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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항저우(杭州) 서호(西湖)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19. 9. 8. by 솜글
여행을 앞두고 고민하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들입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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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杭州) 서호(西湖)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를 공유한다.

앞으로 한국어 가이드는 따로 압축파일로 올리지 않고, 블로에서 바로바로 볼 수 있게 올리려고 한다.

참고로 이 설명 자료는 아래 링크에 올려둔 한국어 지도의 순서대로 되어 있으니 지도를 함께 다운로드해서 코스대로 돌면서 보는 게 좋다.(지도에 없는 것들도 있다.)


항저우 杭州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성도로 상하이에서 남서쪽으로 약 18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인구는 2016년 기준 900만 명이 넘는다.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항저우와 쑤저우(上有天堂 下有蘇杭, 상유천당 하유소항)’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관광지로도 명성이 높으며 특히 도시 중심에 위치한 서호(西湖)는 유네스코가 지정 세계유산으로 1년 내내 많은 방문객이 찾아온다. 남방지역답게 매우 덥고 습하며 여름뿐만 아니라 봄·가을에도 비가 자주 내린다. 겨울에는 눈을 보기 쉽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영하로 잘 내려가지 않는다.

한나라 때는 꽤 오지에 속해서 이 지역으로의 유배는 징역형에 비유될 정도였다가 7세기 수나라 때 대운하의 종점이 되면서 도시가 시작됐다. 남송 시대에는 임안(臨安)이라고 개칭하고 수도가 되어 번영을 누렸으며, 원나라 때에는 마르코 폴로 등에 의해 킨자이(Khinzai)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19세기 태평천국 운동으로 도시가 파괴되고 난징조약 이후 중심지 기능을 상하이에 내준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만 최근 중국의 2선 도시 중에서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IT산업, 친환경 산업 등 특색산업으로 빠른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알리바바(阿里巴巴) 그룹의 본사도 항주에 자리한다. 2022년 항저우 아시안 게임의 개최지로 선정되었는데 중국에서는 베이징, 광저우에 이어 세 번째이다.

알리바바 본사 조감도

중국에서는 미인이 많은 도시로 유명한데, 날씨가 덥고 습해서 여자들이 피부가 좋고 얼굴이 하얗다고 전한다. 길이가 688km에 달하는 전당강(钱塘江)과 서호가 있어서 명산명수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항저우의 특산품인 서호용정차(西湖龙井茶)는 중국에서도 손 꼽히는 명차(茗茶)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大韩民国临时政府杭州旧址纪念馆

2007년 11월 정식 개관하고 2012년에 보수된 전시관이다. 부엌과 침실, 김구 선생의 ‘독립만세’ 유묵을 비롯해 항저우에서 활동했던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입장료는 없지만 기부금함이 있어서 원하는 만큼 기부할 수 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의 눈을 피해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이동하고, 항저우에서도 두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임시정부는 항저우 안에서도 두 차례나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음수사원(飮水思源) 일화

G20 한중 정상회의에서 악수하는 당시 양국 정상

기념관 내 김구 선생 흉상 곁에는 ‘음수사원’이라는 글이 있다. 음수사원은 물을 마실 때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배은망덕(背恩忘德)과 반대되는 말이다.

이 말은 2016년 항저우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 모두발언을 통해 시진핑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건네면서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시진핑은 김구 선생의 아들이 1996년 항저우 인근에 ‘음수사원 한중우의(飮水思源 韓中友誼)’라는 글을 남긴 일화를 소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항저우에 머물던 시절 중국이 김구 선생을 도왔다는 역사를 상기시킨 것으로, 중국이 과거에 도왔으니 한국도 사드 문제에서 양보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였다.

실제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훗날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패하고 대륙에서 쫓겨나 오늘날 대만으로 불리는 중화민국을 건립했다. 시진핑이 마오쩌둥을 계승했음을 자처하는 인물임을 생각해 본다면 시진핑의 ‘음수사원’ 발언은 적절하지 못한 선택일 것이다. 더욱이 시진핑이 박근혜가 일본군 출신인 박정희의 딸임을 모를 리도 없을 테니 조롱의 의미도 곁들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과 수행원들은 그 뜻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서호 西湖

중국국가단위풍경구명승구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담수호이다. 2,000년 전에는 첸탕강(钱塘江)의 일부였다가, 진흙과 모래가 쌓여서 남과 북쪽에 있는 오산(吴山)과 보석산(寶石山)을 막아서 형성된 호수이다. 사실 중국에는 서호라는 이름을 가진 호수가 800개가 될 만큼 많은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항저우의 서호이다. 이 서호는 중국 미인인 서시(西施)의 이름을 딴 것으로 당나라 때 그 명칭이 지어졌다고 한다. 201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서호의 유래에 관한 전설

서왕모 상상도

서호에는 신화, 전설, 민간 고사들이 매우 많이 얽혀 있는데, 그중에 서호의 명칭과 관련된 이야기도 전한다.

아주 먼 옛날에 하늘의 옥룡(玉龙)과 금봉(金凤)이 은하 옆의 선도(仙島, 신선이 거처하는 섬)에서 백옥을 발견했는데, 그들이 함께 수 십 년 동안 옥을 다듬었더니 백옥은 곧 반짝반짝 빛나는 명주로 변했다. 이 명주의 빛이 비치는 곳은 나무가 항상 푸르고 꽃이 만발하게 됐다. 하지만 얼마 후 도교 전설에 등장하는 여신인 서왕모(西王母)에게 명주가 발각되었고, 서왕모는 신군(神軍)과 신병(神兵)들을 파견해 고귀한 명주를 빼앗아가 버렸다.

옥룡과 금봉은 명주를 돌려달라고 했지만 서왕모가 주지 않아 서로 싸우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서왕모의 손에 힘이 풀려 명주가 인간세상으로 떨어지게 됐다. 이 명주는 잔물결이 반짝이는 서호로 변했다고 한다. 이후 옥룡과 금봉도 명주를 따라 인간세상으로 내려온 뒤 옥룡산(玉龙山), 즉 옥황산(玉皇山)과 봉황산(凤凰山)이 되어 영원히 서호를 수호하게 됐다.

서호의 제방

서호는 크게 백제(白堤), 소제(苏堤), 양공제(杨公堤)의 세 개의 제방을 통해 서호 외호(外湖), 북쪽의 북리호(北里湖), 서북쪽 악묘 앞에 있는 악호(岳湖), 서쪽의 서리호(西里湖), 서남쪽의 소남호(小南湖)로 나뉜다.

백제(白堤)

당나라 때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항저우 관리로 임명되어 왔을 때 무너진 제방이 농사를 망치는 것을 보고 제방공사를 다시 했다. 백거이는 더 길고, 튼튼한 둑을 쌓게 했는데, 이로 인해 수원이 풍부해지면서 가뭄을 해갈했다. 이것이 지금의 백제다. 그는 둑 옆에 수양버들을 심고는 매일 산책하며 공사를 감독했다고 한다. 이때 백거이는 제방을 손질하면서 육정(六井, 상국정·서정·금우정·방정·백귀정·소방정)도 지었다고 한다.

소제(苏堤)

백제를 지은 후 약 2백년 후인 송나라 때 소식(蘇軾, 1037~1101), 일명 소통파(蘇東坡)가 항저우에 임명되어 왔다. 이때 다시 농민들은 가뭄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웃자란 수초들 때문에 물대기가 힘들었다. 소동파는 호수 바닥에 침전된 진흙을 모두 파내게 했는데 이것이 기존의 백제보다 세 배는 더 길고 넓었다. 훗날 소동파의 성을 따서 소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소제에는 여섯 개의 다리를 두었다.

양공제(杨公堤)

명나라 때인 1508년에 양맹영(楊孟瑛)이 항주 태수로 부임해 와서 세 번째로 준설한 제방이다. 양공제에도 6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소제의 6교와 더불어 ‘서호 12교’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호십경

남송(南宋)시대 선비들이 서호에서 빼어난 10곳을 골라 ‘서호십경’이라 이름 붙인 곳들이다. 각의 장의 현판이나 비석은 청나라 건륭황제가 직접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신서호십경

신서호십경도 있다. 서호십경 이래로 1984년 <항주일보>에서 신서호십경 선정 작업을 했고, 2007년에는 저장성 항주에서 열린 제9회중국항주서호박람회 개막식에서 항주시위 왕국평 서기가 신서호십경을 세 번째로 다시 선정해 공포했다.

1984년 <항주일보> 선정 신서호십경 : 운서죽경(云栖竹径), 만룡계우(满陇桂雨), 호포몽천(虎跑梦泉), 용정문차(龙井问茶), 구계연수(九溪烟树), 오산천풍(吴山天风), 완돈환벽(阮墩环碧), 황룡토취(黄龙吐翠), 옥황비운(玉皇飞云), 보석류하(宝石流霞)

2007년 항주시위 서기 선정 신서호십경 : 영은선종(灵隐禅踪), 육화청도(六和听涛), 악묘서하(岳墓栖霞), 호빈청우(湖滨晴雨), 전사표충(钱祠表忠), 만송서연(万松书缘), 양제경행(杨堤景行), 삼대운수(三台云水), 매오춘조(梅坞春早), 북가몽심(北街梦寻)

신서호십경 - 호빈공원(湖滨公园)의 호빈청우(湖滨晴雨)

신서호십경 중 하나로 국가수준 AAAA등급의 명승지이다. 물안개가 끼어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운 곳으로 언제나 열려 있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우기에 비가 내린 후 물안개 가득한 모습을 천천히 감상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풍경구다.

풍파정(왼쪽)과 마르코 폴로 기념상(오른쪽)

호빈청우가 있는 호빈공원 북쪽에는 풍파정(风波亭)과 마르코 폴로 기념상(马可波罗纪念像)이 자리한다. 풍파정은 송나라의 민족영웅 악비가 양아들과 함께 처형된 곳이다. 이필(李泌) 기념표도 이곳에 있다. 이필은 당자라 때 관리로 항주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처음으로 서호의 물을 끌어다가 여섯 개의 우물을 조성하여 백성들이 풍족하게 물을 쓰도록 했다고 한다. 해가 지면 서호음악분수(音乐喷泉)에서 두 시간마다 분수쇼가 펼쳐진다.

장징궈고택(蒋经国旧居)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의 아들 장징궈(蒋经国, 1910~1988)가 별장으로 쓰던 2층집이다. 장징궈는 중국 국민당의 정치지도자로 아버지가 건립한 대만에서 군인으로 활동했으며, 장제스 사망 이후 총통대리를 맡다가 1978년부터 1988년 사망할 때가지 대만 제2대 총통을 지냈다. 장징궈는 소련에서 유학하던 젊은 시절엔 아이러니하게도 공산당 지지자였는데, 귀국 후 아버지가 ‘붉은 물을 빼야 한다’며 중국 고전 공부를 시킨 후로 공산주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생전에 존경받는 정치인이었으며 중국 본토와의 관계회복에서 앞장서 1987년에는 대륙 여행 금지령을 폐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장징궈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덩샤오핑과의 교류가 있어 중국과 대만의 통일이 그리 현실성 없는 담론은 아니었는데, 갑작스럽게 장징궈가 사망하자 대만과 중국은 조금씩 관계가 멀어지게 됐다.

사망 직전의 장징궈(왼쪽)

장징궈가 꽤 오랫동안 거주했던 이 집은 과거에는 서호의 인기있는 관광명소 중 하나였고 항저우 시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건물이다. 그런데 최근인 2015년에 중국 정부가 맥도날드에 건물사용권을 매각해 논란이 됐다. 대중음식점으로 쓰이면 문화재가 심하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네티즌들은 ‘아무리 돈이 좋아도 문화재를 이런 식으로 관리할 수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했고 일부에서는 ‘대만 총통의 고택을 중국 대륙 정부가 훼손했다’는 비판도 일었지만, 결국 현재는 고택에 맥도날드 매장이 들어선 상태다.

서호십경 - 단교잔설(斷橋殘雪)

다리에 쌓인 눈이 중간부터 녹아 마치 다리가 끊어진 듯 보이는 풍경

‘다리가 끊어지는 모습’을 닮았다는 곳으로 눈이 오는 겨울에만 감상할 수 있는 명소다. 이곳의 아치형 돌다리에 수북하게 쌓인 눈이 가운데부터 녹으면 마치 다리가 끊어지는 것과도 같은 그림을 그려낸다고 한다. 하지만 항저우는 눈이 잘 내리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보기는 어렵다.

단교는 비교적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서호의 풍경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눈이 멎고 날이 개기 시작할 때 보석산(宝石山) 위에 서서 멀리 남쪽을 바라보면 온 서호가 눈에 하얗게 뒤덮여 있고, 백제에는 눈 쌓인 버드나무와 서리 맞은 복숭아나무가 늘어서 있다. 단교의 돌다리 위는 햇빛에 직접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눈이 녹아 반짝이는 다리 난간이 드러나지만, 다리의 양쪽 끝은 햇빛에 노출되지 않아 여전히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다.

‘단교잔설’이라는 이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당나라 때 장호(张祜)의 시 <제항주고산사(题杭州孤山寺)>라는 작품이다. 이 시에는 ‘누대는 푸른 산처럼 솟았고, 오솔길 하나 호수 가운데로 이어졌네. 비 내리지 않아도 산은 늘 촉촉하고, 구름 없어도 물은 절로 그늘졌구나. 단교의 거친 이끼 껄끄럽고, 빈 뜰에 떨어진 꽃 수북하네. 다만 서창의 달 떠올리는데, 종소리 북쪽 숲에서 들려오네.’라고 되어 있다.

눈이 내리지 않은 단교의 모습

시 속의 ‘단교의 거친 이끼 껄끄럽고’라는 구절에서 단교가 원래 이끼가 뒤섞여 얼룩덜룩한 색을 지녔던 돌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끼가 끼어있던 다리에 아직 눈이 막 녹기 시작했을 때의 모습은 마치 전쟁 뒤의 황량해진 폐허와 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단교잔설의 전설 : <백사전(白蛇傳)>

&amp;amp;lt;백사전&amp;amp;gt;을 배경으로 한 영화 속 장면들. 왕조현. 장만옥 주연의 &amp;amp;lt;청사&amp;amp;gt;(1993)(위쪽)와 이연걸 주연의 &amp;amp;lt;백사대전(2011)(아래쪽)

단교잔설에는 저 유명한 백사 이야기가 전설로 전하고 있다.

옛날 중국 아미산에 수천 년 도를 쌓은 두 마리 뱀이 있었는데, 각각 백사(白蛇)인 백소정(白素貞)과 청사(靑蛇)인 소청(小靑)이었다. 이들이 두 여인으로 변해 서호에서 놀나가 우연히 우산을 빌려준 허선(許仙)을 알게 되고, 백소정은 그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데 된다. 그러나 어느 날 법사인 승려 법해(法海)가 허선을 찾아와 아내가 천 년 묵은 요괴라고 경고하면서 단오절에 웅황주(雄黃酒)를 먹이면 그 정체가 드러날 것이라고 알려 준다. 결국 백소정과 소청의 정체가 드러나 놀란 허선이 죽게 된다.

백소정은 남편을 살리고자 어렵게 신선의 약을 구해와 허선을 되살리고, 허선은 아내의 진심을 알고 그녀를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아들을 낳자 백일째 되는 날 법해가 찾아와 백소정을 서호 바깥의 뇌봉탑(雷峰塔) 아래에 봉인시켜 놓는다.

금대교(锦带桥)

백제에 놓여 단교잔설과 평호추월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정교한 전통 목공기술과 철물을 사용해 1673년 건설됐다. 이후 홍수 때마다 범람하고 1950년에는 큰 태풍으로 다리가 완전히 파괴되어 1953년 재건했다. 현재 있는 것은 2004년 복원된 것이다.

신서호십경 - 보석류하(宝石流霞) - 보석산(宝石山)

보석산은 서호를 북쪽으로 막고 있는 산이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기암괴석이 많은데, 이 바위들이 햇빛을 받으면 보석처럼 아름다운 색으로 빛난다고 하여 보석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노을이 질 때 보석산에서 바라보는 서호의 진경은 신서호십경 중 하나인 보석류하로 선정됐다.

보숙탑(保俶塔)

육각형의 누각식 탑으로, 모두 7층이며 전체 높이는 약 45m이다. 탑신의 조형이 수려하고 보석산 위에 우뚝 솟아 있어 더욱 매끈하게 보인다.

보숙탑은 북송 태조 조광윤(趙匡胤, 927~976)이 북송을 건국한 후 오월의 왕 전홍숙(錢弘俶, 929~988)을 불러들이자, 전홍숙의 외숙부가 조카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세운 탑이라고 한다. 968년에서 975년 사이에 건립되고 북송 제3대 황제인 진종(眞宗, 968~1022) 때 재건됐다.

1789년 청나라 건륭제 때 보숙탑 아랫부분에서 오연상의 조탑기(造塔記)를 새긴 파손된 비석이 1개 발견되었다. 이후에도 파손과 보수 작업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고, 현존하는 탑은 1933년에 개수된 것이다. 벽돌과 목재를 병용한 전목탑이지만 목조 부분은 이미 남아 있지 않고 벽돌로 된 탑신(塔身)만 보존되어 있다.

신서호십경 - 북가몽심(北街梦寻)

서호 북단에 가로로 길게 나 있는 북산가(北山街)를 일명 북가몽심이라고 한다. 북산가는 악묘 서쪽의 양공제 끝단에서 시작해 단교를 지나 호빈공원까지 넓게 자리한다. 남쪽으로 서호를, 북쪽으로는 보석산을 바라보고 있는 북가몽심은 아름다운 자연경관, 그리고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는 근대 건축물의 경관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길이다. 근대 시기 이곳에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선 것은 일본의 침략 전쟁 과정과 관련되어 있는데, 가령 저장성철도국(浙赣铁路局)이 이곳에 이전된 것은 일본 침략에 대한 저항의 흔적이다. 이밖에도 해염관(海盐馆), 마노사(玛瑙寺), 포청별서(抱青别墅) 등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대개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마노사(玛瑙寺)

946년에 처음 지어진 사찰로, 현존하는 것은 청나라 때인 19세기 후반에 재건된 것이다. 본당은 소실되었고 새로 테라스가 건물과 정자, 회랑 등을 갖춘 형태로 다시 지어졌다. 둥근 문 바깥에 있는 고대 항아리는 1600년 전의 것이라고 한다. 안뜰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서호를 내려다 볼 수 있다.

포청별서(抱青别墅)

1907년 건축된 3층 건물로, 바로크 양식을 기반으로 중국과 서양 건축의 특징을 혼용한 과도기적 특징을 보여준다. 붉은색, 푸른색, 검정색 벽돌을 섞어 만든 외관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포청별서는 1929년 서호 엑스포 때 임대해 행사장으로 사용하고 이후 호텔로 쓰였으며,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정치권 인물이 거주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항저우 국립 미술학교의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호십경 - 평호추월(平湖秋月)

평호에서 바라보는 가을 밤 보름달의 운치

이름 그대로 가을밤 서호에 비친 달의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호수가 찰랑이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이곳의 야경은 중국의 달구경 명소로도 손꼽힌다.

예전에 이곳은 고산 망호정(孤山 望湖亭)이라고 불렸다. 어느 8월 15일 중추절, 서문장(徐文长)이라는 사람이 혼자 술을 마시다가 취기가 올라 이곳을 찾았다. 망호정 안에서 시를 읊는 소리가 흘러나와서 정자 안을 보니 선비들이 술상을 차려 놓고 달을 감상하면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듯했다. 서문장이 정자로 들어가자 모임 주최자가 공손히 인사하며 서화 한 폭을 청했다. 서문장을 난처하게 만들어 골탕먹이려는 것이었다. 서문장은 그들의 교만한 태도를 보고는 종이 앞에 앉아 순식간에 풍경화를 그려냈다.

 

화려한 조명이 빛나는 평호추월의 밤

주최자는 서문장의 글재주까지 시험해 보고자 시 한 수를 청했다. 서문장은 그림 한켠에 ‘천상에 한 바퀴의 둥근 달, 수중에 둥근 한 바퀴의 달’이라고 두 구절을 썼다. 그러자 주최자는이것도 시냐며 비웃었다. 서문장은 다시 두 구를 더 써내려갔다. ‘한 색의 호수 빛은 만 경의 가을, 천당과 인간세계 모두 하나의 둥근 달’. 선비들이 서문장의 실력에 감탄하자 서문장은 다시 붓을 들어 ‘평평한 호수 한 색으로 온통 가을빛이고, 호수의 빛은 아득하고 물은 멀리 흐르네. 가을 달 둥글어 세상이 작아 보이고, 달빛은 사계절 가운데 가을이 최고로구나.”라는 시 한 수를 다 지었다.

매 구절의 첫 글자가 특별히 커서 이 첫 글자들만 이어서 읽어보니,‘평호추월(平湖秋月)’이라는 네 글자가 되었다. 소위 말하는 ‘머리말 감추기’라는 시 형식이었던 것이다. 선비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했지만 서문장은 미소만 짓다가 달빛을 밟으며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중산공원(中山公园)

고산(孤山)에 위치한 공원으로 입구에 명나라 때 만들어진 흰색 대리석 사자 한 쌍이 놓여 있다. 산이라기보다는 섬에 가깝지만 중국인들은 이곳을 고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흔히 서호를 ‘하나의 호수, 두 개의 탑, 세 개의 뚝, 세 개의 섬’이라고 하는데, 고산은 ‘一山二堤(일산이제)’라 하여 하나의 산으로부터 두 개의 제방이 갈라져 나온 곳이라는 뜻을 가진다. 고산에서 동쪽으로 항저우 시내 전경, 서쪽으로 소제와 양공제, 남쪽으로 오산과 뇌봉탑, 북쪽으로 보숙탑을 바라보는 풍경은 서호를 즐기는 또 하나의 묘미이다.

 

쑨원

중국에는 중산공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공원이 많다. 모두 쑨원(孫文, 1866~1925)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것들이다. 서호의 중산공원은 옛 청나라 황제의 화원이 있던 자리에 1927년 조성되었는데 자연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쑨원은 1911년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크게 성공시키고 이듬해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인물로, 중국 국민당을 결성한 주역이다. 중화민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고 중국대륙에서도 마오쩌둥보다 존경받는 혁명가로 꼽힌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창립에도 일조해서 1962년과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저장성박물관(浙江省博物馆) 

중산공원의 저장성의 유일한 성급 박물관이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29년 개장해 1993년 확장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춘 박물관으로, 중국 남동부 7천여 년의 역사와 관련된 풍부한 컬렉션을 자랑한다. 청자관, 공예관, 서화관, 전폐관, 역사문물관, 국제여품관 등 총 10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석기 출토품부터 근대에 이르는 10만여 점이 넘는 진귀한 소장품 모두 천천히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본관의 역사문물관에는 기원전 5천년 신석기 시대 허무두(河姆渡) 유적에서 발견된 볍씨 ‘허무두’를 비롯해 양저(良渚) 문화, 후저우(湖州) 문화의 유물은 물론 각종 청동 제품, 실크, 도자기, 칠기 등의 출토품과 저장성박물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청자관의 청자들까지, 저장성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품들이 가득하다. 외부의 문란각(文澜阁)은 청나라 때 중국 역사상 가장 방대한 총서인 <사고전서(四库全书)>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7대 장서각 중 하나이자 강남3각 중 유일하게 남은 곳이다.

허무두 문화(河姆渡文化)

허무두 볍씨

허무두 문화(B.C.5000~B.C.4500)는 항저우 만 남안에서 저우산 군도에 걸친 지역, 즉 저장성 동부에서 발견된 신석기 문화이다. 더러는 기원전 7000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기도 한다. 1973년 처음으로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볍씨가 대량으로 발견되어 인공적으로 대규모의 벼를 재배했음이 밝혀졌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 재배의 예이다. 벼 이외에도 호리병박, 마름, 대추, 연, 도토리, 콩 등의 식물이 유적과 가축을 기른 흔적도 보이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칠기도 발견됐다. 고온다습한 지역 특색에 맞게 고상식 주거(高床式住居), 즉 지상보다 마루를 높게 한 건물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문란각(文澜阁)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82년 건립되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수장하기 위하여 건립한 7개의 사고전서루(四庫全書樓) 가운데 하나로, 전장(鎭江) 금산사(金山寺)의 문종각(文宗閣), 양저우(揚州) 대관당(大觀堂)의 문회각(文匯閣)과 더불어 강절삼각(江浙三閣)이라 불린다. 문종각과 문회각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사고전서

문란각은 중축선을 따라 분포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수화문(垂花門)과 첩산(疊山), 바깥 대청 등이 있다. 바깥 대청의 뒤편에 큰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연못 안에는 선인봉(仙人峰)이라고 부르는 기이한 돌이 우뚝 솟아 있어 독특한 운치를 풍긴다. 연못은 화재에 대비한 방화(防火) 용도로 조성되었으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할도 크다.

호상삼도 : 서호에 있는 세 개의 인공섬

서호에는 총 세 개의 섬이 있는데 이들을 호상삼도(湖上三岛)라고 한다.

완공돈(阮公墩) - 신서호십경 완돈환벽(阮墩环碧)

청나라  때인 1800년에 저장성의 행정장관이었던 완원(阮元)이 서호 준설을 주재한 후 만든 흙섬으로, 후세 사람들이 완원의 이름을 따 완공돈(阮公墩)으로 부르게 됐다. 신서호십경으로 불리는 완돈환벽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섬의 지면이 낮기 때문에 늘 호수에 잠겨 있다 하여 완탄(阮滩)이라고도 한다. 섬이 조성된 후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식물을 재배해 푸르게 되었다.

호심정(湖心亭)

세 개의 섬 중 가장 작지만 서호 전체를 바라볼 수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본래 호심정은 호수 위에 지은 정자를 일컫는 일반명사이고, 서호에서도 이 섬에 떠 있는 작은 섬의 정자를 이르는 말이었는데 그대로 이 섬의 이름이 됐다. 호심정 정자의 이름은 원래 진경정(振驚亭)이었는데, 이 섬에서 호심평조(湖心平眺, 호수의 중심을 평화롭게 바라 봄)할 수 있다고 하여 호심정이라고 부르게 됐다. 궁전에 빗대어 봉래궁(蓬萊宮)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심정 섬은 명나라 때인 152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서호의 섬 중 가장 먼저 생겼다. 1953년 중건됐다. 명나라 말기 시인 장대(張岱, 1597~1676)가 호심정을 찾고 <호심정간설(湖心亭看雪)>이라는 이름난 수필을 남겼는데, 눈이 내리는 날 호심정에서 화로에 불을 피워 놓고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는 흥취를 묘사하고 있다.

호심정 섬은 명나라 때인 152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서호의 섬 중 가장 먼저 생겼다. 1953년 중건됐다. 명나라 말기 시인 장대(張岱, 1597~1676)가 호심정을 찾고 <호심정간설(湖心亭看雪)>이라는 이름난 수필을 남겼는데, 눈이 내리는 날 호심정에서 화로에 불을 피워 놓고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는 흥취를 묘사하고 있다.

소영주(小瀛洲) 

서호 중턱에 있는 인공 호수 섬으로 ‘소영주도(小瀛洲岛)’라고도 한다. ‘영주’란 본래 신선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소영주도는 명나라 때인 1607년  전당현령(錢塘縣令)이었던 섭심탕(攝心湯)이 호수 바닥에서 판 진흙을 쌓아올려 조성한 것으로 면적이 약 60㎞, 서호에 있는 세 개의 섬 중 가장 크다. 세 개의 석조탑이 호수 깊숙한 속에 지어져 진흙 퇴적물을 막아준다.

섬의 남북 방향으로는 구곡교와 개망정(開網亭)이, 동서 방향으로는 울창한 대나무 숲길이 있으며, 섬 둘레는 순환로로 되어 있다. 어비정(御碑亭)에는 청나라 강희제가 친필로 남긴 ‘삼담인월’이라는 비석이 남아 있다.

아심상인정

바로 이 소영주 근처로 서호십경을 대표하는 삼담인월이 있다. 소영주 남쪽 끝에 있는 아심상인정(我心相印亭)에 가면 잘 보이는데, 남쪽을 바라보고 수평으로 길쭉하게 지어진 이 정자의 이름은 ‘서로 마음이 통하면 말이 필요 없다(彼此意會 不必言說)’는 뜻이다.

서랭인사(西泠印社)

1904년 금석학을 연구하는 학술단체인 서랭인사의 창립과 더불어 건립되었다. 금석학이란 금속기(金屬器) · 비석(碑石) 등에 씌어진 명문(銘文)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항저우 서랭인사는 부지면적 7088㎡, 연면적은 1749㎡이며, 명·청 시대의 고적(古蹟)과 빼어난 원림(園林)으로 유명하다. 백당(柏堂)·죽각(竹閣)·앙현정(仰賢亭)·사조각(四照閣)·제금관(題襟館)·관악루(觀樂樓)·환박정려(還朴精廬)·화엄경탑(華嚴經塔) 등의 건물이 지세를 따라 들쑥날쑥 분포되어 있다. 건물 사이에는 인천(印泉)·한천(閑泉)·잠천(潛泉) 등의 샘이 있어 그윽하면서도 운치가 있다.

서랭인사 내부

정자와 누각에는 청나라 때 전각가(篆刻家)로 이름난 정경(丁敬)의 필적을 새긴 석각 등이 있고, 암벽에는 역대 명사(名士)들이 남긴 마애제기(磨崖題記)가 있다. 또 삼로석실(三老石室)에는 동한(東漢) 때의 <삼로휘자기일비(三老諱字忌日碑)>와 역대의 비각(碑刻) 등 가치 있는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2001년 6월 근대 및 현대 사적으로서의 중요성과 건축의 대표성을 인정받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추근묘(秋瑾墓)

추근은 중국의 페미니스트 혁명가이자 시인이다. 전족에 반대하고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외치며 싸웠지만, 청 왕조와 투쟁하다가 봉기가 실패해 1907년 31세 나이에 처형당했다. 당대 사건과 역사상의 여성 투사를 주제로 자주 시를 썼으며 중국의 많은 이가 ‘추근열사’라 하며 그녀를 국민적 영웅으로 숭앙한다.

생전 추근의 모습

추근은 1899년 결혼하여 남편을 따라 베이징에 살지만 불화를 겪어 1904년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일본에 유학한다. 이듬해인 1905년에는 쑨원 휘하의 혁명단체인 중국동맹회에 참가해 저장성의 책임자가 되는데, 이때 중국인들로 구성된 여성 단체인 공애회를 결성했다.귀국 후인 1907년에 학당을 개설하고 이를 광복회의 간부를 훈련하기 위한 혁명거점으로 삼았다. 무장봉기를 준비했지만 청나라 조정에 의해 순식간에 진압되는 바람에 피신했지만 청군에 체포되어 이틀만에 처형되고 만다. 여성의 몸으로 혁명가로 활동했던 추근의 처형은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고, 이후 추근은 중국 혁명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소소소묘(苏小小之墓)

서호의 풍경을 정서적으로 채색하는 한 여성이 있다. 남조 시대 기생이자 중국 4대 명기 중 한 사람인 소소소이다. 우리나라의 황진이나 매창에 비유되는 시인인 소소소는 고산섬이 건너다보이는 마을에서 태어나 고산 나루터의 기방에서 손님을 접대했다. 그리고 19세의 어린 나이에 죽어서 나루터 옆 물가 언덕에 묻혔다. 청나라 건륭 황제 때 묘 위에 정자를 세웠는데 여러 차례 정자가 훼손됐다. 현재 볼 수 있는 정자는 2004년 항저우 시 정부가 각계의 의견 수렴과 고증을 통해 원래의 자리에 묘와 정자를 세운 것으로 높이는 5.5m, 묘의 직경은 2.6m, 묘의 높이는 0.8m다. 중국인들은 소소소의 재주를 추앙한다는 의미에서 이 정자를 ‘모재정(慕才亭)’이라 이름 붙였다.

소소소를 그린 그림들

소소소는 항저우의 톱스타였다. 어릴 때부터 작으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지녀 ‘小小’라고 불렸는데, 조상의 재산을 물려 받아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15세 때 부모를 여의게 된다. 부모의 단속이 없었던지라 선비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겼으며, 그녀의 2층 집은 항상 시인묵객들로 붐볐고 그녀의 집앞에는 언제나 수레가 줄을 이었다고 한다. 황진이가 그렇듯, 소소소와 얽힌 민담은 이루 다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너무 많은 이야기가 떠돌다 보니 소소소가 가상의 인물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임제가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을 올리며 시조를 읊었듯, 서호 호반 소소소의 무덤을 찾는 중국의 문인들도 많았다. 당나라 문호 백거이 등 수없이 많은 묵객들이 찾아와서 시를 지어 바쳤다.

무송묘(武松墓)

무송(武松)은 중국 4대 기서 <수호전(水滸傳)>의 등장인물 중 하나이다. 경양강(景阳岗)에서 사람을 잡아먹고 다니는 호랑이를 때려잡아 그 공으로 양곡현(阳谷县)의 도두가 된 인물이다. 무송은 형수 반금련과 서문경이 불륜을 일으켜 그 일로 형이 죽자 두 사람을 죽이고 자수한 뒤 맹주로 유배가게 된다. 이후, 병마도감 장몽방 휘하에 있다 누명을 써 다시 은주 노성으로 유배간다. 유배 중에 자신을 죽이려 하는 무리들을 또 다시 모조리 죽인 후 도망치다가 스님으로 위장했는데, 호연작이 양산박에 토벌군을 이끌고 공격하자 양산박에 합류하다가 토벌전에서 포도을에게 왼팔을 잃었다. 난이 제압된 뒤 벼슬을 거부하고 육화사에서 출가해 여생을 스님으로 살았다고 한다. 훗날 명나라 때 사람들이 경양강 모래언덕의 중간 쯤에 민족 풍격을 딴 절을 지어 ‘무송묘’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파손된 부분이 많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958년에 지은 것이다.

신서호십경 - 악묘서하(岳墓栖霞)의 악묘(岳墓)

신서호십경 중 하나인 악묘서하는 중국 민족영웅의 대명사인 악비(岳飛, 1103~1142)의 무덤과 사당이다. 악비가 처형당할 때 함께 처형당한 아들 악운의 무덤이 함께 있다. 대전 내부에는 거대한 악비 좌상이 자리하며 벽면에는 생전 그의 활약을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묘 중 큰 것이 악비의 묘이고 우측의 작은 것은 아들의 묘이다. 왕으로 추존된 인물인 만큼 묘 앞에는 묘를 지키는 석상들이 악비를 수호하고 있다.

악비는 남송의 가장 걸출한 장수였다. 가난한 농민 출신이지만 금나라 군사의 침입으로 북송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해 전공을 쌓았고, 북송이 망하고 남송 때에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그의 군대는 악가군(岳家軍)이라는 정병(精兵)으로 다른 군벌들과 협력해서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저지하는 공을 올린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악비의 활약을 그린 내부 그림

하지만 당시 남송 재상 진회(秦檜)는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했기 때문에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1141년 재상은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중앙군으로 개편한다. 이때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가 39세 나이에 살해됐다. 훗날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어 악왕(岳王)에 봉해졌으며, 구국의 영웅으로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됐다. 1914년 이후에는 관우(關羽)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다.

인상서호(印象西湖) 

해진 서호의 또다른 볼거리 중 하나로 장예모(张艺谋) 감독이 연출한 <인상서호>를 들 수 있다. 낮에는 호수속에 가라앉아있던 무대가 공연 직전 수면 가까이로 떠올라 배우들이 물기 자박한 수면에서 공연하는 모습이 절경이다. 날이 추운 1~2월에는 공연이 없으며 매일 저녁 8시경 공연이 시작된다. 민간신화를 각색해 남녀의 만남과 사랑, 이별, 최고 등을 그리고 있으며 한국어로 안내 팸플릿도 받을 수 있다. 2007년부터 공연 중이다. 낮에는 공연 설비가 일체 보이지 않는다. 관람료는 꽤 비싸서 성인 기준 330元 이상이다.

서호십경 - 곡원풍하(曲院風荷)

여름날 호수의 연꽃이 만개해 향이 진동하는 풍경

곡원풍하는 여름날 연꽃이 만개한 경치를 주제로 하며, 소제춘효에 이어 제2의 서호십경이 되었다. ‘곡원’은 원래 남송 조정이 설립한 술을 담그는 수공업 공장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곳에 위치해 있지만 당시에는 서호 연안에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가까운 호수 연안에서 연꽃을 기르고 있어서 여름이 되어 산들 바람이 천천히 불어올 때마다 연꽃향기와 술 향기가 사방에 흩뿌려졌고,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청나라 때 강희(康熙) 황제는 서호십경을 감상하고 난 후 소제의 과홍교 옆에 ‘곡원풍하’라고 세긴 비각을 세웠다.

여름철 곡원풍하의 연꽃밭

곡원풍하에서는 여름날 감상하는 연꽃을 최고로 친다. 공원 안의 크고 작은 연못에는 수백 가지 품종의 연꽃을 재배하고 있는데, 그 중 특별히 매혹적인 것으로 풍하(风荷) 지구를 꼽을 수 있다. 이 수면에는 유명한 연꽃들이 분포되어 있고 연잎은 수면을 뒤덮고 있다. 수면 위에 제각기 다른 작은 다리들이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이 다리 위를 건널 때면 마치 연꽃 한 가운데를 건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신서호십경 - 양제경행(杨堤景行)

신서호십경 중 일곱 번째로 양공제 제방을 중심으로 한다. ‘경행’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듯, 양제경행은 어느 한 곳의 풍경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기다란 제방을 따라 걸어감에 따라 보행자가 직접 풍경을 바꾸어 가며 다양한 서호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서호십경 - 쌍봉삽운(双峰插云)

안개 자욱한 날 구름 사이에 남고봉과 북고봉이 낀 듯한 풍경

소제를 걷다가 서북쪽을 바라보면 쌍봉삽운을 볼 수 있다. 높고 큰 천옥산(天目山)은 동쪽으로 뻗어있는데, 그 산맥의 한 자락이 서호와 만나 남북으로 갈라져 서호 풍경구의 남산과 북산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남고봉(南高峰)과 북고봉(北高峰)은 모두 과거에 승려들이 점유하던 곳으로, 두 산꼭대기에 지어져 있는 불탑이 멀리 사찰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뭇 봉우리들보다 높이 솟아 있었다. 봄과 가을에 날씨가 좋은 날에는 푸른 이끼와 하얀 안개, 탑의 끝이 구름 속에서 때로는 숨고 때로는 드러나 멀리서 바라보면 그 기세가 범상치 않다.

남고봉과 북고봉이 있는 천옥산

이 쌍봉삽운은 남송 시대에 서호십경에 속하게 되었으며, 청나라 강희 황제가 그 이름을 쌍봉삽운으로 고치고, 홍춘교 부근에 경비정을 지었다. 쌍봉의 탑이 무너진지 오래된 탓에 이제는 사람들이 이 경치에 원래 내포되어 있었던 의미를 알기 어렵게 되었다.

남고봉은 해발고도 257m로 산을 오르다 보면 높은 산세와 험준한 벼랑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산꼭대기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면 서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그림처럼 아름답다. 북고봉의 해발고도는 314m이며, 이 산의 서쪽에는 영은사로 수천 개의 돌계단이 있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맑은 계곡물이 순환하며 수목도 무성하다. 산의 동쪽에는 케이블카도 있는데 산을 왕복하는데 6~7분정도 소요된다. 

곽장(郭庄)

흔히 단우별서(端友别墅)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송단보라는 실크상인이 청나라 광서제 때인 1907년 건축해 이후 곽씨에게 판 별장이다. 별장 주인인 곽씨가 분양(汾陽) 곽씨라 하여 분양별서(汾阳别墅)라고도 한다. 1950년 이후 다른 용도로 쓰이다가 1991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개장됐다.

곽장 내부

곽장은 정원과 건물을 자연과 어우러지도록 절묘하게 배치했는데, 중국 정원조성의 역사와 현황, 아름다움을 고찰한 <강남원림지>에서는 곽장을 두고 ‘물가에 정자를 잘 만들어져 있고 오문(吳門)의 그물처럼 우아하며 무림지(武林池)에서 옛 풍취가 가장 아름다운 곳’ 이라고 칭찬했다. 서호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옛 건축물 중 하나이다.

신서호십경 - 용정문차(龙井问茶)

용정촌(龙井村)과 용정다원(龙井茶园)

룽홍(龙泓), 룽추(龙湫)라고도 하는 용정(龙井)은 신서호십경 중 하나로 서호 서남쪽의 풍황령산(风篁岭山)의 용정촌에 있다. 오대시기 이곳에 용정사(龙井寺)를 건립했는데 북송 시대에 가면 용정이 유람 명승지로 이름을 알린다. 소동파가 늘 이곳에서 차 맛을 보면서 시를 읊었다고 전하며, ‘용정’은 이곳이 바다와 통해 있는데 바다에는 용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곳에 있는 용정(龙井) 우물의 물은 맑고 투명하고 달콤한 맛이 있어 호포(虎跑), 옥천(玉泉)과 합계 서호 3대 명천으로 불린다. 우물의 물을 한 번 휘저으면 물회오리가 보이니 꼭 휘저어 보고 오자. 용정 옆에는 949년 세워진 용정사의 옛터가 다실로 쓰이고 있으며, 청나라 견륭제가 ‘용정팔경’이라 칭한 과계정(過溪亭)과 신운석(神云石), 일편운(一片云), 용홍동(龙泓洞), 조심소, 풍황령(風篁嶺), 방원암(方園庵), 취봉각(翠峰閣)도 있다.

노용정어다원(老龙井御茶园)

청나라 건륭 황제가 이곳에 와서 용정촌 사자봉 아래 18그루의 차나무를 어차(御茶)에 봉하고 ‘용정팔경’이라는 글씨를 남겼다. 현재 ‘노용정어다원’이라는 곳에 있는데, 지금은 차를 마시는 시음소로 꾸며져 있다. 한 잔에 25위안에서 100위안까지 시음료를 받는다. 용정촌 안으로 들어가면 한 잔에 10위안에 차를 맛볼 수 있다. 여기저기서 차를 팔기도 하는데, 가격이 천차만별이어서 최고급차는 100g에 300위안을 호가한다.

용정차(龙井茶) 

용정차밭에 나는 용정차는 중국 10대 명차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차로 12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아주 어린 싹만을 따서 만들기 때문에 제조과정이 까다롭다. 처음 덖는 과정에서 최종 제품이 될 때까지 솥 안에서 덖고 비비기를 하여 편평한 모양의 차가 되도록 만든다. 차의 맛이 부드럽고 향이 독특하나 우리나라 사람의 기호에는 다소 부적합한 편이다. 중국의 덖음차로 불발효차의 일종이다. 덖음차란 솥에서 찻잎을 고온으로 찌고 말리는 과정을 말한다.

용정차는 신선한 난향을 지녔으며 작설(雀舌, 참새 혀) 모양이다. 70~80℃  물에 차를 우리면 어린 차 싹과 여린 찻잎이 하나하나 피어나 아름답다.

용정차에는 전설이 하나 전한다. 옛날 용정산에서 차를 따며 사는 노부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노인이 그 집을 지나다 노부인의 집에 깨진 절구가 있는 것을 보더니 팔라고 했다. 노부인은 노인이 깨진 절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그냥 주겠다고 한다. 노인이 절구를 들고 갈 장정을 데리러 마을로 내려간 사이, 노부인은 절구에 쌓인 흙을 깨끗이 털어내어 차나무가 있는 곳에 뿌렸다. 욕심 없는 노부인의 마음에 감복했던지, 그 곳의 차나무는 18그루가 되어 오랫동안 잘 살았다고 한다.

용정차 등급 구분하는 법

특급 : 일아일엽(一芽一葉), 즉 어린 순 하나와 잎 하나로 구성돼 있다. 누런 녹색인 녹두색을 띈다.  청명절인 4월 전에 채취한 첫 채엽으로 건차의 잎이 도톰하면서 균등하다. 명전차(明前茶)라고 한다.

1급 : 기본적으로 일아일엽이지만 중간중간 일아이엽도 섞여 있다. 청명부터 곡우 전에 채취한 것이다. 우전차(雨前茶)라고 하여 흔히 특급의 가품으로 속여 판다.

2급 : 일아이엽 형태가 많고 찻잎이 길다. 상대적으로 진한 초록빛을 띈다.

3급 : 2급보다 색이 더 진한 초록색이며 잎의 크기도 훨씬 더 크고 길다. 차를 우렸을때도 단맛 속에 강한 쓴맛이 감돈다.

중국다엽박물관(中国茶叶博物馆)

중국의 차 문화를 소개하기 위한 박물관이다. 연면적 2,244㎡ 부지 위에 1990년 건립된 국립관광박물관이다.

다엽박물관의 찻주전자 모형

중국은 차나무에서 잎을 따서 차를 우려 마시기 시작한 최초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 약 4000년 전부터 차를 마셧다고 한다. 중국에서 차는 기호식품을 넘어 이미 생활의 일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찻잎과 다기, 차와 관련된 생활문화 등을 전시하고 있는 항저우의 차 박물관은 규모가 매우 작고 단촐해서 20분 내외면 충분히 다 볼 수 있다.

모가부(茅家埠) 풍경구

양공제 주변에 옛 부두가 있던 모가부 호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지역이다. 갈대 습지 중심의 모가부 풍경부는 소박하지만 나무와 풀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호반의 버드나무와 잔잔하게 흔들거리는 서호의 물결을 고요한 곳에서 볼 수 있는 보석 같은 곳이다.

이곳에 처음 마을이 들어선 것은 명나라, 청나라 때이다. 다른 풍경구에 비해 찾는 이가 적지만 서호와 차밭, 양공제까지 다양한 볼거리를 한가롭게 모두 즐길 수 있는 보석 같은 곳이다. 철새들이 찾아와 둥지를 트는 곳이기도 해서 망원렌즈를 가지고 와 조류를 관찰하는 이들도 많다.

모가부의 새 둥지

수백년 된 이 마을은 상향고도(上香古道)를 통해 서호와 연결되며, 호수 남쪽에서 용정촌까지를 기다랗게 잇는 용정로(龙井路)를 분기선으로 상부와 하부로 나뉜다. 이 용정로에는 차를 마시는 상점들이 집중되어 있다.

신서호십경 - 삼대운수(三台云水)

삼대산(三台山) 풍경구에 해당하는 곳으로 선현당(先贤堂), 황공망 고거(黄公望故居), 황멸루수헌(黄篾楼水轩), 무상원방(武状元坊), 제홍교(霁虹桥), 삼태몽(三台梦) 등이 복원되어 자리한다. 삼대운수라는 이름은 북송 때 정치자이자 학자였던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쓴 <엄선생사당기(严先生祠堂记)> 중 유명한 문구인 ‘雲山蒼蒼 江水泱泱(운산창창 강수앙앙 : 구름이 걸린 산은 수목(樹木)이 푸르고 강을 이루어 흐르는 물은 길고도 넓어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늘에서 바라본 삼대운수

항저우 용정차를 파는 찻집들도 즐기하며, 고풍스러운 건물과 정자가 곳곳에 펼쳐져 있고 자연환경과 조화를 지우는 곳이다. 서호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유람객이 많지 않아 한가롭게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배를 빌려 타고 노를 젓다 보면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서호십경 - 화항관어(花港观鱼)

소제의 남쪽 끝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서리호(西里湖)와 소남호(小南湖) 사이의 반도 위에 있다. 남송 시기에 환관이었던 윤승(允升)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화가산(花家山) 아래에 오두막집을 지었는데, 그때 함께 조성한 개인 화원이 화항관어의 시초다. 꽃과 나무가 울창하면서도 잘 정돈되어 있으며 물을 연못에다 끌어와 오색의 물고기를 키우기도 했다. 아름다운 풍경때문에 점점 많은 여행객들이 자주 찾아와 이곳의 풍경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당시에는 노원(卢园)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이 화가산 근처에 있다 하여 다시 화항(花港)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건륭제의 글씨

청나라 때인 1699년에는 현엽(玄烨) 황제가 가마를 타고 서호에 왔을 때 관례에 따라 이곳에 ‘화항관어’라는 제호를 써서 호수 옆에 석비로 세웠다. 이후 건륭(乾隆) 황제가 서호를 방문했을 때 다시 시를 지은 뒤 그 제목을 비석의 뒷면에 새겼는데, 시 중에는 ‘화가산 아래에 꽃이 흐르는 항구 가 있고, 꽃이 물고기 몸에 붙으니 물고기가 꽃을 먹는구나.’라는 구절이 있다. 이 석비에 새겨진 건륭제의 친필은 ‘고기 어(魚)’의 아래 네 점에서 점 하나를 빼서 세 점으로 만듦으로꺼 삼수(三水)를 표시하는 방법, 일명 ‘결필(缺筆)’이라는 한자 유희를 보여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참고로 네 점은 물(水)이 아닌 불(火)을 뜻한다.

서호십경 - 소제춘효(蘇堤春曉)

소제에서 보는 안개 낀 봄날 아침의 풍경

소제는 남쪽 남병산에서 시작되어 북쪽 서하령(栖霞岭) 아래까지 이르며, 전체 길이는 3km이다. 북송 시대의 문장가, 학자, 정치가였던 소동파(苏东坡, 1037~1101)가 항저우에서 재직하면서 서호를 준설할 때 나온 흙을 이용해 쌓은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소동파가 서호를 통치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것을 소동파의 제방이라는 뜻에서 소제라고 명명했다. 긴 제방은 남산과 북산을 연결하여 서호에 곱고 아름다운 경관을 더해 주었다. 남송 시기 소제춘효는 서호십경에 가장 먼저 들어갈 만큼 사랑받는 경관이었다.

겨울이 지나면 소제는 마치 느릿느릿 오는 봄을 알리며 ‘소제춘효’를 보일 준비를 한다. 버드나무가 강 언덕에 끼어있고 산뜻한 복숭아나무가 반짝이며, 호수의 물결이 마치 거울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비춘다. 아침햇살에 비친 이슬과 달이 서산으로 질 때 서서히 바람이 불어와 버드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소제의 여섯 다리

소제의 길게 뻗은 제방에는 여섯 개의 아치형 돌다리가 있어서 여행자들이 유유히 산책하며 주위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다리는 남쪽부터 북쪽의 순으로 영파교(映波桥), 쇄란교(锁澜桥), 망산교(望山桥), 압제교(压堤桥), 동포교(东浦桥), 과홍교(跨虹桥)이다.

  • 영파교(映波桥) : 화항공원(花港公园)과 인접해 있고 비가 쏟아지듯 가득히 드리운 버드나무가 있으며,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수면은 출렁이며 흔들린다.
  • 쇄란교(锁澜桥) : 가까이에는 소영주(小瀛洲)가 보이고 멀리에는 보숙탑(保叔塔)이 보인다. 가까운 곳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고 먼 곳은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다.
  • 망산교(望山桥) : 위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정가산(丁家山)의 푸른 이끼가 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서호십경 중 하나인 쌍봉삽운의 우뚝한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 압제교(压堤桥) : 대개 소제 남북의 황금 분할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호수의 배가 동서로 드나드는 입구였다. 남쪽에 소제춘효의 경비정(景碑亭)이 있다.
  • 동포교(东浦桥) : ‘속포교(束浦桥)’가 잘못 전해졌다는 추측이 있기도 한 곳으로, 호수 위에서 일출을 구경하는 좋은 장소 중 하나이다.
  • 과홍교(跨虹桥) : 비 온 후 드넓은 하늘에 뜬 무지개를 볼 수 있으며 호수와 산이 햇살을 가득 받은 모습을 선사해 마치 선경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소영주(小瀛洲) 

서호 중턱에 있는 인공 호수 섬으로 ‘소영주도(小瀛洲岛)’라고도 한다. ‘영주’란 본래 신선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소영주도는 명나라 때인 1607년  전당현령(錢塘縣令)이었던 섭심탕(攝心湯)이 호수 바닥에서 판 진흙을 쌓아올려 조성한 것으로 면적이 약 60㎞, 서호에 있는 세 개의 섬 중 가장 크다. 세 개의 석조탑이 호수 깊숙한 속에 지어져 진흙 퇴적물을 막아준다.

섬의 남북 방향으로는 구곡교와 개망정(開網亭)이, 동서 방향으로는 울창한 대나무 숲길이 있으며, 섬 둘레는 순환로로 되어 있다. 어비정(御碑亭)에는 청나라 강희제가 친필로 남긴 ‘삼담인월’이라는 비석이 남아 있다.

바로 이 소영주 근처로 서호십경을 대표하는 삼담인월이 있다. 소영주 남쪽 끝에 있는 아심상인정(我心相印亭)에 가면 잘 보이는데, 남쪽을 바라보고 수평으로 길쭉하게 지어진 이 정자의 이름은 ‘서로 마음이 통하면 말이 필요 없다(彼此意會 不必言說)’는 뜻이다.

서호십경 - 삼담인월(三潭印月)

호수에 비친 달이 세 개처럼 보이는 풍경

서호에서 보통 ‘삼담’이라고 하면 3개의 석탑과 그 주위의 수역을 말한다. 이 석탑은 본래 송나라 때인 1089년에 각각 2m 높이로 지어졌다가 나중에 다시 지은 것이다. 원래의 석탑은 물빛이 반짝이는 호수 수면 위에 정삼각형을 이루며 세워져 있다. 소영주(小瀛州) 이남의 호수는 달을 구경하기 가장 좋은 곳으로 물이 마치 심연처럼 깊어 달이 깊숙하고 그윽하게 비친다.

소동파는 서호의 진흙을 정리하고 소제를 지을 때 이곳을 가장 깊게 판 뒤 수역의 경계와 호수의 진흙의 퇴적 상황을 표시하기 위해 석탑을 세웠다. 중추절이 다가오고 밝은 달이 하늘에 걸릴 때마다 사람들은 속이 빈 탑 안에 촛불을 넣어 그 불빛이 바깥으로 스며 나오게 했다. 이 때 탑의 그림자, 구름의 그림자, 그리고 달의 그림자가 함께 섞이고, 촛불의 빛과 달빛, 호수의 빛이 서로를 비추면서 산뜻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현존하는 세 개의 탑은 명나라 때 다시 지은 것으로 각 변이 62m가 되는 삼각형 모양을 형성한다. 남송 때 <방여승람(方輿勝覽)>에서는 서호십경을 소개하면서 삼담인월을 ‘서호삼탑’이라고 했다.

삼담인월의 석탑(왼쪽)과 1위안 지폐의 뒷면 일부(오른쪽)

소동파는 소제 건설 이후 어떻게 하면 진흙이 다시 쌓이지 않고 수초가 자라지 않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호수 연안을 사람들에게 빌려주어 마름이라는 풀을 심게 했다. 마름은 제때에 물속 잡초를 없애주는 효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농민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하지만 서호는 너무나 컸고, 사람들이 호수에 마음대로 식물을 심게 되면 제대로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소동파는 서호 중심에 세 개의 돌탑을 지어 이 구역 안에는 풀을 심지 못하게 했다. 이 작은 석탑들이 서호에서 가장 유명한 풍경인 삼담인월이 되었다. 현재 삼담의 석탑은 1위안짜리 지폐 뒷면의 도안으로 사용되고 있다.

소동파기념관(苏东坡纪念馆)

서호 보수에 힘썼던 소동파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4,200㎡ 규모로 개관한 기념관이다. 본관 전시실과 갤러기, 생애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입구 왼쪽에 소동파의 석상이 마치 구름을 따라 날아오르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타이즈완공원(太子湾公园, 태자만공원)

서호 남쪽에 위치한 공원으로 장원과 징센, 두 태자의 관을 모셨다고 전해져 ‘태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각양각색의 튤립과 꽃나무들이 있어 일 년 내내 아름답지만 3월말에서 4월 중순에 특히 아름다우며 항주 시민들의 웨딩사진 촬영지로 유명하다. 중국 국가우수공원설계 대상을 받은곳이기도 하다.

서호십경 - 남병만종(南屏晚钟)

남병산의 저녁 종소리

북송 말 화가 장택단(张择端)이 일찍이 <남병만종도(南屏晚钟图)>를 그려 세상에 알려진 남병만종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병산(南屏山) 아래 정자사라는 절에서 해질 무렵 울리는 종소리가 남병산 절벽에 부딪히면서 산울림이 되는데, 청아하게 서호에 울려퍼지는 그 소리가 바로 서호십경 중 하나인 남병만종이다.

남병만종

남병산 일대의 산마루는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굴이 많으며 산봉우리가 장벽처럼 서 있기 때문에 절에서 밤에 종이 울릴 때마다 종소리가 진동하여 산 위까지 울려퍼진다. 암석, 동굴 등은 소리가 다가오면 음파의 진동을 더욱 빠르게 하여 진폭을 급속히 증대시킨 후 공진을 형성한다. 산 전체가 일종의 스피커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소리는 서호 연안까지 도착하고 맞은편 화강암 절벽에 부딪혀 메아리로 돌아온다.

남병산은 100m 미만 높이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그 형제는 서호의 남쪽 연안에까지 1km 넘게 늘어져 있다. 맑은 날이면 산에 가득한 안개가 푸른 하늘의 흰 구름과 서로 대조되어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비가 오고 안개가 낀 날이면 운무가 이리저리 끼어 있는 산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대는 모습 같아 보인다.

정자사(净慈寺), 흥교사(兴教寺)

뒤쪽 어두운 건물이 정자사, 앞쪽 금색 지붕이 흥교사

후주 때인 10세기 중반에 지어진 혜일영명원(慧日永明院)은 정자사가 되어 영은사(灵隐寺)와 함께 서호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남병산 산자락의 또 다른 유명한 사찰인 흥교사는 972년 북송 말에 지은 것으로 저녁에 울리는 북과 새벽에 치는 종, 범패와 불상, 향 연기와 촛불의 빛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때부터 남병산은 불국산(佛国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게 됐다.

서호십경 - 뇌봉석조(雷峰夕照)

뇌봉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의 풍경

뇌봉석조란 뇌봉탑에서 바라본 해질녘 서호의 풍경을 말한다. 977년 뇌봉산(雷锋山) 위에 지은 뇌봉탑(雷峰塔)은 천 년가까이 정자사 앞에 우뚝 솟아 있다. 주변 산이 작지만 정교하고 아름다운 데다 뇌봉탑을 품고 있어 서호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 뇌봉탑은 북산의 보숙탑과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서로 호응했으며, 서호에 두 개의 탑이 비쳐 대비를 이루며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었다고 한다.

붕괴 전 뇌봉탑(왼쪽)과 신축된 뇌봉탑(오른쪽)

그러나 1924년 뇌봉탑이 무너져 뇌봉석조가 유명무실해지고 뇌봉산의 경치도 모두 허상이 됐다. 심지어 산 이름도 ‘뇌봉석조’에서 ‘뇌봉’을 뺀 석조산(夕照山)으로 바꾸었다. 최근인 2002년 뇌봉탑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복원됐다.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올라갈 수 있으며, 지금의 탑을 짓기 전에 있던 본래 뇌봉탑의 잔재들도 그대로 보관돼 있다.

장교(长桥) 

서호 동남쪽 장교공원 안에 있는 장교는 길이가 겨우 9m인데도 ‘긴 다리’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다. 여기에는 양축(梁祝), 즉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臺)의 사연이 담겨 있다. 동양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양산백과 축영대의 이야기는 중국의 4대 민간전설 중 하나로 그 유명세만큼이나 발원지에 관한 견해도 분분하다. 둘이 함께 공부했다는 서원, 함께 묻혔다는 무덤이 허난, 산둥, 저장, 장쑤 등 여러 곳에 존재한다. 심지어 허난 성의 마샹진(馬鄕鎭)은 아예 행정구역 이름까지 량주진(梁祝鎭, 양축진)으로 바꿨다.

양축 전설 역시 그 버전이 다양한데, 항저우 버전은 다음과 같다. 축영대가 남장을 하고 항저우의 만송(萬松) 서원에 들어갔다가 양산백을 만나게 되어 함께 공부를 하며 가까이 지낸다. 당시 두 사람은 서호의 장교에서 자주 노닐었다. 양산백은 축영대가 여자임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지만, 축영백이 아버지의 부름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차마 헤어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서로를 거듭 배웅하며 장교를 18번이나 오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다리에 긴 다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또 다른 버전에서는 남녀가 이곳 다리 위에서 몸을 던졌는데 그 자리에 돌 두 개가 튀어나왔다 해서 쌍투교(双投桥)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의 다리는 2002년 재건한 것이다.

서호십경 - 유랑문앵(柳浪闻莺)

버드나무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

유랑문앵은 근 40여 년 동안 끊임없이 개발을 겪은 곳으로 본래는 황제만이 즐기던 어화원(御花园)이었다. 새파란 버드나무와 부드럽게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가 여전히 경관의 기조를 이루고 있고, 호수를 따라 난 1km에 달하는 둑과 도로를 따라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백조천당(百鸟天堂)’이라는 초대형 새장이 설치돼 있으며 꽃이 만발한 춘삼월이면 버드나무가 한들거리고 앵무새 소리가 청아한 분위기를 조성해 놓았다.

문앵관(闻莺馆) 동쪽에는 잔디밭과 빽빽한 숲으로 구성된 우의원(友谊园) 풍경구가 있다. 일본 벚꽃을 심어 놓고 북쪽에는 돌을 깔아 단을 쌓아 놓았는데, 그가운데 ‘중일 평화 기념비’가 우뚝 서있다. 문앵관 서쪽에는 유랑문앵을 중건할 때 호수를 메워 만든 큰 잔디밭이 있는데 이 곳의 풀빛은 서호의 푸른 파도와 푸른 산과 멀리멀리 함께 이어져 있다. 거대한 잔디밭의 북쪽에는 강희제가 내린 ‘유랑문앵’ 정자비를 옮겨 세워 두었다. 남쪽에 있는 높고 큰 교목 숲은 잔디밭, 버드나무 해안 및 호수와 산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냄과 동시에 고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경치를 구성하고 있다.

취경원

공원 북부에 있던 전왕(钱王) 사당은 강남 개인 정원의 스타일과 구조 가진 정원으로 개축되었으며 취경원(聚景园)의 옛 명칭을 원용했다. 정원 내에 정자와 누대와 다락과 집, 석가산과 샘과 못, 작은 다리와 흐르는 물, 낮은 담과 투각 도안으로 장식된 창문, 진귀한 화초는 각각 자신의 특색을 뽐내면서도 한 대 어울려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다. 정원 전체의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깊숙한 곳에 이어져 있어 또 다른 세상인 듯 착각하게 만든다.

야화원의 밤 풍경

공원의 동남쪽은 사람들이 정원에서 노닐며 문화 오락 활동을 즐길 수 있는 하는 장소가 되어 노천 무대가 건설되었다. 이리하여 항저우 시민과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아침에 단련을 하고 한가롭게 휴일을 보내거나 명절과 축제를 지내기에 좋은 장소가 되었다. 매년 여름과 가을이면, 이곳에서 더위를 잊게 하게 하는 야화원(夜花园)과, 노래와 춤, 희곡, 영화 등이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다채롭게 펼쳐진다. 가끔 열리는 꽃 전시회와 연등회, 민속공연 등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곳이다.

신서호십경 - 전사표충(钱祠表忠)

전사표충에는 전왕사(錢王祠)라는 절이 자리한다. 오나라, 월나라의 삼대오왕(三代五王)을 모시는 절인데, 오나라와 월나라는 항주에 도읍을 정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호수와 제방을 다듬은 나라들이다. 북송 때 표충관(表忠觀) 을 지어 전왕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명나라 때 지금의 자리로 전왕사가 옮겨 오게 됐다.

서호천지(西湖天地)

서호 풍경을 즐기며 식사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지구로 현대적인 상점이 즐비하다. 총 너비는 막 5만8천㎡이며 홍콩과 상하이 기업의 합작으로 미국 디자이너의 설계에 따라 2003년 개장했다. 항저우 전통 정원과 건축, 그리고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서호십경 중 하나인 유랑문앵과 인접하고 있으며 서호의 고전적 풍경과 잘 어우러져 있어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용금문(涌金门)

과거 용금문이 있던 자리를 다시 꾸민 유적으로 옛 이름은 풍예문(豊豫門)이다. 소동파는 항상 두 명의 노병을 데리고 용금문 아래 연못인 용금지(湧金池)에서 놀았다고 한다.

중국의 4대기서 중 하나인 <수호전>에 등장하는 108 장수 중 한 사람, 장순(张顺)을 테마로 조성한 곳이다. 장순은 본래 어부였는데 훗날 전공을 세워 장수가 되었다. 난이 일어났을 때 항저우 성 전투에 참여했는데, 적성수로에 몰래 잠입해서 불을 놓아 신호를 하기 위해 밤중에 서호를 체험쳐 용금문을 기어올라갔다가 적에게 발각되어 이곳에서 돌과 화살을 무참하게 맞아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신서호십경 - 오산천풍(吴山天风)

오산에서 내려다 본 서호 전경

서호 남동쪽에 위치한 오산은 94m 높이의 산으로 꼭대기에 성황각(城隍阁)이 있어 구름 낀 특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산 위에 오르면 서호와 도시 곳곳을 모두 볼 수 있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 같다 하여 신서호십경 ‘오산천풍’으로 선정됐다.

오산은 오월 때에는 중시산(中时山), 당나라 때에는 청산(青山)이라고 불렀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순례나 관광을 목적으로 찾는 이들도 항상 붐볐지만, 20세기 이후로는 다른 곳에 밀리고 파손이 거듭되면서 점차 방문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 공산당화 항저우 시의 협력으로 남측 도로 확장사업이 완공되고 오산광장이 건설되면서부터 오산 풍경구 개발이 이루어져 2000년부터 개방됐다.

오산 성황각

오산에 우뚝 솟아 있는 성황각은 높이가 무려 41.6m나 되는 7층 건물로, 용비봉무(龙飞凤舞), 즉 용이 날고 봉이 춤추듯한 형세를 연상케 한다. 남송과 원나라 시대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출입문은 버섯바위로 만들어져 있다. 단단한 기초석은 고대 항저우 성벽의 오랜 역사를 보여 준다.

청하방 거리(清河坊)

항저우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오래된 거리로 옛 항저우의 모습을 보존해 재현한 곳이다. 전통소품과 잡화를 파는 가게가 양옆으로 늘어서 있다. 찻집, 한약방, 수공예품점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길게 늘어선 거리 가운데에는 전통공예품 실크 옷 신발 가면 초상화 장난감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길게 늘어져 있다. 19세기 말 태평천국의 난으로 이 지역은 거의 잿더미가 되었고, 지금 청하방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건물들은 대부분 태평천국 운동 이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위 설명 자료는 아래 링크에 올려둔 한국어 지도의 순서대로 되어 있으니

지도를 함께 다운로드해서 코스대로 돌면서 보는 게 좋다.(지도에 없는 것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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