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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르셀로나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16. 9. 17. by 솜글
스페인 여행을 앞두고 고민하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들입니다. 한국어 인터넷에서 모은 것들과 외국(영어 또는 스페인어) 사이트에서 번역해 모은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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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한국어 여행 지도는 여기에서


바르셀로나(Barcelona)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며, 항만규모와 상공업 활동에 있어서는 에스파냐 제1의 도시이자 스페인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부터 프랑스 남쪽 피레네 산맥과 접경지역을 아우르는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교외지역을 포함한 바르셀로나는 비옥한 해안평야에 펼쳐져 있으며, 천연의 양항(良港)과 더불어 에스파냐 최대의 산업도시를 이룬다. 마르세유와 마찬가지로 페니키아의 도시를 기원으로 하며, 기원전 3세기에 이곳을 지배한 카르타고인이 바르시노(Barcino), 즉 바르카가(家)의 도시라고 명명하였다.(또는 B.C. 3세기경 스페인 식민지를 개척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한니발 바르카의 아버지) 가문의 성에서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와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등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도시로 유명하다.

기원전 201년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며 아직도 구 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는 고딕 가(Gothic街 : 바리오·고티코스)에는 그 당시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8세기에는 무어인이 점령하였으나 801년에 샤를마뉴(=카를 대제)가 이를 해방하고 지배했다. 

12세기에는 카탈루냐 백작과 아라곤 여왕의 결혼으로 아라곤 왕국이 이루어지자 바르셀로나는 그 수도로서 해운, 수공업, 금융의 중심으로서 번영해 14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이 무렵에 지어진 고딕식 대성당(13세기 말)을 비롯하여 역사적 건조물들이 구시가 중앙에 많이 남아 있으며, 당시의 바르셀로나의 해양법(海洋法)인 콘술라도 데 마르는 오랫동안 그 권위를 유지하였다.

1469년에 아라곤과 카스티야가 통일되자 바르셀로나는 지방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고유의 카탈루냐 어를 가지고 있는 데다 1550년에 창립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에스파냐의 선진 지역으로서, 카탈루냐 문화에 대한 긍지와 진보적 시민 자치의 전통과 강력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번번이 독립을 요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17∼19세기에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북부 카탈루냐 지방을 프랑스에 빼앗기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는 에스파냐의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1936∼1939년의 에스파냐내란 당시에는 공화정부(인민전선정부)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가 1939년 1월에 프랑코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시가의 중심인 람블라스 거리에는 은행, 상사, 고급 상품점이 줄지어 서 있고, 이 거리의 남단인 항구 부근의 푸에르타 데 라파스에는 콜럼버스의 기념상이 있다.

람블라스 거리의 서쪽은 19세기까지 건물이 들어차 있다. 동쪽에 있는 중세까지의 도시 지역을 포함하여 구시가라 부르는데, 그 주위를 론다스라고 하는 성벽 터전의 대로가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바깥쪽의 직교상(直交狀)의 시가는 1860년의 도시계획으로 건설된 신시가이다.

바르셀로나의 공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섬유공업이다.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해 그 영향으로 1845년에 14∼15만 명에 지나지 않던 인구가 1931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화학·금속공업도 가세하여 이베리아반도 제1의 도시가 되었다. 내란 후의 중앙집권화에 따라 한때 마드리드에 그 자리를 빼앗겼으나, 그 후 관개 시설이 갖추어진 에브로 강 서부의 풍부한 농산물과 피레네의 수력으로 자동차 공업, 항공기 공업, 식품가공업 등이 활발해지면서 번영을 되찾고 있다. 카탈루냐 문화의 중심지답게 인쇄업도 활발하며, 지금도 문화·경제의 모든 면에서 카스티야의 중심인 마드리드에 대한 대항의식이 강하다.

시가는 료브레가트 강과 베소스 강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서부의 티비다보, 남부의 몬주익 등의 구릉지는 시민들의 행락지이다.(몬주익(Montjuïc)의 발음이 ‘몬후익’이 아닌 것은 이 말이 카탈루냐 어이기 때문이다.)

안토니 가우디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Antoni Gaudi y Cornet, 1852~1926)는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인 타라고나 주의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몸이 약해서 언제나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며 자라 그 과정에서 깊은 신앙심을 얻게 됐다.

가우디는 어릴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했는데, 천재적인 성향을 불어넣어 준 것은 고향의 자연과 주변 건축물들이었다. 레우스는 타라고나의 평원지대에 있으며, 크고 작은 산맥과 바다가 주위를 감싸고 있다. 납작하게 엎드린 평야지대엔 농가와 농장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중세에 건설된 성당의 뾰족탑들은 단조로운 풍경에 활기를 주고 있다. 어린 시절 가우디는 허약한 몸 때문에 혼자일 때가 많았다. 다리가 아파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면 가우디는 근처 숲과 강가에서 혼자 자연을 벗 삼아 놀곤 했다. 특히 레우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옛 건축물들은 어린 가우디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이터이자 산 교육장이 되었다. 당시 레우스는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등 각각의 양식들로 건축된 성당들의 잔재를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우디는 언제나 카탈루냐인임을 자랑스러워했으며, 건축물을 통해 카탈루냐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역사적으로 카탈루냐 지방(하층민)과 카스티야 지방(귀족) 사이에는 갈등과 충돌이 심했다. 두 지역 간의 관계가 나빠질수록 힘이 약한 카탈루냐는 늘 희생자여야 했고, 고유한 언어와 고유한 문화를 가진 카탈루냐 민족의 독립성은 점차 그 빛을 잃어가게 되었다. 파시즘이 들어섰을 때는 아예 카탈루냐어 교육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때 사라지는 카탈루냐의 언어와 문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카탈루냐 문예부흥운동, 즉 레나센샤(Renaixenca)가 발현됐다. 가우디는 이 레나센샤 운동의 영향을 받아 수공예 기술에 대한 존경심과 중세 예술의 정직성을 갖게 됐다. 가우디의 작품에는 카탈루냐의 문화와 종교적인 색채가 깊은데,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특히 카탈루냐만의 독창성을 표현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가우디와 관련된 인물로 구엘 바시갈루피(Eusebi Güell Bacigalupi)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가우디보다 여섯 살 연상의 벽돌 제조업자로서 남작의 작위까지 받은 성공한 사업가였다. 구엘과 가우디의 관계는 고객과 건축가 혹은 후원자와 예술가의 관계 그 이상이었다. 가우디는 1883년 구엘 가문의 건축가로 임명된 후 구엘과 그의 집안을 위해 35년간 일하며 구엘 공원, 콜로니아 구엘 성당의 납골당, 구엘 궁전, 구엘 포도주 저장고 등 구엘 가문에 속한 모든 건축에 참여했다.

구엘 공원(Parque Güell)

멀리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구엘 공원은 동화에 들어온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가우디 특유의 형형색색 모자이크로 장식된 건물과 자연이 어우러지며 과자 집처럼 생긴 건물이나 반쯤 기울어져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인공석굴의 어디쯤에서, 혹은 꾸불꾸불한 산 길 어디에선가 동화 속 요정이라도 만날 것 같은 느낌이다.

구엘 백작이 평소 동경하던 영국의 전원도시를 모델로 한 이곳은 원래  60호 이상의 전원주택을 지어 분양할 예정이었다. 돌이 많은 데다 경사진 비탈이어서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렸다. 1900년부터 1914년까지 14년에 걸쳐서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자금난까지 겹치면서 몇 개의 건물과 광장, 유명한 벤치 등을 남긴 채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가 이 땅을 사들여 이듬해 시영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직선이 아닌 곡선을 위주로 한 건물들, 어디서나 시선을 끄는 화려하고 독특한 모자이크 장식과 타일,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위태롭게 기울어 있는 나선형의 층계, 깨진 도기 조각으로 사치스럽게 장식해 불협화음 속의 묘한 조화를 느끼게 하는 난간 장식, 자연미를 살린 꾸불꾸불한 길과 인공 석굴들 등이 가우디 건축의 독특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지금은 가우디 기념박물관으로 쓰이는 건물도 있고 과거 가우디가 살던 시절 사용했던 침대, 책상 등 유품과 데드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다. 가우디가 직접 디자인한 독특한 가구들도 눈을 끈다.

카사 비센스(Casa Vicens)

어떠한 양식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가우디만의 조형적 감각이 드러난 작품이다. 그것은 벽돌, 돌, 잡석, 타일과 같은 강한 질감의 자연적 재료를 사용하여 새하얀 균질의 미를 부르짖던 당시 모더니즘 양식들 속에서 혁명적인 작품으로 주목을 끌었다. 초록색과 크림색 타일로 덮인 ‘색의 결정체’로, 건축주는 흥미롭게도 타일공장 사장이었다.

가우디가 건축 설계를 위해 부지를 답사했을 당시 부지에는 원래 노란색 아프리카 금잔화가 깔려있고 그 가운데 거대한 야자수가 있었는데 야자수의 잎이 하도 무성해 그 안에 벌레를 잡으려는 새들로 가득했다. 가우디는 바로 이 모티프를 디자인에 적용하려 했다. 가우디는 언제나 건축물이 들어설 대지와 그 주변 환경과 건축물이 완벽하게 조화될 수 있도록 디자인을 하였던 건축가였다.

외관은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패턴을 보이면서도 요소요소에 풍부한 동식물의 장식들이 덧붙어 있어 주변 자연환경과 어떠한 이질감도 없이 서로 어우러져 있다. 촘촘히 박혀있는 매끄러운 외벽 타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달라지는 태양의 각도와 날씨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반짝거리며, 설교단 중앙에 있는 작은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둥글고 얇은 막을 만들어 석양이 비치면 무지개 빛으로 반짝거린다. 실내 역시 자연적 모티프가 적용돼 여기저기에 꽃과 새, 붉은 앵두와 푸른 잎들이 표현돼 있으며, 벽면 가득 조각된 덩굴손과 낙엽 주변으로는 한 떼의 해오라기와 학들이 비상하고 있다. 특히 돌과 유리 조각으로 되어있는 모자이크 바닥은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기까지 한다. 

카사 밀라(Casa Milá)

잘라진 돌을 그대로 쌓아 올렸기 때문에 라 페드레라(La Pedrera, ‘채석장’이라는 뜻)라고도 한다. 가우디의 가장 큰 주거 프로젝트이자 지금까지 세워진 건축물 중에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건물 중 하나이며, 건축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바르셀로나의 사업가 로제르 세지몬 데 밀라와 그의 아내의 의뢰를 받아 설계했는데, 당시 가우디는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비싼 건축가로, 전통을 거부하고 자연에서 그 형태의 영감을 얻은 조각적인 건축, 그리고 색색깔의 모자이크와 타일의 사용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넓은 모퉁이 공간에 위치한 카사 밀라의 구조는 지탱하는 기둥이 있는 오픈플랜으로 돼 있어 하중의 부담이 적다. 외부는 거대한 조각 돌덩어리에서 동굴처럼 솟아난 발코니와 창문이 만들어내는 물결무늬로 돼 있다. 발코니 중에는 제멋대로 비틀고 꼬는 추상적인 철 난간도 있다. 최고의 걸작은 지붕이다. 거대한 모래 언덕처럼 솟아오르다가 작은 다락방 창문이 꿰뚫고 나오고, 그 뒤로는 색색의 모자이크로 덮인 괴상하고 추상적인 굴뚝을 쌓아올렸다. 실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두 개의 안뜰이 건물을 가로지르는 중앙 축 역할을 하며, 아파트는 비어 있는 공간 주위로 들어갔다. 다락방은 마치 배의 용골 모양의 일련의 벽돌 아치로 이루어져 있어, 바로 위의 테라스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라 페드레라는 가우디의 다른 작품이 그렇듯이 하나의 완전한 유일무이하다. 대충 아르누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건축물과도 다르다.

카사 바트요(Casa Batlló)

가우디가 살던 시절 바르셀로나 그라시아 거리는 재건축의 붐이 한창이었다. 부호들은 유명한 건축가를 섭외하여 가장 멋진 집을 지으려 했는데, 카사 바트요도 그렇게 지어진 집 중 하나로 실업가 바트요 카사노바스의 허름한 집을 개축하는 프로젝트였다. 가우디의 성향대로라면 주변에 나란히 붙어있는 주택들과 조화를 이루려 했을 텐데, 독특하게도 외관에는 동물의 뼈와 같이 생긴 기둥들을 넣어 단순히 장식이 아닌 구조적 요소로 구성했다.

본래 이 건물은 개축 전에 구조적으로 너무 낡아 있었다. 가우디는 어떻게 하면 낡은 구조 위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을지 3일 동안 밤을 새워 고민했는데, 그 결론은 몬주익에서 생산되는 암석으로 1, 2층의 정면을 새롭게 만들고, 뼈 형상의 기둥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체가 마치 원시시대에 있었던 거대한 동물의 뼈를 심어놓은 듯 보인다. 발코니에는 눈 부분이 숭숭 뚫린 괴물의 머리뼈가 돌출되어 있고, 2층에 튀어나온 창가엔 허벅지 뼈 같은 기둥이 흘러내릴 듯한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 옥상에는 동물의 척추 뼈를 연상시키는 지붕을 얹어놓았다. 물결치는 건물의 표면은 파도가 지나간 듯이 여러 빛깔의 모자이크로 덮여 반짝이고, 그 위엔 거대한 비늘의 아르마딜로(Armadillo)가 쉬는 듯 누워있다. 아침햇살을 받으면 건물은 온통 무지개 빛으로 반짝거려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데, 이 원색의 세라믹은 차가운 발코니의 돌과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더 돋보인다. 내부의 공간은 어디까지가 벽이고 어디부터가 천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어 전체가 견고한 구조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Sagrada Familia)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성(聖) 가족’이라는 뜻으로,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을 뜻한다. 원래는 가우디의 스승인 비야르가 설계와 건축을 맡아 성 요셉 축일인 1882년 착공하였으나, 비야르가 건축 의뢰인과의 의견 대립으로 중도 하차하고 1883년부터 가우디가 맡게 되었다. 가우디는 기존의 작업을 재검토하여 새롭게 설계하였으며, 이후 40여 년간 성당 건축에 열정을 기울였으나 1926년 6월 사망할 때까지 일부만 완성되었다. 건축 자금을 후원자들의 기부금만으로 충당하여 공사가 완만하게 진행되었으며, 스페인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등의 영향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953년부터 공사를 재개하여 현재까지 진행 중이며,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에 완공할 예정이다. 전체가 완성될 경우 성당의 규모는 가로 150m, 세로 60m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중앙 돔의 높이는 약 170m이다.

건축양식은 입체기하학에 바탕을 둔 네오고딕식이다. 구조는 크게 3개의 파사드(Façade;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로 이루어져 있다. 가우디가 사망할 때까지 완성된 파사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탄생의 파사드(Nativity Façade)’뿐이다. 3개의 파사드에는 각각 4개의 첨탑이 세워져 총 12개의 탑이 세워지는데, 각각의 탑은 12명의 사도(제자)를 상징하고 모두 100m가 넘는다. 또 중앙 돔 외에 성모마리아를 상징하는 높이 140m의 첨탑도 세워진다. 재료는 석재인데, 1953년 건축을 재개하였을 때 석재가 부족하여 그 뒤에는 인조 석재와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있다. 탑의 모양은 옥수수처럼 생겼고, 내부의 둥근 천장은 나무처럼 생긴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천장은 별을 닮은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 차 있다.

가우디 건축의 백미이자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가우디가 직접 건축에 참여한 ‘탄생의 파사다’와 예배실은 구엘 공원, 카사 밀라, 카사비센스, 카사바트요, 콜로니아 구엘 성당의 지하 예배실과 함께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바르셀로네타(Barceloneta) 포트 벨(Port Vell)

람블라스 거리 끝에 위치한 벨 항구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와 식민지 시대를 연 항구이다. 높이 60m에 달하는 콜럼버스 기념탑(Columbus Monument)이 서 있다. 돌과 철, 청동으로 만든 기념비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자랑하기 위해 1888년 만국박람회 때 지었다. 서쪽을 가리키는 콜럼버스 동상에서 신대륙 개척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이 콜럼버스 탑 안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로 올라가면 아름다운 시내 항구와 바르셀로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옆에는 지중해가 보이는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왼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영화관과 수족관, 쇼핑센터 등이 입점해 있는 마레마그눔으로 통한다. 바르셀로나의 도시 전경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다. 벨 항구의 갑판 너머에는 쇼핑몰과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으며 야간에는 항구 주변에 조명을 밝혀 운치를 더한다.

티비다보(Tibidabo)

티비다보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높은 언덕으로 고도 516.6m이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맑은 공기와 시내의 멋진 경치를 즐길 수 있다. ‘티비다보’라는 명칭은 예수를 유혹하던 악마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901년 10월 29일 문을 연 티비타보 놀이공원이 있는데 이는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놀이공원이자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놀이공원이다. 사그랏 코르 성당(Sagrat Cor Church)도 자리해 있는데 내부가 무료로 개방되어 있으며, 전망대에 오르면 바르셀로나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레이알 광장(Plaça Reial)

고딕 거리에 있는 광장으로 19세기 중반 만든 것이다. 만들어질 당시부터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있어 한가하게 식사나 커피 혹은 맥주를 즐길 수 있으며,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테라스는 만남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야자수가 있어 특색 있으며 가우디가 대학 졸업 후 만든 최초의 작품인 가로등(Lampposts)이 두 개 있다.

성 필립 네리 광장(Plaça de sant Felip Neri)과 노바 광장(Plaça Nova)

성 필립 네리 광장은 영화 <향수>에서 주인공 그루누이가 처음으로 어떤 여자를 살인하는 장면의 촬영 장소이자, 프랑코 시대인 1938년에 카탈루냐어 금지령을 어긴 사람들 42명(대부분이 어린이)을 몰아넣고 총살한 곳이기도 하다. 벽에 총알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복원하거나 지우지 않고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노바 광장에는 피카소가 그린 그림(낙서)이 있고 측면에는 두 개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타워가 있다. 목요일이면 골동품 마켓이 열린다.

카탈루냐 음악당(Palau de la Musica Catalana)

1908년 모더니즘(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가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Montaner, 1850~1923)가 심혈을 기울인 걸작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합창, 실내악, 교향악의 환상적인 장소로 카탈루냐의 전통과 역사를 대변하는 성당 건축물이다.

파사드는 모자이크 타일의 기둥과 바흐, 베토벤, 바그너 등 유명 작곡가들의 흉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실내 공간은 형형색색의 모자이크 타일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마치 동화 속 나라의 왕국 같다. 내부를 장식한 작품 대부분이 모두 몬타네르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으로 장미, 백합과 같은 꽃무늬를 주제로 한다.

내부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2층의 장엄한 콘서트홀이다. 안토니 리갈트의 작품인 화려한 푸른 황금색의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천공광(천장에 낸 채광창)이 천사들의 합창단을 의미하는 여자 40명의 머리로 둘러싸여 있다. 아치형의 무대 앞에는 작곡가 바그너와 끌라베의 조각상이 있다. 성당 내부의 발코니나 천장 타일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싶다면 쌍안경을 지참하는 것이 좋다. 내부는 영어, 스페인어, 카탈루냐어로 진행되는 가이드 투어로만 볼 수 있고 관람 시간은 약 50분 소요된다. 현재는 이곳에서 클래식 음악 콘서트가 개최된다.

람블라스 거리(Ramblas Street)

카탈루냐 광장에서 남쪽 항구의 포르탈 데 라 파우 광장까지 1km에 이르는 거리. 도로변에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빽빽하게 수놓아져 있어 도심의 삭막함을 덜어 준다. 시민의 영원한 산책로로 서머셋 모옴이 ‘세계에서 가장 매력 있는 거리’라고 했다. 피카소, 달리, 미로가 이 길을 자주 거닐었고, 파블라스 카잘스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의 악보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 거리를 가로지르면 바르셀로나의 중심지인 대성당을 비롯해 중세풍의 건축물과 미술관, 박물관, 시민의 휴식처인 시우타데야 공원 등을 모두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서민적인 잡화점과 카페, 거리 예술가 등 우리가 연상하는 유럽의 거리 풍경이 그대로 펼쳐지는 곳이다. 지하철 리세우역 부근의 산책로 바닥에는 후안 미로가 디자인한 다채로운 모자이크(1976년)가 깔려 있다. 주말에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치는 거리의 행위예술가들이 나온다. 바르셀로나 최고의 오페라 전당인 리세우 극장과 최대의 재래시장인 산 조세프 시장(=보케리아 시장)도 있다.

구엘 저택(Palau Güell)

1885~1890년에 지은 가우디의 첫 번째 대규모 작업물로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면 장식은 르네상스 양식, 내부는 네오무데하르 양식으로 마치 궁전과 같은 고전적인 외관을 지녔지만 부서진 타일과 돌을 이용한 옥상의 굴뚝, 별이 박혀 있는 것 같은 2층의 중앙 살롱 등에서 가우디의 독창성이 엿보인다. 이 건물은 본래 본관과 연결되는 별관으로 지은 것인데, 구엘이 이 건물을 더 마음에 들어 해서 본관으로 사용했다. 중세의 요새 같은 아치형 입구 옆에는 구엘 가문의 문장인 철제 독수리가 있다. 지하 1층은 마구간, 1층은 마차고, 중2층은 서재, 2층은 응접실, 3층은 침실, 4층은 하인들의 방과 주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면 고딕 지구의 빽빽하게 들어선 좁은 거리와 항구의 전망이 펼쳐진다. 지붕 테라스에는 가우디 특유의 디테일이 돋보이는 20개의 특이한 굴뚝이 있다. 대리석, 타일, 토기 같은 여러 자재를 사용한 다양한 형태의 트렌카디스(Trencadis, 깨진 세라믹이나 도자기 조각)로 장식되어 있다. 중앙탑 꼭대기에는 철제 풍향계가 있다.

산 하우메 광장(Plaça Sant Jaume)

바르셀로나 시청(Casa De la ciutat) 청사와 카탈루냐 자치정부 청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광장이다. 시청사는 14세기 건물로 외관은 신고전주의(옛 그리스 신전의 느낌이 나면 대부분 신고전주의 건축물)이나 내부는 고딕 양식이고, 자치정부청사는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이다. 산 하우메 광장은 로마 지배기에 정치 토론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곳으로 아직도 그 기능이 이어지고 있다. 광장이 매우 넓어 바르셀로나의 큰 축제는 대부분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축제의 시작과 끝이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산 하우메’란 그리스도 제자 중 야곱의 이름을 카탈루냐 어로 읽은 것이다.

시청사 정문 양쪽으로는 동상이 있는데, 왼쪽의 왕관을 쓴 인물은 13세기 아라곤 왕국의 정복 군주로서 바르셀로나의 첫 정부였던 ‘100인 위원회’를 만든 국왕 하우메 1세(Jaume I)이고, 오른쪽은 100인 위원회 위원이며 바르셀로나 명예시민 훈장을 받았던 15세기 후안 피벨러(Joan Fiveller)이다.

왕의 광장(Plaça del Rei)

중세시대 바르셀로나의 정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3면이 건물로 에워싸인 광장이다. 자체의 예술적 아름다움보다는 중요한 역사적인 상징성을 간직한 곳으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에스파냐 왕인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을 알현한 장소로 유명하다. 콜럼버스는 왕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 광장 안쪽의 계단을 올랐었다.

고딕 지구의 중심이기도 한 이 광장은 아라곤 왕가의 궁전 광장으로 광장의 3면이 건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광장 좌우에는 요크티넨 궁과 산타아가타 예배당이 있고 정면에는 아라곤 왕의 왕궁이 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Barcelona Catedral)

고딕 지구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1298에 착공하여 150년 만인 1448년에 완공되었으며 길이 93m, 너비 40m, 첨탑 높이 70m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정면의 현관은 1408년에 만들어진 설계도에 따라 500여 년 만인 1913년에 완성되었다. 성당 안 여러 개의 부속 예배당에 성인들의 유체가 안치되어 있으며, 중앙 제단 밑에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인 산타 에우라리아의 묘가 있다. 오랜 세월 바르셀로나 시민들과 함께해온 대성당은 시민들의 문화생활 공간으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주말에는 대성당 앞 광장에서 오래된 성당 물품이나 투우사의 옷 등을 파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축제가 있는 날에는 시민들이 모여 전통춤인 사르다나를 추기도 한다. 고대 로마 지배기의 바르셀로나의 명칭은 ‘Barcelo’였는데, 광장에 이를 기리는 알파벳 금속 조형물이 만들어져 서있다.

대성당 부주교의 집(Casa de l'Ardiaca)

15 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대성당의 부주교 Lluís Desplà의 명으로 지어졌으니 이후 계속 소유자가 바뀌었다. 1902년 건축가 Domenech i Montaner가 재건축하면서 만든 우편함이 유명하다. 우편함에 우편을 상징하는 제비와 함께 조각된 거북이는 당시의 우편 서비스의 속도가 거북이 같다고 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지금은 손으로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하여 the turtle for luck으로 불린다.

시우타데야 공원(Parc de la Ciutadella)과 바르셀로나 개선문(Arc de Triomf)

바르셀로나 개선문은 1888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를 기념해 세운 것으로 파리의 개선문에서 영감을 얻어 지었다. ‘승리의 문’이라는 별명처럼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그 앞으로 쭉 만국박람회 장소인 시우타데야 공원이 펼쳐져 있다. 바르셀로나 중심지답지 않게 한가로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공원 입구 부근에는 가우디가 학창 시절 공동으로 작업한 철책이 있다.

공원에는 가우디와 동시대에 활동한 건축가이자 카탈루냐 음악당을 설계한 ‘꽃의 건축가’ 몬타네르의 또 다른 작품인 세 마리 용의 성(Castell dels Tres Dragons)이 있는데 현재 동물학 박물관(Museu de Zoologia)으로 쓰이고 있다. 조금 더 이동해 공원 중심으로 들어가면 붉은 색의 웅장한 카탈루냐 의사당(Parliament de Catalaunya)도 만날 수 있다.

이 공원의 꽃은  가우디가 제작에 참여한 카스카다 분수(Cascada monumental)이다. 꼭대기에 아폴로 신의 여동생이자 상단에 밤을 내쫓는 새벽의 여신 오로라가 새벽 전차를 모는 황금색 동상(Quadriga de l'Aurora)이 세워져 있다.

산타 마리아 델 마르 성당(Santa Maria del Mar Church)

부유한 선주와 상인들이 14세기에 지은 성당이다. 선주들이 자신들의 돈으로 지었음을 성당 정문(어부들이 돌을 이고 있는 모양의 작은 부조)에 남겨 두었다. 카탈루냐 고딕 양식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며, 현재 바르셀로나 대성당에 안치된 에우렐리아 성녀의 시신은 본래 이곳에 있던 것이다. 다른 성당과는 달리 기둥 사이가 8미터로 넓게 되어 있다.

4 GATS(El Quatre gats)

피카소, 가우디, 미로 등 예술가들의 단골 카페로, 19세기말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을 동경하던 카탈루냐 미술가와 작가들이 문화를 이야기하던 장소였다. 파리의 카바레 ‘검은 고양이’를 본따 만든 카페 겸 레스토랑으로 1897년 문을 열었다. ‘El Quatre gats’는 에스파냐어가 아닌 카탈루냐어이다. 피카소가 돈이 없을 때는 그림을 그려주고 음식 값을 치르기도 했는데, 지금 쓰이는 메뉴판의 그림도 그 중 하나이다.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가 1970년경 외식가들의 투자로 다시 개장했다. 간판 위쪽에 고양이 네 마리가 있다.

피카소 미술관(Museu Picasso)

1963년 개관한 곳으로 피카소 초기작 3,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어 소년, 청년기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미술관 건물은 본래 13~15세기경에 지어진 옛 귀족의 저택으로 카탈루냐의 고딕 양식을 잘 보여주며,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고 18세기에 크게 개보수한 흔적이 있다. 소장품은 색채화와 데생, 판화와 도자기 등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생전에 작가가 직접 골라 기증한 것들과 사후 그의 부인이 기증한 것이 많다. 소년기, 청년기를 거치며 남긴 드로잉 등의 습작과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응용한 연작 등을 전시하고 있다. 십대 중반에 그린 <자화상>, <집>, <프라도 살롱>, <과학과 자비>도 감상할 수 있다. 입체파 양식이 보이기 시작하는 <블랑키타 수아레스> 등 1917년 이후 작품과 입체파와 야수파의 요소가 함께 드러나는 <피아노>, <재클린의 초상>도 볼 수 있다. 이밖에 피카소의 일곱 번째 연인 재클린 로크(Jacqueline Roque)가 기증한 도예 작품과 피카소 사진 등 화가의 일상의 모습 담은 자료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피카소 미술관의 소장품들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일찍이 화가인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라코루냐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열네 살 때 아버지를 모델로 삼아 사실주의 작품인 <첫 영성체>를 그리는데 이 작품은 그가 옛 거장들의 구도와 색채, 그리고 기법을 완전히 습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마드리드 미술대전에서 호평 받고 일급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어린 시절 대표작 중 하나인 <과학과 자비>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집으로 방문한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스페인 미술에서는 작품에서 주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제를 골라 주곤 했는데, 이 작품 역시 아버지가 모델로 섰다. 어릴 때 피카소는 다른 미술가들의 양식을 받아들였다. 그의 작품 <페파 아주머니의 초상>(1896)은 루벤스의 그림처럼 보이고, <푸른 옷을 입은 여인>(1901)은 로트레크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에게 계속 고전적인 미술을 교육했고 당시 스페인의 미술학교는 석고 데생을 그대로 닮게 그리는 틀에 박힌 교육에 치중했다. 새로운 미술 경향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피카소는 당시 미술계를 선도하던 파리로 가기로 떠나 툴루즈 로트렉. 폴 세잔, 에드가 드가, 피에르 보나르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사교계 생활을 시작하고 그 속에서 주제를 발견하면서 자신만의 자유분방한 방식으로 드가풍의 세련된 파스텔화를 그렸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은 청색 시대, 장미 시대, 원시 시대,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뉜다.

청색 시대(1901~1904)의 작품들은 대개 그림이 직접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어서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우울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가장 친한 친구의 자살과 빈곤한 생활이 겹쳤던 이 시기, 피카소는 모든 것에 청색을 입히다시피 하며 청색을 자주 사용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다른 색을 통해 온화한 색조를 나타냈다. 알코올 중독자, 거지, 매춘부, 방랑자, 빈민들을 마치 엘 그레코의 인물들처럼 길쭉하고 수척하게 그렸다. 당시에는 거의 팔리지 않았으나 현재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에 속한다. 대표적으로 <비극>(1903)이 있다.

피카소는 이후 1904년 파리에 몽마르뜨에 정착하면서부터 아방가르드의 핵심 인물이 되어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살았다. 장미 시대(1905~1907)는 이 시기 페르낭 올리비에(Fernande Olivier)와 열정적인 연애를 시작하면서 찾아왔는데, 연애를 시작한 덕인지 핑크색과 오렌지색으로 주조색이 변화했다. <곡예사 가족>(1905)에서처럼 그림에 어릿광대, 곡예사, 서커스단원들이 등장한다.

원시 시대(1908~1909)에는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미술, 오세아니아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을 선보였다. 인물들을 각이 지게 묘사한 이 그림은 입체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이후 분석적 입체주의(1908~1912)로 나아가 구상 작품인 <기타를 든 여인>(1911)과 정물화 <죽은 새들>(1912)을 제작하면서 3차원적인 형태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입체주의 양식의 독창적인 기법과 이론들을 정립시켰다.

동료작가 브라크와 입체주의를 구체화(1912~1913)하면서는 조각 <기타>(1912~1913)에서는 3차원의 물체들을 거의 그림같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공간적인 순서를 반대로 처리하기도 했다. <식탁 위의 병과 포도주 잔>(1912)에서는 신문, 종이, 헝겊을 콜라주 기법으로 그림 위에 덧붙였다.

피카소의 후기 작품들은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조각상처럼 견고한 신고전주의적인 구상 작품들을 제작하다가, 192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양식으로 옮겨갔으며, 1930년대에는 뛰어난 기교를 선보인 에칭 작품인 <미노타우로마키>(1935) 등 신화적인 주제들을 탐구했다. 그는 활동기간 내내, 구성과 공간, 그리고 기법과 색채에 신경을 썼고 투우, 기타, 어릿광대와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채택했다.

스페인 내란 중에는 프랑코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1937)과 벽화 <게르니카>(1937)를 제작해 파시즘에 저항했는데, 이후에도 에칭 작품인 <통곡하는 여인>(1937) 등을 통해 전쟁의 고통을 표현했다.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쯤부터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종전 후에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 시기부터 주로 남프랑스의 바닷가에서 생활하며 그리스신화 등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밝고 목가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그렸다.

한편 도기 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많아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수법을 창조하였다. 그 후 6·25전쟁을 주제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리더로서 거장다운 활약을 하였다.

피카소는 선배 화가들의 명작을 모작하거나 재창조하는 데도 능했따.  특히 어릴 적 프라도 미술관에서 처음 보고 감명 받은 벨라스케스의 원작 <시녀들>을 새롭게 해석한 <시녀들>(1957) 연작을 죽을 때까디 58작품이나 그렸다. 아예 <시녀들> 모작을 그리기 위해 프랑스 남부 칸으로 이사했다가 그곳에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자 이를 모델로 <시녀들> 시리즈 중 하나를 그리기도 했다.

이밖에도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재해석한 <알제리의 여인들>(1955), 마네의 그림을 재해석한 <풀밭 위의 점심식사>(1961) 등 선대 화가들의 모작을 수없이 많이 그렸다.

1960년대에는 색채주의 작품들을 제작했으며, 이 중 일부는 신표현주의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고 평가된다.

카사 칼베트(Casa Calvet)

칼베트는 구엘의 친구로 당시 섬유업을 하는 실업가였는데, 이 건물을 지어 아래층은 섬유 공장 사무실로, 2층은 자택으로, 3층 이상은 고급 맨션으로서 임대했다. 엘리베이터를 가진 이 건물은 1900년 제 1회 바르셀로나 건축상을 수상했다. 현재 일반인이 거주하는 임대 맨션으로 내부 관람은 불가능하며, 1층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실내 일부를 감상할 수 있으나 매우 값이 비싸다. 가우디의 작품 중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고전적인 방법으로 만든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몬주익(Montjuïc) 언덕, 스페인 광장(Plaça de España) 분수쇼

바르셀로나 서부에는 고도 213m의 몬주익 언덕이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지중해와 시티 전망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로 꼽힌다. 몬주익은 ‘유대인의 언덕'이라는 의미로 한때 유대인들이 살았던 지역이었으며, 몬주익 성은 1640년 펠리페 4세에 맞섰던 반란군들에 의해 세워진 요새였다. 18세기에 개조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한때는 감옥으로도 사용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군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몬주익 언덕을 오르면 바르셀로나 항구를 내려다보는 언덕 옆구리, 미라마르 전망대 입구에 선인장 정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정원들은 건축가 데스포나의 작품이고 호셉 파네요가 선인장을 심었다. 케냐, 에티오피아,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들여온 200종이 넘는 선인장과 그 밖의 다육식물이 자라고 있고 개중에는 키가 6m가 넘는 것도 있다. 또 12종이 넘는 다양한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방문객들에게 반가운 그늘을 만들어 준다. 이 정원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선인장은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사자금으로 나이가 200살이 넘어 ‘안데스의 노인’이라 불린다. 환상적인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몬주익의 선인장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밤에는 스페인 광장의 음악분수대에서 화려한 레이저 쇼가 펼쳐지는데 카탈루냐 미술관에서 내려다보면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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