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프랑스 여행을 앞두고 고민하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들입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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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강에 있는 다리들의 한국어 설명 자료
프랑스 파리, 세느 강 크루즈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다리들의 한국어 가이드를 공유한다.
페이지 맨 아래에서 15쪽 분량의 PDF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PDF에는 다리 사진, 관련 영화 장면 등 각종 사진 자료들이 함께 실려 있다.
나는 바토 파리지앵을 탈 계획이었던지라 바토 파리지앵 코스로 되어 있는데 바토무슈 등 다른 크루즈도 어차피 거의 비슷한 코스를 돌기 때문에 보는 데는 별 상관 없다.
포함된 다리들은 다음과 같다.
그르넬 다리(Pont de Grenelle)
본래 1873년에 목재 다리로 지었던 것을 1966년 강철 다리로 다시 지은 것이다. 그르넬 다리 인근인 시뉴섬 끝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우뚝 서 있는데, 그르넬 다리 위에서는 아쉽게도 그녀의 뒷모습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앞모습을 보려면 미라보 다리로 위로 가야 한다.
미라보 다리(Pont Mirabeau)
강 서쪽의 미라보 다리는 시 한 편으로 유명해졌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라는 시구(詩句)로 단번에 센강의 대표적인 다리로 급부상했다. 1895년에 시작하여 1897년에 장 르살(Jean Résal)의 설계로 완공된 이 다리는 실제로는 다른 다리들과는 달리 철제로 건축됐다. 또 파리의 고풍스런 구시가를 연결하기보다 현대풍의 건물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975년 프랑스 역사기념물로 지정됐다.
비라켕 다리(Pont de Bir-Hakeim)
에펠탑 인근의 비라켕 다리(비르 아켐 교, Pont de Bir-Hakeim)는 2층으로는 메트로가 지나며 1층으로는 사람들과 자동차가 오가는 복합적인 구조다.
본래 부유한 구도심 지역의 이름을 따 파씨(Passy)의 다리라고 부르다가 1942년의 비라켕 전투를 기리기 위해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 이 다리는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주인공들이 처음 만난 첫 장면을 찍은 곳이다. 영화 속 연인들의 비운의 사랑과 이별이 다리에 담겨 있다. <인셉션>의 배경이 된 곳으로 더 유명해 졌다. 다리 아래로는 인공섬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이에나 다리(Pont d'Iéna)
센강의 다리에서는 에펠탑이 변하는 모습을 감상하는 것 또한 색다른 묘미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은 때로는 거대하게 때로는 아득하게 강변을 지키고 서 있다.
에펠탑 앞을 가로지르는 웅장한 다리는 이에나 다리(Pont d'Iéna)다. 1806년 프러시안과의 전쟁에 승리하자 나폴레옹이 다리의 건설을 명령했으나 그의 실각과 함께 건축과 파괴의 지난한 세월을 거쳐야 했던 다리다. 이에나 다리는 에펠탑과 샤요 궁전(Palais de Chaillot)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으며,사람들은 에펠탑을 감상하며 이에나 다리를 걸어서 건넌다. 다리 밑 교각에는 독수리 부조가 새겨져 있다.
드빌리 인도교(Passerelle Debilly)
센 강을 가로지르는 이 인도교는 199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파리를 찾은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다리이다. 알렉상드르 3세 다리를 디자인한 건축가가 제작했다. 강둑에 두 개의 석재 기둥을 두고 그 사이에 금속으로 몸체를 제작해 넣은 구조로 되어 있다. 1991년에 다시 칠해졌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며칠 후인 독일 외교관이 이 인도교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면서 이 인도교가 냉전 중 동독 군부의 은밀한 모임 장소로 쓰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2002년 개봉한 영화 <팜므 파탈>을 촬영할 때 드빌리 인도교를 촬영지로 선택했다고 한다.
알마 다리(알마 교)(Pont de l'Alma)
센 강 유람선 ‘바또 무슈(Bateaux Mouches)’의 선착장에 들어서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다리로, 현재의 알마 다리는 1972년에 세워진 것이다. 본래 1854년 9월 20일 나폴레옹 3세가 러시아와의 크리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56년 지금의 자리에 알마 다리를 건설했는데, 당시 다리 기둥들에는 각각 엽총병, 척탄병, 알제리 보병 그리고 포병을 상징하는 네 개의 조각들을 장식하여 프랑스군의 활약상을 기념했다고 한다. 1970년 5월 11일 다리 확장공사를 할 때, 길이 110m, 폭 42m로 새 다리를 건설하면서 기존의 네 조각 중 주아브(Zouave)라는 알제리 보병 조각만 남았다.
교각을 장식한 이 조각상에서 볼 수 있는 복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국적이고 신선한 것으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센 강의 수위를 측정하는 척도로 사용된다. 가령 장마철이 되면 뉴스에서 ‘주아브 동상의 허리까지 물이 찼다’, ‘어깨까지 찼다’ 하는 식으로 수위를 알리는 식이다. 과거에는 주아브(Zouave) 동상의 발목까지 수위가 오르면 강변도로가 폐쇄됐고 허벅지에 이르면 강 위로 배가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한때 어깨까지 물이 차 센강 일대에 홍수가 나기도 했었다.
1997년 8월, 유람선 선착장 옆의 알마 광장(Place de l'Alma) 지하 터널에서 1997년 8월 영국 황태자비 다이애나가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알마 다리와 연결된 알마 마흐소(Place d'Alma marceau)광장의 ‘자유의 불꽃’에는 다이애나 비를 추모하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놓고 간 조화와 편지, 사진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데, 일본인들과 영국인들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때문에 이 불꽃 상이 다이애나를 추모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오인되기도 하는데, 사실은 그가 사망하기 10년 전인 1987년에 기증된 것이다.
앵발리드 다리(앵발리드 교)(Pont des Invalides)
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 가장 낮은 다리이다.
앵발리드 다리의 건설은 1821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건축가 클라우드 나비에(Claude Navier)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건축 계획을 고안해내면서 건축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건축 계획이란 기존의 다리와는 달리 여타 접점 없이 직접 양 끝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1824년에 건축이 시작되면서 앵발리드 호텔과 알렉상드르 3세 다리와 두루 연결되도록 건축이 시작된다. 그러나 건축이 거의 완성될 무렵 균열이 발견되면서 정식 개통되기도 전에 사실상 건설 계획이 중단되고 만다.
앵발리드 인근의 거주자들이 거센 항의를 하게 되자 시는 강 위쪽으로 다시 다리의 위치를 변경하기로 한다. 이후 1829년 두 명의 건축가가 20m의 높이로 다리 건설을 맡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교량의 건설에 차질이 빚어져 1850년에는 인근 공사장으로의 출입조차 금지되었다.
1854년에는 이 교량은 파리에서 1년 뒤 열릴 세계 박람회를 위해 철거되었다. 이후에 폴 마르텡 가로쉐와 쥘 사라벵이라는 건축가가 이전의 부두와 새로 지어진 중앙의 교량을 이용하여 아치 형의 다리를 다시 짓게 된다. 두 사람이 건축에 이용한 인근의 부두는 신식으로 지어진 것이어서 아름다운 조각상이 곁들여진 형태였다. 하지만 건축 상황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다리 골격이 침하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면서 1880년 겨울에는 두 개의 부 건축물이 소실되었다 다음해에야 복원되기도 한다. 다행히 건축이 이때가 돼서야 완성되면서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20세기 전체 동안 변형된 것은 1956년 다리로 연결되는 지하실을 확장한 것 뿐이다.
알렉상드르 3세 다리(알렉상드르 3세 교)(Pont Alexandre Ⅲ)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는 다시 젊음을 되찾은 파리의 19세기 정신을 완벽하게 반영한다. 이 다리는 오텔 데 쟁발리드를 그랑 팔레, 프티 팔레와 연결해 주는데,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는 1900년 만국 박람회를 위해 지어졌으며 예술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큼 프랑스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의 최고 기량을 보여 주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 다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센 강변에 포함된다.
알렉상드르 3세 다리는 이 두 갤러리로 향하는 만큼 그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통로가 되기 위해 설계되었으며, 다리가 지닌 매력의 큰 부분은 매우 낮게 위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온다. 디자이너들은 이 다리가 센 강 한쪽 편의 샹젤리제나 다른 편의 앵발리드를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는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따라서 단일 구간으로 된 107m의 다리의 높이는 고작 6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코너에 있는 17m 높이의 네 개의 화강암 기둥 덕분에 먼 곳에서도 눈에 들어오는데, 이 기둥들 꼭대기에는 각각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와, 과학, 예술, 산업, 상업을 우의적으로 나타낸 금박을 입힌 조각상이 얹혀 있다. 다리의 양쪽 면을 장식하고 있는 램프, 아기 천사, 님프들도 역시 발전과 성취를 표상하는데, 이들은 함께 중세, 르네상스, 루이 14세, 그리고 현대의 프랑스를 상징한다.
이 다리는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으며,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친교를 표현한다는 의미였다. 1896년 알렉산드르의 아들 니콜라이 2세–마지막 차르–가 주춧돌을 놓았으며, 다리는 만국 박람회 시기에 맞추어 개통되었다. 오늘날 이 다리는 낙관주의적이고 심미적인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으로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의 아름답고 우아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도시 발전이 실용적인 만큼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었던 시대를.
콩코드 다리(콩코드 교)(Pont de la Concord)
튈르리 궁전으로 향하는 곳과 오르세 구역과 인접한 다리로 ‘루이 16세 다리’, ‘혁명의 다리’라고도 불리다가 1830년경부터 ‘콩코르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부르봉 왕가 시대에 루이 15세는 콩코드 광장과 강 남쪽을 오가는 페리 대신 다리를 놓기 위한 계획을 세워 1787년에 착공에 들어간 다리로, 프랑스 혁명 때인 1789년경부터 바스티유 감옥을 철거하고 떼어 온 돌을 이용해 건설을 계속해 1791년에 완성됐다. 1810년에는 나폴레옹이 전쟁 중 사망한 8명의 프랑스 장군의 동상을 다리 양쪽에 배치하게 했는데 이후 대리석 조각으로 대체됐다. 1983년에 마지막으로 보수 공사를 마쳤다.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 인도교(Passerelle Léopold Sédar Senghor)
솔페리노 인도교(passerelle Solférino) 또는 솔페리노 다리(pont de Solférino)로도 불린다. 북측으로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과 연결되며, 남측 7번구 쪽으로는 솔페리노 부두(Port de Solférino)와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이 인접해 있다.
원래 이 곳에는 1861년 나폴레옹 3세가 개통한 주철제 다리가 약 1세기 동안 위치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강변로와 튈르리 강변로를 잇는 차량용 다리였다고 한다. 1859년 솔페리노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솔페리노 다리로 명명되었다. 세월이 지나고 특히 바지선의 충돌 이후 교량의 구조가 약화되면서 1961년 기존 주철제 교량은 철거되고 강철제 인도교가 새로 만들어졌지만 1992년 다시 철거되었다.
오르세 미술관과 튈르리 정원을 연결하는 현재의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 인도교는 프랑스 건축가 마르크 밈람(Marc Mimram)의 설계로 1997년 공사가 시작되어 1999년 완공되었다. 그 후 2006년 교량 건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 인도교로 새로 명명되었다.
이 다리는 중간 교각 없이 길이 106m, 폭 15m의 한판 구조로 센 강을 가로질러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건축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사례이다.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북측 둔치 지하 통로를 거쳐 튈르리 정원으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인도교 상판에는 벤치와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혁신적인 교량에 의해 마르크 밈람은 1999년 은삼각자상(프랑스 올해의 건축상)을 받기도 했다.
후아얄 다리(후아얄 교, 루아얄 다리)(Pont Royal)
퐁네프, 마리 다리 다음으로 파리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다리이다. 1632년 기업가 피에르 피도가 건설을 지시해 15개의 아치 다리로 태어난 것이 시초로, 1649년에 처음으로 보수됐다. 1654년에는 불이 나기도 하고 1656년에는 홍수로 무너졌다가 1660년에 완전히 재건됐으며, 1684년 홍수 때 아치 여덟 개가 손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1685년 재건 공사 때는 루이14세가 재정을 후원해 1689년에 완전히 재건됐는데, 이때 루이14세가 ‘후아얄 다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8세기 들어 이 다리는 다양한 축제와 만남의 장소로 쓰이곤 했다. 1850년에 마지막 재건 공사를 거쳐 1939년 역사기념물로 지정됐다.
카루젤 다리(카루젤 교, 루브르 다리)(Pont du Carrousel)
한쪽 끝이 루브르궁전과 이어져 있어 ‘루브르 다리(Pont du Louvre)’라고도 불리는 다리이다. 카루젤 다리는 총길이 168m, 폭 35m에 3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는데, 루브르 박물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아치 구조물은 강화 콘트리트 위에 석재를 덧댄 형태이다. 다리 양 끝에는 폭 7.5m의 강둑으로 내려가는 보행자 통로가 있다. 이 통로를 따라 내려가면, 강둑 산책길이 나온다.
카루젤 다리는 처음 공사가 시작된 1831년에는 전혀 다른 이름의 다리였다. 처음에는 센 강에서 이 다리가 시작된 지점의 지명을 본따 생-페르 다리라고 불리다가, 1834년 루이 필립 왕 때 다리가 개통되었을 때 지금의 이름인 퐁 두 카루젤로 바뀌었다.
1834년 개통되었을 때 카루셀 다리는 간격이 균일한 3개의 주철 아치 위에 복합 가공목재 상판을 얹은 경구조물 형태의 다리로, 당시에는 혁신적인 공학기술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구조 자체가 너무 약하다는 결점이 있어서 결국 1883년 일부 구조물들의 개보수를 위해 6개월 동안 폐쇄되기에 이른다. 일부에서는 이 기회에 상판 재질을 목재에서 강판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는데, 1906년 개보수 때는 다리 상판이 실제로 강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러한 몇 차례의 개보수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취약한 구조 때문에 늘어나는 통행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리가 심하게 흔들리는 일이 많아 그 안전이 줄곳 문제시 되었다.
결국 1930년, 증가하는 통행량에 비해 다리 폭이 너무 좁다는 이유로 다리를 허물고 완전히 다시 짓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1935년에 시작된 다리 건설 공사는 1939년 7월에 끝나, 지금의 다리 모양을 갖추게 된다. 다리의 기본 형태는 옛날 다리 모습 그대로 3개의 아치를 기본으로 했으나, 아치간 간격은 서로 다르다. 다리의 전체 길이 또한 33m 정도 더 늘어났다.
다리 양끝의 좌우에는 총 4개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데, 각각 센 강, 파리, 풍요 그리고 산업을 상징한다. 이 4개의 조각상은 나름 우여곡절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847년 공사가 끝난 후 2-3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조각가 페티토가 다리 양쪽 4개의 코너 지점에 이 조각상들을 처음 세워 놓았는데, 1906년 개보수 때 다리 입구를 수정하는 바람에 이 조각상들이 오갈 데가 없어지고 만다. 그 결과, 다리에서 철거되어 한동안 방치되다가 1908년 다시 자리를 잡았고, 지금의 카루셀 다리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게 된다.
위 4개의 조각상과 함께, 다리 양쪽 끝 네 귀퉁이에는 또한 다음 오벨리스크 구조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1939년 카루셀 다리 재건 공사가 끝나갈 무렵, 다리의 조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수많은 협의를 거친 끝에, 조명을 주간 13미터에서 야간에는 20미터 높이로 조절할 수 있는 4개의 텔레스코픽 오벨리스크를 세우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반대의 목소리에 밀려, 이 4개의 오벨리스크는 1941년 다리 하단부에 감추어져 있다가 1946년에 이르러서야 햇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현재 이 조명 시스템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한편 2006년 영화화된 <다빈치 코드>에서 랭던 교수 역의 톰 행크스는 프랑스 파리 경시청 파슈 국장의 초대를 받고 의문의 살인 사건이 벌어진 루브르 박물관에 불려온다. 그러나 오드리 토투의 도움으로, 사실은 파슈 국장이 자신을 살의 용의자로 보고 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머니 속에 동전 크기의 GPS 추적장치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살인 용의범으로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으려면 우선 경찰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루브르 박물관을 빠져 나가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상황이 된 것이다. 이때 경찰은 GPS 추적장치를 통해 랭던 교수가 루브르 박물관과 연결된 카루젤 다리에 있음을 확인하고 황급히 카루젤 다리를 건너 GPS 신호를 뒤쫒기 시작하고, 영화 <다빈치 코드>의 쫒고 쫒기는 싸움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예술가의 다리 - 퐁데자르(Pont des Arts)
강변 다리들 중 여행자들의 애착이 담긴 곳은 퐁데자르 다리(Pont des arts)다. ‘예술의 다리’라는 별칭답게 퐁데자르는 센강의 교각 중 보행자 전용 다리이다. 다리 위에는 거리의 화가와 음악가들이 몰려들고 해 질 녘이면 병에 담긴 와인을 기울이는 청춘들을 만나게 된다.
1801~1804년에 건설된 퐁데자르 다리는 오랫동안 파리의 예술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카뮈, 사르트르, 랭보 등이 즐겨 찾던 곳으로 그들은 다리 위에서 센강을 바라보며 숱한 작품을 구상했다. 난간에 시집 한 권 들고 고독을 씹으러 오는 청춘들이 유독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퐁네프의 아름다운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생 미쉘 다리(Saint-Michel Pont)
근처에 있는 예배당인 생 미쉘 교회의 이름을 딴 다리이다. 중세시기인 1378년에 노트르담 대성당, 파리의 도당과 도시 상인들의 협의로 지어진 것이 시초인데, 100년 전쟁 때 나무다리로 재건됐다가 1444년에 다시 모금액으로 돌다리를 짓게 됐다. 지금의 다리는 1857년 7개월에 걸쳐 62m 길이로 지어졌다. 1961년 파리 학살 때 시위자들이 많이 희생된 곳으로 유명하다.
두블 다리(두블 교)(Pont au Double)
1515 년 프란치스코 1 세는 시테 섬의 오뗄 디외(Hôtel-Dieu) 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하기 위해 센 강의 작은 지점을 가로 지르는 다리를 놓도록 했다. 건설은 1626 년에 시작되었고 8년 후인 1634년에야 양측이 연결되었다. ‘두블’이라는 이름은 당시 통행료로 더블 데니어(2데니어)를 받은 데서 유래했다. 1709년에 다리가 붕괴된 적이 있는데 재건되어 1847년까지 사용되었으며, 1883년 현재와 같이 하나의 아치를 가진 주철 다리로 대체되었다.
대주교의 다리(Pont de l'Archevêché)
센 강의 다리 중 가장 폭이 좁은 다리로 총 너비가 17m, 실제 사용 가능한 폭은 11m에 불과하다. 1828년에 68m 길이의 석교로 지어졌다. 퐁데자르에 2010년 자물쇠가 전시되자 레오폴드 인도교와 마찬가지로 연인들 사이에서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 두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노트르담 다리(노틀담 교)(Pont Notre-Dame)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유명하다. 지금 있는 자리에 다리는 지금껏 수없이 파괴되고 다시 세워지곤 했지만 고대부터 전해 왔다고 할 정도로 그 역사가 길다. 한편, 가장 오래되면서도 견고하게 보존되온 다리는 퐁뇌프 다리이다.
예부터 노트르담 다리는 큰 다리(Grand-pont)라고 불리면서 센 강을 가로지르는 교통 수단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886년 노르만족이 파리 지역을 침공했을 당시 구조가 파괴되어 다시 지어졌다. 다시 지어진 다리는 밀브레 다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1406년 대홍수 동안 다리는 다시 유실된다.
1412년 5월 3일 샤를 6세가 부지에 다리의 골격을 새로 정비하고 최초로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그가 정비토록 지시한 다리의 구조는 견고한 목재를 통해 쌩마르탱 가와 다른 곳을 연결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다리 건축에만 7년이 소요되었으며 양옆으로는 각각 30여 가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리는 1499년 10월 25일 아침 9시경 지반 침하와 정비 부실로 붕괴된다.
석재로의 다리 건축이 같은 해 시작되었지만 당분간 주민들은 연락선을 타고 센 강을 건너다녔다. 이 시기에는 아치 형으로 된 석재 다리가 지어졌으며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이자 철학자였던 프라 지오반니가 건축을 맡았다. 그의 건축은 1507년에 완공되었으며 여전히 당시의 60여 개 벽돌과 석재는 보존되고 있다. 이후 상권의 중심으로 떠오른 다리 인근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성장했다.
1660년 노트르담 다리는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이었던 마리아 테레사가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왕비로 발탁되어 파리로 들어올 당시 최초의 다리가 되는 영예를 안기도 한다. 1646~1788년 동안 다리 인근의 가옥이 모두 도시 정비의 일환으로 파괴되었다.
1853년에는 새로운 석재 구조로 기존의 돌다리를 덮었다. 하지만 기존의 예술적 아름다움은 상당 부분 경감되고 만다. 새로운 다리는 아치형으로 지어진 것이었지만 작은 흠이 있었다. 그것은 건축 보수 이후 연락선이 지나다니다 빈번히 사고가 난 것이었다. 때문에 1891년에서 1910년 사이 너무도 잦은 사고 탓에 사람들은 이곳을 악마의 다리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때문에 센 강변의 유람선이나 다른 배의 운송 편의를 위해 금속으로 다시 만드는 계획이 수립된다. 이 작업은 미라보 다리를 만들었던 장 르살이 맡았다. 1919년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푸앵카레가 참석한 가운데 다리가 개통되었다.
샹주 다리(샹주 교)(Pont au Change)
지금은 시테 섬과 우안을 연결해주는 이동 통로로만 사용되지만, 19세기 이전엔 이 다리 위에는 많은 상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금세공사, 가구 공예가, 환전상까지 다양한 상인들이 있었는데, 샹쥬라는 이름은 프랑스어로 환전상을 뜻한다. 센 강의 시테 섬을 잇는 샹주 다리는 나폴레옹 3세 통치기인 1858년부터 1860년까지 지어져 나폴레옹 3세의 이니셜인 ‘N’으로 장식된 다리이다.
샹주 다리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쟈베르 형사는 장발장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이유로 그를 당국에 넘기지 않고 이곳에서 센 강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다.
한편 소설 <향수>에서 파리의 훌륭한 향수 제조인인 지세프 발디니의 가게에 들른 장 그르누이는 뛰어난 후각과 향수 제조를 선보인 후 이곳에서 도제로 일하게 된다. 얼마 후, 그르누이는 곧 이 가게를 떠나게 되고, 그날 밤 기다렸다는 듯이 샹주 다리가 붕괴된다. 소설은 “샹주 다리는 이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상가의 하나로, 이곳에는 유명한 상점들이 많이 있었다(…중략…)이곳에 향수와 장갑 제조인인 지세프 발디니의 상점과 집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퐁네프(퐁뇌프, 뇌프 다리)(Pont Neuf)
‘연인의 다리’로 인상 깊은 곳은 시테섬을 연결하는 퐁네프 다리(Pont neuf)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은 퐁네프에서 노숙하는 남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여인의 운명적 사랑을 담고 있다. 레오 까락스 감독은 영화 촬영을 위해 파리시에 다리 위 교통통제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별도의 세트를 지어 촬영을 강행했다고 한다. 퐁네프 다리는 영화 상영 이후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기 위해 찾는 명소가 됐다. 퐁네프 다리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400년 역사를 지닌 다리이기도 하다.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다리’로 당시 새로운 양식으로 다리를 건축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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