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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이탈리아 여행 URL 복사

[이탈리아] 밀라노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16. 12. 22. by 솜글
이탈리아 여행을 앞두고 고민하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들입니다. 한국어 인터넷에서 모은 것들과 외국(영어 또는 이탈리아어) 사이트에서 번역해 모은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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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la città di Milano

포 강(Po River)의 지류인 티치노(Ticino)·아다(Adda) 두 하천 사이의 비옥한 평야에 자리한 도시로,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발달한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의 중심지다. 켈트 인이 모여 살기 시작한 데서 기원하며, 로마 시대에 ‘메디올라눔(Mediolánum)’이라고 불리면서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374년에 4대 교부(크리소스톰, 제롬, 어거스틴, 암브로시우스) 중 한 사람인 성(聖) 암브로시우스(Ambrosius)가 대주교가 되면서부터 북부 이탈리아의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었는데, 성 암브로시우스는 오늘날까지 밀라노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5~6세기에는 훈 족과 고트 족의 침입으로 시가지가 파괴되고, 다시 랑고바르드 족의 점령 하에 들기도 했다. 샤를마뉴의 치하에 들게 된 무렵부터 밀라노 대주교의 권력이 강대해졌고, 전란을 피하여 성벽으로 둘러싸인 밀라노로 몰려드는 인구도 늘어나면서 11세기에 들어 롬바르디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163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시가지가 파괴되었으나, 밀라노는 롬바르디아 동맹에 가담해 1176년 레냐노 싸움에서 황제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 뒤, 롬바르디아의 도시들은 다시 서로 반목하게 되고, 또 밀라노에서도 여러 세력이 분열하여 기벨린 당(黨)과 겔프 당의 분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 사이에 밀라노에서는 직물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근교 농촌에서 토지 개량도 진척되면서 롬바르디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가 됐다.
1277년에는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은 비스콘티 가(Femiglia Visconti)가 밀라노의 영주가 되어 1447년 그 집안의 남계 후손이 끊길 때까지 밀라노에 군림하였다. 이후 3년의 공화제 뒤에 비스콘티 가의 사위이자 장군이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영주가 되면서 1535년에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가기까지 스포르차 가(Femiglia Sforza)의 지배가 지속됐다. 이 기간 동안 대성당의 건축이 진척되고 운하가 개통되는 한편 브라만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을 비롯한 문인·예술가들이 이 도시에 모여들어 밀라노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 후 에스파냐·오스트리아·프랑스의 지배를 거쳤다가 1861년에 이탈리아 왕국에 통일되었다. 1714년의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까지 지속된 에스파냐 지배 시대와 나폴레옹 지배 시대(1796∼1814)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통일까지 지속된 오스트리아 지배시대에 밀라노는 경제적으로 번영하여, 롬바르디아 상인이 유럽 각지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밀라노는 이탈리아 역사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지위는 상실하고 있었다.
밀라노의 근대공업은 19세기 후반에야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전통적인 섬유공업의 바탕 위에 1880년대 알프스 산록의 수력발전을 기초로 금속공업·화학공업·기계공업 등의 중화학 공업이 발달함으로써 이탈리아 최대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공업지대는 시의 북부에서 교외로, 다시 서부·동부 교외로 발전해 이탈리아 최대의 대도시권(인구 404만)을 형성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공업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으나 특히 화학·섬유·기계공업이 두드러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시가지의 많은 부분이 폭격의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 중앙역을 중심으로 한 지대가 고층건물이 줄을 지은 오피스 가로 변모하고 지하철도 정비해 로마와는 다른 근대적인 상공업도시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

1463년 고딕 양식으로 세워진 도미니크회 수도원이다. 밀라노의 공작이자 스포르차 왕조의 일족인 루도 비코 스포르차(Ludovico Maria Sforza, 1452~1508,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의 후원자로 유명하며, 무어인과 닮은 검은 얼굴빛, 검은 머리 때문에 ‘일 모로(il Moro; 무어 인)’라는 별명으로 불림)가 1492년에 건축가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 르네상스 건축의 고전적 양식을 완성하고 많은 종교 건축을 남긴 이탈리아 건축의 대가)에게 의뢰해 설교단, 수도원, 돔 등을 개축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깔끔하고 세련된 고딕 양식의 신랑 부분과 르네상스 양식의 화려한 쿠폴라(cupola, =돔)가 대조적이다. 198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브라만테는 성당에 삼각 모양의 박공벽이 있는 창을 내고, 위쪽에는 아치가 있는 바깥 회랑을 갖춘 둥근 천장을 얹었다. 반달 모양의 후진(後陣)이 있는 성당 성소 옆에는 아치가 있는 르네상스양식의 대회랑을 설치했는데, 이 회랑은 솔라리가 만든 소회랑과 이어져 있다. 내부에 복잡한 패턴의 아치형 천장이 특징인 고딕 양식의 신도석과 가우덴초 페르라리(Gaudenzio Ferrari)의 프레스코 화가 있으며, 실내가 어두워서 1년 내내 서늘하므로 여름에 태양을 피하에도 좋은 곳이다.
이 성당이 유명세를 탄 이유는 수도원 안 식당 북쪽 벽에 그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때문이다. 당시 43세였던 다빈치가 1495년 완성한 이 작품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여기 있는 제자 중의 한 명이 나를 배반할 것”이라 예언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이 나타낸 순간적인 다양한 반응을 사실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가로 9.1m, 세로 4.2m의 초대형 작품이다.
다빈치는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당시 사용했던 기법(회벽이 마르기 전에 그 위에 색을 칠하는 기법)을 쓰는 대신, 색을 칠해 놓은 벽이 다 마른 후 다시 덧칠을 하는 정교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작품이 완성된 지 5년 후부터 훼손되기 시작했다. 다빈치는 템페라와 유화를 섞어 만든 벽화는 쉽게 변질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 후 나폴레옹 군대가 수도원을 마구간으로 쓰고 내부의 프레스코 화들을 사격 실습용으로 사용하고, 시간이 지나 실내에 습기가 많아지면서 작품이 상당히 손상되었다. 1943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폭격까지 당했지만 방벽으로 세워둔 모래주머니 덕분에 다행히 심한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1977년 이후 전문가들에 의해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고 난 후 어느 정도 원작이 복원되었다. 복원된 「최후의 만찬」은 선명한 색채와 인물들의 풍부한 표정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밀라노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최후의 만찬」은 작품 보호를 위해 입장객을 15분 간격으로 25명씩 엄격하게 제한해서 입장시킨다. 그림을 보호하는 유리문 몇 개를 지나서 안내에 따라 소그룹 단위로 입장하며, 투어는 이탈리아어로 진행되지만 헤드셋을 착용하면 번역 정보가 제공된다. 투어는 15분간 이뤄지기 때문에 식당을 거쳐 지나가면서 벽화를 살펴볼 시간이 충분하다. 3~4개월 전에 인터넷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한다.

주소 : Via Giovanni Boccaccio, 9
입장료 : 무료 / 「최후의 만찬」 투어는 8€(예약 : www.vivaticket.it)
운영시간 : 화~금 09:30-17:00, 토~일·공휴일 09:30-18:30
휴무 : 월요일, 1월 1일, 12월 25일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제1 밀라노 시대(1482∼1499년) 중 1495년에서 1497년에 걸쳐 완성한 그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날, 열두 제자와 함께 만찬을 나누었다(마태 26:20, 마르 14:17, 루가 22:14)는 매우 낯익은 주제를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이 작품의 장대한 구도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15세기 피렌체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전의 작가인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나 기를란다요(Ghirlandajo)에 의해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는 거듭 그려졌는데, 이들 작품의 구도에서는 유다 한 사람이 식탁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최후의 만찬’을 시도했다. 즉 유다까지 열두 제자의 무리 속에 포함시켜서 그 열두 제자를 세 명씩 작은 무리를 짓도록 하였다. 이것은 이전의 작가들이 ‘최후의 만찬’과 유다의 배반이라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면의 조형성에 역점을 두었다.
화면의 구도는 대단히 수학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3개의 창문, 4개의 무리를 이룬 12제자 등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네 복음서,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 등을 각각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화면 한 가운데 위치한 예수의 몸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정확한 원근법으로 짜여 있지만 감상자의 입장에 그 원근법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자리가 없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그림이 일상의 차원이 아니라 이상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기획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화면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인물, 가리옷 사람 유다는 오른손에 은전이 든 주머니를 들고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다. 왼손에는 빵 조각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가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3)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다. 바로 옆자리의 사도 요한은 온순하고 슬픔에 찬 모습이며, 유다와 사도 요한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몸을 기울이는 베드로는 그의 성급한 성격이 잘 드러난다. 카스타뇨가 유다를 긴 식탁의 앞쪽에 고립시키는 전통적인 표현을 택한 것과 달리 무리들 속에 돈주머니를 든 모습으로 표현한 다빈치의 선택은 만찬의 장면을 더욱 생동감 있게 한다.
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뛰어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독창성, 그리고 예리하면서도 정확한 형식미,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뛰어난 방식 등 이 작품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가장 뛰어난 성과로 평가된다. 1980년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최후의 만찬’ 테마의 역사

무교절 첫날, 즉 파스카 양을 잡는 날 저녁, 예수는 제자들과 어느 이층 다락방에서 파스카 음식을 나누는 만찬을 베푼다. 식사 도중 예수는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예언하며 배신자를 지목하고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성찬례를 제정한다. 네 복음서는 저마다 그 기술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모두 이 사건을 전하며, 고린도전서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곧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최후의 만찬이 일어난 시간적 배경이 유대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는 때와 동일한 절기라는 것은 어린양의 피를 희생하여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낸 사건과 예수가 피를 흘려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끄는 사건이 유형학적으로 연결된다. 즉 최후의 만찬은 단순한 식사장면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희생과 구원 사건을 기념하는 행위인 것이다.

초기 : 아가페와 오병이어에서 만찬으로

초기 기독교 시대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은 그 주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망자를 기리는 향연에서 음식을 나누는 이교도의 아가페나 오병이어의 기적 등과 이미지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3세기 초 카타콤 칼릭스투스(Catacombs of Saint Calixtus)에 그려진 프레스코에는 식탁과 그 주변에 (빵과 물고기가 가득한) 바구니가 있는데, 이 바구니들은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암시하며 반원의 식탁에 둘러앉은 인물들은 최후의 만찬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인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빵과 물고기는 이후에 나타나는 최후의 만찬 이미지에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6세기 라벤나의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S. Apollinare Nuovo)의 모자이크에는 그리스도와 12제자의 모습이 분명히 나타나는데, 식탁 위에는 물병이나 잔이 없고 대신 물고기가 나타난다. 물고기는 대홍수에서 노아의 방주에 타지 않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체이므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생선은 성직자에게 허용된 음식이고, 일반인들은 양고기를 먹는 관습이 있다고 전한다.

다양한 식탁이 연출하는 공간

600년경에 제작된 성 아우구스티누스 복음서의 삽화에는 반원형의 식탁에 성작(calix)이 등장한다. 특히 예수 왼편의 두 제자들이 성체를 들고 있어, 최후의 만찬이 성찬식과 연결됨을 암시한다. 비잔틴에서는 말발굽 모양이나 원형의 식탁을 즐겨 사용했던 반면, 로마네스크 양식에서는 긴 식탁에 일렬로 앉는 양식이 나타난다. 12세기 부르고뉴 지방의 로마네스크 교회인 생 쥘리앙 드 종지(St julien de jonzy)의 린텔 부분에 나타난 최후의 만찬은 건축적 환경을 고려하여 가로로 긴 식탁이 등장한다.
중세 이래로, 최후의 만찬은 식탁을 중심으로 예수와 제자를 배열하는 방식에 있어 크게 두 가지 양상을 보이는데, 두치오의 작품(맨 왼쪽 그림, 1311)에서처럼 식탁의 중앙에 예수와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위치하는 구도와 지오토의 「최후의 심판」(왼쪽 그림, 1306)처럼 화면의 왼쪽에 요한을 안은 예수가 있고 긴 식탁을 따라 제자들이 일렬로 자리하는 구성이다.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다

15세기에 들어서면 만찬이 열리는 실내공간과 인물배치가 더욱 안정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수도원 식당에 최후의 만찬이 즐겨 그려졌는데, 많은 이가 함께 식사하는 식당의 긴 벽을 장식하기에 수평의 긴 식탁은 매우 요긴했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식당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가진 넓은 벽을 장식하기 위해 상상의 공간을 창조한다. 창밖으로 시원한 풍경을 그리거나 아치를 이용하여 원근감이 두드러지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는 1445년~1450년 피렌체의 산 아폴로니아(Sant' Apollonia) 수녀원의 식당에 프레스코로 제작한 「최후의 만찬」에서 천장, 기둥, 식탁 등을 투시도법을 사용하여 실내공간의 깊이감을 표현하였다. 특히 배경에 사용된 벽장식용 대리석은 당시 피렌체에서 묘비에 사용하던 것과 유사한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할 뿐 아니라 수도원 생활이 자신을 버리는 죽음의 삶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역시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의 수도원 식당에 그려진 프레스코이다.
사실 이 작품은 프레스코에 능숙하지 않았던 다 빈치가 실험적으로 회벽에 젯소를 바르고 템페라를 사용한 까닭에 완성된 직후부터 안료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모습은 1999년에 복원된 것이다. 예수의 머리에 소실점을 이루는 완벽한 구성,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분명하게 나뉘면서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게 자유롭게 연결되는 사도들의 다양한 동작은 완벽한 균형을 추구했던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념에 부합된다. 무엇보다 주제의 선정에서도 독창성을 보이는데,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는 그리스도의 폭탄과도 같은 선언에 이은 제자들의 놀라움과 동요를 긴장감 넘치게 다루고 있다.

틴토레토의 혁신

1566년 틴토레토가 베네치아의 산 트로바소(San Trovaso)교회에 그린 「최후의 만찬」에서는 정사각형의 식탁이 등장하는데, 이는 매우 드문 일이다. 식탁 중앙에는 양고기가 있는데, 이는 실제 유대인들의 파스카 식탁에 양고기를 차린 것을 재현한 것이다. 또 화면 왼쪽 돈을 집는 유다 옆에 고양이를 등장시킴으로써 그의 탐욕을 암시한다.
한편 그가 1592~4년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지오레(San Giorgio Maggiore)의 챈슬 부분을 위해 제작한 「최후의 만찬」은 화면 밖으로 뻗어나갈 듯한 대각선의 식탁을 통해 바로크의 역동감을 보여준다. 틴토레토는 평생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를 즐겨 다루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만찬을 그리고자 했다. 예수는 화면 가운데 서서 마치 성체를 나누어 주듯 빵을 나누어 주고 있고, 유다는 긴 식탁의 반대편에 고립되어 있지만 시선을 끌지 못한다. 오히려 음식을 나르고 치우는 하인들의 분주한 모습, 먹을 것을 찾아 바구니를 뒤지는 고양이, 식탁 아래에서 뼈다귀를 들고 있는 개, 후광처럼 빛나는 조명이 화면을 지배한다. 이러한 표현으로 최후의 만찬이 주는 비장함이 감돌기 보다는, 오히려 부산함이 느껴진다. 빛의 시각화와 무한히 팽창하는 공간, 그리고 연극적으로 사용된 원근법을 통해 틴토레토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한 것은 현실과 환상의 결합, 즉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상과 천상의 결합인 것이다.

스포르체스코 성 Castello Sforzesco

본래 통치자였던 비스콘티 가문의 소유로 밀라노 성벽 맞은편에 지어진 방어 요새였는데, 도시를 요새화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었기 때문에 비스콘티 가문이 대를 이어갈 때마다 증축하는 바람에 계속 크기가 늘어났다. 마지막 비스콘티 사람인 필리포 마리아(Filippo Maria Visconti, 1392~1447)는 이 성을 저택으로 탈바꿈시킨 후 거기서 살다가 1447년 외로이 죽음을 맞았다. 당시 밀라노 시민들은 비스콘티 가문이 휘두르던 폭정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기 때문에 필리포 마리아가 죽은 후 암브로시아 공화국(Repubblica Ambrosiana)을 세우고 구할 수 있는 무기란 무기는 다 들고 성벽을 무너뜨려 버렸다. 성의 남은 돌은 빚을 갚고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다시 짓는 데 쓰였다.
필리포 마리아의 유일한 혈육인 외동딸 비앙카 마리아의 남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 1401~1466)는 이웃의 베네치아에 대비해 밀라노 공국을 방어하기 위한 용병이었다. 정치적으로 기회주의자였던 스포르차는 필리포 마리아가 죽은 지 3년 후 탐욕스러운 이웃 세력을 상대로 도시와 공화국을 지켰다. 그 후 이러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 1450년 3월 아내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는 밀라노의 아름다움과 권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삼겠다는 생각 아래 군사 기술자와 피렌체의 건축가 안토니오 아베룰리노를 고용해 성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재건축 과정에서 브라만테,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이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5세기 말이 되자 성은 오랜 침체기에 들어섰다. 이후 방치되다 못해 곳곳이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으나, 1800년대 후반에 복원되어 밀라노 시의 예술 작품들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근대 성채의 전형이라고 일컬어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그 후 개축한 것이다. 성 안에는 고미술박물관(Museo d'Arte Antica)이 있다. 기원전 선사시대 유물부터 이집트, 고대 로마, 중세,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작품이 진열되어 있는데 레오나르도의 천장 프레스코 화, 필리포 리피의 그림 등도 만날 수 있다. 최고 걸작은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라는 미완의 대리석상이다.

「론다니니의 피에타」(1565)

‘죽은 예수와 이를 애통해하는 성모’라는 주제의 ‘피에타(pieta)’는 중세 이후 기독교 문화의 예술가들에게는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이었다. 장인들의 손을 통해 이 주제는 때로는 극도의 슬픔으로, 혹은 슬픔을 초극한 신성의 상징으로, 때로는 세족적인 우화로 또 때로는 경건한 신앙의 대상으로 새롭게 번안되어 왔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주도한 불세출의 조각가이자 화가,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Micheloangelo Buonarroti, 1475~1564)에게 역시 ‘피에타’는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되는 일종의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거의 일 세기에 달하는 생애를 통해 여러 점의 ‘피에타’를 제작했으며 그에게 최초로 로마에서의 세속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던 작품이나 파란과 곡절로 점철된 삶을 마감하기 며칠 전까지도 정과 끌을 놓지 못하고 매달렸던 최후의 작품 역시 ‘피에타’였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미켈란젤로는 어지러운 시대를 살며 감내해야만 했던 한 천재의 인간적인 고독과 회한 그리고 영광의 상념들을 이 주제를 빌어 호소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미켈란젤로의 제자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ra)가 1562년 2월 12일에 쓴 편지글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피에타를 제작하기 위해 대리석을 다듬었다고 한다. 높이가 1m 92㎝에 달하는 이 피에타에 ‘론다니니’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훗날인 1744년 론다니니 가(家)가 이 작품을 구매했기 때문이다. 초벌작업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조각을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 멈춰진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거칠게 남아있는 끌 자국 하나하나에서 거장의 숨결이 느껴질 듯한 특별한 감흥을 준다.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성모의 무릎 위에 누워있는 예수라는 전통적인 도상을 완전히 무시한 채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분노할 듯한 자세의 예수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를 말리고 달래는 것 같은 성모를 수직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거침없이 파 들어가는 그의 끌과 망치는 이미 이 같은 자세가 과연 가능한지, 해부학적으로는 정확한지, 또는 성서 중 어느 대목의 모습인지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은 그다지 고려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다만 이 모자는 숙명처럼 짊어지게 될 나머지 돌조각들의 무게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힘겹게 뒤척이고 있을 뿐이며, 굳이 그 종교적인 주제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그 모습은 자체로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류의 모습이자 천재이기 이전에 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던 미켈란젤로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신의 손길인 듯 완벽하게 마무리된 청년 미켈란젤로의 1499년작 「피에타」에서 성스럽게 재현된 종교적 슬픔의 정화를 체험할 수 있다면, 미완성으로 남겨진 「론다니니의 피에타」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모순된 운명을 격렬하게 직시하는 늙은 천재가 건네는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받게 된다.

주소 : Castle Curator Piazza Castello, 3
입장료 : 8€(성 입장은 무료)
운영시간 : 화~일 09:00-17:30 / 휴무 : 월요일

밀라노 대성당 Duomo di Milano

독일의 쾰른 대성당과 함께 세계 최고(最古)의 고딕 건물이자 미술사적으로는 가장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알려지고 있다.
시민들은 이 대성당을 ‘밀라노의 혼’이라고 부른다. 북 이탈리아와 스위스 국경 접경 지역에서 생산되는 흰 대리석을 주재료로 지은 이 건축물은 1386년 밀라노의 영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의견에 따라 대주교 안토니오 디 사루초가 기공한 후 장장 500년이 지난 1890년에 이르러서야 준공했고 부대 공사까지 모두 완료된 것은 1951년이다. 프랑스나 독일의 대성당에 필적할 만한 것을 조영하기 위해 본국 외에 독일과 프랑스의 건축가를 참가시켰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성당 건축 가운데 알프스 이북의 고딕적 요소가 가장 짙다. 5랑식 본당, 3랑식 익랑, 주보랑이 달린 본전(本殿)으로 되어 있으며, 천장은 측랑에서 신랑에 걸쳐 계단 모양으로 높아지는 형태다. 높이 157m, 폭 66m, 장랑 길이 92m로 고딕 양식의 진수를 보여주며 외부 벽면은 명인들이 조각한 3,159체의 조각으로 장식돼 있다. 축구 경기장의 1.5배 넓이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 다음으로 가톨릭 대성당으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 다섯 개의 아일이 입구에서 제단까지 이어지고, 거대한 석조 기둥이 네이브를 지배하는 실내는 4만 명의 방문객을 수용할 수 있다.
하늘을 찌르는 135개의 탑 하나하나의 정상에 성인의 상이 장식되어 있고, 그 중심인 109m의 탑에는 ‘작은 성모’라는 뜻의 ‘마돈니나(Madonnina)’ 상이 3,900장의 금박으로 덮여 있다. 그 황금빛 찬란한 곳 아랫부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고 전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첨탑에는 당시 사람들의 하나님을 섬기고 가까이 가려는 소망이 담겨 있다.
정면 입구의 청동문은 17세기 파비오 멘고니가 만든 걸작이고, 안에 들어가면 유럽 교회로서는 비교적 폭이 넓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광선에 크리스토퍼 소라리의 작품 「성상(聖像)」이 떠오르는 듯한 장엄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외부의 다채로움에 비해 내부에 장식이 거의 없어 오히려 소박한 모습이 경건함을 더해준다. 뒤쪽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고, 지붕 위를 거닐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물이나 음식물은 반입할 수 없다.

주소 : Piazza del Duomo, Milano
운영시간 : 매일 08:00-19:00
입장료 : 테라스 13€(전망대)(계단으로 올라가면 8€), 통합권 15€(박물관+지하유적지+테라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Galleria Vittorio Emanuele II

두오모 북쪽에 있는 명품 거리이다. 갈레리아란 일종의 아케이드로 ‘거리의 거리’라고 할 수 있다. 1877년에 멘고니가 설계한 이 건물은 이탈리아의 갈레리아 중 가장 큰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 거리로 알려져 있으며 1913년 문을 연 프라다 본점, 유명한 레스토랑들이 있다.
1860년, 밀라노 정부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라스칼라 극장 사이의 역사 지구에 새로운 관광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주세페 멘고니(Mengoni)가 설계한 대규모 쇼핑몰 건설을 승인했다. 멘고니가 제안한 디자인은 파리와 빈 등의 유명 쇼핑몰 디자인에 거대한 스케일을 접목한 것으로, 대성당과 극장을 연결하는 대규모 쇼핑 아케이드였다. 건설은 1865년에 시작됐으며, 1200년 만에 이탈리아를 통일한 당시 국왕의 이름을 빌려 ‘비토리오 에마누엘라 2세 갈레리아’라고 이름 지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건축비 때문에 밀라노 주민들이 반대하기도 했지만 공사는 문제없이 진행됐고, 개장 후에도 입구에 세운 개선문이 완공되기까지 10년이 더 걸렸다. 그런데 완공을 하루 앞둔 1877년 12월 30일에 멘고니가 개선문 꼭대기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죽음과 맞바꾼 그의 노력은 다행히 헛되이 묻히지 않아 갈레리아는 곧 도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으며 ‘밀라노의 거실’로 칭송받았다. 아케이드는 매일 늦은 밤까지 쇼핑객과 연인, 여행자들로 가득했고, 방문객이 늘어나면서 명품 숍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밀라노의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갈레리아도 전쟁의 위협에선 벗어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밀라노에 있었던 대규모 폭격으로 아케이드 중심부의 센트럴 옥타곤 건물 일부가 처참하게 손상된 것이다. 다행히 피해가 크진 않아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문을 열었고, 손상된 부분은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채 그대로 유지됐다. 그 후 수많은 예술가와 기관이 나서 갈레리아의 복구를 시도했지만, 예산 부족과 정부의 미지근한 반응 때문에 번번이 무산됐다. 설상가상으로 갈레리아 자체의 관리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 센트럴 옥타곤 외의 건물도 점점 상태가 악화돼 갔다.
그러다 2014년, 밀라노의 세계적 패션 브랜드 프라다와 베르사체가 지원자로 나서 마침내 갈레리아의 복구 작업이 시작됐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예술 감독인 수브린텐덴자 알레벨르 아르티가 복원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나섰으며, 복원 전문 업체 가스파롤리가 작업을 담당해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총 13개월 동안 매일 아침 복원 전문 장인 13명이 4층 건물에 올라가 붓과 클리너로 조심스럽게 먼지를 닦아냈고, 저녁엔 4명의 장인이 교대해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손상됐던 유리 창문과 스테인드글라스, 대리석 장식 등이 150년 전 모습 그대로 복구되었다. 오랜 시간 변색된 채 방치된 건물 벽과 철 구조물도 제 모습을 되찾아갔다.
복원은 이처럼 세심한 작업을 거쳐 2015년 4월까지 진행됐고 그 결과 총 1만 4천㎡에 달하는 공간이 복구됐다. 이로써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는 주세페 멘고니가 디자인한 형태 그대로 과거의 영광을 되찾게 되었다.

황소 모자이크

갈레리아의 중앙 부분에는 옛 이탈리아의 네 국가 (토리노, 피렌체, 로마, 밀라노)의 문장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있다. 이 중 토리노 공국 문장을 상징하는 황소 모양 모자이크에서 황소 고환 부분에 발 뒤꿈치를 대고 세 번 돌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전한다. 이 부분은 바로 갈레리아를 건축하던 멘고니가 추락사한 지점으로, 이곳을 세 번 돎으로써 방문자들에게 그러한 사고를 예방해 준다고 믿는 것이다. 일종의 액땜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 많은 이들이 이곳을 돈 탓에 구멍이 나 있다.

리코르디 출판 본점 Ricordi Media Store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 갈레리아 중앙에서 동쪽으로 나가면 베르케트 가의 코너에 리코르디 본점이 있다. 리코르디는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 관해서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세계적인 악보 출판사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출신 사보(寫譜)업자였던 조반니 리코르디(Giovanni Ricordi, 1785~1853)가 독일에서 제판 기술을 배워와 1808년 로시니와 베르디의 악보를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세계적 악보 출판사로 발전하게 된다. 1842년에는 이탈리아 최초의 음악 관련 정기간행물인 음악 평론지 밀라노 음악신문을 창간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악보와 악기 외에 라 스칼라 가극장과 계약해서 ‘리코르디’란 레이블로 음반도 제작하고 있다. 베르디와 푸치니를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이 이 출판사로부터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살로모네 가 77번지에는 많은 오페라 판권을 갖고 있는 문서관이 있는데 작곡가들의 자필 원고 등을 4천여 점 소장하고 있다. 18~19세기의 오페라 악보, 베르디의 자필 악보, 푸치니에 관한 자료가 대단히 많다. 문서관 방문은 연구자에 한해 예약 후 허용된다.

스피가 거리 Via Della Spiga, 몬테 나폴리오네 거리 Via Della Monte Napoleone

패션의 천국인 밀라노에서도 패션의 중심지인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에는 명품 숍이 즐비하다. 지하철 3호선 몬테 나폴레오네 역에서 지하철 1호선 산 바빌라 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세련된 감각을 갖추고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연출하고 있어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패션의 중심지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와 나란히 있는 신흥 명품 거리인 스피카 거리에는 최첨단 브랜드와 캐주얼 브랜드가 모여 있다. 조르조 아르마니, 에르메스, 돌체&가바나, 베네통 등의 브랜드 매장이 들어서 있다.
산탄드레아 거리(Via Della Sant'Andrea)는 스피가 거리와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를 연결하는 거리로 샤넬과 같은 대형 브랜드 매장을 볼 수 있다. 마리사, 반넬 같은 독특한 셀렉트 숍 매장도 위치한다.

스칼라 극장 Teatro alla Scala

1776년, 화재로 밀라노의 주요 극장이었던 테아트로 두칼레가 소실되었다. 극장 지분을 갖고 있던 이들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고 있던 밀라노의 수장에게 새로운 극장을 지어 달라는 청원을 올렸고, 마침내 훨씬 더 웅장한 극장을 지으라는 명이 내려졌다. 새 건물은 1778년 개관했으며, 이 건물을 지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축성을 거두어들이고 철거했던 산타 마리아 스칼라 교회의 이름을 따 스칼라 극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건물을 짓는 비용은 부유한 밀라노 시민들에게 거둬들인 개인 오페라 박스석, 즉 ‘팔치’ 가격으로 충당되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예전 극장에서도 박스를 소유하고 있었다.
건축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널따란 광장을 향해 지어진 훌륭한 파사드가 특징적이다. 대강당은 3천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메인 플로어(플라테아)에서는 청중들이 서서 공연을 관람했으며, 그 위쪽으로 부유한 후원자들 전용으로 각기 화려하게 꾸며진 박스석이 있었다. 이 박스석 위에는 가장 열렬한 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널따란 갤러리(로지오네)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공연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며 소리 높은 야유가 재빠르게 터져 나오곤 했다.
라 스칼라는 상류 사회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그러나 이 극장의 자랑거리는 항상 위대한 음악가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를 상연하는 장소였다는 점이었다. 라 스칼라는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을 뿐 아니라, 여러 차례 다툼이 있기도 했지만 베르디의 작품도 많이 상연했다. 20세기 초에는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나비 부인」과 「투란도트」 등 푸치니의 작품을 라 스칼라에서 초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폭격으로 손상되기는 했으나, 새로이 단장한 이 오페라 하우스는 당대의 일류 작곡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베리오와 스토크하우젠 등 아방가르드 음악가의 작품을 상연하기도 했다. 스칼라 극장의 음향 설비는 여러 오페라 하우스 설계자들에게 모델이 되어 왔다.

주소 : Via Filodrammatici, 2

나빌리오 운하 Naviglio Grande

밀라노 대성당을 건축할 당시에 대량의 대리석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운하다. 운하 근처에는 오래된 민가, 서민 동네의 모습이 남아 있다. 최근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공방,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과 바가 들어서 인기를 끌고 있으며 독특한 디자인의 물건을 쇼핑할 수도 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는 밀라노 특유의 아페리티보(Aperitivo), 즉 해피 아워(Happy Hour)라는 식문화가 있어 저녁이면 저렴하고 술과 뷔페를 즐길 수 있다. 아페리티보란 본래 식전에 마시는 술을 의미하는데, 밀라노에서는 해피 아워의 개념으로 사용된다. 대체로 오후 6시경부터 시작해 7~12유로 정도면 음료와 함께 뷔페를 무한정 이용할 수 있다. 뷔페는 샐러드, 파스타, 폴렌타, 스시 등 종류가 다양한데 특별히 음식 품질이 좋은 편은 아니나 술과 경치, 저렴한 가격 덕분에 충분히 만족할 만한 저녁을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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