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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스페인 여행 URL 복사

[스페인] 톨레도 관광지 설명 자료(한국어 가이드)

2016. 9. 20. by 솜글
스페인 여행을 앞두고 고민하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포스트들입니다. 한국어 인터넷에서 모은 것들과 외국(영어 또는 스페인어) 사이트에서 번역해 모은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많은 정성을 들인 자료이므로 다른 곳으로 공유하지 마시고 개인적으로만 사용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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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Toledo)

마드리드 남서쪽 70km 지점에 위치한 관광도시로 타호(Tajo) 강 연안에 있으며 역사·미술적으로는 마드리드를 능가하기도 한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의 식민도시가 되었고 8∼11세기에 서고트족의 중심지로서 발전했다. 이어 이슬람 세력의 침입 이후에는 톨레도 왕국의 수도로서 상공업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무기 생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카스티야 왕국의 문화·정치의 중심지로서 더욱 발전했다.

1560년 펠리페 2세의 마드리드 천도로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13세기의 고딕식 성당, 무어풍(風)의 왕궁과 성벽, 유대교회 등 이색 건조물이 많다. 박물관에는 E.그레코, 고야, 반 다이크 등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으며 그레코의 집은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중세 이후 철제 검(劍)으로 유명했는데 반지의 제왕 등 중세나 판타지 영화의 칼을 여전히 많이 제작하며 섬유·도기 등의 경공업 장인이 많다. 또 주변에서 산출하는 양·말 등의 가축, 곡물·포도주·과일 등의 농산물과 광산물의 집산지이다. 톨레도 구시가지는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톨레도는 로마의 자치도시였고, 나르본(Narbonne, 프랑스 남부의 도시) 지역까지 뻗어 있던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으며, 코르도바 에미레이트(Emirate of Cordoba)의 요새였고, 무어인과 싸운 기독교 왕국의 전초기지였다. 또한 16세기의 카를 5세 치하에서는 한때 최고 권력의 근거지였으며 르네상스기에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예술 중심지의 하나이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간직한 톨레도의 걸작들은 3대 주요 종교인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가 공존하면서 이질적인 문명들이 서로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원형극장·수로·하수시설 등의 흔적을 남긴 로마, 그리고 왐바(Wamba) 왕의 성벽 유물과 산타 크루스(Santa Cruz) 박물관에 보존된 공예품들을 남긴 서고트 왕국처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몇 개의 문명을 훌륭하게 증언하고 있다. 코르도바 에미레이트의 문명은 위대한 이슬람 양식의 예술적인 기념물을 많이 탄생시켰다.

 

산타크루즈 미술관(Museo de Santa Cruz)

원래는 16세기 이사벨 여왕이 세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병원 건물이나 지금은 16세기와 17세기에 이르는 시기를 중심으로 한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내부에는 두개의 뜰이 있으며 메인 갤러리인 1층은 프라테레스크 양식, 2층은 무데하르 양식이다. 건물이 산타크루즈, 즉 성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엘 그레코, 고야, 리베라의 작품은 물론 도자기, 유리, 섬유, 금속작품 등 전통 공예품과 상아 십자가(ivory crucifix), 벨기에 지방 벽걸이 장식품 등이 있다.

알칸타라 다리(Puente de Alcantara)

타호 강을 건너 톨레도로 들어가는 다리로 중세의 산 세르반도 성(城) 기슭에 위치해 있다. 로마 제국 때인 104~106년에 건축된 뒤 파괴되었다가 이슬람 지배 시대에 다시 세워졌으나 1257년 교각과 받침대만 남고 모두 떠내려갔다. 이후 레온-카스티야왕국의 알폰소 10세(1252∼1284) 때 재건하고 15~16세기에 복원되었다. 다리의 양끝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시내와 가까운 쪽에만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1721년에 다리에 들어가는 입구로 바뀌었다. 다리 석재로는 로마 시대, 비사고틱(Visagothic) 시대, 아랍 시대의 돌이 사용되었으며 다리 서쪽 끝의 거대한 탑은 무데하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으로 톨레도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오랜 시간 톨레도를 바깥세상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타호 강에는 산 마르틴 다리(Puente de San Martin)도 놓여 있다.

톨레도 알카사르(Toledo Alcazar)

무데하르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합된 빼어난 건축물이다. 최초 건축은 고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서고트인, 이슬람교도인,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여러 번 재건축되었다. 방어를 목적으로 건설된 성이며 나폴레옹 군대가 이곳에 불을 질렀고, 스페인 내란 때는 프랑코군 모스카르도 대령이 공화파의 포위에 맞서 72일 동안 격렬하게 저항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알카사르는 폐허가 될 정도로 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그 뒤 다시 지은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현재 군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카를 5세의 튀니지 정복 기념동상, 무기 변천사를 보여주는 전시실, 스페인 내란 당시 모스카르도 대령의 집무실, 군복 전시실 등이 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전망이 좋다. 

알카사르란 732년부터 8세기 동안의 이슬람 지배 이후, 스페인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축조한 군사 목적의 건축물이다. 일종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알카사르는 스페인 어로 성(城)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같은 뜻을 가진 아랍어에서 유래했다. 보통은 직사각형의 형태인데 네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각 귀퉁이에는 거대한 탑이 있으며, 안에는 파티오라고 하는 넓은 중정(中庭)과 예배당, 병원 등이 있다.

톨레도 대성당(Toledo Catedral)

프랑스 고딕 양식의 대성당으로, 페르난도 3세가 1227년 건설을 시작하여 266년이 지난 1493년에 완성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이 되풀이되었다. 현재 에스파냐 가톨릭의 총본산이며 건물의 규모는 길이 113m, 너비 57m, 중앙의 높이 45m에 이른다. 본당 우측의 보물실(Sala del Tesoro)에 있는 성체현시대(Custodia)는 전체가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고 5,000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총 무게는 무려 180kg이다. 이밖에 프랑스 왕 생 루이가 기증한 '황금의 성서'도 있다. 본당 중앙에 있는 성가대실의 의자 하나하나에 새겨진 정교한 목각 역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다. 대사원의 성기실은 미술관으로 되어 있어 엘 그레코와 고야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수많은 스페인의 대성당 중 단연 첫 손가락으로 꼽힐 만큼 안팎으로 가장 완벽하고 화려한 성당이다.

‘카테드랄’이란 가톨릭교회의 대주교가 있는 성당, 즉 교구주교좌성당(敎區主敎座聖堂)을 가리킨다. 정식으로는 라틴어의 ‘에클레시아 카테드랄리스’라고 한다. 주교가 사는 교구(敎區)로서 그 도시의 이름과 같은 것이 일반적이다. 유럽에서는 각 시대를 통하여 큰 카테드랄이 세워졌는데, 유명한 것은 대부분 11∼16세기에 세워졌다.

엘 살바도르 성당(Camino del Salvador)

원래는 무슬림들이 쓰던 메스키타였다가 12세기 중반에 성당으로 바뀌었다. 역사가  상당히 오래됐으며 거의에 로마의 통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둥 등에 그리스도의 기적, 사마리아 인 이야기 등이 조각돼 있다. 가톨릭 양왕의 딸인 후아나가 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로스 헤수이타스 성당(Iglesia de los Jesuitas)

1629~1769년 완공한 바로크 양식의 성당이다. 내부 벽면이 온통 흰색으로 되어 있고 화려한 세공과 조각을 만나볼 수 있다.

톨레도 구시가지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종탑이 있는 두 개의 종루에 올라가면 대성당을 비롯한 톨레도 구 시가지, 타호 강, 신 시가지 등 톨레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산토 토메 성당(Iglesia de Santo Tomé)

톨레도 출신의 화가 엘 그레코의 그림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Entierro del Conde de Orgaz)>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성당이다. 이는 1586년에 완성된 걸작으로, 천상계와 지상계를 나타내는 상하 2단의 그림으로 나뉘어 있다. 산토 토메 성당을 재건한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에 성 아우구스투스와 성 스테파노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기적을 선보였다는 내용이다. 이 그림 하나를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산토 토메 성당을 찾아오고 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백작의 실제 무덤 위에 그려져 있어 그림의 공간과 현실 공간이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림 속 인물들은 실물보다 약간 큰데, 무덤으로 인해 거리가 생기기 때문에 실제로는 실제 사람과 거의 비슷해 보인다. 백작은 16세기에 톨레도에서 제작된 갑옷을 입고 있어, 관람자가 그림을 보고 있는 순간에 그림 밖 관 속으로 내려지고 있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전경에서 관람자를 그림 속 사건으로 이끄는 아이는 엘 그레코의 아들을 모델로 했다. 소년의 손은 사건을 주목하라고 ‘가리키는’ 동시에, 선행을 베풀고 교회에 기부를 하면 이런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메시지는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대조되는 가톨릭 특유의 주제이다. 엘 그레코의 종교화 도상은 대부분 이런 반종교개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엘 그레코 미술관(Casa y Museo de El Greco)

유대인 지구에 위치한 미술관으로 화가 엘 그레코가 살았던 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엘 그레코의 집 미술관(Museo y Casa del Greco)’으로도 불린다. 1911년 문을 연 이 미술관은 두 개의 건물로 구성돼 있는데, 하나는 뜰이 있는 16세기 저택이고 다른 하나는 1906년에 확장한 것이다.

1층 세 개의 방에는 유명한 <톨레도 풍경>, <제자들과 함께 한 그리스도>, <가시 면류관>, <산 베르나르디노> 등 작품 20여 개가 전시되어 있다. 주로 그레코 말년의 작품들이다. 다른 방에는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1598~1664) 등 17세기 스페인 화가들의 작품이 진열돼 있다. 당시에 사용되던 가구들과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Talavera de la Reina)에서 생산된 도자기도 볼 수 있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그리스 태생의 에스파냐 화가로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로 불렸다. 그의 화풍은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는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초기 화풍은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하였고 베네치아풍의 색채법을 사용했다. 17세기 르네상스 말 펠리페 2세의 궁중화가로 잠시 일했다. 작품 대부분이 종교화와 초상화였고 회색빛 명암과 색채, 비정상적으로 길쭉하고 뒤틀린 인체묘사여서 당대에는 매너리즘 미술로 평가 절하되었다. 19세기 이후 재평가되어 폴 세잔 등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가 등장하면서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성모승천 시나고그(Sinagoga del Transito)

내부에 여러 비문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중세 시기의 가장 아름다운 비문으로 평가 받을 뿐만 아니라 이 비문들을 통해 이 시나고그가 1357년 완성됐음을 알 수 있다. 내부는 길이 23 m, 넓이 9.5 m의 한 개의 신랑(Nave)과 스페인 최고의 낙엽송 나무로 만든 아랍장식 무늬의 격자 천장으로 되어있다.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는 동쪽 벽은 중앙에 헤칼(Hekal)이라는 벽 공간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곳은 세파림 (Sefarim)이는 두루마리 문서를 보관했던 상자가 놓여있다. 헤칼 앞쪽의 바닥에서 사각형 모양으로 보존되어 있는 타일 바닥의 일부를 볼 수 있는데, 이 타일이 당시에는 바닥 전체에 깔려있었다. 남쪽 벽면으로 몇 개의 커다란 창문이 나 있는데 이 창문을 통해 여자들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마초 미술관(Museo de Victorio Macho)

현대 스페인 조각의 선구자인 빅토리오 마초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절벽 위의 절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시나고그(Sinagoga Santa María La Blanca)

12세기 말에는 톨레도에서 가장 큰 시나고그였으나 1391년 유대인 대량 학살 이후 성당으로 바뀌었다. 건축 양식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무데하르의 색을 띠고 있으며, 성당 가장 안쪽에는 동쪽, 즉 예루살렘을 향한 제단이 재현되어 있다. 그 이름(blanca)처럼 내부가 희고 밝다. 유대인 지구에 남아 있는 두 개의 시나고그 중 하나이다.

시나고그 유대교 회당 또는 유대교의 사원을 말한다.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진압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자 흩어진 유대교 모임의 중심이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 없어지자 그 위치를 시나고그가 대신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외형은 나라마다 다르다.

산 후안 데 로스 레예스 수도원(Monasterio San Juan de Los Reyes)

이사벨과 페르난도 양왕이 베가 평원 지대와 씨가랄의 언덕이 내려다보이는 경관이 뛰어난 곳에 세운 곳으로 프란시스코 수도원이 있다. 1477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606년에 완공되었는데, 고딕양식과 이사벨 양식, 무데하르 양식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유대인 지구 한복판에 지어져 있다. 

내부에는 그라나다에서 해방된 기독교 죄수들을 묶었던 쇠사슬이 벽에 매달려 있다. 복잡한 천정을 가진 한 개의 신랑(nave)이 있고 수랑으로 가는 입구 기둥에는 왕실 연단이 세워져 있다. 내부에 있는 모든 조각 및 장식은 마치 보석 세공을 하듯 정성스럽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특히 왕신 묘를 둘러싸고 있는 사제관 벽의 고딕 양식 장식은 화려함의 극치로 성 요한(san juan)의 독수리가 왕실 문장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외벽에는 이슬람 왕국 시절 가톨릭 포로들에게 사용되었던 쇠사슬이 걸려있는데, 이슬람이 물러난 1492년 가톨릭이 그라나다가 수복된 것과 이슬람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기 위해 가져온 것들이다. 화려하고 기하학적인 회랑이 특징이다.

1층 회랑(claustro) : 후안 구아스가 1496년에 죽자, 그의 동료들이 공사를 계속 진행시킴으로써 1504년에 아름다운 회랑이 완성되었다. 이 아름다운 회랑에서 아치 모양을 하고 있는 커다란 창은 그 중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입체적 장식 무늬라든가 레이스를 연상시키는 세세한 조각, 그리고 창을 따라 서 있는 일련의 조상들을 아름다운 회랑의 멋을 한층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

2층 회랑(claustro alto) : 2층 회랑의 창문은 복합양식(곡선-직선-곡선)으로 된 작품으로 후안 구아스의 개인 작품이었다. 그 위로 여러 가지 색이 혼합된 격자천장이 후에 만들어졌는데, 스페인의 여러 왕국의 문장이 다른 문양과 함께 리드미컬하게 채색되어 있다.

캄브론의 문(Puerta del Cambrón)

16세기에 완공되었다. 중앙 안뜰과 광장,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네 개의 탑으로 구성돼 있다. 톨레도 서쪽의 끝을 알리는 문이며 유대인 지구로 통하는 문이라 하여 유대인의 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서고트족의 성문 중 하나이다. ‘캄브론’이라는 이름은 15세기 중반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캄브론이란 당시 문이 세워진 주변에 많이 볼 수 있었던 일종의 관목으로 성벽 중간에 위치한다. 사각탑의 기반 부위에 근처의 공동묘지에서 가져온 두 개의 커다란 아랍 기념석을 썼다. 

2층에는 수문장들과 경비병들의 방이 따로 만들어 졌고 문 정면에는 왕실 문장이 새겨져 있고 내부에는 수호성인인 산타 레오키디아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톨레도의 성인인 ‘레로카디아 성녀(Santa Leocadia)’의 아름다운 모습은 조각가 베루게테의 작품이다. 1577년 특별 명령이 있은 이후로 저녁에도 문을 닫지 않았다고 한다.

에스칼레라스 데 라 그랑하(Escaleras de la Granja)

톨레도 구시가로 가는 가파른 언덕길을 보완하고자  2000년에 언덕 돌산을 깎아 만든 에스컬레이터로, 2001년 ‘Premios Castilla La Mancha de Arquitectura’ 건축상을 받았다. 로다데로(Rodadero) 언덕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 조성했으며 경사를 최소한으로만 깎아내 본래의 지형과 건물을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곳곳마다 아름다운 톨레도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고 중간에 산책로 등도 조성돼 있다.

 

알폰소 6세 문(Puerta de Alfonso VI, 구 비사그라 문)

1085년에 톨레도를 탈환한 알폰소 6세의 이름을 딴 문으로 이슬람 때의 성벽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다. 9세기 이후 이슬람인의 통치기에 톨레도의 주요 출입구였다.

카를 5세 때 비사그라 문이 새로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이 문의 이름이 ‘비사그라 문(Puerta Vieja de Bisagra)’이었다. 측면의 아치가 포인트이다.

비사그라 문(Puerta de Bisagra)

북쪽의 평원지대와 연결된 문으로 붉은색을 띤 이 평원지대를 이슬람인들이 ‘사그라(sagra : 불그레한)’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알폰소 6세 문과 구분해 Puerta Nueva de Bisagra라고도 한다.

16세기에 톨레도 미화 사업을 결심한 카를 5세가 알카사르의 확장 및 보수 공사 과정에서 톨레도 입구에 훌륭한 출입문을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보수한 결과 만들어졌다. 사각형 탑의 밑 부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 수비대의 방을 개조했는데, 훗날 다시 보수하면서 중앙 문 위쪽에 화강암 재질의 위엄 있는 왕실 문장이 조각되었다.

빛의 그리스도 메스키타(Mezquita Cristo de la Lu)

무려 999년에 처음 지어진 이슬람 사원인데, 드물게도 만들 당시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든 카톨릭 지배기에 대부분의 이슬람 건물들이 가톨릭 부속 건물로 개조당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기적과 같은 일이다. 8X8m의 작은 사각형 구조로 네 개의 기둥을 갖고 있으며 내부는 아홉 개의 구획으로 나뉘며 벽돌과 작은 돌로 지어졌는데 이런 방식은 톨레도의 오래된 전통 건축 방식과 이슬람의 영향을 모두 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태양의 문(Puerta del Sol)

톨레도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문으로 13세기경에 지어졌다. 아치 위의 삼각형으로 된 조각 메달은 톨레도 대주교였던 일데폰소를 표현한 것이다. 메달 바탕에 보면 태양과 달이 그려져 있는데, ‘태양의 문’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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