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노트/독일 여행 URL 복사

[독일] 뮌헨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21. 12. 26. by 솜글

뮌헨(München)

바이에른 알프스 산지 가까이 이자르 강에 면하며, 베네딕투스회(會)를 기원으로 하는 도시이다. 1157년 바이에른 공작이던 하인리히 사자(Heinrich der Löwe) 공이 수도사들에게 잘츠부르크로에서 이자르강까지 이르는 곳에 시장을 개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여 이자르 강을 건너는 다리가 건설되고 시장 주위로 성이 구축되면서 뮌헨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1180년 바이에른 공국을 계승한 비텔스바흐 가문(Haus Wittelsbach)에서는 1255년 뮌헨을 도읍으로 삼는데, 14세기에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루트비히 4세(Ludwig IV)에 의해 도시 규모가 크게 확장되고 14세기 말~15세기 초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치하에서 경제가 발전했다. 30년 전쟁(1618∼1648) 중 1632년에는 구스타브 2세 휘하의 스웨덴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했고, 1634년에는 전염병 페스트가 창궐해 인구의 1/3이 사망하기도 했다.

루트비히 1세

오늘날의 뮌헨을 탄생시킨 것은 1825~1848년 재위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Ludwig I)이다. 그가 건축가들로 하여금 공공 건축물을 통해 뮌헨의 특징적인 모습을 확립하면서 뮌헨은 19세기에 크게 성장하고 발전했다. 신교도들도 로마가톨릭의 도시였던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민권을 획득했다. 1854년 10만 명에 불과했던 인구는 1900년에 이르러 5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루트비히 2세가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를 후원하면서 음악과 무대의 도시라는 명성도 얻었다.

루트비히 1세

비텔스바흐 왕조의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루트비히 3세가 퇴위함으로써 막을 내렸는데, 그 후 뮌헨은 우익 정당들의 온상이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나치스 당에 가담해 그 지도자가 된 곳도 뮌헨이다. 1923년 바이에른 당국에 저항해 폭동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던 장소인 맥주 창고가 아직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절반 가까운 건축물이 파괴되었다. 

현대에 들어 구시가가 점차 기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면서, 뮌헨은 과거의 특징을 많이 상실했다. 7개의 성문 중 아직도 남아 있는 카를스, 젠들링거, 이자어 문은 모두 14세기에 세워진 것이다.

비텔스바흐 가문(Haus Wittelsbach)

뮌헨 레지덴츠의 주인인 비텔스바흐 가문은 바이에른 지역에서 왕을 배출한 독일 명문가이다. 11세기 남독일 지방의 바벤베르크 가문(Haus Babenberger)의 분가로 시작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본가인 바벤베르크 가문은 프랑스의 카페 왕조(Capétiens), 발루아 왕조(La maison de Valois), 부르봉 왕조(Maison de Bourbon)와 조상이 같다.

프리드리히 1세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1122~1190)가 팔츠 백작인 비텔스바흐 가의 오토(Otto)에게 바이에른 지역을 증여받은 후부터 본격적으로 비텔스바흐 왕가가 시작되어 20세기 초까지 바이에른을 통치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기도 했고, 그리스가 독립할 때 런던 회의에서 루트비히 1세의 차남인 오톤(Otto, 1815~1867)을 그리스의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그리스 국왕도 배출했다. 비텔스바흐의 바이에른 왕국은 1918년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막을 내렸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정신병

비텔스바흐 가문은 미남 미녀가 많기도 유병하다. 그러나 근친혼을 거듭했던 여느 유럽 왕가가 그렇듯, 비텔스바흐 가문에도 유전병이 있었는데, 특히 우울증이나 광증과 같은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 많았다.

예컨대 루트비히 2(Ludwig II, 1845~1886)는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며 자신을 달의 왕이라 칭하고는 했고, 재위 말기에는 정신병을 이유로 강제 퇴위 당하기도 했다. 그의 숙모인 알렉산드라 공주(Alexandra, 1826~1875)는 결벽증이 있어 흰옷을 고집하고 자신이 유리로 만든 피아노를 삼켰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정신병과 미모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시씨(Sisi)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엘리자베트 황후(Elisabeth, 1837~1898)이다그녀는 외모에 집착해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과 172cm 키에 40kg대 몸무게를 고집했으며 온갖 기상천외한 다이어트 방법들을 동원했다칼에 찔려 암살당했을 때 코르셋의 압박 때문에 자신이 칼에 찔렸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엘리자베트 황후

[참고] 서양식 등작의 위계

황제 ▶ 국왕 ▶ 왕위계승자(황태자·왕세자·대공) ▶ 왕자·왕녀 ▶ 공작(독일) ▶ 친왕·공작(동유럽)·후작(독일) ▶ 백작·성주 ▶ 자작·주교대리(프랑스) ▶ 남작 ▶ 기사 ▶ 향사(영국)·훈사(독일) ▶ 신사(영국)

님펜부르크 궁(Nymphenburg)

바이에른 왕국의 통치자였던 비텔스바흐 가문의 여름 별궁으로 처음 지어졌다. 바이에른의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 부부가 아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이 태어난 것을 기념해 이탈리아식으로 저택 한 채를 지은 것이 시초인데, 당시에는 교회와 여러 별채, 그리고 작은 벽으로 둘러싸인 기하학적 정원이 있는 거대한 입방체 모양이었다.

18세기 초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이 중앙 5층 저택 주변에 4개의 파빌리온을 더 짓고 여러 채의 아케이드로 중앙 저택과 연결하면서 점차 궁전으로 개조했다. 본궁인 레지덴츠 궁전은 비텔스바흐 왕가의 대표적인 궁전이다. 님펜부르크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요정 님프(Nymph)에서 유래했다. 궁전의 그레이트홀 천정화, 여신의 그림에 그 모티프를 따왔다.

님펜부르크는 오랫동안 바바리아의 통치자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 거주지였다. 특히 궁전보다도 정원으로 유명한데 호수와 호수를 운하로 연결하고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1715년경 궁정 건축가 조셉 에프너(Joseph Effner)와 프랑스 조경가 도미니크 지라드(Dominique Girard)는 궁전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을 수립한다. 가장 중요한것은 앙상블 중심의 중앙관을 재설계하고 왕실 파빌리온의 재단장이었다. 중요 궁전 앞 별관도 재건축했다 .궁전 근무자들의 주택과 별채를 다섯 쌍의 파빌리온으로 건축하고, 시각적으로 상쇄된 구조가 융합되여 왕실을 보호하는 완전히 대칭적인 이상적 건물 구조로 재탄생하였다.

근처에 있는 왕궁 마구간에서는 역사적인 마차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 중에는 1742년의 파리 대관식 마차, 루트비히 2세가 바이에른의 자신의 성들을 한밤중에 오갈 때 사용했던 마차와 썰매들이 있다. 궁정 안뜰에는 도자기 공장이 세워졌고 박물관에서는 훌륭한 도자기 제품들을 볼 수 있다. 님펜부르크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조경된 숲에는 사냥 별장(아말리엔부르크), 장식이 화려한 파고다, 눈부신 수영용 파빌리온, 그리고 기도와 조용한 묵상의 장소로 특별히 지어진 예배당 ‘막달레넨 클라우제’가 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Das Konzentrationslager (KZ) Dachau)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모든 죄수들이 이 글귀가 쓰인 문을 지나 걸어갔다.

1933년 6월, 나치 강제 수용소 중 독일에 최초로 개설된 정식 수용소이자 제3제국 수용소 중 가장 오래 운영된 곳이다. 당시 뮌헨 지역 경찰청장은 이 수용소가 ‘정치범 수용을 위한 최초의 강제 수용소’라고 설명한 바 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뒤이은 다른 강제 수용소들의 모델이 되었다. 수용소 운영조직, 형태, 건축 등이 모든 후대 수용소에 적용됐다. 크게 보면 거주 구역, 관리 시설, 경비대 기지로 구성했다.

이 표지판은 죄수들이 서까래에서 교수형을 당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시체 소각실은 시체들을 화장했다.

다하우에는 30개국 이상 20만여 명의 죄수들이 수감됐고 그중 1/3 이상이 유대인이었다. 기독교 계통 성직자들도 반나치 혐의를 받아 많이 수감됐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3,000여명의 수도사, 부제, 목사, 주교 등이 수감되었다고 한다.

소각장 건물 밖에 세워진 표지판. 독일어로 "우리가 어떻게 죽었는지 생각해보라"라고 쓰여져 있다.

이곳에서 25,613명, 보조수용소에서 거의 1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인은 질병, 영양실조, 자살 등 다양했다. 특히 1945년 초 티푸스 전염병이 창궐하자 몸이 약한 죄수가 많이 죽었다.

더 큰 규모인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함께,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치 강제 수용소의 상징이 되었다. 영국 또는 미국 군대가 이곳을 해방시킨 후 뉴스, 영화, 언론보도 등으로 나치즘의 잔인함을 최초로 고발한 장소 중 하나여서 대중들에게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었다. 

1945년 죄수 막사

수용소 조직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수용소 구역과 화장터로 구성돼 있었다. 수용소 구역에는 32개의 막사가 있고 옥사와 조리장 사이에 있는 안뜰은 즉결 처형장으로 썼다. 수용소는 전기 철조망 출입구, 배수로와 7개의 감시탑이 포함된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44년 8월에는 여성 수용소가 설치됐는데, 첫 번째 여성 수감자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이송되었다.

세계대전의 종전

종전이 임박한 1945년 4월, 연합군이 독일로 진격해오자 독일인들은 전선 근처의 강제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후방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한다. 그래서 비교적 후방인 다하우에는 엄청난 수의 수감자들이 줄줄이 도착했다. 그러나 곧 음식과 물이 부족해졌고, 1944년말부터 종전까지 몇 달 간 죽은 수감자 15,000여 명 중 절반이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한다.

미군의 다하우 학살

독일군이 연합군에 항복한 1945년 4월 29일, 수용소장이 미국군에 항복하고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넘겼다. 미군은 20개의 죄수 막사에 1,600명씩 나뉘어 수용된 32,000여명을 발견했는데, 본래 그 막사는 1개당 250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미군들이 찾아낸 약 40량의 각 열차마다 100구 이상의 시체가 가득했다고 한다.

미군 병사들은 수용소의 참상에 분개했고 그들 중 몇 명이 소위 ‘다하우 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미군은 총살된 독일군 경비병이 30여 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이후 조사에서 적어도 122명, 많으면 520명의 경비병이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에 처형되는 나치 대원들

유명한 수감자들

  • 블라덱 슈피겔만(Vladek Spiegelman) : 1978년 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을 아들인 아트 슈피겔만에게 들려주었는데, 아들이 이를 녹취해 만화 <쥐>를 집필하고 이를 통해 1992년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 프랑크 카로(Franc Karo), 파르티잔
  • 게오르그 엘저(Georg Elser) : 1939년에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사람으로 1945년 4월 9일에 살해되었다.
  • 조르주 샤르파크(Georges Charpak) :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물리학자로 199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다.

관람 순서

정문으로 들어와 박물관→벙커→막사→추모관→카르멜수녀원→소각장 순으로 돌아보면 된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박물관→막사→소각장 순으로 둘러보자.

솜글이 제작한 도식입니다

박물관

큰 ㄷ자 모양의 1층 건물이다. 원래는 수용소를 관리하던 나치 친위대가 머물던 관리동(Ehemaliges Wirtschaftsgebäude) 건물인데, 현재는 내부를 모두 들어내고 전시장과 상영관을 만들었다.

정문에 가까이 있는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면 전시물을 순서대로 볼 수 있다. 대부분 당시의 사진과 그림에 자세한 설명을 영어와 독일어로 곁들인 것이고 죄수복이나 도구 등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수감되었는지, 수감자에게 어떻게 노동을 시켰는지, 그들을 어떻게 통제하고 체벌하고 고문했는지, 무엇을 먹이고 어떻게 재웠는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든 자료가 존재한다. 대량 학살, 생체실험 등의 영상을 매일 시간을 정해 무료 상영한다.

가이드 투어를 신청하면 전문 가이드가 관광객을 인솔하며 상세한 설명을 더해 준다. 오픈된 공간에서 투어를 하기 때문에 굳이 투어를 신청하지 않아도 무리에 섞여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벙커(Bunker)

박물관에 이웃한 벙커는 옛 죄수 감옥(Ehemaliges Lagergefängnis)이었던 곳이다. 양쪽에 일렬로 좁은 방이 늘어선 일자형의 긴 건물이다. 죄수들이 수감됐던 감방과 내부 일부를 공개해 당시 투옥된 사람들의 인적사항과 투옥 사유 등을 전시한다. 나치 친위대 담당자들의 신상도 공개되어 있다.

막사(Baracke)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수감자들이 숙식을 생활하던 막사이다. 마치 군대의 내무반을 연상시키듯, 좁은 취침공간과 열악한 화장실 등이 고작인 이 곳에서 수많은 수감자들이 숙식을 해결했다.

막사는 2열로 총 34개가 있었는데, 그 중 2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거해서 32개는 터만 남아 있다. 당시 수감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생활했는지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2개의 막사 건물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막사는 한 곳당 250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되었으나 실제로는 1,600여명이 수용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앉을 공간도 없는 낮고 좁은 3층 침대의 한 칸에서 여러 명이 자야 했다. 

추모관

다하우에서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종교인도 많았다. 목사나 신부가 나치에 반대하는 설교나 운동을 벌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강제 수용소의 한 쪽 끝에는 카톨릭, 개신교, 유대교에서 각각 만든 추모관이 있다. 모두 '예배당'의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추모관의 성격이 강하다. 

세 곳의 추모관이 나란히 있는데, 중앙의 원통형이 카톨릭 예배당, 그 옆 십자가 뒤의 나즈막한 건물이 개신교 예배당, 반대쪽의 지하벙커 입구처럼 생긴 건물이 유대인 추모관이다.

소각장(Krematoriumsbereich)

매일 쏟아져나오는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수용소 한 쪽 구석에 소각장을 만들었다. 소각장 구역에 가면 당시 시체를 태우던 소각로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 유명한 가스실도 남아 있다. 나치는 유대인을 일일이 총살하기에 총알이 아깝다고 여겨,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손쉽게 죽이기 위해 가스실을 만들었다. 

가스실 입구에는 '샤워실(Brausebad)'이라고 적혀 있는데, 몸을 씻으라고 거짓말을 하며 수감자들을 가스실로 들여보냈기 때문이다. 의심할 수 없도록 비누까지 쥐여 들여보냈다고 한다. 가스실 가동이 끝나면 뒤편의 반대쪽 문으로 시체들를 꺼내 맞은편 소각장에서 태워 버렸다. 소각장 앞에 남아있는 자료 사진은 그 당시 실존했던 ‘시체의 산’을 보여주고 있다.

카르멜 수녀원(Kloster Karmel)

한 쪽 끝 담벽 너머로 연결되는 카르멜 수녀원은 ‘성혈(Heilig Blut)’이라는 별칭을 함께 가지고 있다. 매우 엄숙한 분위기이다.

다하우 궁전(Schloss Dachau)

원래 요새의 목적으로 지어진 성이었으나 요새를 만들었던 다하우의 마지막 백작 콘라드 3세(Konrad III)가 상속인 없이 사망하자 비텔스바흐(Wittelsbach)의 공작 오토 1세(Otto I)가 이 곳을 점령하고 재산을 가로챈 뒤 훗날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현재는 전시회장과 음악회장으로 사용되며, 궁전의 내부 일부는 유료 개방 중이다. 이 곳에서 열리는 음악축제가 특히 유명하다고 한다. 궁전 뒤편으로 잘 가꾸어진 궁정 정원(Hofgarten)이 있다.

호프가르텐(Hofgarten)

호프가르텐(Hofgarten), 즉 왕궁 정원은 뮌헨 레지덴츠에 딸린 정원이다. 1617년 바이에른 공국의 대공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가 만든 르네상스 정원이다.

오데온 광장(Odeonplatz) 앞에 무료로 개방되어 있어 시민들의 최고의 쉼터 역할을 한다.

뮌헨 레지덴츠(Residenz München)

바이에른 왕국 비텔스바흐(Wittelsbach) 왕조의 본궁이다(별궁은 인근에 있는 님펜부르크 궁전(Schloss Nymphenburg)이다). 막스요제프 광장(Max-Joseph-Platz)을 마주보고 서 있다.

1385년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해자에 둘러싸여 작고 보잘것없는 성이었다고 한다. 이후 수 세기를 거치는 동안 증축을 거듭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19세기 루트비히 1세 무렵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을 보았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이후 복원 작업을 진행해 독일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궁전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뮌헨 레지덴츠는 각각의 왕들이 모은 보물과 예술 작품 컬렉션을 보관했던 저택이기도 했다. 내부 장식과 예술품들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초기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를 거쳐 신고전 시대를 아우른다. 비텔스바흐 왕조의 독특한 취향과 정치적 야망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켜본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강성했던 바이에른 왕국의 궁전답게 규모도 크고 매우 화려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투박하지만, 내부에 들어가 보면 그 압도적인 화려함에 놀라게 된다.

뮌헨 레지덴츠의 전시 공간

레지덴츠의 공개 홀은 모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는 박물관(Residenz Museum)과 보물관(Ratzkammer)이라는 이름으로 나뉘어 개방하는데, 박물관에서는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고전주의 등 다양한 양식으로 장식된 각종 방을 공개하고, 보물관에는 비텔스바흐 왕조가 모은 각종 금은보화 컬렉션을 전시한다. 둘을 다 본다면 하루 종일 보아도 부족하니 관람 시간을 넉넉히 잡는 것이 좋다.

상당히 많은 구역을 개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증축한 덕에 구조가 복잡하고 다양한 건축양식이 혼재되어 있어 지루하지 않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와 같이, 하나의 건물이라기보다는 안뜰들을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건물 단지에 가깝다. 왕족들이 방을 찾다가 길을 잃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다.

보물관
황제의 방
왕궁 예배당

모든 방과 홀에는 영어와 독일어로 된 자세한 안내가 부착되어 있다. 특히 왕가가 소장한 고대 조각을 전시하기 위해 만든 안티쿠아리움(Antiquarium)이나 비텔스바흐 가문의 선조들 100명 이상의 초상화가 진열된 선조화 갤러리(Ahnengalerie) 등이 특히 유명하다.

안티쿠아리움 - 고대 조각 전시장
대주교를 위한 방, 트리어룸(Trierzimmer)
선조화 갤러리
악기를 전시하는 음악의 방

테아티너 교회(Theatinerkirche)

이탈리아 바로크 건축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교회로, 독일 남부 바로크 건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특이하게도 단독으로 지어진 교회가 아니라 주변의 건물들과 붙어 있으며, 높은 첨탑과 돔, 유채색의 외벽을 가지고 있어 주목받는 건물이다.

테아티너 교회는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 Emanuel)의 탄생을 기념하여 1726년에 만들어졌다. 막시밀리안 2세를 비롯하여 비텔스바흐(Wittelsbach) 왕조의 몇 명의 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다.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독일어로 ‘고화관(古畵館)’의 뜻의 알테 피나코테크는.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1세(Ludwing Ι, 1825~48 재위)가 바이에른 국립미술관의 일환으로 설립하게 한 미술관이다. 18세기까지의 회화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19세기 당시의 회화를 전시한 노이어 피나코테크(Neue Pinacothek)에 대하여 알테 피나코테크라고 불린다. 주요 소장 작가는 다음과 같다.

  • 스페인 : 엘 그레코(El Greco),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 이탈리아 : 라파엘로(Raphael Fra Angelico),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 프랑스 : 프랑수아 부셰(Fran&ccedil;ois Boucher),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
  • 네델란드 : 프란스 할스(Frans Hals) 뤼카스 판레이던(Lucas van Leyden)
  • 독일 : 슈테판 로흐너(Stefan Lochner),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uml;rer)
  • 플랑드르 : 반 다이크(van Dyck),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이중 루벤스의 작품이 가장 많이 소장돼 있는데, 막시밀리안 2 세(1679~1726)가 많이 사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걸작은 15~16세기 독일 회화들(뒤러의 <4인의 사도>, 그뤼네발트의 <성 에라스므스와 성 마리티우스>, 알토도르퍼의 <알렉산더 대왕의 전쟁>, 루벤스의 <아내의 자화상>, <아마존의 전쟁>) 등이다. 원래는

알테 피나코테크 대표작

야코포 데 바르바리, 자고새와 갑옷장갑의 정물
라파엘로, 템피의 성모
프라고나르, 소녀와 개
모네, 수련
고흐, 해바라기
베르메르, 편지를 읽고 있는 푸른옷의 여인(특별 임대전시)
티치아노, 속세의 허영
후안 데 라 크루스, 에스파냐의 공주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의 초상
루벤스, 인동덩굴 그늘의 루벤스와 그의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
엘스하이머, 이집트로의 도피
반 다이크, 자화상
렘브란트, 이삭의 희생
칸딘스키, 꿈의 즉흥
무리요, 포도와 멜론을 먹는 소년들
테르보르흐, 벼룩 잡는 소년
부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부셰, 엎드려 있는 소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 모자
라파엘로, 성 가족
뒤러, 자화상
알토도르퍼, 알렉산더 대왕의 전쟁
피터 브뤼헬, 게으름뱅이의 천국
루벤스,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
렘브란트, 자화상

칼스 광장, 칼스 문(Karlsplatz, Karlstor)

칼스 광장(왼쪽)과 칼스 문(오른쪽)

칼스 광장과 칼스 문은 뮌헨 구 시가지의 관문이다. 서울의 사대문처럼 뮌헨에도 과거 시가지를 드나들던 출입문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중앙역 쪽의 문이 칼스 문이고 그 앞에 만들어진 광장이 칼스 광장이다. 차량, 버스, 트램 등이 얽히는 복잡한 거리 앞에서 쉬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겨울이면 광장 중앙에 분수가 있는 곳이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한다. 

노이하우저 거리(Neuhauserstraße)

칼스 문 뒤편으로 나 있는 노이하우저 거리부터는 쇼핑가이다. 

유스티츠 궁전

칼스 광장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은 뮌헨 법원인 유스티츠 궁전(Justizpalast)이다. 1890~1897년 칼스 광장 서편에 건축가 프리드리히 폰 티에르쉬가 네오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지은 건물로 67m의 유리 돔이 특징적이다. 현재 바이에른 사법부와 뮌헨 제1지방 법원이 들어서 있다.

성 미하엘 교회(St. Michael Kirche)

1597년 완공된 바로크 양식 교회로 내부가 대단히 아름답다. 정면이 조각으로 치장된 바로크 양식을 하고 있다. 건축될 당시 종교개혁에 한창이었던 독일에서 반종교개혁에 선봉에 섰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교회의 아치형 천장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당초 계획은 이보다 작은 규모였는데, 건축 도중 천장이 무너져내리는 사고가 일어나자 건축을 지시했던 영주 빌헬름 5세(Wilhelm V)가 이를 불길하게 여겨 더 큰 교회를 만들라고 지시한 결과 지금의 규모가 되었다.

무료 입장할 수 있지만 지하에 있는 비텔스바흐(Wittelsbach) 가문의 왕족들의 묘지는 입장료를 받는다. 지하 묘지에는 비운의 ‘미치광이 왕’ 루트비히 2세(Ludwig II)의 무덤도 있다.

프라우엔 교회(Frauenkirche)

투박함 속에 독특한 매력이 있는 교회이다. 독일에는 ‘프라우엔 교회’라는 이름의 교회, 즉 성모 교회가 많다. 뮌헨의 프라우엔은 양파 모양의 두 개의 첨탑이 뮌헨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진다. 16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카톨릭 교회로, 뮌헨에서는 뮌헨 대성당(Münchener Dom)이라고도 한다. 

첨탑 높이는 109m(정확히 말하면 북쪽 탑이 12cm 더 높음)이다. 뮌헨 시가지 중심 내에서 109m를 넘는 빌딩의 건축은 금지되어 있는데, 이는 성모 교회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내 어디서든 성모 교회의 양파 모양 첨탑이 잘 보이게 되었고, 이 ‘양파들’은 자연히 뮌헨의 상징이 되었다. 독일에서 이런 양파 모양의 첨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는 쾰른 대성당(Kölner Dom)처럼 뾰족한 첨탑으로 설계되었으나 예산 부족으로 공사가 지연되었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에 첨탑을 완성하게 되어 서로 다른 건축양식이 섞이게 된 결과이다.

내부는 화려함을 지양하고 엄숙하게 만들어져 있다. 입장은 무료이지만 남쪽 첨탑에 엘리베이터로 오르는 전망대는 유료이다.

슈바인스 학세(Schweinshaxe)

독일의 돼지고기 요리로 바이에른 주에서 특히 즐겨 먹는다. 독일어에서 ‘슈바인(schwein)’은 돼지를, ‘학세(haxe)’는 소나 돼지의 발목 윗부분을 뜻한다. 우리의 족발과 달리 슈바인스 학세는 돼지의 발 끝부분을 사용하지 않는다. 독일의 축제나 비어하우스에서 빠지지 않는 메뉴로 겉의 껍질은 바삭하고 속살은 부드러워 겉바속촉이 매력적인 요리이며, 맥주와 아주 잘 어울린다. 흔히 으깨거나 얇게 썬 감자와 자우어크라우트를 곁들여 먹는다. 

고된 농사일로 기력을 보충해야 했던 독일의 농부들은 단백질 섭취가 필요했는데, 일반적으로 소시지와 프레첼은 아침으로 먹고 저녁식사는 슈바인스 학세으로 먹었다고 한다. 17세기 초 중세 독일 음식은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단순하게 찌는 등의 기존의 조리법에서 서서히 탈피했다.

슈바인스 학세의 유래
독일에서 돼지고기 요리가 발달한 이유가 재미있다. 17세기 초 금식 기간 중 어느 수도사들이 배가 고픈 나머지, 수도원에서 기르던 돼지를 구워먹었다. 그런데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지고 말았다.
비난을 받을까 봐 걱정되었던 수도사들은 꾀를 내어, 동네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담장 뒤에서 새끼 돼지를 공중으로 던져 주었다. 돼지들이 공중으로 날아다니자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그때 수도사가 나와서 "신의 가호로 무게가 0인 돼지가 태어났다”고 바람을 잡고, 이 돼지는 금식 기간에 먹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 이야기가 퍼지자 결국 무게가 없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허락되었고,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신의 가호가 내린 축복받은 음식이라며 즐기게 되었다.

독일의 맥주(Bier)

독일 맥주의 가장 큰 특징은 ‘맥주순수령’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에서는 16세기 초반에 공포된 맥주순수령에 따라 맥주를 만들 때 맥주의 원재료인 보리몰트, 홉, 물, 효모 이외의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후 19세기 초에 밀을 원료로 맥주를 만드는 것이 합법화되었고, 해외 시장에서의 경쟁을 위해 법이 완화되었지만 맥주순수령 덕분에 질 높은 독일 맥주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독일은 체코, 아일랜드에 이어 연간 개인 맥주 소비량 3위의 맥주대국이다. 다른 나라보다 지역 맥주양조장이 많은 것도 독일 맥주문화의 또 다른 특징. 현재 독일 전역에는 1,300여 개의 양조장이 있으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맥주의 고향’ 뮌헨이 속한 바이에른 지역에 있다. 뮌헨에서 매년 가을에 열리는 맥주축제인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도 독일 맥주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옥토버페스트 축제장

독일에는 15~20개의 고전적인 맥주 스타일이 있는데, 다른 나라 맥주보다 비교적 다양하게 국내에 들어와 있는 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일 맥주 가운데 필스너, 헬레스, 바이젠, 헤페 바이젠, 둥켈, 둥켈 바이젠, 슈바르츠, 복 등의 맥주를 즐길 수 있다.

독일 맥주에는 아래와 같이 18종이 있다.

벡스, 벡스 다크, 뢰벤브로이 오리지널, 크롬바커 필스, 크롬바커 바이젠, 파울라너 오리지널 뮌흐너 헬, 파울라너 둥켈, 파울라너 헤페 바이스비어 나투르트륍, 파울라너 살바토르, 에딩거 바이스비어, 에딩거 바이스비어 둥켈, 바이헨슈테파너 헤페 바이스비어, 바이헨슈테파너 헤페 바이스비어 둥켈, 바이헨슈테파너 크리스탈 바이스비어, 슈무커 헤페 바이젠, 슈무커 슈바르츠비어, 웨팅어 헤페 바이스비어 나투르트륍, 바르스타이너 프리미엄 페룸

성 페터 교회(Sankt Peter Kirch)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뒤섞인 교회로 12세기 경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전부터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세우고 거주하던 곳에 새로 큰 교회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뮌헨에서 가장 오래 된 교구교회이기 때문에 이 부근에서부터 도시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오래 된 교회라서 그런지 몰라도 ‘알테 페터(Alter Peter)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1327년 대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어 다시 지어졌고, 17세기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첨탑(높이 92m)이 추가되어 현재 시내 전망대로 사용된다. 교회 내부는 수준 높은 성화와 조각들, 그리고 눈길을 확 잡아끄는 천장 프레스코화 등이 볼만하다.

내부는 무료 입장 가능하지만 306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는 첨탑 전망대는 유료 입장이다. 이 곳 전망대에서 신 시청사(Neues Rathaus) 전체가 잘 보인다.

성령 교회(Heilig-Geist-Kirche)

성 페터 교회와 이웃하고 있다. 두 교회가 크기도 비슷하고 건축 양식도 유사점이 있어서 언뜻 보면 닮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또 완전히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성령교회 천장의 프레스코 화

외부는 고딕 양식, 내부는 로코코 양식이며, 나중에 네오 바로크 양식도 추가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심하게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것으로, 내부의 장식은 전쟁 전보다 많이 간소해졌다. 천장의 프레스코가 유명하다.

마리엔 광장(Marienplatz)

Marienplatz는 Maria(마리아)와 Platz(광장)의 합성어이다. 명실공히 뮌헨의 중심부로 신 시청사(Neues Rathaus)와 구 시청사(Altes Rathaus), 그리고 많은 높은 건물들에 둘러싸인 넓은 광장이다. 항상 사람들로 붐비고, 광장 어디서든 행위 예술가 또는 거리의 악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광장에 테이블을 깔아두고 음식이나 맥주, 음료 등을 판매하는 카페, 레스토랑도 매우 많기 때문에 항상 시끌벅적하다.

신 시청사와 구 시청사는 밤에도 야경이 근사하기 때문에 밤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레스토랑 등은 늦은 시각까지도 영업을 하므로 뮌헨에서 밤을 보내기에 가장 좋은 지역이 마리아 광장과 그 인근이기도 하다.

마리아 탑(Mariensäule)

1638년 30년 전쟁으로 스웨덴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했다가 해방되었음을 기념하여 세운 탑이다. 이때부터 이곳을 마리엔 광장으로 불렀다고 한다.

구시청(Altes Rathaus)

뮌헨 시의 구 시청사(Altes Rathaus)는 신 시청사(Neues Rathaus)의 바로 맞은 옆에 있다. 시청 치고 작은 건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 시청사 바로 옆에 있다보니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다. 하지만 음산할 정도로 위압적인 신 시청사에 비해 화사하고 아기자기한 매력이 강하여 신 시청사와 좋은 대비를 이룬다. 마리아 광장(Marienplatz)에서 신 시청사와 구 시청사가 한꺼번에 나오도록 앵글을 잡으면 좋은 그림이 나온다.

신시청(왼쪽 건물)과 구시청

구 시청사도 현재 관공서 건물이다. 시의회가 사용하고 있고 시장의 집무실도 이 곳에 있다. 건물의 1층은 아치형으로 뚫려서 통로로 사용되고 있는데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고 신 시청사가 지어진 뒤 통행을 더 원활하게 하도록 변형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는 장난감 박물관(Spielzeugmuseum)으로 사용된다.

빅투알리엔 시장(Viktualienmarkt)

뮌헨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이다. 평일과 토요일 오전에 개장하여 농산물이나 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관광객이라면 기념으로 공예품들에 관심을 두어볼 만하다. 시내의 상점에서 파는 것보다는 확실히 저렴하다.간혹 영어식으로 빅토리아(Victoria) 시장이라고 적는 자료들이 있는데 그건 올바르지 않은 표기다. ‘빅투알리엔(viktualien)’은 ‘승리’의 의미가 아니라 라틴어로 ‘음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독일어에서 V는 영어의 F와 같은 발음이지만 ‘픽투알리엔’이 아니라 ‘빅투알리엔’이 되는 것도 이 단어가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에서 왔기 때문이다.

빅투알리엔 시장은 미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과 삶을 즐겁게 하는 신선하고 풍부한 물건들을 제공한다. 베이커리, 생선 가게, 특별식 가게, 꽃집 등은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 시장을 뮌헨의 명소로 부각되게 하고 있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생각난다면 굳이 복잡한 호프브로이하우스까지 갈 필요 없이 시장에 있는 비어가든에서 뮌히너들과 함께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신시청(Neues Rathaus)

85m 높이의 중앙 첨탑, 그리고 양편으로 늘어선 거대한 규모, 안으로도 몇 겹으로 형성된 건물군, 밤에 보면 음산하기까지 한 전형적인 네오 고딕 양식. 신 시청사(Neues Rathaus)는 그 규모와 외관으로도 관광객을 압도하는 뮌헨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건물의 균형미와 완성도도 매우 빼어나고, 바이에른 왕국의 강성했던 시절 지어진 건물인만큼 정교한 조각과 장식으로 치장된 것도 보통 수준이 아니다. 내부 역시 궁전처럼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첨탑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올라가 시내를 360도 파노라마로 조망할 수 있다.

시청 입구로 들어가면 자그마한 안뜰이 펼쳐져 있고, 시청 내의 레스토랑인 라츠켈러(Ratskeller)가 안뜰에서 영업 중이다. 안뜰을 가로질러 그 뒤편의 문으로 들어가면 작은 갤러리도 들어가볼 수 있다. 오토바이를 활용해 만든 분수가 갤러리 중앙에 있고, 사방으로 벽을 세워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내부 입장료는 무료지만 첨탑 전망대만 유료로 운영된다. 첨탑에 오르면 2명이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좁은 통로를 통해 뮌헨 시가지를 구경할 수 있다. 사람이 몰리지 않도록 입장객 수를 조절하므로 입장객이 많을 때는 밑에서 기다려야 할 수 있다. 시청 내부로 들어갈 때 안뜰에 도달하기 전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4층까지 올라간 뒤 티켓을 구매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으로 올라가면 전망대이다.

글로켄슈펠 시계(Rathaus-Glockenspiel)

신시청 첨탑의 시계는 독일에서 가장 큰 특수장치로 꼽힌다. 두 계의 층으로 나뉘어, 하나는 빌헬름 5세(Wilmelm V)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내용, 다른 하나는 사육제의 댄스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43개의 종과 32 개 사람 크기의 인형들이 춤추는 것을 정교하게 표현하여 유명한데, 꿈에 나올까 두려운 음산한 악기음에 맞추어 인형극이 펼쳐진다. 인형극은 매일 오전 11시에, 성수기에는 정오와 오후 5시에 추가로 10여분씩 진행된다.

쉐플러탄츠

글로켄슈펠의 아래층은 쉐플러탄츠(Schäfflertanz)라고 하는데, 쉐플러탄츠란 맥주 제조자의 춤이라는 뜻이다. 이 춤의 전통은 뮌헨이 흑사병으로 고통받았던 15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민 중 절반 이상이 병에 감염됐었는데,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들에 즐거움을 되찾아주기 위해 맥주 제조자들이 활기찬 음악과 함께 농기구가 있는 거리에서 춤을 추며 기쁨을 나타냈다고 한다. 주민들 역시 이 소동을 듣고 함께 웃었다.

쉐플러탄츠를 추는 사람들

쉐플러탄츠가 현재의 형태가 된 것은 약 130년 전이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맥주 축제에는 이 춤이 빠지지 않는다. 7년마다 카니발 시즌 중에 이 춤을 추는데 다음번은 2026년이다.

아잠 형제의 교회(Asamkirche)

독일 바로크·로코코 건축의 대표주자, 코스마스 아잠(Cosmas Damian Asam)과 에기드 아잠(Egid Quirin Asam)인 아잠 형제는 잉골슈타트(Ingolstadt)의 아잠 교회(Asamkirche Maria de Victoria)를 만든 바로 그 사람들이다. 비스 교회(Wieskirche)를 만든 침머만 형제와 함께 독일 바로크·로코코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1746년 완공한 건물로 원래는 아잠 형제가 자신들의 개인 예배당으로 만들었다. 아잠 교회와 붙어있는 건물은 주변 건물보다 화려하고 눈에 띄는데, 이 건물이 바로 아잠 형제가 살았던 아잠 하우스(Asam-Haus)이다. 집에 딸린 개인 예배당으로 만든 것이기에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대로 아낌없이 재주를 부렸다. 제단, 천장, 창문에 기둥 하나하나까지 눈을 뗼 수 없는 아름다운 교회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하지만 당시 개인 예배당을 화려하게 지어놓은 것이 시민들에게는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내 시민들의 반발이 있었고, 아잠 형제는 어쩔 수 없이 예배당을 개방하여 일반인도 출입하게 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형제 중 형인 코스마스 아잠이 더 이름난 건축가였다고 하는데, 아잠 교회만큼은 동생 에기드 아잠의 생각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크게 파손되었으나 1983년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가 완료되었다. 독일 후기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건축사적 가치도 높다.

내부 천장화

알리안츠 아레나(Allianz Arena)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뮌헨 시에 준공된 경기장으로, 2005년부터 분데스리가 FC 바이에른 뮌헨의 홈 구장으로 쓰이고 있다. 뮌헨 시 북쪽 외곽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슈트라세에 위치하고 있다. 같은 지역에 위치한 또 다른 클럽인 TSV 1860 뮌헨 또한 이 곳을 홈 구장으로 쓰고 있었지만, 2017년 7월 12일 1860 뮌헨이 임대 계약을 해지하면서 바이에른 뮌헨의 단독 홈 구장이 되었다.

수용 인원은 개장 당시에는 66,000명이었으나 현재 내부 개수와 확장을 거듭해 75,000석 규모를 달성했으며, 대부분 분데스리가 클럽 홈구장들이 그렇듯 서포팅 문화의 특성상 여전히 제공하는 입석 좌석을 포함한 규모인데 국제대회나 UEFA 주관 대회시에는 70,000여 석의 좌석이 제공되며, 현재 유로 2020 메인 경기장으로 선정됨에 따라 이에 대비해 75,000석까지 확장이 완료되었다.

UEFA나 FIFA 주관 대회시 명칭은 푸스발-아레나 뮌헨(Fußball-Arena München)이지만 이는 피파와 UEFA가 경기장 명명권(네이밍 라이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방송이나 문서상에서 쓰는 명칭일 뿐 실제 중계진들이나 팬들도 모두 알리안츠 아레나라고 칭한다. 현지에서 팬들은 그냥 디 아레나(Die Arena)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특이한 외관 때문에 슐라우흐부트(Das Schlauchboot - 고무보트)라고 많이 부른다.

FC 바이에른 뮌헨

UEFA 3대 메이저 대회 우승, 트레블, 유러피언컵 3연패를 모두 달성한 양대 클럽 중 하나이다. 구단 이름은 지역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으로 보통 ‘바이에른’이라 부른다. 이는 바이에른 뮌헨이 뮌헨이라는 도시를 대표한다기보다는 바이에른 주를 대표하는 팀으로써의 이미지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1870년에 통일되기 이전까지 여러개의 왕국과 공국으로 나눠어져 있었기 때문에 지역색이 강한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뮌헨 시와는 다르게 바이에른 주는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은 보수적인 정당인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 연합과 ‘주의 클럽’, ‘주의 정당’으로서의 연합을 맺고 역사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바이에른 뮌헨은 뮌헨 시민들뿐만이 아니라 바이에른 주의 시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상징색은 붉은색이며, Rot und Weiß(레드 & 화이트)로 대표되는 이 팀의 고유한 컬러는 100년 넘게 이어져 왔다.

바이스 부어스트(흰 소시지)(Weißwurst)

식도락의 고장 뮌헨에서는 독특한 향토음식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을 대표하는 요리인 학세(Haxe)도 뮌헨 지방에서 시작된 요리이고, 바이스 부어스트(Weißwurst)도 대표적인 뮌헨 지방의 요리이다.

‘Weißwurst’를 직역하면 ‘흰 소시지’가 된다. 문자 그대로 색깔이 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삶아서 요리하는 것은 보크부어스트(Bockwurst)와 비슷하지만, 소시지의 재료가 돼지고기가 아니라 송아지 고기라는 것이 포인트이다.

요리가 만들어진 계기는 간단하다. 원래 송아지 고기는 양의 창자에 싸서 소시지를 만드는데, 뮌헨의 한 레스토랑에서 양 창자가 떨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돼지 창자를 이용해 소시지를 만들었고, 돼지 창자는 구우면 찢어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삶아서 조리를 했더니 그 맛에 다들 놀라서 정식 메뉴가 된 것이라고 한다.

송아지 고기의 신선도가 중요하므로 정해진 양만 판매하는 것이 관례. 요즘이야 재료를 신선하게 보관할 기술이 널리고 널렸으니 늦게까지 판매하는 식당들도 있기는 하지만, 전통이 있는 레스토랑일수록 이런 철학은 철저히 계승하는 것이 독일 스타일이다. 조그마한 용기에 삶아서 그 상태 그대로 손님에게 내어준다. 삶기 위해 물에 담긴 상태이므로 긴 꼬챙이로 건져 접시에 덜어 먹는다.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입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해 주세요.
*자료가 도움이 되었다면 인사 한 줄 남겨 주세요.
옷, 패션 트렌드, 운동화, 쇼핑, 신상품, 신발, 자켓, 코트, 탈모, 모발이식, 미용, 성형수술, 구두, 부츠, 샌들, 여름 신발, 바지, 롱팬츠, 팬츠, 양말, 모자, 캡, 나이키, 아디다스, ABC 마트, 롱부츠, 첼시부츠, 티셔츠, 원피스, 정장, 수트, 가방, 귀걸이, 목걸이, 반지, 마스크, 시계, 팔찌, 패션, 백화점, 의류, 옷, 머리띠, 롱패딩, 패딩, 점퍼, 야상, 재킷, 화장품, 크림, 스킨, 아이섀도우, 아이브로우, 올리브영, 롯데닷컴, 하프클럽, 니트, 블라우스, 스커트, 치마, 주름바지, 통바지, 크롭티, 와이셔츠, 영어, 토익, 학원, 반찬, 다이어트, 도시락, 닭가슴살, 샐러드, 감자, 계란, 집밥, 요리, 고기, 소고기, 닭다리, 치킨, 아침밥, 삼겹살, 곱창, 밀키트, 선물세트, 저녁 메뉴, 볶음밥, 탕수육, 광어회, 연어회, 해산물, 냉동식품, 참치회, 잡곡밥, 아이스크림, 배스킨라빈스, 배달의 민족, 배달음식, 떡볶이, 튀김, 오징어튀김, 순대, 오뎅, 토마토, 딸기, 사과, 귤, 오렌지, 콤부차, 홍차, 레몬티, 커피, 카누, 네스프레소, 캡슐커피, 식품 직구, 영양제, 비타민, 아이허브, 신용카드, 소액대출, 대출, 보험, 보험상담, 저축은행, 여성대출, 학자금대출, 대출계산기, 대출이자, 주부대출, 임플란트, 치아보험, 자동차 렌트, 제주도 렌트, 렌터카, 자동차, 승용차, 중고차, 자동차보험, 자동차사고, 청약주택, 청약통장, 정기예금, 적금, 주택정약, 아파트, 내집마련, 빌라, 30평대, 부동산, 소형아파트, 치아, 어금니, 송곳니, 법률상담, 모기지론, 대학 편입, 학사편입, 대학교, 웹호스팅, 클라우드, 보안솔루션, 홈페이지, 앱제작, 동영상제작, 영상편집, 기부, donate,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세계구호,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전문자격증, 자격증, 학원, 사이버대학교, 학사, 학위취득, 학점은행제, 토익, 영어, 외국어, 통역, 번역, 동시통역
[면책공고] 솜글 블로그 자료 이용 안내

이 글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