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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22. 1. 21. by 솜글

부다페스트(Budapest)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고지대인 부다(Buda) 지역과 평야지대인 페스트(Pest)로 나뉘는데, 부다는 ‘물’을 뜻하고, 페스트는 ‘평야’를 의미한다.

오랫동안 두 지역은 별개의 도시로 발달해왔으나 이슈트반 세체니(Szechenyi) 백작의 노력으로 1872년 도나우 강 위에 다리를 개통한 이후 비로소 두 도시가 합쳐져 오늘날 부다페스트란 지명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부다페스트의 상징물이 된 세치니 다리는 부다 지역의 이슈트반 세체니 백작이 페스트 지역에서 살고 있는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었으나 악천후로 8일 동안 배가 운항하지 못하게 되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불효와 함께 강을 통행하는 많은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비로 건설한 것이다. 부다는 대지 위에 자리하며 왕궁의 언덕·겔레르트 언덕 등이 강기슭 근처까지 뻗어 있고, 역사적인 건축물이 많다. 페스트는 저지에 자리한 상업지역으로, 주변지구에 공장과 집단주택이 들어서 있다.

1493년 발간된 독일의 역사서 <뉘른베르크 연대기(Nuremberg Chronicle)>에 실린 부다 목판화

14세기경부터 부다는 헝가리의 수도가 되고, 페스트도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872년 부다와 페스트가 합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0년에 인근 소도시를 합병하여 대 부다페스트가 성립되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군사역사박물관(Hadtörténeti Múzeum)

왕궁 정문 뒷면으로 바라보이는 건물로 1847년 지어 병영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개조해 1926년부터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헝가리의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꾸며 놓은 박물관이며 특히 헝가리의 고대 및 중세부분의 전시를 눈여겨 볼 만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장품의 2/3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연중 특별전과 학회, 세미나 등이 수시로 열리는 곳이다.

마리아 마그놀라 탑(Mária Magdolna Torony)

13세기에 지어진 탑으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당해 현재는 종탑만 남았다. 오스만 제국이 부다를 점령했을때 모든 교회를 이슬람 모스크로 바꾸는 와중에 최후까지 교회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후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가 이용하기도 했으나 결국 이곳도 이슬람 모스크로 바뀌고 말았다. 171계단을 올라가면 부다페스트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으며 가끔 현대미술 전시회도 열고 있다. 고딕양식의 탑은 1950년부터 1980년대까지 여러 차례 재건된 것이다.

비엔나 문(Bécsi kapu)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가는 길에 세워졌다 하여 ‘비엔나 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석조문이다. 18세기에는 성문이 있었으나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현재 문은 1936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된지 250주년을 기념해 새로 지은 것이다. 문 뒤편 광장은 비엔나 문 광장(Bécsi kapu tér)인데 과거에는 이 광장에 토요 시장이 섰다고 한다.

복음 교회(Budavári Evangélikus Templom és Gyülekezet)

부다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 교회로 1895년 완공됐다. 외관은 신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지고 두 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있는 절충적 건축 형태를 띄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때 신도석과 제단, 파이프오르단 등이 파괴되어 재건을 거쳤으며, 2008년에는 탑의 개수공사가 완료됐다. 1952년 이래 현재까지 부다페스트 개신교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삼위일체 탑(Szentháromság-szobor)

중세 시장의 중심이었다는 삼위일체광장에 세워진 탑이다. 1686년 부다페스트가 공격을 받은 이후 17세기에 건축된 탑이다. 1691년 흑사병이 돌자 시민들은 이 탑에 병이 끝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기적처럼 전염병이 멈췄다. 이를 기념해 1706년 동상을 세웠지만 3년 후인 1709년에 또 다른 전염병이 돌았고, 사람들은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고 여겨 1712년 더 화려한 동상으로 교체했다. 이후 1713년 14.4m 높이의 새로운 바로크 조각상으로 대체되었는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때 크게 손상되어 재건됐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이 흑사병을 끝내는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꼭대기에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비둘기 모습으로 온 성령이 흑사병으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마차시 성당(Mátyás Templom)

정식 이름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인데 마차시 왕의 이름을 딴 이유는 이곳의 남쪽 탑에 마차시 훈야디(Mattias Hunyadi, 1458~1490) 왕가의 문장과 그의 머리카락이 보관되어 있어 마차시 성당이라고 부른다. 마차시 왕은 이곳에서 카테린 포데브라트(Catherine Podebrad)와 1463년에, 그리고 베아트리체(Beatrice of Aragon)와 1470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13세기에 이 자리에 세워진 부다의 첫 번째 교구 본당은 14세기에 고딕식으로 재건축되었는데,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오스만트루크가 침공했다. 그들은 부다성을 손에 넣은 뒤 마차시 성당을 이슬람 모스크로 리모델링했다.

이 와중에 내부 제대 등은 모두 파괴되었고 벽면도 이슬람 고유의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되었으며, 1686년에는 남쪽 탑과 지붕이 모두 붕괴되기도 했다. 식민 지배가 끝난 뒤 바로크 스타일로 재건축되었던 이 성당은 19세기 말의 명 건축가인 프리제시 슐렉(Frigyes Schulek, 1841~1919)이 중세 폐허에서 발굴된 유품을 다시 사용해 본래의 고딕식 건물로 재건축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성당은 다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전후 복구에만 20년이 걸렸다.

아라베스크 무늬의 내부

마차시 성당의 가장 웅장한 장면은 역시 80m 높이의 고딕식 탑이며, 남쪽 출입구에는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예언하는 내용의 14세기 부조화가 걸려있다. 이곳에 있는 교회예술 박물관에는 종교 예술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많다.

오스만투르크의 침략과 이어진 합스부르크 왕국의 지배는 헝가리 민족주의에 불을 지폈고 마차시 성당은 바로 그 그릇이었다. 헝가리를 대표하는 음악가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가 <대관식 미사>곡을 초연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일요일 대미사를 마친 뒤 모든 사람들이 페렌츠 에르켈 작곡의 <애국가>를 합창하는 것도 이 성당의 오래된 전통이다.

성당의 중심인 제대는 동쪽에 놓였다. 유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승천했던 곳이 동쪽(이스라엘)이기도 하거니와 동쪽은 늘 길한 방향이라 생각한 듯하다. 그리고 그 반대방향이 서쪽이고 그곳에 주 출입구가 있다. 아마 동서양 모두 동·남쪽은 길한 방향이고 서·북쪽은 흉한 방향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니 성당 구조에 있어서도 북쪽에는 출입구가 아예 없고 남쪽에 보조 출입구를 만들었다. 문제는 서쪽이다. 주 출입구가 제대와 마주하고 있으니 주 출입구가 있어야 하는데 방향이 길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마차시 성당의 주 출입구 양편에는 천사 부조상이 있다. 악귀가 성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이니, 수호천사인 셈이다.

힐튼 호텔

마차시 성당 옆에는 1977년 문을 연 힐튼 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헝가리의 국보가 모여 있는 유적지에 호텔이 들어선 것인다. 그것도 13세기 도미니코 수도원 유적지를 호텔이 바닥에 깔고 앉아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세계의 힐튼 호텔들 중 가장 아름답다고 자랑하는 곳이지만, 관료주의가 돈과 결탁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곳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 아름답던 수도원의 자리는 힐튼 호텔의 자본주의 사이로 속 상처를 내밀며 지금도 신음하고 있다. 322개의 방, 6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에게 돈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파괴해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전에 박물관 건설 공사를 하던 중 유물이 발견되자 서둘러 콘크리트로 덮어 버린 적이 있다, 관료주의란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별로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어부의 요새(Halászbástya)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마차시 성당을 둘러싸고 있는 다뉴브강 쪽의 어부의 요새이다. 마치 디즈니랜드의 요정이 나올 것 같은 7개의 둥근 탑으로 이뤄진 이 성채는 네오‑고딕 양식에 속하는 것으로, 19세기말 마차시 성당 재건축을 담당했던 슐렉의 또 다른 걸작이다.

7개의 탑은 본래 이곳에 정주할 때 같이 온 초기 마쟈르의 7개 부족을 상징한다. 어부의 요새는 따져보면 마차시 성당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건축물에 지나지 않지만 워낙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들어져 마차시 성당보다 더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쓰인 석조물의 상당수는 옛 왕궁 잔해를 재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바로 이 성채 아래에 어부들이 주로 살았고 그들이 이 성채의 방어를 책임졌기 때문이다. 성채 아래는 ‘물의 도시’라는 뜻의 비지바로시(Vizivaros)로 페스트에서 바르 헤지를 쳐다보았을 때 왕궁과 함께 어부의 요새, 그리고 마차시 성당의 첨탑이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하는 곳이다.

성 이슈트반 동상(Szent István szobra)

1001년 최초로 헝가리 통일국가를 이룬 인물이자 도나우 강 서쪽 동유럽에서 최초로 가톨릭을 받아들인 성 이슈트반 1세(Saint Stephen I, 970~1038)를 기리는 동상이다.

마자르족의 지도자 집안에서 태어난 이슈트반 1세는 신성 로마제국의 오토 2세의 후원을 받아 가톨릭을 국교로 삼아 헝가리인들을 개종시킨 임금인데, 영웅광장은 물론 국회의사당 등 곳곳에 그의 동상이 많이 세워져 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매년 8월 20일 부다 지역의 마차시 성당과 페스트 지역의 성 이슈트반 대성당에서 이슈트반 1세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이슈트반 1세는 1083년 로마교황으로부터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부다 왕궁(Budavári Palota)

헝가리 국왕들이 살았던 역사적인 성채이다. 과거에는 왕궁(Királyi-palota) 또는 왕성(Királyi Vár)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부다 성은 중세와 바로크, 19세기 양식의 가옥들과 공공건물들로 유명한 옛 성곽 지역(Várnegyed) 옆에 있는 부다 언덕 남쪽 꼭대기에 지어졌다. 아담 클라크 광장과 푸니쿨라(계단식 열차) 옆 세체니 다리와 이어져 있다. 부다 성은 1987년 공표된 부다페스트 세계문화유산의 일부이기도 하다.

1242년, 헝가리 중흥의 아버지인 벨러 4세는 몽골의 내습으로 에스테르곰으로부터 이곳으로 피신해 왔다. 그는 도나우 강변 언덕의 지리적 이점을 발견하고 이곳에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성과 겸하여 요새를 건설하였다. 14세기에는 라요시 1세의 명에 따라 고딕 양식의 왕궁으로 증개축되었고, 15세기 후반에는 인문주의자로 알려진 왕 마차시 1세를 찾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온 장인과 예술가들이 왕궁으로 모여들어 헝가리 르네상스의 막을 올렸다. 이때 이곳은 르네상스건축의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이 시대에 헝가리는 중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16세기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왕궁은 괴멸되고 말았다.

17세기에 들어서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움으로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었으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어 바로크 양식의 궁전을 신축하였다. 18세기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으로 증개축을 실시하여 203개의 방을 갖춘 거대함을 과시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대화재가 발생하여 왕궁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러자 이 일을 계기로 다시 대개축을 시작하여 1904년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다시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이 발생할 때에 소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80년대에 재건된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전후 복구 작업으로 1950년대에 완성된 것이다.

건물 자체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예로부터 왕의 거처이며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입구를 지키는 네 마리의 사자를 비롯하여 안뜰에는 우아함과 위엄이 감돌고 있다. 현재 왕궁은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 일부는 2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세체니 도서관으로 꾸며 중세의 사본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때때로 기획전도 연다.

헝가리 도로 원점(Zero Kilometre Stone)

터널 입구에 있는 돌로 부다페스트에 닿는 모든 도로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한 기준점이다. 가령 헝가리 세게드(Szeged)와 부다페스트 간 거리가 얼마인가를 얘기할 때는 이 지점부터 세게드까지의 거리를 재는 방식이다. 원래 도로 기준 원점은 부다 왕궁 문지방에 있었다가 184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현재의 조각품은 미쿨로스 보소스(Miklos Borsos)가 1975년 제작한 것이다. 이전에 있던 것은 1932년 만들어졌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됐다.

부다 성 터널(Budai Váralagút)

부다 왕궁과 세체니 다리를 잇는 터널로 총 길이는 350m이다. 16번 버스와 105번 버스가 이 터널을 횡단한다. 이슈트반 세체니의 건의에 1853년 건설이 시작되어 1857년 개통돼 1918년까지는 통행료를 받았다. 서쪽 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어 1949년 재건된 것이다. 2013년에는 입구 상부가 개조되고 사고 방지를 위한 장벽을 추가로 지어 넣었다.

세체니 다리(Széchenyi Lánchíd)

부다와 페스트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건설은 19세기 가장 위대한 헝가리인 중 하나였던 이슈트반 세체니(Istvan Szechenyi, 1791~1860)의 주도로 시작됐다. 세체니 집안은 헝가리의 귀족 계급 중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명문가 중 명문가로, 부와 명성, 탁월한 문화감각까지 함께 가졌던 집안이다.

이슈트반 세체니의 아버지 페렌츠(Ferenc)는 자신의 소장 유물과 서적을 국가에 기부해 헝가리 국립박물관과 세체니국립도서관의 실질적인 설립자가 되었다. 어머니 율리아 페슈테티치(Júlia Festetics)가 일생동안 수집해 기부했던 기암괴석 역시 헝가리자연사박물관의 모태가 된다. 그리고 아들인 이스트반 세체니는 헝가리 학문의 전당인 헝가리학술원(MTA)의 설립자이자 진보적 경제관을 가졌던 민족주의의 상징적 인물이다.

건설 계기

이슈트반 세체니가 부다와 페스트 다리 건설에 나선 계기는 정작 따로 있다. 1820년 자신의 영지를 방문했다가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장례식 참석차 급히 돌아온 세체니는 다뉴브를 건너지 못했다.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하는 배편이 기상 악화로 무려 8일 간이나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격분한 세체니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리를 놓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이슈트반 세체니

그는 명문가의 자손답게 자신의 1년 수입을 먼저 내놓고 다리 건설을 추진했다. 이는 곧 국민운동으로 번졌고 다리 건설을 위해 국채가 발행되는 계기도 되었다. 그는 당시 영국에서 다리 설계로 유럽에서 명성이 드높았던 윌리엄 클라크(William Tierney Clark, 1783~1852)에게 설계를 위촉했다. 현수교의 개척자였던 클라크는 런던 템즈강의 첫 번째 현수교인 해머스미스 교(Hammersmith)(1827), 멀로 교(Marlow)(1932) 등을 설계한 인물이다. 그래서 세체니 히드는 런던 해머스미스의 다리와 가장 비슷한 것으로 손꼽힌다.

세체니는 또 스코틀랜드 출신 애덤 클라크(Adam Clark, 1811~1866)를 헝가리로 초빙했다(설계자와 현장 감독 모두 성이 ‘클라크’지만 두 사람은 사실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애덤 클라크는 공사기간 내내 다리 완공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부다 왕궁이 있는 바르 헤지(Var-hegy) 아래를 뚫는 터널까지 설계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본 부다 성 터널이다. 헝가리인들은 부다 쪽 다리 입구의 광장을 애덤 클라크 광장이라 명명하여 지금까지 고마움을 나타내고 있다.

공사의 어려움

1842년 다리 공사가 시작되긴 했지만 어려운 고비도 많았다. 완공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1848년부터 2년간의 대 오스트리아 독립전쟁 땐 파괴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전쟁이 완전 실패로 끝난 이듬해 11월 21일 준공식이 열렸다. 부다와 페스트가 처음으로 한 도시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준공식장에선 해프닝도 적지 않았나 보다. 이 다리 초입에는 사자 동상이 한 쌍씩 모두 네 마리가 안치되어 있는데 한 아이가 갑자기 "아니, 사자 입에 혀가 없잖아!”라며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아이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조각가는 그만 그 자리에서 다뉴브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하도 이상한 소문이 꼬리를 물어서인지 후대 역사가들이 주의 깊게 조사까지 했는데, 문제의 조각가는 다뉴브에 몸을 던진 적도 없으며 행복하게 여생을 마감했다는 조사결과까지 나와 있다. 다만 그런 문제가 제기되기는 했던 모양이다. 동물학자들까지 사자상을 면밀하게 조사했고 본래 사자 혀가 뒤쪽으로 치우쳐 있어 쉽게 볼 수 없다는, 조각가에게 꽤나 우호적인 유권해석까지 붙었다. 이래저래 다리에 얽힌 설왕설래가 많긴 했던 모양이다.

세체니 다리가 독립전쟁에선 살아남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공격엔 견디지 못해 일부 교량이 붕괴되고 말았다. 워낙 중요한 다리라 전후에 곧바로 재건되었으며 부다페스트의 경관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조형물로 남아있다.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Cipők a Duna-parton)

부다페스트에서 다뉴브 강 산책로를 걷다가 세체니 다리에서 국회의사당까지 이어지는 강변가에 난데없는 신발 청동상들이 줄지어 있다. 여기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있는데, 과거 나치 시대에 바로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신발을 벗기고 뒤에서 총을 쏴서 강물로 빠뜨렸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강물이 빨갛게 물들기도 했다고 하는데, 당시 이곳에서 학살당한 유대인들이 6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학살이 길어지자 이를 피하기 위해 아예 총에 맞기 전에 다뉴브강으로 뛰어든 유대인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한겨울의 추운 강물에서 모두 얼어죽었다고 한다. 이 신발 조형물들은 당히 희생된 유대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05년 조성됐다.

국회의사당(Országház)

영국 국회의사당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규모가 크다.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국회의사당의 외벽에는 헝가리 역대 통치자 88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지붕에는 1년 365일을 상징하는 365개의 첨탑이 있다. 국회의사당의 내부에는 총 691개의 집무실이 있으며, 카펫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무려 3456m에 이른다고 한다. 김춘수 시인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의 배경이 바로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코슈트광장이다. 1956년 혁명 당시 부다페스트 대학생과 시민들이 소련군의 철수와 헝가리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소련군의 총탄에 쓰러져간 곳으로, 헝가리 민주의회정치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투어로 운영되는 내부도 장관이지만 부다페스트의 멋진 야경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건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나이 임레 동상(Statue of Imre Nagy)

헝가리 총리를 두 번이나 지낸 나이 임레(Nagy Imre)를 기념하기 위한 동상이다. 두 번째 총리 임기는 1956년 혁명 시기였는데, 이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가 집권하면서 1958년 처형되고 아무데나 묻혔다고 한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그의 이름은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되었고, 국민들은 그를 자유의 상징으로 인식해 오다가 1989년 재평가되어 국민 영웅이 되었다. 1989년 열린 장계식에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에는 무려 20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고 한다. 국회의사당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동상을 놓치지 말고 만나 보자.

성 이슈트반 대성당(Szent István Bazilika)

1001년 최초로 헝가리 통일국가를 이룬 인물이자 도나우 강 서쪽 동유럽에서 최초로 가톨릭을 받아들인 성 이슈트반 1세(Saint Stephen I, 970~1038)를 기리며 헝가리 건국 1000년을 맞은 1848년 착공되었다.

마자르족의 지도자 집안에서 태어난 이슈트반 1세는 신성 로마제국의 오토 2세의 후원을 받아 가톨릭을 국교로 삼아 헝가리인들을 개종시킨 임금인데, 영웅광장은 물론 국회의사당 등 곳곳에 그의 동상이 많이 세워져 있다. 부다페스트에서는 매년 8월 20일 부다 지역의 마차시 성당과 페스트 지역의 성 이슈트반 대성당에서 이슈트반 1세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이슈트반 1세는 1083년 로마교황으로부터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성당 첨탑 부분

건축 과정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1848년 헝가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요제프 힐드(Josef Hild)에 의해서 처음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착공했으나, 헝가리 독립전쟁의 발발로 1851년에야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1867년 힐드가 죽자 미클로스 이불(Miklos Ybl)이 공사를 이어받으면서 신 르네상스식이 가미되었지만, 이듬해인 1868년 폭풍으로 성당의 돔이 날아가고 성당이 무너지자 1891년 이블은 자살했다.

마침내 세 번째로 요제프 카우저(Josef Kauser)가 공사를 맡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06년 완공함으로서 무려 50년에 걸쳐 완공된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헝가리 최대의 성당으로서 약8,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로마에서는 바티칸 대성당이 로마 시내 모든 건축물의 높이를 제한하는 상한선이 되었듯이 부다페스트의 모든 건축물들은 성 이슈트반 성당보다 높이 지을 수 없다고 하는데, 부다페스트에서 성 이슈트반 대성당과 국회의사당 건물은 높이가 똑같다.

성당 입구

아치형 돔 구조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정면에서는 반원형 아치에 돔이 특징인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이고,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에는 이중십자가(☨) 형상이다. 이중십자가는 가톨릭에서 종교의 지도자이자 정치의 지도자임을 상징한다. 또, 성당은 바닥에서 돔 위에 세운 십자가까지 96m인데, 이것은 헝가리를 건국한 896년의 ‘96’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치형 돔

성당 내부

성당 내부는 온통 누런 황금색으로 도색한 것이 특징인데, 한 가운데에는 성 이슈트반 1세가 오른손에 이중십자가(☨)인 주교봉(主敎棒)을 들고 있다. 주교봉은 이슈트반 1세가 헝가리 왕국을 기독교국가로 삼았으며, 로마교황으로부터 대주교 결정권을 부여받았음을 상징한다.

성당 안의 기둥들이 약간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것은 기둥이 지탱하는 아치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 하며, 천장 위의 중앙 돔에 그려진 화려한 그림들이 매우 강렬한 느낌을 준다. 또, 성당에 들어서서 바라보면 전면 2층이 툭 트여서 올려다 볼 수 있는데, 2층 오른쪽에는 헝가리가 자랑하는 대형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대형 파이프 오르간

성당의 지하에는 유럽의 유명한 대성당들이 그러하듯 역대 임금과 유명한 인물들을 안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도 미라 상태로 된 사람들을 볼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특히 주제단 뒤편에는 성 이슈트반의 오른손 미라가 봉헌되어 있는데, 100ft 동전을 투입하면 약 1분 동안 불이 켜져 이슈트반 1세의 오른손목의 미라를 볼 수 있다. 성 이슈트반 1세의 미라가 발견되었을 당시에 오른손목만이 부식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그 손목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밖에 성당에는 성당 건립당시 유명한 헝가리 화가인 모르탄, 베르타란 세케이, 줄러 벤추리 등의 작품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이슈트반 1세의 오른쪽 손목 미라

부다페스트 중앙시장(그레이트 마켓 홀)(Nagy Vásárcsarnok)

부다페스트 시내, 도나우 강 가까이에 유럽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19세기 시장 건물이 있다.

1867년 헝가리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한 타협 법안이 통과된 이후 부다페스트는 급격히 발전했는데, 식량 분배를 위한 기존의 인프라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도매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무 페츠(1854~1922)가 이끄는 일단의 건축가들이 설계한 부다페스트 재래시장 건물은 커다란 메인 창문 하나와 네 개의 좀 더 작은 창문 주위로 벽돌 벽에 문양을 넣은 균형 잡힌 파사드를 보여주고 있다. 파사드의 양끝에는 작은 탑이 서있다. 1991~1994년의 보수 공사 이후 부다페스트 중앙시장은 소매 시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다른 곳의 이와 비슷한 시장들은 모두 헐리거나 아니면 따분한 쇼핑몰로 재개발되었지만 운이 좋게도 부다페스트는 이 시장을 계속 운영키로 결정했고 음식의 천국을 수리했다.

돌로 만든 정문은 네오-고딕 양식이지만, 더욱 인상적인 것은 건물 내부다. 3층까지 올라가서 꽃, 신선한 야채, 치즈, 육류, 생선 등을 파는 180개가 넘는 가게들이 빚어내는 떠들썩한 색색깔의 광경을 내려다보는 좋이 좋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력과 건강을 회복시켜 준다는 빨강 헝가리 피망과 고추를 파는 가게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볼 수 있는 잉어 수조이다. 배럴 볼트를 올린 지붕은 6층 높이로, 철 격자 구조로 지어졌다.

Inno Rheuma Krem(악마의 발톱 크림, 이노우 레마 크렘)

기념품점마다 갖추고 있는 헝가리의 유명한 관절염, 근육통 연고이다. 의술이 발달한 헝가리에서 아프리카의 ‘악마의 발톱’이라는 약초 성분을 이용해 만든 천연 허브 연고로 효과가 좋다. 이왕이면 약국에서 구매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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