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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Kyoto, 京都)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18. 5. 29. by 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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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시

혼슈 중앙부에 있는 도시이다. 한국 한자음으로는 '경도' 시라고 읽는다. 인구는 약 150만 명이고 예전에 일본의 수도였다. 현재는 교토 부(京都府) 중앙부에 있는 부청 소재지이고 게이한신 도시권의 일부이다.

현재는 헤이안 시대의 문화가 남아있는 절, 신사, 역사 유적지와 벚꽃, 단풍의 명소가 많은 관광 도시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반면에 교세라, 시마즈 제작소와 같은 첨단 기술을 갖는 기업이나 닌텐도, 와코루와 같은 업계 상위 기업의 본사도 모여 있는 산업 도시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으며 주민 대부분이 오사카 시나 시내로 출근하여 베드타운으로서의 성격도 짙다. 지방색이 매우 분명한 편이어서 교토 시민들은 이 곳에 3대가 살지 않았으면 토박이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이다.

교토 시의 역사

‘교토(京都)’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교토는 미야코(수도)라는 뜻이다. 일본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는 기원전 10000년경부터 나타나지만, 6세기 전까지 이 지역의 인간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교토에는 6, 7세기부터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도래인들이 정착하였다. 8세기에 들면 강력한 불교 신자들이 황실의 직무에 관여하게 되었고 일본 천황은 불교의 영향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간무 천황은 당시 야마시로 국의 가도노 군 우다 촌을 수도로 선택하였다.

794년 간무 천황은 나라(奈良)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헤이안쿄(平安京)라 하였고 일본의 역사에서 헤이안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교토는 1868년 메이지 유신 때 수도를 도쿄로 이전하기까지 일본의 수도로 남아있었다.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를 거쳐 꾸준히 성장하던 교토는 1467년 오닌의 난으로 상당 부분이 불타 없어졌다. 특히 무로마치 중기에는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별장이 있던 교토의 히가시야마의 이름을 딴 히가시야마문화의 발전으로 노, 다도, 화도, 렌가, 정원 등이 발달하였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고 교토소사대(京都所司代)를 두어 교토를 다스렸다. 교토는 에도, 오사카와 함께 3도(三都)라 불렸다. 1869년 메이지 정부가 도쿄로 천도함에 따라 교토는 1000년 이상 이어오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문화 도시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그러나 새 천황의 정식 즉위식은 계속 교토에서 거행되었다.

미국은 2차 대전 말에 원자 폭탄의 목표로 일본의 정신적 중심이었던 교토를 고려하였다. 그러나 루즈벨트와 트루먼 정부의 국방 장관 헨리 스팀슨이 유서깊은 고대 도시를 파괴하는 것에 반대하여 공격 목표를 교토에서 나가사키로 수정하였고, 덕분에 교토는 피해를 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교토는 마치야로 불리는 전통적인 주택 같은 전쟁 이전의 건물들이 여전히 풍부하게 남아있는 일본의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화로 교토 역 복합단지와 같은 새로운 건축물들이 세워지면서 전통적인 교토는 계속 파괴되었다. 1956년 9월 1일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정령지정도시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에는 온실 가스 배출의 감축에 대한 회의인 교토 의정서를 개최하였다.

천황 즉위식과 교토
일본 천황의 즉위식은 대대로 교토고쇼의 자신전에서 이루어졌는데,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이 도쿄로 옮겨 가면서, 1889년에 제정된 구황실전범(舊皇室典範) 제11조에 따라 즉위식에서 대상제(大嘗祭)는 교토에서 거행하도록 규정했고, 다이쇼 천황과 쇼와 천황도 교토고쇼에서 즉위에 관한 일련의 의식이 거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제정된 현재의 황실전범에서는 교토에 가서 행하라고 규정한 장소에 대한 규정이 없어졌으며, 1990년에 지금의 천황 아키히토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도쿄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교토역(京都駅)

도카이도 신칸센의 전 열차가 정차하며, 일본 각지로 뻗어나가는 고속 버스의 노선이 다수 발착하고 있다. 때문에 일본 전국으로부터 많은 방문객이 모이게 되어, 1일 평균 승차 인원수를 모두 합치게 되만 63만 명을 상회하는 수준이 된다. 일본 유수의 터미널 역이며, 교토의 관광 명소로 가는 현관문이라고 불리는 역이기도 하다.

도카이도 본선(JR 교토선, 비와코선), 고세이선용 플랫폼이 총 5면 7선이나 되며, 구내 서쪽에는 산인본선(사가노선)용의 두단식 플랫폼이 3면 4선, 구내 남쪽에는 나라선용의 두단식 플랫폼이 2면 3선(8번 승강장만 오사카 방면으로 연결되어 있음), 도카이도 신칸센용이 섬식 플랫폼으로 2면 4선 존재한다. 재래선은 지상에, 신칸센은 고가에 위치하고 있다. 각 플랫폼은 서측에 교상 역사와 동측에 개찰내 지하통로가 연결되어 있다. 북측의 가라스마 중앙 출구 방향의 플랫폼은 길이 558m로 일본 최장 플랫폼으로 알려져 있다.

구 역 빌딩 시대에는 대합실이 존재했지만, 이후에 오랫동안 6, 7번 승강장에 있는 소형 열차 대기소 외에는 대합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2008년 3월 중순에 장거리 열차의 발착이 많은 0번 승강장에 대합실이 설치되었다.

교토 히가시쿠조 한인촌

JR 교토 역 남쪽과 가모(鴨) 강 서쪽 사이에 위치하는 교토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공식적으로는 히가시쿠조(東九條)로 불릴 뿐, “한인촌(코리안타운)”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JR 교토(京都)역에서 남쪽으로 가와하라마치(河原町) 거리를 따라 도보로 가면 머지않아 불고기집, 김치 가게, 빠칭코 가게, 선술집 등 한인들이 하는 점포들을 볼 수 있다. 히가시쿠조는 이미 1960년대 초에 주민 3만명 중에 3분의 1정도가 한인이었다. 원래 이 지역에 살던 한인들의 주된 직업은 폐지, 헌옷, 고철 등을 수집하여 파는 고물상이었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의 경제성장 속도가 떨어지면서 고물상 운영으로는 이윤을 올리지 못하게 되자, 적지 않은 한인 젊은 세대가 거주 환경이 열악한 이 곳을 떠났다. 지금은 대개 1세를 중심으로 한 고령자 세대가 많은 편이다.

히가시쿠조 중에서도 특히 가모강과 다카세(高瀬) 강 사이에 끼어 있는 히가시 마쓰노키(東松ノ木) 지구는 한인 거주자의 비율이 60%를 넘는 곳인데, 주거 환경이 가장 열악한 곳이었다. 행정 당국으로부터 ‘불법 주택’으로 취급받아, 전기와 수도는 물론, 지번조차 없이 소위 ‘0번지’라며 방치된 적이 있으며, 일본 영화 「박치기」(2004년)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열악한 생활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지역 주민들의 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행정 지번의 부여 및 전기와 상수도가 공급되었다. 최근에는 소위 ‘불법주택’도 대거 정비되어 아파트 단지도 들어서게 되었다.

영화 「박치기」  
재일교포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영화로, 일본의 대규모 토목공사와 지금의 일본을 건설한 힘에는 조선인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1968년, 일본의 고등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인 경자(사와지리 에리카 役) 등을 괴롭히면서 사건이 시작되고, 조선인 남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이 탄 버스를 쓰러트리며 보복을 한다. 이 사건으로 한일 학생들의 사이가 나빠지자 일본인 선생은 조선인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게 하기 위해 친선 축구 시합을 할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일본인 학생 코스케가 축구친선시합을 제안하러 조선인 학교에 왔다가 조선인 여학생 경자를 보고 반하게 되고, 경자가 연주하던 음악 ‘임진강’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코스케는 경자와 친해지기 위해 조선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고, ‘임진강’이라는 음악으로 경자와 조금씩 친해지게 된다.
경자의 오빠인 안성은 영화의 제목인 ‘박치기’를 통해 일본인 학생들과 싸우는데, 안성의 교복에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그는 북한으로 가서 사회주의 건설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또 조선인 학생 재덕의 교복에는 ‘조국 통일’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국은 분단되었지만 일본에서의 조선은 통일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혼자 있던 재덕이 일본인 학생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자와 친해지면서 조선인 학생들과도 친분을 쌓았던 코스케에게도 재덕의 죽음은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재덕의 장례식날, 한 조선인이 코스케에게 일본인은 돌아가라고 말한다. 당시 조선인은 강제로 일본에 끌려와 강제 노동에 시달렸고, 이제는 한국에서도 오지 말라하고 일본에서는 나가라 하니 어쩔 수 없는 신세였는데, 그러한 상황이 코스케에게 대입되는 것이다.
죽은 재덕의 복수를 위해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이 집단 패싸움을 하게 되는데, 동시에 라디오 방송에서는 쿠스케가 부르는 ‘임진강’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한편 안성은 여자친구인 일본 여인 모모코가 자신의 아기를 출산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려던 꿈을 접는다. 모모코는 안성에게 우리는 가족이라면서 원하는 길로 가도 좋다며 데리고 가달라고 한다. 영화는 쿠스케가 경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히가시쿠조 한인촌의 형성과 변천  

이 지역은 메이지 시대의 소위 ‘숭인(崇仁) 지구’ 일부와 겹친다. 숭인 지구는 근세 피차별 부락민들이 다카세 강 연안에 대거 밀집 거주하던 곳이다. 이곳에 한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당시의 국철 도카이도선 공사, 히가시야마(東山) 터널공사, 가모 강 침식방지 토목공사, 구조 거리의 확장 공사 등 대규모 토목공사에 고용되었던 노동자들, 그리고 교토의 전통 섬유산업 중 하나인 유젠(友禅) 관련의 염색공장에서 말단 작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기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들은 카모가와 강 기슭이나 하류의 히가시쿠조 지구에 임시 변통으로 판자집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었다. 피차별 부락민들은 한인들이 자기들 생활구역에 들어와 사는 것을 묵인했다. 같이 차별받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일본 패전 직후에는 하치조(八条) 대로 일대(지금의 JR신칸센 교토 역 하치조역 입구)에 등장한 큰 암시장 때문에 한인의 인구가 현저하게 증가했다. 1세들 중에는 조국에 귀환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쿄토역에 들렀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작은 개찰구가 하나밖에 없던 교토역 남구 부근에는 수많은 조선 아주머니들이 암시장에 쌀을 사러 나오느라 혼잡한 지역이었다.

1990년 「경향신문」에 실린 김원우의 칼럼 중  이 동네(히가시쿠조)는 한마디로 비참의 극이다. 수챗물이나 다를바없는 시커먼 개골물이 흘러내리는 그 위에 판잣집들이 얼기설기 위태롭게 세워져 있는데, 양쪽에서 내민 처마가 서로 코를 맞대고 있는 그 사이로 미로 같은 좁다란 길이 아무렇게나 뻗어 있다. …중략… 동네 전체가 범굴이다. 하수구와 공동변소에서 풍겨나오는 악취가 대단하고 강변에는 온통 쓰레기더미다. 지금이라도 당장 이 동네를 사진으로 찍어 놓으면 6.25 동란의 참상을 알리는 피난민 집단거주지 쯤으로 알 것이다.

이곳에는 현재 120가구, 상주인구가 약 250명쯤 된다. 그들은 전부 재일조선인이고 혼자 사는 노인네가 반이 넘는다. 주민의 60%가 생활보호 대상자다. 그들은 매달 4만5천엔씩의 생계비 보조금을 받고 있다.

원래 이 일대는 일본에서 가장 천민에 속하는 백정, 곧 ‘부라쿠(부락)’ 동네였다. 그들 속으로 역시 차별대우에 시달린 재일조선인들이 흘러와서 동네가 부풀었다. 교토 당국은 수치로 생각했던지 바로 길 건너에 고층아파트를 지어 일본인만 이주시키고 조선인들만 그대로 방치해 두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 정부와 상당수의 일본인들은 아직도 재일조선인들을 백정처럼 철저하게 차별하고 있다. 히가시쿠조에 수돗물이 들어온지가 불과 7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점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뿐인가. 최근에야 ‘수도투쟁’처럼 ‘전화투쟁’을 벌여 전화가 개통되었다. 

이런 인간 이하의 차별대우는 지금도 여전하다.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면 일체의 고용알선에서 제외시켜 버리며, 실제로 이곳 주민들의 태반이 불법취업자로 분류돼 있다. 

현황  일본의 교육과정을 따르지 않고 한국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민족학급’이 설치된 초등학교가 두 곳 있다. 1993년부터는 매년 11월 3일 히가시쿠조에서는 다민족이 어우러져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히가시쿠조 마당’을 여는데, 초기에는 시끄럽다는 이유로 지역주민의 항의가 빗발쳤으나 지금은 지역 유명 행사가 되었다. 미나미구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국계 학생이 화려한 한복을 입고 일 년간 갈고 닦은 소고나 장구 실력을 뽐내며 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고, 한국인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킨카쿠지(金閣寺)

원래 명칭은 로쿠온지(鹿苑寺, 녹원사)이지만, 금박을 입힌 3층 누각의 사리전(舍利殿)이 긴카쿠(金閣)라는 명칭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어 흔히 긴카쿠지(金閣寺)라고 불리게 되었다. 본래 무로마치막부 시대인 1397년에 장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지은 별장이었으나, 그가 죽은 뒤 유언에 따라 로쿠온지라는 선종(禪宗) 사찰로 바뀌게 되었다.

무로마치시대 전기의 기타야마 문화(北山文化)를 상징하는 3층 건물로서 각층마다 건축이 다르다. 1층은 후지와라기, 2층은 가마쿠라기, 3층은 중국 당나라 양식으로 각 시대의 양식을 독창적으로 절충하였다. 1층은 침전과 거실로 쓰이고, 2층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셔두었으며, 3층은 선종 불전이다. 이 가운데 2층과 3층은 옻칠을 한 위에 금박을 입혔다.

원래의 금각사는 1950년 한 사미승에 의하여 불에 타 없어졌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5년 재건한 것이다. 금박은 1962년에 이어 1987년에 다시 입혀졌으며, 이후 매년 교토 시민들의 세금으로 보수된다. 긴카쿠지가 일본 내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이를 소재로 하여 1956년에 쓴 장편소설  <금각사(金閣寺)> 때문이라고 한다.

주소 Kyoto Prefecture, Kyoto, Kita Ward, Kinkakujicho, 1
운영시간 매일 09:00-17:00 
입장료 500¥

소설 <금각사>

말더듬이 장애를 갖고 있는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오다가 금각사의 도제(徒弟)가 된다. 장애 때문에 자신과 외부와의 통로 없이 폐쇄적인 소외감으로 고민하던 ‘나’는 전쟁 말기의 한때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친화감을 갖지만, 패전과 함께 금각사에 대한 거리감을 느끼며 금각사가 자신의 인생의 길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지배한다. 전후 금각사 내부의 타락을 알게 되면서 ‘나’는 금각을 태워버리고 금각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고, 마침내 방화한다.

료안지(龍安寺)

2005년에는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 명소 29곳 중 하나로 소개됐으며, 일본 전 총리인 호소가와 모리히로가 대한항공 CF에 출연해 일본의 명소로 료안지 정원을 홍보하기도 했다. 일본을 방문한 세계적인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들이 이곳을 자주 찾는 것에서도 료안지의 세계적인 명성은 쉽게 드러난다.

료안지는 무사인 카츠모토 호소카와가 1450년 도쿠다이지 집안의 별장을 양도 받아 세운 선종 사찰이다. 호소카와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개산조가 된 기텐 겐쇼(義天玄詔, 1392~1462) 스님은 임제종 사찰인 묘신지(妙心寺) 출신으로 그에 의해 선종 사찰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하지만 오닌(應仁)의 난 때 전각들이 대부분 불타버렸고, 1499년에야 그것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막강한 실력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선종사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경내에 들어서면 연못 쿄요치(鏡容池)가 눈에 들어오는데, 연못이라기보다 저수지에 가까울 정도로 대단히 크다. 예전에는 원앙새들이 많아 ‘오시도리 연못’이라고 했다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멀리 연못 안에 있는 작은 신사를 발견해 보자.

교요치를 왼쪽으로 끼고 쭉 올라가면 오른쪽 숲 속에 돌로 만든 부처 상이 연화대 위에 앉아 있다. 돌부처를 뒤로 하고 박석이 깔린 돌계단을 오르면 선종사찰에서 자주 보았던 쿠리(庫裡)를 만난다. 가만히 살펴보면 쿠리는 하얀 벽과 목조가 조화를 이뤄 정적이면서도 중후한 느낌을 준다.

주소 Kyoto Prefecture, Kyoto, Ukyo Ward, Ryoanji Goryonoshitacho, 13
운영시간 매일 08:00-17:00 
입장료 500¥

료안지 세키테(石庭; 돌정원)

쿠리에서 방장(호조) 건물 쪽으로 돌면 세계문화유산이자 일본 국가특별명승인 료안지 정원, 카레산스이(枯山水)식 정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정원. 그곳에는 돌과 모래가 산과 바다가 되어 펼쳐져 있다. 방장건물 계단과 마루에는 그 정원을 감상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1499년 소아미라는 화가이자 정원사가 만든 것으로 일본 3대 정원으로 꼽힌다. 가마쿠라 시대에 전해진 중국 산수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흰 모래와 돌이 있을 뿐 나무나 연못은 찾아볼 수 없다. 동서 25m, 남북 10m의 크기의 장방형으로 이뤄져 있다. 정원에는 15개의 돌이 왼쪽부터 5개, 2개, 3개, 2개, 3개씩 무리지어 배치돼 있다.이 15개의 돌은 바다 위의 섬을 의미하며, 나아가 무한한 우주와도 연결된다. 한편 돌의 모양, 크기, 위치, 높낮이, 원근감이 흰 모래와 어우러지는 광경은 그 자체가 예술이며 보는 이에게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어디서 보아도 14개의 돌만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알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가 인간이지만 참선으로 완벽한 앎을 이룰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선종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을 확실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15개의 돌을 모두 볼 수 있다고도 한다. 

료안지의 이 정원은 돌과 모래를 이용해 만든 정원은 가장 자연적인 동시에 비자연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초목 하나 없이 황량한 이 작은 정원에서 보이지 않는 1개의 돌은 14개 돌에 대한 분별을 넘어설 때 드러나는 화두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이곳을 조성한 정원사는 그저 고독과 절망만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료안지의 츠쿠바이(蹲踞)

방장 북동쪽에는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기부한 엽전 모양의 츠쿠바이(손 씻는 물그릇)가 있다. 입 구(口)자 모양으로 뚫린 구멍을 중심으로 ‘五, 隹, 矢, 疋’의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중심의 ‘口’와 합쳐져 ‘오유지족(吾唯知足)’이라는 문장이 된다. 이 또한 ‘오직 스스로 족함을 안다’는 철학적 가르침을 담고 있다.

닌나지(仁和寺)

헤이안 시대 초기인 888년에 우다 천황이 세운, 진언종 신사파의 총본산이다.  고도 교토의 문화재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886년에 고코 천황은 국가를 축북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니시야마 고간지의 건설을 명령했으나 살아있을 때 완성을 보지 못했고, 이후 완성을 본 우다 천황이 고코 천황의 통치 이후의 연호인 ‘닌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888년부터 1869년까지 전통적으로 천황이 자신의 아들을 절의 주지로 보내 관리를 맡겼다. 이후 황위에서 은퇴한 우다 천황은 닌나지의 첫 번째 몬제키(황족·귀족 승려)가 되었고, 에도 시대가 끝날 때까지 황족들이 주지를 이어받아 황실과 귀족의 비호를 받으러 교세를 확장했다.

그러나 1467년에 일어난 오닌의 난 때 화재와 전투로 파괴되고, 약 150년 후에 도쿠가와 막부의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황실의 지원을 받아 교토 황궁의 재건축과 함께 복원했다. 남아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17세기 때의 것으로 아름다운 5층탑과 분재 벚나무 재배지를 포함한다. 절에는 아름답게 채색된 벽과 그것으로 둘러싸인 정원이 있다. 오층탐과 관음당(觀音堂), 중문(中門), 이왕문(二王門), 종루(鐘樓) 등은 중요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주소 Kyoto Prefecture, Kyoto, Ukyo Ward, Omuroouchi, 33
운영시간 3~11월 기준 매일 09:00-17:00(마지막 입장 16:30) 
입장료 500¥

닌나지의 방재 설비

닌나지는 모두 목조인 데다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각종 소방설비를 곳곳에 갖추고 있다. 특징적인 대목은 소방설비가 해당 문화재의 경관을 최대한 고려해 설치됐다는 사실이다. 열감지선은 의식하지 않으면 좀처럼 그 흔적조차 발견하기 힘들며, 화재 진압을 위해 외부에서 물을 뿌려대는 물대포 일종인 방수총(防水銃) 또한 문화재 경관을 해치지 않는 적절한 거리에 마련해 두었다. 가령 오층탑에는 조립식 방수총이 네 모퉁이마다 한 대씩 설치돼 있는데, 평소에는 눈에 잘 띄는 곳에 마련된 함에 넣어두었다가 유사시에는 바로 옆의 방수용 수도에 연결해 목탑을 향해 물을 뿜어낸다. 또 누전이나 정전에 대비해 모든 시설에는 전기 설비가 없는 것도 특징이다.

닌나지가 이런 방재설비를 구축한 계기는 1993년의 폭탄 테러와 1995 고베 대지진이었다. 특히 천황제 반대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닌나지 주요 목조문화재 3곳에 시도한 폭탄테러는 충격적이었다. 금당과 오중탑 등을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아 시간에 맞춰 터지도록 폭탄을 장치한 것이다. 금당 마루 밑의 도시락 폭탄이 터지긴 했지만 다행이 초기 진압에 성공해 문화재를 건졌다고 한다. 지금도 금당 마루를 잘 살펴보면 당시 화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라시야마(嵐山)

‘바람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라시야마는 교토의 대표적인 벚꽃‧단풍의 명승지이자 일본의 사적지다. 

이곳은 일찍이 헤이안시대(794~1185)에 귀족의 별장지로 개발된 이후 교토의 대표적 관광지로서 인위적으로 관리되어 왔다. 사계절의 변화가 선명하며 특히 봄의 벚꽃, 가을의 단풍 명소로 유명하다. 목조로 된 길이 154m의 도게츠교(渡月橋)는 아라시야마의 상징이며 도게츠쿄와 게이후쿠(京福) 전철의 아라시야마역 주변에는 선종의 주요 절인 덴류사(天竜寺)와 마쓰노오대사(松尾大社) 등 여러 사찰과 신사, 불상, 전각이 모여 있다. 북쪽에는 대나무 숲과 수풀이 우거진 산의 출발점을 따라 작은 절들이 흩어져 있고 카츠라가와(保津川, 호즈강)에서는 보트 투어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관광지로서의 ‘아라시야마’는 도게츠교 일대 전반을 통칭하는 단어이지만 주소상으로 엄격히 구분하면 카츠라가와를 기준으로 북쪽이 사가노, 남쪽이 아라시야마 지역이다. 즉, 실제로는 아라시야마 역사가 있는 지역이 원래의 아라시야마 지역이고 관광지 일대는 엄밀히 말하자면 사가노 지역다. 

도게츠교(渡月橋)

155m 길이의 도게츠교는 아라시야마의 상징 같은 곳이다. ‘도게츠교’라는 이름은 ‘강과 달을 건너는 다리’라는 뜻으로, 그 모습이 마치 투명한 달이 지나가는 것과 같다 하여 카에야마 천황(後龜山天皇, 1347~1424)이 붙였다고 한다. 지금의 다리는 193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도게츠교와 게이후쿠 전철의 아라시야마역 주변에는 선종의 주요 절인 텐류지와 마쓰노오대사 등 여러 사찰과 신사, 불상, 전각이 모여 있다. 교각은 철근 콘크리트로 되어 있지만 난간부근은 목조로 만들어져 운치가 있다. 북쪽에는 대나무 숲과 수풀이 우거진 산의 출발점을 따라 작은 절들이 흩어져 있다. 7월부터 9월 말까지는 오랜 옛날부터 행해지는 ‘우카이(鵜飼)’라고 하는 독특한 어업도 볼 수 있다.

우카이  7세기부터 시작된 일본의 전통 낚시법이다. 우쇼우(鵜匠)라고 불리는 전문가가 작은 배를 타고 여러 마리의 훈련 받은 가마우지에게 물고기를 잡게 한다. 여섯 척의 우차이 배가 정렬하여 6명의 우쇼우가 사방으로 둘러 쌓아 강의 얕은 곳으로 은어를 몰아 잡는다고 한다. 가마우지는 물 위에서 헤엄을 치면서 먹을 물고기를 찾는데, 물 속으로 잠수해 물갈퀴가 달린 발로 힘차게 헤엄을 쳐 물고기를 잡는다. 물고기를 유인하기 위해 뱃머리에 화롯불을 피운 철제 바구니를 달아 둔다. 가마우지의 머리에는 각각 3m 정도의 긴 밧줄이 고리에 묶여져 있다. 가마우지 한 마리가 물고기를 물어서 수면으로 올라오면 가마우지를 부리는 사람은 밧줄의 끌어당겨서 잡은 고기를 토하게 한다. 그리고 가마우지가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가도록 밧줄을 놓아 준다. 우쇼우의 전통의상과 아름답고 화려한 낚시법을 보기위해 일본은 물론 외국에서도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 우카이 시즌은 5월에서 10월까지이다. 

치쿠린 대나무숲길(竹林の小径)

대나무 수천그루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는 대나무 숲이다. 일본 3대 대나무 숲으로 꼽히며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으로도 많이 촬영되어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에 한 곳이다. 바람소리에 흔들리는 잎새소리는 ‘남기고 싶은 일본의 소리 100선’에 들기도 했다. 대낮에도 그늘이 질 정도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대나무는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풍경을 선사한다. 교토는 동쪽과 서쪽, 북쪽에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 분지로서 겨울이 비교적 따뜻한데, 따뜻한 곳에서는 예로부터 대나무가 잘 자라며 5월부터는 죽순이 많이 난다. 그래서 이때에는 죽순 요리가 인기가 있다.

아라시야마는 ‘바람의 산’이라는 뜻도 있지만, 사전적 의미로 해석하자면 ‘해 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아련한 산’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아라시야마의 대숲 치쿠린에 들어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높게 뻗어 아스라이 하늘을 가린 대나무들에 햇빛이 연초록빛으로 부서져 그에 아득해진다.

노노미야 신사(野宮神社) 

대나무 숲길은 텐류지 북문 오른쪽에 있는 노노미야 신사에서 시작된다. 이 신사가 유명해진 이유는 신사 앞을 지키는 문의 검은색 토리이 때문이다. 대개 일본 신사의 토리이는 밝은 주황색이어서 노노미야 신사의 검정 토리이가 특별한데, 구로키(くろき; 흑목, 즉 껍질을 벗기지 않은 통나무)로 만든 가장 원시적인 토리이라고 한다.

노노미야 신사는 ‘사랑을 이루어 주는 신사’로 알려져 일본에서도 여성들이나 커플들이 많이 찾는다. 소원을 비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안쪽 참배를 드리는 곳으로 간다. 거기에서 두 번 절한 후 두 번 박수를 치고, 다시 한 번 절을 하면서 소원을 빈다. 다음에는 보시함에 동전을 넣은 뒤, 종 아래 있는 줄을 두 번 흔든다. 절이라고 해서 바닥에 엎드리는 것은 아니고, 선 채로 두 손을 합장한 후 목례를 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면 된다. 참고로 사랑을 이루어주는 신사라고는 하지만 반드시 남녀 간의 사랑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넓은 의미로 직장, 학교 등에서의 좋은 인연도 빌 수 있다.

주소 Kyoto Prefecture, Kyoto, Ukyo Ward, 嵯峨野宮町1
운영시간 매일 09:00-17:00 
입장료 무료

텐류지(天龍寺)

무로마치막부의 장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가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1288~1339)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다. 다카우지는 덴류사의 건립 자금을 마련하려고 중국 원나라와 무역을 재개하여 무역선인 덴류사선을 운항시켰다. 교토 오산(五山: 5대 선종 사찰) 중 제1위로서 세력을 떨쳤으나, 무로마치막부의 몰락과 함께 세력이 약화되었다. 막부의 상징과도 같아서 교토에 난이 생길 때마다 화를 당하는 바람에 건립 당시의 건물은 불에 타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메이지 시대에 지은 것이다. 그럼에도 유네스코가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순전히 정원 ‘소겐치(曹源池)’ 때문인데, 초기 모습이 남아 있는 정원에는 아라시야마와 가메야마의 경치가 그대로 옮겨져 놓았다. 사찰의 북문을 나서면 대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텐류지의 정원과 함께 유명한 것은 법당 천장에 그려져 있는 운류즈(雲龍図)이다. 9m의 원 안에 구름을 타고 있는 용을 그린 것으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박력을 자랑한다.

주소 Kyōto-shi, Ukyō-ku, 嵯峨天龍寺芒ノ馬場町68 
운영시간 매일 08:30-17:30
입장료 500¥(건물 내부는 100¥ 추가)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청수사)

오토와 산(音羽山) 중턱의 절벽 위에 위치한 사원으로 사원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위태로워 보이지만 막상 들어서면 탁 트인 전망에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본당에서 바라보이는 사계절의 풍경이 절경으로 이름 높다. 관세음보살을 안치한 33곳 중 관음영지의 16번째 영지로, 사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도 교토의 문화재의 일부이다. 8세기에 오토와 폭포를 발견한 엔친 대사가 이곳에 관음상을 모신 것이 시초이며, ‘기요미즈(淸水)’라는 이름 역시 ‘맑은 물’을 의미한다. 현재의 건물은 1633년에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령으로 재건된 것이다.

사계절 모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지만 4월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11월 말부터 12월 초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어 더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특히 기요미즈데라에서 산넨자카, 네네노미치, 고다이지에 이르는 길은 납작한 돌이 깔린 한적하고 운치 있는 길로, 계절에 따라 다른 정취가 있어 몇 번이나 다시 찾는 사람도 많다. 한편 이곳에 봉안된 천수관음 입상은 33년마다 한 번씩 공개하는 비불이다.  

주소 Kyoto Prefecture, Kyoto, Higashiyama Ward, Kiyomizu 1-chome, 294
운영시간 매일 06:00-18:00 
입장료 400¥

무대(舞台)

기요미즈데라 본당에서 산을 바라보고 있는 테라스는 일종의 무대로, 본당에 있는 십일면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에게 바치는 춤을 추던 곳이다.(하지만 관광객들은 그저 밖의 풍경만 보지 관세음보살상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높이 12m의 거대한 느티나무 기둥으로 짓고, 410개 이상의 노송나무 판자를 깔아 마무리했다고 한다. 멀리 교토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

무대의 난간에서 뛰어내린 후 살아남으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죽으면 고통 없이 성불한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1694년부터 1864년까지의 고문서를 가지고 통계를 낸 결과, 사람이 뛰어내린 사건은 총 234건이었고 생존확률은 85.4%였다고 한다. 살아남는다 해도 아마 크게 다칠 것이다. 현재는 ‘기요미즈데라 무대에서 뛰어내리다(清水の舞台から飛び降りる)’라는 말이 그만큼 죽을 각오를 한다는 속담으로 쓰인다. 또 매년 한자의 날인 12월 12일마다 무대에서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주관하는 ‘올해의 한자’를 발표하는데, 주지승이 해당 글자를 종이에 붓글씨로 적어 언론에 공개한다. 2016년 발표한 한자는 ‘金’이었다. 참고로 2017년 5월 현재는 50년마다 시행하는 본당 지붕 수리 공사 중이다.

사찰 구성

본당의 지붕이 독특한데, ‘히와다부키’라고 해서 노송나무 껍질을 아주 얇게 만들어 촘촘하게 붙인 것이다. 기와에 비해서 내구성은 좋지 않지만, 재료 조달이 쉽고 독특한 질감과 곡선 표현에 유리해서 일본에서는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또한 본당의 건설에는 못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강조되는데, 동아시아 건축에서는 일반적인 모습이다.(서구 건축의 입장에서는 못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한 모양이다.)

사찰 내에는 지슈 신사(地主神社)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스사노오의 자손인 오오쿠니누시(大国主)를 인연을 맺어주는 신이라 하며 섬긴다. 신사 안에는 두 개의 돌이 있는데, 한 쪽에서 눈을 감고 걸어가서 다른 쪽에 닿게 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토와 폭포(音羽の瀧)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이 3갈래로 갈라져 위에서 아래로 나오는 곳이 있다. 이 3갈래의 물은 각각 건강, 사랑, 학문을 상징하며는데 그 물을 마시면 해당하는 상징이 좋아진다고 한다. 물은 두 개까지 마셔야 이루어지며 세 개를 다 마시면 오히려 운수가 나빠진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이 건강, 사랑, 학문 이야기는 투어 가이드들이 흥미를 위해 꾸며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기요미즈데라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오토와 폭포에 대한 설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건강, 사랑, 학문에 대한 글은 한 줄도 써있지 않다. 길함을 의미하는 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건강, 사랑 등에 대한 기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산넨자카(三年坂)·니넨자카(二年坂)

산넨자카는 일본의 전통 가옥 보존지구로 다이도 3년(808년)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자카’란 ‘고개’란 뜻으로, 이름처럼 계단과 완만한 언덕으로 돼 있다. 산넨자카에는 46개의 돌계단이 있는데, 이곳에서 넘어지면 3년 안에 죽는다는 믿거나말거나 이야기가 전한다. 넘어져도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는 오뚝이 모양의 호리병 박을 액땜용으로 파는 가게도 있다. 예스러운 기념품 가게나 오랜 전통을 간직한 점포가 즐비하고 돌계단 옆으로도 오래된 상점들이 이어져 있는데, 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살려 광고나 포스터에 자주 이용된다.

산넨자카 북쪽에는 니넨자카(二年坂)가 있고 이치넨자카도 있다. 니넨자카와 이시베코지 전체를 함께 산넨자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넨자카에 46개 돌계단이 있다면, 니넨자카에는 17개 돌계단이 있다. 니넨자카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거리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된 가옥들이 남아 정취가 넘치는 언덕을 걷노라면 교토에 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낮에는 물론 밤의 불빛도 멋진 분위기를 자아내며, 한가로이 거닐기에 좋은 언덕이다. 산넨자카와 니넨자카를 다 합쳐 봐야 고작 350m이니 길지 않다.

세이류엔(靑龍苑)

산넨자카의 건물로 ‘교토 사카구치’라는 요정을 2000년 세이류엔(‘파란 용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고친 것이다. 요지야 카페와 정원 등을 만날 수 있다. 요지야는 거울에 비친 게이샤의 얼굴을 로고로 사용하고 있는 화장품 브랜드로 1904년 개업했다. 기름종이, 유자향 립밤. 마유고모리 핸드크림 등이 인기 상품이며 교토 명소에 지점들이 위치하고 있다.

호칸지(法觀寺, =야사카지(八坂寺)) 

산넨자카와 니넨자카를 걷다 보면 멀리 호칸지의 야사카탑(八坂の塔)이 보인다. 이 오중탑은 교토를 소개하는 사진엽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교토의 상징물이다. 벚꽃이 피는 봄에는 ‘일본 최초의 보탑(보물과 같은 탑)’이라고 적힌 팻말이 내걸린 탑 밑에서 결혼사진을 찍는 예비부부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고구려계 도래인들의 흔적은 야사카 신사에서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야사카 탑’이라고 불리는 중요 문화재, 호칸지 오중탑이다. 법관사는 일본말로 호칸지라 불리지만 옛날에는 ‘야사카데라’(‘데라’는 사찰을 의미)로 불렸다. 

이 오중탑은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으로, 주택가 일반 가옥들 사이에 오중탑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지금은 절터도 없고 탑만 남아 있지만 이 오중탑은 교토인들에게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다. 하야시야 다쓰사부로가 쓴 󰡔교토󰡕(1962년)라는 책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법관사는 도시와 함께 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중략)…고려 이리지의 후예가 창립한 곳이다. 고려의 귀화씨족은 소라쿠 군 가미코마 시모코마 지역을 근거로 해서 고려사를 창건하고 씨족의 거점으로 했지만, 야사카노미야쓰코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지역의 씨족은 이 기온사의 전신인 신사에 제사를 지내고 야사카사(寺)를 지었다. 사원 자체는 유감스럽게도 얼마 안 돼 재해를 당해 쇠망했지만, 무로마치 시대 에이쿄 12년(1140년) 재건된 오중탑이 홀로 서서 동산의 전망에 운치를 더하고 있다…(중략)…오닌(應仁)·분메이(文明)의 대란으로 교토가 초토화되고 모든 문물이 불타 버리는 전화를 잘도 피하고 살아남은 것이라 감회가 깊다. 그 당시 교토의 낮은 가옥들 중에서 눈에 띄게 치솟은 이 탑은 매일 아침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시민들의 큰 버팀목이 됐을 것이다.”

메이지 무렵까지는 탑 최상층에 전망대가 있어서 교토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중세에 교토를 쟁탈한 군사들이 가장 먼저 탑 위에 휘장을 둘러치는 것으로 교토 지배의 표시를 했다는 설도 있다. 

주소 京都府京都市東山区清水八坂上町388
운영시간 매일 10:00-16:00 
입장료 400¥

네네노미치(ねねの道)·이시베코지(石塀小路)

네네노미치는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인 기타노만도코로 네네(北政所ねね, 1549~1624)의 이름을 딴 곳이다. 약 2,500장의 화강암이 깔려 있다. 네네노미치를 걷다 보면 왼편으로 이시베코지로 들어가는 골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이시베코지는 ‘돌담이 쌓인 골목’이라는 뜻인데, 약 2m의 골목길로 다른 골목길과 확연히 다른 멋스러운 전통 가옥들을 만날 수 있다. 교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골목이니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다. 다만 이곳들은 주거지이기도 하므로 너무 시끄럽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코다이지(高台寺)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극락왕생과 애도를 위해 네네가 창건한 절이다. 네네는 히데요시 사후 19년을 코다이지에서 보내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네네는 어릴 때의 이름이고, 본명은 고다이인이다. 1549년 오와리국 스기하라 스케자에몬 사다토시의 차녀로 태어났다. 어린 네네는 시집간 숙모를 따라 아사노 마타에몬노조 나가카쓰의 양녀로 성장하는데, 만 12살이 되던 해에 만 24살의 기노시타 도키치로와 결혼하였다. 기노시타 도키치로가 바로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앙 권력을 장악하고 천황을 보좌하는 최고 지위인 간바쿠(關白)에 올랐을 때 네네도 종3위에 서임됐다. 3위 이상의 관위를 받은 네네는 이후 기타노만도코로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만도코로란 3위 이상의 관위를 받은 고위 관리가 사적으로 운영하는 가정(家政) 기관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도요토미 가문의 가정을 담당하는 네네를 높여 기타노만도코로라 한 것이다. 그 뒤 네네는 조정과의 교섭, 오사카에 인질로 온 다이묘 처자들과의 교류를 담당했으며, 1588년에는 천황이 종1위로 관위를 높여 주었다. 

네네는 도요토미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가문의 가정(家政)을 담당했다. 1592년 도요토미 정권은 조선을 침략할 때 보급할 물자를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 교통로를 정비했는데, 이때 히데요시의 명을 담은 문서에 히데요시의 붉은색 직인과 네네의 검은색 흑인장이 공존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도요토미 정권의 공식 업무와 관련된 공의(公儀)와 별개로 도요토미 가문의 사적 업무를 담당하는 내의(內儀)와 관련하여 네네의 독자적인 업무 영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의 사망 후 네네는 첩실인 요도도노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견인을 맡았다. 그러나 자식이 없던 그녀에게 후견인 역할은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599년 네네는 자신이 살았던 오사카 성의 니시노마루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물려주고 교토로 은거했다. 1605년에는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에야스의 후원을 받아 교토 히가시야마에 코다이지(高台寺)를 건립하였고,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네네란 호칭도 이 절에서 유래한다. 네네는 1624년 9월 6일 75세로 사망했다.

주소 Kyoto Prefecture, Kyoto, Higashiyama Ward, 高台寺下河原町526番地
운영시간 매일 9:00-17:00 
입장료 600¥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시조 거리 동쪽 끝에 위치한 신사로, 원래 기온 신사라고 불렀다. 인도 슈라바스티에 있던 사원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따온 이름이다. 기원정사를 수호하는 우두천왕이라는 신은 일본에 들어와 스사노오와 습합하여 중요한 신격을 가지게 되었다. 우두천왕 신앙을 일본에 소개한 주체는 한반도 도래인으로 추정되는데, 7세기에 고구려인 이리시오미(伊利之使主)가 기온 신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 교토 중심부에 있는 만큼 위상도 대단하다. 후지와라 가문으로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기까지 역대 권력자들의 비호를 연이어 받았으며 고대 법령인 연희식으로부터 내려오는 22사에도 들어가 있다. 현재는 관폐대사로 지정된 상태다.

일본인들의 삶에서 신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새해 첫날 건강과 재물을 기원할 때에도, 마쓰리(축제) 때에도 신사를 찾는다. 아직도 매년 일본 각료들이 태평양전쟁 전범 신사 참배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신사는 아직도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정면 미국 유타대 명예교수는 저서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에서 “일본 각지에 퍼져 있는 신사들은 12만 곳에 달하며 이 중 8만여 곳이 한반도 이주민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일본에 남아 있는 신사들 중 가야와 관련된 것은 가야 신사, 백제는 구다라 신사, 신라는 시라기 신사, 고구려는 고마 신사로 불린다. 이 교수는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근대화와 새로운 과학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수많은 신사와 사찰에 남아 있는 한반도의 흔적을 제거하고 변화를 시도했기 때문에 고대 일본 신사들이 한반도와 관련이 있다는 논의는 자세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지만, 역사를 파고들어 가다 보면 한일 간의 진한 교류와 우정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다”고 말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야사카 신사이다.

교토에는 수백 개의 신사가 있다. 아스카 시대를 시작으로 국왕 체제의 중앙집권제가 이뤄진 고대국가 완성기라 할 수 있는 나라(奈良) 시대를 지나 교토가 수도로 정해지는 헤이안(平安) 시대까지 왕실 문화가 지배하는 중심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의 기틀을 세운 사람들이 백제, 고구려, 신라 등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도래인들이었다. 교토에 유독 다이샤(大社)라고 불리는 큰 신사들이 많고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들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 수만 개의 분사(分社)와 말사(末社)가 되었다. 야사카 신사는 교토 신사의 총본사(總本社)라고 할 수 있다.

야사카 신사의 주인공  주목할 만한 점은 ‘야사카’라는 이름 자체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고구려에서 건너온 사신(使臣) 이리지(伊利之)이다. 야사카 신사의 유래를 기록한 문헌을 보면 “이리지는 왕실로부터 야사카노미야쓰코(八坂造)라는 성을 받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리지는 언제 어떤 경위로 일본에 왔을까.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사이메이 여왕 2년 8월 8일에 고구려에서 대사 달사(達沙)와 부사 이리지 등 모두 81명이 왔다”고 적혀 있다. 당시 고구려가 왜로 보낸 대사절단에 이리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사이메이 여왕이 재위할 당시 고구려는 보장왕, 백제는 의자왕, 신라는 태종무열왕이 다스리고 있었으니 이리지는 보장왕이 일본에 보낸 사신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 신사를 지키는 신관들도 대대로 이리지의 후손들이 이어 왔다. 2015년 야사카 신사의 도조 다카후미(東條貴史) 신관은 “신사 창건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지만 고구려계 도래인들이 세운 것이 거의 확실하다”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손들이 신관직을 이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리지는 어떻게 이곳 타국 땅에서 신으로 모셔졌을까. 이에 대한 의문을 풀려면 일본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화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신사의 유래를 기록한 문헌에는 “고구려 사신 이리지가 신라국의 우두산에 계신 소잔오존(素盞烏尊, 스사노오노미코토)을 교토 땅에 모시고 와서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소잔오존’은 일본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이다. ‘스사노오’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소잔오존 신은 일본 열도를 만든 창조주 ‘이자나기’가 낳은 아들로 일본에서는 바다와 폭풍의 신이라고 불린다. 소잔오존은 제멋대로인 성격에 각종 사고를 치다 인간 세상으로 추방됐다. <일본서기>는 “소잔오존이 인간 땅에 내려온 곳을 신라국(新羅國)의 소시모리(曾尸茂梨)”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소시모리는 한국말로 소머리를 의미하는 ‘우두주(牛頭州)’로 풀이돼 왔다. 이 때문에 일본에선 소잔오존을 ‘우두천왕(牛頭天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온 신사  

야사카 신사의 원래 이름은 기온 신사였다. 매년 7월 17∼24일 야사카 신사가 주관하는 축제인 ‘기온마츠리(祇園祭)’는 소잔오존을 받드는 축제이다. 이때 교토에는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기온마츠리는 오사카의 덴만마츠리, 도쿄의 간다마츠리와 함께 3대 축제로 불린다.

교토의 중심거리나 마츠리 이름 앞에 붙은 ‘기온’에도 사연이 있다. 당초 야사카 신사는 기온진자(祇園神社), 기온샤(祇園社), 기온칸신인(祇園感神院) 등으로 불렸지만 1868년 신사와 절을 분리하는 ‘신불분리령’에 의해 지금의 ‘야사카 신사’로 바뀌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진흥왕 때인 566년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가 지어지고 황룡사(皇龍寺)도 완성됐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의 기원사에서 ‘기온사’가 유래됐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하나미코지(花見小路) 거리

교토에 있는 고풍스런 거리중 하나로 ‘화견소로(花見小路)’, 즉 ‘꽃구경하는 작은 길’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꽃이란 이 거리의 명물인 게이코를 의미한다. 일본 옛 수도의 유명 거리답게 고급스럽고 전통적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고 ‘이치겐상오코토와리(一見さんお断り; 처음 온 손님은 거절합니다.)’라는 말처럼 단골 손님의 소개가 없으면 가게에 들어갈 수 없는 상상 이상의 가격과 서비스가 있는 가게들이 많이 모여 있는곳이다. 이런 곳 중 상당수는 은퇴한 게이코와 야쿠자들이 운영하는 오차야(お茶屋 게이코와 마이코가 접대하는 가게)이다.

하나미코지 거리가 끝날쯤 길바닥에 ‘나카미치(中路)·하나미코지(花見小路)’라고 씌어진 표식이 있다. 이 주변에 저녁 6시 전후로 게이코들이 손님맞이를 위해서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교토의 기온 지역에 16명의 마이코(舞妓)와 80여 명의 게이기(芸, 게이샤)가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교토에서는 게이샤를 ‘게이코(芸子)’라고 하며, 게이코가 되려는 견습생을 ‘마이코(舞子)’라고 한다. 의무교육이 시작된 1950년대부터는 만 15세가 되어야만 마이코가 될 수 있다. 게이코는 일본에서 일종의 ‘기예인’으로, 단순히 술과 몸을 파는 존재는 아니다. 게이샤는 교토의 심벌을 넘어서 일본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전세계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교토에서 많이 마주치는 게이코들은 십중팔구 진짜 게이코가 아니라, 게이코 체험을 하고 있는 같은 관광객들이다. 

요즘에는 게이코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녀들이 많다. 2년차까지는 입술 화장을 아랫입술에만 할 수 있고, 3년차가 되어야만 윗입술까지 할 수 있다고 한다. 마이코는 단체 숙소인 ‘오키야’에서 생활하면서 게이코 학교인 ‘뇨쿄바’에서 가무, 기예, 시사·교양을 익힌다. 견습생이더라도 공연 무대에 올라 춤을 추거나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이코와 게이코는 복장과 머리모양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마이코는 가발 없이 자기 머리로만 모양을 만들고 비교적 화려한 의상을 입는데, 특히 등을 뒤덮다시피 화려하게 늘어뜨린 ‘다라리오비’가 마이코를 상징한다. 또 ‘칸자시’라는 머리 장신구의 색깔과 머리모양으로 연차와 소속을 구분한다고 한다. 게이코는 발견하기 굉장히 드문데, 마이코에 비해 훨씬 복장이 수수하고 옷의 소매가 짧으며 머리 장식에도 가발을 쓴다.

기온(祇園)의 시조(四条) 거리

교토에서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다면 기온으로 향하자. 기온은 게이코 문화, 목재로 된 찻집, 상점, 식당 등으로 유명한 교토의 유서 깊은 지역이다. 아름다운 야사카 신사와 카모 강 사이에 위치한 기온은 대부분이 이제는 부티크 매장이나 고급 식당으로 개조된 유서 깊은 찻집들이 있던 곳이다. 낮에 이 지역을 구경하며 사탕, 피클, 수공예 기념품 등 현지 특산품을 구매할 수 있고 밤에 구경하면 쉽게 볼 수 있는 없는 게이샤들을 마주칠 수 있다.

기온의 메인 거리는 시조도리(四条通り)로,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미코지(花見小路), 키야마치도리(木屋町通り) 등의 골목이 이어진다. 시조도리에서 남쪽의 하나미코지 사이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낮은 울타리와 붉은 벽의 전통가옥인 마치야(町家)가 많다. 최근에는 마치야를 개조한 과자 전문점이나 찻집이 종종 눈에 띄므로 한적하게 앉아 차를 마시다보면 고즈넉한 교토의 운치와 전통 가옥의 멋을 느낄 수 있다.

가부키극장과 전통요릿집이 밀집해 있는 하나미코지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산조도리(三条通り)에서 야스이키타몬도리(安井北門通)까지를 잇는 1㎞의 골목으로, 납작한 돌이 깔린 포석 주변으로 마치야가 늘어선 교토의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마이코를 볼 수 있어 교토의 분위기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다.

기온코너  

기온 거리에서 8분 거리에 있는 기온코너는 교토 전통춤인 교마이(京舞)와 다도, 화도, 거문고, 아악 등 교토의 7가지 전통 예능을 소개하는 극장이다. 아름다운 의상을 갖춘 기온의 마이코가 선보이는 교마이의 우아함을 느껴보자. 

주소 京都市東山区祇園町南側570-2 弥栄会館
공연 매일 2회 18:00, 19:00  공연시간 약 50분  
관람료 3,150¥(할인쿠폰 지참 시 2,800¥) 
팁 매표소에서 한국어 팸플릿으로 받을 것 / 자유석이므로 일찍 입장하는 것이 좋음

겐닌지(建仁寺)

기온 주변의 사찰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임제종 겐닌지파의 본산인 겐닌지가 유명하다. 중국의 바이장산(百丈山)을 모방한 가람 배치가 특징이다. 근방의 야스이콘피라구(安井金比羅宮)는 악연을 끊고 좋은 인연을 불러온다는 바위가 있어 방문객이 많다. 겐닌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로쿠하라미쓰지(六波羅蜜寺)에는 중요문화재인 구야 대사의 상이 있다.

주소 Kyoto Prefecture, Kyoto, Higashiyama Ward, 大和大路通四条下る小松町584
운영시간 10:00-16:00 
입장료 500¥

카모가와 강(鴨川)

교토 시를 흐르는 강으로 카모 강이라고도 한다. 길이 약 31㎞, 유역 면적은 210㎞²이다. 강둑은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산책로로 인기 있다. 깊이가 얕아서 1m도 안되는 곳이 많지만, 장마철이 되면 때때로 물이 오솔길까지 넘치기도 한다. 강변을 따라 산책하거나 나들이를 나오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해가 저물면 교토의 카모가와에 마법이 걸린다. 사람들은 어두워진 강을 바라보며 지금껏 말하지 못했던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폰토쵸(先斗町) 거리

폰토쵸라는 이름이 생겨난 이유는 아직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다. 혹자는 영어의 ‘point’와 같은 뜻인 포르투갈어 ‘ponta’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끝이 뾰족한, 혹은 끝이 좁은 길’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 이곳이 원래 강가에 위치한 장 바닥이었다는 점에서 사람이나 물건을 사고 팔면서 도박도 성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돼 거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폰토(ponto), 폰타(ponta)는 포르투갈 말로 앞, 선두라는 뜻으로 노름에서 쓰인다고 한다. 또는 이곳이 가모가와(鴨川) 강과 다카세가와(高瀬川) 강 사이에 낀 곳이기 때문에 땅 생김새가 두 장 가죽 사이에 끼어있는 북과 비슷하다고 하여 북의 음색(‘폰’)을 따라서 폰토초라고 이름 지었다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든  폰토쵸는 교토의 오래된 유흥가로, 카모 강을 따라 나 있는 약 500m 길이의 좁고 긴 골목길을 말한다. 카모 강을 따라 이어진 좁고 긴 골목에는 흥했던 교토의 오랜 흔적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길 양쪽으로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 바, 이자카야, 요정 들이 늘어서 있다. 

원래는 1670년 카모 강의 하천 정비 사업 때 생긴 매립지에 여관과 주점, 찻집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며, 18세기 말 게이코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명실상부한 교토의 유흥가이자 환락가로 입지를 굳히고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오래전 장이 열려 사람들로 흥청스러웠을 거리가 지금은 말끔히 정돈되어 돌로 된 길바닥에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굳이 술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돌길을 걷는 것만으로 오래 전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점심부터 영업을 하는 가게도 있기는 하지만 폰토쵸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해가 질 무렵부터 늦은 저녁 시간대까지다. 카모 강 쪽으로 난 가게들은 전망이 좋으며, 특히 여름에는 강쪽으로 들마루를 내어 영업하는, 이른바 ‘카와유카(노료유카 라고도 불림)’풍류도 즐길 수 있다. 카와유카는 따로 자릿세를 받는 곳이 많으니 미리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기야마치(木屋町) 거리

에도시대 초기에 다카세가와 개통 공사와 함께 조성된 거리이다. 각 지방에서 장작, 숯, 목재 등의 물자가 대량으로 들어와 거리에는 이러한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나무 파는 집이라는 뜻의 ‘기야마치도리’라 불리게 되었다. 다카세가와를 따라 길이 이어지며 봄에는 벚꽃이 핀다. 

다카세가와(高瀨川)

기야마치 거리에 가면 좁다란 운하인 다카세가와를 만날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자연의 강인 카모가와 강과 함께, 직접 강을 만들어서 물자를 운반하거나 즐기기도 했다. 그 강이 다카세가와로, 과거 교토의 영화를 상징한다. 이 강은 니조 부근에서 후시미까지 9.7㎞ 길이로 이어져 있으며 1920년까지 300년 간 운하로 이용되었다.

니시키 시장(錦市場)

니시키 텐만구(錦天満宮)에서 미부(壬生)로 이어지는 약 2㎞의 니시키코지(錦小路)에 위치한 시장으로 ‘교토의 부엌’으로 불린다. 약 400m에 이르는 길로, 약 3.2㎞ 폭의 거리를 중심으로 18채의 건물에 생선과 건어물 외에도 청과물, 반찬 등을 파는 점포 140여 개가 늘어서 있다. 니시키코지의 상점들은 오전 7시경부터 문을 열고 오후 6시경에는 대부분 문을 닫는다. 가장 붐비는 시간은 점심 전과 저녁 무렵. 식재료를 사려는 일반인들과 음식점의 요리사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상권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하며 그 시초는 가마쿠라 시대로 추측한다. 초기의 점포는 생선가게로, 이 지역에 맑은 지하수가 샘솟고 인구가 밀집해 있어 어류의 저장과 판매에 유리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 후 15세기 오닌의 난 등으로 쇠퇴했다가, 1603년 일본을 천하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교토에 니조성(二条城)을 짓자 성안에 근무하는 수천 명의 사무라이와 궁녀들이 쓸 식자재와 옷, 칼, 식기 등의 생필품을 조달하기 위해 교토에 시장을 개설하면서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일본 최대이자 최초의 공용 시장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 일본 각지의 이름있는 상인들이 모여들었는데, 1617년 시코쿠(四国)의 에히메(愛媛)에서 생선장사를 하던 이요마타(伊豫又)도 생선과 초밥을 팔기 위하여 니시키 시장에 가게를 개업하여 현재까지 22대가 운영 중인 이요마타는 아직도 성업 중이다. 일왕에게 생선을 진상하던 도매상이라고 하니, 400년 된 이요마타에 들러 고등어 초밥을 맛보자.

사실 교토에는 천년 이상 된 가게 6개가 영업 중이며 200년 된 가게도 1,6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니시키 시장 안에도 아리쯔구(有次, 부엌 칼 등 주방용품을 파는 전문점)가 1619년에 개업했고 가라나미기치(湯波吉, 두부의 피인 유바(湯葉)로 유명한 집)가 1790년,가이세키(懐石) 요리점인 긴마타(近又)가 1801년에 개업했으니 그야말로 역사와 전통이 가득한 시장이다.

현재는 해산물뿐 아니라 교토산 야채인 교야사이(京野菜) 등의 식재료와 반찬 등을 파는 상점이 즐비하며 식당과 찻집 등도 붐비는 종합 시장으로 발전했다. 교토의 식문화와 서민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활기찬 장소로 현지인 뿐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곳이다. 각 상점의 다양한 품목을 시식할 수 있는 곳도 있으며 회나 초밥 등 싱싱한 재료로 바로 음식을 만들어 파는 곳도 있어 쇼핑을 즐기며 식사하기 좋다. 이곳에서 도시락을 구매해 교토 관광에 나서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요마타 외에도 붕장어 전문점인 야키아나고 마루야타(焼きあなご まるやた), 교료리(京料理)에 필수적인 밀떡을 맛볼 수 있는 후카(麩嘉)도 추천 음식점이다.

주소 Kyoto Prefecture, Kyoto, Nakagyo Ward, 富小路通四条上る西大文字町609番地
운영시간 가게마다 다름(보통 09:30-18:00) 
입장료 무료

아리츠쿠(有次)

일본 5대 칼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칼 전문점으로, 1560년에 시작하여 457년 간 운영하고 있다. 18대 장인이 칼을 만드는 곳으로, 6명의 장인들이 하루에 10자루 내외의 칼을 만든다고 한다. 니시키 시장 중간쯤에 위치해 있으며,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하면 칼에 이름을 새겨 준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伏見稲荷大社)

전국 3만여개의 이나리 신사(진쟈)의 본궁이다. 기원은 794년, 수도가 교토로 이전하기도 전인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우카노미타마노카미(宇迦之御魂神, 이나리)를 모시는 곳으로, 이나리의 전령인 여우 조각상이 많다. 이나리는 827년에 ‘정일위 이나리다이묘진(正一位稻荷大明神)’이라는 존칭으로 불리면서 신들의 판테온에서 상위신으로 자리매겨졌다. 이 신은 일체의 식물을 관장하는 식물신으로서, 특히 식물의 원조인 벼의 생산과 풍요를 수호하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이나리는 ‘벼의 생장’을 뜻하는 말이다. 이나리 신은 근세 이후 상공민의 신으로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그 기본은 도작(稻作) 농경민의 신, 즉 도작 문화의 신으로 흔히 일본인의 민족성에 딱 들어맞는 신으로 간주된다.

교토 남부, 이나리 산을 오르는 단풍나무가 늘어선 아름다운 숲길은 지난 1,300년간 일본인들의 순례길이었다. 그러나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곧바로 가로지르며 더욱 인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사람의 손으로 만든 토리이 길이다. 붉은 주칠을 한 토리이가 산기슭부터 꼭대기의 후시미 이나리 신사까지 구불구불 이어진다. 약 4㎞에 이르는 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고요한 연못과 작은 폭포, 아름다운 묘지들이 즐비하다. 마음대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으며 일년 365일 24시간 개방되어 있다. 

이 길은 계절에 따라 저마다 다른 매력을 뽐낸다. 여름에는 녹음이 짙은 숲과 토리이가 반가운 그늘을 만들어주며, 겨울에는 토리이가 눈을 막아 주어 안전하게 산을 오를 수 있다. 여름에는 녹색을 배경으로 선명한 주홍색, 겨울에는 순백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틱한 레드. 어느 쪽이든 황홀한 것은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외국인 관광객이 후시미 이나리 신사를 찾는 주된 이유는 탐방로를 산책하기 위해서이지만 신사 건물 자체도 충분히 멋지며 방문해 볼 만하다. 신사의 출입구에는 1589년 유명한 지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헌정한 로몬 문이 서 있고, 그 뒤편으로는 신사의 본당(혼덴)과 다양한 부속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본당 왼쪽으로 붉은 토리이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신령스러운 말을 모신 곳인 신마사(神馬舍)를 지나 센본 토리이(수천 개의 토리이라는 뜻)가 나온다. 두 개씩 짝을 지어 서 있는 토리이의 행렬로부터 탐방로가 시작된다. 전체 탐방로를 따라 줄 지어 서있는 이 토리이는 개인과 기업들이 기증한 것으로, 각 문의 뒤에는 기증자의 이름과 기증 날짜가 새겨져 있다. 가격은 4십만 엔의 작은 문부터 시작하며 100만 엔이 넘는 큰 문도 있다. 두 길 중 어느 쪽으로 가든 합쳐지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올 때는 같은 길로 다시 오면 재수가 없다는 속설이 있으니 다른 길로 돌아와야 한다.

산 정상까지 올랐다 내려오는 데는 2~3시간 정도 소요되지만 원하는 만큼만 갔다가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 가는 길에는 방문객들이 보다 적은 액수의 기부금을 내고 기증한 미니어쳐 토리이가 쌓여 있는 작은 신사들이 여러 곳 있다. 길을 따라 식당도 여러 곳 있는데, 이곳에서는 이나리 스시와 키츠네 우동(여우 우동)과 같은 현지 음식을 판매하며, 모두 여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알려진 아부라아게(유부)가 들어간다.

위로 30~45분 정도 더 올라가면 토리이가 점차 듬성듬성해지고 요츠츠지 교차점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산으로 오르는 길의 중간 지점 정도다. 교토를 내려다보며 멋진 전망을 감상할 수 있는 이곳을 넘어가면 탐방로가 갈라져 정상까지 원형으로 이어진다. 이 지점을 지나면 별 다른 볼 거리도 없고 토리이의 수도 더 적어지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발길을 돌린다.

주소 68 Fukakusa Yabunouchicho, Fushimi Ward, Kyoto, Kyoto Prefecture
운영시간 없음(상시 입장 가능) 
입장료 무료

뵤도인(平等院)과 뵤도인뮤지엄

본래 헤이안 시대인 998년에 후지와라 씨의 가장 강력한 일원 가운데 하나였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시골 별장으로서 세운 것이다. 그러다가 미치나가의 아들인 요리미치가 1052년 사원으로 개축했다. 일본 국보인 호오도(鳳凰堂, 봉황당)는 그 이듬해에 건립된 아미다도(阿彌陀堂, 아미타당)로, 건물이 아름다우며 내부에는 아미타여래상을 비롯한 3점의 국보가 있다. 봉황당만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원래의 건물로 경치가 아름다운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고, 부속 건물들은 1336년에 내전으로 불에 탔다.

뵤도인의 주 건물인 봉황당은 중당과 좌우의 복도, 중당 배후의 미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중당에는 아미타 여래상이 놓여 있다. 봉황당의 지붕에는 봉황상이 서 있는데 이 봉황상들도 국보이다. 

봉황당 내부에는 하나의 아미타불상이 높은 연단에 놓여 있다. 아미타불상은 편백으로 만들어졌고 금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조초가 만들었는데 그는 새로운 비율과 공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불상은 머리부터 무릎까지 약 3m 높이다. 봉황당의 벽에는 천국을 나타내는 조각을 해 놓았고 아미타불이 극락정토로 가는 길을 함께 할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인들은 장수와 절의 문화적 중요성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10엔 동전에는 뵤도인 봉황당을, 1만엔 지폐에는 봉황당의 지붕 상에 장식되어 있는 봉황을 디자인해 놓았다. 

건물의 앞에는 연못과 함께 조도시키 정원이 있고 1997년에 고고학 발굴을 위해 준설되었다. 뵤도인 뮤지엄인 봉상관(鳳翔館)은 뵤도인 부지 내에 있는 박물관으로 2001년 3월 1일에 개관했으며 다양한 역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호모쓰칸(寶物館, 보물관)에는 일본 3대 명종 중 하나인 범종을 비롯해 4점의 국보가 있다. 

주소 Renge-116 Uji, Kyoto Prefecture 611-0021
운영시간 09:00-16:10(정원과 뮤지엄은 17:00까지) 
입장료 600¥
팁 10엔짜리 동전을 하나 준비해서 봉황당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스타벅스 뵤도인 오모테산도 점(スターバックス 宇治 平等院 表参道店)

2017년 3월 31일 문을 연 교토 우지 스타벅스 컨셉스토어이다. 뵤도인 정문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보인다. 돌과 자갈로 만든 일본식 정원인 가레산스이로 마당을 꾸며 놓았다.

우지공원(宇治公園)

우지는 헤이안 귀족의 별장지이자 전쟁의 무대인 곳이어서 곳곳에 역사의 현장이 남아 있는 마을이다. 특히 우지공원 일대는 명승과 사적이 풍부해 독특한 분위기가 감도는데, 때문에 모래가 많은 두 개의 섬을 우지공원으로 조성해서 수차례 개수공사를 거치고 있다. 두 섬 중 북쪽의 긴 섬이 타치바나지마(橘島, 타치바나 섬), 남쪽에 있는 작은 섬이 토노시마(塔の島, 토노 섬)이다.

도노시마에 우뚝 솟아 있는 높이 15m의 석탑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1286년 승려 에이손(叡尊)이 건립했다고 전하나 그 경위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먼저 우지교(宇治橋)를 복구한 후 우지 일대에서 어획을 금한 후 모든 고기잡이 도구들을 땅에 묻어 모래로 덮은 후 그 위에 돌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석탑은 홍수와 지진으로 수차례 파괴되ᄋᅠᆻ고, 1756년 대홍수로 쓰러져 이후 약 150년 간 매몰되어 있던 것을 1908년에 발굴해 재건한 것이다. 원래 일본에서는 탑을 나무로 만들지 석탑은 극히 드문데, 홍수가 잘 나는 섬 안이기 때문에 석탑으로 만든 것 같다.

아사히야키(朝日焼)

아사히야키는 주전자·잔을 비롯한 다구를 제작하는 도예 공방이다. 다양한 그릇을 구입할 수 있고 도예 체험 교실도 연다.현재 16대 주인인 마쓰바야시 유스케 씨가 운영하고 있다.

우지 신사(宇治神社)

우지 공원에서 ‘아침 안개 다리’라는 뜻의 빨간색 아사기리 다리(朝霧橋)를 건너면 우지 신사가 나온다. 우지 신사는 원래 우지가미 신사와 하나의 신사였으며 과거에는 하치만구 별궁이라고 불렸다. 메이지 유신 이후 두 개의 신사로 분리되고 아래쪽 신사는 우지 진쟈, 위쪽의 신사는 우지가미 진쟈로 부르게 되었다. 혼덴(本殿, 본전)과 고신조(안치된 신의 조각상)는 카마쿠라 초기에 만든 것으로 중요 문화재이다. 

우지 신사 입구 맞은편에는 우지십첩(宇治十帖, 우지쥬죠) 기념상이 있다. 

「겐지모노가타리」
「겐지 모노가타리」는 왕조 귀족들의 사랑과 인간관계를 풍부한 상상력과 아름다운 문체로 그린 장편으로, 세계 최고 최장의 고전소설로 꼽히며 치밀한 구성과 인간의 심리 묘사, 표현의 정교함과 미의식 등으로 일본문학사상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겐지 모노가타리」의 54첩 중 우지를 배경으로 하는 45첩 하시히메(橋姬)부터 마지막 54첩 유메노우키하시(夢浮橋)까지의 10첩(十帖, 쥬죠)을 뜻한다. 우지 쥬죠는 다리(橋姬, 하시히메)에서 시작하여 다리(夢浮橋, 유메노우키하시)로 끝난다고 한다.
주소 Kyōto-fu, Uji-shi, 宇治山田Uji, Yamada−1
운영시간 24시간 
입장료 0¥

우지가미 신사(宇治上神社)

1994년 고도 교토 문화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인근의 뵤도인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헤이안 시대(794~1185) 후기에 만들어진 본전은 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신사 건축물로 1060년에 지은 것이다. 메이지 시대(1868년~1912)까지는 인접한 우지 신사와 합쳐 ‘우지 리큐 묘우진’으로 불렸다. 제신은, 형 닌토쿠 천황에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우지 강에 투신했다는 우지노와키 도령과, 아버지 오우진 천황, 형인 닌토쿠 천왕이다.

본전(本殿, 혼덴)

본전은 3채의 내전이 하나의 히와다부키(노송나무 껍질 지붕)를 둘러 쓴 드문 구조로 돼 있다. 국본인 배전(拜殿, 하이덴;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본전 앞에 지은 건물)은 카마쿠라 시대(1185~1333) 초의 것으로, 헤이안 시대의 신덴즈쿠리(寝殿造; 헤이안 시대의 귀족들의 대표적인 주택 양식)를 보여 준다. 이 밖에 경내에는 카마쿠라 시대에 세워진 카스가 신사 등의 셋샤(본사의 제신과 인연이 깊은 신을 모신 신사), 우지 7명수(名水) 중 하나인 키리하라스이(키리하라 수) 우물이 있다. 오랫동안 복원 공사를 하다가 2014년 말에 마무리되었다.

신덴즈쿠리(寢殿造)  

10세기 중엽 이후, 후지와라씨(藤原氏)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던 시대에 귀족들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양식의 정원을 만들었다. 그들은 정원을 거닐거나 내다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즐겼는데, 이러한 귀족들의 저택의 건축양식을 신덴즈쿠리라 한다. 신덴즈쿠리 가운데는 대략 1변이 100m 이상이나 되고 면적이 1헥타르를 넘는 거대한 저택도 있었다. 신덴은 그 집의 주인들이 기거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또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기능에 따라 방을 만들고, 연못가에 세운 건물에는 연못의 경관을 감상하는 누각을 세웠다.

주소 Kyoto Prefecture, Uji, 宇治山田59
운영시간 없음(상시 입장 가능) 
입장료 무료

쯔우엔(通圓)과 우지교(宇治橋)

우지 시 가운데에는 우지강(宇治川)이 흐른다. 지방에서(특히 나라쪽에서) 교토로 올라가기 위해서 반드시 이 우지가와를 건너야 되기 때문에 거의 일본 왕조가 시작되는 초기부터 우지교(宇治橋)가 놓이게 되었다. 우지는 옛 수도 나라와 새로운 수도 교토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우수한 품질의 차밭이 많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지방에서 교토를 올라갈 때 들러서 진상품용 차를 구매하는 사람들과 교토에서 지방으로 내려갈 때 들러 선물용 차를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수도와 지방을 연결하는 다리인 우지교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많은 사찰과 별장, 그리고 찻집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옆에 쯔우엔(通圓)이라는 오랜 찻집이 있다. 쯔우엔은 헤이안시대의 말기인 1160년에 설립되어 설립된지가 850년이 넘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의 건물은 1672년에 세워져 3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을 한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에, 이 쯔우엔은 일본역사상 한 장소로서 수많은 그림과 글속에 등장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이 차가게를 이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쯔우엔에서는 다양한 고품질의 우지차와 차도구를 살 수 있다. 현재 사장은 쯔우엔 가문(通円家)의 23세손인 료우타로우(通円 亮太郎)씨의 장남, 유스케(祐介)씨로 초등학생 때부터 가업을 돕기 시작해 대학 졸업 후 교토부립 차산업연구소를 거쳐 2005년부터 정식으로 사업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교토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꽤 알아주는 차 전문가이다. 쯔우엔의 오른쪽 부분은 지금 찻집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왼쪽의 차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시든, 오른쪽의 찻집 문을 열고 들어가든 안에 들어가면 연결되어 있다. 다만, 차를 마신 후 계산하는 곳과 차 가게에서 물건을 구매하고 계산하는 곳은 구분돼 있다. 찻집 창으로는 세차게 흐르는 우지강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토로 마을(ウトロ)

뵤도인과 녹차로 유명한 우지에는 이세탄초 우토로 51번지에 위치한,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마을이 있다. 1942년 2월 이곳에 교토 비행장과 병설 비행기 공장 건설 공사가 결정되자 일본국제항공공업이 시공을 맡고 약 2천 명을 동원하는데, 이중 약 1300명이 조선인이었다. 이 조선인들과 그 가족이 생활하고 있던, 1943년에 건조된 합숙소(숙박시설)가 현재 우토로 마을의 전신이다.

우토로 마을을 만든 장본인은 태평양전쟁 때 군용 비행기를 제작한 대표적인 전범군수기업, 닛산이다. 닛산의 쓰다신고 사장은 전후 미 점령군에 의해 A급 전범으로 연행됐다가 이듬해 무죄 석방됐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이후 그곳에 살던 재일 한국인들은 퇴거 위기에 시달려야 했다. 주민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수도, 취업을 하기도 어려웠다. 조국의 역사와 글을 잊지 않기 위해 조그마한 학교를 짓기도 했지만 일본 정부의 탄압에 얼마 안 돼 문을 닫았다. 주민들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입에 풀칠을 해야 했고 행정의 혜택도 전혀 닿지 않았다. 상하수도 시설도 없어 70~80대 노인들이 펌프질을 해서 물을 길어 올려야 했는데, 그나마 깊게 구멍을 뚫을 수 없어 벌겋고 기름이 둥둥 뜬 물을 그대로 써 왔다.

재일동포에 대한 연금 차별 역시 삶을 고단하게 했다. 병을 앓는 노인이나 생활보호대상자를 제외하곤 고령이라도 일을 해야 한다. 우토로 주민들에게 아무런 전후보상을 하지 않던 닛산은 1987년 이 땅을 몰래 민간에 팔아넘겼다. 우토로 징용자들은 강제동원으로 갖은 노역에 시달린것도 모자라 보상은 커녕 극심한 차별과 살아온 터전마저 빼앗겼지만 일본 정부와 닛산으로부터 어떠한 전후보상도 받지 못한 채 우토로 마을은 방치되었다.

우토로 주민들은 여러 곳에 상고하였으나 모두 기각됨으로써 사법적 판결은 끝이 났다. 2005년 7월 기준으로 우토로에는 65세 가량의 재일 한국인 203명이 살고 있었는데, 이후 우토로 지키기 운동이 일어나 한국의 시민단체와 재일동포의 성금, 우리 정부의 지원금으로 2010년 토지를 매입했다. 

최근인 2016년 6월부터는 재개발을 위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2019년까지 주민 모두가 이주할 수 있는 주택이 건설된다. 2기 건설이 시작되는 2018년에는 우토로 마을이 사실상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산쥬산겐도(三十三間堂)

122m 길이의 렌게오 인(蓮華王院) 사찰이다. 본당은 일본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로, 12세기에 은퇴한 고시라카와 천황의 명으로 지어졌다. 산주산겐당이란 ‘33개의 칸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라는 의미로, 금당 정면이 33칸에 달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산주산겐 당에서 숭배하는 불교의 자비의 신인 관음은 도움을 청하는 이의 상황에 어울리는 서른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현재의 전당은 1249년 화재로 전소한 원래의 전당을 충실하게 재건한 것으로, 1266년 건축되었으며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까지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었다. 귀족들은 평화를 찾기 위해 교토에 많은 사찰들을 지었으며, 어떤 사찰들은 불교 성상들을 모셔 두는 구실을 했다. 산주산겐 당은 그 당시부터 유일하게 남아 있는 보관소이다. 

주소 657 Sanjusangendomawari, Higashiyama Ward, Kyoto, Kyoto Prefecture
운영시간 08:00-17:00 
입장료 600¥ 
팁 내부 촬영 금지

주관음상과 천수관음상

전당 중앙에는 1.8m 크기의 주관음상이 서 있는데 가마쿠라의 조각가 단케이가 평생의 과업으로 84세에 완성했다는 걸작이자 일본의 국보이다. 그 뒤로는 양옆으로 같은 관음을 나타낸 작은 실물 크기 관음상이 각각 500개씩 늘어서 있다. 이 1,001개의 불상은 자세히 보면 얼굴과 팔의 모습이 조금씩 다른데, 각기 만든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1,001개의 천수관음상 중에는 자신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의 얼굴이 반드시 숨어 있다고 한다. 천수관음상이란 천 개의 손을 가진 관음상을 말하는데, 팔이 40개가 달려 있고 한 팔로 25개의 세상을 구한다고 하여 천수관음으로 불린다.

관음 주변에는 28개의 수호신 상들이 서 있는데, 이 28개의 신상은 물의 신, 불의 신, 번개의 신 등 인도 경전 󰡔리그베다󰡕에 나오는 힌두교 내지 산스크리트 신의 모습이다. 양쪽 끝에는 천둥신과 풍신의 상이 있는데, 천둥신이 북을 두드리고 있고 풍신이 바람자루를 어깨에 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본당 뒤로 돌아가면 본당을 따라 긴 복도가 이어져 있는데, 이 118m 길이의 복도는 세계에서 가장 긴 복도로 기네스에 오르 바 있다. 이 복도는 에도 시대(1603~1868) 이래 매년 열려 오던 궁술 시합 ‘도시야’가 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다른 연례행사인 버드나무 의식은 두통을 예방하거나 고치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로 참석자들을 건드리는 의식이다.

도요쿠니 신사(豊国神社)와 미미즈카(耳塚)

도요쿠니 신사(豊国神社 神社)는 우리 역사와 관련이 매우 깊은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의 신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임진왜란을 떠올리며 일반적으로 그를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잔인하고 야욕이 많은 통치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일본 현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상당히 인기가 많은 인물이다. 그가 평범한 백성 출신이었음에도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시대의 영웅으로 올라섰던 일생의 드라마틱함 때문이다.

말 그대로 도요토미는 평범한 ‘백성’의 아들로 태어나 나중에는 ‘天下人’까지 되었다. 그의 본명은 히요시마루(日吉丸)이다. 생긴 모습이 원숭이를 닮았다고 해서 그는 ‘고자루(고원, 어린 원숭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는 노부나가를 만난 이후 출세의 기회를 잡았으며 노부나가 사후에는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실권을 장악해나갔다. 이후 관백에 임명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면서 일본 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전국통일 후에도 만족하지 못했으며 해외 침략의 야심을 품고 1592년 조선을 침략했지만 그는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9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599년에 그 시신을 그의 유언에 따라 호코지(方広寺)에 가까운 아미다 산정에 매장하고 그의 아들이 도요쿠니 신사를 창건하는데, 히데요시는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 1571~1617)으로부터 정1위의 신위와 호코쿠 다이묘진(豊国大明神, 풍국대명신)이라는 신호를 받아 신으로 모셔지게 된다. 그러나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를 끝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문되면서 신사도 몰수되었고, 근근이 유지되다가 1868년 메이지 천황의 오사카 행행 때 재건되었다. 1873년에는 관사로 승격되어 국가에서 관리하였으며, 1880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도요쿠니 신사에는 국보와 히데요시의 유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보물전이 있다. 도요쿠니 신사의 당문은 국보인데 이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통일 후 건축한 것으로, 도쿠가와가 자신의 근거지로 삼기도 했었던 후시미성에서 가져온 것이다. 당대의 모모야마 양식을 잘 보여주는 화려함 때문에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있다.

주소 京都府京都市東山区大和大路通り正面茶屋町530
운영시간 09:30-16:30 
입장료 무료(보물관은 300¥) 

호코지(方広寺) 종각

신사 바로 옆에는 호코지(方広寺, 방광사)가 있는데, 본당만 남은 작은 절에 걸맞지 않은 거대한 종과 종각을 두고 있다. 이른바 국가안강의 종이다.

호코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의 프로젝트 중 하나였따. 그는 도다이지의 대불보다 큰 호코지 대불을 교토에 만들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상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대불은 만드는 족족 불타 녹아버렸고, 히데요시 사후에 목조로 재건되었지만 이 역시 벼락을 맞아 대불전과 함께 18세기에 불탔다. 때문에 종만 남게 되었다. 

종에는 이 종을 만든 경위와 소망을 적은 종명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국가안강(國家安康)’, ‘군신풍락(君臣豊樂)’이라고 적힌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를 두고 17세기에 하야시 라잔(林羅山)이라는 주자학 대가가 ‘국가안강’이란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의 ‘가강(家康)’을 나눈 것이고, ‘군신풍락’은 ‘도쿠가와 히데요시(풍신수길)’의 ‘풍신(豊臣)’을 붙인 것이므로 이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저주라고 주장한다. 이를 빌미로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오사카 겨울 전투이다.

미미즈카(耳塚, 귀무덤)와 임진왜란

미미즈카(이하 귀무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제신으로 모시고 있는 도요쿠니 신사 바로 앞에 있는 임진왜란 관련 유적지이다. 화려한 도요쿠니 신사에서 불과 20여m 떨어져 있는 이 무덤은 주택가 옆에 쓸쓸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귀무덤은 말 그대로 귀를 묻어놓았다고 해서 귀무덤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무덤에 묻혀있는 ‘귀’들은 임진왜란 때 일본의 부대들이 자신들의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조선군민 남녀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온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공양의 의례 후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이는 본래 비총(鼻塚, 코무덤)이라고 하였으나 너무 잔인하다 하여 그 이름을 귀무덤, 즉 이총으로 바꿨다고 한다. 귀무덤은 당시 전쟁의 잔인함과 폭력성 그리고 조선군민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미미즈카를 누가 만들었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있었지만, 귀무덤 자체의 조성은 히데요시가 하였으며 그 위에 만들어진 오륜석탑은 히데요리가 만들어 지금의 형태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히데요시의 사후 히데요리가 아버지의 숙원사업이었던 호코지(方廣寺)의 대불을 조성할 때 호코지의 앞에 위치한 그의 전리품인 귀무덤도 함께 손보았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호코지는 히데요시의 사후세계를 위해 세워진 사찰이므로 그의 업적을 높이기 위해 호코지의 대불을 재건한다고 하면 당연히 귀무덤도 손을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귀무덤 안에는 귀와 코가 묻혀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귀가, 정유재란 때는 코가 전승의 증표로 일본으로 보내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다. 또한 당시 기록에 중요한 적장의 경우에는 머리를 잘라 히데요시에게 보내 확인하게 했다는 것으로 보아 귀무덤 안에는 귀와 코 그리고 중요 인물들의 머리가 함께 묻혀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우리가 귀무덤에는 조선인들의 것이 묻혀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임진왜란이 조선과 명, 일본 간의 국제전이었으므로 명나라 사람들의 것들도 많이 묻혀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코와 귀를 벤 원인은 무엇일까. 당시 일본에 끌려가서 포로 생활을 했던 강항의 󰡔간양록󰡕에서는 그 원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풍신수길이 모든 장수에게 명하기를 “사람이 귀는 둘이 있지만 코는 하나이니, 마땅히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머리를 대신하는 것이 좋겠다. 한 사람이 한 되씩으로 하되 소금에 절여서 나에게 보내라. 코의 수효가 채워진 연후에야 생포로 인정하겠다.”

즉 귀무덤은 전승의 증거로 목을 잘라서 보내는 것보다 코를 잘라 보내는 것이 부피로나 무게로나 훨씬 효과적이라는 단순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이 존재했다. 코와 귀는 그것이 병사의 것인지 양민의 것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 부대들은 자신들의 전과를 올리기 위해 군·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식으로 코를 베었다. 보통 임진왜란을 통해 학살되거나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조선인이 당시 전체 인구의 20~25%에 해당하는 100~150만이라고 하는데, 이중 일본군에게 코와 귀를 베인 조선인이 적어도 10만에 달한다. 단순히 코와 귀를 위해 무작위로 살해당한 조선인들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루 셀 수도 없는 조선인들이 잔인하게 희생됐고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미미즈카이다.

이후 귀무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공과 무위를 일본 내국인들에게 보여주는 데 이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에게 귀무덤을 보여주기도 하는 만행을 저질러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98년 이를 기리는 기념비를 짓고 대대적인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새로이 다시 기억되었다. 이때의 논리는 히데요시가 귀무덤을 만들고 승려로 하여금 공양케 한 것은 박애, 예의의 상징이며 귀무덤은 그것의 상징으로서 조선은 일본과 순치상보의 관계로 만국에 솔선하여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돕고 우의를 달성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을 침략하고 그들이 조성했던 전리품이었던 귀무덤이 이번에는 조선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한편 1990년 귀무덤에 묻힌 원혼들을 본국으로 귀환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83년 우연히 지나다 귀무덤을 발견한 박삼중(朴三中) 스님은 그 참혹함과 쓸쓸함에 비통함을 느끼고 원혼들의 송환을 위해 적극 나섰다고 한다. 이에 일본의 승려들도 지원을 약속하였고 마침내 1889년 출범해 봉행위원회를 원혼들의 귀환 작업이 현실화되었다. 이후 1990년 4월 고혼들을 위로하는 합동위령대제를 지낸 후 국내로 12만 6천여 명의 영혼들을 모셔와 봉환하였다. 이 영혼들은 임진왜란의 역사적 상징성과 영혼들이 마지막으로 조선을 떠난 지점이 남해안 지방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부산의 동명불원(東明佛院)에 모셔졌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400여 년이 지난 후에 민간 승려에 의해 추진되었던 이 원혼들의 송환 노력은 여러모로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무덤 주변의 돌 울타리는 1915년 가부키 연기자들의 기부와 협객으로 알려진 후시미(伏見の勇山)등이 협력하여 세운 것이이라고 한다.

혼간지(本願寺)

혼간지는 오타니파의 본산의 통칭이다. 흔히‘오히가시상’이라 불린다. 이 절은 12~13세기에 걸쳐 활약했던 승려, 신란(親鸞) 성인이 개창한 정토종 혼간지파의 본산이다. 

당시 정토종은 민중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져서 큰 세력을 형성했다. 17세기 초 일본 전국을 통치한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당시 승병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강한 혼간지의 세력을 두려워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절을 강제로 분할시켜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와 ‘니시혼간지’(西本願寺) 2개로 분리시켰다. 

혼간지는 20세기에 이르러, 정치적 불화, 재정적 스캔들 그리고 종파 분쟁 등으로 시끄러워졌고, 결과적으로 많은 하위 종파로 쪼개졌다. 통계에 따르면 히가시혼간지의 최대 종파인 신슈오타니파는 550만 명에 이르는 신도가 있다.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히가시혼간지는 소가 료진, 기요자와 만시, 가네코 다이에이 그리고 하야 아케가라스와 같은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을 배출해 냈다. 2015년 현재 수장(門首)은 1996년부터 이어온 오타니 초오켄(大谷暢顯, 淨如)이다.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서쪽 혼간지’라는 뜻의 니시혼간지는 본래 딸 각신니(覚信尼)가 1272년에 건립한 오오타니묘당(大谷廟堂)이 시초인데, 이 묘당은 신란이 90세에 세상을 떠나고 10년 후 그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1321년부터 혼간지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사찰로 바뀌었고, 몇 차례 이전을 거친 후 1591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부로 현재의 위치에 정착했다. 일본 불교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신란을 모신 사당으로 유명하며, 경내에는 국보와 중요문화재가 많고 1581년에 지은 일본 최고의 노(能) 무대도 잘 알려져 있다. 

남쪽에 마주하고 있는 류코쿠 대학교는 1639년에 니시혼간지의 부속으로 세운 교육 기관에서 시작됐다.금각사, 은각사와 함께 교토 3각으로 알려진 히운카쿠(飛雲閣, 비운각), 그리고 국보인 쇼인(書院, 서원)은 비공개이기 때문에 볼 수 없다.

주소 Kyoto Prefecture, Kyoto, Shimogyo Ward, 堀川通花屋町下ル
운영시간 05:50-18:00 
입장료 무료

고에이도(御影堂, 어영당)  

어영당문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건물로 국보 제230호로 동서로 48m, 남북으로 62m에 높이는 29m나 되는 거대한 건물이다. 화재로 소실되어 1636년 재건되었으며 한번에 3,6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어영당을 니시혼간지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중앙에 신란의 상을 모시고 있으며 혼간지파 역대 문주들의 진영도 여기에 있다. 절의 중요 행사는 주로 이곳에서 열린다. 1999년부터 2009년까지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쳤다. 

고에이도는 아미다도와 와타리로카(渡廊下, 国宝の附指定)라는 복도로 이어져 있는데, 특히 복도 바닥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워낙 오래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다 보니 나무 바닥이 파이곤 했는데, 파인 틈을 메울 때 그대로 조각을 끼워넣는 것이 아니라 결이나 문양에 맞추어 목각 작품처럼 만들어 놓았다. 옹이가 멧돼지로, 단풍잎으로, 꽃병으로, 물 마시러 나온 사슴으로, 후지산으로 변한 곳곳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어영당 앞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400년 이상의 큰 은행나무(大銀杏)가 있다. 이 나무는 화재 때 나무에서 물이 뿜어져 나와 불을 껐다는 전설이 전해 물분사은행(水吹き銀杏)이라고 하고, 뿌리를 하늘에 펼친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거꾸로 은행(さかさま銀杏)이라고도 한다.

테미즈야(手水舎)

2010년 복원된 중요문화재이다. 박공판에는 금속 장식을 달고, 화강암의 마름모 위 ​중앙에 돌 우물과 수반이 있다. 테미즈야란 신사나 절의 참배자가 손이나 입을 깨끗이 씻게 물을 받아 두는 건물을 말한다.

아미다도(阿弥陀堂, 아미타당)  

어영당 오른쪽 건물인 본당이다. 국보 제231호로 중앙에 아미타여래상이 있고, 양쪽으로 인도와 중국, 일본의 일곱 고승들이 모셔져 있다. 1985년 마지막으로 보수 공사가 있었다. 고에이도와 아미다도는 평상시 개방하며, 건물 내부까지 들어가 볼 수 있지만 마루에 오르기 전에 신발을 벗어 봉지에 넣어 휴대해야 한다.

쇼인(書院, 서원)

어영당 남쪽에 있는데, 모모야마 시대에 발달한 화려한 서원 조성 양식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쇼인의 다이멘쇼(対面所), 시로쇼인(白書院), 쿠로쇼인(黒書院), 히운카쿠(飛雲閣), 기타노부타이(北能舞台) 등은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히운카쿠는 킨카쿠지의 금각, 긴카쿠지의 은각과 함께 교토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한편 서원의 남북에 일본 전통 가면극인 ‘노(能)’ 무대가 있는 것은 특이한 점이다. 서원 건물들은 평상시에는 개방하지 않으며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잠깐씩 들어가 볼 수 있다.

경장(経蔵)

1678년 건립된 것으로 이중 지붕으로 되어 있다. 내부 중앙에 팔각형 회전식 서가 전륜장이 있는데, 360개 서랍에 6,323권에 달하는 대장경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이 대장경은 1635년 텐카이 스님이 12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는 비공개이고 외관만 관람할 수 있다.

불반소(旧仏飯所)

예전에 밥을 짓던 부엌이다. 1961년 서원이 세워지고 그곳에서 요리를 하면서부터 더 이상 밥을 짓지 않게 되었다. 곳곳에 파손이 심하고 건물 전체도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가라몬(唐門, 당문) 

국보 제116호로 서원을 지나 남쪽에 나 있는 작은 문이다. 노송나무 껍질로 지붕을 얹었으며 장식이 매우 호화스럽기로 유명하다. 누구든 그 아름다움에 취해 바라보고 있노라면 날이 지는 것도 모른다고 하여 ‘해가 지는 문’이라는 뜻의 히구라시몬(日暮門)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닫혀 있기 때문에 방문객의 출입 용도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가라몬은 일본에서 ‘중국풍의 문’을 일컫는 보통명사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도 가라몬이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니시혼간지의 가라몬에는 중국풍의 사자와 기린, 공작이 조각되어 있다. 허유가 요임금에게서 천자 자리를 넘겨주겠다는 말을 듣고 냇가로 달려와 귀를 씻었다는 고사의 장면도 조각으로 남아 있다.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동쪽 혼간지’라는 뜻으로, 신슈오오타니파의 본산이며 정식명칭은 신슈혼뵤이다. 1602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헌납을 받은 절인 히가시혼간지로 분립된 것이 그 시작이다. 그 후 네 차례 화재애 의해 손실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895년에 재건된 것이다. 미에이도당에는 종파 시조인 신란성인의 사진을, 아미타당에는 본존 아미타여래부처님을 안치하고 있다.

히가시혼간지는 나라의 다이부쓰덴(大佛殿, 대불전) 다음으로 큰 목조건물인 ‘고에이도(御影堂, 어영당)’, 교토 3대 산문이라는 어영당문(御影唐門)으로도 유명하다. 

주소 Kyoto Prefecture, Kyoto, Shimogyo Ward, 烏丸通七条上る
운영시간 05:50-17:30 
입장료 무료

어영당문(御影堂門)

쇼세이엔에서 히가시혼간지로 가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출입문이다. 높이 약 28m의 이중 문으로 되어 있으며, 현판에 정토진종 종파 중 하나인 신슈오타니파의 총본산이라는 의미로 ‘신슈혼뵤우(真宗本廟)’라고 써 있다. 

도후쿠지(東福寺)의 문, 지온인(知恩院)의 문과 함께 교토 3문 중 하나로, 1911년 재건한 것이다. 비공개인 상층에는 석가여래 좌상과 미륵상·아난존자상 입상 등 삼존이 안치되어 있고 불사리도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고에이도(御影堂, 어영당)

어영당문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것이 어영당이다. 화재로 소실되고 1895년에 재건한 고에이도는 높이 38m, 측면 58m, 정면 76m라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면적은 도다이지의 다이부츠덴을 능가하지만, 외관의 거대함에 비해 내부는 단 1층으로 넓다는 느낌만 있을 뿐이어서 일본 최대의 전통 건축물이지만 건축학적인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 메이지 유신 이후 지어진 건물이라 근대 건축에 속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 건물의 정면에 있는 고에이도 문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더 유명하다.

히가시혼간지는 예전에는 대사당(大師堂)이라고 했다. 메이지 천황 때인 1876년, 메이지 천황이 신란 성인에게 ‘見真大師’메이지 천황 에서 신란 대해 현진대사(見真大師)라는 대사의 시호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후 1981년 종헌(宗憲)이 개정됐을 때 이 시호가 삭제되고 대사당이라는 이름도 사라졌다.

히가시혼간지의 실내는 단층으로 구성되었으며, 나머지 부분은 순전히 지붕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가 들어가는 부분이기에 지붕 밑에 개판을 깔아서 외부로 노출되지 않는다. 당내는 내진(内陣)과 외진(外陣), 참배소인 찬바이세키(参拝席)로 나뉜다.

지렛대 역할을 하며 처마를 잡아주는 엄청난 크기의 ‘하네기’와 그것이 연결된 거대한 나무 부재들이 큰 받침대가 되어주며, 그 위로 작은 부재들을 짜서 만들어진 정글짐 형태의 구조가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의 크기와 수를 줄이고 자유로운 배치가 가능해져서 면적이 넓은 실내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하네기가 대량식 구조의 기둥 이상으로 굵어져야 하며, 그 거대한 지붕의 구조는 천장 안에서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높은 공간을 조성하기 어렵다는 것은 단점이다. 덕분에 상당히 높은 건물임에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단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붕 안은 거대한 죽은 공간이 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이 어영당을 지을 때 큰 목재들을 옮기다가 크고 작은 인명 사고가 많이 났는데, 여신도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밧줄을 만들어 목재를 운반하니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존 불당 앞의 전시관에는 게즈나(신자들이 기증한 머리카락을 모아 만든 동아줄)와 용골 등을 전시하고 있다. 

아미다도(阿弥陀堂, 아미타당)

어영당 왼편에 위치해 있다. 아미타불을 안치하는 본당으로, 기와 지붕에 단층 구조로 되어 있다. 폭 52m, 세로 47m 규모이며 불당 크기가 일본 전체에서 7위에 해당된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880년 착공해 1895년 완성한 것이다.

당내는 내진(内陣)과 외진(外陣), 참배소인 찬바이세키(参拝席)로 나뉘는데, 내진 중앙에 수미단(부처를 모셔 놓는 제단)을 두고 그 단상 내에 아미타여태의 목상을 안치했다. 오른쪽 단상에는 쇼토쿠 태자의 초상을, 왼쪽 단상에는 겐쿠상인(源空上人)의 초상을 마련해 두었다. 

내진의 혼마(本間)에서 우측 북쪽 사이에는 인도의 대승려인 용수대사(龍樹大士)과 천친보살(天親菩薩), 중국 정토교의 선구자인 담란화상(曇鸞和尚)의 초상이, 좌측 남쪽 사이에는 수·당 시대 정토교 승려인 도작선사(道綽禅師), 당나라 때 정토종 대승려인 선도대사(善導大師), 10~11세기경 활동한 일본 정토종 승려 겐신(源信僧都)의 초상이 있다.

쇼세이엔 정원(渉成園)

히가시 혼간지의 별채 정원이다. 지금도 큰 정원이지만, 과거에는 카모가와 강에 닿을 정도로 넓은 정원이었다고 한다. 1641년 토쿠가와 이에미츠로쓰가 기부한 땅에 1653년 조성한 것으로 히가시혼간지의 동쪽 약 150m에 위치해 거의 200m 사방의 정방형을 이룬다. 쇼세이엔이라는 명칭은 중국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가사를 땄다. 또 주위에 탱자(탱자 나무)가 심어져 있어 ‘탱자의 저택(키코쿠테이)’라고 통칭된다. 쇼와 11년(1936년) 국가 명승지로 지정됐다. 

쇼세이엔은 근세, 근대를 통해 주지의 은퇴소나 외빈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는 등 히가시혼간지에서 중요한 기능을 했다. 또한 18세기경에는 서쪽인근에 접하여 히가시혼간지의 기숙사가 있었다고 한다. 여러 차례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은 1865년부터 메이지 초기까지 재건된 것이다. 히가시혼간지에서 열리는 행사의 장소로도 활용된다.

주소 京都府京都市下京区下珠数屋町通間之町東入東玉水町  
운영시간 09:00-17:00 
입장료 무료(기부금 500¥을 내면 팜플렛을 줌 / 사람들 대부분 기부금을 냄...)
팁 다 둘러보는 데 약 30분 정도 걸린다.

입장료를 내고 관람 방향으로 가면 정면에 바로 타카이시가키(高石垣)라 불리는 돌담을 만날 수 있다. 각양각색의 돌다리, 주춧돌, 맷돌 등의 돌 조각을 사용한 독특한 담이다. 입구를 들어가면 작은 연못이 있고, 거기에 린치테이(臨池亭)가 물위에 떠 있는 듯이 고요하게 서 있다. 린치테이는 연못(치)을 마주보고(린) 있다는 의미로 1884년 재건된 건물이다. 그 옆에는 테키스이켄(滴翠軒)이 있는데, 연못 오른쪽에 있는 소나무 뒤의 작은 폭포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본따 지었다고 한다. 두 건물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타이리츠세키(代笠席)는 메이지 시대인 1888년 대건된 다실로, 기와로 지붕을 얹었으며 내부에는 다다미 두 실이 동서로 늘어서 있다. 카메노코우노이도(亀の甲の井戸)라는 우물도 만날 수 있는데, ‘거북 등 우물’이라는 이름처럼 거북 모양을 하고 있다.

보우카카쿠(傍花閣)는 메이지 시대인 1892년 재건된 건물로 온린도우의 동쪽, 원내의 가장 중요한 위치인 동쪽에 건설되었다. 독특한 구조의 외관은 선종(禅宗)의 삼문(三門)으로 불리우는 누각문에서 발상된 것이라고 한다. 총 2층으로 좌우측면에 산로우(山廊)을 두고 손잡이가 있는 계단과 지붕을 윗층으로 향하도록 만들어 놓았으며, 방 크기는 다다미 4장 반 정도라고 한다. 윗층은 다다미이고 팔작집 지붕의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쇼와 시대인 1957년에 재건된 온린도우(園林堂)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판화가인 무나카타시코우(棟方志功)가 맹장지에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로안(蘆菴)은 쇼와 시대의 1957년 재건된 이층 건물의 다실로, 1층은 다다미 7장, 2층은 4장 반 넓이라고 한다. 

로안 앞에는 로안노 카스가토우로우(蘆菴の春日燈籠)라는 에도시대 초기 석등이 있는데, 석등의 지붕 선이 눈이 흘러내리는 모양과 같이 곡선으로 만들어져 유명하다.

이 정원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에도시대 말기의 1865년에 재건된 로우후우테이(閬風亭)로 영빈관의 역할을 한다. 에도시대 말 1865년에 재건된 다실인 소우친쿄(漱沈居)는 자연 속에서 그대로 산다는 사자성어 ‘침석수유(枕石漱流)’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배를 타는 느낌을 따서 설계되었다고 한다.

정원 전체 면적의 1/6을 차지하는 연못인 인겟치(印月池), 그리고 거기에 걸려 있는 다리 신세츠쿄우(侵雪橋), 소나무 다섯 그루가 제방을 따라 심어져 이름했다는 고쇼우(五松塢)도 볼 거리다. 인겟치에 돌무더기가 박혀 있는 섬이 있는데, 이곳에는 원래 가류우도우(臥龍堂)라는 불당이 있었다가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이 섬 자체를 가류우도우(臥龍堂)라고 부른다. 인겟치 속에 세워진 불탑 미나모토노 토오루유카리노토우(源融ゆかりの塔)는 겐지 모노가타리의 모델이 된 미나모토노토오루의 공양탑이라고 한다.

연못 북쪽의 다실 슈쿠엔테이(縮遠亭) 옆에는 시오가마노 쵸우즈바치(塩釜の手水鉢)라 불리우는 쵸우즈바치(手水鉢)가 있었는데, 쵸우즈바치의 시초라고 한다. 쵸우즈바치란 손 씻을 물을 떠 놓은 것을 말한다.

헤키교쿠노 세키도우(碧玉の石幢)라 불리는 석등은 다른 정원 석등과 달리 지붕석 모서리에 무늬가 없고 하단 기둥과 연결석이 없는데, 푸른색이 전혀 없는데도 ‘벽옥’이라는 이름이 붙어 수수께끼라고 한다. 시오가마(塩釜)는 소금을 만드는 시설과 비슷하여 ‘시오가마’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슈쿠엔테이 다실의 찻물을 공급하는 우물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카이토로(回棹廊)는 노송 나무 껍질의 맞배 지붕이다. 중앙이 활꼴이고 양끝이 곡선으로 된 박공 지붕으로 좌우에 낮은 난간이 있는 다리인데, 다리 중앙을 한 단계 높이고, 약간  동서에 뻗은 마루 위에 당파풍 지붕을 놓았다. 메이지 시대의 1884년에 재건된 오오겐칸(大玄関)은 정원 내 건물의 입구로서의 역할을 하며, 가을의 특별 공개 기간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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