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노트/스페인 여행 URL 복사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필수 작품 한국어 가이드 바로보기

2018. 6. 16. by 솜글
스페인 여행을 앞두고 고민하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들입니다. 한국어 인터넷에서 모은 것들과 외국(영어 또는 스페인어) 사이트에서 번역해 모은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하세요.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대표작 바로보기

프라도 미술관 대표작들을 온라인에서 바로 볼 수 있게 페이지를 코딩해서 포스팅한다. 즐겨찾기 해 두고 현장에서 찾아서 보기 편하게 해 두었다. 

목록표에서 작품명을 클릭하면 해당 설명으로 바로 내려가고, 다시 목록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두었다.

목록은 총 56개 작품이고, 고야의 <옷을 입은 마하>와 <옷을 벗은 마하>,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은 하나의 묶음으로 해 두었기 때문에 총 58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00개 작품까지 해도 좋겠지만 말 그대로 이건 '꼭 봐야 할' 작품 정도로 추린 것이다. 이 작품들을 3분씩만 뜯어 봐도 세 시간이 걸리니 그 이상 볼 계획이라면 현장에서 한국어 오디오가이드를 빌려서 봐도 되겠다. 

오디오가이드는 1대당 6유로이다. 그런데 그냥 이 페이지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전문가용 충실한 설명은 아니지만, 일반인이 보기에 얕은 수준으로 해 두진 않았다. 

참고 페이지

층별 관람코스를 다운로드하고 싶다면 아래 페이지에 올려 두었다. 

 

위 관람코스 순서대로 설명을 담아둔 PDF 파일은 아래 페이지에 올려 두었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56개 작품 목록표

작자명(성 기준) ABC 순서로 되어 있다. 단, 엘 그레코는 'El Greco'로 해 두었다. ('E'에 있음)

목록표에서 작품명을 클릭하면 해당 설명으로 바로 내려가고, 다시 목록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두었다.

아, 진짜 힘들었다. 매일 조금씩 수정해 가면서 업데이트 완료... 

 

 


여기서부터 작품 설명

작자미상  토끼 사냥(산바우델리오 데 베를랑가 예배당의 벽화 일부) 목록으로

더보기

11세기 초 모사라베 양식으로 지어진 예배당 벽화 중 일부이다.(아래 사진 참조) 

벽화는 20세기 초에 여기저기 딜러들에게 팔렸는데, 그 중 여섯 조각이 겨우 회수되었다. 토끼 사냥 그림은 <사슴 사냥>과 함께 북쪽 벽에 있던 그림으로 사냥하는 사람이 손에 삼지창을 쥔 채 거의 정면을 보며 말을 타고 사냥하고 있다. 앞에는 세 마리의 개를 풀어 토끼들을 미리 쳐 놓은 그물 쪽으로 모는 장면이다. 토끼는 성욕을 상징한다.

이 그림을 포함한 여섯 작품은 모두 원색을 사용해 단순하게 그려졌으며 세속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다른 그림은 코끼리, 사슴 사냥, 전사, 커튼, 곰이다. 

변화가 군데군데 뜯어진 예배당 현장의 모습

Angelico 수태고지 목록으로

더보기

‘수태고지’는 마리아의 예수 잉태를 가브리엘이 찾아와 알려준다는 뜻으로 가장 중요하고 흔한 중세 그림 주제 중 하나이다.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놀란 듯 가슴을 두 손에 모으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성령을 표현한 비둘기가 마리아에게 날아온다. 안젤리코는 수정이 어려운 템페라(안료를 달걀노른자에 섞어 칠하는 방식) 기법을 사용해 원근감과 부드러운 음영을 통해 생동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마리아와 가브리엘의 후광, 성령에서 나오는 빛 등의 금색은 진짜 금을 갈아 칠한 것이고 마리아의 치마에 쓰인 푸른색은 청금석을 갈아 칠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렇게 얼마나 값비싼  재료를 썼는가에 따라서도 그림의 가치가 달라졌고, 아예 그림용 금가루를 만드는 전문가도 따로 있었다.

정원에 있는 남녀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인데, 옷을 입었다는 점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후임을 알 수 있다. 둘의 등장은 하느님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 인류의 원죄를 씻어 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수태고지> 아래에는 조그마한 그림들이 붙어 있는데, 이렇게 제단화 밑에 작게 그려 그림에 대한 부연설명을 하는 그림을 프레델라(predella)라고 한다. 이 작품의 프레델라에는 마리아의 일생이 그려져 있다. 마리아가 태어나는 장면, 남편감으로 요셉이 결정되는 장면과 낙방한 다른 총각이 화가 나서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장면, 아기 예수가 태어나는 장면과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는 장면, 마리아가 숨을 거두는 장면 등이다. 프레델라 속 요셉은 대머리에 허연 머리칼을 가진 노인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마리아가 죽을 때까지 처녀였으니 그 남편인 요셉은 젊고 잘생긴 남자가 아니라 남자구실을 잘 못할 것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수태고지>의 프레델라

Bermejo  실로스 제단화의 성 도밍고(도미니코) 목록으로

더보기

바르톨로메 베르메호가 그린 사라고사 성 도미니코 성당의 제단화 일부로, 18세기에 해체되었다. 성 도미니코의 즉위식을 표현한 가운데 조각은 베르메호의 단독 작품이나 15세기 스페인 회화의 걸작으로 평가되며, 나머지 두 개 패널은 베르메호의 제자와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 연도(年度)가 적혀 있는 그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서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요소가 엿보인다.

Berruguete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성 도미니코 목록으로

더보기

성 도미니코는 12세기 후반과 13세기 초반에 활동한 스페인의 카톨릭 사제이자 도미니코 수도회를 창시한 인물로 사후 교황에 의해 시성된 청빈한 수도사였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서 그는 엉뚱하게도 잔인한 종교재판을 집행 중이다. 여기에는 당시 스페인 심문관들의 계략이 숨어 있다.

이 작품은 카스티야 르네상스의 창시자인 페베루게테가 스페인 종교 재판소의 의뢰를 받아 그린 작품이다. 성 도미니코는 실존 인물이나 종교 재판소가 생기기도 전에 사망한 인물로 종교 재판소와는 관계가 없다. 요컨대 스페인의 이단 심문관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그림을 의뢰함으로써 일종의 전설을 만들어낸 셈이다. 이후 16~17세기 개신교도들이 종교 재판소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단 심문관 도미니코의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욱 과장하며 흑색선전에 이용하게 되었다. 베루게테는 이밖에도 도미니코를 악인으로 묘사한 그림을 여럿 그렸다.

Bosch 쾌락의 정원 목록으로

더보기

‘세 폭 제단화(Triptych)’라는 중세의 전형적인 그림 형식을 빌렸지만 실제로 제단화로 쓰인 적은 없는 작품이다.

왼쪽 날개는 에덴의 동산으로 모두가 풍요롭게 공존한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 구분과 경계가 모호해서 연못 속의 부리 달린 생명체는 수도사의 모습으로 책을 읽기도 한다. 선악의 구분도,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구분도 원래 없는 듯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이 평화로이 어우러져 존재하는 곳이다. 아담의 갈비뼈에서부터 막 태어난 이브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처음 아담과 대면하는데, 아담도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그의 앞에 서 있는 이브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다.

오른쪽 패널은 지옥이다. 중앙에서 창백한 흰색의 나무 다리를 하고 곁눈질로 관객을 노려보는 기괴한 인물은 보쉬 자신의 자화상이다. 그 뒤로는 차가운 빙판과 뜨거운 불벼락이 화면을 뒤덮고, 아슬아슬 얼음판에서 스케이트를 타거나, 불나방처럼 불 속을 뛰어드는 인간의 무리들이 그려진다. 인간 이외의 어떠한 ‘자연’요소도 완전히 배제된, 문명화된 도시의 검은 그림자가, 얼음과 불덩이의 양 극단 사이로 배경을 이룬다. 오른쪽 코너에는 수녀의 가운을 걸친 돼지가 서약서에 사인을 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괴물의 얼굴을 한 특수 기계 장치가 인간의 몸을 통과시켜 웅덩이로 빠뜨린다. 모든 것이 ‘거꾸로 나라’여서, 악기를 즐겼던 인간들은 악기에 매달려 고문을 당하고, 도박을 즐겼던 인간들은 게임 도구로 희생당하며, 생전에 많이 먹은 사람은 이곳에서 먹은 것을 토해내야 한다는 듯 악마가 협박하고, 생전에 토끼 사냥을 즐겼던 인간은 토끼에게 오히려 사냥 당한다. 보쉬는 이렇듯 매우 창의적인 방식으로 지옥을 표현했다.

중앙 패널로 돌아오면, 다시 넓은 대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진 온갖 피조물의 향연이 펼쳐진다. 여기는 대체 어디일까? 남녀가 각각 파트너를 이룬 채 성행위를 암시하는 몸짓들로 활기차고 인간보다 큰 딸기가 넘쳐나며, 새들이 물에서 놀고, 고기가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며, 온갖 동식물이 인간과 혼연일체 되어 노니는 곳이다. 이 중앙 패널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한데, 대개는 이러한 혼란과 과도한 쾌락의 추구가 오른쪽 패널의 지옥을 향하는 지름길임을 경고하는 것이고 이것이 작품의 핵심 주제라고 말한다. 한편 다른 미술사가들, 특히 2002년 이 작품에 대한 책을 펴냈던 저명한 미술사가 한스 벨팅(Hans Belting)은, 이 중앙 패널의 묘사야말로 이때까지 어디에도 없었던 ‘유토피아’의 가상적 시공간이라고 해석한다.

또 하나,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은 바로 원근의 표현이다. 보쉬는 이 수많은 개별 요소들을 한 폭에 담아내기 위해 뒤에 있는 것일수록 작게 그리면서 동시에 화폭의 위쪽에 배치했다.

Brueghel 죽음의 승리 목록으로

더보기

16세기는 사람들의 관심이 정신적 관념이 아닌, 현상의 삶 그 자체에 집중된 시기였다. 그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악마’였다. 천재지변이나 장님, 절름발이 같은 육체적 기형, 흑사병 등의 질병 등 수많은 재앙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고 그 원인으로 언제나 ‘악마’가 거론됐다. 이때 사람들은 악마를 재앙을 내리는 실제적인 존재로 믿었고 고문이나 마녀사냥도 성행했다. 그래서 악마나 죽음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다.

브뤼겔은 1552년 악마 시리즈 세 점을 비슷한 크기로 그린다. <죽음의 승리>는 그 중 하나인데, 재앙을 그렸지만 악마를 그리지 않고 대신 낫자루로 인간을 베어 쓰러뜨리는 해골을 표현했다. 말라비틀어진 초목과 불에 타 연기가 피어오르는 황폐한 배경에 여기저기 수도 없이 흩어져 있는 고통 받는 인간들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이런 처참한 장면들 속에서 희망적인 모습은 어느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오른쪽 맨 아래에는 여자와 태연하게 연주를 하는 남자가 보이는데, 죽음이라는 절실한 문제에서조차 여유와 해학을 표현하는 유머를 택한 것이다. 다른 화가들이 죽음의 순간을 잔인하고 처절하게만 보여주는 것과 대조적이다.

Caravaggio 다윗과 골리앗 목록으로

더보기

카라바지오는 이탈리아 카라바지오 출신으로 활동 당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 작품은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내리쳐 자른 후 그 머리를 끈으로 잡아매려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그림 속 어린 다윗은 방금 적장을 죽인 사람 같지 않게 고요하고 차분하다. 고운 손과 발은 커다란 골리앗의 외형과 완전히 다르다. 다윗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골리앗의 얼굴은 매우 사실적인 데다 관객 바로 앞에 있어 더욱 강렬하다. 카라바지오는 이렇게 거대한 패자와 연약한 승자를 대조해 그림에 입체성을 더했다.

카라바지오의 가장 큰 특징은 빛의 사용이다. 이전의 그림들은 빛이 화면에 고르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카라바지오는 연극의 어두운 무대 위에 인물들을 세워 놓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처럼 빛을 사용했다. 인공적인 조명이라고는 촛불뿐이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카라바지오의 극적인 빛 표현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어둠과 빛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명암법은 이후 17세기에 널리 퍼졌다.

Correggio 놀리 메 탄게레 목록으로

더보기

‘나를 만지지 말라’는 뜻의 라틴어 ‘Noli me tangere’는 부활한 예수가 처음으로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한 말이다. 무덤이 비었음을 알게 된 마리아가 예수를 정원사로 착각해 그에게 예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간청하는데, 예수는 마리아에게 자신을 밝히며 “나는 아직 아버지께 가지 않았으니, 나를 만지지 말라.”라고 말했다. 예수가 두 세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떨어지라는 몸짓을 하면서 한 쪽 어깨 너머로 힐끗 시선을 던지고 있는 예수의 자세를 통해 전달되는데,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이 장면을 작품으로 남겼다.

코레지오의 이 작품은 볼로냐의 한 가문의 예배당에 쓰이기 위해 의뢰된 것으로 훗날 펠리페 4세에게 선물되었다. 날이 밝아오는 새벽을 배경으로 마리아의 불안정함이 예수의 평온함으로 상쇄돼 조화를 이루는 구성이다.

Cotán 사냥감과 과일, 채소가 있는 정물화 목록으로

더보기

산체스 코탄은 스페인의 대표적인 정물화가이자 17세기 스페인 정물화의 황금기를 이끌어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보데곤(bodegón, 음식과 그릇 등 정물 주제를 부각시키면서 서민의 일상생활 속 장면을 묘사한 장르화)이 인기를 끌었는데, 코탄은 보데곤 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극적인 명암의 대비를 활용하여 소재를 만져질 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정물을 화면 앞으로 끌어낸 것이 특징이다. 극도로 사실적이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수렵조와 과일, 채소들은 티끌 하나 없는 정갈한 공간 속에서 새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강렬한 조명을 받고 있다. 양식이라기보다는 마치 기하학의 원리와 수학적인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누군가가 엄격하게 배열해 둔 도형처럼 보인다.

성공한 화가였던 코탄은 40대에 돌연 속세를 버리고 청빈과 정결, 침묵을 서원하는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으로 출가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알 수 없는 신비감을 자아내는 코탄의 정물화가 마치 그의 미래를 예견한 것 같다. 

Dürer 장갑을 낀 자화상 목록으로

더보기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로 불리는 뒤러는 화가가 과감하게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많은 자화상을 그린 최초의 화가이다. 그 전에는 화가가 자신을 그린다 해도 다른 그림에 살짝 끼워 넣는 등 소극적이었다. 때문에 뒤러는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자화상을 회화의 한 영역으로 개척했다고 평가된다.

<장갑을 낀 자화상>은 스물여섯 살 때의 모습으로 젊은 화가들의 다양한 자화상 가운데 가장 생생하면서도 잘 구성된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자신감 외에도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며, 베네치아 풍의 옷을 입고 당시 유행하던 흑백의 줄무늬 모자를 썼다. 그림 속 창틀 아래에 ‘1498, 내 모습을 그렸다. 난 스물여섯 살의 알베르트 뒤러다’라고 새겨져 있다.

뒤러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고 화가의 사회적 지위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전 시대의 화가들과 달리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 자신의 이름 첫 글자인 A와 D를 가지고 하나의 복합적인 문양을 만들어 자의식 강한 화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서명은 화가를 확인해 주고 그 이름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아울러 작품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뒤러는 홍보의 중요성과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제대로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외국으로 판매하기 위해 특별히 전문 대리상을 고용하기도 했다.

Dürer 아담, 이브 목록으로

더보기

기독교 교리에서 이브는 타락의 원인을 제공한 악녀였다. 그래서 중세 화가들은 이브를 그릴 때 남자를 유혹하는 여성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서부터는 아담과 이브의 테마가 새롭게 표현되었다. 첫 번째 인간으로서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살았다는 점에서 인체를 누드로 그릴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된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들고 있지만 벌거벗은 몸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디에도 천사나 악마는 없다. 중세 그림 속 아담과 이브가 종교관에 충실해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인물이었다면, 뒤러의 아담과 이브는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뒤러는 당시의 미남 미녀를 모델로 이탈리아에서 배워 온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인체’를 표현해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남녀를 완성했다. 두 사람의 포즈는 체중을 한 발에만 실어 비튼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자세인데, 화가들은 이 자세가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하여 인물화게 많이 채택했다.

이 그림은 긴 떡갈나무판을 여러 장 이어 붙인 다음 그 위에 그린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물감이 칠해진 앞면과 물감이 없는 뒷면의 수축 속도가 달라 점점 판이 둥글게 휘기 시작했다. 지난 세기의 잘못된 복원 때문에 휨 현상이 갈수록 심해졌는데, 최근 복원팀이 다시 이를 대대적으로 복원해 2011년 다시 전시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림 끝 부분이 아직 살짝 휘어 있다.

El Greco 삼위일체 목록으로

더보기

엘 그레코는 원래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이어서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라고 불렸다. 일찍이 베네치아로 건너가 티치아노에게 배우다가 로마에서 몇 년 머문 후 톨레도로 이주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충실한 소묘 실력과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은 인체 표현력이 빼어난데, 특히 티치아노에게서 배운 색채 표현이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펠리페 2세 당시 스페인은 독일 부분을 제외한 기존의 영토 대부분과 아메리카 대륙, 필리핀(스페인어로 필리피나, 즉 펠리페의 땅이라는 뜻)에 이르기까지 어느 때보다 넓고 흩어진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땅을 직접 다스리기 어려워 각지에 신하들을 보내고 본인은 궁전에서만 생활하며 서류 더미에 쌓여 살았다. 톨레도는 성곽과 강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급격하게 커진 나라 살림을 꾸리기에 역부족이었고, 왕은 토착 귀족이 없고 물이 풍부하며 지리적으로 카스티야 중심에 위치한 작은 마을 마드리드를 수도로 옮겼다.(참고로 아직도 마드리드의 공식 명칭은 ‘도시’가 아닌 ‘Villa de Madrid’, 즉 ‘마드리드 마을’이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에 왔을 때는 마드리드는 수도가 된지 얼마 안 되어 조금씩 분주해지기 시작하는 마을에 불과했고 아직 톨레도가 스페인 사회, 종교,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처음에는 새 수도인 마드리드에 지내고 싶어 했지만, 펠리페 2세가 그의 새로운 성향과 주제를 지닌 작품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궁정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톨레도가 정착하게 되었다. 톨레도에서 그는 이탈리아 유학파로 인정받아 그림 주문을 많이 받았고, 오히려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했다. 플랑드르 화풍이 널리 퍼져 있던 당시 엘 그레코의 베네치아 스타일의 그림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삼위일체>는 그가 톨레도로 이주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린 톨레도 초기작 중 하나로 본래 톨레도 외곽의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성당의 제단화 중 하나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그림 속 죽은 예수의 모습 때문이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보던 그림 속 예수는 거의 40일을 거의 굶은 채로 잡혀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뼈가 앙상하고 피가 낭자한, 처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예수는 피가 아주 살짝 맺혀 있는 데다 건장하고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다. 또 하나의 충격은 성부가 쓴 관이었다. 이 관은 카톨릭 관이 아닌, 그리스 정교회의 사제들이 쓰던 관이다. 이 그림을 주문했던 추기경이 모자 부분을 수정해 달라고 했지만 엘 그레코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그림에 관한 한 신념이 확고해 주문자로부터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소송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El Greco 가슴에 손을 올린 귀족 목록으로

더보기

검은색 옷 안에 흰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기사가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있다. 기사가 어떤 의식에서 맹세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근엄하거나 용맹스러운 표정은 아니다. 블라우스의 깃과 소매 끝에는 화려한 레이스가 달려 있어 검은 옷과 대조를 이룬다. 왼쪽 가슴 아래에 있는 황금색 검(劍)은 손잡이의 디자인과 세공이 뛰어나고 화려하다.

이 기사는 톨레도의 시장이었던 후안 데 실바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사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사료로도 의미가 있다. 가슴에 얹은 손을 보면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이 서로 붙어있는데, 이렇듯 엘 그레코는 손에도 많은 표정을 실으려 했다.

El Greco 우화 목록으로

더보기

16세기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모던한 작품으로 자연스러우면서 과감한 빛, 밝은 빛 앞에서 윤곽이 흐려진 소년의 손과 얼굴, 대충 그린 듯 보이지만 질감을 잘 표현한 옷감까지, 200년이 훨씬 지난 후에 태어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준 작품이다. 종교화도 초상화도 아닌, 순수한 ‘그림을 위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El Greco 목자들의 경배 목록으로

더보기

엘 그레코가 자신의 무덤이 들어갈 톨레도의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성당의 가족 예배당에 걸어 두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이곳에 걸 그림의 주제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선택한 것은 ‘신의 어머니(Theotokos)’를 뜻하는 그의 성 ‘테오토코풀로스’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엘 그레코 말년 때는 화실에서 그의 아들을 포함한 제자들이 그의 이전 작품들의 복제화를 많이 만들어 냈는데, 이 작품만큼은 직접 그려 인간의 육체를 극단적으로 일그러뜨려 표현한 엘 그레코의 후기 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왼쪽 하단에 그리스어로 엘 그레코의 서명이 적혀 있다. 그의 제자에 의하면 엘 그레코는 죽을 때까지 이 그림을 작업했다고 한다. 나중에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성당의 가장 높은 제단으로 옮겨졌다.

특유의 어두운 배경에 성가족과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목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 위로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씌어진 띠를 들고 있는 천사들이 날고 있다. 빛의 원천이자 구성의 중심은 아기 예수이지만 등장인물 모두가 불꽃처럼 스스로 선명한 색채의 빛을 발한다. 같은 주제로 그린 이전 작품에서 발견되는 균형 잡힌 인체 비례, 조화로운 색채, 이해 가능한 공간 표현에 대한 관심이 이 그림에선 발견되지 않는다.

인물들은 육체의 무게나 질감을 갖고 있지 않은, 불타는 기체와 같은 모습이다. 엘 그레코 회화에 충만한 운동감은 무게를 가진 고체가 움직이는 느낌이 아니라, 흔들리며 타오르는 불꽃이 만들어내는 상승의 느낌이다. 화가는 이로써 완전히 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의 시신이 안치된 채플에 놓인 <피에타>(아래 그림)와 비교되곤 한다. 엘 그레코의 스승인 티치아노는 죽은 예수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은 성 히에로니무스의 모습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고, 엘 그레코는 전경에서 무릎 꿇고 있는 목자의 모습에 자신의 얼굴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작품이 설치된 곳과 화가의 관계 또한 유사하다. 티치아노가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린 <성모의 승천>이 있는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에 묻힌 것처럼, 엘 그레코도 톨레도에서 그가 처음으로 제작한 제단화가 있는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에 묻히려고 한 것이다. 

티치아노의 <피에타>

Flandes 십자가 처형 목록으로

더보기

후안 데 플란데스는 플랑드르 출신다운 치밀한 표면과 정교하고 명쾌한 색조가 특징이다. 발렌시아 대성당 주제단 칸막이로 그린 <그리스도의 수난>을 비롯해 이사벨 여왕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Gentileschi 모세의 발견(물에서 구한 모세) 목록으로

더보기

모세의 발견은 흔한 종교화 주제 중 하나이다. 레위 가문에 한 남자가 같은 가문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너무 잘생겨서 석 달 동안 숨겨 길렀다. 더 숨겨둘 수 없게 되자 왕골상자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숲 속에 놓아두고 아기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형편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목욕하러 강으로 나온 파라오의 딸이 이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기며 젖을 물릴 여인을 찾았는데 그 히브리 여인이 바로 아기의 어머니였다. 파라오의 딸은 여인에게 아기를 길러 달라고 부탁하고 아이가 꽤 자란 후 자신의 아들로 삼았는데, 이름을 물에서 건져냈다는 뜻의 ‘모세’라고 지었다.

오라치오 젠틸레스키가 거의 70세에 완성한 이 화려한 작품은 1633년 런던에서 펠리페 4세에게 보내졌다. 옷감에 반사된 빛의 효과가 빼어난데, 옷감의 고급스러운 질감과 세련미를 한층 돋보이게 하고 은색, 금색과 장밋빛 옷감의 느낌을 잘 살려주고 있다. 표현 기법 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

Goya 옷을 벗은 마하, 옷을 입은 마하 목록으로

더보기

고야는 일생 동안 인물을 그렸는데, 초상화에서 인물화로 전환했다. ‘마하’ 연작은 에스파냐의 전통적 여성이 잠자는 비너스라는 고전적 주제나 신화적 상징성에서 벗어나 강한 리얼리티로 표현되어 있다. 위험하고 관능적인 여성 표현 등 고야의 인간관은 차차 악마적 분위기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

마하 연작은 고야의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들 가운데 하나이다. 1800년에 <옷을 벗은 마하>를 그렸는데 이것이 신성 모독 논란을 일으켰고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에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는 것을 거절하고 대신 1803년 <옷 입은 마하>를 새로 그렸다. 같은 여인이 똑같은 포즈로 그려져 있는 이 두 그림은 어떠한 비유나 신화적 연관성이 없는 현실의 여인을 대상으로 한 그림으로 ‘서양 예술 최초의 등신대 여성 누드’로 평가받는다.

그림의 모델인 마하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림을 소유하게 된 카를로스 4세의 수상 마누엘 데 고도이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마하의 후보로 알바 여공을 꼽았으나 고야는 이를 부정했다. 모델이 고도이의 아끼는 정부라는 설도 있다. 여러모로 보아 마하는 실존의 어떤 인물이기보다는 이상화된 여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808년 고도이가 실각하자 이 그림은 그의 모든 재산과 함께 페르난도 7세에게 귀속되었고, 1813년에는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압수되었다가 1836년 반환됐다. 고야는 간신히 이단 심판을 면할 수 있었다.

Goya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목록으로

더보기

궁중 화가였던 고야의 초기 그림들은 미술품의 주요 구매층을 이루던 귀족들이나 왕족의 삶의 유쾌하고 즐거운 면을 묘사하는 모습이 주를 이룬다. 양산을 든 우아한 귀부인, 선명하고 화려한 노란색과 황금색, 장식성이 강한 화풍 등은 당시의 귀족들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가 구축했던 영광을 구가하던 스페인 왕가는 번영에 안주하기만 하고 문명화를 서두르지 않았다.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 그리고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내연남이자 막강한 권력자였던 고도이는 프랑스 혁명을 지켜보며 권력의 공고화를 노렸지만 결국 그들은 프랑스와 영국과 결탁한 페르난드 왕자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야는 이전의 그림에서 보이던 우아한 귀족적 묘사에서 벗어나, 그림의 제작을 요구하는 모든 권력자들의 주문을 수용하되 정치적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기울이지 않으며 그림을 그려 나갔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왼쪽 그림으로 역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을 의식적으로 모방해 그림 왼쪽 구석에 대형 캔버스를 앞에 두고 왕가의 행렬을 냉정하게 그리고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집어넣었다. 작품 한 가운데에는 왕이 아닌 궁정의 실질적인 지도자, 왕비 마리아 루이사를 배치했고, 국왕은 매부리 코에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다. 국왕의 뒤에 왕의 남동생 안토니오 파스쿠알의 모습이 살짝 보이며, 그 옆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공주 부부가 있다. 화면 왼편에는 훗날 페르난도 7세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왕자가 보이고, 그 뒤에는 왕의 여동생인 마리아 호세파 공주가 서 있다. 얼굴을 뒤로 돌린 여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카를로스 4세의 맏딸로 포르투갈 왕비가 된 호아퀴나로 보는 설, 그리고 장차 왕세자비가 될 나폴리 여왕의 딸 마리아  안토니아라는 설이다. 고야는 마리아 안토니아가 스페인으로 온 후 옆으로 돌린 얼굴을 앞으로 돌려 다시 그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이전까지의 궁정 초상화와는 다른, 화가의 솔직함과 무서울 정도로 냉소적인 붓끝을 보여준다. 발견하게 된다. 인물들은 어깨에 스페인 왕실의 훈장인 청색과 백색으로 된 장식 띠를 두르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왕족다운 위엄과 기상을 찾을 수 없다. 보통 궁정에 속한 화가가 왕가의 초상을 그릴 때에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으로 그리기 마련이지만 고야는 오히려 화가의 붓을 무기로 삼아 권력자의 무능과 타락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이 그림을 본 왕실의 가족들이 불경죄로 그를 처벌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들의 아둔함은 자신들의 초상이 풍자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작품 속에서 고야는 왕실 가족과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그의 얼굴은 그들로부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와 어두운 그림자에 반쯤 잠겨 있다. 그러면서 그는 황금과 영광이 지배하는 화려한 무대에서 옆으로 비켜 나 냉정하고 무표정하게 권력의 허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고야의 이 작품이 걸작으로 찬사를 받는 이유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색을 외양뿐 아니라 내면까지 꿰뚫는 탁월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시대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Goya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기마상 목록으로

더보기

마주보고 걸린 카를로스 4세 기마상과 한 쌍으로 그린 것으로, 벨라스케스의 기마 초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스페인 왕의 친척인 루이 14세가 단두대에 오르는 와중이었으니, 벨라스케스처럼 화려한 옷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옛날에 여자들은 말을 탈 때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옆으로 탔는데, 이 그림 속 왕비는 남자들처럼 탄 자세다. 게다가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자신만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고야는 무능한 남편을 휘어잡고 자신의 젊은 애인을 총리에 앉히는 왕비의 개성을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그렸다. 카를로스 4세의 기마상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 특징을 잘 발견할 수 있다. 왕비는 이 그림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Goya 1808년 5월 2일, 1808년 5월 3일 목록으로

더보기

고야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 그려진지 불과 8년 후, 페르난도가 자신의 부모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1808년 3월 즉위한다. 그러나 두 달만에 나폴레옹의 종용으로 왕위를 나폴레옹의 형에게 양위해야 했다. 이때 왕실 가족들은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마드리드를 탈출하려 하는데, 이에 분개한 민중들은 1808년 5월 2일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역사 속에서 미화되어 불과 2년 후 스페인 애국진영에 의해 나폴레옹의 폭정에 대한 항거로 불리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편안하게 유배생활을 보내다가 1814년 5월 페르난도 7세는 마드리드에 재입성하여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고야는 과도기 정부로부터 ‘최고로 칭송될 수 있는 영웅적 행위 또는 유럽의 폭군에 항거한 우리의 명예로운 반란을 기리기 위해 붓을 잡아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그렇게 남긴 작품이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다.

<1808년 5월 2일>은 5월 2일, 프랑스군 휘하의 이집트 친위대와 마드리드 민중 사이에 벌어진

싸움을 묘사한 그림이다. 말을 탄 기병대는 프랑스의 뮈라 장군이 이끄는 이집트 기마병 맘루크인데, 그들의 모습에서 예전의 스페인과 무어인 사이의 갈등을 떠올릴 수 있다.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인물들과 말들이 갑작스레 쏟아져 내리듯 몰려가고, 달려오는 말들은 땅에 나뒹구는 시체들에 놀라 주춤거린다. 그림은 마치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군중들이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 캔버스위에서 갑자기 멈춘 느낌을 준다. 전통적인 전쟁 그림에서처럼 영웅이나 어느 한 인물에 집중하여 승리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군중들의 광기와 잔인성에 초점을 두어 전쟁의 잔인함, 절망한 군중들의 발작적인 폭력을 그려 냈다.

<1808년 5월 3일>은 프랑스 군대가 시민 봉기 가담자들을 처형하는 장면이다. 땅에는 피에 젖은 시체 세 구가 뒹굴고 있고, 수도사로 보이는 양 팔을 들고 서 있는 인물을 비롯해 몇 명의 시민들이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옆으로는 또 다른 사형수들이 줄을 잇고 자기의 차례를 기다린다. 고야는 전쟁의 숭고함이나 영웅적인 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것처럼 그렸다. 캄캄한 어둠이 깔린 하늘 저편으로 도시의 모습이 보이고, 사격수 앞쪽에 놓인 등불로부터 빛이 환하게 비치며, 그 빛은 왼편에 사람들이 등지고 있는 벽에서 반사된다. 땅을 적시고 있는 시체들의 피가 더욱 공포감을 안겨주고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야만적인 행동과 끔직한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 날 죽은 이들의 영을 기리는 걸작이다. 이후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등에서 오마주되었다. 특히 피카소는 명작 <게르니카>를 그릴 때 고야의 이 두 작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Goya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목록으로

더보기

고야는  75세경인 1819년 마드리드 교외에 시골집(일명 ‘귀머거리 집’)을 사서 14점의 대형 벽화를 그렸는데, 어둡고 기괴한 화면 때문에 ‘검은 그림’으로 불린다.  거의 80세를 앞두고 있었고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조수의 도움 없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 누군가의 주문을 받지 않고 예술자의 의지와 영감에 의해 자유롭게 그리는 그림은 현대미술의 특징인데, 이 점에서 고야는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림들은 고야 사후 약 50년이 지난 1870년대에 벽에서 떼어져 캔버스로 옮겨졌지만 이미 훼손이 심해 많은 부분에 복원가의 손이 더해졌다. 따라서 오늘날 미술관에 걸린 그림과 화가가 그린 그림에는 차이가 많을 것이다.

<사투르누스>는 1층 식당 정면 벽에 결려 있었던 작품이다. 크로노스라고도 하는 사투르누스는 고대 로마의 농경신인데, 아들 중 한 명에게 왕좌를 빼앗기리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아들을 차례로 잡아먹는다. 단순한 신화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인간성의 타락, 전쟁의 폭력성,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간의 갈등,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으로서의 사투르누스를 상징하는 의미가 더 크다. 동시에 세상과 단절한 채 병마와 싸우고 있었던 고야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부릅뜬 두 눈은 광기를 내뿜으며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행위에 대해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복원 전 사진을 보면 원래는 발기한 남근까지 그려져 있었는데, 왼쪽 편에는 유디트가 그려진 벽화가 위치해 있어 이 그림과 대조를 이루었다고 한다.

Goya 두 여자와 한 남자 목록으로

더보기

보기만 해도 섬뜩한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웃음을 띠고 있다. 보는 순간 소름이 돋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야가 75세 나이에 '검은 집'에서 그린 14점의 '검은 그림' 중 하나이다. '검은 그림' 시리즈 중에는 엑스레이 촬영 결과 어떤 그림 위에 다시 칠해진 재작업된 것이 많은데, 이 그림은 원래 두 여성이 오른쪽 사람의 무릎에 놓인 책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의미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배경이나 구성상에 특이한 세부 상황이 묘사돼 있지 않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무엇을 보고 웃는지, 이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한 힌트조차 없다. 보통 맨 오른쪽 사람을 '남자'로 추정하는데, 그의 손은 자신의 성기 주변에 놓여 있다. 아마 그는 자위를 하거나, 옆의 여성들에게 성기를 노출하고 있거나, 아니면 단순한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론가 리히트(Fred Licht)는 이 남자의 웃는 표정은 성벅 강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남성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듯한, 사악한 미소로 곁눈질하는 두 여성은 매춘부로 보인다. 두 여성 역시 자위하고 있다는 것들 검게 칠한 그림 하단부가 은밀하게 숨기는 듯하다. 두 여성 역시 남자와 마찬가지로 괴기스럽다. 고야는 늙고 병든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비웃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Maíno 바히아의 탈환 목록으로

더보기

식민지 전쟁이 한참이던 17세기 초엽,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브라질 바히아에서 네덜란드 군대를 물리쳤다. 이런 중요한 승리의 기록은 늘 궁정을 장식해야만 했는데, <바히아의 탈환> 역시 부엔 레티로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주문된 작품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페드릭 데 톨레도 장군은 오른편의 태피스트리 곁에 위엄 있게 서 있고 그 앞에 네덜란드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자비를 간청하고 있다. 장군의 뒤로 걸린 태피스트리에서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당시의 스페인국왕 펠리페 4세에게 승리의 관을 씌워주는 장면이 들어 있다. 태피스트리 안쪽에 그려진 또 다른 인물은 작품을 주문한 올리바레스 공작이다.

작품은 ‘전쟁과 자비 ’라는 대립적 관계를 절묘하게 표현한다. 특히 화면 전면의 환자를 돌보는 젊은 남녀, 그 뒤로 어린아이를 돌보는 여인, 눈을 가리고 슬퍼하고 있는 왼편 끝 부분의 아이와 환자를 가리키며 대화하는 두 남성을 통해 인류애와 자비에 대한 느낌을 부각한다 . 더불어 화면 전반에 이런 분위기가 곳곳에 스며들어 옅은 바다색과 아울러 따스한 기운이 넘쳐난다.

Mantegna 마리아의 죽음 목록으로

더보기

이탈리아 화가인 만테냐는 북이탈리아 만토바 공국 후작의 궁정화가로 두칼레 궁의 천장 프레스코화 같은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원근의 개념을 하나의 인물이나 사물에까지 적용한 단축법을 혁신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다.

<마리아의 죽음>은 현재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동방박사의 경배>, <그리스도의 할례>와 함께 만토바 대공의 궁전 예배당의 제단 후면 장식화 중 하나였다. 이 그림에서 만테냐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 마리아의 죽음을 묘사한다. 체스판 무늬의 바닥과 양쪽의 기둥을 통해 원근감은 극대화했으며, 붉은 옷을 두른 사람에게서 단축법이 엿보인다. 그림 윗부분의 기둥이 미완성인 것은 원래 이 그림이 현재 남아 있는 것보다 더 큰 그림이었음을 암시한다.

Meléndez 잘린 연어, 레몬과 그릇 세 개의 정물 목록으로

더보기

르네상스가 종말을 맞이할 무렵에는 귀족계급과 고위 성직자뿐만 아니라 돈 많은 부르주아지와 떠오르는 상인 계급들도 미술을 향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는 기회가 되었는데, 그 중 하나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배제한 채 생명이 없는 사물만을 그리는 것, 즉 독자적인 영역의 정물화가 등장한다. 정물화는 유럽 전반, 특히 북유럽 국가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다.

한편 스페인 화가들의 정물화는 수르바란이 그러했듯 보데곤, 즉 단순하고 금욕적인 양식으로 많이 그려졌고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그 중 멜렌데스는 고야 이전의 가장 뛰어난 18세기 스페인 화가로 꼽히는데, 놀라울 만큼 명료하고 완벽하게 정확한 정물화로 인정받았다.

Messina 천사에게 부축되는 죽은 그리스도 목록으로

더보기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 출신으로 플랑드르의 유화 기법을 전한 업적이 높이 평가된다. 기하학적 형식에 의한 현실묘사로 베네치아 회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천사가 죽은 예수를 부축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은 수없이 많은데(아래 그림들 참조), 메시나는 특유의 부드러운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한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희로애락이 없는 존재인 천사가 비통해 하는 얼굴을 강조해 그만큼 예수의 죽음이 슬픈 일임을 드러내고, 천사를 한 명만 그림으로써 갈보리에서 시련을 당하는 동안 모두가 떠나 외롭게 버려진 예수의 고독한 감정을 극대화하고 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풍경, 인체를 3/4 측면으로 표현해 강조한 옆구리의 상처, 이 모든 것이 이 작품을 관객을 슬픔으로 이끄는 요소로 작용한다.

다른 화가들이 그린 천사가 죽은 예수를 부축하는 장면들

Mor 메리 튜더 여왕의 초상 목록으로

더보기

모르는 네덜란드의 초상화가로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궁정화가가 되어 세밀한 표현과 세련된 기교에 티치아노의 품격을 결합하여 궁정초상화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그림은 1554년 런던으로 건너간 후 그린 것이다.

메리 여왕은 영국 헨리 8세와 아라곤 왕국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렬한 카톨릭 신자로 1554년 즉위한 후 이듬해에 카톨릭의 나라인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고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신교도를 처형했는데, 그 때문에 후세에 ‘피의 메리’라고 불렸다. 모르가 그린 이 초상은 섬세한 표현으로 궁중 미술의 정점을 보여주면서도 메리 여왕의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꼽힌다.(다른 화가 그림 참조)

다른 화가들이 그린 메리 여왕의 초상

Murillo 귀족 요한의 꿈 목록으로

더보기

무리요는 프라도 미술관의 문 하나의 이름을 차지할 만큼 스페인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전설에 의하면, 352년 8월 5일 더운 여름날에 교황 리베리오와 귀족 요한은 꿈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성모 마리아는 눈이 내린 자리에 교회를 하나 지으라는 계시를 내린다. 더운 여름에 눈이 올 리 만무하지만, 이튿날 실제로 에스퀼리노(Esquilino) 언덕에 하얗게 눈이 내리고 교황과 요한은 그 자리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을 세웠다. 이 성당은 지금도 이탈리아 로마에 있다. 무리요는 이 이야기를 두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두 장 모두 가로가 5m를 넘는 캔버스 크기와 야심 찬 구성, 능숙한 화법으로 배경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무리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무리요는 성모 마리아를 아름답고 친숙하면서도 생명력 있게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Patinir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 목록으로

더보기

파티니르는 플랑드르(현재의 벨기에) 화가로, 보쉬처럼 지평(수평)선을 화면 위쪽에 배치시키고 그 속에 시선을 넌지시 두어 전체를 공상처럼 느끼게 하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특히 녹색, 갈색, 하늘색, 검은 색, 붉은 색을 사용해 종교적 신성을 극대화한 장면을 그린 작품이 많다.

스틱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상과 저승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다. 아킬레우스가 아기 때 몸을 담가 어머니의 손에 잡힌 아킬레스건만 빼고 불멸의 몸을 얻게 된 강도 바로 이 스틱스 강이다. 뱃사공인 카론은 이 강을 지키면서 망자를 강의 저편으로 보내준다. 앞부분은 지옥의 늪으로 떨어지는 부분이라 물살이 거세다. 저 멀리에는 봄의 분수와 망각의 강 레테가 있고, 지옥의 입구에는 머리가 셋 달린 문지기 케르베로스가 웅크리고 있고 더 멀리 지옥불의 화염이 보인다.

파티니르가 묘사한 지옥과 천국의 경계에 대한 묘사는 그리스 신화를 다시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고 그 상황에 맞는 색깔과 구도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존엄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당시 플랑드르의 카톨릭은 1517년 시작된 종교개혁의 열풍으로 신교의 세력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상황이었고 파티니르는 공방(길드)에서 강요하는 종교적 그림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관점에서 이 그림을 본다면 대중에게 지옥의 무서움과 천국의 달콤함을 동시에 보여주어 카톨릭의 존엄과 위협적 메시지를 담으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Poussin 파르나소스 목록으로

더보기

푸생은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데,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세계상을 화폭에 구현하려는 철학적 화가였다. 그가 자신의 후원자이가 이탈리아의 시인인 마리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린 <파르나소스>에도 그러한 경향이 아주 잘 드러난다. 그림에 등장하는 아폴론은 예술의 후원자이다. 파르나소스 산은 뮤즈들의 동산이고 그곳의 샘인 카스틸리아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아폴론은 뮤즈들에게 둘러싸여 시인들에게 월계관을 씌워 준다. 중앙의 백옥 같은 누드 미인은 카스틸리아 샘을 의인화한 것이다. 아이들은 샘의 물을 떠나 문인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는 곧 예술적 영감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아폴론이 있는 한 예술의 미래는 매우 밝을 것이다.

Raphael 추기경의 초상  목록으로

더보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의 한 사람인 라파엘로는 로마에 체류하던 시기에 이 작품을 그렸다. 인물의 개성을 강하게 표현함과 동시에 귀족적인 성품을 부각했다. 날카로운 골상과 안면의 선, 그리고 깊은 윤곽이 인물의 강한 성품을 드러낸다. 소박한 색채를 통해 정적인 자세를 묘사한 반면 인물의 표정은 심리적 면까지 표출해 라파엘로가 초상화를 얼마나 깊이 탐구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한때 줄리우스 데 메디치로 알려져 있었으나 입증된 바 없으며, 오늘날에는 볼로냐 시의 대주교 알세리 추기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Rembrandt 홀로페르네스의 연회에서의 유디트 목록으로

더보기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시대를 연 렘브란트는 빛으로 다양한 회화적 효과를 나타내 ‘명암의 시조’라 불렸다.

이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유일한 렘브란트의 유일한 작품이다. 렘브란트의 서명이 Rembrandt 대신 Rembrant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에는 이 작품을 그린 사람이 렘브란트가 맞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 작품뿐만 아니라 1633년경에 그려진 다른 여러 작품에서도 ‘Rembrant’ 표기를 볼 수 있고 이 작품의 미술적 특징이 렘브란트의 그 시기의 다른 작품들과도 일치해 렘브란트의 진품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주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어 왔으나 구약에 나오는 여성 영웅 유디트에 관한 내용을 묘사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어둠속에 있는 노파의 손에 자루가 들려 있는데, 유디트를 주제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 유디트와 함께 모의한 공범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유디트는 유다 왕국의 베툴리아의 아름다운 과부였는데, 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베툴리아를 34일이나 포위한다. 이스라엘인들은 포위당한 채 기근과 갈증 때문에 항복하려 한다. 그때 유디트가 시녀와 함께 적진으로 가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사 그를 살해할 기회를 노리다가 연회에서 만취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르는 데 성공하고 덕분에 배툴리아는 아시리아 군대를 물리치게 된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이러한 유디트의 이야기와 맞아떨어진다. 1600년대 초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전쟁을 하고 있던 때이고, 그러한 네덜란드가 처한 상황은 이스라엘 민족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Ribera 야곱의 꿈 목록으로

더보기

대부분의 생을 나폴리에서 보냈던 리베라는 카라바지오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아 매우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야곱의 꿈>은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림 중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야곱이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고 있긴 하지만, 꿈에서 본 모습, 즉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으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는 장면은 묘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리베라가 그린 야곱은 평범한 인간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 줄기 빛은 성경 내용을 모르면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미미하다. 마치 시골에서 들판에 누워 잠들던 어린 시절의 서정적인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에서 모든 시선은 꿈을 꾸고 있는 야곱에게 집중된다.

야곱은 그가 꾸고 있는 꿈과는 달리 현실 속의 인간이다. 리베라는 꿈이 아닌 꿈을 꾸고 있는 사람만을 그림으로써 성서의 ‘창세기’를 장식한 이 기적적인 사건을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장면으로 탈바꿈시켰다. 꿈의 내용은 야곱만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의 반 이상을 하늘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다.

Rosales 이사벨 여왕의 유언 목록으로

더보기

스페인 왕국의 통합을 이룩한 이사벨 여왕의 마지막 유언 장면을 옮긴 작품이다. 어두운 배경 속 캐노피 침대에 사망하기 며칠 전의 여왕이 누워 있는데 흰색 시트는 다른 인물의 차분한 색상과 대조된다. 옆에는 유일하게 색채를 강하게 입힌 붉은 옷의 페르디난도 왕이 애도하며 앉아 있고 왕의 뒤에 후아나 공주가 보인다.

19세기 사실적 역사화 시대의 대표자인 로살레스는 이 작품으로 1864년의 국내상과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상을 수상했다.

Rubens 삼미신 목록으로

더보기

플랑드르 출신의 루벤스는 비슷한 화풍의 반 다이크보다 22살 많은 동시대 화가로,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며 그 명성이 유럽 전역에 넘치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젊은 시절부터 화가로서 명성을 누리게 된 루벤스는 5개 국어에 능통하여 외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하고 유럽 각국의 왕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제자들에 둘러싸여 부유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아름다움, 매력, 다산(多産) 등 인간의 미덕을 대표하는 세 여신은 두 팔로 서로의 몸을 정겹게 감싸며 둘러서 있다. 미소 가득한 표정 속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가득하다. 보티첼리, 라파엘로 등 선배들이 그렸던 <삼미신>에 비해 풍만한 신체와 다이내믹한 율동감이 두드러진다. 여신의 모델은 루벤스가 아내와 사별한 후 53세 때 재혼한 둘째 부인 엘레나 푸르망으로, 엘레나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모습을 한데 조합해 이 작품을 완성했다.

엘레나는 겨우 열여섯 소녀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박학다식했다. 루벤스는 엘레나와 함께 한 10년의 간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둘 만큼 정열적으로 사랑을 불태웠으며, 그래서인지 더 이상 무거운 종교적 주제를 그리지 않고 대신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 나선 듯 신화의 세계에 몰입했다. 그 그림들 속에서 엘레나는 때로는 비너스의 모습으로, 때로는 아테나의 모습으로 등장해 신들의 향연의 주인공이 됐다.

Rubens 동방박사의 경배 목록으로

더보기

1609년 처음 그린 후 스페인에 두 번째 여행을 하는 1628~1629년 사이에 더 크게 재작업한 작품이다. 본래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 맺어진 12년 휴전 조약을 기념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앤트워프 시가 의뢰한 작품으로, 이후 스페인의 대사 로드리고 칼데론에게 기증됐다. 청년 흑인, 장년 황인, 노년 백인의 외모를 띠고 황금, 유황, 물약을 아기 예수에게 바치고 있다. 같은 주제의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들이 있지만, 루벤스의 작품에는 이렇게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를 대표하는 동방박사들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처음에 작품은 지금보다 더 작았으며 루벤스 초기 양식을 잘 보여준다. 20여 년 후 루벤스가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 작품을 확장해 다시 작업했는데, 이때 그림 상단에 티치아노 스타일의 천사 두 명을 그려 넣고 우측에는 말에 탄 자화상을 추가했다.

Rubens 용을 무찌르는 성 호르헤 목록으로

더보기

성 호르헤는 조지, 게오르기우스라, 제오르지오라고도 하는 기독교의 성인으로 회화에서는 보통 칼이나 창으로 드래곤을 무찌르는 백마 탄 기사로 그려진다. 전설에 따르면 무서운 용 한 마리가 리비아의 작은 나라 시레나를 장악하고 매일 인간을 제물로 요구했는데, 시레나의 왕은 매일 젊은이들을 산 제물로 바쳤다. 젊은이의 수가 줄자 왕의 외동딸을 용에게 바쳐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용이 공주를 집어 삼키기 전 카파도키아에서 온 젊은 기사 호르헤가 말을 타고 달려와 용을 찔러 제압한다. 시레나로 돌아온 호르헤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을 무찌를 것이니 개종하라고 권했다. 나중에 호르헤는 로마의 박해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Sorolla 해변가의 아이들 목록으로

더보기

스페인의 대표적 근대 인상파 화가인 소로야는 발렌시아 출신으로 마드리드, 파리, 로마 등지에서 수학했다. 일상의 자연스러운 풍광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특히 고향의 아름다운 해변가 풍경을 즐겨 그렸다. 발렌시아 지역의 대표적 특징은 바로 끝이 없는 해안선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이러한 고향 풍경이 빛을 발하고 있다.

활기로 충만한 대기와 햇빛이 쏟아지는 해변가, 그 속에서 산책을 하거나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의 풍경은 따사로우면서도 깊은 애정을 느끼게 한다. 빛과 물, 그리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마치 스냅사진의 한 컷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이면서 인상주의가 아닌 그만의 독특한 화법을 보여준다.

Tiepolo 무염시태 목록으로

더보기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 개신교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카톨릭 미술 주제는 바로 성모 마리아에 관한 것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무염시태이다. ‘무염시태’란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잉태됨을 뜻하는 말이다. 무염시태를 그린 회화에는 일반적으로 초승달 위에 마리아가 서 있으며, 머리 주위는 별들과 태양 빛으로 가득하고 때때로 용과 천사들이 재현되며, 마리아의 상징물들이 첨부되기도 한다.

티에폴로의 마리아는 황금 빛 천상을 배경으로 푸른색의 천구 위에서 초승달과 용을 밟고 서 있다. 그림에서 용의 머리를 한 큰 뱀은 입에 사과를 물고 있는데, 사과는 곧 인간의 원죄를 상징하고 뱀은 그러한 원죄의 원인을 제공한 동물이다.

마리아의 머리 주변에는 열 개의 별들이 둥글게 원을 짓고 있다. 그 위로 성령을 상징하는 백색 비둘기 한 마리가 활짝 날개를 펼쳐 보이며, 마리아의 발아래 어린 천사가 활짝 개화된 백합을 들고 있고 그 아래 왼쪽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비스듬히 뉘어져 있다. 바로 그 옆에 솔로몬이 노래한 ‘사론의 장미’ 한 송이를 볼 수 있다.

티에폴로는 하늘색, 살구색과 같은 중간색들을 파스텔 톤으로 사용했다. 마리아의 자태는 가벼운 춤을 추는 듯한 콘트라포스트 자세, 또 중간에서 벗어나 한쪽으로 이동된 합장한 양손에서 여유 있는 리듬을 느끼게 한다. 티에폴로의 마리아는 아래로 눈을 지긋이 내리 감고 있으며 매우 우아하면서도 성숙한 여인으로 재현되었다.

Tintoretto 제자의 발을 씻기는 예수 목록으로

더보기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마무리하는 화가 틴토레토는 특이한 시점의 역동적 구성, 독창적으로 배치된 극적인 자세의 인물들, 명암대조를 특징으로 한다.

이 그림은 최후의 만찬 전 예수가 겸손과 섬김을 몸소 실천하며 제자 베드로의 발을 직접 씻어주는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발을 씻기는 장면이 가운데가 아닌 오른쪽 가장자리로 쏠려있고 중심부에는 엉뚱하게도 강아지가 있는데, 이 그림이 본래 걸려 있던 위치 특성상 오른쪽에서 그림을 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림을 아래 그림처럼 오른쪽에서 보면 발을 씻기는 장면이 앞으로 두드러져 보이고 다른 제자들은 멀리 보이게 된다. 현장에서 꼭 오른쪽으로 가서 그림의 주제를 크게 감상해 보자. 

Tiziano(Vecellio) 안드로스인들의 바쿠스 축제 목록으로

더보기

바카르날리아(Bacchanalia), 즉 술의 신인 바쿠스(디오니소스)의 공덕을 기리는 축제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페라리의 공작 알폰스 데스테가 방을 장식하기 위해 여러 다른 신화 에피소드의 그림과 함께 주문한 것으로 현재 프라도에 소장돼 있는 <비너스 경배>,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등도 그 중 일부이다.

이 작품은 3세기 그리스 작가 필로스트라쿠스(Philostratus)가 쓴 <이매진(Imagines)>의 묘사를 바탕으로 그려졌다. 안드로스라는 섬에서 술의 신인 바쿠스의 도착을 기념하기 위해 주민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다. 포도주를 중심으로 술에 취한 사람, 춤추는 사람들의 흥에 겨운 모습이 보인다. 분위기를 돋울 플롯을 손에 쥐고 어깨를 드러낸 금발의 여인들 앞에는 “술을 마음껏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은 술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가사가 적힌 악보가 놓여 있다. 이교도적 신화를 주제로 한 이 그림은 많은 등장인물과 리듬감 있는 생생한 움직임,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감으로 넘치는 기쁨인 바쿠스 축제를 표현한 작품이다.

Tiziano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든 살로메 목록으로

더보기

살로메는 성서에 나오는 여인이다. 그의 아버지인 헤롯 왕은 형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는데, 세례 요한이 이것이 옳지 못하다고 비난하자 헤로디아는 앙심을 품고 왕을 설득해 세례 요한을 감옥에 집어넣는다.

이후 어느 헤롯 왕의 생일날, 헤로디아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인 소녀 살로메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어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거기에 흡족해진 왕이 살로메에게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살로메는, 어머니가 미리 귀띔해 둔 대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말한다. 헤롯 왕은 망설였지만 약속을 깰 수는 없어서 요한의 목을 벤다.

이후 살로메는 순수한 악녀의 상징으로서 지금까지도 수많은 건축 조각 장식과 부조, 그림, 연극, 무용, 오페라 등에 등장하고 있다. 초기에는 살로메가 춤추는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이 많았는데 15세기 이후 화가들은 살로메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받아든 장면에 더 관심을 둔다. 티치아노는 살로메를 ‘소녀’라기보다는 관능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전리품처럼 쟁반을 높이 들고 몸을 뒤로 젖힌 자세에서 그녀의 춤추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한편 쟁반 위의 세례자 요한의 머리, 그리고 깊은 눈에 시선을 멈추면 두려움과 섬뜩함이 느껴진다.

Tiziano 베누스와 아도니스 목록으로

더보기

사랑의 여신 베누스(비너스)는 미소년 아도니스와 사랑에 빠졌는데, 어느 날 아도니스가 사냥을 나가면 사고로 죽게 될 것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여신은 아도니스를 말리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도니스는 젊은 혈기로 연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냥을 나가 결국 죽고 만다. 그림 뒤편에는 잠든 큐피트가 보인다. 베누스의 아들이자 사랑의 전령사인 큐피트가 잠들어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 곧 끝날 것임을 암시한다.

연인의 배경에는 나무, 풀밭, 하늘과 그림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티치아노 이전에는 배경을 이렇게 신경 써서 자연스럽게 그린 화가가 없었다. 배경은 그림의 부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이런 풍경 묘사 역시 후대 화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Tiziano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 목록으로

더보기

우리의 눈은 모든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다. 가령 몇 미터 앞에 있는 사람이 입은 니트의 결 하나하나가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니트의 결은 못 보더라도 그 사람이 니트를 입고 있다는 것은 볼 수 있고, 그것이 매끈한 것인지 아니면 거칠고 보풀이 이는 옷인지는 알 수 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볼 수는 없지만 머릿결을 짐작할 수는 있다. 티치아노는 사람의 눈이 사물을 보는 이러한 방식을 화폭에 표현한 화가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보면 뿌연 느낌이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머리카락이나 옷감이 매우 그럴듯해 보인다. 이러한 티치아노의 화법은 이후 틴토레토,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나아가 인상주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는 그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다나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외손자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딸을 탑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던 중 지나가던 유피테르(제우스가 다나에를 보고 첫눈에 반한 나머지 황금비로 변신해 다나에를 찾아온다. 티치아노는 이 황금비를 금화처럼 동글납작하게 표현했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페르세우스이다. 티치아노는 시커멓고 주름 많은 데다 금화를 받으려고 할 만큼 욕심 많은 노인을 그림으로써 다나에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연출하고 있다.

Tiziano 카를 5세의 기마상 목록으로

더보기

뮐베르크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티치아노는 전쟁의 승리를 황제가 말 위에 앉아있는 기마상으로 표현했다.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귀족답거나 잘생기거나 승리에 가득 찬 모습으로 그리지는 않았다. 황제의 엄격한 얼굴은 막대한 권력을 향한 욕망을 담고 있으며 고독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어두움이 화면에 전체적으로 깔려 있다. 넓게 퍼져있는 수풀은 일몰하는 태양 빛을 받아 서서히 불타오르는 듯하며 붉은색의 색감이 황제의 금속 갑옷에 둘린 빨간 휘장, 투구와 말의 깃털 장식에서 서로 반향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이후 반 다이크와 벨라스케스에게 영향을 미치며 영웅 기마상의 좋은 표본이 되었다.

Van Dyck 엔디미언 포터 경의 초상과 안톤 반 다이크의 자화상 목록으로

더보기

반 다이크는 루벤스와 함께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특히 초상화로 국제적인 이름을 떨쳤다. 이후 2세기 동안 그의 초상화는 유럽의 귀족, 궁정 초상화의 기준이 되었고, 반 다이크라는 이름은 ‘우아하고 세련된’ 초상화와 그런 분위기를 가진 인물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사용되곤 했다.

이 작품에서 반 다이크는 대비되는 색채와 뒤틀린 자세를 통해 시선의 분산을 막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공고히 한다. 특히 반 다이크가 어깨에 올린 손은 자신을 봐 달라고 비밀스럽게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다. 눈 또한 비록 한 눈에만 광선이 비춰지고 다른 한눈엔 그늘로 가려졌다 해도 엔디미온 포터 경의 눈보다 더 훨씬 생기 있고 활력 있어 보인다.

Velázquez 브레다의 항복 목록으로

더보기

세비야 출신인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빛’과 ‘색’이라는 회화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그리는 방법’ 자체를 혁신해 18세기 고야, 19세기 마네와 인상주의 화가, 20세기 피카소, 달리,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미술사 안팎의 수많은 인물들에게 강력한 영향과 영감을 준 ‘화가 중의 화가’이다. 활동 초기에는 당시 유럽 전역을 매혹시킨 카라바지오의 영향으로 어두운 바탕에 단일한 광원으로 조명된 사실적인 인물 묘사를 많이 보였다. 초기에는 보데곤도 많이 그렸는데, 다른 보데곤 화가들과 달리 그는 서민들을 조롱거리로 삼거나 그 특징을 과장하지 않고 나름의 위엄과 격조를 유지했다.

벨라스케스는 일찍이 펠리페 4세의 인정을 받아 궁정화가로 임명됐다. 이후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제외한 평생을 마드리드와 인근 왕궁들에 거처하며 펠리페 4세의 화가이자 궁정인으로 살았다. 당시 스페인에서 화가는 돈을 받고 노동력을 파는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는데, 벨라스케스는 평생 귀족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을 만큼 신분 문제에 민감해 했다.

그래서 그가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초상화에 편중되어 있고, 유일하게 그린 역사화가 바로 이 <브레다의 항복>이다. 역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부엔 레티로 궁전을 장식하고자 주문 받은 그림으로, 에스파냐 바로크 시대의 역사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펠리페4세 시절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 네덜란드의 브레다 지방을 함락한 사건을 묘사했다. 항복한 네덜란드 장군 나사우가 당시 에스파냐 군대를 이끌던 암브로지오 스피놀라에게 브레다의 열쇠를 건네주는 장면이다. 화면의 좌우로 승자와 패자가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벨라스케스는 승자인 에스파냐 군대를 표현하기 위해 우측 뒤편에 수직으로 질서정연하게 세워져 있는 창들을 그려 넣었고(이 창들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이 그림에는 ‘창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패자인 네덜란드 군대의 모습은 전열이 흩어져 있는 상태로 표현했다. 두 장군은 서로를 존중하며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말에서 내려 조우한다. 피놀라 장군은 패한 적장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데, 이는 스페인군의 힘뿐 아니라 기사도의 관용의 미덕까지 보여주는 구성이다.

이렇게 벨라스케스는 모든 수사적 기교를 배제하고 이 사건의 핵심인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양편 모두에게 인간성과 품위를 부여한 이 그림은 승리자를 영웅시하고 패자를 치욕스럽게 묘사했던 기존의 전쟁화와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또 투명한 대기의 묘사와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구성, 색조의 배치와 같은 형식미에서도 원숙한 기량이 느껴진다.

Velázquez 바쿠스와 주정뱅이들 목록으로

더보기

이 당시 신화를 주제로 다룬 화가들이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경건한 분위기를 추구했던 것과 달리, 벨라스케스는 직설적이고 단순하며 사실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 마치 평범한 농부들이 모여 포도주의 신 바쿠스를 흉내 내는 젊은 배우와 함께 장난을 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듯하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대표작으로, 그가 1628년 마드리드에서 루벤스를 만나 함께 이태리를 여행하던 때쯤 그린 것이다. 술의 신인 바쿠스를 신적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하층민에 속한 인물처럼 묘사했다. 화면의 색감 역시 아름답고 이상적인 의식이 거행되고 있다기보다는 매우 현실적인 상황이라는 느낌을 준다.

바쿠스를 따르며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시골 농부들은 당시 일상적인 현실 속 인물들의 모습이다. 쾌활한 주정뱅이들의 모습이 카라바지오의 작품을 연상시키며 일상의 인물들이 등장한 것 같은 장면은 보데곤을 연상시킨다. 왕이든 광대이든, 왕자이든 거지이든 간에 평범한 농부들의 웃음에도 인간적인 존엄성이 똑같이 묻어난다.

Velázquez 수사슴의 머리 목록으로

더보기

벨라스케스는 왕의 초상화만 그린 것이 아니다. 불치병이 있는 광대, 왕궁의 하인, 난쟁이 시녀, 졸고 있는 개 모두 초상화의 대상이었다. 이 작품은 그 중 하나로, 갑자기 마주친 인기척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사슴의 초상이다. 멋진 뿔에 어울리는 위엄을 잃지 않은 표정을 포착하고 있다.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의 한 문학교수가 벼룩시장에서 우리 돈 몇 천원에 샀다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으로 밝혀지자 프라도 미술관에 기증하면서 세상에 드러난 작품이다.

Velázquez 이사벨 데 보르본의 기마상 목록으로

더보기

플랑드르 화법을 구사하던 다른 화가가 그린 초상화를 수정한 것이다. 부엔 레티로 궁전의 그림을 걸 장소에 맞춰서 천 캔버스를 크게 확장하고, 왕비의 얼굴과 옷 부분을 그대로 두고 벨라스케스가 말과 풍경 부분을 수정했다. 말의 턱 밑과 앞다리를 보면 배경보다 어두운 부분이 있어 수정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말의 턱 및, 앞다리 부분의 수정한 흔적

왕비가 목에 두른 레이스, 드레스와 말에 씌운 화려한 천의 화려한 무늬 등은 벨라스케스와 화풍이 아주 다른데, 이런 정교함은 플랑드르 화가의 스타일과 비슷하다. 벨라스케스는 말갈기를 그릴 때 물감에 기름을 많이 섞어 묽은 물감으로 흐르는 듯 그리는, 즉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화가였다.

Velázquez 시녀들(펠리페 4세의 가족) 목록으로

더보기

마드리드 알카사르 왕궁에 있는 왕의 개인 집무실에 소장되어 있다가 19세기 초에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져 대중에게 공개 되면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시도되었으나 여전히 해석이 분분한 작품이다.

<시녀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왼편에서부터 차례대로 당시 궁정화가였던 이젤 앞의 벨라스케스 자신과 시녀 한 명, 마르가리타 공주, 다른 시녀 한 명, 우측 두 명의 난쟁이다. 그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왕비의 시녀장과 왕비의 수행원으로 추정된다. 배경 중앙부의 좌측에는 거울에 비친 국왕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이사벨 왕비가 죽은 후 맞은 둘째 부인가 보이고 그 우측 열린 문 틈 사이로 보이는 계단 위의 인물은 왕비의 시종이다. 처음에는 ‘시녀들 및 여자 난쟁이와 함께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로 기록되었다가 이후 ‘벨라스케스 자신의 초상화’, ‘가족도’, ‘펠리페 4세의 가족’ 등으로 기록됐다. <시녀들>이라는 제목은 1843년 이후에야 등장한다.

이 작품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와 면밀한 관찰이 결합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제작되는 벨라스케스 초상화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로 다른 신분에 속한 사람들을 정확하게 옮기면서도 이들이 자신이 설정한 체계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인물간의 관계에 있어 기반이 되는 태도와 미묘한 감정을 잘 포착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왼쪽 시녀의 마르가리타 공주에 대한 존경 어린 태도와 다정한 친밀감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거울과 열린 문을 통해 공간을 넓게 확장시키는 방식은 벨라스케스가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시녀들>에서 거울 안에 반사된 이미지로 등장하는 국왕 부부(왼쪽 그림)는 그림의 모델로 서 있고 공주가 그곳을 방문해 부모님을 즐겁게 해 주고 있다. 그런데 당시에는 국왕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순전히 상상에 의해 그린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면서도 모호한 시각적 장치는 화면 내부의 재현된 세계와 화면 밖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관람자가 실질적으로 궁중 생활의 일원이 된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관람자의 시선, 현실과 현실의 재현인 이미지, 실제와 환영의 관계가 교묘하게 얽히면서, <시녀들>은 단순한 초상화의 차원을 넘어 보다 복잡하고 상징적인 의미 체계를 가지게 된다.

한편 왼쪽에 위치한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은 이 작품의 해석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벨라스케스는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전통적인 ‘화가’의 도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삽입함으로써 예술 창작과 회화의 고결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주제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화면 뒤쪽 벽에 걸린 두 점의 회화, <팔라스와 아라크네>와 <판과 아폴로의 시합>(아래 그림)이 자주 언급된다. 벨라스케스의 사위가 루벤스의 작품을 모작한 이 두 그림은 모두 인간의 ‘공예’를 뛰어 넘는 뛰어난 신적 ‘예술’의 승리를 주제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의 신성화, 그 우월성과 고결함에 대한 강조는 왕과 왕실 구성원의 등장으로 한층 더 심화된다.

<팔라스와 아라크네>와 <판과 아폴로의 시합>

<시녀들>에는 벨라스케스의 예술적 열망뿐 아니라 고귀한 신분에 대한 열망도 함께 투영되어 있다. 국왕과의 친밀한 관계는 귀족의 신분을 얻고자 했던 벨라스케스의 목표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시녀들>은 펠리페 4세가 벨라스케스의 작업 공간을 방문한 장면을 포착했는데, 이를 통해 벨라스케스는 회화가 천대받던 17세기 스페인에서 자신과 국왕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고 자신의 작품들이 가진 우월성과 고결성을 시각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시녀들>에서 벨라스케스는 산티에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가 드러나는 상의를 착용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가 기사단의 일원이 된 것은 그림이 그려지고 3년 후인 1659년의 일이다. 따라서 이 복장은 그림을 완성한 후 나중에 덧그린 것으로 신분 상승에의 욕망을 투영했음을 알 수 있다.

엄밀하게 따졌을 때 <시녀들>은 벨라스케스의 실제 화실이 아닌 알카사르 궁전에 있는 카를로스 왕자의 방을 묘사하고 있다. 이 방은 약 40점에 달하는 루벤스 회화의 모작들로 채워져 있었고 펠리페 4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 받은 루벤스는 동시대 다른 화가들에게 동경의 대상었다. 루벤스의 그림에 대한 왕실의 높은 평가를 대변하는 카를로스 왕자의 방을 배경으로 선택함으로써 벨라스케스는 루벤스와 마찬가지로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고결한 사회적 신분을 획득하고자 하는 자신의 야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Velázquez 실 잣는 사람들(아라크네의 우화) 목록으로

더보기

이 작품의 첫 번째 소장가의 기록에는 이 작품이 <아라크네의 우화>라고 되어 있었지만, 엉뚱하게도 훗날 왕궁에 소장된 후 기록에는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일하는 실 잣는 여인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후 20세기 초까지 수많은 화가와 연구가들은 이 작품을 태피스트리 공장의 광경을 그린 풍속화 정도로 이해했다.

그림에는 세 개의 다른 장면이 묘사돼 있다. 먼저 작품의 전경에는 ① 실을 잣고 물레를 돌리는 두 여인과 이들의 시중을 드는 다른 여인들이 표현되어 있다. ② 둘째로 이들 뒤로 계단위에는 마치 무대 같은 공간이 보이는데, 그 공간에 있는 세 명의 여인들이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감상하고 있다. ③ 마지막으로 태피스트리에는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왼쪽 인물이 손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일상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신화의 한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는 의문이 제기 된다. 그 이유는 마치 태피스트리에 그려진 장면처럼 보였던 후경의 두 인물이 자세히 관찰해 보면 태피스트리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품은 총 네 개의 공간으로 구별된다. ① 실을 잣고 물레를 돌리는 여인들과 시중드는 여인들, ② 태피스트리를 감상하는 세 명의 여인들, ③ 싸우고 있는 듯 보이는 두 명의 인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④ 태피스트리에 표현된 장면이다.

네 개의 장면들

이후 20세기 초반 미술사학자들이 태피스트리에 표현된 장면이 티치아노가 그린 <유로파의 납치>를 인용한 것임을 확인하고, 후경에 그려진 두 인물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직조의 여신 팔라스 아테네 그리고 리디아의 여인 아라크네라는 사실까지 밝혀진다. 아라크네가 아테나와 대결할 때 베에 수놓은 장면이 바로 제우스가 유로파를 납치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Veronese 베누스와 아도니스 목록으로

더보기

티치아노의 그림이 아도니스를 말리는 비너스를 그렸다면, 이 작품은 죽은 아도니스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던 비너스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아도니스의 사냥개들은 신들의 사랑에 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 그림에 유머를 보태고 있다.

한편 큐피트는 헬레니즘 조각상 중 ‘거위와 노는 소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아도니스의 모습은 로마의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미소년 ‘엔디미온’ 조각에서 따온 것이다. 이를 통해 베로네세가 그림을 그리기 전 로마에 다녀왔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엔디미온' 조각

Weyden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목록으로

더보기

예전의 종교화 속 예수는 육체적인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는 듯 멀쩡하게 그려질 때가 많았다. 그러다 점점 예수도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는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그 모습을 보던 마리아 역시 마음이 아팠으리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늘어났다. 베이던은 그 표현 방식을 더 세련되게 다듬어 머리카락 하나하나, 옷감의 직조, 두건에 꽂은 핀, 주름살이나 손등의 핏줄 등을 섬세하게 그려 놓았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은 물론 표정이나 눈물 등이 실감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크게 그리고 그림에 인물들을 꽉 채워 놓아서 마치 이 사건이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 즉 슬픈 연극의 한 장면을 맨 앞줄에서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있던 자리가 아담의 무덤 바로 위라고 믿었는데, 발밑에 놓인 해골은 바로 아담의 해골을 의미한다.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의 죄를 씻기 위해 예수가 자신을 희생했다는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방식이다.

Zurbarán 아그누스 데이(하느님의 어린양) 목록으로

더보기

수르바란은 강한 명암 대비를 특색으로 하며 성직자, 수사, 수도원에서의 생활을 주된 회화 소재로 삼아 종교성이 짙은 작품을 남겼다. 검은색 배경에 관조적 정물화로도 유명하다. 17세기 스페인에서는 인류를 대신한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을 암시하는 ‘Agnus Dei’, 즉 신의 어린 양의 이미지가 확산됐다. 이 말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한 말 그대로인데, 화가들은 이 점에 착안해 요한을 팔에 어린 양을 안은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밝은 빛이 비치는 창턱에 누운 양의 모습으로 구성하기도 했다. 수르바란은 이 주제로 여섯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 중 가장 성숙한 버전이다.

예수가 태어나는 장면과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는 장면, 마리아가 숨을 거두는 장면 등이다. 프레델라 속 요셉은 대머리에 허연 머리칼을 가진 노인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마리아가 죽을 때까지 처녀였으니 그 남편인 요셉은 젊고 잘생긴 남자가 아니라 남자구실을 잘 못할 것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수태고지>의 프레델라

Bermejo  실로스 제단화의 성 도밍고(도미니코)  목록으로

더보기

바르톨로메 베르메호가 그린 사라고사 성 도미니코 성당의 제단화 일부로, 18세기에 해체되었다. 성 도미니코의 즉위식을 표현한 가운데 조각은 베르메호의 단독 작품이나 15세기 스페인 회화의 걸작으로 평가되며, 나머지 두 개 패널은 베르메호의 제자와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 연도(年度)가 적혀 있는 그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서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요소가 엿보인다.

Berruguete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성 도미니코  목록으로

더보기

성 도미니코는 12세기 후반과 13세기 초반에 활동한 스페인의 카톨릭 사제이자 도미니코 수도회를 창시한 인물로 사후 교황에 의해 시성된 청빈한 수도사였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서 그는 엉뚱하게도 잔인한 종교재판을 집행 중이다. 여기에는 당시 스페인 심문관들의 계략이 숨어 있다.

이 작품은 카스티야 르네상스의 창시자인 페베루게테가 스페인 종교 재판소의 의뢰를 받아 그린 작품이다. 성 도미니코는 실존 인물이나 종교 재판소가 생기기도 전에 사망한 인물로 종교 재판소와는 관계가 없다. 요컨대 스페인의 이단 심문관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그림을 의뢰함으로써 일종의 전설을 만들어낸 셈이다. 이후 16~17세기 개신교도들이 종교 재판소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단 심문관 도미니코의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욱 과장하며 흑색선전에 이용하게 되었다. 베루게테는 이밖에도 도미니코를 악인으로 묘사한 그림을 여럿 그렸다.

Bosch 쾌락의 정원  목록으로

더보기

‘세 폭 제단화(Triptych)’라는 중세의 전형적인 그림 형식을 빌렸지만 실제로 제단화로 쓰인 적은 없는 작품이다.

왼쪽 날개는 에덴의 동산으로 모두가 풍요롭게 공존한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 구분과 경계가 모호해서 연못 속의 부리 달린 생명체는 수도사의 모습으로 책을 읽기도 한다. 선악의 구분도,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구분도 원래 없는 듯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이 평화로이 어우러져 존재하는 곳이다. 아담의 갈비뼈에서부터 막 태어난 이브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처음 아담과 대면하는데, 아담도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그의 앞에 서 있는 이브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다.

오른쪽 패널은 지옥이다. 중앙에서 창백한 흰색의 나무 다리를 하고 곁눈질로 관객을 노려보는 기괴한 인물은 보쉬 자신의 자화상이다. 그 뒤로는 차가운 빙판과 뜨거운 불벼락이 화면을 뒤덮고, 아슬아슬 얼음판에서 스케이트를 타거나, 불나방처럼 불 속을 뛰어드는 인간의 무리들이 그려진다. 인간 이외의 어떠한 ‘자연’요소도 완전히 배제된, 문명화된 도시의 검은 그림자가, 얼음과 불덩이의 양 극단 사이로 배경을 이룬다. 오른쪽 코너에는 수녀의 가운을 걸친 돼지가 서약서에 사인을 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괴물의 얼굴을 한 특수 기계 장치가 인간의 몸을 통과시켜 웅덩이로 빠뜨린다. 모든 것이 ‘거꾸로 나라’여서, 악기를 즐겼던 인간들은 악기에 매달려 고문을 당하고, 도박을 즐겼던 인간들은 게임 도구로 희생당하며, 생전에 많이 먹은 사람은 이곳에서 먹은 것을 토해내야 한다는 듯 악마가 협박하고, 생전에 토끼 사냥을 즐겼던 인간은 토끼에게 오히려 사냥 당한다. 보쉬는 이렇듯 매우 창의적인 방식으로 지옥을 표현했다.

중앙 패널로 돌아오면, 다시 넓은 대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진 온갖 피조물의 향연이 펼쳐진다. 여기는 대체 어디일까? 남녀가 각각 파트너를 이룬 채 성행위를 암시하는 몸짓들로 활기차고 인간보다 큰 딸기가 넘쳐나며, 새들이 물에서 놀고, 고기가 날개를 달아 하늘을 날며, 온갖 동식물이 인간과 혼연일체 되어 노니는 곳이다. 이 중앙 패널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한데, 대개는 이러한 혼란과 과도한 쾌락의 추구가 오른쪽 패널의 지옥을 향하는 지름길임을 경고하는 것이고 이것이 작품의 핵심 주제라고 말한다. 한편 다른 미술사가들, 특히 2002년 이 작품에 대한 책을 펴냈던 저명한 미술사가 한스 벨팅(Hans Belting)은, 이 중앙 패널의 묘사야말로 이때까지 어디에도 없었던 ‘유토피아’의 가상적 시공간이라고 해석한다.

또 하나,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은 바로 원근의 표현이다. 보쉬는 이 수많은 개별 요소들을 한 폭에 담아내기 위해 뒤에 있는 것일수록 작게 그리면서 동시에 화폭의 위쪽에 배치했다.

Brueghel 죽음의 승리  목록으로

더보기

16세기는 사람들의 관심이 정신적 관념이 아닌, 현상의 삶 그 자체에 집중된 시기였다. 그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악마’였다. 천재지변이나 장님, 절름발이 같은 육체적 기형, 흑사병 등의 질병 등 수많은 재앙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고 그 원인으로 언제나 ‘악마’가 거론됐다. 이때 사람들은 악마를 재앙을 내리는 실제적인 존재로 믿었고 고문이나 마녀사냥도 성행했다. 그래서 악마나 죽음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다.

브뤼겔은 1552년 악마 시리즈 세 점을 비슷한 크기로 그린다. <죽음의 승리>는 그 중 하나인데, 재앙을 그렸지만 악마를 그리지 않고 대신 낫자루로 인간을 베어 쓰러뜨리는 해골을 표현했다. 말라비틀어진 초목과 불에 타 연기가 피어오르는 황폐한 배경에 여기저기 수도 없이 흩어져 있는 고통 받는 인간들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이런 처참한 장면들 속에서 희망적인 모습은 어느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오른쪽 맨 아래에는 여자와 태연하게 연주를 하는 남자가 보이는데, 죽음이라는 절실한 문제에서조차 여유와 해학을 표현하는 유머를 택한 것이다. 다른 화가들이 죽음의 순간을 잔인하고 처절하게만 보여주는 것과 대조적이다.

Caravaggio 다윗과 골리앗  목록으로

더보기

카라바지오는 이탈리아 카라바지오 출신으로 활동 당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 작품은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내리쳐 자른 후 그 머리를 끈으로 잡아매려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그림 속 어린 다윗은 방금 적장을 죽인 사람 같지 않게 고요하고 차분하다. 고운 손과 발은 커다란 골리앗의 외형과 완전히 다르다. 다윗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골리앗의 얼굴은 매우 사실적인 데다 관객 바로 앞에 있어 더욱 강렬하다. 카라바지오는 이렇게 거대한 패자와 연약한 승자를 대조해 그림에 입체성을 더했다.

카라바지오의 가장 큰 특징은 빛의 사용이다. 이전의 그림들은 빛이 화면에 고르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카라바지오는 연극의 어두운 무대 위에 인물들을 세워 놓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처럼 빛을 사용했다. 인공적인 조명이라고는 촛불뿐이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카라바지오의 극적인 빛 표현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어둠과 빛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명암법은 이후 17세기에 널리 퍼졌다.

Correggio 놀리 메 탄게레  목록으로

더보기

‘나를 만지지 말라’는 뜻의 라틴어 ‘Noli me tangere’는 부활한 예수가 처음으로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한 말이다. 무덤이 비었음을 알게 된 마리아가 예수를 정원사로 착각해 그에게 예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간청하는데, 예수는 마리아에게 자신을 밝히며 “나는 아직 아버지께 가지 않았으니, 나를 만지지 말라.”라고 말했다. 예수가 두 세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떨어지라는 몸짓을 하면서 한 쪽 어깨 너머로 힐끗 시선을 던지고 있는 예수의 자세를 통해 전달되는데,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이 장면을 작품으로 남겼다.

코레지오의 이 작품은 볼로냐의 한 가문의 예배당에 쓰이기 위해 의뢰된 것으로 훗날 펠리페 4세에게 선물되었다. 날이 밝아오는 새벽을 배경으로 마리아의 불안정함이 예수의 평온함으로 상쇄돼 조화를 이루는 구성이다.

Cotán 사냥감과 과일, 채소가 있는 정물화  목록으로

더보기

산체스 코탄은 스페인의 대표적인 정물화가이자 17세기 스페인 정물화의 황금기를 이끌어냈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보데곤(bodegón, 음식과 그릇 등 정물 주제를 부각시키면서 서민의 일상생활 속 장면을 묘사한 장르화)이 인기를 끌었는데, 코탄은 보데곤 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극적인 명암의 대비를 활용하여 소재를 만져질 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정물을 화면 앞으로 끌어낸 것이 특징이다. 극도로 사실적이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수렵조와 과일, 채소들은 티끌 하나 없는 정갈한 공간 속에서 새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강렬한 조명을 받고 있다. 양식이라기보다는 마치 기하학의 원리와 수학적인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누군가가 엄격하게 배열해 둔 도형처럼 보인다.

성공한 화가였던 코탄은 40대에 돌연 속세를 버리고 청빈과 정결, 침묵을 서원하는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으로 출가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알 수 없는 신비감을 자아내는 코탄의 정물화가 마치 그의 미래를 예견한 것 같다. 

Dürer 장갑을 낀 자화상  목록으로

더보기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로 불리는 뒤러는 화가가 과감하게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많은 자화상을 그린 최초의 화가이다. 그 전에는 화가가 자신을 그린다 해도 다른 그림에 살짝 끼워 넣는 등 소극적이었다. 때문에 뒤러는 ‘자화상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자화상을 회화의 한 영역으로 개척했다고 평가된다.

<장갑을 낀 자화상>은 스물여섯 살 때의 모습으로 젊은 화가들의 다양한 자화상 가운데 가장 생생하면서도 잘 구성된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자신감 외에도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며, 베네치아 풍의 옷을 입고 당시 유행하던 흑백의 줄무늬 모자를 썼다. 그림 속 창틀 아래에 ‘1498, 내 모습을 그렸다. 난 스물여섯 살의 알베르트 뒤러다’라고 새겨져 있다.

뒤러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고 화가의 사회적 지위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전 시대의 화가들과 달리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 자신의 이름 첫 글자인 A와 D를 가지고 하나의 복합적인 문양을 만들어 자의식 강한 화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서명은 화가를 확인해 주고 그 이름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아울러 작품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뒤러는 홍보의 중요성과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제대로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외국으로 판매하기 위해 특별히 전문 대리상을 고용하기도 했다.

Dürer 아담, 이브  목록으로

더보기

기독교 교리에서 이브는 타락의 원인을 제공한 악녀였다. 그래서 중세 화가들은 이브를 그릴 때 남자를 유혹하는 여성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서부터는 아담과 이브의 테마가 새롭게 표현되었다. 첫 번째 인간으로서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살았다는 점에서 인체를 누드로 그릴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된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들고 있지만 벌거벗은 몸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디에도 천사나 악마는 없다. 중세 그림 속 아담과 이브가 종교관에 충실해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인물이었다면, 뒤러의 아담과 이브는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뒤러는 당시의 미남 미녀를 모델로 이탈리아에서 배워 온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인체’를 표현해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남녀를 완성했다. 두 사람의 포즈는 체중을 한 발에만 실어 비튼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자세인데, 화가들은 이 자세가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하여 인물화게 많이 채택했다.

이 그림은 긴 떡갈나무판을 여러 장 이어 붙인 다음 그 위에 그린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물감이 칠해진 앞면과 물감이 없는 뒷면의 수축 속도가 달라 점점 판이 둥글게 휘기 시작했다. 지난 세기의 잘못된 복원 때문에 휨 현상이 갈수록 심해졌는데, 최근 복원팀이 다시 이를 대대적으로 복원해 2011년 다시 전시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림 끝 부분이 아직 살짝 휘어 있다.

El Greco 삼위일체  목록으로

더보기

엘 그레코는 원래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이어서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라고 불렸다. 일찍이 베네치아로 건너가 티치아노에게 배우다가 로마에서 몇 년 머문 후 톨레도로 이주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충실한 소묘 실력과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은 인체 표현력이 빼어난데, 특히 티치아노에게서 배운 색채 표현이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펠리페 2세 당시 스페인은 독일 부분을 제외한 기존의 영토 대부분과 아메리카 대륙, 필리핀(스페인어로 필리피나, 즉 펠리페의 땅이라는 뜻)에 이르기까지 어느 때보다 넓고 흩어진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땅을 직접 다스리기 어려워 각지에 신하들을 보내고 본인은 궁전에서만 생활하며 서류 더미에 쌓여 살았다. 톨레도는 성곽과 강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급격하게 커진 나라 살림을 꾸리기에 역부족이었고, 왕은 토착 귀족이 없고 물이 풍부하며 지리적으로 카스티야 중심에 위치한 작은 마을 마드리드를 수도로 옮겼다.(참고로 아직도 마드리드의 공식 명칭은 ‘도시’가 아닌 ‘Villa de Madrid’, 즉 ‘마드리드 마을’이다.)

엘 그레코가 스페인에 왔을 때는 마드리드는 수도가 된지 얼마 안 되어 조금씩 분주해지기 시작하는 마을에 불과했고 아직 톨레도가 스페인 사회, 종교,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처음에는 새 수도인 마드리드에 지내고 싶어 했지만, 펠리페 2세가 그의 새로운 성향과 주제를 지닌 작품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궁정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톨레도가 정착하게 되었다. 톨레도에서 그는 이탈리아 유학파로 인정받아 그림 주문을 많이 받았고, 오히려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했다. 플랑드르 화풍이 널리 퍼져 있던 당시 엘 그레코의 베네치아 스타일의 그림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삼위일체>는 그가 톨레도로 이주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린 톨레도 초기작 중 하나로 본래 톨레도 외곽의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성당의 제단화 중 하나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그림 속 죽은 예수의 모습 때문이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보던 그림 속 예수는 거의 40일을 거의 굶은 채로 잡혀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뼈가 앙상하고 피가 낭자한, 처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예수는 피가 아주 살짝 맺혀 있는 데다 건장하고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다. 또 하나의 충격은 성부가 쓴 관이었다. 이 관은 카톨릭 관이 아닌, 그리스 정교회의 사제들이 쓰던 관이다. 이 그림을 주문했던 추기경이 모자 부분을 수정해 달라고 했지만 엘 그레코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그림에 관한 한 신념이 확고해 주문자로부터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소송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El Greco 가슴에 손을 올린 귀족  목록으로

더보기

검은색 옷 안에 흰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기사가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있다. 기사가 어떤 의식에서 맹세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근엄하거나 용맹스러운 표정은 아니다. 블라우스의 깃과 소매 끝에는 화려한 레이스가 달려 있어 검은 옷과 대조를 이룬다. 왼쪽 가슴 아래에 있는 황금색 검(劍)은 손잡이의 디자인과 세공이 뛰어나고 화려하다.

이 기사는 톨레도의 시장이었던 후안 데 실바로 추정되는데 당시 기사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사료로도 의미가 있다. 가슴에 얹은 손을 보면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이 서로 붙어있는데, 이렇듯 엘 그레코는 손에도 많은 표정을 실으려 했다.

El Greco 우화  목록으로

더보기

16세기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모던한 작품으로 자연스러우면서 과감한 빛, 밝은 빛 앞에서 윤곽이 흐려진 소년의 손과 얼굴, 대충 그린 듯 보이지만 질감을 잘 표현한 옷감까지, 200년이 훨씬 지난 후에 태어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준 작품이다. 종교화도 초상화도 아닌, 순수한 ‘그림을 위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El Greco 목자들의 경배  목록으로

더보기

엘 그레코가 자신의 무덤이 들어갈 톨레도의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성당의 가족 예배당에 걸어 두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이곳에 걸 그림의 주제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선택한 것은 ‘신의 어머니(Theotokos)’를 뜻하는 그의 성 ‘테오토코풀로스’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엘 그레코 말년 때는 화실에서 그의 아들을 포함한 제자들이 그의 이전 작품들의 복제화를 많이 만들어 냈는데, 이 작품만큼은 직접 그려 인간의 육체를 극단적으로 일그러뜨려 표현한 엘 그레코의 후기 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왼쪽 하단에 그리스어로 엘 그레코의 서명이 적혀 있다. 그의 제자에 의하면 엘 그레코는 죽을 때까지 이 그림을 작업했다고 한다. 나중에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성당의 가장 높은 제단으로 옮겨졌다.

특유의 어두운 배경에 성가족과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목자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 위로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씌어진 띠를 들고 있는 천사들이 날고 있다. 빛의 원천이자 구성의 중심은 아기 예수이지만 등장인물 모두가 불꽃처럼 스스로 선명한 색채의 빛을 발한다. 같은 주제로 그린 이전 작품에서 발견되는 균형 잡힌 인체 비례, 조화로운 색채, 이해 가능한 공간 표현에 대한 관심이 이 그림에선 발견되지 않는다.

인물들은 육체의 무게나 질감을 갖고 있지 않은, 불타는 기체와 같은 모습이다. 엘 그레코 회화에 충만한 운동감은 무게를 가진 고체가 움직이는 느낌이 아니라, 흔들리며 타오르는 불꽃이 만들어내는 상승의 느낌이다. 화가는 이로써 완전히 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의 시신이 안치된 채플에 놓인 <피에타>(아래 그림)와 비교되곤 한다. 엘 그레코의 스승인 티치아노는 죽은 예수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은 성 히에로니무스의 모습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고, 엘 그레코는 전경에서 무릎 꿇고 있는 목자의 모습에 자신의 얼굴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작품이 설치된 곳과 화가의 관계 또한 유사하다. 티치아노가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린 <성모의 승천>이 있는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에 묻힌 것처럼, 엘 그레코도 톨레도에서 그가 처음으로 제작한 제단화가 있는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에 묻히려고 한 것이다. 

티치아노의 <피에타>

Flandes 십자가 처형  목록으로

더보기

후안 데 플란데스는 플랑드르 출신다운 치밀한 표면과 정교하고 명쾌한 색조가 특징이다. 발렌시아 대성당 주제단 칸막이로 그린 <그리스도의 수난>을 비롯해 이사벨 여왕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Gentileschi 모세의 발견(물에서 구한 모세)  목록으로

더보기

모세의 발견은 흔한 종교화 주제 중 하나이다. 레위 가문에 한 남자가 같은 가문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너무 잘생겨서 석 달 동안 숨겨 길렀다. 더 숨겨둘 수 없게 되자 왕골상자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숲 속에 놓아두고 아기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형편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목욕하러 강으로 나온 파라오의 딸이 이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기며 젖을 물릴 여인을 찾았는데 그 히브리 여인이 바로 아기의 어머니였다. 파라오의 딸은 여인에게 아기를 길러 달라고 부탁하고 아이가 꽤 자란 후 자신의 아들로 삼았는데, 이름을 물에서 건져냈다는 뜻의 ‘모세’라고 지었다.

오라치오 젠틸레스키가 거의 70세에 완성한 이 화려한 작품은 1633년 런던에서 펠리페 4세에게 보내졌다. 옷감에 반사된 빛의 효과가 빼어난데, 옷감의 고급스러운 질감과 세련미를 한층 돋보이게 하고 은색, 금색과 장밋빛 옷감의 느낌을 잘 살려주고 있다. 표현 기법 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

Goya 옷을 벗은 마하, 옷을 입은 마하  목록으로

더보기

고야는 일생 동안 인물을 그렸는데, 초상화에서 인물화로 전환했다. ‘마하’ 연작은 에스파냐의 전통적 여성이 잠자는 비너스라는 고전적 주제나 신화적 상징성에서 벗어나 강한 리얼리티로 표현되어 있다. 위험하고 관능적인 여성 표현 등 고야의 인간관은 차차 악마적 분위기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

마하 연작은 고야의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들 가운데 하나이다. 1800년에 <옷을 벗은 마하>를 그렸는데 이것이 신성 모독 논란을 일으켰고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에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는 것을 거절하고 대신 1803년 <옷 입은 마하>를 새로 그렸다. 같은 여인이 똑같은 포즈로 그려져 있는 이 두 그림은 어떠한 비유나 신화적 연관성이 없는 현실의 여인을 대상으로 한 그림으로 ‘서양 예술 최초의 등신대 여성 누드’로 평가받는다.

그림의 모델인 마하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림을 소유하게 된 카를로스 4세의 수상 마누엘 데 고도이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마하의 후보로 알바 여공을 꼽았으나 고야는 이를 부정했다. 모델이 고도이의 아끼는 정부라는 설도 있다. 여러모로 보아 마하는 실존의 어떤 인물이기보다는 이상화된 여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808년 고도이가 실각하자 이 그림은 그의 모든 재산과 함께 페르난도 7세에게 귀속되었고, 1813년에는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압수되었다가 1836년 반환됐다. 고야는 간신히 이단 심판을 면할 수 있었다.

Goya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목록으로

더보기

궁중 화가였던 고야의 초기 그림들은 미술품의 주요 구매층을 이루던 귀족들이나 왕족의 삶의 유쾌하고 즐거운 면을 묘사하는 모습이 주를 이룬다. 양산을 든 우아한 귀부인, 선명하고 화려한 노란색과 황금색, 장식성이 강한 화풍 등은 당시의 귀족들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가 구축했던 영광을 구가하던 스페인 왕가는 번영에 안주하기만 하고 문명화를 서두르지 않았다.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 그리고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내연남이자 막강한 권력자였던 고도이는 프랑스 혁명을 지켜보며 권력의 공고화를 노렸지만 결국 그들은 프랑스와 영국과 결탁한 페르난드 왕자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야는 이전의 그림에서 보이던 우아한 귀족적 묘사에서 벗어나, 그림의 제작을 요구하는 모든 권력자들의 주문을 수용하되 정치적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기울이지 않으며 그림을 그려 나갔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왼쪽 그림으로 역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을 의식적으로 모방해 그림 왼쪽 구석에 대형 캔버스를 앞에 두고 왕가의 행렬을 냉정하게 그리고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집어넣었다. 작품 한 가운데에는 왕이 아닌 궁정의 실질적인 지도자, 왕비 마리아 루이사를 배치했고, 국왕은 매부리 코에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다. 국왕의 뒤에 왕의 남동생 안토니오 파스쿠알의 모습이 살짝 보이며, 그 옆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공주 부부가 있다. 화면 왼편에는 훗날 페르난도 7세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왕자가 보이고, 그 뒤에는 왕의 여동생인 마리아 호세파 공주가 서 있다. 얼굴을 뒤로 돌린 여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카를로스 4세의 맏딸로 포르투갈 왕비가 된 호아퀴나로 보는 설, 그리고 장차 왕세자비가 될 나폴리 여왕의 딸 마리아  안토니아라는 설이다. 고야는 마리아 안토니아가 스페인으로 온 후 옆으로 돌린 얼굴을 앞으로 돌려 다시 그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이전까지의 궁정 초상화와는 다른, 화가의 솔직함과 무서울 정도로 냉소적인 붓끝을 보여준다. 발견하게 된다. 인물들은 어깨에 스페인 왕실의 훈장인 청색과 백색으로 된 장식 띠를 두르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지만, 어디에서도 왕족다운 위엄과 기상을 찾을 수 없다. 보통 궁정에 속한 화가가 왕가의 초상을 그릴 때에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으로 그리기 마련이지만 고야는 오히려 화가의 붓을 무기로 삼아 권력자의 무능과 타락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이 그림을 본 왕실의 가족들이 불경죄로 그를 처벌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들의 아둔함은 자신들의 초상이 풍자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작품 속에서 고야는 왕실 가족과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그의 얼굴은 그들로부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와 어두운 그림자에 반쯤 잠겨 있다. 그러면서 그는 황금과 영광이 지배하는 화려한 무대에서 옆으로 비켜 나 냉정하고 무표정하게 권력의 허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고야의 이 작품이 걸작으로 찬사를 받는 이유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색을 외양뿐 아니라 내면까지 꿰뚫는 탁월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시대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Goya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기마상  목록으로

더보기

마주보고 걸린 카를로스 4세 기마상과 한 쌍으로 그린 것으로, 벨라스케스의 기마 초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스페인 왕의 친척인 루이 14세가 단두대에 오르는 와중이었으니, 벨라스케스처럼 화려한 옷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옛날에 여자들은 말을 탈 때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옆으로 탔는데, 이 그림 속 왕비는 남자들처럼 탄 자세다. 게다가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자신만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고야는 무능한 남편을 휘어잡고 자신의 젊은 애인을 총리에 앉히는 왕비의 개성을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그렸다. 카를로스 4세의 기마상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 특징을 잘 발견할 수 있다. 왕비는 이 그림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Goya 1808년 5월 2일, 1808년 5월 3일  목록으로

더보기

고야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 그려진지 불과 8년 후, 페르난도가 자신의 부모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1808년 3월 즉위한다. 그러나 두 달만에 나폴레옹의 종용으로 왕위를 나폴레옹의 형에게 양위해야 했다. 이때 왕실 가족들은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마드리드를 탈출하려 하는데, 이에 분개한 민중들은 1808년 5월 2일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역사 속에서 미화되어 불과 2년 후 스페인 애국진영에 의해 나폴레옹의 폭정에 대한 항거로 불리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편안하게 유배생활을 보내다가 1814년 5월 페르난도 7세는 마드리드에 재입성하여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고야는 과도기 정부로부터 ‘최고로 칭송될 수 있는 영웅적 행위 또는 유럽의 폭군에 항거한 우리의 명예로운 반란을 기리기 위해 붓을 잡아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그렇게 남긴 작품이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다.

<1808년 5월 2일>은 5월 2일, 프랑스군 휘하의 이집트 친위대와 마드리드 민중 사이에 벌어진

싸움을 묘사한 그림이다. 말을 탄 기병대는 프랑스의 뮈라 장군이 이끄는 이집트 기마병 맘루크인데, 그들의 모습에서 예전의 스페인과 무어인 사이의 갈등을 떠올릴 수 있다.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인물들과 말들이 갑작스레 쏟아져 내리듯 몰려가고, 달려오는 말들은 땅에 나뒹구는 시체들에 놀라 주춤거린다. 그림은 마치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군중들이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 캔버스위에서 갑자기 멈춘 느낌을 준다. 전통적인 전쟁 그림에서처럼 영웅이나 어느 한 인물에 집중하여 승리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군중들의 광기와 잔인성에 초점을 두어 전쟁의 잔인함, 절망한 군중들의 발작적인 폭력을 그려 냈다.

<1808년 5월 3일>은 프랑스 군대가 시민 봉기 가담자들을 처형하는 장면이다. 땅에는 피에 젖은 시체 세 구가 뒹굴고 있고, 수도사로 보이는 양 팔을 들고 서 있는 인물을 비롯해 몇 명의 시민들이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옆으로는 또 다른 사형수들이 줄을 잇고 자기의 차례를 기다린다. 고야는 전쟁의 숭고함이나 영웅적인 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것처럼 그렸다. 캄캄한 어둠이 깔린 하늘 저편으로 도시의 모습이 보이고, 사격수 앞쪽에 놓인 등불로부터 빛이 환하게 비치며, 그 빛은 왼편에 사람들이 등지고 있는 벽에서 반사된다. 땅을 적시고 있는 시체들의 피가 더욱 공포감을 안겨주고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야만적인 행동과 끔직한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 날 죽은 이들의 영을 기리는 걸작이다. 이후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등에서 오마주되었다. 특히 피카소는 명작 <게르니카>를 그릴 때 고야의 이 두 작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Goya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목록으로

더보기

고야는  75세경인 1819년 마드리드 교외에 시골집(일명 ‘귀머거리 집’)을 사서 14점의 대형 벽화를 그렸는데, 어둡고 기괴한 화면 때문에 ‘검은 그림’으로 불린다.  거의 80세를 앞두고 있었고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조수의 도움 없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 누군가의 주문을 받지 않고 예술자의 의지와 영감에 의해 자유롭게 그리는 그림은 현대미술의 특징인데, 이 점에서 고야는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림들은 고야 사후 약 50년이 지난 1870년대에 벽에서 떼어져 캔버스로 옮겨졌지만 이미 훼손이 심해 많은 부분에 복원가의 손이 더해졌다. 따라서 오늘날 미술관에 걸린 그림과 화가가 그린 그림에는 차이가 많을 것이다.

<사투르누스>는 1층 식당 정면 벽에 결려 있었던 작품이다. 크로노스라고도 하는 사투르누스는 고대 로마의 농경신인데, 아들 중 한 명에게 왕좌를 빼앗기리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아들을 차례로 잡아먹는다. 단순한 신화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인간성의 타락, 전쟁의 폭력성,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간의 갈등,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으로서의 사투르누스를 상징하는 의미가 더 크다. 동시에 세상과 단절한 채 병마와 싸우고 있었던 고야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부릅뜬 두 눈은 광기를 내뿜으며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행위에 대해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복원 전 사진을 보면 원래는 발기한 남근까지 그려져 있었는데, 왼쪽 편에는 유디트가 그려진 벽화가 위치해 있어 이 그림과 대조를 이루었다고 한다.

Goya 두 여자와 한 남자  목록으로

더보기

보기만 해도 섬뜩한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웃음을 띠고 있다. 보는 순간 소름이 돋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야가 75세 나이에 '검은 집'에서 그린 14점의 '검은 그림' 중 하나이다. '검은 그림' 시리즈 중에는 엑스레이 촬영 결과 어떤 그림 위에 다시 칠해진 재작업된 것이 많은데, 이 그림은 원래 두 여성이 오른쪽 사람의 무릎에 놓인 책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의미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배경이나 구성상에 특이한 세부 상황이 묘사돼 있지 않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무엇을 보고 웃는지, 이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한 힌트조차 없다. 보통 맨 오른쪽 사람을 '남자'로 추정하는데, 그의 손은 자신의 성기 주변에 놓여 있다. 아마 그는 자위를 하거나, 옆의 여성들에게 성기를 노출하고 있거나, 아니면 단순한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론가 리히트(Fred Licht)는 이 남자의 웃는 표정은 성벅 강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남성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듯한, 사악한 미소로 곁눈질하는 두 여성은 매춘부로 보인다. 두 여성 역시 자위하고 있다는 것들 검게 칠한 그림 하단부가 은밀하게 숨기는 듯하다. 두 여성 역시 남자와 마찬가지로 괴기스럽다. 고야는 늙고 병든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비웃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Maíno 바히아의 탈환  목록으로

더보기

식민지 전쟁이 한참이던 17세기 초엽,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브라질 바히아에서 네덜란드 군대를 물리쳤다. 이런 중요한 승리의 기록은 늘 궁정을 장식해야만 했는데, <바히아의 탈환> 역시 부엔 레티로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주문된 작품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페드릭 데 톨레도 장군은 오른편의 태피스트리 곁에 위엄 있게 서 있고 그 앞에 네덜란드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자비를 간청하고 있다. 장군의 뒤로 걸린 태피스트리에서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당시의 스페인국왕 펠리페 4세에게 승리의 관을 씌워주는 장면이 들어 있다. 태피스트리 안쪽에 그려진 또 다른 인물은 작품을 주문한 올리바레스 공작이다.

작품은 ‘전쟁과 자비 ’라는 대립적 관계를 절묘하게 표현한다. 특히 화면 전면의 환자를 돌보는 젊은 남녀, 그 뒤로 어린아이를 돌보는 여인, 눈을 가리고 슬퍼하고 있는 왼편 끝 부분의 아이와 환자를 가리키며 대화하는 두 남성을 통해 인류애와 자비에 대한 느낌을 부각한다 . 더불어 화면 전반에 이런 분위기가 곳곳에 스며들어 옅은 바다색과 아울러 따스한 기운이 넘쳐난다.

Mantegna 마리아의 죽음  목록으로

더보기

이탈리아 화가인 만테냐는 북이탈리아 만토바 공국 후작의 궁정화가로 두칼레 궁의 천장 프레스코화 같은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원근의 개념을 하나의 인물이나 사물에까지 적용한 단축법을 혁신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다.

<마리아의 죽음>은 현재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동방박사의 경배>, <그리스도의 할례>와 함께 만토바 대공의 궁전 예배당의 제단 후면 장식화 중 하나였다. 이 그림에서 만테냐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 마리아의 죽음을 묘사한다. 체스판 무늬의 바닥과 양쪽의 기둥을 통해 원근감은 극대화했으며, 붉은 옷을 두른 사람에게서 단축법이 엿보인다. 그림 윗부분의 기둥이 미완성인 것은 원래 이 그림이 현재 남아 있는 것보다 더 큰 그림이었음을 암시한다.

Meléndez 잘린 연어, 레몬과 그릇 세 개의 정물  목록으로

더보기

르네상스가 종말을 맞이할 무렵에는 귀족계급과 고위 성직자뿐만 아니라 돈 많은 부르주아지와 떠오르는 상인 계급들도 미술을 향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는 기회가 되었는데, 그 중 하나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배제한 채 생명이 없는 사물만을 그리는 것, 즉 독자적인 영역의 정물화가 등장한다. 정물화는 유럽 전반, 특히 북유럽 국가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다.

한편 스페인 화가들의 정물화는 수르바란이 그러했듯 보데곤, 즉 단순하고 금욕적인 양식으로 많이 그려졌고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그 중 멜렌데스는 고야 이전의 가장 뛰어난 18세기 스페인 화가로 꼽히는데, 놀라울 만큼 명료하고 완벽하게 정확한 정물화로 인정받았다.

Messina 천사에게 부축되는 죽은 그리스도  목록으로

더보기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 출신으로 플랑드르의 유화 기법을 전한 업적이 높이 평가된다. 기하학적 형식에 의한 현실묘사로 베네치아 회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천사가 죽은 예수를 부축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은 수없이 많은데(아래 그림들 참조), 메시나는 특유의 부드러운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한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희로애락이 없는 존재인 천사가 비통해 하는 얼굴을 강조해 그만큼 예수의 죽음이 슬픈 일임을 드러내고, 천사를 한 명만 그림으로써 갈보리에서 시련을 당하는 동안 모두가 떠나 외롭게 버려진 예수의 고독한 감정을 극대화하고 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풍경, 인체를 3/4 측면으로 표현해 강조한 옆구리의 상처, 이 모든 것이 이 작품을 관객을 슬픔으로 이끄는 요소로 작용한다.

다른 화가들이 그린 천사가 죽은 예수를 부축하는 장면들

Mor 메리 튜더 여왕의 초상  목록으로

더보기

모르는 네덜란드의 초상화가로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궁정화가가 되어 세밀한 표현과 세련된 기교에 티치아노의 품격을 결합하여 궁정초상화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그림은 1554년 런던으로 건너간 후 그린 것이다.

메리 여왕은 영국 헨리 8세와 아라곤 왕국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열렬한 카톨릭 신자로 1554년 즉위한 후 이듬해에 카톨릭의 나라인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고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신교도를 처형했는데, 그 때문에 후세에 ‘피의 메리’라고 불렸다. 모르가 그린 이 초상은 섬세한 표현으로 궁중 미술의 정점을 보여주면서도 메리 여왕의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꼽힌다.(다른 화가 그림 참조)

다른 화가들이 그린 메리 여왕의 초상

Murillo 귀족 요한의 꿈  목록으로

더보기

무리요는 프라도 미술관의 문 하나의 이름을 차지할 만큼 스페인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전설에 의하면, 352년 8월 5일 더운 여름날에 교황 리베리오와 귀족 요한은 꿈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성모 마리아는 눈이 내린 자리에 교회를 하나 지으라는 계시를 내린다. 더운 여름에 눈이 올 리 만무하지만, 이튿날 실제로 에스퀼리노(Esquilino) 언덕에 하얗게 눈이 내리고 교황과 요한은 그 자리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을 세웠다. 이 성당은 지금도 이탈리아 로마에 있다. 무리요는 이 이야기를 두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두 장 모두 가로가 5m를 넘는 캔버스 크기와 야심 찬 구성, 능숙한 화법으로 배경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무리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무리요는 성모 마리아를 아름답고 친숙하면서도 생명력 있게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Patinir 스틱스 강을 건너는 카론  목록으로

더보기

파티니르는 플랑드르(현재의 벨기에) 화가로, 보쉬처럼 지평(수평)선을 화면 위쪽에 배치시키고 그 속에 시선을 넌지시 두어 전체를 공상처럼 느끼게 하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특히 녹색, 갈색, 하늘색, 검은 색, 붉은 색을 사용해 종교적 신성을 극대화한 장면을 그린 작품이 많다.

스틱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상과 저승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다. 아킬레우스가 아기 때 몸을 담가 어머니의 손에 잡힌 아킬레스건만 빼고 불멸의 몸을 얻게 된 강도 바로 이 스틱스 강이다. 뱃사공인 카론은 이 강을 지키면서 망자를 강의 저편으로 보내준다. 앞부분은 지옥의 늪으로 떨어지는 부분이라 물살이 거세다. 저 멀리에는 봄의 분수와 망각의 강 레테가 있고, 지옥의 입구에는 머리가 셋 달린 문지기 케르베로스가 웅크리고 있고 더 멀리 지옥불의 화염이 보인다.

파티니르가 묘사한 지옥과 천국의 경계에 대한 묘사는 그리스 신화를 다시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고 그 상황에 맞는 색깔과 구도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존엄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당시 플랑드르의 카톨릭은 1517년 시작된 종교개혁의 열풍으로 신교의 세력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상황이었고 파티니르는 공방(길드)에서 강요하는 종교적 그림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관점에서 이 그림을 본다면 대중에게 지옥의 무서움과 천국의 달콤함을 동시에 보여주어 카톨릭의 존엄과 위협적 메시지를 담으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Poussin 파르나소스  목록으로

더보기

푸생은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데,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세계상을 화폭에 구현하려는 철학적 화가였다. 그가 자신의 후원자이가 이탈리아의 시인인 마리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린 <파르나소스>에도 그러한 경향이 아주 잘 드러난다. 그림에 등장하는 아폴론은 예술의 후원자이다. 파르나소스 산은 뮤즈들의 동산이고 그곳의 샘인 카스틸리아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아폴론은 뮤즈들에게 둘러싸여 시인들에게 월계관을 씌워 준다. 중앙의 백옥 같은 누드 미인은 카스틸리아 샘을 의인화한 것이다. 아이들은 샘의 물을 떠나 문인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는 곧 예술적 영감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아폴론이 있는 한 예술의 미래는 매우 밝을 것이다.

Raphael 추기경의 초상   목록으로

더보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의 한 사람인 라파엘로는 로마에 체류하던 시기에 이 작품을 그렸다. 인물의 개성을 강하게 표현함과 동시에 귀족적인 성품을 부각했다. 날카로운 골상과 안면의 선, 그리고 깊은 윤곽이 인물의 강한 성품을 드러낸다. 소박한 색채를 통해 정적인 자세를 묘사한 반면 인물의 표정은 심리적 면까지 표출해 라파엘로가 초상화를 얼마나 깊이 탐구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한때 줄리우스 데 메디치로 알려져 있었으나 입증된 바 없으며, 오늘날에는 볼로냐 시의 대주교 알세리 추기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Rembrandt 홀로페르네스의 연회에서의 유디트  목록으로

더보기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시대를 연 렘브란트는 빛으로 다양한 회화적 효과를 나타내 ‘명암의 시조’라 불렸다.

이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유일한 렘브란트의 유일한 작품이다. 렘브란트의 서명이 Rembrandt 대신 Rembrant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에는 이 작품을 그린 사람이 렘브란트가 맞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 작품뿐만 아니라 1633년경에 그려진 다른 여러 작품에서도 ‘Rembrant’ 표기를 볼 수 있고 이 작품의 미술적 특징이 렘브란트의 그 시기의 다른 작품들과도 일치해 렘브란트의 진품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주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어 왔으나 구약에 나오는 여성 영웅 유디트에 관한 내용을 묘사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어둠속에 있는 노파의 손에 자루가 들려 있는데, 유디트를 주제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 유디트와 함께 모의한 공범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유디트는 유다 왕국의 베툴리아의 아름다운 과부였는데, 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베툴리아를 34일이나 포위한다. 이스라엘인들은 포위당한 채 기근과 갈증 때문에 항복하려 한다. 그때 유디트가 시녀와 함께 적진으로 가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사 그를 살해할 기회를 노리다가 연회에서 만취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르는 데 성공하고 덕분에 배툴리아는 아시리아 군대를 물리치게 된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이러한 유디트의 이야기와 맞아떨어진다. 1600년대 초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전쟁을 하고 있던 때이고, 그러한 네덜란드가 처한 상황은 이스라엘 민족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Ribera 야곱의 꿈  목록으로

더보기

대부분의 생을 나폴리에서 보냈던 리베라는 카라바지오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아 매우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야곱의 꿈>은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림 중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야곱이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고 있긴 하지만, 꿈에서 본 모습, 즉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으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는 장면은 묘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리베라가 그린 야곱은 평범한 인간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으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 줄기 빛은 성경 내용을 모르면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미미하다. 마치 시골에서 들판에 누워 잠들던 어린 시절의 서정적인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에서 모든 시선은 꿈을 꾸고 있는 야곱에게 집중된다.

야곱은 그가 꾸고 있는 꿈과는 달리 현실 속의 인간이다. 리베라는 꿈이 아닌 꿈을 꾸고 있는 사람만을 그림으로써 성서의 ‘창세기’를 장식한 이 기적적인 사건을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장면으로 탈바꿈시켰다. 꿈의 내용은 야곱만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의 반 이상을 하늘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다.

Rosales 이사벨 여왕의 유언  목록으로

더보기

스페인 왕국의 통합을 이룩한 이사벨 여왕의 마지막 유언 장면을 옮긴 작품이다. 어두운 배경 속 캐노피 침대에 사망하기 며칠 전의 여왕이 누워 있는데 흰색 시트는 다른 인물의 차분한 색상과 대조된다. 옆에는 유일하게 색채를 강하게 입힌 붉은 옷의 페르디난도 왕이 애도하며 앉아 있고 왕의 뒤에 후아나 공주가 보인다.

19세기 사실적 역사화 시대의 대표자인 로살레스는 이 작품으로 1864년의 국내상과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상을 수상했다.

Rubens 삼미신  목록으로

더보기

플랑드르 출신의 루벤스는 비슷한 화풍의 반 다이크보다 22살 많은 동시대 화가로,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며 그 명성이 유럽 전역에 넘치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젊은 시절부터 화가로서 명성을 누리게 된 루벤스는 5개 국어에 능통하여 외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하고 유럽 각국의 왕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제자들에 둘러싸여 부유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아름다움, 매력, 다산(多産) 등 인간의 미덕을 대표하는 세 여신은 두 팔로 서로의 몸을 정겹게 감싸며 둘러서 있다. 미소 가득한 표정 속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가득하다. 보티첼리, 라파엘로 등 선배들이 그렸던 <삼미신>에 비해 풍만한 신체와 다이내믹한 율동감이 두드러진다. 여신의 모델은 루벤스가 아내와 사별한 후 53세 때 재혼한 둘째 부인 엘레나 푸르망으로, 엘레나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모습을 한데 조합해 이 작품을 완성했다.

엘레나는 겨우 열여섯 소녀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박학다식했다. 루벤스는 엘레나와 함께 한 10년의 간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둘 만큼 정열적으로 사랑을 불태웠으며, 그래서인지 더 이상 무거운 종교적 주제를 그리지 않고 대신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 나선 듯 신화의 세계에 몰입했다. 그 그림들 속에서 엘레나는 때로는 비너스의 모습으로, 때로는 아테나의 모습으로 등장해 신들의 향연의 주인공이 됐다.

Rubens 동방박사의 경배  목록으로

더보기

1609년 처음 그린 후 스페인에 두 번째 여행을 하는 1628~1629년 사이에 더 크게 재작업한 작품이다. 본래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 맺어진 12년 휴전 조약을 기념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앤트워프 시가 의뢰한 작품으로, 이후 스페인의 대사 로드리고 칼데론에게 기증됐다. 청년 흑인, 장년 황인, 노년 백인의 외모를 띠고 황금, 유황, 물약을 아기 예수에게 바치고 있다. 같은 주제의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들이 있지만, 루벤스의 작품에는 이렇게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를 대표하는 동방박사들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처음에 작품은 지금보다 더 작았으며 루벤스 초기 양식을 잘 보여준다. 20여 년 후 루벤스가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 작품을 확장해 다시 작업했는데, 이때 그림 상단에 티치아노 스타일의 천사 두 명을 그려 넣고 우측에는 말에 탄 자화상을 추가했다.

Rubens 용을 무찌르는 성 호르헤  목록으로

더보기

성 호르헤는 조지, 게오르기우스라, 제오르지오라고도 하는 기독교의 성인으로 회화에서는 보통 칼이나 창으로 드래곤을 무찌르는 백마 탄 기사로 그려진다. 전설에 따르면 무서운 용 한 마리가 리비아의 작은 나라 시레나를 장악하고 매일 인간을 제물로 요구했는데, 시레나의 왕은 매일 젊은이들을 산 제물로 바쳤다. 젊은이의 수가 줄자 왕의 외동딸을 용에게 바쳐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용이 공주를 집어 삼키기 전 카파도키아에서 온 젊은 기사 호르헤가 말을 타고 달려와 용을 찔러 제압한다. 시레나로 돌아온 호르헤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을 무찌를 것이니 개종하라고 권했다. 나중에 호르헤는 로마의 박해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참수형으로 순교한다.

Sorolla 해변가의 아이들  목록으로

더보기

스페인의 대표적 근대 인상파 화가인 소로야는 발렌시아 출신으로 마드리드, 파리, 로마 등지에서 수학했다. 일상의 자연스러운 풍광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특히 고향의 아름다운 해변가 풍경을 즐겨 그렸다. 발렌시아 지역의 대표적 특징은 바로 끝이 없는 해안선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이러한 고향 풍경이 빛을 발하고 있다.

활기로 충만한 대기와 햇빛이 쏟아지는 해변가, 그 속에서 산책을 하거나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의 풍경은 따사로우면서도 깊은 애정을 느끼게 한다. 빛과 물, 그리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마치 스냅사진의 한 컷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이면서 인상주의가 아닌 그만의 독특한 화법을 보여준다.

Tiepolo 무염시태  목록으로

더보기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 개신교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카톨릭 미술 주제는 바로 성모 마리아에 관한 것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무염시태이다. ‘무염시태’란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잉태됨을 뜻하는 말이다. 무염시태를 그린 회화에는 일반적으로 초승달 위에 마리아가 서 있으며, 머리 주위는 별들과 태양 빛으로 가득하고 때때로 용과 천사들이 재현되며, 마리아의 상징물들이 첨부되기도 한다.

티에폴로의 마리아는 황금 빛 천상을 배경으로 푸른색의 천구 위에서 초승달과 용을 밟고 서 있다. 그림에서 용의 머리를 한 큰 뱀은 입에 사과를 물고 있는데, 사과는 곧 인간의 원죄를 상징하고 뱀은 그러한 원죄의 원인을 제공한 동물이다.

마리아의 머리 주변에는 열 개의 별들이 둥글게 원을 짓고 있다. 그 위로 성령을 상징하는 백색 비둘기 한 마리가 활짝 날개를 펼쳐 보이며, 마리아의 발아래 어린 천사가 활짝 개화된 백합을 들고 있고 그 아래 왼쪽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비스듬히 뉘어져 있다. 바로 그 옆에 솔로몬이 노래한 ‘사론의 장미’ 한 송이를 볼 수 있다.

티에폴로는 하늘색, 살구색과 같은 중간색들을 파스텔 톤으로 사용했다. 마리아의 자태는 가벼운 춤을 추는 듯한 콘트라포스트 자세, 또 중간에서 벗어나 한쪽으로 이동된 합장한 양손에서 여유 있는 리듬을 느끼게 한다. 티에폴로의 마리아는 아래로 눈을 지긋이 내리 감고 있으며 매우 우아하면서도 성숙한 여인으로 재현되었다.

Tintoretto 제자의 발을 씻기는 예수  목록으로

더보기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마무리하는 화가 틴토레토는 특이한 시점의 역동적 구성, 독창적으로 배치된 극적인 자세의 인물들, 명암대조를 특징으로 한다.

이 그림은 최후의 만찬 전 예수가 겸손과 섬김을 몸소 실천하며 제자 베드로의 발을 직접 씻어주는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발을 씻기는 장면이 가운데가 아닌 오른쪽 가장자리로 쏠려있고 중심부에는 엉뚱하게도 강아지가 있는데, 이 그림이 본래 걸려 있던 위치 특성상 오른쪽에서 그림을 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림을 아래 그림처럼 오른쪽에서 보면 발을 씻기는 장면이 앞으로 두드러져 보이고 다른 제자들은 멀리 보이게 된다. 현장에서 꼭 오른쪽으로 가서 그림의 주제를 크게 감상해 보자. 

Tiziano(Vecellio) 안드로스인들의 바쿠스 축제  목록으로

더보기

바카르날리아(Bacchanalia), 즉 술의 신인 바쿠스(디오니소스)의 공덕을 기리는 축제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페라리의 공작 알폰스 데스테가 방을 장식하기 위해 여러 다른 신화 에피소드의 그림과 함께 주문한 것으로 현재 프라도에 소장돼 있는 <비너스 경배>,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등도 그 중 일부이다.

이 작품은 3세기 그리스 작가 필로스트라쿠스(Philostratus)가 쓴 <이매진(Imagines)>의 묘사를 바탕으로 그려졌다. 안드로스라는 섬에서 술의 신인 바쿠스의 도착을 기념하기 위해 주민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다. 포도주를 중심으로 술에 취한 사람, 춤추는 사람들의 흥에 겨운 모습이 보인다. 분위기를 돋울 플롯을 손에 쥐고 어깨를 드러낸 금발의 여인들 앞에는 “술을 마음껏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은 술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가사가 적힌 악보가 놓여 있다. 이교도적 신화를 주제로 한 이 그림은 많은 등장인물과 리듬감 있는 생생한 움직임,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감으로 넘치는 기쁨인 바쿠스 축제를 표현한 작품이다.

Tiziano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든 살로메  목록으로

더보기

살로메는 성서에 나오는 여인이다. 그의 아버지인 헤롯 왕은 형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는데, 세례 요한이 이것이 옳지 못하다고 비난하자 헤로디아는 앙심을 품고 왕을 설득해 세례 요한을 감옥에 집어넣는다.

이후 어느 헤롯 왕의 생일날, 헤로디아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인 소녀 살로메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어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거기에 흡족해진 왕이 살로메에게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살로메는, 어머니가 미리 귀띔해 둔 대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말한다. 헤롯 왕은 망설였지만 약속을 깰 수는 없어서 요한의 목을 벤다.

이후 살로메는 순수한 악녀의 상징으로서 지금까지도 수많은 건축 조각 장식과 부조, 그림, 연극, 무용, 오페라 등에 등장하고 있다. 초기에는 살로메가 춤추는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이 많았는데 15세기 이후 화가들은 살로메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받아든 장면에 더 관심을 둔다. 티치아노는 살로메를 ‘소녀’라기보다는 관능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전리품처럼 쟁반을 높이 들고 몸을 뒤로 젖힌 자세에서 그녀의 춤추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한편 쟁반 위의 세례자 요한의 머리, 그리고 깊은 눈에 시선을 멈추면 두려움과 섬뜩함이 느껴진다.

Tiziano 베누스와 아도니스  목록으로

더보기

사랑의 여신 베누스(비너스)는 미소년 아도니스와 사랑에 빠졌는데, 어느 날 아도니스가 사냥을 나가면 사고로 죽게 될 것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여신은 아도니스를 말리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도니스는 젊은 혈기로 연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냥을 나가 결국 죽고 만다. 그림 뒤편에는 잠든 큐피트가 보인다. 베누스의 아들이자 사랑의 전령사인 큐피트가 잠들어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 곧 끝날 것임을 암시한다.

연인의 배경에는 나무, 풀밭, 하늘과 그림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티치아노 이전에는 배경을 이렇게 신경 써서 자연스럽게 그린 화가가 없었다. 배경은 그림의 부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이런 풍경 묘사 역시 후대 화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Tiziano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  목록으로

더보기

우리의 눈은 모든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다. 가령 몇 미터 앞에 있는 사람이 입은 니트의 결 하나하나가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니트의 결은 못 보더라도 그 사람이 니트를 입고 있다는 것은 볼 수 있고, 그것이 매끈한 것인지 아니면 거칠고 보풀이 이는 옷인지는 알 수 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볼 수는 없지만 머릿결을 짐작할 수는 있다. 티치아노는 사람의 눈이 사물을 보는 이러한 방식을 화폭에 표현한 화가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보면 뿌연 느낌이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머리카락이나 옷감이 매우 그럴듯해 보인다. 이러한 티치아노의 화법은 이후 틴토레토,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나아가 인상주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는 그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다나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외손자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딸을 탑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던 중 지나가던 유피테르(제우스가 다나에를 보고 첫눈에 반한 나머지 황금비로 변신해 다나에를 찾아온다. 티치아노는 이 황금비를 금화처럼 동글납작하게 표현했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페르세우스이다. 티치아노는 시커멓고 주름 많은 데다 금화를 받으려고 할 만큼 욕심 많은 노인을 그림으로써 다나에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연출하고 있다.

Tiziano 카를 5세의 기마상  목록으로

더보기

뮐베르크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티치아노는 전쟁의 승리를 황제가 말 위에 앉아있는 기마상으로 표현했다.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귀족답거나 잘생기거나 승리에 가득 찬 모습으로 그리지는 않았다. 황제의 엄격한 얼굴은 막대한 권력을 향한 욕망을 담고 있으며 고독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어두움이 화면에 전체적으로 깔려 있다. 넓게 퍼져있는 수풀은 일몰하는 태양 빛을 받아 서서히 불타오르는 듯하며 붉은색의 색감이 황제의 금속 갑옷에 둘린 빨간 휘장, 투구와 말의 깃털 장식에서 서로 반향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이후 반 다이크와 벨라스케스에게 영향을 미치며 영웅 기마상의 좋은 표본이 되었다.

Van Dyck 엔디미언 포터 경의 초상과 안톤 반 다이크의 자화상  목록으로

더보기

반 다이크는 루벤스와 함께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특히 초상화로 국제적인 이름을 떨쳤다. 이후 2세기 동안 그의 초상화는 유럽의 귀족, 궁정 초상화의 기준이 되었고, 반 다이크라는 이름은 ‘우아하고 세련된’ 초상화와 그런 분위기를 가진 인물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사용되곤 했다.

이 작품에서 반 다이크는 대비되는 색채와 뒤틀린 자세를 통해 시선의 분산을 막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공고히 한다. 특히 반 다이크가 어깨에 올린 손은 자신을 봐 달라고 비밀스럽게 호소하는 듯한 느낌이다. 눈 또한 비록 한 눈에만 광선이 비춰지고 다른 한눈엔 그늘로 가려졌다 해도 엔디미온 포터 경의 눈보다 더 훨씬 생기 있고 활력 있어 보인다.

Velázquez 브레다의 항복  목록으로

더보기

세비야 출신인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빛’과 ‘색’이라는 회화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그리는 방법’ 자체를 혁신해 18세기 고야, 19세기 마네와 인상주의 화가, 20세기 피카소, 달리,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미술사 안팎의 수많은 인물들에게 강력한 영향과 영감을 준 ‘화가 중의 화가’이다. 활동 초기에는 당시 유럽 전역을 매혹시킨 카라바지오의 영향으로 어두운 바탕에 단일한 광원으로 조명된 사실적인 인물 묘사를 많이 보였다. 초기에는 보데곤도 많이 그렸는데, 다른 보데곤 화가들과 달리 그는 서민들을 조롱거리로 삼거나 그 특징을 과장하지 않고 나름의 위엄과 격조를 유지했다.

벨라스케스는 일찍이 펠리페 4세의 인정을 받아 궁정화가로 임명됐다. 이후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을 제외한 평생을 마드리드와 인근 왕궁들에 거처하며 펠리페 4세의 화가이자 궁정인으로 살았다. 당시 스페인에서 화가는 돈을 받고 노동력을 파는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는데, 벨라스케스는 평생 귀족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을 만큼 신분 문제에 민감해 했다.

그래서 그가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초상화에 편중되어 있고, 유일하게 그린 역사화가 바로 이 <브레다의 항복>이다. 역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부엔 레티로 궁전을 장식하고자 주문 받은 그림으로, 에스파냐 바로크 시대의 역사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펠리페4세 시절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 네덜란드의 브레다 지방을 함락한 사건을 묘사했다. 항복한 네덜란드 장군 나사우가 당시 에스파냐 군대를 이끌던 암브로지오 스피놀라에게 브레다의 열쇠를 건네주는 장면이다. 화면의 좌우로 승자와 패자가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벨라스케스는 승자인 에스파냐 군대를 표현하기 위해 우측 뒤편에 수직으로 질서정연하게 세워져 있는 창들을 그려 넣었고(이 창들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이 그림에는 ‘창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패자인 네덜란드 군대의 모습은 전열이 흩어져 있는 상태로 표현했다. 두 장군은 서로를 존중하며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말에서 내려 조우한다. 피놀라 장군은 패한 적장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데, 이는 스페인군의 힘뿐 아니라 기사도의 관용의 미덕까지 보여주는 구성이다.

이렇게 벨라스케스는 모든 수사적 기교를 배제하고 이 사건의 핵심인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양편 모두에게 인간성과 품위를 부여한 이 그림은 승리자를 영웅시하고 패자를 치욕스럽게 묘사했던 기존의 전쟁화와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또 투명한 대기의 묘사와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구성, 색조의 배치와 같은 형식미에서도 원숙한 기량이 느껴진다.

Velázquez 바쿠스와 주정뱅이들  목록으로

더보기

이 당시 신화를 주제로 다룬 화가들이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경건한 분위기를 추구했던 것과 달리, 벨라스케스는 직설적이고 단순하며 사실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 마치 평범한 농부들이 모여 포도주의 신 바쿠스를 흉내 내는 젊은 배우와 함께 장난을 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듯하다. 벨라스케스의 초기 대표작으로, 그가 1628년 마드리드에서 루벤스를 만나 함께 이태리를 여행하던 때쯤 그린 것이다. 술의 신인 바쿠스를 신적인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하층민에 속한 인물처럼 묘사했다. 화면의 색감 역시 아름답고 이상적인 의식이 거행되고 있다기보다는 매우 현실적인 상황이라는 느낌을 준다.

바쿠스를 따르며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시골 농부들은 당시 일상적인 현실 속 인물들의 모습이다. 쾌활한 주정뱅이들의 모습이 카라바지오의 작품을 연상시키며 일상의 인물들이 등장한 것 같은 장면은 보데곤을 연상시킨다. 왕이든 광대이든, 왕자이든 거지이든 간에 평범한 농부들의 웃음에도 인간적인 존엄성이 똑같이 묻어난다.

Velázquez 수사슴의 머리  목록으로

더보기

벨라스케스는 왕의 초상화만 그린 것이 아니다. 불치병이 있는 광대, 왕궁의 하인, 난쟁이 시녀, 졸고 있는 개 모두 초상화의 대상이었다. 이 작품은 그 중 하나로, 갑자기 마주친 인기척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사슴의 초상이다. 멋진 뿔에 어울리는 위엄을 잃지 않은 표정을 포착하고 있다.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의 한 문학교수가 벼룩시장에서 우리 돈 몇 천원에 샀다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으로 밝혀지자 프라도 미술관에 기증하면서 세상에 드러난 작품이다.

Velázquez 이사벨 데 보르본의 기마상  목록으로

더보기

플랑드르 화법을 구사하던 다른 화가가 그린 초상화를 수정한 것이다. 부엔 레티로 궁전의 그림을 걸 장소에 맞춰서 천 캔버스를 크게 확장하고, 왕비의 얼굴과 옷 부분을 그대로 두고 벨라스케스가 말과 풍경 부분을 수정했다. 말의 턱 밑과 앞다리를 보면 배경보다 어두운 부분이 있어 수정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말의 턱 및, 앞다리 부분의 수정한 흔적

왕비가 목에 두른 레이스, 드레스와 말에 씌운 화려한 천의 화려한 무늬 등은 벨라스케스와 화풍이 아주 다른데, 이런 정교함은 플랑드르 화가의 스타일과 비슷하다. 벨라스케스는 말갈기를 그릴 때 물감에 기름을 많이 섞어 묽은 물감으로 흐르는 듯 그리는, 즉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화가였다.

Velázquez 시녀들(펠리페 4세의 가족)  목록으로

더보기

마드리드 알카사르 왕궁에 있는 왕의 개인 집무실에 소장되어 있다가 19세기 초에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져 대중에게 공개 되면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시도되었으나 여전히 해석이 분분한 작품이다.

<시녀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왼편에서부터 차례대로 당시 궁정화가였던 이젤 앞의 벨라스케스 자신과 시녀 한 명, 마르가리타 공주, 다른 시녀 한 명, 우측 두 명의 난쟁이다. 그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왕비의 시녀장과 왕비의 수행원으로 추정된다. 배경 중앙부의 좌측에는 거울에 비친 국왕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이사벨 왕비가 죽은 후 맞은 둘째 부인가 보이고 그 우측 열린 문 틈 사이로 보이는 계단 위의 인물은 왕비의 시종이다. 처음에는 ‘시녀들 및 여자 난쟁이와 함께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로 기록되었다가 이후 ‘벨라스케스 자신의 초상화’, ‘가족도’, ‘펠리페 4세의 가족’ 등으로 기록됐다. <시녀들>이라는 제목은 1843년 이후에야 등장한다.

이 작품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와 면밀한 관찰이 결합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제작되는 벨라스케스 초상화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로 다른 신분에 속한 사람들을 정확하게 옮기면서도 이들이 자신이 설정한 체계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인물간의 관계에 있어 기반이 되는 태도와 미묘한 감정을 잘 포착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왼쪽 시녀의 마르가리타 공주에 대한 존경 어린 태도와 다정한 친밀감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거울과 열린 문을 통해 공간을 넓게 확장시키는 방식은 벨라스케스가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시녀들>에서 거울 안에 반사된 이미지로 등장하는 국왕 부부(왼쪽 그림)는 그림의 모델로 서 있고 공주가 그곳을 방문해 부모님을 즐겁게 해 주고 있다. 그런데 당시에는 국왕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순전히 상상에 의해 그린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면서도 모호한 시각적 장치는 화면 내부의 재현된 세계와 화면 밖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관람자가 실질적으로 궁중 생활의 일원이 된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관람자의 시선, 현실과 현실의 재현인 이미지, 실제와 환영의 관계가 교묘하게 얽히면서, <시녀들>은 단순한 초상화의 차원을 넘어 보다 복잡하고 상징적인 의미 체계를 가지게 된다.

한편 왼쪽에 위치한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은 이 작품의 해석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벨라스케스는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전통적인 ‘화가’의 도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삽입함으로써 예술 창작과 회화의 고결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주제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화면 뒤쪽 벽에 걸린 두 점의 회화, <팔라스와 아라크네>와 <판과 아폴로의 시합>(아래 그림)이 자주 언급된다. 벨라스케스의 사위가 루벤스의 작품을 모작한 이 두 그림은 모두 인간의 ‘공예’를 뛰어 넘는 뛰어난 신적 ‘예술’의 승리를 주제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의 신성화, 그 우월성과 고결함에 대한 강조는 왕과 왕실 구성원의 등장으로 한층 더 심화된다.

<팔라스와 아라크네>와 <판과 아폴로의 시합>

<시녀들>에는 벨라스케스의 예술적 열망뿐 아니라 고귀한 신분에 대한 열망도 함께 투영되어 있다. 국왕과의 친밀한 관계는 귀족의 신분을 얻고자 했던 벨라스케스의 목표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시녀들>은 펠리페 4세가 벨라스케스의 작업 공간을 방문한 장면을 포착했는데, 이를 통해 벨라스케스는 회화가 천대받던 17세기 스페인에서 자신과 국왕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고 자신의 작품들이 가진 우월성과 고결성을 시각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시녀들>에서 벨라스케스는 산티에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가 드러나는 상의를 착용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가 기사단의 일원이 된 것은 그림이 그려지고 3년 후인 1659년의 일이다. 따라서 이 복장은 그림을 완성한 후 나중에 덧그린 것으로 신분 상승에의 욕망을 투영했음을 알 수 있다.

엄밀하게 따졌을 때 <시녀들>은 벨라스케스의 실제 화실이 아닌 알카사르 궁전에 있는 카를로스 왕자의 방을 묘사하고 있다. 이 방은 약 40점에 달하는 루벤스 회화의 모작들로 채워져 있었고 펠리페 4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 받은 루벤스는 동시대 다른 화가들에게 동경의 대상었다. 루벤스의 그림에 대한 왕실의 높은 평가를 대변하는 카를로스 왕자의 방을 배경으로 선택함으로써 벨라스케스는 루벤스와 마찬가지로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고결한 사회적 신분을 획득하고자 하는 자신의 야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Velázquez 실 잣는 사람들(아라크네의 우화)  목록으로

더보기

이 작품의 첫 번째 소장가의 기록에는 이 작품이 <아라크네의 우화>라고 되어 있었지만, 엉뚱하게도 훗날 왕궁에 소장된 후 기록에는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일하는 실 잣는 여인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후 20세기 초까지 수많은 화가와 연구가들은 이 작품을 태피스트리 공장의 광경을 그린 풍속화 정도로 이해했다.

그림에는 세 개의 다른 장면이 묘사돼 있다. 먼저 작품의 전경에는 ① 실을 잣고 물레를 돌리는 두 여인과 이들의 시중을 드는 다른 여인들이 표현되어 있다. ② 둘째로 이들 뒤로 계단위에는 마치 무대 같은 공간이 보이는데, 그 공간에 있는 세 명의 여인들이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감상하고 있다. ③ 마지막으로 태피스트리에는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왼쪽 인물이 손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일상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신화의 한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는 의문이 제기 된다. 그 이유는 마치 태피스트리에 그려진 장면처럼 보였던 후경의 두 인물이 자세히 관찰해 보면 태피스트리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품은 총 네 개의 공간으로 구별된다. ① 실을 잣고 물레를 돌리는 여인들과 시중드는 여인들, ② 태피스트리를 감상하는 세 명의 여인들, ③ 싸우고 있는 듯 보이는 두 명의 인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④ 태피스트리에 표현된 장면이다.

네 개의 장면들

이후 20세기 초반 미술사학자들이 태피스트리에 표현된 장면이 티치아노가 그린 <유로파의 납치>를 인용한 것임을 확인하고, 후경에 그려진 두 인물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직조의 여신 팔라스 아테네 그리고 리디아의 여인 아라크네라는 사실까지 밝혀진다. 아라크네가 아테나와 대결할 때 베에 수놓은 장면이 바로 제우스가 유로파를 납치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Veronese 베누스와 아도니스  목록으로

더보기

티치아노의 그림이 아도니스를 말리는 비너스를 그렸다면, 이 작품은 죽은 아도니스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던 비너스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아도니스의 사냥개들은 신들의 사랑에 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 그림에 유머를 보태고 있다.

한편 큐피트는 헬레니즘 조각상 중 ‘거위와 노는 소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아도니스의 모습은 로마의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미소년 ‘엔디미온’ 조각에서 따온 것이다. 이를 통해 베로네세가 그림을 그리기 전 로마에 다녀왔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엔디미온' 조각

Weyden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목록으로

더보기

예전의 종교화 속 예수는 육체적인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는 듯 멀쩡하게 그려질 때가 많았다. 그러다 점점 예수도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는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그 모습을 보던 마리아 역시 마음이 아팠으리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늘어났다. 베이던은 그 표현 방식을 더 세련되게 다듬어 머리카락 하나하나, 옷감의 직조, 두건에 꽂은 핀, 주름살이나 손등의 핏줄 등을 섬세하게 그려 놓았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은 물론 표정이나 눈물 등이 실감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크게 그리고 그림에 인물들을 꽉 채워 놓아서 마치 이 사건이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 즉 슬픈 연극의 한 장면을 맨 앞줄에서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있던 자리가 아담의 무덤 바로 위라고 믿었는데, 발밑에 놓인 해골은 바로 아담의 해골을 의미한다.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의 죄를 씻기 위해 예수가 자신을 희생했다는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방식이다.

Zurbarán 아그누스 데이(하느님의 어린양)  목록으로

더보기

수르바란은 강한 명암 대비를 특색으로 하며 성직자, 수사, 수도원에서의 생활을 주된 회화 소재로 삼아 종교성이 짙은 작품을 남겼다. 검은색 배경에 관조적 정물화로도 유명하다. 17세기 스페인에서는 인류를 대신한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을 암시하는 ‘Agnus Dei’, 즉 신의 어린 양의 이미지가 확산됐다. 이 말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한 말 그대로인데, 화가들은 이 점에 착안해 요한을 팔에 어린 양을 안은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밝은 빛이 비치는 창턱에 누운 양의 모습으로 구성하기도 했다. 수르바란은 이 주제로 여섯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 중 가장 성숙한 버전이다.

옷, 패션 트렌드, 운동화, 쇼핑, 신상품, 신발, 자켓, 코트, 탈모, 모발이식, 미용, 성형수술, 구두, 부츠, 샌들, 여름 신발, 바지, 롱팬츠, 팬츠, 양말, 모자, 캡, 나이키, 아디다스, ABC 마트, 롱부츠, 첼시부츠, 티셔츠, 원피스, 정장, 수트, 가방, 귀걸이, 목걸이, 반지, 마스크, 시계, 팔찌, 패션, 백화점, 의류, 옷, 머리띠, 롱패딩, 패딩, 점퍼, 야상, 재킷, 화장품, 크림, 스킨, 아이섀도우, 아이브로우, 올리브영, 롯데닷컴, 하프클럽, 니트, 블라우스, 스커트, 치마, 주름바지, 통바지, 크롭티, 와이셔츠, 영어, 토익, 학원, 반찬, 다이어트, 도시락, 닭가슴살, 샐러드, 감자, 계란, 집밥, 요리, 고기, 소고기, 닭다리, 치킨, 아침밥, 삼겹살, 곱창, 밀키트, 선물세트, 저녁 메뉴, 볶음밥, 탕수육, 광어회, 연어회, 해산물, 냉동식품, 참치회, 잡곡밥, 아이스크림, 배스킨라빈스, 배달의 민족, 배달음식, 떡볶이, 튀김, 오징어튀김, 순대, 오뎅, 토마토, 딸기, 사과, 귤, 오렌지, 콤부차, 홍차, 레몬티, 커피, 카누, 네스프레소, 캡슐커피, 식품 직구, 영양제, 비타민, 아이허브, 신용카드, 소액대출, 대출, 보험, 보험상담, 저축은행, 여성대출, 학자금대출, 대출계산기, 대출이자, 주부대출, 임플란트, 치아보험, 자동차 렌트, 제주도 렌트, 렌터카, 자동차, 승용차, 중고차, 자동차보험, 자동차사고, 청약주택, 청약통장, 정기예금, 적금, 주택정약, 아파트, 내집마련, 빌라, 30평대, 부동산, 소형아파트, 치아, 어금니, 송곳니, 법률상담, 모기지론, 대학 편입, 학사편입, 대학교, 웹호스팅, 클라우드, 보안솔루션, 홈페이지, 앱제작, 동영상제작, 영상편집, 기부, donate,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세계구호,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전문자격증, 자격증, 학원, 사이버대학교, 학사, 학위취득, 학점은행제, 토익, 영어, 외국어, 통역, 번역, 동시통역
[면책공고] 솜글 블로그 자료 이용 안내

이 글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