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TV를 거의 보지 않지만ㅡ사실 현재는 아예 안 본다고 할 수 있지만ㅡ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단연 시트콤이다. 종종 웃음을 주는 것도 좋고, 길이가 짧아서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것도 좋고, 몇 회쯤 걸러도 다음 회를 볼 때 지장이 없다는 점도 좋다. 무엇보다도, 내가 시트콤을 좋아하는 월등한 이유는 등장인물들에게 한결같이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시트콤의 등장인물들, 정말 '모두' 결함을 가지고 있을까
TV 속 극은 연출된 것인데 정말 '모두'가 결함을 갖고 있을까? 한 사람쯤은 로맨스 드라마의 완전무결한 남자 주인공 같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내가 본 모든 시트콤 속 인물들은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결함을 갖고 있었다. ‘똑바로 살아라’ 속 박영규도,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도, ‘순풍산부인과’의 박미선도, ‘세친구’ 속 정웅인도, 모두 무언가 콤플렉스를 갖고 살아간다. 해외도 마찬가지, 시트콤의 고전이라는 ‘Friends’의 레이첼이나 조이, ‘Big Bang Theory’의 쉘든과 페니도 모두 결함을 띠었다.
결함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진짜배기 일상
TV 드라마에서 조연 몇몇에게나 있을 만한 '결함'들이, 시트콤에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에게서 보인다. 게다가 개개의 결함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 결함들이 매회 다른 에피소드를 만들어낼 만큼 아주 적나라하다.
사실 우리는 흠을 드러내기 꺼리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그렇지 않겠냐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동양 문화에서는 특히나 그런 면이 강하다. 이런 경향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어차피 모두가 결함을 갖고 태어나 결함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으니 굳이 그것을 남 앞에서 보이거나 콕 짚어낼 필요가 있을까,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ㅡ 하는 면에서는 굉장히 생산적인 문화이다. 사람 고쳐 쓰는 법 아니라는데, 쓸데없는 지적으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는 건 비효율적이니 말이다. 반면 서로의 나쁜 점들을 쉬쉬 감추는 데 익숙해지면 자신의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기도 한다. 모르니 고칠 수도 없다. 서양권에서는 '사과' 문화가 발달한 데에는 남의 결점을 비교적 쉽게 지적하는 문화의 영향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렇듯 나의 단점을 돌아보기 어려운 사회 문화에서 살아가면서, 나는 시트콤 속 인물이 보여주는 각각의 결함을 통해 스스로의 문제점을 발견한다. 그들이 체면에 맞지 않은 치사한 복수를 몰래 할 때, 돈 한 푼에 절절 매고 아까워 할 때, 남자에게 차이고 우울해 할 때, 미신 때문에 이상한 행동을 할 때, 부모의 눈을 속일 때, 회사에서 상사에게 비웃음을 살 때. 이루 다 늘어놓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상황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그것도 한 명의 등장인물이 아닌, 거의 모든 인물들에게서 조금씩 나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내 결점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게 고쳐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다른 사람의 흠 집어내길 꺼리는 문화 속에 사는 내게, 시트콤은 남들이 해 주지 않는 ‘내 결점 드러내기’를 제공한다. 그뿐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사건 사고들 속에서ㅡ혹은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이 없더라도ㅡ매회 나의 이런 점 저런 점을 발견하게 해 준다는 점, 그것이 시트콤 속 인물들의 ‘결함’에서 온다는 점.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장점 역시 함께 보여주어 좋은 점을 통해 더불어 사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 이런 특징을 근대 리얼리즘에서는 ‘전망의 제시’라고 했다. 소설, 희곡 등 플롯을 갖춘 정통 문학이 부재한 이 시대에, 시트콤은 제대로 된 사실주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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