했다. 물론 분양 받은 이들은 자기들의 오뗄(저택)을 갖지 못하는 중류 귀족들이었다. 광장 북쪽면과 남쪽면에는 조금더 튀어 나와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각각 왕과 왕비를 위한 파빌리온이다. 결과적으로 앙리 4세는 귀족들의 주거를 왕궁과 연결하는 데 성공했고, 귀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주거가 왕궁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주어 충성심을 얻을 수 있었다. 1층의 아케이드와 통로를 내어주어 광장에서는 마상시합과 같은 각종 행사가 열리곤 했고 앙리 4세가 원했던 구경거리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쿨레 베르트(Coulée verte René- Dumont)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ée, ‘가로수 산책길’)이라고도 하는 쿨레 베르트(Coulée verte, ‘초록 오솔길이라는 뜻)는 파리 12구역에 위치한 버려진 고가철도 위에 지어진 4.7km(2.9마일) 길이의 선형 공원이다. 1993년 완공했다.

쿨레 베르트는 1859년부터 바스티유 역에서 뱅센을 거쳐 베르뇌유레탕을 이었던 옛 뱅센 철도 위에 지어졌다. 이 노선은 19691214일 운행을 종료하였고, 이 중 일부는 RER A선에 통합되었지만 파리와 뱅센 사이의 구간은 완전히 버려졌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 이 지역의 재생사업이 시작되었다. 1984년 바스티유 역은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건설을 위해 철거되었고, 르위 지역은 1986년 설계되어, 옛 르위 차량기지는 여러 공원 녹지에 하나로 합쳐졌다. 프롬나드 플랑테 또한 같은 시기에 바스티유와 옛날 파리의 초입인 몽탕프와브르 문 사이의 버려진 철도 구간을 재사용 하기 위해 건설에 착수하였다. 조경 건축가 자크 베르젤리(Jacques Vergely)와 건축가 필립 마티유(Philippe Mathieux)가 공원을 설계해 1993년 완공했다. 비아뒥데자르(Viaduc des Arts) 구간의 아케이드는 1989년 샤를페기 광장으로 새롭개 개보수 되었다.

파리 시에 위치한 4.7km 길이의 이 공원은 2009년 뉴욕 시의 첼시 구역에 비슷한 폐 고가철도 위에 지어진 하이 라인1단계가 개장하기 전까지 개장 이후 몇년 동안 세계에서 유일한 고가 위 공원이었다. 시카고에서는 도시의 여러 지역을 통과하고 자전거도 달릴 수 있는 길이 3마일의 블루밍데일 트레일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크레미외 거리(Rue Cremieux)

크레용으로 칠해 놓은 듯한 144m의 거리이다. 베네치아에 부라노(Burano)섬이, 런던에 포토벨로 마켓(Portobello Market)이 있다면 파리에는 크레미외 거리가 있다. 144m 길이의 짧은 보행전용도로는 서른 다섯 채의 알록달록한 집들로 꾸며진 것이 특색이다.

이 길은 본래 밀로 거리(Avenue Millaud)라고 불렸으나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 당시 노동자 계급을 지지했던 아돌프 크레미외(Adolphe Cremieux)를 기리기 위해 1897년 이름이 변경됐다. 고풍스러운 파리의 건물들에 조금 지친다면 통통 튀는 크레미외 거리로 가 보자. 분홍색, 녹색, 보라색 등 여러 색이 입혀진 이 길은 SNS 프로필 사진을 찍어두기에 적격이다. , 사진촬영을 허락하지 않는 집들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서른 다섯 채의 집 중 여덟 번째 집 앞을 지날 때 자세히 보면 1910년 홍수로 인해 센 강이 범람했을 당시 1.75m의 수위를 표시한 작은 토기판이 있다.

비라켕 다리(Pont de Bir-Hakeim)

에펠탑 인근의 비라켕 다리(비르 아켐교, Pont de Bir-Hakeim)2층으로는 메트로가 지나며 1층으로는 사람들과 자동차가 오가는 복합적인 구조다. 본래 부유한 구도심 지역의 이름을 따 파씨(Passy)의 다리라고 부르다가 1942년의 비라켕 전투를 기리기 위해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 이 다리는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주인공들이 처음 만난 첫 장면을 찍은 곳이다. 영화 속 연인들의 비운의 사랑과 이별이 다리에 담겨 있다. <인셉션>의 배경이 된 곳으로 더 유명해 졌다. 다리 아래로는 인공섬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그르넬 다리(Pont de Grenelle)와 자유의 여신상(Statue de la Liberté)

본래 1873년에 목재 다리로 지었던 것을 1966년 강철 다리로 다시 지은 것이다. 그르넬 다리 인근인 시뉴섬 끝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우뚝 서 있는데, 그르넬 다리 위에서는 아쉽게도 그녀의 뒷모습 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앞모습을 보려면 미라보 다리로 위로 가야 한다.

미라보 다리(Pont Mirabeau)

강 서쪽의 미라보 다리는 시 한 편으로 유명해졌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라는 시구(詩句)로 단번에 센강의 대표적인 다리로 급부상했다. 1895년에 시작하여 1897년에 장 르살(Jean Résal)의 설계로 완공된 이 다리는 실제로는 다른 다리들과는 달리 철제로 건축됐다. 또 파리의 고풍스런 구시가를 연결하기보다 현대풍의 건물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975년 프랑스 역사기념물로 지정됐다.

샤이오 궁(Palais de Chaillot)

파리 트로카데로 언덕(샤이오 언덕)에 있는 광장 공원이자 박물관이다.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중심 건물로 사용하기 위해 원래의 트로카데로 궁전(Palais du Trocadéro) 자리에 현대식으로 다시 지었다. 때문에 트로카데로 궁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두 개의 곡선형 건물이 양쪽에 날개처럼 대칭으로 들어서 있고, 그 앞에 대형 분수가 있는 커다란 광장이 있다. 두 건물을 등지고 광장을 가로질러 센 강 건너편을 보면 에펠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샤이오 궁과 에펠탑은 만국박람회의 주요 상징물들로서 당초 설계부터 서로 마주보게 지어졌기 때문에 샤이오 궁에서 에펠탑을 보는 전경은 파리에서 가장 손꼽힌다.

샤이오 궁은 1948년 유엔 총회가 열려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UDHR)>을 발표한 곳이기도 하며 인권선언 테라스와 기념석이 있다. 서쪽 날개관(passy wing)에는 해양 박물관(Musée de la Marine), 인류학 박물관(Musée de l'Homme), 동쪽 날개관(paris wing)에는 프랑스 건축과 문화유산 박물관(Cité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과 샤이오 국립극장(Thêatre National de Chaillot)이 있다. 해양 박물관은 해양 역사를 보여주는 선박들이 실물과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17세기 이후 프랑스 해군의 발전사를 볼 수 있다. 인류학 박물관에는 370만 년 전 인류 화석부터 청동기시대까지의 인류학, 민속학, 고고학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인류의 진화과정을 사료와 실물 모형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건축과 문화유산 박물관은 2007년 문을 열었다. 12세기부터 18세기까지 프랑스의 기념비적 건물과 산업혁명 이후 현대 건축물들을 모형으로 보여준다.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벽화도 볼 수 있다. 국립극장은 약 5000석 규모이다.

트로카데로 광장(Place du Trocadéro)

샤이오 궁 북서쪽에 있는 반원형의 광장으로 정확한 이름은 트로카데로 1111일 광장이다. 1815년 신성동맹이 체결된 이후 프랑스는 1823년 에스파냐에 절대왕정을 확립하기 위하여 안달루시아 지방 카디스(Cádiz)에 있는 트로카데로 요새를 점령하였다. 1827년 이 승리를 기리기 위하여 점령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를 열었는데, 당시 이 광장이 있는 샤요 언덕을 트로카데로요새로 꾸민 뒤로 광장에 트로카데로란 이름이 붙여졌다. 또 제1차세계대전 종전기념일인 1111일에는 이곳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광장은 이후 여러 차례 모습이 바뀌다가 1878년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샤요궁을 건립한 뒤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광장 중앙에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총사령관이던 포슈(Ferdinand Foch, 1851~1929)의 기마상이 있다.

건축 문화재 박물관(Cité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중세 이후 프랑스 건축물의 역사에 관한 전시를 주로 한다. 박물관이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은 파리의 유명 관광지 가운데 하나인 샤요 궁전(Palais de Chaillot) 이다. 이 궁전은 본관을 중심으로 동서에 별관 형태의 궁전이 각각 있는데 파리 건축 문화재 단지는 동쪽 궁전에서 전시를 하고 있다. 양쪽 별관에는 파리 건축 문화재 단지 외에 인류학 박물관, 해양 박물관 등이 함께 들어서 있다. 애초 샤이오 궁전에는 프랑스의 문화재를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었다.

파리 건축 문화재 단지는 이 박물관의 소장품을 기초로 건축 관련 자료를 확충한 뒤 2007년 문을 열었다. 주요 전시물은 중세 이후 파리의 건축에 사용됐던 다양한 장식품들이다. 건축 박물관이긴 하지만 건축 재료나 기술 등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저택에 사용됐던 조각상, 아름다운 문의 조각 기둥, 벽에 새겨 넣은 부조(浮彫) 등 조각 예술에 가까운 작품들을 주로 전시한다. 2층에는 건축물에 사용된 예술성 높은 벽화들이 보관돼 있다. 박물관 건물 안에는 전시공간 외에 건축 문화재 관련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 시설을 별도로 갖추고 있다.

입장 수~월 11:00-19:00

개선문(Arc de Triomphe)

본래 개선문이란 전쟁에서 승전하고 돌아오는 인물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문을 말한다. 특히 고대 로마에서 성행했는데, 공화정기에는 개선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제정기에 접어들면서 팍스 로마나가 정착되자 개선문을 세울 승전의 기회를 얻지 못한 황제들은 공공사업을 통해 쌓은 업적도 개선문을 세울 만한 명예가 된다며 개선문 건립을 정당화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이다.

로마 시대 이후에는 개선문이 국왕의 권위와 영광을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물로 인식되어 근대 유럽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개선문을 세우게 된다. 당시에 세워진 개선문 중 가장 큰 것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바로 이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이다. 정작 건설을 명령한 나폴레옹 본인은 생전에 개선문을 지나지 못했다. 그가 개선문을 통과한 것은 1821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사망한 후 유해를 파리의 앵발리드로 이장할 때인 1840년이었다.

참고로 파리의 개선문이 에투알 개선문으로 불리는 이유는 지도상에서 봤을때 개선문 광장이 빛나는 별(étoile)처럼 생겨서 그렇다. 실제로 구글맵으로 보면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샹젤리제 거리를 비롯한 파리 전역의 거리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 때문에 개선문 광장 주변의 교통은 끔찍할 정도로 혼잡하다. 물론 에투알 광장이란 명칭은 주민들의 애칭일 뿐이고 광장의 정식 이름은 샤를 드 골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딴 샤를 드 골 광장 (la place de Charles de Gaulle)이다.

에투알 개선문은 겉보기와 달리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고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다. 근처에 에펠탑이 있어 굳이 여기에서 전망을 볼 이유가 없는 것 같지만 에펠탑은 입장료가 너무 비싸고, 에펠탑 전망대에서는 에펠탑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개선문의 전망이 인기가 좋다. 더욱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파리 시내 유수의 대로들이 뻗어나가서 이곳에서 보는 전망이 호평받는다.

입장 매일 10:00-23:00

샹젤리제 거리(Av. des Champs-Élysées)

콩코드 광장과 개선문 사이에 위치한 거리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럭셔리 쇼핑과 한가한 여유로움을 만끽 할 수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이 구역은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édicis)의 영향으로 나무 거리가 조성되기 전에는 늪과 들판이었으며, 정비된 후 1709년에 샹젤리제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 후 앙탕 공(duc d'Antin)에 의해 1724년 현재의 거리 모습을 형성했다. 1828년까지는 야생 정원의 형태를 지니다가 분수, 인도, 가스 조명이 설치되었다. 현재에는 프랑스의 주요 행사들이 이 거리에서 열린다: 714일 혁명 기념일 행사, 뚜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 도착지, 신년 축제 등 이 이곳에서 열린다.

오늘날 파리 8구는 파리에서 가장 매혹적인 지역임에는 틀림없다. 에르메스(Hermès), 루이뷔통(Louis Vuitton), 샤넬(Chanel) 등 고급 의상실과 부티크 등이 즐비한 그랑 불바르(대로)의 눈부신 화려함은 관광객들의 눈과 마음을 한없이 들뜨게 하고, 때로는 약간 주눅들게도 한다.

대사관과 고급 의상실, 살롱이 즐비한 이곳에서 혹시 걷다가 지쳐 가격대가 비교적 저렴한 먹거리를 찾는다면, 그야말로 오산이다. 이곳은 그저 방문하는 지역이고, 저녁은 다른 곳에서 하는 것이 좋다.

그랑 팔레(Grand Palais)

샹젤리제 거리 중간쯤에 자리한 그랑 팔레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해 건립되어 국제적인 관심을 모았던 건축물이다. 건축 당시에는 혁신적인 기마르 양식(Style Guimard,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한 아르누보의 프랑스식 명칭)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랑 팔레는 센 강으로 둘러싸인 녹음이 울창한 삼각 지역에 위치하며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룬 훌륭한 건축미 덕분에 지금도 파리의 자랑거리로 손꼽힌다. 어느 방향에서 바라봐도 당당한 느낌을 자아내는 외관이 인상적이다. 특히 윈스턴 처칠 거리 쪽의 정면은 이오니아식 기둥과 지붕 위를 장식하는 거대한 마차 석상이 시선을 모은다.

현재 그랑 팔레 건물 내부에는 다양한 문화 시설이 들어서 있다. 기획전이 열리는 그랑 팔레 국립 갤러리(Galeries Nationales du Grand Palais)’, 과학 기술 박물관인 발견의 전당(Palais de la Découverte)’, 그리고 십여 년의 세월에 걸쳐 리뉴얼된 건물의 중앙 부분에 해당하는 대형 홀로 이루어져 있다. 철골과 유리로 된 거대한 돔이 있는 대형 홀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듯한 박력을 느낄 수 있다. 홀의 길이는 200m, 폭은 55m에 달한다. 과거 살롱 도톤이나 앙데팡당전을 개최하며 근대 미술을 이끌어 왔던 이 홀은 기획전이 열릴 때만 입장할 수 있으며, 앞으로 개최될 전시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발견의 전당(Palais de la Decouverte)

그랑 팔레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거리 쪽에 있는 발견의 전당은 우주, 물리, 화학, 수학, 생물학 등을 주제로 한 과학 기술 박물관이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장 페렝(Jean Baptiste Perrin)1937년 설립했다. 과학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전문가와 함께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최첨단 과학 기술과 인류가 진보해 온 발자취를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천구에서의 천체 운행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인 플라네타리움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인기 있다. 파리를 방문하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다.

입장 화~10:00-18:00

프티 팔레(Petit Palais)

그랑 팔레 인근에는 그랑 팔레와 마찬가지로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해 건립된 프티 팔레와 알렉상드르 3세 다리가 있다.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 궁과도 가깝다.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 쪽에서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너머로 보이는 앵발리드의 전경은 파리에서 손꼽히는 경관을 자랑한다.

프티 팔레 미술관(Musée du Petit Palais)은 프랑스의 파리시가 운영하는 시립 미술관으로서 정식 명칭은 파리시 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de la Ville de Paris)이다. 파리시에서 순수 미술 작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개관한 것은 1902년이며, 팔각원형의 정원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사다리꼴로 배치되어 있으며, 인근에 그랑 팔레(Grand Palais)가 위치해있다. 주요 컬렉션으로는 중세와 르네상스 회화와 소묘, 장식미술품으로 구성된 두튜이 컬렉션(Dutuit Collection)18세기 가구와 장식미술품으로 구성된 터크 컬렉션(Edward Tuck Collection), 파리시가 보유하고 있는 회화 컬렉션 등이 있다. 프티 팔레 미술관은 렘브란트, 루벤스 등을 비롯한 외국 화가들과 푸생, 앵그르, 들라크루아, 쿠르베, 모네, 시슬리, 피사로 등의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들을 고루 전시하고 있으며, 로댕, 마이욜, 부르델, 카미유 클로델 등 조각가들의 작품들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입장 화~일 10:00-18:00 입장료 무료(특별전은 유료)

고대 작품

고전 작품들은 두튜이 형제가 기증한 작품들로 구성된 두튜이 컬렉션에 속해있다. 로마와 그리스의 희귀한 유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기원전 520년 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리스 무덤 유물들과 채색 화병, 아테네 시대의 청동 작품들, 기원전 15세기의 고전주의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테라코타와 보석류들은 주로 기원전 4세기 지중해 인근 지역의 예술품들이며, 로마 유품으로는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던 황금기의 대표작인 <바쿠스><청년> 상이 있다. 1세기와 4세기 사이의 작품들로 추정되는 유리 작품과 금속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다.

동방 기독교와 서방 기독교

동방 기독교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그리스와 러시아 정교회(Orthodox)를 일컫는말이며, 동방 기독교 컬렉션은 정교회의 관련 유물들과 작품들을 말한다. 프티 팔레에 전시되고 있는 동방 기독교 컬렉션은 주로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호제 카발(Roger Cabal)1998, 프리 팔레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다. 동방 기독교 컬렉션에 관해서는 프티 팔레 미술관이 프랑스에서 컬렉션이 가장 크고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주로 작자 미상의 기독교 종교화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회화로는 <세례 요한>, <성 마틴>, <천지창조>, <천사 미카엘과 천사 가브리엘> 등이 있으며, 성모자의 이야기를 다룬 필사본 서적도 한 권 포함되어 있다. 프티 팔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독교 작품들은 주로 중세로부터 초기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들이다. 양이 많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12세기와 13세기의 금세공 미술품과 에나멜 작품 뿐 아니라 섬세한 고딕 상아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초기에 완성된 리모쥬(Limoges)의 채색 범랑 작품과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나무 조각품들도 매우 우수한 작품들이다. 거의가 작자는 미상이며, 대표작으로는 제단화인 <예수의 삶과 고난의 여정>, <성 바오로와 성 도마>, <성모자> 등이 있다.

르네상스 작품

프티 팔레 미술관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북유럽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회화 뿐 아니라, 가구, 도자기, 유리공예제품, 채색 에나멜, 시계, 서적 등도 함께 소장하고 있다. 15세기로부터 17세기 초반에 이르는 유럽 각지의 르네상스 예술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 주로 두튜이 형제가 기증한 두튜이 컬렉션에 속해있는 작품들이다. 회화로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 콘네그리아노의 <성모자>, 모슈타르트의 <요스트 반 브론크호르스트의 초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공예품으로는 작자 미상의 <큐피드의 춤이 그려진 볼>, <양초>, <제이슨과 황금 양털의 장면이 그려진 물주전자>, <두 여인의 옆모습이 그려진 큰 볼> 등을 소장하고 있다.

17세기 작품

두튜이 형제의 기증을 통해, 프티 팔레 미술관은 네덜란드 황금시대와 플랑드르 회화 부문에서 매우 주요한 작품들을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의 공공 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컬렉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선 플랑드르의 거장 루벤스의 아름다운 작품 <페르세포네의 납치>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의 <동양식 옷을 입은 자화상>이 프티 팔레에서 전시되고 있다. 여기에 요르단스의 <다이애나의 휴식>과 호베마(Hobbema)<물레방아> 등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으며, 로마에 살면서 서로 우정을 나누었던 두 명의 프랑스 출신 화가 푸생과 로랑의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다. 푸생의 <무고한 죽음들>, 로랭의 <성 마리넬라 항구의 풍경>이 전시되고 있다.

18세기 작품

프티 팔레 미술관의 18세기 컬렉션의 주를 이루는 작품들은 파리에서 생활했던 미국인 사업가 부부, 에드워드 터크(Edward Tuck)와 줄리아 스텔(Julia Stell)의 기증품들이다. 4개의 전시실에서 전시하고 있는 터크 컬렉션은 18세기 가구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세브르 도자기와 독일의 드레스덴 도자기, 프랑스의 파양스 채색도자기, 영국의 에나멜 제품, 은식기류 등 유럽의 다양한 공예품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18세기의 회화 작품들도 다수 포함하고 있다. 회화 작품으로는 부셰의 <작은 개의 춤>, 다비드의 <세네카의 죽음>, 베르네의 <티볼리 폭포> 등이 전시되고 있다.

19세기 작품

프티 팔레 미술관은 19세기 미술품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프랑스 미술 작품이 훌륭한 것으로 유명하다. 19세기 초반은 초상화가 강세를 이루던 시기였는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보일리의 <아가씨의 초상>이 프티 팔레에 전시되어 있다. 이어지는 낭만주의 화파들의 그림 역시 풍부한데, 제리코의 <무덤이 있는 풍경>과 들라크르와의 <지아우르와 파샤의 전투>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낭만주의 시대를 지나 쿠르베가 등장하게 되는데, 쿠르베를 통해 당대의 미술계는 사실주의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었고, 새로운 세계관이 싹트기 시작했다. 프티 팔레 미술관을 대표하는 화가로 쿠르베가 꼽힐 만큼, 프티 팔레에는 쿠르베의 주요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화염 속으로 돌진하는 소방관들>, <잠자는 사람들>, <센 강둑의 아가씨들(여름)> 등은 쿠르베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프티 팔레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쿠르베의 사실주의 화풍은 뒤이어 유행했던 자연주의 화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대표 화가로는 알프레드 홀(Alfred Roll)과 페르낭 쁠리(Fernand Pelez)가 거론되며, 프티 팔레에는 쁠리의 <작은 수입, 스케치><황제 코모두스의 죽음>가 전시되고 있다. 한편 19세기 후반, 기독교 미술 부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대표 화가, 귀스타브 도레, 바르비종 화파들, 모네, 피사로, 시슬리 등의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엘리제궁(Palais de l'Élysée)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관저로서 대통령 사무소가 위치했으며 장관 회의도 이곳에서 열린다. 중요한 외국 인사의 방문 시에는 인근의 오뗄 드 마리그니(Hôtel de Marigny)가 숙소로 사용된다. 엘리제 궁은 넓은 궁전으로도 유명하여 대통령과 저명 인사들의 파티 장소로도 자주 쓰인다. 지금의 대통령궁 주인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다.

엘리제 궁의 역사

최초에 엘리제 궁을 지을 당시에는 건축가인 아르망 클로드 몰레(Armand-Claude Mollet)가 궁이 위치한 마을의 소유권과 도로 땅을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 전한다. 이곳은 룰(Roule) 마을로서 파리의 서쪽 지역에 해당하는데, 때문에 왕실의 건축에도 차질이 일어났다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소유하던 통로였는데 왕정이 이를 사들이지 못했던 탓에 대법원과 기존의 엘리제 궁전 부지와 연결 차질이 빚어진 것이었다.

1718년 그는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Henri-Louis de la Tour d'Auvergne)에게 앞은 궁정, 건물 뒷부분은 정원으로 자신이 건축을 한다는 조건으로 땅을 처분하였다. 건축은 1722년까지 부속 장식까지 완성이 되었지만, 지속적인 건축 양식 보수와 내부 수리를 통해 현재까지도 가장 고전적인 건축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1753년 아르망이 죽을 때까지 엘리제 궁은 파리 전역을 통틀어 가장 격식이 높은 건물로 꼽혔다. 이에 루이 15세가 애첩이었던 퐁파두르(Marquise de Pompadour)에게 선물하였다. 그녀를 혐오하던 자들은 이에 왕의 매춘부가 사는 곳이라고 써있는 팻말을 들고 불만을 표출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고 왕가 재산으로 엘리제 궁이 계속 쓰였다. 이후 1773년 당대 프랑스 최고 부자이자 궁정을 상대로 은행업을 하던 니콜라 보종(Nicolas Beaujon)이 궁을 사들였다. 당시까지만해도 파리 시라는 독립구획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정·재계를 통튼 자신의 실세를 뽐내고자 건물을 사들여 수많은 명작을 장식하였다. 건물 양식을 보강하기 위해서 그는 건축가 에티엔 루이 부리에를 고용하여 영국풍의 정원과 건물 전체에 보수 작업을 펼쳤다.

 

건축이 완료될 무렵 여러 명작이 전시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The Ambassadors)과 현재에는 루브르 박물관 소장되어 있는 프란츠 할스의 <보헤미안> 등이 있다. 그가 생애 엘리제 궁전에 들인 예술적 영감과 건축 보수는 당대 뿐 아니라 후대에서도 국제적으로 엘리제 궁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높이게 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엘리제 궁을 소유해오다 루이 16세에게 궁전을 양도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에는 주요 가구 창고와 인쇄공장, 무도회장 등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1814년 제정 러시아의 코사크 기병군은 파리를 점령했을 때 엘리제 궁에 머물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에 들어서야 엘리제 궁은 정부 공식 관저로서의 형식적 지위를 획득한다. 2차 공화국에 들어서는 엘리제 국립 궁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관저로 공인된다.

 

1853년 나폴레옹의 지배가 사실상 끝나면서 나폴레옹 3세가 건축가 '조셉 외젠 라크로와'(Joseph-Eugène Lacroix)에게 엘리제 궁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맡기고 인근의 궁으로 거처를 잠시 옮긴다. 하지만 공사 기간 동에도 그는 애첩들과 엘리제 궁에서 여러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두 거처 사이의 비밀 통로를 통해 서로 만났다고 전한다. 1867년 라크로와가 공사를 완공하면서 엘리제 궁전의 외형적 모습은 지금껏 보존되고 있다.

대통령궁으로서의 역사

1870년에 공화제가 다시 들어서면서 궁전은 다시금 대통령궁으로서 권위를 되찾는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인근의 동물원에서 탈출한 고릴라가 궁전에 난입하는 소동이 벌어져서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의 영부인이 끌려가는 상황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궁전 경호원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1920년 정신착란증 증세로 사임한 폴 데샤넬 대통령은 고릴라가 이때 벌였던 행각에 너무도 심취해서 그 상황을 CSCE 회의 동안 나무에 올라가 직접 연출하고 말았다.

이후 엘리제 궁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판자 따위로 둘러싸여있다가 전후에도 계속 빈 상태로 방치되었다. 1959년부터 제5공화국의 샤를 드골 대통령이 머물렀으며 사생활이 아닌 정계의 영향이 미치는 그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만들었다. 사실 그는 인근에 또다른 궁전을 두고 있었으므로 엘리제 궁에서 굳이 개인적인 일을 볼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대통령이던 미테랑 대통령은 거의 사적 공간으로 대통령궁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그는 공식 업무가 끝나고 밤이 되면 그의 사택으로 돌아가기를 선호했다고 한다. 대조적으로 후임자인던 시라크 대통령은 1995년에서 2007년까지 2번의 임기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엘리제 궁에 머물렀다.

시라크 대통령은 대통령궁의 예산을 105% 증가시켜 9천만 유로에 달하는 비용을 썼다고 하는데 매년 백만 유로가 엘리제 궁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음료 값에 해당할 정도라고 한다. 이외에 690만 유로는 대통령궁 직원들의 특별 급여, 610만 유로는 시라크 대통령이 임기 당시 고용했던 특별 직원의 급여로 사용되었다. 1995년 그가 취임한 이후 재임기간 프랑스 대통령직의 급여는 81,012유로에 달했다.

 

2007년 프랑스 대선을 통해 새 주인으로 자리 잡은 사르코지 대통령은 엘리제 궁에서 머물 것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전 아내이던 세실리아는 그의 대통령궁 생활에 강한 의심을 표현해 주목을 받았고 실질적으로 엘리제 궁전에 머물지 않았다. 1018일자로 사르코지와 세실리아는 이혼했다고 한다. 사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대통령궁에서 머물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는 2007년 사르코지 대통령의 휴가 때 그는 9월부터 가족 모두와 함께 궁으로 들어올 것을 밝혔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렇지 않아서 그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지금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살고 있다.

알렉상드르 3세 다리(Pont Alexandre III)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는 다시 젊음을 되찾은 파리의 19세기 정신을 완벽하게 반영한다. 이 다리는 오텔 데 쟁발리드를 그랑 팔레, 프티 팔레와 연결해 주는데,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는 1900년 만국 박람회를 위해 지어졌으며 예술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큼 프랑스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의 최고 기량을 보여 주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 다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센 강변에 포함된다.

알렉상드르 3세 다리는 이 두 갤러리로 향하는 만큼 그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통로가 되기 위해 설계되었으며, 다리가 지닌 매력의 큰 부분은 매우 낮게 위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온다. 디자이너들은 이 다리가 센 강 한쪽 편의 샹젤리제나 다른 편의 앵발리드를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는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따라서 단일 구간으로 된 107m의 다리의 높이는 고작 6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코너에 있는 17m 높이의 네 개의 화강암 기둥 덕분에 먼 곳에서도 눈에 들어오는데, 이 기둥들 꼭대기에는 각각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와, 과학, 예술, 산업, 상업을 우의적으로 나타낸 금박을 입힌 조각상이 얹혀 있다. 다리의 양쪽 면을 장식하고 있는 램프, 아기 천사, 님프들도 역시 발전과 성취를 표상하는데, 이들은 함께 중세, 르네상스, 루이 14, 그리고 현대의 프랑스를 상징한다.

이 다리는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으며,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친교를 표현한다는 의미였다. 1896년 알렉산드르의 아들 니콜라이 2마지막 차르가 주춧돌을 놓았으며, 다리는 만국 박람회 시기에 맞추어 개통되었다. 오늘날 이 다리는 낙관주의적이고 심미적인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으로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의 아름답고 우아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시 발전이 실용적인 만큼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었던 시대를.

앵발리드(Hotel des Invalides)

군사박물관, 군사입체모형박물관, 해방훈장 박물관, 현대사 박물관, 생 루이 데 앵발리드 교회 등 여러 기념물이 한데 집합되어 있는 파리 최대의 종합전시장이다. 파리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념물 중 하나로 꼽히며, 앵발리드의 황금빛 돔은 에펠탑만큼이나 인상적이다. 건물 앞에 넓게 펼쳐진 앵발리드 광장은 1900년 세계박람회 당시 전시장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 개통된 알렉산드르 3세 다리와 이어지며 멋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처음에는 루이 14세 시대인 1671년에 착공하여 1706년에 완공한 부상병 간호 시설이었다. 167011월에 루이 14세가 노병들과 불우한 퇴역군인들을 위한 시설을 건립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시초.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리베랄 브뤼앙(Libéral Bruant)이 건축을 맡았다. 4,000명 가까운 노병들의 생활 근거지가 될 앵발리드는 당시 현역에 복무 중인 병사들의 급료 5년치를 징수한 기금으로 이루어졌다.

 

나폴레옹의 묘로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앵발리드는 단순한 무덤은 아니며 군사 박물관도 있다. 엄밀히 따지면 군사 박물관 앵발리드를 비롯한 박물관들과 앵발리드 돔 교회가 한 데 있고, 그 돔 교회 안에 나폴레옹 1세의 무덤이 있는 것. 한국으로 치면 현충원과 전쟁기념관을 합쳐서 거대한 건물에 같이 넣어놓은 셈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프랑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후, 1940628일에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628일 새벽 530분에 파리를 방문하여 겨우 3시간 동안 머물렀는데, 이것이 그의 평생 단 한 번의 파리 방문이었다. 이 때 히틀러는 앵발리드를 들러 말없이 나폴레옹 1세의 관을 지켜보았다고 하는데,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특히 앵발리드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다고 한다. 이후 같은 해 1215일에는 나폴레옹 2세의 시신을 앵발리드로 이장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1218일에는 소련 침공 계획을 작성하라는 총통 명령 21호를 군부에 하달한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의 운명을 피하고자 모스크바 점령을 미루고 우크라이나로 진격한 결과, 나폴레옹보다 더한 운명을 맞이했다.

 

현재 다양한 행정 사무실과 함께 군사박물관(Musée de l'Armée), 군사입체모형박물관(Musée des Plans-Reliefs), 해방 훈장 박물관(Musée de l’Ordre de la Libération), 현대사 박물관(Musée d'Histoire Contemporaine)과 같은 주요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황금지붕으로 상징되는 왕실의 돔 교회(Dôme Church) 뿐 아니라 군인들의 교회로 불리는 17세기 예배당 생 루이 데 앵발리드 교회(Église St Louis des Invalides)도 볼 수 있다.

입장 매일 10:00-17:00

앵발리드 광장(Esplanadedes Invalides)

18세기 초에 로베르 드 꼬뜨(Robert de Cotte)에 의하여 설계된 길이 500 미터, 250 미터의 잔디밭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고 있다. 앵발리드의 정원에는 17, 18세기의 승리의 대포로 불리는 청동 대포들이 있는데, 지금도 1차 세계대전 휴전 협정 기념일 등의 특별한 날에 축포를 울린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로 옮겨지기도 하였지만 1946년에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라고 한다.

169m 길이의 정면 건물을 통과하여 명예의 뜰 Cour d`Honneur’로 들어서면, 15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으며, 나폴레옹 1세의 청동상이 방문객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돔 성당(Eglise de ôme)

앵발리드의 돔 성당은 병사들의 성당으로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건축가 망사르(Mansart)에 의하여 절충주의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돔 지붕은 1715년부터 2년에 한번씩 금괴 2개의 분량을 얇게 바르는 도금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IMF 시절에 이 금 덩어리를 노리던(?) 유학생들이 많았다는 우스개도 전한다.

아래층의 열주 사이에는 프랑스에 카톨릭을 전파하는 데 공헌한 생 루이(Saint Louis) 왕의 석상과, 유럽 최초의 대제인 샤를마뉴(Charlemagne)의 모습이 보이고, 그 위층에는 선행을 상징하는 조각이 있다. 돔 성당에 층층이 놓여진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기둥들은 당시의 화려함과 루이 14세의 영화를 보여준다.

앵발리드 군사박물관(Musée de l'Armée)

오른쪽 건물에는 앙리 4세 시절, 프랑스와 1세 시절의 중세 시대 갑옷과 기사들의 복장, , 창과 초창기의 화승총이 보존되어 있고, 진열실 끝의 아시아 관에는 일본의 사무라이 복장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1, 2차 세계대전실에는 당시에 군용으로 사용되던 물품들과, 전쟁 상황을 담은 비디오나 영화가 상영된다. 왼쪽 편 건물에는, 루이 14, 15,16세 시대의 군대 복장 및 왕들이 사용하던 방패나 복장이 진열되어 있고, 나폴레옹 시절의 근대적인 군대 모습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1세가 쓰던 모자, 입었던 외투가 있고, 침실도 꾸며 놓았다. 생 뗄렌느(Sainte Helene) 섬에서 유배 생활의 모습도 재현해 놓았으며, 나폴레옹의 애마와 애견이 박제가 되어 전시되고 있다. 꼭대기 층에는 17세기 루이 14세 시절에 스페인과의 영토 전쟁, 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 건축가 보방의 건의로 제작한 프랑스 전역의 수비 성곽이나, 요새들의 대형 모델이 전시되어 있다.

입장 매일 10:00-18:00

나폴레옹 무덤

성당 지하에는 많은 장군들의 무덤이 있는데 특히 나폴레옹 황제의 관이 유명하다. 18009월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역사적 영웅인 튀렌 자작의 시신을 앵발리드의 돔 교회로 옮겨 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린 이래 영묘로서 쓰이기 시작했다. 원래 튀렌 자작의 시신은 역대 프랑스 왕들의 무덤인 생 드니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역대 국왕과 왕비의 무덤을 파괴한 과격한 혁명파들도 그의 시신만은 보전해 주고자 파리 식물원에 따로 옮겨놓은 상태였다. 1808년에는 루이 14세 시기의 명장인 보방(Vauban) 후작의 심장이 안치되기도 했다.

이후 세인트헬레나에서 숨을 거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신이 18401215일에 개선문을 지나 샹젤리제 거리에서 환영을 받는 거국적인 국장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오게 된다. 1815년 워털루에서 패하고 유배지에서 52세로 눈 감은 나폴레옹 1세의 유해는, 프랑스의 마지막 왕인 루이 필립(Louis Philip)이 영국과 진행한 8년 간의 협상 끝에 되찾아온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앵발리드 돔 성당을 전용 영묘로 삼게 되었고 20년이 넘는 공사 끝에 186142일에 나폴레옹 1세의 시신이 지금처럼 안치되게 되었다.

 

그로부터 제롬 보나파르트, 조제프 보나파르트 등 나폴레옹 1세의 형제들과 페르디낭 포슈 등의 제1, 2차 세계대전을 지휘한 장군들이 안장되었으며, 라 마르세예즈의 작곡가이자 군인인 루제 드 릴의 시신도 1차 대전기에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어 나폴레옹 가족과 프랑스의 군사적 영웅들의 영묘로서 사용되고 있다. 나폴레옹의 관 옆에는 나폴레옹과 두 번째 부인 마리 루이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애글롱(Aiglon)의 유해도 놓여 있다. 1811년 파리 근교의 랑부이예 성에서 태어난 그는 1814년 나폴레옹이 유배 가자마자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오스트리아로 가지만 183221살의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훗날 히틀러가 나폴레옹을 자신의 영웅으로 여겼는데, 1940년 파리로 진격하면서 오스트리아에 안장되어 있던 애글롱의 유해를 갖고와서 아버지인 나폴레옹 옆에 안장 시켜 준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엔 팡테옹과 함께 대표적인 파리의 위인 추모시설이 되었다. 현장에 가 보면 나폴레옹 1세의 적갈색 관은 대놓고 이 건물의 주인공처럼 위엄찬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부의 천장화는 예수와 12사도에게 검을 바치는 생 루이 왕을 묘사하고 있으며, 중앙 부분의 난간에서 아래로 보면 비스꽁티(Bisconti) 의 작품인 화려한 핀란드산 붉은색의 대리석 석관이 보인다. 철관, 마호가니관, 두 겹의 청동관, 흑단관, 삼나무관,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붉은색 대리석으로 총 7겹으로 만들어진 웅장하고 화려한 관이, 청록색의 화강암 바닥에 옛 영화를 그리워하며 놓여있다.

로댕박물관(Musée Rodin)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과 로댕이 수집한 미술품을 중심으로 소장하고 있다. 건물은 190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 로댕이 아틀리에로 사용하고 살았던 비론 저택(Hotel Biron)이다. 1911년 프랑스 정부가 비론 저택을 매입하였고, 로댕이 자신의 작품과 소장품을 국가에 기증면서 박물관으로 남겨달라고 제안했다. 로댕 사후 1919년에 개관해 2005년에 개수되었다.

입장 화~일 10:00-17:45

로댕 박물관의 건축적 특징

로댕 미술관으로 쓰이는 비롱저택은 1728년부터 1730년에 걸쳐 건축되었으며, 설계자는 당시 매우 인기있는 건축가였던 쟝 오베르로 알려져 있다. 건축을 의뢰한 사람은 페랑 드 모라(Abraham Peyrenc de Moras)였는데, 가발 메이커였던 그는 당시 유가증권에 투자하여 큰 돈을 벌어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오베르에게 의뢰하여 저택을 짓게 하였다. 그 결과 1730, 로코코 풍의 우아한 외관과 정교한 실내 장식이 아름다운 남향 저택이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택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한 채 페렝 드 모라는 1732년 세상을 떠났고, 저택은 그의 부인에게 상속되었으며 곧 루이 14세의 며느리였던 멘느 공작부인(duchesse du Maine)에게 임대되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던 1753년까지 그곳에 살았고, 다음으로 저택을 소유한 사람이 바로 비롱 원수였다. 그는 이 저택을 구입한 후 건물 내부 구조를 많이 바꾸지는 않았지만, 정원은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다. 저택의 정원을 파리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어놓은 비롱의 이름을 따서 저택은 그 후로 비롱저택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롱 원수가 1788년 세상을 떠난 후 비롱저택은 무도회장, 대사관저 등으로 임대되기도 하다가 수도원 여학교로 사용되었는데, 1905년 교회와 국가의 재산을 분리하는 법령에 의해 국가에 귀속되었다. 그 후 브리앙(Aristide Briand)이 건물을 구입하여 예술가들에게 임대하기 시작했는데, 비롱 저택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을 살펴보면 장 콕토(Jean Cocteau),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lsadora Duncan),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 등 당대의 인상적인 예술가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조각가 로댕이 비롱 저택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비서였던 시인 릴케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는 1908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비롱 저택에서 활약하였다. 비록 생활과 작품 제작은 뫼동의 빌라 드 브리앙에서 했다지만, 로댕은 비롱 저택의 아름다움과 야생의 정원을 매우 사랑하여서 비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저택 안에 수많은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전시하였고, 벽에는 자신의 소묘와 소장품을 걸었으며, 정원에는 그리스와 로마 유물들을 배치했다. 로댕의 연인들 중 가장 질투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슈와죌 공작부인의 매서운 감시 아래이기는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교제를 나누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1911년 프랑스 정부는 당시 빅토르 뒤뤼 고등학교에 위임되어 있던 비롱 저택을 구입하여 활용 방안을 모색하면서 저택을 철거할 것을 고려하게 되는데, 저택을 사랑하던 로댕은 이를 막기 위해 앞으로 비롱저택을 로댕 미술관으로 사용한다면 자신의 모든 컬렉션을 정부에 기증하겠다는 계획을 제안하게 된다. 하지만 조각가의 작품세계가 충분히 평가받지 못했던 당시의 사회 상황 때문에 그의 제안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모네와 미르보 등 여러 예술가들의 지속적인 지원과 언론의 협력, 그리고 로댕 본인의 부단한 노력으로, 1916년에야 프랑스 의회는 로댕의 컬렉션 기부와 미술관 건립에 관련된 제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듬해인 191711월 로댕은 세상을 떠나버렸고, 1919년 사랑하던 비롱 저택이 자신의 이름을 딴 국립 미술관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다.

로댕 박물관의 구조

바롱 저택과 그 정원으로 이루어진 로댕 미술관은 로코코 양식의 우아한 건축물과 아름다운 조경으로 유명하다. 특히 잘 가꾸어진 자연 속에서 로댕의 대표작들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의 정원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정원만을 감상하는 입장권을 따로 판매하고 있을 정도이다. 미술관 건물을 중심으로 남쪽 안뜰에서 <생각하는 사람>을 감상할 수 있으며, 북쪽 정원에서는 <지옥의 문>이 전시되고 있으며 그 밖에도 <발자크>, <세 망령들>, <칼레의 시민들> 등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 건물 뒤쪽에 있는 작은 연못과 조용한 카페가 위치하고 있어서 운치를 더한다.

미술관 건물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16실의 전시실에 로댕의 작품들과 그가 수집한 회화, 고대 유물들을 볼 수 있다. 1층 입구로 들어가면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9개의 방이 있는데, 1전시실부터 8전시실까지는 로댕의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그 다음 방에서는 소묘와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다. 특히 제 6전시실에서는 로댕의 연인이기도 했던 카미유 끌로델의 작품과 로댕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고 있어서, 논란을 낳고 있는 그들의 작품 세계를 비교 감상할 수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2층 역시 왼편부터 시계 방향으로 8개의 전시실이 있으며, 13 전시실에는 로댕이 수집한 회화와 고대 유물들이 조각들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작품은 주로 연대순으로 전시되고 있다.

로댕 박물관 소장품

로댕 미술관은 약 66백 점의 로댕의 조각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테라코타, 석고, 청동, 대리석, 밀랍, 녹인 유리, 철 등의 소재로 제작된 작품들은 파리의 비롱 저택과 정원, 뫼동의 빌라 드 브리앙에 나뉘어서 전시되고 있다. 처음 미술관을 설립하면서 미술관 운영 위원회는 파리의 미술관에는 완성된 대리석과 청동 조각상을 위주로 전시하고, 뫼동에는 석고상들을 주로 전시할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은 지금까지도 큰 변화 없이 이행되고 있다. 뫼동을 방문한 관람객들은 로댕의 작업실을 둘러보고 석고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예술적인 창조의 신비를 탐구할 수 있으며, 파리 비롱 저택과 정원에서는 로댕의 대표작을 감상하며 천재 조각가의 영감과 표현력에 경의로움을 표할 수도 있다. 한편 로댕 미술관에는 1916년 의회를 통과한 로댕의 기증 작품 이외에도, 과거 정부소유의 작품이었다가 로댕 미술관으로 이관된 <생각하는 사람><입맞춤> 등이 전시되고 있다. 남아있는 주형을 통해 미술관에서 다시 제작한 작품들도 추가되었는데, <지옥의 문><우골리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초기 작품들

프랑스의 미술과 수학 교육기관이었던 프티 에콜에서 공부했던 로댕은 1857년 학교를 떠나 자신만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고등 교육기관인 파리미술아카데미나 그랑제콜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모두 낙방하여 좌절하였다. 그는 독립 후 주로 생계를 위해 조각가들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하거나, 장식미술품을 제작하면서 20여 년을 프랑스 미술계의 주류가 아닌 장인으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로댕은 조각가로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작품 활동을 계속했기 때문에 그의 초기 작품들 중에서도 의미있는 작품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1860년 작품인 <아버지의 흉상>, 둘째 누이의 죽음으로 낙담하여 수도원에 들어갔던 로댕에게 조각가로서의 꿈을 잃지 않도록 격려했던 수도원의 <에마르 신부상>, 1865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낙선한 작품인 <코가 부러진 남자>, 로댕의 모델이었다가 연인이 되었고 평생을 그를 위해 헌신했던 여인인 재봉사 로즈 뵈레(Rose Beuret)를 모델로 한 작품인 <미뇽>, 아름답고 섬세한 모델링으로 유명한 테라코타 작품 <꽃모자를 쓴 여인>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1875년은 로댕에게 특별한 해였다. 브뤼셀에서 장식용 조각품을 많이 제작하였는데 이를 통해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경제적인 어려움을 많이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865년 살롱전에서 낙선했던 <코가 부러진 남자>를 다시 제작하여 출품한 결과, 1875년 살롱전에 채택 전시되는 경사가 있었던 것. 살롱전 수상은 로댕에게 매우 큰 격려가 되었으며, 안정감을 되찾은 그는 새로운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브뤼셀에서의 마지막 2년 동안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청동시대>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로댕은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들을 직접 보기 위해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두 달을 제외하고는 꼬박 18개월을 <청동시대>에 매달렸다. 직업 모델 대신 22세의 벨기에 군인 어거스트 네이(Auguste Neyt)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이 작품은 벨기에에서 제목없이 전시된 후 1877년 파리 살롱전에 성공적으로 출품되는 듯 했다.

하지만 모델의 몸에 석고를 발라 직접 거푸집을 만든 것이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여 미술계와 관람객들의 혹평을 받았고 그들의 끝없는 비판은 오랫동안 로댕을 괴롭혔다. 이 작품을 통해 파리의 주류 미술계에 진출하기를 고대했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그는 매우 낙담하여 파리미술아카데미에 계속하여 항의하였다. 항의가 받아들여져 다시 인정받는 데는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 후 <청동시대> 석고상은 곧바로 정부에서 구입하였고 이어서 청동상의 제작 의뢰도 받게 된다. 포도나무 잎이 첨가된 <청동시대> 청동상은 1880년 파리 살롱전에서 성공적으로 전시되었고,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청동시대>의 뒤를 이은 비슷한 개념의 대표작으로는 <세례 요한> 석고상, <아담(Adam)> 석고상이 꼽힌다.

지옥의 문(The Gates of Hell)

로댕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지옥의 문(Thd Gates of Hell)>. 1880년부터 1900년까지 20년 동안 제작된 이 작품은 186인의 인체를 높이 6.50m의 문에 조각한 로댕의 대작이며, 1937년부터 로댕 미술관 정원에서 전시되고 있다. 1880년 미술협회로부터 새로 설립될 파리 장식미술 박물관의 문 제작을 의뢰받은 로댕은 단테의 <신곡>(The Divine Comedy)’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계획이 틀어져서 박물관의 문으로는 사용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로댕은 이 문을 길베르티가 플로렌스 세례당에 제작한 <천국의 문>과 비슷한 구성으로 제작하려고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바꾸어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을 위해 그린 <최후의 심판>과 유사하게 섹션으로 나누어 구성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첫 해에는 단테의 신곡을 분석하며 작품을 구상하고 스케치하는데 공을 들였으며, 그 후에는 모델링을 시작했다. 작품을 진행할수록 그는 스토리 전체를 표현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몇몇 특징적인 캐릭터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캐릭터들이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우골리노와 그의 자녀들>, <웅크리는 여인>, <나는 아름답다>, <세 망령들>, <생각하는 사람>, <단테의 초상> 등이다. 이 인물상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구조와 개념을 따르지 않는 진보적인 작품들로 평가되었으며 <지옥의 문>을 구성하는 작품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각각이 독립적인 작품들로서 다양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지옥의 문>의 일부로 제작되다가 독립적인 작품으로 출품하여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으로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로부터 파생된 작품인 <입맞춤>, 로댕의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 이탈리아 피사의 독재자였다가 동맹, 교회와 충돌하여 반역자로 낙인 찍힌 후 아들들과 함께 탑에 갇혔다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아들들의 인육을 먹었던 비운의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우골리노와 그의 자녀들> 등이 있다.

기념상(Monuments)

로댕의 작품들 중에서도 <칼레의 시민들><발자크> 상은 주목받는 작품들로서 이들은 어떤 조직으로부터 의뢰 받아 제작된 기념상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로댕이 칼레시를 위해 제작한 <칼레의 시민들>은 과거 백년전쟁 중에 위기에 처했던 도시를 구했던 여섯 명의 용감한 시민들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이었던 백년전쟁이 시작되자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영국에서 가까운 프랑스의 연안 도시인 칼레를 집중 공략하였고, 그 결과 굶주림과 영국군의 공격으로 지칠 대로 지친 칼레 시는 1347,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항복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에드워드 3세는, 머리를 밀고 목에는 밧줄을 걸고 벌거벗은 채 도포만 두르고 맨발로 왕에게 도시의 열쇠를 건낸 후 시민 대표로 교수형에 처해질 여섯 명을 뽑으라고 명령한다. 이 고통스럽고도 모욕적인 시민 대표로 자원했던 용감한 여섯 명이 있었으니, 이들은 도시의 가장 큰 부자, 법률가, 사업가 형제 등이었다. 열쇠를 건네 받은 후 교수형을 집행하려 하자, 에드워드 3세의 임신한 왕비가 배 속의 아이를 위해 형을 취소할 것을 간청하였고, 그녀의 간청이 받아들여져서 6인의 시민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5백 여 년이 지난 후, 칼레 시는 여섯 명의 시민들의 용감한 행동을 기리기 위해 기념상을 세우기로 하고 조각가 로댕에게 작품을 의뢰하게 되었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처연하게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 용감한 시민들의 영웅적인 모습을 기대했던 당시의 사람들은 로댕이 표현한, 의로운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움과 자부심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이 작품을 보고 실망감을 표현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로댕의 기념상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발자크(Bazac)> 상 역시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다. 에밀 졸라가 회장으로 있던 문인협회로부터 <발자크> 상을 의뢰 받을 당시 로댕은 전성기를 구가하는 조각가였는데,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또 한번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로댕은 대문호 발자크를 잘 표현하기 위해 각종 자료와 사진 등을 자세하게 조사했으며, 발자크의 고향과 박물관, 단골 옷집 등을 방문하여 연구함으로써 매우 사실적인 모습의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화된 문인의 이미지를 기대하고 있던 문인협회는 다소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로댕의 <발자크 상>을 본 후 이를 받아들일 것을 거부하고 다른 조각가에게 작품을 다시 의뢰해 버렸다고 한다. 로댕 역시 이 일이 있고 난 후 기념상 제작을 더 이상 하지 않을 만큼 마음 고생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리 열기구(Ballon Generali de Paris)

낭만의 도시 파리에 에펠탑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라 바로 하늘 위에 떠오른 거대 열기구이다. 세계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파리 열기구는 150m 높이까지 올라 파리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008년부터는 열기구에 대기 오염 측정 장치를 달고 있는데, 열기구에 그려진 자동차 색이 녹색이면 대기지수가 좋은 편이고 노란색이면 보통, 빨간색이면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어린이는 무료로 탑승할 수 있다.

팡테옹(Panthéon)

프랑스의 위인들이 안장되는 국립묘지이다. 비슷한 성격의 건물로, 군사적인 업적을 가진 위인들이 안장되는 앵발리드가 있다.

국립묘지라고 해서 한국의 현충원,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와 같이 풀밭에 비석이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장엄한 건물 안에 여러 위인들과 명사들의 석관들이 방별로 배치된 형태이다.

입장 매일 10:00-18:30

팡테옹의 역사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같이 본래는 교회였으나 여러 과정을 거쳐 프랑스의 역사적 위인들이 안장된 국립묘지가 되었다. 그 때문에 팡테옹의 정면 박공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AUX GRANDS HOMMES LA PATRIE RECONNAISSANTE(조국이 위대한 사람들에게 사의(謝意)를 표하다)”

이밖에도 여러 위인들이 묻힌 점, 도시의 주요 랜드마크인 점 등이 웨스트민스트 사원과 유사하다. 팡테옹을 설계했던 건축가 자크 제르맹 수플로는 사후 반 세기 뒤 자신이 만든 이곳에 안장되는 영예를 얻었다.

그 외에도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고자 했던 푸코의 진자 실험이 이뤄진 장소로도 유명하다. 참고로 실험에 쓰였던 진자는 1855년에 파리 국립 과학 연구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줄이 끊어져 파손되었고, 현재 팡테옹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건축적 특징

파리의 국립묘지라는 상징성 이외에도, 건축학적으로 봤을 때 팡테옹은 상당히 흥미로운 건물이다. 한 건축가가 각기 다른 양식의 건축을 통합하고자 했던 야심작이었지만, 그가 죽은 뒤 그 의도가 상당 부분 퇴색한 건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건축은 1757년에 시작되어 1790년에 완성되었다. 팡테옹은 원래 생 주느비에브(Sainte-Geneviève; 성녀 제노베파) 성당으로 건축된 것이다. 병으로 다죽어가던 루이 15세가 제노베파에게 쾌유를 기도했고, 병에서 회복되자 당시 파리에서 제일가는 성당을 짓기로 결정한다.

건축가는 신고전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인물인 자크 제르맹 수플로(Jacques-Germain Soufflot)가 임명되었다. 수플로는 1755년부터 성당을 설계하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대담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생 주느비에브 교회는 고딕 건축의 밝음과 그리스 건축의 순수함을 조합할 것이다

 

생 주느비에브 교회를 짓기 이전에 로마에서 판테온 등을 공부했던 수플로는 당시의 분위기를 따라 지나치게 화려한 로코코양식에서 보다 순수한 그리스 로마 시대의 건축에서 이상향을 찾았다. 이를 신고전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수플로는 천대받던 고딕 건축의 구조와 커다란 창에 주목을 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신고전주의와는 달랐다.

이러한 것은 이 건물의 실제 모델 중 하나인 영국의 세인트 폴 대성당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세인트 폴 대성당과 생 주느비에브 성당은 구조는 공중부벽(플라잉 버트레스) 등을 사용한 고딕적인 구조지만, 그것을 가벽으로 가려 은폐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세인트 폴 대성당의 경우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은 고딕을 혐오하면서 고딕식 성당을 공사 도중에 억지로 바로크 식으로 개축한 것에 가깝지만, 수플로는 처음부터 고딕과 그리스풍 고전 양식의 통합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수플로는 구조적으로 육중한 벽으로 돔을 지탱했던 고전 양식의 구조를 버리고, 얇은 기둥들이 서로 연개되어 지탱되는 고딕식 구조를 추구했다. 이를 통해 교회 기둥들은 더욱 얇아지고, 가볍게 보일 수 있다. 외벽를 둘러싼 48개의 큰 창들을 내서 건물 안을 밝게 비출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평면은 고딕식의 긴 라틴 십자가가 아닌 그리스 십자가식의 중앙집중식 평면을 선택했고, 중앙에 돔을 건설하고, 세부적인 장식 역시 고전 양식으로 덧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평면은 라틴 십자가식으로 변경되었고, 돔은 점차 커져 세인트 폴 대성당의 이중 구조 돔과 유사한 이중구조의 돔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커다란 돔은 얇은 기둥들로 떠 받쳐지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 숨겨진 공중 부벽등이 옆에서 추가로 지탱하고 있었다.

 

아무튼 많은 설계 변경이 되면서 차츰 교회는 건설되기 시작했으나, 1780년에 수플로가 사망하게 된다. 수플로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아직 돔이 다 올라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1790년에 설계대로 완성된다. 그러나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새로운 분위기는 이 건축물을 크게 변형시키게 된다. 1791년에 원 설계자인 수플로가 없는 상태에서 이 건축물은 왕의 성당에서 위인들의 묘지로 그 용도가 바뀌게 된다. 이름도 팡테옹으로 바뀌게 되었고, 묘지와 밝은 건물이 안 어울린다고 판단되어 건물을 둘러싼 48개의 창을 벽돌로 막아버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성당 외벽의 창 장식들은 다 사라지고, 외관의 종교적인 조각들 역시 전부 폐기되었다. 심지어는 1790년대 말에 돔을 제거하거나 피라미드 형태로 개장하는 재설계안도 나왔었지만, 다행히 실현되지는 않았다. 참고로 교회 근처에 세워졌던 종탑도 이 때 철거되었다.

몇 년 뒤에는 더 안좋은 사실이 밝혀진다. 돔 아래인 로툰다를 둘러싼 기둥에서 균열이 발견됨에 따라 이 성당의 구조가 돔을 지탱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된 것이다. 결국 1806년에 돔 아래의 아치 부분을 받치는 기둥을 버팀벽으로 교체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구조물은 원형보다 육중해질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때 건물의 장식과 조각들은 새로 설치되었다.

 

이러한 변화들 때문에 이 건물은 수플로가 목표로 했던 밝고 가볍게 보이는 느낌의 건축물에서 크게 후퇴하게 된다. 결국, 수플로의 이상은 온전히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테온은 훌륭한 건물이며, 파리의 대표적인 18세기 건물로 꼽히고 있다.

이 건물의 정면은 판테온에서 따왔다. 정면에서 입구를 바라보면, 로마의 판테온과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내부로 들어가보면, 1층은 전시실로, 이곳에 잠든 여러 인물들을 기리기 위한 예배당 등이 있다. 무덤인 만큼 내부는 어두운 곳도 있다. 으스스하기보다는 마치 박물관이나 기념관 같은 분위기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지어진 건물인 만큼, 석조건물의 느낌이 색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안장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여러 묘비에 쓰여진 글을 읽으며 그 속에서 우리가 아는 아이작 뉴턴, 찰스 로버트 다윈 등을 찾을 수 있듯, 이곳 팡테옹에서도 여러 묘비에 쓰여진 글을 읽으며 우리가 아는 여러 위인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마리 퀴리와 그의 남편 피에르 퀴리,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장 자크 루소, 볼테르, 앙드레 말로, 알렉상드르 뒤마 등이 이곳에 묻혀 있다.

대부분 18세기 초창기에 안장된 장 자크 루소나 볼테르 같은 경우는 따로 대리석관을 제작하여 안장했으나, 19세기 이후부터는 카타콤처럼 벽에 관이 들어갈 광중을 파고 관을 안장한 다음, 석관 반쪽 모양으로 제작한 석재 뚜껑을 덮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이 석재 뚜껑에는 해당 위인의 이름과 생몰년이 새겨져 있다.

뤽상부르 궁전(Palais du Luxembourg), 정원

뤽상부르 궁전은 1625년 앙리 4세의 건축가 살로몽 드 브로스(Salomon de Brosse)가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édicis) 왕비의 뜻에 따라 지은 건물이다. 뤽상부르 궁전의 건축양식은 전형적인 프랑스 바로크 성 양식으로 정사각형 안마당을 감싸는 H자형 평면이 전체적으로 긴사각형 윤곽을 띄며 중앙 출입구에는 돔 모양의 힙 루프를 얹었다. 뤽상부르 궁전을 장식하던 루벤스(Rubens)의 대작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Le Cycle de vie de Marie de Médicis)<앙리 4세의 생애>(Le Cycle de vie de Henri IV)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절대왕정 시대에 왕실의 저택으로 쓰였던 뤽상부르 궁전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포정치 기간 동안에는 감옥으로 쓰였다. 총재정부에 이어 왕정복고 그리고 공화국이 들어서기까지 뤽상부르 궁전은 다양한 형태의 상원을 수용하였다. 18307월 혁명 이후에는 오를레앙 왕조가 들어서며 7월 왕정이 시작되었고 상원의원의 수가 271명으로 늘어났다. 루이 필립 국왕은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1836년에 뤽상부르 궁전을 확장하였다. 현재 프랑스 상원의원의 수는 321명으로 1958년 샤를 드골 장군이 수립한 제5공화국 상원의회의 구조와 같다.

 

뤽상부르 궁전이 위치한 뤽상부르 정원(Jardin du Luxembourg)은 총 면적이 25헥타르에 달하고 기하학적인 설계를 자랑하는 파리의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 하나이다. 영국식 정원과 프랑스식 정원이 조화를 이루며, 빽빽이 심어진 나무들이 작은 숲을 연상케 한다. 정원 내부에는 작은 과수원과 난초(현재 뤽상부르 공원의 난초들은 자연사박물관에 위치한 파리 식물원에서 전시 중이다 Jardin des Plantes, Mille et une orchidées, 2.11.2016~3.7.2016), 야자수 등의 식물을 키우는 온실이 있으며, 106개의 조각상과 메디시스 분수(fontaine Médicis), 오랑쥬리(Orangerie) 등을 감상할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이곳에서 산책이나 운동을 하고, 체스, 뻬땅끄(pétanque: 쇠공을 던져 맞추는 프랑스의 전통 놀이)와 같은 놀이를 즐기는 프랑스인들을 볼 수 있다. 공원 둘레는 4km에 달하며, 곳곳에 동상과 조각상들이 자리한다.

생 제르맹 거리(Boulevard Saint-Germain)

생 제르맹 거리는 여러 명품 매장들이 즐비해 있는 패션 거리다. 우리가 아는 유명 매장뿐 아니라 개인숍도 많으니 여유롭게 쇼핑을 즐기면 좋다. 샹젤리제나 다른 쇼핑 거리에 비해 한적하고 조용한 편. 무엇보다 이곳은 유명 철학가와 작가, 예술가들이 모여 토론하고 작업했던 카페와 서점들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레 뒤 마고’, ‘카페 드 폴로르등에 당시 분위기가 남아있으니 쇼핑하다가 지치면 커피를 마시며 쉬어 가자.

생 제르맹 데 프레 교회(Église de Saint Germain des Prés)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542년에 스페인에서 전쟁 중이던 쉴데베르(Childebert)왕이 생 뱅상(204년에 사라고사에서 순교)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 사라고사의 포위를 풀어주고 그 곳 주교에게 감사의 표시로 받은 생 뱅상의 유품을 보관하기 위하여 558년 건립했다.

메로빙거 왕조의 매장지로 사용되었던 이 교회는 왕실의 후원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재정적 기반이 든든한 교회가 되었다. 8세기경에는 이 지역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베네딕토회에 의해 종교, 문화의 거점이 되었고, 프랑스 대혁명 전까지 필사실을 갖추고 성서의 사본을 제작하기도 했다. 9세기에 노르만에 의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가 1014년에 바실리카식 교회로 재건되었다. 1163년에는 로마교황 알렉산더 3세에 의해 증축되고 시성인 생 제르맹에게 헌정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감옥과 화약창고로 사용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는데 이 때 990~1014년에 건설된 3개의 종탑 중 두 개가 파괴되고 한 개는 보존되어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 된 종탑 중 하나로 꼽힌다. 1820년에 건축가 고드(Godde)와 발타르(Baltard)에 의해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대리석상인 <위로의 성모 마리아상>(1340)과 철학가이자 수학자인 데카르트의 묘비가 있다.

입장 매일 08:00-19:00

들라크루아 박물관(Musée Eugène Delacroix)

외젠 들라크루아 국립 박물관은 프랑스의 대표적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가 살던 아파트와 아틀리에, 작은 개인 정원을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질병에 시달리던 들라크루아는 생 쉴피스(Saint-Sulpice Church) 성당을 장식하는 일을 완성하기 위해 작업장에서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다. 그는 18571228일부터 1863813일 임종할 때까지 이 곳에 살았는데, 잡지에 새 아파트를 자랑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한때 세입자들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파괴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1870~1943), 폴 시냑(Paul Signac, 1863~1935) 등이 중심이 되어 들라크루아 협회를 만들고 작가의 집을 보존하였다. 1952, 협회는 소장품을 국립 박물관에 팔아 그 수익금으로 아파트와 스튜디오, 정원을 확보했고, 1954년에 박물관이 세워진다는 조건 하에 프랑스 정부에 모든 재산을 헌납했다. 1971년에는 마침내 국립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1999년 새로 단장한 박물관은 아늑한 분위기 속에 들라크루아의 작품 세계로 안내한다. 회화, 드로잉, 수채화, 파스텔화, 스케치, 편지와 사진 등이 함께 전시되어 들라크루아의 놀라운 이력과 다양한 주제들을 한 눈에 보게 한다. 이 가운데 1845년 살롱에 전시된 <사막의 막달레인(la Madeleine au désert)>이 가장 독특한 종교적 작품이다. 이는 1842년 노앙(Nohant)에서 그려진 <처녀의 교육(L'Education de la Vierge)>에 비교된다.

입장 매일 09:30-17:00

오르세 박물관(Musée d'Orsay)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의 작품이 전시되는 미술관으로,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과 동 시대 조각가들의 작품이 주된 전시물이다. 오랑제리 미술관과 세트로 운영되는데, 운영위원회가 같고 두 미술관을 동시에 둘러볼 수 있는 공동 입장권도 있다. 오랑주리가 모네 전문이라면, 이곳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중요 작품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물론 오르세 미술관에도 모네의 작품이 있지만, 귀스타브 쿠르베, 장 프랑수아 밀레, 마네 등의 유명한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이 많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밀레의 <이삭줍기>도 이 박물관의 소장품이다. 그 이외에 에드바르트 뭉크,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같은 해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조각도 상당한 수준으로 <지옥의 문>이나 <청동시대>로 유명한 로댕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사진도 예술로 인정, 컬렉션에 포함시켰다는 건데 이 결정을 꽤 이른 시기에 했다. 1970년대에 프랑스에는 사진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없었는데, 최초로 오르세 미술관이 사진을 전시물에 포함시켰다. 소장하고 있는 사진 작품만 해도 45천장이라고 한다. 이들 사진들도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의 작품들인데, 이 시기는 사진의 경우 초창기에 해당된다. 사진기술이 열악할 때 찍힌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 사진의 등장이 이 미술관이 주제로 삼고 있는 인상파가 나오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꽤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하다.

 

건축 예술 부분도 다루고 있는데,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에 해당되는 각종 건축물의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미술관 건물 자체도 예술이다. 원래 오르세 미술관 건물은 미술관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철도역(Gare d'Orsay)과 호텔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1900년 세계 만국 박람회의 수요를 노리고 지은 건물로, 오를레앙 철도회사의 터미널 역이었다. 이 건물을 건축한 사람은 빅토르 라루. 당시 기준으로서는 대단히 현대적인 건축물로, 그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여러 시설이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오르세 역은 승강장 길이가 짧았고, 철도가 발전하면서 차량의 길이가 길어지고 연결되는 차량 수도 많아지자 한계에 다다랐다. 이에 1939년에 장거리 열차의 운행을 중지, 근거리를 운행하는 로컬 열차만 운행하는 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나마도 이용객이 줄면서 폐지되었고, 1973년에는 호텔마저 운영을 중지하면서 폐역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1978년부터 역 건물을 미술관으로 리모델링을 시작했고, 1986년에 미술관으로 재개장했다. 오르세 역을 폐역시킨 RER C선은 1979년에 영업을 시작했고, 오르세 미술관 역이 오르세 역을 대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테크트리를 훗날 서울역이 뒤따르게 된다.

입장 화~일 09:30-18:00(목요일 21:45까지) 입장료 오디오가이드 5유로 기타사항 사진촬영 불가(실상은 대부분 촬영하고 있음)

오르세 미술관에서의 사건사고

드보라 드 로베르티스(Deborah De Robertis)라는 벨기에 예술가가 <세상의 기원> 그림 앞에 앉아 치마를 걷고 다리를 벌려 자신의 성기를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벌여 화제를 일으켰다. ‘기원의 거울이라고 명명한 이 퍼포먼스를 벌인 이유에 대해 그녀는 여성의 성기를 그리는 것은 예술이고 보여주는 것은 왜 외설이냐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오르세 미술관 측은 예술이냐, 외설이냐가 아니라 미술관 규칙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다라고 규정했다. 유튜브와 그녀의 페이스북에 다양한 응원 댓글이 올라오고 있다. 이미 유튜브에 이 행위예술가의 퍼포먼스 영상이 올라와 있는데 유튜브 쪽에서는 예술행위로 인정한 모양인지 아무런 모자이크나 검열 처리도 하지 않고 있었다. , 유튜브 영상은 사라졌다.

소장품

한국어 오디오가이드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대여해서 관람하는 것이 좋다.

파리 지하묘지(Catacombs)

카타콤은 로마시 주위의 지하무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그 의미가 확장되어 굴과 방으로 이루어진 모든 시설물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탈리아어의 영향으로 카타콤바(Catacomba)라고 쓸 때도 있다.

파리의 카타콤은 다른 나라들의 것과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국왕이었던 루이 16세가 도시 꾸미기 정책을 실시하며 파리와 파리 인근의 어울리지 않는 모든 구조물을 철거하는데, 이중에는 묘지도 있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카타콤이지 때문이다. 로마 식민지 시절 사용되지 않았던 폐 채석장을 사용했다고 하며 묻혀있는 유골은 대략 500~600만구이다. 흥미로운 것으론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과 프랑스 레지스탕스군이 이곳에 작전본부를 세웠다고한다. 두 작전본부의 거리는 불과 몇km도 되지 않았지만 워낙 미로같은 카타콤의 구조 때문에 서로 만나지는 않은 듯하다.

불과 몇십년전만 해도 다른 카타콤과는 달리 해골이 가득한 산을 만들정도로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수년에 걸친 보수 끝에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다. 또한 여행객들이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보수 후 여러 통로를 봉쇄하였다.

 

이곳에서는 공포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기괴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홀로 모험을 강행하다가 실종된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카타콤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한데다 다른 용도로 만들어 두었던 지하 공간까지 흡수해 버리면서 굉장히 난잡하게 길이 뚫려있다. 그야말로 지하 미궁이다. 일부 지역은 깔끔하게 직선 직각으로 계획적으로 갱도를 만들었지만 또 다른 일부 지역은 그야말로 개발새발 선을 그은 듯한 갱도로 구성되어 있다. 대중에 개방된 구간은 전체 대비 0.6%에 불과하다고 한다.

가끔씩 이곳에 쌓여있는 해골을 몰래 가져가는 관광객들도 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출구에 가방을 검사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리 까다롭지 않은지 종종 반출되는 실정이다. 특히 1998년에 방영된 프랜시스 프리랜드란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로 때문에 카타콤에는 지옥문이 있을거란 도시전설이 상당히 유행했다.

워낙 시설 자체가 방대하다 보니 관리가 어려워 일부 미관리 지역은 민간인들이 몰래 사용하기도 하는데, 특히 비행청소년들의 일탈의 장소로 쓰이거나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캔버스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2004년에는 누군가가 이곳에 영화상영관을 만들어 두었다가 경찰에게 발견되었다. 영사기, 관객석 등 기본적인 구성요소는 물론 식당까지 구비된 비밀 영화관이었으며, 영사기에는 당시 최신 영화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누가 만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결국 2011년에 들통나고 말았다. 미국 IT매체 기즈모도에 의하면 이 영화관은 프랑스의 급직적 예술단체 레 우쓰(Les UX)가 만들었다고 한다. 공사기간은 총 16개월이 걸렸으며 만든 이유는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장 화~일 10:00-20:30 입장료 12유로

몽파르나스 묘지(Montparnasse Cemetery)

파리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는 프랑스 으뜸가는 많은 지식인들이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소이다. 20세기 초에 몽파르나스는 예술가, 작가, 음악가, 지식인들, 당대의 놀기 좋아하던 사람들이 빈번히 오가는 보헤미안 구역으로 알려졌다.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는 유명한 프랑스 시민들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인들도 잠들어 있다.

1824년 지어졌으며 당시에는 '르 심티에르 뒤 쉬드', '남쪽 묘지'로 알려졌던 이곳은 예전에는 세 개의 농장이 들어서 있던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몽파르나스 공동묘지는 19세기에 파리에 지어진 네 개의 주요 공동묘지 중 하나로, 나머지는 북쪽에 있는 몽마르트르 공동묘지, 동쪽에 있는 페르-라셰즈 공동묘지, 현재 도시 중심에 있는 파시 공동묘지이다. 1786년 건강에 대한 염려로 도시 내부에 묘지를 짓는 일이 금지되었으므로, 이 묘지들은 당시의 파리 시 중심지 외곽에 건설되었다.

 

파리는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의 스타일리시하고 화려한 웅장한 무덤 안에 가장 명망 높은 시민들을 매장해 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매장하고 있다. 묘비 중 몇 개는 가치 높은 예술 작품이기도 하다. 프랑스 조각가 세자르 발다치니는 자신의 무덤을 위해 미노사우루스 형상을 한 스스로의 모습을 청동 조각품으로 만들었고, 루마니아의 조각가 콩스탕탱 브랑쿠시의 입체파 돌 조각품 <르 베제>(키스)는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타냐 라체프스카이아의 무덤을 장식하고 있다.

나무가 늘어선 이 묘지의 대로는 격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에밀 리샤르 거리가 이 묘지를 큰 묘지와 작은 묘지라 알려진 두 구획으로 나누고 있다. 이곳에 묻혀 있는 이들로는 전 멕시코 대통령 프로피리오 디아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오스카 도밍게스, 아일랜드의 극작가이자 프랑스 애호가인 사무엘 베케트, 아방가르드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가인 페미니스트 시몬느 드 보부아르,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 프랑스 작가 기 드 모파상, 프랑스 배우 필리프 누와레가 있다.

몽파르나스 타워(Tour Montparnasse)

1969 년부터 1973 년까지 건설된 이 건물은 2011년까지 프랑스 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였으며 20173월을 기준으로 유럽​​연합에서 14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높이 209m의 빌딩으로 나머지는 사무공간 등이고 56층 카페와 59층 전망대만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이곳 카페와 전망대에 오르면 에펠탑, 개선문을 비롯해 파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현지인들에게는 그리 인기가 없다고 하지만, 파리 풍경을 만끽하고 싶은 여행객들에게는 매력만점이다.

단순한 외형이 파리 도시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 왔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타워가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이 이 타워라는 점에서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편 2005녀 연구결과에 따르면 건축에 석면 물질이 검출됐다고 해서 문제가 됐는데, 2007년부터 제거 작업을 했다.

입장 매일 09:30-22:30(·토는 23:00까지)

마르스 광장(Champ de Mars, 샹드 막스)

에펠탑의 북서쪽, 에콜 밀리테르(École Militaire)의 남동쪽에 있다. ‘마르스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곳이 사관생도들을 위한 군사 훈련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프랑스 혁명 중인 1790714일에 축제(Fête de la Fédération)가 열렸던 장소이다. 또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 발생한 지 2년째인 1791717일에는 국왕인 루이 16세를 몰아내자며 군중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당시 시장이었던 장 실뱅 바이이가 군중들에게 발포하기도 했다.

관광객에게 이곳은 에펠탑의 그늘이 드리워진 녹색 공원으로, 파리에서 가장 평화로운 분위기 느껴볼 수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 샹드 막스 공원의 잔디밭에 누워 프랑스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인 에펠탑의 멋진 모습을 감상하거나, 공원 끝자락에 서 있는 평화의 벽이 품고 있는 가슴 시린 사연에 대해 알아보거나, 피크닉을 즐기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여행 일정이다.

인권기념비(Monument des Droits de l'homme)

파리시가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 이집트 신전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것으로 체코 출신 조각가 Ivan Theimer의 작품이다. 기념비는 인권 선언의 내용을 담은 두 개의 오벨리스크, 문서를 든 남자의 동상, 옷을 입은 여인와 알몸인 채 신문으로 만든 모자를 쓴 어린이의 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의 이름을 새긴 돌들도 있는데 북서쪽에는 리스본(lisboa) - 파리(paris) - 브뤼셀(bruss), 켈리(xelles) - 런던(london) - 더블린(dublin)이 있고, 남서쪽에는 아테네(αθήνα) - 로마(roma) - 룩셈부르크(luxembourg) - (bonn) - 암스테르담(amsterdam) - 코펜하겐(kobenhavn)의 이름이 있다.

평화의 벽(Mur pour la Paix)

공원 저쪽 끝을 향해 걷다 보면 평화의 벽과 마주하게 된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영감을 얻어 2000년에 지어진 이곳은 클라라 알테르(Clara Halter)라는 예술가가 설계를 하고 건축가 장 미셸 빌모트(Jean-Michel Wilmotte)가 건축했다. 평화의 벽은 3개로 이루어진 트리오 기념물 중 하나인데, 비슷한 나머지 두 기념물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일본 히로시마에 위치해 있다. 높은 철강 구조물의 정면에 사용된 유리판에는 평화라는 단어가 49개의 언어와 18개의 알파벳으로 새겨져 있는데, 유리판 앞에서 자리를 바꾸면 반투명 단어도 찾아볼 수 있다.

몽마르트(Montmartre) 언덕 구역

몽마르트르(Montmartre)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해발고도 129m의 언덕을 이룬다. ‘마르스(군신)의 언덕(Mont de Mercure)’이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순교자(martyrs)’에 언덕을 뜻하는 ‘몽(Mont)’과 합쳐져 ‘순교자의 언덕’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한다. 1860년 파리에 편입되었다. 해발 130m의 야트막한 언덕이지만 평지가 주를 이루는 파리에서는 시가지를 내다볼 수 있을 만큼 높은 지대에 속한다. 꼬불꼬불한 골목이 이어진 길을 따라 계단을 오르다 보면 시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꼭대기에 다다른다. 언덕에서는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파리 거리의 이모저모를 볼 수 있다. 
272년 성(聖)도니와 2명의 제자가 순교한 곳이며, 12세기에 베네딕트파의 수녀원이 건립되었다. 그 일부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생피에르 성당은 지금도 남아 있다. 2월혁명(1848) 전에 여기서 정치집회가 열렸으며, 파리코뮌(1871)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1880년경부터 남쪽 비탈면에 카바레 등이 들어서기 시작하였으며, 기슭에 있는 클리시·블랑시·피가르 등의 광장 부근은 환락가가 되었다. 몽마르트르는 자유분방함을 즐기는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유명하다. 근대미술의 발달을 촉진한 예술가들이 살았던 지역으로서도 유명하다. 
특히 19세기 후반 이래 고흐·로트레크를 비롯한 많은 화가와 시인들이 모여들어 인상파·상징파·입체파 등의 발상지를 이루었으나, 20세기부터 점차 몽파르나스로 옮겨갔다. 언덕 위에 세워진 사크레쾨르 대성당(1910년 완성)은 순례지로서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아들고 있으며, 유서 깊은 저택과 물랭루주 등의 카바레가 있다. 그 외에도 옛집이 늘어선 거리는 19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아직도 화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물랭루즈(Moulin Rouge)

빨간 풍차라는 뜻의 물랑루즈는 19세기 파리의 환락가에 위치한 무희들의 공연과 마약, 매춘으로 가득했던 현존하는 클럽이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아름다운 시대)라 불리는 빛의 도시 파리의 아름다운 시절, 밤마다 휘황찬란하게 빛났던 이곳은 188910월 음악홀로 문을 열었다. 공동소유자인 조셉 올레(Joseph Oller, 1839~1922)와 샤를르 지들러(Charles Zidler)에 의해 물랭루즈(Moulin Rouge)’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물랭루즈는 빨간 풍차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옥상에 설치된 크고 붉은 네온사인 풍차에서 유래했다. 이후 음악과 춤의 사원이 되었고, 남성들이 젊은 파리 여성들을 볼 수 있는 장소로 명성을 얻었다.

파리 여성들의 독특하고 놀라운 춤은 그들의 도덕관념만큼 유연했다. 캉캉춤이 1830년대 이래 노동자계급의 볼룸댄스로 이미 소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랭루즈는 초창기에 이 춤으로 대중적 인기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초창기 음악홀의 가장 유명한 후원자는 화가 앙리 드 툴르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이었다. 그는 물랭루즈 풍경에 대한 다수의 그림을 그렸다. 1864년 부유한 프랑스 귀족 알퐁스 백작 가문에서 출생한 로트렉은 뼈가 잘 부러지고 키가 자라지 않는 선천성 질환의 장애인이었다. 154cm의 작은 키로 지팡이에 삶을 지탱하던 유약한 영혼의 그에게 해방구가 되어 준 곳은 당시 파리의 낭만과 사랑으로 일렁이던 물랑루즈였다. 그는 자신과 같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천대받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위로와 편안함을 얻었고, 그곳을 배경으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밤새도록 그는 술에 취해 위태롭게 춤추는 무희들의 흔들리는 겹겹의 치맛자락, 삶에 찌든 술 취한 노동자들, 처연한 웃음이 얼굴에 장식처럼 새겨진 유곽의 여인들을 화려한 색채로 석판화에 담아 세기말 파리의 현란한 불빛에 감춰진 우울한 이면을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포스터 작업으로 물랑루즈는 더욱더 유명해졌다.

벨 에포크가 끝나자 물랭루즈는 사창가로서의 명성을 잃는 대신 영화관으로 잠시 바뀌었다가, 발 뒤 물랭루즈라는 이름의 공연장이 되어 고급 고객들을 유혹하는 화려한 카바레쇼의 무대를 올리고 있다. 오늘날 물랭루즈는 파리의 성인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트쇼를 보기 위해 찾아온다. 쇼는 100명 이상의 무용수들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출연하는데, 성인용 쇼로 어린이들은 관람할 수 없다.

사랑의 벽(Le mur des je t'aime)

몽마트르 언덕 아베스 스퀘어에 있는 쥬 뗌므 벽(Le Mur Des Je t'aime)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전 세계의 300여개 이상의 언어로 무려 1,000번 적혀 있는 벽이다. 40면적의 벽에 가로 29.7cm, 세로 21cm 크기의 타일 511개를 붙여 만들어진 것으로 지역 방언과 심지어 수화까지 망라하고 있다.

이 벽을 고안한 프레데릭 바론(Frederic Baron)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문구를 모으려고 했으나 실제로는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자, 주변 사람들 또는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각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찾았다고 한다. 프레데릭 바론이 사랑의 벽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인물은 끌레어 키토(Claire Kito)라는 여인으로, 중국서체 연구와 동양화 연구가였던 그녀는 중국서체를 배우기 위해 찾아온 프레데릭 바론과 함께 2000년 사랑의 벽을 몽마르뜨 언덕 아래 공원에 만들게 된다. 이 벽에 서면, 본인의 입으로 고백하지 않아도 300개의 언어로, 일천번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시네마스튜디오28(Cinéma Studio 28)

예술가들의 고향몽마르트에 자리한 스튜디오 28은 많은 아티스트들이 교류했던 장소였고, 지금도 예술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문화 공간이다. 1928년 장 플라스드 모끌레르가 문을 연 것이 출발로 파리 최초의 아방가르드 극장으로 꼽힌다. 장 콕도, 루이스 부뉴엘 등 문학가, 영화인들이 모여들면서 예술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름을 높였다.

붉은 풍차로 유명한 물랭루즈 인근에 자리한 이 극장은 1948년 룰로 형제가 운영을 맡으면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들은 루이스 부뉴엘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상영하고 그림과 사진 전시, 재즈 콘서트 등을 열며 스튜디오 28’을 명소로 만들었다.

170석 규모의 스튜디오 28은 파리 예술영화관으로는 드물게 상영관이 하나뿐인 단관 극장이다. 소박한 극장 입구로 들어서면 극장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찬찬히 극장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극장 벽면엔 연륜을 느낄 수 있는 장 콕도 등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고, 유명 예술가들의 발 모양을 찍어 놓은 동판들도 보인다. 잉그리드 버그만, 알프레드 히치콕 등 헐리우드 스타들의 대형 판넬도 반갑다.

 

극장 입구에 놓인 사진 촬영 기계도 인상적이다. 1950년 영화 사진들을 촬영했던 ‘Harcourt’는 파리 스튜디오 요청에 따라 설치해둔 것으로 195060년대 배우처럼 사진을 찍을 수 있어 관객들에게 인기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멋진 상영관이다. 사실, 상영관 안은 특별한 무엇을 만들기 어려운 공간이다. 하지만 이 상영관에 들어서면 잠시 동화의 세계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고깔 모양 조명이 어우러진 샹들리에와 자주빛 의자, 푸른 조명, 붉은 벨벳 가림막까지 아름답다. 상영관은 스튜디오 28의 후원자였던 세계적인 문호 장 콕도가 직접 디자인했다. 극장에는 또 파티 등을 할 수 있는 작은 식당과 야외 테라스, 정원도 자리하고 있다.

스튜디오 281969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회원제를 도입한 극장이기도 하다. 아버지에 이어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알랭 룰로는 관객 커뮤니티 원조 극장으로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작가영화와 기존 극장에서 개봉한 뒤 34주차가 지난 영화들도 함께 상영한다. 오후 3시는 은퇴자, 오후 5시는 구직자나 실업자, 오후 7시는 직장인 등 타겟을 정해 프로그램을 짜는 등 전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 다양한 정보를 담은 뉴스레터도 꾸준히 발간한다. 매주 화요일에는 시사회를 개최하고 일요일에는 감독 등 예술인들과 만나는 씨네클럽을 운영한다. 10월 말에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감독 클로드 를루슈 감독이 함께 자리했다. 수요일은 어린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오후 3시 영화를 상영하고 생일 파티 등 다양한 이벤트도 함께 마련한다.

그러나 스튜디오 28 역시 경영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공적 지원금을 받고 있지만 전체 예산의 810% 수준이고 대관과 카페 운영으로 20% 정도를 충당하고 있다.

고흐의 집(Maison de Van Gogh)

반 고흐가 동생 테오와 함께 살았던 집이다. 고흐의 동료들이 몰려들 때면 테오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곤 했다고 한다. 지금은 일반 사무실과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어 입장해 볼 수 없다. 파란 문 옆 작은 석판이 그가 살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그가 살던 방의 창문에는 해바라기가 꽂혀 있다.

라데 풍차, 걀렛 풍차(Le Moulin Radet, Moulin de la Galette)

현재 몽마르트르 지역에는 두 개의 풍차만이 남아있는데, 라데(Radet) 풍차와 갈레트(Moulin de la Galette) 풍차(원래 이름은 블뤼트팡 풍차)가 바로 그것이다. 밀을 갈거나 포도의 즙을 짜는 데 이용하기 위해 17세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던 제분용 풍차들은 총 30대 이상 설치됐었지만, 1870년부터 없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라데 풍차는 길가에 있어서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만, 보다 안쪽을 잘 들여다보면 블륏-팡이라는 풍차가 하나 더 있다. 라데와 블륏-, 이 두 풍차를 합해서 걀렛 방앗간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물론 이 풍차들을 사용하여 방아를 찧지 않는다. 오히려 방앗간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음식점으로 영업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사실 완전히 식당이 되기 전에도 이 방앗간은 이미 어느 정도 간이 식당이었다. 풍차를 이용해서 빻은 곡식으로 얇은 빵, 즉 걀렛(galette) 을 만들어 팔았던 것이다.

술집겸 식당이 되고 나서 이 방앗간은 많은 화가들의 단골집이 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몽마르트르가 예술의 중심지였을 때 많은 화가들이 이 풍차의 외형이나 식당 안의 흥겨운 풍경을 그림에 담았다.

벽을 뚫는 남자(Le Passe-Muraille)

마르셀 에메 광장(Place Marcel Ayme) 벽면의 예술품으로, 소설 <벽을 뚫는 남자>를 기념한 청동상이다. 환상과 현실의 조화를 멋지게 묘사한 이 소설은 몽마르트의 골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뮤지컬로도 유명해 수많은 소설과 뮤지컬 팬들이 방문하는 명소 중 하나이다.

레앙드르 주택가(Villa Leandre)

앵글로색슨 스타일의 벽돌집과 포장도로로 이루어진 작은 주택가 골목으로 아기자기한 외양 때문에 입소문이 나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코미디언인 샤를 레앙드르(Charles Leander, 1862~1934)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달리다 광장(Place Dalida)

이탈리아인 부모에게 태어난 이집트 출생의 여가수 달리다(Dalida, 1933~1987)는 프랑스 국민 가수이자 유럽과 미국에서도 큰 활약을 했던 가수이다. 아름답고 노래 실력이 좋았지만 개인적인 삶은 매우 고독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만난 적지 않은 연인들이 모두 자살했고, 결국 그녀 역시 우울증을 이기지 못한 채 몽마르트의 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광장은 파리가 그녀에게 헌정한 광장으로 길이 19m, 13m의 규모이다. 달리다의 청동 흉상이 놓여 있다.

몽마르트 박물관(Musée de Montmartre)

몽마르트르 언덕의 역사와 예술 자료를 주로 전시한다. 박물관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60년이다. 그러나 박물관이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그보다 훨씬 전인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이다. 특히 이 건물은 19세기 중반부터 몽마르트르의 화가로 불리는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를 비롯해 빈센트 반 고흐,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등 저명 화가와 프랑스의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등 예술가들이 모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이들은 이곳에서 작품을 직접 제작하기도 하고 예술에 대해 토론도 하는 등 박물관 건물을 예술가의 사랑방형태로 이용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당시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비주류 예술가들이었다.

주요 전시물은 몽마르트르 지역과 연고가 있는 유럽 및 프랑스 예술가들의 작품들이다. 19세기 프랑스의 비주류 예술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혁신적인 작품이 많이 전시돼 있다. 특히 몽마르트르 환락가에서 창녀와 무희들의 모습을 주로 그려 밤의 산책자라는 별명을 얻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22세에 파리에 들어와 몽마르트르 일대를 방황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아마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작품이 상당수 보관돼 있다.

입장 매일 10:00-18:00 입장료 8유로

달리 미술관(Espace Dali)

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 작품 전시관이다. 관광객으로 가득 찬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비교적 조용한 풀보 거리(rue Poulbot)가 있다. 박물관은 이곳에 위치한 한 건물의 지하 2층을 전시관으로 사용한다. 비좁은 입구로부터 계단을 통해 한참 내려가면, 나무 가지 위에 걸린 <녹아내린 시계>라는 놋쇠 조각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미술관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달리의 스케치와 일러스트, 조각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초기 작품도 일부 포함되어 있으며 사진, 석판화, 가구, 의상 등 300여점을 만날 수 있다. 작품 설명은 영어, 불어, 스페인어로 제공된다. 기념품점에서는 포스터와 달리 관련 아이템들을 구입할 수 있다. 미술관은 결혼식과 개인 파티를 위해서 임대하기도 한다.

입장료 11.5유로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

거리의 화가와 여행자들로 늘 북적이는 몽마르트르의 관광명소다. 19세기 후반 무렵, 마티스와 피카소, 고흐 등 유명한 화가들이 광장 주변에 자리를 잡아 예술인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은 무명 화가들이 관광객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광경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초상화 그리는 가격은 보통 30~50유로 정도인데, 화가가 자기 마음대로 초상화를 그리고 비싼 값을 요구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므로 주의해야 하며, 미리 흥정을 하여 요금을 정하는 것이 좋다. 관광객으로 항상 붐비는 곳이므로 소매치기나 사기꾼을 조심해야 한다. 경찰을 사칭하거나 방심한 틈을 타 지갑이나 핸드폰 등을 날치기하는 경우가 많으니 소지품 관리에 신경을 기울이자.

 

광장은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가볼만한 곳은 라 메르 카트린(La Mere Catherine)’이라는 레스토랑이다. 1793년에 오픈한 역사 깊은 곳이다. 1814년 프랑스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을 때 이 레스토랑을 즐겨 찾던 러시아 병사들이 외쳤던 러시아어 비스트로(빨리)’가 오늘날 레스토랑을 뜻하는 프랑스어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바레 오 라팽 아질(Au Lapin Agile)’에도 들러보자. 화가인 앙드레 질이 1880년에 간판에 그린 토끼가 이곳의 이름이자 마스코트가 되었다. 냄비에서 막 튀어나오고 있는 토끼는 붉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술병을 들고 있으며 금방이라도 테이블로 술병을 나를 듯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라팽은 토끼라는 뜻이며 아질은 그림을 그린 앙드레 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테르트르 광장이 예술인의 명소로 부흥하면서 위트릴로와 피카소 등 유명한 화가들도 자연히 단골이 되었는데, 피카소는 이곳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곳은 또한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노래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샹송 쇼와 만담 무대를 볼 수 있다. 많은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테르트르 광장은 예전의 보헤미안적인 느낌을 잃고 상업적인 면만 남았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수많은 예술작품이 탄생한 본거지를 찾아오는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사크레쾨르 대성당(Sacré-Cœur)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침체된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목적으로 모금한 돈으로 만들어졌다. 1876년에 기공되어 1910년에 완성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항복 후에 헌당식을 했다. 성당 앞에 잔 다르크의 동상이 있고 비잔틴 양식으로 하얀 돔이 우아한 자태로 솟아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사크레 쾨르라는 이름은 예수 성심이라는 의미이다. 새하얀 트래버틴 대리석으로 지은 조화로운 이 건축물은 파리에서 가장 높은 몽마르트르 언덕의 꼭대기에 서 있으며, 83m 높이의 돔에서는 남쪽으로 약 30km 전방에 이르는 멋진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1919년 축성된 사크레 쾨르는 교구 성당이 아닌 바실리카로, 예수의 성심에 경배하는 순례지이자 독립된 성소이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폴 아바디 Jr.(1812~1884)였으나 그가 1884년 사망하자 다섯 명의 건축가가 뒤를 이어 작업을 계속했다. 이 중 맨 마지막 주자인 루이-장 윌로는 84m 높이의 종탑과 명상을 위한 종탑과 연못을 지었다. 아바디는 사크레 쾨르를 설계하기 전에 중세 교회를 여럿 복원하였는데, 사크레 쾨르 역시 로마-비잔틴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입장료는 무료이지만 돔과 지하묘지는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생 투앙 벼룩시장(Marche aux Puces de Saint-Ouen)

생투앙 벼룩시장은 방브 벼룩시장, 몽트뢰유 벼룩시장과 함께 파리의 3대 벼룩시장 중 하나이자, 골동품 시장으로는 세계적인 명소로 손꼽힌다. 2001년부터 <건축 도시 경관 유산 보호 지역>으로 지정된 이곳은 7헥타르의 면적에 2500여 개의 가게를 포함한 14개의 개별 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가구와 아시아 예술품을 판매하는 비롱(Biron) 시장, 기상천외한 물건들과 포스터, 오래된 음반 등을 구할 수 있는 쥘 발레스(Jules Vallès) 시장, 소형 골동품, 고서 등을 취급하는 르파사쥬(le Passage) 시장, 1930~1940년대 아르데코식 가구와 70년대의 신식 디자인 용품들을 판매하는 말라시(Malassis) 시장, 아방가르드한 용품들과 가구, 장식품 등을 판매하는 폴 베르(Paul Bert) 시장, 70년대 빈티지한 용품들과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세르페트(Serpette) 시장, 생투앙 벼룩시장의 출발지인 베르네종(Vernaison) 시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몇몇은 지붕이 덮인 상점 형태이고, 몇몇은 노천 시장 형태로 되어 있다. 이 가게들은 온갖 나라에서 온 여러 시대의 잡다한 물건들, 예컨대 클래식한 골동품이나 앤티크 가구, 청동 제품, 예술품, 양탄자, 거울, 식기류, 유리제품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외에도 오래된 음반, 판화, 장난감, , 사진 등도 있고, 빈티지한 의류와 신발, 액세서리 그리고 용도를 알기 어려운 온갖 잡동사니들이 판매되고 있다.

 

파리 18구와 파리 외곽 생투앙 지역에 걸쳐져 있는 생투앙 시장은 파리의 4대 관광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고 가장 파리다운 곳이라 불리기도 한다. 전 세계의 고가구 판매상과 골동품 상인들의 집결지인 이곳에는 연간 약 5백만 명의 사람들이 방문하는데, 이 중에는 미술품 수집가, 여행객, 유명 인사들도 포함된다. 할리우드 영화배우 나탈리 포트만은 프랑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생투앙 시장을 든다고 한다. 우디 알랜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노트르담 성당 근처나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등 화려한 관광지들과 함께 생투앙 시장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집요한 애정을 가진 주인공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생투앙 시장을 방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경로이기 때문이다.

콜레트(Colette),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르네 클레르(René Clair),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 아리스티드 브뤼앙(Aristide Bruant) 등 수많은 예술가들, 작가, 가수들이 생투앙 벼룩시장을 노래하는 것은 아마도 이곳에 쌓여있는 물건들의 불멸성 때문일 것이다. 물건의 소유자는 계속 변하지만, 이손 저손을 거치면서 이 물건들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덧입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1885년에 탄생했다고 기록되고 있는 생투앙 시장은 오늘날 골동품 시장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에는 1,700여개의 판매업자들이 이곳에 소속되어 있는데, 이 중 1,400여 명이 고미술품 판매업에 종사하고 있어, 생투앙 시장은 시장이라기보다는, 온갖 진귀한 물품들을 진열해서 구경하는 박물관이나 갤러리와 닮아 있다. 이곳에 현재 전시되어 있는 가구, 예술품들을 보면 프랑스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 예술사 및 사회사까지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물품의 리스트와 가격 변동 과정만 살펴봐도 프랑스 사회의 변화상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이미 벼룩시장(Marché aux Puces)’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 벼룩이 포함된중고 옷가지와 침대 매트리스를 주로 팔았던 탓이다. 이제 여기서 이런 물건을 찾기는 힘들지만, 벼룩시장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남아 사용되고 있다.

운영 토 09:00-18:00, 일 10:00-18:00, 월 11:0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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