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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동유럽 여행 URL 복사

[오스트리아] 빈(Wien)(비엔나, Vienna)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21. 12. 29. by 솜글

빈(Wien)(비엔나, Vienna)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수도로 알프스 산맥의 동쪽 끝, 도나우 강변에 위치하며 교통의 요충지이다. 로마제국의 북쪽 수비를 위해 숙영지가 설치된 데서 유래하며 후에 바벤베르그 가와 합스부르크 가의 거성 도시로서 발전했다. 1754년에 처음으로 실시된 인구조사에서 인구는 17만 5,000명이었다. 1814~15년에는 나폴레옹 전쟁 후의 유럽 질서를 결정하는 국제회의가 개최된 곳이다.

1848년, 파리의 2월 혁명이 비엔나에도 파급되어 재상 메테르니히가 실각하고 혁명이 프라하와 헝가리 등 제국 전체로 확산되어 5월에는 황제까지도 비엔나를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비엔나는 이때 시민자치제를 실현해 시민이 국민군을 만들어 치안유지에 나섰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비엔나는 시 영역이 확대되어 많은 산업노동자의 도시가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더불어 합스부르크 제국이 붕괴하자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사회민주당이 집권했다. 사회민주당은 노동자의 거주환경을 개선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선거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동자를 위한 집합주택 건설을 추진했다.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수도의 지위를 상실하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부활된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수도로 정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7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빈 분리파가 탄생하여 근대 예술운동의 거점이 되고 아울러 근대건축이 꽃을 피운 곳이기도 하다.

국립 오페라 극장(Wiener Staatsoper)

파리 오페라하우스, 밀라노 오페라하우스와 함께 세계 3대 오페라하우스로 불린다. 규모로는 유럽에서 가장 크다.

이 오페라 하우스의 건립은 19세기 후반에 구시가의 성벽을 철거하고 대로인 링(Ring)을 조성하면서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링은 전체 길이 4km, 폭 56m의 환상 대로로, 도나우 운하를 향해 말발굽을 그리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길을 따라 늘어선 국회의사당, 미술관, 시청사, 부르크 극장 등도 이때 건설됐다.

완공 연도는 1869년이며 초연작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Don Giovanni)>이다. 1897년부터 10년 동안 구스타프 말러가 총감독으로 있으면서 일류 오페라하우스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카를 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클라우디오 아바도 등 세계적인 거장들이 이곳의 음악 감독 자리를 거쳐 갔다.

1869년 5월 25일 개막공연인 &lt;돈 조반니&gt;의 공연 안내문

빈을 상징하는 건축물답게 링 대로에서도 발군의 웅장함을 자랑한다. 건물의 정면은 장식이 많은 네오르네상스 양식이며, 내부는 정면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대계단과 샹들리에가 빛나는 로비, 진홍빛 객석, 황금빛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흰색 발코니 등으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공연이 있는 저녁에는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불을 밝힌다.

오페라와 발레 공연이 매년 300회 이상 열리며 요금은 좌석의 위치뿐 아니라 지휘자나 출연자, 공연 내용에 따라 달라진다. €200가 넘는 비싼 좌석도 있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관객을 위해 €2 정도의 저렴한 입석도 있다.

설계자의 목숨을 앗아간 오페라 극장

1869년에 이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생각하지 못한 결함이 발견되었다. 건축 도중에 링 도로를 포장하면서 길바닥의 높이가 1m 정도 높아졌다. 그래서 건물 1층은 낮아 보이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건물을 ‘가라앉은 상자’라고 흉을 보았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런 사태에 대해 설계자 뉠(E.v.D. Nüll)은 낙담했고 1868년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빈 사람들이 극장의 외관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많고 말이 많았으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을까? 빈 사람들에게 극장은 그토록 소중했던 것이다. 극장은 그들로 하여금 일상의 정치적 소외와 권태를 잊게 해주는 신비스럽고 성스러운 곳이었다. 폴가는 극장의 이런 마법 같은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주 자연스럽던 것이 극장에서는 자연스럽지 않게 작용하며, 단순한 것이 전혀 단순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원인은 무대의 공기가 고유의 신비로운 굴절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거기에 들어간 것은 결코 ‘자연스럽게’ 되돌아와 관객의 귀에 도달하지 않는다.”

오늘날도 이 환상의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사람들은 국립 오페라 하우스에서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 등의 오페라를 관람한다. 공연은 여름 휴가철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오전 공연과 오후 공연까지 합쳐 하루에 세 차례씩 공연이 열리는 날도 있다. 일반적으로 오페라를 공연하려면 가수, 합창단, 무용단, 오케스트라, 스태프 등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며, 엄청난 재정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빈 시는 이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오페라 시즌은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이며 7~8월은 공연을 하지 않고 가이드 투어로 내부 관람만 가능하다.

자허 토르테(Sachertorte)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디저트이다. 초콜릿 스폰지 케이크에 살구잼을 넣고 진한 초콜릿을 입혀 만든 것으로, 진한 초콜릿 케이크이면서 그다지 달지 않고 부드러운 특징이 있다. 1832년에 오스트리아 사람인 프란츠 자허(Franz Sacher)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케이크로, 초콜릿의 쌉싸름함에 살구잼의 새콤함이 대비된 맛이 특징적이며 전통적으로 촉촉한 슐라그(schlag, 당을 첨가하지 않은 휘핑크림)을 얹어 먹는다.

자허토르테는 긴 법적 분쟁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널리 알려져 오늘날 전세계인이 즐겨 먹는 초콜릿 케이크가 되었다. 자허토르테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오스트리아에서는 매년 12월 5일을 ‘자허토르테의 날(National Sachertorte Day)’로 지정 하고 있다.

자허토르테의 어원

자허토르테는 빈에 살던 프란츠 자허(Franz Sacher)의 이름인 자허(Sacher)에 ‘가운데에 크림이나 잼을 바른 스폰지 케이크’를 의미하는 독일어 토르테(torte)가 붙어 만들어진 이름이다.

자허토르테의 종류

호텔 자허(Hotel Sacher)와 데멜(Demel) 제과점의 자허토르테는 그 명칭과 조리법이 다소 다르다. ‘Eduard Sacher Torte(에두아르드 자허 토르테)’ 또는 ‘Demel’s Sachertorte(데멜 자허토르테)’로 표기되는 데멜 베이커리의 자허토르테는 케이크의 초콜릿 아이싱 아래에 한 층의 살구잼이 있는 반면에 ‘Original Sacher-Torte(오리지널 자허 토르테)’라 표기되는 호텔 자허의 자허토르테는 케이크 안쪽에 두 층의 살구잼이 있다. 호텔 자허의 ‘자허 푼치토르테(Sacher Punschtorte)’는 오리지널 자허토르테에 술이 첨가된 것이다.

자허토르테의 기원과 역사

자허토르테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32년이다. 어느 날 오스트리아의 외교가인 클레멘스 벤첼 로타어 폰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 공이 빈 회의에 참석할 각국 대표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주방에 특별한 디저트를 주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메테르니히 공의 직속 요리사가 앓아 눕는 바람에 당시 16살에 불과했던 2년차 견습생 프란츠 자허(Franz Sacher, 1816~1907)가 연회에 제공할 초콜릿 케이크를 대신 만들었고, 바로 이때 만든 케이크가 자허토르테의 모태가 되었다.

프란츠 자허

프란츠 자허(Franz Sacher)의 아들인 에두아르드 자허(Eduard Sacher)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요리사가 되었고 아버지가 빈 연회에서 사용했던 레시피를 개발하여 현재의 자허토르테를 만들었다. 에두아르드 자허는 1876년에 빈에 호텔 자허(Hotel Sacher)를 세워 성공적으로 운영하였으며 그 곳에서 자허토르테를 판매했다.

그러나 에두아르드 자허와 그의 부인 안나 자허가 죽으면서 호텔은 재정적으로 파산상태가 되었고 소유권이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 그 후 에두아르드 자허의 아들인 에두아르드 자허 주니어(Eduard Sacher Jr.)는 빈의 데멜(Demel) 제과점에 취직했고, 에두아르드 자허토르테의 독점판매권을 데멜 베이커리에 넘기게 되었다.

자허토르테를 둘러싼 법정 싸움

1954년에 들어 호텔 자허의 새로운 주인은 자허토르테의 정통성과 ‘오리지널 자허토르테(The Original Sachertorte)’의 이름 사용권을 놓고 데멜 베이커리를 고소했다. 호텔 자허와 데멜 베이커리 사이에 ‘달콤한 7년간의 전쟁(sweet seven year’s war)’이라 불리는 긴 법적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지루한 법적 공방 끝에, 1963년 법정은 ‘오리지널 자허토르테(The Original Sachertorte)’의 사용 권한을 호텔 자허에게 주었고, 대신 데멜 베이커리에는 ‘에두아르드 자허 토르테(Eduard Sacher Torte)’라고 쓰인 삼각 장식을 사용할 권한을 주었다. 흥미롭게도 이 법적 분쟁은 자허토르테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덕분에 오늘날 자허토르테는 많은 이들이 즐겨먹는 초콜릿 케이크가 되었다.

아인슈페너(Einspanner)

빈에는 비엔나 커피가 없다. 우리가 ‘비엔나 커피’라고 부르는 커피의 이름은 본래 아인슈페너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페너는 에스프레소 위에 하얀 휘핑크림을 듬뿍 얹은 커피를 말한다. 기호에 따라 물 대신 데운 우유를 넣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에스프레소와 물을 1:3 정도의 비율로 섞고 설탕을 넣은 후 휘핑크림을 얹는다.

빈에서 유래해 3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차가운 생크림의 부드러움과 뜨거운 커피의 쌉싸래함,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진해지는 단맛이 한데 어우러져 한 잔의 커피에서 세 가지 이상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여러 맛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 크림을 스푼으로 젓지 않고 마신다. 아인슈페너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오스트리아의 교통수단이었던 마차의 마부들이 설탕을 젓지 않아도 한 손을 이용해 마실 수 있도록 고안해 내었다는 것이다.

빈 시립공원(Stadtpark)

빈 시의 첫 시립공원으로 1820년에 조성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공원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약 백년 전 이 공원은 빈의 귀족들이 사교의 장소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프랑스 풍으로 꾸며진 정원 안에는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소위 ‘귀족 구역’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현재는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가 되었다.

공원의 북쪽 코너에는 1907년 암살된 황후 엘리자베스의 조각상이 있다. 온몸이 금색으로 된 음악가 요한 슈트라우스의 조각상은 여행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다. 모차르트의 동상 근처에는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유리 온실이 있는데, 이 안에는 외국에서 들여 온 다양한 종류의 나비들이 살고 있다. 온실 주변에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어 아름다운 공원 안에서 분위기 있게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수도 있다. 1년 내내 꽃을 볼 수 있을 만큼 꽃의 종류가 다양하고 수목이 우거져 아름답다.

쉔부른 궁전(Schloß Schönbrunn)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름 주거지였던 궁전으로 ‘합스부르크 옐로우’로 알려진 독특한 색채의 건물은 내부에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로코코 양식이 주를 이루며 황금으로 된 장식, 크리스털 샹들리에, 커다란 거울 등을 볼 수 있다. 방이 무려 1,441개나 있는 초대형 궁전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이기도 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그녀의 남편인 황제 프란츠 1세는 쉔부른에서 여름을 보냈으며, 그들이 통치하던 시절 여섯 살 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궁전에 초대받아 여제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쉔부른에서 출생해 여든여섯의 나이로 이곳에서 죽게 된다. 이 궁전은 프란츠 요제프의 아내이며 애칭으로 ‘시시’라 불리기도 했던 엘리자베트 황후와의 인연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쉔부른을 매우 사랑하여 결혼한 이후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쉔부른에서 연주회를 가진 6세의 모차르트. 이때 모차르트는 연상의 어린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했다고 한다.

17세기에는 사냥 별장이었으며, 터키가 빈을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던 자리에 세워졌다. ‘쉔부른’이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샘물을 의미하는데, 이곳에 왕실의 식수를 제공해 주던 천연 샘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쉔부른 궁전은 웅장한 신고전주의풍 아치들, 모조 로마 유적, 화려한 분수, 인상적인 종려나무 온실을 완벽하게 갖춘 눈부시게 화려한 대정원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궁전에는 또한 프란츠 황제가 1750년대에 조성한 작은 동물원의 후손인 동물원도 있다. 이 동물원은 여전히 원래의 자리에 남아 있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때문에 동물 우리가 상당히 작은 편이다.

1918년 카를 1세 황제가 왕위에서 물러나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이 될 때 카를 1세가 퇴임 연설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궁전은 공화국 소유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피해를 입어 1950년대에 복구되었다. 오늘날 이 궁전은 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빈 자연사 박물관(Wien Naturhistorisches Museum)

1750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 보관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빈 미술사 박물관과 함께 국왕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제국광장 건설계획의 일환으로 1889년 8월 10일 개관했다.

과학박물관 중 유일하게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Sunday Times)>가 선정한 세계 10대 박물관에 이름을 올렸다. 가까이에 위치한 현대미술관 건물과 건축학적 기법은 물론 분위기까지 흡사하며, 박물관 건물 앞에는 지혜로운 정치로 국민의 존경을 받은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의 동상이 서 있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연에 관한 흥미진진한 수집품들로 가득 차 있는데, 라키오사우루스·아파토사우루스·앙킬로사우루스 등 공룡 화석이 많이 있고, 해충관·박제관·미생물관·동물관이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미술품인 조각품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117kg의 거대한 토파즈(황옥) 원석, 약 1,500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든 마리아 테레지아의 보석 부케 등 3만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von Willendorf)

1908년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근교의 구석기 시대 지층에서 고고학자 요제프 촘바티가 발견한 11.1cm 키의 여자 조각상이다. 발굴 당시 모래와 화산재 지층의 25cm 깊이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발견하자마자 물로 씻어냈기 때문에 색칠의 흔적이 없어져 버렸지만, 1955년 조사 결과 붉은 황토와 같은 산화철 화합물로 색칠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재료는 빌렌도르프에서는 나지 않는 어란석(oolite)이라는 석회암인데, 2007년에 원재료가 체코 브르노(Brno)의 스탄카 스칼라(Stranka skála) 지역에서 온 돌임이 밝혀졌다.

1990년에 조각상 발견 지점의 주변을 조사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 석상은 구석기시대인 기원전 2만 2000년에서 기원전 2만 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일부에서는 기원전 3만 년 전까지로 보기도 한다.), 인간의 모습을 담은 최초의 예술품 중 하나이다.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나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보다도 1만 년 이상 앞선 것이며, 현생 인류의 기원인 크로마뇽인이 제작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만큼 오래된 유물이기 때문에 이런 여체 석상이 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발견하던 날의 발굴 현장

처음에 '비너스'라는 별명이 붙은 것처럼 이 석상이 태고의 이상적인 여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는 학자가 있다. 한편 선사 시대 유럽의 풍요의 여신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다산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면 뚱뚱함은 수렵 생활을 하는 사회의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을 나타내며, 이 석상이 성공과 안녕의 상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이상적으로 표현한 여성상이다. 커다란 유방을 늘어뜨리고 허리는 매우 굵으며, 배는 불룩 나와 있고 지방이 풍부한 엉덩이는 매우 잘 발달해 있으며 성기가 강조되어 있다. 때문에 생식과 출산, 다산의 상징으로 주술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몸통에 비해 작은 팔은 가슴 위에 올려져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머리는 땋은 머리이고 눈, 또는 모자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

석상의 다리는 스스로 설 수 없게 생겼기 때문에 어딘가에 세워 놓았기보다는 누군가 지니고 다니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런 점 때문에 석상이 여신이라기보다는 행운의 부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다산을 위한 부적으로서 질에 삽입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보석 부케(Edelsteinstrauß)

보석 전시관에는 2,102개의 다이아몬드와 761개의 유색 보석이 들어간 마리아 테레지아의 보석 부케가 있다. 이것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Franz I. Stephan)의 세례명축일 선물로 마련한 것으로, 바로크 양식의 보석세공품 중에서도 예술성과 가격 면에서 모두 독보적으로 뛰어난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꽃병은 자연산 크리스탈을 깎아 만들었고 나뭇잎은 초록색 실크로 제작됐으나 지금은 색이 바래서 선명한 녹색은 아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남편이 추진하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경제성장 촉진 정책(보석광산산업 육성)에 대한 지지의 의미로 이 보석 부케를 주문 제작했다고 한다. 유럽 보석 역사상 가장 중요한 컬렉션 중 하나이다.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 자리한 빈 미술사 박물관은 맞은편의 쌍둥이 건물 ‘자연사 박물관’과 함께 제국 광장 건설의 일환으로 지어졌으며, 1891년에 개관해 오늘에 이른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에 꼽힌다. 박물관은 수 세기 동안 수집된 합스부르크가와 여러 후원자들의 방대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바벨탑>과 <농민의 결혼식>을 필두로 한 브뤼헬의 컬렉션이 충실하며, 벨라스케스의 <흰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크라나흐의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 등이 특히 유명한 작품이다. 그 밖에도 뒤러, 루벤스, 티치아노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현관 출입구로 들어서면 헝가리의 화가 문카치의 천장화를 만날 수 있다. 1층은 고대 그리스·로마, 고대 이집트의 조각과 응용미술을 전시하며, 2층에는 미술사 박물관의 대표적인 거장들의 명화를 전시하고 있다. 건물은 중앙의 홀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ㅁ자 구조이다. 한쪽은 루벤스, 렘브란트, 크라나흐 등의 작품을 전시한 네덜란드‧플랑드르‧독일 회화관, 나머지 한쪽은 라파엘로, 브론치노, 카라바조 등의 작품을 전시한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회화관이다. 현관 로비 바로 위에 있는 카페는 간단한 식사를 위해 마련된 곳이다. 아름다운 돔 천장 아래의 홀에서 우아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호프부르크 왕궁(Hofburg Wien)

약 650년의 역사를 지닌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이다. 1220년경에 세워진 이래 여러 군주들이 새로운 건물들을 차례로 증축하면서 다양한 건축 양식의 집합체가 되었다. 13세기에 건축되었던 구 왕궁은 이후 증축과 개축을 거쳐 16세기에 페르디난트 1세가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로 완성했다. 18세기 카를 6세까지의 역대 황제가 구 왕궁에 거주했다.

구 왕궁에서 가장 오래된 스위스 궁에는 15세기 전반에 조성된 왕궁 예배당과 왕실 보물관이 있다. 왕실 보물관에는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진기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6세기에는 아말리아 궁을 지었는데 서로 다른 양식의 건물이 혼재된 점이 독특하다. 17세기에는 레오폴트관이, 18세기에는 겨울철 승마학교와 도서관 등이 건설되었다.

19세기에는 성벽을 제거하고 광장을 비롯한 정원이 조성되었다. 19세기 후반인 1914년에는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신 왕궁이 건설되면서 2,000개가 넘는 방을 갖추었다. 현재는 박물관을 비롯해 대통령 집무실과 국제 회의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 위주로 공개하며,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곳인 레오폴트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왕궁의 정문에 해당하는 미하엘 문(Michaelertor)은 미하엘 광장 쪽으로 나 있고 주변에는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일명 시시) 황후가 머물던 아파트먼트, 궁정 은식기 컬렉션 건물이 들어서 있다. 18세기에 지은 바로크 양식의 건물인 황제의 아파트먼트는 총 20개의 방으로 꾸며져 있다. 황제를 알현할 신하가 대기했던 방에는 프란츠 황제의 초상화가 있고 황제의 집무실에는 엘리자베트 황후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궁정 은식기 컬렉션 건물에서는 합스부르크가의 왕실 행사 때 사용했던 도자기, 은식기, 유리잔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밀라노에서 제작되었다는 33m의 금빛 대형 쟁반이 시선을 압도한다.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Prunksaal der Österreichischen Nationalbibliothek)

호프부르크(Hofburg) 신왕궁에 있다. 역사가 14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도서관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으로 꼽힌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면서 국립 도서관이 되었다. 소장 자료가 2008년 현재 790만 점의 방대한 규모로, 오스트리아 문화재의 보고로 불린다. 소장 자료 중 상당수가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이 도서관은 특히 아름다운 외관과 내부 장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꼽혀 빈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들른다. 도서관의 메인 홀인 ‘프룬크잘(Prunnksaal, 영광의 홀)’은 신성로마 황제 카를 6세(Karl VI, 재위 1711~1740)가 법원 도서관으로 지정한 곳으로 길이 77m에 이르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돔 모양의 둥근 천장 아래 대리석으로 된 기둥과 계단이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2쌍의 대리석 기둥이 돔 모양의 둥근 천장을 지지하고 있으며, 서가가 벽을 따라 늘어서 있다. 천장은 바로크 시대의 화가 다니엘 그란(Daniel Gran)이 1739년에 제작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현재의 모습은 1769년에 마울베르츠(Franz Anton Maulbertsch)가 복원한 것이다. 홀 중앙에는 카를 6세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여성 관련 자료를 따로 모아 놓은 아리아드네(Ariadne)실은 1992년에 설치되었다. 1998년 통과된 연방 예술품 복원법에 따라 나치 시절에 약탈당했던 소장품들을 반환받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2002년에 제정된 박물관법에 따라 오스트리아 문화유산의 보존과 관리 및 활용의 중심 역할을 이 도서관이 맡고 있다.

소장된 장서는 약 260만 권에 이르며, 요제프 2세(Joseph II, 재위 1765∼1790)의 종교개혁 기간 동안 폐쇄되었던 수도원 책들, 오스트리아의 융성을 구축한 영웅이자 서적수집가로 유명한 오이겐(Prinz von Savoyen Eugen, 1663~1736)의 책들도 소장하고 있다.

타임 트래블(Time travel)

약 50분 간 7개의 다른 스테이션에서 4D로 빈 역사의 하이라이트를 체험할 수 있다. 로마 시대부터 빈의 커피 하우스 문화, 투르크 시대, 프란츠 조셉 황제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흑사병에서 살아남아 아쿠구스티노를 만나고, 모차르트와 다뉴브 왈츠의 창시자인 요한 스트라우스도 만나게 된다. 레오폴트의 오스트리아 독립 조약 서명을 체험하고 나면 마차를 타고 빈을 비행하며 돌아오게 된다.

Sturm(슈투엄)

오스트리아에서는 9~10월경에 와인을 만들기 위한 포도를 수확하는데, 포도가 와인이 되는 과정에서 아주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우윳빛 액체가 생성된다. 색깔과 맛이 한국의 막걸리와 아주 비슷하다. 이 와인이 바로 슈투엄(Sturm, 발효가 덜 된 오스트리아 햇와인)이다. 막걸리와 슈투엄 둘 다 여과되지 않은 발효주기 때문에 병에 담아두면 침전물이 생겨, 함께 놓아두면 그 모습이 정말 비슷하다. 슈투엄은 덜 숙성시킨 상태에서 바로 마시는 햇와인이라 단맛이 강한 포도주스와 같은 맛이 난다.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

빈의 유력자 오이겐 폰 사보이 공(Eugen von Savoyen)이 여름 별궁으로 사용하던 궁전이다. 오스트리아 바로크 건축의 거장 힐데브란트(Johann Lukas von Hildebrandt)가 설계했다. 아름다운 바로크 건축물로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716년 별궁인 하궁(Unteres Belvedere)을 세웠으며, 1723년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상궁(Oberes Belvedere)을 지었다. 이탈리아 어로 전망이 좋다는 뜻의 벨베데레 궁전은 궁전 테라스에서 보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상궁과 하궁 사이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있어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뒤 합스부르크가에서 벨베데레 궁전을 매입해 증축하고 미술 수집품을 보관했다. 후에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는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벨베데레 궁전의 구조

상궁과 하궁

벨베데레를 이루는 상궁과 하궁은 모두 힐데브란트가 설계했다. 상궁은 하궁에 비해 보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궁 앞의 연못은 웅장함과 화려함을 더해준다. 큰 정원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 두 궁전의 벨베데레 양식은 흔히 볼 수 있는 정원과 건축의 관계가 아니어서 더욱 흥미롭다.

얼마 전까지 상궁은 19·20세기 회화관, 하궁은 오스트리아 미술관(Österreichische Galerie)으로 중세와 18세기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용도로 사용했으나 현재는 대부분의 작품을 상궁으로 옮기고 하궁에서는 매번 바뀌는 주제에 따라 특별 전시를 하고 있다.

벨베데레 궁전의 정원

정원은 위에서 아래로 단을 이루며 꾸며져 있다.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며 세 개의 단차를 가지고 있다. 상궁에서 내려다보면 첫째 단은 화단이 없이 잔디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번째 단은 양쪽 중앙에 연못과 분수, 화단을 두고 있으며 마지막 하궁 쪽의 단은 숲을 연상케 하는 듯 나무를 빽빽이 심고 있다.

좌우 대칭을 이루는 전형적인 프랑스식 정원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완전한 평면이 아닌 노단 형식의 단차를 지형적으로 살리는 이탈리아식 정원 양식도 보이고 있다.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과 정원이 잘 어우러진 독특한 공간구성을 가진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벨베데레 궁전의 회화 컬렉션

벨베데레 궁전은 클림트(Gustav Klimt)의 회화 컬렉션이 충실하다. 그림에 금박을 사용해 독특한 분위기를 내는 클림트의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그의 대표작인 <키스(The Kiss)>, <유디트Ⅰ(Judith I)>를 비롯해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초상(Portrait of Adele Bloch-Bauer)> 등 유명 작품 외에 풍경화도 보유하고 있다. 클림트에게 수학한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걸작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나 <포옹(The Embrace)>,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의 작품 등도 인기 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의 <웃는 자화상(Selbstbildnis, Iachend)>도 눈길을 끈다. 상궁 2층에는 <오이겐 공의 승전>이라는 프레스코화가 있다. 회화 작품 외에 독일 조각가인 프란츠 메서슈미트의 찌푸린 얼굴을 주제로 한 두상 연작 등도 만나볼 수 있다.

클림프의 <키스>

앙커우어 인형 시계(Ankeruhr)

두 개의 앙커우어 보험회사 건물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시계이다. 길이 10m의 공중회랑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계가 달려 있는데, 1917년 프란츠 매츄가 설계한 이 시계는 역사적 인물들을 묘사한 12조의 인형이 들어 있다가 매시 정각이면 당대의 음악과 함께 한 조씩 문자판 위로 나와 시각을 알려 준다. 12조의 인형이 모두 나오는 정오에는 이 곳 호어마르크트가 관광객들로 성황을 이룬다.

등장인물로는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하여 카를 대제, 오이겐 공, 마리아 테레지아 등이 있으며, 제일 마지막에는 하이든이 나온다.

성 페터 성당(Katholische Kirche St. Peter)

792년 샤를마뉴 대제가 설립했다는 학설이 있지만 아직 증명되지 않았고, 공식적인 기록은 1137년 건축됐다는 언급이다. 1661년 화재로 임시 수리되었다가 1701년 새로운 증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1722년 빈 최초로 돔형 건물로 완공했다. 이후 1733년 봉헌됐다.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본따 설계했으며 깜짝 놀랄 만큼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실내장식이 유명하다.

성 베드로의 생애를 표현한 프레스코화 액자가 성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데 이것은 1998~2004년에 보수된 것이다. 벽면과 기둥에는 독특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성당은 1783년 10월 26일 모차르트가 <다단조 미사곡>을 초연한 곳으로 유명하며, 이것을 기념해 잘츠부르크 음악제 때 이 성당에서 모차르트의 <다단조 미사곡>이 연주된다.

성 슈테판 대성당(Domkirche St. Stephan)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로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고, 1258년 빈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1359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헐어버리고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였고,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독일군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구를 시작하여 대부분 옛 모습을 찾았다. 성당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 슈테판에서 딴 것이다.

성 슈테판 대성당은 옛 건물이 가득 들어찬 구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다. ‘빈의 혼(魂)’이라고 부를 정도로 도시의 상징으로 꼽힌다. 공사기간이 65년이나 걸렸으며 건물의 길이가 107m, 천장 높이가 39m에 이르는 거대한 사원이다. 높이 137m에 달하는 첨탑과 25만 개의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이 눈에 띈다. 첨탑이 137m인 것인 창세기에 언급된 노아의 방주의 길이인 300큐빗에 맞춘 것이다.

성당 지붕에 장식된 합스부르크 가의 상징, 독수리 문장

보헤미아 왕이 세웠던 거인의 문과 이교도의 탑도 남아 있다. 정면의 이교도의 탑은 당나귀 귀처럼 세워져 있는데, 고딕 양식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를 풍미했던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이교도의 탑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곳에 고대 로마 신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입구의 문도 같은 양식이다. 따라서 슈테판 대성당은 원래 이곳에 있던 건물 입구 부분을 그대로 살린 채 나중에 전체적으로 고딕 양식으로 확장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교도의 탑

입구가 거인의 문이라고 불리는 데도 이유가 있다. 기초공사를 위해 땅을 팠을 때 엄청나게 큰 뼈가 발견됐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노아의 홍수 시대에 물에 빠져 죽은 거인의 발뼈라고 생각하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맘모스의 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주 출입구인 거인의 문

입구 바로 왼쪽 벽에는 두 개의 쇠막대기가 박혀 있다. 짧은 것은 78.6cm이고 긴 것은 89.6cm인데, 이것은 옷감 길이의 단위인 당시의 ‘1야드’의 표준이라고 한다. 긴 것은 일반 옷감, 짧은 것은 린넨 옷감의 표준 척도로 사용됐다고 한다.

입구 왼쪽의 쇠막대기

거인의 문으로 성당 안에 들어서면 왼쪽 끝에 작은 규모의 성 십자가 예배당이 있는데, 이곳은 모차르트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이다. 예배당 바닥에는 오스만투르크 군대를 몰아낸 전쟁영웅 오이겐 공(Prinz Eugen)의 묘소가 있다.

왼쪽 두 번째 높은 기둥 아래를 감고 올라가는 계단에는 고딕 양식의 설교단이 있다. 당시에는 마이크나 스피커가 없었기 때문에 교인들이 설교를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기둥을 세워 설교단을 만든 것이다.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된 이 설교단에는 서방 기독교의 4대 교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무스, 성 그레고리우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난간에는 두꺼비, 도마뱀 등의 장식이 조각돼 있는데 이는 선과 악의 투쟁을 상징한다. 계단 꼭대기에는 돌로 만든 강아지가 있어 침입자로부터 설교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아래에 빵떡모자를 쓰고 창문을 통해 몸을 밖으로 살짝 내밀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다. 오르간을 등으로 바치고 있는 듯한 그는 손에 컴버스과 직각자를 들고 있고, 아래에는 ‘M.A.P가 1515년 제작했다’는 큼지막한 문구도 보인다. 이 인물은 안톤 필그람(Anton Pilgram, 1460~1516)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예술가의 사회적 위상이 그리 대단치 않았고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오스트리아에서는 사정이 달랐는지 예술가가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큼지막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안톤 필그람

북쪽 탑으로 올라가는 입구 건녀편에는 15세기에 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 받는 조각상이 있다. 빈 사람들은 이를 두고 ‘치통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원래 이 상은 성당 밖에 있었고 사람들이 꽃을 바치곤 했는데, 꽃이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천으로 묶어 놓곤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청년 세 명이 지나가다가 그리스도의 얼굴이 천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보고는 마치 예수가 치통을 앓는 것 같다며 웃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밤 세 사람 모두 집에서 원인 모를 심한 치통을 알게 되었고, 이곳에 다시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며 회개했더니 치통이 말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치통의 그리스도

북쪽 측면에 세워진 종탑은 남쪽 첨탑의 절반 정도인 68.4m인데, 탑을 세우던 중 오스만투르크 군대의 위협을 받는 바람에 종탑 건설에 필요한 노동력을 도시 성벽 건설에 투입했기 때문에 짓다 만 것과 같은 높이가 돼 버렸다고 한다. 이 종탑에 있던 종은 1683년 빈을 포위했던 오스만투르크가 물러나고 난 뒤 포획한 대포들을 녹여 1711년 만든 것이었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자신감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되어 1957년 지금의 것으로 다시 만들었다.

성 슈테판 대성당의 종

중앙 제단에는 성 슈테판의 순교를 그린 커다란 성화가 있다. 성 슈테판은 기독교 역사에서 첫 번째 순교자로 기록됐는데, 그리스 식으로는 ‘스테파노스(Stefanos)’, 즉 ‘왕관’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 슈테판 대성당은 세워진 방향이 조금 특이하다.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대성당이 동서축으로 세워져 있어서 입구가 동쪽이나 서쪽을 향하는데, 성 슈테판 대성당의 중심축을 4시 방향으로 틀어져 있다. 그것은 이 성당을 지을 때 12월 26일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중심축으로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2월 26일은 성 슈테판 성인의 축일이다.

한편 지하에는 1450년에 만든 지하유골 안치소 카타콤이 있는데,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유골 약 2,000구와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들의 유해 가운데 심장 등의 내장을 담은 항아리 및 백골이 쌓여 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페스트를 퍼뜨렸다는 소문이 돌아서 많은 유대인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되기도 했다.

2017년 공사를 마친 성 슈테판 대성당 내부

왕궁 정원(Burggarten, 부르크 정원)

1800년대 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 지역의 일부분을 파괴하자 1818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가 개인정원 조성을 지시하였다. 총설계는 루드비히 레미(Ludwig Remy)가 맡았으며, 궁정정원사인 프란츠 안토이네가 집행해 1819년 완성했다. 1919년까지는 일반에 개방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빈 시내의 호프부르크 왕궁과 국립오페라극장 사이에 있으며, 총면적은 3만 8000㎡이다. 호프부르크 왕궁, 국립오페라극장, 링(Ring) 순환도로쪽으로 각각 문이 나 있다. 도심 한복판에 시골 느낌이 나는 정원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도심 속 오아시스로 표현된다.

괴테 상과 모차르트·프란츠 2세·프란츠 요제프 1세의 기념상 등이 있는데, 모차르트 기념상 앞에는 파란 잔디 위에 빨간 꽃으로 심은 높은 음자리표가 있어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 정원 안에는 1901년 문을 연 커피집 버터플라이하우스가 있는데, 수백 마리의 열대나비들이 열대기후와 똑같은 환경 속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

모차르트 기념비

신왕궁(Neue Burg)

헬덴 광장에 있는 말굽 모양의 거대한 건물이다. 16세기 오스만투르크의 침략을 물리친 오이겐 공의 기마상이 서 있다. 1881~1931년에 건설된 궁전이나 완공 5년 후 합스부르크 왕국이 멸망하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히틀러가 이 건물 중앙 테라스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선언하기도 했다.

1938년, 신왕궁에서 헬덴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연설하는 히틀러

현재 이곳에는 남미, 아프리카 등에서 가져온 전리품을 전시하는 민속학박물관, 빈의 음악가들이 사용하던 악기 등을 전시하는 악기박물관, 합스부르크 왕가의 무기를 전시하는 궁정무기박물관, 에페소스와 사모트라키 섬에서 발굴한 고대 유물들을 전시하는 에페소스박물관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 경마학교와 부르크 정원 등도 이곳에 자리한다. 왕궁 예배당에서는 매주 일요일에 빈 소년 합창단의 찬송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신왕궁 내부

오스트리아 국회의사당(Parlament)

1873년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모델로 완공했다. 설계자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모든 것을 그리스의 건축 양식에 따르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건물 내부도 그리스식 원주 기둥들을 세움으로써 파르테논 신전의 겉모습처럼 보이게 했다. 건물 바깥의 정중앙에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의 동상을 세웠으며, 지붕 위의 시꺼먼 굴뚝도 그리스 신들의 웅장한 석상으로 가렸다.

거리에서 잘 보일 수 있도록 의사당의 기단을 높이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 심지어, 두 줄로 서 있던 아름드리 가로수도 건물의 모습을 가린다고 해서 베어 버렸다. 그는 하원 건물과 상원 건물을 연결하는 중앙 통로에는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영웅들의 동상들을 세우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건물은 아주 아름답게 완성되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회의사당 건물일 것이다.

부르크 극장(Burgtheater)

‘빈 황실 양식’으로 정의되는 일단의 거대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1741년에 만들어진 유럽 최대 극장 중 하나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궁정무대로 만들 황실 극장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오스트리아 국립극장이 되었다. 고대 극장의 부활을 목표로 한 인문주의에 따라 당시 유럽에서는 이처럼 왕실과 귀족들이 세우는 극장이 많이 생겼다. 완공하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렸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55년에 대규모 복원 공사를 거쳤다.

극장의 이름 위에는 행진 중인 주신 바쿠스의 부조가 보인다. 공연 예술을 위한 공간이라는 이 건물의 목적은 작가들의 흉상과 사랑 같은 우의적인 인물상, 그리고 비극과 희극의 뮤즈 상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1782),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1786), <코지 판 튜테(Così fan tutte)>(1790) 등이 이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1800년 4월 베토벤의 <교향곡 1번>도 여기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1895년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극장 계단 위에 그린 천장화 <디오니소스의 제단(Altar of Dionysus)>도 유명하다. 천정의 프레스코화, 화려한 내부 장식, 대리석 바닥 그리고 벽에 화랑처럼 걸린 역대 극장의 감독과 배우들의 초상화들이 극장 내부를 꾸미고 있다. 유명한 감독과 배우들을 많이 배출했다. 내부를 보려면 유료 가이드투어를 신청하거나 공연을 관람해야 한다.

클림트의 천장화

미노리텐 교회(Minoritenkirche)

1224년 동부 오스트리아 최초의 고딕 양식 교회 중 하나로 설립됐다. 이곳이 더 잘 알려진 것은 <최후의 만찬>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역작인 최후의 만찬 복사본을 이곳 미노리텐 교회에서 볼 수 있다.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했던 1800년대 초에 이 교회에 밀라노에 있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모자이크 형태로 제작해 걸어 놓았기 때문이다. 약간의 헌금을 내면 누구나 무료로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빈 시청(Rathaus)

1883년 세워졌으며, 신 고딕 양식 건물로서 빈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이다. 시민을 위해 시청 광장을 개방하고 있어 문화공간으로 이용되는데, 여름에는 필름페스티벌, 겨울에는 강림절 행사인 크리스마스마켓 등 일 년 내내 크고 작은 축제들이 열린다.

7, 8월 여름밤에 열리는 필름 페스티벌에서는 대형스크린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및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그리고 오페라가 무료로 상영된다. 크리스마스마켓은 11월 16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열리는데, 행사가 시작되면 시청 앞에 늘어선 140여 개의 가판대에 설탕에 절인 과일, 군밤, 솜사탕 등 먹을거리와 크리스마스 장식품이 진열되며, 전세계 합창단이 참가하는 크리스마스 캐럴 콘서트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페스티벌 홀에서 열린다.

오른쪽에는 빈 대학교가 있고 건너편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빈 최초의 극장이었던 왕궁극장(Burgtheater)이 있으며,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오페라하우스가 있다.

빈 대학교(Universität Wien)

1365년 오스트리아 대공인 합스부르크왕가의 루돌프 4세가 형제인 알베르트 3세, 레오폴트 3세와 함께 프라하 대학에 대항하여 독일 문화권 제2의 대학으로서 설립한 대학이다. 설립 당시에는 법학·의학·문학의 3학부로 출발하였으나 1384년 신학부가 부설되면서 파리에서 초청한 신학자 앙리 드 강이 파리대학을 모델로 대학을 재조직했다. 1520년에는 독일어권 대학 중에서 가장 많은 학생을 수용하기에 이르렀으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급격히 쇠퇴했으며 1623년에 예수회에서 인수했다.

18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교육개혁에 의해 부활되고, 의학·법학·역사학 등의 분야에서 빈 학파(비엔나 학파)를 형성해 그 이름을 떨쳤으며, 1848∼1850년 문교부장관 튤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전세계의 독일어권 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대학교이며 중앙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또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육·연구기관이기도 하다.

캠퍼스는 빈 전역 60여 군데에 흩어져 있다. 이곳에 있는 빈 대학교 건물은 1877~1884년에 지었으며 대학의 주요 행정·실무 사무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부설시설로 도서관, 식물원, 통역학센터, 스포츠학·대학스포츠센터, 분자생물학센터 등이 있다.

빈 대학교에 있는 슈뢰딩거의 흉상

졸업생 또는 교수로 노벨상을 수상한 대표적인 인물은 로베리트 바라니(1914, 의학), 한스 피셔(1930, 화학), 에르빈 슈뢰딩거(1933, 물리학),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1974, 경제학)이고, 유명한 졸업생으로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과 리제 마이트너, 수학자 쿠르트 괴델, 공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 정신분석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이 있다.

보티프 교회(Votivkirche)

1853년 프란츠 요셉 황제의 암살 시도가 일어나자 황제의 동생이었던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대제가 황제의 생명을 구해준 신에게 감사하고자 지은 교회이다. 막시밀리안은 훗날 멕시코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 암살 시도를 기록한 그림

당시 23세이던 황제는 호프부르크 궁전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주변을 산책하던 중 21세의 재단사 견습생이 긴 칼로 황제를 찌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헝가리 민족주의자인 야노스 리베니이(Janos Libenyi)였다. 범인은 체포되어 처형됐으나 황제는 이후 그의 어머니에게 약간의 연금을 주었다고 한다.

보티프 교회의 장미창과 오르간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황제의 근처에서 황제를 환영하던 정육점 주인 요셉 에텐라이히(Joseph Ettenreich)도 황제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어 범인을 제압하는 일을 크게 도왔다고 한다. 황제는 그의 행동을 가상히 여겨 귀족의 작위를 주었고 그의 이름도 프란츠 폰 에텐라이히(Franz von Ettenreich)가 되었다. 에텐라이히 집안은 훗날 합스부르크 제국의 백작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중앙 제단

황제 살해 미수사건 이후 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은 사방에 통문하여 바로 그 장소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교회를 세우기로 하였으니 일조하여 줄것을 요청했다. 처음 생각했던 교회 이름은 보티프가베(Votivgabe)였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예물’이라는 뜻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건축비의 75%를 부담했고 나머지는 독일의 공국들, 영국, 프랑스가 헌금을 내서 충당됐다. 처음 계획은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처럼 빈 대학교와 연계한 커다란 캠퍼스를 조성한다는 것이었으나, 예산이 너무 많이 들고 또한 당시 정치적으로도 사회가 불안하던 때여서 계획을 축소해 교회만 짓기로 했다.

보티프 교회의 십자가상 고난 부조

건축 스타일이 슈테판 대성당과 흡사하기 때문에 간혹 관광객들은 보티프 교회가 슈테판 대성당인줄 알고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두 성당 사이에는 7백년이라는 세월이 놓여 있다. 다만, 두 성당 모두 흰색의 사암을 사용했기 때문에 대기 오염 및 산성비 때문에 변색이 되기 쉬워 항상 청소를 게을리 할수 없는 점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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