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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스페인 여행 URL 복사

알람브라 궁전이 만든 물의 도시, 그라나다

2016. 9. 15. by 솜글

타레가(Tárrega)의 기타 연주곡 <알람브라의 추억>을 듣노라면 흐르는 듯한 음색에 두 눈이 절로 감긴다. 우리 귀에도 친숙한 이 명곡은 실연한 작자가 알람브라(Alhambra) 궁전을 여행하던 중 지은 것으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왔다. 특히 이 곡의 정수인 트레몰로 주법의 선율은 궁전 정원 분수에서 졸졸대며 뿜어져 나오는 물방울 소리를 기타 스트링에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디선가 들리는 분수 소리와 지빠귓새의 노랫소리로 기억되는 곳,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한껏 물 먹은 정원과 연못이 넘실대는 알람브라 궁전은 수백 년 간 뜨거운 그라나다를 지켜 왔다.

인공 댐으로 물을 댄 이슬람의 마지막 수도

그라나다는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의 최후 요새였다. 무어인(아랍과 북아프리카 베르베르 족의 혼혈인)이라 불리는이들은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리한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해 1492년까지 무려 800여 년이나 이 땅을 차지했다. 그러나 가톨릭 왕국들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점차 남하하자 세력을 잃은 이슬람 나스르 왕조는 본거지를 그라나다로 옮겼다. 그리고는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고자 높은 사비카(Sabika) 언덕 위에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상 최고의 궁전 복합단지’, ‘안달루시아의 보석’이라 불리는 알람브라 궁전의 시초였고, 지금까지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라나다라는 도시를 기억하게 하는 시발점이었다. 

 

아랍어로 ‘붉다’라는 뜻을 지닌 알람브라는 궁전과 성곽의 복합단지로 1238년부터 1358년까지 지어졌다. 해발 740m의 고원에 위치하며 너비가 205m에 달하고 전체 면적은 14만2천m²다. 스페인 이슬람 건축의 절정기를 장식하는 알람브라를 두고 시인들은 ‘에메랄드 속의 진주’라고 했다. 알람브라는 술탄이 지내는 궁전이었기 때문에 무하마드 1세와 왕족들은 물론이고 이들을 보좌하는 사람들과 대신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도 거주했다. 상시 거주 인원이 5천명에 달했다고 하니 당시의 규모와 활기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사비카 언덕에는 삶의 필수요소인 신선한 물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수원지인 다로(Darro) 강의 물줄기는 성 북쪽에서 30m나 떨어진 데다 지대가 낮았고, 작은 시냇물에 불과해서 수량도 적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하마드 1세는 궁전보다 지대가 높은 강의 상류로 올라가 강물의 흐름 자체를 바꾸어 궁전으로 물이 흐르도록 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대규모 공사를 강행한 결과 궁전에서 6㎞나 떨어진 지점에 인공 댐을 만들어 성 전체에 공급할 물을 확보할수 있었다. 이 댐은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을 5초마다 한 번 채울 만한 양의 물을 멀리 떨어진 알람브라에까지 공급하는 초대형 급수 장치였다. 800년 전, 맨손과 곡괭이로 땅을 파 이런 댐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가져온 물을 곳곳에 공급하는 수로(水路)

댐에는 두 개의 수문을 두어서 하나는 댐 반대편에서 물이 다로 강으로 흘러들어가게 하고 다른 하나는 물을 저수지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저수지에 저장한 물은 6㎞ 길이의 벽돌 수로를 지나 알람브라까지 공급됐다. 알람브라에 사는 인구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매일 수영장 7천 개에 달하는 물을 끌어와야 했기 때문에 수로 크기도 커야 했다. 저수지는 언덕이 많은 골짜기에 있었는데, 수로가 언덕을 만나면 언덕을 피해 가거나 위로 지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언덕을 관통하도록 했다. 물길이 지나는 언덕에 너비 1m, 높이 2m의 터널을 뚫어 수로를 연결한 것이다. 그렇게 사비카 언덕까지 도달한 물은 알람브라의 오아시스이자 정원들의 집합체인 여름 별궁 ‘헤네랄리페(Generalife)’로 왔다. 

 

헤네랄리페는 알람브라가 있는 언덕에서 15m 떨어진 다른 언덕에 있었기에 두 언덕 사이의 수로교, 즉 물이 다니는 다리를 놓아 헤네랄리페까지 온 물을 알람브라로 옮겼다. 수로교를 지난 물은 다시 ‘왕의 수로’라는 뜻의 ‘아세퀴아 레알(Acequia Real)’을 건너 알람브라 중심부까지 이어져 궁전 곳곳에 공급됐다. 아세퀴아 레알은 말하자면 알람브라의 생명줄이었다. 

크고 작은 공사로 완성된 이 완벽한 수로 시스템은 알람브라 내부의 주민들에게 일용한 식수와 생활용수를 대고 농경지의 작물을 자라게 하는 원천이 되었으며 궁전 정원에 있는 수많은 분수와 연못에 물을 댔다. 정원들은 그라나다 왕국의 상징인 동시에 그라나다 시민들에게 태양 속에서 쉴 곳을 마련해 주는 기능을 했다. 

깨끗하게 ‘흐르는’ 물

물은 고이면 썩는다. 하지만 이슬람에서 종교 의식의 정결함은 필수 요건이다. 그래서 무어인들은 계속 ‘흐르는’ 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알람브라에 고여 있는 물이 거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작은 연못의 물이라도 반드시 어디선가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가도록 설계돼 있다. 그라나다 왕국의 기술자들은 모든 물이 고이지 않고 흐르게 하고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즉 퇴적물이 쌓여 수로가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알람브라 전역에 기발한 방법을 썼다. 물길 중간 중간에 유속(流速)을 늦추는 얕은 웅덩이를 만든 것이다. 온갖 불순물이 섞인 물이 좁은 수로를 따라 아래쪽으로 빠르게 흐르다가 갑자기 넓고 깊은 곳에 도달하면 속도가 줄어드는데, 이때 물에 섞인 모래 같은 불순물이 아래의 작은 구멍으로 빠져 나갔다. 이런 방식으로 정원에는 늘 깨끗한 물이 공급되었다.

 

한편 뜨거운 그라나다의 기후 특성상 건기(乾期)에는 강물이 마르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가물 때를 대비해 높은 지대에 거대한 저수지들을 만들었다. 당나귀가 맞물린 나무 톱니 장치를 끌어 올리는 방식의 물레방아가 아래쪽 수로로 지나는 물을 퍼 올려 저수지 물을 항상 확보해 두었다. 저수지들은 높은 곳에 있었기에 언제든지 정원에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물이 너무 많아도 문제였다. 수량(水梁)이 과하면 물이 역류할 수 있고 불순물이 많이 발생해 수로가 막힐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비상 배수구를 만들어 수로의 용량을 초과하는 물들은 벽 곳곳에 뚫린 배출구로 빠져나가도록 했다. 이렇게 빠져나간 물은 다시 다로 강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지금도 알람브라 벽에서는 배수 구멍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물을 끌어오는 일부터 궁전 곳곳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까지, 크고 작은 공사 끝에 요새로 둘러싸이고 정원이 가득한 알람브라 궁전이 완성됐다. 공사는 무하마드 1세가 죽은 후까지도 이어졌고, 왕위가 바뀔 때마다 술탄들은 새로운 궁전을 지어 더하거나 자신의 특성이 나타나도록 기존 건물을 보수했다. 가톨릭이 점령한 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Karl V)까지도 그 아름다움에 반해 자신의 궁전을 추가로 지어 넣었다.

겉과 다른 매력의 알람브라 

알람브라 궁전은 크게 네 개 구역으로 나뉜다. 알람브라의 심장부이자 핵심인 나스르 궁전(Palacios Nazaries), 여름 별궁이자 물을 보관하는 저수지를 둔 헤네랄리페(Generalife), 성채인 알카사바(Alcazaba), 르네상스 풍 플라테레스코 양식의 카를 5세 궁전(Palacio de Carlos V) 등이다. 알람브라에 들어서면 다로 강 댐에서 끌어온 물을 궁전으로 흘려 보내는 ‘왕의 수로’, 수로 단면이 남아 있어 물길을 볼 수 있는 ‘물의 탑’, 기도하기 전에 몸을 씻기 위한 ‘공중목욕탕’을 지나 카를 5세 궁전을 만나게 된다. 카를 5세 궁전은 이슬람 양식으로 가득한 알람브라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카톨릭 건물로, 스페인 번성기의 통치자인 카를 5세가 그라나다로 신혼여행을 왔다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짓도록 한 것이다. 카를 5세 궁전은 겉은 사각형이지만 안은 원형 구조로 되어 있어 독특하다. 자연석을 파낸 후 거대한 물탱크를 묻고 그 위를 광장으로 덮은 ‘알히베스 광장’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이어 만나게 되는 나스르 궁전은 멕수아르의 궁전, 코마레스 궁전, 사자의 궁전으로 이루어져 이슬람 최고의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허브가 줄지어 심어진 아라야네스 중정 연못에 흰 대리석으로 지은 코마레스 탑이 비치는 모습은 알람브라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꼽힌다. 귀족 가문의 남자들이 몰살당했다는 비극의 전설이 남긴 ‘아벤세라헤스의 방’이나 왕비가 거처하던 ‘두 자매의 방’에서 종유석 모양의 정교한 벌집 형태 장식인 모카라베 천장을 만나면 그 섬세한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사자의 중정’의 그늘에 앉아 열두 마리의 돌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중앙 분수를 감상하노라면 술탄이 된 듯한 기분을 즐길 수 있다. 

 

헤네랄리페는 알람브라에 물을 대는 물의 별궁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물 저장 정원’, 미로 같은 사이프러스 나무와 장미가 기다란 연못과 분수를 둘러싼 ‘저층 정원’, 사이프러스와 네모난 연못들이 가지런히 정돈된 ‘왕비의 중정’ 등 수없이 많고 아름다운 정원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특히 ‘수로의 중정’에서는 긴 세로형 정원 중앙에 물길이 흐르고 양쪽에 자리한 수많은 분수에서는 물이 시 원하게 솟구치는데, 이곳의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고 타레가가 <알함브라의 추억>을 작곡했다고 한다. 물 저장 정원에서 내려오는 길에 자리한 ‘물의 계단’은 층계 양쪽 난간에 수로를 파서 물이 흐르도록 만들었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수로가 꺾이는 부분에 약간 넓은 곳을 만들어서 유속을 늦추고 불순물을 가라앉혔던 정수(淨水) 방식을 직접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요새이자 성채인 알카사바에서는 벨라의 탑, 화약의 탑 등을 만나게 된다. 지어질 당시에는 적군의 동향을 살피고 경비하기 위해 지어진 탑들이었지만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그라나다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인기가 높다. 특히 요새 중앙에 있는 벨라의 탑에 오르면 알람브라 궁전 내부와 알바이신 지구, 그라나다 중심부 일대의 수려한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중정의 궁전, 알람브라 

왕이 바뀔 때마다 건물이 더해져 빈 공간 없이 가득 메인 궁전 복합단지가 된 알람브라는 어느 새 유럽에서 가장 경이로운 궁전의 집합체가 되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건물마다 중정(patio) 한가운데 놓인 사각형의 연못들은 화려하고 섬세한 이슬람 건축물과 물의 조화를 아름답게 투영하고 있다. 연못들에는 크고 작은 분수들을 놓아 일 년 내내 물소리가 들리도록 했다. 

당시 이슬람 사람들은 유압을 이용해 높은 곳에서 물을 끌어와서 낮은 곳의 출수구(出水口)를 좁게 만들어 물을 위에서 아래로 분출시켰는데, 이것이 지금 우리가 분수라고 부르는 것의 효시이다. 자연 유압을 이용한 알람브라 궁전의 분수는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에 전달되어 더 화려해졌다. 

 

이슬람 건축물이 대개 그렇듯 알람브라 역시 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또 물을 어떻게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알람브라의 구조에서 물길을 지워 놓으면 건물과 녹지들이 따로 따로 움직이지만, 물길을 더하면 궁전 전체가 연결되고 완전해진다. 그래서 흔히 알람브라를 ‘물의 모든 속성을 이용한 곳’이라고 부른다. 알람브라에서 물은 건물과 건물 밖을 하나로 연결하는 촉매인 것이다. 

먼 곳의 흐르는 물을 궁전까지 흐르게 한 곳, 흘러들어온 물이 궁전 구석구석까지 다시 흐르는 곳. 알람브라는 물이 적은 도시 그라나다를 물의 도시로 탈바꿈시킨 이슬람인들의 마지막 흔적이다. 가톨릭에 패전한 나스르 왕국의 마지막 왕 보압딜은 알람브라 궁전을 파괴하지 않고 자신의 백성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눈물을 흘리며 스페인 땅을 떠났다고 한다. 그가 백성들과 함께 끝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이곳 알람브라에는 여전히 아름답고 청명한 물소리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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