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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프랑스 여행 URL 복사

파리 여행을 위한, 간략한 프랑스 역사

2018. 5. 27. by 솜글

고대(기원전)

골(Gaule)족의 정착

기원전 8세기경부터 지금의 프랑스 영토에 인도·유럽(Indo-European)계의 일파인 켈트족이 이주하여 원주민을 몰아내고 정착했다. 이후 로마인들이 이 지역을 갈리아(Gallia)라 부르고, 이 지역에 정착한 켈트족을 갈리아(Gallia)족이라고 불렀다. 이후 갈리아(Gallia)는 프랑스어 명칭인 골(Gaule)로 변화했다.

로마의 지배

프랑스 남부 해안지역은 기원전 121년 로마의 속령이 되었으며, 나머지 골(Gaule) 지역은 기원전 58년에서 51년에 걸쳐 카이사르(Caesar)에 의해 로마에 복속되었다. 이후 골족이 라틴화되면서 골족의 고유문화에 로마문화가 이식된 갈로로망(Gallo-romaine) 문화가 형성되었다. 당시 골족에 보급된 라틴어가 변형되어 프랑스어로 발전하였다.

중세에서 근세까지

프랑크 왕국(Frank)

메로빙거 왕조(Mérovingiens, 481~752)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게르만족이 대이동했을 때, 프랑스 동북부는 프랑크(Frank)족이, 서남부는 서고트(Wisigoth)족이, 동남부는 부르군디(Burgundy)족이 점령하였다.

481년 프랑크 부족 중의 하나인 메로빙 가(Mérovingiens)의 클로비스(Clovis)가 프랑크 왕국을 건설한 이후 프랑크 왕국은 서고트족과 부르군디족을 물리치고 세력을 확장하여 골(Gaule) 지방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후 소수 지배민족인 프랑크족과 다수 피지배 민족인 골(Gaule) 간에 서서히 동화가 진행되었다.

카롤링거 왕조(Carolingiens, 752~987)

752년 카롤링 가(Carolingiens)의 페팽(Pépin)이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추대되어 카롤링 왕조가 수립되었다. 이후 800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가 골 지방 전체, 이탈리아 북부, 라인 강 유역 일대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하고, 회교도의 유럽 침입을 막아내자 로마교황 레오 3세(Leo III)는 샤를마뉴 대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러다가 843년 샤를마뉴 대제의 손자 3형제가 베르됭(Verdun) 조약으로 3분한 프랑크 제국 영토 중 샤를 2세(Charles Ⅱ, 823년~877년)가 차지한 서부 프랑크(Frank Occidentalis)가 오늘날 프랑스의 모체가 되었다. 이후 9세기 말 노르만족(바이킹)이 프랑스 북부지역과 센(Seine: 현재의 노르망디 지방) 강 유역에 침입하여 정착하였다.

중세 봉건왕조

카페 왕조(Capétiens, 987~1328)

프랑스에서는 987년 위그 카페(Hugues Capet, 재위 987~996)가 왕으로 추대되어 카페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에 전형적인 중세 봉건제도가 성립되면서 골족과 프랑크족 간의 동화가 가속화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크족이 게르만어를 버리고 피지배민족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프랑스어도 게르만어의 영향을 받아 변형되었다.

발로아 왕조(Valois, 1328~1589)

1328년 필리프 6세(Philippe VI, 재위 1328~1350)가 수립한 카페 왕가의 방계인 발로아 왕조는 영국과의 백년전쟁(1337~1453)을 치른 끝에 영국인들을 축출하였다. 그러나 영국과의 전쟁 중인 1348~1360년 기간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인구가 격감하고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이후 15세기 말부터 이탈리아로부터 르네상스 문화가 도입되어 프랑스는 16세기에 루아르(Loire) 강 유역을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한편, 1560~1598년에는 신교도와 구교도가 8차에 걸쳐 종교전쟁을 치렀다.

부르봉 왕조(Bourbon)

1589년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1610)가 수립한 부르봉 왕조는 초기에는 왕권이 미약하였지만, 앙리 4세가 제후들과 오랜 투쟁을 벌인 끝에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이에 따라 루이 13세(Louis XIII, 재위 1610~1643)와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 시대에 절대주의 왕권이 절정을 이루었다. 루이 14세는 태양왕으로 명명되었다.

부르봉 왕가는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걸친 30년 전쟁(1618~1648)을 통하여 신성 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와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반면에 루이 14세는 수차례 전쟁을 벌여서 유럽 대륙의 영토를 확장하고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루이 14세는 신대륙에 루이지애나(Louisiana), 캐나다, 앤틸리스(Antilles) 등 방대한 해외령을 확보하고, 인도에도 식민지 개척의 거점을 확보했다.

17세기 후반에는 라틴문화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프랑스 고전주의 문화를 꽃피웠다. 이 시대에 몰리에르(Molière), 코르네유(Corneille), 라신(Racine) 등의 문호와 파스칼(Pascal), 데카르트(Descartes)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프랑스어 문법과 프랑스 고유의 법체계가 정비되기 시작했다.

프랑스대혁명

프랑스대혁명 발발

프랑스의 부르봉(Bourbon) 왕조는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 집권기에 세력을 떨치다가 루이 15세(Louis XV, 재위 1715~1774)와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1792)의 집권기에 걸쳐 점차 세력을 잃었다. 반면에 이 시대에 상업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

한편, 볼테르(Voltaire)와 샤를 드 몽테스키외(Charles de Montesquieu),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를 비롯한 백과사전파가 계몽주의를 확산시켰다. 이에 따라 귀족과 승려 등의 특권층에 대한 피지배 평민계층의 비판의식이 높아지고, 부패한 왕실에 대한 시민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러다가 1789년 5월 루이 16세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삼부회에서 평민대표들은 봉건사회의 특권을 폐지하고 평등 과세 등의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같은 해 6월 17일, 평민대표들만으로 구성된 국민의회를 선포하였다. 이어서 7월 9일 평민대표들은 귀족과 승려 계급이 참여한 가운데 국민의회를 제헌의회로 개칭하여 헌법 제정을 추진하였다.

드디어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군이 정치범 수용소인 바스티유(Bastille) 감옥을 습격한 사건을 시작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였다. 이틀 후인 7월 16일에는 파리 시 자치정부(Commune de Paris)가 수립되고 8월 26일 인권선언이 선포되었다.

제1공화국 수립

프랑스 대혁명 초기에는 라파예트(Lafayette), 콩트 드 미라보(Comte de Mirabeau), 장 실뱅 바이(Jean Sylvain Bailly),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 등 입헌군주파가 주도권을 장악하여 1791년 10월 1일 헌법을 채택하고 입헌군주제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1791년 6월 루이 16세 일가가 국외로 탈출을 기도한데다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하자 혁명이 과격화되었다. 이에 입헌군주파들이 밀려나고 1792년부터는 공화파들이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1792년 9월 21일 왕정폐지를 선포하고 국민공회(Convention)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프랑스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공화파들은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다.

공화국 초기에는 공화파 중에서 계몽 부르주아 중심의 혁명을 지향한 온건 지롱드당(Girondins)이 우세하였다. 그러다가 1793년 초부터 조르주 자크 당통(Georges Jaques Danton),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로베스피에르2) 등 산악당을 주축으로 하는 급진 자코뱅당(Jacobins)이 지롱드당을 축출하였다. 자코뱅당은 공안위원회(Comité de Salut Public)라는 일종의 혁명재판소를 구성하여 반혁명 혐의자를 대거 숙청하는 등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1793년 7월 14일 마라가 암살되었고, 이후 1794년 4월 4일 로베스피에르가 당통을 처형하고 독재권을 장악했지만, 그의 지나친 공포정치에 반대하는 국민공회가 1794년 7월 그를 처단함으로써 공포정치가 종식되었다. 이어서 5인의 집정관(Directoire)이 지휘하는 집단지도체제가 수립되었다.

프랑스대혁명의 중단

1795년 9월 23일 수립된 5인 집정관 체제는 구심점 없이 힘이 약해지고 재정난에 부딪혔다. 또한 왕당파를 비롯한 반혁명 세력의 도전이 거세지자 나폴레옹이 이런 분위기를 틈타서 1799년12월 13일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나폴레옹은 형식상 3인의 집정관(Consul)으로 구성된 집정체제(Consulat)를 수립하였지만, 제1집정관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1804년 5월 18일 제위에 올랐다. 이로써 프랑스 대혁명은 중단되었다.

제1제정부터 제3공화국까지

제1제정(Le Premier Empire, 1804~181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는 근대 민법전(일명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여 근대적인 행정, 사법, 교육, 군사 제도를 확립하는 한편, 피정복지에 근대적인 제도를 확산하여 프랑스 혁명정신을 구현하는데 기여하였다.

반면, 나폴레옹은 국내적으로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1804년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전 유럽으로 전쟁을 확산했다. 이에 영국을 비롯한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등이 연합하여 나폴레옹에게 대항하였지만, 전쟁에서 계속 패했다. 이로써 유럽 대륙의 대부분이 나폴레옹 제국의 직접 통치 아래 들어가거나 나폴레옹의 헤게모니 아래 복속되었다.

나폴레옹은 반 나폴레옹 연합의 주축인 영국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1805년 10월 트라팔가르(Trafalgar) 해전에서 영국에 패하였다. 또한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하여 굴복시키고자 1806년 11월 베를린(Berlin) 칙령을, 이어서 1807년 11월 밀라노(Milano)칙령을 포고하여 유럽 대륙과 영국의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렸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실패했다.

나폴레옹은 1812년 6~11월에 걸친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뒤,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영국 연합군에게 패하여 1814년 4월 퇴위하고 지중해의 엘바(Elba) 섬에 유배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재집권하였지만, 1815년 6월 워털루(Waterloo)에서 영국과 프러시아 연합군에 패하여 1815년 6월 22일 재차 퇴임하였다. 이로써 나폴레옹의 복위는 100일 천하로 끝나고 제1제정도 종료되었다.

부르봉 왕정 복고(1814~1830)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는 러시아 원정을 나갔다가 크게 패했고,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 연합군(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를 내놓고 엘바 섬(Isola d'Elba)으로 유배되었다. 이에 100일 천하 중 망명 생활을 하던 부르봉(Bourbon) 왕가의 루이 18세(Louis XVIII, 재위 1814~1824)가 파리로 돌아와 1814년 6월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부르봉 왕가가 왕정을 복고했으며, 1824년 샤를 10세(Charles X, 재위 1824~1830)가 즉위했다.

7월 왕정(1830~1848)

프랑스는 1830년 7월 혁명이 발발하여 샤를 10세(Charles X, 재위 1824~1830)가 퇴위함으로써 부르봉(Bourbon) 왕조가 몰락했다. 이후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오를레앙(Orléans: 부르봉 왕가의 방계) 왕가의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 1773~1850)가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즉위하여 왕정을 세웠다. 루이 필리프는 왕위에 즉위하기 전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 혁명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제2공화국(1848~1852)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2월 혁명’이 발발하여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가 퇴위한 후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어서 1848년 12월 나폴레옹 1세(Napoléon I)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éon)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프랑스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제2제정(1852~1870)

프랑스는 1852년 12월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éon, 나폴레옹 3세)이 황제로 즉위한 이래 산업혁명이 활발히 진행되고 문예가 진흥되었다. 또한 프랑스는 파리시의 도시계획이 정비되는 등 더욱 발전했고, 대외적으로는 크림전쟁(Crimean War)에서 승리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인도차이나와 중국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비스마르크1)에 패했다. 이로써 루이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제2제정이 종료되었다.

제3공화국(1870~1940)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 재위 1848~1852)가 몰락한 후 프랑스에서는 왕당파와 공화파가 팽팽히 대립했다. 그 과정에서 1875년까지 과도체제가 유지되었으며, 1875년 의회가 우위에 있는 대통령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100년에 걸쳐 명맥이 끊겼다가 이어졌다가 한 혁명 끝에 공화제가 정착되었다.

그런데 제정파들이 타협하여 제정한 제3공화국 헌법은 단일 법체계가 되지 못했다. 또한 권력기관들이 그 권한을 규정하는 법률과 권력기관 간 관계를 규정하는 법률을 별도로 제정하여 운영했다. 이런 이유로 법체계의 통일성이 결여되고 제정당이 난립함에 따라 불안정한 정국이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프랑스는 초기에 수세에 몰렸고, 독일군은 파리 근교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후반기에 대독일 연합군의 주축이 되어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다가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1851~1929) 원수가 1918년 11월 11일 독일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파리평화회의(Peace Conference at Paris)를 개최하는 등 전후 처리 문제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초기에 프랑스가 독일에 패하였고, 앙리 필리프 페텡(Henri Philippe Pétain) 장군이 1940년 독일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나치 점령군의 괴뢰정권인 비시(Vichy, 1940년~1944년)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장군이 수립한 망명정부가 연합국에 의해 승인됨으로써, 종전 후 프랑스는 전승국의 대열에 가담했다.

1940년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비시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프랑스의 제3공화국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제3공화국 헌법은 1945년 10월까지 법적으로 유지되었다.

근·현대

제4공화국(1946~1958)

프랑스에서는 1945년10월 21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제3공화국 헌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1945년 11월 2일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장군이 임시헌법에 따라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드골은 의회에서 절대다수 의석을 점한 좌파와의 대립으로 1946년 1월 사임했다. 이후 1946년 10월 27일 내각책임제 형태의 제4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제4공화국에서는 정당이 난립하여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알제리 사태는 수습되지 않았고 1958년 5월 알제리 주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정국은 위기에 처했다. 이에 정부가 드골 장군에게 사태 수습을 위촉하였고, 드골 장군은 알제리 사태를 수습하고 나서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드골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추진함에 따라 제4공화국이 막을 내렸다. 이후 1958년 샤를드골

제5공화국(1958~현재)

프랑스에서는 1958년 9월 28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제5공화국 헌법이 채택되고 1958년 10월 4일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어서 1959년 1월 8일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막강한 권한을 장악한 드골 대통령은 1962년 알제리에 독립을 부여하고, 같은 해 10월 28일 국민투표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한 후 1965년 12월 19일 직선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프랑스 정국은 알제리 사태가 수습된 후 안정되었지만, 1968년 대대적인 학생시위와 총파업 사태가 일어나 난국을 맞았다. 드골 대통령은 지방행정 개혁과 상원 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자 1969년 4월 28일 하야하였다. 이후 퐁피두(1969~1974), 지스카르데스탱(1974~1981), 미테랑(1981~1995), 시라크(1995~2007), 사르코지(2007~2012), 올랑드(2012~2017)에 이어 현재 마크통 대통령이 국가 원수로서 프랑스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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