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생애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백석(白石, 1912~1995)은 본명이 기행(夔行)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진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백석은 오산고보를 다니던 시절 문학과 영어에 소질을 보이지만, 1929년(18세) 졸업 후 집안 사정 때문에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서 책을 읽으며 지냈다. 그러다가 같은 해에 조선일보사가 후원하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야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들어간다. 재학 중이던 1930년(19세)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데, 이 등단작은 시가 아니라 <그 모와 아들>이라는 단편 소설이었다.
시작 활동
1934년(23세) 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산문 <이설 귀ㅅ소리>, 번역 산문 <임종 체홉의 6월>, <죠이쓰와 애란의 문학>을 발표하고, 1935년(24세)에는 단편 소설 <마을의 유화> 등을 발표했다. 백석의 초기 단편들은 대부분 노쇠한 부부나 죽음과 같이 삶의 어두운 일면과 연관된 소재를 통해 황량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데 이런 성향은 이상하게도 시로 발길을 돌리면서부터 사라졌다.
1935년(24세) 백석은 «조광»을 중심으로 <정주성>, <산지>, <주막>, <비>, <여우난 곬족>, <흰 밤> 등을 발표하고, 이듬해에는 초기작 33편을 담은 첫 시집 «사슴»을 내어 문단의 호평을 받는다. 1937년(26세)에는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위해 함경도 산간으로 가서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문화, 향토 음식 등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한다. 그리고 이들을 여러 시편에 담아내는데, 특히 <남행 시초>, <함주 시초> 등 해마다 나오는 기행시 형식의 연작시에 잘 표현되었다. 이 밖에도 <통영>, <오리>, <탕약>, <연자ㅅ간>, <황일> 등도 발표하였다.
1938년(27세)에는 서울로 와서 연작시 <산중음>와 <물닭의 소리>, <석양>, <고향>, <절망>, <설문답>,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무래기의 약>, <멧새 소리>, <외가집>, <개>, <고성 가도>, <박각시 오는 저녁> 등을 냈다. 또 1939년(28세)에는 연작시 <서행 시초>와 시 <안동>, <함남도안>,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등을 내놓는다. 그러면서 서른 살도 되기 전에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 시인으로 입지를 굳혔다. 그의 시는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낳고, 그의 시가 실린 지면은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만주에서의 시작
이 무렵 백석은 3년 전 허준의 결혼식 때 잠깐 본 이화여고 여학생 ‘란’에게 빠져 그녀의 집을 찾지만,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후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만주로 떠나면서 친구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서 시 1백 편을 건져오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0년(29세) 만주에 도착한 백석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얻어 시를 짓는 데 열중한다. 당시 급하게 얻은 방이 토굴이나 마찬가지여서 주말마다 근교 러시아인 마을로 방을 다시 얻으러 돌아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북만주 오지의 원시 부족 사람들과 얼굴을 익혔다. 이 해에는 <목구>, <북방에서>, <허준> 등을 써서 발표하고, 1941년(30세)에는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사포나 이백 같이>, <귀농> 등을 발표한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 강화되자 백석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산다. 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처럼 그야말로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고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게 되어, <북방에서>에서처럼 “혼자 넋없이 떠도는” 것이었다. 1942년(31세)에는 만주 안둥으로 직장을 옮겨 외국 소설을 번역했고, 국내에 있던 동료 김소운은 백석의 시들을 일본어로 옮겨 «조선 시집»에 실었다.
해방 이후
1945년(34세) 해방 후 귀국한 백석은 고향인 평북 정주로 가서 1947년(38세) <적막 강산>, <산>을 발표하고, 1948년(37세)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을 발표하였다.
백석은 고향에서 남북 분단을 맞은 후 소련 김일성 환영회에서 <장군 돌아오시다>라는 즉흥시를 낭송했다고 하는데, 그 밖의 행적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의 어느 문학 단체에도 그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연금과 집필 금지 등의 수난을 겪은 듯하다. 이렇게 백석은 남녘에서는 기피되고 북녘에서는 금지된 채로 잊혀 갔다.
백석 시의 특징
풍부한 북방 토속어의 사용
백석은 ‘구인회’를 비롯한 모더니스트들의 서구적 취향과 달리,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이면서도 시에 북녘 지방의 토속 방언들을 채워 넣는다. 이제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토속어 지향의 시 세계는 한국인의 얼을 빼어나게 담아낸다.
사실 백석은 이미 표준어가 정착한 시기에 창작 활동을 한 시인이고, 신문사의 편집 일을 맡기도 한 그가 표준어와 방언의 차이를 몰랐을 리 없다. 따라서 그가 굳이 방언을 고집한 것은 작품 세계를 심화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개성 있는 모더니즘
백석의 작품들은 몇 작품을 제외하면 대개 주관적 감정을 철저하게 억누르는 극도의 절제를 보여 준다. 바로 이 점이 백석을 모더니즘 시인으로 부르는 이유이자, 다른 모더니즘 시인들과 구별하게 하는 원인이다.
또한 반 도시(反都市) 산촌의 성격은 백석의 시를 더욱 독특하게 보이게 하는 요소이다. 가령 시집 «사슴»에 수록된 시 33편 중에는 도시 문명이나 도시 감각에 바탕을 둔 시가 단 한 편도 없을 정도이다.
흔히 백석의 시에서 나오는 ‘시골’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곳이 아니라 안온하고 풍요로운 전원이다. 이 때문의 그의 시는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 이면에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삭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석의 시
<정주성>
1935(24세)년 발표한 시 데뷔작이자 초기 시 세계를 확연히 보여 주는 작품으로, 자신의 고향 ‘정주성’과 그 주위의 밤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정주성’은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성이 아닌, 성문이 헐려 그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인 퇴락한 성이다. 화자는 그처럼 폐허가 된 성의 모습을 “잠자려 조을던 무너진 성터”,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한울빛같이 훤하다”라는 시각적 묘사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아울러 ‘정주성’ 주위의 밤풍경들을 다채로운 감각적 이미지로 묘사함으로써 폐허가 된 성의 모습을 한층 실감나게 환기시키고 있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라는 청각적 묘사와,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짝이로 난다”와 같은 시각적 묘사가 바로 그것이다.
‘정주성’과 그 주위의 밤풍경들에 대한 이러한 다채로운 감각적 묘사는 폐허가 된 ‘정주성’의 풍경을 한층 을씨년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무너져버린 역사의 허망함까지도 환기시켜 주고 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유물로서의 ‘정주성’에 대한 정물적 풍경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폐허가 된 ‘정주성’의 풍경으로부터 역사의 허망함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이 같은 풍경 묘사에 이어 마지막 시행에서 “날이 밝으면 또 메기 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라는 행위의 서술을 첨가시키고 있다. 여기서 ‘메기 수염 늙은이’의 모습은 폐허가 된 ‘정주성’의 모습과 절묘한 시적 대응을 이루어, ‘정주성’의 황폐함과 역사의 퇴락함을 더욱 실감나게 환기시켜 준다.
<정주성>
산(山)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려 조을던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
<여우난 곬족>
1935(24세)에 발표한 작품이다.
백석 시는 초기에는 대체로 평북 사투리와 토속적인 소재의 선택으로 농촌 공동체의 원형적 정서를 그려 내다가, 후기에는 여행을 통한 풍물시와 모더니즘 시풍을 보여 주는 특징을 갖는다. 이 시는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명절날의 풍경을 통하여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유년기 화자의 순진무구한 정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위해서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속에 구수한 사투리와 다양한 이미지 수법을 개입시킴으로써 푸근한 고향 정서를 환기시켜 주는 한편, 문장 종결형을 현재 시제로 하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독자에게 직접 말하고 있는 느낌을 전해 주고 있다.
우선 이 시는 유년의 ‘나’가 체험하는 명절날의 풍속을 시간적 경과에 따라 순차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서사적인 시간 구성을 지니고 있다. 즉 명절날 유년의 화자가 ‘엄매 아배를 따라’ 큰집으로 나서면서부터 저녁과 밤, 다음날 아침까지의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시간적 경과에 따라 서사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명절을 즐기는 공동체의 풍요로움을 다양한 시적 대상을 동원하여 표현함으로써 끈끈한 인간적 체취를 물씬 풍기게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고향을 상실한 일제 암흑기에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원초적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여우난 곬족>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後妻)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 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가즈랑집>
1936(25세)년 출간한 첫 시집 «사슴»에 수록된 작품이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가즈랑집’을 소재로 하여 시적 화자의 유년 체험을 농촌 공동체에서의 연대 의식의 표출로 승화시키고 있다. <여우난 곬족>과 함께 토속적인 지명을 적절히 시제로 선택한 작품이라 하겠다.
<가즈랑집>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 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모닥불>
1936(25세)년 출간한 첫 시집 «사슴»에 수록된 작품이다. 백석 시의 특징인 이야기성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일상적인 언어를 과감하게 시에 사용한 점이 백석다운 특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시는 모닥불에 타 들어간 온갖 사물들과 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일체화되어 마을 공동체의 정겨운 삶을 노래하고 있다. 가장 하찮은 것들이 피워내는 따뜻한 모닥불가 앞에 모인 사람들과 동물들이 모두 모여 불을 쬐는 광경을 묘사함으로써,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이 하나 됨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그 모닥불을 무지의 슬픈 역사에 비유함으로써 우리가 살아온 역경, 그러나 그 곁에 모두 모여 끈질기게 살아온 정겨운 삶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수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한 이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여승>
1936(25세)년 출간한 첫 시집 «사슴»에 수록된 작품이다.
백석이 가지고 있던 공동체적인 공간에 대한 시적 관심은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가족적인 유대나 유년기의 체험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생활 세계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함으로써 민중들의 삶을 위협하는 현실의 모순을 파헤치는 커다란 힘으로 고양되기도 한다. 이 <여승>은 바로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백석의 대표적인 리얼리즘 시로 거론되고 있다.
이 시는 역행적 구성 방법으로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는데, 1연은 여승의 현재 모습이며, 2~4연은 그녀가 여승이 되기까지의 삶의 궤적을 더듬고 있는 부분이다. 거의 모든 시행을 하나의 문장으로 배치함으로써 빠른 속도감을 느끼게 하고 있으며, 짧은 작품 구조로써 그녀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표현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비록 불교에 귀의한 여인이지만, 화자인 ‘나’의 눈에 비추어진 여승의 모습은 여전히 현실적 고뇌를 극복하지 못한 서글픈 모습으로, 마지막 두 시행에서 보여 주고 있는 섧게 우는 ‘산꿩’이나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여인의 머리오리’가 바로 그녀의 내면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938년(27세) 발표한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이국 정취를 풍기고 있어서 백석의 시 치고는 다소 이질적이다. 그의 기행 체험의 시에 해당하지는 않더라도 그간 지나칠 정도로 강한 집착을 보여 왔던 우리의 토속적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 도피적인 유랑 의식과 모더니즘 시풍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후기 시에 속한다.
화자인 ‘나’의 처지는 가난하고 쓸쓸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런 화자는 ‘나타샤’를 사랑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자는 현실을 떠나 깊은 산골로 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 도피를 일러 화자는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가 현실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현실을 능동적으로 버리는 행위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화자의 인식에서부터 시대적 아픔과 고민을 애써 외면하려 하는 백석의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치열한 현실 인식이 나타나 있지 않아 아쉬움을 주지만, 인간 모두의 마음속에 근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사랑에의 환상적인 꿈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서정시의 한 진경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서 환기되고 있는 사랑에의 환상적인 꿈은 ‘눈’ · ‘나타샤’ · ‘흰 당나귀’ 등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미지의 조화를 통해 환기되고 있는데, 그러한 이미지들은 다분히 이국적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의 거리감과 단절감을 느끼는 화자가 끝내 그 현실에 합일되지 못한 탓으로 이 시는 환상적인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고 우수 어린 정조가 짙게 배어 있는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고향>
1938년(27세) «삼천리»에 발표한 작품이다. <여우난 곬족>의 연장선에 선 작품으로, 백석 특유의 고향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백석의 시는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원초적인 고향 개념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의 시가 보여 주는 토속적 사투리와 현대적 가족 제도, 풍물의 세계는 단순한 풍물이 아니라 반드시 인간이 개입된 풍물로, 그는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을 감동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 정서가 점차 상실되어 가는 일제 치하에서 더욱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백석의 시 세계의 주인공은 항상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침잠해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시인의 현실적 세계와 대립됨으로써 고향이라는 공동체는 삶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는 세계로 형상화된다.
이 시가 환기시키는 정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 고향이 불러일으키는 따스한 정이다. <여우난 곬족>에서는 고향을 무대로 그 곳에서 벌어지는 토속적이고 원형적인 삶의 모습을 서사적 구조를 통해 고향의 정서를 보여 준 데 반해, 이 시는 인물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와 시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는 기법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고향>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ㄹ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서행 시초 3—팔원>
1939년(28세)에 낸 시로, 4편의 <서행 시초> 연작 중 세 번째 작품이다. ‘나이 어린 계집아이’의 고통스러운 삶을 일제 강점기의 우리 민족의 비극적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여승>과 함께 백석의 대표적인 리얼리즘 시로 거론되는 이 시는 가족 공동체조차 유지할 수 없도록 한 일제의 식민지 수탈의 참혹상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 시에서 ‘어린 계집아이’는 <여승>의 주인공이 금전판으로 떠난 ‘지아비’를 찾아 떠돌다 자식까지 잃고 여승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파행적 역사 과정 속에서 희생당한 민중들의 한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또 그 계집아이의 확실하지 않은 행선지는 바로 식민지 치하의 우리 민족의 방향성을 상실한 삶을 표상하고 있다. 그러므로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새하얗게 얼은’, ‘텅 비인 차 안’ 등과 같은 구절은 단순히 관서(關西) 지방의 추위를 뜻한다기보다는 일제 치하의 고통스러운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담담한 어조로만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 작품의 비극성을 한층 두드러지게 해 주고 있다.
물론 이 시는 화자가 현실의 모순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없이 다만 객관적 사실의 제시로만 그치고 말았다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백석의 시가 유년의 체험과 그에 대한 강렬한 향수에만 지나친 집착을 보이는 일종의 퇴행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시는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는 일제의 가혹한 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려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또는 자신의 순진무구한 유년의 공간 속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서행 시초 3—팔원>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북방에서>
1940년(29세)에 낸 작품으로, 백석이 북방을 유랑하던 시절에 쓴 것이다. 지난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삼자의 입장이 아닌,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살아오고 있는 화자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제시함으로써 역사를 조상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짊어지고 그 슬픔을 감당하려는 한 시인의 진실한 면모와 역사적 현실 앞에서의 무력감과 가책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1940년대 백석의 시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극심한 회의와 갈등을 보여준다. 이러한 회의와 갈등은 이 시기에 들어서서 더욱 가혹해진 식민지 수탈과 식민지 세력의 팽창 앞에서 망국민으로서 겪게 되는 무력감과 가책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의 화자는 백석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던 때부터 현재까지 살고 있으며, 현재의 입장에서 자기가 살아온 삶과 역사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가책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부여, 숙신, 발해, 요, 금, 흥안령, 송화강, 음산은 우리 민족의 옛 터전이며 송어, 메기, 너구리, 사슴, 개구리 등은 그곳에 사는 자연물들이다. 화자의 삶은 이곳에 사는 자연물들과 족속들을 배반하고 떠남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떠남의 밑바탕에는 극복한다기보다는 회피함으로써 일신의 안일을 추구하는 행위로 규정되고 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르게 되고 그 때에 와서야 슬픔을 안고 옛 고향으로 찾아가지만 거기에는 조상도, 일가친척도, 자랑도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고백을 통해 일제 말기의 극한적인 상실감과 자신의 삶에 대한 가책과 슬픔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화자의 삶은 북방의 광대한 영역을 버리고 한반도라는 작은 국토로 축소되는 과정, 그리고 그 속에서 여러 차례의 외침과 수난을 겪으면서도 사대로 큰 나라를 섬기고 안일하게 지내다가 드디어는 나라마저 빼앗기고 유랑하는 우리 민족의 역사 그 자체이다.
<북방에서>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勃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잦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하늘로 땅으로—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 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1948년(37세) «학풍» 창간호에 실은 백석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가 남녘에서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99년 «한국일보»에서 기획한 <21세기에 남을 한국의 고전>에서 시 10편 중 한 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는 거칠고 험한 삶의 정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이를 딛고 나아가려는 백석 자신의 굳건한 의지가 투영된 이미지일 것이다. 어느 한 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고달프게 떠돌아야 하는 질곡의 절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시의 부름켜 아래 고요히 녹아 있다. 체념과 달관을 통해 인간의 합일 정신과 삶을 잇는 그대로 껴안으려는 수용 자세가 확고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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